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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류인석의 사상과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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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 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머리말

류인석은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의 중심 학파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종장(宗匠)을 이은 대성리학자요, 그 위정척사사상을 실천에 옮긴 의병지도자였다. 1895년을 시작으로 타계하는 1915년까지 국내 중부 및 서북지역을 비롯해 중국·노령(러시아령)을 누비며 일제를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실로 실천적 지성인이라는 표현은 류인석에게 적절하다 하겠다.
류인석은 그의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의병 지도자와 계몽운동 지도자가 모두 참여한 13도의군(1910)·성명회(1910)·권업회(1911)의 단체에서 각각 총재·회장·수총재에 추대되었다. 이는 류인석이 의병운동의 범주를 넘어 민족운동계 전체의 상징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류인석이 활동하던 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 문제를 자주적으로 극복해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신구사상(新舊思想)의 갈등도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사상계의 흐름은 관료층의 개화사상(開化思想), 재야 유림의 위정척사사상, 민중(民衆)의 동학사상(東學思想)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제시한 지도이념은 방략상에 있어서 크게 달랐다. 류인석은 위의 지도 이념 중 위정척사사상 즉 전통지성(傳統知性)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류인석에 대한 연구는 전통지성이 조선시대 말기의 민족과제에 대처하는 과정을 살피는 문제로 귀착되기도 한다.
류인석은 위와 같이 역사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었기에 학계의 관심도 많았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연구 성과도 축적되었다. 그러나 아직 류인석에 대한 전기물 하나 없으니 만족할 만한 연구 수준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간의 연구들은 주로 1896년 전후의 전기의병 활동에 치중되어 있어 류인석의 전 생애 및 그 활동을 역사적인 시각에서 일관되게 정리해 보는 작업이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본서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류인석의 사상과 활동에 접근해 본 것인데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하였다.
첫째,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전통 성리학자의 사상적 변화과정을 보기 위해서이다.
둘째, 류인석이 전기의병을 해산하고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의 그 목적의식 및 활동내용이다. 이는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의 연원 문제와 관련이 있다.
셋째, 중기의병(1904년) 이후 류인석의 의병활동 전략은 어떠하였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류인석이 전기의병의 경험을 어떻게 반성하고 발전시켜 나갔는가의 해답을 구해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서 의병활동의 발전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1908년 연해주에서의 활동내용과 그 의의이다. 이는 의병의 독립군으로의 전환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집필하는 과정에서 선 연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전기의병시기 원주·충주·제천에서의 의병항쟁은 많은 부분을 선 연구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1896년 류인석의 서북 및 중국으로서의 이동과 그 활동, 1900년 귀국한 후의 활동, 중기의병(1904년) 이후 류인석의 행적, 1908년 노령(러시아령)으로의 이동과 그곳에서의 활동 부분은 선 연구가 부족하여 자료를 찾아 많이 보충하였다.
열의를 갖고 공부하여 보았으나 혹 실수로 선열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두렵다. 강호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집필 중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으나 특히 윤병석 선생님과 조동걸 선생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1992년 8월 유한철 근지(謹識)

제1장 가계·출생 및 성장

류인석은 1842년(헌종 8년) 1월 27일(음) 강원도 춘성군(春城郡)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류중곤(柳重坤)과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재신(再新)이고, 후일 승린(承隣)으로 고쳤다가 다시 인석(류인석)으로 고쳤다. 자(字)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시조(始祖)는 고려 첨의시중 류탁(柳濯)인데 공민왕에게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 류탁의 후손 중 특별히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은 없었다.
류인석의 집안은 고조(高祖) 이후[고조부: 류옥, 증조부: 류영갑, 조부: 류곤] 출사(出仕)치 못하였고, 따라서 가정은 빈한하였다.
류인석은 이미 6∼7세 때에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을 싫어하였고, 걸음걸이에 뛰는 법이 없었으며,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단정한 자세를 취하였다.
류인석은 8세 때 『소학(小學)』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 후 14세 때 족숙(族叔)인 류중선(柳重宣)의 양자로 입양한다.
류인석의 양가는 생가에 비해 다소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류인석은 14세부터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한다. 양가의 가문 내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부; 류경(柳璟)…증(贈) 호조참판
증조부; 류영오(柳榮五)…병조참판
조부; 류갑(柳)…통덕랑(通德郞)
부친; 류중선(柳重善)…벼슬 안함

고조부 류경은 호조참판[贈職]을, 증조부 류영오는 병조참판을 지냈으니 류인석이 입양했을 때만 해도 양가는 어느 정도 세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양가의 가풍(家風)은 학문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고조부 류경(柳璟)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류경은 항상 자손들에게 ‘문장(文章)절의(節義)는 진실로 우리 가문의 기구(箕裘)인데 만약 우리 자손 중 정학(正學)에 정진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이 바로 나의 지극히 원하는 바다.’라고 가르쳐 자손들이 학문에 힘쓰도록 격려하였다. 류인석이 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가풍에 크게 영향 받은 것이었다.
양가의 가세(家勢)는 류인석의 증조부 류영오가 대관(臺官)직에 있을 때 권문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유배에 처해진 후 조금씩 기울었다. 류영오는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의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양근(楊根) 잠강(潛江)에 은거하게 된 것이다.
류영오도 그 부친[류경]과 같이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양근에 오자 곧 벽계(碧溪)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갔다. 이 시기에 류인석도 화서(이항로)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가 1855년 3월(음력) 류인석의 나이 14세였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류인석은 당대의 거유(巨儒) 이항로와 사제(師弟)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항로도 류인석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라고 칭찬하였고,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글귀를 써주고 학문에 전념하도록 격려하였다. 류인석은 이후 이항로의 학문을 전수 받음은 물론 이미 화문(華門)에 입문한 종숙(從叔)인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와 그 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단구(丹邱) 이인구(李寅龜), 금천(錦川) 임규직(任圭直), 항와(恒窩) 류중악 등 거유(巨儒)들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류인석은 18세 때 첫 과거를 보고자 하였으나 시험에는 응시도 못하였다. 그 사연이 류인석의 인품을 시사해 주는 재미있는 것이었다. 류인석이 과거시험장에 갔는데 그곳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6살 난 어린 아이가 아사지경에 쓰러져 있어 장차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을 형편에 이르렀다. 류인석은 이를 보고는 과거 보는 것을 중단하고 그 아이를 데려다 보살폈다. 아이가 기운을 차리자 류인석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 아이의 부모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결국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류인석이 과거시험장에까지 갔다가 응시도 못한 이 이야기는 스승 이항로에게까지 알려졌는데 이항로는 그 사연을 듣고 류인석을 극히 칭찬했다고 한다.
류인석의 19세 때의 일화이다. 하루는 이웃집의 소가 류인석의 밭에 들어가 상당량의 벼를 먹어치웠다. 류인석으로서는 크게 화를 낼 일이었으나 류인석은 조용히 소를 끌어내고 선선한 그늘에 매어놓았다. 소 주인은 날이 저물었으나 미안하여 감히 소를 찾으러 오지 못하였다. 그러자 류인석은 가노(家奴)에게 명하여 소에게 여물까지 먹여 주인에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루는 도적이 들어 류인석의 집 마당에 있는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훔쳐 가려 하였다. 류인석은 도적이 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인기척을 하면 도적이 놀라 떨어져 다칠 것을 염려하고 문을 열지 않은 채로 단지 사람이 자지 않고 있는 것만을 알려 도둑으로 하여금 스스로 내려와 무사히 달아나도록 하였다고 한다. 류인석의 관유(寬裕)한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요컨대 류인석이 화서(이항로) 문인으로 입문하는 계기는 그 양가의 고조부 류경과 증조부 류영오의 학문 열의에 영향 받은바 컸다고 하겠다. 이후 류인석은 이항로의 척사사상을 전수받아 척사유림의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제2장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1. 류인석의 학문 계보

조선후기의 성리학계는 크게 이이(李珥)를 계승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이황(李滉)을 계승한 영남학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양대 흐름은 19세기경에는 더욱 세분되는데 다음과 같이 9개 학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화서학파;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 경기·강원·충북 지역
2) 의당학파;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1834~1910), 충북 지역
3) 연재학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충남 지역
4) 간재학파;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전북 지역
5) 노사학파;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전남 지역
(이상은 기호계열임)
6) 한주학파;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5), 경남 서부 지역
7) 정재학파;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 경북 동북 지역
8) 사미헌학파;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 경북 동남 지역
9) 성재학파;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6~1886) 경북·경남 동남 지역
(이상은 영남 계열임)
(금장태,「한말 일제하 한국성리학파의 사상계보와 문헌에 관한 연구」,『한국철학사상의 제문제』,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참고)

류인석은 위 학파 중 화서학파에 속하고 이항로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였다. 류인석의 유학사상사(儒學思想史)에서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그의 스승 이항로의 학문 연원을 살펴보자.
이항로는 경기도 양근 벽계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었고 오직 경학(經學)의 오묘함에 심취되어 주자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연구과정에서 이항로는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임로(任魯, 임성주의 아들)·이우신(李友信)과 더불어 경학(經學)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는 등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이항로는 22세 때부터는 특히 주자학에 심취하여 ‘주자의 학설이 곧 성인(聖人)의 정통을 계승하면서 제가(諸家)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그는『주자대전』을 연구하고 또 송시열의『송자대전(宋子大典)』을 섭렵하면서 송시열이 주희[주자] 이후의 성리학의 정종(正宗)을 이었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이항로가 주희[주자]나 송시열에 심취한 것은 죽촌(竹村) 이우신(李友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이우신의 학문 계보는 다음과 같다.

송시열 - 김창협 - 어유봉
김창흡 - 박필주 - 김용겸
김양행 - (이우신) - (이항로) - 김평묵 ­ 류중교 - 류인석

즉 이항로는 학파로서는 기호학파, 당색은 노론 계열의 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항로의 학맥은 그의 사후(1868)에 김평묵(金平黙)·류중교(柳重敎)에 이어 류인석에게 계승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항로가 타계한 후에 화서학파 내에 작은 분화가 얼어났다. 분화는 1886년 류중교와 김평묵 간의 심설논쟁(心說論爭)에서 비롯되었다. 류중교는 수년 전부터 이항로의 「심설」에 의심을 품어 왔다가 1886년 겨울『시동문제공첩』(示同門諸公帖, 여러 동문에게 보이는 글)을 지어 이항로와는 다른 그의 ‘심설조보론(心說調補論)’을 밝혔던 것이다.
류중교의 ‘심설조보론’이 이항로의「심설」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심(心)은 이(理)와 기(氣) 어느 것으로도 분류될 수 있다고 한 점, 태극(太極)에 주재(主宰)가 있다고 한 점, 명덕주리론(明德主理論) 등은 이항로와 같은 입장이었다. 다만 심(心)을 신명(神明)·명덕(明德)으로 세분하여 볼 때 신명은 형이하(形以下)로 명덕은 형이상(形以上)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류중교는 위와 같은‘심설조보론’을 저술하고는 먼저 김평묵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김평묵은 류중교에 대해 주기론(主氣論)적 입장에서 이항로를 배척했다고 조목을 들어 비판하였다(1887년 l월). 이것이 발단되어 양 문인들 사이에도 학문적 논쟁이 일어났다. 그 논쟁에 참여한 중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류중교 계열; 류인석·류중악(柳重岳, 1843~1909)·이근원(李根元, 1840~1918)·주용규(朱庸奎, 1845~1896)·이소응(李昭應, 1861~1928)·송민영(宋敏榮)·오인영(吳寅泳)·이진응(李晋應, ?~1896)·서상렬(徐相烈, 1854~1896)
*김평묵 계열; 최익현(崔益鉉, 1833~1906)·홍재구(洪在龜)·류기일(柳基一)

위의 인물 중에서 비판이 격렬했던 인물은 김평묵 계열의 홍재구였다. 마침내 류중교의 문인들은 1888년 3월 이근원·이소응·류중악·송민영·김영록 등이 연명(聯名)하여 홍재구에게 고절(告絶)을 경고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류인석도 홍재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류중교의 ‘심설조보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대개 학자가 심(心)과 성(性)을 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심과 성을 잘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헛되이 심과 성만을 논하여 그것이 우리의 심과 성을 다스리는 데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심설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화옹(華翁)의 심법(心法)을 본체로 하였다면 그 심설을 조금 고쳤더라도 화옹(華翁)의 도의(道義)를 전하는 데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고 화서의 심법에 어긋난다면 비록 그 심설을 그대로 따랐더라도 화서의 학규(學規)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윽히 관찰해 보건대 그대(홍재구; 필자 주)의 기질(氣質)·도량(度量)·언행(言行)은 화옹(華翁)의 심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여 집니다. (「덕암선생행장」,『항재집(恒齋集)』권15. 3~4면)

학문 논쟁이 극한 감정 대립으로 변질되자 류중교는 사태수습을 위해 1888년 10월 김평묵을 찾아가「심설정안(心說正案)」8조를 협의하여 정하고 심설논쟁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두 사람의 타협적인 모색에도 불구하고 문인들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결국에는 1892년 류인석을 비롯해 서상렬·유치경(兪致慶)·송민영(宋敏榮)·조종익(趙鍾益) 등 류중교의 문인들은 계속 류중교를 비난한 류기일(柳基一)과 절교를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상이 심설논쟁을 통해 본 화서학파 내의 주요 인물들의 동향이다.
요컨대 류인석은 이항로·김평묵·류중교 3 거유(巨儒) 모두를 스승으로 하여 그 화서학파의 정통을 이었던 것인데 단, 김평묵과의 관계는 이항로·류중교와의 관계에 비교한다면 다소 소원하였다고 하겠다. 후일 화서학파의 의병운동은 주로 류중교·류인석 계열이 중심이 된다.

2.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의 형성과정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이 형성, 완성되기까지는 대략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는 1866년(류인석 25세)의 병인척사운동(丙寅斥邪運動), 둘째 단계는 1876년(류인석 35세)의 병자척사운동(丙子斥邪運動), 셋째 단계는 1881년(류인석 40세)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다.

(1) 병인척사운동(丙寅斥邪運動)과 류인석

병인척사운동은 1866년 조선정부가 불란서(프랑스)와 화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이항로가 앞장서 전개한 상소운동(上疏運動)이다. 1866년 9월(음) 불란서(프랑스)의 무력 침공 위협으로 국내 전역이 동요하고 정부에서는 적절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항로는 사태를 수습하는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지금 국론(國論)이 교(交)·전(戰)양설(兩說)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만 양적(洋敵)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변인(國邊人)의 주장이오, 양적과 화교(和交)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적변인의 설(說)입니다. 전자(前者)를 따르면 나라가 의상지구(衣裳之舊)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후자를 따르면 나라가 금수(禽獸)의 영역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중략)… 전하께서 이제 전수(戰守)의 태도를 취하여 그 뜻을 견정(堅定)하시고 비록 만부(萬夫)가 저요(沮搖)한다 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절름발이라도 원기를 백배(百倍)할 것입니다.[이항로,『화서선생문집』권3,「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所)」]

요컨대 철저한 척화론(斥和論)의 입장이다. 이어 이항로는 주전척화(主戰斥和)의 성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응책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대신(大臣)들을 경신(敬信)하여 체통(體統)을 세울 것.
2) 삼사(三司)의 밖에까지 언로(言路)를 넓힐 것.
3) 장수를 뽑아 무비(武備)를 닦을 것.
4) 사람을 기용할 때는 덕이 있는 사람을 우선할 것.

이항로 척사론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이론을 민중에게까지 적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척화론의 성공적인 완수를 위해 민중의 단결과 참여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8도 내에 각각 인망(人望)있는 사람을 하나씩 뽑아 그 호칭을 소사(召使)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충의(忠義)의 사람들을 수습하여 의려(義旅)를 만들게 한 다음 그 의려를 관군과 함께 서로 응원케 하여 적이 오면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이륜(彛倫)을 밝히어 사교(邪敎)를 종식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될 것이 명확합니다. (이항로, 위의 책)

이상이 1866년 9월~10월간 이항로가 전개한 병인척사운동의 개략이다. 이 척사운동 때 류인석은 25세의 청년이었는데 이항로를 따라 배종(陪從)하였다. 류인석은 스승의 격렬한 척사상소운동을 지켜보면서, 또 척사논리가 현실 정치에 반영되어 가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척사사상을 심화시켜 갔던 것이다.

(2) 병자척사운동(丙子斥邪運動)과 류인석

일본은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운오효사건, 1875)을 일으킨 후, 그것을 빙자하여 우리나라에 무력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개항(開港)을 강요하였다. 정부에서는 그 대응책에 부심하였으나 의견통일이 되지 않아 논란만 거듭되었다. 한편 지방 유생들은 개항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는데, 특히 화서학파내 홍재구(洪在龜)·류인석·최익현이 일본과의 수교에 반대하여 척사운동을 주도해 갔다. 그런데 당시는 이항로가 타계한 이후였으므로 김평묵이 운동을 주도해 갔다.
연명상소문은 김평묵에 의해 작성되었고 그 내용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 일본과 서양은 모두 같은 오랑캐라는 논리)에 근거한 척사론(斥邪論)이 핵심을 이룬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서양의 앞잡이로 이미 서양 사람과 굳게 결합하여 중국을 횡행한지 수년이 되었다.
2) 일본은 서양배를 타고 서양포(砲)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양과 기물을 공용(共用)하고 있다.
3) 만약 일본이 침공할 계획으로 왔다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와 육지로 진격할 것이고 수호(修好)할 계획으로 왔다면 사신(使臣)만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4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이것은 이전의 사행(使行)에는 예(例)가 없던 일이다.
이상이 화서학파 유림들이 전개한 병자척사운동의 대강이다. 이 운동에서 류인석은 한때 연명상소의 소수(疏首)로 추대될 정도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연명상소의 소수는 홍재구로 최종 결정되었지만 그 결정과정에서는 몇 차례의 번복이 있었다. 번복의 발단은 류중교(柳重敎)가 류기일을 소수(疏首)로 정할 것을 제의하였을 때, 김평묵이 그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류중교는 류기일을 소수로 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고 그때 김평묵도 류중교의 의견에 따랐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소유(疏儒)들이 류중교에게 류기일 대신 류인석을 소수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고, 류중교는 미처 김평묵과의 상의없이 류인석을 소수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김평묵 계열의 유생들이 소청(疏廳)에 이르러 류인석이 소수로 된 사실에 반대하고 다시 김평묵 계열의 홍재구를 추대하여 소수로 삼았다. 위와 같이 류기일-류인석-홍재구로 소수가 변경됐던 것은 류중교·류인석을 중심한 계열과 김평묵·홍재구를 중심한 계열의 상호견제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나 어쨌든 류인석이 당시 척사운동에서 중심인물이었던 점은 분명하다.
병자척사운동은 류인석이 처음으로 적극 참여했던 척사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류인석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류인석은 한때 연명상소의 소수로 추대될 만큼 중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0년 전 병인척사운동 때 단순히 이항로를 배종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 병자척사운동을 통해 척사 계열에서의 류인석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던 것이다.

(3)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과 류인석

병자척사상소운동(丙子斥邪上疏運動) 이후 김평묵을 위시한 화서문인(華西門人)들은 정치에의 관여를 배재하였다. 그런데 1880년 겨울 신사유람단을 이끌고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온 김홍집(金弘集)이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저술한『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내에 유포하면서 유림계의 척사논의는 다시 격렬하게 일어났다.『조선책략』은 ‘조선이 제국주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합하여야 한다.’(親中國 結日本 聯美國)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과 서양을 예의도 모르는 금수(禽獸)요, 오랑캐로 취급해 온 유생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고 결국 신사척사운동(1881)이 전개되었다.
김홍집에 대한 성토와 함께 척사논의(斥邪論議)가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영남 지역에서 특히 격렬하였다. 화서학파에서는 병인척사운동 때와는 달리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이는 병자척사운동 이후, 화서학파에서 결정한 ‘자정(自靖)’노선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화서학파는 다른 지역에서의 척사운동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먼저 화서학파에서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의 유림들에게 서신을 보낸 그들의 척사적 주장에 찬성하는 뜻을 전해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 서신으로 인해 김평묵은 유배당하였다.
또 화서학파에서는 경기유소(京畿儒疏)의 척사운동에도 지원하였다. 경기유생들의 상소문 작성과정에 참여하였으며, 가평(加平)·포천(抱川) 등 경기지방 유생들로 하여금 척사운동에 참여토록 독려하기로 하였다.
화서학파에서는 강원지역의 관동연명유소(關東聯名儒疏)에도 지원하였다. 관동에서의 척사운동은 홍재학(洪在鶴)이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홍재학은 김평묵의 문인(門人)이었고 또 김평묵의 사위인 홍재구(洪在龜)의 동생이었으니 관동척사운동과 화서학파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홍재학은 형 홍재구와 함께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유림들을 모았고 원주(原州)의 모임에서 그 소수(疏首)로 추대되어 1881년 4월부터 그 해 윤(閏) 7월까지 60여 일간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이 신사척사운동 때 화서학파에서는 직접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경기·영남·관동에서의 척사운동을 이면에서 지원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미 화서학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 류인석도 신사척사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구조

위정척사론은 류인석 사상의 근간이 된다. 위정척사의 뜻은 ‘올바른 것을 보위(保衛)하고 사악(邪惡)한 것을 배척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옳은 것이란 성리학(性理學) 및 그와 연관되는 모든 문화를 뜻하고, 사악한 것이란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문화를 뜻한다. 즉 위정척사론자들은 성리학 보위를 바로 국가 보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일면 세계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 그에 대항하여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논리를 제시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위정척사사상이 비록 민족 근대화 과정에서 역기능적으로 작용했던 일면이 있더라도 당시로는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사상이었고, 민중의 호응도 개화사상(開化思想)보다 더 많이 받고 있었다. 유림(儒林)들의 의병운동은 바로 이같은 민중의 지원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은 스승 이항로·김평묵·류중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일생을 통해 견지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만년(晩年)에 이르면 그의 사상도 만주 및 노령(러시아령)에서 신문화를 접촉하면서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유림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안동유림(安東儒林)과 홍주유림(洪州儒林)의 일부가 의병운동에서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이 장에서는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을 살피되 전기의병(1894!1896) 전후한 때로 시기를 맞추었다. 이는 류인석이 의병활동에 나서는 그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류인석의 만년기의 사상적 변화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시 상술(詳述)하기로 한다.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은 크게 1) 소중화론(小中華論) 2) 반개화론(反開化論) 3) 화맥불가단론(華脈不可斷論)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1) 소중화론(小中華論〉

소중화론은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송시열의 논리를 류인석이 이항로를 통해 계승한 것이다.
소중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화(華)’와 그에 대립개념인 ‘이(夷)’에 대해 살펴보자. 류인석은 ‘화’와 ‘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화(華)라는 것은 복희(僕羲)·신농(神農)·황제(黃帝)·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 이하 제왕승통(帝王承統)의 대(大)와 공(孔, 공자)·안(顔, 안회)·증(曾, 증자)·사(思, 자사)·맹(孟, 맹자)·주(周, 주돈이)·정(程, 정자)·장(張, 장재)·주자(朱子, 주희) 이하 성현연원(聖賢淵源)의 정(正)과 천서천질(天序天秩)·천명천계(天命天計)·오상삼강(五常三綱)·삼백예의(三百禮儀)·삼천위의(三千威儀)의 실(實)과 예악형정(禮樂刑政)·의관문물(衣冠文物)의 성(盛)과 삼분오전(三墳五典)·사자육경(四子六經)의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중략)… ‘이(夷)’라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금수의 행동을 하며 대개 이것이 화(華)를 어지럽힌다. (「답왕원초성순서(答王原初性淳書)」: (1899. 6),『소의신편』, 90~91면)

류인석에 의하면 ‘화’의 문화란 (1) 복희·신농·황제·요·순·우·탕·문·무 등 역대 현군(賢君)의 큰 정치를 계승하고, (2) 공자·안현·증자·자사·맹자·주돈이·정자·장재·주자 등 성현(聖賢)의 올바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화’문화의 내용은 (1) 오상삼강, (2) 삼백예의, (3) 삼천위의, (4) 예악형정, (5) 의관문물, (6) 삼분오전, (7) 사자육경 등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라는 것은 위와 같은 현군과 성현을 계승하지 않은 모든 것이 해당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화’는 지선지극(至善至極)한 가치를 갖고 있는 개념이고 ‘이’는 그와 반대되는 비속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는 ‘화’의 문화를 파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제 류인석의 ‘소중화론’을 살펴보자. 류인석의 ‘소중화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가) 지리적으로 환경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던 중국이 요·순 이하 3대의 제왕과 공자·맹자·정자·주자의 성현(聖賢)에 힘입어 좋은 문화를 계승하여 훌륭한 중화문화의 맥을 이어 오고 있었다.
(나) 조선도 단군과 기자(箕子)에 의해 일찍이 ‘화문화’의 기틀을 열었고, 그 후 성왕(聖王)과 선정(善政)이 이를 계승해 위로는 치교(治敎)가 밝게 되고 아래로는 풍속이 아름답게 되어 갔다.
(다) 그런데 중화의 맥을 이어 오던 중국은 명(明)나라 때 이적(夷狄, 즉 오랑캐 혹은 미개인의 뜻)인 청(淸)나라에게 멸망한 후 조선은 비록 편소(偏小)하지만 중국으로부터 중화의 맥을 전수해 천하에서 유일하게 당당한 ‘소중화’가 되었다.

요컨대 ‘화’의 문화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계승·발전시켜 왔는데 중국이 멸망함으로 인해 중국에서의 ‘화’문화는 단절되었고, 오직 우리나라만 ‘화’문화를 보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류인석은 조선이 화문화권으로 완성되는 시기를 송시열(宋時烈)과 효종(孝宗)의 시기로 보고 있다.
또한 류인석은 단군과 기자에까지 올라가 조선 ‘화’문화의 연원을 찾는다.

저 단군께서는 우리 동방의 초두(初頭)에 승운(乘運), 계화(啓化)의 神聖(신성)이 되어 만세(萬歲) 소중화의 근기(根基)를 세우셨다. 이를 기반으로 기자(箕子)와 같은 성인이 나와 구주(九疇)의 법을 밝히고, 8조의 가르침을 세웠고, 신라·고려를 거쳐 우리 조선에 이르렀다.
(「고단군문(告檀君文)」,『소의신편』권1, 274면)

즉 ‘화’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완성될 수 있었던 배경을 시조 단군에서 찾고 있으니 이는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높은 자긍심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의 근저에는 강렬한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2) 반개화론(反開化論)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서양 열국과의 통상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개화사상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개화사상(開化思想)은 초기에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시기부터 서양의 침략을 우려하고 그에 대한 배척논리를 이론화했던 척사유생들은 개화의 물결을 망국 사태로까지 인식하였던 것이다. 류인석도 철저하게 반개화론을 주장하였다.
류인석은 서양과 일본을 과거의 어떤 오랑캐보다도 교활한 국가라고 혹독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오랑캐가 지구상에서 유일한 문화국가인 조선을 침범해 오는 것이므로 미증유의 대변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류인석은 이와 같은 변란의 책임을 일본과 개화관료에게 돌리고 있다. 류인석은 그들의 죄악은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다고 비난하면서 국내의 개화파를 일제 침략세력과 동일시함은 물론 심지어 개화파의 죄는 일제보다 더욱 심하다고 까지 언급하였다.

슬프도다. 저 양왜(洋倭)는 이적(夷狄)의 아래인 금수(禽獸)인데 매국(賣國)의 무리들이 다년간 결탁하여 오늘날의 대화(大禍)를 양성해 놓았으니 마침내 우리의 소중화는 절멸(絶滅)되어 소양(小洋)·소왜(小倭)가 되고 말았구나. (「서증이기중조승 홍원옥선표 귀고국(書贈李紀中肇承洪元玉選杓歸故國)」1896. 12),『소의신편』권1, 20면)

당연히 류인석의 개화에 대한 반대 입장은 대단히 강경하였다.

나라가 이국(夷國; 즉 오랑캐)이 되어 존속하느니 차라리 화국(華國; 즉 성리학 국가)의 상태에서 망하는 것이 낫고, 금수가 되어 살아가느니 차라리 인간인 상태에서 죽는 것이 나으리라.
(「답민사인용호서(答閔士人龍鎬書)」,『소의신편』권3, 82면)

이와 같은 반개화 사상, 즉 위정척사사상에 대한 평가는 논자(論者)에 따라 달라질 소지가 많지만 어쨌든 이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3) 화맥불가단론(華脈不可斷論)

‘화맥불가단론’이란 이 지구상에서 화맥은 결코 끊어질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지 계승된다는 이론이다. 류인석이 위정척사론을 견지(堅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 ‘화맥불가단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에는 쉬지 않는 도(道)가 있고 양(陽)은 다해질 수 없는 이치가 있다. 화하(華夏)의 제도가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전해지고 기수(氣數)가 절박해져 폐(廢)하여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우리나라가 이를 계승했으니 이것이 천도(天道)는 멈출 수 없고 양맥(陽脈)은 다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답변덕일석현(答邊德一錫玄)」(1897),『소의신편』권1, 32면)

이 설명은 정자(程子)의 ‘양무가진지리’(陽無可盡之理) 즉 ‘양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논리에 근거한 입론(立論)이다. 류인석은 위와 같은 논리에 근거하여 ‘화맥불가단론’의 이론을 확신하면서 그의 문인사우(門人士友)들에게 화맥 수호에 진력(盡力)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은 ‘화맥불가단론’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 나아가 중국망명생활을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류인석은 조선이 소양·소왜로 전락했다고 판단하고는 홀로라도 화맥을 ‘준보(準保)’할 것을 천명하였다.

만고(萬古)의 화하(華夏) 일맥(一脈)이 끊어진 지금 천신만고(千辛萬苦)로 그 전형(典型)을 준보(準保)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화맥의 래복(來復)함을 기다리는 것이 진실로 나의 마음입니다. 비록 하루를 더하고 말지라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재입요동약정의체(再入遼東約定義諦)」(1898. 4),『소의신편』권3, 76면)

이것은 류인석이 의병운동을 실패하고 두 번째로 중국으로 망명할 때(1898년), 그의 문인 사우들과 맺은 의체(義諦)이다. 비록 조선에서 화맥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이국땅에서나마 단 하루라도 더 화맥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 내용이다. 그러한 결연한 의지는 홀로라도 화맥을 보존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화맥을 계승한 온전한 조선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기인한다. 이같은 이국땅에서의 화맥 회복의지는 국권 회복을 위한 근거지(根據地)를 구상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후일 류인석의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근거지 구상의 정신적 배경은 바로 이 ‘화맥불가단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제3장 전기(前期) 의병운동의 전개

1. 의병봉기의 배경

일반적으로 의병봉기의 기점(起點)은 1894년의 갑오의병(甲午義兵)에서 찾는다. 일제는 1894년 6월 청일전쟁의 도발을 앞두고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하고 친일정권을 세웠다(갑오왜란). 이와 같은 일제의 침략을 응징하기 위해 안동(安東)과 상원(祥原)에서 무장 의병봉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봉기는 한말 의병항쟁의 선구였다.
류인석의 거의는 이보다 약 1년 후인 1895년 12월 24일(음력) 단발령(斷髮令) 공포(1895년 11월 15일: 음력) 이후 일어났다. 봉기시기로 보면 류인석이 의병운동에 나서는 직접적인 계기는 단발령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병 봉기의 조짐은 이미 1년 전부터 조성되어 있었다. 앞장에서 살펴본 위정척사운동도 언제고 무장봉기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 후 갑오왜란의 사건에서 류인석은 일제의 침략에 강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왔던 것이다. 즉 류인석이 의병봉기에 나서는 계기는 (1)갑오왜란(1894)에서 마련되었고 그 후 (2)변복령(變服令), (3)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4)단발령(斷髮令) 등 일련의 사태들이 류인석이 의병봉기에 나서게 되는 복합적 배경이 된다.

(1) 갑오왜란(甲午倭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개화파 인물은 물론, 친일(親日)성향의 인사까지 모두 정계에서 거세(去勢)되고 일제의 영향력도 감소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정책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갑오왜란은 그러한 침략야욕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4월 27일(음)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다급한 나머지 4월 28일(음) 청국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5월 5일~7일 간 군사 2,100여 명이 아산만을 통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자 일본도 5월 9일 우리나라의 군사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약 6,000여 명의 군사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의 이같은 파병은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일제는 불법 주둔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정부에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이는 1860년대 초부터 일본 정계에서 일어났던 정한론(征韓論)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었다.
이 시기 정부와 동학농민군은 늦게나마 외세 개입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내정개혁안을 받아들였고,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침략야욕은 집요하였다. 일제는 1894년 6월 21일 군사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침공하고, 그들의 내정간섭에 장애가 되는 관료들을 몰아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리고는 친일적인 성향의 인물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갑오왜란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태는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전주화약 이후 정부와의 교전을 중단했던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10일경부터 이전의 반봉건(反封建) 투쟁을 반일제(反日帝) 투쟁으로 전환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무장봉기에 나섰다. 이것이 동학농민군의 제2차 농민전쟁이다.
한편 지방 유림들도 갑오왜란에 대해 반발의 움직임을 보였다. 류인석은 갑오왜란에 대하여 ‘마침내 6월 20일 밤을 기하여 우리 3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라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일부지역에서는 일제를 응징하기 위한 무장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나섰다. 안동(安東)의 서상철(徐相轍), 상원(祥原)의 김원교(金元喬), 양평(楊平)의 안승우(安承禹), 정산(定山)의 안창식(安昌植) 등이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이중 안동과 상원에서는 실제로 의병항쟁이 있었고, 양평과 정산의 경우는 병사모집이 어려워 별 성과 없이 지지부진 하다가 1896년 초에 이르러서야 봉기하였다.
류인석은 갑오왜란에 대해 분개하고 민족의 장래와 관련하여 깊이 우려하기도 하였으나 직접 의병활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류인석은 후일 전기 의병활동에 나서게 될 때 갑오왜란을 봉기의 첫 명분으로 꼽았다.

(2) 변복령(變服令)

갑오왜란에 이어 1894년 6월 25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7월 15일에는 신관제(新官制)에 의한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어서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그 개혁에는 근대적 요소들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급작스런 변화는 보수적인 유림들의 심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유림들이 특히 완고하게 반발한 항목은 관리 복제(服制)의 개혁이었다. 복제는 1894년 6월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이 변경되어 갔다.
1) 1894년 6월; 반령착수(盤領窄袖; 둥근 깃에 좁은 소매)로 개정.
2) 1894년 12월; 대례복(大禮服)을 흑단령으로, 통상예복(通常禮服)을 흑색주의(黑色周衣)로 개정.
3) 1895년 3월; 관민(官民) 모두 흑색과 주의(周衣)를 입을 수 있도록 허가.
위와 같은 개정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첫째, 의례상으로 관(官)과 민(民)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다. 즉 변복령은 경색된 신분제도를 해소시킨다는 의미, 또 형식적인 것을 간소화 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요소도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는 유교적인 형식절차와 신분 차별의식에 젖어 있던 유림들에게는 대단히 못마땅하였다. 류인석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오호라 애통하도다. 4천 년 화하정맥(華夏正脈)과 2천 년 공맹대도(孔孟大道)와 조선 5백 년 예악전형(禮樂典型)과 가가(家家) 수십세(數十歲)의 관상법도(冠裳法度)가 여기서 단절되었도다. 이제 글 읽는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중략)… 이것은 (즉 변복은; 필자 주) 천지(天地)·성현(聖賢)·선왕(先王)·부조(父祖)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무엇하리오.(「을미훼복시입언(乙未毁服時立言)」,『소의신편』권4, 132면)

유교적 풍속과 윤리의식에 철저했던 보수 유림들은 변복령의 반포를 오랑캐 문화의 침투로 인식하여 심각한 문화적 위기의식에까지 이르게 된다. 유림들에 있어 복제의 변경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전통문화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흑색은 전통 유교에서는 음사(淫邪)한 색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에 흑색이 의복의 색으로 결정되자 유생들은 더욱 강하게 반발한 것이었다.

(3) 을미사변(乙未事變)

을미사변이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제의 사주(使嗾)를 받은 일본인 낭인(浪人)들에 의해 시해(弑害)된 사건을 말한다.
일제는 청일전쟁(1894)을 우세하게 이끌어 가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조선에 대한 발언권도 높아가자 개화를 구실로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조선은 이러한 일제의 침략상황에 반발하여 점차 일본의 영향력을 물리칠 계산 아래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이른바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 나가려 한 것이었다. 이 친로 정책은 ‘삼국간섭’사건 이후, 러시아의 국제적 위치가 높아지면서 더 구체화하였다. 친로정책은 명성황후에 의해 주도되어 나갔는데 일제는 명성왕후의 친로정책이 그들의 침략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자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소문이 백성들에게 전해졌을 때 바로 의병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는 명성황후에 대한 유림들의 정치적 입장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일면 임오군란(1882) 때도 명성황후가 사망했다는 소문 끝에 다시 살아왔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명성황후의 죽음을 반신반의하였다. 그런데 정부에서 명성황후를 폐위조치하면서 명성황후의 죽음이 사실로 확인되고, 또 그 만행이 일본군의 소행이었음이 알려지자 뒤늦게 의병봉기가 시작되었다.
1895년 10월 10일 서울에 창의소 고시문(倡義所告示文)이 나붙었고 10월 하순 지방에도 ‘복수토적(復讐討賊)의 의거(義擧)가 없는가’라는 고시문이 돌았다. 원주에서는 유림들이 모여 거의(擧義)의 뜻을 다졌고, 구월산에서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죄상을 성토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안동에서도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을 격퇴하여야 한다는 격문이 게시되었다. 특히 회덕의 문석봉(文錫鳳), 평북 강계·초산의 김이언(金利彦)·김구(金九) 의병부대는 실제 의병항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의 일간지『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은 다음과 같이 의병봉기를 보도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 이전 의병봉기 보도기사」
보도일자 보 도 용
1895. 11. 13
1895. 11. 22
1895. 12. 20
1895. 12. 25
1895. 12. 27 황주(黃州)에 화적(火賊) 봉기하다. 그 수는 200여 명에 달한다
강화도 및 경기도 광주에 적의 봉기가 횡행한다.
충청도의 각지에 적(賊)이 일어나 그 창궐 세력이 극렬함.
전라도 각지에 근래 흉도(兇徒) 횡행.
충주부(忠州府)내 충주·이천·음죽·제천·괴산·진천 등 각 군에서 적의 무리 횡행.


(*자료;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 일자는 양력.)

이상과 같이 을미사변은 의병봉기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였다. 단발령(1895. 11. 15; 음) 이후 일어나는 의병들도 의병봉기의 명분으로 을미사변을 반드시 거론하고 있다.

(4) 단발령(斷髮令)

단발령은 1895년 11월 15일(음) 공포되었다. 당시 정부에서 내세운 단발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신체·머리털·살갗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유교윤리가 의식 깊이 뿌리 박혀 있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생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에서는 단발령을 강행하였고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다.
단발령은 국민들의 문화충격을 계산하지 못한 무리한 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다. 관리들도 단발령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가 사직상소를 올리고 단발령의 철회를 건의하였고,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도 단발령 반대 상소를 올렸다.
단발령에 대한 반대는 유생들이 가장 거셌다. 류인석도 다음과 같이 반발하였다.

천지(天地)간의 화이강상(華夷綱常)과 예의대도(禮儀大道)는 반드시 인신(人身)에 있다. 이 몸이 화인(華人)되고 금수(禽獸)됨은 상투와 원몌[圓袂]에 달려있다. 이 상투와 원몌의 있고 없음에 따라 화이인수(華夷人獸)의 구분과 강상대도(綱常大道)의 보전 여부가 달려 있다. …(중략) … 머리는 만 번이라도 잘릴지언정 상투는 한 번도 잘릴 수 없고 몸은 만 번이라도 찢겨질지언정 원몌는 한 번도 찢길 수 없다.(「증언김중일환국(贈言金仲一還國)」,『소의신편』권3, 117면)

단발령은 그간 갑오왜란·변복령·을미사변 등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의병 봉기를 계획했거나 혹 주저하고 있던 유림들에게 의병봉기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류인석이 의병활동에 나서는 것도 바로 이 단발령 이후였지만 민용호(閔龍鎬)의 강릉 의진, 김도현(金道鉉)의 영양 의진(英陽義陣), 김도화(金道和)의 안동 의진, 허위(許蔿)의 금산(金山) 의진, 이강년(李康秊)의 문경(聞慶) 의진, 노응규(盧應奎)의 진주(晋州) 의진, 김하락(金河洛)의 이천(利川) 의진 등 대규모 의병들이 단발령 후 일어났다. 단발령 이전 유림들의 의병봉기 계획이 지지부진했던 원인은 병사의 모집이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단발령 후 이에 반대하는 백성들이 적극 유생들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에 의병활동의 활발한 전개가 가능해졌다.

2. 류인석의 기의(起義) 논리

유학적 사고에 따르면 재야유생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논어』태백(泰伯)장의 ‘그 지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사(政事)를 도모하지 아니한다.’라는 논리에서 근거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것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할 경우 비난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화서학파도 병인척사운동·병자척사운동 때 그들의 척사론을 적극적으로 폈으나 그로 인해 관료들에게는 물론 재야유생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화서학파는 신사척사운동 때는 의도적으로 자숙의 태도를 견지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유학적인 규범이 위와 같았으므로 류인석도 일종의 정치활동으로도 볼 수 있는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제시하여야 했다. 이제 류인석이 설명하는 의병봉기의 명분을 살펴보자.

(1)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

갑오왜란이 얼어나고 갑오개혁(1894)이 추진될 때만 해도 류인석은 나라의 앞날을 우려하면서도 어떤 구체적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진 후 류인석은 1895년 윤 5월 2일(양력 6월 4일) 제천 장담(長潭)에서 문인사우(門人士友) 수십 명을 소집하고 그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 후 1895년 11월 15일(음) 류인석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장담에서 문인사우들과 함께 그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하는데 그때 세 가지 방법이 논의되었다. 이를 ‘처변삼사론’이라고 한다.
(ㄱ)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함.
(ㄴ) 거지수구(去之守舊); 국외에서 화맥(華脈)의 대의(大義)를 홀로라도 지킴.
(ㄷ) 자정치명(自靖致命); 스스로 목숨을 끊음.
‘처변삼사론’이 제시되기는 하였으나 류인석과 그 문인사우들의 선택은 일치되지 않았다. 류인석은 주용규(朱庸奎)·박정수(朴貞洙)·이정규(李正奎) 등 몇몇 제자들과 함께 중국(요동; 遼東)으로 망명하여 수의(守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필희(李弼熙)·안승우(安承禹)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몰아낼 것을 주장했고, 양두환(梁斗煥) 외 몇 사람은 목숨을 끊을 것을 주장했다.
류인석은 세 방법 중에서 망명[去之守舊]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자정(自靖)하는 일은 사도를 위해 순절(殉節)하는 것이므로 마침이 선(善)해 결정정정(潔淨貞精)하여 마음에 지극히 편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를 따르면 사문(斯文)의 여맥(餘脈)이 이 세상에서 그림자조차 끊어질 것이니 원통함이 막심하다.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위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 인류를 보호하며 중간으로는 우리의 도(道)를 보호하는 것이라 마음에 최고로 통쾌하지만 큰 역량이 없으면 공(功)을 기대하기가 어렵다(「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 1896. 11. 7『소의신편』권1, 24면)

위에서 보면 류인석은 세 방법 중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대처할 수 있는 군사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의병봉기 계획은 포기한다고 하였다. 류인석은 목숨을 끊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끊을 경우 화맥을 계승해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류인석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류인석의 대단히 현실적인 태도를 보게 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류인석이 의병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계속 보인다.
위와 같이 류인석은 단발령 직후에는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지만 그의 문인(門人)들이 의병봉기에 나서 관군 및 일본군과 항쟁하는 것을 목도하고 또 문인들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는 그의 망명계획을 바꾸어 의병활동에 나서게 된다.

(2) 의병운동의 당위론(當爲論)

앞 절에서 본 바와 같이 류인석은 대변란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 중에서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방법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고 최종적으로 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류인석은 재야유생의 신분으로서도 의병을 일으켜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를 공자의『춘추(春秋)』와 주자의『주자대전(朱子大典)』에서 찾았다.

춘추에 의하건대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고 난적을 다스릴 때에는 먼저 그 당여(黨與)들을 다스려야 한다.(「입강지초산 진정대죄소략(入疆至楚山陳情待罪疏略)」,『소의신편』권2, 47면)

(주자에 의하면; 필자 주) 일이 국가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면 비록 위포(韋布)의 입장이라도 또한 가히 관여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하물며 도(道)가 망함에 있어서랴.(「답조석일구원서(答趙錫一龜元書)」,『소의신편』권2, 47면)

즉 재야의 백성들도 나라를 어지럽히는 관료와 도적의 무리들에 대해 응징을 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춘추』의 논리는 류인석 뿐 아니라 의병봉기에 나서는 유생들이 하나같이 거론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논리에 반대하는 유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류인석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의병봉기에 반대하는 유생들을 비판하였다.

도적이 촌락을 침범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음이 극에 달했는데 일부 사람은 도망가고, 일부 사람은 편안히 앉아서 상처를 입고, 일부 사람은 무리를 모아 한바탕 혈전을 벌여 큰 도적을 물리쳤다. 이때 도망갔던 무리와 편안히 앉아 있던 무리들이 도적을 물리친 무리들을 상 주기는커녕 오히려 ‘재물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할지언정 어찌 추악한 도적들과 더불어 서로 싸워 체모를 실추시키겠느냐’ 하였고, 이에 온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여 같이 나무랐다면 어찌 될 것인가? 도적을 몰아낸 자들의 의기는 소침될 것이요, 도적이 그 내막을 안다면 거침없이 재침해 올 것이니 이러한 상황은 오늘의 형세에 비유될 수 있다. (「여이문중근원별지(與李文仲根元別紙」『소의신편』권3, 94면)
의병운동에 반대하고 참여치 않는 유생들을 비겁한 자에 비유하는 극단적인 비판이다. 의병봉기에 대한 류인석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 의병활동의 전개

(1) 호좌창 의진(湖左倡義陣)의 성립

전술한 바와 같이 류인석이 의병운동에 나서는 직접적인 계기는 단발령에서 마련되었다. 그런데 류인석은 단발령 및 그 이전의 일련의 사태를 대변란으로 인식하면서도 단발령 직후까지만 해도 의병봉기에 반대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류인석의 제자 중 이필희(李弼熙)·안승우(安承禹)·이범직(李範稷) 등 소장파들은 류인석 망명계획에도 불구하고 일제 침략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의병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이들은 1896년 1월 12일 지평(砥平)의 김백선(金伯善)과 그 포군의 지원을 받아 원주군 안창리에서 의병의 깃발을 올렸다. 이는 단발령 공포 후 13일 만이었다. 이들은 다시 1896년 1월 17일 약 80리의 길을 행군하여 제천(堤川)으로 이동하여 의병의 기세를 높혀 갔다. 이때 아래와 같이 의병지도부가 조직되었다. 이필희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으므로 이 시기 의병진영을 이필희 의진(義陣)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필희 의진(義陣)의 지도부 구성]
대장; 이필희
중군(中軍); 이춘영(李春永)
선봉(先鋒); 김백선
군사(軍師); 서상렬(徐相烈)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 안승우
서기(書記); 원용정(元容正)
참모(參謀); 이필근(李弼根)

지도부 편제 후 이필희 의병진은 1월 19일 활동하기 유리한 단양으로 이동하였고, 22일에는 관군과 첫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후 관군의 병력이 증강되고 공격도 맹렬해지자 의병진은 공격을 피하여 죽령(竹嶺)을 넘어 응암점(鷹巖店)·풍기(豊基)·영춘(永春)을 지나 영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즈음 류인석은 주천(酒泉)·방림(芳林)을 경유, 영월에 들어가 제자들을 만나 중국으로의 망명계획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때 류인석의 제자들은 스승의 망명길을 극구 만류하고 함께 의병활동에 나설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에 류인석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내가 친상(親喪)을 당한 지 몇 날이 안되었으므로 여기에 잠시 머무는 것도 마음에 송구한데 하물며 상복(喪服)을 벗고 종군하여 인륜(人倫)에 거듭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평소에 경서(經書)를 강론할 때에는 내가 다소라도 앞선 선배라 하여 감히 제군의 추존을 받았지만 군사(軍事)의 일에 이르러서야 털끝만큼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실로 제군보다도 낫지 못하면서 다만 더할 수 없는 죄를 보탤 따름일세.(이정규,「종의록(從義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22면)

류인석은 1) 모친의 친상 2) 병사 지휘 능력의 부족을 들어 의병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홀로라도 화맥을 계승하고 후일을 기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눈물로써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만일 의병을 중지하면 머리 깎는 화가 더욱 빨라질 것이고, 일 또한 막히어 선생님께서 요동으로 가시려 해도 가실 수 없을 것이며, 조용히 물러나 계신다 해도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또 선생님께서 삼년상을 온전히 마치려 하신다 해도 그것도 그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의 경중(輕重)을 헤아려 본다면 선왕(先王)의 대도(大道)가 망하는 것과 상주(喪主)노릇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하겠습니까.(이정규,「종의록」,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22면)

요컨대 친상을 치루는 것보다 국가의 운명을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라는 논리이다. 류인석은 3차례에 걸쳐 사양했으나 유생들이 거듭 권유하자 마침내 류인석도 망명계획을 단념하고 영월성 문루(門樓)에 복수보형(復讐保型)의 큰 깃발을 앞세우고 대장소(大將所)를 설치한 후 엄숙한 군례를 행하고 의병대장의 직에 취임하여 ‘호좌창 의진(湖左倡 義陣)’을 출범시켰다. 이때가 1896년 2월 3일(음: 1895년 12월 20일)이었다.
류인석은 먼저 격문「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과「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전국에 발송하였다.「격고팔도열읍」의 주요 내용을 보자.

[8도의 여러 고을에 알림(檄告八道列邑)]
아! 우리 8도 동포들이여. 망해가는 이 나라를 내버려 두시렵니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오백 년 유민(遺民)이 아닌 사람이 없거늘 내 나라, 내 집을 위해 어찌 한 두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단 말입니까.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것이 과연 운(運)입니까, 명(命)입니까.(중략)
무릇 우리 각 도 충의의 인사들은 모두가 임금의 배양을 받은 몸이니 환난을 회피하기란 죽음보다 더 괴로우며, 멸망을 앉아서 기다리느니 싸워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땅은 비록 만분의 일 밖에 되지 않지만 사람은 백배의 기운을 낼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으니 더욱 신담(薪膽)의 생각이 간절하고 때는 자못 위태하여 어육(魚肉)의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랑캐로 변한 놈이 어찌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공(公)으로 보나 사(私)로 보나 죽음으로 지표를 삼을 따름입니다.(중략)
이에 감히 먼저 의병을 일으켜 이 뜻을 세상에 포고하노니 위로 공경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가 애통하고 절박한 뜻이 없겠습니까. 이야말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각자 짚자리에 잠자고, 창을 베개 삼아 또는 끓는 물속이나 불속이라도 뛰어 들어 온 누리가 안정되게 하여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 나라에 대한 공로이겠습니까. 실로 만세에 공훈이 전해질 것입니다.(이정규 편,「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86~88면)

류인석은 위의 격문을 전국 8도에 발송하였는데, 즉 의병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류인석 의병활동의 전략 중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국적 봉기를 단일 체계로 조직화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2) 호좌창 의진의 조직

1896년 2월 3일(양) 호좌창 의진(湖左倡義陣)이 출범할 때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호좌창 의진 조직](초기)
창의대장; 류인석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얀승우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 조련장(操鍊將); 안성해(安成海)
참모; 박주순(朴冑淳) 사객(司客);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이조승(李肇承)·홍선표(洪選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

이제 호좌창 의진의 조직구성의 특징을 살펴보자. 호좌창 의진 참여자의 신분구성은 양반유생과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개 지휘부는 유생들이 맡고 평민들은 병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유생들은 거의 화서학파 계열, 특히 류중교와 류인석 계열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다. 류인석·류중교 계열의 인물 중에서도 안승우·서상렬·신지수·이필희·이범직·주용규 등이 적극적인 의병 주창자들로서 호좌창 의진의 활동은 이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병사 조직은 지평(砥平)의 민병(民兵) 400여 명이 주축을 이루었고 지평감역(砥平監役) 맹영재의 군리(軍吏) 김백선이 이끄는 포군 수백 명과 이문흠(李文欽)의 단양 포수 수백 명을 비롯하여 각지의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필희 의진 때와 비교해서는 대장 직책에 류인석이 추대된 점, 조직이 좀 더 구체화하고 간부의 인원이 늘어난 점을 들 수 있는데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제 참여 인물들을 살펴보자.
이춘영(李春永; 1869~1896. 2. 26.)은 호는 괴은(槐隱),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지평(砥平)출신으로 류중교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류중교의 척사사상에 심취하여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같은 고향의 연장자(年長者)인 안승우와 더불어 수시로 일제의 침략에 맞설 방책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단발령 공포 후에 안승우 함께 원주 안창리(安倉里)에서 의병의 기치를 올렸는데, 이때 이춘영은 김백선과 그의 부하 포군 400여 명을 의병봉기에 끌어 들여 원주봉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춘영은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호좌창 의진 성립의 단서를 연 주요 인물이다.
안승우(1865~1896)는 호는 하사(下沙),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지평 출신으로 이항로의 문인 류중교와 금계(金溪) 이근원(李根元)의 제자이다. 류중교로부터 화이론을 전수받고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성리학에 소양이 깊고 또 반일의식도 강하였다.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상도를 경유, 서울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이를 저지해 보고자 했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의 강경한 반일(反日) 성향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처변삼사 논의 때,

지팡이 끝에 기를 달고 적을 꾸짖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며, 그것은 또한 후세에 대의를 펼 수도 있는 것이다.(이정규,「종의록(從義錄)」, 앞책, 17면)

라고 거의(擧義)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안승우는 단발령 공포 후 이춘영과 함께 지평 의진(砥平 義陣)을 결성하여 호좌창 의진의 단서를 연 인물이다.
호좌창 의진의 의병장 중에는 평민출신이 한 사람 있었는데 김백선(金伯善)이 그 사람이다. 김백선(?~1896. 3. 27)은 경기도 지평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1894) 때 동학군 탄압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는 이춘영의 제의에 호응하여 포군(砲軍) 400여 명을 거느리고 원주에서 의병 봉기에 나섰다. 호좌창 의진의 무력 기반은 김백선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호좌창 의진에서는 선봉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취중(醉中)의 실수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 외에 지도부에는 편제되지 않았으나 서상렬·주용규·이범직·이필희 등도 기억되어야 할 인물들이다.
서상렬(徐相烈; 1854~1896. 7)은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서상렬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의 직에 있었으나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사임하였다. 이어 김평묵·류중교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화서학맥의 성리학을 체득하였다. 서상렬도 화서학파의 인물 중에서 의병봉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갑오왜란 때부터 의병봉기를 주장했으나 그때는 류인석의 만류로 중단하였다. 서상렬은 단발령 후 안승우·이춘영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합세하였다.
주용규(朱庸奎; 1845~1896. 2)는 호는 입암(立菴), 함흥출생이다.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에 뜻을 세우고 류중교를 찾아 양구(楊口)에 정착한 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주용규는 특히 문장이 웅장하고 뛰어나, 의병활동 시 격문 초안의 일을 맡아 하였다. 의병활동의 강경론자로 1896년 2월 28일 충주성 전투에서 패색이 짙은 가운데 끝까지 병사들을 진두에서 격려하다가 순절하였다.
이범직(李範稷; 1868~1896. 8. 24)은 자(字)는 보경(輔卿), 본관은 전주이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지만 농사를 하며 대대로 빈한한 생활을 해왔다. 이범직은 류중교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범직은 제천주둔의 시기에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때 소모장의 직책을 받아 호좌(湖左)방면에서 의병모집에 주력하였고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여 젊음의 패기를 십분 보여주었다. 그는 류인석이 의병을 이끌고 서북으로 이동할 때 강계에서 순국하였다.
이필희(李弼熙; ?~1896)는 호는 실곡(實谷), 자는 만여(萬汝)이다. 류중교와 류인석의 제자이다. 원주군 안창 봉기 때에 이춘영·안승우에 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되는 것으로 보아 화서학파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이 호좌창 의진의 인물 중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인물들이지만 이외 이정규(李正奎)·박정수(朴貞洙)·원용정(元容正)·원용팔(元容八)·이조승(李肇承)·윤정섭(尹鼎燮)·정운경(鄭雲慶)·류홍석(柳弘錫)·정화용(鄭華鎔) 등도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인물들이다.
다음 호좌창 의진의 병사층을 살펴보자. 당시의 신분 구성을 감안할 때 당연히 농민이 대다수를 점하게 되는데 특히 동학농민군이 다수 참여하였다.
유생과 동학농민군은 1년 전만 해도 각각 갑오의려(甲午義旅)와 반봉건운동의 주체자로서 서로 대립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대립 세력이 합류하는 것이다. 이는 의병 참여자들이 계급적 입장을 극복하며 민족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외 호좌창 의진에는 포수(砲手)·보부상·지방병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포수는 의병진의 전투능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의병장들은 포수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춘영과 안승우가 원주의 첫 봉기 때에 먼저 포수대장 김백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호좌창 의진에는 지평의 포수 400여 명을 포함 그 외 다수의 포수가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것이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호좌창 의진에는 보부상(褓負商)도 소수 참여하고 있다. 단 이들은 보부상의 조직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들의 직업적 특징을 활용하여 서신연락의 책임을 맡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 호좌창 의진의 조직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직구성을 살펴보면서 대규모 의병봉기가 가능했던 역사의 추동력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 이념은 성리학적 민족주의였으며,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는 과정에는 30대 전·후반의 청·장년 유생(예컨대 안승우·이춘영)들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병사층은 포수와 동학농민에서 그 추진력이 찾아진다. 이들은 유생들과 이념적인 경향을 달리하지만 일제의 구축이 민족과제의 급선무라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 하고 반봉건 근대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유생들의 반외세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3) 제천으로의 이동과 충주(忠州)성 점령

호좌창 의진은 지도부 편제 후 곧 영월에서 제천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시기는 2월 11일(양)이었다.
류인석은 제천 도착 후 단양군수 권축(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는 공론에 따라 2월 15일(음력 1월 3일) 이들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의병진의 결연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담긴 장엄한 광경이었다.
호좌창 의진의 첫 번째 공격지역은 충주성이었다. 충주는 호서지방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충주에는 이미 경군(京軍) 400명, 일본군 수백 명, 지방병 400명이 의병 ‘진압’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주둔 병력이 충주성 점령 계획에 큰 장애였던 것이다. 이때 이정규가 포군 서장석(徐長石)·엄팔용(嚴八龍)을 충주성에 잠입시켜 그들의 인척인 지방대 장교를 포섭하였고 이후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음력 1월 4일) 충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제천을 출발한 후 전승지 우기정(禹冀鼎)·이원하(李元夏)·이조송(李肇承) 등이 민병 수천 명을 모집하였는데 이들은 비록 무기는 갖추지 못했으나 그 규모만으로도 일본군과 관군의 위세를 제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 의병규모는『동경조일신문』1896년 2월 26일자에 의하면 10,000여 명에 달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의병진은 진격 첫날(2월 16일) 원서면(遠西面) 평동(平洞)에서 묵고 이튿날 2월 17일 교치(橋峙; 다리재)를 넘어 강령(江嶺)에 이르렀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선발대의 안홍원(安鴻遠)·정술원(鄭述源)이 보고하기를 충주로 가기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북창진(北倉津)이 얼음이 엷어 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전군장 안승우는 다음과 같이 호령하였다.

지금 우리 선생이 받든 것은 만고(萬古)의 대의를 위한 것이니 나루터의 얼음이 무엇이 두려우랴. 만약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이정규,「종의록(從義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623면)

안승우의 추상같은 호령에 따라 병사들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많은 병사들이 건널 동안 얼음은 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넘긴 의병들은 ‘하늘이 돕는다’하여 더욱 의기(義氣)가 높아갔고 충주성을 향해 맹렬히 진격해 갔다.
의병의 기세가 높았던 반면, 관군과 일본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락되었다. 일본군이 북문의 문루에서 포를 쏘며 잠시 대항하였으나 그들도 곧 달아났다. 호좌창 의진이 충주성을 점령하자 백성들의 환대가 대단하였다.「육의사열전」에는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사방이 모두 존경하며 흡족히 여겨 영리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날랜 자나 둔한 자나 모두 춤추고 뛰며 축복하고, 귀머거리·앉은뱅이까지도 다 분발하여 격문이 전달된 곳에는 의병의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 마치 우뢰(雨雷)가 울리자 바람이 따르는 형세와 같았다. (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677면)

한편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은 의병들이 들이닥치자 남문을 통해 달아나다가 중군종사 오명춘(吳命春)에게 체포되어 류인석에게 끌려왔다. 이때 류인석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반역한 죄를 조목조목 들어 논하고 김규식의 목을 베어 북문에 높이 달아 메니 백성들이 의병진의 위엄에 숙연해 하였다. 당시 의병진에서는 권축·서상기·김규식과 뒤에 처형하는 평창군수 엄문환(嚴文煥)을 사역(四逆)으로 지칭하였다.
한편 호서방면으로 갔던 이범직(李範稷)은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고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을 잡아 가두었고, 서상렬·원용정은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병들을 모았다. 또 1896년 1월 20일(음; 1895년 12월 6일) 춘천에서 봉기했던 이소응은 춘천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다가 호좌창 의진이 충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춘천의병을 그의 종형(從兄) 이진응(李晋膺)에게 맡기고 자신은 충주에 합류하였다.
이소응은 류인석의 휘하에서 의병들의 행동지침인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지었는데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군중사무의 대강](요약문)
1) 비록 여러 가지 바쁜 중에서도 ‘도(道)를 잠깐이라도 떠나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으로 행동하라. 하늘이 우리에게 덕을 부여한 것과 이 같은 큰 소임을 맡게 된 것을 저버리지 아니하면 스스로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2) 날마다 충의로써 병졸을 격려하되 ‘왜적은 강제로 임금의 머리를 깎고 우리 토지를 빼앗고, 우리 예악과 법도를 파괴하고, 4천 년 내려오는 정의(正義)의 맥을 씻은 듯이 없어지게 하였으니 결코 이 땅에 섞여 살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라고 하라.
3) 사람을 잘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내세워 인재를 수용하되 충의·지략·용감 3가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하라.
4) 날마다 더욱 정병(正兵)을 모집하고 병졸을 훈련한다. 전곡(田穀)·문부(文簿)의 일은 유사(有司)를 정하여 책임을 지게 하되 사소한 일은 간섭하지 말고 큰일에 전심 하도록 한다. (이정규,「창의견문록」, 앞책, 제1집, 11면)

호좌창 의진이 군사 체제를 잡아가는 한 과정이라 하겠다.
충주성을 빼앗긴 일본군은 다음날부터 반격해 왔다. 일본군은 성 옆의 남산에 올라가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성벽 아래로 몸을 숨기고 반격 사격을 가하자 몸이 노출된 일본군은 가흥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반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의병의 공세에 번번이 퇴각 당하였고 이에 따라 의병에 합세하는 사람이 더욱 늘어났다. 이문흠(李文欽)이 단양 포수 수백 명을 모집해 합세한 것, 신태홍(申泰洪)이 호서지방 의병을 이끌고 합세한 것,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가 제자(왕응선 외)들을 보내 류인석을 도운 사실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충주에 며칠을 주둔한 후 장차의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에서 중군장 이춘영은 류인석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 1단계; 수안보와 조령을 점령하고 그곳을 활동의 거점으로 삼는다.
2) 2단계; 호남지역과 연계하여 병력의 보강은 물론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군량을 보급 받는다.
3) 3단계; 서울로 진격하여 일제 및 부일배(附日輩)들을 구축한다.
위의 이춘영의 제의는 무엇보다도 서울진격계획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수안보와 조령에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고 다수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계획의 실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2월 23일(음 1월 11일) 일본군 수백 명이 달천(達川)에까지 진격해 왔다. 그때 이춘영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접전하여 일본군 50~60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이춘영은 그 승세를 타고 수안보 공격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춘영은 이전부터 일본군의 수안보 병참을 공격하기 위해 지형을 조사해 두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쉽게 포위할 수 있었다.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의병진의 공격에 일본군은 심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불행한 사고가 얼어났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춘영이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이춘영과 같은 능력있는 젊은 장수의 손실은 의병진에 큰 타격이었다. 이춘영이 당시 나이 28세의 청년이었으나 의병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같이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시신이 충주성에 운구(運柩)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아래와 같이 슬퍼하였다.

원근(遠近)·상하(上下)·승속(僧俗)·남녀(男女)들이 모두 울며 일손을 놓고 밥을 먹지 않았으며 개화를 주장하는 간악한 여러 흉적도 듣고 탄식하며 아깝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公)의 조카가 치상(治喪)하여 집으로 돌아가는데 지나가는 곳 마다 마을이나 주막에는 영접하고 전송하는 사람들이 담을 쌓듯이 늘어서고 곡성(哭聲)이 수백 리에 줄을 이었다. (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681면)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충주일대를 둘러싸고 충주성에 압박을 가하였다. 2월 29일(음력 1월 17일)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보자.

적이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오므로 우리 군사들이 포살하기를 무려 28차례나 하였다 …(중략)… 밤낮으로 크게 싸우니 포탄이 공중을 누비는데 까막까치가 이따금 땅에 떨어지고 성안에는 가옥이 완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포성은 수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바람은 심하게 깃대를 꺾어 눕히고 추위는 활줄을 끊어뜨리는데 사졸들은 성을 지키며 밤을 세웠다. 성의 백성들이 혹 숯불을 공급하고 밥을 갖다 주는데 포탄이 부엌 벽을 부수어 밥 짓는 여인이 놀라 거꾸러졌다. 밥을 들고 높은 토성으로 올라가면 피흘린 시체가 쌓여있어 모두 피하게 되므로 군사들에 대한 보급이 극히 어려워졌다. (박정수,「하사안공 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763면)

3월 2일(음; 1월 19일)에는 일본군 3개 중대의 연합공격이 시작되었다. 의병진은 성 밖에서의 물자지원이 차단되어 큰 곤경에 빠졌다. 일본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사상자가 늘어나자 의병진 내에 동요가 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누구보다도 의병봉기에 앞장섰던 주용규가 3월 2일 저녁 남문 문루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춘영에 이은 주용규의 전사는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침내 류인석은 3월 4일(음력; 1월 21일) 장수들과 상의하여 청주나 공주로 이동, 그곳에서 병사와 군량을 구해 다시 활동할 계획을 세우고 일단 충주성에서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다음날 3월 5일 의병진은 북문을 통해 달천(達川)을 경유, 청주방면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달천 방향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달천으로의 이동사실이 일본군에게 탐지된 것이다. 의병진은 계획을 바꾸어 마치(馬峙)를 넘어 신당(新塘)·황강(黃江)을 경유, 3월 6일(양) 청풍부(淸風府)에 도착하였다. 충주성에서의 전투는 이렇게 마감되었으니 충주성 입성 18일만의 일이었다.
호좌창 의진의 충주에서의 항쟁은 대단히 훌륭하였다. 일본군도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충주부는 2월 17일 이래 폭도의 차지한 바 되었으며 그 곳의 험요함을 이용하여 정예를 모아 사수(死守)하고 있었다. 우리 수비대가 몇 차례에 걸쳐 이를 공격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용이하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3월 5일 우리 수비대는 3개 중대가 힘을 합하여 공격한 결과 이를 함락 시킬 수 있었다.(『일본공사관기록』「폭도토벌에 관한 건」)

(4) 제천에서의 의병 활동

가. 제천으로의 이동과 의병진의 재정비
충주성을 탈출한 의병진이 청풍을 경유하여 제천에 도착한 것은 1896년 3월 8일(양)이었다. 류인석은 제천 지역을 방어할 전략을 세우고 아래와 같이 제천일대의 수비망을 구축하였다.
1) 원도상(元道常: 守城將)·홍대석(洪大錫: 前軍將)…청풍의 북창진(北滄津)
2) 신지수(申芝秀)…충주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
3) 장익환(張益煥)…단양경계
4) 이형구(李亨九)…개천(開川)으로 통하는 길목
5) 김교헌(金敎憲)…원주로 통하는 길목
한편 호좌창 의진이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모은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지자 각처에서 의병장들이 호응하여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稙)·이인영(李麟榮)·이명노(李明魯)가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합류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유격장에, 한동직은 참장(參將)에, 이명노는 영서(嶺西) 소모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강년의 합세는 의진에 큰 힘이 되었다. 이강년(1858~1909)은 호는 운강(雲崗), 본관은 전주이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병서(兵書)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역임하였으나 1884년부터 문경에 은거하였다. 이강년은 단발령 직후부터 의병봉기에 뜻을 두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못했는데 류인석의 봉기소식에 고무되어 문경에서 의병을 모아 봉기했다. 그 후 이강년은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처단하고 안동의 권세연 의병장과 연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나. 수안·문경·태봉지역에서의 전투
제천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의병진은 다시 일본군과의 전투를 시작하였다. 먼저 1896년 3월 14일(음력; 2월 1일) 수안보 및 가흥(佳興)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충주성 전투 때 이춘영에 의한 공격이 이미 있었으므로 이는 수안보에 대한 2차 공략인 셈이다. 이때는 유격장 이강년이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전투를 이끌었다.
이강년은 3월 19일(음력; 2월 6일) 의병을 거느리고 수안보 남산에 도착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병들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일본군 병참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수안보는 일본군에게도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방어가 대단히 견고했던 것이다. 결국 의병들은 덕주(德周)남문으로 후퇴했다가 재공격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군량수송이 늦어지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단 서창(西倉)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호좌창 의진의 맹장 서상렬은 일찍이 충주성 점령 시기 류인석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지금 군사가 일어난 지 시일이 오래고 여러 번 적을 이긴 소문이 났으니 서울의 적들은 반드시 엄히 방비할 것인 즉 잠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군사를 모으고 양곡을 쌓으며 사방의 군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려 진취(進取)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략)… 영(嶺) 밖의 고을은 국가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바인데 지금 겨우 일어났다가 힘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지병(一枝兵)을 거느리고 가서 영남 군사들을 고무하여 일으킨다면 일을 안전하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이용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174면)

즉 서상렬은 장차 영남의병과 연합할 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류인석의 허락을 받고 서상렬은 안동·예천으로 진출하여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3월 초에는 안동 의진의 중군 권문팔(權文八) 및 예안·풍기·순흥·영천·봉화 등 각 고을의 의병장들이 예천에 모여 서상렬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흰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동맹할 것을 맹서하였다. 이때의 맹약서는 류인석의 문인 원용정(元容正)이 지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역적의 편이 되지 말 것.
2) 중화(中華)의 제도를 변경하지 말 것.
3) 죽음에 이르러도 마음을 바꾸지 말 것.
4) 사사로운 두 마음을 갖지 말 것.
5) 겁먹어 전진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서상렬을 중심한 영남 연합의진은 먼저 예천군수 류인형(柳仁馨), 의성군수 이관영(李觀永), 영덕군수 정재관(鄭在寬)을 참형에 처하였다.
곧 이어 연합의진은 상주(尙州)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병사들이 곧 흩어져 전세는 크게 불리했다. 서상렬이 분전(奮戰)하여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기는 하였으나 의병진영의 일방적인 패전이었다. 이때 서상렬은 예천으로 회군(回軍)하고 의병들에게 기초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일면 군사모집에 힘써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3월 하순경 3,000여 병사들이 모여 들어 의진의 기세가 높아지자 서상렬은 다시 함창(咸昌) 태봉(胎峰)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제천의 본진(本陣)에는 조령(鳥嶺)의 길목을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봉에는 일본군 수비대의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서상렬은 일거에 태봉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3월 26일(음; 2월 13일) 영남 연합의진은 1차로 태봉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안보에 주둔해 있던 이강년은 문경으로 이동하여 조령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서상렬의 태봉공격을 측면에서 지원해 주었다. 첫날의 싸움은 소규모의 접전으로 끝났다.
3월 29일 (음; 2월 16일) 서상렬은 다시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태봉공격을 시작하였다. 선성(宣城)의병이 선봉에 서고 풍기·영천·순흥 3개 지역의 의병이 그 뒤를 따랐다. 3,000여 의병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태봉을 향해 진격하는 광경은 실로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태봉에는 이미 대구(大邱)주둔 일본군 수비대의 구원병이 도착해 있어 태봉 주둔 일본군의 규모가 당초 서상렬의 예상과는 달랐다. 예상 밖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대등한 싸움으로 시작되었으나 산과 들판에서 격전 벌이기를 9시간, 무기가 열악한 의병들은 차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의병장 서상렬이 의병들을 독려하며 분전하였으나 이미 폐색이 짙었다. 연합의진은 예천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군의 추격과 만행이 잔혹하였다. 일본군은 흩어진 의병을 쫓아 안동에 들어가 의병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민가에까지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때 바람세를 탄 불길이 온 읍내로 번져 나가 안동읍 1,000여 호가 잿더미로 화하였다.
한편 이강년은 위와 같이 서상렬과 연계하여 문경·수안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4월 20일경(음력; 3월 8일) 제천의 본진으로 돌아왔다.

다. 가흥(佳興)지역에서의 활동
가흥 전투는 평민 의병장 김백선이 지휘한 전투이다. 김백선은 3월 16일(음력; 2월 6일) 제천을 출발하여 가흥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3월 17일 충주 매운(梅雲)에 이르자 김백선은 일본군의 동정을 살핀 후 병사가 적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천 본진에 병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중군장인 안승우는 허락하지 않았다. 김백선은 불만스러웠으나 본진의 명령이 그러했으므로 도리없이 진격을 계속하였다.
의병들이 3월 19일(음력; 2월 6일) 가흥 부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본군이 인근의 청룡촌(靑龍村)에 들어가 민가에 불을 놓고 있었다. 김백선과 의병들은 분노하여 일본군을 뒤쫓아가 공격을 시작했다. 의병들은 익숙한 지형을 적절이 이용하여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도망가는 일본군을 쫓아 강 건너 가흥까지 진격해 갔다. 그런데 가홍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었다. 결국 김백선이 처음에 염려했던 대로 의병진은 가흥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였다.
가흥 진격전에서의 실패로 김백선 휘하의 포수들이 다수 사상당하고 일부는 흩어졌다. 제천 의진으로서는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퇴진 후 김백선은 위와 같은 패배를 분해하며 패전의 책임을 증원요청을 거절한 안승우에게 추궁했다. 그런데 당시 김백선은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추궁하는 태도가 거칠었다. 김백선은 신분이 평민이었고 직책이 안승우보다 낮았으므로 그러한 행동이 여러 유생들에게 용납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류인석은 김백선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김백선은 술에 만취되어 창의대장인 류인석 앞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위의 장수들에게 칼을 들고 위협하며 증원요청에 협조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백선은 군율에 따라 ‘참형’에 처해졌다. 한 사람의 장수가 아쉽던 그때 류인석은 김백선을 처형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사를 거느리려면 규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규율이 없다면 모든 사람을 어찌 통솔할 것인가. 지금 대의(大義)를 아직 펴지 못했는데 1만 군사의 규율이 너로 하여금 땅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부득불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울면서 마속(馬謖)을 베던 것 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이정규,「종의록」, 『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45면)

류인석은 제갈공명이 한사람 남은 장수 마속을 베었던 심정으로 김백선을 베었다. 류인석이 그의 아들보다 더 사랑했다는 김백선이었으나 기강을 위해 부득이 김백선을 참형에 처하는 장면은 실로 선비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장엄한 장면이었다.

라. 제천 전투
류인석은 김백선을 참형에 처한 후 의진의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우선 제천근방에 아래와 같이 장수들을 배치하여 방어망을 튼튼히 하였다.

전군장 홍대석(洪大錫); 명호치(鳴湖峙)
좌익장 우필규(禹弼圭); 파랑령(波浪嶺)
좌군장 우기정(禹冀鼎); 박달령(朴達嶺)
우군장 안성해(安成海); 족동(簇洞)
별장 원우규(元友珪); 조령(鳥嶺)
참장 한동직(韓東直); 단정(端亭)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강녕(江寧)
소모장 이범직(李範稷); 강녕
파수장 이형구(李馨九); 유현(楡峴)
(1986년 3월 중순~4월 중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제1집, 264면 참조)

그러나 당시 의진의 사기는 심히 저락한 상태에 있었다. 공격 작전을 수행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제천을 수비하는 지루한 상황이었다.
한편 1896년 3월 21일(양) 일본군과 연합하여 남한산성 연합의진을 해산시킨 친위대 및 강화진위대는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하였다. 관군의 인솔자 장기렴은 충주에 도착하여 류인석에게 해산할 것을 종용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었다.

(전략) 의병의 칭호는 예로부터 수 없이 많지만 오늘의 의병 같은 것은 아직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관장(官長)에까지 미치고 노략하는 버릇이 작은 민가에까지 이른다. 하는 일이 이러하니 의병이라는 이름이 합당할 것인가.
이에 본 참령(參領)은 역적 토벌하라는 황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렀다. (중략)
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글 읽는 선비로서 세상 변화하는 데 대처하는 길이 어둡기 때문에 이번 일이 의(義)가 되는 줄만 알고 그 의거(義擧)가 도리어 역적이 될 줄은 생각지 못한다. 그래서 선유(宣諭)라는 은명(恩命)을 군대의 정토(征討)에 앞세우는 것이다. 만일 왕명에 복종하는 것이 순리가 됨을 깨달아 창을 거꾸로 들고 와서 맞아한다면 의거의 처음 마음을 표창할 것이니 시작도 의(義)요, 나중도 의(義)가 되는 것이다. (하략)
건양 원년 4월 25일 구력(舊曆) 3월 13일 왕사주진소(王師駐陣所)
(이정규편,「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제l집, 117~118면)
실로 오만 불손하기 이를 데 없는 무례한 서신이었다. 장기렴은 서울공략을 계획하며 맹위를 떨쳤던 남한산성 연합의진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기세가 당당하였다. 장기렴이 내세우는 의병의 죄목(罪目)은 두 가지다. 첫째 관아의 수령들을 처형하여 나라에 반역한 점, 둘째 민가에 피해를 끼쳤다는 점이다. 장기렴이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의진 측에서는 아래와 같은 반박 회문(回文)을 보냈다.

이번 거의(擧義)한 이유를 우리나라 신민(臣民)으로서 누가 모르겠는가. 복수설치(復讐雪恥)하는 일과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는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원칙이다. (중략)
소위 관장(官長)을 살해한 것은 그들이 곧 난적의 당파요, 국가의 관장이 아닌 까닭이다. 즉 먼저 토벌하고 나중 보고하는 의리를 어찌 그만둘 것인가. 우리가 빼앗은 재물은 모두 왜적의 물건이 된 것으로서 우리 국가의 공공물건은 아니다. 그것을 가져다 적을 토벌하는 물자로 쓰는 것이 어찌 의(義)에 해로울 것인가. 또 세상 변화에 대처하는 데 어둡다는 것은 더욱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피로 맺힌 원수를 다 제거하였는가, 뿌리박고 있는 역적의 무리를 다 섬멸하였는가, 선왕의 옛 제도를 다 회복하였는가, 선성(先聖)의 큰 도를 다 밝혔는가. 심지어 성상(聖上)께서는 파천(播遷)하여 아직 대궐로 환어하시지 못하였으며 국모의 인산(因山)은 달이 지나고 해가 넘도록 아직 모시지 못하였다. 백관이 도망하여 숨고 조정이 텅 비었으니 종묘사직의 우환이 앞으로 어디까지 이를지 모르겠다. (중략)
참령은 원래 대대로 장신(將臣)의 집안으로서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으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며 중화를 높이고 이적(夷賊)을 물리쳐서 선왕의 덕에 보답하고 선대의 사업을 이을 것을 생각하여야 안으로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얼굴이 붉어 지지 않을 것이다. 말은 여기서 그치니 잘 알아서 할 줄 믿는다.
병신년(丙申年) 3월15일(양력; 4월 27일; 필자 주)
제천 호좌의병장
(이정규편,「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118~120면)

위의 회신은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관리 처단과 재물 탈취에 대한 해명이다. 둘째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4월 말은 단발령이 취소되고, 김홍집 정권이 몰락된 즈음으로 고종의 조칙에 의해 대부분의 유생의병들은 자진 해산할 시기였다. 그러나 류인석은 일반적인 유생들과는 달리 의병해산을 거부한 것이다. 그 의병해산 거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피 맺힌 원수 일제가 물러나지 않은 점.
2) 역적의 무리(즉 개화인사)들이 섬멸되지 않은 점.
3) 선왕의 옛 제도가 회복되지 않은 점.
4) 선성(先聖)의 도를 회복하지 않은 점.
5)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還宮)하지 않은 점.
6)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이 치루어 지지 않은 점.
7) 조정은 인재가 없어 텅 비어 있는 점.
한편 의병진 일부에서는 왕명(王命)을 받아 온 군사들과 싸울 수 없으니 화친(和親)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강경론자인 안승우는 다음과 같이 화친을 반대하였다.

지금 3이(3李; 李範普·李完用·李允用; 필자 주)가 김홍집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이(利)로써 권리를 빼앗은 것이요, 충성으로 적을 토벌한 것은 아니며 그들이 왜의 심부름꾼인 것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또 적의 무리가 군부(君父)를 가둔 후에 누가 인군(仁君)의 명령이 한번이라도 밖에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느냐. 설령 인군의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임금을 끼고 위협하는 명령이다. 만일 임금을 끼고 위협하여 내리는 명령이라고 한다면 옛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어찌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한다고 하는 조조(曹操)의 군사를 칠 수 있을 것이랴. 또 이 무리들은 모두 왜의 형상을 하고 국모를 시해한 자들이니 우리가 이를 토벌하는 것은 반드시 왜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저들이 죽으려고 온 것인데 도리어 맞아들인데서야 말이 되느냐.(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195면)

즉 안승우는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을 왕사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좌창 의진이 왕사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버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신교환 후 교전없이 소강상태가 5월 하순까지 지속되었다. 관군 측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의병들이 점차 귀순해 올 것으로 계산하고 공격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병들의 대항은 완강하였다. 그에 따라 관군은 5월 23일(음력: 4월 11일) 제천을 향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관군은 곳곳의 의병 방어지역을 피해 제천의 본진(本陣)을 향하여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관군은 5월 25일(음력; 4월 13일) 제천 남산성에 도착하였고 곧 대격전이 시작되었다.
의병진에서는 중군장 안승우가 선봉에 나섰다. 안승우는 전투에 대비하여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손수 화약을 재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고장림(古場林)방면으로 진격하던 관군은 의병의 반격을 받아 3차례나 숲 밖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하늘은 관군을 도왔다. 큰 바람이 서남쪽에서 불어오더니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의병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대부분 사격할 때 마다 불을 붙여 사용하는 구식 화승총이었다. 의병들은 비로 인해 총을 사용할 수 없었고 관군의 일방적 공격이 계속 되었다. 결국 의병진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의병진영이 무너지자 중군장 안승우는 분을 참지 못하여 젖은 총을 집어 던지고 돌을 던지면서 관군에 대항하다가 오른쪽 다리에 탄환을 맞고 쓰러지고 만다. 안승우는 더 이상 거동이 불가능하여 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때 장기렴은 안승우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안승우는 굽히지 않고 아래와 같이 호통을 쳤다.

너희는 짐승 같은 것들(즉 일제; 필자 주)에게 굴복하여 군부(君父)를 욕보이며 또 왜를 토벌하는 의병을 공격하니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다. 사람을 잡아먹으려면 잡아먹을 것이지 어찌 사람에게 말을 거느냐…(중략)… 금수의 더러운 소리로 사람의 귀를 더럽히지 말라.(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196면)

안승우는 최후까지 절의(節義)를 지키다 관군들의 뭇매를 맞고 전투현장에서 절명하였는데 그의 나이 32세였다.
안승우의 죽음도 장렬한 것이었지만 또 한 사람의 열사가 있었다. 안승우의 종사로 활약했던 19세의 청년 홍사구였다. 관군이 밀려오자 안승우는 홍사구에게 일단 후퇴할 것을 여러 번 권하였다. 그러나 홍사구는,

종사가 되어서 주장이 화를 입은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더구나 제자가 되어서 선생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환란을 당할 때 어버이를 이유로 들어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스승이겠습니까.(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201면)

라고 하고 끝까지 안승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죽음을 함께 했다. 결국 제천진영은 관군에게 함락되고 류인석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단양방면으로 퇴각하였다.(이외 제천일대에서의 소규모 전투는 뒤의 「연보」참조)

제4장 서북 및 중국지역에서의 의병재기 모색

1. 서북지역에서의 활동

류인석은 1896년 5월 25일(음력; 4월 13일) 제천 전투에서 패한 후 일단 제천근방의 지곡(芝谷)에 머물렀다. 이때 전군장 정운경(鄭雲慶), 좌군장 이희두(李熙斗), 우군종군 윤영훈(尹永勳), 별영장 이인영(李麟榮), 참모장 한동직(韓東直) 등이 동행하였는데 나머지 장수들은 흩어지거나 전사했다. 이럴 즈음 류인석의 심정은 침통한 것이었다. 류인석은 의병활동을 중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수들은 류인석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원수(元帥)의 처음 뜻이 여기에 그치려 하셨습니까. 원수의 처음 뜻은 억만 동포들이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하고 다같이 의복과 머리털을 보존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만약 이같이 하신다면 하소연 할 데 없는 군중들이 장차 어디로 가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엎디어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다시 생각하시어 군졸들의 이 슬픈 정상을 알아주시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일찍이 듣자오니 서쪽 사람들은 강하고 날랜 이가 많고 무예에 정밀하다 하오니 영남·호남 사이에서 일을 이루지 못하면 서북쪽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우리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며, 또 거기에서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세개에게 구원을 청할 것이며, 또 그곳에서도 일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노(魯)·제(齊)나라에 들어가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머리털을 지녀 한 가닥 중화의 명맥을 막된 세상에서 보존하는 것도 또한 큰 불행은 아닐 것이니 원컨대 깊이 통촉하십시오.(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496면)

위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주장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장좌(將佐)와 사졸(士卒)들이 건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주장에는 의병진의 추후 활동 계획이 제시되어 있어 주목되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단계: 영남·호남지역에서 재기
2) 제2단계: 서북쪽으로 이동해서 재기
3) 제3단계: 중국의 원세개에게 구원 요청
4) 제4단계: 중국으로 들어가 화맥(華脈)을 보존
수산(壽山)에서의 계획(이하 ‘수산계획’이라고 약칭함)에 따라 류인석은 해산계획을 취소하고 의병활동을 재개한다. 그리하여 의병진영은 6월 6일 충주로 이동하였고 6월 8일에는 음성(陰城)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탄약·무기·소모물자 등을 조달했다. 음성 전투에서는 공주 지역 소모장이었던 정인설(鄭寅卨)의 활약이 컸다. 의병진은 관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6월 9일에는 충주의 은현(隱峴)으로, 6월 10일에는 또 다시 원주의 강천(康川)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류인석은 앞의 ‘수산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추후 활동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1단계: 여주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
2) 2단계: 강원도에서 활동
3) 3단계: 서북지방에서 재기
4) 4단계: 원세개에게 구원병을 요청
5) 5단계: 중국에서 의병을 모집해 국내로 진격
류인석이 1단계 계획으로 여주(驪州) 지역을 새로운 거점지역으로 결정한 것은 여주 지역 의병장 심상희(沈相禧)를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심상희(1861. 4. 5~1931. 12. 25)는 사과(司果)를 지낸 관료 출신 의병장이다. 일찍이 1896년 2월 5일 여주 지역의 유생들과 의병활동에 나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이천 김하락(金河洛) 의병진에 합세하였다. 이어 김하락 의병진과 더불어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나 2월 23일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한 후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제천 류인석 의병진의 휘하 장수로 들어간 인물이다. 여주의병은 봉기 당시의 의병규모가 500여 명에 달했으니 전기의병에서도 큰 의병세력 중의 하나였다. 류인석의 여주 근거지계획은 이러한 여주의 잠재력을 감안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류인석은 여주로의 이동을 위해 6월 11일 심상희 의진의 중군장 원용석(元容錫; 일명 원용팔)을 호출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심상희가 고종의 조칙을 받고 의병을 해산한 것이다. 여주에 희망을 걸고 있던 류인석은 크게 실망하여 바로 다음날 6월 12일 심상희에게 속히 활동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류인석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심상희는 의병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이에 류인석은 여주에서의 활동계획을 포기하고 봉현(鳳峴; 6월 15일)·보안역(保安驛; 6월 16일)·금대(琴臺; 6월 17일)·제천 모산(茅山; 6월 20일)·영월(寧越; 6월 24일)을 지나 6월 26일 정선(旌善)에 도착하였다. 즉 류인석은 제2단계 계획인 강원도 지역을 중심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선유사가 파견되어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럴 즈음 7월 3일(음력; 5월 23일) 류인석은 유명한「서행시재정선상소(西行時在旌善上疏)」를 올려 해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전략)선유사가 사방에서 군사로 핍박하며 비도(匪徒)라고 지목하고 살벌(殺伐)로써 위협하니 원통합니다. 이 어찌 우리 전하의 마음이겠습니까. 신이 그윽히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처음에는 소신이 있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목표가 있어 갑자기 중지할 수 없은 즉 오늘날 갑자기 중지하지 못하는 것은 옛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10적(十賊)과 그의 무리들이 열립해 있는 것도 전과 같고, 왜놈의 병참이 연달아 있는 것도 전과 같고, 복색을 고친 것도 전날과 같고, 정삭(正朔)을 고친 것과 관제(官制)를 변경한 것도 전과 같고, 주군(州郡)을 개혁한 것도 전과 같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머리를 깎는 데 이르러서는 전하께서도 마음에 쓰라린 바 있으시거늘 오히려 ‘편의를 따른 것이다’, ‘급한 일이 아니다’ 하시니 이는 반드시 꺼리는 바 있어 그러는 것이옵니다. 더욱이 환궁(還宮)하시는 것이 늦어져 궁궐을 지킬 사람이 없으며 국가의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하여 전례(典禮)를 한 가지도 거행 못하고 백료(百僚)들이 도망해 숨고 사방 민심은 동요되니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기 전날보다 배나 더 하옵니다. 이런 때에 이르러 의병된 자로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중략)
의병을 한번 해산하면 강기(綱紀)가 반드시 무너지고 나라가 이어서 망할 것이니 우리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서 이미 이 일을 짐작하고 계실 터인데 어찌 참으로 이런 유시(諭示)가 내리겠습니까. 가령 이런 유시를 내리셨다 할지라도 이는 좌우에서 전하의 총명을 엄폐하여 오직 자기들의 권세와 이익만을 견고히 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화는 생각하지 않고 협령(挾令)을 가지고 안팎을 막으려 하는 것이옵니다.(중략)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잡음에 동요되지 마시고, 궁중으로 돌아가 예법대로 국모의 장례를 치루시고, 충성되고 어진사람을 올려 쓰시고, 소인들을 물리치시며, 간사한 적의 무리들을 쓸어 없애시고, 발호(跋扈)하는 왜적을 몰아내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랑캐의 제도를 쓰는 것을 영영 금하시고 글을 숭상하는 다스림을 쾌히 회복하시어 공(功)을 역대 임금보다 더욱 빛내시고 사업을 후세에 남기시어 백대 중흥의 임금이 되시옵소서. 이렇게 하시면 신도 또한 분수를 지켜 군사를 해산할 것입니다…. (하략)(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16~523면)

의병을 해산할 수 없는 논리는 앞장에서 본 장기렴에게 보낸 글과 차이는 없다(앞장 참조). 단 시기적으로 3개월이 지난 당시도 류인석의 거의 논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위의 상소는 고종에 대한 충정 즉 근왕의식(勤王意識)이 구구절절 표현되어 있는데 흡사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제출했던 심정과 유사하다.
류인석은 7월 4일 중군아장(中軍亞將) 이원하(李元廈)를 중군장에 임명한 후(원용석은 사퇴) 의풍정(倚風亭; 7월 7일)·강릉 지협(芝峽; 7월 10일)을 지나 7월 11일 대화(大和)에 도착하였다. 대화에서 류인석은 인근에 아래와 같은 통문을 발송하였다.

지금 재물로써 도와주면 궁색한 것을 근심하지 않겠으며, 집으로써 도와주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원망이 없겠고, 몸으로써 도와주면 죽는다 해도 이름 없는 근심은 하지 않으리라. (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25면)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의병진의 정황을 짐작케 한다. 이제 강원 지역에서의 활동에는 한계가 온 것이다. 즉 류인석은 다시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의병진은 이동을 계속하여 창계(倉桂; 7월 13일)·내흥정(內興亭; 7월 16일)을 지나 7월 16일에는 봉평(蓬坪)에 도착하였다. 봉평에 이르자 이튿날 7월 17일(음력 5월 7일) 서상렬은 다음과 같이 서북으로의 이동을 제안했다.

지금 일이 위태한 지경에 도달하여 백 번 생각해도 방법이 없으니 부득이 서쪽으로 가서 강병을 모집하여 장기계획을 세우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또 이(이춘영; 필자 주)·안(안승우; 필자 주) 여러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불행히 적을 만나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구차하게 화를 면하고 혼자 살아남는 것도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인도하여 적과 충돌할 것이오니 원하건대 선생께서는 군사를 지휘하여 뒤를 따르십시오. (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28면)

서상렬의 제안에 따라 의병진은 관서지방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의병진은 청계(淸溪; 7월 19일)·원당(元堂; 7월 20일)·인제(麟蹄; 7월 21일)를 지나 7월 23일 낭천(狼川; 지금의 華川)에 도착했는데 낭천에서 관군과의 전투가 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선발대를 지휘하던 서상렬이 전사하였다. 의병진이 관군에 포위되었을 때 한 부하가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서상렬은 ‘내가 어찌 소장부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고 적을 보고 달아나 살려고 할 것이냐’하며 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현재 전장골(화천군 화천읍 아5리)이라 불리우는데 당시의 전투가 치열했음을 시사한다.
류인석이 서상렬의 전사소식에 접한 것은 7월 27일이었다. 그때 류인석은,

황천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냐, 국가 운수가 다 되었단 말이냐. 웅무(雄武)한 의사들이 차례로 순절하니 4,000년 화하문명(華夏文明)과 2,000년 공·맹(孔·孟, 공자·맹자)의 정통과 500년 종사와 2,000만 창생이 영영 끊어지고 영구히 금수가 되는구나. 어찌 내 몸에 이르러 영영 엎어지고 만단 말이냐. 이 조그만 충성을 누구와 더불어 다시 일을 계획한단 말이냐. (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33면)

라고 서상렬의 죽음을 통탄하였고, 이 광경을 본 주위의 군사들은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후 류인석은 서북으로의 이동을 계속하여 수교(水橋: 7월 19일)·양구(7월 24일)·금성(金城; 7월 30일)·평강(平康: 8월 4일)·유연(流淵: 8월 5일)·대문(大問: 8월 6일)·소금강(小金剛: 8월 7일)을 지나 8월 8일 구당(龜堂)에 도착하였다. 구당에 이르자 류인석은 산세를 보고 지세(地勢)가 ‘군사를 기르고 무예를 익힐 만하다’라고 기뻐하였다. 류인석은 내심 구당을 활동 근거지로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다음날 전방에 정탐을 나갔던 병사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관찰사와 군수가 각각 주현(州縣)을 점령하고 병정들이 계속 옳지 못한 명령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소란케하기 때문에 서북쪽의 물정이 전일에 듣던 바와는 달리 한 사람의 병정도 모집할 수 없습니다.(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39면)

서북지역에서 건장한 병사들을 모집할 수 있으리라는 류인석의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때 류인석은 급히 회의를 소집, 협의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형세가 이와 같으니 차라리 강을 건너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병을 청함과 같지 못하며, 그것도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머리털을 보존하여 우리 소신대로 사는 것이 옳습니다.(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39면)

즉 제4단계의 계획인 중국에의 군사요청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인데 이때가 1896년 8월 9일이었다. 의병진이 서북지역에 당도하기도 전에 서북지역에서의 재기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에 따라 류인석은 이필희(李弼熙)·송상규(宋尙奎)·유치경(兪致慶)으로 하여금 군사를 요청하는 글을 원세개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2. 중국으로의 이동과 활동

(1) 이동과정-국내지역

앞 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류인석이 원세개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려는 결정은 8월 9일 구당에서 확정되었다. 먼저 구당을 출발한 후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에 이르기까지 20일 간의 이동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896. 8. 9: 구당(龜塘)
2) 1896. 8. 10: 안변(安邊)
3) 1896. 8. 14: 법지(法池)
4) 1896. 8. 15: 양덕(陽德)
5) 1896. 8. 15: 청간(淸澗)
6) 1896. 8. 16: 영흥(永興)
7) 1896. 8. 18: 맹산(孟山)
8) 1896. 8. 19: 덕천(德川)
9) 1896. 8. 21: 군악(軍樂)
10) 1896. 8. 22: 청도(靑渡)-청도 전투
11) 1896. 8. 23: 운산(雲山)
12) 1896. 8. 24: 초산(楚山)-초산 전투
13) 1896. 8. 28: 회인현(懷仁縣)
이동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고생은 극심하였다. 원용정의 「의암류선생서행대략」에는 구당에서 이미 병사들의 반은 병들어 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재정(財政)도 어려워 하루 두 끼만을 먹는 생활을 하였다. 백성들의 지원도 극히 저조하였다. 의병진이 덕천읍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동향을 원용정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적(十賊)의 앞잡이들이 널려 있는 것이 이미 지나온 곳보다 더욱 심했다. 그들은 의병이 장차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관속과 주민을 꾀어 시장을 철폐시키고, 상점을 파괴하며, 배를 침몰시키고, 나루를 끊었다. 슬프다 적당(賊黨)의 죄는 용서할 수 없거니와 민심마저 그 자들에게 넘어간 것이 이다지도 심한가.(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자료집』제1집, 544면)

위와 같이 의병활동을 지속하기는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추격하여 오는 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청도 전투·영변 전투·초산 전투가 그것이다. (이외 소규모 전투는 부록의 「연보」를 참조할 것).

(2) 청도 전투(靑渡戰鬪)·영변 전투(寧邊戰鬪)

청도 전투는 8월 22일에 있었다. 이때 의병진은 접전 끝에 관군을 물리치고 영변(寧邊)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관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영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켰는데 마침 관군이 들이 닥쳐 다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장시간의 접전 끝에 의병진이 다시 승리를 거두고 의병들은 석진(石津)을 건너 영변으로 이동했다.

(3) 초산 전투(楚山戰鬪)

초산 전투는 청도·영변 전투의 연장으로 8월 24일에 있었다. 청도·영변에서 승리한 후 의병진은 중국행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운산을 경유 초산에 이르렀다. 당시 류인석은 관군의 추격을 염려하여,

쫓아오던 군사가 피해 돌아갔으니 반드시 군사를 더 청해서 뒤쫓아 올 것이다. 장좌(將佐)로부터 사졸에 이르기까지 한 마음으로 서로 경계하고 힘쓰도록 하라.(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46면)

라고 병사들에게 주의시키기도 하였다. 그럴 즈음 초산에 도착한 8월 24일 밤, 두 어린아이가 달려와 다음과 같이 알렸다.

방금 정병(精兵) 3백여 명이 쫓아와서 장차 밤을 타 대진(大陣)을 습격하려 합니다. 형세가 몹시 긴박하여 밤새워 산을 넘어와서 보고하는 바입니다. (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46면)

류인석이 두 아이를 보니 병들어 허약한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어린아이들이 지형도 모르는 산길을 밤에 찾아 왔으니 류인석은 하늘이 돕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의병진이 주둔한 곳은 전투에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래서 의병진은 후퇴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선수를 빼앗겼다. 관군이 이미 산위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병들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관군을 만나 당황하였으나 사력을 다해 싸웠다. 전투에 참여한 원용정은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막다른 길에 선 우리 군사들은 모두 죽음이 있을 뿐이요, 살 생각은 없었다. 각각 담력을 분발하여 철포와 짧은 무기를 가지고 시체를 뛰어넘어 닥치는 대로 적을 공격하니 그 소리가 크게 진동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캄캄한 밤중에 안개마저 끼어 양쪽 진영의 사졸들은 서로 얼굴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사졸들은 모두 죽기를 맹세하고 힘껏 싸워 날래고 용감하니 누가 능히 이를 대적하랴. 적들은 이에 피해 달아나므로 뒤를 추격하여 20리까지 나가서 또 쳐부셨다.(원용정,「의암류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547면)

병사들의 투혼정신에 힘입어 의병진이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사상자는 반에 이르러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튿날 새벽, 의병진은 와송(臥松)에 도착하였다. 류인석은 장졸들을 위로하고 특히 관군 습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 두 소년에게 큰 상을 내렸다. 두 소년의 제보가 없었다면 의병진은 관군의 야간 기습공격으로 전멸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으니 의병진으로서는 큰 위기였던 셈이다. 한 소년은 이름이 용문(龍文)인데 의병장 손덕화(孫德化)의 아들이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도운 것이었다.

(4) 중국으로의 이동과 의진의 해산

초산 전투 후 류인석은 8월 28일 아이성(阿夷城)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 다시 여러 관리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관리들에게 포고하는 글로서는 영월에서 발표한「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에 이어 두 번째인 셈이다.

국경을 넘으며 고국을 돌아보니 비통을 이기지 못하겠고 또 차마 그간 여러분에게 바라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 이에 피로써 글을 올립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 마음을 고쳐 몸보다 임금을 우선하고, 집보다 나라를 우선하여 수적(讐賊)을 토벌하고 오랑캐를 응징하십시오. 그리하여 천지(天地)의 경상(經常)을 부지하고 종사(宗社)의 전형(典型)을 회복시켜 공자의 춘추(春秋)대의에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재격백관문」,『소의신편』권1, 18면)

한편 이에 앞서 이범직은 신지수와 함께 선발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파견되어 갔었다. 그런데 그곳의 수장(守將) 왕무림(王茂林)이 이들의 길을 막았다. 결국 이범직은 참모관 권몽수(權夢洙)와 함께 초산으로 되돌아 왔는데 그때 관군을 만나 권기수와 함께 전사했으니 8월 28일이었다. 류인석과 초기부터 활동했던 맹장이 또 한 사람 순국하는 순간이었다. 이범직 외에도 많은 의병들이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 류인석은 바로 그날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류인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인원은 약 24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의병진이 파저강변(波潴江邊)에 도착했을 때 회인현(懷仁縣)의 현재(縣宰) 서본우(徐本愚)가 의병을 해산하도록 요구하였다. 중국과 일본이 이미 화약(和約)을 맺은 관계로 의병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의병들은 무장해제를 당하고 22명 외 나머지 219명은 귀국하였다. 류인석과 함께 중국에 잔류한 2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류홍석(柳弘錫)·윤정섭(尹鼎燮)·윤양섭(尹陽燮)·김영록(金永祿)·오인영(吳寅泳)·박정수(朴貞洙)·정운경(鄭雲慶)·안신모(安愼模)·김화식(金華植)·구연상(具然庠)·차갑동(車甲東)·원용정(元容正)·송환국(宋煥國)·조봉렬(趙鳳烈)
- 통사(通辭)
김연교(金演敎)
복부(僕夫): 이치수(李致壽)·최춘흥(崔春興)·김석린(金石麟)·심우춘(沈禹春)·李氏·金氏

이제 동행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류홍석[1841. 1. 6~1913. 11. 21, 호는 외당(畏堂), 자는 효백(孝伯)]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류인석의 재종형이다. 1896년 1월 춘천에서 이소응과 봉기하여 가평과 춘천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춘천 의진이 함락되자 제천 의진으로 합세하여 이후 줄곧 류인석의 막하에서 군무를 주재하였다.
윤정섭[호는 매한(梅澗), 자는 경현(敬顯)]과 윤양섭[호는 소백(小白) , 자는 경리(敬理)]은 류인석 의진이 제천을 출발, 충주성으로 진격할 때 합세한 이후 류인석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김영록[호는 윤재(充齋); 자는 사수(士綬)]은 류인석과 동문으로 1895년 11월 독자적으로 격문을 돌려 의병 봉기를 촉구했던 인물이다. 의병진에서는 장재(掌財)의 역할을 맡았다. 저술로 「조선가」가 있다.
오인영[호는 충재(忠齋), 자는 사원(士元)]은 단발령 공포 후 류인석이 제자들과 처변삼사를 논의할 때 주용규·박주순·박정수·최병식·최열·이조승·정화용·홍선표·홍덕표·이정규와 더불어 거지수구(去之守舊)의 방법에 동의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춘영·안승우가 의병봉기에 나서자 거지수구의 종전계획을 수정하여 의병활동에 나섰다. 오인영은 7월 4일(음: 1896년 5월 24일) 중군참모의 직에 임명되었는데 서북지역에 지리가 밝아 서행시기 의병진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박정수[?~1917, 호는 회당(悔堂), 자는 관여(觀汝)]는 처변삼사논의 때 류인석과 같이 ‘거지수구’의 계획에 찬동한 인물이다. 류인석이 영월에서 의병에 참여하자 박정수도 ‘거지수구’의 입장을 바꾸어 의병에 참여하였다. 충주성 점령 시 중군참모에 임명되었다.『운강선생창의일록』·『안공하사실기대략』·『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의사삼계원공을사창의유적』등을 저술하여 의병사의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정운경[1861. 2. 19~1908. 2. 2, 호는 송운(松雲), 자는 화유(和有)]은 정철의 후손이고 제천출신이다. 류인석과 함께 의병진에 참여하였고 1896년 4월 25일(음: 1896년 3월 13일) 홍대석을 대신하여 전군장에 임명되었다. 박정수가 서행시 의지할 만한 장수로 정운경과 서상렬을 꼽고 있었을 정도로 정운경의 류인석 의진에서의 비중이 높았다. 정운경은 의병활동과 관련하여「북유건연(北遊巾衍)」과「동유록(同遊錄)」을 남겼다.
김화식[호는 복암(復庵)]은 1897년 8월 류인석이 일시 귀국할 때 극구 만류하였던 인물인데 척사의식이 강했던 인물로 보인다. 김화식은 제천 전투에서 패한 이후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고 특히 도만 후에는 많은 일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김화식은 서간도에서 1899년『소의신편』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구연상[자는 대규(大逵)]과 관련해서는 1896년 6월 10일(음: 4월 29일) 류인석 의진이 제천에서 패한 후 원주 강천에 주둔하였을 때 관군의 동정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김·차갑동·조봉렬·송환국은 충주에서 의병진의 소문을 듣고 참여해 온 인물들로서 류인석의 측근에서 활동하였다.
안신모는 1896년 6월 3일(음: 4. 22) 황학강 일대를 정찰하고 1896년 6월 7일(음: 4. 26) 이어수(鯉魚水) 일대를 정찰했던 활동기록이 보인다.
원용정[자는 치화(致和), 호는 서암(恕庵)]은 원주 출신으로 호기 있고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군중에서는 부하 다스리기를 엄격히 하였다고 한다. 원용정은 류인석이 충주성을 공격할 때 서상렬·홍선표와 함께 영남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류인석의 참모역할을 담당하여「서행시재정선상소」의 초본을 수정(1896년 7월 2일)하였고, 대화격문(大和檄文: 1896년 7월 11일)과 원세개에게 보내는 구원 요청 서신(1896년 8월 7일)도 작성하였다. 류인석 의병진의 공식 문서는 주로 원용정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하겠다. 주요 저술로「의암류선생서행대략」과 「복은(卜隱)」이 남아 있다.
송환국은 1896년 7월 4일(음: 5. 24) 류인석 의진에서 활동했던 기록이 보인다.
위의 인물 외에도 중국에 들어간 인물이 있다. 의병진의 도만에 앞서 1896년 8월 9일(음: 7월 1일) 류인석이 원세개에게 파견한 이필희·송상규·유치경과 류인석의 도만소식을 듣고 뒤늦게 망명한 류인석의 문인 홍선표·이조승·박제달·홍덕표가 그들이다.
이필희[호는 실곡(實谷), 자는 만여(萬汝)]는 김평묵·류중교의 문인이고 무과출신이다. 단발령 공포 후 처변삼사 논의 때 안승우·이범직과 함께 거의소청의 강경한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1896년 1월 17일(음: 1895년 12 월 3일) 이춘영이 원주에서 기의할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영월에서 류인석이 의병장으로 취임하자 자신은 부군사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진동장(1896년 3월 29일)·별모장(1896년 5월 15일)의 직책을 맡아 의병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유치경[호는 도진(桃津), 자는 경선(景善)]은 평산 출신이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동문들과 그 대처방안을 논의하던 중 류인석의 기의소식을 듣고 제천에서 합류하여 참좌(參佐)의 직책을 맡았다.
송상규는 해서(海西) 출신 인물로 류인석 의진이 해서에 도착했을 때 그에 호응하여 의병활동에 합세한 인물이다.
홍덕표[자는 여질(汝質)]는 처변삼사논의 때 류인석과 함께 거지수구의 계획에 동의했던 인물이다. 도만 이전기간 의병활동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조승[자는 기중(紀仲)]도 처변삼사논의 때 거지수구의 안에 동의했던 인물이다. 류인석이 영월에서 의병장에 오를 때 종사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풍기(1896년 5월 31일: 음력 4월 19일), 정선(1896년 6월 30일: 음력 5월 20일), 청풍(1896년 7월 8일: 음력 7월 8일)에서의 활동기록이 보인다. 저술로『관의재집(寬毅齋集)』이 있다.
박제달[자는 운로(雲露)]은 1896년 3월 14일(음력: 2월 1일) 제천에서 활동한 기록이 보인다.
홍덕표[자는 원옥(元玉)]는 1896년 6월 17일(음력: 1896년 5월 7일) 금대(제천 근방)에서 활동했던 기록이 있다.
이상 1896년 류인석과 도만한 인물은 모두 28명이었다. 이들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 활동기록이 부족하여 이들에 대한 체계적 분석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겠으나 현재 다음과 같은 정도가 파악된다. 인맥 관계를 보면 류인석의 친척, 이항로의 문인, 류인석의 문인이 많고, 지역적인 측면을 보면, 강원도와 충북출신이 주류를 이루나 서북출신의 인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신분적인 측면을 보면 대개 유생이었으나 복부(僕夫)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류인석 의진에서 초기부터 참여하여 활동한 특정이 있는데 즉, 척사의식이 철저한 인물들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일단 천신만고로 서간도에 도착한 류인석은 원세개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기 위해 심양(瀋陽)으로 향하였다. 한편 원세개는 가원계를 보내 원용정을 맞이하였다. 그때 가원계(價元桂)는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이유로 들어 군사지원 요구를 거절하였다. 수 차례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군사지원의 요청을 끝내 결렬되고 청측에서 은자(銀子) 30냥(兩)을 지원하는 선에서 그쳤다.

(5) 중국에서의 활동과 그 의의

류인석은 당시의 국제적인 정황으로 보아 중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원병요청계획을 포기하고 일단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정착하였다. 이때가 1896년 9월(음)이었다.
류인석은 통화로 이동한 후에도 의병재기에의 집념을 보이고 있었다. 류인석은 곧 유치경·원용정·홍선표·이조승을 심양에, 류홍석·오인영·차갑동·김영록을 국내에, 박정수·정운경을 북경에, 박재달·홍덕표를 길림에 각기 파견하여 의병재기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은 통화현에 도착한 후 1896년 12월 11일(음: 1896년 11월 7일) 의병재기를 위해 국내에「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를 띄워 동문사우들로 하여금 서간도에 모일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 땅을 보건대 오랫동안 양국의 경계로 수십 년 전 청나라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금(國禁)이 있어 왔으나 근래에 대황(大荒)으로 인해 금지가 불가능하게 되어 내거(來居)하는 자 만여 명에 이르고 나머지 땅(미개간지: 필자 주)에도 기만호(幾萬戶)가 수용될 수 있습니다. 토지가 심히 비옥하여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일 년을 경작하면 삼사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숙속(菽粟)이 수화(水火)와 같고 사람들이 인심(仁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왕왕 의기가 있어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 이에 사우(士友)들을 취회하고 영웅을 모으면 나의 도모하는 바를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석(麟錫, 류인석)은 제공들이 속이 이곳으로 모이기를 바랍니다. (「여동문사우서」,『소의신편』, 244편)

위와 같이 류인석은 중국에 망명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켜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 자료 중 ‘왕왕 의기가 있어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의 기록에서 보면 의병 재기의 시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현지 주민의 호응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국내에서 의병 재기가 어려웠던 것과 같이 통화현에서의 의병모집도 실행 단계까지 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류인석의 통화현 오도구에서의 활동은 망국단을 세우고 이주민의 애국의식을 고취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치고 만다.
류인석은 1897년 10월(음력: 양력 11월경) 고종으로부터 귀국하라는 칙유(勅諭)를 받고 일시 귀국하였다. 이때 제자들이 귀국하지 말도록 극구 만류하였으나 류인석은 귀국을 강행하였다. 류인석은 귀국하여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일에 칙유를 받지 아니한 것은 바야흐로 군사를 거느리고 일을 하려 한 것이므로 그때에 만약 칙유를 받는다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칙유를 받지 않은 것으로 의리를 삼았으니 곧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말 그대로다. 그러나 지금은 일도 없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칙유를 받지 아나하면 임금을 끊는 것이니 이것은 군신의 인륜을 멸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또 군자는 그럴듯한 방법 앞에는 속을 수 있는 것이니 비록 그 무리들의 농락하는 간사한 꾀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칙유의 말뜻이 이미 의리에 합당하니 신하된 자가 울며 일이 되도록 꾀하는 것이 옳다.(이정규,「종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634면)

류인석은 1898년 1월(음: 양력 2월경)까지 국내에 체류하고 다시 통화현 오도구로 망명하는데 이때에는 류인석의 문인사우(門人士友)들이 대거 동행한다. 전후 서간도에 망명한 인물은 다음의 71명이 확인된다.

윤정섭(尹鼎燮)*·고석노(高石魯)·유치경(兪致慶)*·채순묵(蔡淳黙)·변석현(邊錫玄)·이소응(李昭應)·이필희(李弼熙)*·김화식(金華植)*·김영록(金永錄)*·오인영(吳寅永)*·박재양(朴在陽)·신명균(申明均)·백삼규(白三圭)·원세병(元世炳)·이종하(李鍾夏)·신지수(申芝秀)·송상규(宋尙奎)*·박정수(朴貞洙)*·안신모(安愼模)*·임이섭(林理燮)·홍종훈(洪鍾熏)·김상태(金尙台)·권해진(權海鎭)·남영수(南永洙)·정락삼(鄭樂三)·오세만(吳世晩)·최락구(崔洛九)·우종하(禹鍾夏)·구연상(具然庠)*·최능흡(崔能洽)·박제규(朴齊逵)*·이정규(李正奎)·차재정(車載貞)·한세섭(韓世燮)·김태원(金泰元)·허식(許植)·이원린(李元燐)·장기정(張基正)·신혁희(申赫熙)·홍선표(洪璇杓)*·정현서(鄭賢緖)·한홍모(韓弘模)·서상묵(徐相黙)·변승수(邊承洙)·이조승(李肇承)*·임창호(林昌鎬)·이선교(李善校)·허명(許命)·이제규(李濟奎)·장인환(張麟煥)·박예선(朴禮善)·류제승(柳濟昇)·한도섭(韓道燮)·강진국(康進國)·우제홍(禹濟洪)·홍덕표(洪德杓)*·홍직표(洪直杓)·정화용(鄭華容)·김정업(金鼎業)·문석헌(文錫瓛)·김용제(金庸濟)·김상학(金相鶴)·유도식(劉道植)·이치수(李致壽)·최근창(崔根昌)·박태진(朴泰鎭)·정수봉(鄭壽鳳)·이만성(李萬成)·송환국(宋煥國)*·김유성(金有成)·최춘흥(崔春興)
(「연보」,『의암집』, 677면)
(*표는 1896년 8월 망명 때 동행한 인물임.)

망명 후 1898년 여름, 이들은「재입요동약정의체(再入遼東約定義諦)」를 지어 척사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만고의 화하일맥(華夏一脈)이 타진(墮盡)된 지금 천신만고로 그 전형(典型)을 준보(準保)하여 화하(華夏)의 래복(來復)을 기다림이 진실로 우리 마음이다. 비록 하루의 화하(華夏)를 살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재입요동약정의체」,『소의신편』권3, 76면)

위의「재입요동약정의체」의 특징은 ‘거지수구’의 성격이 강한 점이다. 이는 ‘거의소청’의 목적하에 실행된 1차 망명과는 성격이 다른 점이다. 그러면 류인석은 의병 재기의 계획을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류인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금일의 수의(守義)는 토복(討復)을 잊은 것은 아니다. 수의(守義)를 성실히 하면 또한 토복(討復)의 기틀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양자는 별도의 의미는 아니다.(「팔왕동어록」,『소의신편』, 222면)

즉 류인석은 ‘수의’의 전제로 ‘거의소청’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류인석의 통화현에서의 활동은 의병재기를 위한 준비기로 볼 수 있다. 이는 원주에서의 ‘거의소청’의 입장이 계속 견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류인석은 약 9개월간 오도구에서 생활한 후, 1898년 10월(음) 인근의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하였다. 팔왕동에서 활동의 특정은 향약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다. 류인석은 주민들에게 가정에서의 효제(孝弟)와 국가 충순사상(忠順思想)을 가르치기 위해 향약을 실시했다고 한다. 아울러 공자·주자·송시열·이항로·류중교의 영정을 받드는 사당을 지어 화맥전수(華脈傳受)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도 하였다.
류인석은 저술활동에도 전념하였다. 류인석의 주요 저술에 속하는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 1899. 2)」, 「출처설(出處說)」, 「국병설 (國病說: 이상 1899년 여름) 」 등이 이때에 저술된 글이다. 이는 류인석이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지은 글이다. 특히『동국풍화록』은 우리나라 역사상의 덕학(德學)·명절(名節)·사업(事業)·충효(忠孝)·열사(烈事)와 관련한 사실들을 모은 국사서(國史書)인데 고조선 시기부터 다루고 있다. 류인석은 이 책을 국내에 유포하고 유림들에게는「통고경성급팔도각읍사림문」(通告京城及八道各邑士林文; 경성 및 팔도 각 읍의 사림에게 보내는 글)을 보내 위의 책을 백성들에게 읽혀 교화의 마음을 일으키도록 당부하고 있다.

제5장 귀국 후 강회(講會) 및 향약운동(鄕約運動)의 추진

1900년 중국에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전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류인석도 중국에서의 계속적인 체류가 어렵게 되었고 1900년 7월(음) 귀국하였다. 이 시기 류인석의 나이 59세였는데 귀국 이후 류인석은 1908년 러시아로 다시 망명하기까지 강회활동과 향약운동에 치중하였다.

1. 강회활동(講會活動)

류인석은 귀국한 후 제천을 중심한 중부지역 및 관서지역 일대를 순회하며 강회활동에 전념하였다. 강회의 내용은 ‘존화(尊華)의 의(義)를 표창(表彰)하고 사림(士林)의 모범(模範)을 건립’하자는 위정척사사상이 근간을 이루었다. 비교적 규모가 컸던 강회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901. 4.~8.: 관서지역순회; 평산(平山)·숙천(肅川)·태천(泰川)·철산(鐵山)·용천(龍川)·안주(安州) 등지를 순회하며 강연. 숙천에서는 유생 수백 명이 모였다.
2) 1901. 9.: 개천(价川); 숭화재(崇華齋)를 설립하고 강회.
3) 1902. 5.: 용천(龍川); 용천의 유생 장세정(張世瀞)·문봉기(文鳳岐) 등이 옥산재(玉山齊)를 건립하고 류인석을 초치해 장회를 열었다.
4) 1903. 8. 19: 제천; 청성묘(淸聖廟)에서 강학(講學)하였는데, 약 1,000여 명의 유생들이 참석하였다.
5) 1903. 9. 15.: 제천; 대노사(大老祠)에서 강학하였는데, 약 3,000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다.
6) 1905. 2. 7.: 제천; 제천읍에서 맹자의 일치일란장(一治一亂章)을 강학하였는데, 약 1,000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다.
7) 1905. 8.: 만동묘(萬東廟)에서 대규모 강회를 계획하였으나 류인석의 각병(脚病)으로 열지 못하였다.
위의 강회들은 비교적 집회의 규모가 커 강회 내용들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들인데, 이외에 소규모의 강회도 많이 열렸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으므로 류인석이 강회하며 이동한 경로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900: 통화현 팔왕동 → 강계(江界) → 개성(開城) → 파주(坡州)→ 가정(柯亭) → 제천(堤川) → 평산(平山)
2) 1901: 구월산(九月山) → 해주(海州) → 평산(平山) → 숙천(肅川) → 태천(泰川) → 철산(鐵山) → 용천(龍川) → 안주(安州) → 묘향산(妙香山) → 죽천(竹川)
3) 1902: 평양(平壞) → 용강(龍岡) → 선천(宣川) → 용천(龍川) → 개천(价川)
4) 1903: 송화(松禾) → 해주(海州) → 평산(平山) → 연안(延安) → 여주(驪州) → 가정(柯亭) → 개천(价川)
5) 1904: 평산(平山) →은율(殷栗) →구월산 정곡사(停穀寺) → 평산(平山) → 가정, 곡운(谷雲)
6) 1905: 제천 → 선주(宣州) → 곡운(谷雲) → 운담(雲潭) → 평산 → 은율 → 개천 → 곡운
7) 1906: 서흥(瑞興) → 평산 → 서흥, 속령사(續令寺) → 평산 →은율 → 가정
이 시기 류인석의 강회활동의 특징은 지역적으로 제천 일대를 위시해 북부지역에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사실이다. 류인석이 멀리 떨어진 북부지역에까지 가서 활발히 강회활동을 벌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 관서지방은 이항로의 문인인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가 일찍부터 많은 제자(신석원·채갈산 등)들을 양성하여 놓았기 때문에 이항로 제자인 류인석을 맞이할 학문적 토대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류인석의 서북지역에서의 강회는 전기의병 때 류인석이 구상했던 서북지역을 근거지로 한 의병 재봉기의 계획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즉 류인석의 의병봉기의 의지는 끝난 것이 아니었고 단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위와 같은 강회활동은 의병 재봉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즉 류인석의 강회활동은 후일 류인석 문인들의 중기·후기 의병 봉기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2. 향약(鄕約)의 시행

류인석이 향약을 실시하는 것은 1904년 10월인데 동학(東學)의 일부 세력이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고 친일(親日)행각을 벌이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류인석은 일제세력의 확장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방책으로 향약을 구상한 것이다.
류인석의 본래 계획은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조병세(趙秉世)·이용원(李容元)·윤용구(尹用九) 등 중망(重望)있는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중앙에 도약소(都約所)를 설치한 다음 전국의 도(道)·읍·면·리에 약소(約所)를 설치하는 대규모의 향약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위의 계획은 최익현이 도중 고종의 소환을 받아 서울로 올라감으로써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류인석은 우선 제천향약부터 시행하였다. 제천향약에는 제천 관내 8개면이 참여하였다.
제천향약은 ‘향선생(鄕先生)’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향선생의 직책에는 모든 사람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이 추대되었다. ‘향선생’의 직책에 적임자가 없는 경우는 도유사(都有司)를 선정해 향약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당시 제천 유림들은 류인석에게 향선생의 직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류인석이 굳이 사양하여 이직선이 도유사로 추대되었다. 도유사의 아래에는 도약정(都約正)이 실제 업무를 통괄하였고, 그 아래 부약정(副約正, 2인)·직월(直月, 21인)·부직월(副直月, 27인)·장의(掌議, 2인)·사정(司正, 2인)·집례(執禮, 4인)·독물(讀笏, 5인)·상례(相禮, 6인) 등이 있어 도약소의 임원만도 70여 명이 되었다. 8개 각 면에서의 향약은 위의 조직체계와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다.
제천향약의 임원은 모두 142명에 달하였는데 구성원들의 특징은 전기의병에 참여했던 인물이 많다는 점이다. 현재 다음의 26명이 확인된다.

「제천향약 임원 중 전기의병 참여자」
성 명 직 책 출 신 비 고
이직신(李直愼) 도유사(都有司) 유학(幼學) 춘천의병장
유치삼(兪致三)
이병선(李炳善) 현우약정(縣右約正) 전 교관(敎官)
이직응(李直應) 직월(直月) 전 주사(主事)
이정규(李正奎) 장의(掌議)
우기정(禹冀鼎)
강수명(姜秀明) 상례(相禮) 유학(幼學)
지원영(池源永) 집례(執禮) 유학(幼學)
김홍경(金鴻卿) 동면사정(東面司正) 유학(幼學)
원규상(元奎常) 근우직월(近右直月) 유학(幼學)
이재열(李載烈) 직월(直月) 진사(進士)
강수종(姜洙鍾) 남면직월(南面直月) 1907년 이강년 종사관
이복연(李福淵) 부직월(副直月) 유학(幼學)
유진필(兪鎭弼) 도약정(都約正) 전 참판(參判)
강순희(姜順熙) 사정(司正)
이용식(李容植) 부약정(副約正) 전 군수(郡守)
권필수(權珌洙) 직월(直月) 유학(幼學)
안흥원(安鴻遠) 부직월(副直月) 유학(幼學)
이풍림(李豐林) 부직월(副直月) 유학(幼學)
김복규(金復圭) 부직월(副直月) 전 주사(主事)
최병식(崔秉軾) 부직월(副直月) 유학(幼學)
유진하(兪鎭河) 부직월(副直月) 유학(幼學)
이용규(李容奎) 현우사정(縣右司正) 유학(幼學)
류흥문(柳興文) 현좌직월(縣左直月) 유학(幼學)
정술원(鄭述源) 남면약정(南面約正) 유학(幼學) 류인석 의진 종사
박문선(朴文善) 현좌직월(縣左直月) 유학(幼學)

(*자료: 최재우,「한말 제천지방 향약의 위정척사적 성격」,『충북사학』제2집, 1989, 53~54면에서 재정리.)

위와 같이 보았을 때 제천향약에는 그 이념 뿐 아니라 인맥상으로도 전기의병의 맥락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제천향약이 실시된 후 인근지역에서도 이를 본받아 곳곳에서 향약을 실시하였는데 그 때문에 제천 및 원주 일대에는 일진회 조직이 침투하지 못했다.

제6장 러시아 망명과 독립운동 근거지 설치

1. 중기의병 시기의 류인석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우리나라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고(일본군이 한국에서 전략요충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 인정), 1904년 3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군사침략의 중추기관)을 설치하였으며,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協定書)’를 체결하는 등 일련의 침략정책을 강행하여 갔다. 일제의 이 같은 책동에 의병봉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시기(1904년)의 의병봉기는 대체로 이전의 광무농민운동(光武農民運動)이 의병전쟁으로 전환되어 가는 형태를 띤다.
위와 같이 1904년부터 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기운은 1905년에 11월 ‘을사5조약(을사늑약)’ 이후 더욱 확산되었다.
중기의병 활동 중에서 류인석과 관련해서는 그의 제자 정운경·원용팔의 의병봉기가 주목된다. 중기의병 시기 유생들이 봉기하는 것은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공포 이후의 일인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원용팔의 봉기는 중기의병 시기 유생의병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원용팔(1862. 2. 17~1907. 3. 13)은 호는 삼계(三戒), 본명은 원용석(元容錫)이고 충북 제천군 한수면 서운 출신이다. 일찍이 전기의병 때 여주의병장 심상희(沈相禧)의 후군장·호좌창 의진의 중군장으로 활동한 바 있는 의병장 출신이다.
원용팔은 1905년 8월16일(양) 원용수(元容銖)·채순묵(蔡淳黙)·김락중(金洛中) 등 8인과 함께 풍정(楓亭)에 모여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곧바로 주천·단양·영춘·영월을 이동하며 의병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때 류인석의 제자로는 박정수(朴貞洙)·정운경(鄭雲慶)이 참여하였다. 의병진은 영춘에 이르러서 포군 수백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확대되어 갔다. 당시 원용팔은 류인석에게 아래의 글을 보냈다.

현재의 불행한 형편으로 말한다면 일본이 말로는 고문(顧問)이라는 명색을 갖고 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고 소위 10부 대신이라는 것은 벌써 일본 정부로 화하였습니다.
들판을 태우는 큰 불길이 8도로 퍼져서 시골에 약간 남은 옛 풍속도 몇 달 안에 다 없어지게 되고 소위 재판이니, 세금을 받느니 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 새로 정한 약조가 160여 조나 된다고 하니 무슨 흉모(凶謀)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차례차례 실시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말 것입니다.
이 시기 형편은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 나를 죽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산림 천택(川澤)을 점거하는 일이나 호구를 등록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우리를 나라로 보는 일이 없으니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悔堂集』,『독립운동사』제1권, 의병항쟁사, 335면에서 재인용)

이 서신은 원용팔이 전기의병의 지도자이자 그의 스승인 류인석에게 속히 의병 봉기에 나설 것을 건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즈음 류인석은 심한 각병(脚病)으로 거동이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의병봉기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류인석은 두 차례의 서신을 보내어 원용팔의 봉기계획을 격려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만다.
의병봉기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침략정책을 강행하여 1905년 11월 27일,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소위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때 류인석은 전국 유림들에게 통고서(通告書)를 발송하여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고 무력으로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 범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조약(을사늑약, 1905)의 체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문인 백인해(白仁海)를 천진의 중국북양대신(北洋大臣) 원세개(袁世凱)에게 보내어 군사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 류인석의 문인사우들이 의병봉기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류인석의 문우(文友) 최익현이 1906년 5월 6일(양) 전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林炳贊)과 더불어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에서 거병하여 순창(淳昌)·담양(潭陽)·곡성(谷城) 등 인근의 여러 읍을 점령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때 류인석도 그의 제자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을 보내어 최익현을 지원하였다.
또 류인석의 문인 이강년(李康䄵)은 1907년 3월 제천에서 봉기하여 단양(丹陽)·제천(堤川)·원주(原州)·연풍(延豐)·영월(寧越)·횡성(橫城)·강릉(江陸)·청풍(淸風)·충주(忠州)·문경(聞慶)·예천(醴川)·영주(榮州)·봉화(奉化)·안동(安東) 등을 이동하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유생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활동양상은 유격전 형태로 전개하였던 점이 특징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지사들은 류인석이 의병의 지도자로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류인석은 그의 저술「서악문담(西嶽問答)」(음력 1906년 3월 저술)에서 밝힌 대로 심한 각병으로 의병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
요컨대 중기의병 시기의 류인석의 활동은 원용팔·이강년·최익현 등 문인사우들의 의병활동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2. 장기전(長期戰)을 위한 근거지(根據地) 구상과 러시아 망명

일제는 중기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침략야욕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헤이그밀사 파견 사실을 트집 잡아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1907)’을 체결한 후 차관(次官)정치를 시작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정규군대까지 강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해산군인들도 의병전선에 참여하여 의병봉기가 다시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를 후기의병이라고 한다.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류인석은 의병전쟁의 전략을 어떻게 구상하였을까. 류인석은 의병들이 일제와 즉각적으로 정면 충돌하는 전략에 찬성하지 않았다. 류인석은 의병과 일제의 군사력을 감안하고 또 그 동안의 의병활동 경험에 비추어 당시의 의병역량으로는 즉각 일제를 구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즉 류인석은 의병들이 전투를 피하며 군사력을 키워나갈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류인석은 일단 러시아로 들어가 더 많은 의병을 모집해 국내의병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장기적 항쟁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유사시의 나라 안에서의 계책을 생각해 볼 때 어찌할 방도가 없다. 출강(出疆)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국내의 충의호걸(忠義豪傑)들을 맞이하여 형세를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아 부흥을 기하고 싶다. 국가의 존망·인류의 존망이 이 일거에 있으니 이는 대사(大事)이다. 다만 이 대사가 잔열(殘劣)한 이 사람에게 맡겨짐이 두려우나 하늘의 뜻의 여하를 기다릴 뿐이다. (「여동지사우서」(與同志士友書: 동지 사우에게 올리는 글),『의암집』, 상권, 589면)

류인석은 1907년 8월(양) 동생 류하석(柳夏錫) 외 김낙원(金洛源)·김형전(金衡銓)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露)으로 각병에 중풍이 겹쳐 류인석은 러시아 망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류인석은 신병치료를 위해 서울에 체류하게 된다. 그러나 류인석의 문인 박치익(朴治翼)은 후일 류인석의 망명을 대비해 러시아로 향하였다.
후기의병 시기 류인석의 국권회복전략은 일정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실천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던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일정 지역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는 구상을 ‘근거지 구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류인석의 근거지 구상은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楊州)의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에 보낸「여제진별지(與諸陣別紙)」에 잘 나타나 있다.
류인석은 우선 서울 진공계획의 무모함을 비판하고 바람직한 전략은 조선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하고 지구(持久)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지배체제를 조직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차선책으로 ‘북계(北計)’를 구상하였다. 그러면 ‘북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류인석이 구상한 ‘북계’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주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에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류인석은 ‘북계’의 유리함에 대하여 3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첫째는 지리적 조건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류인석은 백두산의 지리적 조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각건대 백두산은 일국의 근저로서 부근의 제읍 즉 무산·삼수·갑산·장진·자성·후창·강계 등이 절험(絶險)하여 요충지가 될 만하니 이를 근거지로 삼으면 대사를 도모할 만하다.(「여제진별지」,『의암집』, 상권, 592면)

둘째는 무장투쟁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 조성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서북인은 강경하고 포를 쏘는 데 능하며 서북지방은 북간도와 서간도에 인접해 조선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듣건대 이 지방에서 호응하는 기세가 없지 않다 하니 이것을 서로 연결하여 병력을 모아 기를만하고, 재곡(財穀)을 모을만하고 병기를 만들거나 구입하기가 좋다. (중략)
듣건대 삼수·갑산·북청은 이미 의병이 일어나서 기세가 매우 장하고 장진·강계 또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이제 동남의 병사 수천 명이 여기에 합류하면 세력이 강대해질 것이다. 따라서 서북 제읍은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여제진별지」,『의암집』, 상권, 592면)

셋째, 국제적인 환경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즉 의병전쟁을 전개하다가 유사시에는 청나라 혹은 러시아의 원조를 구하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류인석의 근거지 구상은 전기의병활동과 망명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의 결정체로 보이며 이는 당시에 있어서는 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독립군기지 개척구상과 쌍벽을 이루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었다. 이는 의병운동자들이 그 이전의 즉각적인 결전론(決戰論)을 일부 수정하여 계몽운동의 준비론에 접근해 간 구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리는 여기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방략이 합류하는 양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1920년대 이후 30년대에 백두산에 연결되는 북간도와 서간도의 산악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던 점에서 류인석의 위와 같은 근거지 구상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원(遙遠)의 불길로 얼어나던 후기의병도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전이 실패한 후 1908년 l월을 고비로 규모면에서 점차 위축되어 갔다. 이후 국내의 의병활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민족과업을 달성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류인석도 1908년 7월(음) 러시아로 향한다.
1904년 이후 1908년 망명하기까지 류인석은 일제의 침략양상을 목도하면서도 스스로는 심한 병으로 인해 일체의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답답한 시기가 아니었나 한다. 류인석은 망명길의 답답한 심정을 다음의 시로 남겨 놓았다.

병든 한 몸 작기는 하고(裝病一身小)
휘날리는 범선 만 리 길이 가볍구나(揚帆萬里輕)
나라의 운명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國命今何境)
하늘이 이 길을 재촉하도다.(天心付此行)
풍운은 때때로 변하는데(風雲時變化)
일월만이 홀로 밝고(日月獨生明)
옆 사람은 부질없이 웃고 있으나(傍人空笑語)
나의 마음은 아득할 뿐이로다.(茫昧我中情)
(「북해주중작(北海舟中作)」,『의암집』, 상권, 27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류인석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박양섭(朴陽燮)·우병열(禹炳烈)·김재철(金載鐵)·김병간(金秉僴)·이남기(李南基)·박정빈(朴貞彬)·정인설(鄭寅卨)·김상여(金商與)·김병진(金秉振)·차재정(車載貞)*·박문선(朴文璿)·박규승(朴奎承)·변승수(邊承洙)*·이진룡(李鎭龍)·심노술(沈魯述)·백진해(白鎭海)·최우익(崔于翼)·허승현(許承炫)·강진국(康進國)*·박이채(朴彝采)·박병강(朴炳疆)·김영섭(金榮燮)·안재희(安在熙)·김만송(金晩松)·안종석(安鍾奭)·박용근(朴龍根)·우문선(禹文善)·박승연(朴勝衍)·김기한(金起漢)·이병태(李炳台)·이석기(李錫驥)·허승렬(許承烈)·홍석우(洪錫禹)·백경환(白慶煥)·백숭제(白崇濟)·김두운(金斗運)·한봉섭(韓鳳燮)·성시원(成時源)·김봉래(金鳳徠)·석진재(石鎭哉)·강철묵(康哲黙)·김영희(金永禧)·이함(李涵)·김성룡(金性龍)·이동섭(李東燮)·변완규(邊完奎)·김동려(金東勵)·이중희(李重熙)·지희전(池熙銓)·박재눌(朴載訥)·정승규(丁承奎)·정홍규(丁弘奎)·강기복(康基復)·현경균(玄敬均)·한상설(韓相說)·문승도(文昇道)·박영실(朴永實)·이철수(李哲洙)·안수만(安壽萬)·방서봉(方瑞鳳)·강규복(姜圭復)
(*는 1898년 망명 때의 동행자)

한말 의병장들에게는 ‘승패는 상관없다 오직 의로써 일어날 뿐이다’라는 명분적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류인석은 달랐다. 나라가 망한 암울한 상황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에 고심하였다. 그 고심의 결과가 러시아 망명을 통한 ‘근거지 개척’ 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3. ‘의병규칙’과 민중조직 ‘관일약’(實一約)

류인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1908년 8월(음) 연추(煙秋, 노우키에프스크) 중별리(中別里)에 도착하였다. 연추(노우키에프스크)는 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일찍부터 최재형(崔在亨)과 이범윤(李範允)이 이주 한인들을 모아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류인석은 1908년 10월(음력) 이범윤과 함께 ‘의병규칙’을 제정하여 조직적인 의병활동을 위한 지침으로 삼았다. 의병규칙은 35개조에 달하는 긴 글인데 그 주요 내용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병규칙’
一. 이 의거야말로 천추만대의 큰 의미이며 천하의 큰 업적이다. 사람이 누구나 한번 죽음은 있는 것이니 죽어서 절의를 세운다면 이 죽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이 삶이 얼마나 보람 있겠는가. 그런즉 우리는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큰 의리를 밝히며 큰 업적을 완수하자.
一. 진군(陣軍)은 백 명으로 1대 삼아 제1대·제2대라고 칭하며 각 대에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통솔력이 있는 사람을 대장과 분대장으로 삼아 각각 병졸 50명을 거느리게 한다. 언변이 있고 전투에 능한 자를 십장(什長)으로 삼고 병졸 10명을 거느리게 하며 신망 있고 용감하며 겸하여 여러 사람을 어거할 수 있는 자를 총영장(總領將)으로 삼는다.
一. 군중에서는 신의(信義)로써 근본을 삼는다.
一. 기밀을 신중히 다루어라.
一. 군수품 일관(一實)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무릇 행군 시는 재정과 식량이 제일 중요한데 의병이 스스로 식량을 마련할 수 없고 돈을 지어 쓸 수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으니 나라의 재물을 취해 쓰고,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니 백성의 재물을 취해 쓸 수밖에 없는 일이다.
一. 오늘날 관찰사와 군수는 모두 왜적의 앞잡이니 일체 배척하여 그 명령을 받지 말라.
一. 13도의 의병이 모두 일어났으므로 왜적들이 아직도 저희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일어나야 한다.
一. 군사를 징발할 때는 반드시 한유(閑遊)한 자를 취하고 농민은 보류해 두어 실농(失農)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포수와 출전(出戰)을 자원하는 자는 반드시 형제 중 한 사람을 취하고 독신(獨身)은 보류한다.
一. 각 읍에는 의리를 알고 지조가 있는 자를 추대하여 읍총재를 삼아 진장(陣將)을 지휘하게 하고 각 도에는 덕망과 신의가 현저하여 일도(一道)의 영수(領首)가 될만한 자를 추대하여 도총재(道總裁)로 삼아 열읍총재를 관할하게 하며 도통령과 열읍총재는 그 지휘를 받아 감히 어기지 못한다. 또 각 도에서 충의(忠義)와 역량(力量)과 덕망(德望)과 좌지(坐地)가 13도의 인심이 복종하고 향응(響應)할 만한 자를 추대하여 13도 도총재를 삼아 도통령(都統領)과 각 도 총재를 관할하게 하며 도통령과 각 도 총재는 그 절제를 받아 감히 어기지 못한다.
一. 무릇 우리나라의 지형은 백두산 부근에 있는 여러 고을이 가는 곳 마다 험준하여 일당백(一當百)의 요새지이며 또 청국과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에 접경(接境)이 되어 군량을 저축(儲蓄)하고 병기를 무역해 올 길이 있으니 이곳에 근거지를 정하면 족히 견고한 지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一. 적을 섬멸(殲滅)하는 계책은 먼저 지방에 분포한 부대부터 소탕하고 다음에 그 근거지(즉 서울: 필자 주)를 공격한다.
(『의암집』권 36 하권, 경인문화사, 1973, 133~141면)

위의 내용에서는 4가지 내용이 주목된다. 첫째, 13도 도총재의 지휘 아래 전국 의병의 조직을 연계시키고 있는 사실이다. 의병의 전국적 조직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은 1910년 6월 21일에야 조직되는데 그 구상은 이미 1908년 10월(음) ‘의병규칙’에서 마련되고 있었다.
둘째, 의병활동의 재원(財源)과 관련하여 백성에게서의 징발과 징용을 정당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전 대부분의 의병은 의병활동에 있어서 민가에 대한 피해를 크게 염려하고 기피하여 왔는데 ‘의병규칙’에서는 민가에서의 징발을 명문화하여 정당화 시켰다. 이는 의병전쟁의 참여자들이 의병전쟁을 국가 간의 전쟁개념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셋째, 백두산을 중심한 근거지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이는 류인석이 러시아로 망명하기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계획이다.
넷째, 일제구축의 전략으로 ‘선지방 후경성(先地方後京城)’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1907년 말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전이 실패한 후 의병전선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사실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의병규칙’에서는 실효 없는 소모전을 지양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의병규칙’의 구상은 당시 일제의 우세함과 의병진영의 불리한 실정을 감안한 현실적인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7월에 이르러 류인석은 의병활동의 장기적 전개를 위한 구상의 일환으로 관일약(實一約)을 제시하였다. 관일약은 향약제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던 점이 특징이다.
류인석은 관일약 실시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왜 관일약을 실시하는가. 부득이하여 실시하는 것이다. 왜 부득이한가. 지금 섬 오랑캐의 화(禍)가 극에 달하여 국가가 망하고 도덕이 멸하며 신체를 보존치 못하고 사람은 모두 진멸(盡滅)하였으니 이 약(約)을 실시하는 것이다.(「관일약서(實一約序)」『의암집』하권, 295면)

인석(류인석)은 외람된 일이기는 하지만 일약을 지어 관일약(實一約)이라 한다. 애국(愛國)·애도(愛道)·애신(愛身)·애인(愛人)으로써 언약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통함을 하나로 한다. 이로써 이 땅에 사는 제현(諸賢)이 먼저 일심동체가 되어 먼저 보신(保身)·보도(保道)하고 나아가 국권회복을 기하고 인류를 구하기 원한다.(「통고」,『의암집』권 37, 하권 168면)

즉 류인석은 관일약 실시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회복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인석은 국권회복의 달성은 단지 우리 민족만을 구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를 구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관일약의 실천강령은 목(目)·요(要)·실(實)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목(目): 애국심(愛國心)·애도심(愛道心)·애신심(愛身心)·애인심(愛人心)
2) 요(要): 마음을 4애에 두어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통일되는 경지.
3) 실(實): 정(精)을 모으고 성(誠)을 하나로 하여 금석(金石)을 꿰뚫는 경지.
관일약의 조직은 약장(約長)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그 아래 별유사(別有司)·장의(掌議)·장무(掌務)·사규(司規)·찬의(贊議)·간무(幹務)·직월(直月)·사적(司籍)·사화(司貨) 등을 두었다.
이상 류인석이 구상한 관일약의 의병적 성격을 보았다. 그러나 관일약이 실제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독립군 근거지 구상과 우리의 전통조직을 접목시킨 구상은 의미 있는 것이라 하겠다.

4.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

1910년에 이르러 노령(러시아령)지역의 민족 운동가들은 노령(러시아령) 뿐 아니라 만주(滿洲) 및 국내까지를 연결하는 전 민족적 연합의병부대 조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연추(煙秋: 노우키에프스크)지역에서 활동하던 류인석·이범윤·이기남(李基南)·이상설(李相卨) 등이 1910년 6월 21일(음: 5월 15일) 13도의군을 조직하였다. 이와 같은 전민족적 연합의병의 구상은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의병규칙」(1908. 10: 음)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즉 국내·외의 전 민족적 연합의병 조직 계획이 수립된 후 그것이 실행되는 데는 약 19개월의 기간이 경과한 것이다. 이로 보면 당시 노령(러시아령)지역에서의 민족운동도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보겠다.
13도의군 도총재(都總裁)에는 류인석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류인석은 중국 봉천(奉天)에 망명해 있던 왕실의 이재윤(李載允)을 도총재에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는 의병조직을 왕실과 연계시킴으로써 조직의 권위를 극대화하고 그리하여 국민 지원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류인석은 이재윤에게 13도의군 도총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이재윤으로부터 회답이 없었다. 결국 이범윤·이남기·이상설 등이 다시 류인석에게 강권(強權)하였고 류인석은 도총재의 직책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13도의군의 조직은 거의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만주·노령(러시아령) 등 각지에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집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러한 계획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있어서는 대단히 힘든 과업이었다. 류인석은 결성식에서 여러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오백 년 신성한 종사(宗社)가 망함에 이르렀다. 또 수천만 예(禮)의 인류가 진멸(盡滅)하기에 이르렀다. 원통하도다. 도맥(道脈)을 붙잡지 않을 수 없으며 강역(疆域)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만고의 대의(大義)이고 천하의 대사(大事)이다. 대의를 펴고 대사를 이룸이 단지 우리 동료 의인(義人)의 일심진력(一心盡力)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동의인(同義人)들은 반드시 일심전력하여 의를 펴고 사(事)를 이루어 스스로 대공(大功)을 이룰 것이며 만약 마음에 힘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자라면 의사(義事)는 괴패(壞敗)하고 스스로는 낭패에 이를 것이니 스스로 그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모두 면려할지어다.(『의암집』권36, 하권, 경인문화사, 1973, 150면)

그리고 13도의군에서는 임명된 국내외의 의원(議員)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였다.

[통고 국내외 의원: (通告 國內外 議員)]
금일 13도의군 도총재를 받들어 추대하여 도총재께서 단에 오르셨다. 일에는 통기(統紀)가 있어야 하므로 명령은 한 곳에서 나올 것이다. 국권을 회복하고 인류를 구하며 화맥(華脈)을 보존하고자 하는 바 천지에 기(氣)가 증(增)하고 명(明)이 광(光)을 생(生)하며 만세가 태평하니 이는 길조이다. 모든 대소 의원들은 극히 총재를 숭경하고 신명같이 받들고 부사(父師)와 같이 존중할 것이며 규율을 위월(違越)치 말 것이다. 규율을 위월하면 그를 다스릴 것이다. 또한 각자 맡은 바 명을 받들 것이며 태만한 즉 유죄(有罪)로 다스린다. 임첩(任帖)을 내려 보낼 때에 받지 않는 자는 멸국멸의(蔑國蔑義)하는 자로 알고 단연(斷然)히 법으로 행할 것이다. 만일 거리가 멀다고 하여 이를 믿고 명을 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행법(行法)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벌은 마땅히 우중(尤重)하리라. 대저(大抵) 군에는 기율(紀律)이 있는 것이오 지극히 엄차중(嚴且重)하니 -(중략)- 모든 대소 의원은 마땅히 이 뜻을 받들어 총단위(總壇位)의 명의(命意)를 받들도록 하라. 삼가 이에 통고한다. (『의암집』하권 150면, 경인문화사, 1973)

이제 13도의군의 조직을 살펴보자. 중앙의 조직은 도총채 아래 부총재·창의총재(影義總裁)·장의총재(壯義總裁)·도총재(道總裁)·도총령(都總領)·도참모(都參謀)·도총무(都總務)·도소모(都召幕)·도규찰(都糾察)·도통신(都通信)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 조직으로는 각 고을마다 총재·총통(總統)·참모·총령(總領)·소집(召集)·규찰(糾察)·통신(通信) 등의 임원을 두어 이를 도(道)총재가 거느리고 도(道)총재는 다시 13도 총재의 지휘를 받도록 편성하여 전민족 단일조직으로 계통화 하였다. 조직의 구성원 중에서 현재 다음의 인물들이 확인된다.

도총재: 류인석
장의총재: 이범윤
도총소 참모(都總所參謀): 우병렬(禹炳烈)
의원: 이진룡(李鎭龍)·이갑(李甲)·홍범도(洪範圖)·안창호(安昌浩)
외교대원: 이상설(李相卨)

참여인물의 성격을 간단히 보자.
이범윤(1856. 12. 29~1940. 10. 20)은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으로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이다. 1902년 6월 북변 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의 직책을 받아 간도에서 이주한인들을 관리하였다. 그때 이범윤은 우리 이주민들을 청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포대(私咆隊)를 조직할 정도로 이주민 권익보호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간도 지역은 1881년부터 영유권 문제로 청나라와 잦은 의견 대립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범윤이 부임할 시기에는 그 충돌이 첨예화하였다. 한편 이범윤은 노일전쟁(러일전쟁, 1904) 때에는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할만큼 일제침략에 대해서 일찍부터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터였다. 노일전쟁(러일전쟁, 1904)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제는 1907년 간도에도 마수를 뻗어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이범윤은 일제의 통제를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러시아에서 이범윤은 연추를 근거지로 항일 무장활동을 계속 하였다. 이범윤은 1908년 이후 국내의 의병이 함북·함남 일대에까지 확산되자 그때 창의회(彰義會)를 중심으로 군자금과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주한인들의 호응이 대단하였는데 군자금은 30여만 원, 의병 병력은 4,0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범윤은 노령(러시아령)지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우병렬은 황해도에서, 이남기는 함경도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인물인데 모두 류인석의 문인(門人)으로 류인석이 러시아로 망명할 때 통행하였다.
이진룡은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으로 류인석의 제자이다. 이진룡은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이 체결되자 의병활동에 나서 러시아와 국내를 왕복하며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3도의군이 조직될 시기에는 이진룡은 개성·해주·서흥(瑞興) 등지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진룡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13도의군에 편성된 사례에 속한다.
홍범도(1867. 8. 27~1943. 10. 25)는 1893~1907년까지 포수생활을 하였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北靑)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군에게 가장 두려운 의병장으로 지목될 정도로 의병사에서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대부분 포수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어 어느 의병부대 보다도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활동도 활발하여 1907년에서 1908년 9월까지 일본군과의 전투 횟수는 약 37회에(일본군 보고서에 의함) 달하였다. 그 전투 중에는 노령(러시아령)의 이범윤·최재형의 지원을 받는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합동작전도 있었는데(1908년 7월, 서흥일대) 홍범도는 이미 이 시기부터 노령(러시아령)지역의 의병들과 적지 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노령(러시아령)에서 13도의군이 편성될 즈음에 홍범도는 간도 왕개둔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홍범도는 명의만 13도의군 조직에 편성된 사례에 속한다.
안창호(1878. 12. 9~1938. 3. 10)와 이갑(1877. 5. 12~1917. 6. 13)은 1910년 4월 망명이전 국내에서 신민회를 주도하고 학교설립운동 등 실력양성론에 근거한 계몽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10년 4월 신채호·유동렬·김희선·이종오 등 계몽주의자들과 함께 러시아 지역에서 무관학교를 설치할 계획으로 망명하여 있다가 13도의군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상설(1870. 12. 7~1917. 3 .2)은 1894년(25세) 문과에 급제한 후 관계(官界)에 나아가 한림학사·승지·성균관 관장·궁내부특진관·법무협판(法務協辦)·학부협판(學部協辦)의 직책을 거쳐 1905년 의정부 참찬(參贊)에까지 올랐다. 그 후 이상설은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헤이그 밀사로 활동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였다. 헤이그 사행(使行) 실패 후에도 이상설은 좌절하지 않고 영국·독일·미국·러시아 등을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1909년 봄까지 이상설은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다가 1909년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여 정착하고 그곳을 국권회복운동의 터전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 첫 번째의 성과가 13도의군의 편성이었는데 이상설은 13도의군이 결성되는 데 있어 실무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상 13도의군의 조직구성과 참여인물의 성격을 보았다. 13도의군은 국내외를 망라하여 계몽운동자와 의병운동자 모두가 합류한 조직이었다고 하겠다.
류인석은 13도의군이 조직된 후 바로 국내 동포들에게 아래와 같은 격문을 발송하였다.

「통고13도 대소동포」(通告 13道大小同胞: 13도 대소동포에게 알리는 글)
13도의군 도총재 류인석은 남쪽 고국을 향해 경성 및 13도 열읍의 대소 동포에게 두루 고합니다.-(중략)- 종사(宗社)·강토·도맥(道脈)이 회복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인가. 그 일의 성취는 오직 우리 대소동포들이 힘을 모으고 죽음을 무릅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제 13도 열읍에 많은 임원을 파견하였으니 그 곳에 임하는 임원은 마땅히 그 맡은 바 직책을 다해야 할 것이요, 비록 임원이 아니라도 충의 충량(忠良)의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국의 2천만 동포들은 일제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군신(君臣)·부자(父子)·친척(親戚)을 구합시다.(「연보」,『의암집』하권, 경인문화사, 1973, 703면)

13도의군 활동의 특징적인 것은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그 군비를 정식으로 광무황제(고종)에게 요청한 사실이다. 즉 그들은 의병항쟁은 바로 국가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전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둘째는 망명정부를 계획한 점이었다. 13도의군은 7월 28일자로 광무황제(고종)에게 상소문을 보내어 러시아로 망명해 올 것을 건의하고 있다. 상소문은 13도의군의 참모 서상진(徐相津)이 전달하였다.

지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폐하께서 다른 나라에 파천(播遷)하여 계신다면 밖으로 세계만방의 공론도 제창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안으로 민심도 고동시킬 수 있으므로 천하의 일을 단연코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영사관으로 파천하시도록 빨리 결정을 내리시옵소서. 신 등이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오나 폐하를 보호하고 중흥할 계획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국경을 떠나 파천하시는 동안의 모든 절차는 신(臣) 등이 다시 아뢰어 결정하겠으나 만일 몇 달이 지연된다면 다른 염려가 있을 듯하니 빨리 서두르셔야 할 것입니다. 또 만일 중간에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있다면 신 등에게 알릴 것도 없이 직접 행하셔도 좋을 것입니다.(윤병석,『국외 한인사회와 민족운동』1990, 178면에서 재인용)

과연 13도의군에서 계획한 광무황제(고종) 망명 계획은 적절한 전략이었는가, 그리고 광무황제(고종)가 실행할 만한 계획이었는가의 문제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고 또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국왕의 국외 망명계획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는 효시를 이루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5. 성명회(聲明會)에서의 활동

일제는 1910년 8월 22일(정식 공포는 29일에 함)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화 하였다. 이 소식은 그 다음날 노령(러시아령) 지역에 전달되었고 동포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노령(러시아령)지역 한인들은 국망사태(國亡事態)에 대처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韓民學校)에 모여 한인 대회를 열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 설립의 목적은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성명회란 ‘성피지죄 명아지원 (聲彼之罪 嗚我之寃: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통분한다)’에서 「성」과 「명」을 딴 이름이다. 성명회 취지문의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략)-정의·인도를 무시한 왜적은 다시 그 악을 키워 소위 합방(合邦)의 의(議)를 창(唱)하고, 우리의 국기를 뽑고, 우리의 역사를 불사르고, 우리의 민적(民籍)을 그들의 노안(奴案)으로 만들려 한다.
오호라. 우리는 금일에 이르러서도 상차(尙且) 인묵(忍黙)하여야 하는가. 오늘의 사태, 우리의 최후의 역사가 아니냐. 우리 동포가 무장할 날이 오늘이고 피 흘릴 날도 오늘인 것이다.
대저 일에는 차서(次序)가 있고, 때에는 전후가 있다. 이십세기 국민의 행동은 세계열강의 여론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열국 중 우리나라와 친교 동맹을 체결한 각국에 왜적의 불법무도의 사실과 아울러 합방반대의 의견을 피력하여 그 오해를 풀고, 열국의 공명정대한 여론을 구하고 그리고 왜적의 죄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제일 급무일 것이다.-하략- (윤병석,『국외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990, 218면에서 재인용)

위의 취지문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운동방략이 13도의군에 비해 크게 수정되고 있는 점이다. 성명회에 앞서 2개월 전에 조직되었던 13도의군에서 계획되었던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은 전민족적인 무장봉기론이었다. 그러나 위의「성명회 취지문」에서는 무장항쟁의 방략보다 국제 열강의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적 전략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 같은 방략의 수정은 13도의군이라는 조직체가 이미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단체인 성명회가 조직되었던 배경이기도 한데 이것이 성명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즉 13도의군은 의병운동적인 성향이, 성명회는 계몽운동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명회의 회장에는 13도의군 도총재인 류인석이 다시 추대되었다.
성명회에서는 먼저 일본정부와 각국 정부에 ‘합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 작업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8월 26일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국무장관 귀하
국민의회는 일본 측의 무자비한 적대행위에 대해 유럽 제 강대국과 미국·중국에 항의를 제기합니다. 이미 체결된 조약에 대해 일본 측은 반복적인 위반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유혈적(流血的)인 양상을 띠고 국법을 위반해왔고 정의의 법을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우리 측은 충분히 강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한국의 합병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원하는 바가 아니란 점을 명백히 알립니다. 그것은 평화에 위반일 뿐 아니라 미래의 끝없고 휴전없는 투쟁의 계속을 의미할 뿐 입니다. 우리는 국법과 정의를 존중하는 귀 정부가 우리가 세계열강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온 태도를 앞으로도 계속 고수할 수 있도록 일본의 한국합병(강제병탄, 한국강제병합, 1910)을 반대하는 데 적절한 태도를 표명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한국국민의회(성명회) 회장 류인석
(윤병석,『국외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990, 219면에서 재인용)

위의 전문(電文)은 미국 외에도 중국·유럽(오스트리아·독일에는 현재 전문을 문서 보관서에 보관 중) 등 여러 나라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워낙 다급히 작성되었기에 내용도 간략하다. 그래서 성명회에서는 기본취지는 위와 같으나 내용을 좀더 보강한「성명회선언서」를 작성하여 다시 세계 각국에 발송하였다.「성명회선언서」가 앞의 전문과 다른 특징은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내용이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일제의 만행과 배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는 인도주의적 호소를 통해서 열강의 지원을 얻어보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둘째, 보호요청에 대한 표현이 직접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보호를 바랍니다.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귀하들의 권리와 정의도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귀국정부에서는 이것이 영광과 명예가 될 것입니다. 귀하들이 불의(不義)를 두둔하기 위해 수 세기 이래로 귀하들의 명예와 영광을 이루고 있는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진정한 한국인인 대한인(大韓人)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국민의회(성명회) 회장 류인석
(윤병석,『국외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1990, 226면에서 재인용)

위의 글은 이상설이 기초하였다고 하지만 류인석이 수정을 가하였고 또 류인석 자신이 영문으로 친필서명하여 발송하였기 때문에 류인석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그렇다고 하면 류인석 개인으로서는 실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류인석은 서양세력과 문화에 대해 오랑캐라고 하여 야만시 했었다. 그러나 위의 선언서에서는 그러한 오랑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8624명의 서명록이 첨부되었던 점이다. 여기에는 이범윤·김만학(金萬學)·김좌두(金佐斗)·홍범도(洪範圖)·정재관(鄭在寬)·이규풍(李奎豐) 등 중국과 노령(러시아령)의 거의 모든 민족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위와 같이 성명회 지도부는 외교적 방법을 앞세우고 있었으나 반면 일부 회원들은 성명회 결성 후 곧바로 무장봉기에 나섰다. 성명회가 결성된 그날 밤 청년 5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하였다. 그 다음날 한인들의 활동이 보다 격앙되어 결사대의 수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사태가 확대되자 그 다음날 26일 러시아군경이 집회를 막았다. 그러자 50여 명의 한인들은 비를 맞아가며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2km 지점의 ‘친고개’에 모여 광복결의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또 이범윤은 총병력 10,000명의 의병을 조직, 독립전쟁을 시작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성명회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탄압의 손길이 노령(러시아령) 지역에까지 미친 것이다. 일제는 대신(大臣) 계태랑(桂太郞)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여 한국인의 반일운동에 대해 러시아에 항의함과 동시에 그 주요 인물들에 대해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당국은 1910년 9월 11일 이상설·김좌두·이규풍·이범윤 등 성명회와 13도의군 간부 200여 명을 치안을 이유 삼아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도 러시아 당국은 한인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체포를 계속하였고, 노령(러시아령)에서의 한인들의 정치활동도 엄금하였기 때문에 성명회의 활동도 거의 종식되어 갔다.
성명회와 13도의군의 주요 인물들이 피체되어 갔을 때 류인석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 비통함이 국내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국내에서 합방(合邦, 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의 비보(悲報)가 전해져 그 화(禍)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고, 국외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협약이 이루어져 사태가 중하고 시기가 급하여 계략을 쓸 바가 없다가, 곧 전보(電報)로 청국과 러시아 및 각국 정부에 합방무효를 승인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어서 10,000여 인이 성명서를 만들어 다시 각 나라에 보내어 저들 왜적의 죄악을 성토하고 한국의 원한을 선명(宣明)하여 성과가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한민이 결약(結約)하여 왜적의 절제를 죽어도 받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사로잡히는 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이 어찌된 운명입니까. 실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극단에 처하면 반드시 살아날 방도를 극적으로 만나는 것이 세상 이치이므로 열패(劣敗)의 상황은 곧 끝날 것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우리 내외 2,000만 동포는 비록 기반압제(羈絆壓制)에 처해 있으나 더욱 충성된 마음을 모으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모아 대대의 원수, 피맺힌 원수를 갚도록 하십시오. -(중략)- 인석(류인석)은 죽어서라도 상제(上帝)에게 고하고 백신(百神)에 아뢰어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인석(류인석)이 멀리서 재배 올립니다.(「여일국동포: 與一國同胞: 동포에게 드림」,『의암집』상권, 595면)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 목표는 뚜렷한데 힘은 모자라서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민족지도자의 심정은 실로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었다.

6. 권업회(觀業會) 회장에의 추대

1910년 8월 중순 이후 노령(러시아령)지역에서는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국권회복운동이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류인석도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11년 1월(음)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유정구(柳享口)로 이동하였고 다시 2월에는 운현산(雲峴山)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1911년 러시아 당국에 구금되었던 성명회 및 13도의군 간부들이 석방되어 민족운동가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들은 1911년 5월 20일 권업회를 발족시켰던 것이다.
권업회의 회칙에 의하면 권업회의 사업 목적은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한인의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생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저축을 장려하고, 상애(相愛)·상신(相信)의 친목을 견고케 하여 문명의 행동을 도모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권업회는 국권회복운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였다.
위와 같이 발족한 권업회는 한인 자치단체로서 러시아 당국의 공식 승인을 얻고 1911년 12월 17일에는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을 정비하고 그에 따른 임원을 선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때의 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업회 임원」(1911. 12. 17)
(총재부)
수총재(首摠裁): 류인석
총재: 김만학(金萬學)·최재형(崔在亨)·이범윤(李範允)
(의사부: 議事部)
의사부 의장: 이상설(李相卨)
부의장: 이종호(李鍾浩)
총무: 한형권(韓亨權)·김익용(金翼鎔)
회계: 김니콜라이·이바노비치
서기: 이민복(李敏馥)
의원(議員): 김중화(金仲化)·이범석(李範錫)·홍병훈(洪丙勳)
(집행부)
교육부 부장: 정재관(鄭在寬)
경용부(經用部)부장: 조영보(趙永普)
통신부 부장: 김치보(金致甫)
사찰부 부장: 홍범도(洪範圖)
서적부 부장: 신채호(申采浩)
교접부 부장: 김병학(金炳學)
기록부 부장: 이남기(李南基)
구제부 부장: 고상준(高尙俊)
검사부 부장: 윤일병(尹一炳)
종교부 부장: 황공도(黃公道)
실업부 부장: 최학만(崔學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제4집, -도산 안창호 자료집-, 1990, 172~173면)

권업회의 최고 지위인 수총재의 직에는 류인석이 추대되었다. 권업회의 활동은 이미 1911년 5월부터 시작되었으나 류인석은 1911년 12월에 이르러서야 권업회의 수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총회가 열렸던 당시 류인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지 않았고 [당시 운현산(雲峴山)에 은거하고 있었음] 또『의암집』의 「연보」에는 류인석이 권업회의 수총재에 추대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뿐 아니라 「연보」에는 권업회와 관련한 기사가 전혀 없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비록 류인석이 권업회의 수총재에 추대되었다 하더라도 그 수총재 직은 명예직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류인석과 권업회의 관계는 이전 13도의군과 성명회에서 류인석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보면 류인석의 항일 국권회복운동계에서의 실제 사회활동은 성명회에서의 활동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류인석의 노령(러시아령)에서의 활동을 13도의군·성명회·권업회를 통해 살펴보았다. 류인석은 13도의군·성명회 시기에는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지만 권업회에서는 실제 참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류인석이 민족운동의 일선에서 점차 물러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은 것인가. 이는 2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류인석이 고령에다 각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몸이 불편하였기에 사회활동이 어려웠던 것이다. 둘째는 류인석과 노령(러시아령)지역 인사들의 국권회복전략에 일정한 괴리가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류인석은 보수유림으로서 복고주의를 주장한 반면 노령(러시아령)지역은 계몽운동의 성향이 강했다.
계몽운동자들이 주장하는 ‘신교육’·‘공화정’ 실시는 류인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결국 류인석은 노령(러시아령)사회에서 은퇴하고 서간도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류인석의 처지가 그의 한시에 잘 나타나 있다.

「러시아 땅에서 형세가 점차 변하기에 중국으로 향할 결심을 내리고」
메마른 땅에 살며 대사를 꾸미려나(居陋初心計事爲)
형세변해 떠나야하네 지체말고 떠나야하네(形移當起起無遲)
요순의 옛 고장에 공자의 옛 동리에(唐堯古地宜尼里)
거기가서 몸 지키며 다시 때를 기다리리.(去守吾身更待時) (김영덕 편,『류인석 전집(1)』, 1990, 417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제7장 류인석의 만년기(晩年期) 활동과 저술

1. 류인석의 만년-중국으로의 이동

류인석은 1911년 2월(음) 운현산에 은거한 이후 사회 활동을 중지하였다. 이어 류인석은 중국으로 망명하는데 이동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11년 2월(음)-운현산
2) 1912년 9월(음)-중국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함.
3) 1913년 2월(음)-목화촌(木花村)-의병장으로 활동했고 권업회의 기록부 부장이며 제자인 이남기에게 의탁함.
4) 1914년 3월(음)-봉천(奉天) 서풍현(西豊縣)에 머묾.
박이미(朴彛米)·박병강(朴炳彊)·한봉섭(韓鳳燮)·박치익(朴治翼) 등이 찾아와 함께 머묾.
5) 1914년 5월(음)-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도착하여 아들 류제함(柳濟咸)·류제춘(柳濟春)에게 의탁함.
6) 1914년 8월(음)-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構)의 송상규(宋尙奎) 방문.
7) 1914년 8월(음)-홍경현 난천자에 되돌아 옴.
8) 1915년 1월 29일(양: 3월 14일) 난천자에서 별세함.

류인석이 중국으로의 이동을 결심하는 것은 1912년 9월(음)경이다.
류인석의 중국행 목적지는 홍경현 난천자였다. 난천자에는 류인석의 아들 류제함·류제춘을 비롯해 친척 및 문인사우들이 1911년 4월경 가족을 이끌고 망명한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천자에는 망명 후 별세한 부인 정씨(鄭氏)의 묘소도 있었다. 난천자 일대는 45가족이 모여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가장(家長)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류제함(柳濟咸)·류홍석(柳弘錫)·류의석(柳毅錫)·류중교(柳重敎, 族叔)·정응규(鄭應奎; 婦弟)·박화남(朴華南)·이직신(李直愼)·박양섭(朴陽燮)·백삼규(白三圭)·박치익(朴治翌)·송상규(宋尙奎)·이치수(李致壽)·신혁희(申赫熙)·송헌창(宋憲昌)·민정식(閔正植)·어취선(魚聚善)·김화진(金華鎭)·김경전(金敬銓)

류인석은 중국으로 이동해서는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류인석은 그의 만년을 학자 생활로 마감하고 있다. 류인석이 만년기에 저술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1) 1911년 4월(음) :「산언(散言)」
2) 1911년 윤6월(음) :「고동반사우서(告同伴士友書)」
3) 1913년 2월(음) :「우주문답(宇宙問答)」·「니봉고소초(尼峯稿小沙)」
4) 1913년 5월(음) :「병상기어(病狀記語)」·「한등만필(寒燈蔓筆)」
5) 1914년 겨울 :「도모편(道冒編)」

위의 글들은 류인석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지은 것인데 독립운동 사상사(思想史)에서는 중요하게 연구되어져야 할 글 들이다. 이중「우주문답」과「도모편」은 각기 단행본 분량의 대작(大作)이다. 특히「우주문답」은 류인석이 800여 질을 인쇄하여 대량으로 배포(1914년)하기도 한 중요한 저술이다. 류인석은「우주문답」을 통해서 장차 조선이 취해야 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정책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류인석이 후손에게 당부하는 유언으로 볼 수 있다. 이제「우주문답」의 내용을 통해 1910년 전후 신구사상(新舊思想)이 교차하던 시기의 전통 지성(知性)의 성격 즉 성리학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해 보자.

2.「우주문답(宇宙問答)」에 보이는 만년기 류인석의 사상

「우주문답」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우주에서 중국(中國)이 되는 이치
2) 왕정(王政)과 공화정
3) 나라를 위한 일곱가지 일
4) 동서(東西)의 대세·동서(東西)의 장기(長技)·동서의 문명
5) 평등과 자유·서양문물의 수용·서양사회와 법률
6) 윤리·예악론(禮樂論)
7) 신학교(新學校)·여학교(女學校)·소학교육(小學敎育)·정학술론(正學術論)
8) 물질문명론
9) 강국론(强國論)
10) 선양(禪讓)·세습·귀족제도론
11) 민주제와 군주제·입헌(立憲)·서법(西法)
12) 일본의 침탈
13) 개화론(開化論)·사대론(事大論)·소중화론(小中華論)
14) 야소학(耶蘇學; 기독교)·단군·종교론
15) 공자를 높이는 뜻·하도낙서(河圖落書)
위의 내용 중에서 류인석이 민족의 장래를 염두에 두면서 쓴 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 세계관(世界觀)

류인석은 당시의 세계정세를 인류의 위기상황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가 끝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모든 사물이 견고할 때는 질서가 유지되지만 무너질 때는 곧 혼란이 있게 된다 (「우주문답」,『의암집』하권, 545면)

그러면 인류의 위기 상황은 절망적인 것인가. 류인석은 그렇게 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난리가 극에 달하여 안정되는 것은 실로 현실이 바라는 바이고 그 혼란을 일으키는 자도 스스로 깨달아서 안정되기를 생각할 것이다. 세계는 그 품격이 서로 다르나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의 이치는 같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45면)

그러면 류인석은 세계평화의 방법 즉 제국주의 사조의 극복방법을 어떻게 구상하였을까. 류인석이 구상한 세계는 조선·중국·일본의 동양3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였다. 그리하여 삼국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먼저 일본은 중국을 성심으로 받들고, 조선에는 사죄하고 국권을 돌려 준 후 자강(自强)에 힘쓰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중국은 중국되는 소이(所以)를 독무(篤務)하여 정(正)과 강(强)을 얻어 천지의 가운데 자립해야 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오랜 혐의를 풀고 서로 상정(相正)·상화(相和)해야 하며 조선에 대해서는 한가족의 두터움을 더욱 돈독히 하여야 한다. 또 일본을 책망하여 나라의 긍지를 회복해야 한다. 약한 것은 강하도록 힘쓰고 쇠퇴한 것은 성하게 하며 뒤쫓을 수 있는 것은 따르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여 이것이 모두 하나가 되어 세를 이루어야 한다.
조선은 비록 일본에 대해서 정천지원(井天之怨)이 있더라도 일본의 사죄를 받고 또 시세를 고려하여 반드시 서로 좋게 지내고 서로 독려하고 권면해야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더욱 존경하여 선(善)에 나아가도록 매진하고 자면(自勉)·자강(自强)에 힘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우주문답」,『의암집』경인문화사, 1973, 507~508면)

류인석은 동양삼국이 질서를 잡아가면 제국주의 서양도 새로운 평화에 동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양은 이미 스스로 부강(富强)이 매우 성(盛)하고 토지가 넓은데 어찌 부족함이 있어서 이런 상잔(相殘)의 행위와 전쟁을 하는가. 이제 동양의 정돈된 것을 본다면 부득불 동양을 존경하고 꺼리어 중국의 상달장기(上達長技)를 흠모하고 본받을 것이다. 그런즉 대종(大宗)이 이루어지고 천지(天地)가 융화되는 좋은 광경을 볼 것이다.(「우주문답」,『의암집』, 경인문화사, 1973, 508면)

류인석이 구상한 세계 평화의 구조는 동양 삼국을 중심으로 하되 그 동양 삼국 중에서도 중국을 중심한 국제 질서의 재편성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대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즉 류인석은 세계질서(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심의 역할은 중국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대일통론(大一統論)’이라고도 하는데 『주역』에 근거한 이론이다.

(2) 유교(儒敎) 국가 재건론

(가) 7대 무론(七大務論); 나라를 위한 일곱 가지 큰 일
류인석은 정치가가 국가를 훌륭히 운영하기 위해서 7가지에 힘써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즉 도(道)·덕(德)·학(學)·정(政)·형(刑)·문(文)·무(武)가 그것인데 이를 ‘7대무론’이라 한다.
류인석은 ‘도’를 잃으면 사람됨을 잃는 것이라 하여 ‘도’를 가장 중요시 하였다. ‘도’의 요체는 인의(仁義)이며 인의(仁義)가 없으면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은 ‘도’가 있고 없음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나라는 ‘도’가 있고 없음에 따라 존속하기도 하고 멸망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덕(德)’이란 마음에 얻은바 착하고 진실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덕’을 갖추어야 임금·신하·백성이 자기의 직분을 다해 태평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학’(學)은 ‘도’와 ‘덕’을 구해서 자기에게 간직하는 것이라 하였다. 학문이 아니면 도덕을 구할 수 없으니 도덕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학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인심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올바로 가르치는 것이 천하의 요도(要道)이고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학술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덕을 해치는 음사(淫邪)·이단(異端)·잡류(雜類)를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고 하였다.
‘정’(政)은 나라와 백성을 경영하여 다스리는 것이라 하였다. 정치가 고르지 않으면 나라는 어지럽고 백성은 곤궁해진다고 하였다. 류인석은 정전법(井田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홍범8정(洪範八政) 가운데 첫째가 ‘식(食)’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균등하여 가난함이 없기로는 정전(井田)만한 것이 없다. 정전은 비단 농사 한 가지만 위한 것이 아니라 백 가지의 모든 것이 이로부터 정해져서 다스려지니 정전을 기본으로 하지 않으면 진실로 구차하게 될 뿐이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05면)

‘형(刑)’은 백성들이 잘못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을 착한 곳으로 이끌고 채찍질하는 도구라고 하였다. ‘형’을 시행하되 정도에 맞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형’이 죄보다 지나치면 ‘형’을 받은 자는 원망할 것이요 ‘형’이 죄에 미치지 못하면 ‘형’을 받은 자는 방종하고 해이해질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도(道)’에 기초한 ‘형’을 강조하였다. 백성을 금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며 벌을 주고 사형시키는 것도 모두 인술(仁術)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형’은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고, 기강이 바로서야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므로 ‘형’을 공명정대히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문’(文)은 나라의 교화를 이루어 광화(光華)롭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문’이 닦여지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문’이 닦여지지 않으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武)는 나라의 위세를 세우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특히 무위(武威)에 힘써야 되며 그러면서 문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군주제론
1910년 전후는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민주제의 정치 이론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민주제를 주장하는 주요 논리는 ‘정치는 다수를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것과 ‘임금은 계속 바뀌지만 백성은 항구적이니 바뀌는 것보다 항구적인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류인석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하나를 주로 삼는 것이니 하나로써 만(萬)을 통치해야 그 이치를 얻을 수 있다. 만(萬)이 ‘하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어지럽게 될 것이다. 천지를 두고 보아도 하나의 태극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과 남녀만물이 생겨나고, 사람에 있어서도 한 마음이 있어야 사지(四肢)·백체(百體)를 쓸 수 있다. 많은 것으로 따지면 뭇별[衆星]이 태양보다 많지만 태양이 위주가 되고, 뭇산이 태산 보다 많지만 태산이 위주가 되고, 만민(萬民)이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임금이 있어 그 위주를 이루는 것이다.(「우주문답」,『의암집』, 하권, 경인문화사, 1973, 533면)

그리고 류인석은 선양(禪讓)제도와 세습(世襲)제도에 찬성하였다.

오늘날 이른바 총통(總統)은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교체 때마다 반드시 다툼이 있다. 하물며 제왕과 같이 귀한 자리는 어떻겠는가.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세상의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세습제를 행하여 당화(黨禍)를 그치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면 세상의 혼란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습제를 행하되 임금의 부덕함이 심하지 않을 경우는 신하로서 마땅히 이윤(伊尹)·주공(周公)의 충성을 바칠 것이고 그 부덕함이 심할 경우 천명(天命)의 폐위(廢位)함을 따를 것이다.(「우주문답」,『의암집』, 하권, 경인문화사, 1973, 579면)

권력 다툼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세습제(혹은 선양제)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 입헌제도(立憲制度) 반대론
류인석은 입헌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류인석은 백성에게 물어 정책을 결정하는 방법은 올바른 것이기는 하나 입헌(立憲) 정치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입헌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임금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의원(上下議員)으로부터 먼저 의논하여 정한 후에 임금에게 이르는 것이니 임금은 가부취사(可否取捨)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허락만 할 뿐이다. 이는 아래로부터 위로 미칠 뿐이며 위로부터 아래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되면 임금의 자리란 이름은 높지만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시킴을 받을 뿐이니 실은 백성의 심부름꾼밖에 안된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경인문화사, 535면)

즉 류인석은 입헌제도는 임금을 단순한 심부름꾼으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임금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성리학적 근왕의식(勤王意識)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라) 귀족제도(貴族制度) 옹호론
류인석은 봉건사회의 대표적인 제도인 신분제도 특히 귀족제도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귀족은 그들의 조상이 국가와 천하에 공덕을 세웠으므로 그 공덕을 계승한 자들이다. 후세에 귀족들의 자손 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귀족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옛날 정치가 잘되던 시대에 희화(羲和)·후직(后稷)·사악(四岳) 등은 그 업(業)과 관직을 계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선비로서 관직을 세습 받지 않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현명함과 현명치 못함에 의할 뿐이지 세업(世業)때문에 세관(世官)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또 자고로 세신(世臣)이 있어야 국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일시의 친신(親臣)이 비할 바가 아니다. 귀족과 천족(賤族)을 구분하지 않고 현명한 자를 등용해야지 현명하지 못한 자를 등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현명한 자를 등용하자는 데 뜻이 있다. 그 말대로 하면 인재 등용이 공평해지고 정치도 잘될 것이다. 그런데 단지 귀족을 타파하자고만 한다면 그 뜻이 현자를 등용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대로 하면 인재등용이 공평하지 않고 혼란이 망극에 달할 것이다. (「우주문답」,『의암집』, 하권, 경인문화사, 531면)

류인석은 관직에는 귀족·평민·천민을 막론하고 현명한 자가 등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귀족제도를 옹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그 가문의 공적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신(世臣)이 있어야 국세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설명이 합리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두 가지 주장 모두 기득권을 강조하는 양반 생리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3) 서양문화의 비판과 부분적 수용

류인석은 대한제국의 망국 원인을 모두 서양에 돌리고 있을 정도로 서양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인 입장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빼앗은 것도 서법(西法)에 의한 것이고 조선이 나라를 잃은 것도 서법에 의한 것이니 세상에서 서법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는 조선이다. 조선이 이미 서법에 의해 나라를 잃었으니 서법을 싫어함이 마땅한데 오히려 서법을 모열(慕悅)하여 황급히 서법을 쫓아 구하니 슬픈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우주문답」,『의암집』하권, 경인문화사, 538면)

그런데 류인석이 반대한 서양 문화는 자유·평등사상·공화정·학교제도·종교 등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일부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측면은 척사유생의 의식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 평등사상·자유사상 비판
류인석은 근대사상의 기본이념인 평등사상·자유사상을 부정하였다. 이는 앞장의 귀족제 옹호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평등과 자유란 어지러운 싸움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니 싸움을 일으키는 칼자루이다. 천지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만물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며, 산에는 높은 산과 언덕이 있고, 물에는 하천과 바다가 있는데 그와 같은 것들이 어찌 평등하다 하겠는가. 사람도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윗사람과 아랫사람,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의 구분이 있고 성인(聖人)과 범인(凡人), 지인(智人)과 우인(愚人)의 다름이 있는데 어찌 평등하다 하겠는가. (「우주문답」,『의암집』하권, 경인문화사, 513면)

그리고 류인석은 평등과 자유의 사상이 만연하는 사회는 극도로 혼란해지고 붕괴될 것으로 설명하였다.

평등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러워진다. 자유로우면 사양하지 않고 사양하지 않으면 다투게 된다. 오늘날 세계의 어지러운 다툼은 다름 아닌 평등·자유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평등·자유를 주장하면 어지럽게 다툴 마음이 생겨나 난쟁(亂爭)을 일삼게 되고 천하가 평등·자유로 만연되면 어지럽게 다툴 마음을 일으켜 난쟁을 일삼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인류는 장차 쇠잔하여 없어질 것이니 천지 또한 반드시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주문답」,『의암집』하권, 경인문화사, 513면)

그리하여 류인석은 개화파들이 평등과 자유의 원리에 의하여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것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나) 공화정 반대
류인석은 중국이 신해혁명(辛亥革命, 1921)을 통해 공화정을 출범시키자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중국이 대총통제를 행하면 명분이 바로 서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며 체계가 잡히지 않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함께 들어갈 바를 잃으니 백성이 불안할 것이다. 더욱이 서로 다투어 선거하면 틈은 갈수록 벌어져 급기야 그 형세는 서로 무기를 동원할 것을 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만 두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고 각기 외국의 힘을 빌어오고자 할 것이다. 외국이 이를 기화로 그들의 욕심을 꾀하면 그때는 설령 그것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01면)

즉 류인석은 공화정을 실시하면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나라가 혼란되고 멸망할 것으로 보았다.

(다) 서양종교 반대
류인석은 기독교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반대하였다.

지금 서양을 사모하고 야소(耶蘇; 예수)의 학을 배운다면 백성의 마음은 서양의 성정(性情)으로 변할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성정이 서양의 성정으로 변하게 되면 선(善)이 불선(不善)으로 되어 선하지 못한 것으로 화하게 되고, 서양의 성정으로 화하게 되면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자가 적어서 결국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니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 것인가. 그 극심한 재난은 차마 말로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와 야소(예수)의 정사(正邪)·진망(眞妄)·허실(虛實)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고명한 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우주문답」,『의암집』하권, 541~542면)

즉 기독교를 사악하고(邪), 망령되고(妄), 허망된 것(虛)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기독교와 교류하게 되면 나라는 서양에 동화(同化)될 것으로 염려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에 대해서는 ‘한 때의 공리(功利)만을 따져 시세에 따른 자’들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사악한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장차 기독교는 물러가고 공자의 가르침이 일어나 밝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였다.

(라) 신학교(新學校) 설립 반대
1905년~1910년간 우리나라에서는 사립학교 건립운동이 전국에서 얼어나 1910년에는 약 5,000여 개의 사립학교가 건립되었다. 이 교육운동은 계몽운동자들이 주도하고 국민들이 적극 호응하여 후일 민족운동 역량의 주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류인석은 이러한 사립학교 건립 운동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류인석은 학교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학교는 부자(父子)의 친함, 군신(君臣)의 의리, 부부(夫歸)의 분별, 장유(長幼)의 차례, 붕우(朋友)의 믿음이라는 오륜의 도리를 구하는 곳이다. 천하에는 오륜이 없는 사람이 없고 오륜의 밖에 있는 사람도 없다. 맹자가 말하기를 ‘학교는 인륜을 밝히는 곳이다. 인륜이 위에서 밝으면 백성들이 아래에서 친하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인륜이 밝아야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우주문답」,『의암집』하권, 518면)

류인석은 위와 같이 학교의 기능을 정의하고는 신학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서양의 학교에 어디 부자의 친함, 군신의 의리, 부부의 분별, 장유의 차례, 붕우의 믿음이라는 인륜의 도리를 위함이 있는가. 형기상(形氣上)의 일만을 구하여 욕심을 채울 뿐이다. 윤리는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어긋나니 어찌 학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우주문답」,『의암집』하권, 519면)

류인석은 서양의 신학교는 기술 교육만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교를 설립하는 사람들은 애국자가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는 난적(亂賊)이라고 혹독히 비판하였다. 이어 류인석은 아래의 비유를 들어 조선 사람에게는 당연히 전통적인 조선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유컨대 벼는 논에서 기르고 조는 밭에서 기르는 것인데 논에서 기르던 벼를 밭에서 기른다면 잘 길러지겠는가. 우리의 옳은 것을 버리고 저들의 그른 것을 취한다면 어찌 옳겠는가.(「우주문답」,『의암집』하권, 519면)

그리고 류인석은 여학교 설립에는 특히 극단적으로 반대하여 유학자적 특징을 보여준다. 류인석은 여학교 설립을 주장하는 사람을 금수(禽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이 밖과 안에 자리를 정하여 만물에서 부모가 되니 하늘은 굳세고 땅은 유순하며,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하며, 하늘은 화육(化育)을 베풀고 땅은 문채(文彩)를 머금는다. 만물은 천지에서 탄생하되 건도(乾道)는 남자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이룬다. 만물의 남자와 여자되는 이치와 모양은 천지를 본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는 불변의 이치이다. -(중략)- 오늘날 남녀는 평등하다고 하면서 남자도 학교가 있고 여자도 학교가 있어 남녀가 함께 거동하니 이는 하늘과 땅이 높고 낮음이 없는 것과 같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19면)

주역의 음양설(陰陽說)에 근거한 명분론(名分論)인데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봉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라) 서양기술의 부분적 수용
이상과 같이 보았을 때 류인석은 성리학적 보수사상을 거의 견지하고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류인석은 서양기술에 대해서는 종래의 배타적인 입장을 바꾸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인은 서법을 병으로 여기되 특별히 국사(國事)를 경영함에 있어 취할 것만 취해야 한다. 취할만한 것은 기계(機械)등 국사에 관한 것들이다. -(중략)- 우리의 윤상예의(倫常禮儀)의 구법을 더욱 돈독히 하고 우리의 원기를 회복하여 끝내 병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38면)

류인석이 서양문화에서 수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 부분은 기술분야에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배울 때에는 우리의 전통사상을 굳게 지켜야 함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류인석이 서양기술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계기는 의병전쟁을 통해 일제 무기의 우수성을 절감한데서 비롯되었다.

옛날 중국에서 무력(武力)을 떨치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고 쉬기도 한 것은 시세에 따른 것이었는데 오늘의 시세는 무력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서양의 전쟁기술·병기(兵器)와 그 밖의 장점을 취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계속하여 서양의 것을 취하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것이다.(「우주문답」,『의암집』하권, 514면.)

그러면 서양의 기술을 어떠한 방법으로 수용할 것인가. 류인석은 사람의 수를 한정하여 국내의 한곳에 모아 교육시키든지 흑은 외국에 유학을 보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단 유학을 보낼 때에는 재주만 보지 말고 충신(忠臣)의 마음을 겸비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상 류인석 만년기의 저술「우주문답」을 살펴보았다. 철저히 보수적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제시한 논리였고 발전적이라기보다는 반근대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상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있어서 지도이념이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볼 때 류인석이 성명회 활동을 끝으로 사회 활동에서 은퇴했던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즉 권업회가 조직될 즈음 노령(러시아령)에서는 계몽주의자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교육·산업분야에서 근대적 정책도 많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유학자인 류인석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고 결국 류인석은 러시아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류인석의 한계는 류인석 개인이 갖고 있는 한계라기보다 그 시대가 갖고 있는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맺는 말

류인석은 1915년 1월 29일(양: 3월 14일)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류인석은 타계하기 전날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타계하는 날 밤 류인석은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주위에서도 운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류인석은 기력이 떨어지자 조용히 베개와 이불을 가지런히 하는 듯 하더니 곧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다. 잠깐의 일이었기에 류인석의 옆에는 김형태(金瀅泰) 한 사람만이 류인석의 임종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류인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마감되는 순간은 실로 잠깐이었다. 그의 인생 역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쓸쓸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류인석이 만년기의 여생을 보내는 곳은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이다. 비록 이역 만리땅이기는 하였지만 그곳에는 아들과 문인사우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있었고 또 부인의 묘소도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류인석이 남은 여생을 보내는 데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류인석에 대한 평가는 그간 그의 행적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류인석의 만주·노령(러시아령)에서의 활동을 단순한 도피적 망명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류인석의 성리학적 보수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류인석이 보수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음은 사실이지만 또한 류인석은 당시의 민족과제인 국권회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민족지도자였음도 분명하다. 이는 류인석이 의병적 조직인 13도의군 뿐 아니라 계몽운동적 조직인 성명회와 권업회에서 최고의 직책에 추대된 사실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류인석의 활동을 통해 볼 수 있는 특징은 유생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류인석의 국권회복의 전략은 모두 현실을 감안한 실천성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의병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격전에 대해 무모성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던 사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인 근거지 계획을 구상했던 사실, 류인석이 그토록 멸시했던 서양 열국에게 지원을 요청한 사실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류인석의 성리학적 보수성을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이는 논자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김구의 명언을 참고할 만하다. 김구는 광복 후 귀국하자 먼저 류인석의 묘소를 찾아 다음과 같이 추도하였다.

적을 배퇴(排退)하기에 급하던 때라 논(論)을 화이(華夷)에서 끌어 왔으니 문자(文字) 비록 구(舊)를 승하나… 우리는 선생의 충(忠)을 깊이 헤치어 피막(皮膜)을 넘어 그 내함(內含)한 민족적 충성을 세발(洗發)코저 하나이다.

류인석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참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부기(附記)하고 이 글을 맺는다.

연보

1842. 1. 27(1세)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가정리(柯亭里) 우계(愚溪)에서 아버지 류종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다.
1844(3세) 글쓰기를 시작하다.
1849(8세) 소학(小學)을 읽다.
1855. 2.(14세) 같은 마을(우계)에 살고 있는 먼 족질(族姪)인 류중선(柳重善)과 덕수(德水) 이씨의 양자로 입양하다.
1855. 3. 양근(楊根) 벽계(檗溪)의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다.
1859. 9.(18세) 여흥(驪興; 지금의 여주) 군수 민종호(閔宗鎬; 민진원의 아들)의 딸과 혼인하다(초혼).
과거를 보기 위해 과거장에 갔으나 과거는 치르지 못하다.
1861(20세) 겨울, 스승 이항로에게 글을 올리다. 이 시기 학문의 수준이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문인사우로부터 인정받다.
1862(21세) 주희(주자)와 송시열의 화상(畫像)을 만들고 삭망(朔望)으로 배향하다.
1864(23세) 류중악(柳重岳)과 함께 만동묘 철폐를 통탄하는 글을 짓다.
1865. 1(24세) 부인 민씨 별세하다.
1866. 1(25세) 경주 유생 정문구(鄭文龜)의 딸과 혼인하다(재혼).
1866. 9. 스승 이항로가 병인양요(1866)를 당하여 척사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할 때 배종(陪從)하여 서울에 한 달간 머물다(丙寅斥邪運動).
1867(26세) 현등사(懸燈寺)를 유람하다.
1868. 3(27세) 스승 이항로 별세하다. 이후 김평묵(金平黙)과 류중교(柳重敎; 류인석의 從叔)에게 학문을 배우다.
1876. 1(35세) 홍재구 등과 일본과의 수교반대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다(병자척사운동). 한때 류인석이 소수(疏首)에 추대 되었으나 홍재구로 변경되다.
1876. 여름, 류중교를 따라 양근으로부터 가릉군(嘉陵郡; 가평) 북쪽 옥계(玉溪) 부근으로 이사하다. 이때 류중악 외 친척과 김평묵도 부근에 이사하다. 이곳에서「옥계구곡(玉溪九曲)」을 짓다.
1877(36세) 류중교의 지시로 홍무향음례(洪務鄕飮禮)를 주관하다.
겨울, 류중교의 지시로 운곡암(雲谷庵)에서 3개월간『강목(綱目)』을 통독하다.
1878. 4(37세) 류중교를 따라 양구(楊口) 해안(亥晏)으로 이사하다.
1881. 10(40세) 본가 부친 류중곤 별세하다.
1883(42세) 본가의 모친 고령신씨 별세하다.
1884. 4(43세) 춘천 가정리 왕동(旺洞)으로 이사하다.
1887(46세) 삼종제(三從弟) 류의석(柳毅錫)의 아들 제함[濟咸(류제함)]을 양자로 삼다.
1891(50세) 아들 류제춘(柳濟春) 태어나다.
1892(51세) 1월, 스승 김평묵 별세하다.
3월, 류중교를 무척(誣斥)한 류기일(柳基一)과 척절(斥絶)하다.
1893. 3(52세) 스승 류중교 별세하다.
1895. 5(54세) 제천 장담 구학산(九鶴山) 아래 구탄(九灘)으로 이사하다.
1895. 10. 양가 모친 덕수이씨 별세하다.
1895. 11. 삭발령(削髮令) 소식을 듣고 변고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處變三事]을 논의하다.
1895. 11. 28(양; 1. 12), 이필희·서상렬·이춘영·안승우 등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895. 12. 모친의 상중(喪中)임으로 거의할 수 없다하여 중국으로 망명을 결정하다
1895. 12. 20(양; 1896. 2. 3), 문인들의 만류로 중국 망명을 취소하고 호좌창 의진(湖左倡義陣) 창의대장에 오르다. 이때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전국에 발송하여 의병 봉기를 촉구하다.
1895. 12. 28(양; 1896. 2. 11), 제천으로 진군하다.
1896. 1. 3(55세)(양; 2월 15일), 단양군수 권tnr(權潚)과 청풍현령 서상기(徐相耆)를 베다.
1896. 1. 4(양; 2. 16), 평창과 제천에서 민병을 모집해 충주로 진격하다.
1896. 1. 5(양; 2. 17),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金奎植)을 처단하다.
1896. 1. 11(양; 2. 23), 중군장 이춘영 수안보 전투에서 전사하다. 전 삼화부사(三和府使) 이경기(李敬器)를 중군장으로 삼다.
1896. 1. 19(양; 3. 2), 주용규 충주성 전투에서 전사하다. 이즈음 고종의 의병격려 밀서가 도착하다.
1896. 1. 21(양; 3. 4), 청주나 공주로 퇴각할 것을 결정하다.
1896. 1. 23(양; 3. 6),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퇴각하다.
1896. 1. 24(양; 3. 7), 안승우를 중군장에 임명하다.
1896. 1. 25(양; 3. 8), 제천에 도착하다.
1896. 2. 1(양; 3. 14), 수안보·가흥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다. 이강년을 유격장으로 삼다.
1896. 2. 2(양; 3. 15), 독송정(獨松亭)에서 군사들에게 진법을 훈련시키다.
1896. 2. 6(양; 3. 19), 이강년이 의병을 이끌고 수안보에 도착하다. 김백선(金伯善)이 가흥의 일본군과 전투에서 참패하다.
1896. 2. 13(양; 3. 26), 서상렬(徐相烈)이 영남 연합의병진을 이끌고 상주 태봉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하다. 2월 16일(양; 3. 29.)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선전 끝에 패하다.
1896. 2. 14(양; 3. 27), 여주 의병장 심상희(沈相禧)가 그의 후군장 원용석(元容錫)을 보내 부하로서 자청(自請)하다. 대장소에서 김백선의 목을 베다.
1896. 2. 24(양; 4. 6), 후군의 장수 채동집(蔡東集)·홍귀봉(洪貴鳳)·임도봉(林道鳳)이 독곡(獨谷)전투에서 전사하다. 또 김태원(金泰元)·김하락(金河洛)이 이끄는 이천의병들이 합세하다.
1896. 2. 27(양; 4. 9), 이강년이 문경의 일본군을 공격하다.
1896. 3. 1(양; 4. 13), 이희두(李熙斗)를 호위장으로 삼다. 이강년이 동창(東昌)을 공격하다.
1896. 3. 7(양; 4. 19), 김사두(金思斗)를 중군 참모로 삼다. 영국 영사관에서 회답의 글을 보내오다.
1896. 3. 13(양; 4. 25), 정운경(鄭雲慶)을 전군장으로 삼다. 남한산성 연합의진을 격파한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제천 공격을 위해 충주 북창(北滄)에 도착하여 해산 권유문을 발송하다.
1896. 3. 15(양; 4. 27), 의병을 해산할 수 없는 이유를 회답하여 보내다.
1896. 3. 22(양; 5. 4), 신지수가 하소진(荷沼津)에서 관군을 습격하다.
1896. 4. 6(양; 5. 18), 신지수(申芝秀)·원규상(元奎常)·이인영(李麟榮)이 가흥을 공격하다.
1896. 4. 8(양; 5. 20), 서상렬이 제천 의진을 지원하기 위해 단양에 이동하다.
1896. 4. 13(양; 5. 25), 제천 남산성이 함락되고 안승우(安承禹)와 그의 제자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하다.
1896. 4. 14(양; 5. 26), 단양에 머물다.
1896. 4. 16(양; 5. 28), 이완하(李完夏)를 중군장에 임명하다.
1896. 4. 17(양; 5. 29), 우군장(右軍將) 이강년과 후군장(後軍將) 신지수가 제천을 공격하다.
1896. 4. 18(양; 5. 30), 대장소를 기주(基州)로 옮기다.
1896. 4. 20(양; 6. 1), 의곡(義谷)을 지나 영춘(永春)에 머물다.
1896. 4. 21(양; 6. 2), 서상렬이 합세하다.
1896. 4. 22(양; 6. 3), 단양부(丹陽府)에 머물다.
1896. 4. 23(양; 6. 4), 수산(壽山)으로 진을 옮기다. 이날 제자들과 함께 추후 4단계 활동 계획을 의논하다.
1896. 4. 24(양; 6. 5), 개실(開實)을 경유 충주에 도착하다.
1896. 4. 27(양; 6. 8), 음성(陰城)에서 관군(청주·공주 병사)을 크게 무찌르다.
1896. 4. 28(양; 6. 9), 충주 은현(隱峴)으로 진을 옮기다.
1896. 4. 29(양; 6. 10), 원주 강천(康川)에 주둔하다. 이날 추후 5단계 활동 계획을 확정하다.
1896. 5. 5(양; 6. 15), 봉현(鳳峴)에 주둔하다.
1896. 5. 6(양; 6. 16), 보안역(保安驛)에 머물다.
1896. 5. 7(양; 6. 17), 금대(琴臺)로 옮기다.
중군장에 원용석(元容錫)을 임명하다.
1896. 5. 10(양; 6. 20), 제천 모산(茅山)으로 이동하다. 선유위원(宣諭委員) 정언조(鄭彦朝)를 꾸짖다.
1896. 5. 14(양; 6. 24), 영월부로 이동하다. 이날 전군장 정운경이 이동 중 관군과 만나 패하다.
1896. 5. 15(양; 6. 25), 평창(平昌)으로 이동하다.
1896. 5. 16(양; 6. 26), 정선부(旌善府)로 이동하다.
1896. 5. 23(양; 7. 3), 정선에서 상소(上疏)를 올리다.
1896. 5. 24(양; 7. 4), 이원하(李元廈)를 중군장으로 삼다.
1896. 5. 30(양; 7. 10), 강릉(江陵) 지협(芝峽)으로 이동하다.
1896. 6. 1(양; 7. 11), 대화(大和)에 도착하다.
1896. 6. 2(양; 7. 12), 이원영(李元永)을 중군장에 임명하다.
1896. 6. 3(양; 7. 13), 창계(昌桂)로 이동하다.
1896. 6. 5(양; 7. 15), 내흥정(內興亭)에 주둔하다.
1896. 6. 6(양; 7. 16), 봉평(蓬坪)에 주둔하다.
1896. 6. 7(양; 7. 17), 서상렬이 서북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다.
1896. 6. 9(양; 7. 19), 청계(淸溪)로 이동하다.
1896. 6. 10(양; 7. 20), 원당(元堂)에 도착하다.
1896. 6. 11(양; 7. 21,), 인제(麟蹄)에 도착하다.
1896. 6. 12(양; 7. 22), 소현(蘇峴)에 도착하다.
1896. 6. 13(양; 7. 23), 춘천 문진(文津)으로 이동하다. 서상렬이 낭천(浪川)에서 전사하다.
1896. 6. 14(양; 7. 24), 양구(楊口)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방산역(防山驛)에 주둔하다.
1896. 6. 15(양; 7. 25), 회양(淮陽) 문등(文登)에 도착하다.
1896. 6. 16(양; 7. 26), 점방(占方)에 주둔하다.
1896. 6. 17(양; 7. 27), 오천(烏川)에 주둔하다.
1896. 6. 19(양; 7. 29), 수교(水橋)에 주둔하다.
1896. 6. 20(양; 7. 30), 금성(金城)에 주둔하다. 전투하여 승리하다.
1896. 6. 22(양; 8. 1), 회양부(淮陽府) 은계역(銀溪驛)에 주둔하다.
1896. 6. 24(양; 8. 3), 선창(羨倉)으로 이동하다.
1896. 6. 25(양; 8. 4), 평강(平康)으로 이동하여 관군과 대치하다.
1896. 6. 26(양; 8. 5), 유연(流淵)으로 이동하다.
1896. 6. 27(양; 8. 6), 대문(大門)에 머물다.
1896. 6. 28(양; 8. 7), 소금강(小金剛)에 머물다.
1896. 6. 29(양; 8. 8), 구당(龜塘)으로 이동하다.
1896. 7. 1(양; 8. 7), 원세개(元世凱)에게 이필희(李弼熙)·유치경(兪致慶)·송상규(宋尙奎)를 파견하여 군사를 요청하다.
1896. 7. 2(양; 8. 10), 안변(安邊) 영풍(榮豐)에 주둔하다.
1896. 7. 5(양; 8. 13), 법지(法池)에 이르다.
1896. 7. 6(양; 8. 14), 양덕(陽德)에 주둔하다.
1896. 7. 7(양; 8.15), 청간(淸澗)에 도착하다.
1896. 7. 8(양; 8. 16), 영흥(永興)에 도착하다.
1896. 7. 9(양; 8. 17), 양덕 구창(舊倉)에 도착하다.
1896. 7. 10(양; 8. 18), 맹산군(孟山郡)에 이동하다.
1896. 7. 11(양; 8. 19), 덕천군(德川郡)에 주둔하다.
1896. 7. 13(양; 8. 21), 군악(軍樂)에 머물다.
1896. 7. 14(양; 8. 22), 청도(靑渡)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승리하고(청도 전투) 영변(寧邊)으로 이동하다.
1896. 7. 15(양; 8. 23), 운산(雲山)으로 이동하다.
1896. 7. 16(양; 8. 24), 관군과 싸워 이기고 초산(楚山)에 머물다.(초산전투)
1896. 7. 20(양; 8. 28), 초산 아이성(阿夷城)에서「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다.
1896. 7. 31(양; 8. 29), 회인현(懷仁縣) 파저강변(波潴江邊)에서 무장해제 당하여 219명 귀국하다.
1896. 9. 중국 원세개에의 군사요청 계획을 포기하고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정착하다.
1896. 11. 「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를 국내에 보내다.
1897. 5(56세) 회인현(懷仁縣) 호로두(葫蘆頭)로 옮기다.
1897. 8. 고종의 초유문(招諭文)을 받고, 귀국하여 초산에서 「진정대죄소(陳情待罪疏)」를 올리다.
1897. 9. 국내에「정동지제공서(呈同志諸公書)」를 보내다.
1897. 10. 춘천 가정리에 머물다.
1898. 1(57세)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다.
1898. 윤3.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머물다.
여름, 의체(義諦)를 약정하다.
1898. 10. 통화현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하다.
1899. 2(58세)「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을 저술하다. 「통고 경성급팔도각읍 사림문(通告 京城及八道各邑 士林文)」을 국내에 보내다.
1899. 3. 여름,「출처설(出處說)」과「국병설(國病說)」을 저술하다.
1900(59세) 봄, 향약을 실시하다.
1900. 7.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당해 귀국하다.
1900. 11. 평산(平山)의 산두재(山斗齋)에 머물다.
1901. 4(60세) 관서 지방을 순회하다.
1902. 3(61세) 문인들이『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다.
1902. 9. 계상(溪上)에서「석계구곡(石溪九曲)」을 짓다.
「구산지결(臼山旨訣)」을 짓다.
1903. 8(62세) 제천에 돌아오다.
1904. 3(63세) 해서(海西) 순회의 길에 오르다.
1904. 4. 신지수(申芝秀) 별세하다. 침랑(寢郞)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거절하다.
1904. 7. 구월산(九月山) 정곡사(停穀寺)에 머물다. 이때「흥도서사약속(興道書社約束)」과「납량사의의목강변(納涼私議疑目講辨)」을 짓다.
1904. 8. 「칠실분담(漆室憤談)」을 짓다. 평산(平山)에 머물다.
1904. 9. 「산두재성사사실약속(山斗齋聖祀事實約束)」을 짓다.
사림에게 거수(去守)를 권유하는 통고문을 발송하다.
1904. 10. 국내의 사우(士友)들에게 수의(守義)토록 통고문을 보내다.
최익현에게 일진회에 대항하여 향약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다. 가정(柯停)으로 돌아오다.
「내소상처의(內小喪處義)」를 짓다.
1905. 1(64세)「혹인대(或人對)」를 짓다.
1905. 10.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이 체결될 조짐의 소문을 듣고 전 국민이 모두 분발하여 일어나도록 촉구하는 글을 사림(士林)에게 통고하다.
1905. 11. 중국의 연성공(衍聖公)에게 사람을 보내다.
친척사우(親戚士友)들에게 중국으로 망명함을 알리다.
1906. 1(65세) 서흥(瑞興) 속명사(續命寺)에서 각병을 치료하다.
1906. 2. 평산-곡부(曲阜)-은율(殷栗)에서 병을 치료하다.
1906. 3. 『화동사(華東史)』 33권을 발간하다.
「서악문답(西嶽問答)」을 짓다.
1906. 4. 망명계획을 병으로 인해 포기하다. 유림들에게「여동지사우서(與同志士友書)」를 보내다.
1906. 윤4. 16(양; 6월 7일), 가정(柯停)으로 돌아오다.
유림들에게「재고진신사림서(再告縉紳士林書)」를 보내다.
1906. 7.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의 서문을 짓다.
1907(66세) 봄, 고종 황제의 밀지(密旨)와 밀부(密符)를 받았으나, 류인석은 의병에 나설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돌려보내다.「니산구곡(尼山九曲)」을 짓다.
1907. 6.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 체결 소식을 듣고 상경하다. 서울과 개성에서 의병봉기를 촉구하다.
1907. 7. 15(양; 9월 3일),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여 원산(元山)에 이르다.
1907. 8. 각지에서 의병 봉기의 소식을 듣고「여각도창의소서(與各道倡義所書)」의 격문을 각지에 보내다. 중풍(中風)이 심하고 낙상(落傷)까지 하여 러시아 망명을 중지하다.
1908. 1(67세)「여제진별지(與諸陣別紙)」를 각 의병진에 보내다.
1908. 2. 부평(富平)·작촌(鵲村)·통진(通津)에 이동하다.
1908. 7. 노령(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다.
1908. 8. 연추(煙秋, 노우키에프스크)의 중별리(中別里)에서 최재형(崔在亨)·이범윤(李範允) 의병부대에 합류하다.
1908. 9. 「여수청거인제인서(與水淸居人諸人書)」를 보내어 의병 활동을 격려 하다.
1909. 2(68세) 서계동(西溪洞)으로 이주하다.
1909. 3. 시지미촌(時芝味村)으로 이주하다.
1909. 7. 관일약(貫一約)을 실시하다.
1909. 8. 맹령(孟嶺)으로 이주하다. 이상설(李相卨)이 내방하다.
1909. 9. 「통고북도사림서(通告北道士林書)」를 발송하여 관일약의 실시를 독려하다.
1909. 12. 일제의 추격을 피해 이상설의 권유에 따라 잠시 이종섭(李鍾燮)의 집에 머물다.「의무유통(義務有統)」을 지어 통제(統制)의 법을 세우다.
1910. 1(69세)「황견봉시약중제인(荒見奉示約中諸人)」을 짓다.
1910. 2. 이범윤의 출병을 만류하다.
1910. 5. 15(양; 6월 21일),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에 추대되다.「통고13도대소동포(通告13道大小同胞)」를 발송하다.
1910. 5.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다.
1910. 6. 상소(上疏)를 올리다.
1910. 7. 국치[國恥(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소식을 듣고「재고13도대소동포(再告13道大小同胞)」를 국내에 발송하다.
1910. 7. 18(양; 8월 23일), 성명회(聲明會) 회장에 추대되다.
1910. 8. 8(양; 9월 11일), 이상설·이범윤 등이 러시아 당국에 피체되고 류인석은 겨우 피하다. 이때「치고일국서(致告一國書)」와「토죄왜정부서(討罪倭政府書)」를 발송하다.
1910. 8. 국내의 지사들은 모두 망명하도록 촉구하다.
1911. 1(70세) 유정구(柳亭口)로 피신하다.
1911. 2. 운현산(雲峴山)으로 이주하다. 운현산에서 건강을 회복하다.
1911. 4. 류인석의 가족·친척·사우들이 대거 중국 난천자(暖泉子)로 망명하다(45가구).「산언(散言)」을 짓다.
1911. 5. 시양단(蒔陽檀)을 설치하다.
1911. 윤6. 「서고동반사우(書告同伴士友)」를 발송하다.
1911. 12. 권업회 수총재에 추대되다.
1912. 9(71세) 「통고아령유우동포(通告俄領流寓同胞)」를 발송하다. 이즈음 중국으로 향할 것을 결의하다.
1913. 2(72세) 목화촌(木花村)에 머물다. 「우주문답(宇宙問答)」·「니봉고소초(尼峯稿小秒)」를 저술하다.
1913. 4. 부인 정씨(鄭氏) 별세하다.
1913. 5. 「병상기어(病狀記語)」와「한등만필(寒燈蔓筆)」을 짓다.
1914. 3(73세) 봉천성(奉天省) 서풍현(西豊縣)에 이르다.
1914. 5. 흥경현(興京縣)의 난천자(暖泉子)를 향해 출발하다.
1914. 8. 관전현(寬甸縣) 방취구에 머물다.
1914. 9. 난천자에 도착하다.
겨울,「도모편(道冒編)」을 저술하다. 「우주문답」 800여 권을 발간하다.
1915. 1. 29(74세)(양; 3월 14일), 졸(卒)하다.
1915. 4. 난천자(暖泉子) 평정산(平頂山)의 부인 묘소 옆에 묻히다.
1917. 문인들이 문집 『의암집』을 발간하다.
1935. 류인석의 묘소를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 이장하다.

참고문헌

1. 자료
조선총독부, 1910~1911,『조선총독부통계연보』
한국내부경무국, 1910,『顧問警察小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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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1989,『대한제국말기의 국권회복운동과 그 사상』,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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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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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석, 1976,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시론」,『사학연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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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렬, 1982, 「한말 변혁운동의 정치 경제적 성격」,『한국민족주의론』1
이종춘, 1982, 「한말 초기 의병운동에 관한 연구」,『논문집』18, 청주교대
정경현, 1982, 「한말 유생의 知的 變身」,『육사논문집』23
윤병석, 1983, 「13도의군의 편성」,『사학연구』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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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석, 1983, 「1910년대 독립군의 기지 설치」,『군사』6
이만형, 1983,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對義兵觀」,『해사논문집』18
강재언, 1983,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근대한국사상사연구』
김도형, 1985, 「한말의병전쟁의 민중적 성격」,『한국민족주의론』3
금장태, 1985, 「한말 일제하 한국성리학파의 사상계보와 문헌에 관한 연구」,『한국철학사상의 제문제』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창열, 1985, 「한말의 역사의식」,『한국사학사의 연구』, 1985
문성혜, 1985, 「의암 류인석의 의병항쟁」,『제주사학』1
박민영, 1986, 「의암 류인석의 衛正斥邪運動」,『청계사학』3
김항구, 1986, 「한말의병봉기의 원인 및 배경분석」,『이원순교수회갑기념사학논총』
배형식, 1986, 「의암 류인석의 학통과 의병활동」, 인하대 석사논문
조동걸, 1986, 「의병운동의 한국민족주의상의 위치」(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신용하, 1986,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서준섭, 1987, 「의병장류인석의 漢詩」,『강원의병항쟁사』
이이화, 1987, 「의병의 對外認識」,『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1
손승철, 1987, 「의병장 류인석사상의 역사적 의미」,『강원의병운동사』
강재언, 1987, 「平民義陣의 對日抗爭」,『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1
유병용, 1987, 「류인석 제천의병항쟁의 제한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강원의병운동사』
김의환, 1987, 「儒生義陣의 대일항쟁」,『한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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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권, 1988, 「한말 의병전쟁의 민중운동사적 의의」,『망원한국사연구실회보』3
김상기, 1988, 「한말 을미의병운동의 起點에 대한 小考-문석봉의 회덕의병을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2
오석원, 1988, 「화서학파의 心說論爭에 관한 고찰」,『동방사상논고』
주진오, 1988, 「독립협회의 사회사상과 사회진화론」,『손보기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유한철, 1989, 「김하락 의진의 의병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3집
김상기, 1989,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권오영, 1989, 「김평묵의 척사론과 聯名儒疏」,『한국학보』55
최재우, 1989, 「충주 을미의병에 대한 재검토」,『예성문화』10
윤병석, 1989,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과 신한촌」,『한국민족운동사연구』3
조동걸, 1989, 「의병운동의 한국 민족주의상의 위치」(하),『한국민족운동사연구』3
최재우, 1989, 「한말 제천지방향약의 위정척사적 성격」-화서 이항로 문인의 경우-,『충북사학』2
오영섭, 1990, 「19세기중엽 衛正斥邪派의 역사서술」-화서학파의『宋元華東史合編綱目』-, 『한국학보』60
박민영, 1990, 「강릉의병장 민용호의 생애와 擧義 논리」,『윤병석교수화갑기념한국근대사논총』
유한철, 1990, 「홍주 의진(1906)의 조직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4집
유한철, 1991, 「1907~1910년 강원도 의병진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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