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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자해자전

    1. 기미년 3월 1일 조선 독립운동


      조선은 4천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랜 국가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조(李朝) 500년 동안은 국명을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그전에는 고려국이라 불렀다. 이보다 더 오래 전 조선은 신라·백제·고구려 등 3국으로 나뉘었으며, 또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의 국명도 있었다. 이를 3한이라 칭했다. 그 후 갑오년 완전 독립시 부터 조선의 국명을 한국이라 호칭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이라는 이름은 삼한(三韓)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갑오년(1894년)에 독립한 대한제국은 중·일(중국·일본) 양국의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조약), 1895]을 통해 그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독립국으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버렸다. 정치부패·내정불수·국력미약의 대한제국은 경술년(1910년)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부터 또 다시 국명을 조선이라 불렀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비록 일본이 무력으로 국내를 장악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노들의 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조선 역사상 영원히 씻어버릴 수 없는 가장 치욕적인 오점일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망국노의 신분으로 전락된 3천만 조선 인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한 통치하에 착취와 고된 노역으로 참혹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날이 갈수록 침략야심과 확장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오늘, 그들이 높이 외치고 있는 만주와 몽골정책의 문제는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과 갈라놓을 수 없는 침략적 음모이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 공포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무장기의(起義)를 일으켜 적극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불과 몇 년이 안 되어 결국 실력부족으로 실패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 인민들의 항일투쟁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제l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의 조관에는 조선인민은 우리가 반드시 원조해야 할 약소민족이라는 정의를 내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대표를 프랑스 파리에 파견하여 조선을 통치하는 일제의 죄행을 선포했고 아울러 독립자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5대 강국 중 하나인데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와 여타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세만장(氣勢萬丈)한 시기였으니 누가 감히 정의를 지지하고, 누가 감히 약소민족인 조선 대표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이때 조선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최대한 일본의 선심정책을 선전했고, 또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는데 급급했다. 이 기간 국내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찍 해외에서 유랑한 항일운동가들 이었다. 그들의 활발한 항일투쟁으로 인해 조선의 분위기는 긴장이 더 없이 고조되었고, 그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세력들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선 인민들의 항일행동에 대한 일본군, 경찰의 단속은 더 한층 강화되었다.
      또 하나 조선인의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이태왕(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원래 ‘친화배일(親華排日)’로 저명한 광무황제 이태왕(李太王)은 일본의 침한정책(侵韓政策)에 불만을 갖고 비밀리에 대표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일본의 죄행을 호소했다. 때문에 조선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직접 궁궐로 들어가 핍박으로 황제를 퇴위시켰으며, 경술년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실현 이후 융희황제를 이왕(李王)으로 하고, 전 광무황제를 이태왕으로 했다.
      이번에 프랑스 파리에 비밀리에 파견된 대표가 평화회의에서 독립을 요구한 것은 틀림없이 이태왕(광무황제)이 계획하여 도모한 일이다. 그래서 시독암해(施毒暗害)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위여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계의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해 분노했으며,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사무친 원한을 진정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조선의 많은 전국적 대표 인물들, 예를 들면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은 명월관(明月館)에 모여 연명으로 독립선언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독립운동이며, 간칭은 3·1운동이다.
      ‘3·1운동’은 우선 서울과 평양 등의 독립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적인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 즉 작은 성시로부터 향(鄕)·진(鎭)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끊임없이 계속하여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잔인무도한 일본군과 경찰은 군중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실탄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에 품은 시위대들은 이러한 비인도적인 왜놈들의 실탄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시위대에 참가하여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계속하여 항일시위를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 중·경(輕)한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중(重)한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바로 살해되었다. 당시 그 유혈참극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또 수원군(水原郡) 제암리(堤岩里)에 있는 백여 호의 남녀노소 모두를 집안에 가둔 후 밖으로 출입문을 잠그고 아주 잔인하게 살인방화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잔혹한 행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어느 누가 인성(人性)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죄행에 대해 증오하고 치를 떨지 않겠는가? 이렇듯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죄악을 조선 인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때 조선의 애국지식청년들은 국내에서 발을 붙이고 생존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일본 통치 집단들이 국내외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운동에 관련된 그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당시 해외로 망명한 애국인사들과 일본 통치에 불만을 품고 중국의 동북 각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농사를 지으며 농부로 사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은 일찍부터 그 지역에서 항일구국의 조직을 결성했다. 이렇게 그들은 국내외에서 정열적인 독립운동의 기회를 가졌으며, 암암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국내의 애국청년들에게 항일구국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청년들이 조선을 떠난 유일한 동기이다.



    2. 조선을 떠나기 전·후의 사실


      원래 나의 집은 자강도(慈江道) 중강군(中江郡) 장사면(長士面) 호하리(湖下里)에 있었다. 이때 나는 중강진(中江鎭) 공립병원에서 일했으며, 병원은 나의 집에서 약 30여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나의 집 앞에 있는 압록강 바로 건너편은 중국이었는데, 지명은 호호투(胡芦套)라고 했다.
      그 지방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손만정(孫萬程)이라는 노인 한 분이 이곳에 살면서 직접 땅을 개간하면서 농사를 짓는 농지로 되었으며,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들면서 인구가 점점 늘어나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아들·딸·자손들과 함께 아주 검소하고 평범하게 생활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비도들은 이곳을 진압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손만정 이라는 이 노인이 바로 나의 양아버지이다. 그는 특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으며, 우리 두 집은 늘 서로 오가며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어느 깊은 밤, 16살 된 여자 아이(손만정 노인의 딸로 추측)가 몇 명의 토비들이 찌른 창에 어깨를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 시절 중국에 서양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득이 내가 일하고 있는 공립병원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병원 측도 우리 두 집 간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책임지고 치료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언젠가 한번은 어떤 환자에게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진행하였는데 부서진 뼈를 맞추느라 꼬박 밤 새워 날 밝을 때까지 해서야 겨우 수술을 마쳤다. 그 후에도 수술후유증을 관찰하여야 했던 나는 제 시간에 집에 돌아가 식사를 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늦게서야 간신히 숙소에 돌아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헌병보조원이 들어왔다.
      당시 나는 백세봉 여관에서 투숙하고 있었는데, 여관의 누구도 그를 접대한 적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스스로 재봉기 옆에 와 앉았다. 아침을 먹었냐는 나의 물음에 이미 먹었다고 대답하고 나서 무엇 때문에 이제야 밥을 먹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에 나는 “토비에게 부상당한 중국의 어린 동생의 상처를 날 밝을 때까지 수술을 하고 이제야 돌아왔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 병원에서 암암리에 중국인을 치료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런 사실은 마땅히 먼저 헌병대에 보고해야 하며, 마음대로 외국 환자를 치료해 줘서는 절대 안된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뭔가 울컥 치솟는 마음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밥상에 앉은 채 “보고는 무슨 보고! 정말 보고해야 할 규정과 보고의 의무가 있다면 원장과 서기에게 보고할 것이며, 당신은 나 자해(이자해)가 그런 일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기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느낀 그는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원래 이 김 모라는 자와 나는 어려서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한 동창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일본 헌병보조원이 되어 전문적으로 일본인을 도와 조선 동포를 못살게 굴었다. 한편 일본인은 그의 일정한 문화정도를 인정하여 중요한 사건을 조사할 일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맡겨 처리했다.
      이런 그가 일본인 앞에서는 꽤 손꼽히는 사람이었으나, 일반 조선 동포들은 그를 아주 무서워했으며, 또한 증오하고 무시했다. 나의 동창 가운데는 일본의 헌병보조원으로 일하는 동창이 셋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김절로(金浙爐)·한명신(韓明信)·박정모(朴正模)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조선 태생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기상관측소 가상참의 교대근무 시간까지 아직도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어 같은 방에 있는 사람과 한담하고 있었다. 이때 김 모가 이태왕(광무황제)이 죽은 후 근 며칠 동안 조선 각지의 불령선인들이 망동과 교란을 하고 있다면서 당신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인데 이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우선 네가 날 양해해 주길 바라면서 내가 먼저 몇 마디 말하겠다! 양심적으로 말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조선 사람인데 그럼 너는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불령선인들을 말하는데 어찌되었건 그들도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적이고 정의로운 용감한 사람들이며, 그들이야 말로 조국독립을 위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사람들인데 무엇 때문에 이런 그들을 불령선인이라 하는가?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는 정황으로 볼 때 일본 헌병대는 일본 수비대, 일본 재향군인회 소속으로 구성된 의용대, 그리고 일본 거류민 4~5백호와 몇백 명에 달하는 일본의 유동벌목공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인을 진압하는 실력이 상당히 강하며, 이런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인해 전국 각 지방의 독립선언 시위운동은 발생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미 일제의 피압박 속에서 고난의 쓴맛을 볼대로 본 조선인들 중 그 누가 현재의 상황을 평정무사(平靜無事)하다고 판단하겠는가? 현재 너희들이 조선인 진압을 책임진 만큼 적극적으로 일어나 만일에 발생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제지하고 그 대가로 영광스럽게 일본의 훈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나는 네가 그런 실력을 쟁취하기 바란다.”

      나와 김 모는 동창의 입장에서 만나 쟁론을 하기 때문에 나의 이런 자극적인 말에도 김 모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김 모와 이런저런 한담을 하는 동안 어느덧 출근시간이 되었다. 급히 측후소로 가던 중 나는 전화호출을 받고 즉시 우체국에 가 강계군(江界郡)에 있는 연병래(延秉來)와 전화통화를 했다. 우선 서로 일반적인 인사말을 나눈 이후 그가 말했다.

      “우리 중강진이 비록 특수지역이지만, 우리들 가운데 군중을 발동하는 사람이 없이 무사안일하게 보내는 것이 아주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그래서 내가 어제 이미 문건과 함께 사람을 당신한테 파견했는데, 그의 이름은 김병현(金秉賢)이며, 아마도 내일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우린 아주 오래된 친구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잘 보살피길 바라며 나도 곧 4~5일 이후 모든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연병래와 통화를 마친 나는 시위운동에 관계된 사정을 알게 되어 몹시 흥분되었다. 마침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 아침 6시에 마지막 관측성적을 전보로 발송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나는 찾아 올 손님을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문밖 멀리 나가지 못했다. 드디어 오후 5시쯤 되어 낯선 청년이 들어왔다. 손님의 태도는 아주 우아하고 표정이 간결했다. 내가 먼저 “당신이 김병현 선생이 아니냐?”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제가 바로 김병현입니다.”고 대답하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넸다.
      나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350리 정도를 오느라 3일 정도 힘들게 걸었을 터이니 우선 한 시간 정도 휴식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피로하지 않다고 사양해 우리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등옥(宇登屋)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이 우등옥은 일본인 과부가 딸을 데리고 장사하는 밥집이다. 비록 전문적으로 뜨거운 국수를 파는 집이긴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잘 대해 주어 모두들 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손님이 선금을 지불하면 어떤 요리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더욱이 평소에 나에 대한 그들의 인상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춘자(春子)네 우등옥으로 갔다. 그 곳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과 요리 등을 주문했다. 식당주인에게 “함께 온 이 친구는 나의 오랜 동창인데 오늘 생일이라 특별히 초청해 술 한 잔 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약간의 돈을 더 지불할 테니 제일 좋은 요리를 부탁한다고 했다. 신이 난 그들 모녀는 정말 아주 열정적으로 우리를 접대해 주었다.
      한참 뒤 김병현이 본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선언시위운동은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서로 연락이 아주 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잘 조직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체포된 사람과 살해된 사람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고 구제할 것인지와 시위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지방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거래와 일상적인 경제관계를 단절하는 등의 구체적인 모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연병래 씨는 비록 중강진의 환경이 특수하고 뜨거운 피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으며, 더욱이 절대로 일본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될 수는 없다는 긴박감 때문에 특별히 김병현을 파견하여 독립선언서 및 시위운동조직 강령 등 문건을 보내오게 된 것이었다. 김병현은 우선 나와 주요 인물들과의 연락방법을 상의하고 나서, 4~5일 내에 연(연병래)씨가 돌아온 이후 다시 구체적인 문제를 상의하기로 결정했다.
      연병래는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당시 함경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대장 연기호(延奇昊)의 손자이다.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살해당할 당시 26살 난 청년이었다. 그는 집에서 평범한 생활을 할 수가 없어 변장하고 도처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다가 중강진의 모 공장에서 조장 직책을 맡기도 했다.
      상당한 문화와 기개가 있고, 인간성 또한 좋아 날이 갈수록 결집력이 높아갔다. 그는 또 자신의 책임범위 안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어려움에 직면하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연히 알게 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지낸 지 며칠 안 되어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되었으며, 서로 형·동생하면서 지낸 지가 이미 2년이 되었다.
      춘자네 우등옥을 나올 때 그들에게 음식값의 절반을 팁으로 주었더니 그들 모녀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재삼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4~5일 후에 다시 10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식사를 할 것이니 조용한 방을 준비해 달라는 나의 부탁에 춘자는 “마침 지금 공인(工人)들이 모두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손님이 없으니 언제든지 조용한 방을 이용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아주 반겼다.
      식당에서 나와 먼저 김병현을 숙소로 보낸 후 나는 모 교회의 임 장로를 찾아가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는 독립선언 및 시위운동을 교회에서 주도할 것에 관해 말하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면서 “만약 누군가가 각 인원들에 연락하여 군중을 동원하는 일을 도와준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선두적인 역할을 하겠다.”라고 화끈하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일찍부터 종교적인 수양이 있는 사람들의 언행이 일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적극적인 행동에 아주 기뻤다. 우리 두 사람은 즉시 몇 사람을 초청하여 중강진의 독립선언 및 시위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강계(江界)에 있는 연병래가 파견한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게 된 전후과정을 설명했다.
      우리의 토론결과는 의외로 즉석에서 결정되었다. 우리는 우선 각자가 책임지고 기관단체에 연락하여 품행이 정직하고 사상이 믿음직한 공작인원으로 한 개 기관을 조직하여 교회예배당 회의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동시에 최근 일본 헌병대가 위장하여 아주 교묘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여 경각성을 높이자고 다짐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12시경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제 시간에 출·퇴근했다. 그 외의 나머지 시간은 전부 동분서주하면서 독립운동에 관한 활동을 진행하였지만, 우리의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일본의 보복과 횡포를 두려워했으나,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개인의 생존과 전 가족의 생활을 위하여 일본인 밑에서 일하면서 이미 온갖 부당한 대우와 비인도적인 압박을 받았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마땅히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면을 보더라도 조국광복과 독립을 갈구하는 조선인민의 심정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알 수 있다.
      연병래가 강계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 6시에 나와 그는 함께 춘자네 우등옥으로 들어가 이미 약속한 13명 전원과 함께 술상에 모여 앉아 조선의 현실과 우리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연병래)씨는 며칠 동안 우리의 활동성과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면서 신속히 실제행동으로 옮길 구체적인 방법을 결정했다.
      그로부터 3일 뒤가 바로 예배일이라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에 옮길 좋은 점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이날 오전 10시 반 전후에 예배당 앞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주석(主席)의 연설이 끝나고 만약 시간이 허락되면 자유연설을 하고, 다음 책임자가 군중을 동원하여 대열을 정돈한 후 시위하기로 계획했다. 나와 연병래 등 세 사람은 기밀유지를 책임졌기 때문에 정면에 나설 수 없었으나, 우리 각자는 매우 긴장했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 배일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은 국내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중국에 이주하여 농사를 짓거나 시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조선 국내에서 폭발한 민족혁명 이후, 일본 군경은 배일운동 중심기관이 중국에 있는 조선인이라 판단하고 최근 비밀리에 변복한 헌병을 중국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인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본지에 우리의 인원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우리의 행동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다행히 우리는 순조롭게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이 다가왔다.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각 학교 교사들은 토요일 날 학생들에게, 내일은 봄맞이 여행을 가니 오전 10시에 지정장소에 집합하여 출발한다고 선포했다. 이날 일반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제 시간에 약속장소에 도착했으며, 집회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들이 속속 모이면서 집회 장소는 삽시간에 인산인해가 되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임 장로가 먼저 주석대에 올라 의미심장하게 개회사를 선언한 이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장내에서는 열렬한 환호와 함께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속하여 주요 간부와 지방 유지들의 발언이 있었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준비한 태극기 만 여개를 시위참석자들에게 나눠주어 행렬을 정돈한 후 예정된 선으로 앞을 향해 전진하면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우리의 행렬이 채 5리도 가지 못했을 즈음 갑자기 일본 기병과 헌병, 일본 의용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리의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시위대와 일본 헌병대가 결사적으로 서로 밀치고 당기고 하면서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 일본 무장군경들이 다가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진압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원 3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날 우리를 타격한 일본 군경 중에는 김절로·박정모(朴正模)와 같은 민족적 패류도 있었다. 기세등등한 이 자들은 총으로 많은 사람들을 해쳤으며, 더욱이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것은 김(김절로)·박(박정모) 두 패륜아가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의 스승과 교장에게 구타를 가한 사건이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많은 부상자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나를 그 곳에 파견하여 인명구조공작을 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원장에게 “조선 사람인 내가 마땅히 이런 운동에 참가해야 합니다. 만약 분노한 군중들이 나를 보면 더욱 화날 것이므로 다른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제의했다. 나의 주장에 원장도 동조하면서 결국 나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시위대 구조작업 현장에 파견했다.
      부상당한 사람 가운데는 체포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조선인이 진료하는 병원에 왔다. 이날 시위과정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33명이었다. 이들은 연속 3일간 취조를 받은 후, 경·중으로 구분되어 26명은 강계(江界)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3백3십 리의 긴 노정에서 그들은 많은 지방을 경과하면서 대·소도시를 가릴 것 없이 군중들의 열정적인 환영과 접대를 받았다. 이렇게 제1차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우리가 제2차 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각 방면에서 많은 말들이 들려왔다. 어느 날, 나와 연병래·김병현 세 사람이 중국 모아산(帽兒山)을 이용한 집회를 갖기 위하여 모아산에 있는 고봉일 진료소에 갔었다. 그때 마침 그곳에서 우연히 몇 명의 옛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 모두는 배일사상이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즉시 국내외 형세에 대해 담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번 중강진에서의 운동과정과 조직력이 아주 좋았다고 하면서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번 운동은 모두 연병래의 지도로 이룩한 성적이며, 우리가 또 다시 제2차 운동을 계획하고 있으니 여러분의 많은 지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시위과정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핵심인물들인데 이렇게 되면 앞으로 누가 건국공작을 책임지고 담당하겠는가?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이런 1차와 같은 시위운동을 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상해 법(프랑스)조계에서는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하였으며, 국내외 유명한 지사와 걸출한 조선 민족의 영수인 도산 안창호선생도 이미 미주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아울러 해외 각지의 역량도 모두 상해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많은 청년들도 모두 상해로 집중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 방면에서 유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일본 각 기관에서 일하는 인원들을 동원하여 근무처를 떠나도록 유도하여 일본의 통치에 대한 항의시위를 나타내고, 또한 그들이 일본 통치세력들로부터 받은 타격에 대해 세계여론에 호소함과 동시에 우리의 항일실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중요하고도 새로운 소식을 들은 우리는 아주 기뻐했다. 모두들 즉석에서 이후부터 이 방면에서 많은 노력을 할 것을 다짐하고, 즉시 돌아가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스러웠던 것은 일본 기관에서 직을 떠난 인원과 기타 애국지식청년들을 중국에서 어떻게 집중훈련하고 생활을 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역시 신중하지 못한 나의 사고력과 혁명운동에 대한 경험부족, 그리고 시사에 대한 지식결핍과 비판 및 분석능력이 없이 단순한 애국사상의 지배하에 맹목적으로 활동하는 근원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중국에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참가


      당일 오후 우리는 강을 건너와 바로 약 10여명이 참가한 소조회의를 열었다. 오늘 있었던 기쁜 소식을 전한 후, 각 방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연구했다. 결론적으로 연병래와 김병현 두 사람은 노동공인계 및 기타 공상계 인원을 책임지고, 나는 중강진의 각 기관·학교 그리고 공작인원들을 책임지기로 했다.
      활동을 시작한지 2주도 안되어 우리는 일본 헌병대에서 믿을 수 있는 공작인원 12명을 동원하는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작이 노출되어 일본 경찰에 밀고 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연할 수가 없어 바로 활동장소를 옮겼다. 헌병대가 검거하기로 계획한 첫 날, 우리 37명은 압록강을 건너 모아산(帽兒山)에 도착하여 임시로 지정한 비밀기관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또 하나 아주 즐거운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바로 이 곳 봉천성(奉天省) 경내에 현재 두 개의 항일구국단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족회(韓族會)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소위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 중국 동북으로 이주한 각지의 조선인 단체는 이미 1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무릇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어김없이 학교가 있었다. 그 외에 또 하나의 정규적인 군사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주로 매년 농한기에 청년들을 모집하여 단기적인 군사훈련 등을 진행하였는데, 학생들에 대한 단속이 아주 엄격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 발발 후 압록강을 건너 온 조선청년들이다.
      그들은 “군사실력을 탄탄히 쌓아 앞으로 전진하자는 주장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지금 현재 우리 눈앞에 있는 적들은 다름 아닌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실력을 키워 반드시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하며, 10년 전 의병들의 실패경험을 거울로 삼아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들을 우리는 후진파라 불렀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주장이 아주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동료들을 떠나 이 단체에 참가할 용기가 없었다.
      두 번째는 ‘대한독립단’이라는 단체이다. 이 대한독립단은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당시에 조선각지에서 유격전을 펼쳤으나, 의병들의 실력저하로 실패한 이후, 7명으로 다시 조직된 단순한 군사행동의 주요단체였다. 단장 조맹선[趙孟善: 호는 圓石(원석 조맹석)]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대장이다. 그들 전체 간부들의 주장은 몇 백 명의 청년을 흡수하여 단기간 내에 강력한 대오로 훈련무장하여 국내에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임강현(臨江縣) 모아산에 파견되어 비밀리에 국내 청년을 끌어들이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그들을 우리는 급진파라 불렀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새로 온 청년은 약 4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인원을 분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 단체에 참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밤새도록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일본 헌병대에서 탈출한 동지들과 다수의 애국청년들이 모두 대한독립단에 참가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대한독립단에 참가하기로 하고, 즉시 사람을 대한독립단에 파견하여 책임자와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두 단체의 중앙기관이 모두 몇 백리 먼 거리에 있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아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튿날 아침 일찍 대한독립단의 길 안내를 따라 40여 인이 함께 출발했다.
      일찍부터 모아산에서 나와 가장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의제(金義濟)가 우리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자 나는 아주 즐거웠다. 이때부터 나와 김의제·연병래·김동범·김병현 등 다섯 사람은 시시각각 서로 함께 하면서 하나의 소집단이 되어 서로 상의하며 줄곧 같은 주장을 유지했다. 우리는 모아산을 떠나 바로 두조구(頭條溝)에 들어가 오늘내로 반드시 90여리가 되는 인적이 없는 밀림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소위 노야령(老爺嶺)이라는 곳에 늘 토비가 출현하므로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비들을 만난 경험이 없었던 우리 모두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 5시가 되어 임자둔(林子屯)에 거의 도착할 무렵 20여 명의 토비가 총을 지니고 나타나 우리를 포위하였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 각자가 지닌 재물은 빼앗았지만 우리들의 인원이 많고, 또한 조선 사람들이라 상세한 검사를 하기가 불편하였던지 건성으로 검사해 큰 손실은 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재물을 빼앗긴 사람들도 손실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튿날 오후 우리 일행은 팔도강(八道江)시 조선인 농촌마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며칠간 휴식하였다. 이곳 팔도강 일대에 있는 유명한 조선사람 안병운(安丙雲)이 대한독립단의 지단장이라고 하니, 앞으로 그에게 의존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조맹선 단장은 다년간 아주 원만하게 지낸 좋은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안병운에 대한 한족회의 회유가 있었지만, 그와 조맹선의 관계는 줄곧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전언을 통해 우리는 한족회와 대한독립단 사이에서 마찰이 일어나게 된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4. 정식으로 대한독립단에 참가


      며칠간의 긴 노정을 거쳐 우리는 안전하게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대한독립단 중앙기관에 도착하였다. 옆에는 다만 오씨 성을 가진 재무원(財務員)과 이씨 성을 가진 담임서기관 이외에 2~3인이 출입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볼 때 내부가 아주 조용한 것 같았다.
      당일 오후 오 재무가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그는 “조맹선 단장과 중요한 직원들은 얼마 전에 모두 군사훈련에 관한 일 때문에 노령(러시아령)에 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조(조맹선) 단장이 그곳의 일이 아주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으며, 이제 곧 7~8일 후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보냈으니 여러분들 모두 안심하고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했다.
      조맹선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대원들의 질서가 산만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김동범을 대장으로 매일 아침 체조를 하고 군사동작을 연습하는 등 조직훈련을 강화했다. 모두들 조선 구령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에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일반 청년들은 의외로 더 없이 기뻐했다. 며칠 후 조맹선 단장이 돌아왔다. 도착한 날 그는 우리를 만나 몇 마디 따뜻한 인사말을 주고 받은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보통 키에 용모도 아주 엄숙하고 단정한 조맹선 단장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조선 의병대장이라 말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의 인상을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는 그가 아주 봉건적이고 완고하며, 머리도 자르지 않고 수염도 길게 드리운 것이 마치 작고한 광무황제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진보적이지 않고 새 것과 낡은 것에 대한 조절이 어려운 고리타분한 원로 선생이겠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이 돌아온 이후 바로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미 있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까지 합쳐 회의에 참가한 인원은 총 백여 명이 되었다. 회의에서는 우선 ‘대한독립단’을 ‘대한독립단총단’으로, ‘단장’을 ‘총단장’으로 각각 호칭을 바꾸었다. 이어서 직원을 교체하였다. 당시 김의제는 훈련부장에, 연병래는 검사부장에, 그리고 나는 의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세 사람이 총단부에 남게 된 후 처음으로 맡게 된 직책이다. 한편 이번에 새로 온 청년들과 원래 있던 청년들로 한 개 대를 편성하면서 김동범은 대장에 김병현은 부대장에 임명하여, 정치외교를 전적으로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길 안내 겸 도중에 숙식을 책임질 두 사람을 임명하고, 이튿날 아침 모든 대원이 함께 노령(러시아령)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우리와 함께 온 동지들 사이에서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으나 대체로 평안한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국내에서 중국으로 도망한 조선 청년들의 수는 날마다 증가되었다. 매번 이민 숫자는 4~5명 내지 10여명이었다. 당시 국내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이에 대한 일본 군경의 진압수단도 갈수록 잔혹해졌지만, 조선 인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 현재 대한독립단총단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우선 자금조달이고, 그 다음은 국내에 우단(友團)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단의 기층조직이 충실해야 만이 각 방면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고, 또한 총단에서도 우리의 존재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국 각지에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지방마다 이미 한족회에 의해 설립된 기층단체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조직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족회와 발생한 마찰의 원인은 임강팔도강지단(臨江八道江支團)과 관전현지단(寬甸縣支團) 설립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족회 조직범위 내에서 지단발전을 쟁취하자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조선 각지의 학자(전문적으로 중국한문을 연구하는 학자와 공자·맹자를 숭배하거나 완고한 보수지만 배일사상이 상당히 강렬한 학자)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들은 탄탄한 경제실력 뿐만 아니라 사·농·공·상계에서의 위신이 아주 높고 호소력이 아주 크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물며 일부 학자들이 조맹선 단장을 아주 존경한다고 하니,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학자들한테 파견하여 대표인물을 설득하면 이러한 역량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지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한 결과 연병래와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한 김진하(金眞河) 두 사람을 학자들한테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즉시 출발했다. 본 단의 미래에 관계된 아주 중요한 활동이어서 사람들 모두 그들 두 사람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5. 장백현에 다녀온 경과


      일찍 장백현(長白縣)에 설립된 대한독립단은 오랜 지우와의 서면협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정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그곳에 파견하여 대한독립단과 연락을 취하고 그들을 만나 구체적인 모든 정황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총단에서는 이 임무를 나와 김의제 두 사람에게 맡겨 임무완성을 명령했다. 생각과 달리 이 임무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찜통 같은 삼복더위의 날씨에 3천리 길을 왕복으로 오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고행 길이었다. 게다가 지리마저 익숙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 어떠한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전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단체의 문제가 무엇보다 우선인 만큼 이런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은 독립운동가로서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므로, 우리 두 사람은 즉시 정결한 복장을 갈아입고 출발했다. 백여 보 가량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머리를 돌려 돌아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조맹선 단장이었다.
      뭔가 부탁이 있는 줄로 안 나는 몇십 발자국 걸어 조(조맹선) 단장의 앞으로 갔다. 조(조맹선) 단장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손에 권총을 쥐여 주면서, “간첩들의 활동으로 압록강 근처의 상황이 아주 복잡하고 위험하니 특별히 조심하여 자기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탄약이 적으니 좀 기다리라고 말한 후 다시 돌아가 10여 발의 탄약을 갖고 나왔다.
      이토록 자기 부하를 생각하는 그의 자상한 모습은 나에게 아주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잠깐이나마 조(조맹선) 단장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것에 대해 후회의 마음과 더불어 진심으로 미안했다.
      드디어 우리는 모아산 기관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대한독립단과 한족회가 자기 조직의 확장을 위해 서로 청년들을 끌어들이려고 사사건건 대립하며 마찰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우리는 장백산을 향해 출발했다. 원래 이 길은 말들이 달리는 길로 산꼭대기에 있었으며, 지대가 너무 높은 관계로 이곳에서 마실 물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더욱이 다년간 볼 수 없었던 심각한 가뭄이 들어 산위의 모든 것들은 이미 모두 바짝 말라버렸다. 어느 날 점심때 우리 두 사람은 심각한 갈증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한 것이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방 두 개 달린 농가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황급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 마루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우리가 너무 갈증이 나서 물 한잔 마시고 싶어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하자 그 여인은 이런 가뭄에 어디에 물이 있겠냐고 하면서, 저 뒷산 깊은 산골에 물이 있으니 물바가지를 가지고 그곳에 찾아가 마시라고 했다.
      우리는 그녀가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 물 있는 곳을 찾았다. 과연 깊은 골짜기에서 두 치가량 깊이의 고인 물을 찾아냈다. 그러나 속에 몇천 마리의 청개구리가 있고, 물 위에 파란 이끼 같은 것이 떠 있어 아무리 갈증이 나 죽을 지경이라지만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그 농가로 돌아갔다. 계속하여 자리에 누워있는 그 여인을 보고 내가 “어디가 불편해서 방에 이러고 누워 계십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치통 때문에 며칠째 고생하고 있지만 치료해 줄 의사가 없어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있어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하면서 통증을 호소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즉시 “잘 됐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제가 치과의사이니 아주머니의 치통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비상약 중에서 지통주사 한 대를 꺼내 그에게 주사하고 또 한 알의 진통제 약을 주어 당장 복용하도록 했다. 약을 복용한 그녀는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소중하게 깊이 감추었던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꺼내면서 우리더러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곧 점심식사를 준비할 것이니 식사를 하고 떠나라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직도 30여 리를 더 가야 비교적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우리는 식사하고 떠나라는 그녀의 성의를 상냥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 잔의 뜨거운 물은 우리의 생명을 구했으며, 그 물의 힘을 빌어 우리는 피로와 갈증을 멀리한 채 계속하여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드디어 초저녁에 조선인 농민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의 한 농가에서 하루 밤을 투숙했다.
      대한(大旱)의 날씨로 오후에는 겨우 한 발씩 힘들게 길을 걸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몇십 리를 걸어 삼수구(三水溝)에 도착한 우리는 정씨네 집에 묵었다. 정씨는 우리 연락소의 주요인물이며 또한 삼수구가 조선 지방에 가깝기 때문에 몇천 호의 작은 성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연락소를 경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짧은 4일 동안 우리는 적지 않은 공작을 하면서 많은 국내청년과 유지인사들을 접견하여 해외의 소식을 전달하였다. 정말 가슴이 뿌듯했다. 장백현 외에도 아직도 우리는 더 많은 지방을 가야 했다.
      어느 날 나는 정씨에게 “4일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그들의 사상이 모두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만에 하나라도 나쁜 분자가 나타나면 우리의 안전한 행동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낮 시간을 피해 야간에 길을 떠나야 내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던 정씨는 결국 우리의 제안에 동의함과 동시에 소개장을 써서 우리에게 주면서 “이 사람은 나의 동생인데 국내에 있을 땐 교사로 있다가 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한 탄압을 견뎌낼 수 없어 부득이 사직하고 온 가족이 함께 중국에 건너와 농사를 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애국운동단체와 접촉하면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라고 하며, 도중의 간식용으로 건량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이렇게 되어 밤중에 길을 떠난 우리는 너무도 맑은 공기로 인해 심신이 즐거워 전혀 피로한 줄도 몰랐다. 나중에야 우리는 우리가 삼수구 정씨네 집을 떠난 지 약 3시간 만에 변복을 한 일본 헌병이 중국 삼수구를 포위하고 조선인 몇 집을 수색하면서 임강(臨江)에서 온 조선인 두 사람을 찾았지만 어떠한 증거도 발견 못하자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정황에 근거해 볼 때 우리의 행적은 이미 모아산에서부터 노출되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날이 밝아 아침 태양이 지평선에서 서서히 떠오르자 농민들은 각각 자기의 생활터전으로 나갔다. 우리가 작은 성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찰서 문 앞을 지나야 했다. 첫 번째 경찰서 문 앞을 지날 때였다. 정원에 5~6명의 순경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이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세수하는 사람도 있었다. 총을 멘 한 순경이 우리 앞을 가로 막으면서 “당신네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저항하면서 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정말 당신들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느냐? 조선 사람은 정말 나쁘다!”라고 하면서, 먼저 김의제의 몸을 샅샅이 검사했다. 몸에 총을 지닌 김의제가 혹 불행한 일이 생길까 두려워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주 긴장한 내색을 내비치자 그들은 더욱 더 세밀하게 검사를 했다.
      만약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틀림없이 위험한 결과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고의적으로 물건을 풀어 헤친 후 검사차례를 기다리면서 아주 태연하게 “나의 친구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김의제의 몸에는 의심할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차례가 되어 그들로부터 검사받을 때 나의 물건 속에서 의료 책 한 권과 청진기가 발견되었다. 바로 이때 아주 웅장한 체구에 우아한 자태의 제복을 입은 한 경찰관이 이 광경을 지켜보더니 “당신들 무엇 때문에 행인을 괴롭히는가? 정말 말이 아니구나! 내가 보건대 그 사람은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가 마땅히 보호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질책하였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우리는 급히 일어나 그분에게 경례를 드리면서 연속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와 물건을 정리해 주면서 “당신들의 행로를 지연시켜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위험한 장소를 벗어나 계속하여 길을 떠났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한참 동안 그냥 머리를 숙인 채 10여 리 길을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마침내 우리는 정씨 동생네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은 집에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2~3일 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계속하여 걸음을 다그쳐 한 마을에 도착했다. 길옆에는 맑고 푸른 시원한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밥집이 있었다. 마침 4~5명의 조선인들이 모여 전통습관에 따라 즐겁게 환담하며 복날을 쇠고 있었다. 이미 취기가 오른 듯한 그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우리를 반겼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차례로 자기소개를 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찾는 정씨의 동생이었다. 우리가 건넨 편지를 다 읽고 난 그는 아주 반가워하면서 우리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람들을 향해 “이분이 대한독립단의 특파원이며 아주 중요한 특별한 임무가 있어 장백현 삼수구로 간다는 나의 형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우리들에게 어렵게 찾아오셨는데 자신이 부재중이어서 매우 아쉽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아주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 또한 그들이 준비한 밥과 술을 함께 먹으면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중국 순경들에게 검문당한 경과를 얘기했다. 우리의 말을 듣고 난 정씨는 몹시 놀라면서, “이전에는 장백산 일대의 중국 관민 모두가 조선 사람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로 이러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 간첩들이 활동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경계가 한층 강화되었으니 반드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백현성까지 30여 리가 되는데 목적지까지 가려면 도중에 순경이 있는 검문소 두 곳을 경과해야 합니다.”라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잠시 걱정되는 듯한 표정으로 밖에 나갔던 그가 약 10분 정도 되어 다시 들어와 한 시간 후에 어떤 사람이 당신들 두 분을 데리러 올 것이니 안심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진심어린 배려와 열정에 우리는 정말 너무 감사했다. 과연 1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중년남자가 왔다. 그는 안시공조선동몽학교(安市公朝鮮童蒙學校) 교장 겸 교사인 이관웅(李官雄) 선생으로 중국과 조선 인민들 사이에서 성망이 높고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백현 경내에 7~8개의 동몽학교가 있는데 완전히 조선인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위주로 하며, 현 정부에서 경비를 지출하여 조선 어문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금시초문의 새로운 소식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장백현 중·조(중국·조선) 양국 간의 친선을 알 수 있었다.
      석양이 가까워 올 무렵 이관웅은 자신이 타고 온 자전거를 정씨에게 맡겼다. 우리 세 사람은 도보로 길을 가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저녁 무렵에 이관웅의 소속 학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별로 피로한 감을 느끼지 못한 우리는 밤새도록 국내·외의 여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길을 떠나 장백현성에서 약 30여 리 정도 떨어진 목적지까지 채 두 시간도 안 되어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여러 요인들을 만났다. 이 지단의 단장은 성이 채(蔡)가인 거의 60에 가까운 노인인데 아주 웅장한 체격과 성실한 태도를 갖추었다. 말투도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그야말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일찍 국내의병 시기에 조맹선 총단장과 환난을 함께 한 전우였던 그는 조맹선의 편지 한통을 받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 개 지단을 조직했는데 명의에 불과한 것일 뿐 전혀 힘이 없었다.
      내가 건넨 조(조맹선) 총단장의 편지를 받아 본 그는 “조맹선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오랜 전우이다. 그의 애국정신과 건강한 개성, 그리고 전우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성품은 그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이다. 지금 국내의 독립운동은 날이 갈수록 강렬하게 확장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일치단결하면 조국광복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나는 우리 조선 사람들 모두가 충분히 이런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또 “얼마 전 장백현성의 맞은편에 있는 조선인들도 제2차 만세시위를 거행했었다. 그때 장백현에 있는 조선 사람들도 그들을 성원하여 시위운동을 거행함과 동시에 경축사도 보냈다. 이 일은 본 현 당국의 묵인으로 어떠한 장애도 없이 시위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이 지단의 유지유모(有智有謀)한 방침이다.
      지금 이 단의 정식 단원은 총 108명으로 모두들 사상이 믿음직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다. 경비는 각 단원들이 자기의 능력에 따라 자발적으로 납부한 헌금으로 유지한다. 앞으로 자금이 많아지면 반드시 무장역량을 강화하고 그 외 기타 사정에 대해서는 무조건 조(조맹선) 단장의 지시에 복종하고 이에 대해 우리는 추호도 다른 마음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채단장의 말이 진실인 것 같았다).
      이곳에 노령(러시아령) 산길 통행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 무기를 구매하기가 아주 편리하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머문 6일간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기록하는 등 신중하고도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끝으로 지단에서는 단원 두 명을 파견하였다. 우리는 특명을 받은 전권(全權)대표와 함께 총단부로 갔다. 채 단장은 “당신들은 여전히 한적한 길을 선택해야 하며 이동 중에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므로 반드시 배를 타고 곧바로 모아산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가장 좋기는 중국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옷을 구입했다. 나는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보통 중국 복장을 입었다.
      이튿날 아침 6시에 우리가 미리 준비해 놓은 중국 목선에 막 오르려고 하는데 당지 조선인 소학생 4명이 뒤따라와 우리를 환송했다. 김의제는 그들에게 많은 격려의 말을 해주면서, 부단히 노력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장면이 너무도 열렬하고 눈에 띄어 함께 배를 탄 손님들과 선주는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예의주시했다. 채 단장은 직접 선주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배를 조선부두에 정박하지 말 것과 그리고 절대로 일본 사람을 태우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오랜 가뭄으로 수심이 깊지 않아 항해속도는 아주 느렸다. 때론 바람이 일고 파도가 높아 항선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두 가까이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길을 떠난 지 겨우 8일 만에 모아산에 도착했다. 우리가 배에서 내려 상륙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밝은 대낮에 시내로의 진입이 불편했던 우리는 다시 이도구(二道溝)로 방향을 돌려 그곳 모 지인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는 이곳에서 채 2리도 되지 않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우리는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 일본 헌병대보조원 김절로를 만났다. 비록 우리가 중국 복장으로 변복을 했지만 일본 간첩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찍부터 우리의 일행을 의심한 그는 몇십 보 앞으로 다가와 길옆에 서서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속으로부터 이 악한에 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노기충천하는 불길을 억제할 수 없었다. 손을 쓰기로 작심하고 반짝이는 검은 권총을 꺼내들고 앞으로 몇 보 걸으면서 높은 목소리로 “김절로! 너 잘 지내고 있니? 어서 손을 들어!”라고 외쳤다.
      나는 평소 그가 항상 5연발식 총을 갖고 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그의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경무 수첩 이외 다른 물건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갑작스러운 봉변으로 얼굴색이 파래진 그는 “자해(이자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린 서로 원한이 없는 좋은 친구가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나는 “헛소리 집어치워! 너의 말대로 넌 일본의 거민이고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는 조선 독립운동의 대 도리를 모를 리가 없으며, 또한 우리 사이가 철천지 원수사이라는 진리는 더욱 잘 알 것이다. 지난 번 중강진에서 만세시위를 할 때 너는 조선 사람을 마구 욕하고 잔혹하게 구타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네가 너의 오랜 은사와 교장을 잔혹하게 구타한 사실이다. 비록 너의 부모는 조선 사람이지만, 너의 가슴속에 넘쳐나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심보일 뿐이다. 이런 너는 이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가 없는 인간이므로 오늘 나는 이곳에서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니 빨리 뒤로 돌아서라!”라고 명령했다. 갑자기 너무 당황한 그는 혀가 굳어져 버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지 간신히 “그동안 내가 죽을 죄를 많이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줘! 앞으로 꼭 지은 죄를 통감하면서 반드시 고칠 것이다.”라며 애걸복걸했다.
      공교롭게도 이때 마침 먼 곳에서 중국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무기가 없고, 또한 우리 네 사람이 충분히 빈손으로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총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경무 수첩을 보았다. 새로 받은 것이라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없었다. 김절로의 수첩에 나는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을 오늘 그만 살려준다는 글!’을 썼다. 대한독립단 특파원 김우(金宇)는 그에게 수첩을 돌려주면서 즉시 도강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들은 절대 자기의 나쁜 악습을 고치지 못한다며 한바탕 욕하고 때려 주려고 하였다. 그는 마치 그물 안에 든 물고기 같았다. 도강하라는 말이 떨어지자, 그는 수첩에 적은 나의 글을 보지도 않은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황급히 강변 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준비해 놓은 목선 한 척과 뱃사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둘은 함께 강을 건넜다.
      예정된 지역으로 가기가 불편했던 우리는 산마루에 있는 작은 집 정원에 모여 앉아 배에서 먹다 남은 간식을 꺼내놓고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며 아주 통쾌해 했다. 모두들 낮에 있었던 나의 민첩한 동작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태양이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다시 시내로 들어가 어느 중국여관에 숙소를 정한 후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고풍일 진료소를 방문했다. 그는 현재 모아산의 정황에 큰 변화는 없지만 우리가 장백을 떠난 이후 모아산을 경과하여 노야령으로 간 사람이 이미 50여명이 된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국내형세가 매우 긴장함을 알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단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고씨에게서 몇 가지 비상약품을 구한 후, 10시가 넘어 여관에 돌아와 휴식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우리는 여관비를 계산하고 곧바로 출발했다. 우리 아홉 사람은 이 길에서 지난번에 비적을 만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긴장한 표정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건량을 먹으면서 계속하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양이 질 무렵 우리는 안전지대로 판단되는 총 120여 리 정도 되는 임자둔(林子屯)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간단한 전병과 좁쌀죽으로 요기한 후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났다.
      팔도강(八道江)을 지날 때 나와 김의제 두 사람은 본지 지단장 안병운 선생을 방문했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왕래가 계속하여 멈추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총단의 상황은 매우 긍정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날마다 단부의 새로운 발전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안(안병운) 선생은 또 본 지단 범위 내에서 한족회의 기층조직과 마찰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유감이라는 말도 했다. 계속하여 그는 “우리는 모두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구국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으므로 너와 나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일대에 있는 약 7~80호의 조선인들은 모두 몇십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들을 나, 안병운이 영도하고 있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일들은 내가 거의 전부 알고 있다. 얼마 전 몇몇 사람들이 마을의 각 집을 찾아다니며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강박적으로 한족회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한족회가 나의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단은 나와 조(조맹선) 단장의 오랜 친분관계로 설립된 단체인데다 또한 평소 우리 지단의 응집력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조직의 형식을 개변하는 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은 단부로 돌아가 이런 상세한 정황을 조(조맹선) 단장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안(안병운) 단장의 견해에 찬성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대 도리에 따라 해석하고 단결을 쟁취해야 합니다. 반대로 만약 장기적인 마찰이 지속된다면 우리 항일전선의 역량은 곧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의 적들만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안(안병운) 선생의 열정적인 접대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조선 전통음식인 냉면을 먹었다. 안(안병운) 선생의 집을 떠난 후 우리는 팔도강 시내에 있는 약속 장소인 식당 옆으로 갔다. 그들 일곱 사람도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다. 오후 4시에 우리 일행은 계속하여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무더운 탓에 걸음 속도가 아주 느렸다.
      어느 날 우리는 작은 성시에 도착하였는데, 영춘원(永春圓)이라 불렀다. 이곳은 총단부와 약 20여 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조용한 곳을 찾아 점심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 후 오후 3시쯤 계속하여 길을 걸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길 옆 나무 가지 위와 축대 위에 작은 나무 광주리들이 걸려 있었다. 그 속에는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이 광경을 목격한 나는 너무도 놀라 정말 심장이 멈출 뻔하였다. 일행 중 어떤 사람이 그것은 당일 오전에 자른 머리로서 군중들에게 보이기 위한 토비들의 수작이며 중국 각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므로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잔인한 장면을 보고 너무도 화가 치민 내가 “차라리 총살을 할 것이지 왜 이런 잔인한 형벌을 가하느냐?”며 울분을 토하자 모두들 “그건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며, 그들한테 물어 보아야 왜 그랬는지를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산마루 옆 작은 우물가 옆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과 양말을 벗고 발을 씻었다. 심신이 아주 가볍고 상쾌했다.
      석양이 가까워 올 무렵 우리는 총단부 사무실에 들러 총단장 이하 요원을 만나 장백현에서 온 지단 대표 및 모아산에서 새로 온 동지들을 총단장 이하 요원들에게 인사시켰다. 서로 아주 기뻐했다. 백여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이곳은 그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으며,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단부 발전의 새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나는 그날 보고할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튿날 간부회의에서 우선 장백현 지단의 상세한 모든 정황과 장백현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진행한 활동과 모아산 내의 정황, 그리고 팔도강 지방에서 최근에 일어난 문제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경과보고가 끝난 후 조(조맹선) 단장과 장내에 있던 간부들은 모두 우리들의 성과에 대해 아주 높이 평가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장백산 대표가 다시 이 지단을 설립한 이후의 활동경과를 보고했으며, 회의에서는 장백산의 두 분의 대표를 총단부에 남겨 임용하기로 결의했다.



    6. 학자파가 참가한 이후 총단부의 변화


      총단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는 매일 먼저 온 청년들에 대한 체력검사를 실시하였다. 만약 그 과정에서 사상이 불건전한 자가 나타나면 즉시 개별면담을 통해 문제를 발견했고, 또 일부환자의 병을 진료해 주었다. 때로는 중국인들의 요구에 따라 각 마을을 돌며 왕진도 가고, 또 회의도 참가하느라 휴식할 짬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심정은 오히려 아주 즐거웠다.
      매일 오가는 사람이 7∼8명이 되자 취사원들은 식사준비로 밤낮없이 바빴다. 이들 취사원 중에는 연세가 지긋한 노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과 웃으면서 함께 잘 어울렸으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도 아주 친근하게 접근하고 열정적으로 대해 주었다. 그 노부인은 순수한 애국열정을 지니고 가정을 떠나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춘향 어머니(春香母)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특히 그는 나를 당신의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나의 건강이 염려되어 조맹선 총단장을 찾아가 “이자해가 비록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순 있지만,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무리를 해서는 절대 안되며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의할 정도였다. 조(조맹선) 총단장도 춘향모의 제의를 받아들여 가끔 나를 불러 놓고 얼마간 휴식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사실 나는 별로 피로한 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에 대한 춘향모의 따뜻한 관심에 나도 친부모와 같이 따르고 존중했으며,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몇 년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어느 날 연병래가 아주 어려운 임무를 완성하고 안전하게 돌아왔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흥분하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파 주요인물 총 4명과 20여 명의 청년들은 안전하게 강을 건넜는데 고령의 노인 한 분이 걸음이 너무 느려 매일 50리도 걸을 수 없었다. 현재 그들이 아직도 30여리 밖에 있으니 아마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하게 될 것이며, 나는 이런 정황을 우선 보고한 후 그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기 위해 먼저 왔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헤어진 후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총단부는 즉시 학자파들을 환영하기 위해 방을 정리하였고, 조맹선 단장은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그들을 영접하기로 하였다. 다음 날 오후 우리 전체 인원들은 1리 밖에 나가 그들을 영접하기로 했다. 석양이 질 무렵 그들 일행 30여인이 도보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 박화남[朴華南, 원명 : 長浩(박장호)] 선생은 이미 70이 넘는 고령이었고, 그 외 조국동[趙菊東, 원명 : 秉準(조병준)]·백온당[白溫堂, 원명 : 三圭(백삼규)]도 모두 60에 가까운 노인들이었다.
      연병래의 말에 따르면 이들 ‘학자파’는 경제적인 실력뿐만 아니라 아주 탄탄한 단결력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충효절의(忠孝節義)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었다. 제1차 방문 시, 그들은 비록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으나 우리 총단장에 대해 매우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박화남 선생은 조맹선 선생이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조건 최선을 다할 것을 선언했다고 한다. 불과 며칠간의 노력으로 연락을 통해 이곳에 온 사람들은 도합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차례로 차를 타고 압록강 기밀부두에 왔는데, 모두가 순조롭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오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가 학자파들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은 그들의 적에 대한 적개심이 특별히 강하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그들은 모두 일본인을 일본인이라 호칭하지 않고 왜노(倭奴) 아니면 동이(東夷)라 불렀다. 그러나 그들에게 불만스러운 것은 지나치게 완고한 사상과 새로운 관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 노소는 모두 머리를 자르지 않은 장발이었으며, 그들을 따르는 20여 명의 학생들도 모두 그들의 마음에 든 학생들이었다.
      학자파가 온 이후 총단은 줄곧 회의를 열지 않았다. 조맹선 단장 이하의 주요 인원들만 밤낮으로 박화남 선생이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으나, 회의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6∼7일이 지난 어느 날 오전 총단부에서 “오늘 오후 총재부의 성립의식을 거행한다.”고 선포했다. 무엇 때문에 별도로 또 총재부를 설립하는 것일까? 너무 궁금했는데 그 상세한 정황은 이렇다.
      원래의 계획은 그들이 온 이후 총단장의 직책을 박화남 선생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간의 연구토론 결과 박화남 선생은 국내의 학계에서 성망이 높지만, 조맹선의 위상은 중국과 남·북만 및 노령(러시아령)일대에서 광범위한 호소력이 있으므로 그의 총단장 직위는 절대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별도의 총재부를 설립하여 박화남 선생을 총재로, 백온당과 조국동을 각각 부총재로 임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후 1시에 난생 처음으로 보게 되는 성대한 총재부 성립의식과 정·부총재 취임의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주석대에 오른 총재가 취임의식을 인계 받고, 곧바로 각종 명령의식을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주요 직원들의 취임의식이 진행되었는데, 의식이 진행될 때마다 그들은 매번 허리를 굽히고 깊숙히 머리 숙여 인사하는 예절을 갖추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 양복을 차려입은 나는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는 이러한 인사격식을 차리기가 아주 불편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인 것 같아 아주 우스웠지만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박화남 선생도 의병대장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손오병서(孫吳兵書)에 아주 익숙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많은 내용들을 베껴다가 다시 약간의 내용을 덧붙여 근대의 소견으로 만들어 이런 희극을 연출하는데 누가 이를 믿겠는가?
      오후 3시 반에 성대한 취임의식이 끝났다. 나와 연병래·김의제 등 세 사람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술집에 들어가 몇 가지 안주와 술을 청해 마시면서 속마음을 나누었다. 나는 오늘 연출한 낡은 의식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장래에 총단부 지단 간에 어떤 마찰이 빚어지고 신·구파들 간에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일을 처리할 때 맹목적이지 않고 진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내가 다시 장백현을 다녀온 경과 및 김절로를 만났을 때 강제로 교육해서 돌려보낸 사건을 말하자 연병래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동생이 참 잘했다. 동생은 정말 용기가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나를 칭찬했다. 술집을 떠나 총단부로 돌아 갈 때 단부 입구에서 춘향 어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들을 보고 “자네들이 나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밖에 나가다니 정말 실망이네. 음식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빨리 내 방에 들어가 음식을 먹어야지...”라고 하며 부드럽게 우리를 핀잔했다. 밥상에는 아주 먹음직한 닭고기가 놓여 있었다. 이 닭고기는 원래 총재부에 대접하려고 준비한 것인데 총재부가 삼원포에 가서 조선냉면을 먹고 왔기 때문에 닭고기는 먹지 않았던 것이다.
      박화남 총재가 내일 전체회식을 해야 하니 소고기를 사오라고 명령하여 우리는 사람들을 청년들이 있는 각 지방에 파견하여 회식을 한다고 통지하였다. 그 다음 날 오전 우리는 총단부가 설립된 이래 가장 열기가 넘친 집합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는 우선 총재부에서 파견된 사람의 간단한 연설이 있은 후 바로 회식이 시작되었다. 술과 고기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어 모든 동지들은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이때부터 총재부는 사람을 국내에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잘 쓰여진 위임장과 구국금 영수증 그리고 기타 선전 문건들을 휴대하였다. 동시에 국내에서 이 단에 찾아온 청년들의 수도 끊이질 않아 대한독립단의 명성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학자파가 독립단에 참가한 소식이 알려진 이후부터 국내의 여러 운동조직들은 많은 자신감과 탄력을 받았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본 통치자들이 구 학자계에 대해 어떤 잔혹한 수단을 취할지 모를 일이므로 우리는 특별히 주의해야 했다.



    7. 노령(러시아령) 훈련영에서의 대한독립단의 진상


      사람들이 모두 아령(俄領, 러시아령)에 대해 말하였는데, 나는 노령(러시아령)이란 곳이 어디인지 잘 알지 못했다. 어느 지방을 가리켜 노령(러시아령)이라고 하는 걸까? 러시아 영토 내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일까? 일본인들은 이곳을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연해주라 불렀는데 노령(러시아령)이라는 곳이 다른 곳의 명칭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 사이에서는 ‘아령(러시아령)’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몇 십 년 전에 지리적 관계로 함경도 사람들이 노령(러시아령)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만호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고, 같은 조선 사람끼리 결혼을 하였다. 당시 일반 조선 사람들의 자녀들은 모두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러시아어에 정통했지만 조선어를 잘 몰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법률적으로 병역의무가 있는 조선족 청년들은 군대에 들어갔다. 그 중에는 이미 군사학교를 졸업한 인재들도 있었다. 완전히 조선족으로 편성된 이 두 개 사단은 서부전장에서 소련을 침략한 유럽군에 항거하여 빛나는 전투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그들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 후 또 원(元) 장관이 인솔하는 부대는 하얼빈 부근에 파견되어 동청철로(東淸鐵路)를 보호하였다. 당시는 소련의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모든 제국주의자들이 소련에 대한 포위봉쇄를 감행한 시기였다. 이때 제국주의자들은 러시아로 하여금 몇 개의 괴뢰정부를 만들도록 하였다.
      러시아 모스크바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자에 귀속되어 암묵적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판단할 때 원 장관 본인도 이 러시아 모스크바 정부의 실체를 몰랐고, 더욱이 소련 10월 혁명의 의의는 더욱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단지 머리가 간단한 일개 군인에 불과했다. 비록 그가 조선말은 잘 모르지만 조상혈통의 관계로 쉽게 조선인 활동가와 접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맹선 단장과 기타 2~3명 요인들은 다행히 원 장관과 조선광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마침 3·1운동이 폭발되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원 장관과 협상을 진행하였다. 원 장관은 아주 긍정적으로 “당신들이 만약 충분한 역량이 있어 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나한테 보내 준다면 그 수가 얼마든지 모든 복장과 무기 그리고 훈련까지 철저히 책임질 것이다. 아울러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직접 출마하여 청년들을 거느리고 조선독립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일본군과 싸울 것이다. 끝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할 것은 절대적인 비밀보장이다.”라고 말했다. 노령(러시아령) 훈련영에서의 대한독립단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 예를 들면 조(조맹선) 단장을 비롯한 2~3명 요인들은 모두 간단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시사상식과 소련의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결핍된 관계로 잠시 하얼빈을 떠나 삼원포로 와 다시 옛날 동지들과 모였다. 그 후 대한독립단을 조직하면서부터 그들은 많은 청년들을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평소에도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점차적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 현재의 지위로 발전되었다.
      이 훈련영의 성립과정에서 나타난 내부정황은 누구도 잘 모른다. 조(조맹선)와 원의 협상좌석에 함께 있었던 2~3명 요인들은 하얼빈에 머물면서 직접 원 장관과 연락을 취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당시 정황은 왕복 길 안내를 맡은 사람들이 청년들을 데리고 연락소로 오면, 연락소에서는 다시 청년병영으로 데리고 가는 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왕래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원 장관의 부탁대로 기밀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모집한 인원을 국내외에 파견하여 청년흡수 공작을 시작하게 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병영에 있는 청년들도 2천여 명에 달했다. 물론 당시에는 우리도 몰랐지만 그 2천명 가운데는 일본 측에서 파견한 전문 간첩 혹은 투기불량분자도 있었고, 의지가 약한 형형색색의 분자들도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모든 대한독립단이 허위적으로 독립운동이라는 명의를 빌려 우리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러시아에 팔아넘겨 유력한 병사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곳의 책임자를 먼저 죽인 후, 다음 총단부와 책임자를 찾아가 결단을 내야한다.” 라는 선동적인 요언을 퍼트렸다.
      즉석에서 선동에 동조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가 갈라지면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유혈참극이 발생하였다. 이때 간첩분자들은 신속히 일본 영사관에 달려가 지원을 요구했으며 일본군은 아주 득의양양하게 간섭에 나섰다. 당시 하얼빈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은 여타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군대를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급기야 일본군은 이튿날 아침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원 장관의 병영을 포위하고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이후로 일본군은 다시 러시아 모스크바 괴뢰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이 혼란 과정에서 도망한 대부분 청년들은 하얼빈에서 직접 국외로 돌아갔고, 그 외 적지 않은 사람들은 러시아 방면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총단부로 돌아갔지만 그 수가 백여 명 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 긴급한 전보를 받고 즉시 하얼빈에 사람을 파견하여 사건발생 경위를 조사하였다. 마침 현장에서 탈출한 한 청년이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우리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그 청년의 말에 따르면 이번 혼란과정에서 주요한 책임자 및 정의를 지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살해되었거나 일본군에 납치되었으며,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총체적으로 이번 사건으로 인한 인력 및 경제적 피해는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미치는 정치적 파장 또한 매우 컸다. 이 엄청난 피해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총단부는 즉시 연강(沿江) 일대의 각 연락소에 사람을 파견하여 국내의 청년들을 흡수하는 공작을 잠시 멈추도록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유력한 인원을 하얼빈 및 노령(러시아령)일대에 파견하여 사후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매일 하얼빈을 탈출하여 돌아오는 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만스러운 태도로 “이번에 발생한 처참한 유혈참극은 경험 부족과 방만함에서 비롯된 실패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주요목표가 조국의 완전독립이므로 절대로 일시적인 실패로 인해 침체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더욱 더 분발하여 반드시 지속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전쟁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므로 이번에 적들과 싸운 전투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충분히 잘 활용하면 앞으로 틀림없이 실력이 향상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번 실패의 교훈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이때 우리 독립단과 늘 마찰을 빚었던 한족회의 기관지 신문이 이 사건에 대해 고의적으로 완전히 흑백이 전도된 그야말로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은 허위보도를 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부터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식의 가장 유치한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허위기사에 격분한 청년들은 즉시 이 신문사의 책임자를 찾아가 거세게 항의하고 신문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신문사의 책임자가 즉시 대한독립단에 찾아와 정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였고, 아주 신속하게 당일에 발행된 문제의 문장을 전부 삭제하면서 일단 풍파가 진정되었다.
      밤낮으로 걱정했던 김동범이 무사히 돌아왔다. 유혈참극 당시 그는 선동분자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허리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그 영향으로 행동이 아주 불편하였으나 다행히 조선동포의 집에서 약 2주간 요양을 거쳐 간신히 매일 2~3리 정도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병색이 짙게 드리운 창백한 그의 얼굴을 보아 당시의 처참했던 참상을 느낄 수 있었다. 김의제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오늘 아침 다른 두 명과 함께 연강일대에 파견되었는데,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8. 팔도강에 특파대를 편성


      김동범의 건강은 재빨리 회복되어 어느덧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조(조맹선) 단장은 최근 모아산 기관에서 흡수한 청년 사오십 명을 기초로 무장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외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 세 사람은 거듭되는 토론을 진행하였지만, 무기와 기타 장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우리 세 사람이 총단장에게 의견을 제기하였다. 조맹선 단장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우리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원래 독립단을 성립할 당시의 주요취지는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단기간에 기 백 명을 흡수하여 집중훈련을 시킨 후, 그들을 국내외에 파견하여 당신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또 “우리들의 조직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오늘, 비록 외면상으로는 매우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해 매우 속상했는데 오늘 당신들의 의견을 들으니 정말 기쁘다. 당신들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나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아울러 당신들은 이 계획을 꼭 비밀로 지키고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기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라고 부탁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늘 모든 계획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고, 때로는 조(조맹선) 단장에게 직접 제안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우리는 조(조맹선) 단장이 국내에서 가지고 온 원래의 무기와 몇 년간 준비해 둔 무기를 무송현(撫松縣)의 모처에 숨겨놓았으며, 이 무기로 백여 명 정도는 충분히 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맹선 단장은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의견을 박 총재에게 제기하였다. 박 총재도 이에 흔쾌히 동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즉석에서 현금을 허락해 사람을 임강(臨江)에 파견하여 50여 명 분의 피복과 기타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도록 하였다. 한편 또 연병래를 파견하여 팔도강 지단과 협력하여 50여 명이 훈련기간 중 머물 숙식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구호의무 인원을 훈련시키기로 결정하고 김동범을 정대장으로, 김천두(金天斗)를 부대장에 임명한 후(그들 두 사람은 모두 군사인재) 각각 두 개 그룹으로 나눠 팔도강에서 훈련을 시작하도록 했다. 당시 우리들이 내부적으로 정한 계획은 동절기에 집중적인 훈련 등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돌아오는 봄에 강물이 녹으면 삼림지대로 옮겨 장기거주하면서 충분히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찾아 대대적인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과 또한 일반농민 및 군중들과 관계를 잘 다지는 것이다. 그 외 본단과의 통신방법은 정황에 따라 추후에 별도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김동범과 김천두가 팔도강에서 훈련을 시작한 이후의 전반적인 훈련정황은 아주 좋았다. 늘 보내오는 서면보고가 이를 증명해 주었다.
      음력 2월 중순이 되어 이제 좀 있으면 물이 풀릴 것 같았다. 대장 김동범이 대원 한 명을 데리고 압록강 연안에 가 암흑 속에서 도강할 위치를 찾고 있던 중 그만 조심하지 않아 세 명의 무장간첩에게 체포되었다. 현재까지 그들의 생사존망을 알 길이 없다. 이 불행한 소식을 들은 우리는 너무 마음이 아팠으며, 이 보고를 접한 조(조맹선) 단장도 너무 괴로워 눈물을 흘렸다.
      이때 총단부에서는 즉시 지령을 내려 부대장을 대리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또 안병운 지단장으로부터 ‘지금 이 지단 경내에 거주하는 청년들의 질서가 갑자기 악화되고 있으니 속히 이들을 설득하여 올바르게 인도해 주길 바란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았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조맹선 단장은 나에게 당신이 설득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며 현금과 함께 설득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명령을 받은 나는 즉시 행장을 준비하고 이미 잘 훈련된 의무인원 2명을 데리고 함께 출발했다. 밤낮없이 길을 걸어 이틀도 안 되어 팔도강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지단장 안(안병운) 선생을 방문하여 그에게 정황을 상세히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대는 이곳에서 약 15리 정도 떨어진 흑차구(黑茶溝)에 있었다. 홍통구(紅通溝)를 지날 때 이 지단부의 간부가 소고기와 쌀을 사서 전체 대원들과 함께 회식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곳 흑차구에 있는 10여 호의 조선인들이 개간하는 농지에서는 기껏 그들이 생활할 수 있는 양식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어서 쌀과 고기를 구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간부들이 묵고 있는 지역의 어느 집에 도착하여 김천두 대장을 만나 김동범 대장이 체포된 경위와 최근의 부대정황을 상세히 보고 받았다.
      이튿날 전체부대가 모여 회식을 했다. 그 자리에서 개별적인 담화를 통해 전반적인 정황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지대의 기율이 악화된 주요원인은 김천두의 불량한 작풍으로 인해 군중들로부터 위신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개성이 너무 편협하여 대오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속히 팔도강에 사람을 파견하여 정 대장을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총단부에서 지금 신임 대장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니 곧 별도의 지령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라는 전보를 보내 왔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대원들이 주둔해 있는 곳을 뛰어 다니면서 그들의 어려운 생활에 대해 위로하고 동시에 그들의 애국정신을 적극 격려하면서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적들과 혈전을 전개하고 있는 용사들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아주 위대하고도 간고하므로 반드시 견강한 의지가 있어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더욱이 우리의 승리를 위해서는 긴밀하게 단결해야 충분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중국의 영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재국의 법률을 따르고 복종해야 하며, 더욱이 지방의 치안을 중시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이곳에서 아주 편리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행동에 대한 중국 당국의 깊은 동정과 배려가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며, 또한 몇 십 년 전 우리의 선배들이 여러 방면에서 확고하게 기초를 잘 다져놓은 것과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최상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원칙을 유지해야 합니다.”

      간단한 나의 연설이 끝나자 다수의 사람들은 수긍의 뜻을 나타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게 “우리는 이런 장기적인 은둔생활을 더 이상 참아내기 힘드니 아예 국내로 돌아가 적들과 죽기 살기로 사생결단을 하는 것이 차라리 더 통쾌하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열정에 넘친 그들에게 나는 조만간 꼭 여러분들의 염원이 실현될 수 있도록 약속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했다. 이곳에 온지도 이미 열흘이 지났다. 단 중앙의 소식이 없어 매우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새로 위임된 대장이 총재부에서 파견한 한 명의 경리원과 함께 들어왔다. 이 신임대장 김명준(金明俊)은 원래 황해도 사람인데 15살 때에 의병에 참가하여 유격전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갖고 있으며, 또 지능성과 용감성, 인솔자의 재능 등이 적절하게 겸비된 적임자였다.
      신임대장의 인계의식은 특별히 안병운 단장 이하 각급 간부들만 참가한 가운데서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의식이 끝난 후 김 대장(김명준)은 나에게 조맹선 단장으로부터 상세한 밀령(密令)과 앞으로 국내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지시를 전달받았으며, 지금 압록강의 물이 녹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물이 녹으면 곧 총단장이 직접 무기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 이날 나의 부친이 본국에서 왔다. 원래 부친은 물이 녹기 전에 압록강을 건널 계획이었지만 마무리 못한 일이 남아 있어 일정이 좀 늦어졌다. 며칠 전에 물이 풀리자 바로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하여 부친은 모아산에 있는 고씨네 진료소를 찾아가 나의 소식을 탐문하였다. 고씨로부터 오랫동안 서로 통신연락이 없었다면서 가능하면 팔도강의 안병운 선생댁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3일 동안 걸어서 이곳 안병운 선생의 집에 도착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날 안병운 선생은 집에 없었으나 그의 식구들이 나의 부친임을 알고 아주 열정적으로 반기면서 부친을 모시고 일부러 나를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 부자는 서로 마음속으로만 묵묵히 그 동안의 그리운 정을 나누었다. 그것은 이곳 사람들이 모두 고향과 부모·처자를 떠난 사람들이므로 노골적으로 정감을 드러내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정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일 날 우리는 총단부에 압록강의 물이 녹았다는 정황을 전보로 보고했다. 이날 조회는 신임대장이 직접 진행했는데 그의 긍정적인 언변이 아주 의미심장하여 모두들 흥겨워했다. 마지막으로 우수대원 맹성록(盟成祿)이 전체대원을 대표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며 일치단결하여 어떤 간고한 환경조건 하에서도 원칙을 견지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신성한 조국광복을 위한 사업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맹성록은 비록 중학교 졸업생이었으나, 그의 연설내용은 너무 훌륭했다.



    9. 팔도강 특파대가 국내에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


      절대적인 비밀을 유지하면서 모든 공작을 순조롭게 완성하고 총단장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총단장과 연병래가 지단에 왔다. 나와 김 대장(김명준)은 지부에 찾아가 밤새도록 무기운반에 관한 내용과 도강지점을 선택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그것은 6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도강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행동하기 아주 불편할 뿐만 아니라, 무송에서 여기까지 오는 거리 또한 너무 멀어 안전보장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론과정에서 비록 각자가 서로 다른 의견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우리는 “지금 일본 측에서는 이미 성세호대(聲勢浩大)한 조선 독립군이 모두 봉천성 서북부에 주둔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임강현에서 안동현(安東縣)까지 연안주변의 경비가 아주 심하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임강과 장백현 구간의 경비는 아주 느슨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다. 때문에 우리는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무송(撫松)에 도착하여 전투무장을 한 후, 다시 백리 좌우의 산길을 가로 질러 강 연안에 도착해야 하며 그곳에서 도강지점을 선택한 후 3~4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나무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면 불과 2~3시간 내에 도강공작을 훌륭히 완성할 수 있다.”라는 통일된 의견을 냈다.
      이때 연병래가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서 목선공인으로 있을 때 늘 임강의 바닷길을 다닌 적이 있었다. 때문에 바다 길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을 익숙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렇게 되어 이 임무는 연병래가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했던 두 가지 문제를 다수의 일치한 결론으로 해결하게 되어 너무 기뻤다.
      다음날 우리는 전체대원들의 회식준비를 위하여 양 3마리를 샀다. 회식모임에서 조맹선 총단장은 우선 ‘도강해 국내로 밀고 들어가 정식으로 유격전을 진행한다.’는 위대한 임무를 선포했다. 이때 김명준 대장이 머리를 들고 전체대원들 앞에서 손을 들어 선서하였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다. 이어서 연병래의 연설이 끝난 후 대원들에게 나는 “얼마 전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동지들의 염원을 반드시 실현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실현되었습니다. 아울러 오늘 내가 여러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으므로 여러분들도 나에게 분명히 약속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으로부터 바라는 요구는 다름 아닌 동지들이 꼭 자신의 건강한 신체를 잘 유지하고 더욱더 노력하여 이 위대하고도 어려운 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연설회의를 마친 후, 계속하여 아주 의미가 있는 최후 만찬이 준비되었다. 오늘은 특별히 술도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흥분된 심정으로 성공과 신체건강을 위한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만세! 독립단 총중앙은 계속해 앞으로 전진하자.’를 소리 높이 외치기도 하였다. 장내 분위기는 갑자기 매우 긴장하면서도 아주 엄숙했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초저녁이 되었다. 부대는 김(김명준) 대장의 지휘 하에 대오를 정돈한 후 바로 출발하였다. 모두들 새로운 복장을 하고 있어 아주 정결하고 돋보였다. 사랑스러운 ‘대한독립단 제1지대’의 대오는 정말 모두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대오가 떠난 후 나는 혼자 이곳에 남아 잔여 사무들을 정리했다.
      대오가 떠난 후, 시간적 여유가 있자 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향의 정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 나로 하여금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나의 3칸짜리 집이 백오십 원에 이성하(李聖夏 : 헌병보조원)에게 팔린 사건이었다. 그것도 당시 그가 약속한 시간에 집값을 지불한다는 종이쪽지를 남겼으나 약속을 어기고 집값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에 항의하며 집값을 갚으라는 아버지에게 돈을 이미 당신 아들에게 주었으니 믿지 못하겠으면 아들을 찾아가 확인하면 될 것 아니냐며 생떼를 부렸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이렇게 되어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지은 집을 일본 헌병보조원에 빼앗겼다. 정말 울화가 치미는 분노할 일이지만 “조선 국내에 이보다도 더 기막힌 사건들이 얼마가 많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작은 손해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라고 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20여 일이 지나 안(안병운) 지단장이 파견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임강에 돌아온 안(안병운) 지단장은 조(조맹선) 단장과 연병래를 찾아가 만났다. 대부분 총기를 휴대한 그들은 도중에 조선 농호만 7~8가구가 살고 있는 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총을 가진 청년들은 밤새 총을 닦았고 총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청년들은 총 사용 기본동작을 연습하고 있었으며 도강임무는 시간이 지체되어 약 10여 일이 지난 후 안전하게 완성했다.
      조맹선 단장은 비록 60에 가까운 노인이지만 신체가 아주 건강하며 절대로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아주 훌륭한 생활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광복사업을 위하여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면서 적당한 휴식도 없이 늘 일반 동지들과 함께 숙식하고 동고동락을 한 탓에 최근 1개월간 그의 얼굴은 아주 수척해졌다. 조(조맹선) 단장에게 우리 두 사람이 한동안 이곳에서 요양할 것을 간절히 권했지만 그는 완강히 우리 두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허약한 몸을 다시 추스린 후 곧바로 총단부에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이때 총재부의 박 총재가 인편에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서 그는 “현재 10여 명의 주요한 요인들이 압록강에 도착했는데 아직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들이 임강기관일 것 같으니[조(조맹선) 단장에게] 사전에 안(안병운) 지단장에게 통지하여 새로 온 사람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해 줄 것과 중앙기관에 통보하기 전에 지단에 잠시 투숙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의 편지를 읽고 난 나는 여기에 필경 어떤 문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조(조맹선) 단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이곳에 일주일간 머물기로 결정했다. 나와 연병래는 여전히 흑차구에 있었고 조맹선 단장은 안병운 지단장의 집에 머물렀다. 우리들이 조(조맹선) 단장의 영양식과 약간의 돈을 안(안병운) 지단장에게 전했으나 그는 “당신들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영양공급을 잘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극구 돈을 받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는 긴요하게 처리할 일이 없으면 2~3일에 한 번씩 안(안병운) 지단장의 자택을 찾아가 우리의 총단장을 문안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흑차구 입구에 작은 강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사람을 시켜 고기그물과 낚싯대를 사서 매일 아버지를 따라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다 먹지 못한 물고기는 말려서 건어로 만들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한편 나는 이곳에서 몇 명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 중에는 위장병이 있는 성이 고가인 어린 13살 난 중국 소녀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소녀의 집에서 나의 부친과 우리 두 사람을 식사초대 했다. 음식을 식탁에 마련한 후, 그 소녀는 나의 부친을 양아버지라 부르면서 덥석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또 한 명의 중국 동생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정말 너무 기뻤다. 그들은 비록 편벽한 산골에 사는 농민이지만 일상생활을 보아 썩 가난하지 않은 집이었다. 다음날 나는 안(안병운) 지단장의 집에 다녀올 때 팔도강 거리에서 옷 한 벌을 사서 여동생에게 선물했으며, 그 후 우리 두 집은 서로 더욱 친밀하고 다정하게 왕래했다.



    10. 제2기 학자파가 온 이후


      얼마 전에 박화남 총재가 제2기 학자파가 독립단에 가입한다는 통보를 보내와 이곳에서 우리는 약 20여 일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전덕원(全德元)을 비롯한 학자파 12인이 모아산(帽兒山) 기관을 경과하여 안전하게 이곳에 왔다. 그들은 조선 서북 학자파계의 영수인 전덕원 집단인데, 조맹선 단장과 박화남 계와 서로 의견대립이 있었다. 때문에 이미 먼저 독립단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박(박화남)씨 측의 일행들은 전덕원 일행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덕원과 우리 조(조맹선) 단장은 비록 만나보진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성망이 아주 높았다. 전(전덕원)씨 이하의 모든 사람들은 조(조맹선) 단장에게 깍듯이 머리 숙여 경례를 했다. 아주 완고하고 보수적인 그들은 만약 그 누가 악수를 요청하면 온 얼굴이 빨개지면서 양손에 땀을 흘렸으며, 사교적인 시대의 유행어를 말할 줄 몰랐다.
      그들은 조국의 광복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먼저 ‘충군안국(忠君安國)’에 대해 이야기했고, 경제문제를 말할 때는 ‘생재유도(生財有道)’의 도리를 설명했으며, 단결문제를 말할 때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예의범절에 대해 말하였다. 그들의 완고 정도는 결코 제1기 학자에 못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 12인 중에는 외부인원이 한 명도 없이 완전히 전(전덕원)씨네 형제·조카·사위 등으로 구성된 가족집단이었다. 정말 의심스러운 것은 이 사람들이 과연 전쟁에서 사생결단하면서 싸움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이들 가정은 모두 피난을 온 것 같았다. 전덕원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모든 행동으로 보면 모두가 전형적인 야심가의 모습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인물들로 판단되었다.
      팔도강에 있는 며칠 동안 그들의 돈 씀씀이를 살펴보니 각자가 모두 허리춤에 상당한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온지 5일이 되자 전(전덕원)씨는 아주 단호하게 총단부에 갈 것을 요구하고, 조(조맹선) 단장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기다리라는 박(박화남) 총재의 밀령을 어기고 내일 아침 유하현 삼원포 단 중앙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남아있는 동포들의 각 집을 방문한 후, 양 동생네 집에 찾아가 부친을 잘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들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꼭 노인을 잘 보살펴 드릴 것이니 절대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들 모두가 선량하고 순수한 농민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더욱이 그들이 평소에 우리 집을 아주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없이 편한 마음으로 부친을 떠나 전체행렬을 따라 총단부로 갔다. 이틀이 넘는 긴 행로지만 동행인이 많아 즐겁게 웃으면서 걸으니 우리는 힘들다는 생각이 없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시 총단부 식구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우리를 본 춘향모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자네들이 이곳을 떠난 3개월 동안 늘 보고 싶었고 그리워 죽을 뻔 했네. 이제 1시간이 지나면 곧 밥을 먹을 것이니 자네들은 큰가마 밥을 먹지 말고 우선 빨리 나의 방에 들어가 씻고 좀 휴식하는 것이 좋겠네.”라고 말했다.
      그날 우리 밥상에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절인 채소와 그리고 또 몇 량의 좋은 술도 올라 있었다. 우리는 마치 또 한 번 생일을 맞는 즐거운 기분이었다. 평소 춘향모가 별로 좋지 않은 담배를 피우고 있어 우리는 팔도강에서 길림성 특산담배 두 갑을 사서 한 갑은 부친에게 드리고 나머지 한 갑은 춘향모에게 드렸다. 그녀는 아주 좋아하면서 “자네 부친이 본국에서 오셨다면서 왜 함께 오시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팔도강의 환경조건이 부친에겐 아주 알맞은 훌륭한 조건이므로 우선 잠시 그곳에 거주하시다가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연병래는 팔도강 거리에서 산 옷 한 벌을 춘향모에게 드렸다.
      3개월 전, 이곳에서 급성관절염을 앓고 있던 한 노인이 춘향모의 소개를 통해 나에게서 병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병이 완쾌되었다. 그 후 내가 공적인 일로 팔도강에 가게 되자 그는 늘 춘향모에게 이 선생이 나의 중병을 치료해 주었는데도 아무런 감사의 뜻도 표시하지 못했으니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느냐며 늘 안타깝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오늘 내가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사 제쳐놓고 저녁식사에 나를 초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이 노인은 아들·딸이 있지만 자신이 직접 찾아와 우리 두 사람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요청했다. 춘향모를 통해 나와 연병래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있었던 그는 우리 두 사람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함께 올 것을 암시했다. 초청받은 우리들이 그들의 집에 갔다. 그들은 전형적인 조선식으로 밥과 반찬을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님을 대접하는 예의 또한 빈틈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정말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전덕원(全德元) 일행이 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표면상으로는 누구도 그 어떤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어느 날 전체간부회의에서 새로 온 직원을 발표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덕원과 이웅해(李雄海) 두 사람을 대한독립단 총단의 부총단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웅해 선생은 7~8년 전에 중국에 건너와 우선 한족회에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3·1운동 전후로 한족회와의 의견 충돌이 생겨 서로 화합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한족회를 탈출하여 독립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오늘 부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누가 오늘의 대한독립단의 전도가 이 두 사람에 의해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날 줄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전주 이씨의 족보에 따르면 이씨는 나의 본가이나, 그러나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최근에 전해지고 있는 한족회와 독립단의 통일문제에 대해 누가 제기했는지는 잘 모를 일이나 쌍방의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통일을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양측의 요인들은 비공식적인 연락을 통해 회의를 진행할 구체적인 문제까지 접근해 회의지점과 쌍방의 인수, 주석단 인수, 기타 회의일정 등을 결정하였다. 출석할 정식대표 인수를 한족회와 독립단 각각 50명으로 결정하였고, 기타 참석 인수는 무제한으로 하며, 표결없이 자유발언을 하기로 했다. 나와 연병래는 정식 대표자 중에 속했고, 개회지점은 삼원포 교회예배당으로 정했다.
      첫날 회의에서 양측의 주요한 요인들이 연설했다. 이들은 모두 국내외의 모든 항일단체들이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는 절박성을 열정적으로 강조하면서 우리 전체 조선 인민들이 반드시 일치단결해야만 유력한 투쟁을 전개하여 눈앞의 강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 국내는 물론이고 각당 각파가 서로 단결해야 할 때 입니다. 최근 모지에서는 오동진이 인솔하는 흥사단, 안모가 영도하는 청년단,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소위 연통제, 즉 각도의 독판(督辦), 군의 군감(郡監)과 같은 새롭게 성립된 단체들이 모두 압록강 하류일대의 중국 지방에 있으면서 각자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아주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와 같은 규모가 큰 두 단체가 완전한 통일을 실현하면 그 외의 소조 및 작은 단체는 자연히 해체되게 됩니다. 때문에 나는 우리 모두 하루 빨리 각 단체 간의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이를 완성해 나가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좋은 주장).
      양측의 사람들은 모두 주석대에 올라가 각파와의 통일의 절박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그들의 사상에 비춰볼 때 절대 자기 위주의 야심을 버릴 수 없으므로 자아주의 및 이기주의 노선에 쉽게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회의를 진행한 지도 이미 5일이 지났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현재 조직의 내용을 공개하는 문제와 역대로 내려온 지방조직의 개조문제, 통일적으로 영도하는 문제, 경제통일을 장악하는 문제, 훈련을 강화하고 아동교육을 개선하는 문제 등은 모두 순조롭게 통과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단체의 명의 및 각 부의 인선문제였다.
      끝으로 단체명의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쌍방은 서로 자기단체의 원명을 주장하였다. 한족회는 자신들의 한족회가 이미 1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부 각종 시설이 확실하고 상당한 기초가 있는데 만약 명의가 바뀌면 엄청나게 큰 영향이 초래되기 때문에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 소조회의에서 조맹선 단장은 “두 단체는 진심으로 단결해 반드시 합병해야 하므로 내가 자발적으로 우리 독립단의 명의를 취소하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조(조맹선) 단장의 결단적인 행위에 나는 정말 탄복했다. 그러나 박화남 계와 기타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독립단의 명의를 취소하는 것에 반대했고, 전덕원 계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적극적으로 반대를 주장하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박화남은 조(조맹선) 단장을 질책하면서 “우리가 국내외에서 독립단의 명의를 걸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고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냈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립단의 명의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며 오늘 당신이 이런 결정을 내려 변절해서는 절대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때 조국동[趙菊東 : 원명 秉準(조병준)] 원로 선생이 “나는 독립단의 명의를 취소하겠다는 조원석[조(조맹선) 단장의 아명]의 주장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마땅히 국가 및 민족의 절개와 의지를 제창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국적인 시각으로 과감하게 독립단 명의를 취소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학자가 마음이 열려있는 진보적인 학자구나 라는 판단이 서면서 나는 즉시 그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의미있는 눈빛으로 연병래를 쳐다보았다. 그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같은 생각임을 나타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회의의 성공여부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았다.
      두 번째 회의에서 나는 두 단체의 원래의 명칭을 완전히 취소하고 새로운 명의로 바꾼 후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의견을 제출하며, 이렇게 되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아름다운 범례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병래가 일어나 나의 요구를 찬성하면서 주석단에 표결을 요구했다. 그 결과 3분의 2 이상이 손을 들지 않고 반대하였으며, 조국동·이웅해 등은 손을 들어 찬성했다. 6일간 계속된 회의는 마침내 파열되었고, 그 후 다시 회의를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