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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현순 원고(manuscript)- 자서전|| 연설|| 에세이

    현순 원고(manuscript)- 자서전|| 연설|| 에세이

    목차



    1장. 조상의 혈통
    2장. 유년기 - 임오군란
    3장. 1884년 갑신정변 - 부친의 관직 등용
    4장. 부친의 은퇴와 고향 생활
    5장. 1894년 갑오경장
    6장. 명성황후(Queen Min)시해사건 - 의병이 되기 위한 가출
    7장. 가족들의 상경과 도시 생활



    1장 조상의 혈통(Ancestral Lineage)


    조선시대의 전통에 따르면, 조선에는 큰 가문이 두 개 있다. 바로 연안 이씨(李氏) 가문과 광산 김씨(金氏) 가문으로 이 두 가문은 “삼한잡족”, 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양반(귀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가문 뿐 아니라 이(Lee)씨, 김(Kim)씨, 조(Choy)씨, 안(Ahn)씨, 정(Chung)씨, 박(Park)씨 등 6개 가문도 큰 가문에 속한다. 하지만 변(Pyen)씨, 방(Pang)씨, 현(Hyun) 씨 같은 가문은 그다지 존경받는 가문이 아니고, “한미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에 이 가문들은 “사색당파”, 즉 노론, 소론,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던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전 고려시대에 현(Hyun) 씨 가문의 조상들은 고위 관직에 올라 나라를 위해 일했다. 심지어 기원전 1122년, 기자조선의 시조 기자가 수백 명의 예술가를 이끌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중국의 문화를 전파할 무렵, 현탁(Tark Hyun)으로 알려진 현(Hyun) 씨 가문의 시조도 당시 한국으로 건너온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 뒤 현탁(Tark Hyun)의 후손들은 평안도 지방에 흩어져 뿌리를 내렸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1130년 경 고려 명종 시대,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인 조위총(Wee Chong Cho)이 난을 일으켰다. 조위총(Wee Chong Cho)은 조정에서 파견된 윤인첨(In Chum Yun-尹麟瞻)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여 마침도 평안도 지방에서 40개 성(城) 이상을 함락하였다. 그 뒤 조위총은 자신을 왕이라 선포했고, 영변(寧邊)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조위총(Wee Chong Cho)이 난을 일으킬 무렵 영변지역에는 현담윤(Dam Yun Hyun-玄覃胤)이라는 평범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현담윤(Dam Yun Hyun)은 새롭게 왕위에 오른 조위총(Wee Chong Cho)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평민으로 이루어진 “의병”을 모집하였다. 현담윤(Dam Yun Hyun)의 장남은 현덕수(Duk Soo-玄德秀)이며, 차남은 현이휴(Lee Hoo Hyun)이다. 현담윤(Dam Yun Hyun)과 현덕수(Duk Soo Hyun), 현이휴(Lee Hoo Hyun) 세 부자는 기골이 건장한 장수였고, 타고난 군사전략의 천재였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위총(Wee Chong Cho)이 수도로 삼은 영변지역은 즉시 의병에게 함락되었고, 현담윤(Dam Yun Hyun)은 조위총(Wee Chong Cho)을 참수하였다. 의병의 승전보가 정부군에게 전달되었고, 정부군을 거쳐 마침내 고려왕 명종(明宗)에게 전달되었다. 명종은 크게 기뻐하여 현담윤(Dam Yun Hyun)을 가까이 불러 그에게 가장 높은 육군 계급인 “대장군(최고사령관)과 “평장사(전투지휘관)”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 명종은 후손들에게 세습할 수 있는 약 230만 평의 땅도 하사하였다. 현담윤(Dam Yun Hyun)의 두 아들인 현덕수(Tuk Soo Hyun)와 현이휴(Lee Hoo Hyun) 역시 귀족 세습권과 함께 고위 관직을 하사받았다. 현(Hyun) 씨 가문은 1391년 고려시대 몰락기까지 명종에게 하사받은 땅을 후손들에게 세습하였다.
    조선에서 복음 전도사로 일할 때, 우연히 영변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강동이라 불리는 마을에 있는 선조 현담윤(Dam Yun Hyun)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나는 현담윤(Dam Yun Hyun)의 묘비명에 새겨진 찬양의 글을 읽은 뒤 이렇게 독백하였다.
    “할아버지, 당신은 고려의 왕을 위한 전사였지만 저는 왕 중의 왕, 그리스도를 위한 전사입니다.”
    지금도 묘비명에 새겨진 글귀가 기억난다.
    “당신의 무사 정신은 을지문덕(Eul Chi moon Duk)이나 양만춘(Yang Mang Choon)의 무사 정신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을지문덕(Eul Chi moon Duk-乙支文德)과 양만춘(Yang Mang Choon-梁萬春)은 국가의 영웅이다. 을지문덕은 수양제(隋煬帝)가 이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이를 전멸시켰다. 또 양만춘은 중국의 당(唐) 태종(太宗)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이를 물리쳤다.
    현담윤(Dam Yun Hyun)은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 현(Hyun) 씨 집안의 시조이다.
    1391년,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King Kong Yang-恭讓王)을 모시던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이 모든 문신과 무신의 동의를 얻어 공양왕을 폐위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려의 순교자인 정몽주(Mong Choo Chung-鄭夢周)는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의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무자비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뒤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은 공양왕을 따르는 충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양왕을 폐위한 뒤 이(Lee)씨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이 이(Lee)씨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백 명의 고려 충신들은 새로운 왕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태조의 명령에 끊임없이 반대하였다. 이런 고려 충신의 지도자들은 은둔자의 마을인 두문동의 “72인”으로 알려졌다. 현담윤(Dam Yun Hyun)의 후손 현익첨(Ik Chum Hyun)도 두문동의 “72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Sung Kei Lee)는 고려시대의 수도인 송도에서 남쪽으로 7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한양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양은 지금 국제적으로 ‘서울’로 알려져 있다.
    현담윤(Dam Yun Hyun)의 9대 조상인 현수(Soo Hyun)는 고려시대에 새로운 수도인 한양 근처의 여주에서 여주 현감을 지냈다. 그런데 이씨 조선이 건설되자 현수(Soo Hyun)는 고려에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로 여주 현감 자리를 내던지고 외딴 마을로 들어가 평민이 되었다. 현담윤(Dam Yun Hyun)의 9대 조상인 현수(Soo Hyun)가 관직을 내던진 사건 이후로 한양, 즉 서울의 현(Hyun) 씨 가문은 귀족 신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현수(Soo Hyun)의 후손들 중 대부분은 농업과 그들이 기르던 조랑말을 매물로 시장에서 팔아 겨울에 연료를 마련하여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교육의 기본 요소인 한문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담윤(Dam Yun Hyun)의 14대손인 현수겸(Soo Kyum Hyun)은 서울 동쪽에서 1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주의내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현수겸(Soo Kyum Hyun)은 젊었을 때 자신의 조상들이 걸었던 길을 따랐다. 즉 현수겸(Soo Kyum Hyun)은 여름에는 농사를 지었고, 긴 겨울 동안에는 중국의 고전을 익혔던 것이다. 또 여가 시간에는 서울로 장작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현수겸(Soo Kyum Hyun)은 서울의 황(Whang)씨 집안에 장작을 팔게 되었고, 그 뒤 계속해서 황(Whang)씨 집안에 장작을 팔았다. 황(Whang)씨 가문의 가장은 현수겸(Soo Kyum Hyun)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름, 나이, 거주지, 조상, 교육 정도 등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현수겸(Soo Kyum Hyun)의 대답은 황(Whang)씨를 만족시켰다. 그 뒤 황씨는 현수겸(Soo Kyum Hyun)에게 자신의 딸과 혼인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현수겸(Soo Kyum Hyun)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황(Whang)씨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다.
    황(Whang)씨 가문은 대대로 역관, 즉 당시의 외교관직에 종사하였다. 장인인 황(Whang)씨가 중재하여 현수겸(Soo Kyum Hyun)도 역관이 되었다. 그로부터 현(Hyun) 씨 가문은 역관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역관은 양반 계급으로부터 멸시를 당하던 중인, 즉 중간 계급에 속하던 신분이었다. 하지만 이씨 조선 500년 동안 정부의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명색만 관료였던 계급은 양반뿐이었다. 양반은 이름뿐인 관료였고 실제 거의 모든 업무는 중인, 즉 중간 계급에 속한 이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중인은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역관, 천문관, 의관, 율관, 산관, 화원 등으로 일했다. 이밖에도 중인들은 이조(내정 담당), 호조(재정 담당), 예조(교육, 외교 담당), 병조(군사 담당), 형조(법률 담당), 공조(농업 등 산업 담당) 등 육조에서 서리(胥吏, 하급관리), 서기, 전문가로 일했다. 조선시대에 외교를 담당했던 사역원은 조정에서 육조와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지만 다른 육조의 통제를 받지 않은, 독립적인 기구였다. 사역원은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거나 외국으로 갈 사신을 선발하였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담당하였다. 사역원에는 또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 강습반이 여러 개 있었다.
    현수겸(Soo Kyum Hyun)은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현수겸(Soo Kyum Hyun)의 아들 다섯 명은 모두 주의내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고 있던 거대한 저택은 뒤로 아름다운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근처에 넓은 농토가 있었다. 또 둘레가 9킬로미터 가량 되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는 작은 인공 섬이 다섯 개 있었고, 각각의 섬에는 큰 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다섯 개의 작은 인공 섬은 현수겸(Soo Kyum Hyun)의 아들 다섯 형제를 나타내었다. 나는 장남인 현룡(Ryong Hyun)의 직계 후손으로, 조부님인 현일(Yill Hyun)은 현룡(Ryong Hyun)의 11대 후손이다. 현룡(Ryong Hyun)부터 현일(Yill Hyun)까지 우리 현(Hyun) 씨 가문의 조상들은 외교를 담당하던 부서인 사역원에서 아주 중요한 직책을 맡아 일하였다.
    수당과 황력은 역관이 맡은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직이었다. 수당이란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의 우두머리를 수행하던 종사관이었는데, 주로 왕의 주요한 밀서를 중국에 전달하거나 중국 왕실과 조선 왕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이 업무를 맡은 이들은 연간 10만 냥(대략 5만 달러)의 연봉을 지급받았다. 이것은 당시 영의정의 연봉보다 많은 액수였다. 특별 관리였던 황력은 조선에서 배포하기 위해 중국 황제가 해마다 보내는 책력 몇 백 만 권을 접수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현(Hyun) 씨 가문은 서울 중심지인 수표교 북쪽에 거대한 저택들을 지었는데 모두 7채였고 두 구역이나 차지하였다. 또 현(Hyun) 씨 가문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각기 다른 지역 3곳에 묘소를 만들었다. 현수겸(Soo Kyum Hyun)의 고향인 주의내,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48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경기도 포천군 군자정, 마지막으로 서울 북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양주군 하응동이 현(Hyun) 씨 가문의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각각의 묘소는 넓은 산자락을 차지하고 있었고, 묘지기를 위해 쌀과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농토가 딸려 있었다.
    조부님이신 현일(Yill Hyun)은 시인이셨다. 조부님의 필명은 달빛에 비친 정원을 뜻하는 효정이었다. 조부님은 동양의 정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폭넓은 식견을 겸비한 분이셨다. 또 조부님은 여러 정치 지도자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마침내 대원군(Prince Tai Won)의 사적인 조언자가 되셨다. 당시 대원군(Prince Tai Won)은 1864년 아들인 11살의 이희(Hee Lee)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하고 있었다. 조부님인 현일(Yill Hyun)에게는 정치적인 야심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조부님은 연천현감, 한국과 중국의 경계에 있는 의주의 세관원 같은 작은 직책에 만족하셨다. 조부님은 그런 작은 직책을 거친 뒤 공직에서 물러나 남은 생을 하응동에서 보내셨다.
    조부님이 은퇴하신 뒤 조부님의 장남이자 나의 백부인 현재성(Chai Sung Hyun)은 대원군(Prince Tai Won)의 실제적인 조언자가 되었다. 현재성(Chai Sung Hyun)은 대원군(Prince Tai Won)에게 재정, 농업, 군장비, 고위 관료 선발 등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많이 제시하였다.
    1866년 프랑스 원정대가 강화도의 요새를 공격한 뒤 한강까지 올라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백부인 현재성(Chai Sung Hyun)을 휴전 협정을 위해 프랑스 장교와 면담하는 조선 정부의 대표로 파견하였다. 백부 현재성(Chai Sung Hyun)은 프랑스 측과 용감하게 논쟁을 벌인 뒤 프랑스가 조선을 공격한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신시켰다. 조선과 프랑스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증진하기로 약속하였고, 마침내 프랑스는 한국에서 물러났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백부 현재성(Chai Sung Hyun)의 공적에 몹시 기뻐하며 그에게 귀족의 신분을 되돌려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부는 정중히 사양하며 대원군(Prince Tai Won)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년 뒤, 명성황후(Queen Min)가 점점 세를 키워 시아버지인 대원군(Prince Tai Won)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서울을 떠나 양주의 적동으로 물러났다. 양주의 적동은 조부이신 현일(Yill Hyun)이 여생을 보냈던 하응동 근처에 있었다. 1877년 조부 현일(Yill Hyun)과 백부 현재성(Chei Sung Hyun)이 차례로 작고하셨다. 현(Hyun) 씨 일족들은 가문의 가장이셨던 두 분의 사망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조부 현일(Yill Hyun)의 첫째 부인이셨던 우봉 김(Kim)씨는 자녀를 낳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둘째 부인이신 청주 최(Choy)씨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백부 현재성(Chei Sung Hyun)은 청주 최 씨의 장남이셨다. 조부님의 셋째 부인은 경주 김(Kim)씨였고, 조부님은 셋째 부인과 그의 외아들인 현재창(Chei Chang Hyun)을 남기고 작고하셨다. 경주 김 씨는 나의 조모님이시고, 현재창(Chei Chang Hyun)은 나의 부친이시다. 부친 현재창(Chai chang)은 조부님이 작고하실 무렵 아직 어렸고, 조모님이신 경주 김 씨에게는 돈이나 토지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또 현(Hyun) 씨 가문에는 아직 가문의 대소사를 경영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어린 사촌이 두 명 있었고, 재정이나 토지에 관해 어떤 일도 의논할 수 없는, 미망인이 된 숙모가 세 분 계셨다. 조부님의 셋째 아들인 현재표(Chei Pou Hyun)는 행실이 좋지 않았지만, 가문의 모든 재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
    현재표(Chei Pou Hyun)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재산을 탕진하였다. 이렇게 행실이 좋지 않는 현재표(Chei Pou Hyun)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동안 나의 부친과 두 명의 사촌들은 시골 집에서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면서 지냈다.

    [족보]
    가계표







































































































































































































    세대 이름 공직명 왕조
    1 담윤(Dam Yun) 현(Hyun) 대장군 고려
    2 덕수(Tuk Soo) 도원수 고려
    3 원빈(Wan Pin) 지휘관 고려
    4 경조(Kyung Cho) 고문관 고려
    5 산박(San Park) 지휘관 고려
    6 헌(Hurn) 문학가 고려
    7 성병(Sung Pyung) 행정관 고려
    8 명수(Myung Soo) 행정관 고려
    9 수(Soo) 여주현감 고려
    10 우(Woo) 평민 조선
    11 규남(Kuee Nam) 평민 조선
    12 숙량(Sook Ryang) 평민 조선
    13 춘(Choon) 평민 조선
    14 수겸(Soo Kyum) 역관(외교관) 조선
    15 룡(Ryong) 역관(외교관) 조선
    16 인상(In Sang) 역관(외교관) 조선
    17 욱(Wook) 역관(외교관) 조선
    18 덕우(Tuk Woo) 역관(외교관) 조선
    19 곽(Kark) 역관(외교관) 조선
    20 상하(Sang Ha) 역관(외교관) 조선
    21 심(Sim) 역관(외교관) 조선
    22 계근(Kei Kun) 역관(외교관) 조선
    23 휴(Hoo) 역관(외교관) 조선
    24 재명(Chai Myung) 역관(외교관) 조선
    25 일(Yill) 행정관 조선
    26 재창(Chei Chang) 괴산현감 조선
    27 순(Soon) 목사 조선





    2장 유년기 - 임오군란(Rebellion of Royal Army-壬午軍亂)


    조선의 아동들은 아주 유년기 때부터 자신의 생일 뿐 아니라 부모님의 생신과 다른 가족들의 생일을 모두 암기하도록 교육받는다. 따라서 나도 우리 부모님의 생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친이신 현재창(Chei chang Hyun)은 1857년 음력 11월 20일에 태어나셨고, 풍양(豊壤) 조씨(趙氏) 성을 가졌던 모친은 1857년 음력 1월 16일에 태어나셨다. 우리 부모님은 조부님이신 현일(Yill Hyun)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결혼하였다. 두 분 사이에 태어난 첫 자녀는 딸로, 현성원(Sung Wan)이라 불렀다. 나는 1879년 3월 21일(음력 2월 28일) 하응동 고향 집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린 시절 이름은 성스러운 인물이라는 뜻의 ‘성인’이었다. 나는 경주(慶州) 김씨(金氏)였던 조모님의 총애를 받아 조모님의 관심과 보호 아래 성장하였다.
    나는 2살 때 누이 성원(Sung Wan)과 함께 천연두에 걸렸다. 당시 조선에는 종두법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석영(Sai Eyung Chi-池錫永)이 종두법을 도입했던 1882년까지 해마다 천연두에 걸린 아이들의 70퍼센트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누이인 성원(Sung Wan)은 가엽게도 천연두를 앓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살아남았다. 조모님은 사랑하는 손녀를 잃은 뒤 서울로 이주할 것을 고집하셨다. 그래서 마침내 1881년 조모님, 부친, 모친, 그리고 어린 꼬마였던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가족은 모두 서울로 이사하였고, 수표교 근처에 있는 현(Hyun) 씨 가문의 저택 가운데 한 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882년 봄, 세 살이었던 나는 하인들의 자녀들과 어울려 놀았다. 어느 날 어떤 하인의 자녀가 나를 서울 중심가로 데려갔다. 그 때 우리는 종로까지 걸어갔는데, 종로는 육의전(Six Main Stores-六矣廛)이 있는 서울의 상업 중심지였다. 육의전이란 조선시대에 여섯 가지 중요한 물품, 즉 종이, 면포, 명주, 모시, 신발과 보석을 팔던 큰 상가를 일컫는 말이다. 종로에는 거대한 종을 걸어두는 건물이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하루에 두 번씩 종을 쳤다. 한번은 오전 5시, 또 한 번은 저녁 8시에 종을 쳤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을 지키는 보초들은 그 종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고 닫았다.
    두 어린 꼬마가 사람들로 한창 붐비는 종로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 울고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우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셨다.
    “네 성이 무엇이냐?”
    나는 성이 현(Hyun) 씨라고 대답하였다.
    “몇 살이냐?”
    나는 세 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수표교 근처에서 산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나를 등에 업은 뒤 수표교를 지나 우리 집을 정확히 찾아 주셨다. 우리 조모님은 대청마루에서 우리를 보시고 깜짝 놀라 일어나셨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뒤 나를 업고 온 할머니에게 감사의 뜻으로 돈과 옷가지를 드렸다.
    이 사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 뒤 조선에서 부활절 예배를 주도할 때 “길을 잃은 경험”이라는 설교를 통해 수백 명의 죄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부활절 예배에서 내가 한 설교의 기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성은 김(Kim) 씨나 이(Lee) 씨, 또는 존(Jones)이나 스미스(Smith)가 아닙니다. 인간성이 인간의 유일한 성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심지어 동물과 같은 단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여, 신에게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하십시오.
    2. 인간의 나이는 사실 날이나 달, 또는 햇수로 계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짜 나이는 생명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형태만을 즐기기 때문에 생명이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이여, 주 예수에게로 돌아가 그의 구원의 권능을 통해 생명을 다시 얻으십시오.
    3. 인간의 집은 궁전이나 저택, 또는 거대한 건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집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상실하고 미친 듯이 이 세상의 사멸해가는 것들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여, 성령으로 돌아가 진리, 평화, 행복, 사랑의 마음을 다시 찾으십시오.

    1882년 5월 중순의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조모님과 모친이 울고 계셨다. 나는 두 분께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여쭤보았다. 조모님은 우리 가족들이 모두 군졸, 즉 군인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그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몇 분 뒤, 숙모님 등 현(Hyun) 씨 가문의 여성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조모님에게 피신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모두 허름한 농가로 피신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 거주하는 현(Hyun) 씨 집안사람들은 군졸들의 모반과 연루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군졸들이 우리 가족에게 해를 끼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행실이 나쁜 숙부였던 현재표(Chei Pou Hyun)가 민겸호(Kyum Ho Min-閔謙鎬), 김보현(Pou Hyun Kim)과 관련되어 있었다. 민겸호(Kyum Ho Min)와 김보현(Pou Hyun Kim)은 군졸들에게 6개월 동안 급여를 주지 않았던 고위 관료였다. 군졸들은 현재표(Chei Pou Hyun)가 자신들이 6개월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한 사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래서 현(Hyun) 씨 가문의 여성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1882년에 발생했던 임오군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왕의 군대의 군졸, 즉 병사들은 모두 5,772명이나 되었다. 이 군졸들은 동대문 밖의 왕십리에서 살고 있었다. 군졸들은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군졸은 소외받았고, 6개월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군졸들은 고통받고 멸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마침내 정부, 특히 명성황후(Queen Min)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 명성황후(Queen Min)의 인척들은 점점 명성황후(Queen Min)의 영향력에 힘입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상실했고, 명성황후(Queen Min)가 정권을 강탈한 것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성황후(Queen Min)는 타고난 외교관이었고, 교섭 업무에 상당히 능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대원군(Prince Tai Won)이 실시한 “쇄국(Closed Door)”정책을 과감히 폐기하고, 새로운 “개국(Open Door)”정책을 실시하였다. 명성황후(Queen Min)의 명을 받아 새로운 군대도 2개 조직되었다. 그리고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새로운 군대의 병사를 훈련하기 위해 일본의 장교 호리모토(Horimoto-堀本禮造)를 발탁하였다. 명성황후(Queen Min)의 인척인 민겸호(Kyum Ho Min)는 군료 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선혜청 제조)으로 임명되었다. 굉장히 사교적이었던 명성황후(Queen Min)는 또한 미신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여흥을 즐기거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나 되는 사찰에 특별히 기부하는 데 나랏돈을 낭비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이 현명하게 통치하면서 각 지방의 곳간에 쌓아둔 돈과 곡식이 모두 없어졌다. 따라서 선혜청은 6개월 동안 군졸들에게 급여를 줄 수 없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은 고위 관료들을 살해한 뒤 곧장 명성황후(Queen Min)의 행방을 찾기 위해 궁궐 내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Queen Min)는 영리하게도 궁녀의 옷을 입고 변장한 뒤 가마꾼의 도움을 받아 궁궐을 빠져나갔다. 군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군졸들은 결국 명성황후(Queen Min)의 인척들의 집을 남김없이 습격하였고, 서대문 밖의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렀다. 일본의 공사인 하나부사(Hanabusa)는 일본인 군사 고문인 호리모토(Horimoto)와 함께 제물포로 달아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군졸들은 대원군(Prince Tai Won)을 찾아가 다시 정권을 잡도록 부탁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군졸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명성황후(Queen Min)가 조직한 새로운 부대를 해산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관직에서 민 씨의 인척들을 모두 축출하였고, 명성황후(Queen Min)가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명성황후(Queen Min)는 충주 단월리라는 마을에서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자신의 인척을 청나라에 보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은밀히 보고하게 하였다. 명성황후(Queen Min)는 대원군(Prince Tai Won)이 임오군란을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당시 청나라 조정 제일의 실력자인 북양대신 이홍장(Lee Hung Chang-李鴻章)은 명성황후(Queen Min)에게 몹시 동정의 뜻을 표하며 청나라의 장군 정여창(Dung Yu Chang)과 장교 오장경(Wu Chang Kyung-吳長慶), 원세개(Yuon Shih Kai-袁世凱)를 조선으로 보냈다. 정여창(Dung Yu Chang) 장군 등 3명은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을 벌하고 대원군(Prince Tai Won)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정여창(Dung Yu Chang) 장군 등이 포병대, 해군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을 때 군졸들은 이미 대부분 멀리 피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몇 명의 지도자들은 청나라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청나라 군에게 체포되어 청나라의 배로 텐진(天津)으로 이송되었다. 대원군(Prince Tai Won)은 그 뒤 보정부로 유배되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고, 곧 자신의 권력을 되찾아 국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새로운 정치인을 많이 발탁하였다. 김윤식(Yun Sik Kim-金允植), 어윤중(Yun Choong Urh-魚允中,), 홍영식(Young Sik Hong-洪英植), 조용직(Ryung Chik Cho), 조영하(Eyong Ha Cho-趙寧夏) 등이 명성황후(Queen Min)에 의해 새롭게 등용된 이들이다. 또 박영효(Young Hio Park-朴泳孝), 김옥균(Ok Kyun Kim), 서광범(Kauang Bum Soh-徐光範) 같은 젊은 정치인들도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Hyun) 씨 가문은 서울에서 사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영리한 명성황후(Queen Min)와 보수적인 대원군(Prince Tai Won)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치적인 분쟁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Hyun) 씨 가문은 송도로 이주하여 송악산 아래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하였다. 송도는 고려의 옛 수도이고, 현(Hyun) 씨 가문 조상들은 고려시대에 송도에서 부와 특권, 귀족의 명예를 누리고 살았다. 오늘날 우리들은 송악산의 늘 푸른 소나무와 만월대의 유적을 보면서 이제는 사라진, 장엄한 고려시대를 떠올리곤 한다.
    송도와 그 근방에는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름난 유적은 선죽교(善竹橋)에 남아있는 피의 흔적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유명한 충신이었던 정몽주(Mong Choo Chung-鄭夢周)는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정몽주(Mong Choo Chung)는 고려시대 마지막 왕이 통치하던 무렵 고려의 정승을 지냈다. 어느 날, 정몽주(Mong Choo Chung)는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이 베푸는 큰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 연회 자리에서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은 공양왕(恭讓王) 폐위 문제에 관해 정몽주(Mong Choo Chung)의 의견을 물었다. 정몽주(Mong Choo Chung)는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몽주(Mong Choo Chung)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Mong Choo Chung)는 이 시를 읊은 뒤 연회장소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던 정몽주(Mong Choo Chung)가 선죽교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이성계(Sung Kei Lee) 장군의 부하들이 습격하여 정몽주(Mong Choo Chung)를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정몽주(Mong Choo Chung)가 살해당할 때 선죽교에 흘린 피가 돌을 적셨고, 그 피의 흔적은 500년이 넘도록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정몽주(Mong Choo Chung)가 흘린 피의 흔적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송도인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송도인은 민주적이고, 부지런하다. 이씨 조선이 통치하는 500년 동안 송도인들은 벼슬길에 올라 관료가 된다는 야망은 절대 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는 일에 좀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인삼은 송도의 주된 특산물이다. 전국의 포구와 도시의 상인들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부분 송도인이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도시와 포구, 그리고 그 도시와 포구의 산업과 상업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송도에서만은 조선인이 산업과 상업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송도인들은 수많은 상림과 상단을 조직하였다. 송도에서는 수도와 전기시설도 조선인들이 통제하였다.
    1882년 음력 8월 2일, 우리 집안이 송도로 이주한 직후 남동생인 찬인(Chan In-Thriying Creature)이 태어났다. 나는 6세까지 송도에서 자랐고, 6세 때부터 한문 일천자로 이루어진 입문서인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884년 초반, 우리 가족만 양주 하응동의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3장 1884년 갑신정변(Revolution of 1884- 甲申政變) - 부친의 관직 등용


    여주 하응동 고향집으로 이주한 뒤부터 계속 가정교사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부친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격, 사냥, 낚시로 소일하였다. 부친은 뛰어난 사격수였다. 1884년 4월 무렵, 부친께서 거대한 호랑이를 사냥하였는데, 그 호랑이는 평소에 인가로 내려와 가축과 심지어 사람까지 여럿 잡아먹었다. 나는 지금도 장정 15여 명이 숲에서 우리 집까지 호랑이를 운반해 왔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호랑이는 갈색과 검정색 줄무늬로 장식된 멋진 가죽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가죽을 오래 동안 간직하였다. 부친은 호랑이를 사냥한 뒤부터 인근 마을에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 가족이 여주 하응동에서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누리고 있는 동안 1884년 10월, 서울에서는 또다시 “갑신정변”, 또는 1884년 혁명으로 알려진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 동양에는 영웅이 셋 있었다. 한 명은 청나라의 이홍장(Lee Hung Chang-李鴻章)이었고, 또 한 명은 일본의 이토히로부미(Ito-伊藤博文)이었고, 마지막 한 명은 조선의 대원군(Prince Tai Won)이었다. 이토히로부미(Ito-伊藤博文)는 열성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청나라의 이홍장(Lee Hung Chang)과 조선의 대원군(Prince Tai Won)은 계속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대원군(Prince Tai Won)은 “쇄국” 정책을 고집하였다. “쇄국” 정책의 바탕에는 유럽 야만인에게서 건너온 종교나 문물은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Prince Tai Won)은 가톨릭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프랑스 신부와 그를 따르는 조선인 수천 명이 대원군(Prince Tai Won)에게 박해를 받았고, 끝내 순교하였다. 하지만 대원군(Prince Tai Won)은 1882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청나라의 보정부로 이송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대원군(Prince Tai Won)이 보정부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조선의 정치인들은 강력한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그 파벌 중 하나는 ‘사대당’이었고, ‘사대당’의 수장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씨(閔氏) 일족이었다. 이 ‘사대당’의 목적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계속 지켜나가고,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의 조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파벌은 ‘독립당’이다. ‘독립당’은 신진 정치인인 김옥균(Ok Kyun Kim-金玉均), 박영효(Young Hio Park-朴泳孝), 홍영식(Young Sik Hong-洪英植), 서광범(Kauang Bum Soh-徐光範), 현재 미국에서 살면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박사로 더 잘 알려진 서재필(Chai Pil Soh-徐載弼) 등이 조직한 파벌이다. ‘독립당’의 목적은 한국과 청나라의 관계를 단절하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박영효(Young Hio Park)는 결혼으로 인해 왕족이 된 인물이었다. 박영효(Young Hio Park)는 철종(哲宗)의 외동딸과 결혼했는데, 철종은 대원군(Prince Tai Won)의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 바로 선대왕이었다. 그리고 대원군(Prince Tai Won)은 철종의 사촌이었다. 고종은 철종이 승하한 뒤 왕실 인척의 동의를 받아 철종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 결과 박영효(Young Hio Park)는 고종의 매형이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절친한 벗이었다. 따라서 박영효(Young Hio Park)는 고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영효(Young Hio Park)와 그의 동지들의 배후에는 백춘배(Choon Pai Pack)라는 스승이 있었다. 백춘배(Choon Pai Pack)는 그 당시 세계정세를 꿰뚫고 있었다. 박영효와 그의 동지들은 스승 백춘배(Choon Pai Pack)를 통해 거대한 바다 저편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계몽된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백춘배(Choon Pai Pack)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일본이 이들 나라로부터 새로운 정치제도, 법률제도, 교육제도, 산업제도, 육군 및 해군제도 등을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백춘배(Choon Pai Pack)는 우리 조선도 일본처럼 이들 나라로부터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은 조만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그래서 백춘배(Choon Pai Pack)의 젊은 제자들은 넓은 식견을 가진 스승에 의해 혁명적인 사상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박영효(Young Hio Park)는 자신이 가진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에게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였다. 고종은 박영효(Young Hio Park)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조선 역사상 최초의 외교부인 외아문(外衙門)을 설치하였다. 총명한 신진 학자였던 김옥균(Ok Kyun Kim-金玉均)은 외무아문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은 그 뒤 차례로 서구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먼저 1882년 5월 2일 미국과, 그 다음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순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의 몇 몇이 외국고문으로 고용되었다. 수백 명의 젊은 군인 생도들이 일본에 가서 새로운 군사제도를 배웠다. 궁궐에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전신 시스템도 설치되었다. 박영효(Young Hio Park)와 김옥균(Ok Kyun Kim)은 특별한 외교 사절의 자격으로 여러 번 일본에 다녀왔다. 박영효(Young Hio Park)와 김옥균(Ok Kyun Kim)은 일본의 놀랄만한 변화상을 목격하였고,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일본의 진보적인 젊은 정치인들과 교제하였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고종은 훌륭한 성품을 타고 났으나, 정신적으로는 허약한 왕이었다. 고종은 하루는 박영효(Young Hio Park)의 제안에 동의하였다가 그 다음날 누군가가 박영효(Young Hio Park)의 생각이 해롭다거나 위험하다는 발언을 하면 금방 마음을 바꾸곤 하였다. 사대당은 여전히 조선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고, 독립당의 숙적이었다. 독립당의 당수인 김옥균(Ok Kyun Kim)은 혁명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1884년의 혁명, 즉 갑신정변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영국 출신의 M.A. 맥켄지(M. A. Mckenzie)의 저서 “조선의 자유를 위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동일한 사실에 대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독립당과 일본공사의 호위병들은 청나라 군대를 이끄는 원세개(袁世凱) 장군에 의해 격파 당했다. 홍영식과 박영효(Young Hio Park)의 동생 박영교가 살해되었다. 김옥균(Ok Kyun Kim), 박영효(Young Hio Park), 서광범(Kwang Bum Soh), 서재필(Chai Pil Sur)은 일본 공사인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김옥균(Ok Kyun Kim), 박영효(Young Hio Park), 서재필(Chai Pil Sur)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훌륭한 스승인 백춘배(Choon Pai Pack)는 고종의 명령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정치적인 폭풍이 가라앉았다. 서울의 하늘은 다시 맑고 고요해졌다. 나의 부친은 매우 정부의 관리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1884년 12월 다시 하응동에서 서울로 이사하였다. 부친은 역관이나 외교 관료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친의 첫 관직은 교육 감찰관이었고, 그 뒤 몇 가지 하위직을 역임하였다. 고종은 드디어 부친을 충청도 괴산의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부친이 현감 직을 맡아 괴산으로 내려갈 때 가족들이 모두 부친을 따라 이사하였다. 괴산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1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그 당시 새로운 현감의 행렬은 웅장하고 멋있었다. 2~3쌍의 나팔수가 행렬의 가장 앞에 섰고, 화려한 군복을 입고 칼, 곤봉,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호위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현감 바로 앞에는 현감의 명령을 군중들에게 전달하는 두 쌍의 군졸들과 관리들이 있고, 그 뒤로 현감과 그의 가족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책실”, 즉 현감의 공식 비서가 사노비들과 하녀들과 함께 뒤를 따랐다.
    현감, 현감의 가족들, 그리고 현감의 비서는 가마를 타고 이동하였다. 가마는 긴 다리 두 개가 달린 자가용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그 다리를 들고 가마를 운반하였다.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당나귀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현감의 행렬은 좋은 볼거리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두 줄로 늘어서서 현감의 행렬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서울에서 괴산까지는 3일 가량 소요되었다. 우리가 괴산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현감을 맞이하는 연회가 크게 열렸다. 그 연회를 시작으로 부친의 현감 생활이 시작되었다.
    현감은 법률에 의해 세금을 징수하고, 재판을 관장하며, 공교육과 군사 훈련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런 일들은 모두 다소 원시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나 어린아이들 눈에는 몹시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친이 일하시는 동헌 뒤뜰에서 현감놀이를 하곤 했다.
    동헌에는 나팔, 꽹과리, 징, 큰 북 등으로 구성된 악대가 있었다. 악대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관청의 모든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연주를 하였다. 해마다 가을이면 백일장이 열렸다. 각지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스승들과 함께 백일장에 참석하기 위해 관청으로 모여들었다. 현감은 학생들의 스승 중에서 심사위원을 몇 명 선출하여 참석자들이 작성한 산문, 운문, 논문 등을 심사하는 일을 맡겼다. 당선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졌다. 일 년에 두 번, 무술을 겨루는 대회도 실시했다. 궁사, 검사, 창병, 사격수들이 모여들었고, 무술 대회의 수장을 맡은 현감의 명령에 의해 훈련 시범, 조준 사격, 검술, 경주 등이 실시되었다.
    현대인의 눈에는 이런 무술대회 같은 것들이 모두 우스꽝스럽고 원시적인 일처럼 보이겠지만, 무술대회는 조선의 360개 현에서 실시되는 흥미롭고, 고무적인 행사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행사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만주 땅을 정벌하고, 일본이 침략할 때마다 물리쳤던, 한 때는 동양에서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많은 죄인들이 재판을 받는 장면도 생생히 기억난다. 절도범, 강도, 도굴꾼, 간통한 남녀들,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자들과, 부모를 학대하는 자들은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각종 형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내 기억 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형벌은 길고 넓적한 막대기로 엉덩이를 때리는 벌, 지렛대로 다리를 누르는 벌 등이다. 죄수들은 목을 ‘칼’이라 불리는 길고 무거운 널빤지에 끼운 채 수감 생활을 하였는데, 이 칼은 식민지시대 미국에서도 사용되던 형벌 도구였다. 죄수를 감옥에 감금할 때는 손과 발을 수갑과 족쇄로 채웠다. 이런 잔인한 일들을 볼 때마다 피가 솟구쳤고, 나중에 정부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이런 잔인한 관습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부친께서 괴산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다음해인 1886년, 모친께서 굉장히 심각한 병에 걸리셨다. 그러나 괴산에서는 훌륭한 의사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모친은 남동생과 함께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조모님, 부친과 함께 몇 달 동안 더 괴산에 머물렀고, 그 뒤 부친은 경상도 군위 지역으로 전임하게 되셨다.
    조모님, 부친 등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로 이주하였고, 수표교 근처에서 새로운 저택을 구입하였다. 1886년 초여름, 끔찍한 질병인 콜레라가 서울에서부터 남쪽 지방 전역까지 창궐하였다. 경상도 군위에도 역시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친께서는 경상도 군위로 내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고종은 부친께서 망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부친에게 산악지대인 강원도 인제 지역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부친은 서울에 가족들을 둔 채 홀로 인제로 내려가 그곳에서 현감생활을 시작하셨다.
    콜레라는 서울에서 점점 더 극성을 부렸다. 매일 수백 명이 죽어나갔고, 우리 친척 중에도 콜레라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생 상태는 상당히 열악하였다. 서울에는 상수도 시설이나 하수처리 시설이 없었다. 굉장한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너나할 것 없이 누구나 우물물을 마셔야 했다. 서울의 모퉁이, 골목, 오솔길, 대로마다 널려있는, 뚜껑이 없는 배수구란 배수구에는 모두 쓰레기가 넘쳐났다. 이러한 열악한 위생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전염성 질병이 발생할 때마다 무방비 상태로 안전을 위협받았다.
    부친께서 현감으로 임용되어 강원도 인제로 떠난 뒤 조모님은 나를 하응동 고향집으로 내려 보내셨다. 하응동으로 내려갈 당시 나는 아홉 살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리를 좀 더 잘 분별할 수 있었다.
    하응동에는 4대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3개 있었다. 근처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했다. 엄청나게 넓은 논도 곳곳에 있었다. 밤나무도 몇 그루 있어서 아침 일찍 밤을 줍곤 했다. 또 신선한 광천수가 바위틈에서 솟아나왔다. “도암산”에서 흘러내리는 깨끗한 냇물에서 예쁘게 생긴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나는 내 주위의 이런저런 것들에 정신을 빼앗겨 서울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잊어버렸고, 여름 내내 하응동에서 살고 있는 사촌들과 어울려 지냈다.
    가을에 서울로 돌아올 무렵 끔찍한 콜레라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동몽선습”은 아동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책이었다. “동몽선습”에서 다섯 가지 도덕적 계율을 배웠다. 첫째는 ‘부자유친(父子有親)’으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군신유의(君臣有義)’로 왕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부부유별(夫婦有別)’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충실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는 ‘장유유서(長幼有序)’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섯째는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4장 부친의 은퇴와 고향 생활


    앞에서 설명했듯, 명성황후(Queen Min)는 미신을 맹목적으로 믿었다. 명성황후(Queen Min)는 1882년 권력 투쟁에서 대원군(Prince Tai Won)에게 승리했고, 조선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명성황후(Queen Min)의 욕심과 불타는 야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명성황후(Queen Min) 자신이 평생 동안 조정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명성황후(Queen Min)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아들의 후계자를 통해 왕위를 계속 잇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성황후(Queen Min)의 가까운 인척인 민 씨 일가를 조정의 주요 관직에 등용하는 것이다.
    명성황후(Queen Min)는 이런 세 가지 야망을 마음속에 품은 채 많은 점술가와 무녀, 예언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평상시의 욕심과 야망에 따라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대답이 명성황후(Queen Min)를 만족시키면 점술가와 무녀, 예언자들은 재물과 조정의 명예로운 관직을 하사받았다. 이런 무녀 중에는 “진령군”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여자가 있었다.
    진령군은 상당히 영리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고, 과부였다. 남편이 죽은 뒤 진령군은 절로 들어가서 몇 년 동안 기도를 하고 불경과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렇게 절에서 생활하던 진령군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2세기 중국의 유명한 장수이자 전쟁의 신으로 신성시되는 관운장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진령군은 예언을 하고 기도로 병을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진령군의 이름은 서울에 널리 알려졌고, 드디어 명성황후(Queen Min)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가 명성황후(Queen Min)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진령군은 상궁의 특권과 명예를 하사받았다. 관운장의 성지와 동문 안 성동에 있는 진령군의 사택을 짓는 데 엄청난 돈이 투입되었다. 마침내 진령군은 관료들의 모임에서도 힘을 행사하게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진령군의 영향력을 통해 관직을 얻었다. 부친 역시 진령군과 알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진령군에게는 극규(Kuk Kuee)라는 아명을 가진 사랑하는 손녀가 있었는데, 그 손녀는 나와 동년배였다. 1887년 초반,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진령군은 극규(Kuk Kuee)와 나를 혼인시키는 게 어떻겠냐며 조모님을 설득하였다. 진령군은 부친을 조정에서 승진시켜주고, 내가 성장하면 왕의 측근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조모님은 현명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조모님은 진령군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뒤 부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진령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 집안은 틀림없이 부와 명예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진령군이 명성황후(Queen Min)와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집안도 결국 그런 일에 휩쓸려 험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조모님은 진령군의 청혼을 거절하였고, 부친에게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종용하였다. 부친 역시 조모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1887년 4월,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을 떠나 하응동으로 돌아갔다. 하응동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하응동에는 대략 15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의 10가구가 현(Hyun) 씨 집안이었다. 하응동 주민들은 대부분 현(Hyun) 씨 집안의 묘지기들이었다.
    사촌형인 현언(Earn Hyun)과 현범(Punm Hyun)은 화려한 방이 많고 정원과 큰 연못이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부님인 현일(Yill Hyun)의 직계 손자였다. 부친은 따로 저택을 구입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하응동에는 존경받는 가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윤씨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씨 가문이었다. 윤(Yun) 씨와 이 씨는 우리 현(Hyun) 씨 가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부친과 두 사촌형 현언은 윤 씨, 이 씨 일가와 함께 사냥과 운동을 즐겼다. 부친은 또 장총 몇 자루와 구식 무기로 무장한 방위 민병대도 조직하였다. 나는 부친 덕분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현대식 소총을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어른들이 운동, 사냥, 시조 짓기를 즐기는 동안 나를 포함한 20여 명의 소년들은 서당에서 고전을 배우고, 시를 쓰고, 서예를 익혔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겨울에는 역사서와 고전 읽는 법을 배우고, 여름에는 중국의 옛 시가를 암송하거나 짓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었다. 12살이 되었을 때 한 편이 18줄의 절로 이루어진 시를 짓는 법을 배웠다. 중국 시가 짓는 법을 배우기는 몹시 힘겨운 일이었다. 중국 시가에는 운이 굉장히 많았다. 나는 때로는 하루 종일 한 줄도 짓지 못해 엉덩이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조선의 옛 서당에서 마음속의 생각을 시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로서는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 자유로운 결혼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예전에는 어린 나이에 동일 집단 내에서 중매인을 통해 약혼이 이루어지고, 구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우리 조선의 조혼 풍습은 힌두교 신자들의 조혼 풍습만큼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과 소녀들은 10세에서 12세 사이에 부모님의 기쁨과 이익을 위해 결혼을 하였다.
    또 동일 집단 내에서의 결혼이라는 것은, 양반(귀족)집 아들은 양반집 딸과 결혼을 하고, 상인(평민)의 아들은 상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모님은 부모님과 의논한 뒤 중매인을 통해 같은 중인인, 이 씨 성을 가진 의관의 딸을 나의 신부로 선택하였다.
    신부는 14세였고, 나는 12세였다. 양쪽 집안이 여러 차례 접촉한 뒤 마침내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1890년 11월 10일(음력 9월 28일) 하응동에서 북쪽으로 3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마천에 있는 신부의 집에서 이 씨 집의 어린 딸과 현(Hyun) 씨 집의 어린 아들이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신랑 들러리, 하인과 하녀들의 완벽한 보호를 받았다. 몇 가지 진부한 의식과 3일 동안 계속된 다소 지루한 잔치가 끝난 뒤에야 어린 신랑과 신부는 신랑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결혼식은 오로지 조모의 기쁨과 명예를 위한 행사였다. 이른바 환갑, 즉 할머니의 61번째 생신이 1890년 12월 14일(음 11월 3일)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의 신부는 친정에서 조모님의 생신 때 드릴 값비싼 선물을 많이 가지고 왔다. 조모님의 환갑잔치에는 하객들의 수가 천 여 명에 이르렀다.
    1891년 봄, 부친은 하응동 근처의 농장을 팔고 하응동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장단의 논골에서 농장을 구입하였다. 1891년 여름, 가족들은 모두 논골로 이사하였다. 논골은 상당히 외딴 마을이었다. 마을 뒤에는 삼림이 울창한 황계산이 버티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귀리, 밀, 메밀, 옥수수, 콩, 기장 등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이 넓게 펼쳐졌다. 계곡 아래쪽 낮은 평지에는 해마다 400석(1석은 대략 35리터), 400석은 약 40,000 부셀(bushels)를 소출할 수 있는 논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소작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하나는 해마다 소작인이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는 임대 방식의 소작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해마다 소작인이 생산한 곡식을 지주와 정확히 절반씩 나누는 소작제도이다. 우리 집은 곡식을 소작인과 절반씩 나누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200석의 쌀이 우리 소유가 되었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우리 집은 건장한 일꾼을 10명 고용하여 귀리, 밀, 메밀, 옥수수, 콩, 기장 등을 재배하였고, 땅을 경작하기 위해 소와 말도 몇 마리 키웠다. 논골에서 큰 여흥거리는 없었지만 우리는 몹시 부유하게 살았다. 중국 고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짓는 사람이 천하의 근본이다.)”
    나는 15세 때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친은 나에게 농사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리고 소작제도, 종자 선택법, 각기 다른 곡물을 재배하는 시기, 수확량 조사 등에 대해서 배웠다.
    이렇게 농사일을 조금씩 배워가는 동안에도 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스승으로부터 중국 고전을 공부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승님은 기억력을 개발하게끔 가르쳤고, 나는 중국의 당송시대에 쓰인 글을 많이 암기하였다. 1892년 봄에는 더 수준 높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지금은 작고한 스승 이명순(Myung Sun Lee)으로부터 정치, 경제, 윤리, 사회질서 등에 대한 맹자의 저서들을 배웠다. 이명순(Myung Sun Lee)은 1894년 정치개혁 때 박영효(Young Hio Park)에게 발탁되어 이조참판, 황해도감사 등을 지낸 분이시다. 나는 사촌형인 현언(Earn Hyun)과 함께 지내면서 날마다 스승 이명순(Myung Sun Lee)의 자택에 찾아가서 학업에 힘썼다. 이렇게 여름 내내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가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팠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새로운 문물을 많이 경험하기도 하였다. 사촌형인 현언(Earn Hyun)은 경복궁의 왕실 사서였다. 어느 날 사촌형 현언이 나에게 경복궁을 구경시켜주었다. 사촌의 집에서 경복궁까지의 거리는 5킬로미터 가량 되었다. 사촌형인 현언(Earn Hyun)은 하인들이 운반하는 가마를 탔고, 나는 당나귀를 타고 가마 뒤를 따랐다. 경복궁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궁을 지키던 보초병이 우리에게 가마와 당나귀에서 내리라고 지시했고, 그때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서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지나쳐서 우리는 왕실의 서고에 도착하였다.
    책꽂이를 가득 채운 수천 권의 책을 보았다. 그러나 수천 권의 책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내 기억 속에서 아직도 퇴색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예술적인 문양으로 형형색색 채색된 거대한 건물, 예복을 차려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환관 내시들,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얹고 긴 치마를 끌며 오리걸음으로 다니는 궁녀들, 그리고 신기하게 생긴 노란색 모자를 쓰고 붉은색 가운을 입은 대전별감들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경복궁에만 설치되어 있는 발전 장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뇌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또 다른 것은 바로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이다. 사촌형(현언)은 나를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소인 경무대로 데려갔다. 경무대는 높이 3 미터, 넓이는 가로 30미터, 세로 60미터 가량 되는 높은 단으로, 테두리는 석벽이었다. 이 경무대에서 왕과 판관 3명이 과거시험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경무대 바로 밑에는 시험에 참가한 응시자들이 앉을 수 있도록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명의 응시자들이 흰 도포와 검은색 갓을 쓰고 경무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경무대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장소를 차지하려고 물밀듯이 몰려 들어왔다. 경무대에서 가까운 장소를 차지하여야 시험을 다 치른 뒤 다른 응시자보다 먼저 답지를 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응시자들은 무리의 뜻을 가진 “접(接)”으로 불리는 집단으로 묶여 있었다. 각 접은 20명에서 50명 사이의 응시자들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접은 자신이 속한 접의 이름이 적힌 깃발, 큰 양산, 천막을 가지고 있었다. 수백 개의 접은 넓은 잔디밭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자리를 잡았고, 큰 양산과 천막 밑에서는 응시자들이 시험 문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 문제가 게시판에 적히면 응시자들은 모두 시험 결과를 채점하는 판관이 응시자들에게 원하는 방식에 따라 시나 수필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시험에는 6개의 작문 형식이 있었다. 응시자 30,000명 중 단 3명의 합격자만이 상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지만,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았다.
    과거제도는 조선의 문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요소 중 하나였다. 조선은 과거제도를 통해 동양에서 가장 높은 학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과거제도의 정신이 조선의 젊은 세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상들이 구축해 온 학문 세계를 더 새롭게 개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93년 여름 어느 날, 우리들이 집에서 중국 시가를 암송하고 있을 때 동생인 창인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몇 시간 후 동생은 의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동생은 그 뒤 몇 달 동안 앓아누워 있었고, 결국 간질이라는 끔찍한 병에 걸려 버렸다. 우리 마을 인근에서는 유능한 의사를 찾기 힘들었다. 마을 주민들, 특히 여성들은 대부분 간질이 귀신에 씌어 생긴 병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조모님은 수많은 점술사와 무녀를 고용해서 간질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모두 헛된 일이었다.
    바로 그 무렵, 우리는 이원필(Won Pil Lee)이라는 유명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원필(Won Pil Lee)은 장단에서 불치병을 많이 고쳤다고 소문난 의사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보내 이원필(Won Pil Lee)의 왕진을 부탁하였다. 이원필(Won Pil Lee)은 우리 집으로 와서 동생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 가지 치료법을 사용하였다. 첫 번째 치료법은 바로 피부에 침을 놓는 것이었다. 두 번째 치료법은 말린 쑥을 태워 뜸을 놓는 것이었다. 세 번째 치료법은 약초를 처방하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이원필(Won Pil Lee)의 치료법이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목격하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동생의 상태는 훨씬 호전되어 우리는 이원필(Won Pil Lee)의 의술에 크게 보답하였다. 이원필(Won Pil Lee)이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이원필로부터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전해져 오는 의료법을 배웠다. 이원필(Won Pil Lee)은 침술, 뜸, 진맥법, 한약 처방 등에 관한 소책자를 10권 가량 소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책들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 두었다.
    1894년 청일전쟁(Sino-Japanese War)이 발발할 때까지 우리 가족은 장단의 논골에서 살았다. 논골에서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부친은 농사를 짓는 것 외에도 제물포에서 일본 상인과 콩 거래를 하였다. 부친은 콩 수확을 하기 전에 미리 콩을 재배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모두 지불하였다. 부친은 그 뒤 수확한 콩을 거두어들여 제물포로 실어갔고, 그곳에서 일본상인에게 더 높은 가격으로 콩을 판매하였다. 부친은 생전 처음 보는 일본 은화와 엔화를 집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해마다 연초에 수천 엔이 쌓였다. 다른 사람들은 값싼 금속으로 만든, 부피가 큰 엽전을 사용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우리 가족은 다시 이사할 운명에 처했다. 1894년 초여름, 우리는 논골에서 하응동 옛집으로 다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동안 살던 논골은 평양에서 진격해올 청나라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일본군대가 주둔하던 대로 근처에 있었다. 따라서 금방이라도 전쟁터로 바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논골에서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장 1894년 갑오경장(Political Reformation of 1984)


    의원 이원필(Won Pil Lee)로부터 끊임없이 치료를 받았지만 동생 창인(Chang In Hyun)의 간질병은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다. 1894년 3월 무렵, 동생 창인(Chang In Hyun)이와 조모님, 의원 이원필(Won Pil Lee)과 나, 이렇게 4명은 조모님의 명에 따라 하응동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나는 금방 하응동을 떠나 논골로 돌아왔다. 논골에는 부모님과 어린 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논골로 돌아오자마자 서울에서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우두머리였고, 그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Ok Kyun Kim-金玉均)이 1894년 2월 초 상해(上海)에서 홍종우(Chong Woo Hong-洪鍾宇)라는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고종이 가장 신뢰하는, 청나라 전담 사신인 조한군(Han Kun Cho)이 홍종우(Chong Woo Hong)와 함께 김옥균(Ok Kyun Kim) 시신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고종은 김옥균(Ok Kyun Kim)의 시신에 다시 형벌을 가할 것을 명했고, 홍종우(Chong Woo Hong)에게는 하사품과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910년,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홍종우(Chong Woo Hong)와 교류하게 되었고, 그에게 세례를 하게 되었다. 세례를 주고 2년 뒤, 나는 서울 근교에서 홍종우(Chong Woo Hong)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김옥균(Ok Kyun Kim)의 암살 소식이 들려온 지 몇 주일 뒤, 서울에서 다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은 다음과 같다.
    “동학당(Eastern Learning Party)”이 남쪽 지방 전역에서 고종의 통치에 반발하는 난을 일으켰다. 동학당은 무장은 변변치 못하지만 큰 군대를 조직하였다. 동학당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각 마을을 공격하였고, 수많은 탐관오리, 특히 양반들을 살해하였다. 동학혁명은 전라도 고부군의 전봉준(Pong Choon Chun-全琫準)이라는 현명하고 용감한 혁명가에 의해 시작되었다.”
    동학혁명의 실상과 세부적인 내용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조선이 몰락하여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과 1884년, 두 차례의 정치 격동기를 극복한 명성황후(Queen Min)는 결국 권력을 장악하였다. 명성황후(Queen Min)가 임용한 관료들, 특히 지방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였고, 백성들로부터 부정 이득을 취하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명성황후(Queen Min)에게 일정한 양의 재물을 헌납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 자들 이었다. 풍요로운 지역의 통치권을 확보한 많은 민씨 일파는 심각한 수준의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돈과 땅을 강탈하였다. 백성들은 이런 끔찍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도대체 백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탐관오리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민란”, 즉 백성들의 봉기가 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탐관오리들은 분노한 백성들 손에 죽기도 하고, 서울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바로 이때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Pong Choon Chun), 또는 녹두장군이라는 불리는 영웅이 등장하였다(녹두는 키가 작은 남자를 일컬을 때 사용되는 콩의 일종이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체구가 작았지만 용감하고, 유능하며, 전략전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의 부친은 고부군의 아전으로 정직한 관리였는데, 고부군수의 폭정에 저항하다가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아주 어렸을 때 부친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탐관오리에 보복하고, 폭정을 끝장내겠다고 결심하였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현명하게 처신하여 결국 동학당에 들어갔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한동안 동학의 교주인 최시형(Si Hyung Choy-崔時亨)으로부터 동학의 교리를 학습하였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최시형(Si Hyung Choy)의 오른팔이 되었고, 교인들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도 획득하였다. 또 교인들을 ‘포’ 등 여러 집단으로 조직하는 포접제를 두었다. 전봉준(Pong Choon Chun)은 청나라 보정부에서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는 대원군(Prince Tai Won)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전봉준(Pong Choon Chun)과 대원군(Prince Tai Won)은 백성들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살게 만드는 현 조정을 전복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동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동학은 서양의 문물이나 가톨릭에 반대하는 새로운 종교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1867년 초반 경상도에서 최제우(Chei Woo Choy)에 의해 창도되었다. 최제우(Chei Woo Choy)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최제우(Chei Woo Choy)는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완벽히 습득하였다. 그리고 외딴 곳에서 몇 년 동안 기도와 학문에 힘쓴 뒤 ‘동학’이라는 큰 뜻을 깨달았다고 선언하였다.
    동학의 주요한 교리는 위대한 우주의 정신과 인간의 본성을 믿는 것, 우주의 정신과 인간의 본성의 결합을 믿는 것이다. 동학의 목적은 동학의 교리를 널리 퍼뜨리고 백성들을 폭정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 동학의 교인들은 모두 매일 밤낮으로 동학의 교리를 암송하였다. 동학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하늘과 같다.
    현세구복(現世求福), 지금 현재 세상에서 복을 구한다.
    후천개벽(後天開闢), 나중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도와 백성을 평화롭게 한다.“

    1894년 2월 초순, 전봉준(Pong Choon Chun)은 서울에서 고향인 고부로 내려오자마자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봉기를 실행에 옮겼다. 동학군은 사령관인 전봉준(Pong Choon Chun)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 각 지방을 휩쓸고 다니면서 관아를 공격하였고, 탐관오리와 양반을 살해한 뒤 서울로 향했다.
    정부의 군대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급파되었으나, 오히려 동학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고종은 동학군의 기세에 크게 놀라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1894년 6월, 청나라 군대가 아산의 둔포에 도착하였다. 엽지초(Yup Chi Cho-葉志超) 장군과 섭사성(Sup sa Sung-攝士成) 장군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동학당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1894년 6월, 굉장히 무더운 날, 나는 의원 이원필(Won Pil Lee), 하인 한 명과 함께 논골에서 하응동으로 향했다. 우리는 짐을 실은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도보로 움직였다. 하응동까지 삼분의 이 가량 남았을 때 우리는 무장해제당한 군대와 마주쳤다. 군인들 중 한 명이 내 목을 잡고 이렇게 소리쳤다.
    “넌 양반의 자식이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는 시골 농부의 아들입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평양사람들이다. 일본군이 우리가 호위를 하고 있는 경복궁을 습격할 때 고종은 우리에게 일본군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다.”
    갑자기 군인들이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어리석은 왕과 이기적인 양반 놈들! 왕과 양반들이 나라를 왜놈들(일본인들을 폄하해서 부르는 말)한테 팔아먹었다.”
    군인들을 우리를 보내주고 마을을 약탈하러 갔다. 무장해제당하고 평양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군인들을 다시 만날까 두려워 우리는 산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했고, 마침내 밤늦게나마 안전하게 하응동에 도착했다. 하응동에 도착하니 이미 우리 집에는 사촌형인 현언(Earn Hyun)과 현범(Punm Hyun)이 그들의 모친, 부인, 아이들, 그리고 먼 친척들과 함께 와 있었다. 사촌형(현언)과 가족들은 서울에서 달아나 하응동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상세히 듣게 되었고, 왜 평양 출신 군사들이 무장해제당해야 했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군대를 조선에 보냈다. 둔포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자 이에 발끈한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과 청나라는 1884년에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텐진조약(天津條約)이라고 알려져 있다. 텐진조약에 따르면, 일본과 청나라는 각각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어느 일방이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에는 정식으로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런 통보 없이 군대를 조선에 파견한 청나라에 전혀 항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도 해협 너머로 군대를 파견했고, 수도인 서울에 일본군 10,000명이 진주하게 되었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와 일단의 일본군 장교가 경복궁에 들이닥쳤다. 조선의 관료들 중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와 그의 부하들이 경복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도 정신과 충성심은 언제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 것이었다. 평양의 부대에서 특별히 선발되어 왕의 호위를 담당했던 300여 명의 평양 군인들은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와 그의 부하를 향해 총을 쏘았다.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했다. 평양 군인들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왕의 명에 복종하였고, 하나둘씩 총을 내려놓고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평양 군인들이 물러난 뒤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는 고종을 알현하였다.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는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하였다.
    첫째, 조선은 더 이상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조선은 일본에게 특권을 주고,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셋째, 조선의 조정은 정치 제도를 모두 개선해야 한다.
    고종은 오오토리(Otori-大鳥圭介)의 요구에 응하였다. 원세개(Yuon Shih Kai-袁世凱)는 조선의 정식 통보를 받고 3일 이내에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원세개(Yuon Shih Kai)는 조선의 행동을 모두 감시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파견된 식민지 판무관이었는데, 나중에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조선에서 동학당과 싸운 청나라 장군 두 명은 일본군대와 몇 차례 무력충돌을 빚은 뒤에 동쪽 지방을 통해 만주로 떠났다. 마침내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1894년 7월 25일, 고조선의 옛 수도였던 평양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충돌하였다.
    일본군대는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이 그렇게 계속해서 승전보를 울리는 동안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조언을 받아 구체제를 혁파하고 중앙과 지방의 제도, 행정, 사법, 교육, 사회 등 제반 문제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다. 박영효(Young Hio Park)가 지도하는 정치 망명객들이 서울로 돌아와서 고위 관직을 차지하였다. 고종은 박영효(Young Hio Park)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였다. 나의 스승님이셨던 이명순(Myung Sun Lee)은 박영효(Young Hio Park)에 의해 발탁되어 내무부대신이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1894년 겨울, 사촌형인 현언(Earn Hyun)도 이조의 관원이 되었다.
    1894년 8월 하순, 부모님과 어린 신부는 하응동으로 돌아갔고, 이미 하응동에서 자리 잡고 있던 다른 가족들과 함께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즐겼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하응동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동안 조선의 남쪽 지방부터 서울을 거쳐 평양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켰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새로운 문물을 많이 익히게 되었다. 사촌형인 현언(Earn Hyun)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유럽에는 낯선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종이 청나라 군대로 보내는 특별 사신이었던 박종선(Chong Sun Park)으로부터는 중국어를 배웠다. 또 원영의(Young Eai Wan)로부터는 조선에서 내려져오는 산술법에 대해서 배웠다. 정치적 폭풍이 몇 차례 조선을 휩쓸고 가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국제 전쟁이 조선에서 벌어지는 동안 나는 이렇게 세상을 향해 시야를 넓혀가고 있었다.



    6장 명성황후(Queen Min) 시해사건|| 의병이 되기 위한 가출


    1894년 겨울, 일본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중요한 도시인 길림(吉林)과 봉왕을 접수하였고, 만주의 봉천과 목단을 점령하였다. 1895년 초, 일본해군이 청나라 전함을 거의 전멸시켰고, 마침내 뤼순항을 차지하였다. 청나라의 위대한 정치가인 이홍장(Lee Hung Chang-李鴻章)은 일본 육군과 해군의 불패신화에 경악하여 이경방(Lee Ching Fang)을 일본으로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이토히로부미(Ito-伊藤博文)는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에서 파견된 이경방(Lee Ching Fang)을 만났다.
    1895년 4월 17일에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 즉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2.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3. 청나라는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개항한다.

    요동(遼東)반도, 즉 만주 남부지방은 그 뒤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3개 강대국의 간섭에 의해 청나라로 반환되었다. 러시아는 즉시 만주 북부지방을 포함한 넓은 요동반도의 할양을 확보하였다.
    청일전쟁(Sino-Japanese War)이 만주에서 진행되는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남쪽지방에서 봉기한 동학혁명을 진압하였다. 용감한 작은 영웅 전봉준(Pong Choon Chun-全琫準)과 수많은 그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학당의 몇 몇 지도자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학당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손병희(Pyung Hee Son)다. 손병희(Pyung Hee Son)는 나중에 동학당의 후신인 천도교(天道-The Religion of heavenly way)의 교주가 되었는데, 손병희(Pyung Hee Son)를 따르는 교인들의 수는 백만에 달했다. 손병희(Pyung Hee Son)는 또한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33인의 대표였다.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평화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선의 정부는 국명을 ‘대한제국(Great Chosen)’으로 바꾸고, 고종을 대한제국의 ‘황제’로 칭하였다. 새로운 정부의 기본 방침은 관직제도에서 양반제도라는 구습을 없애고 어느 계급 출신이든 유능한 인물을 관리로 발탁하는 것이었다. 일반 공립학교, 군사학교, 외국어(일본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등)를 교육하는 학교가 서울에 설립되었다.
    내무대신 박영효(Young Hio Park)는 고종의 승인을 받아 청년 수백 명을 발탁한 뒤 정부의 재정으로 일본의 동경에 보내 근대 서구 문물을 완벽히 익혀오게 하였다. 당시 16세였던 나는 중국 고전을 절반가량 배웠고, 바깥 세계의 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가는 시험에 합격한 먼 친척뻘 되는 현국(Kook Hyun)과 함께 정부의 학생으로 일본에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슬프게도, 조모님께 간곡하게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으나 조모님은 결코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그때부터는 중국 고전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는 조모님을 사랑했고, 조모님의 명에 복종해 계속 하응동에서 중국 고전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895년 겨울, 친구 몇 명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95년 여름 동안 서울의 정치 지도자들은 두 개의 당파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내각수반이었던 김홍집(Hong Gip Kim-金弘集)과 그의 각료들이 이끄는 친일파(Pro Japanese)였다. 다른 하나는 이윤용(Yun Yong Lee-李允用), 이완용(Wan Yong Lee-李完用) 형제와 진이범(Bum Chin Lee)이 이끄는 친러시아파(Pro Russian)였다. 진이범(Bum Chin Lee)은 나중에 워싱턴 DC에서 한국인 목사가 되었고, 1906년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친 러시아파는 고종의 명령을 받아 러시아의 영향력을 통해 친일 내각을 타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친일파 중에는 이두황(Doo Whang Lee-李斗璜), 우범선(Bum Sun Woo-禹範善) 등 장교 2명이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일본군 장교인 삼포(Miura-三浦梧樓)는 이두황(Doo Whang Lee)과 우범선(Bum Sun Woo)을 일본 공사관으로 초대하여 명성황후(Queen Min)를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 당시 명성황후(Queen Min)는 여전히 고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고종은 여전히 모든 분야에서 명성황후(Queen Min)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명성황후(Queen Min)시해 음모가 내무대신 박영효(Young Hio Park-朴泳孝)에게 알려지면 틀림없이 박영효(Young Hio Park)는 반대할 터였다. 그래서 삼포(Miura-三浦梧樓)는 박영효(Young Hio Park)에게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가라고 경고하였다.
    삼포(Miura-三浦梧樓)와 이두황(Doo Whang Lee), 우범선(Bum Sun Woo) 등 명성황후(Queen Min)시해 음모를 꾸민 자들은 박영효(Young Hio Park)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삼포(Miura-三浦梧樓)는 새롭게 조직된 군대의 조선인 장교 두 명에게 명성황후(Queen Min)가 “친절한” 일본인 고문들을 모두 추방하고, 그 자리를 러시아인들로 대신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부하들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말이 명성황후(Queen Min)에 반대하는 친일파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1895년 8월 20일, 삼포(Miura-三浦梧樓)는 조선군과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대를 끌고 경복궁을 습격하여 건청궁(乾淸宮)이라 알려진 건물에서 명성황후(Queen Min)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Queen Min)시해라는 국가적인 범죄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으면 앞에서 언급한 영국 M. A. 맥켄지(M. A. Mckenzie)의 책을 참조할 것]
    명성황후(Queen Min)가 시해당한 뒤 내무대신 김홍집(Hong Gip Kim) 내각은 시해된 명성황후(Queen Min)의 지위를 강등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다시 명성황후(Queen Min)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김홍집(Hong Gip Kim)은 친 러시아당 쪽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조선의 관습을 개혁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담뱃대 길이에서부터 의복 형태, 머리 모양에 관한 수많은 포고령과 화려한 법률이 공포되어 조선 방방곡곡을 뒤흔들었다. 포고령 등에 의하면, 담뱃대의 길이를 줄여야 했고, 흰 한복은 검정색으로 염색해야 했으며, 소매 단도 줄여야 했다. 또 조선의 남자들은 모두 즉시 상투를 잘라야 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법령의 발표에 백성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충청도의 유인석(In Suk You)이라는 유교 학자가 명성황후(Queen Min)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에 대한 항의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1895년 11월, 충청도와 강원도 각지의 백성들은 유인석(In Suk You)의 소집에 응해 엄청난 수의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 거대한 의병군은 서울로 향했다. 의병의 기세에 경악한 김홍집(Hong Gip Kim) 내각은 의병군에 대항하기 위해 정부군을 파견하였다.
    바로 그 무렵, 마침 중국 고전 공부가 몹시 싫어진 참이었다. 어느 날 밤 또래 친구들을 몇 명 방으로 불러 모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용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피 끓는 청춘들이다. 지금 당장 의병으로 들어가 왜놈(일본인)과 매국노들을 모두 처단하자.” 친구들은 모두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하마.”
    나는 그 뒤 가족들이 모두 깊이 잠든 방을 지나 부친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부친의 금고에서 은화 30엔을 훔친 다음 의병에 들어가겠다는 쪽지를 부친의 침상 아래 놓고 나왔다.
    의병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 4명은 모두 집을 나와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곧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무작정 동이 틀 때까지 걸었다. 날이 밝아서 우리가 있는 곳을 확인해보니 서울로 가려면 남서쪽으로 향해야 했다. 시골 주막에서 아침을 먹은 뒤 의병이 있는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짐작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리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들처럼 용감하게 행진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다시 길을 걷던 중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수십 명 가량 이 길가에 둥글게 서 있었다. 어떤 남자가 숫자가 여러 개 적힌 표를 가지고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이 숫자 가운데 하나에 돈을 올려놓고, 내가 주사위를 던져 같은 숫자가 나오면 그 돈의 두 배를 주겠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중 여러 명이 돈을 걸어 이겼다. 우리 친구 한 명도 도박에 참여해 2원 3전을 땄다. 그 뒤 다들 도박을 했지만, 결국 모두 돈을 잃고 말았다.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도박을 했고, 결국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고 말았다. 모두 거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이준백(Pack Chun Lee)이라는 친구가 황실의 먼 일가였다. 이준백(Pack Chun Lee)은 자신의 집안 농장이 있는 교하로 가서 하룻밤을 묵자고 제안했다. 그는 교하 농장에서 쌀 몇 석을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 무사히 교하에 도착하였다. 이준백(Pack Chun Lee)은 쌀 몇 석을 팔았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서울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집을 나선 지 이틀째 되는 날, 나는 지쳐버렸다. 나뿐 아니라 다들 지친 다리로 계속 걸어야 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고, 서대문과 종로를 가로질러 한강을 건넌 뒤 남대문 밖에서 숙소를 구했다. 내가 도박에 돈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이준백(Pack Chun Lee)이 우리의 대장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이준백(Pack Chun Lee)은 이렇게 말했다.
    “제물포로 가서 새로 개항한 항구를 구경하는 게 어때.”
    친구들은 다들 이준백(Pack Chun Lee)의 제안에 동의했다.
    “좋아, 제물포로 가서 거대한 항구를 구경하자.”
    서울과 제물포 사이의 거리는 약 35마일이었다. 오이카이(Oikai), 소사(Sosa) 같은 일본인 정착촌을 몇 군데 지나 드디어 제물포에 도착했다. 바로 우리가 집을 나선지 3일 째 되는 날 밤이었다.
    우리는 모두 피로에 찌들어 얼굴이 창백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도저히 정갈한 숙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노동자들이 묵는 여관에 묵어야 했다. 그 여관은 초가집이었다. 우리 4명을 포함한 1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작은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노동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 아침을 먹은 뒤 바깥 구경을 하러 나섰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기묘한 옷을 입은 일본인 남녀를 구경한 뒤 일본의 절을 찾았다. 절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동안 일본인 승려가 우리를 안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우리는 절로 들어가 그 일본인 승려와 필담을 나누었다. 몇 가지 의례적인 문장을 주고받은 뒤 나는 이런 문장을 한문으로 적었다.
    “나는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가고 싶습니다. 내가 일본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일본인 승려 역시 한문으로 이렇게 썼다.
    “진심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몹시 기뻐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일본에 가면 먼 친척인 현국(Kook Hyun)이를 만나야지.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많이 배워 와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해야지.”
    나는 의병이 되겠다는 생각을 바꿔 일본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 승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뒤 들고 다니던 짐 꾸러미를 가지러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부친의 친구인 윤섭여(Sum Yer Yun) 아저씨와 마주쳤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세요?”
    나는 깜짝 놀라 이렇게 소리쳤다.
    “여기서 뭐 하냐고? 지금까지 계속 너를 찾아 다녔다. 네가 그렇게 가출한 뒤 조모님께서는 밤낮으로 울고 계신단다. 그래서 네 부친께서 너를 데려오라고 나를 보냈다.”
    부친의 친구인 윤섭여(Sum Yer Yun)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윤섭여(Sum Yer Yun) 아저씨 말을 거역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을 제물포에 남겨 놓고 아저씨와 함께 가마를 타고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한 뒤 사촌형님인 현언(Earn Hyun)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사촌형님(현언)은 나에게 군사학교에 입학하라고 권하였다. 나는 사촌형님(현언)의 말에 따라 군사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윤섭여(Sum Yer Yun) 아저씨는 하응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조모님을 안심시켜드리고 부친의 용서를 빌었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남은 1895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7장 가족들의 상경과 도시 생활


    1895년 하반기, 의병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제물포에서 하응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나는 그때 사촌형인 현언(Earan)이 설명해 준 현 조정의 개혁 정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평소 친일 내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완전히 바뀌었고, 유럽의 문명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1896년 1월, 나는 부친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님, 우리 민족은 지금 부흥기로 가는 전환점에 있습니다. 현 조정이 공포한 단발령에 따라야 합니다.”
    부친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말이 맞다.”
    그래서 1896년 초, 부친과 나는 용감하게 상투를 잘랐다.
    상투를 자른 뒤 훨씬 기분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단발령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들의 행진은 점점 더 서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응동에서 1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도 의병 부대가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절친한 친구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하응동을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다. 의병들이 상투를 자른 죄로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 경고를 받은 날 밤 부친과 나는 짐을 실은 나귀 한 마리와 하인 한 명과 함께 하응동을 떠났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사촌형인 현언(Earn Hyun)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현언(Earn Hyun)은 이미 직장인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떠나고 없었다. 우리는 오래 동안 걸어오느라 지쳐 있었기 때문에 사촌형(현언)이 올 때까지 쉬고 있었다.
    그 날 오후 사촌형(현언)이 퇴청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몇 마디 인사말이 오간 뒤 사촌형(현언)은 이틀 전에 서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총리대신인 김홍집(Hong Gip Kim-金弘集)과 농상공부 대신인 정병하(Pyung Ha Chung-鄭秉夏)가 체포되어 고종의 명에 따라 종로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내무대신 유길준(Kil Chon You-兪吉濬)은 조선시대 군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경복궁 바로 앞에 위치한 삼군부에 주둔하던 일본인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유길준(Kil Chon You)과 김홍집(Hong Gip Kim) 내각의 각료들은 언제나처럼 일본의 동경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런 일은 1896년 2월에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일본이 조선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을 러시아가 대신 행사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이래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과 태평양을 향해 철도를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시베리아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은 인도에서의 영국의 권한 행사를 위협했고, 철도 건설 정책은 일본을 위협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했고, 드넓은 만주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만주 남부까지 모두 강탈하겠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3국 간섭(The Three-power interventior)을 통해 청나라에게 요동반도를 돌려주라고 일본을 강압하였다. 러시아는 또한 조선에 진출하기 위한 기회가 오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M. Waeber)는 자신의 통역관인 김홍륙(Hong Ryuk Kim)을 통해 친러파와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란 바로 고종을 궁궐에서 자신의 공사관으로 빼내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일단의 러시아 수병이 뒷문을 통해 궁궐로 잠입했고, 고종은 러시아 군사의 보호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 뒤 일본은 서울에서 행사하던 정치적인 영향력을 모두 상실해버렸다.
    바로 그 무렵,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미국 시민권 자, 의과과정을 마치고 미국여자와 결혼한 미국명 필립 제이슨(Dr. Pilip Jaisohn) 박사로 더 잘 알려진 서재필(Chai Pil Sur-徐載弼)이 서울로 돌아와 국왕 자문기관의 자문관이 되었다.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는 “독립신문(The Independence News)”으로 알려진 신문을 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함으로써 한국의 개혁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립신문은 그 뒤 발간되는 한글신문의 시조였고, 백성들 사이에서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맹렬한 의병의 불길은 김홍집(Hong Gip Kim) 내각의 몰락으로 차츰 누그러졌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즉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에 관해 러시아, 일본, 조선 3국 사이에 평화롭게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고종은 1896년 말까지 계속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1896년, 봄의 시작이라는 뜻의 연호인 ‘건양(建陽)’이 공식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조정은 윤용선(Yong Sun Yun-尹容善)내각에 의해 비교적 평화롭게 통치되었다. 윤용선(Yong Sun Yun) 내각 각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용선(Yong Sun Yun-尹容善)- 총리대신
    박정양(Chung Yank Park-朴定陽)- 내무대신
    이윤용(Yun Yong Lee-李允用)- 군부대신
    안형수(Hyung Soo Ahn) - 재정대신
    민종묵(Chong Muk Min-閔種默)- 학부대신
    이범진(Bum Chin Lee-李範晋)- 법부대신
    조병세(Pyung sai cho-趙秉世)- 농상공부 대신

    부친과 내가 서울로 피신하고 한 달 가량 지난 뒤 남은 가족들도 서울로 올라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이 다시 서울에 정착한 것이다. 우리는 수표교 남쪽의 저동에 근사한 집을 마련하였다.
    봄과 여름 내내 나는 바깥세상 구경하는 것을 몹시 좋아하는 삼촌인 현재정(Chei Chung Hyun)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삼촌(현재정-Chei Chung Hyun)과 나는 서울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새로운 문물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진고개에 있는, 일본인 정착촌에서 펼쳐지는 모습들을 둘러보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공사관이 모여 있는 정동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평소와 마찬가지로 삼촌(현재정-Chei Chung Hyun)과 나는 바깥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곤당골로 알려진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큰 벽돌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그 건물의 앞 벽에는 큰 한자가 각기 4개씩 양쪽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각각 선함, 옳음, 예절, 지혜를 뜻하는 인, 의, 예, 지가 각인되어 있었다. 또 다른 벽에는 부모에 대한 효심, 존경심, 충성심, 믿음을 뜻하는 효, 제, 충, 신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각인되어 있는 한자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삼촌(Chei Chung Hyun)과 나는 그 건물의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안내자가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에 앉아서 우리말로 유럽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삼촌(현재정-Chei Chung Hyun)과 나에게 낯설고 흥미롭게 비추어졌다. 우리는 모퉁이에 앉아서 그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였다. 구렛나루를 기른 키 큰 백인 남자가 합창을 이끌었다. 그 백인 남자는 정장을 입은, 지적으로 보이는 한국 신사를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 신사 분은 윤치호(Thi Ho Yun-尹致昊)씨입니다. 윤치호(Tchi Ho Yun)씨는 외무부서에서 일하시는 고위 관료이시고, 오늘 아침 우리에게 연설을 하실 겁니다.”
    나는 그날 아침 윤치호(Tchi Ho Yun)의 연설에 집중하였다. 그전에 상해(上海)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윤치호(Tchi Ho Yun)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윤치호(Tchi Ho Yun)가 한 연설의 골자가 기억난다.
    “유교의 가르침은 상류 계층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층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전파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교는 오직 양반이라는 소수 계층에 기반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일반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윤치호(Tchi Ho Yun)는 또 꾸짖는 음성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Queen Min)가 시해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감히 언급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각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조정에 저항하여 일어섰습니다. 도대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양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윤치호(Tchi Ho Yun)의 연설을 듣고 그의 이야기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는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일 외에도 최초의 감리교 종교학교인 배재학당에서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을 많이 가르쳤다. 나는 여러 차례 서재필(Chai Pil Sur) 박사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는 처음에는 “건양협회”라고 알려진 큰 정치 모임을 조직하였다. 건양협회는 조직된 직후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로 바뀌었다. 초대 독립협회 회장은 안형수(Hyung Soo Ahn)였고, 두 번째 회장은 이완용(Wan Yong Lee)이었다.
    독립협회의 노력을 통해 청나라를 숭배한다는 의미의 모화관이라는 건물과 영광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영은문이라는 문은 해체되었고, 대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이 세워졌다. 1896년 11월, 독립협회의 후원 아래 독립문과 독립관의 개관식이 열렸다.
    독립문과 독립관은 서대문 밖에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독립문과 독립관의 개관식을 보러 갔다.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개관식 행사 때 진행된 수많은 프로그램 중에 기억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서재필(Chai Pil Sur) 박사의 유창한 영어 연설이다. 두 번째는 왕실영어학교 학생들이 선보인 제식훈련 장면으로, 나는 그 뒤 왕실영어학교에 입학할 용기를 가졌고 그 학교에 입학하였다. 세 번째는 아펜젤러(Apenzzler)가 작곡하고 아펜젤러(Apenzzler)의 배재학당 제자들이 부르던 독립가이다. 왕실영어학교의 제식훈련은 나의 용기를 자극하였다. 하지만 감리교 종교학교인 배재학당 학생들의 독립가는 나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노래의 한 소절을 기억하고 있다.

    1896년 건양원년 11월
    동양의 위대한 조선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축복의 날이여, 축복의 날이여
    우리 조선 독립의 위대한 날이여
    해와 달이 밝게 비춘다.
    우리의 숭고한 독립을
    축복의 날이여, 축복한 날이여
    우리 조선 독립의 위대한 날이여

    1896년 겨울, 나는 한자로 『서경(書經)』을 배웠다. 『서경(書經)』은 고대 중국의 역사 기록을 편찬한 것으로 10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각 권마다 기원전 2356년의 요(堯)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황제들의 통치 기록을 담고 있다. 스승은 내가 『서경(書經)』을 한 권씩 한 권씩 암송하게 하였다. 때때로 밤새도록 5~6권을 연속해서 암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서경(書經)』 공부가 나의 마지막 중국 고전 공부였다.
    1897년 1월, 고종은 정동 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있는, 새로 수리한 궁궐로 돌아왔다. 청나라의 천단과 비슷한 제단이 건설되었고, 고종은 그 제단에서 황제로 승격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이름은 건양에서 빛나는 무의 정신을 의미하는 광무(光武)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로 칭해졌다.
    1897년 1월, 나는 부친의 허락을 얻어 왕실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왕실영어학교는 농상공부 건물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어학교에는 영국인 교사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교장인 허치슨(W. de Flon Hutchison)이고, 다른 한 명은 평교사인 홀리팍스(Holifox)였다. 두 영국인 교사 외에도 한국인 교사가 여러 명 있었다. 고의성(Eai Sung Koh), 남중규(Chung Kiu Nam), 김필희(Pil He Kim), 조채용(Chai Young Cho), 이한응(Han Eung Lee) 선생님이 아직도 기억나는 선생님들이다.
    왕실영어학교에는 5개의 학급이 있었다. 다섯 번째 학급은 초보자를 위한 학급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 학급에 들어가 이한응 선생님으로부터 영어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한응(Han Eung Lee) 선생님은 몹시 친절하신 분이셨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설명해 주셨다. 영어 알파벳 26개를 외우는 데 삼일이 걸렸다. 상급반 학생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그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여름 시험을 치른 뒤 우수한 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왕실영어학교는 고종황제가 건립한 학교이다. 고종황제는 영어를 완벽히 통달한 젊은 학생들을 영국에 보내 해전술을 배워오게 할 목적으로 영어학교를 건립하였다. 왕실영어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부잣집이나 고위 관료 가문의 아들이었다. 때때로 고종황제가 전교생을 궁궐로 초대하여 영국식 제식훈련을 참관한 뒤 맛있는 음식을 베풀었다. 영어학교 학생들은 여름에는 노란카키색 군복을 입었고, 겨울에는 검정색 양복을 입었다.
    왕실영어학교의 자매 학교로 러시아어학교, 프랑스어학교, 독일어학교, 중국어학교, 일본어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들이 모여 1년에 두 번씩 육상 경기 대회나 운동 경기를 개최하였다. 높은 순위에 오르는 이들은 거의 영어학교 학생들이었다. 또 영어학교에는 축구팀도 있었다. 우리 팀은 주로 영국 해병대와 경기를 했고,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훈련원에서 경기를 하였다. 영국인 조단(Jordan) 경, 영국 국교회의 터너(Turner)주교, 그리고 청나라의 총영사인 당소의(Tang Soa Eai-唐紹儀)가 우리와 함께 축구를 하곤 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에도 기억나는 이들이 몇 사람 있다. 서울 출신인 김우항(Woo Hang Kim), 이완(Wan Lee), 조인순(In Soon Cho), 한상룡(Sang Ryong Han), 한상기(Sang Kee Han), 안중수(Chung Soo Ahn), 평양 출신인 김경민(Kyung Min Kim), 윤호(Ho Yun), 황해도 출신인 장응진(Eung Chin Chang), 곽산 출신인 유동근(Tung Kun You) 등의 친구들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로스앤젤레스(Los-Angeles)에서 살고 있는 H. J. 송(Song)은 특히 더 그렇다.
    1896년 가을, 나는 다섯 번째 학급에서 네 번째 학급으로 올라갔고, 그 뒤 겨울에는 세 번째 학급에서 두 번째 학급으로 올라갔다. 나는 왕실영어학교에서 영어독본, 과학독본, 지리, 산수 등을 배웠다. 일요일에는 주로 서재필(Dr. Jaishon) 박사의 강연을 들으러 배재학당에 갔다.
    내가 왕실영어학교에 다니는 동안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정치운동은 상당히 발전하였다. 독립협회원도 몇 백 명에서 몇 천 명으로 늘어났다. 독립협회는 집회 장소로 모화관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도 부여받았다. 모화관은 수리를 거쳐 독립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윤치호(Tchi Ho Yun)가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이상재(Sang Chai Lee)가 부회장이었다. 독립협회는 서울의 정치중심이 되었다.
    부친이 먼저 독립협회에 입회하였고, 나도 곧 부친의 뒤를 따랐다. 배재학당의 양홍묵(Hong Mook Yang)이 이끄는 “협성회”라는 조직도 있었다. 부친은 협성회에 들어가서 『제국신문』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제국신문』은 그 뒤 조선에서 상당히 유명한 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의 초창기 회원들은 류명(Liu Myeng), 남궁억(Uk Nam Koong), 임중모(Choong Mo Lium), 임진수(Chin Soo Lim), 한치유(Chi You Han), 최정덕(Chung Duk Choi), 정학모(Hak Mo Chung), 나호(Ho La), 정규(Kio Chung) 등이다. 나이어린 회원중에는 이승만(Syng Man Rhee), 변하진(Ha Jin Byoun), 조한우(Ha Nu Jo) 등이 있었다.
    2년 뒤인 1898년, 정부는 군사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학균(Hak Kyun Lee) 대령을 교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왕실영어학교에서 군사학교로 전학하고 싶었지만 조모님의 충고에 따라 뜻을 접어야 했다. 나는 계속 왕실영어학교를 다녀야 했다. 하지만 영어학교의 교장인 허치슨(W. de Flon Hutchison)과 보조 교사였던 고의성(Eai Sung Koh)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은 자부심이 강하고 빈틈없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나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은 몇몇 학생들에게 행한 부도덕하고 부당하며 수상쩍은 행동 때문에 학생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고의성(Eai Sung Koh)은 이른바 정미 7적 중 하나인 고영희(Young Hee Koh)의 차남이었다. 고영희(Young Hee Koh)는 당시 ‘학무아문 참의’라는 일종의 교육부 차관직에 몸담고 있었다. 고의성(Eai Sung Koh)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부친의 영향력을 악용하였고,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이 받은 것과 동일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학기가 끝났을 때 전교생은 한상룡(Sang Ryong Han)이 주도하는 항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상룡(Sang Ryong Han)은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과 고의성(Eai Sung Koh)의 잘못을 모두 폭로하였다. 열띤 논쟁 끝에 전교생은 두 개의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을 옹호하는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에게 반대하는 집단이었다. 한상룡(Sang Ryong Han)은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에게 반대하는 집단을 이끌고 용감하게 학무아문으로 가서 고영희(Young Hee Koh)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건 바로 학무아문에게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과 고의성(Eai Sung Koh)을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진정서였다.
    학무아문은 고의성(Eai Sung Koh)은 해고하였지만 허치슨(W. de Flon Hutchison)은 계속 교장직에 남게 하였다. 한상룡(Sang Ryong Han)과 나는 허치슨(W. de Flon Hutchison) 교장을 반대하는 집단에 속해 두 사람을 학교에서 몰아내기 위해 일했지만 결국 허치슨(W. de Flon Hutchison)을 쫓아내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1898년 가을에 왕실영어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보내는 동안, 독립협회는 서재필(Chai Pil Sur) 박사의 현명한 자문을 받아 점점 더 세력을 키워나갔고, 정부의 잘못된 국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종황제는 상황을 염려하여 마침내 미국인 선교사인 알렌(Dr. Allen) 박사를 불러 미국 정부로 하여금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를 소환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알렌(Dr. Allen) 박사는 고종황제의 말에 따라 미국 정부에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를 소환해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마침내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는 자신이 귀화한 나라인 미국을 향해 다시 짐을 꾸려야 했다.
    서재필(Chai Pil Sur) 박사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부패한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서재필(Chai Pil Sur) 박사가 떠난 뒤 죽음의 서약을 맺었고, 70명의 러시아군대 고문관을 채용하고, 부산의 섬인 절영도를 러시아에 양여하려는 고종황제의 계획을 저지하는 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독립협회의 정책은 궁궐에서 이국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외국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도록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이런 활동을 전개하는 도중에 고종황제의 밀사 몇 명이 독립협회에 잠입하였다. 고종황제의 밀사들은 극비 정보를 입수하여 황제에게 이렇게 간언하였다.
    “만약 정부에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중형으로 처벌한다면, 독립협회는 자동으로 해산될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이런 악의적인 조언을 받아들여 경찰에게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Tchi Ho Yun)와 부회장인 이상재(Sang Chai Lee)를 포함한 지도자 17명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9월 무렵,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부친은 새벽에 소공동 첩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윤치호(Tchi Ho Yun)는 남부감리교도인 리드(Reed) 박사와 그의 중국인 부인 마시(Mar See)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경찰의 체포 망에서 벗어나 피신하였다. 당시 나는 왕실영어학교를 그만둔 상태였지만 학교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집을 나섰다.
    저동에 있는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우리 집 하인인 김용(Kim Ryong)을 만났다. 김용(Kim Ryong)은 소공동에 있는 부친의 첩 집에서 오는 길이었다. 김용(Kim Ryong)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인님이 오늘 아침에 체포당하셨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장교 북쪽에 위치한 독립협회 사무실로 달려갔다. 독립협회 사무실 밖에는 회원 몇 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회원들을 설득했다. “다 같이 경찰국으로 갑시다.”
    우리가 경찰국 정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서울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 수백 명 이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구제도에 따라 나누어진 6개의 부서, 즉 이조, 병조, 형조, 호조, 예조, 공조로 이루어진 “육조” 제도를 따서 이름을 붙인 “육조앞”이라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를 따라 양쪽으로 6개의 부서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이 거리의 끝에는 북악산을 향해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복궁이 매력적이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서 있다.
    몇 시간 뒤 거의 100,000 여 명이 이 “육조앞”거리에 모여 들었다. 독립협회는 집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현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 독립협회 회원들은 고종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로운 지도자 17명이 체포당했습니다. 고종황제께서 악의적인 추종자들이 속삭이는 잘못된 충고에 따라 우리의 지도자를 체포하라 명하신 겁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풀려날 때까지 이 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맙시다.”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 발탁된 젊은 웅변가들이 거리 곳곳으로 급파되어 정부가 독립협회 지도자들에게 자행한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원들은 상점 주인들에게 상점 문을 닫을 것을 권하였다.
    정부는 군사를 보내 육조 거리에서 대중들을 해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땅바닥에 굳세게 주저앉은 수많은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표하지 않았고, 군인들은 대중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나갔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조 거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노숙을 했다. 바로 이 날 “풍찬노숙”이란 사자성어가 만들어지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풍찬노숙”을 한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바람 속에서 식사를 하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이루다.”
    우리는 6일 밤낮으로 경찰국 앞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조선을 위한 민주주의- 현순-


    지난 35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냉혹한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고통받아온 “은자의 왕국”인 우리 조선은 이제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조선은 연합국(the Allied Nations),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38선 이남의 조선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미군정은 제일 상층부에서부터 하층부까지 모든 관직에서 일본 관료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유능한 조선인들을 임명하였고, 우리 한민족을 위해 조선의 정당들을 모두 통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소련은 38선 이북의 조선 땅에 들어와 그 지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소련 역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소련 적군에서 훈련받은 조선 병사들을 조선으로 데려왔습니다. 소련 정부는 또한 38선 이북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조선인을 위한 인민위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과 조선인민들 사이에 다소 오해가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조선인들 쪽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처사가 당혹스럽고 불만스러웠으며, 미국과 소련 쪽에서 보면 판단착오로 여길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조선은 지금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의 십자로, 즉 문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문을 갖는 조선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찾은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정복당한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소련의 조선인가, 아니면 미국의 조선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우리 조선 민족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우리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도와주겠습니까? 아니면 소련 정부가 우리를 도와주겠습니까?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운명을 건설하기 위해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주역은 바로 우리 조선인민입니다.
    우리 조선인민들은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민들은 수 천 년 동안 군주제 정부 밑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35년 동안은 일본 제국주의의 독재 아래 살아왔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조선인민들은 진정 “인민(people)”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들의 친절한 노력을 통해 수백 만 명의 우리 조선인민들은 “인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일심동체로 뭉친, 사회에 관심 있는 인민들은 한 국가의 초석입니다. 조선인민들은 오래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새로운 조선 민족의 탄생을 위해서는 한마음으로 단결하고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민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위대한 교훈을 터득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결코 공산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또한 과격한 공산주의를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바꾼 레닌(Lenin) 동지가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병합(강제병탄)한 이후부터 군벌들이 조선으로 밀고 들어와 산업계 뿐 아니라 조선 전역에 착취 정책을 일상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반관(半官) 회사가 “동양척식회사(Oriental Development Company)”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토지는 공공 목적에 사용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 아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습니다. 조선인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일제의 식민지 총독에 의해 몰수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몰수당한 토지는 모두 조선으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수백 만 명의 조선인들은 조국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조국을 떠난 조선인들 중 어떤 이들은 만주 벌판에서, 또 어떤 이들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호구지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만주와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당연히 러시아로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공산주의의 영향은 조선 전 지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민들에게 더 큰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를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에 대항하는 폭동과 사보타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수천 명의 조선 청년들이 악명 높은 일본 정부에 의해, “사상범(thought offense)”으로 알려진 특수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또 “사상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Communism)는 조선인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조선인은 오직 공산주의에만 의지해서는 완전한 국가의 자유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조선 민족의 운명은 단순히 하나의 원칙이나 이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원리나 이론이라 해도 말입니다. 조선 민족의 운명은 조선인의 보편적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조선인들이 완전히 통합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북 출신이든 이남 출신이든 관계없이 모든 조선인이 함께 모여 우리 민족의 현재와 내일을 이야기할 때, 모든 조선인들이 단일한 정치적 정책이나 경제적 정책을 채택할 때, 그리고 모든 조선인들이 용기를 내어 군사동맹국에게 자신들의 바람을 솔직하고 우호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때, 군사동맹국들은 틀림없이 조선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고,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할 것입니다. 오늘날 조선인이 수립해야 할 것은 소련의 공산주의도 아니고, 미국의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우리 조선인은 조선 민족의 삶에 적합한 조선식 민주주의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조선의 국토와 인민(Korea|| the Land and Her People)-현순(Soon Hyun)-


    아시아 대륙의 북동 해안선에서 돌출한 반도인 조선의 국토는 이탈리아 반도와 거의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조선의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서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조선과 태평양 사이에는 일본 열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지리적인 특징이 조선과 서양 세계와의 관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실제 거대한 태평양 정기선 중에 조선의 항구에 들어온 정기선은 아직 없습니다. 조선의 이런 지리적 특징 때문에 조선은 세계의 다른 국가로부터 고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선의 지리적 특성은 사실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반도는 북으로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해안 지역과 접해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이 만주와 시베리아와의 경계를 가르고 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압록강은 한반도 서쪽의 서해로 흘러들어가고, 두만강은 동쪽의 동해로 흘러들어갑니다. 조선의 국토는 남쪽으로는 “현해탄” 즉 조선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큐슈 섬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부산항에서 일본의 시모노세키 항까지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배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이런 한반도 지역의 면적은 대략 35,318 평방 마일입니다. 한반도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의 거리는 660마일이고, 최동단에서 최서단까지의 거리는 170마일입니다. 또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사람이 살고 있는 작은 섬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습니다. 이런 동해안과 서해안 인근 섬들의 면적만 해도 9만 평방 마일에 달합니다.
    조선 국토의 지형적 특징은 명백히 산악지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조선 국토 전체 면적의 4분의 3 이상이 산맥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산맥은 조선과 만주의 국경에 자리 잡은 백두산의 위풍당당한 정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반도의 척추를 형성하는 이런 산맥은 동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달려가다가 서해를 향해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산맥을 이루는 각 산의 꼭대기들은 가파른 절벽 등을 자랑하면서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해안선이 완만하게 굽이치면서 펼쳐집니다.
    조선의 척추를 이루는 산맥의 중간 부분에서 뻗어 나온 줄기들은 서쪽 지방과 남쪽 지방에서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고, 낙동강, 금강, 한강, 대동강과 압록강 주위에는 광활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경작지는 한반도의 남쪽 지방과 서쪽 지방에서 발견됩니다. 남쪽과 서쪽 지방에 경작지가 많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의 삼림 지역은 대부분 북동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동 지역에는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지리산 등 큰 산 다섯 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강산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해안선의 길이는 섬을 제외하고 5,399 마일 이상입니다. 하지만 가파른 산비탈 때문에 동해안에서는 해안선 만입(灣入)이 다소 작은 편입니다. 그래서 동해안에는 좋은 항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입니다. 반면에 남해안과 서해안은 섬에 인접한 작은 만이 많기 때문에 근사한 항구 도시가 많이 포진해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해군은 조선의 해안이 해군 기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간파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행정구역은 13개의 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울(일본식 명칭으로는 경성)은 조선의 수도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평양을 극동 지역의 기독교 신앙 중심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조선의 지리적 위치에 의해 기후 조건도 결정됩니다. 비록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는 해도 조선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라기보다는 대륙성 기후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해양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북쪽 지방에서는 특히 해안선을 따라 해양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게 작용합니다. 차갑고 따뜻한 파도가 번갈아가며 한반도를 찾아들면서 극도의 추위와 더위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봄과 가을은 다소 짧은 편입니다. 봄과 가을 동안에는 밤낮의 기온 차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겨울의 추위 주위는 다소 규칙적입니다. 3일 동안 추위가 계속되다가 4일 동안은 추위가 수그러듭니다. 조선에서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 일컫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겨울은 건조하고 서늘하고, 여름은 덥고 비오는 날이 많습니다. 한 해 평균 강우량은 대략 36인치입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덕분에 온대성 야채가 무성하게 자라고, 조선인들은 집약 농업으로 상당히 이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수 백 년 동안 벼, 기장, 콩, 토마토, 옥수수, 수수, 귀리, 보리, 호밀, 면화, 담배, 사탕수수, 인삼(유명한 조선의 강장제), 그리고 다양한 채소와 과일들을 성공적으로 재배해왔습니다. 조선은 언제나 백성들이 소비하는 양보다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동양의 어느 국가보다도 기근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에서는 가난과 기근이 조선 전역을 뒤덮고 있습니다.
    국토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습니다. 조선 각지에서 금, 은, 텅스텐, 흑연, 납, 철, 석탄, 고령토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광물들 중에는 매장량이 상당히 많은 광물도 있습니다. 이 광물들은 지금 적절한 근대식 기계를 사용해서 충분히 개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일본의 착취는 오로지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회사에 의해서 운영되었던 금광이었던 운산 광산은 1896년 채굴권이 인정된 뒤에 12년 동안 1,637,591 톤의 광석을 캐내어 10,701,157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현재 조선의 인구는 대략 24,000,000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 인구는 크게 세 집단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조선 국내에는 21,000,000명이 살고 있고, 둘째, 만주에는 2,000,000명이 살고 있으며, 셋째, 시베리아에는 1,000,000 명이 살고 있습니다. 조선 국내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은 상인, 농부, 노동자를 포함해서 대략 1,000,000 명입니다. 또 이 지구상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위에서 말한 세 곳만이 아닙니다. 하와이에서 6,000 명이 살고 있고, 미 대륙에서 2,000명이 살고 있으며, 멕시코에서 1,5000 명, 쿠바에서 500명이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조선이 동양 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우수한 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일본이라는 지리적, 정치적 장벽에 가로 막혀 조선의 문화와 위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의 국가로서 조선이 탄생한 시기는 기원전 2천 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기원전 2333년). 이 때 조선의 시조인 단군이 조선을 창건하였습니다. 단군이 다스렸던 영토는 지금은 만주로 알려진 처녀지였습니다. 단군의 후손들이 기자가 중국에서 조선으로 넘어올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습니다. 기자의 후손들 역시 단군이 최초로 채택한 국명인 조선(朝鮮, Moring Calm)이라는 국명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기자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기자조선은 다시 천 여 년을 이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라, 백제, 고구려로 알려진 세 왕국이 이 땅에 출현하였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오늘날 한반도로 불리는 지역을 대부분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의 만주 지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조선의 문화는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삼국시대가 전개되는 동안 천 년 이상 찬란하게 꽃피웠습니다. 중국, 인도, 일본의 사료들은 조선의 미술, 문학, 철학, 음악, 천문학, 군사학이 얼마나 눈부시게 번창했고, 주위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조선 민족은 많은 나라들로 흡수되었습니다. 조선 민족이 흡수된 나라들은 부여, 숙신, 선비, 거란, 발해, 요나라와 금나라 등이었습니다. 이 부족들 중 일부는 일찍이 기원전 500 년경에 중국 남쪽으로 내려와 수나라를 건설하였고, 1,000여 년 동안 7개의 큰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주 왕실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관해서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가장 강력한 조선인 부족이었던 숙신의 직계 후손들이 중국의 당 왕조를 정복하였고, 청 왕조의 최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청 왕조는 1911년 중화민국이 도래할 때까지 300년 이상 중국을 다스렸습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대략 9세기 경 군사전술에 천재적이었고, 정치적 전략과 인도주의적 정신을 가진 왕건이 신라, 백제, 고구려를 통일하여 고려 왕조를 건설하였습니다.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은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려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조선인들은 중국인과 몽골인 등 서로 다른 인종과 혼인하였습니다. 고려인들은 농업, 상업, 산업, 조각, 도예, 미술, 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조선 민족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14세기, 이씨 왕조가 고려 왕조를 계승하여 조선을 다스렸습니다. 조선의 시조는 이 태조입니다. 이씨 왕조가 근대까지 계속되는 동안 혁혁한 발명품과 발견물이 수없이 등장하였다. 16세기, 찰스 다윈이 영국에서 태어나기 훨씬 전 이황(Lee Whang)이 진화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인쇄 활자가 유럽에서 사용되기 이전에 조선에서 먼저 발명되었습니다. 1592년에서 1599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발발한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순신(Lee Soon Shin) 장군이 근대 잠수함의 시조이며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하였습니다. 거북선은 나무와 쇠로 만든 거북이 형상의 전함입니다. 거북선의 표면과 수면 아래 양쪽에서 선원들이 노를 저을 수 있었습니다. 거북선 수십 척이 조선의 해협에서 300 척의 일본군 전함을 공격하였고, 실제 일본군 전함을 거의 대부분 침몰시켰습니다. 결국 일본은 조선 땅에서 아무런 발판도 마련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조선은 1910년 8월 29일까지 4천 년 동안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 독립 국가로 존재하였습니다. 몰락하는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은 나중에 조선의 총독이 된 사내(Terauchi-寺內) 장군의 강압에 의해 병합 조약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만 했습니다. 나약하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세계의 다른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조선은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집단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인민은 자유와 국가 독립을 위해 쉴 새 없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조선 인민들은 침략과 지배 세력에 대한 전 세계적인 투쟁 속에서 세계의 인민들과 함께 공동의 적의 완전한 멸망을 위해 확고하게 전선에 서 있습니다. 조선의 지리적 위치, 역사적 배경, 자연 자원, 그리고 민족의 잠재력은 전쟁과 평화의 시대에 유엔에 소중한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