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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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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 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 『독립운동가 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장규

머리말

우리 한민족은 단국 성조의 개국 이래 주변의 이민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켜온 우리의 금수강산과 민족자주정신을 유지하고자 피로써 항쟁하였다. 수와 당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인들의 항쟁, 최씨 무인정권과 삼별초의 몽골과의 항쟁, 임진왜란(1592) 시에 전국각지에서 기병한 의병들의 활동 등은 그 일례인 것이다.
구한말에 들어와 강화도 조약(1876)이래 일제의 계획적이고도 노골적인 한반도에 대한 침략행위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악랄하고도 잔혹한 것이었다. 또한 그 결과로 우리 한민족은 국토와 국권을 상실하는 민족 최대의 수난을 겪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또다시 전 민족적인 대외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은 한민족의 자주민임과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이 3·1운동(1919)에 나타난 민족정신을 흡수, 통합하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추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활동은 만주지역에서의 무장독립군의 활동과 함께 항일독립투쟁의 역사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백범 김구는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首班)으로서 한평생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그리고 해방직후에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한분이었다. 구한말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창의」의 대의를 내걸고 조선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내고자 일어난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의 선봉장으로, 의병으로, 또 한편으로는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에 앞장서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인물이었다. 3·1운동(1919) 이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직을 맡으면서부터 온갖 형용하기 어려운 고초와 숱한 역경 속에서도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해방 이후에도 혼란과 분단의 소용돌이 정국에서 대내외의 역경과 만류, 그리고 70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한민족 만에 의한 진정한 민족자주통일과 독립정부를 수립하고자 성스러운 투쟁을 계속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우리 민족사상 대의(大義)의 화신(化身)이며 영원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목(巨木) 백범 김구에 대한 연구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이제까지 많은 선행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업적들은 크게 백범(김구)의 독립운동 과정 중의 활동, 그 중에서도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낙양군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거나 귀국 후의 백범(김구)의 건국활동, 백범(김구)의 사상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전 생애를 조명한 전기류 등도 일부 간행되어 있다.
본 책은 기존의 연구업적을 중심으로 백범(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백범(김구)의 생애를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1)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국내 활동기, 2) 상해 망명시기, 3) 귀국 후의 건국활동 등이 그것이라 하겠다. 그럼으로써 백범(김구)이 어떠한 생각과 정신으로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나 하는 점과 그가 대항일독립투쟁의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예한 학문과 투박한 글 솜씨로 인하여 행여 백범(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의 업적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보잘 것 없는 이 책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 주시고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고 바로 잡아 주신 추헌수 교수께 깊이 감사드린다.

제1장 가계와 청년기의 수학

1. 출생과 가계

백범 김구는 고종 13년(1876년) 음력 7월 11일(양력 8월 29일) 자시(子時 : 23시~01시 사이의 시간)에 태어났다. 그곳은 황해도 해주에서도 서쪽으로 80리가량 떨어진 백운방 텃골이라는 가난한 농촌지역이었다. 아버지 이름은 김순영(金淳永)이며, 어머니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로 이름은 곽낙원(郭樂園)이었다. 아버지의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하다가 24살 때에 14살의 곽(곽낙원) 씨와 결혼을 한지 3년 만에 백범(김구)을 낳았다. 어머니 곽(곽낙원) 씨는 푸른 가시가 돋친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톨을 얻어 잘 간수한 꿈을 꾼 후에 백범(김구)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범(김구)의 앞날이 험난할 것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백범(김구)의 어머니는 유례없는 난산으로 진통이 시작된 지 7일 만에야 해산을 할 수 있었다.
백범(김구)의 첫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본관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으로부터 헤아려 33대손이니, 백범(김구)의 집안은 족보상으로는 분명 양반이었다. 그것도 한때 큰 권세를 누렸던 가문이다. 고려 원종·고종 때의 명장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은 경순왕의 8대손이며 그 충렬공의 현손인 익원공이 백범(김구)집안의 시조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익원공의 21대손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인조반정(1623) 때에 공을 세운 김자점이 효종 때에 역모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백범(김구)의 11대조부터 해주의 텃골로 피신하였던 것이며, 언제부터인가 군역전을 일구게 되면서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된 것이다.
어린 백범(김구)이 주변의 양반들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떠한 수모를 받았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백범(김구)이 상놈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얼마나 뼈저린 한을 갖고 있었는지는 그가 성장한 후의 몇 가지 경우에 잘 나타나고 있다.
해주에서 과거를 보게 된 주된 이유가 상놈의 신분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부친상을 당했을 때 “만년에나 강 씨, 이 씨에게서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했더니….”라고 하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26년 12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 취임권고를 받았을 때조차도, “해주 서촌의 일개 도존위(都尊位)의 아들인 나같이 미천한 자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사양하기도 하였다.

2. 유·소년 시절

백범(김구)의 어린 시절은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가난과 비애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백범(김구)은 자신의 이러한 어린 시절을 『백범일지』에서 “가정이 극빈하여 옷을 해 입지 못하고 14살이 될 때까지 바지를 입지 못한 채… 할아버지의 커다란 저고리를 저고리 겸 바지 겸 외투로 입고 다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일기를 통해서 어린 시절 백범(김구)의 집안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살림에 산모가 잘 먹을 수도 없어서 백범(김구)은 항상 젖이 모자랐다. 이에 암죽으로 대신하거나 혹은 동냥젖을 먹기도 하였다. 특히 먼 일가인 핏개댁이라는 아주머니는 한밤중이라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백범(김구)에게 젖을 주곤 하였다. 백범(김구)은 장성한 후에 이 일을 잊지 않고 핏개댁의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감사의 뜻을 표하곤 하였다.
4살 때인 1879년에는 천연두로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다. 이때 얼굴에 돋은 고름을 어머니가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빼내었는데, 이 때문에 백범(김구)의 얼굴에는 굵은 마마자국이 남게 되었다. 다음해에 그의 집안은 강령 삼거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백범(김구)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어 이를 옮겨 본다.

낮이면 부모님은 들일을 다니시거나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가장 가까운 신풍(新豊)의 이 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인 아이도 있었고, 두세 살 위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주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억울하게도 한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 생원 집으로 갔다.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18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중략)…
역시 그 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하기도 하여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먹자 하고 그 스무 냥을 모두 꺼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 아버지에게로 가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먹기 때문에 자못 심통이 나서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것이다.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더니 회초리로 후려갈기기 시작했다.…(중략)…
한번은 장맛비가 많이 내린 통에 근처 샘들이 솟아서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과 파란 물감 등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우러지는 모양을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기도 했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 백범(김구)의 성격은 퍽 대담하고 솔직하였다. 하지만 친한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그의 과묵한 성격형성에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찌들대로 찌든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백범(김구)은 9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문을 익혀 어른들 앞에서 이야기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어깨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모두 익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체계적인 공부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백범(김구)은 12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백범이 글공부를 하게 된 데에는 뼈아픈 사연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집안 문중에 혼인하는 집이 있어 일가 중의 할아버지 한분이 서울에서 사다가 간직해 둔 관(冠)을 쓰고 새 사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길 가던 어떤 양반이 보고 관을 산산이 부서뜨린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는 김씨 문중에서 다시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백범(김구)은 누구는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를 캐물었다. 그리고 백범(김구)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이와 같은 양반들로부터의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임도 알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자신도 과거에 급제하여 상놈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또 양반들로부터의 멸시를 면해보고자 글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글공부에 뜻을 둔 백범(김구)은 먼저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결심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자기 집 사랑방을 서당으로 바꾸고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의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 새로이 서당을 연 것이다. 글공부를 하게 된 백범(김구)은 기쁜 마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같은 서당 학생들 중에서 글 실력이 가장 뛰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백범(김구)은 일시 공부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중풍을 잘 다스리는 의원을 찾아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 전역을 돌아다니셨다. 그러던 중 천만다행으로 아버지의 병에 차도가 있어 어느 정도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백범(김구)의 부모님은 배움을 갈망하는 아들에게 어려운 살림에서도 계속 서당에 다닐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백범(김구)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땅문서·소장(訴狀)·축문작성·편지쓰기 등 실용적인 것들도 틈틈이 공부했다. 하지만 백범(김구)은 같은 상놈들 속에서 문장이 되고 문중에서 촉망받는 존위 같은 직책에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통감(通鑑)』·『사략(史略)』에 나오는 진승(陳勝)의 「왕후장상녕유종호(王候將相寧有種乎)」(왕족,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을까)라는 말이나 중국 천하를 호령했던 유방(劉邦)과 한신(韓信)의 지략과 의기에서 자신의 장래를 꿈꾸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15살이 되던 해에 백범(김구)은 학골에 사는 정문재(鄭文哉)라는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한문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백범(김구)은 기쁜 마음으로 매일 험한 산길을 오가며 과문(科文)의 초보인 「대고풍(大古風)」·「십팔구(十八句)」와 학과로 「한당시(漢唐時)」·『대학(大學)』·『통감(通鑑)』 등을 열심히 배웠다.
정문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지 2년이 조금 넘은 1892년 해주에서는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가 되어버린 임진경과(壬辰慶科)가 시행되었다. 백범(김구)은 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말 과거제도의 문란은 극에 달해 있었다. 따라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장원급제와 진사급제는 이미 돈 있는 양반들의 횡포로 인해 미리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과거 시험에 응시한 백범(김구)의 낙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9살 때부터 8여 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진사가 되어 상놈의 한을 풀어보고자 했던 백범(김구)의 신념은 결국 헛된 희망에 불과했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과거와 자신의 신분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감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한편, 아버지의 권유로 『마의상서(麻衣相書)』를 통해 관상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백범(김구)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 주었을 뿐이다. 자신의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귀격(貴格), 부격(富格)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천격(賤格), 빈격(貧格)같은 흉격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범(김구)은 『마의상서』중의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라는 한 귀절로 마음의 울분을 달랠 뿐 이었다. 즉 백범(김구)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놈의 운명을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의상서』 그 어디에도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이에 실망한 백범(김구)은 『손무자(孫武子)』·『오기자(吳起子』·『삼략(三略)』·『육도(六韜)』등의 병서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의 나이 17. 양반집 자제였다면 벌써 과거에 급제할 나이였지만, 해주 산골의 백범(김구)에게는 전근대적인 신분적 예속과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그 어디에서도 울분의 분출구를 찾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일가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틈틈이 익히며 끓어오르는 울분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제2장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抗日救國運動)

1. 동학(東學)에의 입도와 활동

백범(김구)이 과거에 낙방한 뒤 실의와 좌절 속에서 병서를 읽으며 마음의 울분을 달래고 있을 1892년 말경 황해도 해주 일대에도 이미 동학에 관한 많은 기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동학은 철종 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동학은 유(儒)·불(佛)·선(仙) 3교의 장점을 취하여 서학(西學), 즉 천주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교리에는 천주교나 민간의 무속신앙에서 받아들인 요소도 있었다. 특히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압박받고 있던 평민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19세기의 조선 사회는 유교적인 지배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 그리고 서구 세력의 무력적 위협과 종교·사상적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서구 열강의 세력 침투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한 경제력의 파탄은 일반 국민들의 생활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동학은 신분체제의 폐지와 인간평등주의를 기본교리로 내세웠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 등 강력한 사회적 개혁을 표방하는 등 민중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 교세가 급속히 성장해 가고 있었다.
무엇 하나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백범(김구)은 동학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얼마 뒤 백범(김구)은 해주일대에서 기인으로 소문이 파다한 갯골의 동학도인 오응선(吳膺善)을 찾아 가기로 결심하였다. 백범(김구)은 남들이 하는 얘기대로 누린 것,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목욕재계한 뒤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1893년 정초에 오응선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오응선의 집에 당도한 백범(김구)이 주인을 찾았다. 잠시 뒤에 오응선이 직접 나와 백범(김구)의 공손한 인사에 역시 공손하게 답례하였다. 상놈으로서의 천대와 유교적 통념 속에서 살아온 백범(김구)은 크게 당황하였다. 백범(김구)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러한 대우는 당치 않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응선은 동학도인은 빈부귀천에 차별을 두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한다고 하면서 백범(김구)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백범(김구)은 동학이 무엇인가 알고자 하여 왔다고 답하였다. 오응선은 백범(김구)에게 동학의 내력과 도리를 설명해 주었다. 백범(김구)은 그 중에서도 동학의 평등주의에 관한 설명에 깊은 관심을 갖고 경청하였다. 백범(김구)은 평등주의야 말로 상놈의 한을 풀 수 있는 획기적인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도할 뜻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동학에 입도한 후 백범(김구)은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익혔다. 동시에 포교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매사에 성실한 백범(김구)의 태도는 여기에서도 나타나서 입도한 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연비(聯臂 ; 포덕하여 얻은 신도)가 수백 명에 달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이때에 [아기 접주]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고 백범(김구)의 아버지까지 입도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수(金昌洙)]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은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도 지역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893년 말경 백범(김구)은 황해도 도유사(道儒使)의 한명으로 선발되어 충북 보은에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대도주(大道主)를 만날 수가 있었다. 1893년 갯골의 동학도인 오응선과 최유현 등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공함을 받고 대도주를 찾아갈 도유 15명을 선발하였다. 백범(김구)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동학에 대한 열성을 높이 인정받아 15명 중의 한명에 선발된 것이다.
백범(김구) 일행이 보은에서 최시형 대도주를 만나 연비명단과 가지고 온 예물을 제출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며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학사(東學史)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보고가 들어 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이 군사를 일으켰으며 어느 고을에서는 동학도인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관리들의 횡포가 몹시 심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해월(최시형)은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라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정세의 추이를 관망해 오던 해월(최시형)의 이 한마디는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의 동원령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대접주들은 해월의 이 말이 혁명군을 일으키라는 명령으로 생각하고 각자 자신들의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백범(김구) 일행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접주 첩지를 받고 해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1894년 4월 초 백범(김구)은 [팔봉접주(八峰接主)]라는 첩지를 받고 황해도로 돌아왔다. 백범(김구)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 지역의 동학도 인들도 군사를 일으키자는 의견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황해도 지역 15명의 동학 접주들과 여러 우두머리 도인들은 해주 죽천장(竹川場)을 총 소집장소로 결정하고 각 지역의 동학도 인들에게 봉기를 명하는 편지를 발송하였다.
백범(김구)은 자신의 부대 이름을 「팔봉접(八峰接)」이라고 명하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백범(김구)의 휘하에는 총을 가진 사냥꾼 출신들이 많이 모여 들어 약 700여 명의 무장된 군사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백범(김구)은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고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며칠 후에 동학군의 총사령부에서 해주성을 공격하여 탐관오리와 왜놈을 죽인다는 것과 백범(김구)을 이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의 작전계획이 하달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백범(김구)은 7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1894년 9월 해주성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총격에 놀란 동학군의 후퇴로 해주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한 백범(김구)은 해주에서 80리가량 떨어진 회학동(回鶴洞)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것은 장교 경험이 있는 사람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으로서 사격술 및 재식훈련 등 실전에 필요한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범(김구)은 정덕현(鄭德鉉)과 우종서(禹種瑞) 두 사람을 군사참모로 영입할 수 있었다. 백범(김구)은 이들의 건의에 따라 군대를 구월산으로 옮기고 재기를 위한 준비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군에 대한 계속적인 추격과 수색, 동학군내의 세력다툼에 실망한 백범(김구)은 동학군에서 물러나와 정덕현과 함께 잠시나마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백범(김구)이 자신의 신분에 대한 극복과 과거 시험에서 직접 체험한 정치 제도의 부패상 등 동학 혁명을 통해 극복해 보고자 했던 노력은 일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비록 동학군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지만, 동학군에의 참여와 선봉장으로서의 활동은 그의 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즉 [척양·척왜], 인내천으로 대표되는 [만민평등] 사상을 배경으로 봉기한 동학혁명은 백범(김구)의 민족주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백범(김구)은 서양문물을 배격하는 입장에 선 동학이라는 민족종교를 신봉하게 됨으로서 후일 그가 민족·자주·자립의 정치 형태를 절대적으로 믿고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2. 고능선(高能善)의 가르침

백범(김구)은 해주성에 대한 동학군의 공격이 실패로 끝난 이후 정덕현과 함께 몽금포 근처에서 일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정덕현의 충고로 청계동에 살고 있는 안태훈(安泰勳)의 집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안태훈은 안중근(安重根)·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등 세 아들의 아버지였으며 청계동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인근지역에 까지도 글 잘하는 선비로, 또한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태훈은 동학군이 거병하였을 때 그 반대의 입장에서 동학군을 진압하는 「의려(義旅)」를 일으켜 동학군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범(김구)이 회학동에 은거하고 있을 때 밀사를 보내어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되면 언제라도 자신에게 와서 의탁하라는 언질을 준 일이 있었다.
백범(김구)은 정덕현과 함께 안(안태훈)진사의 집을 찾아 갔다. 안진사는 이들을 정중히 맞이한 후 백범(김구)에게는 부모님의 안부까지 걱정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부하에게 명하여 백범(김구)의 부모님을 청계동으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백범(김구)이 부모님과 함께 청계동의 안(안태훈)진사의 집에서 지낸 시간은 4~5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백범(김구)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안(안태훈)진사와 같은 큰 인물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과 둘째 고능선같은 의기 있는 유학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의 가르침으로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또한 이때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안태훈)진사의 장남인 중근(안중근)과도 만났는데, 당시 중근(안중근)은 16세의 나이로 호방한 성격에 사냥을 즐겼다고 『백범일지』에 서술되어 있다.
고능선은 호가 후조(後凋)로 중암 조중교(重庵 趙重敎)의 문인이며 의암 류인석(毅巖 柳麟錫)과 동문으로 해서지방에서는 손꼽히는 학자였다. 고(고능선)선생은 백범(김구)의 사람됨을 귀히 여긴 탓이었는지 언제 한번 자신의 사랑으로 놀러 올 것을 권하였다. 백범(김구)이 다음 날 고(고능선)선생을 찾아 가자, 선생은 매우 기쁜 얼굴로 맞아 주었다. 선생은 백범(김구)과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앞으로 매일 이곳에 와서 서로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학문도 토론할 것을 권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백범(김구)은 크게 기뻐하여 그날 이후로 거의 매일 고(고능선)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고(고능선)선생이 백범(김구)에게 가장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의리]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은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고 백범(김구)에게 역설하였다. 고(고능선)선생은 백범(김구)이 지닌 재질과 정신을 기초로 하여 [헤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은 채워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방법을 채택하여 학문을 지도하였다.
고(고능선)선생은 백범(김구)의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았는지 「득수번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樊枝無足奇 懸崖撤手丈夫兒)」(나무를 오름에 가지를 잡는 것은 족히 이상한 것이 아니나 절벽에 매달려서는 손을 놓는 것이 장부다)라는 한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사내대장부는 모름지기 기개를 갖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고(고능선)선생은 강조한 것이다. 선생의 이 가르침은 훗날 백범(김구)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뜻을 굳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이 고(고능선)선생의 별세소식에 접했을 때 “오늘날까지 30여년에 나의 용심의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이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라고 한 데서도 고(고능선)선생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백범(김구)은 고(고능선)선생에게 실로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범(김구)이 가장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이었다. 고(고능선)선생은 백범(김구)에게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청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시국관과 구국의지 및 구국방법 등은 백범(김구)의 사고 영역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백범(김구)은 과거시험에서의 좌절과 동학혁명에의 참가로 자신의 의식을 많이 변화·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고능선)선생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백범(김구)의 의식을 한 차원 높음 저항적 민족의식으로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3. 의병활동

안(안태훈)진사의 집에서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백범(김구)은 일제와 싸워 이기려면 청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청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만주를 여행하는 동안 백범(김구)은 김리언(金利彦)이라는 평안도 사람이 청국의 도움으로 일본군과 싸울 의병을 모집, 양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의병부대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김리언은 초산(楚山)·강계(江界)·벽동(碧潼) 등지의 포수와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 중에서 사냥총을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300여 명의 무장군사를 거느린 의병장이었다. 김리언 의병부대에 참가한 백범(김구)은 초산·강계 등의 지역에서 포수의 모집과 화약을 사오는 일을 담당하였다. 김리언 의병장은 을미년(1895년) 동짓달 초순경에 강계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거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강계성에 대한 공격은 정보의 사전 누출과 전략의 미비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강계성의 공격에 앞서 공격계획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김리언 의병장이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백범(김구)은 강계성 공격이 실패하리라고 어느 정도 예견하였고, 그것이 확연히 판명되자 미련없이 다시 청계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김구)은 고능선 선생을 찾아가 그동안의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과 안부를 묻는 중에 고(고능선)선생으로부터 ‘곧 성례를 치르도록 하자’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했다. 백범(김구)이 만주로 여행을 떠난 사이에 고(고능선)선생의 사랑방을 찾은 백범(김구)의 아버지에게 고(고능선)선생은 자신의 장손녀와 백범(김구)을 약혼시키자는 제의를 하여 이 두 사람 간에 약혼이 백범(김구)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백범(김구)은 고(고능선)선생 같은 의기 있는 유학자의 손녀사위가 된다는 말에 내심으로는 형용할 수 없이 기뻤으나 또 한편으로는 얼마간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약혼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백범(김구)의 아버지가 10여 년 전에 취중농담으로 김치경(金致景)이라는 사람의 딸과 백범(김구)을 결혼시킬 것을 언약한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백범(김구)이 이 일을 극구 반대하여 혼사는 성립되지 않았고, 또 김치경의 딸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치경이라는 사람이 백범(김구)은 자신의 딸과 이미 정혼한 사이라고 하면서 고(고능선)선생 댁에 와서 행패를 부려 백범(김구)의 혼사가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이 혼사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해 백범(김구)은 훗날 『백범일지』에서 [불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섭섭한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제1차 투옥

백범(김구)은 고(고능선)선생의 장손녀와의 혼담이 성사되지 못하게 되자, 울적한 심정으로 만주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전에 만주지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만난 적이 있는 서옥생(徐玉生)의 아들을 찾아 가기 위해서였다. 안주에 도착한 백범(김구)은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 1896년 2월) 소식과 함께 단발령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보게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로 한민족의 일제에 대한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1895)에 뒤이은 김홍집(金弘集)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으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국내 정국은 친러파의 세력하에 있었다. 이들 친러 내각은 김홍집 내각에서 실시한 모든 개혁정책을 백지화 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서 단발령이 중지된 것이다.
백범(김구)은 이와 같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1895·6년에 걸쳐 계속된 정국의 변화와 의병봉기 등 정세의 변화를 본국에 머물면서 관망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안악으로 되돌아오던 중에 대동강 하류의 치하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백범(김구)이 주막에서 아침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변복·변성명을 한 일본인 한명이 눈에 띄었다. 백범(김구)이 주막집의 방안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발을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성은 정씨이며, 황해도 장연에 산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장연 지방의 사투리가 아닌 서울 말씨였다. 또 한국말이 능수능란하지만 백범(김구)이 보기에는 분명한 왜놈이었다. 이에 더욱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흰 두루마기 밑에 군도를 숨기고 있었다. 백범(김구)이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보통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본인이라면 변복·변성명을 할 필요가 없을 터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이름까지 한국이름으로 바꾼 것을 보면 국모인 명성왕후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일당이라고 백범(김구)은 생각하였다. 설령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모의 원수를 갚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생각한 백범(김구)은 우국의 일념에서 이 일본인을 처단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이 일본인을 처단한 후 주막집의 주인에게 일본인의 소지품을 가져오게 하였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죽은 일본인은 토전양량(土田讓亮)이라는 일본 육군중위로서 엽전 800냥도 갖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이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일인의 시체는 강에 던져 물고기들로 하여금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고 주막집 주인에게 일렀다. 그리고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인을 죽였노라」는 내용의 글과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海州 白雲坊 基洞 金昌洙)」라고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고향집으로 유유히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백범(김구)은 부모님에게 일인 장교를 때려죽인 일을 아뢰었다. 부모님은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나라를 위하여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오히려 백범(김구)은 만일 자신이 잡혀 죽는다 하더라도 그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면 죽어도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집에서 태연히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백범(김구)은 토전(토전양량)을 처단한 지 석 달 지난 뒤인 1896년 5월 11일 새벽에 체포되어 해주옥에 수감되었다. 백범(김구)의 어머니는 옥바라지를 하고 그의 아버지는 영리청·사령청·계방(契房) 등을 찾아다니며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통해 백범(김구)의 석방을 호소했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해주옥에서 백범(김구)은 심한 고문을 받아 그때의 상처가 훗날까지도 흉터로 남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7월 초순경 인천 감리영으로 이송되었다. 옥사의 시설은 더없이 불결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장질부사까지 앓게 된 백범(김구)은 어느 날 밤 다른 죄수들이 모두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忠)]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하였다.
인천 감리영에서 백범(김구)은 3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특히 백범(김구)은 이 심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일인 관리 도변(渡邊, 와타나베)에게 대하여

이놈,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이라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폐하를 살해(을미사변, 1895)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라고 호통을 쳤으며, 이에 당황한 도변은 대청 뒤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한 관리들은 백범(김구)의 심문을 경무관이 아닌 감리사 이재정(監理使 李在正)으로 하여금 직접 담당하게 하였다.
백범(김구)은 자신의 심문을 담당한 이재정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김구)는 일개 하향 천생이지만 국모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을미사변, 1895)를 당하고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 ; 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는 것)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영귀와 관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은 해주 감영과 인천 감리영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계속하여 자신은 일개 도적이 아닌 국사범(國事犯)임을 자처하며 법정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뜻있는 행동은 그를 심문하는 관리들이나 옥사장 그리고 일반백성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되어 백범(김구)을 면회 오는 사람들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한편, 백범(김구)은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감리서에 다니는 젊은 관리를 통해 신문화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관리는 백범(김구)에게 근대 유럽의 문명과 세계의 정치·경제·문화 등을 널리 연구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여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배일사상만으로는 기우는 나라를 구할 수 없으니 신학문을 받아들여 국민을 각성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고 백범(김구)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 젊은 관리는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게 하였다. 백범(김구)은 이러한 서적들을 통하여 세계관과 정치의식에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다. 즉 「왜놈 한 놈이라도 때려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신념이 이제는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라는 의식으로 바뀐 것이다.
신서적을 읽으며 옥중생활을 하던 백범(김구)은 1897년 7월 27일 자의 신문에서 자신을 일반 살인범, 강도범과 함께 사형에 처한다는 기사를 발견하고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고종의 특사령으로 사형이 중지되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후에 인천항내의 물상객주 32명과 병마우후(兵馬虞侯) 김주경 등이 각기 여러 방면으로 백범(김구)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7~8개월이 지나도록 별다른 효과도 없고, 또 같은 방 죄수들의 간청에 의해 백범(김구)은 1898년 3월에 인천 감리영을 탈옥하게 되었다.
탈옥 이후 백범(김구)은 1898년 낙엽이 뒹구는 어느 늦가을에 충청도 계룡산의 마곡사에서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하게 되었다.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얻었으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을 하고 말았다.

5. 결혼과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고향으로 돌아온 백범(김구)은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봄에 강화도에 살고 있는 김진경을 찾아 다시 고향을 떠났다. 백범(김구)은 강화도에서 이름을 김두래(金斗來)라고 바꾸고 생활하였다. 어느 날 류인무(柳仁茂)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백범(김구)에게 소개장과 노자를 주며 국내의 여러 곳을 여행하게 한 이후, 백범(김구)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숙식을 같이 하였다. 류인무는 학자의 기품이 있는 사람으로, 백범(김구)이 인천 감리영에 수감되어 있을 때 13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백범(김구)을 탈출시키고자 시도한 일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백범(김구)은 류인무의 집에서 머물면서 그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제의를 받고 이름을 창수(김창수)에서 [김구(金龜)]로 바꾸고 자(字)는 [蓮上(연상)], 호는[蓮下(연하)]라고 지었다.
류인무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던 백범(김구)은 어느 날 아버지가 황천(黃泉)이라는 두 글자를 써보라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백범(김구)은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한약을 지어 달이며 성심성의껏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였지만 별차도가 없었다. 이에 백범(김구)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리고, 살은 구워서 약으로 잡수시도록 하였다. 백범(김구)의 이러한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1901년 2월 아버지 순영(김순영)은 백범(김구)의 무릎을 베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김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던 백범(김구)은 1902년 27살이 되던 해 정월에 장련에 사는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중이라 결혼은 1년 뒤로 미루고 백범(김구)은 여옥에게 틈틈이 글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혼사도 이듬해에 여옥이 병으로 사망하게 되어 이루어지지 못하고, 백범(김구)은 교육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장련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吳舜炯)과 함께 아동교육에 노력하였다. 백범(김구)은 여옥이 죽은 이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지만 그 정확한 시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백범(김구)은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에 전도 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즈음 백범(김구)은 평양 숭실학교의 학생이며,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최광옥(崔光玉)으로부터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을 소개 받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혼사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오빠인 도산 안창호가 예전에 상해의 모 중학에 다니는 양주삼(梁柱三)이라는 사람에게 동생과의 혼인을 구하고 또 누이동생에게도 양주삼과 결혼을 권유하는 편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범(김구)과 안신호와의 혼담이 있은 직후 양주삼이라는 사람에게서 청혼요구가 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신호는 이 두 사람과 모두 파혼하고 제3자와 결혼을 한 것이다. 안신호는 훗날 백범(김구)이 남북협상차 북한에 갔을 때 백범(김구)의 안내역을 맡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번번이 깨지고 하던 백범(김구)의 결혼은 190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29세가 된 백범(김구)은 신천 사평동에 사는 최준례라는 18세 처녀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백범(김구)이 장련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조선의 국내 정국은 서구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한 이후 「한일의정서(1904)」·「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4)」등을 체결하여 조선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계획적인 침략 의도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마침내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서 독립국 조선은 완전히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의 체결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민중들에게 알려지자, 민중들의 항일투쟁은 먼저 조약(을사늑약, 1905) 폐기의 상소 투쟁 형태로 나타났다. 백범(김구) 역시 진남포 예수교 교회 에버트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의 폐기를 주장하려는 정치집회였다. 이 대회에는 정순만(鄭淳萬)·이준(李儁)·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 등이 참석하였으며 집회가 끝난 뒤 이들은 대한문으로 가서 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왜경에게 제지되었고, 상소장에 서명한 대표 5인이 체포되자 나머지 군중들은 기왓장을 집어 던지며 왜경에게 저항하였다.
백범(김구)은 이와 같은 상소 투쟁이 별다른 실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도 의기는 충천하나 군웅할거 적으로 아무런 군사적 지식도 없고 무기도 미약하여 각지에서 패전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행동적이던 백범(김구)이 의병운동마저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은 이미 만주에서 김리언 의병진에 참가했던 경험과 인천 감리영에서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신서적을 통해서 배운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일제의 실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소 투쟁과 의병운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던 백범(김구)은 「지식을 업신여기고 애국심이 빈약한 이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나라가 곧 자기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지체 없이 황해도로 돌아와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문화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원,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勉學會) 하기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한 것이다. 또한 백범(김구)은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摠監)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은 교육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황해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회와 환등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송화에서는 환등회를 개최하여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배일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과거 일·청[日·淸(청일전쟁, 1894)]·일·아[日·俄(러일전쟁, 1904)]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본이 우리의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의 책임이 아니다.

이러한 백범(김구)의 태도는 그가 전념하고 있던 교육활동과 정치의식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백범(김구)은 이 환등회의 연설내용이 문제가 되어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다음 날 아침, 백범(김구)은 주재소에서 이등박문이 하얼빈역에서 [은치안(안중근)]이라는 한국인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안중근)]은 바로 1894년 백범(김구)이 청계동의 안태훈 진사의 집에서 만난 안(안태훈)진사의 장남인 중근(안중근)이었다. 백범(김구)은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처단 사건과의 관련혐의를 받고 한 달간이나 구금된 후에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백범(김구)은 안중근의 아버지와 세의(世誼)가 있었을 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부인하여 불기소로 석방되어 안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6.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제2차 투옥

백범(김구)은 의병운동과 상소투쟁이라는 대일항쟁방식 대신에 교육구국운동,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단체에 가입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가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우고 표면으로는 교육 사업을 내세우면서 여러 우국지사들을 모아 애국 활동을 벌이기 위해 1907년 9월에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백범(김구)이 황해도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던 1910년 어느 날 서울의 양기탁으로부터 신민회의 비밀회의에 참석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은 독립군기지건설을 위해 만주로의 대대적인 이민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계획은 1910년 전후로부터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던 민족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또 이것은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실천하려는 핵심적인 방안이었다. 독립전쟁론이란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바른 길은 한민족이 적절한 시기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결행하는 것이라는 독립운동의 한 이론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밀회의에서 백범(김구)은 황해도의 대표로 15만원의 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임무를 띠고 1910년 12월 안악으로 돌아온 백범(김구)은 김홍량과 함께 모금을 위해 노력하던 중인 1911년 1월 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로 연행되고, 곧이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조선총독「사내정의(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 치밀하게 계획해 온 조작극이었다.
총감부로 이송된 백범(김구)은 평소에 나라를 위해 정성을 쏟지 못한 죄로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육신(死六臣)과 삼학사(三學士)를 본받아 죽어도 일본놈들에게는 굴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백범(김구)은 총감부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악랄한 고문과 심문, 일제의 간교한 회유책에도 굴하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일제의 악랄한 고문형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셋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랏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정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 버리면 사람이 대롱대롱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붙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 참을 수도 있지만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 겨우 죽지 아니하리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 밥을 받아서 먹는 고깃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일제의 이와 같은 잔인하고도 무자비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백범(김구)은 구금된 지 7개월만인 1911년 8월에 「강도 및 강도 미수죄와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1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1912년 7월과 이듬해에 명치(明治)일왕과 그 처의 사망으로 내려진 사면령으로 백범(김구)의 형기는 5년으로 감형되었다. 백범(김구)은 왜놈의 국왕이 죽어서 감형이 된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형무소에서 나가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백범(김구)은 형무소의 창을 닦고 뜰을 쓸 때마다

하나님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

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또 백범(김구)은 이 시절에 자신의 이름을 [김구(金龜)]에서 [김구(金九)]로 바꾸었다. 이는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또한 「연하」라는 자신의 호도 「백범(白凡)」으로 바꾸게 되었다. 「백(白)」자는 백정에서 따온 것이며, 「범(凡)」은 범부라는 뜻에서 빌린 것으로 모두 비천한 계층의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김구는 가장 비천한 사람까지 모두 글을 배우고 애국심을 가질 줄 아는 국민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호를 백범(김구)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한민족이 모두 신분의식을 초월하여 애국심과 지식을 자기만큼이라도 높이지 않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건설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형기를 2년여 남기고 백범(김구)은 형무소 간수와의 말다툼 때문에 인천 감옥으로 이송되어 축항공사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몇 달이 지난 1914년 7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제3장 상해(上海)로의 망명과 초기 독립운동

1. 상해(上海)로의 망명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은 일제에 빼앗긴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최후의 한사람까지 평화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한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거족적인 3·1운동(1919)의 시작이었다. 황해도의 안악지방에서는 온정리(溫井里)에서 3월 11일에 첫 만세시위가 시작된 이후, 3월 하순경에는 안악읍내와 문산면 등지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국권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반생을 바쳐온 백범(김구)에게 이 만세소리는 분명 더할 수 없이 감격스러운 것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44세의 장년이 된 그로서는 만세소리의 감격에만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해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는 백범(김구)으로서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보다는 해외에서의 활동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해외로의 망명을 결심하고서도 망명하기 전날까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동산평의 농장에서 소작인들을 동원하여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의 이러한 행동은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는 3·1운동(1919)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보였다. 이 때문에 백범(김구)의 동정을 살피러 왔던 일본 헌병은 안심하고 되돌아갔다. 이튿날 백범(김구)은 아무도 모르게 농장을 빠져 나와 사리원·신의주를 거쳐 안동현(安東縣)에 도착했다. 안동현에서 일주일을 머문 백범(김구)은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를 타고 이미 안동에 도착해 있던 15명의의 해외 망명 지사들과 함께 마침내 1919년 4월 13일 상해의 포동마두(浦洞碼頭)에 도착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해방으로 귀국할 때까지 약 27년간의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에 많은 국내의 독립운동지사들이 상해를 망명지로 결정한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상해는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관할 구역이지만 시내에는 외국의 주권이 행사되는 조계지(租界地)가 설정되어 있어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 둘째 상해는 세계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세계열강들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있어 구미 각국인의 내왕과 거주가 많아 국제적인 여론형성과 정보 수집 및 장차 외교 활동의 전개에 있어 이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수립과 백범(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3·1운동(1919)의 최대의 산물이었다. 3·1운동(1919)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독립된 정부의 조직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기관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최고의 독립운동 기관이자 지도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부는 아니었다. 즉, 국가를 대표할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지만 독립운동 지도자들 간의 연락의 곤란과 견해 차이로 인해 처음에는 몇 개의 임시정부가 국내외에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로서 가장 먼저 수립된 것은 노령[露領(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자체 개편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언론·집회·결사 등의 자유가 허용되자 노령(러시아령) 연해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1917년 12월 노령(러시아령) 한인사회의 조직화·체계화를 위하여 결성한 통일적 중앙기관이었다. 노령(러시아령)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1919년 2월에 대한국민의회로 발전된 것이다. 그리고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파리강화회의(1919)에 파견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 김규식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일어나자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에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를, 그리고 21일에는 대통령에 손병희(孫秉熙)·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조직을 발표하였다.
한편 3·1운동(1919)에 대한 준비를 가장 조직적으로 전개한 상해에서는 천여 명의 독립운동지사들이 운집한 가운데 국내의 혁명세력을 통일 조직하며 현재의 독립운동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건립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4월 10일에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32호에서 각도 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임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4월 17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관제(管制) 등을 선포하였다.
국내에서도 3·1운동(1919)이 확대·발전되고 있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한성정부(漢城政府)가 바로 그것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들은 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생존 권리의 확보와 자유·평등의 신장, 정의·인도의 옹호를 위해 1919년 4월 23일 13도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한성정부의 수립 선포는 연합통신에 의하여 전 세계에 홍보됨으로써 노령(러시아령)의 대한국민의회나 상해의 임시정부보다도 국제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1운동(1919)을 전후하여 조국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목적이 동일하고 각 정부의 국무위원이 상호간에 중복되어 있는 정부가 대내외에 3개씩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내적으로는 항일투쟁에 있어서 힘의 분산 내지 혼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민족의 통일성을 의심받게 될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나의 통합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곧 시작되었다.
3개 처의 임시정부를 하나의 정부로 통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외의 독립운동지사들은 얼마간의 어려움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마침내 하나의 임시정부 탄생을 보게 되었다.
노령(러시아령)의 대한 국민의회와 상해의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국내의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해에 위치하여 27년간 독립운동을 지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백범(김구)은 3·1운동(1919)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어 어느 정도 그 결과를 보게 된 4월 13일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백범(김구)은 상해에 도착한 날 신익희(申翼熙)·윤현진(尹顯振)·서병호(徐丙浩) 등과 같이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백범(김구)이 상해에 도착하여 내무부 위원으로 또 한편으로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안창호 내무총장을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백범(김구)의 이러한 청원에 안창호는 처음에는 의아해 했다. 백범(김구)은 일찍이 서대문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생전에 우리나라 정부의 정청(政廳)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던 일을 안창호에게 말하였다. 안창호는 백범(김구)이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자청하게 된 동기를 듣고, 이 청원을 쾌히 승낙한 후에 이 안건을 국무회의에 회부하였다. 그 결과 백범(김구)은 임시정부의 문파수가 아닌 경무국장의 직책을 맞게 되었다. 윤현진·이춘숙(李春塾)·신익희 등 나이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데, 나이 많은 선배로 하여금 문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임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이와 같은 국무회의의 결과에 대해서, “순사될 자격도 못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란 당치도 않다.”고 반대하였다. 도산(안창호)은 이에 “만일 백범(김구)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시오”라고 강권하여 백범(김구)은 경무국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경무국은 농공상국(農工商局)·지방국(地方局)·비서국(秘書局)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서 그 소관업무는 행정경찰·고등경찰·도서 출판 및 저작권 일체와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경무국장 밑에 경호부장과 경호원을 두었고, 한인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곳에는 분국(分局)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경무국의 임무에는 사법경찰에 관한 사항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무국의 실질적인 임무에 대해 백범(김구)은 『백범일지』에서 「기성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경무국장인 백범(김구)은 기성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고 수사관과 검사·판사의 직무와 형의 집행까지도 겸해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경무국장의 중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편,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창립을 주장하고 그 발의에도 참여하여 초대 이사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922년 10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무장투쟁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단체이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元)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이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었다. 여기서 노병이란 독립적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영농적 기술(營農的 技術)을 겸비한 병사를 의미한다.
백범(김구)은 이후 1923년 48세에 이르러 노백린(盧伯麟) 내각의 내무총장으로 입각하고, 1926년에는 국무령(國務領)에, 1927년의 제3차 개헌으로 국무위원, 1940년 제4차 개헌으로 주석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지켰던 것이다.

3.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결성(結成)과 활동(活動)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1919)의 결과로서 성립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서 1919년 4월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의 의욕적인 활동과는 달리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방법론의 차이(독립전쟁론·외교독립론·준비론)와 사상적인 대립(민족주의·공산주의), 1921년 4월 신채호에 의한 이승만·정한경(鄭翰景)의 위임통치청원(委任統治請願) 문제에 대한 성토, 소련 볼셰비키의 원조 자금 문제, 또 이와 관련된 임시정부의 재정적인 궁핍,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개최와 실패 등으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와 같은 대내적인 갈등과 혼란을 겪으면서도 자체의 권위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의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임시의정원에 의한 1925년 3월의 이승만 탄핵안(彈劾案)의 가결과 박은식의 임시대통령 취임, 그리고 1926년 12월 김구의 국무령 취임과 1927년 개헌을 통한 김구의 주석(主席) 취임으로 임시정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인 난관 속에서 백범(김구)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는 동안, 국제정세도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경제의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열국은 물가의 폭등, 조업중단, 대량실업의 발생, 사회주의 운동의 격렬화 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1920년대의 이른바 베르사이유체제에 의한 국제정치의 안정기조는 빛을 잃고, 신흥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전쟁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일제도 본국에서 극단적인 탄압정치를 자행하고, 밖으로는 노골적이며 적극적인 침략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즉 일제는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국내의 경제적 파탄에 이어 각종 사회 문제의 발생, 정치적 불안정 등에 직면하자 이러한 국내문제를 대륙침략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의 제1차적인 목표는 만주지역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대륙침략정책의 첫 번째 목표로 삼은 것은 산업, 경제적으로 석탄·철강 등 군수산업의 안전한 원료 공급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만주 지역에 근거를 둔 각종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항일무장투쟁을 저지함으로서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 독립운동자들에게 만주지역은 독립군의 전진기지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인접해 있어 국내로의 진입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조선조 말부터 많은 동포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알맞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미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합방, 1910)를 전후해서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곳을 독립군 기지화하고 대규모의 한인 이주계획과 무관학교의 설립 등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3·1운동(1919) 이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이 독립군 혹은 광복군을 조직하거나,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의 관공서나 주구배를 처단한 일이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또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리는 가장 대표적인 만주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성과이었다.
일제는 이와 같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제지하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1920년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의도적으로 일으키고 이를 구실삼아 대량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여 한인을 수없이 학살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1925년에는 만주당국과 「삼시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억압하고자 획책하였다. 삼시협정(1925)은 일제가 만주당국을 위협하여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인 삼시궁송(三矢宮松)과 봉천성(奉天省) 경찰국장인 우진(于珍) 사이에 체결된 한인독립운동자들에 대한 탄압령이었다. 특히 이 협정의 내용 중에, 중·일 양국 경찰은 합작하여 봉천 동부에서 활동하는 한인의 독립운동을 방지할 것, 중국 당국은 한인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여 일본 당국에 인도할 것, 주요 한인독립운동자들의 명단을 일본 당국이 중국 당국에 통보하여 줄 것 등이 규정되어 있어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계획적·의도적으로 일으켜 이듬해 3월에는 마침내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일제는 마침내 대륙침략의 일차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대외 정세의 변화에 대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하고 거듭 항일운동에 정진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만주에 남아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에게 만주 지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항일구국군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최후까지 분전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도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수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한 결과, 특무공작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즉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모집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적의 중요기관을 파괴하여 대내외적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을 소생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특무공작은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운동계 전체가 놓여 있던 여건 아래에서 불가피하게 채택한 독립운동의 사활을 건 유일한 활로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말미암아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근거지를 잃게 되었고, 또 날로 팽창해 가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갖고 있지 못한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서는 대규모의 군사 활동을 전개·추진할 수 없었고, 또 그와 같은 대규모의 작전을 계획·수립한다고 할지라도 그 조직의 지도자들 간에 논의하는 과정 중에 일제의 정보망에 누설될 수 있었기 때문에 특무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침체에 빠져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채택한 최선의 방법이 바로 특무공작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특무대가 결성되었으며, 이것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앵전문 의거를 전후해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으로 명칭이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는 특무공작에 관한 모든 권한을 백범(김구)에게 위임하였다. 백범(김구)은 이 무렵 국무위원으로 재무장의 직책을 맡아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백범(김구)은 자금조달·인물선정·공격대상의 결정 등 특무공작의 진행상 필요한 일체의 권한을 모두 위임받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특무공작을 위한 조직원을 결정하는 일부터 극력 주의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한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칠 수 있는 굳은 결심이 서고 또 노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선별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물론 각 조직원들 간에도 서로 조직원임을 모르게 할 정도로 조직사업에 최대한의 비밀을 보장하도록 노력하였다. 이것은 임시정부 수립 초창기의 상황과는 달리 독립운동이 침체될 대로 침체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족적 신망을 받던 지도급 인사들이 절개를 폐리처럼 버리고 일제에 굴복·아부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의 치밀한 정보망 때문에 엄밀한 조직과 철저한 비밀보장이 특무공작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32년의 이봉창 의사(李奉昌 義士)의 동경 앵전문 의거(東京 櫻田門 義擧)와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이다. 이 외에도 비록 거사 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되어 실패로 끝나긴 하였지만, 한인애국단에서는 1932년 3월에 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을 처단하려 하였고, 또한 4월에는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을 만주에 파견하여 일본 관동군사령관 본장번(本庄繁) 및 만철총재(滿鐵總裁) 내전강재(內田康哉)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수원에서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유지하던 중농(中農)에 속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이진규(李鎭奎)가 소유한 땅이 일제에 징발당하여 하루아침에 생계를 이을 길이 없어져 용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소년 시절의 이봉창은 총명하였지만, 집안 형편으로 10살이 되어서야 4년제인 문창소학교(文昌小學校)에 입학하였다. 19살에는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 정거장의 운전견습생으로 취직하여 4년간을 일하였다. 이봉창은 일인의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 일인의 압박과 횡포를 체험하게 되어 일인에 대한 적개심을 일제의 타도를 통해 풀어보고자 결심하였다. 더구나 용산에서 직접 경험한 3·1운동(1919)은 그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그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철도회사를 그만두고 자기희생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성취시켜야 한다는 각오와 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지로 들어 가야한다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일본에서 이봉창은 명고옥[名古屋(나고야)]·동경[東京(도쿄)]·대판[大板(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상점의 고용원과 공장의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일본말과 일본의 풍습을 익히는 한편, 이름까지 목하창장(木下昌蔣)이라는 일본식으로 바꾸면서까지 조국을 위한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더욱이 동지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대사를 거행한다는 것이 역부족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봉창은 6~7년간에 걸친 일본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마침내, 이봉창은 1931년 1월 중순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봉창은 상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임시정부를 찾아 갔으나 그의 일본인 같은 언행 때문에 독립운동자들은 그를 일본인 밀정으로 오해하고 내쫓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백범(김구)은 이봉창의 태도에서 남다른 비범함을 간파하고 이봉창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의 심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백범(김구)은 이봉창의 비범함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고 며칠이 지나 12월 11일에 그가 머물고 있는 상해 프랑스 조계의 중흥여사로 찾아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1년 이내에 일본 국왕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틀 뒤인 13일에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일왕을 폭살시킬 수류탄 2개와 거사 자금 300원을 백범(김구)에게 넘겨받고 같은 애국단원인 안공근(安恭根)의 자택에서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고 백범(김구)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선서식을 마친 이봉창은 상해를 떠나기에 앞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 상해 주재 일인 경찰서장에게 장기[長岐(나가사키)]경찰서장 앞으로 보내는 소개장을 받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봉창은 마침내 12월 17일 상해를 출발하는 배편에 일인으로 가장하여 승선하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동경에 도착하여 거사 계획을 준비하던 중 28일자의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의 보도를 통해 다음 해 1월 8일에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大大木)이라는 연병장에서 일왕 유인(裕人)의 신년(新年) 관병식(觀兵式)이 거행됨을 알게 되었다. 이봉창은 즉시 백범(김구)에게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음」이라는 암호 전문을 보냈다.
마침내 기다리던 1월 8일의 아침이 밝았다. 이봉창은 아침 일찍이 숙소를 나서 앵전문 앞에서 일왕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경 관병식을 끝낸 일왕의 행렬이 삼엄한 경비를 받으면서 나타났다. 연도에 늘어선 많은 일인들은 그 행렬을 구경하다가 일왕이 지나가면 모두 허리를 굽혀 이른바 최경례(最敬禮)를 하고 있었다. 이 때 이봉창은 군중 속에서 뛰어 나와 일왕 유인을 향하여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하고, 또한 거리가 너무 멀어 일왕을 폭살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한편, 상해의 백범(김구)은 이날 아침부터 동경으로부터의 소식을 가슴조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상해 시가지에는 오후 늦게서야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中)」(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맞지 않았다.) 이라고 인쇄된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신문을 본 백범(김구)은 크게 실망하였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았지만 자금이 넉넉하지 못하여 보다 강력한 폭탄을 제작하지 못함으로해서 일왕을 폭살시키지도 못하고 애국 청년 한명만 잃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고 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김구)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많은 동지들은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

고 백범(김구)을 위로하고 오히려 백범(김구)의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 주었다.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는 전 일본이 신격화(神格化)해 놓은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한국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과 저항정신을 온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또한 전체 한국독립운동계와 국내외 동포사회, 나아가 일제의 침략에 당면해 있는 중국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중국의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國民日報)』는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에 대해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는 중국인들도 이 동경의거를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장사(長沙)』 등의 여러 중국 신문에서 「불행부중」이라는 기사를 실어 동경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 같은 중국의 언론 보도에 대해 당지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은 청도의 국민일보사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또 불행부중이라는 문구를 쓴 여러 신문사들을 강제로 폐간시키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 이후 일제는 한인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검거와 보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피체된 이봉창은 일제의 온갖 악랄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한인애국단원으로서 단명(團命)에 따라 일왕을 처단하고자 하였다는 것 밖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제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동경의거의 배후에 백범(김구)이 있음을 알고 프랑스 총영사관을 통해 백범(김구)을 체포·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백범(김구)은 동경의거 이후 상해 거류민단의 기관지인 『상해한보(上海韓報)』에 신병으로 요양 중이라는 기사를 내게 하고 독립운동자의 집이나 한인 동포의 집으로 돌아다니며, 이봉창 의사의 뒤를 이을 특무공작을 암중리에 모색하고 있었다.
한편, 피체된 이봉창 의사는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었다. 이후 9개월이 지나도록 예심조차 거치지 않은 채 9월 30일에 진행된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왕 유인에게 수류탄을 던져 온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다시 한 번 인식케 한 이봉창 의사는 결국 1932년 10월 10일 생을 마감하였다. 32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 상해에서는 백범(김구)의 명에 따라 전체 애국단원이 단식을 함으로써 의사의 대의를 기념하고 조국 광복에의 염원과 일제에 대한 항쟁을 거듭 다짐하였다.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 직전만 해도 임시정부 내에서는 특무공작의 성과 여부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경의거는 전 세계를 진동시키고 국내외의 한인동포를 격동시켜 독립운동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미주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은 백범(김구)에게 많은 격려의 편지를 보내어 백범(김구)의 활동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그 중의 일부는 적당한 사업을 하면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또한 동경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도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중국의 각 신문이 보도한 바와 같이 한민족 못지않게 감격하고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경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에 대해 일제는 일차적으로 동경의거 이후 「불행부중」이라는 기사를 내보낸 중국의 각 신문사들을 강제로 폐쇄하였다. 이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국제도시인 상해를 장악하고자 계획하였다. 즉 「상해사변(上海事變)」을 계획한 것이다. 결국 이 상해사변은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발생된 것이며, 백범(김구)은 이것이 중·일전쟁으로 까지 확대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당시의 심정을 『백범일지』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과 일본의 싸움을 본격화시켜 그 틈에서 우리가 일본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보아 독립을 쟁취하려고」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범(김구)은 상해사변을 중·일(중국·일본) 간의 전면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김홍일 등과 상의하여 또 다른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것은 홍구의 일본군 영내에 출입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포섭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를 폭파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기 전에 정전(停戰)이 되어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백범(김구)은 이에 따라 다시 활동자금을 마련하여 애국단의 활동을 강화하고 새로운 특무공작을 준비하였다. 백범(김구)은 1932년 3월 중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 한인애국단원이며 상해 한인청년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던 이덕주와 유진식을 국내에 파견하여 조선총독을 처단하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유상근·최흥식을 만주에 보내 일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本庄繁)을 폭살하기로 계획하는 등 새로운 인물이 선정되는 대로 한인애국단의 이름하에 일제의 원흉들을 모조리 폭살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이 무렵에 윤봉길을 만나게 되었다. 백범(김구)을 찾아온 윤봉길은
“선생님, 언제 조용히 한번 뵐 기회가 없으시겠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그 시간을 약속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백범(김구)을 찾은 윤봉길은 “선생님,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으면 저를 써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였다. 백범(김구)은 윤봉길을 처음 만난 이후 그가 국내에서부터 민족운동을 해온 성실한 항일투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열정적인 독립에의 자세를 갖고 있는 것에 새삼 감격하였다.
백범(김구)은 윤봉길에게 자신의 생각 중에 있는 일본군 수뇌들을 폭살시킬 계획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서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그 때에 한번 큰 목적을 달해 봄이 어떻겠소.

라고 윤봉길의 의중을 물어 보았다.
백범(김구)의 이 같은 질문에 윤봉길은 서슴없이

할랍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라고 아주 흔쾌히 대답하였다.

그 후 4월 20일에 일본 신문인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일본인들의 소위 천장절인 4월 29일에 상해사변의 전승기념행사를 천장절 행사와 겸하여 한다는 기사와 함께 식장에는 매점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에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각 점심도시락 1개, 물통 1개, 일장기(日章旗) 1개 만을 휴대할 수 있다고 하는 포고가 실렸다.
이 신문 기사를 본 백범(김구)은 곧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김홍일을 찾아가서 상해 병공창장 송식표에게 도시락과 물병형의 폭탄 제조를 교섭하도록 하였다. 중국의 병공창에서는 지난 번 동경의거에 사용된 폭탄의 성능이 부족하여 실패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백범(김구)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폭탄의 성능을 실험하였는데, 거의 완벽할 정도로 훌륭한 폭탄이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 제작된 20개의 폭탄을 백범(김구)은 한인 동포의 집에 귀중한 약재이니 불만 조심하라고 하고는 감추어 두었다.
윤봉길은 자신이 이번 거사를 담당하기로 결정한 이후 날마다 천장절 기념식이 거행될 홍구공원으로 찾아가서 식장을 준비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며, 폭탄을 던질 장소와 자신이 서있을 위치 등을 점검하였다. 이후 4월 26일에 윤봉길은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 가입한다는 선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앞

선서식이 끝나자, 윤봉길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한손에는 도시락 폭탄을 또 한손에는 물통 폭탄을 들고 웃는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4월 29일의 아침이 밝았다. 백범(김구)은 동지인 김해산의 집에서 윤봉길과 마지막이 될 아침 식사를 함께하였다. 이때의 일을 백범(김구)은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윤봉길)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윤봉길)군은 자신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윤봉길)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윤봉길)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윤봉길)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을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윤봉길)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윤봉길)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실고 홍구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홍구공원에 도착한 윤봉길은 태연자약하게 한손에는 일장기를 또 한손에는 보자기에 싼 도시락 폭탄을 그리고 어깨에는 물통 폭탄을 메고 식장에 들어가 거사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의 천장절 기념식은 아침 9시경에 시작되었다. 11시 40분경에 기념식의 마지막 순서로 일본의 국가가 울렸다.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막 끝나려고 할 때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홍구공원을 뒤 흔들었다. 윤봉길이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 폭탄을 사열대에 명중시킨 것이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윤봉길은 사열대에 던진 폭탄이 작렬하는 것을 본 다음 도시락 폭탄으로 자폭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헌병대에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윤봉길은 일제의 헌병들에게 피체되어 뭇매를 맞고 끌려가면서도 대한의 남아답게 성난 사자가 울부짖듯이 「대한독립만세」라 불렀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사열대 위에 도열해 있던 일제의 거물급 인사들 중에서 중국 주둔군 사령관 백천의측(白川義則) 대장은 중상을 입고 입원을 했다가 5월 24일 사망했으며, 해군 중장 야촌(野寸)은 실명, 육군 중장 식전(植田)은 다리를 절단했고, 거류민단장 하단(河端)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백범(김구)을 비롯한 이동녕·엄항섭 등은 정오경에야 윤봉길 의사의 거사성공과 피체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일 오후에 상해 거리는 홍구공원에서의 척탄 사건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윤봉길의 신원을 놓고 중국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인이라는 말도 들리는 등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상해에는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그 내용은

홍구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대 위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하고, 백천대장·중광공사·야촌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하였다.

라는 것이었다.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신분과 국적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았다. 이튿날 조간신문에야 비로소 사건의 자세한 진상과 함께 윤봉길의 이름이 크게 보도 되었다. 동시에 법(프랑스)조계에 거주하는 한인에 대한 일제의 발악적인 검거와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검거와 수색에도 불구하고 안창호와 한인 청년 11명 등 홍구공원 의거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한인을 체포하는 데 그쳤다. 안창호는 상해 거류민단장인 이유필의 아들 이만영(李晩榮)에게 선약한 소년단 기금 2원을 주기 위해서 이유필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 중이던 일인 형사들에게 검거된 것이다.
한편, 백범(김구)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성공한 것을 알고 곧 동지의 도움으로 상해 Y.M.C.A 주간인 미국인 S. A. Fitch(피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백범(김구)은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으면서도 김철·엄항섭·안공근 등의 동지들과 함께 피치의 집전화로 다른 동지들의 안부를 알아보는 한편, 잡혀간 동지들의 가족의 구제와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등에 관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 의거에 대한 전모를 밝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이번 두 차례의 의거가 한인애국단에 의해 거행되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것은 한인 동포와 동지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5월 10일에 「일본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서 백천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백범(김구)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엄항섭에게 기초하게 하고, 또 이를 피치의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각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한편 사건 현장에서 피체된 윤봉길 의사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과 집요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5월 10일 한인애국단의 성명서로 백범(김구)이 이번 사건의 배후 인물임을 발표한 이후에야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5월 25일 이른바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윤봉길 의사는 살인·상해·폭발물 취재벌칙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에 일본 대판(오사카)에 있는 육군위수형무소(陸軍衛戍刑務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2월 18일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 속에 금택(金澤)으로 압송되어 다음 날인 19일 오전 6시 40분경 총살형을 당하여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형장(刑場)으로 가기 전 남길 말이 없느냐는 형무소장의 말에 윤봉길 의사는 친필로 「남아로써 당연히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니 만족하게 느낄 따름이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고 썼다.
또 어린 아들에게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는 글을 남겼다. 이것은 윤봉길 의사의 의연한 최후이었다.
이상과 같이 백범(김구)의 주도에 의해 실행된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할 때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이 판단했던 대로 독립운동계에 민족정신의 자세를 재확립케 하여 주는 귀중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한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사에 남겨진 위대한 정신적 업적이었다.

4. 장개석과의 회담과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의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백범(김구)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다시금 피신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남파 박찬익(南坡 朴贊翊)의 주선으로 가흥의 저보성(楮補成)이라는 사람의 집에 일시 은신하게 되었다. 이때 백범(김구)은 성을 장씨로 바꾸고 이름은 진구(震球) 또는 진(震)이라고 변성명하여 지냈는데, 성은 자신의 조모를 따른 것이었다.
저보성은 일찍이 강소성장(江蘇省長)을 지낸 바 있는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저(저보성)씨는 백범(김구)에게 자신의 수양아들인 진동손(陳桐蓀)의 정자를 숙소로 사용하게 하며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이곳 가흥에서 백범(김구)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저(저보성)씨 내외와 그의 아들인 저봉장(楮鳳章) 내외, 그리고 진동손 내외뿐이었다. 백범(김구)은 이곳에서 광동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지냈다.
가흥에서의 생활도 일제의 악착같은 추적으로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백범(김구)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가흥과 저봉장의 처가인 주씨댁 산장을 오가며 피신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백범(김구)이 가흥의 큰길가 공터에서 중국 군인들의 훈련 광경을 군중들의 틈에 끼어 구경하고 있었다. 이것이 거액의 현상금이 붙어 있는 백범(김구)으로서는 큰 실수이었다. 중국 군관 중 한명이 백범(김구)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백범(김구)에게 다가와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다. 백범(김구)은 언제나 하는 것처럼
“나 말이오? 나는 광동 사람이외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 중국 군관이 정작 광동 사람인 것을, 백범(김구)은 곧 중국군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가게 되었다. 비록 백범(김구)의 보호자인 저씨 댁과 주씨 댁의 주선으로 무사히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이 일로 해서 백범(김구)은 저봉장으로부터 새로운 피신 책을 권유받게 되었다. 결혼을 주선 받은 것이다. 저봉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 중에 과부로서 중학교 선생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저봉장의 이 같은 제의에 백범(김구)은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게 되면 더욱 자신의 본색이 탄로되기 쉬울 것이라고 하며 찬성하지 않았다. 대신에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여 그녀의 배 안에서 지내는 편히 훨씬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가흥을 중심으로 피신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남파 박찬익·일파 엄항섭(一坡 嚴恒燮)·신암 안공근(信岩 安恭根) 등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정보수집과 중국과의 외교 활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 정부와의 외교 활동에서는 박찬익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박찬익의 노력으로 백범(김구)은 중국 국민당 주석인 장개석(蔣介石)과 회담을 갖게 되었다. 박찬익이 1933년 8월 국민당의 조직부장이며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陳果夫)와 교섭하여 백범(김구)과 장개석 양자의 회담을 성사시킨 것이다.
백범(김구)은 안공근·엄항섭 2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貢沛誠)·소쟁(蕭錚) 등 국민당의 요인들이 진과부를 대신하여 백범(김구)을 마중 나왔다. 회담 장소는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구내에 있는 장개석 주석의 사저로 결정하였다. 이는 장(장개석) 주석이 당시의 복잡한 대일관계를 고려하여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남경의 중앙반점을 숙소로 정한 백범(김구)은 도착 다음 날 밤에 박찬익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장개석과의 회담장소로 갔다.
서로 간에 의례적인 인사말이 끝나자 장주석은 백범(김구)에게
“동방 각 민족은 손중산(孫中山 ; 손문)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백범(김구)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난 후에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刻一刻)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壁左右)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장개석은
“하오 하오 - 좋소 -”
하니, 회담장에 있던 진과부와 박찬익은 밖으로 나가고 백범(김구)과 장주석만이 남게 되었다.
백범(김구)이 먼저
“선생이 백만금을 허하시면 이태(2년) 안에 일본·조선·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장(장개석) 주석에게 글을 써 보였다. 이것을 본 장(장개석) 주석은 붓을 들어
“청이계획서상시(請以計劃書詳示)”
라고 답하였다. 그에 관한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백범(김구)은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장개석) 주석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장(장개석) 주석은 진과부를 통하여 자신의 의견을 전하였다.
“특무공작으로 일본의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떻습니까?”
이러한 예상외의 제의에 대한 백범(김구)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외다.”
라고 답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국청년들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中國陸軍中央軍官學校 洛陽分校 第2總隊 第4大隊 陸軍軍官訓鍊班 第17隊)」이다. 한인군관학교 입교생의 교육내용과 운영을 놓고 낙양분교 교장인 축소주(祝紹周)와 이범석·이청천 등 한인교관 사이에 약간의 의견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한인군관학교 입교 생에 대한 군사·정치교육은 한인교관이 담당하고, 중국 측에서는 운영 경비만을 지원하기로 상호 간에 절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인군관학교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백범(김구)은 이제 유능하고 믿을 만한 한인 교관을 널리 초빙하였다. 또 한편으로 북경·진천·상해·남경 등지로 사람을 보내어 독립정신이 투철한 청·장년 인재를 모집하는 데 노력하였다.
백범(김구)은 한인교관으로 이청천·이범석·오광선(吳光鮮) 등 역전의 명장들을 한인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1934년 2월에는 마침내 9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한인군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입교 생들은 한인 교관들의 정신교육을 통해,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때 일본 본토와 동아대륙(東亞大陸)의 교량적 역할을 할 한국 및 남만주 지방의 일제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침략 원흉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을 지휘하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국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교육내용에 있어서는 한인의 무관 양성인만큼 민족의식의 고취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교과 내용은 정신교육 40%, 내무교육 10%, 전술교육 30%, 학과교육 2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인군관학교 내에서 행하여진 모든 교육내용이나 교과 과정 등을 종합해 보면, 한인군관학교의 교육은 근대적 군사지식의 습득과 훈련교육의 시행을 통한 체계적인 군사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교육과정에서도 비록 중국 국민당의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운영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도 중국의 교과과정에 대한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고 이청천·이범석 등의 한인교관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과 기대에 찼던 이러한 무관양성계획은 출발시의 원대한 계획과는 달리 순조롭지 못하였다. 즉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은 제1기생 6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대일관계 때문이었다. 중국의 관립기관에서 한국독립군 간부를 양성한다는 것은 일제와의 사이에 국제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에서는 이 한인특별반의 존재를 철저하게 대외 비밀로 하였다. 또한 입교 생들의 이름도 본명이 아닌 중국명으로 바꾸어 학적부를 작성하는 등 겉으로는 중국군관학교와 똑같이 하였지만, 일제의 정보망에 한인특별반의 존재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일본 영사관에서는 강력히 항의하였고 중국 정부에서는 더 이상 한인특별반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더구나 한인특별반에서도 약간의 내부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입교생을 교육시킬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낙양분교 내의 한인특별반은 1935年 4월 9일 제1기 입교생의 졸업식을 끝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백범(김구)은 한인특별반에서의 무관양성계획이 일단 중단되자, 또 다른 계획을 추진하였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한인 특별반 졸업생들과 중국 중앙군관학교 재학 중인 학생들을 합한 약 80여명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한 것이다.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은 무력수단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세력을 응징하고자 하는 특무활동 기구로서 군사적 조직체를 지향하고 있었던 단체이었다. 그리고 또 백범(김구)은 1935년 2월부터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과는 별개의 조직체로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를 설치·운용하였다.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의 설치 목적은 중국 중앙육군 군관학교에 입학시킬 한인 청년을 모집하여 입교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었다. 이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는 「특무대예비훈련소(特務隊豫備訓練所)」, 혹은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도 불리웠다. 학생훈련소에 수용된 한인 청년은 1935년 5월말에는 15명이었던 것이 차츰 증가하여 10월경에는 30여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낙양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백범(김구)의 군사간부 양성계획과 그 노력은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간섭, 중국 정부의 대일유화정책, 그리고 중국 국민당 내의 복잡한 사정 및 지원 자금 부족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인군관학교 출신의 졸업생들 중의 일부는 중국군의 장교로 입대하여 군무를 수련하고 혹은 남경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로 다시 진학하여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학생훈련소 출신의 대원들도 일부는 개별적으로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제각기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대부분 광복군의 중견 장교로서 대항일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동하였다.

5. 임시정부의 위기와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결성

국내외 한민족의 거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극심한 탄압에 의한 국내의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 조직의 노출과 붕괴는 임시정부의 자금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도 중국과 일제의 감시로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였다. 연통제는 국내에 실시된 지방행정제도로써 통신 업무와 임시정부 자금 수합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와 만주의 일부 지역에 설치되어 임시정부의 지도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교통국은 통신기관으로써 대일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연락하는 등의 통신 업무에 치중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수합임무를 병행하고 있었다. 특히 안동 교통국은 무기 수송의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으며, 국내를 왕래하는 독립운동자들의 체류지 혹은 연락지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통제와 교통국의 국내의 조직이 일제에 의해 거의 대부분 파괴됨으로써 국내로부터의 독립운동 자금이 거의 전해지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미주 지역의 한인교포들에게 수합한 독립운동 자금을 구미위원부에서 전용토록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재정적인 지원을 거의 중단함으로서 임시정부는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독립운동 자금의 부족 등 재정난으로 임시정부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큰 시련은 임시정부 자체 내의 갈등이었다. 3개 처의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되면서부터 야기된 문제점과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노선에 따라 독립운동자들이 분열, 갈등을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임시정부의 내부에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청원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독립운동계에서는 이승만의 지도권에 대해 논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불만은 마침내 임시대통령 불신임결의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어려운 상황에 독립운동 노선상의 대립, 즉 외교독립론·무장독립전쟁론·실력양성론 등의 대립과 이동휘의 볼셰비키 자금의 횡령 문제 등이 겹치게 되어 임시정부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수립 초창기의 상황과는 달리 혼란의 와중에 빠져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임시정부에 대신할 기관을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개최가 요구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불온언동에 대한 주의의 건」이란 경고문을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백범(김구) 역시 임시정부의 명분을 중시하고 있었고 또한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운동에 반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이렇게 혼란과 대립이 계속되자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직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1925년 3월 13일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키고, 박은식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4월 7일에는 임시헌법을 개정, 공포하였다.
개정된 헌법은 1919년의 헌법이 명분과 그 형식적 체제에 집착하여 임시정부의 운영에 차질을 가져온 불합리한 점들을 현실에 맞게 고친 것이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서는 정부 수립 이래 가장 큰 난제로 지적되어 왔던 대통령 탄핵에 대한 문제와 헌법 개정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자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새 헌법에 의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임시의정원에서는 개정 헌법의 발효와 동시에 초대 국무령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을 선임하였다.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하여 만주 지역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을 그 관할 하에 두고자 한 것이었다. 1925년 9월 상해로 부임한 이상룡은 주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자들로 내각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취임거부로 조각에 실패하여 이상룡은 1926년 2월 사임하였다. 이에 임시의정원에서는 양기탁을 국무령에 선임하였으나 그 역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임시의정원에서는 미국에서 돌아와 상해에 머물고 있던 안창호에게 국무령직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안창호 역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8월에 이르러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홍진(洪震)을 국무령에 선출하여 겨우 조각에 성공함으로서 임시정부는 1년여의 무정부상태를 모면하게 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은 비타협적 자주 독립의 진작, 민족유일독립당의 결성 등을 골자로 하는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홍진 내각 역시 재정난을 비롯한 독립운동 진영의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4개월 만인 1926년 12월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가 이 같은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던 어느 날,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이동녕이 백범(김구)을 찾아와 국무령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이동녕의 이 같은 요청에 다음과 같은 2가지의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것은 첫째, 자신은 해주 서촌의 일개 도존위(都尊位)의 아들이니 우리 임시정부가 아무리 초창시대와 비교해 보잘 것 없는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 같은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상룡·홍진같은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거늘 자신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 국무령 취임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의 이러한 거절 이유에 대해 이동녕은 첫째 것은 이유가 안 되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김구)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마침내 백범(김구)은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여 이동녕을 정치적 지도자로 하여 1945년 8월 해방으로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국무령 취임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수천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자들이 이제는 수십 명으로 줄어 인물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백범일지』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으로, 내무총판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올라서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 대통령이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미·법(영국·미국·프랑스)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김구)은 국민대표회의의 개최와 그 실패의 여파와 1925년 4월의 개헌 이후 계속된 내각 조직의 실패 등으로 산만해진 임시정부 운영의 개선책으로 개헌에 착수하여 1927년 5월 임시약헌을 개정, 공포하였다. 백범(김구)은 개헌의 동기를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임시약헌은 이후 1940년 전시체제 헌법으로 다시 개정될 때까지 13년간이나 임시정부를 지탱해 준 헌법이었다.
이상과 같은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임시정부의 안팎에서 끊임없이 계속된 혼란, 즉 독립운동 노선상의 갈등,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문제, 이동휘의 볼셰비키 원조자금 문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와 실패, 1925년 개헌 이후 계속된 내각 조직의 실패 등으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의 중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26년 말 백범(김구)이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약헌을 개정, 공포한 1927년에 들어와서야 임시정부는 어느 정도 체제를 정비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 이처럼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국민대표회의 파동으로 임시정부의 권위가 너무 크게 실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 관내에서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위치가 약화된 반면, 1924년 중국 국민당의 제1차 국공합작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달성하고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민족연합전선론(民族聯合戰線論)을 제기하였고, 이것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민족유일당운동이란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국 관내와 민주지역, 그리고 국내에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이나 소련의 「일국일당(一國一黨)」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유일당 조직을 위해 북경(北京)·광동(廣東)·무한(武漢)·남경(南京) 등의 지역에서는 각 지역 독립달성을 위한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 11월에는 이들 각 지역 촉성회의 연합체로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가 조직되어 민족·공산 양진영의 합작을 통한 독립운동 진영의 전선통일(戰線統一)과 민족유일당의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8년으로 접어들면서 중국 관내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기반 확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국공합작의 결렬 등으로 민족협동전선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상해촉성회의 해체를 선언함과 동시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자들만으로 새로운 형태의 협동전선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유일독립당 운동에 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과 그로 인한 운동의 실패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떠들었다. 재중국청년동맹(在中國靑年同盟)·주중국청년동맹(駐中國靑年同盟)이라는 두 파 공산당이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다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야」한다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독립운동자로 돌변하여 민족독립운동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를 끌어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일방적인 상해촉성회의 해체와 그 후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안창호·이동녕·김구·조소앙·조완구 등 민족주의자 28명은 민족주의 진영의 쇄신과 해외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1930년 1월 25일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독립당은 결성이후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독립당이 결성된 1930년대는 한국의 독립운동 기간 중에서 대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독립운동 역량이 크게 강화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중국이 일제의 만주침략(1931년 9월)으로 동북지방 즉 만주를 상실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한국독립운동진영과 연합할 것을 주장하는 여론이 한층 강도 있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중국인들의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지원은 훨씬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즉 1932년 이봉창·윤봉길 양의사의 의거 이후 한국독립운동 진영은 1920년대 중반 이래 볼 수 없었던 군관학교를 통한 혁명 간부의 양성 등으로 활기를 띠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검거와 수색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의 주요 간부들은 상해의 불(프랑스)조계를 떠나 남경·항주·진강 등의 지역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상해 의거 이후 중국 측의 조야로부터 기증된 독립운동 자금의 처리문제와 중국지에 실린 안창호에 대한 비방기사를 둘러싸고 발생한 이른바 「항주사건(杭州事件)」(1932년 5월)으로 독립운동 진영은 상호 파벌적 대립의 양상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이 불행한 사건은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각자 안전한 연고지를 찾아 피신하여 개별적으로 활동을 함에 따라 자연 의사소통의 기회가 적은 데서 오는 오해로 인해 발생된 것이었다.
임시정부 임시판공처 습격사건으로도 불리는 항주사건으로 법무장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조소앙, 재무장 김철, 군무장 김구 등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임시정부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분열과 대립 양상과는 달리 1931년 9·18사변을 시작으로 해서 1932년에는 괴뢰정부인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하여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 중국 관내로 저들의 침략의 마수를 계속 뻗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내의 급박한 상황에서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각 정당과 단체들을 통일하여 대일항쟁의 강화를 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한국독립운동계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1932년 10월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단체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마침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반일 혁명세력을 집중하여 그 활동의 통일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아울러 혁명으로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 혁명역량의 집중과 통일로써 대일전선(對日戰線)의 확대강화를 기하며 필요한 우군과 연합해야 한다는 행동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이 같은 연합전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즉 백범(김구)은 항주사건으로 새로이 임명된 군무장직을 내놓고 이동녕과 함께 가흥을 떠난 1932년 5월 이후 한인애국단의 운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물질적·재정적인 지원 하에 무장세력 기반의 양성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구는 상해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지원과 낙양의 한인군관학교의 운영 등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에 소요될 인적·물적의 활동 기반위에서 한인애국단·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 등의 항일특무조직의 운영에 전념하면서 이들 무장세력을 자신의 항일독립투쟁의 세력기반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상해의거 이후 파행을 거듭하던 임시정부는 1933년 10월 3일의 제26회 정기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혼란을 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1933년 말과 1934년 1월에 걸쳐 다시 시작된 제26회 정기 임시의정원 회의는 국무위원에 대한 개선을 단행하여 독립운동계의 혼란을 수습하고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주장하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활동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외의 전체 한인동포와 단체들에게 장문의 국무원포고(國務院布告)를 국무위원연서로 발표하였다. 이것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4년 3월 1일 남경에서 개최된 제2차 대표회의를 계기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종래의 연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배제하고 각 혁명단체들의 역량을 총집중하여 대일전선을 통일,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실질적인 행동을 추진할 수 있는 단일정당의 결성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중에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참가단체 대표의 자격으로 송병조·김규식·최동호·김철·윤기섭 등 5명이 참여하고 있었고, 또한 본 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중에도 송병조 등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동단결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상호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1932년 홍구공원 사건 이후 일제의 감시와 수색을 피해 항주·가흥·남경 등지로 피난하면서부터 이른바 ‘유랑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1934년에 들어서 밖으로 대동단결체 운동을 추진하고 안으로는 그동안 부진하였던 제반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국무위원을 개선하여 체제정비를 단행하는 등 새로운 활동을 추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재정적인 곤란으로 1934년 10월 정기 의정원회의 때가지 4차례의 국무회의를 개최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9명의 국무위원 중에서 조성환·윤기섭·성주식(成周湜) 등이 사표를 내고, 김철이 6월에 폐렴으로 사망하여 국무위원은 5인으로 줄어들었다. 10월의 제27회 정기 의정원회의에서 류동열·차리석 2인 만을 보선하였을 뿐이다. 이후에는 다시 일체의 추적을 피하느라 국무회의마저 쉽게 열지 못하다가 1935년 대동단결체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결성으로 임시정부는 또 다시 윤(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이후 최악의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추진하고 있는 신당 결성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진전되면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인 중에서 양기탁·조소앙·김규식·최동오·류동열 등 5인이 1935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사표를 제출하고, 각기 소속 정당의 대표로 신당 결성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임시정부는 송병조·차리석 2사람의 국무위원만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위기에 봉착한 임시정부에 대해서 김두봉 등 신당조직의 대표자들은 「5당이 통일된 이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신당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었다. 그것은 임시약헌 제2조에서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다.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은 이 당에 있다」고 규정하였고, 또 제49조의 헌법개정 조건에서는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이 당에서 개정함」이라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운동은 어떤 면으로나 명분이 있었던 것이며 이 같은 명분에서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할 것을 그 첫째 임무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명분보다도 더욱 큰 문제점은 신당에는 1928년 제3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노선을 분명히 하게 된 의열단이 참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장개석이 일제의 침략정책에는 계속 양보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국내의 공산당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공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산주의를 표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계는 민족주의 진영과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이러한 통일운동에 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원봉의 신당에 참여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렸고,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통일운동에 관해 논의를 하던 중 김원봉의 통일운동에 임하는 속셈을 알아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원봉이 이 운동(신당결성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는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신당결성 운동이 점차 구체화되어감에 따라 임시정부의 존폐론이 재차 등장한 것이다. 더구나 국무위원들이 신당에 참여하기 위하여 속속 임시정부를 떠났다는 소식을 알게 된 백범(김구)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또한 임시정부로 복귀할 것을 천명하는 서한을 발표하였다.
1935년 5월 19일자로 백범(김구)은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서한을 통해,

경계자(敬啓者) 김구(金九)는… 금에 전문(傳聞)에 의하면 명실이 부상부(不相符)인 대당조직의 미명을 가지고 임정 법인의 해소를 타도하는 인사들이 있다 하니… 동양의 화수(禍首)인 일황을 달벌하고 그의 장신형륙(將臣形戮)한 것이 우리의 신성한 임무다. 한족의 혈을 가지고 국권·국토를 광복하려는 거개(擧皆) 임정을 성심옹대(誠心擁戴)할 의무가 있다.…
구(김구)는 비록 직임을 가지기는 불능하나 국민된 책임만은 명심각골하고 모험 분투한다. 이·윤(이봉창·윤봉길) 양의사가 동정북벌한 그 권의를 장(丈)하고 구(김구)는 일심으로 임무를 다하여 홀로 선열의 영을 위하고 차 임정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 중이다.

이와 같은 서한을 통해 백범(김구)은 신당인 민족혁명당의 결성 움직임에 찬동하여 임시정부의 해소를 주장하는 인사들을 비난하고 자신은 임시정부로 복귀하여 본연의 직무에 신명을 다할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한편, 상해의 한국독립당에서는 신당결성 대표대회에 대한 참가 여부와 임시정부 폐지론을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당론 확정을 위해 1935년 2월 15일 항주에서 「제7차 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비록 의견의 대립은 있었지만 임시정부 폐지론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신당 결성 대표대회에 불참하기로 결의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제3차 대표대회의 소집 기일을 연기하면서까지 한국독립당의 참여를 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 관내의 한인독립운동단체 사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와 비중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당의 핵심세력인 김구가 주력하고 있는 한인애국단과 한국특무대독립군, 학생훈련소 등 항일 무장세력 기반의 불참은 신당결성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꾸준하게 한국독립당 및 김구 계열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1935년 5월 25일 임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앞서의 대표대회결정을 번복하고 신당결성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이사장이자 국무위원인 송병조와 상무이사이며 국무위원인 차리석은 단일신당의 장래가 불투명하고 임시정부를 해소하는 것이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임시대표대회의 결정에 반대하고 아울러서 임시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독립당의 직책에서 사퇴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송병조·차리석 양 국무위원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표명과 단일신당의 결성을 위한 대표대회의 참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이 단일신당으로 결성되었다.
상해 한국독립당의 핵심세력인 김구 계열 및 임시정부의 송병조와 차리석 등의 불참으로 민족단일당으로서는 어느 정도의 한계성을 갖고 출발한 민족혁명당이지만 결성 이후 첨차 항일독립운동의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혁명당의 세력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임시정부의 강력한 지지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지지정당의 결성에 앞서 선결해야할 더욱 시급한 과제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임시정부 체제의 정비·확립이었다.
송병조·차리석 양 국무위원은 임시정부의 재정비를 위하여 백범(김구)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동녕과 광동에 있는 김붕준, 양명진에게도 연락을 취하였다. 그 결과 1935년 10월 19일부터 항주의 한국독립당 사무소와 가흥에서 개최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백범(김구)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주도하게 된 백범(김구)은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민족혁명당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범(김구)은 자신의 세력기반인 한인애국단·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의 대원들과 상해 한국독립당 광동 지부의 김붕준·양명진 그 밖에 이동녕·조완구·송병조 등과 협의를 거쳐 1935년 11월 항주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의 결성 직후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한국국민당 간부 명단(1935년 말 현재)
이사장(理事長) : 김구(金九)
이사(理事) : 이동녕(李東寧)·송병조(宋秉祚)·조완구(趙琬九)·차리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안공근(安恭根)·엄항섭(嚴恒燮)
감사(監査) : 이시영(李始榮)·조성환(曺成煥)·양묵(楊墨)[양명진(楊明鎭)]
선전부장(宣傳部長) : 엄항섭
조직부장(組織部長) : 차리석
비서(秘書) : 조완구
검사(檢査) : 김붕준

한국국민당은 결성 이후 임시정부의 강력한 지지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그 산하에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한국청년전위대(韓國靑年前衛隊)」 등의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관공서 파괴, 요인처단, 후방교란 등의 무력적 파괴와 같은 특무공작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 밖에도 『한민(韓民)』·『한청(韓靑)』 등의 기관지를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혁명적 의식의 고취·환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중일전쟁(1937)의 발발이후 임시정부 내에서의 동당의 지위와 역할, 동당의 외곽단체들에 의한 세력 기반의 확대 등으로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여 민족진영 3당, 즉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의 연합시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좌익 계열과의 민족연합전선의 결성 시도, 중국 측과의 연합을 통한 항일전선의 결성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4장 임시정부의 부흥과 후기 독립운동

1. 중일전쟁(中日戰爭)의 발발과 한중항일연합(韓中抗日聯合)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한 이후 1935년까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북평정무위원회(北平政務委員會)」·「기동자치정부(冀東自治政府)」·「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몽고자치위원회(蒙古自治委員會)」 등의 괴뢰기구를 만들어 자신들의 침략정책의 하수인으로 삼는 등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의도를 점차 노골화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계획적·의도적인 중국침략정책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案內)」, 「외교무형지전쟁(外交無形之戰爭)」으로 표현되는 무저항정책을 취하며 외교적 수단으로 이 같은 일련의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국정부의 대일태도는 1936년 이른바 「서안사변(西安事變, 시안사건)」을 계기로 변화되었다. 즉 이제까지의 안내양외의 국책을 내전정지·국공합작·항일무장투쟁의 전개 등의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또한 일제가 2·26군부반란 사건으로 군부에서 일본 내각을 장악, 조정하면서 중국 본토에까지 자신들의 침략정책을 더욱 적극화·노골화하는 데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일 대응정책의 변화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이와 같은 국내정세의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일제의 계획적인 의도로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이 발생되어 전면적인 중일전쟁(1937)으로 확대되었다.
중·일간의 전면적인 전쟁의 반발은 백범(김구)이 예전부터 예측하고 기다리던 바이었다. 백범(김구)은 한민족이 일제의 막강한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없는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중일전쟁(1937)의 본격화는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중일전쟁(1937)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 분명하고 이로 인해 일제는 패망하리라고 백범(김구)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이러한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면 독립할 수 있겠느냐는 김홍일의 질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과 일본의 싸움을 본격화시켜 그 틈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보아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던 것이다.
한인애국단을 통한 백범(김구)의 특무공작도 이러한 중일전쟁(1937)을 유발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도 내포되어 있었다. 백범(김구)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이것이 중일전쟁(1937)으로 확대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에 대비하여 군사간부를 양성,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중국과 함께 대일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이 1934년 말부터 낙양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 등의 운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자신의 예견대로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게 되자, 그 동안에 잘 조직, 훈련된 한국국민당 당원과 산하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한국청년전위대」의 단원들을 중국 측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중국 및 국내 각지에 파견하여 특무공작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백범(김구)의 주도에 의해 전개된 특무공작은 중일전쟁(1937)의 발발 이후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고 전개되었다. 중일전쟁(1937)이 당초 예상과는 달리 중국 측에 불리하게 진행되어 가게 되자 중국 정부에서는 한국독립운동 단체들의 대일항전 참여를 희망하게 되었다. 한국독립운동 진영 역시 이 기회에 중국 측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한·중(한국·중국) 연합으로 대일항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조국의 해방을 쟁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국국민당 및 그 외곽단체의 소속단원들에 의해 전개된 특무공작의 내용은 주로 기관지의 국내배포, 일제요인·친일주구배 처단, 관공서 파괴, 대일군사정보수집 등이었다. 특히 대일군사정보수집은 중국 측에 제공되어 중국 정부는 대일항전에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백범(김구)은 중일전쟁(1937) 이후 이와 같은 특무공작을 전개하여 중국 측과의 대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민족혁명당의 결성 이후 3개의 정당으로 나뉘어 각기 활동하고 있는 민족주의 진영의 연합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935년 민족유일당을 자처하면서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얼마 안 되어 내부의 갈등으로 이탈세력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상해 한국독립당 계열의 조소앙·박창세 등이 김원봉 등 의열단 계열의 독주에 대한 반발 및 민족혁명당의 노선과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차이 등을 이유로 탈당하였으며, 신한독립당의 홍진 등도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였다. 이들은 1935년 9월에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혁명당과 미주 지역의 대한독립당도 대표를 소환하여 원당으로 복귀하는 등 민족혁명당은 내부분열로 인해 결성 본래의 목적인 민족대동단결체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1937년 1월의 전당대표대회에서 김원봉이 서기국 총서기에 선임되면서 민족혁명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후 이청천·최동오 등은 같은 해 4월 조선혁명당을 새로이 결성하면서 민족혁명당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결국 1937년 4월에 이르러서 중국관내에서의 민족주의 진영의 세력은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으로 정립되게 된 것이다.
민족진영 3당의 연합을 모색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중일전쟁(1937)의 반발에 따른 보다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위해 독립운동전선에서의 연합요구가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재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창당 이후 각각 심각한 재정난으로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워짐으로써 한국국민당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요구되고 있었다는 점과 한국국민당에서는 임시정부를 옹호·지지하며 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재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점들이 서로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진영 3당의 연합은 백범(김구)의 한국국민당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다. 그 결과 1937년 7월 초순에 3당의 대표들이 남경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1) 3파 합동의 취지를 밝히기 위하여 근간 공동성명서를 발표 할 것. 2) 합동단체는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확대·강화할 것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 결의문을 미주 지역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동지회(同志會)」·「단합회(團合會)」·「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 등의 단체와도 협의·호응을 얻어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여 일단 민족주의 진영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결성은 중일전쟁의 발발에 대응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세력에 대응하려는 민족진영의 세력 결집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진영의 세력결집에 대항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1937년 12월에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창립선언을 발표하여, 중일전쟁(1937)의 발발 이후 중국 관내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계는 양대 진영으로 각기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1937년 11월에 들어서 중일전쟁(1937)이 강남으로까지 확대되어 남경도 일본 공군의 폭격으로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경의 정세가 날로 위험하게 되자, 중국 정부는 수도를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고 한국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3당 지도자들과 임시정부도 그 가족들을 데리고 장사로 피난하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피난처인 장사에서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를 직접 모실 수 있었고, 또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백범(김구)의 일생을 통하여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향촌에서 성장하였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침선(針線)이 능하신」 그의 어머니였다. 백범(김구)이 어머니를 남경에서 모시고 생활하던 어느 날 어머니의 생신날이 되자 한국국민당청년단과 동지들이 생신 축하연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어머니는 생일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그냥주면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장만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모은 돈을 모두 드렸다. 어머니는 생일 음식을 장만하지 않고 대신 권총 2자루를 사서 백범(김구)에게 내놓으면서 독립운동에 사용하라고 하신 일도 있었다.
한편, 계속되는 피난길에서도 백범(김구)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재차 민족주의진영 3당의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특히 장사에 도착한 이후 3당 대표들은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의 본부가 있는 남목청에서 3당 통합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이 남목청회의는 이운한의 총기 난동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이운한이 3당 대표들을 향해 쏜 첫발에 백범(김구)이 맞아 쓰러지고, 이어서 현익철·류동열·이청천 등이 차례로 총을 맞았다. 이청천 만이 경상이었을 뿐 나머지 3명은 중상이어서 현익철은 입원하자 곧 절명하였다. 백범(김구) 역시 그 부상 정도가 매우 심하여서 병원 측에서는 살 가망성이 없으니 입원수속조차 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냥 절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는 백범(김구)의 장남 김인(金仁)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쳐서 인(김인)은 안공근과 함께 장례를 치룰 생각으로 달려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백범(김구)이 4시간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야 병원 측에서는 백범(김구)의 치료를 서둘렀다. 하지만 심장 바로 옆에 박힌 총알은 제거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백범(김구)은 수전증을 가지게 되었다.
남목청에서의 3당 통합회의가 이운한의 총기 난동 사건으로 무기 연기된 채, 중일전쟁(1937)의 와중에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독립운동 진영은 또 다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계속되는 피난으로 임시정부는 1938년 10월로 예정되었던 정기 의정원회의도 개최하지 못하였고, 1937년도 의정원회의에서 의욕적으로 발표한 1개 연대의 군대 편성 실천은 물론 군사훈련 및 특무활동도 모두 중지한 채 1938년 한 해를 유랑하면서 보낸 것이다.
1938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독립운동 진영과 중국 정부에서는 한·중(한국·중국) 연합문제가 더욱 절실한 현안문제로 대두되었다. 중일전쟁(1937)이 중국 측에 날로 불리하게 진행되자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을 대항일전에 참가케 하려는 중국 측의 의도와 중일전쟁(1937)을 이용하여 더욱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의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은 한·중(한국·중국) 연합문제에 대하여 「중국인 동지들에게 고함」(1938년 8월 29일)·「경고중국민중서(警告中國民衆書)」(1938년 11월 25일) 등의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중(한국·중국) 연합의 필요성과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신촉보(新蜀報)』·『대공보(大公報)』 등의 중국 유명 언론지도 사설(社說)을 통하여 한·중 양 민족은 연합, 공동합작하여 일제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한·중(한국·중국) 항일연합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중(한국·중국) 의 연합문제는 중국 측의 복잡한 내부 문제와 한국독립운동계의 분열로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즉 1937년 말까지 한국독립운동계는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약칭)과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3당 역시 또한 제각기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중(한국·중국) 연합을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1939년 초에 김구는 중경의 아궁보에 있는 조선민족혁명당 및 조선의용대의 본부를 직접 방문하여 좌·우 양진영의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 단일정당을 결성할 것을 제의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도 이미 1937년 7월에 「고동지동포서(告同志同胞書)」를 발표하여 통일적인 지도하에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고, 중국 측으로부터 좌우합작을 권유받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의 이 같은 제의에 별다른 반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양진영의 대표들이 몇 차례의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통일문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마침내 1939년 5월에 김구와 김원봉 양인은 「동지 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同志 同胞諸君에게 보내는 公開通信)」이라는 공동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공동선언서에서 이들 양인은 중국 관내에 현존하는 모든 혁명단체를 해소하고 동일한 정강(政綱)하에 단일 정당을 재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서 좌·우 양진영의 통합이 일견 성사되어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陳線協會)」가 성립된 것으로 일부 중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김구의 이와 같은 좌우합작의 노력으로 1939년 8월 27일 기강에서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3당과 민족전선의 4단체가 「7당통일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7당통일회의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과 조선민족해방자동맹(朝鮮民族解放者同盟)이 탈퇴함으로써 결렬되었다. 이 두 단체는 단일신당의 조직방법론에 관한 견해 차이와 전 해외(全海外) 공산주의자들의 선 통일을 이유로 탈퇴한 것이다. 두 단체의 탈퇴 이후 나머지 5당 만으로 통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주의적인 신당의 조직과 당의(黨義) 및 당원자격 등 8개항에 서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신당의 당의 수정과 당원자격의 개정 등을 이유로 5당 회의에서 탈퇴하였다.
이에 따라 백범(김구)은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합당을 추진하여 1940년 4월 1일 마침내 「한국독립당」이란 정당으로 통합하고 각 당은 같은 해 5월 8일자로 해체선언을 발표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유일 여당으로 환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선상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는 계속되는 피난길에도 불구하고 체제정비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민족주의 진영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같은 노력은 1939년 말에 열린 정기 의정원회의에서 새로이 구성된 제5차 내각의 구성원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즉 임시정부는 1939년 5월에 그 소속인원과 함께 기강에 도착한 후 7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서안 방면으로 파견하기로 하고 10월 1일 조성환을 군사특파원으로 선임하는 등 차츰 체제정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10월 3일에는 2년여 만에 정기 의정원 회의를 기강현 임강위 43호에서 12월 25일까지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1939년 말로 임기가 만료되는 제4차 내각 국무위원들에 대한 개선이 있었다. 먼저 국무위원의 수를 약헌의 최대 숫자인 11인으로 정하고 백범(김구)을 비롯한 제4차 국무위원 7인을 전원 유임시키고 새로이 조선혁명당의 이청천과 류동열, 재건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을 추가 선임하여 제5차 내각을 3당 연립내각으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재정비를 마친 임시정부와 민족진영 3당의 통합으로 결성된 한국독립당은 중국 측과 연합을 통한 대일항전을 위해 꾸준하게 노력하였고 그것은 마침내 광복군의 창설을 낳게 하였다.

2. 광복군의 조직과 그 지위문제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한 이후 백범(김구)은 중국 측과의 협조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추진해 온 광복군 설치에 관한 사무관장을 한국독립당으로부터 임시정부로 이관하여 대한민국 광복군 사령부를 설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타국의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국 정부의 동의 및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백범(김구)은 1940년 5월 장개석에게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교섭하여 사전 양해를 구하는 한편 협조약속까지 받은 바도 있었다. 백범(김구)은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조직과 그에 따른 재정적인 지원 약속을 받게 되자 곧 「한국광복군조직계획대강」을 작성하여 중국 측에 통보하는 등 백범(김구)은 광복군의 창설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이 계획대강은 전면적인 독립전쟁을 앞두고 백범(김구) 자신의 조국의 독립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원대한 계획을 숨김없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백범(김구)이 독립전쟁에 임하는 전략적 구상이나 전술적 방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립운동사상의 일단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계획대강과 함께 제출된 총동원 방략은 「중국의 적에 대항하는 총반공(總反攻)의 시기적 필요에 호응하기 위하여 국내의 전민중의 총궐기를 준비하여 대폭동과 대혼란을 실행」하기 위한 행동계획이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이와 같은 광복군 조직운동 노력과는 별도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지도하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나월환(羅月煥) 지도하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1938년 10월 1939년에 각기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김구)은 한국광복군의 창설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먼저 광복군을 조직하고 추후에 중국과의 협정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한 것이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중경 이전과 함께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백범(김구)의 명의로 주관하던 광복군의 설립문제를 임시정부 주석 백범(김구)의 명의로 바꾸어 대한민국 국군사령부의 설립이란 계획 하에 광복군의 설립문제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9월 15일에 임시정부의 주석이며 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인 백범(김구)의 이름으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200여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1907년 구한국군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국권이 상실된 이후 30여 년간에 걸친 의병과 항일독립군의 무장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국군으로서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직할부대로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총사령부 성립 직후에 「대한민국 임시통수부 관제」를 새로이 제정, 공포하고 군의 최고통수기관인 통수부(統帥府)를 설치하였다. 통수부의 기구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광복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었고, 김구·이청천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또한 광복군 총사령부는 새로이 제정된 「조직조례」에 따라 10개 부서를 두고, 다음과 같이 간부진을 선임하였다.

총사령 : 이청천
참모장 : 이범석
총무처장 : 최용덕(崔用德)
참모처장 : 채원개(蔡元凱)
부관처장 :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 조경한(趙擎韓)
편련처장 : 송호성(宋虎聲)
군의처장 : 유진동(劉振東)
참모 : 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공진원(公震遠)·유해준(兪海濬)·이준식(李俊植)

이들은 대부분이 만주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간부로서 다년간 줄기차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1930년대 이후 중국 관내로 건너와 임시정부에 집결한 군사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1940년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작전에 편리한 서안으로 일시 옮기고 4개 지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4지대는 설치하지 못하였고 제1지대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산서방면(山西方面)으로, 제2지대장은 고운기(공진원)로 하여 수원(綬遠)방면으로, 제5지대장에는 나월환을 임명하였다. 제5지대는 광복군보다도 먼저 1939년 10월에 중경에서 조직된 후 서안으로 이동하여 100여 명의 대원으로서 맹활동을 전개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그대로 광복군에 자진 편입해 와서 이루어진 지대였다. 각 지대 대원들은 각 지대의 활동 구역별로 초모사업, 적정정찰 및 첩보활동, 유격활동 등을 수행하였으나, 중국 정부 및 중국군의 비협조로 그 성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미미하였다.
중국 관내에서의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활동에 관해서는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가 장개석 총통에게 미리 사전 양해와 협조 약속까지 받아 낸 사항이었으나 중국 국민당의 군사위원회에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광복군의 조직활동을 금지하는 등 초기부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1941년 11월에는 중국 정부가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의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일체행동과 행정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韓國光復軍 9個 行動準繩)」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그 내용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되는데, 다음과 같다.

1. 광복군이 중국 영토 내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접 예속되며 작전권 및 인사·행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중국군 참모장이 장악한다.
2. 광복군이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는 동안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광복군에 대한 임시정부의 통수권을 부인, 박탈하는 것이었다.
3. 광복군의 공작활동 지역을 이미 일본군에 점령당한 지역이나 중국 전구(戰區) 제1선 지역으로 한정하여 중국 후방지역에서의 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광복군의 발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9개 준승은 재정지원을 해주는 대신에 광복군을 임시정부의 군대로서가 아니라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수권 아래 예속된 군대로서 다루면서 광복군의 자주성과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수락할 수 없다는 반발이 분분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중국 측의 재정 지원이 절대불가결했기 때문에 영·불(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선례를 들어 부득이 이를 수락하게 되었다.
9개 준승을 일단 수락함에 따라 광복군의 조직은 대폭 개편되어 중국 측으로부터 참모장·참모처장·정훈처장 등을 위시한 참모 및 실무 요원들이 대거 파견되었고, 한국인 간부들은 중국 측에 의해 재임명되는 참으로 어이없는 과정을 밟게 되었으며, 중국군 장교들은 광복군의 활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규제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9개 준승의 개정을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그 폐기를 주장하고 양국 간의 평등한 원칙에 의한 군사문제의 선 협정을 맺을 것을 중국 당국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결의안 작성을 위한 5인의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여 1943년 1월 국무회의에서는 조소앙·조성환·류동열·박찬익·김규식 등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서는 1943년 2월 9개 준승의 폐지와 중한호조군사협정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임시정부의 외무장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위임을 받아 1943년 2월 20일자로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 앞으로 공한을 보내, 한·중(한국·중국)의 역사적 관계와 1차 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 중의 체코 민족위원회와 화란(네덜란드) 국민군의 예를 따라 단시일 내에 9개 준승을 폐지하고 「한중호조군사협정(韓中互助軍事協定)」을 체결할 것과 그럼으로써 한국광복군의 국군으로서의 지위와 활동을 보장할 수 있게 하라고 주장하고 임시정부에서 작성한 한중호조군사협정 초안을 함께 발송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백범(김구)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역시 계속해서 9개 준승이 한·중(한국·중국) 연합전선에 미치는 악영향과 폐해를 지적하고 중국요로에 이의 조속한 폐지와 신군사협정의 체결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인사들은 개인적으로는 광복군에 대한 인식은 중요시하면서도 광복군 문제의 주무기관인 군사위원회를 비롯한 군사당국에서는 임시정부의 이와 같은 제의를 거절해 버리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4월에 백범(김구)이 기초한 「한국 임시정부 공작계획 대강」의 정신과 원칙에 따른 구체적인 「군무부공작계획대강」을 작성하여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이 군무부공작계획대강은 1) 현재 국외에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대오를 임시정부의 통일적 지휘 하에 두기로 할 것 2)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취소하고 신 군사협정을 체결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모두 13개 항의 공작사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대한 광복군의 지원 및 신군사협정의 체결을 요구하는 동시에 광복군의 내적 충실화를 기하게 되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5월에 이른바, 「한국 광복군 간부훈련반 계획개요」 14개 항을 광복군 사령부에 통보해 왔다. 여기에는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근거하여 사상(思想)을 정도(正道)로 인도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광복군의 자주성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측의 이 같은 통고에 국무회의의 결의로 이를 거부하도록 총사령부에 지시하고 새로이 동 계획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내에서의 조선민족혁명당의 정부탄핵 제출 등으로 혼란한 와중에도 시급한 광복군의 활동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마침내 1944년 6월 중순경부터 7월 초순까지 한·중(한국·중국) 양측의 실무자 회담이 전후 4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비록 구체적인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광복군의 발전을 위해서는 9개 준승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중국 측도 동의하게 되었다. 그 후 7월 10일자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하응흠(何應欽) 총장은 장개석 국민당 총재에게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에 예속시킴이 옳으며 9개 준승은 수개(修改) 또는 취소해도 중국 항전의 안전보장에 무해할 것이나, 단지 각 전투지역에서의 공작 및 초모인원의 전구통과(戰區通過)는 반드시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고 장개석은 마침내 8월 23일자로 9개 준승을 폐지한다는 내용의 공문서를 임시정부에 보내왔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의 독자적인 활동에 많은 장애가 되었던 9개 준승은 취소되었다. 마침내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독자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9개 준승의 폐지로 광복군은 그 활동에 있어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다. 중국의 모든 재정적·물질적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여 1945년 4월에 새로이 「원조한국광복군변법(援助韓國光復軍變法)」이라는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비록 독립전쟁 수행 시 광복군은 중국최고통수부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규정은 있었지만, 광복군이 임시정부의 소속임을 명시하고 광복군에 관한 협의는 한·중(한국·중국) 양국이 파견한 대표와 협상한다고 규정한 점, 그리고 광복군 소요 군비는 그 일체를 차관형식으로 대체한 점 등은 임시정부의 독자성 확보와 지위 개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결국 백범(김구)을 비롯한 조소앙 등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의 부단한 대중국외교로 광복군은 마침내 대외적 지위에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회복하고 중국군과의 관계도 상호 대등한 협력관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임시정부의 좌우합작(左右合作)

1940년 9월 17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창설된 한국광복군이 임시정부의 직속 관할 군대로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의용대와의 통일을 이룩하고 9개 행동준승으로 제약되고 있는 중국과의 군사 관계를 개선해야만 하였다. 조선의용대와 대립, 병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광복군의 창설 이후 광복군에 대한 애초의 지원 약속을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면서 내부적인 통일문제를 선행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대하여 광복군에 대한 강력한 개선책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광복군의 지휘문제와 운영문제를 중국 측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광복군을 독립성을 지닌 국군으로 성장시키는 일과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고자 하는 백범(김구) 영도하의 임시정부의 계획이 이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와의 합작은 김원봉 등 좌파의 책동으로 지지부진하여 시간만 소비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좌파와의 합동은 기대하지 않고 중국 측에서 요구하는 내부적인 통일문제도 오로지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임시정부의 체제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백범(김구)의 이 같은 생각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또한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아 대내외로 활발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밖으로는 중국을 상대로 광복군 지원 등에 관해 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미국에 대하여 1941년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과 공식외교 관계의 개시 및 군사원조 등의 제의를 재미교포들과 협조하여 전개하고 있었다. 8월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 수상이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대서양헌장(大西洋憲章)」을 발표하자, 임시정부에서는 헌장의 내용을 환영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및 군비원조를 요구하고 세계우방 각 민족의 최후 승리를 위한 공동전선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41년 10월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김붕준 의장을 제명하고 대신에 송병조를 의장에 선출하고 광복사업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군사·정치·외교·재정 등의 발전을 계획, 실행하는 업무를 정부에 위임할 것을 가결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주석 백범(김구)의 영도하에 날로 긴박해져 가는 국제정세에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25일에는 광복운동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공포하였다.
임시정부 외무장인 조소앙에 의해 기초된 건국강령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임과 동시에 전시체제 준비에 따른 독립운동자들의 총동원 및 민족의 독립운동역량 총집중을 위한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이기도 하였다. 중일전쟁(1937) 및 제2차 세계대전(1939) 발발에 따른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시체제 정비과정에서 전 민족 최대다수의 공동요구에 부응하는 하나의 독립운동의 지도 이념을 확립하여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시켜 광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건국강령이 제정된 것이다.
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建國) 등의 3장 24조로 구성된 건국강령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조소앙에 의해 창안된 이 삼균주의는 철저한 균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을 실현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균등을 이루며 나아가 세계일가(世界一家), 사해일가(四海一家)를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그 체제의 강화와 광복군의 지위 강화에 노력하고 있을 때, 1942년 12월 8일 일제가 진주만(하와이)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이 발발되었다. 임시정부는 다음 날 즉각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고 광복군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연합군 측에 대하여 거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군비원조를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임시정부가 전시체제로의 정비를 서둘러 내실을 기하고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임시정부의 지위가 상당히 회복되자,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진영은 이제까지 비난과 방해로 일관하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즉 조선민족혁명당은 1941년 5월의 중앙회의와 12월의 제6차 전당대표대회의 결의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관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정책을 변경하였다.
한편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숙(金星淑)이 지도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는 국제정세가 급변하게 되고 또한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자 중대 시국임을 이유로 들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당파가 합작함으로서 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자진 편입한 전례를 들어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의 통일지휘와 편제에 집중시켜 항일전선의 최후 승리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김원봉 주도하의 조선의용대는 1941년 말에 그 주력부대가 화북지역의 공산당 구역으로 이동한 후 「팔로군(八路軍) : 중국공산당 휘하의 비정규군」 관할구역으로 들어가 그들과 합작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이 같은 사태에 대해 중국정부에 대한 배신이며 기만이라고 생각하고 이제까지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비호해 오던 군사당국을 비난하고 이어서 김원봉에 대한 신임을 완전히 철폐하고 조선의용대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도 중단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따라 김원봉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임시정부로의 참여로 방향을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 및 광복군 측과 조선의용대 간의 통일은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날로 급변해 가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일요구에 의해 조선의용대는 마침내 1942년 5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편입 인원은 비록 50명 내외의 적은 규모였지만, 조선의용대의 편입은 광복군의 전략 강화와 조직 발전 그리고 그 지위 제고의 획기적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은 조직을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새로이 편입된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지대장 : 김원봉, 부사령 겸임)로 하였고, 종래의 1·2·5지대를 합편하여 제2지대(지대장 : 이범석)로 편성하였다. 제2지대는 안휘성 부양(阜陽)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1942년 4월에 설치된 징모 제6분처(주임 : 김학규)는 안휘성·강소성·산동성 일부를 무대로 하여 초모사업 및 대일공작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나중에 학병 출신으로서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청년들의 대거 편입으로 조직이 강화된 뒤에 1945년 6월에 제3지대로 정식 발족하게 되는 등 광복군의 확대와 아울러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편입으로 임시정부는 좌·우 양진영 무장 대오의 통일과 그에 따른 지휘체계의 일원화, 즉 군사 통일을 실현시키고 나아가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흡수하여 군사적 통일을 달성한 이상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까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로 흡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임시정부는 1942년 8월 4일 제38차 국무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선거규정을 통과시켜 조선민족혁명당 등의 임시정부 참여에 대비하면서 결원된 의원이 선거를 9월에 실시하였다. 그 결과 6명의 조선민족혁명당 출신의 의원과 5명의 기타 좌파계열을 비롯한 23명의 새 의정원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종래 한국독립당 일색의 임시의정원은 각 정당 단체 및 무소속 인사들을 총망라하게 되었고 1942년 10월 25일부터 개최된 제34회 정기의정원회의는 조선민족혁명당까지 참석하여 개회하게 됨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이루게 되었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4. 전시체제 강화와 광복군의 국내 진공 준비

1942년 제34회 정기의정원회의에서 좌우합작을 이룬 임시정부는 1943년 10월 9일에 개헌 및 1943년 말로 임기가 만료되는 주석과 국무위원의 개선을 위해 제35회 의정원회의를 소집하였다.
개헌 문제는 1942년 12월의 제34회 의정원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조선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각파 정당이 임시정부로 통합됨에 따라 한국독립당이 임시의정원과 국무위원을 독점하고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체제개혁의 요구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 개정을 요구한 헌법은 1940년 10월 9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약헌이었다. 이 임시약헌(제4차 개헌)은 종래의 집단지도 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주석(主席) 지도하의 단일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일전쟁(1937)과 제2차 세계대전(1939)의 발발에 대응하여 전시체제로 전환, 임시정부 행정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백범(김구)의 영도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국무위원회의 주석은 국군의 총괄과 대내외로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것이다. 전시체제하에서 주석의 위치를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국군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영도자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백범(김구)은 이 같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석의 자리에 선임된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노동국총판 안창호에게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시켜 달라고 요청했다가 경무국장이 된 이후 내무총장·국무령·국무위원을 거쳐 주석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한편 국무위원으로서는 이시영·조완구·조소앙·차리석·박찬익·조성환 등이 선출되었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의 한 개인으로서는 일국의 최고 원수인 주석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영광이 있었지만, 그동안 백범(김구)에게는 가정생활에 불행한 일도 많이 있었다. 인천 감리영에서 탈옥한 이후 교육운동에 전념하고자 김용제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던 1906년 1월 동짓달 찬바람에 갓난 첫딸을 잃었고, 안악사건으로 피체되어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4년 1월 가출옥으로 석방되기 서너 달 전에 둘째딸 화경을 잃는 슬픔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1924년 정초에는 부인 최준례 여사와 사별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1937) 발발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진영과의 합작을 위해 분주하던 1939년 4월 백범(김구)의 평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광서지방의 수토병(水土病)인 인후증으로 돌아가시는 슬픔도 있었다. 숨을 거두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81세를 일기로 생을 달리하신 것이다. 한평생을 아무런 즐거움도 보지 못하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 평생 고생 속에 지내신 어머니를 여읜 백범(김구)의 심정은 무슨 말로도 형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그 시기문제에 다소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을 뿐 개정에는 모두 찬성하여 조소앙·조완구·유자명·박건웅 등 9명의 기초위원으로 하여금 6개월 이내로 개정 초안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의정원에 접수된 지 1개월 이내에 개헌을 하기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개정 초안은 1943년 제35회 의정원 회의가 개회되어서야 제출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는 이 같은 헌법개정안이 당초의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임시정부에서 공금 20만원을 횡령하였다는 점을 내세워 정부 탄핵안을 제출하여 의정원 회의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유동렬 등 16명의 한국독립당 인사들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는 부분의 이익에 구애될 수 없으며 전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당의 분열을 돌아볼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고 탈당을 하게 되어 임시의정원 회의는 공전되었다. 따라서 주석 및 국무위원에 대한 개선과 개헌은 다음번 의정원 회의로 연기되었다.
임시의정원 회의가 공전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상당히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카이로 선언(1943)」이 발표되었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이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백범(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적당한 시기」라는 표현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해 장개석 총통과의 회담을 촉구하여 한국 문제의 처리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공전되고 있는 의정원 회의의 개최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44년 4월 20일에 제36회 의정원회의를 개회할 수 있었다.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개최된 제36회 의정원회의에서 당초 합의대로 곧 개헌안이 상정되었고, 약간의 자구수정을 거쳐 통과되어 4월 22일에 공포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5번째의 개헌이었다. 이 5차 개헌은 임시정부의 지도 체계가 일종의 비상시의 연립정부와 같은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첫째, 주석의 권한이 개정 전의 임시약헌 때보다도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주석제를 신설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수 김규식에 대한 배려로서 좌·우 양진영의 결속과 역량을 집중하려는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그리고 4월 24일에는 4당 연립으로 주석·부주석·국무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선출된 위원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 : 김구(한국독립당)
부주석 : 김규식(조선민족혁명당)
국무위원 :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박찬익·조소앙·김붕준·안훈(이상 한국독립당 소속)
장건상(張建相)·성주식(成周湜)·김원봉(이상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류림(柳林 : 무정부주의자)·김성숙(金星淑 : 조선민족해방동맹 소속)

이와 같이 임시정부 체제를 강화·정비하게 된 백범(김구)은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광복군의 독자적인 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9개 준승의 수정 내지는 철폐와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일 등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는 예전부터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영·소 등 연합국 측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중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여 그 정책을 수정하였다. 그동안에는 중국은 한국 측의 내부통일 등을 내세워 승인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임시정부도 내부가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승인문제를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부통일도 이룩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여론도 상당히 호전되었으므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서 강력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내부적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9개 준승의 폐기문제 역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단한 대중국외교로 1944년 8월 마침내 해결 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1944년 한해는 임시정부에 매우 뜻깊은 한해였다. 즉, 1943년부터 계속되어 온 임시의정원의 혼란이 제36회 의정원 회의(1944년 4월 20일)에서 수습되면서 임시정부는 백범(김구)의 영도하에 그 수립 이래 대내외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광복군의 활동에 가장 큰 제약이 되고 있던 9개 준승을 철폐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역시 미국과 영국의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먼저 중국으로 부터는 그 약속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또한 비록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이 첨부되기는 하였지만, 전후 한국의 독립이 「카이로 선언(1943)」을 통해 국제적으로 보장된 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1944년 67세가 된 백범(김구)은 이 해에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백범일지』하권의 집필과 완성이었다. 『백범일지』상권은 그가 상해에서 53세 때인 1929년에 탈고한 것이며, 그로부터 14년 만에 하권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상권의 집필 목적에 대해,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운동(1919)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남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 껍데기로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

고 적고 있다.
하권의 집필 목적에 대해서 백범(김구)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낸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로 은감(殷鑑)을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때문이라고 하였다.
1944년 8월 9개 준승의 취소로 광복군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되자, 백범(김구)은 9월에 장개석과 회담을 추진, 성사시켜 9개 준승에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군사협정의 체결문제를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이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그 내적 충실화를 기하며 적극적인 참전태세를 서두르고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1943년에 들어서면서 연합군과 합동하여 항일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광복군 총사령부와 영국군 동남아 전구 사령부가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사관공작대를 파견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첫 번째의 합작이 성사된 것이다. 1943년 8월에 인도·버마 전선의 최전방인 임팔(Imphal) 지역에 한지성(韓志成)을 대장으로 광복군공작대 10여명을 파견하여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과 전단작성, 노획 문서 번역, 포로 심문 등의 심리전 활동에서 큰 성과를 내다가 1945년 9월에 사령부로 원대 복귀하였다.
또한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 공작보고서에 나타난 광복군의 활동을 보면, 광복군의 현인원은 339명으로 성립 당시의 12명에 비해 대단한 발전을 하였고, 공작상황도 부양(阜陽) 등지에 50여 명이 주둔하는 외에 국내·만주·적 점령지 등 중요 거점에 50여 명의 공작원을 두어 선전·조직·초모 등의 공작을 적극 진행함과 동시에 노하구(老河口) 최전선에서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의 인도·버마 전선 파견과는 별도로 광복군의 한·미합작 항일연합작전이 미국 국방성 전략정보처(Office of Strategic Service, 약칭 O.S.S)의 중국 곤명(昆明) 주재 요원들과 제휴하여 대원들에게 특수훈련을 교육시키고 미국과의 공동작전에 의한 국내정진이 준비되었다.
이와 같이 한·미합작의 제1차 계획으로 대일정보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 한·미합작의 특수훈련계획이 추진되었다. 즉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중국 곤명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제14항공대 간부와 접촉을 갖고 한·미합작군사 행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바 있었다. 1944년 가을에는 중경에서 주중미군사령관(駐中美軍司令官)으로 연합군 중국전구부사령관(中國戰區副司令官)인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 광복군의 작전계획과 한·미합작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여 실천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에는 미공군 제14항공대의 실무자들이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고 제1·2지대를 방문, 광복군의 실정을 파악하며 지대장들의 의견을 들어 일을 구체화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학규 제2지대장은 1945년 3월에 미공군 제14항공단 사령관과 면담하고 한·미 공동작전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여, 마침내 한·미군사 합작계획은 물론 그에 따른 세부계획과 구체적인 실시방안까지도 합의를 볼 수 있었다.
백범(김구)은 진작부터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사사건건 백범(김구)의 정책에 반대하며 자파의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이 연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국내진입을 위한 공작을 광복군에 앞서 전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백범(김구)은 O.S.S.의 훈련과 함께 훈련반을 분대별로 조직하여 비행기·잠수함 등을 통하여 국내에 진입시켜 서울지역을 비롯 전국 각 지구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는 전투태세 확립의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그 결과 O.S.S. 훈련반은 3개월 과정의 훈련이 끝날 무렵 이미 광복군은 제2지대장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94명 규모의 국내 정진대를 편성하여, 8월 20일 안으로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군의 이와 같은 국내 진입 계획은 미국의 일본 광도[廣島(히로시마)]와 장기[長岐(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목 메이도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8·15광복, 1945)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범(김구)에게는 일제의 항복 소식이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로 느껴졌다. 이번 전쟁에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수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국제적인 발언권이 매우 미약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의 이와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임시정부의 자격으로서가 아닌 한 개인의 자격으로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서글픔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국제연맹의 신탁통치안 문제로 또 한 번 소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심정을 백범(김구)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이어니와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간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70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온 백범(김구)에게 조국의 독립은 오히려 아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광복(8·15광복, 1945)의 이날에 비탄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다시 정비하여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 사업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원본누락)…
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과 공식외교 관계에 개시 및 군사원조 등의 제의를 재미교포들과 협조하여 전개하고 있었다. 8월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 수상이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대서양헌장(大西洋憲章)」을 발표하자, 임시정부에서는 헌장의 내용을 환영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및 군비원조를 요구하고 세계우방 각 민족의 최후 승리를 위한 공동전선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41년 10월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김붕준 의장을 제명하고 대신에 송병조를 의장에 선출하고 광복사업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군사·정치·외교·재정 등의 발전을 계획, 실행하는 업무를 정부에 위임할 것을 가결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주석 백범(김구)의 영도 하에 날로 긴박해져 가는 국제정세에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25일에는 광복운동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공포하였다.
임시정부 외무장인 조소앙에 의해 기초된 건국강령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임과 동시에 전시체제 …(원본누락)…

제5장 환국과 건국활동

1. 환국과 건국준비

백범(김구)이 O.S.S.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들의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백범(김구)은 일제의 항복소식에 기쁨보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니 임시정부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생각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백범(김구)은 먼저 앞으로의 대책회의를 주선하였다. 일제가 항복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광복군 중에서 선발대를 조직하여 광복된 조국으로 속히 달려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국내치안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범석을 비롯하여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노능서(魯能瑞) 등과 한국인 2세 미군장교 몇 사람과 미국 측의 대령 한 사람 등 모두 45명의 선발대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중무장을 갖추고 8월 18일 여의도 공항에 착륙하였으나 통수기능이 마비된 일본군과 충돌이 발생하여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8월 17일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는 차후 임시정부의 진로문제에 대하여 1) 27년간 우리가 대행했던 임시정부의 정권을 금일 해방된 국내 인민에게 대치하기로 결의함 2) 정권을 대치하기 위하여 현 임시정부는 곧 입국하기로 결의한다는 결의안을 상정하였고, 백범(김구) 역시 국무위원회의 주석으로서 현직 국무위원이 사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결의안을 놓고 임시의정원은 의견 대립이 계속되어 일부 야당의원들이 퇴석하는 등의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백범(김구) 등의 한국독립당에서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귀국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민족혁명당 등에서는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하고 환국 후에 국내외 각 정파와 협의 하에 임시정부의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임시의정원에서의 이 같은 내부갈등은 백범(김구)의 강력한 내각총사퇴 반대에 따라 일단 해방된 조국에 정통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하고, 이후 국민의 총의에 따라 정부를 재조직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백범(김구)은 본국에 돌아가 국민들에게 정부를 인수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범(김구)의 이 같은 신념은 그의 『백범일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동안에 임시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반론하여 귀결이 못나다가 주석인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 앞에 정부를 바칠 때까지 현 상태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또한 백범(김구)은 내각총사퇴의 불가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비록 우리 손으로 왜놈을 거꾸러뜨리지 못하여 유감이나 지금은 퍽 정신상으로 질량으로 전에 비해 진출되었다고 본다. 이제 임정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국무위원을 단속하여 속히 국내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군이 조선에 들어갈 때 우리 광복군도 같이 들어가자고 하였다. 어쨌든 이 시기에 총사직은 불가하다. 총총하고 일이 많고 보따리 쌀 이 시기에 총사직 문제를 내는 것은 불가하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먼저 정통정부의 법통을 가지고 환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는 중국전구(中國戰區) 총사령관 웨드마이어(Wedemeyer) 장군에게 1) 귀국 후 국내 치안 유지는 임시정부에 맡길 것 2)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정치활동에 대해 간섭하지 말 것 등의 4개항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 회답을 기다리면서 환국준비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미 남한지역에 대해 군정(軍政)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한 미국 측에서는 임시정부의 이 같은 4개항의 조건제시에 대해 아무런 배려도 없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만 한다」는 회신만을 보내 왔다.
9월 2일 일본은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조인을 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협조로 한국의 해방을 가져온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다음과 같은 임시정부의 3대 임무를 발표하였다.
1)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동맹군과 협력, 일인을 몰아낸다.
2) 한국 임시정부의 권력을 국민에게 반환하고 자유선거를 실행하여 정식정부를 조직한다.
3) 한국 인민과 동심육력(同心戮力)하여 한국으로 종속 독립하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백범(김구)의 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과 14개 조의 「임시정부 당면정책」을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여기서 조국의 해방이 우연히 얻게 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여러 애국선열의 보귀한 열혈의 대가와 중·미·영(중국·미국·영국) 등 맹군의 위업에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가 전체 한 민족을 대표하여 조국의 법통을 이어가는 조직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한반도 전체가 미·소 양국에 의해 군정이 실시될 것을 예감 하면서도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정식 정부 수립 전까지는 정통정부임을 천명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정통성과 통치권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보존, 지속되어야한다고 발표하였다.
해방된 조국에 정식으로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정부의 정통성은 여전히 임시정부에 있다고 중대 발표를 한 백범(김구)은 당면정책 제1항에서 밝힌 바대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환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백범(김구)은 중경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먼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묘소에 하직 인사를 고하고, 가죽상자 8개에 정부문서를 정리하게 하는 한편, 10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재중 한인동포들의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환국 후에도 중국 정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박찬익을 단장으로 하는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설치하고 중국에 일정 기간 동안 체류하게 하였다. 또한 백범(김구)은 이청천과 이범석에게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 한국청년들을 인도 받아 광복군을 확대·편성하고 전 부대를 무장시켜 임시정부의 군대로서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백범(김구)은 귀국 준비로 분주한 중에도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이라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엄항섭을 통해 「우리들이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은 조선인의 독립, 조선인의 자유, 또 통일된 조선의 수립을 요구하는 데 있다. 재화 조선인은 북위 38선에 의한 조선인의 분할점령에 대해 단연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게 하여 통일된 조선의 독립을 거듭 주장하였다. 이는 백범(김구)이 환국한 이후 자신이 나아갈 정치노선을 밝힌 것이었다.
이와 같이 환국준비를 하는 동안 중국 정부와 미군 사령부의 협조로 귀국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원래 한반도는 중국 전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전후에 태평양 전구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환국 문제는 한·미합작 군사작전의 수립으로 임시정부와 비교적 우호관계에 있던 중국 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장군의 권한 밖의 일이 되었다. 장개석은 임시정부의 환국이 공적인 것이냐 혹은 개인 자격이냐를 두고 맥아더 사령부와 미국 대사를 통하여 여러 차례 협의를 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는 ‘이미 남한 지역에 군정이 실시되고 있으니 임시정부 환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회답을 보내올 뿐이었다. 이 같은 미국 측의 통보를 장개석을 통하여 받은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의견을 종합하였다. 그 결과 논란은 있었지만, 개인 자격이라도 환국하되 혼란을 막기 위해 각 당은 활동을 중지하고 공식 발언은 대변인을 통해서만 하기로 하였다.
한편 백범(김구)은 환국 준비로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내면서도 해방된 조국의 분단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즉 미·소 양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점령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백범(김구)은 중경을 떠나면서 「조선의 여하한 분할에 대해서도 허락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금후 자신이 취할 기본적인 노선의 방향을 거듭 표명하였다.
백범(김구) 및 임시정부 요인 일행 15명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 상해에 도착하여 입국 승인을 기다렸다. 21일에야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입국 승인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백범(김구) 일행은 11월 23일 오후 1시에 하지 중장이 보낸 C-47중형 미군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백범(김구)의 나이 어언 70세. 조국을 떠나 상해·남경·가흥·중경 등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부은 지 27년 만에 백범(김구)은 꿈에도 그리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희생하고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가 이제 70세의 백발이 되어 돌아오는 노혁명가 백범(김구)이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겪은 온갖 풍상으로 이미 희노애락의 감정을 잊은 지 오래였건만 귀국 비행기 안에서 목메이게 그리던 조국산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백범(김구)의 두터운 안경에도 뽀오얀 김이 맺혔다. 잠시 뒤 그것은 그대로 두 줄기 눈물이 되어 그의 뺨을 타고 내렸다.
오후 4시 5분, 백범(김구)과 그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마침내 김포 활주로에 도착했다. 그러나 드넓은 김포 활주로에는 환영 인파 대신 미국 당국에서 보낸 장갑차 한 대만이 덩그러니 백범(김구)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노 혁명가에 대해 미군정은 이처럼 무례한 대접을 하였던 것이다. 백범(김구)은 광복된 조국산하에 도착하였으면서도 그 즉시 도착 성명서도 발표하지 못하고 밀폐된 장갑차에 실려 오후 5시 서대문 밖의 죽첩장(竹添莊 : 후에 경교장으로 부름)에 도착하였다. 미군정은 백범(김구)과 그 일행이 서울에 도착한 지 2시간이 지난 23일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조선 주둔 미군 총사령관 하지의 이름으로 「오늘 오후 4시 백범(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백범(김구)선생 일행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 온 것이다.」라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하여 백범(김구)의 서울 도착을 공표하였을 뿐이다.
11월 23일 환국한 백범(김구)은 가장 먼저 이승만의 방문을 받고, 이어서 저녁 8시경부터 엄항섭이 백범(김구)을 대신하여 도착성명을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이 성명서에서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애국선열과 미·중·소 등 동맹국에게 독립의 공을 돌리고 공포들이 기대한 만큼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여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 것을 사과하였다. 또 앞으로 통일된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국민들이 자신을 불러 준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애국의 의지를 소박하게 피력하였다.
백범(김구)은 다음 날 경교장에서 귀국 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견석상에서 백범(김구)은 기자들의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였다고 발표되었는데…”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나라에는 현재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이 될 것이나 우리 한국사람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이다.”라고 답하여 임시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26일 미군정청에서 내외기자단과 공식적인 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백범(김구)은 건국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선배 혁명 동지들과 국사를 위해 애쓰고 있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 독립과 건국경륜(建國經綸)을 논의하며, 미군정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한 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것이라는 매우 함축성 있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7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국내정치 판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4개 정치세력의 대표자들과 모임을 가졌다. 즉 한국민주당의 송진우, 한국국민당의 안재홍, 인민당의 여운형,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허헌 등과 각각 회담을 가지면서 복잡한 국내정치상황의 파악을 위한 활동과 건국준비를 시작하였다.
12월 1일에는 3만여 인파가 모인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가 있었다. 그리고 3일에는 환국 후 처음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백범(김구)의 주재하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날의 회의는 「오늘은 보고를 듣는 것만으로 끝내고 우리도 국내 정세에 대해 직접 접할 기회를 가진 다음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제의가 받아들여져 뚜렷한 의제 없이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민족의 대망인 민족통일의 성공적인 달성을 위해서는 인민공화국측 인사들과의 협조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백범(김구)의 생각은 임시정부의 외무장 조소앙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봉건제도를 지키려는 것도 아니요, 자본주의를 고수하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인민 대중에게 기초를 둔 정부를 조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포부는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포부를 가졌음을 말해둡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추구해 나가려는 입장에서 이러한 정책을 밝혔던 것이나, 인민공화국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해서 양 정부를 다 같이 해체하고 반반수의 균형으로 합작하자는 제의를 하여 왔다. 임시정부가 이 제의를 거부하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민족통일전선과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백범(김구)과 임시정부를 비난하였다.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한 백범(김구)과 임시정부의 노력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해방 이후 계속되는 정국의 혼란 속에서 12월 19일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베풀어졌다. 백범(김구)은 혼란한 정국에 임하는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우리 임시정부는 과거 27년간 일대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 민족 총단결의 입장과 민주주의 원칙을 일관하게 고수하여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임시정부는 결코 모 일계급(某一階級), 모 일파(某一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 민족이 총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투한 결과는, 즉시 우리의 임무를 달성하자면 오직 3·1대혁명(3·1운동, 1919)의 민주 단결 정신을 계속 발양해야 하고 좌파·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 개개인의 혈관 속에는 다 같이 단군왕조의 성혈이 흐르고 있습니다. 극소의 친일파 민족 반도를 제외한 외에 무릇 우리 한국동포는 마치 한사람 같이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우리의 독립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반도들을 숙청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불의(確信不疑)합니다. 유구한 문화 역사를 가진 우수한 우리 민족은 이 시기에 있어서 반드시 단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정부 동인들은 보다 더 많은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전 민족 가계 당파의 철 같은 단결을 완성하기 위하여 분투하려 합니다.

이러한 소신에 따라 백범(김구)은 임시정부 내에 좌·우로 분열된 민족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한 기구로써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의 구성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임시정부의 움직임은 국내정계에 새로운 미묘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즉, 귀국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정치세력권을 구체화 시켜가고 있던 이승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임시정부와 한국민주당 역시 동당 내의 친일파 숙청문제로 내적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은 자신의 정치 신념인 민족 대동단결의 기치 아래 각 정당과의 협상을 전개하며 광복된 조국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 3상회의(1945)」의 결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결의안(信託統治決議案)」이 통과되었다는 외신 보도가 전해졌다. 백범(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건국 준비에 대한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결정된 1945년 12월 28일의 비보였다.

2. 신탁·단정 반대운동

1945년 12월 28일 정오. 모스크바 3상회담(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공동성명이 워싱턴·모스크바·런던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미·영·중·소(미국·영국·중국·소련)가 최고 5년 동안 한국의 독립을 대비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3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은 국내에서 거센 반대여론을 야기하였고, 백범(김구)은 이에 대해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자세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된 조국에 대한 신탁통치 논의는 이미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있어왔다. 그것이 카이로 선언(1943)에서 [적당한 시기(in due coures)]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표현되었던 것이며, 여기서 적당한 시기란 바로 상당 기간의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5년간의 신탁통치라는 충격적인 소식은 완전한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백범(김구)과 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독립정부를 갈망하고 있는 전 국민을 흥분과 분노에 떨게 하였다. 백범(김구)은 경교장에서 이시영과 함께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당일 급히 야간 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백범(김구)은 국무회의의 시작에 앞서 “신탁통치안 결의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전 민족을 건 투쟁의 길로 나설 것이다.”라는 말로 독립주권국가 수립에 방해되는 어떠한 공작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국무회의에서는 신탁통치안의 결의에 대해 거족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김구)과 외무부장 조소앙의 이름으로 미·영·중·소(미국·영국·중국·소련) 4개국의 원수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백범(김구)은 신탁통치안 결의에 대응하가 위하여 2인씩의 각 정당 대표, 6대 종교단체대표, 그리고 각 신문기자의 모임을 주선하였다. 백범(김구)은 이 모임에서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탁치(託治)에 대한 반대운동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이에 매진할 것이라는 임시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울러 이 반탁운동에 전 국민이 호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백범(김구)은 반탁운동의 초기 전개과정에서 민족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열렬하게 이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백범(김구)이 통일된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자신의 강렬한 의지와 임시정부 주석이라는 공식 지위로 해서 당시 반탁운동의 실직적인 최고 지도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군정의 실시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 한민족의 가슴속에는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가진 유일정부로 인정되고 있었다. 특히 신탁통치라는 중대한 민족적인 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민족을 공식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은 임시정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 지도하에 반탁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각 정당·사회단체·청년단체들의 호응을 얻었고 상가는 철시(撤市)까지 하였다. 31일에는 백범(김구)과 임시정부에서 주도하는 반탁시위운동이 백설이 뒤덮인 서울운동장에서 영하 2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각 정당, 사회단체는 물론 일반시민 및 어린 학생들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의 자율의사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백범(김구)은 좌·우익을 망라한 전민족의 반탁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나, 1946년 새해가 되면서 좌익 계열은 돌연히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이제까지 와는 달리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주장하게 되어 백범(김구)은 새로운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1946년 2월 2일 이른 바 조선인민공화국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1945)의 결정에 대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 위원회의 결정서」를 미·영·중·소(미국·영국·중국·소련) 4개국에 전문으로 보내고, 같은 날 조선공산당도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바로 전날까지도 솔선하여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신탁통치 결정을 하루아침에 진보적 결정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수립한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신탁통치의 실천을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실로 웃지 못 할 해프닝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서 3일에는 신탁반대 서울시민대회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의도대로 찬탁국민대회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46년 새해 벽두부터 좌익의 노선 변화로 말미암아 한편에서는 반탁시위대가, 또 한편에서는 찬탁시위대가 거리를 난무하여 국내정세는 혼란의 극에 달하게 되었다. 좌·우익이 판연히 구분되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전 민족의 단결을 촉구하며, 또한 신중하게 민족통합을 모색하고 있던 백범(김구)은 마침내 1월 4일 이제까지의 임시정부의 발자취에 대한 회고와 해명, 그리고 장래의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이 성명서에서 1945년 9월 3일 환국하기에 앞서 중경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당명정책」의 제6항의 내용, 즉 국외 임무의 결속과 국내 임무의 전개가 서로 접속됨에 필수한 과도조치를 집행하되, 전국적 보선(普選)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의 저명한 각 민주 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비상정치회의의 소집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과도적 조치로서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며 과도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정식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백범(김구)은 비상정치회의의 수립을 주장하는 이상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몇 차례에 걸쳐 좌우익 각 정당 및 각계 인사들과의 활발한 합작공작을 전개, 추진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의 합작도 추진하였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민주당 인사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합작이 성사되어 비상 정치회의의 명칭을 「비상국무회의(非常國務會議)」로 변경하고 백범(김구)은 이승만과 함께 동회의의 영수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하지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권위를 갖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은커녕 사사건건 백범(김구)과 이승만에게 사리사욕과 당파성에 의해 국민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곤 하였다.
미군정의 노골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1946년 2월 1일 예정대로 비상국무회의는 명동 성당에서 167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이 날 회의에서는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한 최고 정무위원회를 설치하되 인원수와 그 선정은 이승만과 백범(김구)에게 일임한다는 건의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불참한 좌익 단체의 참가 권유안을 가결한 후 의장에 홍진, 부의장에 최동오가 선임되었다. 이밖에도 13개 위원회 위원 선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38선 철폐 요구 결의 등을 가결하였다. 그리고 비상국무회의의 최고 의결기관인 「최고정무위원회」가 원만히 구성되어 일단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체제는 완비되었다. 비상국무회의가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체로서 성립되자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앞으로 개최될 미·소공동의원회에 대해 우익진영의 통일된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기구가 있어야겠다는 현실적 필요에서 미군정은 이 최고정무위원회를 「민주의원(民主議院)」이라는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발족시키고자 하였다. 임시정부 계열에서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정식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과 긴밀한 협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백범(김구)은 이를 응낙하게 되었다.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단순한 자문기관의 역할이라는 요구와는 달리 점차 정권인수를 목표로 독자적인 국민대표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나갔다. 이것은 한국민의 의지와 이를 이끌고 지도하는 백범(김구)의 지도력이 융합되어 나타난 결과이었다.
한편 백범(김구)이 주도하는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우익진영이 어느 정도 대동단결의 기세를 보이게 되자, 좌익 측에서도 이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통일전선의 결성을 서둘러 1월 19일에 「민족통일전선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비상국무회의와 민족통일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이 각기 그 세력을 정비해 가고 있을 무렵,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백범(김구)과 김규식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에 대해 관망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 회의에서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어떤 방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대표는 “앞으로 수립될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1945)의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백범(김구)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이에 백범(김구)은 반탁투쟁위원회에 참가한 각 정당·사회단체의 대표들을 만나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어 민족진영과 좌익계열이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놓고 양분되어 어수선한 중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하는 외신보도가 공개되었다. 1946년 4월 6일 샌프란시스코발 AP통신의 보도이었다. 국내정계는 이 보도를 둘러싸고 또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백범(김구)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미·소공동위원회나 그 밖의 어떤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정부가 수립될 경우에 대비하여 한국독립당의 강화를 위해 민족진영 제정당의 합당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44년 4월 18일에는 한국독립당·신한민족당·한국국민당 등 3당 이외에 급진자유당·대한독립회·자유동지회·애국동지회 등의 군소정당이 참여하여 한국독립당의 당세를 강화·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은 명실상부한 민족진영의 최대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환국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또한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이라는 공인으로서 통일된 자유독립국가의 완성을 위해 민족진영을 이끌어 가던 백범(김구)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가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확대·강화 작업이 완료되자 7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국 순회의 길에 올랐다. 인천과 공주 마곡사를 거쳐 윤봉길 의사의 고향을 찾은 백범(김구)은 4월 29일에 윤(윤봉길)의사의 14주년 의거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백범(김구)은 목이 메인 소리로 추도사를 읽다가 마침내는 제단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백범(김구)은 그 후 일본에 있는 박열(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여 효창공원에 세분의 유골을 안장하고 명복을 빌었다. 1947년에는 아들 김신(金信)을 중국으로 보내 이국땅에서 외로이 숨진 이동녕·차리석 두 동지의 유해와 함께 어머니, 맏아들 김인(金仁), 그리고 상해에 묻힌 부인의 유골을 봉안해 오게 하여 효창공원과 정릉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비록 작은 희망이나마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을 걸고 있었던 전 국민의 실망은 배가되었고, 통일국가 건설의 지연에 대한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우익 진영에서는 공동위원회(미·소공동위원회)가 소련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중단되자 이에 격분하여 또 다시 반탁운동에 총궐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 정세가 찬탁·반탁으로 인한 좌·우익의 대립,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와 결렬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정국은 더욱 혼란의 와중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발언에 대하여 백범(김구)과 한국독립당에서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백범(김구)은 남북한이 통일하여 전 민족을 대표하는 차원에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추호의 변동도 없었다.
한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새로운 형태의 좌우합작을 추진하여 앞으로 수립될 과도정부에서 합작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하여 앞서 본 민주의원과는 달리 「입법의원(立法議院)」이라는 기관을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김규식 등의 합작파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정부 수립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였다.
이와 같이 통일정부 수립의 전망은 보이지 않고 국내 정계는 혼란해져만 가는 가운데 다사다난했던 1946년이 가고 1947년 새해가 밝았다. 백범(김구)은 그동안 비교적 은인자중하던 태도를 바꾸어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매진할 것임을 신년사를 통해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그동안에 미군정 당국에 의해 추진되어 온 통일정부 수립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어떠한 외부세력도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자주적 민주의지를 바탕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정치 제일선에 나서야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다.
백범(김구)은 명분 없는 정치세력의 분열을 통탄하며 모든 정치세력의 단결을 절규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수십 년 독립운동의 법통을 계승한 「비상국무회의」를 중심으로 모든 민족세력이 집결하기를 희망하고 또 이를 추진하였다. 이 같은 백범(김구)의 민족진영 총단합의 주장에 호응하여 민족통일전선·독립촉성국민회·비상국민회의 등 3단체가 통합을 결의하고 그 통합기구의 명칭은 「국민의회(國民議會)」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백범(김구)은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건설의 동량인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건국실천원 양성소(建國實踐員 養成所)」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도미한 이승만 주로 미 의회 지도자들과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의 단정 수립을 위한 정책을 역설하면서 이들의 후원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이 무렵 미국 내에서도 점차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국 내의 정책 변화를 인지한 이승만은 곧 귀국하였고, 귀국환영대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의 절차를 빨리 완수해야 하며, 또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더 이상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또 다시 결렬되고 다른 한편 백범(김구)과 이승만이 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열되어 있는 동안 미군정은 공동위원회에서의 한국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였다. 미국 측은 소련의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총선거 실시 및 통일정부 수립 이후 미·소 양군 철수를 감시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엔한국감시위원단」을 설치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러한 유엔 총회의 결의에 대해 백범(김구)은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한다는 뜻만은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이 같은 이승만과는 달리 1947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이 성명서에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하지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비하여 단계적으로 그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이승만도 이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단독정부 수립이냐 통일정부의 수립이냐를 놓고 백범(김구)과 이승만, 미군정의 의견 대립이 심화되고 있을 무렵,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도착하였다. 이승만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나아가 「하루 빨리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며, 비록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된다고 해도 남한에 전 인구의 2/3이상이 살고 있으므로 그것은 통일정부임에 틀림없다고 역설하며 단정노선에서 조금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평소의 신념과 확신인 미·소 양군이 철수한 후 남북 지도자 회의를 통해 통일된 자율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948년 2월에는 자신의 이 같은 확고한 신념을 한국독립당 이름으로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한편, 유엔 한국임시위원장의 메논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에 협조해 줄 것을 요망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이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메논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의 주선을 요청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단정노선을 추구하는 인사들은 백범(김구)에 대해 끊임없는 비난과 공격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백범(김구)을 소련의 적화노선을 지지하는 자라고까지 비난하고 있었다.

3.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

백범(김구)이 이승만의 남한에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진정한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는 그 시기에도 일부 이승만과 미군정의 추종자들은 백범(김구)의 조국에 대한 통일 염원을 이해하기는커녕 백범(김구)을 소련 적화노선의 추종자라고 비난하며 공격하였다.
이러한 백범(김구)에 대한 모든 모략과 오해에 대해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조국분단이라는 비극의 가능성과 충돌의 위기를 거듭 환기시키고, 다시 한 번 통일 조국의 건설을 위해 자신의 신명을 바칠 각오를 굳게 다짐하는 성명서를 1948년 2월 13일에 발표하였다.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한다」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성명서는 백범(김구)의 자유민주주의의 수립과 완전한 통일정부의 수립에 대한 평소의 정치 신념과 애국충정의 마음이 그 어느 성명서나 발표문보다도 농도 짙게 표현되어 있다.

…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도출하여서 단선(單選), 단정(單政)의 노선으로 민족을 선동하여 국제연합위원단을 미혹하기에 전 심력(心力)을 경주하고 있다.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기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일 것이다.
…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鐵)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사리사욕을 탐하여 국가·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백범(김구)은 단정과 단선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을 일제치하에서 주구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친일파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통렬하게 비난하고, 미·소간의 대립이라는 국제적인 제약으로 단정 수립이 불가피한 상황일지라도 민족의 지상 목표인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평소 자신의 신념을 남김없이 토로한 명문장이었다.
백범(김구)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엔 소총회에서는 남한에서만의 총선거 실시를 결정하였다. 백범(김구)은 즉각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백범(김구)은 먼저 일개 국가(소련)의 반대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유엔의 무기력함을 통박하고, 자신은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과 부탕도화(赴湯蹈火)라도 불사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서 백범(김구)은 한국문제는 결국 한국인의 손에 의해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직접 북한의 지도자들과 교섭하기로 결심하였다. 백범(김구)은 김규식과 연명으로 1948년 2월 16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내 남북지도자가 직접 회담하여 민족통일의 진로를 개척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한편, 백범(김구)은 남한에서 만의 단독 선거가 공식화되자, 1948년 3·1절(3·1운동, 1919) 기념식에서 식사(式辭)를 통해 우리의 살길은 오직 자주독립의 한 길 뿐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민생문제 역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행동을 같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백범(김구)은 단정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여 3월 11일에는 백범(김구)을 서두로 하여 김규식·조소앙·조완구·조성환·김창숙·홍명희 등 7거두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유엔조차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였으니 우리 스스로가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도리밖에는 없다고 하여 남북 지도자가 직접 상면, 통일문제 해결의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월 25일이 되어서야 평양방송은 소위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북조선 노동당·조선민주당 등 6개 단체의 이름으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게 고함」이라는 초청장을 한국독립당·남로당 등 17개 정당·단체에 발송한다는 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이 초청장에는 백범(김구)과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다만 미국과 단독 선거 주장자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고, 일방적으로 오는 4월 14일에 평양에서 남북한 회의를 개최하자고 하는 매우 오만, 불손한 내용이었다.
평양방송이 있은 그 다음날, 김일성과 김두봉의 밀사가 서울에 당도하여 서한을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백범(김구)과 김규식의 서한을 받았음을 알리고, 이어서 전 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4월 초에 평양에서 개최하고자 하니 참석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김두봉과 김일성이 백범(김구)과 김규식의 제의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 요망에 대해 백범(김구)과 김규식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31일이 되어서야 일단 참석 원칙을 정하였다. 백범(김구)은 회담을 조속히 추진하기 위해 4월 7일 안경근과 권태석을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여 북한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오도록 지시하였다. 이들로부터 지극히 낙관적인 보고를 받은 백범(김구)은 즉각 북행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해 옮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국내외의 여러 가지 정세로 보아 김일성과 김두봉이 제안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담으로는 통일문제의 해결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또한 새로 수립될 남한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자신을 추대하려는 미군정 측의 간곡한 만류에 북행의 결과에 비해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북행을 주저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행이라는 중대 결정을 심사숙고한 끝에 내렸지마는 북행을 앞두고 매우 착잡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측근에게 밝힌 다음과 같은 말에서 저간의 백범(김구)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 웬 셈인지 이번 남북협상의 길을 떠나기 앞서서는 도무지 밥숟갈이 손에 잡히지 않는구료. 더구나 요새 며칠 동안은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소. 그야 내 나이가 늙어 노쇠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때의 사형선고는 나 개인의 문제였고 지금 이 남북협상문제는 전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그 의의가 한량없이 중대하오.

백범(김구)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행이라는 결심을 하고 이를 위해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일부에서는 그의 북행 결정을 모략·비난하고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방해와는 달리 백범(김구)의 북행 결심을 찬양하고 그와 뜻을 같이할 것을 맹세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남한의 지식층을 대변하는 문인 108명이 4월 18일에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감동적인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백범(김구)의 북행을 둘러싸고 열렬한 지지와 환영, 거센 반대가 연일 교차되는 가운데 백범(김구)은 마침내 4월 19일 오후 2시경 비서 선우진과 아들 신(김신)을 대동하고 경교장을 출발하였다.
백범(김구)은 개성, 사리원을 거쳐 20일 저녁 무렵에야 평양에 도착하였다. 김규식은 병으로 백범(김구)과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22일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인 조소앙·조완구·엄항섭·조일문 등과 함께 평양에 도착하였다.
백범(김구)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인 19일에 이미 평양에서는 연석회의가 시작되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백범(김구)과 김규식이 제안했던 남북정치 회담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연석회의였다. 연석회의로서는 남한에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남북한의 정치 협상의 자리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범(김구)은 회의 3일째인 22일 조소앙·조완구·홍명희 등과 회의 장소인 모란봉 극장에 참석하여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기본적인 원칙론만을 언급한 축사를 하고는 일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김규식 역시 병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70노구의 몸을 이끌고, 민족통일이라는 대과업을 달성하고자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평양에 도착한 백범(김구)은 남북협상이 북한 측의 극히 비민주주의적인 방법에 의해 진행되자 평양 근교와 만경대 등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4월 30일이 되어서야 백범(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인 남북요인회담이 개최되었다. 「4김회담(4金會談)」이라고도 불리는 회의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南北政黨·社會團體指導者協議會)」가 개최되어 그동안 합의된 사항에 대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백범(김구)과 김규식, 그리고 그 일행은 5월 5일 귀경하였다. 귀경 다음날 북행의 결과 보고 형식으로 백범(김구)은 김규식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백범(김구)이 통일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내던진 채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하였지만 이와는 달리 남한에서는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1948년 6월 초순에는 김두봉과 김일성이 백범(김구)과 김규식에게 제2차 남북요인회담을 해주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하여 왔다. 그러나 백범(김구)과 김규식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북한은 북한 지역 정권구성을 위해 1948년 6월 29일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8월 9일 이른바 ‘조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반도에는 38선을 경계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백범(김구)이 평생을 들여 노력한 남북통일 정부 수립은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이다.

4. 노혁명가의 최후

백범(김구)·김규식·조소앙 등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는 남북협상파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동안, 5·10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어서 7월 17일에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 중심제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다.
백범(김구)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7월 21일 김규식의 지지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촉성회」를 결성하였다. 통일방략을 모색하기 위한 이 단체의 모임에서 백범(김구)은 “우리는 친미·친소 보다도 먼저 우리 조국과 친하여 통일단결로써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하여 통일자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백범(김구)의 이 같은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피 끓는 절규는 도외시 된 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이른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순수한 애국의 일념으로 통일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받쳐온 백범(김구)은 남북한에 2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상황에서 착잡한 1948년 한해를 보내고 1949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신년을 맞이하여 백범(김구)은 여전히 통일의 염원을 재확인 하면서 자주적 민족정신에 입각한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서와 서예를 즐기면서 분단이 점차 고착화 되어가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백범(김구)이 남북한의 통일된 정부 수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활동을 하는 동안 1948년 10월에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사건이 발생하였고, 1949년 6월 초순에는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여 백범(김구)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실로 웃지 못 할 소문이 세간에 유포되기도 하였다.
운명의 날인 6월 26일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11시 30분경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었던 김학규의 소개로 몇 번 경교장을 방문했던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백범(김구)과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백범(김구)은 먼저 찾아온 손님과 환담 중이었다. 12시가 조금 지나 비서 선우진은 안두희를 백범(김구)의 거실로 안내하였다. 백범(김구)은 거실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선우진이 2층에서 내려온 지 2~3분이 지난 후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선우진은 불길한 예감에 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층계를 몇 계단 올라갔을 때, 한손에 권총을 들고 내려오는 안두희와 마주쳤다. 안두희는 「백범(김구) 선생을 내가 쏘았소」라고 하며 권총을 떨어뜨렸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고등경찰의 주구노릇을 하며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과 애국지사를 체포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한 노덕술·최운하, 그리고 당시 방첩대장 김창룡(金昌龍)의 묵시적인 지시를 받고 인간 백정 안두희는 백범(김구)의 가슴에 총을 쏜 것이다.
선우진이 정신없이 거실로 뛰어 들었을 때 백범(김구)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급히 인근 병원의 병원장이 달려 왔지만 백범(김구)은 이미 운명을 달리 하였다.
광막한 허허벌판 중국 대륙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조국의 통일과 완전한 자주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일신상의 안위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오직 독립과 통일만을 위한 한평생을 산 백범(김구)은 동족이 쏜 4발의 흉탄을 맞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마친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백범(김구)의 나이 74세였다.
7월 5일.
백범(김구)의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영결식이 서울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 장례위원장 오세창을 대신하여 조소앙이 조사(弔辭)를 읽었다.

… 선생(김구)의 웃는 낯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고 이 운동장은 울음과 한숨으로 차지하니 뜻 아니한 통탄을 금할 수 없노라. 무정한 초목도 슬픔에 고개를 숙이고 날아가는 새조차 날개를 멈추나니, 이제 선생(김구)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지와 무력을 버리고 민족진영이 협력하는 것뿐이다.

조사에 뒤이어 한국독립당을 대표한 엄항섭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엄항섭의 조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통곡으로 3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다시 울고 눈물 밖에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하늘이 선생님을 이 땅에 내실 적에 이 민족을 구원하라 하심이니 74년의 일생을 통하여 다만 고난과 핍박 밖에 없었습니다. 청춘도 명예도 환락도 다 버리시고 멀리 해외로 떠나시어 오직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살으셨습니다.…
선생님의 고난, 일생 지성일념이 이러했거늘 마지막에 원수 아니 동족의 손에 피를 뿜고 가시다니요!…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 왔는데 오늘 저녁 우리는 뉘게 가서 그 말씀을 듣자오리까?…

영결식이 끝나고 영구는 백범(김구)이 영원히 잠들 효창공원 유지에 도착하였다.
하오 7시 10분.
태극기에 감싸인 관이 서서히 땅 속으로 내리어 졌다. 이제 백범(김구)의 육신은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백범(김구)의 가슴에, 아니 우리 전 민족의 가슴에 총을 쏜 안두희는 백범(김구) 암살에 대해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늘날까지 이 땅에 살고 있다.
민족의 영원한 사표이자 대의의 화신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백범 김구. 선생은 통일 조국의 완성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기고 이렇게 차가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범(김구)은 죽지 않았다. 백범(김구)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민족정신의 상징으로서 우리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어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된다.

연보

1876. 8.29 (음 7.11) 1세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사이에서 출생. 아명은 김창암(金昌巖)

1887. 12세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한문공부를 시작

1890. 15세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통학하며 『한당시』·『대학』 등을 수학

1892. 17세 조선조 최후의 과거가 된 임진경과(壬辰慶科)에 응시했으나 낙방, 조선조 말기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고향으로 돌아와 『마의상서』·『손자』·『오자』 등의 관상서와 병서를 탐독.

1893. 18세 정초에 동학교도인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의 기본교리와 이념을 청취하고 동학에 입도.
동학에 입도 후 이름을 김창수(金昌洙)로 개명.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명에 선발되어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교주를 만남.

1894. 19세 4월초 팔봉접주(八峰接主)에 임명.
9월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

1895. 20세 신천군 청계동의 안태훈(安泰勳)을 찾아감.(안태훈은 안중근 의사의 부친임) 안태훈의 집에 거주하며 당시 명망이 높은 후조 고능선(後凋 高能善)에게 많은 훈도를 받음.
만주로 가서 김리언(金利彦) 의병진에 참가.

1896. 21세 2월 안악의 치하포에서 변성, 변복한 일본의 육군대위 토전양량을 처단.
5월에 해주옥에 감금된 후 7월에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1897. 22세 7월에 사형이 확정. 고종의 특별사면령으로 사형집행이 정지.

1898. 23세 3월에 인천 감리영 탈옥, 전국을 유랑하던 중 공주 마곡사에서 일시 승려생활. 법명(法名)은 원종(圓宗).

1899. 24세 환속하여 고향으로 돌아 옴.

1900. 25세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도에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으로 활동.
류인무(柳仁茂)와 교류. 다시 이름을 김구(金龜),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로 바꿈.

1901. 26세 2월에 부친 김순영 별세.

1903. 28세 공립학교 교원으로 재직. 이 해 여름에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을 만남. 그의 소개로 안창호의 누이 동생인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과 약혼하였으나 파혼.

1904. 29세 신천의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1905. 30세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이 체결되자 경성의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이준·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

1906. 31세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학무총감으로 추대되어 학교설립을 적극추진.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생활.

1908. 33세 황해도 재령군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으로 추대.
10월에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처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해주감옥에 감금되었다가 석방.

1910. 35세 서울에서 개최된 신민회(新民會)의 비밀회의에 참석.
* 이 비밀회의는 만주로의 대대적인 이민계획과 함께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무장대오를 양성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 회의였다.

1911. 36세 1월에 일제의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라는 일제의 조작극으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수감 중에 이름을 김구(金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침.

1914. 39세 형기를 2년여 남기고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인천 축항 공사장의 노무자로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7월에 가출옥.

1915. 40세 동산평 농장의 농감으로 있으면서 농촌 개량운동에 전념.

1919. 44세 3·1운동(1919) 직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선임.

1923. 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

1924. 49세 1월에 부인 최준례 여사가 폐렴으로 별세.
4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

1927. 52세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국무위원제로 변경. 백범(김구)은 내무장에 피선.

1928. 53세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 시작.

1929. 54세 5월에 『백범일지』 상권 탈고. 대한교민 단장에 추대.

1930. 55세 민족주의 정당인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가. 국무위원으로 국무령 겸 재무장에 취임.

1931. 56세 한인애국단 조직.

1932. 57세 1월 이봉창 의사의 동경 앵전문 의거와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지도.
양의사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항주·가흥·장사·기강 등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이른 바 유랑의 시대가 시작됨.

1933. 58세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중국 낙양군관 학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1935. 60세 11월에 이동녕·송병조 등과 한국국민당 결성. 이사장에 추대

1937. 62세 민족주의 진영 3당인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을 주도.

1938. 63세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을 위해 남목청에서 회의 중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

1939. 64세 5월에 민족연합전선의 결성을 위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만나 회담 결과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이라는 제목의 공동선언서를 발표.

1940. 65세 민족주의 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립.

1941. 66세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

1944. 69세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

1945. 70세 8·15해방으로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

1948. 73세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김규식 등과 평양행.

1949. 74세 6월 26일 경교장에서 민족의 반역자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 7월 5일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거행. 효창공원에 안장됨.

1962.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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