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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한용운의 생애와 독립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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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 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유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제1장 머리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우리민족이 반봉건(反封建)·반외세(反外勢)라는 내외적 과제에 직면하여 있을 때 출생하여 일평생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봉건왕조(封建王朝)의 말기적 모순들이 극명히 노출되어 있었다. 조정의 위정자들은 18세기 이래 토지문제를 비롯한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각종의 제도에 대해 진보적 개혁안을 제기한 실학자들의 요구를 기득한 정치권력에 안주하며 이를 외면하였다. 대내외적으로 착취와 쇄국만을 고집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의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거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였으나, 조정은 이를 억압으로 일관, 성장된 민중의식에 낙후되고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한편 당시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와 서구 열강국가들에 자원시장·상품시장의 대상지로 인식되어져 그들의 부단한 개항요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외 여건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이른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일명 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의 체결은 조선이 더 이상 폐쇄된 국가가 아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으나, 피동적으로 제국주의 질서 속에 강제 편입된 셈이다.
결국 오랫동안 쇄국정치를 고집, 국제사회와 단절된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쩔 수 없이 개국하게 된 조선으로서는 각종의 부작용이 야기되고, 열강국의 탐욕스런 이권쟁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하겠다. 이후 조선은 내부적으로 반봉건의 극복이란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외세로부터 민족과 국토의 주체적 보존이란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생·성장한 한용운의 생애는 다사다난 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한 지 3년 만에 출생하였고, 출생 몇 개월 전에 일본으로부터 부산(釜山)에 상륙한 콜레라가 전국으로 전염된 사건으로 상징되듯이 그는 출생과 더불어 반봉건·반외세라는 동시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만족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혀 민족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격랑과 위기시대의 여러 인물군상(群像) 가운데 한용운처럼 철저하게 반봉건을 부르짖고, 끝까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초지일관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불행을 당하여 그와 같은 우국지사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은 민족적 비극이었으나, 그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나마 크나큰 다행이었다.
그는 불교혁신운동과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반봉건을 부르짖었고, 3·1운동(1919)을 비롯한 민족운동을 주도하며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불교개혁의 선봉 승려로서, 문학가로서 폭넓은 활동과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어느 한 분야도 소홀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다양한 활동과 투쟁은 곧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서 전개된 해당 분야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은 곧 우리의 민족적 정기와 양심의 발현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사상과 활동은 그가 생존하던 당대에도 주목된 바 있다. 또한 그의 입적과 광복 후에 더욱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광복 직후인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는 주로 그에 대한 인간적인 추도나 회고 및 그의 작품 중의 일부가 주목되었고, 1960년대에는 문학사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주종을 이루며 불교 사상사적 입장에서의 검토가 병행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연구자들이 대개 만해(한용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와 서술상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이 지적될 수 있다. 한편 그의 일부 기행(奇行)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인(奇人), 또는 기벽가(奇癖家)로서 설명하여 한낮 흥미거리로 회자된 바도 있다. 이는 그로 하여금 기행을 하도록 한 세계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본제국주의 지배라는 시대적 배경과 상황논리가 결여된 다분히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인물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사고와 몸짓을 하도록 하였는가 하는 것과, 님의 침묵을 통해 절규코자 하였던 것, 또 그가 이를 통해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1970년대 이후 그의 문학·불교사상·독립투쟁 등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많은 업적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승려·시인·독립투사로서의 그의 사상 및 활동이 만족스럽게 설명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그를 삼위일체적 시각에서 전인적이고 종합적으로 수용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우리의 근현대사, 특히 일제강점하에서 끼친 활동과 영향의 폭이 넓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독립투쟁을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파란만장하고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속에서 그의 고뇌와 민족을 위한 지향점의 윤곽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개혁을 위해 애쓴 승려로서, 또한 끝까지 일제를 거부한 위대한 독립투사로서의 면모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시인 만해(한용운)에 대한 문학적 영역의 검토가 부족한 불완전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필자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으로, 독자 제현의 혜량을 바란다.
아울러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 자상하게 많은 교시를 해주신 중앙대학교 김호일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제2장 가계(家系)와 출가(出家)

1. 가계와 유년기

만해(한용운)는 봉건왕조가 기울던 1879년(고종16)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忠南 洪城郡 結城面 城谷里)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방씨(溫陽方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本貫)은 청주(淸州), 자(字)는 정옥(貞玉 : 호에 기재된 이름), 속명(俗名)은 유천(裕天), 득도 당시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오늘날 그는 법명과 법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 등에 스스로 애용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는 그간 학계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어 왔다. 즉 그의 선대가 누대(累代)의 사족(士族)이란 견해와,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가문은 관료귀족이나 선비의 집안이 아니라 경제적 실력과 얼마간의 교양을 갖춘 아전(衙前) 정도의 중인 출신 농촌지식인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그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교지(敎旨)나 전령(傳令) 등 문건의 자료적 가치를 전면 인정하여 내린 결론이며 후자의 경우는 그러한 문건자료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일부 인정하더라도, 19세기에 이르러는 신분질서가 조선전기에 비하여 크게 문란하였고 관료조직도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당시의 관행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1885년(고종 22) 충훈부(忠勳府)에서 만해(한용운)의 부 한응준에게 내린『판하사목(判下事目)』에 보면 응준(한응준)은 조선 태종조(太宗朝)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서원군(西原君) 이양공(夷襄公) 한명진(韓明溍)의 19세손으로 공신의 훈예(勳裔)라 되어 있다. 좌명공신이란 1400년(정종 2)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박포(朴苞) 등을 평정하고 방원[芳遠(이방원), 후의 태종]을 즉위케 하는데 공로가 있는 46명의 공신을 말한다.
그러나 좌명공신 46위(位)에 한명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공신(正功臣)이 아닌 수종자(隨從者), 즉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오히려 한명진은 세조(世祖)를 도와 찬위(簒位)케 한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서의 기록이 확인된다. 즉『단종실록(端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등에 보면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삼등(靖難三等)으로 논공이 되어 1452년(단종 원년)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이 되었다. 이후 1454년(단종 2) 2월 경인(庚寅)에 죽었는데[당시 직책은 전구서승(典廐署丞)], 가정대부병조참판(嘉靖大夫兵曹參判)에 추증되고, 양도(襄悼)라는 시호(諡號)를 얻었으나, 후에 예종(睿宗)의 시호를 범하였다 하여 이양공(夷襄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가문이 언제 홍성에 정착하게 되었고 어떻게 생활하였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전해 내려오는 교지나 전령 등의 자료의 진실성을 전제로 종합해 볼 때, 그의 가문에 일대 전기가 된 것은 만해(한용운)의 증조(曾祖) 인 한광후(韓光厚) 때인 듯하다. 즉 1862년(철종 13)에 내린 교지가 몇 개 있는데, 이를 보면 광후(한광후)는 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의 선대 및 비(妣)·처(妻)가 추증(追贈)되거나 격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타의 전령 등을 검토한 결과 만해(한용운)의 부 응준(한응준)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從五品)·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宣略將軍行忠武衛副司勇), 조부 영호(永祜, 한영호)는 선략장군행훈련원첨정(宣略將軍行訓鍊院僉正, 從四品), 증조 광후(한광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從二品)·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 등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가문이 실직(實職)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양반계층이었음을 알려 준다. 특히 무반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 갑오년(甲午年, 1894)의 전령과『홍주읍지(洪州邑誌)』의 기록은 만해(한용운)의 부 응준(한응준)이 동학(東學)의 토벌과 관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정작 만해(한용운) 자신은 그의 가문에 대하여 전혀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그의 부친에 대하여,

…고향에 있을 때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는데, 선친은 서책을 보시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 세우시고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걸사의 언행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세상형편, 국가사회의 모든 일을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시었다.…
(-시베리아를 거쳐 서울로-『삼천리(三千里)』1933년 9월호)

라 한 것이 고작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건대 그의 선대가 홍성에 정착할 때는 명분상 반렬(班列)에 있었으나, 실제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전통적, 봉건유교적 세계관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를 지닌 중인(中人) 정도의 농촌지식인이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고 보인다.
한편 그의 부친 응준(한응준)과 형인 윤경(允敬, 한윤경)이 창의대장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의병에 참가했다가 1896년에 전사하였다는 통설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홍성에서 1896년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瓉) 등이 주도한 전기의병과, 1906년 민종식의 주도로 전개된 중기의병은 우리 의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응준은 의병이 아니라 1894년 동학군 토벌과 관련하여 행목사(行牧使)에 차정(差定)되고 있어 이른바 갑오의려(甲午義旅)로 추측되며, 또한 한응준 사망년월은 1895년 3월로 확인한 바 의병 참여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형 윤경(한윤경)은 1929년 3월 6일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한 바, 민종식 의병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는 사실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소년 만해(한용운)는 몸은 작았으나 힘이 세고 모험심이 강하였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당찬 아이였다. 그는 6세 때부터 동리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였는데 매우 영특하였다고 한다. 이미 9세 때『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통감(通鑑)』을 해득하였으며,『서경(書經)』기삼백주(朞三百註)를 통달하였다고 전한다. 또한『대학(大學)』에 있는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책에 먹칠을 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14세(1892)에 향리에서 부친의 뜻에 따라 천안전씨(天安全氏, 貞淑)와 혼인하였다. 이후 그는 동리 서당의 숙사(塾師)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배운 옛 의인(義人)들의 기개와 사상을 숭배하며 자신도 그들과 같이 되고자 결심하였다. 이는 이미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버린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청년 만해(한용운)의 웅지였다. 그러던 중 1896년 홍성에서 김복한·이설·안병찬 등에 의해 주도·전개된 을미의병(乙未義兵)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18세인 1896년에 동학혁명군에 참여하여 홍주 호방을 습격, 1천 냥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1876년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반식민(半植民)·반봉건(半封建)의 상태로 전락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화사상·위정척사사상·동학사상이 대두되었고, 급기야 1895년 국모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의 사태와 그로 인해 고향에서 전개된 의병항쟁이 청년 만해(한용운)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고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출가와 입산(入山)

향리에서 한학 공부에 정진하며 혼인까지 한 만해(한용운)는 표연히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출가 동기에 대하여 동학군에 참가하였다가 패하여 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라는 회고를 통하여 이를 밝힌 바 있다. 여기에서 보면 그로 하여금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노자도 한 푼 없이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서울로 향하게 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의인이 되라는 교시와 국운이 기울어 가고 있다는 국가멸망의 위기의식, 그의 고향 홍주에서 동학, 의병운동이 전개되는 등의 상황전개가 그에게 더 이상 산속에 파묻혀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다른 뜻있는 사람들처럼 상경을 결심케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정말 쫓기는 몸이었다면 애초에 서울이 아닌 심산유곡의 은신처로 도피하였을 것이고, 상경 길에 한가로이 인생에 대해 고뇌할 여가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그의 출가 동기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혀 온 유교적 질서의식이 한계에 다다르게 된 정신적 혼란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위기의식이 그를 번민에 빠지게 했고, 결국 사회개혁과 국가자존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안고 집을 떠났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그의 출가시기에 대하여도 이견이 있다. 즉 18세·19세·25세 설이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그는 18세에 일단 출가하여 불목하니 생활을 하고 시베리아를 잠시 다녀온 뒤 일시 귀가하였다가 25세 되던 1904년 완전히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아들 보국(保國, 한보국)이 이 해 12월 21일 출생함].
한편 상경 길에 올랐던 그가 도중에 방향을 바꾸어 입산하게 된 동기도 그의 회고를 보면 다분히 즉흥적인 변경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그가 홍성의 어느 절에서『주역(周易)』을 공부하던 중 불교 교리에 깊이 빠져 유교서적을 불사르고 불교에 귀의키로 결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회고와는 다르다. 즉 그는 자신이 승려가 되게 된 동기를 종교에 대한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상경하던 도중 어느 주막집에 누워 적수공권이고 한학 밖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라고 술회하였다. 그곳에서 5·6일간 회의와 번민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겠고, 또한 인생 자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상경 길을 포기하고 보은(報恩) 속리사(俗離寺)로 갔다가 더 깊은 심산유곡의 큰절을 찾아 강원도 설악산(雪嶽山) 백담사(百潭寺)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불목하니와 동냥중의 생활을 하며 불도를 닦기 시작 하였다.
이처럼 그의 출가와 승려가 된 동기가 종교적 목적 때문이 아니었고, 또 다른 회고에서 밝힌 것처럼 당시 매우 쇠잔해 있던 불교계를 통해 무엇을 해보겠다고 판단한 것이 그의 현실인식의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간을 홍성에 묻혀 세상물정에 어둡고 연소하였던 그에게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고 숭유정책에 의해 국가적으로 배척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민중 속에 뿌리박고 있어 사회개혁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불교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해(한용운)는 1905년부터 본격적인 불교 수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해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로부터 득도하고 전영제사(全泳濟師)로부터 수계(受戒)하였으며,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서 기신론(起信論)·능엄경(楞嚴經)·원각경(圓覺經) 등을 강의 받았다. 또한 1907년 4월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서 수선안거[首禪安居, 최초의 선(禪) 수업]를 하게 되었다. 1908년에 다시 유점사(楡岾寺) 서월화사(徐月華師)로부터 화엄경(華嚴經)을, 건봉사에서 이학암사로부터 반야경(般若經)·화엄경을 수료하였다.
한편 1908년 그는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를 세우고 소장에 취임하였다 한다. 이는 일제의 침략마수가 본격적으로 미쳐 오자 이에 대응하여 개인과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전한다.
일단 불교의 교리를 수학한 만해(한용운)는 1909년 7월 강원도 표훈사(表訓寺), 1910년 9월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화산강숙(華山講塾)의 강사를 역임하며 교리를 설법하여 불교혁신과 대중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만해(한용운)는 1910년 3월과 9월에 각각 중추원(中樞院)과 통감부(統監府)에 승려의 취처를 건의하는 헌의, 건백서를 두 차례에 걸쳐 당국에 제출하여 불교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도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는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그의 불교개혁운동의 서곡이었다.
본격적인 불교 수학을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만해(한용운)는 불교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저술한『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탈고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그가 짧은 기간에 당시 불교계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혁신적 개혁안을 제기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것이다. 이는 첫째, 그가 소년기에 이미 습득한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어려운 불경을 철저히 독파하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둘째, 유교의 현세적 합리주의를 불교개혁론에 적절하게 접목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셋째, 반봉건요소의 척결에 대한 철저한 개혁사상과 이의 구현을 위한 의지가 확고하였으며 넷째, 우리 민족의 반봉건·반제국주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근대 서구의 자유·평등주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3. 국외순유(國外巡遊)와 근대 서구사상의 수용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불자 만해(한용운)의 초기생활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고백처럼 그리 철저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물욕·색욕에 움직일 청춘의 몸이 한갓 도포자락을 감고 고깔 쓰고 염불을 외게 되매 완전히 현세를 초탈한 행위인 듯이 보이나 아마 나 자신으로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철저한 도승(道僧)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년 승방에 갇혀 있던 몸은 그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길이 없어『영환지략(瀛環志略)』이라고 하는 책을 통하여 조선이외에도 넓은 천지의 존재를 알고 그곳에 가서나 뜻을 펴 볼까 하여 엄모(嚴某)라는 사람과 같이 원산(元山)서 배를 타고 서백리아(西伯利亞, 시베리아)를 지향하고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것이다.…
(-나는 왜 승(僧)이 되었나-『三千里』1930년 5월호)

…나의 입산한지 몇 해 안되어서의 일인데 나의 입산한 동기가 단순한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유벽(幽僻)한 설악산에 있은 지 멀지 아니하여 세간번뇌(世間煩惱)에 구사(驅使)되어 무전여행으로 세계만유(世界漫遊)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때쯤은 나뿐 아니라 조선 사람은 대개 세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별로 없었으므로 외국어 한 마디도 모르는 산간의 한 사미(沙彌)로 돌연히 세계만유, 더구나 무전여행을 떠난 것은 우치(愚痴)라면 우치요, 만용(蠻勇)이라면 만용이었다.…
(-북대륙(北大陸)의 하룻밤-『朝鮮日報』1935. 3. 8∼13)

즉 그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인생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계속되고 젊은 혈기를 누를 길이 없었던 터에『영환지략』이란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먼저 가까운 러시아로 갔다가 중구(中歐)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만해(한용운)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자극을 주고 세계여행을 결심케 하는데 영향을 준『영환지략』은 중국 청(淸)나라 때의 서계여(徐繼畬, 1795∼1873)가 1848년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은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우수성을 깨달아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은 지니되 서양적 수단을 채택해야 한다는 양무론(洋務論), 즉 중국과 서양의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현실적 반성으로 서양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환지략』은 1850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위원(魏源)의『해국도지(海國圖地)』, 정관응(鄭觀應)의『역언(易言)』과 함께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 등 우리나라의 초기 개화파에게 널리 읽히며 개화사상의 형성에 계기를 제공하였다. 만해(한용운)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는 한편 새로운 세계관과 세계질서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이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가 세계여행을 위해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시기는 정확치는 않으나 대개 1905년경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 해 초봄 백담사를 내려와 세계여행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였다. 도중 얼음이 녹아 흐르는 차디찬 가평천(加坪川)을 건너며 일체유심(一切維心)을 절감하고 맨주먹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사정과 지리를 너무도 모르는 나로써 진로와 사정을 대강이라도 알려면 그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울로 가야 하리라는 생각으로 설악산 백담사로부터 경성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때는 음력 2월 초순이라 깊은 산에는 물론 빙설이 쌓여 있으나 들과 양지에는 눈이 상당히 녹는 때이므로 산골 냇물은 얼어붙은 곳도 있지마는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곳도 있었다. 백담사에서 경성을 오려면 산로(山路)로 20리를 나와서 가평천이라는 내를 건너게 되는데, 그 물의 넓이는 약 1마장이나 되는 곳으로 물론 교량은 없는 곳이었다. 그 내에 이르매 내가 눈 녹은 물이 불어서 상당히 많았다. 물이 얼음보다 찬 것을 다소 경험해 본 나로서 건널목에 이르러 건너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계일주의 첫 난관이었다. 추운 때에 눈 녹은 물을 건너보지 못한 사람으로는 그만 것이 인생행로의 난관이 되겠냐고 웃을지는 모르지마는 한번이라도 건너본다면 그 어려운 맛을 알 것이다.
다리를 훨씬 걷고 건너기 시작하였다. 산골 내에는 흔히 대소부동한 둥근 돌이 깔렸는데, 거기에 물이끼가 입히면 미끄럽기 짝이 없어서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인데 이 가평천은 그런 중에도 더욱 심한 곳이었다. 건너기 시작한지 얼마 아니 되어서 물이 몹시 찰 뿐 아니라 발을 디디는 대로 미끄러지고 부딪쳐서 차고 아픈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중류에 이르러서는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 못하여 감각력을 잃을 만큼 마비가 되었으므로 육체는 저항력을 잃고 정신은 인내력이 다하였다. 가령 정신의 인내력은 다소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저항력과 감각력을 잃은 다리는 도저히 정신의 최후명령을 복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도 없고 나아가려야 나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유곡, 남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저앉는 것이 아니면 넘어지는 것뿐이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홀연히 생각하였다. 나는 적어도 한 푼 없는 맨주먹으로 세계만유를 떠나지 않느냐, 어떠한 곤란이 있을 것을 각오한 것이 아니냐? 인정은 눈 녹은 물보다 더욱 찰 것이요, 세도(世途)는 조약돌보다 더욱 험할 것이다. 이만한 물을 건너기에 인내력이 부족하다면 세계만유라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 스스로 나를 무시하는 동시에 다시 경책(警責)하였다.
차고 아픈 것을 참았는지 잊었는지는 모르나 어느 겨를에 피안에 이르렀다. 다시 보니 발등이 찢어지고 발가락이 깨어져서 피가 흐른다. 그러나 마음에는 건너온 것만이 통쾌하였다. 건너온 물을 돌아보고 다시금 일체유심(一切唯心)을 생각하였다.…
(앞의『북대륙의 하룻밤』중에서)

경성에 도착한 그는 세계여행에 필요한 도움말을 듣지 못하고 스스로 지도와 견문한 바를 토대로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여행 일정을 결정하였다. 배를 타기 위해 원산으로 가던 그는 동료 승려 두 명을 만나 일행이 되어 배에 올랐다. 전에 나룻배를 타 본 경험에 불과한 그는 신식의 큰 배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다다르며 항구에 묻은 수뢰(水雷) 때문에 접항을 못하고 러시아 배로 갈아타고 입항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의 국방을 위한 국가적 설비에 놀라며 상대적으로 초라한 조선의 국방형편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부두 근방의 여관에 동행한 승려와 함께 투숙했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시련이 닥쳤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부근에 거주하던 우리 교포 청년들이 머리를 깎고 그곳에 온 만해(한용운) 일행을 일진회원으로 오인하여 행랑을 검색하고는 내일 처치하겠다는 사형선언을 하고 여관 주인에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를 명하고 돌아간 것이다. 당시 그곳에서는 이러한 오해로 말미암아 조선인끼리의 살육이 종종 있어 온 터였다.
만해(한용운)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 밤을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지새웠다. 그는 앉아서 죽느니 기지를 발휘하여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모험심이 강하고 담력이 컸던 만해(한용운)는 이튿날 새벽 여관 주인을 대동하고 그곳 교민대표라는 엄인섭(嚴寅燮)이란 자와 이노야(李老爺)의 집을 직접 찾아가 그들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오해임을 설명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일행을 안심시킨 뒤 갑갑한 마음을 풀려고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그는 여기에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그를 미행한 5·6명의 조선청년들이 느닷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바닷물로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몸집은 작으나 완력이 남달리 세었던 만해(한용운)는 그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때 청인(淸人)이 달려들어 이를 말렸고, 러시아 경관이 달려와 말려 그는 또 한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동포간의 살육에 크게 낙담한 그는 대성통곡을 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원산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산까지 되돌아 갈 배삯이 없어 50리 되는 작은 바다만 배로 건너고 육지를 하염없이 걸어 연추(煙秋)를 지나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만해(한용운)에게 있어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하룻밤은 크나큰 충격이었고, 외부지향의지가 처음 맛본 좌절로써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후 백담사에서 불경의 연구에 전력하던 그는 이때를 전후하여 양계초(梁啓超)의『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을 접하며 근대 서구의 자유·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그의 개혁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중국 최고의 지성이며 사상가인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은 1902년 10월에 초간본이 나온 이후 1910년까지 7회에 걸쳐 증보와 재간을 거듭한 것이다. 그 내용은 정치·시국·종교·교육·생계·학술·역사·전기·지리·잡문(雜文)·유기(遊記)·담총(談叢)·운문(韻文)·소설(小說) 등 제반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은 구한말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지식층과 사상계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특히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하여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해 금서로 탄압 당하였다.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처하여 있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비슷하였고 문화적·역사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해(한용운)가 양계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은 그의 저술『조선불교유신론』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보면 그는 5회에 걸쳐 양계초를 직접 거론하고 있고, 칸트·베이컨·데카르트·플라톤·루소·뉴턴·다윈·헤겔·루터·존로크·볼테르·괴테·홉스·스펜서·와트 등의 사상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만해(한용운)는 그 자신이 이처럼 많은 서구 사상가들의 저작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양계초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서구 근대사상을 광범위하게 수용하여 그의 개혁사상을 형성하였음은 틀림없다. 한편 그는 1935년『조광(朝光)』이란 잡지에 기고한『최후의 5분간』이란 짤막한 수필에서도 양계초의 일화를 인용할 정도로 그를 깊이 흠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담사·건봉사·유점사 등지에서 교리를 연구하고, 설법에 힘쓰던 그는 190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동기에 대해 그는 한반도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고, 비단 불교문화뿐만 아니라 새 시대의 기운이 융흥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관(馬關)을 거쳐 동경(東京)으로 간 만해(한용운)는 조동종(曹洞宗) 종무원(宗務院)을 찾아 갔다. 그는 조동종의 대표자인 홍진설삼(弘津說三)과 교우하고, 그의 주선으로 조동종 대학(駒澤大學)에 입학하여 일본어와 불교를 수학하며 천전(淺田) 교수와도 교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즉 당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었고, 침략의 선봉을 문화란 미명하에 일본불교가 수행하고 있던 때에 만해(한용운)가 그 주역인 조동종 대표자와 교우하고 지원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만해(한용운)가 조선 불교계 자체의 현실적 진단은 정확하고 개혁의지가 확고하였으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일제의 침략을 민족적 위기로까지는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즉 그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때까지는 반봉건적 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하다가 이회광(李晦光) 일파의 친일매불사건에 대응한 종지수호운동(宗旨守護運動)을 주도하며 반제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해(한용운)에게 있어서 불과 몇 달 동안의 일본여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이었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유학중이던 최린(崔麟)·고원훈(高元勳)·채기두(蔡基斗) 등과 교우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3·1운동(1919)을 최린 등과 함께 계획하고 주도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1908년 10월 귀국한 만해(한용운)는 다시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 지리산(智異山) 등의 사찰을 돌며 불교의 대중화와 개혁운동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부터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이회광 일파의 친일매불행위에 격분하여 이듬 해 l월 송광사(松廣寺)·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 그들의 음모를 격파하였다.
1911년 가을, 만해(한용운)는 우리 동포를 만나 망국의 설움을 서로 달래고 조국의 장래를 논의하고자 만주(滿洲)로 건너갔다. 그는 동포들에게 고국의 사정을 전하고, 박은식(朴殷植)·이시영(李始榮)·윤세복(尹世復) 등의 민족지사들과 만나 목자 잃은 양떼 같은 동포를 보호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또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일제의 첩자로 오인하여 그를 미행하던 독립군이 숲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굴라재라는 고개에서 몇 발의 사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거의 죽기 직전, 불심이 깊었던 그는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의 환체를 보고 정신을 차려 피를 흘리며 인가를 찾았다. 다행히 중국인의 도움으로 대강 상처를 수습한 뒤 동포들의 마을로 와 달포 동안을 치료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총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을 체머리(요두증)를 흔들며 지내야 했다.
이 같은 만해(한용운)의 국외 순유와 서구 근대사상의 수용은 그가 반봉건의식과 함께 반제의식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반영하며 장차 불교를 통한 사회개혁과 독립투쟁의 선봉에 서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3장 불교혁신운동의 전개

1. 조선 불교계의 상황

조선은 건국 직후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표방함으로써 삼국시대 이래 정치·사상·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던 불교는 급격히 쇠락하였다. 간혹 세종·세조 같은 왕들에 의해 개별적이고 일시적으로 숭상, 보호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이후 불교에 대한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정신적 사유인 불교에 대하여 조선후기에 가해진 각종의 제도적 금압조치는 승려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천민과 비슷하게 전락케 하였다. 먼저 고려 광종 때 실시되어 승려들을 등용, 법계(法階)와 승직(僧職)을 수여하던 승과제도(僧科制度)가 연산군(燕山君) 때 폐지되어 승려의 배출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였다. 이는 명종(明宗) 때 일시 부활되었다가 다시 폐지됨으로써 불교는 왕실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동시에 승려의 사회경제적 신분도 전혀 보장 받지 못하였다.
한편 세종·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졌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가 1623년(인조 원년) 이후 승니(僧伲)의 도성출입 금지조치가 다시 내려지고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엄격히 지속되었다. 이로써 승려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현종대(顯宗代)에 오며 불교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즉 양민으로서 승려가 되는 행위를 일체 엄금하였고, 성안의 불사(佛寺)를 헐고 서당으로 고치도록 하였으며, 약간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사원전(寺院田)마저 몰수하여 버렸다. 특히 사원전의 몰수조치는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따라서 승려의 경제적 생활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후 영·정조(英·正祖) 때에도 사찰에 위패를 모시지 못하게 하고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재차 엄금하는 등의 불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법란(法難)의 연속 속에서도 호국충정을 표방하는 불교는 국난에 처할 때마다 이의 극복에 신명을 다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정유재란(丁酉再亂)·정묘호란(丁卯胡亂)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승려들은 의병장으로, 또는 승군을 조직하여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불행히도 이러한 승려들의 투철한 호국정신과 의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자학적 질서 속에서만 모든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다고 신봉하던 유생들은『벽이단(闢異端)』·『척사예(斥邪穢)』등을 끊임없이 조정에 올려 승려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 붙였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승려들은 양반과 지방사령은 물론 심지어는 아전들로부터 모멸을 받았고, 각종의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고 잡역에까지 동원되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양반 및 관속(官屬)의 사찰 행차 시 조금이라도 접대에 소홀하다면 구타당하는 경우는 예사였다. 또한 권세가나 양반, 아전들의 토색과 가렴주구로 관청용 메주·산나물·과일·지팡이·짚신·미투리 등을 수탈당하였다. 특히 사찰과 승려에 부과된 갖가지 응역(應役) 가운데에서도 지역(紙役)으로 인한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찰과 승려가 당한 각종 수난의 실정은 철종(哲宗)과 고종(高宗)때 예조(禮曹)에서 법주사(法住寺)에 내린 완문(完文, 부당행위 금지명령)과 통도사(通度寺) 승려들이 경상도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에 보낸 호소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승려들이 절을 떠나 텅 빈 이른바 무주공사(無住空寺)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승려들은 신분적 천대와 경제적 수탈의 역경과 수난을 참아 가며 부녀자와 민중 사이에서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존여비의 풍토 속에서 사회진출이 불가능한 부녀자, 지배계층의 수탈에 신음하던 일반 백성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주자학적 가치개념은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 없는 별천지의 것이었다.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을 찾았다. 이러한 사회풍조 속에서 불교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재래의 민간신앙과 결합하는 기형적 형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의 건국 이래 일시적 현상을 제외하고 계속되는 법란으로 말미암아 불교의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사찰과 승려의 사회적·경제적·신분적 지위가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 민중의 정신적 지주로써 존재해 온 불교는 피지배계층과 불우한 처지의 민중들에게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2.『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의 저술

만해(한용운)의 저작물은 200자 원고지 1만매 이상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중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1913년 불교서관(佛敎書館)에서 발행한『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최초의 인쇄출판물이다.
이 책은 그 자신이 “온 나라 사람들이 승려보기를 소·말이나 노예같이 하고”, “한번만 불교계를 들여다보아도 구역질이 난다.”고 한 당시의 조선불교의 현상을 비판하고 당면과제를 지적하여 자유·평등주의 사상에 입각, 개혁안을 제기한 실천적 지첨서이다. 여기에는 그의 모든 교육과 사색과 견문이 쇠락한 조선불교의 현상에 대해 전면적이고 비판적 형태로 집약되어 있다. 또한 그의 장래의 사상과 행동이 총체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이론 및 불교자유사상에 대한 일종의 교양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서문을 포함,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서문
2장. 서론
3장. 불교의 성질(論佛敎之性質)
4장. 불교의 주의(論佛敎之主義)
5장. 불교유신은 파괴로부터(論佛敎之維新이 宜先破壞)
6장. 승려의 교육(論僧侶之敎育)
7장. 참선(論參禪)
8장. 염불당폐지(論廢念佛堂)
9장. 포교(論布敎)
10장. 사원의 위치 (論寺院位置)
11장. 불가에서 숭배하는 불상과 그림(論佛家崇拜之塑繪)
12장. 불가의 각종의식 (論佛家之各樣儀式)
13장. 승려의 인권회복은 반드시 생산으로부터(論僧侶之克復人權이 必自生利始)
14장. 불교의 앞날과 승려의 결혼과의 관계(論佛敎之前道가 關於僧侶之嫁聚與否者)
15장. 주지의 선거방법(論住職選擧法)
16장. 승려의 단체(論僧侶之團體)
17장. 사원의 통할(論寺院統轄)
18장. 결론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해(한용운)는 이 저서를 통하여 불교의 교리는 물론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까지도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온 불교유신을 당장 실행할 수는 없으나, 시험 삼아 글로 나타내어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고자 한 것뿐이라는 자기 독백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론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나)에 있다는 논리를 장황할 정도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부문은 이미 유신이 되었으나, 유독 불교만이 유신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과 함께 ‘참다운 유신’이 실행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이는 유신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다른 승려들의 분발과 동참을 촉구한 것이었다.
3장에서는 미래를 계속적인 진보의 역사로 보고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적합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불교의 성질을 종교와 철학적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장에서 불교를 평등과 구세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양계초(梁啓超)·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 및 칸트·베이컨·데카르트·플라톤·루소 등 동서양 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며 이것이 불교철학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불교를 ‘철리(哲理)의 큰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5장에서는 유신을 파괴의 자손으로 규정하고, 유신의 정도는 파괴의 정도와 정비례한다고 하며 파괴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파괴의 대상이란 불교의 전래 이래 누적되어 온 각종의 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명의(名醫)가 살을 베고 피를 빼는 수술을 통해 병의 뿌리를 제거하듯이 피상적인 개량이 아닌 철저한 파괴를 주장한 것이다.
6장에서는 교육과 문명과의 관계와 승려교육의 급선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교육은 문명의 꽃이요, 문명은 교육의 과일이며, 교육이 기후라면 문명은 수은주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승려의 교육은 중요하며, 전문학의 기초로써의 보통학(普通學)·사범학(師範學)과 함께 인도·중국·구미로의 외국 유학을 그 급선무라 하고 있다.
7장에서는 현재 조선의 참선이 겨우 명목만 유지하는 형편이고, 십중팔구의 경우 선실(禪室)은 영리만 추구하고 선객(禪客)은 쌀로 사온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참선하는 방법도 옛사람은 마음을 고요히 가지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처소를 고요히 가지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개선책으로 각 사찰의 재산을 합쳐 큰 선학관을 만들어 선의 이치에 밝은 스승을 모신 뒤 일정한 시험을 과해 참가자를 가리며, 때로 참선의 정도를 시험하고 후에 저서를 내어 중생을 인도할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8장에서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염불을 참염불과 거짓염불로 나누고, 참염불은 부처님의 마음과 배움과 행(行)을 염(念)하여 참으로 소유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또한『후한서(後漢書)』마료전(馬廖傳)과『장자(莊子)』인세전(人世傳), 유자후(柳子厚)의 재인전(梓人傳) 등을 인용하며 거짓 염불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꼭 염불당에 모여 앉아 축음기같이 염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9장에서는 포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예수교와 대비하며 조선의 불교가 유린된 것은 세력이 부진하기 때문이며 이는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열성과 인내와 자애를 모두 갖춘 자를 완전한 포교인이라 하고, 그 방법으로 연설 및 신문·잡지의 이용, 불경의 번역, 자선사업 등이 모두 강구되어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10장에서는 산간에 위치하고 있는 절의 위치가 사상과 사업상의 불리한 점을 들고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절의 궁벽한 위치 때문에 사상적으로 ㄱ) 진보사상이 사라짐, ㄴ) 모험적 사상의 결여, ㄷ) 구세사상의 결여, ㄹ) 경쟁사상이 결여된다고 하고, 사업상으로는 ㄱ) 교육, ㄴ) 포교, ㄷ) 교섭, ㄹ) 통신, ㅁ) 단체 활동, ㅂ) 재정에 불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개선책으로 절을 산으로부터 도회지로 옮기는 세 가지의 단계적 방법을 제시 하였다.
11장에서는 ‘거짓모습의 거짓모습’인 수많은 불상과 그림 즉, 소회(塑繪)를 함부로 숭배하는 현상을 지적한 뒤 이를 가려서 하자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나한독성(羅漢獨聖)·칠성(七星)·십왕(十王)·신중(神衆)을 숭배하는 것은 부당하고 오직 석가모니 한 분만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념하는 취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교계에 특별한 행적이 있는 자의 위패를 관내에 모시는 것도 좋다고 하고 있다.
12장에서는 불가에서 행하는 재공양(齋供養)과 제례(祭禮) 등 각종 의식이 번잡·혼란하고 무질서하며 비열·잡박하여 ‘도깨비의 연극’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 개선안으로 매일 예불을 한 번씩 하되 삼정례(三頂禮)를 행하며, 또한 반공(飯供)도 의미가 없으니 폐지하자고 하고 있다.
13장에서는 승려들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해온 원인이 사취(欺取)와 개걸(丐乞) 생활에 있다고 보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여 인식을 새로이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는 승려들의 무위도식함이 근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분리(分利) 개념에 해당한다고 전제하고 길쌈과 농사일을 하여 스스로 생산하고 자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때문에 비록 자본이 없고 방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노동가치론과 이와 결부된 사회적 불평등의 경제적 기초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림사업(과일·차·뽕나무·도토리)과 공동경영 (주식·합자·합명회사)안의 제안은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주목된다.
14장은 승려의 취처문제를 언급한 파격적인 것으로써 가장 많은 파문을 일으킨 부분이다. 그는 이미 1910년 3월과 9월에 중추원(中樞院) 의장 김윤식(金允植)과 통감(統監) 사내정의(寺內正毅) 앞으로 승려들의 취처를 청원한 바 있는데, 다시 여기에 그 전문을 수록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청원의 이유에 대해 정치적 힘을 빌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사상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즉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전후하여, 특히 통감에게 청원하고 있음은 그가 반봉건적 이념은 철저하였으나, 당시 최대의 과제인 반제라는 시대와 민족의 본질적 명제는 깊이 인식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개혁론자로의 만해(한용운)는 있으되, 독립투사로의 만해(한용운)의 면모는 아직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그는 여기서 이 문제를 재론하며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모두 결혼하였으며 불교의 진수가 자질구레한 계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는 바로 불교를 부흥시킬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이라 하며, 승려의 결혼금지가 윤리·국가·포교·교화에 해롭다고 지적하고 있다.
15장에서는 과거의 주직(主職)의 선발방식을 통박하고 새로운 선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당시의 주직을 윤회·의뢰·무단주직으로 유형을 구분하며, 이는 통일성과 봉급이 없는 등 승려의 법규가 서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절의 크기와 사무의 분량을 고려하여 월급을 정하고 3분의 2의 찬성을 받은 자를 주직으로 선출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16장에서는 당시 승려들의 방관적 자세를 6가지 형태, 즉 혼돈(混沌)·위아(爲我)·오호(嗚呼)·소매(笑罵)·포기(暴棄)·대시파(待時派)로 나누어 설명하고 절대로 깨지지 않는 정신적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승려들이 갚아야 할 은혜를 부모·부처님·중생의 은혜라 하면서, 특히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불효를 다음과 같이 자탄하고 있다.

나는 본래 탕자(湯子)였다. 중년에 선친이 돌아가시고 편모를 섬겨 불효에 이르렀더니, 지난 을사(乙巳 : 1905년)에 입산해서는 더욱 흩어져 국내·국외를 떠돌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집에 소식을 끊고 편지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난해에 노상에서 고향사람을 만나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3년이 지났음을 전해 들었다. 이로부터 만고에 다하지 못할 한을 품게 되었고 하늘의 크기로도 남음이 있는 죄를 짓는 결과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도록 이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고 떨리고 용납하기 어려워 가끔 사람과 세상에 뜻이 없어지기도 한다. 붓을 잡고 이 대목에 이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막히고 몸이 떨린다. 감히 천하에 알림으로서 벌이 내릴 것을 기다린다.

이는 인간 만해(한용운)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17장에서는 당시 불가의 무원칙한 변화는 통할이 없고 일정한 지휘가 없기 때문이라 진단하고, 불가를 살리기 위해 통할의 시급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혼합과 구분 통할의 장단점을 제시하였으나, 당시 불교계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통할할 수 없어 그 방책을 끝내 제시할 수 없음을 개탄하고 있다.

마지막 결론으로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전혀 사심이 개입되지 않았음을 강조한 뒤 승려 동지들에게 불교개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만해(한용운)는 이 저술을 통해 진보적 관점에서 상호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소개하여 새롭고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서양의 자유·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의 자율성·모험정신·경쟁정신 및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의 도입까지 강조하는 등 투철한 근대시민정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특히 서양 사상가들의 논리를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견해가 다를 경우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불교라는 특정 분야에 합리적으로 적용한 것은 우리 근대사상사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인간의 내면적 자유는 강조하였으나, 사회적 자유를 간과하였으며, 불교적 평등은 인정하면서도 민족적 평등을 도외시 한 채 승려의 결혼문제를 일본총독에게 청원하는 등 당시 민족의 본질적 명제를 등한시한 것은 이 저술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직 당시의 사회와 시대적 상황이 서구의 사상을 완전히 수용할 자세를 갖추지 못하였고, 또한 만해(한용운) 자신 개혁의 관점이 그의 신분상 불교계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서 초래된 불가피성은 감안되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3. 불교 자주화운동

일제는 1876년 강제 개항 직후부터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진종(眞宗)·일련종(日蓮宗) 등의 불교와 이미 일본에 뿌리내린 기독교 등 종교를 전위적인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일제에 있어서 종교는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식민침탈의 사상적, 문화적 수단이었다.
그들은 유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한편 대개 무지한 조선 민중들에게 신앙의 대상이던 불교를 본격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우선 공략하여야 할 대상으로 선정하고 국가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일본 불교의 조선이식을 추진하였다. 이는 종교와 제국주의의 동반적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되자마자 일본 내무경(內務卿) 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과 외무경(外務聊) 사도종칙(寺島宗則)은 진종 본원사(本願寺) 관장인 엄여상인(嚴如上人)에게 조선으로의 포교를 종용하였다. 이에 1877년 장기현(長崎縣) 고덕사(高德寺)의 주지였던 오촌원심(奧村圓心)과 평야혜수(平野惠粹)를 파견하여 본원사 부산별원(釜山別院)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불교를 조선에 이식한 것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거짓임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일본인의 내왕이 잦아지면서 그들은 본래의 의도를 계획대로 진행시켜 나갔다.
이는 조선에 최초로 파견된 일본 승단의 거물인 오촌원심의『조선국포교일지(朝鮮國布敎日誌)』에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일지는 그들이 1877년 8월 16일 조선국으로 출장을 명령받은 이야기부터 시작, 1897년 6월 오촌(오촌원심) 남매가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기 직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은 포교를 떠나기 직전 일본정부와 긴밀히 협의하여 ‘국가를 위하고 불법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진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불교와 제국주의가 야합한 단적인 증거이다.
오촌(오촌원심)은 포교원 양성을 위해 부산에 선어학사(鮮語學舍)를 세우고 본원사 승려를 데려다가 조선어와 관습을 가르치는 등 포교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이들과 조선 정계, 즉 개화당 인사들과의 관계이다. 이 자료에는 개화승인 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挺埴)이 특별한 관련이 있었고, 배차산(裵此山)·유대치(劉大致)·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등도 발견된다. 이를 통해 개화파의 갑신정변(甲申政變, 1894)과 일본 정부의 사주, 개화파 인사와 오촌(오촌원심)의 부산별원과의 관계를 연계해 볼 때 그들의 포교 이외의 활동, 즉 정치에의 간여는 명확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97년 7월 다시 조선에 온 오촌(오촌원심)이 그의 누이동생 오촌오백자(奧村五百字)와 함께 이듬해 초 본원사 본산(本山)에 제출한 포교정책안은 조선인에 대해 식산흥업(殖産興業)을 강조할 것, 조선인의 일본시찰 장려, 학교를 설립하여 실업교육에 힘쓸 것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외무성(外務省)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며 포교에 힘쓰고 있는데, 이는 조선인의 환심을 사서 장차 도래할 본격적인 식민지배의 기반을 확충하고 이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과 충격을 사전에 약화시키고자 한 정치적 의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같은 진종 본원사에 이어 1891년 일련종, 1895년에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1897년에 정토종(淨土宗), 1906년에 조동종과 진언종(眞言宗)이 잇달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 중 1894년에 입국한 일련종의 좌야전려(佐野前勵)의 행적과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조선 불교를 일련종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먼저 조선 승려와 불교도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 승려와 불교도들이 가장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 인조 이래 27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승려의 입성금지조치임을 간파하고 그 해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각 사찰의 승려들에게 이 취지를 알려 호응을 받으며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게 진정서를 올리는 한편 각 대신(大臣)들을 방문하여 입성해금운동을 폈다. 심지어 대원군(大院君, 흥선대원군)까지 방문, 적극적인 활동을 펴, 결국 1895년 4월 해금을 실현시켰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급진적으로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 불교계는 1899년 전국사사통일안(全國寺社統一案)을 발의, 동대문(東大門)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 이를 조선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로 하고 각 도(道)에 1개의 수사찰(首寺刹)을 두어 해당 도의 사찰을 관장하게 하였다. 사실 이는 일본의 승정제도(僧政制度)와 비슷한 형태였다. 1902년에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립, 36조로 된 사사관리현행총칙(寺社管理現行總則)을 칙령(勅令)으로 반포하여 전국의 사찰을 통관하였다.
한편 1906년 초에는 이보담(李寶潭)·홍월초(洪月初) 등이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조직, 본부를 원흥사에 두고 명진학교(明進學校)란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정토종의 정상진현(井上眞玄)과 결탁, 종지(宗旨)를 정토종으로 선포하고 말았으니, 당시 조선 불교에 대한 일본 불교의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이른바 1905년의 을사조약(乙巳條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 야욕이 노골화되자 우리의 불교계도 이에 민감히 반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8년 이회광일파의 원종(圓宗)선포였다. 이는 불교연구회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1908년 3월 6일 전국승려대표 52인이 원흥사에서 모여 종명(宗名)을 원융무애(圓融無礙), 선교원수(禪敎圓修)를 의미하는 원종(圓宗)이라 한 것이다. 그들은 당시 해인사(海印寺) 주지였던 이회광을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하였다. 이는 8개의 부서까지 둔 한국 불교의 근대적 통일기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일진회장(一進會長) 이용구(李容九)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 승려 무전범지(武田範之)를 고문으로 맞이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원종은 1910년 수송동(壽松洞)에 각황사(覺皇寺)를 건립, 조선불교중앙회의소 겸 중앙포교소로 운용하고 기관지『원종(圓宗)』을 발간하는 등 나름대로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인 이해 10월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관장 석천소동(石川素童)을 만나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맹약을 합의하고, 조동종 종무대표자인 홍진설삼(弘津說三)과 다음과 같은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1. 조선 전체의 원종 사원중(寺院衆)은 조동종과 완전 또는 영구히 연합 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2.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을 의촉(依囑)할 것.
3.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얻음에 알선의 수고를 담당할 것.
4.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할 것.
5.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위탁하고 또는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정하여 포교사를 파견하는 때는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원(首寺院)에 숙사(宿舍)를 정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승려교육에 종사케 할 것.
6. 본 체맹(締盟)은 쌍방의 뜻이 합치되지 않으면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할 수 있다.
7. 본 체맹은 그 관할처의 승인을 얻는 날부터 효력을 발생함.

명치(明治) 43년 10월 6일
조선 원종대표자 이회광 󰂙
조동종종무대표자 홍진설삼 󰂙

이 계약의 주안점은 조선불교 측에서 본다면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일본 조동종에 의뢰한 것이며, 반면 일본 조동종 측에서 본다면 조선의 사찰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이회광의 개인적 야욕에 기이한 것으로써 친일매불(親日買佛)이며 개종역조(改宗易祖) 행위였다. 이회광은 귀국 직후 총독부에 이 동맹의 승인을 얻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동맹의 내용이 조선 불교의 조동종화, 즉 일본 불교에의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독부의 승인은 시간과 절차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만해(한용운)는 1911년 1월 15일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김종래(金鍾來) 등과 호남일대에서 기치를 세우고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궐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고 원종에 대응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창립,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았다. 이해 3월 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추대된 만해(한용운)는 전국에 포교소를 설치하여 전통의 임제종 종지(宗旨)를 선양하였다. 이는 곧 불교의 자주화 운동, 종지수호운동인 것이다.
결국 우리 불교계는 원흥사를 중심한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이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총독부는 양종의 대립, 분열상을 방관하다가 이해 6월 불교의 보호육성이란 미명하에 전문6조의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였다. 이는 전국 모든 사찰에 적용되는 것으로써 조선의 불교조직과 행정의 총독예속화를 의미하는 악법이었다. 한편 이해 9월 전문6조의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이 시행되어 전국을 30본산으로 규정, 지배하였다.
이로써 만해(한용운)의 주도하에 전개된 임제종 운동은 친일매판적 불교를 격파하고 종지수호에 일단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의 계속되는 간섭과 탄압을 극복해야 하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임제종 운동은 만해(한용운)의 사상과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즉『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 때까지 반봉건의식에 가려져 있던 반제의식이 불교의 자주화 운동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총독부를 상대로 꾸준히 종정분리(宗政分離) 투쟁을 전개함은 물론, 3·1운동(1919)을 주도하였고 이후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4. 불교 대중화운동

내면적 갈등과 혼란한 대외정세로 인한 번민과 방랑 끝에 1905년 그는 완전히 불가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스스로의 불심연마와 불경연구에 전념하였고,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불경을 설법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혁신적인 불교계의 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제거하여 예전의 번성했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여 대중 깊숙이 뿌리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바로『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은 그런 그의 사상과 행동적 지침을 완성한 것이며, 친일매판불교에 대항한 불교의 자주화운동, 즉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은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만해(한용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각종 불교제도의 보완 및 개선과 함께 포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본『조선불교유신론』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공법(公法) 천 마디가 대포 일문(一門)만 못하다’는 서양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진리와 세력과의 상관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분명 도덕과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야만적 문명의 발상이나 ‘세력이 없어서 경멸받는 조선 승려’의 입장에서는 한번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인정하며, 이를 타종교와 불교와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즉 불교의 만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타종교도 악착스레 활약하여 그 뜻을 펴고 있는 터에 현묘광대(玄妙廣大)한 불교가 어깨가 처지고 움츠러져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곧 포교가 미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는 근거도 불교의 계율에 얽매여 애를 낳지 못하게 한다면 불교의 포교는 물론 보존조차로 힘들다고 하는 파격적인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불교 대중화의 한 방편으로 불경을 주석·정리하여 간행하는 작업에 크게 노력하였다.『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1910)하여 이를 간행(1913)하던 시기를 전후하여(1909∼1914)『불교교육불교한문독본(佛敎敎育佛敎漢文讀本』이란 책을 편하였다. 이 책은 별로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은 것이나 그의 승려교육에 대한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을 알 수 있다. 이미『조선불교유신론』에서 승려의 교육을 강조한 바 있던 그가 실제 교육용 교재로써 직접 정리, 필사한 것이다. 이는 곧 승려의 교육은 물론 포교와 연관하여 볼 수 있는데 불교혁신의 진행과정으로 이해된다.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은 4권 229과로 된 미완성의 저작이다. 이 책은 표지의 하단 부분에『용봉양사연합 예천포교당인(龍鳳兩寺聯合 醴泉布敎堂印)』이란 소장인(所藏印)으로 미루어 볼 때 용문사(龍門寺)와 명봉사(鳴鳳寺)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예천포교당에서 교재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내용을 보면 권1은 주로 기초 한자와 기본 어휘의 습득을, 권2는 권1의 기본 어휘를 토대로 불사(佛事)·교양(敎養)·고사(故事)를 소재로 한 기본구문의 습득을, 권3은 기본 구문을 더욱 확대하여 긴 문장을, 권4는 불교원전을 그대로 소개하는 등 소재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이는 한문습득과 불교교리의 이해정도에 따라서 진도 별로 난이도를 달리하는 배려를 한 것이다. 비록 미완성의 유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다양한 소재의 선택과 유려한 문체는 그 자신이 불교 연마과정에서 체득한 산경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1914년 4월에는 초인적인 정력으로 방대한『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독파하고 이를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요약, 정리한『불교대전(佛敎大典)』(국반판 800면, 범어사)을 간행하였다. 원래 불교의 장경은 매우 방대하고 난해하여 일반인은 물론 승려들조차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해(한용운)는『조선불교유신론』의 탈고 직후인 1912년부터 경남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에 보관중인 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고 경(經)·율(律)·론(論)을 뽑아내어 요약해 냈다. 한번 읽어 보기조차 어려운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읽고 이해한 뒤 이를 재구성하여 편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돈독한 불심과 해박한 교리, 철저한 불교개혁과 대중화의 의지가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불교대전』은 서품(序品)·교리강령품(敎理綱領品)·불타품(佛陀品)·신앙품(信仰品)·업연품(業緣品)·자치품(自治品)·대치품(對治品)·포교품(布敎品)·구경품(究竟品) 등 9개 품(品)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구성상 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결국『조선불교유신론』이 불교의 혁신을 불교계에 호소한 것이라면, 이는 불경을 간이화·실용화하여 실제 승려의 교육과 불교 대중화의 초석을 이룬 것이다. 또한 불교의 근대화란 관점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한편 1917년 4월에는『정선강의 채근담(精選講義 菜根譚)』(포켓판 276면, 동양서원)을 간행하였다. 본래『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明)나라 말기 홍자성(洪自誠)이란 사람이 펴낸 책으로 유(儒)·불(佛)·도(道)의 삼교일치(三敎一致)의 통속적 처세철학서이다. 이는 예로부터 동양인의 정신수양서로 널리 읽혀 온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이 책의 서문에서 조선 정신계의 거울로 읽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원문의 해독은 물론, 해박한 자신의 지식과 번뜩이는 기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자신의 강의를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은 승려들의 교양교육은 물론 일반인의 교양교재로서의 가치도 지니는데 그의 교육에 대한 의지의 일단을 알 수 있다.
3·1운동(1919) 전 해인 1918년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수양 잡지인『유심(維心)』(국판 60여면, 신문관)을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집필진은 편집 겸 발행자인 만해(한용운) 자신 및 박한영(朴漢永)·백용성(白龍城)·권상로(權相老) 등 대개가 불교도였으나, 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현상윤(玄相允) 등 사회 저명인사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국여(菊如)의 소설『오(悟)』가 연재되고 있고, 보통문(普通文)·단편소설·신체시가(新體詩歌)·한시(漢詩) 부문을 현상 공모하여 소설과 논설, 시가부문의 당선작과 가작을 발표하고 있어 문예지로서의 성격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만해(한용운)는『유심』창간호의 권두사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싣고 있다

배를 처음 띄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 바람이 굳셈이라
서리 아래에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대(竹)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느니라
미(美)의 음(音)보다도 묘(妙)한 소리
거친 물곁에 돗대가 난다
보느냐 새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의 장애를 타파하고 대양(大洋)에 도착하는 득의(得意)의 물결을
보이리라 우주의 신비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

한편 그는『심(心)』·『조선청년과 수양』·『고통과 쾌락』·『고학생(苦學生)』·『전로(前路)를 택(擇)하여 진(進)하라』·『학생의 위생적 하기자수법(夏期自修法)』·『마(魔)는 자조물(自造物)이다』·『자아(自我)를 해탈(解脫)하라』·『천연(遷延)의 해(害)』·『전가(前家)의 오동(梧桐)』·『무용(無用)의 노심(勞心)』·『훼예(毁譽)』등의 논설과 수필을 비롯하여 격언집인『수양총화(修養叢話)』및 타골의 원저를 연속하여 번역·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불교의 교리를 해설함과 함께 특히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계몽적 성격이 강하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불교 대중화 작업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장차 그가 참여할 항일운동과 사회계몽운동의 신호탄인 것이다. 또한『님의 침묵』이전의 문학형성에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잡지에 최린·최남선·현상윤·임규(林圭) 등이 논설을 게재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이들은 3·1운동(1919)의 초기 계획단계와 진행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때문에 만해(한용운)가 3·1운동(1919)의 초기 계획단계에서 최린을 수차 방문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불교계의 대표로서 민족대표로 참가 한 것도 도일(渡日) 당시의 면식과 함께『유심』을 통한 교유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3·1운동(1919)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고 난 얼마 뒤인 1925년 오세암에서『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여 이듬해 5월에 간행하였다(4·6판 34면, 법보회).『십현담(十玄談)』이란 당(唐)나라 때 상찰선사(常察禪師)가 저술한 선화게송(禪話偈頌)으로 분량은 적으나 의미가 난해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일찍이 중국에서 이를 주해한 것이 있으나 만해(한용운)의 주해가 더욱 선명하고 평이하다고 평가된다. 이는 만해(한용운)의 선(禪)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의미한다. 또한 이 해에 그가『님의 침묵』도 발표하고 있어,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불경의 주해를 통한 실용화·현대화·대중화 작업도 계속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해(한용운)의 불경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구의 노력은『유마힐소설경강의(維摩詰所說經講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강의는 400자 원고지 148장의 친필로 된 미완성·미발표 원고이다. 원래『유마경(維摩經)』은 대중불교(大衆佛敎)를 신봉하던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14품(品)으로 정리한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이중 제6품인 불사의품(不思議品)까지는 번역과 강의를 하고, 제7품 이하는 원문만 소개하고 있다. 그의 강의를 정독하면 불자로서의 만해(한용운)는 물론 시인이자 독립투사로서의 면모까지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4장 3·1운동(1919)의 주도

1. 준비기의 활동

3·1운동(1919)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획기적인 항일투쟁이었다. 이러한 3·1운동(1919)에서 만해(한용운)가 초기 계획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만해(한용운)의 3·1운동(1919)에 관한 활동과 업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① 1919년 1월 말경의 초기 계획단계부터 천도교 측 대표들과 회합하며 계획 수립, ② 유림과 불교계 측의 참여 유도, ③ 민족대표로 서명, ④ 독립선언서의 불교계 배포, ⑤ 3월 1일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주도, ⑥ 꿋꿋하고 의연한 옥중, 법정투쟁, ⑦ 옥중에서 독립사상을 정리한『조선독립(朝鮮獨立)에 대(對)한 감상(感想)』이란 논설 발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3·1운동(1919)시 만해(한용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고, 활동 또한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학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그의 활동을 둘러싸고 이견이 대립된 부분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일부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도 일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재론의 여지도 없이 만해(한용운)는 훌륭한 독립투사이자 문학가요, 불교개혁자이다. 때문에 불필요하게 그의 기행(奇行)을 부각시킨다든가 부정확한 활동 내용을 강조한다면 훌륭한 선인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사항은 인물의 전기적 연구에서 상당히 신중을 기하여야 하리라 믿는다.
이제 사실과 자료에 입각하여 3·1운동(1919)에서의 만해(한용운)의 활동을 추적하고자 한다. 1905년 입산, 승려가 된 이래 불교의 혁신과 대중화를 위해 전념하던 그가 3·1운동(1919)의 선봉에 서게 되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친일매불음모의 타파와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을 주도하며 제국주의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어 민족이 처한 본질적이고 당연한 과제를 자각하게 되었던 점이다. 종래 반봉건의식에 가려져 있던 그는 이제 반제투쟁을 보다 시급한 상위적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유심』의 창간과 운영은 그에게 불교외적인 분야로까지 시야를 확대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를 통해 비록 불교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그의 수필과 논설에서도 역설하고 있듯이 젊은 청년과 학생들에게 사회계몽적 차원에서 자각과 진취적 활동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우열론과 적자생존론을 인용, 이를 선악의 개념으로 설명하며 우자(優者), 승자(勝者)가 될 것을 강조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타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최린·최남선·현상윤·임규·백용성 등 3·1운동(1919)의 주도적 인사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여 이들과 교유하며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그의 예리한 정세판단 능력과 상황변화에 대한 논리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이미 앞의『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 설명을 통해서 그가 근대 서구의 자유·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불교계를 혁신코자 하였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제 그는 자유평등의 개념이 국가 간에도 적용되어야 하리라 생각하고 제국주의적 질서를 부정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외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던 중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제청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를 조국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여 능동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민족자결주의(National Self-Determination)는 제l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이 종전 후의 패전국 식민지 처리원칙으로 발표한 14개 조항 중 제5항의 내용이다. 따라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에는 적용될 성질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해(한용운) 등 민족지도자들은 이러한 민족자결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알면서도 이를 조국독립의 주체적·능동적 기회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만해(한용운)는 1919년 1월 말경 그가 일본에 갔을 때부터 알게 된 최린을 방문하여 시국담을 나누던 중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등 우리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던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에도 최린은 물론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수시로 회합하여 계획을 추진하였다. 사실 이 시기는 이미 천도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추진 중에 있던 때였다.
결국 만해(한용운)는 천도교 측에 의해 추진 중인 계획에 동참, 불교계와 연합하게 하여 박차를 가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인 판사의 심문에 대한 최린의 답변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최린은 만해(한용운)와의 관계를 묻는 심문에 만해(한용운)와의 상면시 천도교 측에서 이미 진행 중인 계획을 비밀의 누설을 우려하여 말하지 않았고, 만해(한용운)가 참가하겠다고 하여 가입시켰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따라서 만해(한용운)가 먼저 제안하여 손병희(孫秉熙)에게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여 참가케 하였다는 등의 왜곡된 서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의 추진체, 즉 종교계의 세력판도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세운동의 추진과정에서 만해(한용운)는 유림(儒林)과 불교계의 포섭을 담당하였다. 그는 먼저 경남 거창(居昌)에 거주하던 영남(嶺南)의 거유(巨儒)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만나 민족대표로 참가하겠다는 동의를 구하고 2월 24일 서울로 올라왔다.
이 과정에 대해 만해(한용운)는 공소공판에서 곽종석을 만나기 위해 거창에 내려 갈 때 정탐이 미행하였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사정상 민족 대표로 서명 날인하지 못한 그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실 곽종석은 민족대표로 참가하겠다고 쾌락을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3월 1일 직전 급환이 생겨 아들 편에 인장을 주어 만해(한용운)를 찾아 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곽종석의 아들은 2월 말 상경하여 만해(한용운)를 찾았으나,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긴박한 일정과 상황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끝나는 날 잠시 만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곽종석은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는 못하였으나 실제는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는 곽종석이 후에 유림의 대표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제출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어 만해(한용운)는 불교계 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포섭을 시도하였다. 범어사(梵魚寺)에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하였으나, 워낙 시일이 촉급하고 불사가 산간에 위치하여 제대로 연락이 닿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불교계 인사를 가입시키지 못하고 2월 27일 당시 해인사 승려이던 백용성(白龍城 일명 白相奎)만 가입시키는데 그쳤다. 따라서 비록 천도교 측 대표 15명, 기독교 측 대표 16명과 비교해 볼 때 불교계 측 대표가 2명뿐이라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해(한용운)와 백용성이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불교계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이필주(李弼柱)·함태영(咸台永)·최남선(崔南善) 등과 회합하여 서명자의 배열을 정하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28일 밤에는 가회동(嘉會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최종적으로 만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23명의 민족대표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희도(朴熙道)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경우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게 되어 일본 군경과의 충돌로 불상사가 야기될 것을 우려하며 장소의 변경을 제안하자 이에 찬성하였다. 이어 손병희의 제안으로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결정하였다. 또한 독립선언 후 일경에 체포되더라도 피하지 말고 행동을 함께 할 것이며, 그 동안의 경과를 감추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주장할 것을 결의하는 등 행동지침을 통일하였다.
한편 그는 이날 독립선언서의 불교계 측 배포를 담당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직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2월 27일 밤 비밀리에 2만여 매가 인쇄되었다. 독립선언서 배포의 총책임자는 오세창이었고, 실무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었다. 이의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측에서 분담 배포키로 하였고, 천도교는 인종익(印宗益) 등이, 기독교는 김창준(金昌俊) 등이, 학생은 이갑성(李甲成)이 각각 맡기로 하였고, 만해(한용운)는 불교계 측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만해(한용운)는 2월 28일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이달 밤 12시, 그는 자신의 집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인 정병헌(鄭秉憲)·김상헌(金尙憲)·오택언(吳澤彦)·전규현(田奎鉉)·신상환(申尙煥)·김법윤(金法允) 등에게 이를 건네주며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다. 당시 그는 불교계 청년들의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영향력이 컸었다. 일제에 피체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독립선언서의 배포가 초점이 되었다.
역사적인 3월 1일 오후 2시가 가까워지며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속속 모여 들었다. 이 자리에는 늦게 도착한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정춘수(鄭春洙) 및 상해(上海)로 탈출한 김병조(金秉祚)를 제외한 29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태화관에 도착하였다.
회합한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 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였고, 최린이 만해(한용운)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그는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 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각자의 건강을 기원하는 축배를 들며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그런데 손병희는 최린으로 하여금 미리 일경에게 민족대표들이 모인 목적과 장소를 전화로 통지하도록 하였다. 독립선언식이 거의 끝날 무렵 황급히 들이닥친 경시(警視)·경부(警部) 이하 수십 명의 일경은 민족대표 전원을 체포·연행하였다.
만해(한용운) 또한 현장에서 피체되어 일경이 준비해 온 자동차에 실려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그는 당시 연행당하며 목격한 감격스런 만세시위 장면을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때입니다. 열두 서넛 되어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자동차를 향하여 x x (필자주 : 만세)를 부르고 두 손을 들어 또 부르다가 x x (필자주 : 일경)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부르다가 마침내는 잡히게 되는데, 한 학생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옆의 학생은 그래도 또 부르는 것을 차창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학생들이 누구이며, 왜 그같이 지극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보고 그 소리를 듣던 나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에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朝鮮日報』, 1932년 1월 8일자)

이상에서 독립만세시위의 계획부터 민족대표 독립선언식의 주도까지 만해(한용운)의 활약상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는 화약을 다져 폭탄을 만들고 여기에 도화선을 연결하여 점화시킨 것이었다.

2. 공약삼장(公約三章)과의 관계

공약삼장은 독립선언서의 전문을 함축, 요약한 독립만세 전개과정상의 행동강령이자 지침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이니 오직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요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一. 최후(最後)의 1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1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一.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여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중 제2장의 최후의 1인, 최후의 l각이란 표현은 민족대표들에 극형을 적용하고자 한 일본 검사의 집요한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는 제2장의 내용이 독립투쟁에 미친 영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독립선언서의 기초자가 육당 최남선이란 사실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바로 이 공약삼장의 기초자가 과연 육당(최남선)이냐 만해(한용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논란은 해방 직후 만해(한용운)의 후학 등에 의해 만해(한용운)가 독립선언서의 일부를 윤문하였다거나 공약삼장을 첨가해 삽입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해(한용운)설을 주장하는 견해의 논거는 대개 만해(한용운)와 주변인물의 회고 등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만해(한용운)의 법정 진술기록, 공약삼장의 내용을 불교의 교리와 연계하여 해석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주장은 해방 직후 육당(최남선)의 변절과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적 심판이 내려지고 비판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제기되어 충분하고 실증적인 학술적 검토의 과정이 생략된 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져 왔다. 이는 광복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독립투사에 대한 열렬한 찬양과 함께 반민족적 변절자에 대한 가차 없는 격하라는 인물평가의 흑백양단(黑白兩端)만이 존재했던 시대적 상황이 빚어낸 민족의 어두운 그림자의 하나였다.
한편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19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공약삼장의 만해(한용운) 첨가설을 부정하고 육당(최남선)의 전담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재판 기록의 철저한 분석, 3·1운동(1919) 주도자들의 회고 및 당시의 상황논리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공약삼장 작성자에 대한 만해(한용운)설과 육당(최남선)설은 나름대로의 논리적 타당성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도 몇 해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양편의 논리를 검토하고 자료를 분석하여 왔다. 아직 검토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필자는 일단 육당(최남선)설이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예만한 이 부분이 명쾌히 밝혀지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나름대로의 몇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일제의 취조서나 공소공판 기록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민족대표들이 일본 검사의 심문이나 법정에서 한 진술에는 자신 및 동지들을 보호하려 한 때문에 진실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회합한 민족대표들은 피체된 후 받을 심문에 대해 미리 답변 내용을 맞추어 두자는 어느 대표의 제안에 대해 그럴 필요 없이 꿋꿋하고 정당하게 대답하자고 결의한 바 있기에 이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경찰과 검사 등은 거의 모든 민족대표에게 독립선언서의 제작경위와 의미에 대하여 추궁하고 있는데, 이는 손병희·최린·최남선에게 특히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일제는 공약삼장 중 제2장의 의미에 대해 신랄하게 추궁하였다. 이는 보안법(保安法)·출판법(出版法)보다 가중한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한 술책이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제2장 역시 논란이 되고 있는 육당(최남선)과 만해(한용운) 외에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도 질문되고 있다. 그런데 만해(한용운)에게는 주로 초기 조직단계에서의 역할과 선언서의 배포에 관한 심문이 주를 이루었고, 이 부분에 대하여는 경성지방법원의 예심과 공소공판 때에 추궁당한 바 있다. 이중 문제가 되는 공소공판 때의 심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하였나?
답 :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점이 있어서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소.
(『東亞日報』1920년 9월 25일)

이 부분은 만해(한용운) 첨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논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지칭하는 서류란 단지 ‘일본 정부에 제출한 서면 외’라고 막연히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독립선언서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당시 일본 판검사가 혈안이 되었던 관심사는 공약 제2장의 의미파악이었다. 만일 만해(한용운)가 개정 운운한 것이 공약삼장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더 이상의 추궁 없이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독립선언서의 본문과 공약삼장을 별개의 것이라는 분리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당시 만해(한용운)가 최린의 부탁으로 최남선이 기초한 몇 개의 서류를 보관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최린이 만해(한용운)에게 한 부를 더 정서하여 주기를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해(한용운)가 맡아 두었던 것은 미국대통령과 열국의 대표, 일본 귀중양원(貴衆兩院) 및 총독부(總督府)에 보낼 세 통의 독립탄원서와 통고문 중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즉 독립선언서의 초고는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독립선언서의 작성 경위에 대한 질문은 주로 최린과 최남선에게 집중되고 있다. 최린은 공약삼장의 의미를 추궁하는 일인 판검사에게 자기 견해를 설명하고 있으나, 선언서는 모두 최남선이 작성한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최남선에게는 거의 선언서에 관한 질문으로 일관하고 있다. 당시 재판장은 선언서의 첫머리부터 공약삼장의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를 장황하게 낭독하며 심문하였다. 특히 제2장의 의미가 폭동선동이 아니냐는 의도적이고 집요한 질문에 최남선은 “글이란 보는 사람의 경우와 사상과 교육정도와 이해하는 범위를 따라서 다른 것이니까 혹 그렇게 해석할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지(本旨)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말이라 하는 것은 어원에까지 올라가고 역사적 배경까지 넣어 가지고 생각을 하면 거의 한량이 없는 일이니까 다만 그 글에 나타난 문면(文面)으로만 해석해 주길 희망한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직접 그 내용을 기초한 사람이 자기의 글에 대해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부연설명하며 변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관하여 최남선의 회고는 주목된다. 그는 후에『내가 쓴 독립선언서』(『새벽』2호, 1955)란 글에서“…(독립선언서 등) 형식과 내용과 표현 전부가 내 의사로 작성해서 그대로 실제에 사용된 것….”이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또한 “조선의 독립운동은 한 때의 감정적으로 일어났다가 깨질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성질의 것임을 밝혔다.”라 하고 있다. 최남선을 비판하는 견해 중 최남선 같은 유약한 성격으로는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이란 표현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비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최남선은 일반인은 물론 민족대표들 간에 절대적인 신망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는 다른 민족대표의 취조 및 공판기록을 보면 분명하다. 그들은 선언서의 초안을 사전에 보았건 안 보았건 간에 그의 글에 무조건 찬성했을 정도였다. 또한 이미 최남선의『소년(少年)』·『청춘(靑春)』등을 검열한 바 있던 총독부의 검열전문가 아이바(相場淸)도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정밀 분석한 후 최남선이 기초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장담한 바 있다.
다음으로 최린의『자서전(自敍傳)』(『한국사상(韓國思想)』제4집, 1962)도 중요한 자료이다. 최린은 3·1운동(1919)의 초기 준비단계 및 선언서의 작성을 총체적으로 주도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진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독립선언서의 작성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독립선언서에 관해서는 2월 상순경부터 최남선·현상윤 등 제인(諸人)과 더불어 운동계획을 협의하던 차에 운동의 골자는 선언문인 즉 무엇보다도 선언문을 먼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는 문제가 제출되었다.
그때 육당(최남선)은 말하기를 일생을 통하여 학자생활로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글을 읽는 나로서 독립선언문만은 내가 지어 볼까 하는데 그 제작책임은 형이 져야 한다고 하면서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나는 육당(최남선)의 표정과 처지에 동정하여 이를 승락하고 속히 기초에 착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육당(최남선)은 독립선언문과 일본 정부 귀중양원과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와 파리강화회의 열국위원(列國委員)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기로 하고 독립선언문만은 2월 15일에 육당(최남선) 자신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받아 읽어 본 후에 거문고 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는 최남선으로서 선언문을 짓는 것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책임은 누가 지든 간에 선언문만은 육당(최남선)이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용운의 이의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만해(한용운)가 민족대표로 서명하지도 않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짓겠다는 뜻을 표하였으나, 선언서의 작성을 포함한 모든 초기 계획단계를 주도한 최린에 의해 거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현상윤 등도 최남선의 작문임을 밝힌 바 있다.
공약삼장의 기초자를 밝힐 수 있는 또 하나의 관건은 독립선언서의 작성 및 인쇄의 시기문제이다. 물론 이 시기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먼저 최린은 손병희·오세창·현상윤·권동진(權東鎭)·송진우(宋鎭禹)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방법론을 논의한 후 ①대중화, ②일원화, ③비폭력 등 3대 원칙을 수립하였다. 최린은 이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것을 최남선에게 부탁하였다.
최남선은 2월 초순부터 선언서 등의 초안 작성에 착수하여 2월 11일경 먼저 독립선언서를 완료, 15일에 최린에게 건네주었다. 최린은 이를 일시 보관하였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에게 보여 동의를 얻고, 그 후 기독교 측 연락대표인 함태영에게 건네주어 기독교 측의 동의도 구하였다.
이렇게 완성, 확정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에 관하여는 그 작업을 직접 감독, 주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기록인 이른바『묵암비망록(黙庵備忘錄)』이 주목된다. 그는 이 기록에서 자신이 재판정에서 진술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하고 있다. 즉 인쇄매수가 2만여 매가 아니라 3만 5천매이고, 인쇄일자도 2월 27일이 아니라 20일부터 서서히 찍기 시작한 것이라 밝혔다.
한편 만해(한용운)가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본 시기는 거창의 곽종석을 만나고 상경한 2월 24일이었다. 이미 이때는 인쇄공의 한문 해독력의 부족으로 최남선이 직접 조판한 선언서가 비밀리에 인쇄되던 도중이었다. 때문에 수정할 상황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초고에 불만을 갖고 윤문이나 첨가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기초한 원고에 필삭이 가해졌다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자타가 공인하던 최남선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미 천도교와 기독교 등 만세계획을 추진하던 양대 세력의 동의를 구한 초고를 불교도인 만해(한용운)의 개인적 불만으로 내용이 새로 첨가되거나 개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해(한용운)의 공약삼장 첨가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되나, 최남선의 전담설을 주장하는 일부 견해 중 만해(한용운)가 선언서의 초안을 보지 못하였다는 논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
만해(한용운)설을 주장하는 논거 중 공약삼장의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이란 구절을 불교의 ‘세세영생(世世永生)’ 사상으로 해석, 그 강력한 근거로 제시한 것이 있다.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 여겨진다.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이 연합, 이른바 민족대연합전선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불교만의 교리나 사상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선언서의 본문과 공약삼장을 분리하여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최남선도 독립을 완수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밝힌 바 있듯이 공약삼장은 본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요약한 실천적 행동강령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대로 논란이 되고 있는 공약삼장 기초자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어쩌면 이 문제는 3·1운동(1919)이 우리 민족운동사상 지니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엽적인 것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장황히 논의를 전개한 것은 만해(한용운)나 육당(최남선)에 대한 새로운 인물평가를 위함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공약삼장을 포함한 독립선언서의 문장 모두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만해(한용운)가 공약삼장을 추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절대로 절하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논의와 관계없이 만해(한용운)가 위대한 독립투사였음은 불변의 사실이다.

3. 옥중 법정투쟁

태화관에서 감격어린 축사를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한 뒤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피체되어 일경이 대기해 둔 자동차에 분승, 연행되었다. 거사 직전 만해(한용운)는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설령 체포된다 하더라도 ① 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③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만해(한용운)의 옥중 행동은 불굴의 민족혼 바로 그 자체였다. 다음의 옥중 일화는 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만세의 주동자로 피체, 투옥되었을 때 최린이 일본인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압박하고 있다고 총독정치를 비난하였다.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만해(한용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 : 최린의 호)는 총독이 정치를 잘하면 독립운동을 안 하겠단 말이요?”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만해(한용운)는 도승답게 태연자약하였다. 그러나 일부 민족대표들이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던 중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풍문이 돌자, 몇몇 인사들 가운데는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격분한 만해(한용운)는 감방 안에 있던 분뇨통을 들어 나약해진 일부 대표들에게 뿌리며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며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한다. 이 일화는 이종일의『묵암비망록』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이종일은 이를 통쾌하다고 적고 있다.
한편 만해(한용운)는 피체, 연행된 후 일본 경찰 및 검사·판사의 심문에 매우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였고, 시종 꿋꿋한 기개와 정연한 논리로 법정투쟁을 전개 하였다. 그의 정연한 논리와 고결한 식견은 담당 일본인 검사로 하여금 “당신의 이론은 정당하나 본국 정부의 방침이 변치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실토하게 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러면 그의 의지와 기상을 일제의 취조서와 공소공판기에 나타난 심문내용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은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일본인 검사 하촌정영(河村靜永)과의 문답 중의 일부이다.

문: 피고는 금번의 운동으로 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
답: 그렇다. 독립이 될 줄로 안다. 그 이유는 목하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되고 있는데, 장래의 영원한 평화가 유지되려면 각 민족이 자결(自決)하여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민족자결이란 것이 강화회의의 조건으로서 윌슨 대통령에 의하여 제창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태로 보면 제국주의나 침략주의는 각국에서 배격하여 약소민족의 독립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서도 물론 각국에서 승인할 것이고 일본서도 허용할 의무가 있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압수하고 있는 서면에 기재된 바와 같다.
문 :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는 중[僧]에 월조(月照)가 있고, 조선에는 중에 한용운이가 있을 것이다.

또한 다음은 이해 5월 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일본인 판사 영도웅장(永島雄藏)의 심문에 대한 답변 내용의 일부이다.

문 : 피고는 금번 손병희 외 31인과 같이 조선독립선언을 한 일이 있는가?
답: 있다.
문 : 어째서 이 계획에 참가하였는가?
답 : 작년 겨울에 경성에서 발행되는『매일신문』과『대판매일신문』에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제창하였고 구주 전란 후 각 식민지가 독립을 진행 중에 있다고 하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므로 이 기회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계획하였다.
문: 피고는 조선 독립 선언으로 일본의 주권에서 이탈되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문 : 그런데 일본의 실력적 지배를 벗지 못하면 결국 독립선언은 무효가 되고 말 것이 아닌가?
답 : 국가의 독립은 승인을 얻어서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독립의 선언을 한 후 각국이 그것을 승인함을 생각하였고, 우리가 그 선언을 하면 일본과 각국이 그것을 승인하여 점차 실력을 얻게 될 줄로 생각하였다.
운 :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문 :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편 공소공판 때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독립에의 자신을 보이며 논리적이고 웅변조로 질타하고 있다.

문 :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은 어떠한가?
답 :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할 수 없는 것이요. 우리나라가 수백 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 문명에 뒤떨어진 것이 합하여 망국의 원인이 된 것이요. 원래 이 세상의 개인과 국가를 물론하고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의 자존심이 있으나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오.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인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4천 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다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장의 부탁으로『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하오.
(『東亞日報』1920년 9월 25일)

그런데 만해(한용운)는 한동안 일인의 심문에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재판관이 그 이유를 묻자,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인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며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결심공판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진술의 기회가 주어지자 만해(한용운)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며 일본의 패망을 엄중경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에 있고 험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魏)나라의 무후(武侯)가 오기(吳起)란 명장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과 강병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나라의 보배로다’라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라’라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要諦)로 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알려 두노라.

이 같은 만해(한용운)의 옥중 일화와 법정투쟁은 독립투사로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3·1운동(1919)을 통하여 그는 이제는 단순히 불교개혁을 외치는 불승으로서 뿐 아니라 일제를 타도하려는 독립투쟁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출판법 위반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의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현재 만해(한용운)는 3년 만기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동아일보』1921년 12월 23일자를 보면 전날 가출옥의 형식으로 석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가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일제를 두려워하여 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를 회피한 사람들이었다. 만해(한용운)는 그들이 내미는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남을 마중 나올 줄만 알지 말고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도 알라는 따끔한 충고를 했다고 한다. 이제 1920·30년대에 전개될 그의 다양한 항일투쟁을 알리는 첫걸음을 강인한 투지로 내디딘 것이다.

4.『조선독립(朝鮮獨立)에 대한 감상(感想)』의 작성

만해(한용운)는 수감되어 있던 1919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 글의 전문을 작은 글씨로 휴지에 적은 다음 간수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러 겹으로 접어서 종이 노끈인 것처럼 위장하여 형무소로부터 차출하는 옷갈피에 끼워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만해(한용운)의 독립사상이 집약된 이 논설은 상해(上海)에서 발간되던『독립신문(獨立新聞)』1919년 11월 4일자에 부록의 형식으로 게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날짜『독립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주(註)와 함께 이를 소개하고 있다.

차서(此書)는 옥중(獄中)에 계신 아대표자(我代表者)가 일인(日人) 검사총장(檢事總長)의 요구(要求)에 응(應)하여 저술(著述)한 자(者) 중(中)의 일(一)인데 비밀리(秘密裡)에 옥외(獄外)로 송출(送出)한 단편(斷片)을 집합(集合)한 자(者)라.

이 논설은『조선불교유신론』과 3·1운동(1919)의 참가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의 인식을 통해 형성되고 심화된 그의 투사적 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논설은『조선독립(朝鮮獨立)의 서(書)』·『조선독립이유서(朝鮮獨立理由書)』·『조선독립(朝鮮獨立)에 대한 감상(感想)의 개요(槪要)』등으로도 알려져 있고, 단순히『심문에 대한 답변서』라는 설도 있으나, 만해(한용운) 자신이 공소공판 때 밝힌『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 하기로 한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개론
2.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
1) 조선민족의 실력
2) 세계대세의 변천
3) 민족자결 조건
3. 조선 독립선언의 이유
1) 민족자존성
2) 조국사상
3) 자유주의(자존주의와는 아주 다름)
4) 세계에 대한 의무
4. 조선 총독정책에 대하여
5. 조선 독립의 자신

제1장은 총체적인 개론으로서 자유와 평화의 동반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진보주의적 바탕위에서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필연적 멸망을 역설하고 있다. 맨 첫머리에서 그는 자유와 평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고 난 사람의 주변 공기는 무덤으로 변하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경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우주만물의 가장 이상적인 진짜 행복은 자유와 평화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하여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니 이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이니 침략적 자유는 평화가 없는 야만적 자유가 되며,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으니 평등은 자유의 상대이다.
따라서 위압적 평화는 굴욕일 뿐이니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동반할 것이다. 자유여! 평화여! 전 인류의 요구로다.

그의 자유개념은 이미『조선불교유신론』에서 논한 바 있던 자아(自我)의 불성(佛性)에 대한 자각이 뿌리가 되어 발전한 것이며, 이를 평화와 평등과의 상관적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평등에 대해『조선불교유신론』에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남에게 매달리지 않는 자유진리(自由眞理)라 한 바, 곧 절대적 자유가 절대적 평등이란 논리이다.『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과 이 개론 부분을 비교해 볼 때 그의 자유·평등은 인간의 정신적·내면적 형태로부터 사회적·국가적 형태로 인식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민족과 국가 간의 자유와 평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군국주의와 침략주의는 부자유·불평등주의며, 이들로부터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과 국가의 주권회복이 참된 자유와 평등의 상태가 된다.
그는 대표적인 군국주의 국가로 서양은 독일, 동양은 일본이라 지적하고 독일 패전을 예로 들며 군국·침략주의의 실상과 허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에 대한 간접비판이고 상대적 경고이다. 즉 세계대전 시 독일의 탁월한 군사작전도 다름 아닌 군국주의적 낙조(落照)의 반사에 불과한 것이고, 세계대전이 끝나게 된 것은 무기의 우열로 인함이 아니라 독일 국민들의 내부 혁명의 힘이니 곧 정의와 인도의 승리이며 군국주의의 실패란 것이다. 결국 이로써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전별회(餞別會)가 된 것이고, 오히려 독일과 연합군이 모두 승리한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하고 있다. 특히 독일을 타파키 위해 연합한 연합군의 방법론도 살인도구를 수단으로 한 것이라 준제국주의(準帝國主義)라고 규정, 제국주의에 대해 철저히 혐오하고 있다.
또한 20세기 이래 정의·인도적 평화주의가 도래함에 따라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 폴란드·체코·아일랜드와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말미에서 우리 독립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하늘이 찬동하는 바로서 전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다. 누가 이를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제2·3장은 이 글의 본문이라 할 수 있다. 제2장에서는 우리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게 된 최근의 동기를 우리 민족이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고, 세계의 대세가 평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된 것 등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는 조선은 물질문명이 부족하여 독립할 수 없다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논리를 반박하며, 제국주의적 학정과 열등 교육제도의 폐단에 기인함을 지적하였다. 오히려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 국민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현대 문명을 함께 나눌 만한 실력이 있고, 또한 우리에게 독립정부가 있어 원조·장려한다면 모든 문명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독립은 물질문명을 완전히 구비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되어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매우 주목되는 것이다. 즉 3·1운동(1919) 이후 일제가 조선의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행한 고등의 식민지배 술책인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의 저의를 꿰뚫고, 한편으론 비록 불완전한 망명정부 형태이기는 하나 임시정부가 탄생하여 다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명확히 예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상황의 정곡을 간파하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태추이의 맥을 정확히 진단하는 판단력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20세기 초부터 군비축소와 제한 등 평화주의가 도래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현재로부터 미래의 대세는 침략주의의 멸망, 자존적 평화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또한 윌슨이 제기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를 세계의 공언(公言)이라 하며 이의 실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제3장에서는 먼저 망국 10년 만에 독립을 선언한 민족으로서의 침통함과 부끄러움을 표하고 독립선언의 이유를 만족자존성, 조국사상, 자존주의와는 구별되는 자유주의, 세계에 대한 의무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민족자존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동물을 예로 하여 자존성과 배타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같은 무리끼리 사랑하며 자존하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자연히 배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배타는 자존의 범위 안에 드는 남의 간섭을 방어하는 것뿐이지 자존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배척함, 즉 침략과 구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본성은 인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하며 한민족(漢民族)과 만주족(滿洲族)간의 쟁탈, 아일랜드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동화정책,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동화정책 등 각국의 동화정책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 자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을 가져 팽창의 한도 즉 독립자존의 길에 이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조국사상에서도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즉 월조(越鳥)가 남쪽가지를 그리워하고 호마(胡馬)가 북풍을 그리워함은 근본을 잊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라 하고 있다. 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천성이고 미덕이라 하며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가 단지 무력의 열세로 역사가 단절되고 말았으니 참을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자존주의와 구별한 자유주의에서는 그의 민족과 국가 간의 자유론이 또 다시 강조되고 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이 참된 자유에 있다고 전제하고, 일본의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터럭만큼의 자유도 없으니 피가 없는 무생물이 아닌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다고 하고 있다. 또한 자유를 얻기 위해 생명까지 바치겠노라고 하였는데 이는 일제 타도의 결연한 의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일제의 조선 침략이 중국 경영을 위한 야심이라고 지적하고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동양 평화의 중요한 열쇠일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가져 올 것이니 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의무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민족자결이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만해(한용운)는 제3장의 각 항의 말미마다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란 확신에 찬 어귀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독립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문장배열로 생각된다.
제4장에서는 총독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시정방침을 무력압박이라고 단정하고 사내(寺內, 사내정의, 데라우치), 장곡천(長谷川) 총독을 정치적 학식이 없는 한낱 군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이들에 의한 정치를 군인적 특성을 발휘한 헌병정치·군력정치·총포정치라고 규정하였다.
이어 종교와 교육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일제의 학정을 통박하고 조선인이 그들에게 반발치 않는 것은 주위의 압력으로 저항이 불가능 했을 뿐만 아니라 총독정치를 중요시 하여 반항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총독정치 이상으로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란 근본문제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라도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깨뜨리고 독립자존을 이루려는 것이 2천만 만족의 뇌리에 항상 박혀있는 정신이기 때문에 총독정치가 아무리 극악하다 하더라도 여기에 원망어린 보복을 가할 까닭이 없고, 아무리 완전한 정치를 한다 하더라도 감사의 뜻을 보면 까닭이 없는 것이니 총독정치는 지엽적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태를 인식하는 그의 명쾌한 탁견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는 조선 민족이 타파해야 할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대상은 곧 식민체제 자체로 보고, 그 수단이자 하위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총독정치는 지엽말단적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입장은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이 추구했던 독립청원론·참정권 획득론·자치론·외교론 등 일제와의 타협이나 일제의 양해속에서나 가능한 왜곡된 독립투쟁 방법론에 대한 일대 경종이었다. 또한 그 자신의 철저한 비타협주의, 자주적 완전독립론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었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다시 한번 정의·평화·민족자결주의의 도래를 상기시키며 조선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를 볼 때 역행치 못할 명백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설명하는 논리가 앞부분과는 상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토록 철저하고 단호하게 일제를 논박하던 태도와는 달라서 이를 읽는 이로 하여금 자못 당혹하게 한다.
이러한 것은 만해(한용운)의 논리적 모순이라기보다는 당시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본 논설의 제5장 등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모순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그는 수차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정확한 정보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해 일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대부분의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해 깊은 통찰력과 혜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등 구체적 사안에까지의 이해는 마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또한 이른바 ‘기회론’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선이 즉시 독립될 수 있으리라는 낭만적 희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약간은 추상적 개념을 지녔던 것 같다. 그는 제5장에서 조선 독립의 관건이 “일본의 승인 여부뿐이며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다분히 이상적이고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또한 제4장에서 “과거 10년 동안 조선인이 조그마한 반발도 일으키지 않고 순종” 운운한 것은 그간 끊임없이 지속된 의병전쟁과 비밀결사투쟁 등을 부정한 셈이다. 특히 향후 10년의 식민통치 결과 일본이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물질상의 이익은 수지상 많은 여축을 남겨 일본 국고에 기여함이 쉽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관리나 기타 월급생활 하는 자의 봉급 정도일 것이니 그렇다면 그 노력과 자본을 상쇄하면 순이익은 실로 적은 액수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니, 설령 그의 이 논리가 일제를 회유하려 하였던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식민지 경제수탈과 그 폐해를 지나치게 축소하여 평가한 것으로 지적할 수 있다.
셋째, 그는 이미 3·1운동(1919)의 준비과정에서 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독립청원, 또는 탄원이란 용어에 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제5장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면 일본은 “동양평화의 맹주”, “복음을 전하는 천사국”, “합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의 원한을 잊고 깊은 감사를 표할 것”, “선진 일본의 문명을 수입함으로 양국은 아교나 칠 같이 긴밀할 것” 등의 표현을 하고 있어 청원, 탄원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 논설을 제출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고 표현상의 한계와 불가피성을 일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전후의 논리가 모순되며 현실을 직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이 논설은 그가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반복되는 심문으로 피로하고, 무더운 7월의 감방에서 아무런 참고도서도 없이 오직 그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투철한 독립사상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저술하고 있어, 3·1운동(1919)을 전후한 시기의 최고의 논설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한 뛰어난 국제감각, 철저한 독립사상은 당대의 어떤 민족지도자 보다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반봉건만을 지상과제로 하였던 그가 불교자주화 운동을 통해 반제사상이 형성되었고, 3·1운동(1919)을 주도하며 반제사상이 심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겠다. 일부의 한계는 있으나, 만해(한용운)가 민족적 현실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며 반제사상과 투쟁을 반봉건의 그것보다 우선하여야 할 상위개념으로 깨닫게 됨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제5장 3·1운동(1919) 이후 민족운동의 전개

1. 불교혁신운동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석방된 만해(한용운)는 다방면에 걸쳐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중 불교 혁신운동은 혁명가이자 승려인 그가 사회활동의 초기단계부터 추진하였던 사업의 계속이었다. 그는 이미『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로써 불교 개혁의 범위와 방향을 제기하였다. 이 후 스스로의 경전연구에 전념함은 물론 불경을 번역·간행하였고 전국의 각 사찰을 순회하며 포교에 노력하는 등 불교의 혁신과 대중화에 힘썼다. 특히 친일 매판불교 음모의 격파와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을 주도하며 제국주의와 종교와의 관계를 간파하고 종정 분리투쟁 등을 전개한 바 있다.
만해(한용운)에게 있어서 불교의 개혁은 단순한 불교계의 개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사회 전체의 개혁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우리의 정신과 문화의 전통이 오랜 탄압 속에서도 불교에 바탕을 두어 왔기 때문에 불교의 개혁은 곧 우리의 정신과 문화의 개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개혁운동은 곧 민중운동·민족운동의 차원으로까지 언급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해(한용운)가 추구했던 불교 혁신운동의 종점은 ‘불교사회주의(佛敎社會主義)’가 아닌가 한다. 그는 1931년 한 기자와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문 : 석가의 경제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답 : 불교사회주의라 하겠지요.
문 : 불교의 성지인 인도(印度)에도 불교 사회주의라는 것이 있습니까?
답 :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최근에 불교 사회주의에 대하여 저술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기독교 사회주의가 학설로서 사상적 체계를 이루듯이 불교 역시 불교 사회주의가 있어야 옳을 줄 압니다.
문 : 불교 사회주의! 장차 저술을 통하여 그 내용을 뵙고자 합니다만, 그러면 석가께서 2천 4백여 년 후인 오늘날 조선에 나셨더라면 우리들이 늘 듣는 공산주의가 되기 쉬웠을 듯합니다.
답 : … (삭제)
(『三千里』제4권, 1931. 11월호)

그가 여기서 밝힌 ‘불교사회주의’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조차 없는 것으로 그의 깊은 불심과 자각된 민중의식에서 우러난 독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그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저술을 접할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여타의 저술을 통해 볼 때 자유와 평등에 바탕한 사회의 실현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이는 그가 신간회운동·여성해방운동·사회계몽운동·노동자·농민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으로도 이해된다.
만해(한용운)는 이러한 불교혁신을 통한 사회개혁운동을 주로 청년 불교도들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당시 그가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예컨대 월간 불교잡지인『불교(佛敎)』에서 실시했던 조선 불교의 대표적 인물에 대한 투표결과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투표의 대상인물은 조선인 승려에 한하였고 투표자는 아무나 할 수 있었는데, 결과 만해(한용운)가 422표였고 차점이 18표를 얻은데 그친 방한암(方漢岩) 스님이었다 하니 그에 대한 절대적 신망의 정도를 알 수 있다.
1922년 3월 24일 만해(한용운)는 대장경 국역사업을 위해 법보회(法寶會)를 발기하였고,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회는 1911년 초 만해(한용운) 등에 의한 임제종운동 이래 두 번째로 전개된 조직적인 청년운동단체로서 1920년 6월 각황사에서 서울의 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 각 사찰에 지회를 설치하고, 이 해 12월 30본산 연합사무소에 연합제규 수정, 사찰재정 통일, 교육제도 혁신, 포교방법 개신 등 8개항의 건의안을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과 관변 승려들에 의해 외면당하였다.
1921년 12월 불교청년회원이 중심이 되어 조선불교유신회(朝鮮佛敎維新會)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불교청년회의 일종의 별동대라 할 수 있다. 즉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 불교계의 중추격이었기에 직접 행동하기 곤란한 일을 감담키 위해 조직하였던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조선불교유신회의 조직을 축하하고 분발을 촉구하며 교리·경전·제도·재산의 민중화를 역설하였다. 이제 이 회의는 30본산 주지뿐 아니라 직접 총독부를 상대로 하여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 승려들의 본산 주지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1922년 봄 각황사에서 주지 성토대회를 갖고, 급기야는 김상호(金尙昊)·강신창(姜信昌) 등 1백여 청년 승려들이 대표적인 관권 주지였던 강대련(姜大蓮)을 종로 네거리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준 이른바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불교유신회는 중앙의 불교행정기관을 편달하여 모든 규약을 개정케 하고 총독부에 정교 분립,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여러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와 관권주지들의 더욱 심한 탄압으로 인해 약 3년 뒤에 자동 해체되게 되었다. 한편 불교청년회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27년경 부흥하였는데, 1931년 3월 조선불교청년총동맹(朝鮮佛敎靑年總同盟)으로 개편 되었다.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① 불타정신의 체험, ② 합리종정(合理宗政)의 확립, ③ 대중불교의 실현 등 3대 강령을 가지고 출발하였는데, 당시 불교계는 물론 일반사회인들로부터도 크게 주목되었다. 침체된 불교청년운동의 부활을 강력히 주창하던 만해(한용운)는 이 ‘동맹’의 창립을 목적적 발전의 점진적 성숙이 아니고 과정적 필연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며, 이러한 미완의 조직체가 다시 완성된 ‘회(會)’나 ‘당(黨)’의 형태로 복귀하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총동맹의 가장 긴급한 사명에 대하여 정교분립의 기성(期成)·불교통일의 촉진·사회적 진출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그는 정교 분립을 일반의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본질적 분립이 아니라 조선의 불교에만 가해진 특수한 정치적 간섭인 조선사찰령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는 승려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찰령 시행과 30본산 성립 이후 불교 통일의 미진을 비판하고, 일반 승려의 각성을 통해 중추기관인 불청동맹이 책임을 지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개량주의적 방식을 지엽적 수단이라 배격하였다. 또한 불교도도 민족과 사회의 일원인 이상 그 책무가 있으며,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본령인 대중불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에 진출하여야 할 것을 강조 하였다. 이는 시대 조류에 아첨·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대중의 공동적 이익을 위한 공적 책무 이행의 표현이란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제는 불교개혁을 추구하는 만해(한용운)에게 있어 항상의 과제였다. 이중 총독부를 상대로 펼친 정교분립 투쟁은 제국주의가 종교를 하수인으로 삼는 본질적 문제를 간파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는 단순한 불교개혁 운동의 일환이 아닌 반제투쟁의 하나였다. 그는 다른 장문의 논설을 통하여 세계 24개국의 헌법에 규정된 정교 분립의 조항을 예로 들며 그 당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보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는 국가를 본위로 하는 사무적 행위니 인민의 표현행위를 관리하는 것이요, 종교는 지역과 족별(族別)을 초월하여 인생의 영계(靈界), 즉 정신을 정화 순화, 혹 존성화(存性化)하여 표현행위의 근본을 함양하며, 안심입명(安心入命)의 대도(大道)를 개척하느니, 종교는 인위적 제도로써 제한 혹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그 성질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의 정신계를 영도하느니, 지역적이요 단명적인 인위적 제도, 즉 정치로써 종교를 간섭한다는 것은 훈유(薰蕕)의 동기(同器)와 같아서 도저히 조화를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에게 불행한 결과를 줄 뿐이다.…
( -정교를 분립하라-『佛敎』87호, 1931년 9월)

한편 위의 총동맹과 관련된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활동은 매우 주목된다. 사실 총동맹은 만당의 표면단체였다. 만당은 1930년 5월경 김법린(金法麟)·최범술(崔凡述)·김상호(金尙昊)·이용조(李龍祚)·조학부(曺學浮)·조은택(趙殷澤)·박창두(朴昌斗)·강재호(姜在浩)·허영호(許永鎬)·최봉수(崔鳳守)·차상명(車相明)·정상진(鄭尙眞)·장도환(張道煥)·박영희(朴映照)·박윤진(朴允進)·강유문(姜裕文)·박근섭(朴根燮)·한성동(韓性動)·김해윤(金海潤)·서원출(徐元出)·정맹일(鄭盟逸)·이강길(李康吉) 등 20여 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로 경상남도 사천(泗川)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일원과 동경(東京)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원들은 비밀 엄수와 당명의 절대 복종을 생명으로 하였다.
만해(한용운)는 만당의 비밀 당수로 추대되어 이들을 지원하였으나 직접 연관은 없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만당의 강령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같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의 만당선언문을 보면 그 궁극적인 것은 민족의 자주독립임을 알려준다.

보라! 3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 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어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났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향자(向者)는 동지요 배자(背者) 는 마권(魔眷)이다. 단결과 박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하고 과감히 전진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만당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1938년 말 일경에 발각, 서울·사천·진주·해남·합천·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 선풍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말았다. 당시 만해(한용운)는 구속된 당원들을 면회, 격려하기 위해 대구·진주 등지로 분주하였으나, 일경의 방해로 면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당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규약 등 일체의 문서화된 서류를 남기지 않아 지금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1933년 2월 20일 그 본부 내에 교정연구회(敎政硏究會)를 창립하였다. 이는 조선불교의 교정(敎政)을 연구하여 미래의 지도원리을 확립하자는 취지였다. 만해(한용운)는 이를 쇠잔한 조선 불교의 부흥과 통일의 전조로 보고 시대적 산물이라 평가하며 많은 촉망(囑望)을 하였다. 이들은 그의 철저한 불교개혁 의지와 나아가 조국독립의 간절한 염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만해(한용운)는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민중계몽을 위하여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 당시 운영난에 빠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그러나 1931년 불교잡지『불교(佛敎)』를 권상로(權相老)로부터 인수, 속간하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참고로 당시 불교의 기관지, 즉 불교잡지 발행의 변동 상황을 간단히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제호(題號) 총발행호수 발행년간
원종잡지(圓宗雜誌)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해동불교(海東佛敎)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
불교(佛敎) 2
19
8
9
3
22
108 1910
1912. 2~동년 8월
1912. 11~1913. 6
1915. 3~동년 12월
1916. 4~동년 6월
1917. 3~?
1924. 7~1933.7


(자료 : 한용운,「‘佛敎’ 속간에 대하여」『佛敎』신제1집, 1937. 3월 및「‘佛敎’의 과거와 미래」『佛敎』신제21집, 1940.2)

이로써 볼 때 만해(한용운)가『불교』를 인수, 경영의 책임을 맡기까지 모두 7회의 개호(改號)가 있었으며, 171호의 발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비록 수록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을망정 불교기관지였던 것은 공통되는 사실이다.
만해(한용운)는『불교』가 1933년 7월 이후 휴간된 원인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재정난을 들면서도 이는 중앙교무원 간부의 기설사업 축소라는 소극적 정책의 오산에 순사(殉死)한 것이라고 힐난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재정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조선 불교계의 불교도 수나 전체 재산으로 볼 때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착심이 부족한 불교계 간부와 일반 불교도, 그리고 발간책임자인 자신 등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이 편찬책임을 맡고난 이래 새로워진 내용에 대한 간부의 의구심을 들고 있다. 그 내용 중 정교분립의 강력한 요구 등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많아 감독 책임 간부가 자신에게 화근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거나, 불교행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휴간되었던『불교』는 경남삼본산(慶南三本山), 즉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세 본산이 자금을 분담·지원함으로써 1937년 3월부터 속간될 수 있었다. 이후 20여 호를 발행했던『불교』는 1939년 1월부터 다시 휴간하게 되었다. 만해(한용운)는 자금과 편집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이유도 없이 다시 휴간된 것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고 있다. 반면 이렇게 7회의 개명과 6차의 폐간 및 2회의 속간을 거듭한 것은 불교의 칠전팔기·불요불굴(不撓不屈)의 장엄한 정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는『불교』의 과거로 미루어 볼 때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전망하며 폐간·휴간 없이 발간의 영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재산의 독립을 제일 간편한 방법으로 들고 있다. 즉 간행예산을 경남삼본산에 의존치 말고 사찰로부터 분리시켜 기본금으로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을 통하여 만해(한용운)가 활동 초기부터 지속해 온 불교 혁신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1920·30년대를 통하여 불교청년회·불교유신회·불교청년총동맹·비밀결사 만당 등의 청년 승려들의 활동을 주도하였고, 불교지의 간행을 통하여 불교개혁과 민족운동의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불교혁신운동은 민족운동과 분리된 것이 아닌 합치된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2. 신간회 운동

만해(한용운)는 민족자존성을 강조하는 비타협주의의 민족주의자였다. 옥중에서 참회서를 써내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일제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출옥 후에도 철저히 비타협주의로 일관하였다. 당시 일부 3·1운동(1919)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일제와의 타협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1920년대의 항일운동은 일부 지도급 인사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노동자·농민 등이 주체가 된 민중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민중운동에는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제기되어 사상적으로 복잡하고 혼란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사상적 분열과 혼란을 타파하기 위해 만해(한용운)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있다.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이것이 우리 조선 사상계를 관류(貴流)하는 2대 주조(主潮)입니다. 이것이 서로 반발하고 대치하여 모든 혼돈이 생기고 그에 따라 어느 운동이고 다 뜻같이 진행되지 않는가 봅니다. 나는 두 운동이 다 이론을 버리고 실지에 착안하는 날에 모든 혼동이 자연히 없어지리라고 믿습니다. 경제혁명이나 민족해방이 우리에게는 다 필요한 것이나 다만 이것이 본질적으로 융합치 않는다고 반발할 때에는 사상이란 도리어 망하게 하는 장본이 될 것이외다. … (중략) 우리는 오늘 우리의 특수한 형편을 보아 이 두 주조가 반드시 합치하리라 믿으며 또 합치하여야 할 것인 줄 압니다…. (중략) 그러니 나는 우리 사상계를 사상으로 구제하지 말고 오직 실행으로 현실을 본 실행으로 하여 나갈 것임을 주장합니다. 해방의 수단 방법에 대해서는 이에 언명할 자유가 없거니와 양 운동자가 이상보다 현실에 입각하는 날에 서광이 올 줄 압니다.
(『東亞日報』1925년 1월 1일)

이는 일제치하라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각자의 노선과 사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모두 일치하여 조국의 독립에 힘쓰자는 내용이다. 비록 당시 좌우가 대립된 사회·경제적 현실상 약간은 인식의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으나, 나름대로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곧 민족운동과 사회운동과의 차이점과 일치점에 대하여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두 운동은 실행수단과 목적, 장애요인이 다 같고 우리 조선의 형편상 모두 부합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 실제의 예로 소작쟁의와 물산장려운동을 들고 있다. 즉 사회주의 운동론자들이 주장하는 소작쟁의를 같은 조선인끼리의 다툼이고, 손해를 보아도 조선인이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인에 이익이 된다는 면에서 민족운동론자들의 견해와 같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물산장려운동에 대하여 자본주의의 옹호라는 사회운동론자의 비판을 외국의 자본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

…원래로 학리를 따지자면 이 두 운동은 아주 딴판이겠지요. 그리고 우선 완전한 해방을 얻은 뒤에 혹은 사회주의 국가로 할런지 또는 봉건제도, 도시국가 등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또 달라질 줄 압니다. 요컨대 틀리다는 점은 다 해방이 완성된 뒤에 어느 길로 나갈 것인가 하는 날에 있는 문제인 줄 압니다.
(『東亞日報』1925년 1월 2일)

즉 조국의 독립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에 민족운동이 보다 상위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완전한 자주독립만을 추구했던 만해(한용운)로서는 당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주와 소작관계나 민족기업의 육성이 식민지체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의 계층간 대립을 심화시키고 오히려 봉건체제가 강화되어 나간 점을 간과하고 있음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기에 있어 독립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3·1운동(1919)을 기점으로 학생계층이 크게 성장하여 전면에 부상하였고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조도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데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무정부진영 및 각기 이들 갈래로 흡수, 참여하게 되는 학생층이나 모두 독립이란 공동목표를 추구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그 자체의 사상에 몰두하기 보다는 독립에 이르는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 중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항일투쟁에 더욱 강렬함을 표방하였다. 때문에 일부 지도층에 실망하고 파리 강화회의·태평양회의 등 서방세계가 주도했던 국제회의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민중의 반사적 반발심리가 보다 투쟁적이라 생각되고 새로운 사상인 이들에게 기울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중 공산진영과 민족진영, 사회인사와 학생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니, 곧 1926년의 6·10만세운동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과 천도교 측 인사들의 계획이 6월 6일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학생들이 주도한 계획만이 성공하여 6월 10일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만해(한용운)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6월 7일 천도교주 박인호(朴寅浩)와 기타 간부 송세호(宋世浩)·김성수(金性洙)·최남선·최린 등과 함께 일경에게 일시 예비검속 당하였다가 풀려났다. 6·10만세운동에서 만해(한용운)의 활동에 대하여는 구체적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25년 초 몇몇의 신문 기사를 통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합치를 강조한 바 있던 그가 좌우연합이라는 새로운 투쟁양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한용운)는 1927년 좌우합작의 민족단일당운동인 신간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6·10만세운동에서 민족, 공산진영의 연대가능성이 시험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간회가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타협주의 노선을 견지해 왔고 민족 간의 분열해소를 강조하였으며, 6·10만세운동으로 양 진영의 연합을 시도하였던 그가 그의 이상과 일치하는 신간회에 적극 동참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불교계를 대표한 만해(한용운)는 김준연(金俊淵)·백관수(白寬洙) 등의 조선일보계, 홍명희(洪命熹)·이승복(李昇馥) 등의 시대일보계, 한위건(韓偉健)·최원순(崔元淳) 등의 동아일보계, 이갑성(李甲成)·이승훈(李昇薰) 등의 기독교계, 권동진(權東鎭) 등 천도교 구파 및 지방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등 34명과 함께 신간회를 발기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중앙기독교청년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참석회원은 3백여 명이었으나, 입추의 여지도 없이 운집한 방청객으로 대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왜경의 감시 아래 긴장과 흥분 속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선언의 발표가 일제에 의해 금지되는 바람에,
一.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一.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一.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이란 강령을 승인한 후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권동진 등의 간부를 선출하고 오후 11시경 만세 삼창을 끝으로 역사적인 대회를 마쳤다.
만해(한용운)는 이 창립총회 시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고, 6윌 10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에 피선되는 등 신간회의 주도적 위치에 자리하였다. 그러나 6개월 만에 경성지회장을 사임하였다. 사임의 동기와 과정이 단순치 않았음은 당시의 언론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에는 여전히 적극적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3·1운동(1919) 이후 10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 평가되는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민중대회(民衆大會)의 계획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이 발발하자 신간회 본부에서는 11월 10일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을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진상이 확인되자 신간회는 ‘광주학생사건 보고 대연설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일경에 의해 금지되자, 일본의 불법탄압과 광주진상보고를 겸한 만중대회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12월 9·10일경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만해(한용운)는 이 달 광화문통(光化門通) 허헌의 집에서 신간회 검사위원장 권동진을 비롯하여 송진우(宋鎭禹, 동아일보 부사장)·안재홍(安在鴻, 조선일보 부사장)·이시목(李時穆, 중외일보 조사부장) 및 손재기(孫在基)·조병옥(趙炳玉)·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주요한(朱耀翰) 등과 회합하였다. 그는 이들과 12월 13일 오후 2시 번화가를 택하여 광주사건의 정체폭로, 구속된 학생의 무조건 석방, 경찰의 학교유린 배격, 포악한 경찰정치와 항쟁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연설광고문을 인쇄·살포하여 청중을 모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한 뒤,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만해(한용운)는 조병옥으로부터 연사로 강연해 줄 것을 제의받고 이를 응낙하였다. 당시 연사로 내정된 인사는 그를 비롯하여 조병옥·권동진·허헌·이관용·홍명희·주요한·손재기·김항규(金恒奎)·이원혁(李源赫)·김무삼(金武森) 등 11인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탐지한 일경에 의해 수많은 지사들이 피체되고 신간회 본부가 수색당하여 각종 인쇄물이 압수되는 등 차단당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비록 만해(한용운)는 이 사건으로 피체되거나 수감되지는 않았나, 일경으로부터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감시가 더욱 심해졌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1930년 말경 신간회 경성지회의 의안부장으로 재등장하는 등 여전히 식지 않는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여성해방운동이나 조선인 본위교육론 및 농민운동 등은 바로 이러한 신간회와 그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투쟁노선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투쟁방략과 사회적 관심의 폭은 신간회 활동을 통해 더욱 심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좌우연합전선으로 결성되었던 신간회는 1930년대 들어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 해 12월 6일의 부산지회대회에서 집행위원장 후보로 피선된 김봉한(金鳳翰)이 본격적으로 해소론을 제기한 이래 전국지회로 파급되어 의론이 분분하다가 급기야 1931년 5월 해소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신간회에 기대와 애착을 가졌던 만해(한용운)는 해소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였고, 해소된 뒤에도 재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해소론이 제기되자 1930년 2월『삼천리(三千里)』2권 2호에서 연합의 형태가 아닌 각 계급의 개별적 운동은 신간회의 최종 목표인 조국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지적하고 해소가 아닌 개선을 희망한 바 있다. 또한 해소론이 한참 논란 중이던 1931년 3월에는『혜성(彗星)』창간호에서 해소론자들이 정책상 신간회에 가입했다가 정책상 해소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정확히 간파하면서도 정작 분화는 될지언정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간회가 해소된 뒤,『조선일보』(1932년 1월 3일자)를 통하여 해소론을 제기한 자들을 ‘착오적 이론과 어떤 충동으로 피동적으로 조선운동을 그르친 죄과를 범한 것’이라고 혹평하고, 부분적인 계급운동의 상위개념으로서의 ‘조선운동’을 위해 범민족적 표현단체가 재건설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논설을 통해 신간회의 성립 당시부터 머지않아 실패할 줄 알았다는 이른바 유물변증법적 논리를 내세우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신간회의 조직이 과오를 범하여 미구에 실패될 것을 알았다면 왜 유물변증법에 적합한 비신간회(非新幹會)를 과오를 범치 않도록 조직하여서 조선운동으로서 성공을 기하지 않았는가?…
(-事後의 先見者-『韓龍雲全集』1, p.217.)

결국 만해(한용운)는 지상 목표인 ‘조선운동(자주독립)’을 위하여는 모든 이념과 각기의 사상과 주의를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제와의 타협을 모색했던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 뿐 아니라, 이념과 노선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강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1930년을 전후하여 자신이 속한 불교 외에 천도교와 유림계에 대하여 한 충고는 주목된다, 그는『신인간(新人間)』20호(1928)와『신동아(新東亞)』(1932년 4월호)를 통하여 지나치게 세속화·사회화 되어가는 천도교에 대하여 사회사업과 시대적 상황을 등한히 하지 않되 종교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재분열을 막지 못한 천도교 간부와의 대화를 예로 들며 분열의 원인을 제거하고 영구히 합동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인도(人道)』통권 8호(1930년 10월)에 게재한『유림계에 대한 희망』이란 글에서 유학자들의 몰염치한 행태와,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외면하고 아집에만 빠져 있음을 신랄히 비판하고 자체개혁을 권유하고 있다.
이를 곧 신간회의 목적·활동과 연결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나, 타종단도 자체의 개혁을 이루어 사회 개혁과 항일투쟁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 해석된다.

3. 교육진흥운동

만해(한용운)는 불교혁신 외에도 사회 각 방면의 계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비록 승려에 국한된 것이긴 하나『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문명은 교육의 정도에 따라 성쇠하는 것이라는 대전제하에 승려교육에 대한 잘못된 현상을 비판하고 구체적 개혁안을 제기하였었다.
이같이 불교계 자체 내의 혁신을 위한 그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3·1운동(1919) 이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즉 불교계에서 식민지 학정에 신음하고 있는 일반 민중으로 시야와 관심이 확대된 것이다. 그는『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에서도 수차 일제의 우민화를 위한 열등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있으며, 출옥 후 조선인본위교육(朝鮮人本位敎育)과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교육 진흥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제는 강제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공포하여 일본어의 보급과 조선인을 우민화시켜 일제에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양성하는데 혈안이었다. 이러한 식민지하의 교육내용이 만해(한용운)에게는 우주와 사물의 원리와 이론을 담은 과학교과서 조차 단지 일본말 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만해(한용운)의 저작을 통해 볼 때, 그는 교육을 가정·사회·학교교육의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하고,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렸을 때 접하는 가정교육이라 보았다. 어린이들이 가정에서 보고 듣는 것 중 교과서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육(智育)과 체육(體育)에 치중하여 덕육(德育)이 부족한 학교교육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실제 학교교육이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식민교육의 폐해를 누구보다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자신의 딸을 취학시키지 않고 직접 교육시킨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일제는 3·1운동(1919)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며 자기네의 교육제도에 준거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새로이 제정된 교육제도는 일본 학제와 동일하게 시행한다는 것을 내세웠으나, 그 실제 내용은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어 시간수를 대폭 늘리고 자기들의 역사를 주입시켜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즉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만해(한용운)는 한일공학제도(韓日共學制度)를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교육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1920년대의 민족지사들의 교육 및 민족운동이론의 하나였다. 그는 한 논설을 통해 교육의 근본목적은 개성의 발휘에 있다고 하며 조선에서 참다운 교육을 시키려면 조선인의 개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조선인 본위교육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일본인에게도 그들 본위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특히 초등교육의 경우 아동들이 가장 고심하는 것이 어학인데 공학을 하게 됨으로써 교육상 상당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지적하였다. 때문에 교육이론과 풍속·습관·언어의 차이 및 기타 관계로 볼 때 초등은 물론 중등교육에서도 공학의 실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주의를 지닌 만해(한용운)에게 있어서 한글에 대한 깊은 애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가갸날(한글날)’이 제정되자 가갸날이란 이름에 대한 인상을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은 감격에 벅찬 어조의 시를 읊었다.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제일(祭日)
데이·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 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 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여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리쳐
가갸날을 자랑하겠습니다.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
-관음굴(觀音窟)에서-
(『東亞日報』1926년 12월 7일)

또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마련되자 이를 환영하며 그 보급방법으로 첫째, 교과서가 나와야 하고 둘째, 언론기관과 문필가가 힘써 행하여야 하고 세째, 한글 강습회를 열어 대중을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등 한글에 대한 깊은 애정과 보급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일본어 교육위주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식민지 체제 자체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 양성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1911년의 제1차 조선교육령의 시행으로 조선 청년들의 대학교육의 길은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일부 학생들만이 해외유학의 방법을 통해 전문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3·1운동(1919)의 영향으로 외형적이나마 총독정치가 방향을 전환하였고 민족적 각성에 의해 1922년 초부터 민립대학 설립의 기운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민족정신을 높이고 단결을 공고히 하여 새로운 희망과 긍지를 주었으며, 점차 향상되어져 간 우리의 교육수준과 교육열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의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의 서두 부분은 이 운동의 취지를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들의 일이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고는 불능하도다.
그런고로 알고야 동(動)할 것이요, 알고야 일할 것이며 안 이후에야 정치나 외교도 가히 써 행할 것이요, 안 이후에야 산업도 가히 써 발달케 할 것이라. 알지 못하고 어찌 사업의 작위와 성공을 기대하리요. 다시 말하면 정치나 외교도 교육을 기대서 비로소 그 효능을 다 할 것이요, 산업도 교육을 기대서 비로소 그 작흥(作興)을 기할 것이니 교육은 우리의 진로를 개척함에 있어서 유영한 방편이요 수단임이 명료하도다….
(『東亞日報』, 1923년 3월 30일)

당시『동아일보』『조선일보』등 민족언론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일대성거(一代盛擧)’, ‘일종의 문예부흥’, ‘민학(民學)의 발흥’이라 극찬하며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일제의 황민화·우민화만 요구하는 식민지 열등교육을 강도 높게 비판하던 만해(한용운)는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民立大學期成準備會)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드디어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종로중앙청년회관(鍾路中央靑年會館 : YMCA)에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국내외의 발기인 1,170명 가운데 462명이 참석하였다. 회의는 며칠 동안 계속 되었는데 만해(한용운)는 3월 31일의 회의에서 이상재(李商在)·이승훈(李昇薰)·최린(崔麟)·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30명의 중앙부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4월 2일에는 유성준(兪星濬)·이승훈 등과 함께 9인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주역을 담당하였다.
만해(한용운)는 이 해 4월 18일 YMCA에서 열린 민립대학 기성회 제1차 선전강연에 유성준과 함께 연사로 참석하여 ‘자조(自助)’란 연제의 강연을 하는 등 민립대학의 설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동아일보』1924년 1월 1일자에서는 첫째 우리의 민족이라는 단체감 부족, 둘째 심히 담박(淡泊)한 듯하면서도 심히 인색한 인민, 세째 ‘다수의 력(力)의 집합’이란 단체생활의 근본 원리에 대한 이해 부족, 네째 동족간의 불신을 들고 있다.
그런데 1923년 여름의 수재로 인한 재산상의 막대한 손실과 이재민의 발생, 1923년 9월의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인한 경제공황 등이 기부금의 모금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의 탄압은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23년 5월 간교한 경성제국대학령(京城帝國大學令)을 발표, 맞불작전으로 그 기세를 약화시키려 하였고,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불온사상 소유자라 탄압하며 다각도로 모금운동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결국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여러 요인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식민통치하에 좌절하여 있던 민중들에게 희망과 자각을 준 것은 나름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제국주의적 통치의 방편으로 최고 학부인 경성제국대학을 설치하여 고등인력을 교육, 식민관료로 배출하고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창출해 나간 것이었다.
만해(한용운)는 일본 제국주의의 타파라는 우리 민족에 처해진 당면의 본질적인 과제를 깊이 자각하면서 교육의 대상을 승려에서 일반 민중으로 인식을 전환하였다. 실제 한일 공학제도를 반대하고, 조선인본위교육을 주장하였고, 또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주체적인 민족교육운동을 항일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였던 것이다.

4. 여성 해방운동

자유와 평등에 관하여 만해(한용운)는 누구보다도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간·국가간은 물론 남녀 간의 경우에도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미 1912년경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여자단발론(女子斷髮論)』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원고가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남자들의 단발에조차 사회적 물의가 그치지 않던 때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또 그는 20년쯤 후엔 여자들의 비녀가 소용없게 될 것이라는 선각적인 예언을 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봉건적 유습에 얽매여 있던 여성의 해방을 주창한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근대 여성운동을 간략히 볼 때, 188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을 효시로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이 생겨 선각적 여성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여성계몽운동으로 여성의 자각이 심화되어 점차 사회참여가 확대되었다. 특히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여성운동의 전기가 되었으며, 3·1운동(1919)을 계기로 여성운동은 본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여성의 교양향상과 교육, 경제적 균등운동을 전개하다가 1924년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고, 1927년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지닌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만해(한용운)는 1927년 조직된 신간회·근우회와 관계를 가지며 여성해방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여학생친목회취지서』에서 과거 우리 여성의 역사를 단 한줄기의 광명도 없는 커다란 무덤이었다고 말하고 남존여비라는 불평등하고 구속적이고 굴욕적인 현상을 타파하고 장엄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친목단체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 여성이 아닌 신여성,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성,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여성 활동이 크게 진전되지 않는 것을 여성 자신의 자각의 부족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설령 여성해방에 종사하는 여성일지라도 그들이 철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남자에게 피동(被動)된 것이라 하고 있다. 그 예로 여성해방을 위해 활동하여 촉망과 희망을 받던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타락’하여 활동을 중지하고, 한동안 많던 단발여성들이 보기 드물게 된 것을 들며 다음과 같이 여성 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조선여성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각을 가지고 그 자신의 해방에 대하여 자립적 정신으로 잘 활동하게 하기 위하여 그 자각을 촉진하여야 합니다. 여성에게 충분한 자각이 있게 되는 날, 조선 여성운동은 비로소 힘있게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성의 자각을 여성해방의 목적, 더 나아가서는 인류해방의 목적을 달성 하는 원소(元素) 라고 합니다.
(『東亞日報』1927년 7월 3일)

한편 그는『근우(槿友)』창간호(1929년 5월 10일)에서 여성운동의 대상을 여성을 속박하는 구윤리·도덕·습관이라 하고, 당시 여성운동의 이론이 부족하고 실현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작은 일부터 큰 것에로 꾸준히 나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1920년대 그는 여성해방운동에 관해 어느 정도 구체적이고 확고한 믿음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4년 저술한 유고(遺稿)『죽음』이란 소설에서는 약간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주인공 영옥의 입을 빌려 여학생은 미래사회의 어머니이자 그들이 낳은 아이들의 가정교육을 위해 주임교사로서 학식을 갖추고 교육을 받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또 자녀교육을 잘 시키기 위하여 순결과 방정한 품행을 행복의 조건이라는 전제를 덧붙이고 있다. 이는 아직 그가 여성 해방운동에 대하여 피상적이고 계몽적인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즉 여성의 범위를 신여성·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성·여성 해방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으로 국한한다거나, 여성만의 순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론인 평등정신과 모순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1930년대에 들며 만해(한용운)는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소설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 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흑풍(黑風)』이다.『흑풍』은 그의 소설로는 맨 처음 발표된 것으로 1935∼36년에『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이 가운데 그의 여성해방에 관한 운동이론이 가장 잘 보이는 것은 ‘여성해방회(女性解放會)’란 부분이다.
이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남자의 속박을 떨치고 자유평등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여성해방회 발기총회가 열리는 공회당이 설정된 무대이고, 임시의장·회원·호창순이란 여성 및 기타 방청객의 발언을 통하여 여성해방운동에 있어 일정한 이론 없이 제시된 강령을 비판하고 나름대로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만해(한용운)는 여성해방회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남자 방청객으로 말미암아 입장하지 못한 여성이 많은 상황과 호창순의 발언에 대한 야유를 묘사하며 여성 해방운동이 장래에 닥칠 난관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방청에 있어서의 남녀평등권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단발여성, 양장차림의 20세 전후의 여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신여성의 집합체로써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임시 의장은 남녀 간 육체적으로 부분적 차이는 있을망정 이것이 권리상 하등의 문제가 없는데도 과거 남자에 의해 노예 같은 생활을 해온 여성생활의 폐단을 지적하고 다음의 네 가지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남편의 횡포를 제재할 사.
둘째, 사생아를 보호할 사.
세째, 참정권을 획득할 사.
네째, 경제권을 확립할 사.

그런데 만해(한용운)는 임시 의장의 여성해방에 관한 취지 설명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과격하고 약간은 이성을 잃은 듯한 표현을 하여 보다 논리와 조리를 지닌 강령이 제시될 것이란 복선을 치고 있다.
이에 대한 다른 회원의 발언이 계속된다. 그녀는 회에서 제시한 강령이 불철저하고 중복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보다 철저한 세 가지 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일체 남자의 횡포를 타도할 사.
둘째, 강제 결혼제도를 폐지할 사.
세째, 연애의 자유를 실행할 사.

첫 조항의 일체 남자란 남편은 물론 아버지와 오빠까지 포함한 것이고, 먼저 제기되었던 참정권과 경제권 문제는 이 조항만 제대로 실행된다면 따로 조항을 만들 필요 없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이 강령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바로 이때 호창순이 등단하여 만해(한용운)의 여성운동 방법론상의 지도이론을 대변하고 있다. 그녀는 극단을 배격하고 중용적(中庸的) 입장에서 이론이 서고 실행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위의 두 가지 강령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일체 남자의 횡포 제재’란 것은 이론상 맞지 않고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남녀가 천부 인권이긴 마찬가지인데 여자를 압박하는 것이 남자의 포학이라면 인권을 찾지 못하고 남자의 압박을 받는 것은 여자의 약점이란 것이다. 따라서 남자를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인격과 품위와 위치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강제 결혼제도 폐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단순히 혼인제도 때문에 여자만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논리상 잘못된 것이라 하며 혼인제도가 인지(人智)의 발달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진화된 남녀 결합의 형식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결혼 시 당사자들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여자로서의 생명은 정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연애의 자유란 다부주의(多夫主義)·난음주의(亂淫主義)와 엄격히 구분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정조를 여자의 인격과 권리라 하였으나, 여자가 정조를 지키는 것은 남자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라 하고 이것이 여자의 권리를 찾는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네째, 참정권을 획득키 위해 노력하되 먼저 학문·지식·품행·훈련 등 정치에 참여할 만한 능력배양을 선행 조건으로 들고 있다. 또한 여자가 수천 년 동안 남자에게 압박을 받아 온 제일 중요한 원인으로 경제권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경제는 생활의 혈맥이라 하고 개인 경제가 파탄되면 인격이 자립할 수 없으니 의뢰성을 버리고 스스로의 생활력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호창순은 약간은 장황하나 논리와 조리를 지닌 이상의 발언을 끝내고, 이를 종합하여 다음의 4대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여자의 품격을 향상할 사.
둘째, 결혼과 이혼을 자유로 할 사.
셋째, 남여가 한가지로 정조를 지킬 사.
넷째, 경제권과 참정권의 획득을 기도할 사.

이는 곧 만해(한용운)의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강령이자 이론이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여성해방운동의 극단적 방법론을 스스로 제기하고는, 이를 중용적 입장에서 스스로 재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만해(한용운)는 이를 통해 자칫 오해, 오도될 수 있는 여성해방론에 대하여 현실과 실현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 내용은 만해(한용운)가 이전에 논설을 통해 주장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즉 남성이나 사회제도를 탓하기보다 여성 스스로가 깊이 자각하여 품격을 높이고 굳센 실행력을 키우며 나아가 정치적 능력을 배양하고 경제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만해(한용운)의 여성해방 운동관은 우리의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질서체계를 변형하는 한편, 서구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 이를 잘 조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만해(한용운)의 자기혁신적 면모를 보여 주는 것으로, 여기에는 봉건적 구습의 혁신과 보수적인 면이 병존하는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5. 농민운동

1930년대에 들며 만해(한용운)는 농민문제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소작쟁의 운동이 치열해지는 등 농민운동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자신이 신간회 활동을 통해 구체적 사안에까지 민족운동의 개념이 확대되고 인식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하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 원인이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에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통감부(統監府) 시절부터 계획된 것으로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한 기초적이고 종합적인 식민정책이었다. 이는 우리가 주권국가로서 주체적으로 실시했던 양전사업(量田事業)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식민지 경제수탈정책인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말미암아 소작농의 관습상의 경작권과 도지권(賭地權)이 부정·소멸되었고, 농민의 한광지(閒曠地) 개간권과 입회권(入會權)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간교한 계책으로 다수의 토지를 탈정하여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식민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 사업이 우리 농촌사회에 끼친 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농민층의 분화가 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소작농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토지조사사업이 토지개혁적 성격이 아니라 반봉건적 기생지주제도(寄生地主制度)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소작료율이 관유지(官有地)에서조차 종래의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대폭 인상되었고, 소작농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게 되었다. 또한 자소작농(自小作農)들도 식민지 상업 자본주의의 침투에 따라서 소작농으로 전략하게 되어 소작지 수요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결국 많은 소작농이 몰락하여 유이민화하여 만주나 해외로 떠돌았고, 일부는 도시로 유입되어 임금노동자로 전신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작권의 보호와 소작료율을 경감하기 위한 소작농의 단결이 촉구되어 1920년대 초반부터 노동단체와 소작농단체가 조직되더니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농민운동은 소작인 조합의 결성, 소작권 보호, 소작료 감하를 비롯한 소작조건의 개선 등이 주된 투쟁의 과제였다.
다음의 소작인 단체의 결의사항은 당시 소작인의 고충과 소작경작의 실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 1922년 9월 4일 개최된 진주소작노동자대회(晋州小作勞動者大會)에서 채택된 결의안

1. 종래의 지정소작료[정조(定租)]를 폐지할 것.
2. 소작료는 생산의 절반 분배로 할 것.
3. 지세(地稅) 및 부가세(附加稅)는 지주부담으로 하며 고(藁 ; 짚단)는 그 전부를 소작인의 소득으로 할 것.
4. 소작료의 운반은 지주의 소재지 1리(里) 거리내에서는 소작인 부담으로 하고 1리 이상부터는 지주부담으로 할 것.
5. 지주 및 사음(舍音 : 마름) 등에 물품증여의 관습을 모두 없앨 것.
6. 지주에 대한 무상노역을 모두 없앨 것.
7. 곡세(斛稅)를 모두 없앨 것.
8. 소작료 취득에는 두곡(斗斛)을 사용할 것.
9. 본 결의 사항에 위반하는 자는 상호보조를 아니하며 단교(斷交)할 것.
10. 본 결의 실행 및 조사를 위하여 공제회 지회내에 조사위원 20명을 두어 각 면을 순회케 하고 소작인 대 지주간에 입회하여 실행케 할 것.
11. 지주로서 본 결의사항을 반대하거나 무과실의 소작인으로부터 소작지를 빼앗은 자와는 단교·배척할 것.
12. 본 결의는 금년 추수기부터 실시할 것

· 1923년 1월 5일 순천군(順天郡) 상사면(上沙面) 소작상조회(小作相助會)에서 통과된 결의안

1. 소작료는 전 수확의 4할로 할 일.
2. 소작권은 함부로 이동치 못할 일.
3. 소작료 운반은 10리 이내로 할 일.
4. 사음의 중간소작을 폐지할 일.
5. 두량(斗量)할 시에는 사각두(四角斗)를 쓰지 말고 고두봉(高斗捧)의 관습을 못하게 할 일.
6. 지주는 소작인에게 무상노동을 요구치 못하게 할 일.
7. 제언(堤堰) 방축비가 2원 이상 달할 시에는 지주가 부담 할 일.

이를 보면 소작료율의 인하, 소작권의 확보, 지주의 부당한 소작외적 요구의 거부, 지주의 각성 및 소작인의 단결촉구 등이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지주들은 지주회의를 조직하여 집단 대응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대 일제가 실시한 산미증식계획도 식민지 경제수탈의 가혹한 정책이었으므로 농민, 특히 소작인을 중심한 소작쟁의를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920년대 중반에 만해(한용운)는 대다수의 소작농민의 이익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소작쟁의를 순수농민운동으로 이해하지 않고, 조선 사람들끼리의 이해 다툼이기 때문에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면 소수의 희생은 마땅하다는 견해를 표한 바 있다. 이는 일제와 결탁한 지주계층을 식민지배의 본질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경제적 투쟁 방법을 정치적 투쟁의 하위에 위치시키는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조국독립을 대전제로 한 논리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경제적 독립을 추구했던 소작쟁의에 대한 본질의 파악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조국독립을 위한 방법론으로 그는 철저한 귀납적 논리보다는 연역적 논리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농민운동의 관점은 1930년대에 들며 본질에 접근하고 있고,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하는 등 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30년대의 농민문제는 1920년대에 비해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이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이란 식민정책과 조선미의 일본유출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였다. 소작쟁의는 더욱 빈발하여 1923년의 126건에서 1928년에는 1,590건으로 격증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1927년에 5년에 걸친 소작제도 관행조사를 실시하였고, 1932년에는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 및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整令) 등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는 일제가 일부 악랄한 지주 계급의 횡포를 억제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증진을 기하고, 소작쟁의가 사회주의적 농민운동과 결합하여 민족해방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타협적 방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해(한용운)는 1930년, 당시 농민들의 생활이 파멸에 처해 있다고 하며 그들의 고통과 불만을 깊이 동정하고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농민 속에 들어가서 위대한 노력을 한다 해도 정치적으로 운동이 있기 전에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자주국에선 정치적으로 그들을 움직일 것이나, 조선은 객관적 정세가 정치적 충돌을 줄 수 없으므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길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아 생활에 동요가 생기는 그들이니만큼 역시 모든 것을 경제적 운동을 통해야 할 것입니다.…
(-농민의 고통-『농민』1권6호 1930)

이는 그의 농민운동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1920년대와는 달리 정치적 관점에서 벗어나 농민운동을 순수한 농민의 경제적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가 처해 있던 식민치하의 현실상 정치적 운동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정치운동에 우선하여 경제운동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당시 농사를 한천한 직업으로 알고 이농하여 도회지로 가고자 하는 세태를 지적하고 농업의 신성함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과거는 오직 자연대로 무의식하게 생각하여 왔으나, 우리는 이 농업이란 직업을 가장 신성하게 알고 또는 자기가 그 직업을 가장 마땅한 직업이라고 선택하였다고 의식하고 농업에 대하여 충실하며 기술의 연구와 증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줄 믿습니다.…
(-농민대중에 대한 기대와 희망-『윗책』1권1호, 1930)

이어서 그는 농사와 농민생활에 대한 방어책에 대하여도,

…물론 농사짓는 데에도 이렇게 여러 사람의 힘을 합하여야 하거든 농민생활에 있어서 정치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반드시 방어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 농촌에는 반드시 무엇이라고 지정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침입할 것이었으니 그는 우리 농민대중이 스스로 각성하고 온 힘을 바쳐서 단체적으로 그를 방어할 준비가 있지 않으면 안될 줄 믿습니다.
(위의 글 중에서)

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우려한 ‘농촌에 침입할 것’은 기생지주제를 포함한 불합리하고 악랄한 식민지 경제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결국 그는 조선의 농민들에게 농업의 신성함을 주지시키고 식민지 경제수탈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농민대중이 각성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한 논설에서 농민의 유형을 구분하고 농민운동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즉 농민을 지주·자작농·소작농으로 유형을 구분하고, 이들 농민을 모두 규합하여 운동을 한다면 이는 변질된 정치운동이지 농민운동은 아니라고 정의하고 소작농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농민운동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그는 당시까지 계속된 소작쟁의가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일제의 탄압에도 원인은 있으나, 더 근본적인 것은 소작인의 단결부족이라고 지적하고 소작인이 깊이 각오하여 일치행동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농촌 소작인의 자구책으로 협동조합운동과 농촌 계몽운동 등의 대책도 제시한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농촌 소작인 경제의 자위책으로 소비조합을 조직하여야겠다. 근일에 도회지에서도 소비조합 열이 왕성하나 도회지보다도 농촌에 더욱 필요하다. 농촌에 소비조합을 설립하고 농구·비료, 기타 생활상 필요한 일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쓰면 훨씬 싸게 사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외에 문자보급, 미신타파에 대해서는 현재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후에도 더욱 왕성히 할 것이나 농민의 미신이라는 것이 그 뿌리가 심히 강하니 너무 급격히 타파하려다가는 성공도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반감을 격성(激成)시킬 것이니 서서히 실제 사건에 포착하여 타파에 힘쓸 것이다.
(-농민운동에 대한 신년소감-『조선농민』6권1호, 1930)

협동조합·소비조합운동론은 근대적 경제개념에 입각한 것으로써 그의 탁월한 사회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하여 농민들이 정신적으로 결집될 수 있고, 실제의 생활에도 크게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문자보급과 미신타파는 농촌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다. 농촌과 농민을 계발하여 조국광복 원동력으로써의 역량을 강화하고, 그들이 미신에 구속되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 타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충정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만해(한용운)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로 인하여 기존의 농촌사회와 질서가 파괴되어 농토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의 이민이 날로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이민 대상지에 대한 현실적 검토를 한 뒤 그 중 비교적 적당한 이주지로 시베리아를 들고 있다. 그는『조선민족이 안주할 땅』(『삼천리』제4권 제10호, 1932. 10)이란 논설에서 하와이의 호놀룰루나 미주(美洲)는 이민법(移民法)때문에 노동을 위한 이주가 불가능하고, 일본의 동경(東京)·대판(大阪)·북해도(北海道) 등지는 농업이 아닌 공장노동자로 가는 것이고 인원도 제한을 받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또한 만주는 농토는 광활하나 마적의 피해로 동포들의 피해가 있으므로 굳이 이민을 간다면 시베리아로의 집단이주가 적당하다고 하고 있다.
그는 이 같은 농업이민이 최선책은 아니나, 당시의 추세로 볼 때 시베리아로의 집단이주를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정치적 선행조건으로 어느 지역을 100년, 또는 50년 동안 무상으로 불하받아 농사를 지어 생계를 개척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 이민은 불법적인 상황이므로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다. 결국 이 또한 식민지배하에서 갈등하고 고민했던 만해(한용운)의 고육지책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제6장 노년의 만해(한용운)와 불굴의 민족정신

1. 저항문학활동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와 3·1운동(1919)을 거쳐 1930년대 초반까지 불교 개혁가·민족혁명가·독립투사로서 만해(한용운)의 활동은 왕성하였다. 그러나 1930년 중반 이후는 주로 논설·수필의 집필과 함께 특히 소설을 집필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필자로서 그의 문학세계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은 과분한 작업이다. 그러나 만해(한용운)가 순수 문학만을 지향한 것이 아니고 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문학 활동을 전개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피상적이나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해(한용운)의 문학은 그가『님의 침묵』을 발표한 직후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 시집이 발간되었던 1926년『시대일보(時代日報)에 류광열(柳光烈)이,『동아일보』에 주요한이 각각 그 독후감을 발표한 이래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관심 속에 연구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하여 만해(한용운)에 대해 다양하고 많은 연구업적이 도출되었다. 특히 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분석이 집중되어 비록 그가 시성(詩聖) 타고르(R. Tagore)의 영향을 받았으나, 문학사적 관점 외에 독립투사, 선승(禪僧)이란 업적이 더해져 타고르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한편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만해(한용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시인이요, 3·1운동(1919) 세대가 낳은 최대의 시민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문학이나 독일의 반나치스 작가의 저항문학과 비교해 볼 때, 그가 단지 문학만을 통한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일생동안 변절 없이 다양한 투쟁을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 주요한의『불놀이』가 신시(新詩)와 자유시(自由詩)의 최초의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일본의 문학적 형식을 처음 우리나라로 도입한 것들에 대해 ‘최초’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제가 문화정치란 미명하여 허가한 일부 신문의 문예란과 잡지는 몇몇 문인들의 동인지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시인 만해(한용운)는 조국과 민족의 광복을 외면하고 식민지적 체제 속에 편입되어 그 소시민으로 전락한 문인들로 구성된 어떤 문학동인 그룹이나 문예지에도 가담하지 않고 자신이 발행하던『유심』등에만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비타협적 성격이 당시의 반민족적 문단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최남선·이광수의 문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시(作詩)는『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을 위시하여 시조와 한시를 포함, 모두 300여 편에 달한다. 이 같이 방대한 작품 중『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의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만해(한용운) 자신은 원래 시인으로 출발한 것도 아니고, 또한 자기 스스로가 서정 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자신을 독자에게 시인으로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며, 자신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님의 침묵』이야말로 ‘의정(疑情)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한 세계에서 오직 한 권밖에 없는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로서 ‘선(禪)의 세계를 처음으로 인간화하고 역사화함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현대화하고 보편화 하는데 성공한 증도의 시집’이란 평가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그가 애타게 갈구한 ‘님’은 그의 시 전체에 흐르는 공통의 주제이자 문제의식이다. 그의 님은 그의 신분과 사상 및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종합하여 초월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였고, 연구자에 따라 조국·민족·불타·중생·애인·친구 등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떠나버린 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님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그 기다림은 회자정리(會者定離)·이자정회(離者定會)라는 일반적 원리에서 출발하고 있어 현실을 보는 그의 시각을 말해준다. 즉 침묵하는 님을 통해 역동적인 희망을 강조한 것으로써, 일제치하라는 암울한 당대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일체화 된 조국광복에의 희망적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만해(한용운)는 새로운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미 1924년 탈고한 미발표 소설『죽음』이 있으나, 그의 노년기인 57세부터 60세에 이르는 시기에 신문·잡지에 본격적으로 연재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그의 소설로는『죽음』외에『흑풍(黑風)』(1935,『조선일보』연재),『후회(後悔)』(1936,『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철혈미인(鐵血美人)』(1937,『불교』신 1·2집에 연재하다가 중단),『박명(薄命)』(1938,『조선일보』연재) 등이 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한때『삼국지(三國志)』를 번역,『조선일보』에 연재한 적도 있었다. 그가 이처럼 소설을 발표한 것은 그의 다양한 문학장르와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노년의 그의 경제적 생활상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주로『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하였던 것은 그 자신이『동아일보』가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면도 있으나, 조선일보사에 그와 친분이 두텁던 홍명희(洪命熹)·이광수 등이 요직에 있으며 집필을 권유하였고, 특히 사장 방응모(方應模)의 배려가 있었다. 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그를 도우려는 친구들의 호의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판을 향해 달리며 압정과 학대가 더욱 심해져 언론을 통한 직접적 표현이 불가능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간접적 표현인 소설의 형태를 빌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장편소설『흑풍』의 연재를 광고하고 있다.

금번 만해 한용운 선생이 본보를 위하여『흑풍』이란 장편 소설을 집필하시게 되었습니다. 4월 8일부터 본보 제4면(학예면)에 연재될 터로 날마다 여러분의 환영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선생은 우리사회에 있어 가장 존경을 받은 선진자의 한분이요, 또 가장 널리 명성을 울리는 선배의 한분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어떠한 작품에든지 그 작자의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님의 침묵』에도 고결한 중 열정이 넘치는 선생의 인격으로 가득 차 있지만 더구나 이『흑풍』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다 그러한 선생의 인격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올시다.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1935년 4월 8일자)

이는 단순히 필자를 평면적으로 소개하고 내용에 대해 간단히 요약 설명하는 여타의 소설 선전광고와는 색다르다. 즉 독자들에게 만해(한용운)의 고결한 인격을 소개하는 한편 그의 소설이 다른 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것임을 강조하며 다른 의미로 읽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른 소설과 다르다는 것은 순수문학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만해(한용운)의 반봉건·반제사상을 암시한 것이라 생각된다.
만해(한용운)도『흑풍』의 연재가 시작될 때 ‘작자의 말’을 통해『흑풍』의 내용을 간단히 언급함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나는 소설 쓸 소질이 있는 사람도 아니오. 또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애쓰는 사람도 아니올시다. 왜 그러면 소설을 쓰느냐고 반박하실지는 모르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동기까지를 설명하려고는 않습니다. 하여튼 나의 이 소설에는 문장이 유창한 것도 아니오, 이외에라도 다른 무슨 특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로서 평소부터 여러분에 대하여 한번 알리었으면 하던 그것을 알리게 된데 지나지 않습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드리는 것은 미안하오나 이 기회에 여러분과 친하게 되는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많은 결점과 단처를 모두 다 눌러 보시고 글속에 숨은 나의 마음씨까지를 읽어 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조선일보』1935년 4월 8일자)

이로써 볼 때 그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의 형식을 벌어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앞두고 일제의 군국주의 지배가 극성을 부렸고, 언론출판물에 대한 검열이 매우 혹독하였었다. 특히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던 만해(한용운)의 글이 주목을 받을 것은 너무도 뻔한 것이었기에, 그는 한계에 부닥친 직접표현 대신 소설이란 간접표현을 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가공의 사실 외에 ‘글속에 숨은 나의 마음씨’, 즉 항일자주독립정신의 고취라는 본래의 취지까지 읽어달라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 활동 분야 중 소설부문은 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는 일반인 가운데에는 그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님의 침묵』이 너무 유명한데도 이유가 있으나, 소설에 대한 연구와 평가의 미진에도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만해(한용운)의 소설작품은 1970년대의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결과 그의 소설의 특성은 항일 민족주의적인 주제와 투철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내용의 지향이란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앞에서 말한 주변의 권유 및 민족주의적 계몽의도라는 사실과 함께 그의 의욕적인 카타르시스가 시어(詩語)만으로는 의도대로 생성되지 않는 자기 시작(詩作)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만해(한용운)의 문학 활동, 특히 소설부문에 대하여는 아직도 검토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소설을 통하여 전하고자 한 ‘글속에 숨은 마음씨’는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제 그 사실을 추구하도록 한다.
1924년 탈고한 미발표 유작『죽음』은 일신의 안락을 위해 허위보도와 곡필을 하는 경성신문사 편집국장 정성렬과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민족청년 김종철을 대비시킴으로써 1930년대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제목처럼 등장인물들이 복잡한 사건의 갈등 끝에 모두 죽고 만다는 데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에 의해 악업(惡業)을 짓고 세간(世間)에 윤회하는 중생들의 허무를 그리고 있다. 특히 영옥의 어머니가 임종하며 그녀에게 남긴 유언 중 금전만능과 자유연애 지상주의의 경계, 영옥이 신여성에 대한 계몽활동 전개 등의 사실을 통해 신소설 수준의 계몽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소설의 첫머리를 8월 29일의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일로 설정,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채 곡필을 일삼던 경성신문사 편집실에 폭탄을 던지고 종로경찰서에 스스로 나타나는 종철의 모습을 통하여 팽팽한 긴박감을 주며 항일만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한 의도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는 소설속의 최 선생이 독립투사를 숨겨주다 발각되어 경찰에 잡혀가 문초를 받다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처럼『죽음』에서 항일적 내용이 직접적이고 강한 톤으로 그려졌고 복선이 많이 깔려져 있음은 3·1운동(1919) 직후 그의 강렬한 독립투지를 보여주고 있다.
1935년에 발표한『흑풍』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변혁기의 사회적 사조와 상황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이 소설은 청(淸)나라 말기를 무대로 낡은 정치체제에 대한 근대적인 혁신운동의 격렬하고도 엄숙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3·1운동(1919) 같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이미지로 하여 항일투쟁의 모습을 그리려 한 것이었다. 이처럼 중국의 사건과 상황을 소재로 한 까닭은 일제의 혹독한 언론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그는 혁명적 활약을 하는 왕한과 창순·봉순을 주인공으로 하여 독자들에게 다음의 교훈을 전달하려 하였다. 하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일제에 대한 투쟁정신을 고취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빈부의 격차, 자본가 계층의 착취, 소작인과 노동자의 참상을 부각시켜 사회주의적 혁명을 조장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해방회란 단체를 등장시켜 여성해방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과 강령을 제시, 반봉건적 요소의 타파에도 강한 신념을 보이고 있다.
1936년『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 신문의 폐간으로 중도하차 한『후회』는 근대 개화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주인공 창수와 전통적 여성인 경순, 창수가 일본유학 중 새로 사귄 선경 간에 삼각의 애정관계를 스토리로 전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도중에 중단되었기 때문에 후반부를 알 수는 없으나, 제목에서 암시하듯 재혼한 창수의 본처에 대한 인간적인 참회를 전제로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만해(한용운)는『후회』가 연재되던 중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주최한 장편작가 회의에 참석하여 그의 문학관 및『후회』의 모델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자리에는 만해(한용운)를 비롯하여『조선일보』에『애욕의 피안(彼岸)』을 연재하던 이광수,『매일신보』에『불연속선(不連續線)』을 연재 중이던 염상섭(廉想涉) 등 10명이 참석하였다. 그는『후회』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대상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도시와 농촌을 구별하기는 어려우나 도시 편에 가깝고 과거가 아닌 현실을 취재,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이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문학관 및 작가론을 피력하고 있다.

…예술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시대와 세상만을 그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상을 떠나서 천상(天上)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요, 지하를 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면 그것이 과연 훌륭한 예술이냐 아니냐에 있을 것이다. 예술이 오늘날의 일부 문학자들이 말하는 거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예를 꽃에 비해서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성 그것은 어느 한 사회나 계급은 물론이요, 어느 한 시대나 현실만을 그려야 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이 시대의 사람이요, 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킨다든지 어떠한 필요에서 보더라도 자연히 이 시대와 세상을 먼저 그려내는 것이 순서를 보아서도 타당한 일이라고 보겠다.
(『삼천리』제8권 11월호, 1936. 11)

문학이란 특정계급이나 일부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적 문제에 착안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과 작가론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문학의 현실참여를 강조한 것이다.
한편 그는 신문 연재소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술성보다 통속성에, 순수적인 것보다는 대중적인 편이 좋을 것이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서 모든 문학작품에는 사실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적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모든 작가들도 여러 경향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나, 굳이 자신의 경향을 분류하자면 사실주의에 속한다고 밝혔다.
『후회』를 쓰게 된 동기와 모델에 관해서도 언급한 바, 이는 그가 1년 전인 1935년 여름 사직공원에 놀러 갔다가 보고 느낀 지극히 인간적인 부부애를 소재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30세가량의 아편쟁이이자 소경의 부인이 매일같이 동냥을 하여 남편의 아편 값을 대고 남편을 위해 온 희생을 감내하는 광경에 깊은 감명을 받고『후회』의 집필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하여 인간 최하층에서 일어나는 참된 부부애를 그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대개 이른 아침이나 저녁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소설을 집필하였는데, 그 분량은 일정하지 않았고, 내용의 구상과 전개가 잘 되지 않을 때에는 4·5일이고 집필하지 않으나, 일단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세 번 이상 읽은 뒤 송고하는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1937년에『불교』잡지에 연재하다 중단한『철혈미인』은 분량이 너무 적어 그 대강의 파악조차 어렵다. 그러나 중국군벌의 거두 손전방(孫傳芳)과 봉천파(奉天派)의 장종창(張宗昌)과의 전쟁을 소재로, 이 전쟁을 반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봉천파에 합류, 제이군장이 된 시종빈(施從濱)의 딸 곡란[谷蘭(시곡란)]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가 손전방을 암살한 동기와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민족 내부의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여인인 곡란(시곡란)과 미국에 유학하여 신교육을 받은 그녀의 친구 성순과의 대화를 통하여 여성의 가치관을 대비시키고도 있다.
1938년『조선일보』에 연재한『박명』은 완결된 소설이다. 이 소설 또한 제목에서 상징하는 바와 같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 장순영(張順英)의 박명한 생애를 그런 것으로 한국판『여자의 일생』이라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소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듣고 본 중 가장 거룩한 한 사람의 여성을 그려볼까 합니다. 대략 이야기의 줄기를 말하면 시골서 자라난 한 사람의 여인이 탕자의 아내가 되어 처음에는 버림을 받았다가, 나중에는 병과 빈곤을 가지고 돌아온 남편을 최후의 일순간까지 순정과 열성으로 받드는 이야기인데, 이러한 여성을 그리는 나는 결코 그 여성을 옛날 열녀관념으로써 그리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사람을 위해서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변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면서 남을 섬긴다는 이 고귀하고 거룩한 심정을 그려 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줄거리를 끌고 나가면서 만약 곁가지로 현대 남성들의 가정에 있어서의 횡포하고 파렴치한 것이라든지 또는 남녀관계가 경조부박한 현대적 상모가 함께 그려진다면 작가로서 그윽히 만족하는 바이며 또한 고마운 독자 여러분에게 그다지 조촐하지 아니한 선물을 드렸다고 기뻐하겠습니다.
(『조선일보』1938년 5월 10일)

이로써 볼 때 부부애를 그렸다는 점에서는『후회』와, 남녀간의 평등적 사랑을 강조한 점에서는『흑풍』과 대략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계모슬하와 같은 식민지 환경에 처한 우리 민족의 비애를 암시, 은유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만해(한용운) 자신이 언급하였듯이 순수하게 인간자체에서 발원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는 신문 연재소설의 특성, 즉 대중성·사회성·은유성·암시성을 십분 활용하여 전통적 관념과 새로운 사조를 주체적으로 재정립하여 봉건적 질서의 타파를 부르짖는 한편 항일투쟁정신을 직·간접적으로 고취시켜려 한 것이었다.
만해(한용운)의 소설에서는 흥미중심의 스토리 전개, 계모의 등장, 주인공들의 해외유학, 권선징악, 비극적 종말, 동양적 불교사상의 관류 등이 공통분모로써 추출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그의 소설에 대하여 근대적 형태에 미치지 못 한다든가, 스토리형에서 근대소설로 접근하는 과도적 작법을 보이고 있다든가, 배경설정과 스토리의 전개에서 너무 우연성이 인위적으로 강조되어 부자연스럽다는 등의 순수문학사적 입장에서의 비판과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문학적 차원으로만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사회적 신분, 불교사상 등 전인적인 면을 융합, 이를 토대로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교훈적 측면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흑풍』등에서 지주·기업가·특권 상류층과 노동자·소작인 등 하층민의 생활을 지나칠 정도로 양극적으로 대비하며 하층민의 입장에 서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노골적인 사회주의로의 몰입이나, 당시 문단에서 유행하던 신경향파의 사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주의란 현대적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파악될 성질이 아니다. 이는 그가 추구했던 불교사회주의적 차원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실체가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자유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일반적 의미의 공산주의와의 혼동도 유의하여야 한다. 당시 사회주의도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것으로써 단지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사상 그 자체가 절대적·궁극적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만해(한용운)는 민중적 색채가 농후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불교사상적 사회주의를 가미한 이상향을 지니고 반봉건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고, 소설에서의 표현 역시 이러한 관점과 맥락에서 이해함이 옳을 듯하다.

2. 풍란화(風蘭花)의 매운 향내 -일화(逸話)-

풍란화 매운 향기
님에게야 견줄손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 위 없으니 혼자 돌아오소서

이 시는 만해(한용운)의 지기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그의 영결식에 즈음하여 만든 추모시이다. 풍란화보다 매운 향기 그 향기는 곧 만해(한용운)의 인격·지조이며 그가 남긴 불꽃의 향내이다.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했고 불구가 된 조국을 얼싸안으며 꿋꿋하게 외길을 지켜 온 그였기에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말해주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고집스럽고 기벽한 성격을 보여주는 기담도 있으나, 대개 그의 투철한 민족애·조국애·자주독립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구전되거나 주변인물들의 회고 등을 통하여 오늘날에 전해져 실제와 약간의 가감은 있을 수 있으나 그를 전인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여겨진다.
만해(한용운)는 1933년(55세) 병원 간호부로 40세가 넘은 노처녀 유숙원과 재혼, 이듬해에 딸 영숙[英淑(한영숙)]을 낳았다. 그는 1930년『남모르는 나의 아들』(『별건곤(別乾坤)』제5권 제6호)이란 글에서 전처 소생의 아들 보국[保國(한보국)]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왜 전처와 아들을 냉대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그는 재혼과 함께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방응모(方應模)·박광(朴洸) 등의 후원을 받아 심우장(尋牛莊)이란 택호(宅戶)의 집을 짓고 입적때까지 줄곧 여기에서 여생을 보냈다.
심우장이란 택호는 만해(한용운)가 손수 지은 것으로 소를 찾는다는 뜻인데, 소를 마음에 비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수양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의『심우장』이란 시는 그 깊은 뜻을 노래하고 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약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그런데 집을 지을 때 그를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마주 보이는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 하여 끝내 동북향으로 집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조선 전체를 감옥이라 하고 심우장의 냉돌 위에서 꼿꼿이 앉아 상념에 잠기곤 하여 얻은 ‘저울추’라는 별명과 함께 그의 항일자주독립정신을 알려주는 대표적 일화이다.
평상시 그는 말이 적어 주위사람들이 매우 어렵게 생각하였다 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밤늦도록 고담준론을 나누다가 제자가 먼저 잠들면 아랫목에 옮겨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곤 자신은 냉골인 웃목에 꼼짝 않고 앉아 참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대중연설에 재질이 있었다. 풍부한 비유와 은유적 표현으로 청중을 압도하여 심지어 감시 차 임석했던 일경조차 박수를 치도록 사로잡았다.
3·1운동(1919)으로 옥고를 치루고 난 약 2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 등단한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연설을 하고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털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고 끝을 맺었다. 좌중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계속 되었고 그를 감시하기 위해 임석했던 일경 삼륜(三輪)조차 박수를 쳤다고 한다. 연설회의 성격이나 내용이 조금만 ‘불온’해도 당장 해산시키고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 가던 시절이었으니 그의 연설이 얼마나 기술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어느 강연회에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한 바 있다. 그는 일본에 자유를 빼앗긴 우리의 실정을 과수원을 지나며 본 잘려진 나뭇가지의 부자유함과 비유하여 좌중의 호응을 받았다. 이어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라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 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라고 나아가야 합니다.”라며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자신이 종교인이면서도 민족과 국가의 자유를 갈구함에 무신론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자유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란 취지로 우리 자신의 각성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한용운)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실권자였던 31본산 주지회의 때도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는 이를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나가서는 많은 독설을 뿜었다. 그 한 예로 총독은 조선을 통치하기에 바쁜 사람이니 자비를 바탕으로 사는 승려들은 총독을 면담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편안케 하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다. 이는 총독을 만나기에 혈안이 된 친일적인 31본산 주지들을 비아냥한 것이다. 또 다른 연설회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자문자답 하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은 31본산 주지들이라고 신랄히 호통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한편 다른 민족지사들과의 교유와 관련된 일화는 그의 곧은 지조와 기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흥미롭다. 3·1운동(1919)의 계획단계에서 그가 비밀리에 거창에 살던 영남의 거유 곽종석을 만나 유림측의 동의를 구하였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어 중복을 피하거니와, 그 외에도 많은 인사와 접촉하였다고 한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의논하던 중, 그가 독립 선언이 아닌 독립청원을 일본정부에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하자, 만해(한용운)는 우리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을 강조하였다. 끝내 이상재가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자 그는 이상재와 결별하였다. 이후 1927년 이상재의 사회장 때 자신이 장의위원으로 되었음을 알고 수표동의 장의위원회를 찾아가 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한다. 이때 펜에 얼마나 힘이 주어졌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명부가 찢어졌다 하니 그의 단호한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말의 대신이던 박영효(朴泳孝)·한규설(韓圭卨)·윤용구(尹用求) 등이 3·1운동(1919)에의 적극적 참가를 꺼리자 이들을 국가와 민족을 외면하고 개인의 안위와 영달만을 위하는 개인주의자라 비난하였다 한다. 또한 당대의 거부인 민영휘를 가짜 권총으로 위협,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일화도 전한다.
3·1운동(1919)이 발발한 직후 이에 각성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반납한 적이 있었다. 또 얼마 뒤 인도에서도 간디의 무저항 투쟁에 자극을 받은 시인 타고르가 영국으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하자 그는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다.’는 의미 있는 비교를 하였다 한다.
온 민족이 모든 역량을 모아 독립투쟁에 전념할 것을 역설했던 그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나라의 장래를 논의하던 중, 그가 장차 독립을 하면 과거 기호사람들이 5백 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그르쳤으며 서북 사람들을 박대한 죄가 크니 이제는 서북사람들이 집권해야 한다고 하자 다시는 도산(안창호)을 만나지도 않았다 한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란 대명제를 앞에 두고 지방간 파벌을 나누고 집권 운운함에 그가 실망하였던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와 뜻을 같이 한 동지들에 대하여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 만주에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총장(總長) 등을 역임하며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순국하자, 그는 자진하여 유해를 인수, 심우장에 모시고 5일장을 치루었다. 영결식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미아리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조그만 화장터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그는 민족이 유사지추(有事之秋 ; 독립을 의미)를 당하여 인물이 사라졌으니 애통하다 하며 대성통곡 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우는 것을 그때 단 한번 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가세가 빈곤하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지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였던 것이다.
1942년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묘비건립계획에 참여, 그가 비문을 짓고 오세창(吳世昌)이 글씨를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비문 작성작업을 중단하고 신백우(申伯雨)·최범술(崔凡述)·박광(朴洸) 등과 함께 단재(신채호)의 유고인『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상고문화사(上古文化史)』의 간행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최범술이 경남 경찰부에 구금되자 그는 꽃다발을 들고 그를 면회하려 하였다. 일경의 거절로 면회가 무산되자 그는 꽃다발을 일경에게 내동댕이치고 돌아왔다. 그는 후일 그 꽃다발이 입감을 축하하는 의미였다고 하였다 하니 격조높은 애국심과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이를 단념한 낭산(郞山) 김준연(金俊淵)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창씨개명(創氏改名)에 격분하여 자결한 국문학자 신명균(申明均)의 소식을 듣고는 충절은 찬양하면서도 자결에는 반대의 입장을 표하였다. 즉 자살은 종교상 죄가 될 뿐만 아니라 비겁·자책·실망의 극치로써 파산한 부모가 자살하면 그 자녀들이 비참해지는 것과 같이 남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끝까지 살아서 온몸을 던져 투쟁·독립을 쟁취하자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변절한 친일인사들에게는 설령 전에 친분이 두터웠거나 함께 독립투쟁을 하였다 하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1운동(1919)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 창씨개명을 하고 심우장을 방문하였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무안해진 최린이 그의 딸 영숙(한영숙)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그는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그길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문틈으로 집어 던지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하루는 어떤 지기가 찾아와 최린·윤치호·이광수 등이 창씨개명한 사실에 격분하여 ‘개자식’이라고 욕하자, 그는 차라리 개는 주인을 알고 충성하는 동물이거늘 주인도 모르고 저버리는 인간들을 개자식이라 하는 것은 도리어 개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그는 양반과 유림들의 고장인 안동(安東) 지방이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있다는『매일신보』보도를 보고 ‘위무불능굴(威武不能屈)’이란『맹자(孟子)』의 구절을 들어 개탄하였다고 한다. 그의 창씨개명에 대한 반대의지는 확고하여 평생 왜놈의 호적에 이름을 등재할 수 없다고 고집, 호적 없는 일생을 보냈고,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라는 시(『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읊기도 하였다.
어느 날 춘원 이광수가 심우장을 방문하였다. 만해(한용운)는 그와 문학을 토론하고 정신적인 교류를 하던 지기였으나, 그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을 알고는 인사도 받기 전에 호통을 쳐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또 하루는 길에서 우연히 육당 최남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육당(최남선)은 변절하여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에 있을 때이므로 만해(한용운)는 외면하고 지나쳐 버렸다. 육당(최남선)이 따라와 반갑게 인사하자 만해(한용운)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며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라 쏘아 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각계 각층의 사회 인사들과 교유했던 만해(한용운)에게는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라는 화가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당대 최대의 요녀(妖女)인 배정자(裵貞子)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그를 찾아갔다. 배정자와 김진우가 반갑게 맞이하고 술상을 내오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술상을 친구에게 던져버리고 그 집을 나와 버렸다고 한다. 이는 진정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의 행동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그는 만해(한용운)의 입적 시 끝까지 호상하며 누구보다도 슬피 울었다고 한다.
청량사(淸涼寺)에서 어떤 지기가 베푼 생일잔치에 초대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 자리에는 각계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이때 중추원 참의 정병조(鄭丙朝)가 일제가 부여(扶餘)에 건설 중인 신궁(神宮)의 낙성식을 화제로 이야기 하던 중 낙성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서민자래(庶民自來)’라 하였다. 이 말은『시경(詩經)』에 나오는 고사로써 어진 임금이 집을 짓는데 많은 백성이 자발적으로 역사(役事)하여 하루 만에 지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제가 계획한 신궁의 건설은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한 간교한 식민지배 계책으로 도저히 적합한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던 만해(한용운)는 격노하여 그의 얼굴에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일침을 가한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전한다.
이처럼 강인한 항일정신을 지닌 만해(한용운)는 일본의 말과 글, 연호(年號) 또한 철저히 금기하였다. 어느 날 그의 딸이 신문에 있는 일본 글자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그것은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가 딸을 식민지 교육제도인 학교에 취학시키지 않고 직접 한문을 가르쳤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술좌석에 동석했던 김적음(金寂音) 스님이 건배를 제의하며 ‘간빠이’란 일본말을 하자 호통을 쳤고, 친구 홍재호(洪在皥)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무심코 일본말을 섞어 말하자 따귀를 때려 쫓아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가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전국으로 공문을 돌리기 위해 인쇄한 봉투를 보다가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로 표기되어 있음을 발견한 그는 즉시 천여 장이나 되는 봉투를 아궁이에 처넣어 태워버리고는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그가 입적하기 전해인 1943년, 일본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4월 29일)을 맞아 신궁(神宮)에 참배하고 일장기를 게양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심우장을 방문한 동 서기를 호통쳐 보냈던 적도 있다.
이러한 만해(한용운)에게 일제는 끊임없이 회유와 유혹의 마수를 뻗쳤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그가『불교』의 발간에 전념하고 있던 어느 날 식산은행(殖産銀行)에서 그에게 도장을 가지고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가 응하지 않자 식산은행 직원이 직접 서류를 가지고 불교사로 찾아와서 도장만 찍으면 성북동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허락했을 리 만무하다. 또 하루는 어떤 청년이 심우장을 방문, 그에게 돈 보따리를 내밀었다. 워낙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였으나, 돈의 출처가 총독부라는 말을 듣고 돈 보따리로 청년을 후려갈기며 시시한 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질책하였다 한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빈민을 돕는 데는 앞장서서 식민지 경제수탈로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들에게 구제금을 선뜻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해 삼남지방에 큰 수재가 발생하여 학생들이 수재민 돕기 성금모금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들의 방문을 받은 그는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내다가, 성금의 일부가 국방비로 헌납된다는 말을 듣고는 노발대발하여 돈을 도로 빼앗고 내쫓았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에 이르며 일제는 제국주의의 말기적 발악을 하였다. 특히 1937년의 중국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함에 따라 우리는 일제의 파쇼적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전락, 군수물자와 강제징병 및 노동력 동원 등 전면적인 동원체제로 편제되었다.
일제는 패전의 위기를 맞아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대량 동원, 전장에 투입하여 무고한 젊은이들의 희생이 컸다. 그들은 1938년 2월『육군특별지원병령』, 1943년 7월『해군특별지원병령』을 시행하다가 1944년 4월 강제징병제를 실시, 1944∼45년에 걸쳐 육해군 합계 209,279명의 조선청년을 강제로 전선에 내몰았다.
당시 민족지도자 중에는 학생들에게 학병출정을 적극적으로 권유한 친일분자가 있었는가 하면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쓴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던 만해(한용운)에게도 총독부 선전기관지인『매일신보』기자가 찾아와 학병출정을 독려하는 원고를 부탁하였다. 그가 거절하자 기자는 신문사에서 적당히 원고를 쓰겠으니 사인만 해달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에 격노한 만해(한용운)는 카메라를 빼앗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어느 회합장소에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이극로(李克魯)를 만났다. 이극로는 일제의 강권을 못이겨 학도병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을 한 바 있었다. 그는 조선어학회를 살리기 위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이극로에게 “더럽게 되었군.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으오. 그것이 오래 갈 것 같으냐 말이요. 죽으려면 고이 죽어야 되지 않겠소!”라고 힐난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그의 혜안과 끝내 일제에 비타협으로 일관한 고결하고 투철한 민족정신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러나 만해(한용운)는 그토록 간구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9일(음 5. 9.) 심우장에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입적하고 말았다. 어느 날 눈을 쓸다 쓰러져 반신불수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입적하고 만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김동삼을 영결했던 미아리의 조그마한 한국인 경영 화장터에서 불교의 관례에 따라 조촐히 거행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많은 인사들은 아예 참석조차 못하였고, 숨어서 지내는 듯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신은 모두 소골(燒骨)되었으나, 오직 치아만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가에서는 치아의 출현을 매우 귀하게 여긴 터라 참석자들은 그의 심오한 수법공덕(修法功德)에 깊이 감복하는 한편 이를 조국광복의 길조라 생각하고 슬픔 속에서도 부푼 희망을 안고 깊이 합장하였다고 한다. 죽으면서까지 민족에게 조국독립의 희망을 온몸을 불살라 보여준 것이었다.
그의 사후 평소 그와 흉허물없이 고담준론을 나누던 송만공선사(宋滿空禪師)는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고 한 바, 바로 그 하나가 만해(한용운)를 일컫는 것이었다. 또한 홍명희도 그의 입적을 깊이 애도하며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한용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한용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 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편 일본의 거물급 낭인(浪人)인 두산만(頭山滿)도 그의 입적 소식을 듣고는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에게 “조선의 큰 위인이 갔다. 다시는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이고, 지금 우리 일본에도 없다.”고 추모하였다 한다.

제7장 맺음말

만해(한용운) 한용운은 격동과 파란의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고, 주목되어야 할 대상이다.
국가와 민족이 위난에 처했을 때 한 개인은 이를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인물상과,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인물상으로 양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전자의 경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만해(한용운)는 개항 직후 외세가 거세게 밀려오던 1879년 민족이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할 반봉건·반외세란 내외적 과제를 떠안고 출생하였다. 그의 선대와 가문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양반계층으로 무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중인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부와 형이 의병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거나, 만해(한용운)가 동학혁명군에 참여하였다는 견해도 시기적 선후관계·제적등본·상황논리 등을 종합할 때 사실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향리에서 글공부를 하였고 혼인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배운 교시, 국가멸망의 위기의식, 고향에서 전개된 의병전쟁 등에 자극을 받고 18세에 고향을 떠나 상경 길에 올랐다. 도중에 인생에 대해 번민하고,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민중적 기반과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해 있던 불교를 통해 꿈을 실현하고자 백담사를 찾아 불가에 입문하게 되었다.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 득도한 그는 건봉사·유점사 등지에서 불경을 계속 공부하였고, 1909년경부터는 각지를 순회하며 불교의 혁신과 대중화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1910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승려의 취처를 당국에 건의, 불교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불가에 입문한 초기에 그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계속되고 젊은 혈기가 충동하였다. 이때『영환지략』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1905년경 세계여행을 계획하였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루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다시 백담사로 돌아온 그는 양계초의『음빙설문집』을 통해 근대서구의 자유평등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그의 개혁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1908년 4월 새로운 문화가 융흥하던 일본을 돌아보기 위해 도일한 그는 조동종 대표자와 교우하였다. 이러한 그의 일본여행은 비록 그가 조선 불교계 자체에 대한 현실적 진단이 정확하고 개혁의지가 확고하였다 하더라도, 아직 일제의 본질과 민족적 위기를 깊이 간파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최린 등과 교우하게 됨으로써 3·1운동(1919)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해 10월 귀국한 그는 다시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교리를 설법하고 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1911년 가을에는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투사와 동포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의하였으나, 일제의 첩자로 오인, 피격되어 절명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의 불교는 조선 건국 이래 계속된 억불숭유 정책, 특히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과 사원전의 몰수 등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승려의 사회경제적 위치는 천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연속되는 법난과 승려에 대한 신분적 천대, 경제적 수탈 속에서도 불교는 부녀자와 민중들에게 희망의 신앙으로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만해(한용운)는 이러한 불교의 병리적 현상들을 유신하고 대중화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 인식하였다. 1910년에 탈고, 1913년에 발간한『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개혁의지와 방향이 종합된 실천적 지침서이다. 18장으로 된 이 내용은 당시 조선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자유·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혁안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진보적 관점에서 상호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원리, 인간의 자율성, 모험정신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적 경영방식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는 서양의 사상과 철학을 단편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합리적·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우리 근대사상사에서도 크게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인간의 내면적 자유와 평등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사회적 자유와 평등이 간과되고 있고, 총독에게 승려의 취처를 청원하는 등 민족의 본질적 명제를 간파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신분상 관심영역의 한계 등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1910년 10월 이회광 일파가 친일매불음모인 원종운동을 전개하자, 만해(한용운)는 1911년 1월 호남일원에서 이를 반대하는 기치를 세우고 임제종 종지수호운동, 즉 불교자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그의 사상과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불교 등의 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본질을 간파하게 되었고『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때까지 반봉건의식에 가려져 있던 반제의식이 개화되며 민족적 명제를 인식하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고 대중화하기 위하여 불경의 주석과 간행에 힘써『불교교육한문독본』·『불교대전』·『정선강의채근담』·『십현담주해』·『유마힐소설경강의』등을 저술하였고, 1919년에는 최초의 불교수양잡지인『유심』을 발행, 불교의 교리를 소개하고 청년층을 대상으로 사회계몽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1운동(1919)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산맥을 이루는 것이지만, 만해(한용운)의 사상과 활동에 있어서도 일대 전기가 된 획기적 사건이었다. 3·1운동(1919)은 독립투사요 사상가로서의 그를 완성시켰다.
1919년 1월 말경, 만해(한용운)는 3·1운동(1919)의 초기계획단계부터 천도교 측 대표들과 회합하며 계획수립에 동참하였고, 유림과 불교계 측의 포섭을 담당하였다. 또한 불교계의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 하였고, 독립선언서의 불교계 측 배포를 분담하였다.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고 누구보다도 꿋꿋하고 의연한 자세로 옥중, 법정투쟁을 전개하였으며 3·1운동(1919)을 전후한 시기의 논설 중 최고의 백미라 평가 되는『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저술하였다.
이로써 볼 때 3·1운동(1919)에 있어 그의 활동은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활동과 공적에 대해 논란이 되거나 과장, 왜곡된 부분이 있는 듯하다. 예컨대 3·1운동(1919)을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다거나, 육당(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불만에 갖고 일부 문장을 윤문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는 견해 등은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사실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할 때에만 올바른 자리매김이 될 것이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만해(한용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절대 절하될 수 없는 부동의 위치이자 불변의 사실인 것이다.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한 만해(한용운)는 다방면에 걸쳐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대개 불교혁신운동의 계속, 신간회운동·교육진흥운동·여성해방운동·농민운동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만큼 그의 독립사상이 심화되고 반제사상과 투쟁을 반봉건보다 우선의 상위개념으로 인식한 결과라 여겨진다.
만해(한용운)에게 있어서 불교혁신운동은 단순히 불교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민족운동과 합치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곧 이는 그의 지론이자 이상향인 불교 사회주의의 건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청년불교도들의 절대적 신망을 받으며 종정분립·불타정신의 체험·대중불교의 실현·불교의 통일 등을 표방하고 조선불교청년회·조선불교유신회·조선불교총동맹 등을 주도하였고,『불교』의 간행을 통해 이를 민중 속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가 지도한 비밀결사 만당의 강령과 활동은 불교운동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그는 일제에 철저한 비타협주의를 고수한 민족주의자로서 지상과제인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각 이념과 노선의 연합투쟁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1926년의 6·10만세운동과 1927년 조직된 신간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민족·공산진영, 사회인사, 학생들이 연합, 계획한 6·10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임시 검속당한 바 있는 그는 신간회 발기인·중앙집행위원·경성지회장으로서 주도적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광주학생사건을 민중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한 민중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의 참여와 활동을 통하여 교육진흥운동·여성해방운동·농민운동 등 관심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0년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자 그는 이에 적극 반대하였고, 해소된 뒤에도 재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궁극적 목표인 자주독립쟁취를 위해 모든 이념과 주의가 각자의 사상과 노선을 버리고 대동단결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식민지 교육정책인 한일공학제도 등을 거부하고 조선인본위교육을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인을 우민화시켜 일제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자 한 식민지정책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는 일제의 교육정책이 민족말살정책임을 간파하고 민족의 실력양성, 고급인력의 배출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 민립대학기성회의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한글에 깊은 애정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주체적인 민족교육운동을 항일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민족과 국가 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그는 이를 남녀 간에도 적용, 선각적 입장에서 봉건적 유습에 얽매여 있는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는 여러 논설을 통해 여성해방을 강조하던 중 1930년대 중반에는 신문연재소설을 통해 운동이론과 강령을 제시하였는데, 그 대표적 작품이『흑풍』이다. 그는 여기서 극단적인 방법론으로 자칫 오도될 수 있는 여성해방운동을 경계하고 현실적 상황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 중용적이고 구체적인 4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이고 유교적 질서와 가치관을 변형시키는 한편, 서구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자기혁신을 위한 조화의 묘가 돋보인다.
이와 함께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데, 일제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산미증식계획 등 식민지 경제수탈로 말미암아 농촌사회가 파괴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1920년대 후반기에 소작쟁의 등에 대해 그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의 본질적 의미 파악에까지 미치지 못하다가 1930년대 들며 그 실체를 이해하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파멸에 처한 농민들의 고통을 깊이 동정하고 식민지 경제수탈로부터 자위를 위해 농민대중이 각성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근대적 경제 개념에 입각하여 협동조합·소비조합운동을 제시한 것은 그의 탁월한 사회사상의 일면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정치운동과 경제운동을 분리개념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방법론 중 농업이민 등에 대한 견해는 그의 현실인식론에 대한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1926년 발표한『님의 침묵』은 그를 우리나라 문학사에 있어서 최초의 근대시인, 최대의 시민문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는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 독립투쟁 등의 행동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나 독일의 반나치스 문학보다 한 차원 승화된 것이고 타고르 보다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기에 그는 식지 않는 정열로『흑풍』·『후회 』·『철혈미인』·『박명』등의 소설과 논설을 발표, 글속에 숨은 자신의 마음씨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필활동은 단순히 문학적 차원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을 듯하다. 여기에는 그가 처했던 시대상황, 그의 신분과 사상 등이 종합될 때에만 그가 말하고자 한 침묵 속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한용운)의 노년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지조와 절개가 빛나는 ‘풍란화의 매운 향내’ 바로 그것이었다. 시대가 낳은 풍운아 만해(한용운)는 그답게 많은 기담과 일화를 남겼다. 이 또한 그의 조국애·사상·인격·지조·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종교는 석가모니, 사상은 간디, 시는 타고르에 비견되고, 혁명가·선승·시인의 일체화라 평가되는 만해 한용운.
한 인물의 전기적 연구와 서술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특히 만해(한용운)처럼 심오한 사상을 지니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게 활동한 인물의 경우 그 어려움은 더하다. 그러나 필자 나름대로는 가능한 한 모든 사실들을 망라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견식부족으로 본의 아니게 빠뜨리거나 잘못 기술한 부분이 있을까 두렵다. 추후 보완할 것을 기약하며 독자제현의 혜량을 바란다.

연보

1879(1) 8월 29일(고종16년, 음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방씨(溫陽方氏) 사이의 2남으로 출생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卍]海)
1884(6) 향리 사숙에서 한학 수학
1887(9) 『서상기(西廂記)』·『통감(通鑑)』·『서경(書經)』·『기삼백주(朞三百註)』 등을 독파·해득
1892(14) 향리에서 천안전씨(天安全氏, 貞淑)와 혼인
1896(18) 향리에서 숙사(塾師)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침. 일단 출가하여 백담사 등지 전전
1904(26) 년초에 고향에 들렀다가 얼마 후 다시 백담사로 돌아감
12월 21일 아들 보국(保國) 출생(6·25때 행방불명)
1905(27) 1월 26일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로 부터 득도, 전영제사(全泳濟師)로 부터 수계 4월,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로 부터 『기신론(起信論)』·『능엄경(楞嚴經)』·『원각경(圓覺經)』을 수료
1907(29) 4월, 강원도 건봉사에서 최초의 선(禪)수업 성취(首禪安居)
1908(30) 4월,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로부터 『화엄경(華嚴經)』 수학
4월~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대표 등과 교우, 유학중이던 최린 등과 교우
10월, 건봉사에서 이학암사로부터 『화엄경』·『반야경(般若經)』수학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개설, 소장에 취임
1909(31) 7월,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로 취임
1910(32) 3월과 9월에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취처를 건의
9월 20일,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華山講塾) 강사로 취임
백담사에서『조선불교유신론』탈고
1911(33) 1월 15일, 순천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 궐기대회개최, 이회광 일당의 친일매불응모격파
동래 범어사에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3월 15일 서무부장, 3월 16일 관장에 취임
8월,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이시영·윤세복 등과 독립운동방략 논의
1912(34) 불교 대중화를 위한 『불교대전』의 편찬을 계획, 양산 통도사의 대장경 열람
1913(35)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 창설
4월, 불교강구회 총재에 취임
5월 19일, 통도사 불교 강사로 취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조선불교유신론』 발행
1914(36) 4월 30일,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발행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
1915(37) 영·호남지방 사찰 순례 강연, 교리를 설법하고 불교혁신과 대중화 운동 전개
10월, 조선선종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
1917(39) 4월 6일, 동양서원에서 『정선강의채근담』 발행
1918(40) 9월, 계동에서 편집 겸 발행인으로 월간지 『유심』 발행
중앙학림 강사에 취임
1919(41) 1월말 경 , 최린 등 천도교도와 3·1운동(1919) 계획 수립
2월, 유림·불교계 측 인사 포섭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 주도 후 피체
7월 1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작성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유죄 판결 받음
1921(43) 12월 22일,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
1922(44) 3월 24일, 대장경 국역간행을 위해 법보회 조직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 참여
1923(45) 2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원
3월 31일,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에 피선되었고 4월 2일 상무위원에 피선, 4월 18일 동회 제1회 선전강연회에서 강연(연제 : 자조)
1924(46)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
1925(47) 8월 29일,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 탈고
1926(48) 5월 20일, 안동서관에서 『님의 침묵』 발간
6월 7일, 6·10만세사건에 앞서 임시 검속됨
1927(49)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시 중앙집행위원에 피선
6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장에 피선
1929(51) 12월, 허헌·조병옥 등과 광주학생사건을 민중적으로 증폭하기 위해 민중대회 계획
1930(52) 5월경, 김법린·최범술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됨
1931(53) 6월,『불교』지 인수, 사장으로 취임하고 속간
9월 24일, 윤치호·신홍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 조직, 여수·부산·대구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
1932(54) 12월, 전년 7월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었던 한글경판 원판을 발견, 조사하여 보각 인출
1933(55) 유숙원과 재혼, 성북동에 심우장 지음
1934(56) 9월 1일, 딸 영숙 출생
1936(58) 단재 신채호의 묘비 건립에 참여
7월 16일, 정인보·안재홍 등과 경성부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 서세백년기념회 개최
1937(59) 3월 1일, 재정난으로 휴간된 『불교』 속간하여 신제1집 발행
3월 3일,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인수, 심우장으로 모시고 5일장을 지냄
1938(60) 년말, 비밀결사 만당이 발각, 당원이 일경에 피검되자 일경의 감시가 더욱 심해짐
1939(61) 음 7월 12일,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 등이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마련. 사흘 뒤 다솔사에서 후학들이 마련한 회갑연에 참석, 기념식수
1940(62) 창씨개명 반대운동 전개
1942(64) 신백우·박광·최범술 등과 단재 신채호 유고집 간행 추진
1943(65)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전개
1944(66) 6월 29일(음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
미아리 화장터에서 불교 관례에 따라 화장,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8 5월, 박광·박영희·박근섭·김법린·김적음·허영호·장도환·김관호·박윤진·김용담·최범술 등 만해한용운전집간행추진회 조직, 자료 수집
1950 6·25 동란으로 전집 간행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속개
1962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1967 10월, 용운당만해대선사비건립추진위원회가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대선사비 건립
1971 만해한용운전집 간행을 위해 신구문화사가 전집간행위원회에서 수집·보관 중인 원고와 자료를 인수하고, 최범술·조명기·서경보·백철·홍이섭·정병욱·천관우·신동문·김영호 등으로 편집위원회 구성
1973 7월 5일, 『한용운전집』 전6권 신구문화사에서 발행
1979 9월 10일, 『한용운전집』 증보 초판 발행
1980 10월 25일, 『한용운전집』 증보 재판 발행

만해 저작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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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佛敎敎育漢文讀本
女子斷髮論(現 不傳)
原僧侶之團體
朝鮮佛敎維新論
佛敎大典
古書畫의 三日
精選講義菜根譚
悟道頌
처음에 씀

朝鮮靑年과 修養
苦痛과 快樂
前路를 擇하여 進하라
學生의 衛生的 夏期自修法
苦學生
生의現實
修養叢話
一莖草의 生命
魔는 自造物이다
(卷頭)
自我를 解脫하라
毁譽
前家의 梧桐
無用의 勞心
朝鮮獨立에 對한 感想
無窮花 심으과저
現制度를 打破하라
朝鮮及朝鮮人의 煩悶
내가 믿는 佛敎
죽음(遺稿)
混沌한 思想界의 善後策
社會運動과 民族運動
十玄談註解
님의 沈黙
가갸날에 대하여
女性의 自覺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가장 痛快하였던 일
質素·簡潔
成佛과 往生
天道敎에 대한 感想과 囑望
나의 追憶
天下名妓 黃眞伊
朝鮮靑年에게
人格을 尊重하라
작은일부터
專門知識을 갖추자
聞砧聲外 8首
明沙十里行
農民運動에 對한 新年所感
新幹會 解消運動
農民大衆에 대한 期待와 希望
나는 왜 중이 되었나
沈着性과 持久性있는 靑年을
萬有가 佛性으로 돌아간다
남모르는 나의 아들
滿10週年 紀念祝辭
農民의 苦痛
儒林界에 對한 希望
民衆佛敎建設은 布敎法에 있다.
大協同機關組織의 必要와 可能如何
(卷頭)
(卷頭)
비바람
漫話
佛敎靑年總同盟에 대하여
在滿·在日同胞의 結婚問題
政·敎를 分立하라
印度 佛敎運動의 片信
國寶的 한글 經板의 發見 經路
漫話
(卷頭)
(卷頭)
朝鮮佛敎의 改革案
中國佛敎의 現象
閒葛藤
閒葛藤
(卷頭)
타이(暹羅)의 佛敎
(卷頭)
歸鄕小曲
宇宙의 因果論
中國革命과 宗敎의 受難
겨울밤 나의 생활
二大問題
(卷頭)
寺法改定에 대하여
원숭이와 佛敎
表現團體 건설여부
平生 못잊을 傷處
(卷頭)
禪과 人生
軍縮會議에 대하여
(卷頭)
世界宗敎界의 回顧
出發點
(卷頭)
新年度의 佛敎事業은 어떠할까?
滿洲事變과 日中 佛敎徒의 對幟
閒葛藤
派爭으로 再分裂한 天道敎
銅像
祝辭
閒葛藤
佛敎新任 中央幹部에게
孫文은 어떤 사람인가?
유태민족의 건국운동
(卷頭)
信仰에 대하여
(卷頭)
閒葛藤
(卷頭)
閒葛藤
朝鮮佛敎의 海外發展을 要望함
(卷頭)
閒葛藤
敎團의 권위를 확립하고
(卷頭)
海印寺 巡禮記
佛敎靑年運動에 대하여
西伯利亞에 移農
明月夜에 一首詩
(卷頭)

고난의 칼날에 서라
釋迦의 精神
(卷頭)
한글經 印出을 마치고
佛敎事業의 旣定方針을 實行하라
새해의 맹세
나의 처세훈
(卷頭)
宗憲發布紀念式을 보고
(卷頭)
現代 아메리카의 宗敎
달님, 산너머 언니, 籠의 小鳥
(卷頭)
佛敎硏究會 創立에 대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보급 방법
(卷頭)
(卷頭)
新러시아의 宗敎運動
禪과 自我
西伯利亞를 거쳐 서울로
自立力行의 精神을 普及시켜라
구차한 사랑은 不幸을 가져온다
精神的 動搖가 없도록
北大陸의 하룻밤
꿈과 근심
黑風
韓·日 共學制度
文學非文學
最後의 五分間



星漢

就職
人造人
山居, 산골물, 矛盾
淺日

日出, 海村의 夕陽
江배, 落花, 一莖草
파리, 모기
失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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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9. 1
1933. 10. 1
1934. 2
1934. 2
1935. 3. 8~13
1935. 4
1935. 4. 9~1936. 2. 4
1935. 10. 8
1935. 10. 15
1935. 11. 11
1936. 3. 6~7
1936. 3. 8~9
1936. 3.10~12
1935. 3. 12
1936. 3.17~18
1936. 3.19~20
1936. 3.21~26
1936. 3. 27
1936. 3. 28
1936. 3. 31
1936. 4. 2
1936. 4. 3
1936. 4. 5
1936. 6. 1
1936. 10
1936. 11. 1
1936. 50回 未完
1937. 3. 1
1937. 3~4
1937. 4. 1
1937. 4. 1
1937. 5. 1
1937. 6. 1
1937. 6. 1
1937. 7. 1
1937. 7. 20
1937. 8. 1
1937. 10. 1
1937. 11. 1
1937. 10~12
1937. 12. 1

1938. 2. 1
1938. 3. 1
1938. 5. 1
1938. 5. 1
1938. 5. 1
1938. 5.18~1939. 3. 12
1938. 7. 1
1938. 9. 1
1938. 11. 1
1939.11. 1~1940.8.11(未完)
1940.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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