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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신규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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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머리말

1876년 문호개방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재편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한국사회는 생산력의 점진적 발전과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종래의 봉건적 생산관계가 동요·해체되는 등 내재적 발전과정에 있기는 했지만 문호개방 이후 일본을 위시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의 자주적 근대국가 성립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반봉건(反封建)을 위한 근대화와 제국주의를 저지키 위한 자주 독립이란 중첩된 시대적 민족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과제는 문호개방 이후 줄곧 당시의 선구적인 애국지사에게 주어진 풀어야 할 숙명적인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신규식(申圭植)은 자주적 근대국가 성립을 위해 중첩된 민족 과제를 짊어진 시기인 1880년 보수적 유림(儒林)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우국충절한 모습을 보였으며, 근대화에의 열정을 품은 청년으로 성장한 이래 1922년 43살 장년의 나이로 이역만리 타국 땅 상해에서 순국할 때까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한 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았다.
이처럼 신규식의 생애는 1898년 구국교육과 계몽학회 활동을 전개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몸담은 이후 상해에서 순국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그의 활동 시기는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1911년 초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이며, 제2기는 상해 망명 이후 임시정부수립 전까지로 이 지역에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던 시기고 끝으로 제3기는 임시정부수립 이후 순국할 때까지의 시기다.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혼은 아직 돌아 올 날이 있을 것이다. 힘쓸지어다. 우리 동포여!…”라고 한 그의 절규는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이를 기반으로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의 발현이었다. 그는 이러한 소명감을 갖고 한말과 일제의 식민지 시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일신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신규식처럼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애국지사들은 국권을 상실한 시기를 전후해 해외로 망명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다수의 한인이 이주해 있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발하였는데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부터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구국운동 기지설치 및 의병활동과 교육활동 등을 중심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반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1920년대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상해 등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활동은 미미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규식은 1911년 상해로 망명해 한국독립운동가로서의 최초로 중국혁명가와 유대를 맺고 중국혁명에도 직접 가담함으로써 한국혁명 즉 한국독립의 실현을 위한 첫발을 디뎠다. 그 결과 신규식은 그 후로 줄곧 중국 혁명지사들과 친분관계를 맺어 함께 혁명에의 기초를 다져갔으며 그들로부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상해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 기반 위에 동제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신규식의 선구적인 활동을 통해 중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기반확대 및 운동이론정립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독립운동사상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자리매김할 수 있다.
격변하는 한 시대의 역사를 살다 간 인물들에 관해 논의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운명 속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국권을 상실한 시대적 아픔 속에서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어떻게 그 시대의 고난을 헤쳐 갔는가를 짚어보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이 시대의 과제를 현명하게 풀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1장 청년시절의 근대화 열정과 국권회복운동

1. 어린 시절

(1) 출생과 가계

예관 신규식은 개항초기인 고종 17년 즉 1880년 1월 13일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가 훗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주로 활동했던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의 생일과 같았다. 이 때문에 그의 나이 38세 되던 1917년에 다음과 같은 자수시(自壽詩)를 지어 나라 잃은 양자 모두의 비극적 운명을 읊었던 것이다. “오늘날 건청전에서 정사를 다스리던 청조의 고아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동정의 눈물이 끝없이 나도 모르게 흐르는구나.(今日乾淸殿 獨兒正可憐 同情無眼淚 不覺不漣漣)”
그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공집(公執)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성용[成用(신성용)]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 문장과 절개로 당대의 육은(六隱)과 견줄 만큼 이름난 곽은 덕린[德鄰(신덕린)]을 위시해 조선 초에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 여섯 왕을 섬기면서 정공의 반열에 오른 보한제(保閑濟) 신숙주 등 명망가를 선조로 두고 있다. 이처럼 문재를 떨친 선조 이외에도 15대인 간[柬(신간)]은 무과 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1592)·병자호란(1636) 때 참전하여 혁혁한 천공을 세워서 일등공신의 칭호를 받아 가문의 명예를 빛냈으니 문과 무를 겸비한 가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이런 구국일념으로 일신을 아끼지 않는 충절이 가문의 전통이 되어 왔다.
그런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이 낙향하여 충청도 청주에 정착한 것은 8대조인 신숙주의 다섯째 아들인 소안공준(昭安公浚)의 증손인 석회[碩淮(신석회)]가 낙향한 후였다. 사실 이들보다 먼저 청주 지역에 내려와 있던 이는 신숙주의 일곱째 아들, 동[洞(신동)]의 아들인 신광윤이었는데 그가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연루를 피해 청주 지역으로 입향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석회(신석회)가 입향한 뒤 보한재(신숙주)의 여섯째 아들 계열(신계열)도 이곳으로 낙향하니 이 지역에 고령 신씨의 문중촌을 이루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살피면 청주에서 동쪽으로 약 30분쯤 거리에 산당산성(山當山城)이 있는데 그 아래 문중촌을 이루었으므로 일명 산동(山東) 신씨라고도 일컬었다. 이들 산동 신씨는 고령 신씨의 여러 지파 중 최대 문중을 이루었으며 영조 년간에 그 번성의 정도를 『택리지』충청도조에 실린 상당산성(上黨山城) 동쪽에 신씨촌이 있다는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연산군시대부터 지금까지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문중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문중촌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청원군 양성면과 가덕면(加德面) 일대이며 조선조 말기 행정구역인 청주목 산내 이상면과 문의현 동면에 해당되어서 행정구역상 2개면으로 나누어졌지만 실제로는 동네간 거리가 5리 정도에 불과하므로 동일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서울에서 청주를 지나 이화령·추풍령을 넘는 영남으로의 교통로 중 하나이면서 인접한 보은을 경유해 무주·진안으로 이어져 호남에 닿는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어 문화전달 및 외부로부터의 정보 수용이 유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산동 신씨의 문중촌이 자리 잡은 곳은 조선조 노론의 본산인 화양동서원의 입구여서 남인의 당색을 지녔다고 하는 산동 신씨 문중은 이들 노론계 유생들과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하여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 노론이 집권하여 득세하던 순조 이후 문중 내 문과 급제자가 현저히 감소하면서 다른 남인계 문중과 마찬가지로 문중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고종 즉위 이전까지 가문의 형세가 많이 약화되었으며 실제 신규식의 직계 선조들 중 16대조 이후에는 관직에 나간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고종이 즉위한 뒤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한 과감한 정치개혁으로 인재등용 시 당파성이 배재됨에 따라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이 용이해졌고 관직 진출자도 점차 늘어나면서 산동 신씨 문중도 재기할 수 있는 활로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규식의 부친인 신용우와 형 정식[廷植(신정식)]이 비슷한 시기에 중앙정계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 신용우는 1887년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의 관직을 얻어 중앙에 진출한 뒤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경제적으로도 윤택하여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춘궁기가 되면 토광을 열어 인근 빈민에게 볏단을 나누어 주었던 인정 많은 양반이었다고 한다.
부친의 뒤를 이어 형 정식(신정식)은 사마음(司馬蔭)으로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뒤 탁지부 재무관, 회계국장 등 경제 계통의 관직을 거쳐 참서관·궁내부시종·덕천(德川) 군수를 지낸 바 있다. 예관(신규식)의 형과는 달리 동생들은 그의 영향을 받은 까닭에 대의에 뜻을 두고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중시한 것이다. 즉 셋째 건식[建植(신건식)]은 그와 더불어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일신을 바쳤으며 넷째 동식[東植(신동식)]도 향리에서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활동하는 등 구국에의 일념을 위해 젊은 열정을 태웠으니 이렇게 나보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울 수 있음은 아마도 우국충절이 내력이 된 가문적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이런 면은 신규식 집안 이외에 산동 신씨 문중출신 중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쳐 활동한 이가 많은 데서도 엿볼 수 있으니 이를테면 신채호·신백우·신흥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사숙에서의 한학수학

이러한 내력을 가진 산동 신씨 문중에 태어난 예관(신규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해 이미 3살 때 글자를 깨쳤으며 일찍부터 가숙(家塾)에 들어가 한문을 배우게 되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가세가 넉넉한 덕분에 열심히 학업에 정진할 수 있어 남보다 빨리 사서오경을 독파하였으며 남달리 글재주가 있어 글과 시를 지어 그 준일함을 발휘하니 어른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 있어 삽시간에 온 동리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었다. 그의 문재는 뒷날 그가 지은 다수의 한시(漢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관(신규식)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표현하거나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하는 안부 편지나 혹은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길 경우에도 시로써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관(신규식)이 남긴 저서 중 유일한 시집인 『아목루(兒目淚)』에 담긴 한시들은 그 하나하나가 축하할 일이나 격려해 주는 내용이거나 일기처럼 혹은 기행문처럼 지어져 있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속장(束裝)」이란 시에 부제로 ‘친구가 체포된 사실을 듣고’라는 것을 붙여 자신이 빨리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해야 하는 실정을 읊고 있다. 그 외에 1910년대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중국혁명 인사에게 보내는 시와 함께 독립투쟁에 몸담고 있던 동지들에게 주는 시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기 예관(신규식)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준다.
예관(신규식)은 16살 때는 조선왕조의 정치문란과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꿰뚫어 보고서 일본을 배척하며 간악함을 배격하는 글을 지어 민족의식을 일깨움으로써 문명(文名)을 드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관(신규식)은 당시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경시하는 사회풍조를 통탄하면서 무력양성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1895년 민비(명성황후)가 시해되던 을미사변(1895)의 발발과 단발령의 공표로 전국에서 을미의병(1895)이 봉기하자 예관(신규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숙의 학우들을 지도해 스스로 소년대(동년군)를 조직한 뒤 밤낮으로 조련하여 뒷날을 기약하고자 하는 등 무덕(武德)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여 비록 나이 어리지만 국난에 신속히 조직적인 무력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공고해 짐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런데 그의 소년대 조직은 척사론적인 성격이 지배적인 을미의병(1895)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아마도 그의 문중이 갖는 보수적인 성향에서 영향 받은 구국충정의 발로로 보인다.
어쨌든 예관(신규식)은 일찍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분의 기개를 담고 있었으며 국력회복을 위해서는 무력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무력중시의 의지는 후일 서울로 올라 온 그가 무관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3) 결혼과 상경

예관(신규식)은 17살이 되던 해인 1896년 봄 향리에서 경기도 명문인 한양 조씨 집안에서 군수를 지낸 종만[鐘萬(조종만)]의 딸인 조정완(趙貞垸)과 혼인하였다.
혼인하자마자 곧이어 신학문 수학의 뜻을 품고 상경하였다. 그가 상경했을 당시 서울에는 부친과 형인 정식(신정식)이 관직에 재직 중이었고 문중의 젊은 청년으로 앞서 상경한 신흥우(申興雨)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예관(신규식)은 이제까지 향리에서 전통적인 한학 교육만을 받았으나 앞서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던 부친이나 형 이외에 당시 상경해 있던 상경 문중인사들로부터 신학문이나 “개화”의 필요성과 조언을 받았을 것이며, 본인 자신도 그에 공감하여 서둘러 상경을 결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신흥우의 경우를 보면 그의 부친이 아들에게 “나는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경전을 읽어도 뜻을 이룬 바가 없는데 신진인사들이 모두 외국의 문자로 출세하는 방도를 삼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태임을 명심하라.”고 강조하면서 아들의 출세를 위해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같은 시기 상경해서 벼슬하고 있던 예관(신규식)의 부친이나 형도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2. 신학문 수학과 근대화에의 열정

(1) 관립 한어학교 시절

예관(신규식)이 상경했을 당시는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다툼이 극심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즉 민비(명성황후)시해 및 단발령에 항거한 을미의병(1895)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2월에는 고종을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게 한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으로 친일정권이 몰락하고 친러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눈독들이던 각종 이권을 경쟁적으로 획득하여 직접 침탈을 개시하게 되자 삼천리강산의 여기저기가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열강의 침탈을 보면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세력의 구심점이 되고자 하였으며 이어서 7월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이를 중심으로 도시의 자주 민권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인 서울에 상경한 예관(신규식)은 우선 급선무가 신학문 수학이란 판단 하에 견지동에 새로 문을 연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이때가 대략 1897년 후반기로 추측되는데 입학 당시 함께 입학한 학생수가 35명가량이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그가 한어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양공업전습소에 입학했다가 모종의 시위사건에 관련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다.
다만 예관(신규식)이 이후에도 줄곧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공업부문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선조의 훌륭한 이기(利器)보존에도 열의를 다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통 있는 양반가문, 특히 출세지향적이라는 산동 문중 출신의 신동인 그가 그곳에서 학업을 시작했다고 보기에는 납득키 어려운 바가 있다.
당시 서울에는 6개의 관립외국어학교가 설립되어 있었으며 그 중 취직 전망이 좋은 곳은 영어와 불어학교였다. 그런데도 그가 한어학교를 택한 까닭은 명망 있는 양반가문 출신으로 이미 전통한학의 기초가 닦여 있었다는 점과 다른 외국어학교보다 보수적인 관직으로의 진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당시의 관립외국어학교는 아직은 역관 양성을 위한 기관, 즉 1895년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 당시 신분제폐지와 정치 제도의 개혁으로 폐지된 사역원(司譯院)의 연장으로 취급하는 경향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예관(신규식)이 관립한어학교로 진학한 것은 그가 전통적인 신분관념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이 시기 어느 정도 양반으로서의 자기 체질극복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우선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관(신규식)의 이 같은 선택은 비슷한 시기에 상경, 수학했던 문중의 신흥우가 서구적인 신신학교의 대표인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며 신채호는 전통적인 구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당 이남규(李南珪) 문하에 들어갔던 것과 비교해 보면 개화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차이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그가 수학했던 관립한어학교는 견지동에 있는 체신기념관으로 현재 보존되고 있는 목조단층의 한옥이었으며, 수업 연한은 3년간이었다. 당시 한어학교 교관은 중국인으로는 호문위(胡文衛)가 있었는데 그는 중국의복에 변발차림으로 강의했다고 한다. 그 외 한인으로 류광열(柳光烈)·오규신(吳圭信) 등이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예관(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 시절 중 교관들과 맺은 인연으로 훗날 중동학교에서 구국 교육활동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한어학교에서 한문과 중국어 수업 이외에 산술·지리·역사과목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외에 어느 동문의 회고담에 의하면 체조도 교과목으로 규정되어 있어 날씨가 화창하면 가끔 운동장에 서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체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는 관립학교 규정에 따라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학용품이 관비에 의해 무료로 지급되었으며 점심도 급식되었다. 또한 소정의 수업 연한을 마치고 학력검정에 급제하면 졸업장과 함께 관리임용의 사령장이 수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은 한어학교에서 3년간 수학했으나 정식으로 졸업하지 못한 듯한데 일설에는 학교 학감의 부정을 보다 못해 동맹휴학을 주동한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런 이유도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그가 한어학교에 적을 두고 수학하면서 1898년 후반에 만민공동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즉 자료를 검토하면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이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기에 그가 일반회원으로서 이승훈·허위 등과 함께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으로 활동하였으며 1898년 12월 25일 수구파의 대탄압을 받고 해산당할 때 구속된 400여 회원 중 중요회원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미루어 예관(신규식)은 여기서 문중청년인 신흥우·신채호와 뜻을 같이 하여 활동하는 한편 후일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케 되는 나철·이승만·안창호·양전백·이승훈·이동휘·박은식 등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만민공동회의 자유민권운동에의 참여활동으로 인해 그가 관립한어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여 출사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예관(신규식)은 이를 계기로 다시 20살 되던 해인 1900년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닦아 후일 국권회복에 기여하고자 결심하였다. 비록 졸업한 것은 아니더라도 관립 한어학교에서 배운 중국어는 상당한 수준이어서 후일 중국을 활동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그가 구사하던 유창한 중국어 때문에 예관(신규식)을 중국인으로 오인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언어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2) 육군무관학교 시절

구한말에 설립된 육군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식군대를 지휘하고 교육시킬 수 있는 유능한 초급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웠으므로 까다로운 입학 선발 규정과 입학시험을 거쳐야 했다. 즉 입학자격이 군부의 장교나 정부의 칙임관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며 설사 추천을 받고 시험에 응시했더라도 십여대 일이란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비로소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대단히 인기가 높은 학교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무관학도로 뽑힌 200여 명이 모두 칙임관의 아들·사위·동생·조카들이라고 한 지적처럼 육군무관학교는 신학문을 배울 수 있고 관료로도 진출할 수 있어 당시 지배계층에 속하는 자제들을 비롯해 관계로의 진출을 꾀하는 청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또한 구국의 일념으로 무력을 다지려는 애국청년에게는 실력양성기관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쉽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신규식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00년 9월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해서 다닐 무렵의 육군무관학교는 비교적 자주적으로 운영되었으므로 민족의 자주·자강 사상을 보다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은 문관선호사상이 강했던 유교적 전통의 문중 출신이었으므로 이 학교에의 입학은 부친이나 집안 어른의 이해가 전제된 결정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유가 문중으로서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또한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활동 중 교류가 있던 개화지향적인 무관인 박승환·이동휘 등에게 영향 받은 자주적인 국가방어의식을 체현시키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예관(신규식)은 여기서 전술학·군제학·병기학 등 군사학과 외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신학문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학교 성적이 선두로서 뛰어났던 예관(신규식)은 학교 당국이나 친일세력이 다수를 점한 교관들의 부패상과 규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처리하는 불합리한 처사를 들어 끊임없이 그 부당함을 항변했다. 그러던 중 무관 학교 내부에서 부패한 학교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일부 교관들과 생도들 사이에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예관(신규식)은 동기생이지만 자신보다 4살이나 나이 많은 조성환(曹成煥)과 개혁에 대한 뜻을 같이 하고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약 10여 명이 의기투합하자 우선 동맹휴학을 하자고 계획했을 뿐 아직은 그 구체적인 거사일자나 방법을 정하지 않았을 때였다. 적당한 기회를 살피며 예의 주시하던 중 불행하게도 사전에 학교 당국에 의해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주모자로 지목된 조성환과 일부 학생들이 체포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규식은 신병 치료차 잠시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여서 다행히 체포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의리를 소중히 여기던 예관(신규식)이 함께 일을 도모 했던 조성환의 체포로 인해 그가 겪었을 심적 갈등이 얼마나 컸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중에 학교 당국에서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주모자 한 사람만 제외하고 관련자 모두 사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성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가 무기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으며 3년 후에 사면되어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예관(신규식)은 조성환과 더욱 각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뒤에 의형제를 맺고 고락을 함께 할 정도로 절친해졌으며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무렵에도 함께 활동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육군무관학교 시절 신규식은 근대화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동맹휴학 주동 등을 통해 근대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청년으로서의 입지가 굳어져 있었고 동료사회에서도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특히 그가 신병치료차 향리에 내려갔던 시기에는 이러한 근대화 지향적 청년으로서 문중개화를 지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무관학교를 무사히 마친 예관(신규식)은 1902년 7월 6일 육군보병 참위에 임관됨으로써 정식 군인이 되었다. 이어 1903년 3월 22일 진위대 제4연대 제2대대에서의 견습을 거친 뒤 그해 7월 3일 졸업증서를 받았던 것이다. 이 후 1907년 9월 한국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는 그날까지 육군무관으로서 명멸해 가는 국운을 회복하고자 구국대열에 앞장서게 되었다.

(3) 문중개화와 근대화에의 열정

예관(신규식)의 문중인 산동 신씨는 세조대의 영의정이었던 신숙주의 후손으로 조선조의 정치사상으로 보아 초기에는 훈구벌족이었으나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 변모했으며 붕당기에는 남인 계열에 속하였다. 이들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해 산동 지역에 문중촌을 형성했는데 이 지역이 바로 노론의 본산인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입구였으므로 서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면서 문중 출신의 과거급제자의 수도 감소하기는 했지만 순조 대 이후의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하에서 중앙정계에로의 진출 자체가 위축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의 중앙정계 진출로 화려했던 집안의 광영이 쇠락해 가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고종 즉위 후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려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인재 등용책에 힘입어 남인계인 산동 신씨도 비로소 관직 진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적극 활용해 선진적으로 중앙에 출사한 문중인사들의 개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이들의 변화에 따라 산동 문중의 유능한 청년들이 신학문 수학과 중앙정계 진출을 꿈꾸며 속속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규식·신채호·신흥우 등의 상경인데 이들은 상경과 더불어 문중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선구적인 근대화 청년으로 변모할 계기를 갖게 되었다. 예관(신규식) 등은 앞서 중앙에 진출해 있던 문중 어른들의 적극적인 배려 속에서 각각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신식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또한 당시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주도해 가던 정치운동으로 인해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사상이 형성, 고양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근대화에 대한 당대의 시급한 문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근대화인식 및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수용에 만족치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근대화에의 열정을 심화시키면서 향리에 문동학원·덕남사숙·산동학당 등을 설립하여 문중을 근대화의 대열로 이끌기 위해 열의를 다하였다. 그 결과 1908년 5월에는 보수양반 문중으로는 최초로 문중 내 근대식 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靈川學契)를 결성할 정도로 전통적인 유림적 사고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체질 개선을 통해 근대화로의 과정 속에서 적극적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산동 문중의 변화 과정에 있어서는 그 선구자격인 예관(신규식) 등을 후원했던 문중 내 소수 유력 인사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동도서기적인 방식으로 문중 개화를 이끌어 가도록 기본틀을 제시하였다. 산동 신씨 문중이 내세운 근대화의 특성은 영천학계 취지에서도 나타나듯이 서구적인 근대화로의 방향이 아닌 구체신용(舊體新用)의 방향 즉 동도서기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을 비롯한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 실패와 전통 유림의 척사의병 실패를 거울삼은 반성적인 사고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신용적 문중 근대화로의 길은 예관(신규식)이나 신채호 등 산동 문중의 선구적 열혈청년에게도 받아들여졌는데, 예관(신규식)의 경우는 그의 저서 『한국혼(韓國魂)』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구학문·신학문에 대한 비판을 검토해 보면 양자의 무비판적인 맹종을 모두 정신의 죽음으로 비판하고, 우리의 정신과 이기(利器)를 바탕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구체신용적인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파악된다. 다만 이들의 경우에는 구국투쟁을 위한 이념적 바탕으로 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자주적 근대화나 일제에 대한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보다 강화되는 모습으로 반전되어 갔던 점이 특정적이다.

3. 국권회복운동의 대열에

(1) 기우는 국운을 통한하며

예관(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에서 지낸 3년 동안 무관이 갖추어야 할 엄격함과 굳센 기질을 몸에 익힌 덕분에 일평생 몸가짐이 시종 군인의 규율과 단정함을 간직하고 지킴으로써 장엄한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하고 근대화에의 열정이 강렬한 청년으로 변모한 예관(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진위대와 시위대 및 모교인 육군무관학교에서의 견습 과정을 마친 뒤 시위대 제3대대에 배속되고 6품으로 승급되었다. 예관(신규식)은 바쁜 군대 생활 속에서도 구국교육에의 열정을 태워 문중 및 그 지역사회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려는 일념 하에 1903년 겨울 향리에 덕남사숙을 설립하였다.
눈이 하얗게 덮인 겨울 어느 날, 10여 칸의 아담한 교사 앞에서 주민 백여 명과 학동 80여 명이 모인 덕남사숙의 개교식에서 신규식은 이 사숙을 세운 뜻을 밝히며 입을 열었다.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입니다. 또한 보배입니다.… 우리가 망하게 된 이유는 무(武)를 업신여긴 것과 또한 교육을 등한히 한 탓입니다.… 이순신의 철갑 거북선을 한낱 녹슨 쇠붙이로 만든 후손이 나라 망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요, 또 이 원인은 교육이 철저치 못한 탓입니다.… 이 나라 먼 장래를 내다 볼 때 어린이 교육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난데없이 장끼 한마리가 식장에 날아들었다. 신규식의 손에 잡혔던 오색찬란한 꿩이 푸드득거리며 앞산으로 날아갔다. 꿩은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모두들 기뻐했다. 개교식은 즐거움 속에 끝났다.
이 사숙에서는 산술·측량·한문·일어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그 외에도 유능한 교사를 확보하기 위해 멀리 청주에서까지 선생님을 모셔 오는 등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예관(신규식)은 이 사숙에 유난히 애착을 가져 늘 발전의 기틀을 굳게 하고자 힘썼으며 틈만 나면 향리에 내려와 직접 강의를 맡곤 했다.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 체결 직전에는 이곳에 내려와 손수 작사·작곡한 노래를 학동들에게 가르쳐 준 일도 있었다.

아 대한국 만세
부강기업(富强基業)은 국민을
교육함 존재함일세
우리는 덕을 닦고 길을 바로어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 봅시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나라의 기초는 우리 학도님
충군신 애국성을 잊지맙시오
활발히 경주하여 전진함에
허다사업을 감당할려이면
신체의 건장함이 청백이로다

천지도 명랑하고 평원광야에
태극기 높이 달고 운동하여 보자

서구문명의 이기를 배워 산업을 진작시켜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러한 많은 사업을 슬기롭게 전진시켜 가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선구적이며 충실한 일꾼 양성이 선결 과제임을 깨우치려는 그의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즉 당시 지식인층에 풍미했던 서구의 근대화론인 문명개화에 기초한 산업 부흥과 교육 진흥이란 실력양성론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실력에는 무의 겸비가 포함되고 있으며 우리의 정신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관(신규식)의 이러한 의도에 걸맞는 탓인지 학동들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며 그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고 한다.
1905년 11월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해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 소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체결케 하였다. 그 결과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었으니 사실상 모든 주권이 송두리째 일제의 손아귀로 넘겨진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당시 2천만 대한의 백성들이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체결에 대한 분노는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을 필두로 경향 각지에서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유생들의 구국 상소가 줄을 이었으며 당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이었던 민영환은 조약(을사늑약, 1905)의 부당함을 천명하는 우국의 피 끓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하여 조약(을사늑약, 1905) 반대운동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한국혼』에서 민영환의 순국을 다음과 같이 높이고 있다.
“슬프다! 민충정(閔忠正, 민영환)의 피여! 5조목(을사늑약, 1905)의 통감협약(統監協約)이 강제로 협박되어 끝내 이루어지자 서울로 달려 올라와 중문을 두들겨 힘껏 간하였으나 군신 상하의 심리가 일치되지 않고, 사회의 결합이 견고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목에서 가슴까지 이르니, 피육(皮肉)이 헝크러지고 피가 만지(滿地)를 적시면서 죽어갔다.”
즉 치욕, 민족적 치욕을 씻고자 한 피흘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즈음 예관(신규식)은 향리에서 천지가 무너지는 소식을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면서 조약(을사늑약, 1905)반대운동에 참여키 위해 급히 상경하였다. 주위에서 전개되는 저항운동을 예의주시하면서 그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군 조직을 이용해 각 지방의 군대에 연락하고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시도하였으나 아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열혈청년의 응어리진 고통을 토해 낼 수가 없었으니 민영환의 뒤를 이어 자결로써 조약(을사늑약, 1905)체결의 부당함을 세상에 널리 밝히고자 음독자살을 꾀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집안 식구들에게 일찍 발견되어 긴급히 치료한 덕분으로 겨우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음독한 약기운이 워낙 강한 까닭에 시신경을 다치게 되어 끝내 바른쪽 시선은 바르게 보지 못하고 흘겨 보게 되었으니 이후 자신의 호를 흘겨 본다는 뜻인 예관(신규식)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는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어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우국지사의 애절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2)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압적인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이 체결된 후 고종은 그 조약(을사늑약, 1905)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외국에 알리려고 노력했으며 그 일환으로 밀사를 해외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세 사람의 밀사도 그러한 의도 하에서 추진되었는데 만국평화회의 자체가 제국주의 열강을 위한 회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물론 동일한 식민지 문제를 갖고 있는 영국 등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 당하는 국가적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킨 여세를 몰아 1907년 7월 24일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키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한일신협약, 1907)을 늑결함과 동시에 군대해산 등을 포함한 비밀각서를 교환했다. 이 각서에는 조약상 명시되어 있지 않은 ‘황궁 시위를 위한 1개 대대만 남기고 한국군 전부를 해산시킨다.’는 내용의 군대해산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 일제가 극비로 추진한 한국군 해산계획에 따라 본국으로부터 증원군을 파견되었고, 이들이 각기 대구·대전·용산·평양 등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서울에도 병력을 집중 배치시켰을 뿐 아니라 해군까지 동원해 구축함 4척을 대기시키고 한국 연안에 제2함대를 순항케 했다. 일본군의 배치가 완료된 다음날인 7월 31일 밤 일군 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창녕궁으로 들어가 미리 작성한 각본대로 순종으로 하여금 강제로 군대해산 조칙을 재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예관(신규식)은 1906년 1월 정3품으로 위계가 오른 뒤 그 해 4월 시위대 제3대대에 배속되면서 부위(副尉)로 진급하였던 것이다. 이후 기울어 가는 국운과 함께 하는 구한국군대에서 최후까지 남아 강제해산 당하는 수난을 겪는 비운의 군인 중 하나가 되었으니 그가 감내해야 할 고뇌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8월 1일 군대해산이 단행되던 날을 기술한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이날 하늘은 흐리고 보슬비가 소소히 내리고 있었다. 아! 훈련원은 국가 5백 년 동안 무예를 닦던 곳이요 현재의 군인들 또한 다년간 용약(勇躍)하며 무예를 익히던 곳인데, 갑자기 오늘부터 헤어져야 하니, 하늘인들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라고 그 처절한 광경을 전한다.
이날 오전 한국군 시위혼성여단장 양성환 이하 연대장·대대장·각 부대장은 일본군 교관들과 일군사령관 관저로 소집되었다. 여기서 군부대신 이병무가 해산조칙을 낭독하고 이어 일군사령관 장곡천호도의 훈시가 있었다. 이때 일군사령관은 각 부대장들에게 금일 각 훈련원에서 도수훈련(徒手訓鍊)이 있으니 병사들에게 무기를 소지시키지 말고 10시까지 집합토록 명령하면서 해산이 조용히 이루어지도록 당부하였다.
한편 해산식이 열릴 훈련원에는 군부협판·일본군참모장·군부고문 등이 일찍부터 일군혼성부대를 배치시키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한국군 기병대의 도착을 시작으로 제1연대 3대대, 제2연대 3대대 등이 도착했다. 예관(신규식)이 속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강제동원을 거부하고 일군과 교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후 2시에야 겨우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총해산인원 3,441명 중 1,629명이 불참한 중에 진행되었다. 해산명령이 내려져 한국군들은 차고 있던 칼과 어깨의 견장을 해제 당하고 미리 준비된 은금이 주어진 뒤 자유해산이 명해졌다.
이 날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및 제2연대 제2대대 병사들은 해산을 거부한 채 일제히 무장봉기해 일본군경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는데,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창령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이 바로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깝겠는가?”란 유서를 남긴 채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총으로 무장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를 필두로 인접한 제2연대 제1대대는 국권수호를 위해 일치단결하였던 것이다. 당시 부위였던 예관(신규식)은 혼신을 다해 앞장서서 부하들을 이끌고 대한문까지 진출하였다. 이기려던 전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망국민의 처절한 울분이요 설움의 응결이 이러한 기의를 유발케 한 것이다.
구한국군의 거사 소식을 전해 듣고 즉각 출동한 일본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투입시킨 대병력과 월등한 화력으로 이들을 육박해 왔다. 일본군은 완강한 해산군인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였으며 힘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는 시위 군인들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는 병영을 포기하고 서소문 밖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관(신규식)은 대대장 박성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고 순국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당하고 자신도 9월 3일 정식으로 면관됨에 군복을 벗게 되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42명의 사상자를 냈고, 시위대는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탄약고갈로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또한 이 날의 항전은 시위대 병사만의 고립된 것이 아니라 상인·노동자·학생 등 각계각층의 서울시민이 합심해서 이들의 항전을 도왔던 것이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이후 의병전쟁 전개에도 큰 활력을 제공했다.
비록 무력투쟁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결단과 행위는 후일 『한국혼』에서 주장하듯이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주검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의식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식 속에서 구국에의 열정이 끊임없는 구국적 활동으로 체현된 것이었다.
예관(신규식)은 이런 무장투쟁적인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다른 한편으로 계몽단체에 가입하여 계몽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7월 대한협회의 회원이 되어 공동운명하의 위기적 상황을 각성하고 함께 단결해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취지의 시를 통해 자신의 실력양성론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한자강회가 해산 당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송자강자(送自强子)」란 시에 담았으며, 이 시에서 자강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대한자강회를 계승해 설립된 대한협회에 대해 “같은 배에 타서 풍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지속되는 진력전진의 계몽운동을 전개하도록 독려하는「봉대한자(逢大韓子)」란 시를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예관(신규식)은 현실의 민족위기를 극복키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국민적 역량을 축적하고 신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의 실력양성론을 강조한 것이다.

(3) 광업회사의 설립

강제로 군복을 벗게 된 예관(신규식)은 서울 운니동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구국운동에 투신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군복무 시절 상사였던 윤치성(尹致晠)이 찾아와 실업부흥의 일환으로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를 받은 그는 늘상 실력양성론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화의 큰 줄기 중 하나가 산업진작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인 퇴직 장교 10여 명을 규합하여 광업회사(廣業會社)를 발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발기인으로 윤치성·조철희, 무관학교 동기생인 신창휴 및 부친과 친분이 두터운 민영휘의 아들인 민대식 등이 있었다.
광업회사의 사무실은 지금의 단성사 앞에 있었으며 각 지방에서 생산된 각종 물산을 거래하는 것이 주요업무였다. 광업회사의 경영진은 출자를 많이 했던 윤치성의 형인 윤치소(尹致昭)가 사장을 맡고 예관(신규식)은 경리책임자가 되었는데 예관(신규식) 등의 뛰어난 사업수완 덕분에 다행히도 운영이 잘되어 번창해 갔다고 한다. 직접 회사경영에 참여하는 한편 예관(신규식)은 선조의 이기(利器)를 되찾는 일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조의 이기를 되찾은 일은 예관(신규식)이 품고 있던 국권회복책 중의 하나로 대한의 혼을 지키는 길에 속하는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 실천을 위해 우선 공업전습에 유능한 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분원자기(分院磁器)를 부활시켰다. 그 외에도 그가 관립공업전습소의 학생들이 세운 공업연구회의 주된 후원자로 나섰던 사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즉 1908년 가을 관립공업전습소의 학생들은 조직적인 공업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공업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에 공감한 많은 뜻있는 인사들은 후원자(찬성자)가 되어 학생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으며, 예관(신규식)을 위시한 광업회사 임원들도 공업연구회의 취지에 찬성해 모두들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업연구회의 월보인 『공업계(工業界)』의 발행을 위해 사무실을 빌려 주었고, 예관(신규식)은 월보사장 겸 편집부장을 맡아 월보발간에 힘써 주었다. 그런데 당시 공업연구회 1대회장으로 선출되어 연구회를 주도해 가던 학생은 박찬익이었는데 그와는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친분이 깊어졌으며 구국에의 열정이 가득 찬 예관(신규식)의 진지한 모습은 박찬익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훗날 이들의 관계는 망명 이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몸담던 시기에도 각별한 유대가 이어졌다. 이 잡지는 당시에 발간된 『상공월보(商工月報)』·『상업계(商業界)』와 더불어 한말 실업계의 계몽에 공적이 컸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1910년 일제의 보안법 공포로 다른 출판물과 마찬가지로 발행이 금지되었다.
식산흥업을 위한 예관(신규식)의 활동은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후(厚)하게 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관(신규식)이 『가정양계신편(家庭養鷄新編)』이란 양계에 관한 책을 역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1908년에 출판되었던 양계에 관한 전문서적인데 역자명이 신규식으로 되어 있다. 그 출판의 기본 취지를 보면 외국양계법에 관한 책을 검토하여 이를 기반으로 우리의 일반 가정에서 쉽게 보고 양계할 수 있게 하여 가정의 긴요한 산업의 하나로 추진시킴과 동시에 거대한 재원으로 활용케 하기 위해 역술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양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외국어를 역술한다는 의미에서만 생각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밖에 예관(신규식)의 산업발전에 대해 갖는 열의는 대한협회의 활동상에서도 나타난다. 예관(신규식)은 대한협회의 학회활동 당시 실업부에서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가 민족자본의 육성과 독립자존을 위한 경제력 향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말해 주는 좋은 예이다. 예관(신규식)은 대한협회 이외에도 기호흥학회가 결성될 당시인 1908년 8월에 회원으로서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일천원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혀 학회를 통한 구국계몽활동에 있어서 물질적·정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으로 알 수 있다.

(4) 구국교육의 일선에서

예관(신규식)은 구한국 군인으로 애국충절한 군인양성과 의병거사 등 무력적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도 1900년대 구국 운동의 또 하나의 흐름인 구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를 테면 예관(신규식)은
“우리 대한이 망했다 해도 우리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한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의 혼을 보존하는 것만이 민족과 국가회복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있었다. 또한 예관(신규식)은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전술한 바의 식산흥업의 적극적 추진과 더불어 교육구국활동을 중시 하였다.
일찍부터 교육활동에 눈을 뜬 예관(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 시절인 1901년 향리인 인차리에 설립된 문동학원에 관여한 이래 앞서 본 바와 같이 1903년 자신이 직접 덕남사숙을 세워 민족혼을 심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이 이처럼 근대적 학교교육에 열의를 보이던 이 시기의 교육 현황을 보면, 근대학교는 대부분이 기독교의 선교학교였으며 그 외 민립학교가 몇몇 있었는데 그것도 유교성향이 약한 북부지방에 치중된 경향이었다. 그렇지만 중부 이남지역은 아직도 봉건적 유풍(儒風)이 강하게 남아 근대학문의 필요를 인식치 못한 상태였으므로 보수적인 유생의 반대가 근대적인 학교경영을 어렵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예관(신규식)의 집안인 산동 신씨 문중에서는 민립학교인 문동학원이 1901년 설립되고, 1903년에는 예관(신규식)의 덕남사숙이 설립되어 근대교육을 실시한 것은 가히 선구적이라 할만하다. 특히 문중촌에 신식교육의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문중 내의 합의가 전제되었을 터인즉, 신씨 문중의 선구적인 근대화의 열정이 가득 찬 청년과 문중 자체가 상호 보완적으로 근대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예관(신규식)은 이처럼 문중촌에 선구적인 근대식 학교를 세워 문중의 근대화로의 진전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그런 정성 어린 노력에 힘입어 문중은 물론 문중인사들의 교육활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모되어 갔다. 그 결과 주요한 문중인사들에 의해 문중학계(學契)와 2개의 사립학교가 문중촌 부근에 설립될 수 있었다. 즉 서울에 올라와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학계결성이 논의되어 1908년 5월 1차 종회(宗會)에서 정식으로 영천학계(靈川學契)가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계는 총감(總監)·계장·부계장·총무 각 1명·부장 4명·일반부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총감은 관찰사를 역임한 신태휴, 계장은 신흥우의 부친인 신면휴, 부계장은 예관(신규식)의 부친인 신용우, 실무담당인 총무는 예관 신규식이 각각 맡게 되었다. 신규식의 형인 정식(신정식)도 부장으로 선임되어 집안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문중촌이 있는 청주·문의·옥천에 각각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을 전개하니 학계의 취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문중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영천학계의 설립취지는 종중의 사장된 재산을 학교설립에 끌어 들여 재정이 안정된 학교를 세우려는 것이었으며 이들이 지향하는 학교교육의 요체는 구학과 신학을 겸비하면서 덕행을 수양하고 지식을 계발하며 충효를 시상(是尙)하고 지기(志氣)를 바르게 세우자는 것과 의무교육의 실시였다. 말하자면 의무교육과 신·구학문의 장점을 겸비한 구체신용의 교육에 역점을 둔 주체성 있는 근대교육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이념을 실천하고자 사립학교와 가족구락부를 설치하겠다고 하였으며 그에 따라 청주와 문의지회에 각각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즉 1909년 6월 신형우(申亨雨)가 청주에 청동학교(淸東學校)를, 신승구(申昇求)가 문의에 문동학교(文東學校)를 설립했던 것이다. 청주의 산동문중학교, 문의의 산동문중학교란 의미에서 청동·문동으로 명칭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의 전기에 의하면 예관(신규식)이 청동학교·문동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두 학교가 문중의 영천학계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고 당시 학계의 총무였던 그가 학계의 주도자로 제반 사업을 주관했던 사실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그가 학계의 대표는 아니지만 당시 학계 참여 인사들의 연배로 보나 근대적 학문과 구학문을 겸비한 학력으로 보나, 학회활동과 실업활동 등의 경력으로 보나 총무였던 예관(신규식)이 영천학계를 이끌어 가는 중추였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런 점에서 보아 학계설립 당시 산동 문중이 지향했던 근대화의 방향이 구체신용, 즉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민족주체성의 강조였다고 한다면 이는 또한 예관(신규식)이 갖고 있던 근대화 지향의 방향과 일치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문중차원의 교육활동 이외에 서울에서 개인적으로 후진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1909년 3월 윤치소의 뒤를 이어 현 중동학교의 전신인 중동야학교(中東夜學校)의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중동학교는 당시 계몽단체나 민간인들이 근대적 제도교육의 필요성을 각성하여 설립한 많은 사립학교들 중 하나로 1906년 한어야학(漢語夜學)에서 출발한 학교였다.
한어학교 출신으로 교육활동에 뜻을 두었던 그가 교장으로 재임하기 이전부터 이 학교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예관(신규식)은 교장에 취임하여 다른 사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인재양성·실력양성·계몽 등에 역점을 둔 교육을 실시하여 위난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외세를 구축한 뒤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을 앞세웠다. 또한 중동야학교의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받게 되어 학교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 뒤 1910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춘강 조동식(春江 趙東植)에게 교장직을 맡긴 채 혼신을 다해 구국에 몸바칠 인재를 양성하려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중동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제2장 상해에 독립운동 기반 마련

1. 망국의 슬픔을 딛고

(1) 자결을 결심하고

구한말 나라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의 구국단체인 각종 계몽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교육 및 실업진흥에도 일신을 아끼지 않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예관(신규식)은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한일강제병합, 강제병탄, 1910)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라 안 상하는 물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치 친부모를 여윈 듯이 가슴을 조이고 발을 구르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온 나라 안에 피 끓는 곡성과 원통한 외침이 끊이지 않았으며, 온 국민의 피눈물어린 호소가 온 세계에 퍼졌으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논리가 지배하던 당시의 세계질서 탓에 어느 누구도 귀기울이고자 하지 않았다. 이제 이천만 단군의 후손들이 일제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서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래 줄곧 애국충절의 일념으로 국권회복에 몸바쳐 온 예관(신규식)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관(신규식)은 다시 한번 목숨을 버리고자 음독자살을 꾀하였으나 다행히도 대종교의 종사(宗師) 나철에 의해 발견되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나철은 당시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한 종사였는데 예관(신규식)은 1909년 7월경에 대종교에 입교한 이래 그와 두터운 친교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대종교에 한민족의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확신한 까닭에 우리민족의 부흥은 곧 대종교의 발전에서 가능하다고 인정할 만큼 대종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대종교에 대한 확신은 그가 고유한 민족정기를 이었다고 보는 민족지상주의적인 대종교에 귀의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자살사건을 기화로 나철과 친분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또한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망명 이후 상해에서 활동할 때에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여 매주 예배를 올리는 등 이 지역 대종교를 영도했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국권상실의 통한을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와신상담하는 심정으로 나라와 민족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 그 상처를 치유해야만 복국(復國)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망국으로 치닫게 된 원인을 법치의 문란과 원기의 쇠약, 지식의 빈곤, 외세에 대한 아첨과 한순간의 편안함 추구, 그리고 터무니없이 스스로를 크게 여기거나 스스로를 낮추는 것, 당파를 짓고 사리사욕을 꾀하는 것에서 찾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하늘이 준 본연의 착한 마음을 송두리째 잊어버린데 있다고 보았으니 “상진천량(喪盡天良)”이 그 의미다. “상진천량”때문에 양심이 마비되고 악한 병에 걸리는데 그것이 바로 선망(善忘), 즉 잘 잊어버린다는 병이었다. 이처럼 백성들이 잊어버리기를 잘하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돌파구는 다름 아닌 선망증을 치유하는 방법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를테면 선조의 교화와 종법, 선조의 공렬과 이기(利器), 국사(國史)와 국치(國恥)를 잊지 말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만 대한의 혼은 간직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대한혼”의 복구가 국권회복의 최선책이란 생각을 굳힌 예관(신규식)은 새로운 각오로 구국에 몸바치기로 하였지만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진전되기 어려우며 더욱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즈음 예관(신규식)은 국제정세 특히 중국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으로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공화주의 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2) 중국혁명의 땅으로 망명

어느덧 1910년도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즈음 망명을 결심한 예관(신규식)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 조성환과 박찬익을 만나 새로운 각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세 사람의 애국청년들은 상호 머리로 맞대고 장래의 구국활동에 관해 논의한 끝에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여 조성환과 박찬익은 먼저 떠나고 예관(신규식)은 남아서 남은 일을 정리하고 망명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예관(신규식)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던 광업회사의 돈까지 거두어 2만여 원을 준비하였는데 당시에 쌀 한가마니에 1원 50전이었다고 하니 2만원은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었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자금 중 일부를 장질인 신형호에게 주어 먼저 중국에 망명한 조성환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부친에게 고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향리인 인차리에 내려가 경부 신백우를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뜻을 비쳤다. 그리고나서 당시 관립외국어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우 건식(신건식)에게 상해로 망명할 것임을 알려주고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그가 남긴 한시 중 「속장(束裝)·친구의 체포 소식을 듣고」에 의하면, 예관(신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 민족운동과 관련되어 측근의 친구가 일제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망명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내용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추측컨대 신민회와 관련된 민족인사의 체포인 듯하며, 이 때문에 그가 어떤 신분상 위협을 감지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망명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진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병(한일강제병합, 강제병탄, 1910)을 전후한 시기부터 국내에서는 더 이상 어떤 민족운동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해외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세워 독립투쟁을 전개하려는 계획이 대안으로 마련되었다. 즉 이 시기 가장 주된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는 1910년 전부터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애국지사 중 다수가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만주와 연해주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중국 본토보다 한인의 이주가 일찍부터 시작된 이래 다수의 한인이 정착하여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으므로 물적 인적자원 활용이 독립운동 기지설치에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으로 건너가 무장투쟁과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하면서 조국 광복의 꿈을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 본토는 교통이나 거리 문제도 있고 한인들의 이주시기도 짧아 그 수가 매우 적어 1911년경에는 상해·북경 등에 불과 수십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규식이 이와 같이 독립운동을 위한 제반 환경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조차 그야말로 봉모인각으로 드물었던 상해로 망명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자료는 없으나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예관(신규식)은 국제정세 특히 중국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의 조짐을 주목하면서 그러한 기운이 한국의 앞길에도 새로운 전환을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중국정세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망명 이전 학회활동 시기에 계몽운동단체의 학회지나 신문을 통해 당시의 외국정황 특히 중국혁명당에 관한 기사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몽운동 시기의 언론에서 중국 혁명당에 대한 기사들이 당시 국가흥망을 염려하던 지식인들 간에 지대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열강의 주된 약탈대상이었던 중국에서의 혁명성취 여부가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의 해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 측면은 뒷날 신규식이 중국혁명에 대한 대단한 희망을 가지고 중국혁명의 성공이 바로 한국의 독립·해방으로 연결된다는 확신을 갖고 중국혁명에 직접 참여하는 사실로도 입증되는 바였다. 중국혁명에 대한 그의 신념은 당시 중국이 처한 입장이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판단 하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의 공화주의적 혁명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독립해방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혁명지사들과 연계를 맺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희망을 가진 탓에 중국혁명의 중심지인 상해로의 망명을 결심했다고 추측된다.
게다가 상해는 동방교통의 요지요, 서구열강의 조계(租界)가 있어 독립운동의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며 구미(유럽·미주) 각국인의 내왕과 거주로 국제여론 형성과 정보수집이 용이한 이점도 있었다. 이런 유리한 여건을 이용해 상해는 당시 중국 혁명운동가들의 중심지로써 이들의 잡지나 신문이 다수 출판되어 있었고 혁명운동단체의 조직도 많아 혁명기운이 만연하였으므로, 중국 이외에 다른 피압박 민족에게도 민족운동의 전략중심이 되어 있었다.
예관(신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한 시기는 대체로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게 되는 1911년이지만 정확한 달과 날짜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신해혁명(1911)에 참여하였다는 점과 그가 남긴 시구를 통하여 정리해 보면 이 해 3~4월로 추정할 수 있다. 즉 한시에 능했던 그가 남긴 시집 『아목루(兒目淚)』중 일본인이 친구들을 체포하자 속히 떠날 채비를 한다는「속장(束裝: 聞友人被捕)」에 이어 부모에게 사실을 고하지도 못하고 떠나는 불효를 원망하는 시를 지었으며, 다음에 「한성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며(發漢城渡鴨綠江)」란 제목으로 “큰 강이 저처럼 흘러가는데 언제나 다시 동쪽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탄식조의 시를 지어 망명객의 심사를 표현하였으니, 이 시 구절처럼 그가 다시는 조국 땅을 밟을 수 없는 불귀의 객으로 순국하게 되었던 훗날의 일을 예견한 듯하다. 이로 보아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이미 해빙기가 되었다는 뜻으로 그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3월쯤이 될 것이다.
또한 중국 신해혁명(1911)에의 참가활동과 연관지어보면 상해에서의 신해혁명(1911) 준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동맹회중앙총회(同盟會中央總會)의 조직에서 비롯됨으로 그가 압록강을 건너 상해에까지 가는 경로를 보아 늦어도 4월 초쯤에는 압록강을 건넜다고 볼 수 있다.
압록강을 건넌 예관(신규식)은 지나가는 곳마다 그 지역을 보고 느낀 감회를 적은 한시를 남겨 놓아 대체로 어떤 경로로 상해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추적할 수 있다. 우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을 거쳐 요양(遼養)의 고려문(高麗門)을 지나 심양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조국에 몸바치자고 맹세하며 의형제를 맺은 뒤 그보다 먼저 이곳으로 망명해 온 청쇠(晴衰) 조성환을 방문하였다. 청쇠(조성환)로부터 당시 중국의 실정을 듣고 나서 이때의 감회를 “서울에서 이별하고 3천리나 와 이 해가 다 저문 북경 땅에 옛친구를 만나서 눈물만 흘리고, 둘은 말도 없이 서로가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하다가, 비로소 중국의 사정을 올바로 알게 되었네.”라는 표현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예관(신규식)은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과거 우리나라의 공사관이었던 곳을 수소문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은행을 그곳으로 잘못 알고 헤매다가 결국 찾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없는 적적한 모습만 보았는데 이미 해가 지고 말았다는 서글픔을 시로 표현하였으니 국권상실의 애절함을 공사관을 폐쇄했다는 표현을 빌어 은유적으로 나타내려는 그의 울분 섞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예관(신규식)은 조성환과 그에게 보냈던 조카 형호(신형호)와 함께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갈 목적으로 천진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가 여기를 택하였던 것은 이후 상해에서도 주로 프랑스 조계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프랑스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또한 일본의 치외법권 지대여서 그들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관(신규식)이 천진에서 묵고 있을 때 “천진다리 위에 고려인이 거닐고 불조루(佛照樓)에서 세상사를 평하고 있는데 주인은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무엇을 사줄 것이 아닌가 하고 친절만 베푸네.”란 내용의 한시를 지었다. 이 시도 또한 나라를 잃고 후일을 기약하기 위한 망명객의 통한이 담겨진 애절한 내용이었다. 그가 여기에 묵게 된 연유는 아마 국내에 있었을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곳으로 사전에 예약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천진에서 산동의 제남(濟南)으로 갔을 때에는 진제전에 머물렀는데, 김선교(金宣喬)가 방문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상해로 가는 그의 여정은 미리 짜여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사전에 그와 연고 있는 곳에 연락이 닿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이어 예관(신규식)은 여기를 떠나 청도(靑島)에 도착하였는데 청도가 1898년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상기하면서 교주만(膠州灣)에서 영국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상해로 향하였다. 항해 중 그는 배 내부의 모습을 “이른바 방창(房艙)이라는 안에는 전후 좌우로 모두 아편 흡입자들로 가득찼다. 그러므로 밤에 잠을 다 자도 식사를 얻어먹을 수가 없었고 통증이 있었으나 이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에 한시나 지어 아편 귀신이나 쫓아야 하겠다.”고 표현한 시를 지었으니 예관(신규식)의 눈에 비친 당시 중국의 실상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중국혁명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주는 실례가 되었으리라.

2. 중국혁명의 근거지인 상해에서

(1) 신해혁명에서 혁명의지를 키우며

상해에 도착한 예관(신규식)은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키 위해서는 우선 운동을 전개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혁명운동을 전개하던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적극적인 유대 및 협력 체제를 다져 나감과 동시에 한국 독립지사들이 상해로 망명하도록 종용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즉 신규식은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혁명은 모두 중요하며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념하에 중국혁명파 인사들과의 교류를 시도하였다. 예관(신규식)이 그의 시에서 “내가 일찍이 신해년에 상해에 왔을 때 다음 날로 친교를 맺는 첫 번째 사람”이라고 밝힌 이가 바로 중국혁명파 잡지인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서혈아(徐血兒, 서천복)였다.
서혈아는 본명 천복[天復(서천복)]으로 당시 중국 혁명파를 대표하는 일간지에서 혁명사상을 보급하고 항일적인 논조를 전개하던 논설작가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서혈아(서천복)와 만난 예관(신규식)은 자연스러이 의기투합하여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은 예관(신규식)의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바 서혈아(서천복)는 예관(신규식)과 중국혁명파 인사들과 친교를 맺게 해 준 교량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민립보』란 1910년 10월에 우우임(于右任)이 창간한 신문으로 당시 중국혁명의 주도단체였던 중국동맹회 회원인 송교인(宋敎仁)·여지이(呂志伊)·범광계(范光啓)·서혈아(서천복) 등이 적극 참여해 활동하였으며 진기미(陳其美)가 외신기자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중국혁명운동가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혁명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던 까닭에 혁명파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던 중요한 매체였다. 또한, 그 사무실이 있던 민립보관은 이들의 연락 중심지로 중국동맹회 회원을 비롯한 선구적인 혁명운동가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왕래 장소이기도 하였다.
『민립보』는 멕시코·필리핀·인도·터키 등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여 이들 국가들의 민족운동에 관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또한 그들의 성공을 빌면서 중국혁명당인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격려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었다. 이처럼 『민립보』의 논조는 바로 우리 한국이 처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고무적인 입장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민립보』는 창간 후에 독자들로부터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어 밤낮으로 인쇄기가 쉬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약 2만 부가 발행되어 당시 중국 내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혁명파의 일간지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 아래 예관(신규식)이 상해로 와 처음 알게 된 중국인사가 앞서 본 민립보사 사원인 서혈아(서천복)였던 것은 의미가 깊다. 예관(신규식)으로서는 서혈아(서천복)와 가까이 지내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관(신규식)은 『민립보』와 서혈아(서천복)를 통해 중국혁명의 지도적인 인물들과 용이하게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신규식은 송교인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를 연계로 비로소 중국혁명동지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으니 중국동맹회의 창립동지인 황흥(黃興)·진기미 등과 차례로 친교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신규식은 스스로 이름도 신정이란 중국이름으로 고치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한 후 진기미와 더불어 1911년 10월 무장혁명에 참가하여 뒷날 한국지사로는 중국 신해혁명(1911)에 투신한 최초의 인물로 높게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혁명동지들과의 동지적 유대가 깊어질 수 있었다. 무장혁명의 성공으로 신규식은 조국독립에의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자극 받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혁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속속 상해 지역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후 예관(신규식)은 혁명 동지인 진기미를 통해 오철성(吳鐵成)·거정(居正) 등 중국 각 지역 혁명가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으며, 더욱 더 고무적인 바는 상해에 도착한 중국 혁명의 지도자 손문과도 친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문이 주도한 중국 혁명은 민족·민권·민생주의를 표방한 민족복권운동이면서 약소민족의 독립·해방쟁취를 지지·격려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중국혁명이 신속히 진전되었던 까닭에 신규식은 손문과 중국혁명에 대한 기대가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12년 손문이 중화민국 초대 임시 대총통이 되었을 때 이를 축하하며 공화정의 출범을 기리는 시를 지어서 손문에게 바쳤으며 그 후 조성환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손문을 직접 회견하고 한국의 멸망을 호소한 뒤 조국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런데 중국 측 정국에 변화가 생겼다. 즉 1차 혁명에 성공한 손문이 임시 대총통으로 즉위하고 나서 원세개가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총통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소식을 듣자 손문은 원세개와 타협하여 즉시 청제 퇴위와 공화정을 선포하는 조건으로 원세개를 제2대 임시 총통으로 당선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손문의 기대와는 달리 정권탈취에만 급급한 원세개는 북경병변(北京兵變)을 일으켜 북경에서 총통으로 취임한 뒤 제제(帝制)를 복구하고자 획책하여 1913년 3월 반원(反袁)세력의 주도급 인사인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어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중국혁명파의 힘을 약화시키는 음모를 꾀함에 1913년 7월부터 도원(倒袁)운동인 2차 혁명이 각처에서 일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규식은 2차 혁명 발발 이전 몇몇 동지와 함께 진기미를 방문하였다가 다시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반혁명적인 원세개를 성토하면서 그를 도와 상해 일대의 2차 혁명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2차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주도인물인 진기미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신규식도 북경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어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중국혁명지사와의 교류

중국혁명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국혁명파들과 함께 활동했던 신규식은 개인적으로도 혁명인사들과 상당한 친분관계를 유지해 상호 서신왕래 및 의견교환을 통해 서로의 혁명운동에 있어 정신적·물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특히 송교인과 진기미 등과는 가장 먼저 사귀었고 우의도 깊은 절친한 관계를 이루어 송교인이 원세개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예관(신규식)은 비분을 가눌 수 없이 극도에 달하여 3일간이나 단식하여 침통한 애도의 정념(情念)을 표시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어 한국의 몇몇 지사를 규합하여 추도회를 열고 정중히 추도하니, 국민당의 선열이 순난(殉難)을 당하고 외국 인사에게 추도 받은 일도 아마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진기미와는 정의가 서로 투합하고 우의가 두터웠으며 진기미 자신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더욱 열심히 “마음을 기울여 서로 돕고, 밤낮으로 걱정할” 정도로 진심어린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가장 절친한 사이로 진전되었다. 후에 그가 피살되었을 때 상해의 분위기가 아주 험악한데도 이를 개의치 않은 예관(신규식)은 자기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조문하였다. 그 때 진기미의 시체는 침상에 안치된 채 아직 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총탄에 맞은 머리와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그 처참한 모습이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고인을 안고 통곡한 뒤 “장쾌하다. 사내대장부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었구나. 살아서는 영웅이요, 죽어서는 신령이 되었으니 당인(黨人) 중에 영사(英士)와 같은 이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구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아울러 「벽랑호반 한인담(壁浪湖畔恨人談)」과 「진선생 영사시(陳先生英士詩)」를 지어 고인을 극진히 애도하였고, 그 글과 정이 다 같이 깊어 글자마다 진정이요, 귀절마다 피눈물로써 외국인으로 이토록 훌륭하게 협정(俠情)을 풀어냈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케 했다고 예관(신규식)의 전기는 전한다.
예관(신규식)과 친교를 나눈 중국혁명인사 중 각별한 관계를 가진 또 한 사람으로 대계도를 들 수 있다. 그는 사천 광한인(廣漢人)으로 청말 일본에 유학하면서 항상 한국 독립지사들과 왕래하던 인물이었다. 귀국 후 상해에서 언론계에 종사하였는데 혁명파에 속하는 언론에서 편집을 맡게 되었다. 이후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대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예관(신규식)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대계도가 혁명파 신문인 『민권보(民權報)』를 창간할 때 자금난에 허덕이자 예관(신규식)은 망명 때 가지고 간 자금의 일부를 기꺼이 희사하여 중국혁명사상 전파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양자간은 더욱 밀접해졌으며 대계도 또한 한국의 현황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 일본 제국주의의 한인에 대한 잔악상을 규탄하는 논조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예관(신규식)이 맺은 개인적 친분은 한국독립운동에 있어 중국 측으로부터의 정신적·물질적인 지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와 친분 있던 인사들이 죽은 후에도 이들의 협조적인 유대관계가 이어져 중국의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가 긴밀히 유지될 수 있는 토대를 이루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신규식은 당시 중국동맹회 회원을 비롯한 혁명지사들의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였다. 남사는 1909년 11월 13일 발기된 문학단체로서 문자 혁명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만청정부(滿淸政府)를 반대하면서 혁명운동을 도와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한 혁명적 성격을 띠었다는 평가를 받던 단체였다. 실제로 남사의 사원 중에는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많았으며 송교인의 가담으로 동맹회와의 관계도 깊어졌고, 서혈아(서천복)·진기미 등도 남사에서 활약하였으며 남사의 본부격인 연락처도 민립보사였다. 이처럼 남사는『민립보』및 중국동맹회와 깊은 관계를 맺은 단체였다. 따라서 신규식은 이런 연관성을 중시하며 1913년 말이나 1914년 초쯤 남사 회원인 주소병(朱少屛) 등의 추천을 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사에 가입하여 문학을 통해 중국 혁명지사 및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914년 8월 신규식이 처음으로 남사의 회합인 아집(雅潗)에 참석했을 때 “이름은 정, 자는 산려(汕慮), 요령인(遼寧人)으로 원적은 조선이며, 삼한이 망국하게 된 비참을 통분하여 집을 떠나 서쪽으로 와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하였다.”고 소개되었으며 그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외 남사에서의 문학적인 활동은 그렇게 활발하지 못해 비정기 출판물인 『남사총간(南社叢刊)』에 1915년 3월 부록으로 『신예관과 동사제자서(申晲觀과 同社諸子書)』가 있으며, 시집 『아목루』중 「기남사(奇南社)」와 「남사 11차 아집시아자(南社十一次雅集示亞子)」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문학에 조예가 갚은 신규식이 남사의 활동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 단체에 가입한 근본적인 목적이 문학 활동에 있다고 하기 보다는 중국혁명가 및 그 외 중국인들과의 교류를 넓혀가면서 한국독립운동의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려는 목적이 우선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이 시기는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때와는 달리 신규식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 운영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던 시기였으므로 활동이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관(신규식)은 장계란(張季鸞)·호정지(胡政之)·엽초창(葉楚傖)·사양재(史量才) 등 여러 중국 인사들과 공동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한국혁명을 선전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한국통사(韓國痛史)』·『이순신전』·『안중근전』 등 서적을 출판하였으며 잡지를 발간하고 『진단보(震壇報)』를 출판하여 한국혁명에 대한 대외 선전에 앞장섰다. 『진단보』는 반월간(半月刊)으로 발행되었으며 예관(신규식)은 진단이 세상에 나온 것을 동지를 대신해 축하한다는 의미의 「진단출세억동지대축(震壇出世憶同志代祝)」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남사와 관련을 맺으면서 신규식은 환구중국학생회에도 가입하여 이등휘(李登輝)·당문치(唐文治)·주가화(朱家華) 등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학생회는 1905년 이등휘가 상해를 거쳐 출국 혹은 귀국하는 중국유학생들의 취업을 알선키 위해 발기한 단체인데, 1914년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주소병이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단체는 학생들의 유학알선, 직업지도 및 교육적 기능을 그 주 업무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이 이 단체에 언제 가입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등휘와 사귀었다는 『전기』기록으로 보아 이등휘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듯하며, 이 학생회와 같은 목적에서 예관(신규식)이 박달학원을 설립한 시기와 1913년 말인 점을 고려해 보아도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신규식은 망명 이전부터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 방책임을 실천을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망명 이후에도 이를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를 실행키 위해 환구중국학생회와 같은 성격을 가진 한인학생의 유학알선과 교육기능을 담당할 기구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이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키 위해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하여 중국인과 중국인 단체의 조직적인 협조를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립운동의 불모지였던 상해에 망명한 신규식은 신해혁명(1911)을 비롯한 중국혁명운동을 열렬히 지지, 가담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제고시키는 한편 그들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여 상호 협력 체제를 형성하면서 독립운동 기지설립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남겼던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3. 상해에 독립운동의 터를 닦으며

(1) 동제사의 결성

신규식이 상해에서 독립운동 기지마련을 위해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협조하는 동안 독립운동가들도 중국혁명의 진척에 자극되어 점차 상해로 모이게 되었고, 또한 그의 노력으로 조국광복에 뜻을 둔 청년들도 많아지게 되자, 독립투쟁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갈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예관(신규식)은 1912년 5월 20일(음력) 동제사(同濟社)를 발기·결성하였다.
동제사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결성 당시의 조직형태나 규모·정강 등을 파악할 만한 자료를 남겨두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실체의 규명은 어려우나, 신규식 이외에 박은식·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문일평·신건식·조성환 등이 결성 이후 적극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제사의 결성목적은 동제사의 “동제”(同舟共濟)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반대편에 도달하자는 의미가 말해 주듯 한 인간의 친목융화, 간난상구(艱難相求)를 목적으로 한다고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이 그 진정한 목표였다.
그 조직 구성을 몇몇 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해 보면 본부는 상해에 두고, 지사는 북경·천진·만주 등 중국지역과 노령(러시아령) 이외 구미(유럽·미주)·일본 등지에 설치되었으며 본부조직에는 이사장과 총재를 두며, 지사에는 사장과 간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최성기에는 300여 명의 회원을 가질 정도로 발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동제사에 가입하는 회원은 가입 당시 절대 비밀을 맹약하고 이를 엄수하며 간부 상호간에는 암호를 사용하여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조직력을 가진 비밀 결사였음을 알 수 있다.
신규식이 본부의 이사장직을 맡고 총재는 박은식이 담당하여 운영의 중추역이 되었다. 그 외 동제사 회원 중 중견 간부로 활약한 사람들을 들어보면, 홍명희(洪命憙)·문일평(文一平)·박찬익(朴贊翊)·조성환·농죽(農竹)·김용호(金容鎬)·신철(申澈)·신무(申武)·민제호(閔濟鎬)·김갑(金甲)·정환범(鄭桓範)·김용준(金容俊)·민충식(閔忠植)·윤보선(尹菩善)·이찬영(李贊永)·김영무(金英武)·이광(李光)·신우창(申于蒼)·한진산(韓震山)·김정(金鼎)·김덕(金德)·변영만(卞榮晩)·민필호(閔弼鎬)·김규식(金圭植)·신석우(申錫雨)·여운형(呂運亨)·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炳浩)·장건상(張建相)·정원택 등이 있다.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의 성격은 신규식을 위시한 동제사의 핵심 인물인 박은식·신채호·조소앙 등이 시민적 민족주의사상·개량적 사회주의사상·대동사상을 정치사상으로 하며,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교적 신앙을 공통으로 가졌던 점으로 보아 그들에 의해 경영되는 동제사의 기본 이념과 독립운동 방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동제사가 실제는 어떻게 활동했는가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미루어 보면 비교적 활발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반을 닦아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우선 1913년 7월 28일부터 8월 13일까지 남경에서 동제사총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은 동제사가 각 지부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통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동제사는 주기적으로 각 지부가 모여 총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창립날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이 해마다 거행되었음도 알 수 있다. 그 외 신입사원을 위한 환영회도 개최하여 동지적 유대감을 심어 주고자 했다. 대체로 상해지역으로 유학이나 구국운동을 위해 망명한 청년들은 대부분 동제사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중국관내에서 한인들을 결집시켜주는 구심체적 역할을 맡던 단체였다고 하겠다. 또한 구미(유럽·미주)·일본 등지에도 지사가 설치되고, 300여 명의 회원이 있었으므로 각 지사를 중심으로 지역별 투쟁을 전개함과 아울러 지사 상호간의 연락·정보교환 등을 통해 분산된 지역의 독립운동이 통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상해본부가 이를 주도하여 지사의 사원을 통해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독립운동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던 핵심적인 단체였다고 보인다. 이를 테면 동제사의 주요인사인 신규식·박은식·조성환 등은 북미합중국과 미국령 하와이 지방에서 보내주는 『신한민보』·『국민보』 등을 받아서 안동현으로 보내면 안동현의 박광(朴洸)·백세빈(白世彬) 등에 의해 국내로 배포되었다는 기록은 각 지역에 세워진 동제사의 지사를 활용하여 해외에서 발행된 신문을 국내로 전하려는 일환으로 취해진 배포 방법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전해진 신문은 국내에 은닉된 조직망을 통해 뜻있는 애국지사는 물론 일반 민중에게도 정확한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제사는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서 이후의 단체결성 및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전개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동제사의 협력 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통한 중국혁명세력의 지원도 확보할 수 있다.
동제사가 언제까지 존립했던가는 확실치 않으며, 신규식이 순국한 1922년 9월 이후 박찬익이 동제사의 이사장직을 맡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까지는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했다고 추측된다.

(2) 한·중 협력단체의 결성

동제사를 조직한 후 예관(신규식)은 상해에서 진기미 등과 협의하여 비밀결사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전적으로 한국독립을 위하여 조직한다는 기본취지 하에서 한국과 중국의 혁명운동가를 연결하고 양 국민간의 우의를 증진시켜 상호협조 속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하려는 데에 역점을 두었으며, 그 명칭도 동제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동제사의 협력단체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신아동제사는 1912년 말에서 1913년 초 사이에 창립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 동맹회의 세력극성기로 그 중심인물인 진기미가 이 단체의 감독을 맡게 됨에 다수의 혁명파가 이에 가입하게 되었다. 회원은 송교인·진기미(陳其美, 일명 英士)·호한민(胡漢民)·요중개(廖仲塏)·추노(鄒魯)·대계도(戴季陶)·진과부(陳果夫)·서겸(徐謙)·장부천(張傅泉)·오철성(吳鐵城)·은여려(殷汝驪)·장계란(張季鸞)·호림(胡霖)·백문위(栢文蔚)·여천민(呂天民)·당노원(唐露園)·당소의(唐紹儀)·황개민(黃介民)·양춘시(楊春時)·장정강(張靜江) 등이다.
이들 중 송교인·요중개·진기미·대계도·호한민·추노·백문위 등은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 신해혁명(1911)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며, 후에 손문에 의해 수립된 광동정부에서 요중개는 재정차장, 오철성은 광동대원수부참모, 서겸은 손문의 비서장, 여천민은 사법부장, 당소의는 재정부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진기미의 조카인 진과부·오철성·대계도 등은 국민당정부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으며, 호림과 장계도는 상해의 신문인으로 언론 선전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처럼 중국혁명운동의 중심인물들과 중국 언론 등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신아동제사가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동제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키 위한 양국 혁명가들의 협력단체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 단체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한국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한 한·중(한국·중국) 양국 혁명운동의 호조기관으로서 최초의 조직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그 회원인 대계도·호한민·추노·오철성·진과부 등은 당시 중국 혁명세력의 주류로써 중국혁명운동을 이끌어 갔으며 그 외 요중개·당소의 등과 함께 중국혁명정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이렇듯 신규식이 중국혁명이란 파란 속에 주저함 없이 몸을 던져 혁명대열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관계를 전개시켜 양국이 공동보조를 맞추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즉 선구적인 협조 체제가 구축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 혁명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3) 박달학원의 설립과 교육활동

신규식은 상해 망명 후에도 독립운동의 기반확대와 조직력 강화를 위해 청년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는 우선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친분관계를 활용하여 한국청년들을 중국 각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면서 유학 및 그에 필요한 제반 여건 마련에 동분서주하였다. 한 예로 1910~20년대 상해지역의 한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인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를 남긴 정원택(鄭元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정원택은 처음 중국으로 망명할 때 북경으로 유학하고자 결심하고 길을 떠났으나 이후 목적지를 변경하게 된 이유가 상해에 예관 신규식 선생이 많은 유학생을 통솔하고 계시니 제반사가 용이하리라는 주변의 충고에 따른 것이라고 언급한 사실에서 그의 활동상을 엿볼 수 있다. 또, 1913년 12월에 상해에서 예관(신규식)을 만났던 이광수의 회고에 “예관(신규식)은 우리가 있던 집보다 더 큰 집을 얻어 7∼8명의 학생을 유숙시켰으며… 신채호·김규식 씨도 예관(신규식) 댁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때 예관(신규식)은 상해 뿐 아니라 강남 일대 조선인 망명객의 본거지였다.”고 술회한 점으로 미루어 예관(신규식) 주변에 청년학도들이 모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신규식은 이러한 열혈청년들의 애국심을 정신적·육체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교육알선 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자 체계적인 방안을 모색하여 전술한대로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한 뒤 중국인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협조체제를 이루고자 꾀하였다.
이처럼 예관(신규식)은 청년들에 대한 사랑과 보호가 남달랐다고 한다. 이러한 애정은 혁명운동의 실천은 청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며, 국가 부흥도 청년만이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열정과 충절을 가슴에 담은 청년들을 구국교육으로 무장시켜 장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인재로 양성하여 민족의 광명이 될 밑거름을 만들고자 굳게 다짐하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선생은 청년이 찾아오면 식사와 숙소를 마련하여 주었고, 청년이 떠나면 노자를 마련해 주었으며, 청년이 유학가면 여권의 입국수속을 돌보아 주었으며 청년이 학교에 입학하면 학비를 마련해 주었으며, 심지어는 몸소 학생을 데리고 가서 학교에 입학시키고 그들의 학비를 납입하고 책을 사고, 그 밖의 모든 수속절차를 마치는 것을 보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였다.”고 전기에는 전한다. 또한 청년들이 환란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실망하였을 때는 그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청년에 대한 지극 정성의 보살핌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박달학원의 설립이었다.
즉 유학을 원하여 상해 등지에 모인 학생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자 예관(신규식)은 보다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교육활동을 위해 동지들과 상의하여 1913년 12월 7일 상해 프랑스 조계내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수용하고 훈련과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학원은 중국·구미(유럽·미주) 유학을 위한 입학 예비교육을 주요 목적으로 하며,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을 교육과목으로 정하고 수학기간은 1년 반이었다. 박달학원의 선생은 중국어 교사인 조성환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홍명희·문일평·조소앙 등 모두 독립운동지사로 유명한 인물들이 담당하였으며 이외에 중국인으로 혁명운동가인 농죽 선생과 미국인 화교인 모대위(毛大衛) 등이 있었다.
또한 학원 내에 구락부를 조직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각 학생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학원의 기강을 세우는 등 비교적 체계를 갖춘 교육기관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박달학원은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하였으며, 예관(신규식) 등은 그들이 지원하는 바에 따라 중국 각 대학과 구미(유럽·미주)에 유학을 보내거나 학자금을 알선해 주었다. 그 중 4·19(4·19혁명, 1960) 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허정(許政)이 “신규식 선생과 장계(장부천) 씨 간의 협조로 유법검학회(留琺儉學會)의 유학생들 틈에 끼어 1919년 11월 한국청년 6명이 프랑스로 유학갈 수 있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예관(신규식)이 얼마나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밖에 윤보선과의 일화가 있다. 나이 20의 피 끓는 청년 윤보선은 상해로 건너와 여운형의 집을 거쳐 서양인 ‘핏취’란 사람 집에 묵던 중 예관(신규식)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청년을 아끼는 예관(신규식)은 윤보선의 인물됨을 보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임정(임시정부)을 위한 재목으로 여기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천거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독립운동 자금모집 활동을 맡겨 일본에 건너가도록 하였다.
예관(신규식)은 윤보선에게 인격적으로 큰 감화를 주었으며 아끼고 여러모로 지도해 주면서 해위 즉 ‘바다의 갈대’라는 아호까지 지어주었다. 이 아호는 바닷가에선 갈대처럼 연약해 보이면서도 그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관(신규식)의 청년에 대한 사랑은 국경을 초월하였으므로 한국청년은 물론 중국의 열혈청년들도 그를 추종하고 숭배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중 대조신(戴朝臣)이란 남경의 한 중국청년은 예관(신규식)의 감화를 받아 그를 친아버지처럼 받들었다. 이때 예관(신규식)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머물렀는데 일인들이 늘 변복을 하고 와서 인질을 써서 몇 번이나 술수를 쓰니 체포당할 위기에 용감하게 몸을 던져 일인들의 독수(毒水)를 막아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상해에서의 망명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그렇지만 대조신은 중국인이면서도 한국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한마디의 원망도 없고 오직 마음으로 예관(신규식)의 숭고한 인격을 존중하였고 예관(신규식)의 위대한 덕성을 칭찬하고 높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외국 청년조차 예관(신규식)을 숭배하였으니 그가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가늠할 만하다. 더욱이 한국청년 중 김충일은 예관(신규식)을 너무나 숭배한 까닭에 예관(신규식)이 서거하자 미쳐버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무력을 중시했으며, 『한국혼』에서 밝힌 대로 피 흘림, 즉 무력투쟁론을 찬성하는 입장이므로 군사교육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상해의 여러 가지 여건상 직접 군사교육을 실행키 어려우므로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중국의 당계요의 협조를 얻어 한국학생을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천진군수학교(天津軍需學校)·남경해군학교(南京海軍學校)·호북강무당(湖北講武當)·운남군수학교(雲南軍需學校) 등 중국 군사학교에 보내 약 10년간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켜 무장투쟁의 예비군을 양성시켰던 것이다. 이를테면 청년시절 상해 예관(신규식)의 집에서 머물었던 철기 이범석 장군은 다른 4명의 학생과 함께 1916년 가을 신규식과 당계요의 주선으로 운남 육군강무학교에 입교하였으며, 졸업 후 무장 독립군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기 이범석이 예관(신규식) 밑에 있을 당시 예관(신규식)이 보여준 나라사랑과 청년사랑의 애절함을 표현하는 아래와 같은 일화가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예관(신규식) 선생이 프랑스 조계 어양리(漁陽里)에서 계실 때 저자(민필호)와 철기 이범석과 함께 지냈다. 낮에는 선생은 국민당 요인들과의 공작으로 바쁘시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2층에서 벼루에 먹 가는 소리와 가벼운 시를 읊는 소리와 연이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철기(이범석)군은 신(신규식) 선생님 또 우시네 하며 눈시울이 벌개졌다. 우리는 태극기가 다시 서울에 꽂히는 날이 오기 전에는 선생의 그 울음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기(이범석)군과 청년들이 학교로 떠날 때 선생은 배우기 위해서는 훈련장의 철봉대에서 떨어져 죽거나 강의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더라도 도시 상관할 바가 못된다고 하며 다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장 중시할 것과 나라 잃은 삼천만 겨레의 영광인 것을 강조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후 철기 이범석은 운남강무학교에서 번번이 수석을 차지하는 등 코피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학업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당계요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임시정부의 증명서를 소지한 자는 자신이 경영하는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약 50여 명이 졸업하도록 주선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규식은 박달학원의 설립과 유학주선을 통해 이후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실제로 이들은 교육을 마친 후 각지의 독립투쟁에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항일운동에 지속적인 역할을 담당케 하는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4. 1차 세계대전 시기의 활동

(1) 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독립운동 전선의 동향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전쟁의 영향권 내에 들게 된 러시아와 중국은 자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방침이 변화되자 기존에 세워 둔 한인에 대한 정책을 철회하고 합법적인 독립운동단체까지도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 전까지 러시아령, 서북간도 등 각지의 한인독립운동기지에서 독자적으로 한인자치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였던 연해주의 권업회(勸業會) 및 대한광복군정부, 북간도의 간민회(墾民會)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해산당하게 되었다. 또한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新興學校)도 그 경영상 어려움으로 활동이 봉쇄당할 지경에 처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을 전후해 해외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 온 국외독립운동기지화계획과 독립전쟁에 대비, 양성해 오던 독립군 양성계획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곤경에 직면한 독립운동계의 일각에서는 오히려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한 뒤 유럽에서 유리하게 전쟁을 강행하던 독일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후의 정국이 한국의 독립만회에 유리하도록 전개될 것임을 전망하였다.
이를테면 1915년 3월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도 이 시기의 국제정세를 독립전쟁론 실현을 위한 적기(適期)로 포착하고 각지에서 해체된 기존 단체의 독립운동 역량을 재정비·결집하여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조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한혁명당은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 발발과 국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해산을 계기로 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이 발발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중국대륙에 진출한 뒤 1915년 1월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제시하면서 점차 침략의 기치를 드높여 갔다. 그 여파로 중·일(중국·일본)개전설, 러시아내에서의 러·일(러시아·일본)전 재발설 등이 널리 유포되어 표면적으로 중·일(중국·일본), 러·일(러시아·일본) 간의 관계가 악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종전의 결과를 독일의 승리로 전망하고 기대하던 독립운동계에서는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안을 암중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시베리아지역의 경우 1914년은 러일전쟁(1904) 발발 10주년이 되는 시기이며, 또한 아무르 철도의 준공 예정 등을 이유로 하급군인들을 중심으로 러·일(러시아·일본)전 재발의 항설(港說)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일(러시아·일본)전 발발을 독립운동전개의 기회로 삼고자 권업회의 이동휘를 중심으로 무기 및 자금모집을 활발히 진척시켜 나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당초 예상과 달리 상호 동맹관계가 형성되었으며, 그 때문에 한인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권업회를 해산시켜 버린 것이다. 이때 이동휘를 위시한 독립운동가들은 탄압을 피해 간도나 북만주 등으로 이동하였는데 북만주로 이동한 이동휘·이종호 등은 서북간도·러시아령의 운동세력과 상호연락을 취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다.
한편 북간도 간민회원이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시국을 국권회복의 적기로 파악하고 독립회복의 거사를 계획하였으니 1915년 3월경 이동휘·황병길을 주축으로 한 운동세력은 훈춘 방면을 근거로 활동하고, 간민회원이던 이봉우·윤해 등은 국자가 방면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들은 만약 자신들의 예상대로 중·일(중국·일본) 관계가 악화되면 간도가 바로 군사요충지가 될 것이란 판단하에 지금이 생사성패를 결정할 시기라 여겨 거병계획을 세웠다. 이어 4월 하순 중·일(중국·일본) 교섭의 결렬이 임박했다는 보도를 듣고 신속하게 비밀집회를 열어 암살대조직, 군자금모집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훈춘에서도 중국군과 연합해 일제와 대항할 계획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있었다. 일본의 대독 선전포고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그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로 독립이 가능하리라 전망한 이들을 중심으로 민중운동 실현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2)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군사동맹체결계획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각지의 독립운동계에서는 1차 대전(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일본의 참전을 독립만회에 있어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려던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각지의 움직임을 한데 모아 보려던 노력이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즉, 권업회의 해산으로 상해로 이동한 이상설을 중심으로 상해지역의 신규식·박은식, 북경지역의 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 그외 이춘일(李春日)·유홍열(劉鴻烈) 등과 북간도의 이동휘, 간민회를 이끌던 이동춘(李同春) 등이 합세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 발발 및 일본의 참전이란 국제정세를 독립만회의 기회로 포착하여 당시의 정국을 예의 주시한 결과 이후의 전쟁의 추이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 분명할 터인즉 ‘구주전쟁’의 승리 후 그 침략의 기치를 동양으로 향해 일본을 공격함이 필연적이며 이에 중국도 연합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아울러 영국·미국·러시아 등도 이에 합세하게 되어 일본은 고립될 것이 분명하니 이때가 바로 독립 쟁취의 기회이므로 우리도 독립군조직을 정열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전쟁론 실현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
신한혁명당 결성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이었으므로 주도세력들이 당시 전쟁의 추이를 어떻게 파악하고 종전에 대한 전망은 어떠했나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일본이 청도를 함락한 후 다시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제시함에 따라 중·일(중국·일본) 교섭이 진행되던 당시의 정국을 종합·분석하여 각국의 일본에 대한 대응책을 예상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운동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런 면은 특히 신한혁명당이 국내에 당원을 파견하여 작전을 전개할 때 국내 동포에게 준 경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경각서에 의하면 중·일(중국·일본)교섭전의 대세를 아래와 같이 파악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한 후 중국 동삼성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러시아를 유인, 동아시아의 유지를 위해 러·일(러시아·일본) 간 협조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어 만주·몽골로의 진출야심을 품고 몽골의 독립을 획책코자 3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령의 한인을 밀약국인(密約國人)이라 규정하고 이들의 표면적인 활동을 저지시켰던 것이다. 특히 1913년 8월에는 이상설·이위종(李瑋鍾)을 러시아 수도에 금고하였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무형적 활동조직”, 비밀결사의 조직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중·일(중국·일본)교섭 후의 대세는 중국인민의 배일행동, 배화열(排貨熱)이 더욱 거세짐으로 인해 각국의 일본에 대한 입장을 아래와 같은 사태로 결말지어지리라 예상 판단하였다.
① 일·러(일본·러시아)관계[일러밀약(가쓰라테프트 조약, 1905)의 효력이 취소될 전망]: 즉, 일본의 흥망에 중대한 중·러협약이 성립되고 내몽골의 독립이 취소될 것이다.
러시아는 3차 러일밀약(가쓰라테프트 조약, 1905) 체결 이후 몽골을 독립시켜 보호국화하여 세력권을 확장하려던 중 대전(제1차 세계대전)의 반발로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의 관심이 소홀한 틈을 타서 이를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에서 21개조에 몽골을 포함시켰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일·러밀약을 취소하고 양국은 적대관계로 변화할 것이다.
② 영·일(영국·일본)관계[영·일(영국·일본)동맹이 위험한 예정이유]: 영·일(영국·일본)동맹에 한국영토, 중국 이익의 공점(共占)의무를 서로 침범치 않기로 약정한 바 있으나 영국이 구주전(제1차 세계대전)에서 주동이 되자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겉으로만 지킨다고 공포하였다. 일본이 청도를 함락시킬 때 영국과 연합하고 청도함락이 성공하면 청도 부근 지역인 이가둔(李家屯)을 영국에게 귀속시킨다고 밀약하였다. 그러나 청도가 함락되었어도 이를 이행치 않고 영국군의 무능함을 비난하였다. 또한 21개조 중 영국의 이익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후일 영국과의 문제를 야기시킬 소지가 있다. 일본의 각 신문에 영국에 관한 무해(無楷)의 기사를 게재해 여러 가지로 공략하였다.
③ 중·독(중국·독일)관계[중·독연합공일(攻日)의 예정이유]: 독일이 전승할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이치며, 전후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권리는 독일에 귀속하게 된다. 또한 청도문제에 대한 대일개전은 기정사실이므로 동삼성·산동지역이 전지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중립을 선언한 중국을 경시하고 일본이 중립지대를 침범하면 공법을 문란케 한 연유로 중국이 독일과 연합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때 미국은 중·독(중국·독일)의 원조국이 되고, 영국·러시아는 동족관계로 연합해 일본의 배후로부터 침입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의 혁명은 애원적(哀冤的)외교수단으로 독립만회를 청구하고 일면 혁명의 주동자는 모국(某國)에 명조(明助), 혹은 암조(暗助)를 받아 일군 운반의 요새지를 방어, 상하분열케 하면 일본은 전승키 어려울 것은 예측할 수 있다.… 현재 중·독(중국·독일)의 내응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교제기관이 급박한 시기다.”라고 함은 한국혁명의 방향 제시, 독일과 중국에게 원조요구를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할 교제기관의 필요성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④ 중·독·일(중국·독일·일본)의 관계가 결렬된 후 우리 동포들의 활동방향: 즉, 자유국민의 자격을 얻으려면 외수내응(外受內應)의 힘이 꼭 필요하다. 재외자(국외동포)와 재내자(국내동포)가 함께 기회를 적절히 이용, 협조체제를 이루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결국 신한혁명당은, 구주전쟁(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귀착됨이 명백하므로 구주전(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 후 그 침략의 기치가 동양으로 향해 일본을 공격함이 필연적이며 이에 중국도 연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아울러 영·미·러(영국·미국·러시아) 등도 이에 합세함에 일본은 고립됨이 분명하니 이를 독립회복의 적기로 활용하려 한 것이 당의 주된 결성배경이었다. 물론 신한혁명당의 정세판단과는 반대로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으며, 러시아·미국·영국 등도 일본과 적대적인 대응 관계를 초래하지 않았다는 정세판단 상 허점은 있다.
1914년 말경 상해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각지의 운동 기반을 재정비, 운동역량을 결집키 위해 비밀결사조직을 결의하고 명칭, 조직의 성격 활동방향에 관해 잠정 합의하였다. 이 결정에 의거 성낙형이 중심이 되어 동지규합, 각 지역의 조직기반활성화, 국내조직과의 연결망구축 등 사전 준비작업을 신속히 전개해 갔다. 이를 바탕으로 1915년 3월 이상설 등 각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영국 조계 서북천로 학숙에 모여 조직기구, 임원선출을 완료하고 규칙과 취지서를 작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신한혁명당이 결성되었고 곧이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한혁명당의 조직은 본부와 지부로 구성되었다. 본부는 북경 서단패루(西單牌樓) 김자순(金子順)의 집에 설치하고 본부에 재정부·교통부·외교부의 기구조직을 두었다. 지부에는 지부장을 두고 각기 당원을 파견해 중국, 국내의 중요지역에 설치하여 재정·통신 연락 및 당원모집 등 주된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본부와 지부조직 및 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본부장: 이상설
재정부장: 이춘일
교통부장: 유동열
외교부장: 성낙형
감독: 박은식
지부 중국 상해: 신규식
한구(漢口): 김청구(김위원)
봉천:
장춘: 이동휘
안동부:
연길현: 이동춘
국내 서울: [난회(蘭會)란 시회(詩會) 조직활용]
원산:
평양: 정환준(鄭桓俊)
회령: 박정래(朴定來)
나남: 강재후(姜載厚)

구체적인 조직구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당수를 결정해야 하는 보다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신규식을 비롯한 혁명당의 주도세력들은 신중하게 논의한 끝에 장차 동맹관계를 맺게 될 중국과 독일이 모두 군주정치를 표방하는 점을 고려하여 당이 추구하는 목적달성에 보다 유리한 방법을 채택하였으니, 구황실의 한사람을 맹주로 할 것을 결정하고 광무황제(고종)를 당수로 추대한 것이었다. 이들이 광무황제(고종)를 당수로 추대하고 군주정치를 표방한 방략에서 신한혁명당을 일개의 독립운동단체가 아니라 독일·중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키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적인 성격의 단체로까지 발전시키려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해 종래 주장해 오던 공화정치의 이념도 잠시 유보해 둔 채 보황주의적 방략을 채택한 점은 신한혁명당이 지닌 한계라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민족의 최대 과제인 독립을 위한 또 하나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
혁명당(신한혁명당)의 운영자금은 중국혁명당의 예에 따라 기부나 모집으로 충당하는 방식을 기본원칙으로 정했다. 단 부득이한 경우 해적이나 강탈의 방법까지도 허용한 것에서 군자금모집의 절박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예관(신규식)을 위시한 신한혁명당을 이끈 주도세력은 대부분 국내에서 한말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주력하다가 국권이 상실되던 시기를 전후해 러시아·만주 등지로 망명해 쉬지 않고 구국투쟁을 전개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리하여 북간도·상해·시베리아 등지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문무겸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간민회·권업회·동제사 등을 조직, 한인사회의 결속과 자치 및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각지의 지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을 계기로 해당국들의 모든 한인 독립운동 단체해산이란 방침으로 인해 기존활동이 저지당하고 공들여 이루어 온 운동기반이 상실당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황 속에서 이런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는 한편 흩어진 운동단체들의 역량을 재결집할 비밀무형의 결사단체를 결성할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그 결과 운동노선, 이념차이를 극복하고 광무황제(고종)란 상징적 존재를 당수로 추대하고 ‘민족독립쟁취’란 공동목표달성을 위해 신한혁명당을 결성한 것이었다.
신한혁명당의 주된 활동은 유사시 한국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수행에 필요한 군비를 정비해 두는 것과 외교적 측면에서 독일의 보증하에 중국과 군사원조동맹인 “중한의방조약(中韓誼防條約)”을 체결하는 계획이었다.
우선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무장준비계획은 무력준비와 국내 국경지역에 대한 진공계획수립으로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구주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뒤 동양으로 진출하면 일본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며 이 경우 연합체제가 구축될 것이므로 우리의 독립군도 각국과 연합해 독립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비의 조달은 기존에 정비되어 있던 대한 광복군정부의 독립군과 무기 등을 기반으로 보다 신속히 조성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한혁명당 사건으로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기록에 의하여 국외에서 편성된 각 지역 독립군 중 동원가능한 인원과 주무자 혹은 주무기관 및 무장내역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동삼성 내 길림의 주무기관: 성낙형
재류동지수: 2,600,000여 명
총기탄약수: 창탄소유,
무송현: 5,300명
강계수렵군 4,607명, 나머지 해산병 693명
신식쾌창 6,500정, 탄알 9,700발
왕청현: 19,507명
산렵군 19,000명, 해산병 320명, 학생
신식창 탄알 소유
통화·회인·즙안현: 25세 이상 30세 이내 39,073명
현재 밤에 집대군식교련 신식창탄 소유
하얼빈 주무기관: 김철성(金喆聲)에 의해 연락
시베리아 주무기관: 이상설(李相卨)
29,365명
총기 탄약: 창탄 13,000자루, 탄알 500,000발
러시아 사범학교 공지를 빌려 군대훈련
미국지방에 있는 주무기관: 박용만(朴容萬)
학생무관교련 850명, (군함 5척 목하 있음)

위 자료상의 병력·탄약수 등은 신빙성이 없어 그 실세파악이 어려우나 지역적으로 만주·시베리아·미주 지방을 모두 통할하여 단일 군대를 편성코자 한 의도는 파악할 수 있다. 각 지역에 주무기관, 즉 주무자를 선정해 지역별 독립군예비병력을 관장케 하였는데 그 주무자들이 각기 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어느 정도 훈련 무장군대가 편성되었던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이 무력을 근거로 국내로의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군병출병시 통화·회인·즙안현 3군의 군병은 합동해 초산군 앞쪽을 건너 습격해 신의주에 유진할 것.
왕청현의 군병은 계현(系懸) 등의 지역에 출몰해 일병(日兵)을 유인하여 장마촌(長馬村)의 뒤쪽을 습격할 것.
무송현의 군병은 연락해 연길부·시베리아 구원병을 합해 두만강을 거슬러 회령과 나남면에 유진해서 돌격할 것.
여순·대련의 원조병과 봉천군대를 합쳐 영구(營口)의 기차를 급속히 차단할 것.

이러한 군사 계획을 세운 것은 중국과 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국·영국·러시아도 모두 이를 원조할 것이며, 이때 우리 군대는 일군운반의 요새지를 방어하면 일본군은 상·하 분열되어 전승하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산동지역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신의주-안동-봉천의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파괴하여 그 후방의 군수품 지원을 차단하고자 계획하였다. 또한 여순·대련이 일본의 조차지였던 연유로 그들 세력하의 항구인 영구를 방비함으로써 해상을 통한 수송 역시 신속히 차단하고자 계획한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전쟁수행을 위한 군비조달을 보다 확고히 하는 한편, 각국의 원조를 취득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중국과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에서 혁명전쟁 즉 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 측이 군기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취지의 밀약이다. 아울러 그 실행상 국제적 효력을 보증키 위한 수단으로 독일 보증하에 한국과 중국이 조약을 체결하는 방법을 선정해 두고 있다. 이 조약안은 전문 21개조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약체결 당사자는 양국의 원수로 정하되, 한국혁명 착수 전에는 비밀을 보장해야 하므로 중국·한국·독일의 중요인물 간에 대표로 사결(私結)하고 혁명 성공 후에 각 정부가 이를 계승해 정식으로 세계에 공포하도록 한다. 둘째, 중국은 한국혁명이 발발할 경우 군기(軍機), 재력을 방조(幇助)하고 중급군관을 파견해 전력(戰力)을 원조해야 한다. 만약 재정·군기가 부족하여 이를 독일에 청구할 경우 중국은 독일에 권고하고, 담보를 제공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한국혁명이 성공한 후 독일이 방조한 것을 계산하여 국채로 30년간 상환하되 무이자상환이란 조건을 설정해 두고 있다. 셋째, 한국혁명이 성공한 후 중국이나 독일의 원조에 대한 대가로 내정을 간섭하려 하거나 한국의 영토를 점령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저지키 위한 금지조항도 마련해 두었다. 그 대신 독일에 대해서는 동서의 우등권을 양도하고, 중국 측에는 세관·철도 등 사업상 이권을 주도록 규정하였다. 넷째, 만약 혁명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중국 측에게 신한혁명당의 혁명주도인물에 대한 신분보장을 요구하는 조항도 설정해 두어 사후의 대비책 마련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한의방조약안’을 마련한 후 밀약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임무는 외교부장인 성낙형이 주관하게 되었으며, 중국당국과 밀약체결을 위한 준비과정상 필수적인 것은 우선 당수이자 미래에 세워질 한국 정부의 원수로 추대될 광무황제(고종)로부터 밀약체결의 전권을 위임 받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에 성낙형은 정권위임의 밀지를 받기 위해 국내 잠입을 결행하고 국내 잠입에 앞선 선무공작으로 국내 당원인 변석붕에게 이 거사내용 및 함께 일을 도모할 동지를 규합하도록 미리 통지하였다. 그 뒤 1915년 7월 초 성낙형과 김위원은 밀약안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하여 평양을 거쳐 무사히 경성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국내 잠입에 성공한 성낙형은 변석붕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구체적인 세부활동, 방향을 협의하였는데 사전에 통지를 받고 준비를 어느 정도 진척시킨 변석붕의 활약으로 마침내 광무황제(고종)에게까지 계획이 전달될 수 있었으며 성낙형이 조약안을 가지고 알현해 조약체결의 위임을 위한 밀지를 받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성낙형이 중한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알현하기 직전 불행히도 일제 측에게 발각되어 본부에서 파견된 당원 및 국내 활동원 모두가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들을 “보안법위반사건”으로 묶어 재판에 회부하였다. 모든 당원의 체포로 계획은 무산되었으나 신한혁명당의 외교부장이 국내에 잠입해 활동을 신속히 전개하여 단시일에 광무황제(고종)에게 계획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국외의 당 본부와 국내 조직 간의 긴밀한 상호연계 체제가 구축되었기 때문이었다. 신한혁명당이 ‘중국의방조약’체결을 위한 준비로 국내에서 전개했던 계획은 당원들의 체포로 성사 직전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이후에는 활동이 중지된 것으로 미루어 당 조직자체도 무산된 듯하다.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 방략상 중요한 것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민족독립을 위해 실리적인 방략을 중시하여 공화주의를 포기하고 보황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동맹국이 될 독일과 중국과 같은 제정을 표방하고 광무황제(고종)를 당수로 추대하였다. 물론 이 경우 복벽적이라기 보다는 입헌군주적 제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신한혁명당 계획이 실패 이후 복벽주의나 보황주의적 방략은 그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더 이상 독립운동방략상 주된 노선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7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단계에 이르면 공화주의 노선이 독립운동의 이론으로 정립하게 되는 진척을 가져왔던 것이다. 둘째는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정부의 조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의 정부가 어떤 형태라는 설명이 없어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국내·국외 간 외수내응(外受內應)의 효과적 독립운동을 추진키 위한 중추기관으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던 것은 가히 선구적이었으며,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단초를 열었다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는 신한혁명당 이후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서 통일된 최고기관인 정부의 수립을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화된 실시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관(신규식) 등 신한혁명당의 주도세력이 내린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이 어긋난 점과 방략상 보황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그렇기는 하나 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으로 국외독립운동 조직의 활동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세워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려 한 점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이후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적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과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 대동단결의 선언

신한혁명당 계획이 무산된 후 예관(신규식)은 박은식과 함께 상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였다.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설치하고 시베리아와 간도 방향의 애국동지와 국내의 동지를 단원으로 한 조직으로 단장은 박은식이 맡았으며, 단의 확장에 주력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규식이 박은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주도해 가는 동안 국제정세도 많이 변화하였으며, 그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러시아의 2월 혁명과 소수민족의 자유보장이란 기치 아래 핀란드·폴란드가 독립하였으며, 그에 자극받은 이스라엘도 독립에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중국 역시 손문 등 혁명파가 주도한 광동의 호법정부(護法政府)가 세력을 확장시키며 그동안 미미했던 신해혁명(1911)의 전통을 회생시키면서 연합군에 합세하는 등 국제적 환경의 변화가 독립운동에의 결단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관(신규식)은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하여 세계 각처에서 일고 있는 피압박민족의 독립이란 해방의 움직임에 편승하며 우리도 독립의 결실을 맺기 위한 첫 단계로 「대동단결의 선언(大同團結의 宣言)」을 작성, 이를 선포하였다.
신규식은 전술한 대로 중국혁명운동에 직접 가담하였음은 물론 그가 추구하는 운동노선을 보아 모든 이에게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신한혁명당 계획이 성공치 못한 방법적인 문제점을 깊이 통찰한 바 있으므로 그 일전으로 이 계획을 적극 추진했으리라고 보이며 실제 발기인의 대표격으로 되어 있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7월(단기 4250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 14명의 발기자가 제창한 것으로 전문 12면이며 대동단결의 필요성, 국내동포의 참상폭로, 해외동포의 역할, 당시의 국제환경, 대동단결의 호소, 끝으로 제의(提議) 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언문은 발기자의 의사를 수렴하여 조소앙이 기초하였는데 우선 그 요지를 검토하면서 선언의 성격을 살펴보자. 선언에 나타난 운동방략을 통해 예관(신규식)이 추구해 가고자 하는 독립 운동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권은 민족 고유한 것이며 융희황제(순종)의 삼보(三寶, 즉: 주권)포기는 오인동지(吾人同志, 국민)에게 양여한 것으로 이를 계승하여 상속해야 할 책임이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주권상 제권(帝權)소멸로 인해 민권이 발생되었음을 선언하여 국민주권론을 표방한 것이다.
그 주권상속의 방법으로 “국가 상속의 대의를 선포하여 해외동지의 총 단결을 주장하며 국가적 행동의 급진적 활동을 표방”하였다. 즉 국가라는 통일 단결된 조직만이 그 권리와 의무의 행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행동의 성취를 위해 통일기관, 통일국가, 원만한 국가라는 3단계 요강을 제시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한 전단계로 통일국가 즉 임시정부 같은 조직을 만들고 그 준비 단계로 민족대회 즉 통일기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끝으로 당시의 국제환경은 유기적 통일을 가능케 해 주는 유리한 조건이라고 파악하여 세계공론을 환기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즉 슬라브의 혁명은 반한(反韓)의 본이니 핀란드·유태·폴란드의 독립선언은 선진(先進)이고, 이어 아일랜드·트리폴리 등 피압박민족의 부활과 해방운동이 제고된다고 하였다. 또한 민권연합의 만국사회당 등을 예로 들어 당시의 국제정세가 인류의 화복(禍福)을 재정(裁定)하는 현상이니 “장엄(莊嚴)하고 신성(神聖)한 무상법인(無上法人)이 일대사를 위해 출현할 상서로운 징조”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를 이용해 “주권상속의 대의와 대동단결의 문제를 들어 먼저 각계 현달한 여러 인사의 찬동을 구하고 특히 일반 국민의 각성을 구하며 세계의 공론을 환기코자 대동단결을 선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의(提議)의 강령을 덧붙여, 기존의 해외 독립운동단체나 개인이 모여 회의를 거쳐 명실 공히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를 조직하고 지부를 설치하여 이를 통할하는데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해야 함을 밝혔다. 독립운동의 실천방략은 국민외교론과 친일적 자치론 및 동화론을 배격하자는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의 마지막에 이 제의에 대한 찬동여부를 묻는 통지서가 첨부되어 동포사회 각지의 개인과 단체에게 발송되었으며 그 답서를 요구했으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고 대개 관망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동단결선언」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대동사상을 기초로 하되 당시 세계적인 사상 조류였던 사회주의혁명의 기운을 수렴하여 이를 민족대동사상과 접합시켜 인류 대동의 단계로 발전시킴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추구하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당장 실천되지는 못하였지만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제시한 방략은 독립운동사상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큰 것이다.
첫째 1915년 신한혁명당 계획 이후 침체된 독립운동계의 상황에서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수립이란 새로운 운동이론과 방향을 제시하여 독립운동의 이론적 결집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점은 신한혁명당 단계의 망명정부 구상을 계승해 구체적이고 체계화된 실천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정도로 발전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이론적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국민주권론의 주장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국민주권론이 이론적으로 확립되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복벽적 망명정부의 수립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신한혁명당을 결성할 당시 갖던 방법론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사상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셋째 대동단결을 주장하고 회의를 통해 각계의 의견과 방향을 수렴코자 한 것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되 분산적 개별적인 투쟁을 지양하고 민족역량을 결집시켜 통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노선에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수용하여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면은 이 선언의 발표와 함께 1917년 8월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조소앙 등과 상의하여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사회당’의 명칭으로 조선 독립 촉구를 위한 전문을 보낸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전문에서는 지금의 전쟁(1차대전, 제1차 세계대전, 1914)이 발칸반도 문제로 인해 발생되었음을 지적하고 일본의 노예상태에 있는 한국의 문제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이어서 모든 민족의 정치적 균등, 국제정의의 실현, 피압박민족의 원상복귀, 국제적인 독립한국의 실현 등의 문제를 회의에 반영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전문의 주장은 대동단결선언의 주장과 그 궤를 같이 하며 시기적으로나 주동인물로 보나 대동단결선언의 실천적인 행동의 하나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예관(신규식)은 독립운동의 기반이 전혀 닦여 지지 않은 상해로 망명한 이래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제사를 조직하여 각지의 운동세력을 통할하는 조직으로 발전시켜 가는 한편 장차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청년들에게도 끊임없는 격려와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청년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적 위치를 굳혀갔던 것이다. 아울러 국제정세의 흐름과 걸맞는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였으니 신한혁명당의 결성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분산된 운동역량의 결집을 시도하였다. 동원가능한 민족역량을 한데 모아 독립전쟁을 펼치고자 무력투쟁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목적은 달성치 못한 채 무산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예관(신규식)은 이 실패를 거울로 삼아 방법론상의 한계를 극복하여 대동단결선언을 주관할 수 있었다. 이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방략상의 일대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마침내 임시정부수립이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제3장 임시정부에서의 활동과 만년의 사상

1.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1) 3·1운동(1919)의 선성(先聲)

1918년 제1차 세계대전(1914)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1919)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피압박민족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 민족해방운동의 기회로 활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1918년 11월경, 미국대통령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도착하여 파리강화회의(1919)는 특히 피압박민족에 대해 그 해방을 강조하게 될 것이므로 약소민족들은 그 해방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연설하고 그 계획추진을 촉구한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활용코자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우선 여운형(呂運亨) 등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주축으로 크레인의 협조를 얻어 한국민족대표를 평화회의(파리강회회의, 1919)에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젊은 청년층의 지도자였던 예관(신규식)은 자신이 이끌던 동제사에서 회원으로 활약하던 여운형 등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한청년당이 밝힌 결정을 적극 지원하며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 독립에 대한 원조를 요구하는 전문을 발송하면서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신규식은 파리강화회의(1919)가 약소민족 및 압박당하는 민족의 장래에 새로운 길을 보여주리라는 기대하에 조선민족도 권리와 정의를 주장하여 세계공론에 호소할 시기이므로 각지에서 우리 동포는 독립을 선언하고 운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국내외 각 방면의 운동 역량을 결집시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1919년 1월 하순 봉천의 동제사 회원인 정원택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독립운동에 적극 호응토록 조처하였다.
“방금 구주 전란(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을 제창하며 파리에서 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를 개최하니 약소민족의 궐기할 시기라 상해에 주류하는 동지들이 미국에 있는 동지와 국내 유지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며 일면으로 파리에 특사를 파송 중인데 서간도와 북간도에 기밀을 연락치 못하였으니 군(정원택)이 길림에 빨리 가서 남파(박찬익)와 상의하고 서간도에 있는 동지와 연락하고 각 방면으로 주선하여 대기응변하기를 갈망하노라.”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예관(신규식)의 서신을 받은 정원택은 상해에서 온 남파 박찬익과 더불어 예관(신규식)의 지시에 따른 구체적인 모의 방안을 마련하고자 여준 선생 댁에 모였다. 상해지역의 움직임을 전해들은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심사숙고한 뒤 그 해 음력 1월 27일(양력 2월 27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으며 여기서 상해에 길림대표를 파견하여 연락을 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조소앙이 후일 길림대표로 상해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독립의군부의 활동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대한독립선언서’였는데 예관(신규식)도 39인의 발기자 중 한 사람으로 명기되어 있다. 물론 당시 길림지역 독립의군부의 구성원이 아닌 인사들이 자신도 모른 채 선언서의 명단에 올린 것이기는 하나 그 당시 국외 독립운동계의 명망과 관련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선언서가 1919년 거대한 독립운동 에너지의 분출로 국내외가 혼연일체 되었을 때 외응(外應)의 측면에서 가장 형식이 잘 짜여진 선언서였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길림지방에서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및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도록 사전 지시를 내린 예관(신규식)의 판단은 탁월한 지도역량의 소산이었다.
예관(신규식)은 또한 만주지역과는 별도로 방효상(方孝相)과 곽경을 불러 국내의 월남 이상재와 의암 손병희에게 다음과 같은 밀서를 전하도록 밀파하였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이 서한에서 “…제(弟)는 이미 김규식·조소앙 두 동지들에게 중국 상해로부터 파리강화회의(1919)에 가서 호소할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형들은 모름지기 때를 맞추어 국내에서 우리 전체의 민중 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일제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한다는 굳은 결의를 표시하여 국제적으로 선전에 이바지하시오.”라고 하였다. 이 밀서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간 방효상과 곽경은 사전에 발각되어 전달되지 못했으며, 체포된 이들은 일제에 의해 혹독한 형을 받아 곽경은 옥사하고 방효상은 거의 죽을 정도로 폐인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선우혁(鮮于爀)은 상해로부터 비밀리에 평북 선천(宣川)으로 와서 그곳에 거주하는 목사 양전백(梁甸伯)을 방문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 조선민족대표자를 보낸 사실과 또한 조선 내에서도 이에 대한 후원과 이에 호응하는 독립운동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해 찬동을 얻었다. 다음 정주군 곽산에 사는 이승훈(李昇薰)을 방문하고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및 기독교계 교회유력자들과 회동해 양전백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전하여 독립운동과 자금취합에 대한 찬동을 얻고 상해로 돌아갔다.
이들은 선우혁의 권유로 평양에서 관공 사립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3월 3일 광무황제(고종)의 국장을 기해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계획하던 중 천도교로부터의 합동운동계획을 교섭받고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소앙을 동경에 밀파하여 동경 유학생으로 하여금 거사토록 종용하였다. 이어 장덕수(張德秀)로 하여금 동경을 거쳐 국내로 잠입시켜 일본의 운동은 2월 초순, 서울의 운동은 3월 초순에 실행될 예정이니 양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정황을 시찰하고 통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장덕수는 2월 3일 일본에 도착하여 미리 파견되어 활동하던 조소앙과 접선하여 유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8일을 기해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장덕수는 임무를 완수키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동경의 2·8독립선언이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곧이어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일어났던 것이다. 전술한 신규식의 계획과 활동으로 미루어 보아 신규식은 3·1운동(1919)을 유발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각 지역에 거족적 독립운동전개를 촉구하도록 추진하는 와중에 예관(신규식)은 조카인 신필호(당시 산부인과병원에 근무 중임)에게 연락해 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조(조완)씨 부인과 장녀 명호[明浩(신명호)]·장남 상호[尙浩(신상호)]를 맞은 예관(신규식)은 십년 만에 다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17세의 과년한 딸을 예관(신규식)이 데리고 있던 청년인 민필호와 맺어 주었다.

(2) 임시정부의 태동

3·1운동(1919)이 대중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징후로 나타난 것이 임시정부 수립의 추진이었는데 이는 3·1운동(1919)의 대중화와 함께 나타난 한국인의 주권적 의지의 결집인 동시에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직화하려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각처에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상해 그리고 노령(러시아령)이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수립 추진에 참여한 예관(신규식)도 신한혁명당과 대동단결선언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전부터 구상해 오던 임시정부의 조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여운형·선우혁·한진교(韓鎭敎)·김철(金喆)·현순(玄純) 등과 모의하여, 3월 하순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준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1919년 4월 10일 1차 임시의정원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정식으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 선포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관제를 의결하여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하고 각부의 국무원도 선출하였다. 드디어 4월 13일을 기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정식으로 국내외에 선포하게 되었다. 이 때 발표된 내각의 각료 명단은 국무총리 이승만,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강화대사 김규식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내각 명단에서는 신규식의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4월 23일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에는 신규식이 법무총장으로 선임되어 있어 국내에서 차지하는 그의 명성과 위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임정의 각료로 선임되지는 못했지만 신규식은 당시 임시정부의 성립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의의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한국 임시정부의 조직은 무수 선열(先烈)의 선혈(鮮血)의 관개(灌漑)로 된 것이요 삼천만 자유를 애호하는 한민족의 옹호로 이룬 것이요. 전 세계 정의를 숭상하는 인사의 동정으로 해서 된 것이며, 천만번 불굴 불소하는 혁명지사의 추진으로 된 것이다. 다만 왜구의 매와 개가 국내에 널려 있어 정령(政令)을 순조롭게 시행하고 국권을 펼 수 없으니 형세 부득이 국외에 안전한 곳을 택해 정부를 설치하여, 정권을 안정하고 정령을 관철하는 길을 구하게 된 것이다 … (중략) … 국외 및 동북 등지에서 항왜(抗倭) 무장운동을 격동하고 여러 가지 직접 행동을 지도하여 왜구의 암흑통치를 전복하고 태극기를 거듭 경성에 휘날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나타난 그의 정부관은 우선 자유와 정의를 중시하고 있으며, 그 정부조직을 가능케 하는 힘은 피의 투쟁에서 찾고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가 추구하는 목적은 무장투쟁을 직접 지도해 일제의 암흑통치를 퇴치시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분산, 고립된 독립투쟁 역량을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으로의 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중시하고 그 투쟁방략으로 보다 적극적인 직접 투쟁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에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관(신규식)이 제1차 의정원회의는 물론 상해임시정부 초기 각료 명단에서도 누락되고 있어 그 조직과정 중 핵심적인 인물로 표면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는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었다고 한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만으로는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가장 중추적인 조직에서 제외된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이유는 당시 상해지역에서 임시정부 조직과정 중 이에 참여한 인물들 간의 힘의 역학관계나 방략상의 의견갈등 등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앞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실제 임시정부조직 당시에 관한 『지산외유일지』의 기록을 보면 참여운동세력간의 갈등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신규식이 가장 활동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는 망명 이후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로 나타나며, 그 이후에는 상해방면의 주도권이 임시정부로 넘겨졌으며, 그는 주도권을 상실한 채 임시정부에서 그 임원으로써 활동하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신규식은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된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 충청도지역 의원으로 참석하여 손정도 의장과 함께 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구급의연금 모집을 담당할 각도 구급의연금 모집위원 선출을 결의함에 따라 충청도 모집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예관(신규식)은 자신이 망명하기 전 서울의 갑부인 정두화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자금을 댈 용의가 있다는 약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말 판서를 지낸 정낙용(鄭洛溶)의 아들 정명선도 이따금 자금을 보내주는 터여서 이들에게 자금을 부탁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결정한 뒤 신규식은 5월 초 정원택과 김덕진을 국내에 밀파시켜 그들에게 보내 운동자금을 받아오도록 지시하여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두 청년은 상해에서 일찍부터 예관(신규식) 밑에서 활동하던 청년들로써 예관(신규식)과 자금 모집방안을 심사숙고한 결과 예관(신규식)이 친필로 운동자금기부를 부탁하는 서신을 써주면 이를 가지고 국내를 잠입하여 모집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기밀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특한 방법의 서신 작성법이 사용되고 하였다. 즉, 책의 속지에 소금물을 찍어 편지를 쓰면 소금물이 마른 뒤 글씨 쓴 흔적이 전현 나타나지 않아 아무도 알지 못하나 편지를 받은 이가 이를 화롯불에 쪼이면 보이는 방법이었다. 밀명을 받은 두 청년이 밀지를 가지고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뒤 정두화를 만나 자금모집에 대한 예관(신규식)의 뜻을 전했으나 의외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설상가상 6월 초 정원택은 체포되고 김덕진은 가까스로 상해로 도피하여 뜻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뒤 신규식은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 개최된 7월 14일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의원직마저 사퇴하여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한편 이즈음 3·1운동(1919)의 발발에 자극 받은 각 지역에서 각기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니, 1919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일제의 타도와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5개의 임시정부가 그것이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월 21일에, 서울에서 조선민국임시정부가 4월 9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4월 10일에, 철산·신의주에서 신한민국정부가 4월 17일에, 서울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 명의로 한성정부가 4월 23일에 각각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 정부들은 3·1운동(1919)의 열기 속에서 해당 지역의 운동가들이 명망있는 인사를 각료로 추대하여 설립한 과도적 정부체제였다. 때문에 지역적 분산성과 고립성을 극복하고 체계적인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최고지도기관으로서의 단일 중앙정부의 수립이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분산되어 버린 민족역량을 한데 모으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임시정부로서의 실체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산하의 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병합해 단일의 입법기관을 형성하고, 이것이 국민적 기반을 가진 한성정부의 법통과 인맥을 계승하여 행정부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통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결의에 따라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는 8월 18일부터 개회한 제6회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헌법 개정 및 정부개조안을 통과시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한 이외에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9월 11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새로 수립되고 그에 부수하여 임시헌법과 내각명단이 공포되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총판: 안창호
1919년 11월 3일 법무총장에 임명된 신규식은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총판 안창호와 함께 내각 취임식을 갖게 되었다.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 정부들의 노선을 종합해 민주공화정치를 채택하였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하되 임시의정원으로 하여금 이들을 탄핵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은 초기에는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독립운동을 통괄하는 한편 세계열강에게 우리민족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이룬 업적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제치하의 암흑 속에 잠긴 국민들에게 민족해방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을 불어 넣고 또 국민 개개인이 그런 목표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국가건설의 방략을 앞장서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즉 임시정부는 수립당초부터 민주공화정치를 내세웠을 뿐 아니라 남녀·귀천·계급·빈부의 차별이 없는 일체평등을 지향했고, 종교·언론·출판·결사·집회·신체·소유의 자유를 주창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명실 공히 통일된 민족대표기관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게 되었다.

(3)손문의 광동정부에 특사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의 유일성과 정통성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운영문제나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각 세력사이에 대립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독립운동의 처지에서 3권 분립 규정,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절충, 공산주의의 침투문제, 재정원확보, 운동노선 상의 이견, 외교활동의 침체 등 많은 문제를 안고 내부적인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정부개편 논의가 대두되어 1921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정국쇄신안을 논의하였으나 이승만의 현상유지책 주장이 우세한 탓으로 개편안은 무산되어 버리자 이를 수용하지 못한 국무총리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한편 임시정부 밖에서도 정부의 개편강화란 현안을 놓고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자는 의견이 속출하였다. 즉 상해에서는 안창호·박은식 등이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북경에서는 박용만·신채호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통일회에서, 또한 만주 방면은 여준·김동삼·이탁 등이 액목현회의를 열어 각각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러한 안팎의 갈등으로 인해 그 존폐의 위난을 당하자 이를 안타까워하던 신규식은 3월 이동녕·이시영과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지지 및 범민족적 옹호를 호소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분열을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임시정부 지지세력들의 움직임에 대처한 반임정(임시정부)파들도 정구단(正救團)을 조직해 대통령 이승만의 무책임과 무능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럼으로써 상해정국은 더욱 혼란의 와중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독립운동계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여론이 기울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규식을 비롯한 임정(임시정부)지지세력과 뜻을 달리하는 김규식·안창호가 내각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추진을 전개하게 되자 대통령 이승만은 이 사태를 수습치 못한 채 워싱턴의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 1921)에 참석키 위해 상해를 떠났다. 대통령도 없고 국무총리도 떠나 버린 임시정부를 이끌어 갈 책임을 맡게 된 신규식은 5월 16일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한 뒤 이어 26일에는 외무총장직도 겸임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21년 11월에 세계평화를 위한 군비축소문제와 태평양 및 극동정책을 논의키 위한 국제회의가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5대 강국이 회합을 갖고 세계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원동(遠東)문제를 중심으로 의제가 다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1919)에서 관철시키지 못한 한국의 독립안을 상정시킨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그리하여 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 결과를 관망하느라 국민대표회의 운동은 소강상태를 들어갔다. 한편, 신규식을 비롯한 이시영·이동녕 등은 태평양회의를 한국국권회복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중심으로 그 대책을 협의하고 워싱턴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에게 주권을 되돌려 주어 독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후원회와 협의해 각 방면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여 각국으로부터 열렬한 지원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나라 정부와 정식으로 접촉하고 외교적 절차를 따라 각국의 정식승인을 얻고자 하였다. 이 같은 방침 하에 신규식은 신익희와 함께 중국 남방외교에 대한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1921년 10월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예관(신규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친선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 문제와 독립운동지원 문제를 교섭키 위해 중국의 호법정부(護法政府)에 급파되었다.
호법정부란 구약법(舊約法) 즉 신해혁명(1911) 당시 입헌공화제의 약법을 수호하는 정부로 광동에서 성립되어 중국 민의(民意)를 대표하였던 것이다. 즉 1917년 단기서(段棋瑞)가 북경정부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실권을 잡자 세계대전 참전안에 대해 불만을 품고 구국회(舊國會)에 대신해 따로 참의원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운남독군(雲南督軍) 당계요(唐繼堯)는 이를 반대하고 구국회를 회복하여 구약법을 옹호할 것을 주장하였고 손문도 일본에서 돌아와 구약법옹호의 뜻을 밝혔다. 이리하여 그 해에 비상국회를 열고 호법정부를 수립하고 대원수에 손문, 부원수에 당계요와 육영정(陸榮廷)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전권대사 파견 때 마침 손문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군벌을 제거하고자 세운 북벌계획을 위한 북벌서사식(北伐誓師式)이 있어 축하도 함께 전하자는 배려도 포함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래 정식으로 특사를 파견해 우방을 방문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1921년 10월 26일 새벽 예관(신규식)은 비서인 민필호를 대동하고 애산(涯山) 부두로 가 프랑스 우편선인 에스 스나일(S. Sniel)호에 승선하여 광동으로 향했다. 이 기선은 1만 톤 정도의 배로 빛깔은 초록색으로 아주 경쾌하며 그 모양은 마치 순양함과 같았다. 배안의 시설은 퍽 화려하고 조밀하였으며 식당·응접실·의료실·목욕실 등을 갖춘 까닭에 육지와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9시에 출발한 배는 서서히 육지를 떠나 바로 오송구(五淞口)를 향해 달렸다. 예관(신규식)은 망망대해에 뜬 일엽고주(一葉孤舟) 위에서 임시정부의 특사란 임무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틀간의 항해 끝에 10월 28일 3시 홍콩에 도착하여 동아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예관(신규식)은 당시 홍콩에 머물고 있는 옛 친구 당계요(唐繼堯) 장군을 방문하였다. 그는 보통 키에 훌륭한 외모를 가진 풍채 좋은 사람이었는데 예관(신규식)을 보자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두 사람은 함께 최근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의 현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어려운 현안문제를 거론하였다. 예관(신규식)은 우선 3년 전의 3·1운동(1919)은 전 민족적인 만세운동으로 민중이 이에 참가한 것은 오로지 하나의 애국단심과 자유해방을 얻고자 하는 정의감에서 솟아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어 그 당시의 일제의 무력진압을 전하면서 비무장한 민중 중 참살자가 7만여 명 투옥자가 3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일례로 소학교 학생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행렬을 따르니 일본경찰이 그 손을 베었고 학생은 왼손에 국기를 다 시 잡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일본경찰은 다시 그 왼손마저 베어 선혈이 낭자하고 옷은 피로 물들었지만 학생이 계속 만세를 외침에 마침내 그 목을 잘랐던 만행을 설명하면서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 그 외 임시정부의 조직경과와 현재의 군사 경제사정에 대해 설명하였다. 당계요는 임시정부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독립투쟁공작이 용이치 못하다는 말을 듣고 선뜻 자신이 운남으로 돌아가서 은행의 예금 문제가 해결되면 10만원(元)을 찬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계요의 경제적인 지원약속을 받은 예관(신규식)은 고마운 뜻을 전한 뒤 군사적인 측면을 거론하여 독립군이 청산리대첩(청산리전투, 1920)의 전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고정적 근거지를 잃어 앞으로의 발전이 낙관키 어렵다는 것과 사관후보와 혁명 간부 배양문제가 쉽지 않다는 고충을 털어 놓았다. 이에 대해 당계요는 자신이 운남에 돌아가서 한국을 위해 최소한 2개 사단의 군관을 양성하여 한국혁명을 원조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계요의 경제원조건은 당시 상해 중불은행(中佛銀行)의 파산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군사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증명서를 소지한 청년들을 그가 경영하는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50여 명을 졸업케 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예관(신규식) 일행은 10월 29일 홍콩 떠나 광동에 도착하였다. 광동은 주강(珠江)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주강을 사이에 두고 하남(河南)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경제에 있어 중국 4대 중요도시의 하나였다. 또한 이곳은 중국혁명의 원천지로 성 밖의 백운산(白雲山) 황화강(黃化崗)에는 72열사의 묘지가 있다. 특히 손문이 비상 대총통에 취임하여 광동성 안에 주재한 후에는 사방의 호걸들이 이곳에 운집해 북양군벌을 전복시키고 중국을 부흥시키려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튿날 예관(신규식)은 민필호를 대동하고 비상 대총통 관부와 각 부회(部會) 및 친지를 방문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본영 비서장겸 총참모 호한민과 대리원장 서겸(徐謙), 내정부장 여천민(余天民), 외교부장 도정방, 차장 오조추, 총통부 비서장 사지, 재무부장 요중개 등을 만나 임시정부와 한국광복운동에 대한 물심양면의 원조를 요청코자 특파되었음을 밝히고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전방문은 예관(신규식)이 광동특사로 파견된 목적을 달성키 위해 정부차원에서 문제를 거론키 앞서 사적으로 정부요인들과의 면담을 통해 원만한 해결을 도모코자 한 사전포석이었던 것이다. 이에 호한민은 성심성의껏 이 문제를 다루겠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약조를 해 주었다.
“한국과 중국의 두 나라는 역사상으로 말하면, 손과 발의 관계와 같은 정의가 있는 것이요, 지리상으로 말하면, 이와 입술의 관계와 같이 서로 의지하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희비가 상관하며, 환난은 서로 도와야 한다. 뜻밖에도 우리 중화민족이 성립 이래 20년 동안 원세개는 황제를 칭하고, 장훈은 복벽하며, 군벌은 할거하니, 내란은 거듭 일어나고 국가에 평안한 날이 없으며, 국민은 생활을 안정하지 못하여, 국가 민족의 존망이 실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귀국의 광복운동에 대하여 지금까지 아무 이렇다 할 원조를 못하였음을 마음이 아픈 일이고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 이번에 선생이 멀리 우리 호법정부를 방문하여 준 두터운 정은 지극히 감명이 깊은 바로, 저는 반드시 선생의 뜻을 손(손문) 총통에 전달하고 시간을 정하여 정식으로 회견할 것으로 약속하며, 한국과 중국의 두 나라의 국시에 대하여 가장 좋은 방법 상의하고자 한다.”
이 날의 회합에 대해 이튿날 ‘한국특사 신규식 씨가 광동에 와서 우리 당국과의 협상이 매우 원만하였으며 광동은 모두 기뻐 경축한다.’는 기사가 광동의 각 신문에 실렸다고 전한다.
11월 3일 예관(신규식) 일행은 손문 대총통과 예비접견을 갖기 위해 예의를 갖추고 미리 준비해 온 서류와 각종 선전품을 가지고 관음산 아래에 위치한 비상총통부로 갔다. 거기서 외교부장, 외교차장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때 비서관 민필호는 외교차장에게 준비된 것을 전했다. 즉 미국 지역 한인이 출판한 『한국견문론』한 권, 한글신문 몇 종류 3·1운동(1919)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 여러 첩, 예관(신규식)이 경영하는 진단학교 등의 인쇄물을 전하면서 널리 선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나서 호한민의 안내로 대총통관저로 인도되어 마침내 손문 대총통과 만날 수 있었다. 예관(신규식)은 손문과의 예비모임에서 광통특사로 방문하게 된 요지를 전하고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원조를 요청하면서 아울러 임시정부가 마련한 호혜조약(互惠條約) 5관(款)을 전하고 재가를 청하였다.
이에 손문은 기본적으로 광동정부가 한국독립운동을 당연히 원조할 의무가 있음을 전제한 후 아직 중국혁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움을 줄 여력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원조는 북벌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린 후 시기가 오면 전력을 다해 한국 광복운동을 원조하겠다고 진심어린 약조를 하였다.
호한민은 이에 덧붙여 중국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기를
“한국은 동아시아의 발칸으로 한국 문제가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아시아주의 시국 대세가 균형을 잃어 동아의 평화를 유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대총통은 몸소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창하고, 아울러 대아시아주의를 내걸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아시아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주의와 사상에 있어서 함께 뭉치어 진정한 평화를 함께 꾀한 후에야 동아의 영구 평화가 비로소 실현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예비 접견의 성과에 힘입어 손문과 국회비상회의의 적극적인 찬성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정식승인을 얻을 수 있으며, 군사교육건은 각 군사학교에 한국청년들을 수용토록 명령할 것과 이후 북벌계획이 완성되면 한국광복운동을 원조할 것이란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마침내 11월 18일 광동정부 북벌서사(北伐誓師) 전례식과 한국특사를 정식으로 접견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흑색 대례복을 입고 국민당 당기와 중국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고 주위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회장으로 나갔다. 손문 대원수와 총통부의 각원 전부, 참의원과 중의원의 의원 전원, 육·해군 장교 천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식순에 따라 신규식은 축사를 읽고 가져온 국서(國書)를 손문 대총통에게 상정하였으며 손문 대총통은 이를 접수하고 임시정부의 특사파견은 영광이며 여기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열리어 장차 친선우호의 길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는 답사를 하였다.
이 공식접견에서 다음과 같은 5개조의 외교문서를 전달하였다.
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법정부를 중국 정통의 정부로 승인함. 아울러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② 대중화민국 호법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함.
③ 한국 학생을 중화민국 군교(軍敎)에 수용하여 교육할 것.
④ 5백만원을 차관하여 줄 것.
⑤ 조차지대를 허락하여 한국독립군 양성에 도움이 되게 해 줄 것.
이 중 4~5항은 광동정부로서도 조처할 능력이 없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으나 그 외의 문안에 관해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즉 손문과 광동정부 국회비상회의의 적극적인 찬성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정식승인을 얻을 수 있었으며, 군사교육건은 각 군사학교에 한국자제를 수용토록 명령할 것과 이후 북벌계획이 완성되면 전력으로 한국 복국운동을 원조해 줄 것을 약조하였다. 예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안에서 예관(신규식)은 “이번 손(손문) 대총통의 정식 접견을 받게 된 것은 비록 일종의 의식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 의의는 참으로 중대한 것이 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이는 가장 기념할 만한 하나의 큰 사실이라 할 수 있으며, 또 내가 중국에 온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의 큰 사실이 된다. 다만 지금의 중국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국토 또한 수복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근심스럽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우리의 책임은 더욱 중대한 바가 있다.”라는 말로써 재차 앞으로의 임무를 다짐하였다. 그리고서 손(손문) 총통의 우대를 받은 것 외에 호한민 등 여러 옛 동지들의 조력에서 큰 의지를 받았다는 것을 감격스러워하였다. 양국 간의 외교관계 성립에 따라 임시정부는 1922년 2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을 광동주재 임정대표로 파견하여 외교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이와 같은 외교적 성과는 임시정부사상 소련(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성사시킬 수 있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던 배경은 신규식이 임시정부 수립 전부터 중국혁명의 근거지인 상해지역에 기반을 두고 중국혁명에 직접 참여하는 등 중국의 신해혁명(1911)에 대한 열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물심양면으로 중국혁명지사들을 지지 후원하면서 그들과의 혈맹관계를 다져 나갔던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런 관계가 밑거름이 된 위에 혁명에의 공감대 형성을 통해, 중국혁명·한국혁명 즉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 상호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정식접견을 무사히 마친 예관(신규식) 일행은 광동에 머무르던 중 중산현(中山縣)에 있는 당소천(唐小川)의 초청을 받고 잠시 틈을 내어 그가 있는 마카오를 방문케 되었다. 마카오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당가만(唐家灣)에 위치한 당소천의 집에 도착한 예관(신규식)은 그의 환대를 받았다. 당소천은 과거 한국에 있었던 때를 상기하고 한국의 산수와 풍물을 칭찬하였다. 예관(신규식)은 그와의 대담 중에 “이번 한국임시정부가 대표를 파견하여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중국대표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대표를 도와주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여 당소천의 승낙을 받았다. 그는 또한 미국 후버 대통령과도 친하니 후버 씨에게 따로 서신을 보내어 원조를 청할 수 있다고 대답하여 예관(신규식)이 고마움을 전했다. 좋은 성과를 가지고 광동으로 돌아온 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느덧 12월 중순이 지나갔다. 이즈음 총통부 요인들은 손문 대원수를 따라 북벌을 위해 북상하였으나 신규식은 계속 머무르면서 한가한 틈을 타서 시내 사면(沙面)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영사를 방문하는 등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신규식은 각국 영사와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임시정부의 입장은 표명키 위해 모임을 개최키로 마음먹고 22일 오전 시내에 위치한 신신호텔에서 사면의 각국 영사를 초대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전개에 대한 각국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프랑스·미국영사와 총통부의 내빈을 비롯하여 수십 명이 모였다. 이 연회에서 예관(신규식)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어 많은 독립운동단체를 통괄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현황을 알려주고 또한 삼일운동(3·1운동, 1919) 당시의 실상과 각 지역에서의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중국호법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한 경과를 밝히고 열국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를 바란다고 연설하였다. 예관(신규식)의 연설에 이어 프랑스와 미국영사의 협조차원의 답사를 듣고 성황리에 연회를 마쳤다.
상술한 바대로 광동에서의 외교활동을 통해 소기의 목적하는 바를 무사히 완수한 예관(신규식) 일행은 그해 25일 광동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2. 임시정부의 분열을 걱정하며

(1) 임시정부에서 물러나다

예관(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후 한국혁명운동은 일대 전환기를 이루었으며 독립운동의 앞길에는 한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성과의 환희도 잠시일 뿐 돌아온 예관(신규식)에게 부가된 일은 또 다시 복잡한 임시정부 내부의 수습과 끊임없는 고뇌뿐이었다.
즉 임시정부가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결성하면서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의 기회로 이용코자 했던 태평양회의가 1922년 2월 오히려 일본의 세력 강화와 국제정세의 안정이란 방향으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 결과 이 회의에 기대를 걸었던 독립운동 지도부는 다시 한번 실망을 맛보아야 했으며 외교방략상의 활동노선에 대한 재검토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또 다시 임시정부는 안팎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태평양회의 개최기간 동안 그 회의에 거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대로 인해 잠시 주춤해졌던 국민대표회의의 개최운동이 급속히 재개되었다. 소용돌이 정국 속에서 신규식이 이끄는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하여 1922년 3월 20일 군무총장을 제외한 모든 국무원이 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임시정부가 약화될 대로 약화되고 혼란에 빠지자 그 수습책을 두고 기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이 수립하자는 주장 즉, 개조안과 창조안으로 양분되면서 임시정부의 앞날은 더욱 암울해지기만 하였다. 국무총리직을 사퇴한 예관(신규식)은 파국으로 치닫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전선의 분열상태를 비관하고 망명 이후 10여 년간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고뇌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5월 이후에는 심장병과 신경쇠약이 악화되어 병석에 눕고 말았다.
그런데 그를 병석에 눕게 하는데 치명적인 타격을 준 또 하나의 요인은 다름 아닌 중국혁명운동 과정에서 발발한 진형명(陳炯明)의 혜주(惠州)반란이었다. 그해 5월 중국 광동정부 수립의 결정적 힘이 되었던 광동의 군벌인 진형명이 상호협력관계를 깨고 손문에게 반기를 들어 손문 등 혁명세력의 거두에게 체포령을 내렸던 것이다. 결국 손문을 비롯한 혁명파들은 이를 피해 광동을 떠나고 말았다.
예관(신규식)은 광동정부에 특사로 다녀온 뒤로는 한국임시정부와 중국호법정부는 이미 환난을 같이 할 형제의 의를 맺었을 뿐 아니라 운명을 가를 수 없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손문의 혁명정부의 안위, 나아가 중국혁명의 성패는 한국혁명 즉 한국독립운동의 성패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관(신규식)은 진형명의 반란으로 중국과 한국이 지닌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속단하고 좌절의 뼈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중국의 불행이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중산(손문) 선생이 애를 써서 이룩한 사업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이것은 비단 중국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큰 불행이로구나.”하고 탄식하며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되었다.

(2)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자결

중국혁명의 실패, 임시정부 변혁논의를 둘러싼 계파간의 극한 대립, 임시정부 내부에서 전개된 의정원과 대통령의 대립 등 한국독립운동이 운동방략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신규식의 상심은 더욱 깊어졌으며 그로 인해 병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수면과 음식의 양이 날로 줄어 들고 말수도 적어져 갔다. 다만 그 눈초리만은 전과 다름없이 예리하였으며 전보다 더 음울한 빛이 감돌았으나 몸은 날로 여위고 파리해졌다. 그래도 예관(신규식)의 자태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엄숙하고 단정했다고 전한다. 병환 중에 예관(신규식)은 혼자 창 앞에 서서 창 너머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리곤 하였는데 그 때 표정이 몹시 고통스럽고 침울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에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8월 초순 찌는듯하게 무더운 어느 날 예관(신규식)은 전처럼 창가에 섰다. 홀쭉히 빠진 양 볼에는 깊게 주름이 잡히고 백지장처럼 하얀 움푹하게 패인 눈으로 창 밖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요.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 없소.” 하는 자책하는 듯한 독백을 남기곤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는 침대에 누워 줄곧 단식하고 말도 없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기만 하였으며 음식이라고는 매일 뜨거운 물을 조금 마실 뿐이었다. 우울·병환·기아의 시달림 속에 병세는 더욱 중해졌으며 모습이 아주 야위어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가 되었다.
아우 건식(신건식)이 달려와서 식사와 약 들기를 권했으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즈음 그의 고향에서 모친인 최씨 부인이 작고했다는 부음이 전해졌다. 망명한 두 아들을 부르다가 임종했다는 소식이었으나 친지들은 병중에 있는 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병세가 더욱 악화됨에 동지들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억지로 음식을 들도록 하고 항문에 링게르 주사를 놓아 영양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예관(신규식)은 몸소 반항하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감았던 눈을 뜨고 보는 눈초리에 노기를 띠고 있었다. 예관(신규식)이 죽음을 결심하고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약도 거부한 지 25일째 되던 9월 25일(음력 8월 5일)에 ‘정부! 정부!’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이처럼 그는 죽는 날까지 임시정부의 앞날을 염려했으며 독립운동계의 계파 간의 알력과 분열을 안타까워했다. 이천만 동포를 일제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대한의 혼을 간직하고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정부 밑에 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예관(신규식)은 세상을 등지면서 남은 동지들에게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의미의 말을 남긴 것이었다.
향년 43세로 슬하에 1남 l녀를 두었으며 딸 명호[明浩(신명호)]는 민필호와 결혼하였고 아들 상호[尙浩(신상호)]는 이 당시 10살이었으나 17세 때 항주에서 요절하여 항주 교외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즐풍목우(櫛風沐雨)한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예관(신규식)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옛 동지, 그를 따르던 애국청년 등 천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 본국·중국·미국 등 각지 신문들도 예관(신규식)의 서거를 기사화하고 애도하였다. 당시 예관(신규식)을 추종하던 청년들이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는데 그중 김충일이란 청년의 경우 큰 충격을 받고 이를 감당치 못해 미치고 말았다니 예관(신규식)에 대한 이들의 충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유해는 상해 프랑스 조계 홍교만국공묘(虹橋萬國公墓)에 안치되었으며 그 비문은 친지인 조완구가 썼다.

3. 사상과 역사적 위상

“선생의 카이젤식 구렛나루가 넉넉히 선생의 강철과 같은 의지와 강인한 투쟁심과 백절불굴의 담대한 무겁심(無怯心)을 상징해 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용감하고 호매(毫邁)하고 정절이 굳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생의 미려한 턱의 짧은 수염은 즉 결백하고 욕심없는 눈동자와 구레나룻의 엄하고 사나운 기상과 더불어 어떤 종교가의 자애와 관후(寬厚)와 연학(硏學)과 평화를 풍기게 한다.”라고 표현한 『전기』의 묘사는 예관(신규식)의 외모가 군인과 같은 대담하고 엄격한 모습과 학자들의 단정함과 절제된 온유함을 겸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듯한 예관(신규식)의 장엄한 기상은 타고난 천성 이외에 후천적인 극기와 수양의 결과였다. 예관(신규식)은 낮에는 절대로 자리에 눕는 일이 없으며 아무리 불같은 더운 여름날이라도 웃옷을 벗는 일은 결코 없었을 뿐 아니라 실내에서도 항상 장삼(長衫)을 입었으니 땀이 흘러 옷이 흠뻑 젖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평상시에도 결코 흐트러진 몸가짐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절제된 생활 속에서 자신을 다스렸음을 엿볼 수 있다.
예관(신규식)은 과묵하고 쉽사리 노하지 않으며 결코 농담하는 경우도 없었다고 한다. 늘 온유한 가운데 강의(剛毅)한 기품을 지녀서 공손하고 정아(靜雅)하였지만 그 내면에 굳센 의협심과 언제라도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숨기고 있었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하였다. 예관(신규식)은 선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병중에 들었는데, 와병 중에도 친히 제문(祭門)을 짓고 분향치제(焚香致祭)하며 제계소식(齊戒素食) 하기를 3개월에 걸치고 아울러 조석으로 유상(遺傷) 앞에 묵도를 올렸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평생토록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절제를 잃지 않도록 함에 담배·술·바둑과 같은 세속적인 오락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수와 시화(詩畫)를 즐길 정도였다. 그가 수많은 세월을 이리저리 표박하면서도 항상 지니고 다닌 것은 한 폭의 단군초상화와 한 권의 한국지도였다. 예관(신규식)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이를 마주 대하여 묵묵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모습이 온 정신을 기울여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천만 한국 국민이 지금 일제에게 받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하며, 조국광복 후에 건설한 조국의 미래상을 설계하는 듯하였다고 『전기』에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예관(신규식)은 일생을 두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였으며 한시라도 사적인 일에 시간이나 마음을 빼앗긴 것이 없었다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예관(신규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사상체계가 서고 한문에도 조예가 깊다고 평가되었으나 그가 남긴 저작이 거의 산일되어 현존하는 것은 『한국혼』과 시집인 『아목루(兒目淚)』뿐이다.
『한국혼』은 1939년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중경(重慶)에서 초판이 인쇄되었고, 그 후 1955년 대만에서 증정(增訂)된 재판이 나왔다.
『한국혼』은 그가 1912년 동제사 창립 때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글로 옮긴 것인데 국인(國人)에게 민족주의와 복구(復仇)의 대의를 밝히려는 목적을 가진 민족운동의 지침서로 예관(신규식) 자신도 피와 눈물로 엮었다 하여 일명 『통언(痛言)』이라고도 한다. 그는 “통언을 쓰려고 하나 나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고통이 간직되어 있어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하여야 될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만 나의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이를 쓰려고 하나 또한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로 이 글을 읽는 자는 사람마다, 느끼고 받는 바의 고통을 영원히 여러 사람 마음속에 간직하여 망국의 치욕을 벗어난 다음에 잊어버리도록 하여라.”고 토로하였다. 그리 분량이 많은 저술은 아니지만 이 속에 그의 사상이 압축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한국혼” 사상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근대적 한국사 인식이 민족정신, 주체성 확립 등의 민족적 과제 하에서 체계화되던 당시 학계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초기민족주의 사학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예관(신규식)은 이 책 앞부분에서, 나라 회복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가령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비록 지도가 그 색깔을 달리하고 역사가 그 칭호를 바꾸어 우리 대한이 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혼은 아직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힘쓸지어다 우리 동포여! 다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치 않도록 할 것이며, 먼저 각기 가지고 있는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즉 복국책의 요체는 한마디로 “대한의 혼”을 지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전 단계로 우선 망국의 원인을 진단하여 “망국론(亡國論)”을 피력하였다. 망국론은 하늘이 준 본연의 착한 마음을 송두리째 잊어버렸기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고 악한 병에 걸려서 생긴 일종의 마목불인지증(痲木不仁之症), 즉 잊기 잘함을 그 근본 원인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도, 첫째 선조의 교화와 그 종법(宗法)을 잊어버렸고, 둘째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으며, 셋째 국사(國史)를 잊었고 넷째 국가의 치욕, 즉 국치(國恥)를 잊었음”을 통한하며 이렇게 사람들이 잊어버리기를 잘하니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라고 논하였다.
이를 좀 더 살피면, 첫째 선조의 교화와 종법이란 생민교화(生民敎化)의 시조인 단군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개국시조이며 주재자인 단군의 가르침을 잊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하늘을 본받아 도를 닦고 나라를 세우며 홍몽(鴻濛)을 개벽하여 자손들에게 전한 것은 5천 년전 동방 태백산에 신으로 강림한 이가 바로 우리 개국시조 단군이었다. 이로부터 성철(聖哲)이 대를 이어 일어나고 토지가 날로 개척되며 문화는 융창하고 무치(武治)는 강성하였다고 논술하였다. 이어 예로부터 우리 선조를 신인국(神人國)·군자국(君子國)·예의동방·해동승국(海東勝國)이라 칭하거나 상국(上國) 신생국으로 불러왔음을 상기시킨 뒤 나라에는 충성하고 집에는 효도하며 벗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싸움터에 나가 물러남이 없으며 살생하되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5조목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종법인 것이라 논술하였다. 이 종법은 자손만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단군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5조목의 종법을 지켜 근본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신념을 몸소 실천한 신규식은 망명시절 매일 두 차례 단군의 신상을 향해 향을 피워 배례하고 묵념으로서 조국광복을 염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숭배 사상은 그가 대종교에 입교한 후 대종교를 독신하였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말에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대종교는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로 전승되어 온 단군을 받들어 모시며 이에 귀일함으로써 조선민족정신의 순화통일과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하였다. 동시에 조선민족의 강화에 의해 독립 국가로서의 조선의 존속을 목적으로 한 민족종교로 출발하여, 일제하의 국내외 민족운동에 있어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도 이러한 대종교의 현실적이며 목적의식적인 측면을 중시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주로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잊혀져가는 단군의 성스러운 전통을 계승하여 진실한 민족의식을 배양하고, 선조의 교화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이를 신봉해야 한다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예관(신규식)은 평생을 두고 산수와 시화(詩畵)를 즐겨 평생을 객지에서 보내면서도 한 폭의 단군초상화와 한국지도는 항상 지니고 다녀 아침·저녁으로 이를 대하여 기도하였다 한다. 즉 예관(신규식)은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한국지도를 보고 온 정신을 기울여 이를 주시하고 묵묵히 사색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천만 한국국민이 지금 일제에게 받고 있을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하였고, 조국 광복 후에 건설할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아울러 아무리 바빠도 매일 새벽과 밤이면 우리나라 개국의 성조인 단군의 신상(神像)을 향해 향을 피우고 두 차례 절하고 나서 묵념함으로써 하루 빨리 혁명을 완수해 조국을 되찾고 노예 상태 하의 동포를 구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극진한 예관(신규식)의 단군숭배는 대종교가 대한의 민족정신이 깃들인 종교로 한국민족의 부흥은 대종교의 발전과 병행된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며, 확신의 차원을 넘어 한국광복운동을 일종의 종교요, 신앙으로 인식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종교란 정신적 이념을 지주로 해 혁명에 헌신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단군봉례 즉 단군현양은 곧 민족독립의 실현이란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양상은 1910년대 단군정통의 역사의식 고양과 단군의식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대종교의 성장으로 인해 대종교에서 말하는 단군의 중광(重光)과 독립운동에서 말하는 광복을 일치시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 중 많은 수가 대종교를 믿었으며 비록 입교하지는 않았더라도 대종교의 단군의식을 받아들여 단군숭모 관념과 종교적 의식을 범민족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단군을 민족적 부조위(不佻位)로 인식하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믿음에서 상해에 도착한 뒤에도 대종교 포교에 주력하였으며, 매주 마다 교우들과 더불어 예배를 올렸다. 매년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과 10월 3일 개천절과 8월 29일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기념일에는 상해의 모든 교포를 모아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의 오욕을 되씹으면서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보다 확고히 다져나갔던 것이다. 또한 동북독군(東北督軍) 장작림(張作霖)이 일제의 요청으로 동삼성(東三省)에 있는 한국 교포들이 세운 대종교의 교당과 교포학교를 폐쇄시키고자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예관(신규식)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중 북양정부(北洋政府)의 국무총리 장요증(張耀曾)이 상해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여 장요증과 면담하게 되었다. 예관(신규식)은 그에게 동북에서 한국 교포들이 받는 학대와 이를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아울러 장작림에게 대종교의 전교당과 한인학교의 폐쇄조치를 중지시켜 줌과 함께 그 보호도 요청하였다. 예관(신규식)의 정성에 감동한 장요증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즉시 명령을 시달하여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둘째 선민의 공렬과 이기를 잊었다는 가장 중요한 실례로 우리 민족은 만난지형(萬難之衡)을 당해 중흥의 과업을 이룬 대한의 영웅이요 절세의 위인인 이순신을 잊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선조(宣祖)가 수레를 타고 피난하였으며 여러 주군(州郡)은 깨어지고 여러 장수들이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날 때 충무공(이순신)은 한 몸으로써 우뚝히 버티어 연전연승을 거두었음을 상기시켰다. 이어 역사에 전함을 인용해 이순신만이 왜구의 침범에 방비해 거북선을 만들었던 것을 높이 기렸다. 그의 사전 예비책 때문에 일본의 10만 수군을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만은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여 중죄인으로 취급하였던 과거의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선조의 과업을 정당하게 평가해 이를 본받아 기리는 마음자세가 되어 있지 않음을 비난하였다. 이어 간신이 활개치고 열사가 명분이란 허울 속에서 압살당한 무수한 사례를 열거하면서, 조야(朝野) 모두가 무수한 영웅과 인재를 꺾어 버렸던 우리의 과거사가 망국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음을 통언하였다. 평생을 두고 조국을 극히 사랑하였으며 거룩한 선조들을 추모하였는데 특히 이순신을 숭모하고 그의 정신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을 고취하고 국민을 각성키 위해 틈만 나면 이충무공(이순신)의 “바다에 맹서하니 어룡(魚龍)도 움직이고, 산에 맹서하니 초목도 알도다.”라는 시를 읊었으며, 충무공(이순신)의 영웅적인 전공을 기리곤 했다. 그밖에 시집 『아목루』중 「건국기원절후15일 이충무공 한산도기념[建國紀元節後十五日(十月八日)李忠武公閑山島紀念(第三百四回)]」이란 연작시를 지어 그가 세운 은공은 백세토록 잊을 수 없음과 만국이 지금 그를 가장 높이 추앙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충무공(이순신)에 대해 기리는 마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그리는 미래의 조국 상에도 투영되었으니 국권회복 이후 재건된 국가 모습 중 구국원훈인 이순신을 통제(統制) 즉 국권의 우두머리로 상징한 구상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관(신규식)은 “우리조상의 자손들로 어질고 명철한 분이 대대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충무공(이순신)을 드는 것은 충효와 문무로 국궁진수(鞠躬盡廋)한 것은 4천년 사이에 오직 공 한사람뿐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물론 그의 이순신에 대한 흠모가 지나친 면도 없지 않다. 이런 이순신 상이 생겨난 이면에는 이순신이 무엇보다도 대왜 항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승리를 쟁취한 무관이었다는 점과 그가 “문”도 겸비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인재가 이미 모두 꺾어 버림을 당하였는데 이기(利器)가 온전한 보존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선조들의 이기에 대해 논술하며 그 상실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은 철판으로 만들어서 거북이 등처럼 만들고 머리와 꼬리도 만들며 그 앞뒤에 모두 포를 장치하였고 그 좌우에는 고르게 포혈(咆穴)을 만들었으며 병사들은 배 속에 숨게 하여 배를 운행하면서 포를 쏘게 하였고 여덟 면에는 모두 창을 꼽았으며 진퇴가 자유로워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서 적선(敵船)을 불살아 버림으로써 승리하였다는 역사기록을 인용하여 그 뛰어남을 칭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기』를 인용해 조선의 전선은 철판으로 싼 것이 귀갑(龜甲)과 같은데 그것을 사용해 일본의 목조선을 대파하였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철갑선이 되며 조선인이 창조한 바가 된다고 한 평가를 들었다. 이처럼 타국인도 인정하는 선민들이 발명해 낸 훌륭한 이기 즉 거북선이며, 비행차(飛行車) 등 편리한 기기와 무기류들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습속에 의해 꺾여 버렸음을 밝혔다. 이어 삼국에서 고려,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상무정신이 쇠퇴하여 오히려 문을 높이고 무를 경시케 됨에 국방을 소홀히 한 결과 입국(立國)의 정신을 상실하고 급기야 망국의 지경에 이른 것임을 통탄하고 있다.
『한국혼』에서 그가 열거한 선민의 대부분이 역대 이래 이민족의 침략에 항거한 장군이나 의병이었던 점, 그리고 이기라고 지적한 것도 대체로 무리류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신라의 김유신·장보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강감찬·김방경을 열거한 뒤 임진왜란(1592) 당시 권율·곽재우·조천·김천일 등이 몸 바쳐 나라를 구했음을 지적해 두었다. 예관(신규식)의 영웅적인 선민에 대한 가치평가는 위난에 처한 국가를 위한 공업(功業)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민의 구국적 투쟁과 순국을 높이 평가하여 조국광복이란 당면과제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한 영웅의 실상을 한국의 역사, 즉 대한의 혼에서 찾고자 한 것이니 이런 입장은 신채호·박은식의 영웅관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국지정신(國之精神)”은 바로 “나라의 문헌”에 깃들어 있으니 이것은 국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국사를 잊었다 함은 곧 나라의 정신을 잊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슬프다!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는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고까지 단언하기에 이른다. 국사를 잊게 된 원인은 5천년 이래 수차에 걸쳐 당한 대외적인 침략에 있으며, 후세 역사가들이 조종(祖宗)을 멸시하고 외국에 아첨한 결과 국내의 사서를 무시하는 중국 중심의 전통사학 때문이었다고 파악하였다.
우선 우리의 5천년 이래의 경적(經籍)과 문자가 당한 화를 살피면, 처음에 당나라 총관(總管) 이세적(李世勣)이 사고(史庫)를 불태웠고, 두 번째는 원의 침략 당시 『고려사』를 깎아 버렸으며 세 번째는 견훤의 군대에 의해 신라의 경적이 소실되고 네 번째 연나라의 난리를 만나 기자의 역사가 흔적 없이 상실됨을 한탄하였다. 이 때문에 『단군사』·『단조사(檀朝史)』·『신지서운관비기(神誌書雲觀秘記)』·『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표훈천사(表訓天詞)』·『지공기(志公記)』·『도증기(道證記)』·『동천록(東天錄)』·『통천록(通天錄)』·『지화록(地華錄)』, 고흥(高興)의 『백제사』, 이문진(李文眞)의 『고구려사』, 거칠부의 『신라사』·『발해사』 등은 그 명칭만 남을 뿐 책을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게다가 고대 도의(道義) 교화한 경적(經籍) 문자 중 나라의 정수가 남은 것은 이단시하여 버리고 게재하지 않았으며 교린에는 낮추고 겸손함을 본분이라 하였던 사대사상으로 인해 국사가 상실되었음을 비판하였다. 결국 법도에 관한 변칙과 손익을 버리고 거울삼아볼 만한 것은 없애버린 것이 많고 그 중 심한 것은 고래의 사책(史冊) 중 외국을 배척한 것도 고치거나 삭제해 버렸다. 또한 개인의 저술 중 참된 것을 억눌러 전하지 못하게 하니 많은 개인저술이 세상에 펴지지 못하였으니 그 태반이 상실되었음을 탄식하였다. 또한 근세의 이익·정약용·유형원·박지원 등 여러 선철(先哲)들이 찬술한 역사·지리·정치·학술 등에 관한 위대한 논술과 걸작들도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던 것을 지적하였다. 단지 많은 책이 전할 경우는 한 성(姓)의 가승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노비문서일 따름이라고 통언한 것이었다. 이런 문헌상실로 인해 조종을 추념(追念)하고 선열을 빛내고 후인들을 격려하려 해도 잔편단간(殘編短簡)으로 완전을 기할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구학문·신학문을 하는 모두를 향하여 자국의 역사는 모르나 중국의 역사는 잘 알고, 서양의 문명은 말하면서 자국의 문명역사는 모르는 사대사상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예관(신규식)은 구학을 한 선생들은 도읍의 건설을 말할 때 제요도당(帝堯陶唐)의 산동(山東) 평양(平壤)은 알아도 신조(神朝) 단군의 평양은 모르며,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말할 수 있어도 동명성제(東明聖帝) 고주몽(高朱蒙)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그 사대사상의 병폐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신지식의 학자는 마니산의 제천단(祭天壇)은 몰라도 애급(이집트)의 금자탑을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새로운 기구를 말하되 정평구(鄭平九)가 창조한 비행기는 몰라도 멍물이 발명한 기구(氣球)는 과장하여 말하며 인쇄활자는 반드시 독일과 화란(네덜란드)만 말하지 그보다 수백 년이나 앞서서 창조한 신라나 고려는 아는 이가 적다고 안타까워하였다. 또한 위인을 말할 때 워싱턴·넬슨만을 들었지 우리나라 기왕의 철인걸사(哲人傑士)는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도 이들 외국의 훌륭함을 숭배하지 않는 바 아니나 다만 우리 동포들이 자기의 것을 버리고 남의 것만을 좇는 것을 원치 않을 따름이라고 단언하였다.
“소양(素陽: 주자)에게 무릎 꿇고 감히 스스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겨우 남이 뱉은 찌꺼기의 침을 핥는 것이며, 온몸을 백조(白潮: 신문학의 유파)에 적시는 것은 그 껍데기를 입어보기 전에 먼저 나의 정신을 장사 지내는 것이다. 원수가 멸망되지 않는다면 주자의 죄인이 될까 두려우며 문명을 몽상만 한다면 끝내 서양인의 좋은 벗은 되지 못할 것이다.”
즉 무비판적인 신·구학문에 대한 맹종을 정신의 죽음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대사상과 존화사관에서 벗어나 신채호가『대동사(大東史)』를 기초하고 박은식이 광문회(光文會)를 창설하고 나철이 대종교리를 밝혔으며 주시경은 조국의 문어(文語)를 연찬(硏鑽)하는 등 국사와 한국혼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받아 국혼(國魂)이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분석해 본다면 그가 지향했던 근대화의 방향이 바로 동도서기론적 입장에 섰음을 간파할 수 있다. 즉 구학의 오류에 대한 비판과 그를 넘어서 우리의 본연의 정신과 역사를 찾아 이를 기초로 삼아야 함을 전제한 그 위에 신학에 대한 맹종적 입장을 견지하고 그 중 장점을 취해야만 비로소 근대화도, 복국도 가능하리라는 신념을 견지하게 되었다.
신규식의 역사인식은 한국혼, 대한의 혼 사상에서 출발한다. 그의 국혼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추측컨대 단군에게 이어 온 민족정신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대한의 혼은 국사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국사를 한국혼의 표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국사관은 지도상의 대한이란 칭호는 망하더라도 대한의 혼과 그 표징인 국사를 잊지 않으면 대한은 되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사를 잊음”이 망국의 한 원인이므로 국사를 되찾아 대한의 혼을 국인 각 개인의 마음에 보존한다면 외형적인 대한도 복국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관(신규식)은 거듭 강조하기를 오늘은 노예 밑에 노예가 되고 옥 가운데 옥에 빠져 있어 그대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흐리멍덩하고 태만하고 거칠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면 장차 나라가 망할 뿐 아니라 멸종의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단군의 문명은 이미 노장들의 머리 속에는 관념조차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의 신무천황(神武天皇)과 명치천황(明治天皇)만이 우리 어린 자제들의 머리 속에 차지하고 있는 것을 한탄하고 분명히 우리의 조상,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글, 우리의 말인 데도 감히 국조니 국사니 국문이니 국어니 하지 못하고 겨우 선사(鮮史)·선문(鮮文)·선어(鮮語)라고 밖에는 부르지 못하니 이러다가 앞으로 선인(鮮人)이란 명사도 또한 절멸되고 말 것이라고 통한하였다. 이와 같은 원통하고 분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의 얼을 얽어매어 흩어지지 않게 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관(신규식)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실천적으로 발휘되었다. 이를테면 광개토왕의 쇄보(灑寶)가 안휘의 정씨(程氏) 집에 소장되었다는 말을 듣고 1911년 북경에서 알게 된 정가(程家) 성군을 통해 그 유적을 보고자 시도한 일이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던 것이다.
또한 1915년 셋째 아우 건식(신건식)이 항주(杭州) 적산(赤山) 부근에서 고려사의 옛터를 발견한 일이 있었다. 이 절은 지난날 항주의 명승고적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 지은 것인데 매우 광대하고 화려해 사방 각지에서 불공 드리러 오는 이가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져 울타리와 무너진 담벽 등 만이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예관(신규식)은 “옛사람들이 남긴 유적을 망쳐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자손된 사람들의 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큰 돈을 모금해 절을 다시 짓고 친히 ‘고려사’란 세 글자를 휘호해 편액을 걸고 「티없이 이 강산과도 같이 고려사를 세우니, 사시로 향불을 피우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왕을 배하도다」그리고 「비로서 깨여 천년 옛 불조를 우러러 만리길 서쪽나라에 와 왕손 눈물짓도다」라는 글을 지어 영련을 걸게 하니 절의 모습이 일신하여 그때부터 고려사란 이름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예관(신규식)은 또 칠언율시 한 수를 지어 감회를 읊기도 하였다.

적산에 해가 기울 무렵 절간으로 찾아오니
현회의 서쪽 숲은 마치 산골짜기 마음 같도다.
석상은 이미 천년이나 서서 불조를 우러러 보고
정처 없이 만 리 길을 떠나 옛 왕손을 울리도다.
절의 향불 피우며 평생의 복을 비르니
한결같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깨끗하건만,
다만 몹시 견디기 어려워 고래를 돌이켜 보니
딱하게도 몇 칸 낡은 묘당이 남아 있구나.

신규식은 일제에 대한 투쟁을 상대적인 의미에서 일제가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과 빼앗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지도상의 대한,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영토를 빼앗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인정하고 후자, 즉 빼앗을 수 없고 빼앗겨서 안 되는 정신적인 것 이를테면 국가정신, 국혼을 그 대상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므로 대한의 혼인 정신적인 유산을 기반으로 빼앗긴 것 즉 물질적인 대한의 국토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 당면한 민족의 과제였음을 통감하였다. 따라서 그의 국사관은 이러한 과제에 잘 부응하는 사상이 될 수 있었다.
넷째로 지적한 건망증인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를 잊음이란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을 잊었다는 의미다. 먼저 삼국 이래 무수한 왜구의 침략을 지적하고서 임진년에 우리를 유린하였고 을미년(1895)에는 명성왕후를 시해했으며 1904~5년에는 우리 주권을 빼앗아 버렸고 1907년에는 우리 군주를 협박해 양위케 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의병을 학살하고 1910년 마침내 우리를 멸망시켜 우리 동포를, 소·말로 만들어서 완전한 식민지로 떨어지게 했음을 열거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회유·무력·금력에 눈이 어두워 이런 치욕을 잊었음을 병통해 하였다.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주검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할 것이며 치욕을 아는 자의 피를 알지 못하니 어찌 치욕을 씻어 버릴 피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아 동포들이여! 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하여 일제에게 받은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장투쟁론을 밝혔다. “대개 한 사람의 충성과 의분의 기개로도 족히 사나운 오랑캐를 삼킬 수 있거늘 하물며 애국의 마음으로 치욕을 잊어버리지 않은 자에 있어서랴.” 하는 확신을 가지고 몸이 아직 썩지 않고, 기가 아직 꺾이지 않고 피가 아직 식지 않고 마음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치욕을 앎으로써 싸움에 이길 수 있다고 동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을미년(1895) 이후 일제에게 주권을 침략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날들을 열거하면서 그때 받은 치욕을 상기시켰다. 또한 1905년 이후 순국한 여러 선열들의 피를 잊어서는 안됨을 강변하였던 것이다. 민영환이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으로 자결한 사건을 필두로 군대해산 시 대대장 박승환(朴勝煥)도 피 흘림으로 천백세 영웅스러운 귀신이 되었으며, 안중근은 홀로 하얼빈에서 적을 죽여 참으로 통쾌하고 위대한 일을 완수한 뒤 죽음의 길을 찾았던 사실을 열거하면서 이렇듯 선열들이 나라 위해 바친 피 흘림의 값을 깨닫고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옥균의 정치개혁을 기울어 가는 국권회복을 위한 혁명으로 판단하고 그를 혁명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김옥균은 명문귀족의 자손으로 명예와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자인데 어찌 모험을 하고 난당의 악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정치개혁을 주창하였겠는가 질문하면서 혁명의 선구자인 그가 일신의 부귀영화보다는 국가발전을 우선시한 점을 기렸다. 따라서 그가 흘린 피는 잊을 수 없으며 그를 낮추는 평가도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신규식 자신의 정치 개혁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는 것으로 망명 이후 그가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할 수 있는 사상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추측되며 서구시민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를 수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김옥균이 “문명개화”란 서구중심적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전통적인 종래의 문물을 모두 비판하고 구래의 학문적 전통도 미개화란 명목으로 경시한 점과는 달리 예관(신규식)은 “동도(東道)”를 중시하는 입장에 섰음은 급진적 개혁의 미진한 점을 보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성장배경인 전통유림적인 면모가 급진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의 방향에 서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혹자는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고들 하지만 과거 유림과 사문(沙門)에서 대대로 인물이 나왔음을 지적하고서 산천의 옛모습이 그대로인데 인물이 왜 없겠는가 반문한다. 태백산 밑 우리의 아름다운 산수와 우리의 빼어난 남녀 중에 반드시 인물이 있어 사명대사·이율곡(율곡 이이)·조헌·안중근 같은 이가 뒤를 이을 것이며 한반도의 크롬웰과 단테가 일어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규식은 망국의 원인을 제거하고 조국광복을 위해서 선치해야하며, 선치하면 반드시 유혈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국제 정세를 언급하면서 그에 따른 구국책을 제시하였다. 예관(신규식)은 “오늘의 세기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철혈세계(鐵血世界)라 파악하고 서로의 경쟁과 세력다툼으로 대전국(大戰局)이 급박했음을 인지하고 이런 세계조류에서는 극단의 사회주의나, 극단의 이상주의는 잠시 접어두어야 하며… 방법은 반드시 현실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널리 세계 각국의 역사를 보면 흥망의 사실이 덧없이 반복되고 있으므로 국민들에게 애국심이 남아 있어 일치 단결해 백번 죽어도 급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사람의 마음은 죽지 않는 것이니, 비록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더라도 아직 망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의미이니 우리들의 신성한 역사가 또 다시 빛을 발휘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궐기해서 건망을 회오하여 영원토록 잊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더구나 우리민족의 밑바탕이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을사·병오·정미 등 의병이 봉기하여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 극단의 일제 압력에도 민심이 굴하지 않음을 보였으며 극단의 궁핍 속에서도 국채보상운동(1907)에 적극 참여한 국민들의 사기가 존재함은 이를 예증한 것이리라.
또한 나라 세움은 정신에 있는 것이지 넓고 크고 많은 것에 있지 않음을 논하였다. 즉 이백조의 인도인은 영국에 병합되고 7억 평방리의 중국은 일본에 곤욕을 당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구주(유럽)의 몬테가로(몬테카를로)는 겨우 6백 평방리 인구 25만인데도 분용(奮勇)과 선전(善戰)으로 굴하지 않는 것으로 이름 높고 오스트리아에 항거한 세르비아와 독일에 항거한 페르샤(페르시아)와 독일이 혼자 열강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분명한 증거이므로 우리의 이천만 인민이 정신을 차리면 나라 찾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임을 믿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전도에 희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편안히 앉아 스스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런 경우 인민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국가를 위해 앞으로의 일을 꾸민다면 그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주로 하지 않겠는가. 이미 이것으로 전체와 근본을 삼는다면 서로 전개하는 주장은 비록 다르다 해도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예관(신규식)은 논한다. 그리하여 단일의 집합점이 바로 국가민족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앞서 본 망국의 원인을 깨달아 건망을 회오하여 대한의 혼을 보존하고 만인이 일치단결해서 국가와 민족을 전제와 근본으로 하되 대다수의 국가이익과 국민의 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집합점인 국가민족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목표달성을 위해 가장 해결키 어려운 것이 사견을 희생시키고 인심을 단결해 통솔하는 문제인데, 진실로 오늘날 인물 중 통솔자를 구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인물 중 한마음으로 결속시킬 자를 구하는 방안도 있는 것이다. 이를 통솔할 이념적 지도자로 역사 속의 인물인 개국시조 단군을 주재(主宰)로, 구국원훈의 이순신을 통제(統制)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개국시조와 충효와 문무를 갖춘 정신적 지도자 아래서 민족주의를 이상으로 조국광복에 뜻을 두고 실력을 배양하면서 신분·지위·교파·남녀노소·사상을 불문하고 동지가 되어 공복이 될 만한 자를 선출하여 그에게 일임케 하되 감독·애호·찬조·신종할 것이며 다만 부당한 것만을 배척해야 하며 시기하거나 알력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두 법칙 밑에 다스림을 받도록 하여 아무도 이를 못 벗어나도록 하자는 것이 그가 구상한 국가민족주의였다.
‘실력준비’운운하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국민들로 하여금 상실, 표탕한 정신을 회복시킨 다음 다시 올바르고 굳은 의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며 십 년간 끌어 모으고 십 년간 교훈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그가 주장하는 ‘국가민족주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대개 국민주권론에 입각하여 개인의 사상이나 주장의 차이도 인정하면서도 민족과 국가를 전제로 하는 합일점을 찾는다는 것, 선거에 의해 공복을 뽑는다는 것, 법치를 주장한 것 등에서 시민적 민족주의 국가를 구상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혼』을 통해본 그의 민족주의 핵심은 민족과 국가 즉 민족국가인 것이며, 이러한 면은 당시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하에 놓여 있어 당시의 당면 과제인 복국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을 중시하며 주창된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우선 잊혀져가는 대한의 정신이 담긴 국사를 재정립하고, 재평가하여 이를 보존해야 하며 그 속에 이어온 선조의 종법과 유혈 항쟁의 기백을 되살려 무력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 그의 독립사상의 요체다.
이상에서 본 『한국혼』에 나타난 신규식의 사상과 문장은 이 책을 엮어 출간한 민필호의 표현을 빌리면, 독일 피히테의『독일 국민에게 고함』, 프랑스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중국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와 비견된다. 신규식의 인물상을 쓴 오세창은 예관(신규식)의 사상 및 불타는 애국열이 담긴 『한국혼』은 우리 민족 4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전통을 세계에 선양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진로를 교시한 사상이며 혁명운동의 길잡이로서 ‘자존자신(自尊自信)’·‘자력갱생(自力更生)’·‘일치단결’·‘분발도강(奮發圖强)’을 부르짖은 절실한 민족의 수신서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만큼이나 예관(신규식)의 사상과 행적은 민족정기의 함양을 위한 것이 아님이 없고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절규가 아닌 것이 없다. 그의 생애는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범민족적인 대동단결이 구국운동의 척결이라 여긴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단결을 염려하여 무언의 당부를 남기면서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맺음말

예관 신규식의 생애는 1898년부터 교육과 학회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한 이래 1922년 9월, 무정부상태에 빠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혼란을 비통해 하면서 순국할 때까지 전후 20여 년 동안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의 일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시기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망명이전 1910년까지로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한 시기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신분으로서 1905년 의병거사 계획추진과 1907년 일제에 의해 실시된 구한국군의 해산조치에 불응한 무력시위 등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민족자존과 자력갱생의 실천방안으로 대한협회에 가입하였으며, 문동학원·덕남사숙을 건립, 경영함과 아울러 중동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인재양성 및 실력양성을 통한 교육구국활동을 폈다. 또한 식산흥업책의 일환으로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공업계』란 잡지의 창간을 도와 실업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제2기는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 전까지 독립운동기지를 확립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때다. 신규식은 독립운동의 불모지인 상해에 망명하여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한 뒤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혁명가들의 인식을 제고시켜 그들을 지지세력으로 확보하고 협력관계를 마련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동제사·신아동제사·대동보국단·신한혁명당 등 독립운동단체를 차례로 조직하였고 대동단결선언도 주도할 수 있었다. 또한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유학 등을 주선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제3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를 위해 활동한 시기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국무총리대리 및 외무총장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1921년 11윌 임시정부의 특사로 중국 호법정부를 방문해 임시정부의 정식승인과 독립운동 원조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중국혁명가들과 맺어놓은 친밀한 유대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후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 정부의 관계를 긴밀히 할 수 있는 초석이 된 것이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임시정부를 분열이나 갈등 없이 지속시키려는 의도에서 측면 지원의 입장으로 일관한 것으로 보인다.
신규식의 사상은 첫째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인 단군을 민족정신-한국혼-의 모태로 여기는 단군숭배사상이었다. 둘째, 조국광복이란 민족적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구체적이며 실현가능한 영웅의 실상을 국사, 즉 대한의 혼에서 찾고자 하는 영웅사관을 주장하였다. 셋째 그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은 “한국혼” 즉 “대한의 혼” 사상에서 비롯된다. 즉 한국혼의 표징은 국사이므로 비록 지도상의 대한은 망했다고 해도 국사를 잊지 않는다면 대한은 살아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넷째 독립운동방략으로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다. 즉 일제에게 받는 치욕은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유혈투쟁이 선열의 피를 이을 우리의 책임임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 복국책으로 국가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는 국가와 민족을 전제로 대다수 국리와 민복에 근본을 두고 법칙 하에서 사상·연령·계급·직업의 차별을 뛰어넘어 모든 동지의 결속으로 대동단결하면서 대한의 혼은 보존하고 실력을 배양하면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국민주권론·법치주의·입헌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근대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규식은 독립운동가로서는 선구적으로 상해에 망명하여 중국혁명의 중요성을 한국독립과의 연결선상에서 인식하고 중국혁명에 가담하였다. 그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동제사 등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한혁명당과 대동단결선언의 망명정부 계획은 이후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규식은 선구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통해 1910년대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활동터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며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연보

1880. 1. 13. (1세)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신용우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본관은 고령. 시조 신성용의 25대손, 신숙주의 17대손임.
1895 동년군(소년대) 조직
1896 (17세) 조정완 여사와 결혼
3개월 후 상경
1897 (18세) 관립한어학교입학, 만민공동회운동 참여
1900. 9. 육군 무관학교 입학
1901. 향리에 문동학원 설립에 참여
1902. 7. 6. 육군보병 참위(9품)에 임관
1903. 3. 22. 진위대 제4연대 제2대대 견습
1903. 7.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받음
1903. 덕남사숙 설립
1904. 4. 진위대4연대 1대대 견습
10. 육군무관학교 견습
1905. 3. (26세) 6품으로 승급
1905. 4. 시위대 3대대에서 승급
1905. 말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 반대운동에 동참코자 한 의병거사의 실패로 자살기도. 생명은 건졌으나 오른쪽 눈의 시신경 마비
1906. 1. 정3품으로 오름
1906. 4. 시위 제3대대에 배속
부위로 진급
1907. 8. 군대해산식 이후 대한문까지 진출
9. 3 해관부위직
1908. 5. 영천학계 결성
1908. 7. 대한협회 가입
9. 대한협회 평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 실업부 부원으로 임명됨.
1909. 1.『공업계』잡지 발간
3. 중동야학교 제3대 교장 취임
7. 대종교 입교
1911. 초봄(32세) 상해로 망명
중국 동맹회에 가입
10. 신해혁명(무장혁명, 1911)에 진기미를 따라 참가
1912. 5. 20. (음) 동제사 결성.『한국혼』집필 시작
1912. 말~1913. 초 신아동제사 조직
7. 진기미와 함께 원세개 타도 운동인 2차 혁명에 참가
12. 17. (음) 상해 영덕리에 박달학원 설립
1914. 남사, 상구중국학생회에 가입
7. 2. (음) 박달학원 내 구락부조직, 규칙제공『한국혼』탈고
1915. 3. 신한혁명당 조직
1915 항주 적산 부근 고려사 복원
1916 강화동락회 조직
1917. 7.(38세)「대동단결선언」발표
8.「조선사회당」의 명칭으로 스웨덴 스톡홀름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의 독립지원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냄
1917. 9. 배일잡지 반월간『진단』발행
11.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원조를 요청하는 정보 발송
1919. 3. 하순 여운형·선우혁 등과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 설치
4. 30.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됨
5. 6.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 구급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선출됨
1919. 7.14.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직 사임
11. 3.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취임
1921. 3. (42세) 협성회 조직 선언서 발표
5. 16. 국무총리대리에 취임
26. 외무총장 겸임
11. 3. 광동특사로 손문 접견 외교문서 중정
18. 광동정부 전례식 참가 임시정부 대표로 공식접견, 공식적인 외교성립
12. 22. 광동의 신신호텔에서 각국 영사 초대연회를 마련하여 독립운동 선전
1922. 3. 20. 시정방침 발표, 내각 사직서 제출
5.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움
9. 25. 순국. 유해는 상해 흥교만국공묘에 안치
(음 8.5.) 비문은 조완구가 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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