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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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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이민족 식민지가 되어 갖은 수모와 억압, 착취를 당해야 했던 굴욕과 고난의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굴욕과 고난의 민족 수난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계셨습니다. 그 분들은 조국과 겨레를 향한 숭고한 사랑, 불타는 정열, 강철 같은 의지로 국권을 회복하고 고난받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구원의 일대 드라마가 펼쳐졌고, 민족정신이 크게 앙양되었습니다.
그 동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애국 선열들의 생애를『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냈습니다. 1992년 제1차로 류인석·김규식·김구·홍범도(1)·신규식·한용운·안중근 등 일곱 분의 열전을 내어 놓은 데 이어, 이번에 제2차로 이강년·서재필·홍범도(2)·이종일·차리석 등 다섯 분의 열전을 새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열전은 연구소가 지난 10년간『독립운동사 자료총서』와『한국독립운동사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애국지사들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내고 연구해 온 데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안정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바탕에는 조국을 찾기 위해 쏟은 애국지사들의 피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열전 발간 사업은 바로 이 분들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배금주의, 무분별한 소비문화와 외래 풍조에 휩쓸려 범죄와 부조리, 이기주의가 증대해 가며, 도덕성은 날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성취하고 나아가 세계 일류 국가에 진입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민족의 대업에 헌신하는 새로운 국민적 기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재충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끝으로 집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연구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7년 3월 1일
독립기념관 관장 박유철

머리말


홍범도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사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서 일반 대중에게도 전설적 일화와 함께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 분석·연구 등은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요즈음 발간되는 독립운동 관계의 각종 서적이나 자료집·연구 논문 등에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국 연변과 구소련(러시아) 등지의 학자들과 교류가 가능하고 그곳의 연구성과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홍범도에 대한 연구는 종전보다 훨씬 좋은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홍범도와 그가 이끌었던 무장 세력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남한과 북한, 중국 연변, 구소련(러시아)과 일본 등지에서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남한에서의 연구가 약간 많은 편이다. 그런데 연변에서는 1991년 여름에『홍범도장군』이라는 전기물을 국내외 통틀어 처음으로 출판하여 그에 대한 연구에서 신기원을 이룩하였다.『홍범도장군』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출판된 만큼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많이 제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고,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내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홍범도 전기의 출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은이는 홍범도에 대한 간단한 소책자를 저술하여 국내의 일반인들에게 홍범도의 비범한 일생을 알릴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홍범도는 함경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과 중국의 만주지방을 왕래하며 일제 및 반민족·매판봉건세력과 싸웠다. 또한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지원하는 적군(赤軍)과 함께 제정 러시아를 지원하는 백위파(白衛派)를 상대로 투쟁하기도 하였고 노년에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임종하였다. 이 같은 그의 다양한 편력과 넓은 범위에 걸친 행동반경, 수십 년을 헤아리는 장기간의 투쟁경력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다양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근래의 국내외 학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을 놓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남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홍범도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한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로 간주한다. 반면에 북한과 연변, 러시아의 학계에서는 그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서 거병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중에 사회주의자로 전향·발전한 영웅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생기게 된 요인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학자들이 서로 고립 분산적으로 연구하면서 자료의 부족이나 사상적 제약과 같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또 나름대로 시각의 차이 등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이와 같은 제한적 요소를 물리치기 위해 가능하다면 많은 국내외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또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집약하여 홍범도의 일생을 여러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이념이나 사상적 편력을 흑백논리로 재단하기보다 그가 당시에 어떤 상황과 입장에 처해 있었던가, 또 결국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즉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의 삶을 얼마나 진솔하게 이해하고 또 그의 투철한 생애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조명·평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홍범도는 그와 싸웠던 일본군 스스로가 “날으는 장군(飛將軍)”으로 부를 정도로 기민한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일본군을 연파, 명성을 떨쳤다. 당시 함경도 지방의 민중 사이에서 홍범도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의 명장” 등으로 까지 과장되게 알려져 있었다. 이는 그만큼 그의 활동이 비범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성원과 기대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홍범도는 정규군을 지휘·통솔하는 장군의 자리에 임명되거나 취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 그는 체계적으로 잘 정비되고 짜여져 있는 정식 교육기관에서 한 번도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 불리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가 존경받을 만한 인품을 지닌 훌륭한 무인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홍범도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구소련(러시아) 지역에서 또한 ‘혁명가’, ‘소비에트 주권을 위하여 투쟁한 국제주의자 빨치산’ 등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연변에서도 뜨거운 민족애를 품은 사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홍범도의 폭넓은 생애를 단적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홍범도의 일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과 좌절, 동시에 오욕을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을 볼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의 생애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물론, 만주와 연해주·일본 등지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연관시킨 거시적 시야에서의 고찰이 요구된다.
지은이는 홍범도의 일생을 그려가면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미화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뛰어넘는 특출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한 개인의 역할을 지나치게 크게 보는 영웅주의 사관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역사의 발전은 몇몇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나 민족, 혹은 제도나 기구, 또 특출한 개인으로 하여금 그의 역할을 가능케 하는 시대적 상황 등에 크게 영향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지은이는 최근 러시아에서 국내에 소개된 홍범도의 이력서와 일지 등 새로운 자료와 참고문헌, 그리고 기존의 국내외 여러 자료 및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개설적으로 그의 비범한 일생을 서술코자 한다.
홍범도의 생애는 크게 보아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지은이는 대략 아래와 같은 시기구분에 따라 그의 일생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제1기 - 어린 시절 및 청·장년기(?): 출생부터 1907년 11월 본격적 의병활동의 개시 직전까지 시기
제2기 - 국내에서의 의병부대 조직과 항일무장투쟁시기: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 초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까지의 시기
제3기 - 만주·연해주 지방에서의 재기도모 시기: 1908년 11월 초부터 1919년 8월 간도로 진입하기까지의 재기 준비시기
제4기 - 간도 지방에서의 국내 진입작전 및 독립전쟁 전개시기: 1919년 8월부터 1921년 1월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기 직전까지 시기
제5기 - 연해주·중앙아시아에서의 만년: 1921년 1월부터 1943년 10월 임종하기까지 연해주·중앙아시아 지방에서의 노년기

이러한 시기구분이 엄격하게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홍범도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에 약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시기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물론 국내에서의 의병부대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시기, 그리고 1920년대 초 국내 진입작전과 간도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부족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집필과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조동걸·신용하·성대경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은 1992년 발간되었던『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을 일부 보완하고 미처 언급하지 못한 1920년대 이후의 독립전쟁 사실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최근 국내외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고 연구업적이 증가함에 따라 독립운동사 연구도 새로운 방법론과 접근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책이 과연 그러한 요구에 얼마나 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지만, 뒷날의 수정·보완을 기약하고자 한다.

1997년 3월 1일
혹성산 기슭에서
지은이 삼가 씀

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1. 어린 시절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안도 평양의 외성(外城) 서문(보통문을 흔히 이렇게 불렀음) 안에 있는 문열사 앞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부친의 성함은 홍윤식(洪允植)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 그의 모친에 관해서도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홍범도의 일지를 통하여 그의 어머니가 해산 후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홍범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고 한다.
그의 출생연도에 대하여는 1869년설이 있으나, 지은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68년 출생한 것이 확실하다. 또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평안북도 자성, 평안남도 양덕이라고 하는 등의 이설이 있었지만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홍범도의 가계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평안도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가 홍경래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으로서 원래 평안도 용강군의 화장골에서 홍경래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경래가 1811년 12월 농민봉기를 일으켜 5개월간 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홍경래 가문은 이에 연루되어 전부 화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고조부는 약간의 재산을 갖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홍범도의 증조부 대에 와서는 더욱 몰락하여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홍범도의 부친은 결국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확실한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료로서 뒷받침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 어떤 기록으로써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각지의 동족부락을 조사한 기록이 있는데, 이 조사에서 평남 용강군 금곡면 화도리에 상당한 규모의 남양 홍씨 동족부락이 있다고 밝혀진 사실은 있다. 홍경래가 용강 출신이기 때문에 위의 전설이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홍범도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북지방의 풍운아 홍경래를 의도적으로 끌어 들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 점은 홍범도 고조부와 홍경래의 생존연대를 유추해 보면 비슷한 시기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홍범도와 홍경래 사이의 혈연적 연계가능성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현재 홍범도의 가문내력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는 없으나 홍범도의 본관이 남양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알려져 있다. 홍씨는 조선시대에 10대 벌열(閥閱)의 하나인 명문 씨족으로 유명한데, 특히 남양 홍씨는 홍씨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남양은 현 경기도 수원과 화성 일대의 옛 지명으로 과거에는 당성(唐城)·당은(唐恩)으로 불리우기도 했고 고려시대에는 남양부, 조선시대에는 남양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기도 했다.
홍범도가 태어난 평양은 어떤 곳인가?『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했다고 하는데, 아사달이 바로 평양이었다고 한다. 평양은 낙랑, 고구려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 전시대를 거쳐 서경(西京) 혹은 서북지방의 웅도로써 매우 중시되었고 경기 이북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회지이기도 하였다. 평양은 거의 2천년 이상을 북한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산업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로 역할 하였던 곳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때도 평양성 내에는 기자릉(箕子陵)과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평양에 살고 있던 시민들은 이 도시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평양은 또한 매우 아름다운 풍류의 고도로서 수많은 시인 묵객과 재사들이 수려한 평양의 풍광을 읊으며 찬탄을 보내기도 했던 명승지였다. 맑고 정겨운 대동강이 평양성을 끼고 도는 가운데로 대동강의 푸른 물줄기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연광정과 부벽루·을밀대 등은 대표적인 명소들이다. 고려 때 김황원(金黃元)이 부벽루에 올라 자신이 회심의 명작시를 남기겠다고 시를 짓다가 ‘긴 성 한면은 도도히 넘쳐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머리는 점점이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하는 시구는 지었으나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하루 종일 애쓰다가 울며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주위의 경승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 평양 출신의 뛰어난 문사 정지상(鄭知常)이 벗을 보내며 읊은 저명한 시 ‘송우인(送友人)’의 배경이 된 곳도 바로 대동강변이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한결 더한데
그대를 남포에 보내노니 슬픈 노래가 동하도다.
대동강물은 언제 다하려는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강물을 보태노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漏年年添錄波

이 시의 작자 정지상은 고려 인종 때인 1135년 당시 서경으로 불리우던 평양에서 일어난 묘청(妙淸)의 난에 연루되어 사대주의자 김부식 일파에게 피살되고 말았으니 위의 시와 같이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고 하겠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은 1811년 말에서 1812년 4월까지 청천강 유역에서 전개된 홍경래의 난 때문에 세도정치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반역의 고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누명이 씌워져 있었다. 이처럼 고려·조선 양 시대에 서북인들은 지배층에 영합하기보다는 그들에 저항하다가 필경은 실패하고 더 큰 불이익을 받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지닌 지역이었다.
19세기 후반 무렵의 평양은 평안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평안도 관찰사가 평양 부윤을 겸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평양부 관하의 인구는 약 2만 2천명이었는데, 이는 수도 서울인 한성과 개성에 뒤이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조선왕조 후기에 와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며 수공업 및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평양이 서북지방의 상공업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무렵의 나라 안팎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은 60여 년간에 걸친 세도정치로 정치체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열강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다투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침입해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홍콩(香港)을 할양받았으며 광동(廣東) 등을 개항시켰다. 한편 미국도 일본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1854년 통상조약(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는 늦었으나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 선박은 이미 18세기부터 조선 연해에 나타났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배를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초기에는 측량과 탐사를 목적으로 조선 연안에 접근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는 직접 통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해안지방에 불법으로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에 대한 공포와 의구심이 깊어졌고 안으로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와 같이 서양세력의 침투와 내정의 문란이라는 내우외환으로 조선사회가 큰 시련에 직면하였을 무렵인 1863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고종(高宗)이 즉위하면서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쇄국정책을 취하여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외국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서양물품의 교역을 엄금하며, 외세를 안으로부터 맞아들이는 세력이라고 생각되는 천주교에 대하여 일대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1866년 9월 로즈(P. G. 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케 하고 일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케 하는 침략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침입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 정권의 굳은 항전 의지와 유학자들의 적극적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뒷받침된 국민여론, 그리고 한성근(韓聖根)·양헌수(梁憲洙) 부대의 분전으로 격퇴되었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1866)라 한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 때 서북지방의 포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외세의 침략을 격퇴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같은 해 7월(음력)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e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격분한 평양의 군민과 충돌하여 소각·침몰되는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註1)이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홍범도의 할아버지가 이때 제너럴셔먼호를 용맹하게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때 평양 사람들은 용감히 싸웠다. 평양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홍범도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홍범도가 태어나던 해인 1868년 미국군함 쉐난도(Shenandoah)호가 셔먼호의 생존자 수색 차 대동강 하류유역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여 주민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또 1868년 4월에 독일 상인 옵페르트(Ernst Oppert)는 조선에 불법 침입하여 천주교도의 안내로 충청도 덕산군에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는 야만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만행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집권층의 쇄국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고 일반 국민들에게 서양인은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확실케 하여 배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1592) 이후 조선과 교린관계를 유지해 오던 이웃 일본은 1854년 개항된 직후에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범했으나 미국 이외의 유럽 여러 나라와도 통상조약을 맺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서서히 근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1868년에 덕천막부(德川幕府)가 타도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정부가 성립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되어 봉건적 신분제가 폐지되는 등 일대 혁신이 단행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으나, 부국강병 정책을 실현한 뒤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조선을 정복하자는 의견으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침략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나라가 처한 내외상황은 그 나라에 사는 국민 개개인에게는 절대적인 관련을 갖고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홍범도가 나서 자라고 성인으로서 활동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의 한국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범도는 자기 자신의 한 개인적 삶을 뛰어 넘어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한 일본의 침략세력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자신의 생애를 민족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는 출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된 아버지의 품에서 이웃 동네 여인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지주의 집에서 머슴을 하고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아서 동냥젖일망정 넉넉하게 얻어 먹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정성스런 양육과 이웃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홍범도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무 탈이 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사내답게 생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름을 ‘범도(홍범도)’라고 지었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모범 범(範)’자에 ‘그림 도’ 또는 ‘꾀할 도(圖)’자였다. 호랑이 같은 아이 또는 장수답게 생긴 애라는 뜻이 담겨 있었고 훌륭하게 자라서 타인의 모범이 되라는 간절한 소망도 들어 있었다. 이 이름은 물론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지은 것이었으나 그는 무식했기 때문에 혼자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제일 유식하다는 훈장 어른을 찾아뵙고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귀한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어머니를 일찍 잃어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를 끔찍히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행복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바로 집 앞에 있는 보통문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같은 동네의 어린 친구들과 같이 성 밖에 나가 푸른 대동강물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운 한때를 갖기도 했다.
홍범도가 만 세 살 때인 1871년에는 5년 전에 평양에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조선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개국시키고자 미국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미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이때 범도(홍범도)가 사는 평양에도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지시로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서 온 평양사람들이 서양오랑캐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범도(홍범도)의 아버지는 사건의 내용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장과 같이 서양오랑캐들의 야만적 침략에는 오직 힘닿는 대로 싸워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는 낮에는 집에서 혼자 놀기도 하고 주위의 동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성 밖의 넓은 들판을 쏘다니며 뛰어 놀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고된 일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일하며 엄마도 없이 자라는 불쌍한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한지 범도(홍범도)가 만 아홉 살 때인 1877년 홍윤식은 고역에 지친 나머지 병에 걸려 여러 달을 누워서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린 범도(홍범도)의 정성스런 간호도 보람 없이 결국은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도(홍범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머니도 없이 자란 그가 이제 아버지마저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아직 철모르는 어린이였지만 자신이 이제 홀로 되었으며, 양친도 없이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뼈저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험난한 앞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고아일망정 꿋꿋하게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어렸을 때에 가끔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며 자신을 몹시 귀여워 해주던 작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숙부는 아버지마저 여읜 범도(홍범도)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홍범도는 평양 근처의 숙부댁에서 자라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1877년은 쇄국정책으로 굳게 문을 닫았던 조선이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으로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지 일 년 뒤였다.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일본은 그 틈을 이용하여 그들이 미국에서 당한 전례를 모방한 운양호(雲揚號)사건(운요호 사건, 1875)을 일으키고, 이어서 강화도에 군함과 군인을 파견하여 위협적으로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때 조선에서는 개항반대론이 거세었으나 개항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이 있어서 조선은 마침내 크게 불평등한 내용의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으로 정치·군사·경제적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조선 침투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구미 열강과도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열강의 침투가 심화됨에 따라 조선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시련을 겪게 되었다.

2. 평양 친군서영의 병사생활


홍범도는 숙부댁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살림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작은 아버지도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농부인 숙부를 도와서 농사일을 같이 하였고 틈나는 대로 작은 집 일을 도와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어린 범도(홍범도)는 힘에 부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고 성심성의껏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도와 드렸던 것이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잔일을 하며 몇 년을 보낸 범도(홍범도)는 체격도 제법 커지고 일도 꽤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란 범도(홍범도)는 가난한 숙부댁에서 지내며 신세를 지기보다는 약간 힘들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일해 주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숙부댁에서 멀지않은 부자집의 꼴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에게 머슴살이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남의 집에서 머슴으로 생활해야 했던 홍범도는 동년배의 소년들 보다 훨씬 일찍부터 온갖 차별과 냉대를 경험했고 또 같은 마을의 다른 일꾼이나 머슴들과도 어울리며 지냈으므로 자기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이에 비해서 매우 조숙한 소년이 되었다. 이제 범도(홍범도)는 자기 부모님들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고역을 자신이 몸소 체험하면서 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 했으며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데도 집은 그렇게 가난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당시 조선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지주·소작관계의 모순과 양반 관료사회의 부패 및 신분제의 한계가 갖는 의미는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는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항상 가난하고 주인네는 논밭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잘 사는 것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범도(홍범도)는 그러면서도 자기가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으며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막일을 하며 머슴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인집에 충실히 대했으며 맡은 일은 열심히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꼴머슴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되었고 점차 사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일하는 가운데 틈틈이 평양성 내외를 오가며 같은 연배의 상놈친구들과 어울렸고 유명한 평양 박치기·돌팔매질·씨름하는 법 등을 배워 꽤 할 줄 알게 되었다.
홍범도가 열네 살 때인 1882년 서울에서는 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임오군란(1882)은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우대하고 구식군대는 차별한 데 대한 반발로 구식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 별기군은 조선정부에서 추진하던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1881년 설치한 신식군대였는데,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임오군란(1882)에는 개항 이후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쌀값이 폭등하는 등의 이유로 직접 피해를 입고 있던 서울의 일부 시민들도 가세하였다. 군인들은 군기고(무기고)와 포도청을 습격하고 고관들을 살상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또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고 있던 상당수 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궁궐에도 침입하여 민비(閔妃; 뒤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민비(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하여 실패하였다. 임오군란(1882)의 결과 한때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청군(淸軍)이 출동해서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청으로 압송해 갔기 때문에 다시 민씨(명성황후) 일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민씨(명성황후) 척족들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은 이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임오군란(1882) 후 청의 원세개(袁世凱)는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에 주둔하였는데, 조선군대를 청나라 식으로 훈련시키게 하였고 군제도 청의 군제 대로 개편케 하였다. 임오군란(1882) 직전인 1881년 말까지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5군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5군영이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에 성립한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수어청(守禦廳) 등 서울 중심의 다섯 군영을 말한다. 그러나 수 백년간 지속되었던 5군영체제는 1881년 4월에 별기군이 창설된 뒤 같은 해 12월 말경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이라는 양 군영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같은 양 군영체제는 임오군란(1882) 직후 잠시 5군영제로 환원되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청군이 조선에 출동하여 주둔하면서 신건친군(新建親軍)이라는 새로운 청식 군제로 바뀌게 된다. 즉 1883년부터 1884년 11월 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종래의 5군영은 신건친군 전·후·좌·우영과 친군 별영(別營)이라는 친군영제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때 성립한 친군 각 영은 병력 수나 소속군의 내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조직은 대체로 비슷했다.
또 각 군영은 청을 통해 수입한 영국제 소총과 청의 천진(天津) 기기국에서 만든 대포 등으로 무장하였다. 그런데 임오군란(1882) 직후에 이처럼 서울의 군대가 청군의 지도를 받아 신식으로 개편되고 있을 때 지방의 각 군영도 청의 영향력 하에서 새롭게 편제되고 있었다. 특히 평안감영군은 청군이 중국을 왕래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다른 감영보다 더 빨랐고 북방의 방위와 관련하여 중앙정부의 관심도 컸다. 이리하여 평안감영에서는 1883년부터 감영군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친군후영 감독(후에 營使로 개칭됨)과 좌영의 영사(營使)를 역임하였던 민응식(閔應植)이 188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안감영의 군병은 서울의 친군영에 따라 전면적으로 개편되었고 청식으로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의 평안감영은 1885년 친군서영(親軍西營)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평안감사가 서영사(西營使)를 겸하였다. 민응식은 당시 민씨(명성황후) 척족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민비(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으로 피난하였을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크게 혜택을 받고 있던 보수적 인물이었다.
이 무렵 각 지방의 병영은 새로 군병을 모집하여 경군(京軍)의 예에 따라서 훈련하며 가끔 상경하여 서울의 각 영군과 어울려 조련하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이러한 친군영 군제는 1888년까지 유지되었다. 친군서영은 1895년 군제개편으로 다시 진위대(鎭衛隊)로 개편되어 비로소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 관헌 측 자료나 국내 대부분의 서적에 홍범도가 평양의 진위대에서 병사로 복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언급이다. 그는 친군서영에서 근무하였던 것이다.
홍범도가 만 15세가 되던 1883년 위와 같은 사정에 따라 평양의 감영에서는 병정을 모집하여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비록 나이 어리고 무식하지만 군대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되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잔일을 하는 머슴보다는 군인이 되어 스스로의 앞길을 열어 나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 뽑는 병정은 의무병이 아니고 지원병이므로 자기 같이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군인이 되면 아주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범도(홍범도)는 비록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된 일을 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녔기 때문에 몸이 아주 튼튼했으며 체구가 나이에 비해서 좀 컸다. 그래서 그는 병영에 가서 입대할 수 있는 장정의 자격과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 참으로 아쉬운 점은 군인이 되려면 최소한 만 17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다. 그는 그러한 제한조건을 알고 무척이나 실망하였다. 더욱이 또 그를 어렵게 한 점은 병사로 입대하려는 어중이떠중이 청년들이 너무 많았고 당시 유행하던 매관매직의 풍조로 뇌물을 바치고 군인이 되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홍범도 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서민들이 돈을 받고 복무하는 고용병이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범도(홍범도)는 군인이 되기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는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마침 평안감영에서는 신호병의 직책인 나팔수를 몇 명 뽑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팔수 지원자들은 얼마 안 되어서 범도(홍범도)는 자신의 나이를 17세라고 두 살 올려서 지원한 결과 가까스로 입대할 수 있었다. 결국 홍범도는 부모님을 다 여읜 뒤에 열다섯 살까지 숙부댁에서 지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슴일도 하며 어린 시절을 매우 고생하며 보냈으나 이제 겨우 군인이 됨으로써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홍범도는 당시 기영(箕營)으로 불리우기도 하던 평안감영의 우영 제1대에서 나팔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임오군란(1882) 이듬해인 1883년 즉 계미(癸未)년이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사격술을 배웠다. 그는 총을 쏘는 훈련에 열성적으로 임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사격에 꽤 익숙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가 입대한 뒤에 평안감영은 친군서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던 친군서영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임오군란(1882) 직후에 어수선하던 서울의 치안과 관청의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고, 또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무위영과 장어영 소속의 각 병영과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병력의 일부가 선발되어 교대로 서울에 와서 몇 달씩 근무하였는데, 범도(홍범도)도 이때 인물과 체격이 좋고 훈련을 잘 받는다고 하여 뽑혀서 서울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서울은 평양보다 훨씬 컸으며 상당히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이나 장비가 많이 눈에 띄어 범도(홍범도)를 놀라게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평양의 친군서영에서 병졸로 약 4년간 복무하여 처음 입대할 당시보다 몇 계급 진급도 하여 직위가 높아졌고 또 병영생활에 차츰 익숙해졌다. 이제 그는 군대생활에 제법 흥취를 갖게 되었고 갈 곳 없는 그가 살아가기에는 군인노릇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수는 넉넉지 않지만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병사생활을 통하여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가 친군서영에 있던 시절은 한창 성장하는 시기였으므로 몸과 마음 모두 많이 자라고 성숙하였으며 이제 거의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의 졸병생활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의 군대는 규율이 없고 부패하여 양반 출신인 군교(장교: 초관이나 별군관, 초장 등)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고 병사들에 대한 급양이 형편없었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병정들을 학대하고 차별하기까지 했다. 1860년대 이후에는 거의 매년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러한 농민봉기는 조선왕조 말기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범도(홍범도)가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던 1883∼7년 사이에도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1884년 12월에 함경도 안변·덕원 등지에서 농민들이 수세(收稅)문제로 일으킨 소요사건은 이북지방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군인들은 이러한 민란의 진압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의 세금을 징수하여 오는 일에도 동원되었으므로 병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들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군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와 같은 모순된 현실을 목격하고 군대생활에 점차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친군서영은 그전의 평안감영이 개편된 군영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부대의 내용이 크게 혁신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편제와 장비 등은 많이 바뀌었지만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훈련내용도 종전과 비슷했고 군교들의 병정들에 대한 차별과 군내의 부패상도 여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투력의 향상을 달성하기 위한 당초의 개혁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직 어렸던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 박봉이나마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착취와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또 훈련이 가혹하며 사병들에 대한 학대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되자 군대생활에서 어떤 보람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때에 범도(홍범도)는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군교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 사람을 구타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할 수 없었다. 병영에 돌아가면 중형으로 처벌받을 게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4년간에 걸친 군인노릇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갈 곳 없는 그에게는 제법 할 만한 직업이었고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하여 범도(홍범도)는 안정된 직업이자 호구지책이었던 병졸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3. 제지공장의 노동생활


범도(홍범도)는 병영으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행동은 미리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서 단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앞길이 순탄치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평양을 벗어나자 막상 갈 곳이 없었고 당장 먹고 자고할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생활고는 더욱 심각해졌으며 당장의 일거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범도(홍범도)는 평양성을 빠져나왔으나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 무척 막막하였다. 평양에 살고 계시는 작은 아버지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으나 어려운 형편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이제 성인이 다된 그가 몸을 의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얼마 동안을 주저앉아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같은 부대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하던 말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해도 수안군에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製紙所)가 있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마땅하게 의지할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설은 수안까지 가기가 주저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지소의 노동자로 일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수안은 황해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 1,120미터의 언진산이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고 비교적 산이 많은 벽지였다. 하지만 평양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 교통이 편리하였다. 또 이곳에는 금광이 있어 광산노동자들이 많았고 일거리를 얻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1888년경부터 황해도 수안군 천곡의 총령(蔥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로 가서 종이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여기에서의 생활은 거의 머슴살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총령은 수안에서 신계로 가는 요로에 있는 고개였다. 특히 이곳은 그 옆에 흐르고 있는 총령천이 유명하여 종이 산출지로 꽤 알려진 지역이었다. 총령천은 깊이 패어진 바위굴 속에서 흘러 내리는데, 장마나 가뭄에도 수량에 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매일 조수 때를 따라 일정하게 늘었다 줄었다 한다. 바로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 때문에 이 총령천 옆에는 종이 만드는 제지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종이를 만드는 작업에는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지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정부에 공납을 바치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종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주로 서민들이 창문에 바르는 창호지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제지소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소 주인은 19세기 후반에 창도되어 한창 맹렬히 퍼져나가던 동학의 수안군 주요 간부였다.
홍범도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본래 이름을 숨기고 가짜 이름을 쓰며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거의 모든 공정을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극히 수공업적인 것으로서 대체로 다섯 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기술자들을 도와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웃 대오면에서 나는 닥나무를 옮겨오는 일이라든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힘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 즉 닥나무를 잘게 부수는 일이나 재지원료를 물에 씻는 일 등을 주로 하였던 것이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고 잔일이 많은 고된 과정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온갖 잔일로 단련된 범도(홍범도)에게는 참고 견딜만한 것이었으며 나무를 재료로 하여 새하얀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을 하였고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었다. 당시 숙련된 제지기술자는 하루에 약 500장 정도의 분량을 만들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 더 열심히 배우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영세한 수공업체인 이곳 제지소에서 일한 지 약 1년 정도 되었을 때 평소에도 동학에 대하여 늘 말하곤 하던 주인은 범도(홍범도)를 정식으로 불러서 동학을 신봉하고 동학교문에 들라고 권유하였다. 주인은 동학당 지방 간부의 일원으로서 이 지방 사람들에게 동학을 포교하고 보급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공장의 노동자들을 동학에 가입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일꾼들을 동학의 조직에 포섭하여 동학을 믿게 하려는 목적은 동학의 종교적 성격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사상을 순화시킴으로써 그들을 동학군이라는 무장 세력으로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동학은 정부당국으로부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교(邪敎)라고 낙인 찍혀 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당한 뒤 포교와 신봉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국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환영받아서 주로 경상·전라·충청도 등 삼남지방에 집중적으로 전파되었고 경기·강원·황해도 등 중부지방까지 널리 포교되어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동학이라는 종교에 관하여 군대에 있을 때에 들어본 적이 있어서 대강 어떤 종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동학에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받았을 때는 저으기 당황하였다. 그것은 동학의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자기생각으로는 도무지 허황되서 믿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군대에 있을 적에 받은 교육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때 그는 동학은 배척해야 할 이단적 사교라고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 요인은 범도(홍범도)가 어려서부터 거의 혼자서 자기문제를 해결해 왔고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이나 기타 미신 혹은 종교의 힘에 의존하여 해결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종교에 관해서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였으며 또 보이지 않는 신이나 절대자의 권능에 의지한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동학이라는 종교는 미신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였기 때문에 그가 보기에는 도대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범도(홍범도)는 주인에게 동학에 들 수 없고 또 믿을 수도 없다고 확실하게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주인은 여러 번 범도(홍범도)에게 동학을 믿고 그 조직에 참가할 것을 권하였고 점차 강제적으로 명령하다시피 하였다. 그렇지만 범도(홍범도)가 어떤 사람인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겸연쩍어 하며 조심스럽게 거절하였지만 누차 주인의 강요가 계속되자 아무리 강요하더라도 동학을 신봉할 수 없으며 그 관련조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제지소에 들어온 지 약 2년이 넘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동학에 들라고 협박하였으며 그 몇달 후부터는 아예 동학에 들지 않으면 임금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매월 주던 노임마저 주지 않았다. 범도(홍범도)는 화도 나고 기가 막혔지만 이곳마저 벗어나면 갈 곳도 없는 처지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받지 못한 삯이 일곱 달이나 밀리게 되었다. 그동안 범도(홍범도)는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구차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지소 주인은 자신이 범도(홍범도)를 고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위세를 빌어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말했다.

“네 고삯을 찾으려거든 동학에 참여하여라. 그러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소원대로 할 데 있으면 하여 봐라.”

범도(홍범도)가 생각하기에 동학에 끌리는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인의 강압적 태도가 비위에 거슬리고 또 노임도 받지 못한 처지에 자기의 고집이 있는지라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어갈 생각은 없소.”

범도(홍범도)가 수안 총령의 제지공장에 들어와 일한 지 약 3년이 되었을까?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주인에게 밀린 삯을 달라고 여러 번 청하였다. 하지만 주인은 동학을 믿으면 밀린 노임을 모두 주겠다고 하면서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럴 때마다 범도(홍범도)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참았다.
이렇게 주인과 범도(홍범도)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날 주인과 범도(홍범도)는 마침내 동학에 관한 문제로 크게 다투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일곱 달이나 거의 무료나 다름없이 일해주고 있는 범도(홍범도)에게 주인이 또 다시 동학에 들라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난 다음 저녁 무렵에 범도(홍범도)를 불러서 다시 동학에 가입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동안 범도(홍범도)는 머슴이나 다름없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며 참을 만큼 참았는데 주인은 이제 범도(홍범도)한테 동학에 들지 않으려거든 제지공장을 아예 떠나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떠날 결심을 하고 밀린 임금을 달라고 주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파렴치한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들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서 아예 떼먹으려고 하였다. 심지어 주인은 범도(홍범도)를 협박하며 폭력으로 쫓아 내려고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그날 밤 주인과 말다툼 끝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에게 주먹을 휘둘러 거꾸러 뜨리고 말았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삼년 가량이나 꽤 애착을 갖고 열성적으로 종이 뜨는 기술을 배웠지만 주인의 고집에 시달리며 쓰라린 고용노동자 생활을 청산해야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반성해 보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행패가 워낙 심하여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으므로 차라리 그곳을 뛰쳐나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4. 금강산 수도생활


범도(홍범도)는 군대생활과 제지소 고공(雇工: 품팔이) 생활 모두 상급자 및 주인과 싸우고 좋지 않게 결말을 보며 그 생활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이 혹시 비뚤어지거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고 깊이 반성해 보았다. 생각해보면 참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나 더 큰 잘못은 대개 상대방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도 남과 다투고 나면 속으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불공평한 일이나 억울한 사정을 당하면 그러한 사태를 수수방관하지 못하였고 도무지 가만 놓아둘 수 없었다. 이러한 성격은 그가 일면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자라온 성장과정을 눈여겨 살펴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평안도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으며 용감하고 동작이 민첩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평안도인의 기질을 맹호가 산림 가운데서 뛰쳐나오는 것 같다(猛虎出林)고 비유하기도 했던 것이다. 평양 사람들이 싸울 때 곧잘 하는 박치기는 유명했다. 물론 홍범도의 인품이나 성격을 태어난 지방의 특색이나 기질에만 한정하여 논하는 시각은 대단히 지엽적이며 위험한 관점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시적이며 포괄적인 넓은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자세가 요청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홍범도는 유년 시절부터 매우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간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인내심, 그리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적극적 자세가 몸에 배어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이와 같은 시련은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한 강한 반발과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불의와 부정을 미워하며 항상 약자를 돕는 정의감을 드높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홍범도 청년기의 성격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불같이 급한 격정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홍범도가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병영과 제지공장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후일 그의 인생역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대 경험은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한 체험은 노동의 소중함과 어려움, 그리고 가진 자들의 횡포를 직접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제지공장에서 나온 범도(홍범도)는 수안에서 가까운 신계를 거쳐 강원도 북부 지방으로 향하였다. 제지소 주인을 해쳤기 때문에 당분간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는 산골에서 조용히 숨어서 지내고 싶었다. 그는 몇 달에 걸쳐 강원도 북부의 이천·평강·철원·김화·회양 등의 산골을 지나며 지주집에서 품을 팔아 약간의 돈을 벌어 노자를 삼기도 했고 어떤 마을을 지나다가는 웬 떠돌이가 마을에 들어오느냐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곳 마을들은 이천·철원의 일부 지방과 같이 평야지대인 곳을 제외하면 대개 깊은 산골이었으므로 쌀농사 보다는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하고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생활의 서러움을 몸소 겪으며 자신의 신세를 여러 번 한탄하였다. 왜 자기는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여러 곳을 유랑하던 끝에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동해안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태백산맥에 연결되는 고산준령을 뒤로하고 망망한 동해를 앞으로 하여 산과 바다가 있고 또 마을 주위에는 농사짓기에 제법 부족하지 않은 평야도 있었다. 그래서 관동지방의 주민들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가운데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며 때로는 산에서 임업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유명한 금강산을 지나 금강산이 바다에 연한 해금강 방면으로 향하여 회양군의 동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간성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강원도의 최북단인 통천군에 이르게 된다.
범도(홍범도)는 천하제일의 명산 금강산을 지나오면서 생전 처음으로 자기의 조국에는 참으로 수려한 강산이 많으며 자랑할 만한 명산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방랑의 처지를 돌이켜 보고는 우울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정리를 지나 발길을 옮기다가 양진리라는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은 금강산의 한 줄기인 관음봉과 문필봉이 지척이어서 경치가 매우 좋았고 앞에 꽤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서 농사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금강산 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계사(神溪寺 또는 新鷄寺)라는 절이 있어서 가끔씩 찾아오는 절의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얼마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그날그날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결코 안정된 삶을 제공하지 못하였으며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여러 모로 불투명한 하루하루였고 어떤 보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무렵 신계사에는 지담(止潭) 대사라는 고승이 있어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남에게 구차스런 사정을 해가며 품팔이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절의 중이 되어 불공평하고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심신을 수양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되면 먹고 자고 입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자신의 억울한 심정이 해소되며 자제력이 없는 급한 성격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신계사의 지담 대사를 찾아가 저간의 자기사정을 고백하고 절에 머물며 수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를 살펴보고 난 뒤에 우선 절의 잔일을 하며 수도를 하는 상좌(上佐)로서 절에 기숙하며 수도하도록 허락하였다. 상좌승이란 일명 행자(行者)라고도 하는데 절의 온갖 잔심부름이나 궂은 일을 하여야 하는 절의 일꾼이나 다름없는 수도과정의 승려를 말한다. 상좌는 절의 주지나 고승들의 시중에서부터 동네에 나가 시주를 받아오는 일이나 나무해오기·물 기르기·밥하기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하나의 도피처와 마음의 안식처로 절을 택했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0년경부터 그 이듬해까지 약 1년 반 가량 범도(홍범도)는 신계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지담 스님의 상좌노릇을 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에게 그럴 듯한 법명을 지어 주었다. 이제 신계사에서 그는 더 이상 ‘홍범도’가 아니었다. 신계사는 아름다운 외금강의 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신계천이 흐르고 멀리는 짙푸른 동해바다가 아스라히 보이는 명승지에 위치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양하기에는 매우 알맞은 절이었다. 신계사는 불교계의 31본산시대 때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末寺)였다.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519)년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옛부터 이 절의 옆에 있는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이러한 살생으로 성역의 참된 뜻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조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고기를 다른 곳에서 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하천에는 고기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절 이름에 ‘신 신(神)’자를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신계사는 특히 법관 출신의 고승 학눌(學訥: 호 曉峰)이 1925년 입문 수도한 절로서도 유명했는데, 학눌 대사는 1958년에 조계종의 종정(宗正)이 되었고 1962년에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었다.
신계사 승려생활은 범도(홍범도)에게는 아직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별천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며 절의 어려운 수도 생활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절의 상좌노릇을 하면서 바쁜 가운데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지담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절에 들어올 때부터 심오한 불교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또 자신이 불도를 깊이 깨달아 고승이 되겠다는 철저한 각오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수도생활은 투철한 승려로서의 길도 아니었다. 나이 20이 넘어서 뒤늦게 시작한 불교공부가 잘될리도 없었거니와 범도(홍범도) 자신도 불법의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 무렵 한글은 깨우쳐서 약간 알고 있는 그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한문 투성이의 경전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으며 머리가 아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담 스님이나 다른 중들이 하는 설법을 많이 듣다 보니까 대충 불교가 어떤 종교라는 것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에서의 체류기간을 통하여 간단한 한글 문장이나 편지 따위를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종교나 사상·학문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졌다고나 할까?
지담 스님은 원래 수원출신으로 속성은 덕수(德水) 이씨였다. 덕수 이씨는 조선조에서 문무 양 부문에 걸쳐 저 유명한 이율곡(李珥, 율곡 이이)과 이충무공(李舜臣, 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하여 명문 씨족으로 알려진 가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과 백전백승의 뛰어난 전술에 관하여 가끔 이야기 하였으며 비록 산간에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몸을 아끼지 말고 구국항쟁의 대열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하였다. 이러한 지담 스님의 수도승답지 않은 현실적 국가관은 그의 가문전통과도 연계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서산 대사(휴정: 休靜)와 그의 제자들인 사명당(유정: 惟政)·처영(處英) 등의 승군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즉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 대사가 승군을 조직해서 의병을 일으키자 금강산에서 수도하고 있던 사명 대사도 절의 승려들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 그의 스승인 서산 대사의 휘하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금강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점사에는 임진왜란(1592) 때 승군장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명당의 유품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또한 사명당의 스승인 서산 대사의 부도(浮圖)도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점사 이외에도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표훈사·원통사·고승사·신계사 등의 각 절에는 임진왜란(1592) 때의 승군조직에 관련된 이야기나 서산 대사 및 사명당에 관한 무수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러한 애국 전통이 그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승려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이와 같이 신계사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훈도를 받아 점차 정신적으로 성숙하였고 종래의 무계획적이며 방만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참으며 은인자중 할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차츰 성장하였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처해있을 때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많은 가련한 중생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가 아니었던가? 신계사에서 알게 된 김유신이나 이순신·사명당과 같은 그러한 인물들처럼…. 범도(홍범도)에게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혼자만 해탈하겠다고 참선하며 면벽하고 앉아있는 답답한 중들보다는 실제로 도탄에 빠진 중생을 염두에 두고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지담 대사의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가끔 지난날의 행적을 되돌아 보면서 깊이 뉘우쳤다. 과거의 감정에 치우친 과격한 행동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몇 번이었던가 하고….
홍범도의 생애에서 이 무렵은 그의 앞날에 자못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마도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은둔과 수도를 통하여 이순신이나 서산대사·사명당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임진왜란(1592) 당시의 대일항전에 관하여 일상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반일감정이 누적되었고 의병 전통이 우리나라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머리 속 깊이 새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에서의 상좌생활은 고달픈 것이었고 별로 깊이 있는 사상이나 학문에 접해보지 못했던 그였기에 불교철학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익에 급급하며 감정적인 폭력이나 휘두르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는 냉철하며 합리적인 통찰력과 장기적 전망에 입각한 올바른 실천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일을 도모할 때에는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방법을 취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도 하였을 것이다.

제2장 첫 의병봉기와 시련

1. 첫 의병봉기와 류인석 의병부대


범도(홍범도)는 절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부근의 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서 절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큰 절인 장안사나 유점사 등 다른 절로 자주 왕래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약 1년 가량 되었을 때 자기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의 여승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신계사 근처에는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비구니의 속성은 단양(丹陽) 이씨였고 북청 출신이었다. 원래 불교교리 공부에 취미가 없던 데다가 조실부모한 탓으로 무척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범도(홍범도)는 비록 서로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허심탄회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나이 20이 넘도록 여자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별로 없는 범도(홍범도)는 그 여승과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와 그 여승은 자기들이 중의 신분이라는 엄연한 한계도 잊고 서로 알고 정답게 지냈으며 처녀·총각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신계사에 몸담고 있었지만 끝내는 자기가 불교계에 빠져들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이 여승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선경이라고 일컬어지던 금강산의 뛰어난 경관 속에서 청춘남녀들이 향유하는 사랑을 속삭였으며 이성간에만 있을 수 있는 고귀한 정을 주고받곤 하면서 마침내는 승려로서의 한계를 넘는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거의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이제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절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였다. 범도(홍범도)와 사랑을 나누던 단양 이씨 비구니의 배가 불러와서 더 이상 절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2년 여름 무렵 범도(홍범도)는 이제 중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속인의 신분으로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파계하고 평범한 아녀자의 처지로 돌아온 단양 이씨 처녀를 데리고 신계사를 떠났다. 두 사람은 금강산을 벗어나 원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처녀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원산 근처에서 불의의 변을 당한 뒤 서로의 행방을 모른 채 헤어져 버리고 말았다. 홍범도는 이씨 처녀의 행방을 탐문하였으나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였다. 그녀와 갑자기 생이별을 하게 된 현실이 너무 원통했다. 더구나 그녀가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범도(홍범도)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이제 또 다시 혼자 되었으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범도(홍범도)가 그 때 알지는 못했지만 이씨는 그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뒤 북청 친정에 가서 그의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된다.
범도(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러다가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의 먹패장골이라는 곳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은 금강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깊은 산골이었는데 신계사에 있을 때 가끔 이야기를 듣던 고을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이곳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거의 세상과는 발길을 끊고 약 3년간 머무르면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기도 하고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를 발휘하여 사냥을 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조용히 참선하며 수양도 하였다. 그리하여 절에 있을 때 깎았던 머리는 다시 자라서 상투를 틀어 올릴 수 있었으며 수염도 제법 자라서 완연한 성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어엿한 청년의 풍채를 보이게 되었다.
홍범도가 먹패장골에 있던 동안 조선의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갑오년인 1894년에 삼남지방은 물론 황해·강원·평안도의 일부 지방까지도 동학군이 주동이 되고, 봉건적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에 반발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거 가담한 농민들의 봉기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동학농민전쟁(1894) 또는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이 국내에 진주하여 청일전쟁(1894)이 일어났다. 청일전쟁(1894)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의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청과 시모노세끼(下關)조약(1895)을 맺어 청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와 대만(臺灣)을 할양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변상받았다.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은 노골적인 침략의 손길을 조선에 뻗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 친일적 인사들을 도와 정부의 내각을 구성케 했고 그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케 했다. 이 같은 일련의 개혁을 우리는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1895)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진보적 개화론자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자주적으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위협적으로 강요한 요소도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은 일본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그 개혁조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 민중의 반일감정을 폭발적으로 격화시킨 사건이 바로 1895년 8월 20일(음력; 양력으로는 10월 8일)에 일제의 하수인들에 의해 야만적으로 자행된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간접적 배경이 된 것은 소위 ‘삼국간섭’을 계기로 하여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고 러시아의 힘이 일본을 압도하자 그 기회를 틈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물리치려던 조선정부의 배일친로(排日親露) 정책이었다. 즉 고종은 김홍집·박영효 등의 친일내각을 물리치고 이범진(李範晋)·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 등으로 친러시아 내각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호시탐탐 조선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크게 당황하여 자기세력의 만회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이란 1895년 5월경 러시아·독일·프랑스 등이 연합하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일본을 위협한 결과 일본이 이에 굴복해서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준 일련의 국제적 사건을 말한다.
삼국간섭(1895) 이후 조선에서 세력만회에 부심하던 일본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반목하며 배일친로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지목되어온 민비(명성황후)를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그리하여 일본인 낭인(깡패)과 군대를 동원하여 민비(명성황후)를 무도하게도 시해(을미사변, 1895)하였고 조정의 친로파를 축출한 후 김홍집·유길준 등으로 하여금 다시 내각을 조직케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 하였고 열강도 일본을 비난하였다.
을미사변(1895) 후에 수립된 김홍집 내각은 잠시 중단되었던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양력의 사용(건양: 建陽)을 비롯해서 지방 행정구역을 8도에서 23부(府)로 개편하며 군제의 개편 등을 단행하고, 급기야는 단발령을 내려 강제로 국민들의 머리를 잘라서 반일감정에 불을 붙였다. 특히 단발령의 강제적 실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겨오던 유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온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야기하였고 을미사변(1895) 때문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국민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리하여 을미사변(1895)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봉기는 이제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의 강행 이후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범도(홍범도)가 있는 먹패장골은 깊은 산중이었으므로 서울 등 전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소문이 한참 뒤늦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후 한참 뒤에야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든가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봉기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였다. ‘왜놈’이 조선 땅을 짓밟고 있는 현실이 너무 원통했던 것이다. 자기가 신계사에 있을 때도 보았듯이 임진왜란(1592) 때 왜병에 의해 불타버린 절이 한두 군데였던가? 그래서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지 기회가 생기면 일본에 대하여 꼭 원수를 갚겠다고 벼르면서 그 골짜기를 나와 대처로 향하였다. 이때가 대략 을미(1895)년 8월 23일 경(음력)이었는데 범도(홍범도)의 나이는 만 27세로 훤칠한 헌헌장부로서 혈기왕성할 한창 때였다. 실제로 홍범도는 뒷날 “반일·반봉건(反封建)의식에 눈을 뜬 것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 때였다.”고 밝혔다.
먹패장골에서 나온 지 약 23일 뒤인 음력 9월 18일쯤(양력 11월 4일경) 범도(홍범도)는 장안사에서 회양읍과 철원의 금성(金城) 방면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단발령을 지나오다가 고개 정상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이의 이름은 김수협이었고 황해도 서흥 출신이었으며 연배가 범도(홍범도)와 비슷했다. 단발령은 높이 1,241미터의 험준한 고개로서 금강산 서쪽 천마산(天摩山) 중턱에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을 지나다가 빼어난 금강산의 여러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출가를 다짐하는 뜻에서 삭발하였다 하여 단발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단발령 근처 남서쪽에는 오량동(五兩洞), 북동쪽에는 피목정(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오량동은 행인들이 단발령을 지날 때 산적을 막기 위해 안내인에게 다섯 냥의 돈을 주어 호송을 부탁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홍범도는 김수협과 함께 고개 위에서 쉬다가 통성명을 하며 서로 친하게 되었다. 김수협은 당시의 국내사정을 말하며 비분강개하였다. 범도(홍범도)도 그와 비슷한 시국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숨김없는 심정을 토로하며 의기투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미약하나마 힘을 합쳐 의병투쟁을 벌이기로 약속하고 우선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무것도 없으니 먼저 친일인사와 일본군이 있는 큰 도회지로 가서 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과 무기를 빼앗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오량동을 지나 금성읍에 이르렀는데, 그곳 장거리에 때마침 일본군의 한 부대 약 200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두 의병은 일본군 병사가 어깨에 메고 있는 최신식 소총을 보니 무척 욕심이 났다. 당시 일본군은 ‘무라다(村田)’식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이 총은 공주 우금 고개 전투를 비롯한 동학농민군과의 각종전투와 청일전쟁(1894)에서 큰 위력을 떨쳤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최신식 무기로 농민군을 도처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일본군의 무기를 빼앗고 싶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금성 장거리에서의 낭패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들과 같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갖춘 지점을 물색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다닌 결과 그들은 경기·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으로서 천하의 험로로 알려진 철령(鐵嶺)을 찾아냈다. 철령은 높이 685미터의 고개로서 회양의 북쪽에 위치하여 강원도와 함경도를 구분하는 관문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고개의 북쪽인 함경도 지방을 관북지방, 동쪽인 강원도 동부지역을 관동지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서쪽의 풍류산(風流山), 동편의 장수봉이 천하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고 당시에도 수비하기에 매우 알맞은 석성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와 김수협 두 사람은 그들이 능히 수십 명을 대적할 수 있는 고개의 고지 한곳을 선정하여 견고한 진지를 만들고 일본군이 지나가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일본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수백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는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장총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떨어지는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적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척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도 없이 이날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이튿날 아침에는 약 10여 명의 일본군이 원산방면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별로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철령을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야말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날랜 화승 놓는 솜씨로 화승총을 발사하여 순식간에 그들을 거의 궤멸시키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으나 안전하게 엄폐된 고지의 요새에서 사격하는 정확한 사격솜씨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홍범도가 전개한 최초의 의병전투였다. 아직까지 남한의 학계에서는 1907년 11월의 후치령(厚峙嶺) 전투를 홍범도가 처음으로 전개한 의병전투라고 보고 있는데, 앞으로 면밀한 검증을 거친 뒤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철령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병을 몰살시킨 후에 그들이 갖고 있던 소총과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피신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일병의 추격을 받아 견디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가까스로 거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약 12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합계 14인의 소규모 의병부대가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가 바야흐로 범도(홍범도) 나이 만 28세인 1896년 여름이었다.
그런데 이무렵 전국각지에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 이후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의병봉기가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이때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도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강릉에서 봉기하여 함경도 남부지방까지 북상해서 크게 활약한 민용호(閔龍鎬) 부대, 춘천에서 약 1,000여 명의 대병력으로 기병한 이소응(李昭應) 부대, 그리고 단양·충주·제천 등지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강원도로 이동하여 싸움을 계속하던 류인석(柳麟錫) 부대,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부대,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부대, 광주의 기우만(奇宇萬) 부대 등은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함흥 지방에서는 민용호의 관동창의군과 밀접히 연관되어 활동하던 최문환(崔文煥) 의병부대가 함흥부의 관리들을 처단하는 등의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가 학포에서 모집한 의병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거나 떠돌이 또는 산간에서 사냥을 하던 포수들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군대경험과 산중에서의 사냥 경험을 되살려 얼마 동안 이들에게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요원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병부대의 진용을 어느 정도 구비한 뒤에 이들은 안변군에 있는 석왕사(釋王寺)로 옮겨와서 봉기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해몽과 관련된 전설이 유명한 절이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는 바로 앞에 원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어서 일본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또 원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원산 거류 일본인과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부근에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추가령(楸哥嶺)과 철령이 나오는 것이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작은 부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화승총으로 무장되었고 철령에서 빼앗은 소수의 신식 소총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석왕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충주와 제천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끌던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한 류인석 부대가 가까운 안변의 영풍으로 옮겨와서 자기들과 같이 싸울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홍범도와 김수협은 의논하여 류인석 의진에 합류하기로 했다. 소수의 부대로 활동하기보다는 류인석과 같은 명망있는 지도자가 인솔하는 대부대와 함께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註2) 류인석은 헌종 8(1842)년 춘천 가정리(柯亭里)에서 출생했다. 이후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에게 배워 화서학파의 맥을 계승하였다. 그의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시에도 상소를 올려 내수자강론(內修自强論)과 개항 반대론을 극력 주장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류인석은 화서학파의 학통과 정신을 이은 위정척사론자들의 핵심적 인물로서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한 개화는 국가와 민족을 파멸시킬 뿐이라는 강경한 척사론과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논리를 펴며 반개화(反開化) 및 반일운동을 이끌었다.
을미사변(1895) 후에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당시에 그는 최익현 등과 함께 유림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논리를 전개하며 의병봉기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1896년 초에는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호좌(湖左) 의병진영의 창의대장(倡義隊長)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른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우세한 화력과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관군에 참패하고 소위 ‘북천지계(北遷之計)’의 방략에 의해 북상하게 되는 것이다.
‘북천지계’란 호서·관동지방에서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또 관군의 군세가 강하여 중부지방에서 싸우기가 불리하니 인민의 기질이 강건하고 용맹하며 무예에 능한 사람이 많은 서북지방으로 옮겨가서 의병운동을 계속하자는 임기응변적 전술을 말한다. 류인석의 이 같은 논리는 1907년 고종(광무)황제의 퇴위와 정미(丁未) 7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 이후에 나라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국외 기지건설론과 지구전의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즉 류인석은 전국의 의병부대는 전투방법을 지구전으로 하되 무산·삼수·갑산 등 백두산 부근지역을 무대로 삼아 중국과 러시아에 기지를 두어 정예군을 양성, 운동을 펴나가야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함부로 국내에 진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의 이러한 계책은 후일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1896년 6월 하순경부터 강원도 지역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정선을 거쳐 대화(大和)에 이르른 동년 7월 11일(음력 6월 1일)에 포고문과 통문을 발송하여 그해 6월 4일 충청도 수산(壽山)에서 결정했던 서북지방으로의 행선지를 재확인했다. 그 후 류인석 의진은 청계·원당·인제·소현(蘇峴)·춘천을 거쳐 양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다시 금성·평강·소금강·안변·양덕·청간·영흥·맹산을 거쳐 8월 19일에는 평안도 덕천군의 덕천읍에 도착하였다. 그 뒤에도 영변·운산·초산을 거쳐 마침내 그해 8월 28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서간도 지방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류인석 등 약 240여 명의 의병들은 요녕성(遼寧省) 회인현(懷仁縣; 桓仁縣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중국관리로부터 의병의 해산을 요구받아 수 천리 장정 끝에 천신만고의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투쟁해 온 보람도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의진을 해산하게 된다. 이후 류인석을 비롯한 21명 등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그들 이외에 219명은 귀국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홍범도와 김수협 등 의병들은 류인석 부대가 안변·양덕·영흥·맹산 등 평안도와 함경도 접경 지방을 경과하며 투쟁할 무렵 여기에 참가하여 이들과 같이 줄기찬 항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 등은 류인석 부대와 함께 그동안 세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이 와중에 이들은 크게 패하여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수협이 전사했고 다른 의병들도 하나 둘씩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결국은 범도(홍범도) 혼자만 남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어렵게 조직했던 의병조직이 무너지고 홀로 남게 되자 더 이상 의병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정척사라는 보수적 이념과 반일·반개화의 의지는 철석같이 강했지만 실질적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서는 약간 문제가 있던 류인석 의진과 결별하고 거기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다註3) 한편 류인석 의병부대는 평안도의 북단인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북지방에서 이 부대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과 봉기 이래 류인석을 추종하여 그곳까지 종군했던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강을 건너지 않고 국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몇 년 뒤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다시 의병투쟁을 위해 봉기하게 된다.
홍범도와 류인석은 서로의 출신성분과 지위가 달랐고 지향하는 바 그 이념은 비록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이 투쟁하였다. 두 사람은 이 때 헤어지지만 1908년 7월경 류인석이 50∼60여 명의 추종인사와 더불어 러시아령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망명하고 홍범도 역시 의병활동이 여의치 않자 무기와 탄약을 구하기 위해 1909년 1월경 연해주 크라스키노(우리 동포들은 연추라고 부름)를 잠시 방문함으로써 다시 만나게 된다. 홍범도의 호(號)는 여천(汝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그가 류인석 의병부대에 참가했을 때 류인석이 자신의 자 여성(汝聖)과 비슷한 여천(홍범도)이라고 지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2. 단독 의병활동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같이 싸우다가 패전하고 피신한 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생계유지를 하며 적당한 기회가 오면 의병활동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다수의 대중들을 설득하여 의병봉기를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1896년 후반기에 황해도 곡산군 하도면(당시에는 영풍으로 불리웠음)에 있는 널귀 금광으로 가서 자기 신분을 숨기고 광산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박달재를 넘으면 함경도 문천과 원산이 바로 코앞이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당시 조선의 주요 광산은 대부분 미국·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열강의 이권쟁탈전 결과에 따라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은 그해 평안도의 운산(雲山) 금광을, 러시아는 함경도의 경원과 경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을, 또 영국은 1900년에 평안도의 은산 금광을, 독일은 1896년에 강원도 금성의 당현(堂峴) 금광 채굴권을, 일본은 1900년 황해도 송화와 장연의 금광 및 은율·재령의 철광 채굴권을 조선정부로부터 획득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은 오래 전인 1882년부터 벌써 함경도 단천의 사금장 채굴권을 빼앗았으니 이러한 사례만 보더라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얼마나 수탈에 열을 올렸던가 그리고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이때 일하게 된 금광은 워낙 산골에 있어 아직 일본의 침탈을 받지는 않았지만 원산이 가까웠으므로 일본인들의 주목을 받아 가끔 일본인들이 찾아와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광산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으며 작업도구도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업환경도 매우 위험해서 일하면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의 임금 또한 매우 낮아서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이 가끔 휴식을 취할 때면 의병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은연중에 반일사상을 고취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홍범도가 이 금광에서 몇 달간 일했을 때 그의 신분은 결국 노출되고 말았다. 같이 일하던 광부가 그를 밀고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에 붙잡힐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도망하였다. 기존의 논문이나 저서에 홍범도가 단천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의 일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황해도 곡산의 한 금광에서 일했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단천에는 사금장(沙金場)이 있을 뿐이고 광산에서 산출되는 금은 없다는 점을 보아도 확실하다.
범도(홍범도)는 광산에서 도주하여 평안남도(1896년 8월 지방관제의 개혁으로 1년 전의 23부 체제가 다시 과거의 8도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경기·강원·황해도를 제외한 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뉨) 양덕 방면으로 가는 도중 지경령이라는 고개에서 일본군 병사 세 명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지경령은 높이 약 655미터의 꽤 험한 고개였고 옆에는 해발 1,486미터의 우람한 하람산이 곡산과 양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병들은 방심하고 천천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일본 병정 셋을 몽땅 화승총으로 사살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총 세 자루와 약 300발의 탄환, 그리고 쌀 등을 노획했다. 그중 총 두 자루는 후일을 대비하여 부근의 알기 쉬운 지점에 표시를 해 놓고 묻어 놓았다. 그 뒤 범도(홍범도)는 총과 양식 등을 배낭에 휴대하고 바로 옆에 있는 지경산 꼭대기에 올라가 밤을 지샜다.
홍범도는 이튿날 지경산을 내려와 양덕을 거쳐서 며칠 후에는 함경남도 덕원의 ‘무달사’ 라는 절에 도착했다. 그는 무달사 근처의 산간에서 지내다가 얼마 뒤에는 무달사에 상당기간을 머물며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덕원읍의 사정을 정탐하였다.
당시 덕원읍에서는 좌수로 있는 전성준이란 자가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홍범도는 전성준을 응징하여 반민족행위를 감행하는 민족반역자는 의병의 단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온 덕원고을에 알리기로 했다. 전성준은 덕원에서 바로 근처인 원산을 내왕하며 일본 침략세력의 주구가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원산은 조선 초기에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산하의 원산진(元山津)이라는 조그만 어항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래로 함경도 일대는 물론이고 강원·황해·평안도와 한양 등 각지에서 여러 물산이 집결되고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일대 도회지가 된 곳이었다. 그런데 1880년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된 뒤부터는 일본의 조선침략 교두보로서 주로 일본과의 무역항으로서 활기를 띠며 번성하였다. 따라서 그 곳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조계지(租界地)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일본상인들도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강력한 보호를 받으며 조선의 각지를 순회했고 기만적 상업행위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자주 말썽을 일으키곤 하였다.
일본상인들이 개항 후부터 1880년대 전반기까지 우리나라에 가져온 상품은 약 88%가 영국산 면제품이었다. 개항 직후만 하더라도 일본제 상품은 보잘 것 없는 수공업 제품이 주종을 이루어서 자기·성냥·술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 등에서 수입된 공장제 제품을 조선에 비싸게 파는 대신 쌀과 콩, 가죽·생사·금 등의 1차 산품을 헐값으로 반출해갔다. 그러다가 일본의 공업이 발전하면서 조선의 수입상품은 점차 일본제품으로 바뀌어 갔다.
개항 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강화한 일본은 조선 수입액의 50%, 수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조선과의 무역활동에서 독점적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측은 말할 것도 없이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미곡을 싼값으로 팔아서 값비싼 생활필수품을 사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산과 원산·목포에는 일본인들의 곡물거래소가 생겼는데, 그들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입도선매(立稻先賣) 또는 고리대 형식이라는 약탈적 방법으로 곡물을 수매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농촌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바로 이 같은 상황이 간접적 배경이 되어 1894년 삼남 지방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관북지방에서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반출되는 곡물의 양이 막대하여 국내가격이 폭등하였던 것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곡물유출을 막기 위해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대일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했다가 일본의 항의로 인하여 3개월 감봉처분과 전보발령의 징계를 받았고, 조선정부에서도 4년 뒤에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사례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머슴으로, 군인으로, 절의 중으로, 그리고 사냥꾼과 금광의 채전꾼으로 일하며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범도(홍범도)는 농민들의 고통을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성준은 이 무렵 원산에 있는 일본인 곡물수집상과 관리들의 손발이 되어 우리 농민의 피땀어린 농산물을 수집해서 일본으로 실어가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동안 거액의 돈을 벌어서 그 위세로 덕원의 좌수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분개하였다.
홍범도는 달이 없는 캄캄한 밤에 대담무쌍하게도 혼자서 전성준의 집에 쳐들어갔다. 그는 전성준을 위협하여 그 사이에 모아놓은 돈을 다 꺼내라고 명령하였다. 전성준은 범도(홍범도)가 일본제 소총을 들이대자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숨겨놓은 돈을 끄집어냈다. 전성준은 애지중지하며 모아놓은 돈을 강탈당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웬 시커먼 녀석이 갑자기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니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서 총소리를 내면 자기가 위험할 것 같아서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납치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전성준은 될 수 있으면 집안에서 버틸려고 했지만 소리칠 수도 없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데리고 무달사 어귀까지 왔다.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성준에게 알렸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이미 을미년부터 의병활동을 계속해 왔다는 것과 일제의 앞잡이로서 힘없고 가난한 조선 농민들의 피땀을 착취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단호하게 역설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빼앗은 돈은 의병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쓰일 것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주저하였다. 연방 굽신대며 생명을 보전코자 애쓰는 전성준을 보려니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처치함으로써 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친일 민족반역자는 살아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의병의 항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민들에게 주지시킬 필요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독한 마음을 품고 전성준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그는 전성준을 사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부터 덕원의 좌수 전성준이 괴한에게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온 덕원에 쫙 퍼졌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에게서 뺏은 돈을 계산해 보고 조금 놀랐다. 일본돈 8,480원이라는 거액이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이곳저곳 장마당으로 다니면서 장기간의 산중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과 양식·신발·의복 등을 구입해서 평안도 동부의 산간지방인 양덕·성천·영원 등 깊은 산골의 숲 속과 바위틈 여러 곳에 숨겨 놓았다. 또 이전에 곡산의 지경령 근처에 숨겨놓은 무기도 찾아서 옮겨다 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곳을 주 무대로 거의 1년간을 혼자 떠돌아 다니면서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때가 1896년에서 1897년경이었다. 그의 나이 만 30이 되지 않았을 때인….
이무렵 국내 사정은 어떠하였던가? 단발령 이후 치열하게 벌어졌던 의병들의 항거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몰락한 다음 고종이 의병해산 조칙을 공포하고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 등을 파견해서 의병을 선유케한 결과 점차 의병들의 저항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류인석 등은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가 평안도를 거쳐 서간도 지방으로 건너갔음은 이미 앞에서 고찰하였다. 소위 을미의병(乙未義兵, 1895)이라고 하는 1895∼6년의 의병봉기는 이렇게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을미의병(1895)의 이러한 근왕적(勤王的)·보수적 성격은 이 무렵 의병투쟁의 한계로 지적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홍범도가 이 사이에 평안도 동북부에서 의병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거나 다른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단독으로 행동해야 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생주도의 의병봉기는 이와 같이 1896년 10월경이 되면 거의 소멸되지만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과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던 일부 빈농민과 영세 수공업자·도시빈민·소상인 등은 그 이후에도 화적 집단이나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남대(南大)·북대(北大) 등의 소규모 민중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지방관아나 부호,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등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활빈당은 양반 부호나 관아, 외국인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것을 가난한 소농민이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빈민구제 사업을 벌여서 억눌린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은 홍범도의 활동도 일종의 활빈당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홍범도가 혼자서 의병활동을 벌여 나가고 있을 때인 1897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는 미국의 금광약탈에 대한 광산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반대투쟁이 전개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즉 외세의존적인 조선정부로부터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빼앗은 미국은 먼저 그 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광산노동자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중국인·일본인·조선인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하였다. 생활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기존의 운산 금광 노동자들은 미국의 불법수탈에 대항하여 미국인에게 항의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인근주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격렬히 투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 300여 명에 이르는 광산노동자들의 드센 항쟁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은 매판적인 조선정부와 미국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1896년 7월에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였고 이듬해 10월에 고종은 여러 대신들과 독립협회 회원 등 많은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구단(園丘壇)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하여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외세의존적인 정부를 비판하고 헌의 6조(獻議 6條)를 결의하였으며 입헌의회의 설치를 주장하여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깊은 산골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국내 정치상황의 변동을 잘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덕원의 전성준에게서 빼앗은 돈을 군자금 삼아서 몇년 간을 평안도 동북지역으로 떠돌아 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그는 약간의 일본군을 살상하였고 친일적인 관리들과 매판적 양반·부호들을 응징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탄환과 식량·의복과 신발 등이 다 떨어지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 더 이상 의병항쟁을 계속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이제 의병활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동안 그는 자기의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써 왔으나 이제 굳이 이름을 속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후 진짜 이름인 홍범도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30세까지 홍범도의 행적


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1. 산포수 생활


홍범도는 잠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발걸음을 함경남도 북청 방면으로 돌렸다. 그리로 가면 예전에 신계사에서 만났다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단양 이씨를 혹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 처녀의 고향이 북청이었다는 희미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또 함경도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에는 직업 포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자기도 일정기간 수련을 거치면 훌륭한 산포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그곳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냥을 하면 그럭저럭 생계유지는 될 것 같았다.
범도(홍범도)는 1897년경 북청에 정착해서 부자집의 농토를 소작하여 농사를 지으며 틈이 나는 한가한 초겨울에는 사냥에 나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하는 등 얼마간 홀로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30을 바라보니 당시의 혼인 풍습에 비추어 보면 거의 홀아비에 가까운 노총각이었다. 세월은 무상하여 멈춤이 없이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범도(홍범도)는 북청에서 사냥과 농사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수소문하며 자기의 옛사랑을 찾아보았다.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몇 달이 흐른 뒤에 가까스로 범도(홍범도)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녀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단양 이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양순(홍양순)이라고 이름한 아들을 데리고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외롭게 살고 있던…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가 헤어졌던 1892년경에 외가집이라고 할 수 있는 북청의 자기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이때 양순(홍양순)이는 겨우 만 일곱살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일 그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십대의 어린 소년으로 의병에 참가하여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 양순(홍양순)이는 거의 7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범도(홍범도)대로 이씨는 이씨대로 또 양순(홍양순)이는 양순(홍양순)이대로 얼마나 애타는 세월이었던가? 이제 범도(홍범도)는 나이 서른이 되서야 정식으로 장가들게 되었다. 뒤늦은 만남이었기에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 소중했고 그러기에 세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홍범도는 이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이씨가 살고 있던 처가에서 살게 되었다. 처가는 북청군 안산사(安山社: 1914년 풍산군 안산면으로 개칭됨) 노은리(老隱里) 인필골에 있었다. 그곳은 북청에서 갑산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厚峙嶺) 고개 바로 아래였다. 노은리 옆에는 높이 1,527미터의 송동산이 있어서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주로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섰다. 범도(홍범도)가 사는 북청 등 관북지방은 함흥과 영흥 등의 일부 평야지대와 해안 연변의 작은 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높고 척박한 산악지대로 되어있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대단히 노동집약적이며 고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은 소출이 변변치 않은 반면 야생동물의 사냥은 때때로 상당한 수입을 보장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인적이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울창한 산림에는 호랑이·곰·멧돼지·표범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민가에 내려와 해를 끼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랑이의 피해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를 ‘호환(虎患)’이라 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맹수들의 습격을 물리치기 위한 자위수단으로서 덫을 설치하거나 직업 포수들을 고용하기도 했고 주민 자신이 무기를 갖추어서 스스로 수렵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사는 웬만한 청·장년들은 대부분이 농민이면서 동시에 사냥꾼이기도 했다. 사냥꾼들은 산사람과 같은 생활을 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호탕한 기질과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생활을 했는데, 그런 생활이 범도(홍범도)에게는 잘 어울렸다.
함경도의 포수들은 대부분 여름이나 늦가을과 겨울에 사냥을 하고 봄·여름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한겨울에는 한가하게 쉬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1년 중 약 5개월은 사냥을 하고 7개월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홍범도는 사냥철이 되면 북청 이외에도 이웃고을인 삼수·갑산·장진·흥원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곰·호랑이·사슴·여우·사향노루·멧돼지·검은담비 등을 사냥하였다. 호랑이는 가죽과 뼈가, 곰은 웅담이라 불리는 쓸개가, 사슴은 흔히 녹용이라고 하는 뿔이 값이 많이 나갔다. 여우도 가죽이 쓸모 있었으며 사향노루의 사향은 비싼 약재로 유명했다. 담비는 이곳의 특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므로 가죽이 중국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멧돼지는 사냥꾼들에게 별로 인기는 없었지만 밭의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없애달라는 요청이 자주 있었다.
대개 관북지방의 포수들은 혼자서 수렵을 하지 않고 몇 명의 포수들이 협동하여 공동 작업으로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곰·호랑이 등 맹수가 이 지역에 많은데다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구식 화승총으로 그러한 맹수를 잡으려면 철저하게 잘 짜여진 공동의 협력이 없으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또 가끔 식인 호랑이가 출현하면 그 호랑이를 잡을 임무가 부여되는데 그 때에는 평상시보다 많은 대규모의 사냥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홍범도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 북청군 안산사에는 포연대(捕捐隊)라는 직업 포수들의 동업조합이 결성되어 있어서 부근 지방까지 그 명성이 높았다. 포연대는 ‘안산사 포계(砲契)’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사냥꾼들이 대거 참여하여 계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농업과 사냥일을 겸하다가 탁월한 사격술과 우수한 사냥솜씨를 인정받아 이 직업 산포수대에 가입하게 되었다.
포연대는 함경남도 당국의 승인을 받은 합법 조직이었다. 포연대와 같은 사냥꾼들의 조합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들 스스로가 조직한 측면도 있으나 동시에 이러한 조합의 결성에는 유사시에 포수들을 전투병으로 동원하기 위한 봉건정부의 의도가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헌들은 이 조직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유사시에는 포수들을 정발하였던 것이다. 사냥꾼들의 계 형식의 협동조합 내지 이익단체의 성격을 띠는 이와 같은 조직은 사냥꾼들이 많은 평안도 강계, 함경도 삼수·갑산 등에 많이 결성되어 있었다. 병인양요(1866) 때 강계포수들이 대거 참여한 양헌수(梁憲洙)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사실은 포수들이 국방에 동원된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홍범도는 포연대에 가입한 지 얼마 후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어 이 조직의 대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포연대장은 지방의 관리들과 교섭하여 세금으로 내는 포획물의 양을 협상하고 이를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일정하고 정확한 포획의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수렵의 특성 때문에 지방관리와 포수들은 사냥의 성과물에 관한 협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이지방의 포수들은 대체로 빈궁했고 그들이 사냥 때 쓰는 수렵도구는 거의가 낡은 화승총이었으며 기타 탄약이나 장비도 별로 좋지 않았다. 포수들의 사냥 성과물은 대개 일정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허탕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군의 관청에서는 포수들에게 포획물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애써 사냥한 포획물을 송두리째 세금으로서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즉 지방관리들이 호랑이 가죽이나 웅담·사향이나 녹용 등을 헐값으로 빼앗아 가는 사례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 지역에는 평안감사를 삼년하면 거지가 되어가고 삼수·갑산 군수 노릇 삼 년 하면 큰 부자가 되어 간다는 속담마저 전해지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포연대장으로서 동료들의 신임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사냥을 해보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던가? 사냥감을 쫓아서 수 십리 산과 들을 헤매고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사투를 벌이며 운이 좋아야 겨우 목표로 삼은 짐승을 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굳세고 강건한 북청 사냥꾼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세금액을 낮추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포수들 사이에서는 더 큰 신임을 얻었으나 당국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수하려 했으며 더 높은 직책을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범도(홍범도)는 이를 모두 단호하게 거부하고 완강히 투쟁하여 결국은 사냥꾼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세금을 낮추는데 성공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결혼 이후 약 8∼9년간 북청의 안산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 후에는 안산사 포계의 포연대장을 겸하였다. 그가 포연대장의 직책을 맡은 뒤로는 농사보다는 사냥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으며 동료 포수들을 위하여 한층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범도(홍범도)의 일생에서 이 시기가 제일 행복하고 단란한 때였을 것이다. 그는 이씨와 재결합 직후인 1897∼8년경에 두 번째 아들을 얻었다. 범도(홍범도)는 둘째의 이름을 용환[龍煥(홍용환)]이라고 지었다. 첫째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가 없을 때 그의 부인이 자기 좋을 대로 지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개명하는 것도 어색해서 그냥 그대로 양순(홍양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둘째 아들 이름은 자기가 손수 짓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에 호랑이를 뜻하는 음인 ‘범’자가 들어 있으니 아들은 범에 손색이 없는 용같은 씩씩한 녀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 용자’에 ‘빛날 환자’를 집어 넣었다.
‘용환(홍용환)’ -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범도(홍범도)는 흐뭇하였다.
두 아들은 자기를 닮아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무렵 나이 서른이 넘은 홍범도는 체격이 컸고 두껍고 새까만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의 얼굴은 좀 넓어 보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약간 엄격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짙고 두터운 눈썹 아래 깊이 자리 잡은 눈은 차분하고 선량해 보였다. 이때는 단발령이 내린 뒤라 신식 하이칼라식으로 머리를 자른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당시만 해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상투를 틀고 있었다. 특히 북청과 같은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들을 거의 친일파라고 단정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범도(홍범도)도 이때는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여러 가지 애로에 부딪혀 1908년 말부터 1910년 초반에 걸쳐 만주와 연해주를 왕래하게 되는데, 이 무렵 상투를 자르고 턱수염을 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덟 팔(八)자 모양의 콧수염은 평생 자르지 않고 기르고 있었다. 40대 중반인 1912년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홍범도는 얼굴이 약간 길쭉하고 콧대가 우뚝하며 눈에 정기가 있고 입술이 좀 두툼해서 남자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범도와 같이 살았고 뒤에 그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비교적 냉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는 동정적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보통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끌었고 그 자신도 기꺼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범도(홍범도)는 우정을 존중할 줄 알았고 신의와 포용력이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의 성품은 인자했고 태도는 겸손했으나 일처리에는 과감하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사람됨은 그의 동료와 다른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1)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


되 나왔다 되 들어가는데
왜 들어왔다 왜 나가지 않노.
되 들어가 되 안 나오는데
왜 안나가고 왜 죽는거뇨.

청일전쟁(1894)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는 이런 동요가 퍼져서 많이 불리우고 있었다. 이는 청(되)을 은근히 동정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비꼬는 노래였다. 청일전쟁(1894) 이후 심화된 일본의 침투는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한 뒤에는 이제 노골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당시에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든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체결하고 이어 1905년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억지로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7년에는 소위 ‘정미7조약(丁未7條約, 한일신협약, 1907)’을 통하여 일본인을 각부의 차관으로 임명토록 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은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해산 뒤 전국 각지에서는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로 계속 되고 있던 의병들의 항전이 치열하게 재연되었다. 이 봉기에는 군대해산으로 군문에서 쫓겨난 해산군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항일 의병투쟁이 190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자료가 있다.『함경도지』277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04년 3월 21일 밤 함흥에 폭도(의병: 필자) 약 300명이 봉기하여 매우 위험한 순간에 원산수비대로부터 파견된 오꾸다[奧田(오전)] 대위가 인솔한 정찰대와 조우하여 동야반(同夜半), 즉 다음날 22일 오전 2시 반까지 격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의병 봉기의 기록은 활빈당 같은 농민운동 집단이 의병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느 의병부대의 활동인지 또 그 후에 이들이 어떠한 행적을 보이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의병의 봉기가 함경도 지방에서는 러일전쟁(1904)이 개전된 직후에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홍범도는 그의 일지에서 러일전쟁(1904)이 한창이던 1904년 9월 초순에 다시 의병활동을 벌였다고 적고 있는데 위의 자료를 보면 그러한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의 회상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추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야 한다는 것이다.
1905년에는 함경북도 무산지방의 포수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부령과 회령 등지를 주 무대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관북지방에서는 항일 의병투쟁이 일시적으로 잠복상태에 있다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자행되는 1907년 중반부터 격렬하게 일어났다.
홍범도는 안산사 일대의 포수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자 1906년경부터 사냥꾼들이 주축이 된 의병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민중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그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 모았다.
일제 침략자들은 1905년 이후부터 그들의 침략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행정구역과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06년 9월 전국을 13도(道) 11부(府) 333군(郡)으로 개편하였고 일본인 참여관(參與官)을 두어 행정을 감독케 하였다. 이 무렵 함경도 지방의 행정체계는 군(郡)·사(社)·리(里) 또는 동(洞)의 단위체계로 되어 있었다. 군에는 군수가, 사에는 사존(社尊)과 풍헌(風憲) 및 도헌(都憲)이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있었고, 리 또는 동에는 존위(尊位)와 도감(都監)이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봉건적인 지방조직을 자기들의 침략목적에 적합하도록 개편하였다. 즉 군에서 사를 폐지하고 몇 개의 사를 통합하여 몇 개의 면으로 만드는 등 일련의 작업을 거쳐서 행정체계를 뜯어 고쳤던 것이다. 또 군과 사·리·동 등의 행정책임자인 원(元)·사존·풍헌·도헌·존위·도감 등의 직책을 폐지하고 대신에 군수·면장·구장(區長) 등을 신설하여 그들을 일진회원(一進會員) 등 친일분자들로 임명하였다. 1907년 7월에는 보안법(保安法)을 제정하여 집회 및 결사(結社)를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침략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06년 10월 압록강과 두만강의 삼림에 관한 한일합동조관(韓日合同條款)을 체결하고 뒤이어 이듬해 4월에는 영림창(營林廠) 관제를 공포하여 북부지방의 삼림에 관한 통제와 벌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1907년부터 삼수·갑산 지방에 삼림의 도벌을 주관하는 목재창(木材廠)을 설치하고 산림의 도벌과 반출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북부지방의 산림에 관한 이러한 일제의 침략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화전민과 포수들의 생계유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벌채하거나 밭을 일구기 위해 불을 지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처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 울창한 삼림지대가 벌채됨으로써 야생 조수들이 격감하여 포수들의 수렵에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결국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으로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침투가 늦었던 북부지방의 주민들은 이제 직접적인 생계의 위협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더욱 부채질을 한 사건이 바로 같은 해에 서울의 군대해산 이후 마지막으로 진행된 북청 진위대의 해산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시행이었다. 특히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강행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은 산포수가 많은 함경도 지방에 매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이 법령은 한국 민간인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아에서 거두어 들이도록 하고 위반자를 처벌토록 한 것이었다. 이 법은 민간인까지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결국 의병투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사냥꾼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렵용 무기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법률의 적용에 따라 포수들은 이제 그들의 생업이 위협을 받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함경도 지방에는 지역적 특성상 산포수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에 무기도 또한 제일 많았다. 그러기에 일제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함경도 지방 포수들의 무기를 빼앗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제의 무기·탄약 회수반이 함경도의 포수들을 찾아와서 총기의 납부를 요구한 때는 1907년 10월경이었다. 즉 일제는 북청의 파발교(把撥橋) 부근에 병력을 파견하여 각 면의 면장들을 앞세우고 포수들의 수렵용 총기를 수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의 북청수비대는 북청군의 안산사 내에 있는 포수들의 총을 빼앗으려고 일부 수비대를 그곳에 보냈다.
홍범도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일본군에게 납부하라는 꼭두각시 정부와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설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안산사에 그대로 있다가는 왜놈한테 총을 빼앗기게 될 것이니 왜놈들을 후치령 이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고 주장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또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 봉기를 예로 들며 이 시기야말로 두메산골에서 사냥만 하고 지내는 우리일망정 자기의 생존권 및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하였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설득이 주효하여 당시 북청의 36사(社) 포수들은 대부분 그들의 총을 당국에 제출하였으나 유독 안평·안산 두 사의 총기 납부실적은 매우 부진하였다.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일제 침략자들을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위하여 궐기하자는 범도(홍범도)의 강력한 권유는 동료 포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범도(홍범도)의 주장과 설득에 동감한 포수들은 그들의 풍부한 사냥 경험을 자랑하며 항일의병대의 조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일찍이 행하여 오던 의병조직 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는 동료 포수들뿐만 아니라 차츰 일제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화전민과 광산 노동자, 몰락한 빈농민 등을 망라하였고 또한 북청 진위대의 해산으로 실직상태로 있던 해산병도 받아들여 전투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 조직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통칭 안산사 포계라 불리우는 북청군 안산사와 안평사 두 사(후에 면으로 개칭됨) 포수들의 동업조합인 ‘포계’였다. 이 포계의 계장은 당시 임창근(林昌根: 70세)이라는 은퇴한 포수였다. 임창근은 연장자였기 때문에 조합의 장으로 추대되었고 실제로 이때 안산사 포계의 포수들을 고무, 추동하여 의병봉기에 가담시킨 사람은 애초부터 포연대장 홍범도였다. 또 홍범도 의병부대에는 차도선(車道善)을 중심으로 한 북청·삼수·갑산 등지 일단의 포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공동으로 지휘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이며 일진회원으로서 안평면의 면장이었던 주도익(朱道翼)은 안평면의 총기 회수실적이 신통치 못하자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총기 등을 납부하라고 독촉하며 금품을 강탈하는 등 행패를 부려서 인근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특히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면장 유병갑(劉炳甲)을 쫓아내고 스스로 면장이 되었고 심지어는 면민의 결혼도 반드시 일진회원과 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일진회에 가입하라고 선전하여 신망을 잃고 있었다.
홍범도와 차도선의 인솔하에 약 70여 명의 포수들은 머리에 가죽관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 엄방동(嚴方洞: 언방골이라고도 함)에서 모여 의병으로 떨쳐 일어날 것을 결의하였다. 이날이 바로 홍범도 산포수 의병부대의 봉기일이었다. 홍범도가 후치령 전투 전후 시기에 의병부대를 최초로 조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국내외 대부분의 책 내용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봉기 당시 차도선은

“하늘이 일진회의 무리를 없애기 위해 나로 하여금 의를 안산(安山)에서 일으키게 하는구나! 이제 그들을 살륙함으로써 국운을 회복시키려 한다!”

고 하며 친일주구인 일진회원의 소탕을 선포하였다.
봉기한 포수의병들은 그 다음날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주구로서 가렴주구와 매국친일에 앞장서던 안평면장 주도익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진목동에서 그를 처단함으로써 결연한 구국의지를 과시하였다. 계속하여 그들은 같은 달 19일에는 역시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파인 안산면장 이쾌년(李快年)과 그의 아들 이봉국(李鳳國)도 총살하여 버렸다. 이튿날인 20일에는 안산사에 거주하는 일진회 회원 최석우(崔錫禹)·이종현(李鐘鉉)·김창식(金昌植)·김창로(金昌魯)·이병필(李炳弼) 등 5명을 한꺼번에 처형하고 부근의 친일분자들을 소탕하여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사태에 즈음하여 일제는 의병의 봉기라는 그 성격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부 포수들의 일진회 회원에 대한 반발인 것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축소 해석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그 다음에는 기만적 술책으로 포수들의 총기를 빼앗으려고 했다. 즉 일본군과 경찰이 포수들의 총기를 압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총기에 이름표를 붙여 검사도장을 찍고 총기의 사용권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기 위한 조치라고 강변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 수비대는 산포수들이 파발교 옆의 일본군 병참주재소에 총기를 갖고 와서 이름표를 받은 뒤에 사냥총을 계속 사용하면 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속였다.
이 같은 기만적 선전에 속은 유기운(劉基云) 등 73명의 포수들은 파발리에 나와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총을 내놓으면서 총기 사용의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는 이번에는 총표의 도장이 북청 경찰서 본서(本署)에 있으니 면의 책임자를 데리고 가서 본서에서 날인을 받은 뒤에 총과 총표를 돌려주겠다고 또 속여서 68정(두 명은 총기를 납부하지 않고 도주함)이나 되는 포수들의 사냥총을 거두어 가버렸다. 일부 포수들이 완전히 일제의 계략에 그대로 속은 것이었다. 사냥총은 포수들에게는 실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었다. 총을 압수당하게 되면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총은 곧 사냥꾼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들의 생계가 매달려 있는 생명의 도구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김춘진(金春辰) 등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러한 사태의 심각함과 일제의 간악한 술책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과 같이 일제의 기만적 책동을 쳐부수기 위한 대책으로서 항일 의병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범도(홍범도)는 일찍부터 진행하여 오던 의병 조직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키는 한편, 총을 압수당한 포수들을 자기 휘하에 받아들여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속아서 빼앗긴 총을 다시 회수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포수들의 사냥총을 압수한 일본군 수비대는 다음날 그 총을 말 3마리에 싣고 후치령을 넘어 북청으로 반출하려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 수비대가 파발리에서 북청으로 가자면 반드시 후치령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포수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총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본격적인 의병항쟁은 바로 이 후치령의 길목에서 무기를 빼앗아 북청으로 넘어가는 일본군을 섬멸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봉기 당시 조직은 약 70여 명의 7개 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제가 후치령 전투 직후에 입수한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907년 11월 15일경 홍범도 의병부대의 조직편제와 간부 및 의병대원의 명단·주소는 다음과 같다.

제1분대
분대장 차도선(車道善) 부독(副督)
홍범도(洪凡道) 부독
김춘진(金春辰) 참독(參督)
김문엽(金文葉) 정궁(正宮)
김홍윤(金弘允)
주필영(朱必英)
임승조(林承祚)
임용기(林用基)

제2분대
분대장 김규연(金奎淵) 안평 서상리(西上里)
김상준(金尙俊) 안평 중지경(中地境)
김기준(金基俊) 안평 진목정(眞木亭)
유용칠(劉用七) 안평 중지경
장양민(張良民) 안평 신점리(新店里)
김용학(金用學) 안평 노은수(老隱水)
이종호(李宗浩)
김상사(金尙社)
이춘덕(李春德) 안평 엄방동
임승수(林承秀) 안평 심포(深浦)

제3분대
분대장 임용락(林用洛)
김석필(金錫必) 배왕동(裵王洞)
박지응(朴枝應)
이지옥(李枝玉)
장윤택(張允澤)
조병민(趙丙敏) 미전동(米田洞)
황영팔(黃永八)
이종원(李鍾元)
조병록(趙炳彔)
이일권(李日權)

제4분대
분대장 나현서(羅鉉瑞) 엄방동
김학권(金學權)
김학용(金學用)
김달엽(金達葉)
나종수(羅宗洙) 안산 황수원(黃水院)
조광목(趙光牧)
김운용(金雲用)
김명순(金明淳)
신방일(申芳日) 지량봉(志良峯)
설인택(薛仁澤) 노은수

제5분대
분대장 김치환(金致驩) 양평(陽坪)
박중실(朴仲實) 양평
김택선(金澤善) 노경봉(老竟峯)
이득책(李得柵) 양평
이창록(李昌祿)
최석책(崔錫柵)
최창건(崔昌乾)
강우봉(姜禹鳳) 양평
정익영(鄭益永) 양평
김경신(金景信) 노양촌(老陽村)

제6분대
분대장 임윤석(林允石) 진목전(眞木田)
김운성(金雲星) 안평 심포
이명근(李明根) 위와 같음
송호수(宋虎秀) 위와 같음
이종성(李宗成) 위와 같음
김종인(金鍾引) 진목전
김봉익(金鳳益) 미전동
이종순(李鍾淳) 신점리
홍사영(洪使永) 진목전
김경당(金景棠) 노은수

제7분대
분대장 고응렬(高應烈) 노은촌(老隱村)
송석규(宋錫奎) 위와 같음
김준학(金俊學) 위와 같음
이봉재(李鳳在) 감토동(甘土洞)
이종수(李宗秀) 위와 같음
임교수(林喬秀) 안산 황수원
송홍익(宋弘益) 감토동
이성만(李成萬) 노은수
김홍원(金洪元) 서상리
신전태(申田太) 미전동

위의 표에 나오는 68명과 도독 1명을 합하여 69명이 1907년 가을에 봉기한 홍범도 의병부대의 간부진과 참가 의병인 것으로 파악된다. 위의 명단에 도독의 이름은 없으나 도독은 앞에서 설명한 안산사 포계의 계장인 임창근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문서에는 후치령 전투에서 임창근이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 사실여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위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1분대가 지휘본부이며 차도선과 홍범도가 똑같이 부독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휘본부인 제1분대의 분대장이 차도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범도가 부독의 자리에 있었음은 궐기 당시 홍범도가 이 조직 안에서 차도선과 동일한 지휘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차도선이 분대장이라는 사실은 의병부대의 조직과정에서 차도선의 기량과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차도선이 홍범도보다 5살이나 연상인 1863년생이었다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홍범도가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을 우대하여 분대장의 임무를 위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범도(홍범도)는 실제로 부대의 지휘를 차도선과 같이 공동 협의하여 했거나 아니면 서로 분담하여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도선이 한때 일제에 ‘귀순’하기 전까지의 이 부대를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홍범도·차도선 다음 제3의 지휘자가 참독인 김춘진이며 정궁의 직책을 맡은 김문엽은 아마도 이 세 사람의 참모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에서의 한 연구(오길보의 논문 「홍범도 의병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주중국이라는 17세 소년이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홍범도가 기병할 당시에 포수들을 모집하는 과정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즉 주중국이 지원하는 포수들의 성명을 기록하는 서기의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주중국은 그에 관한 유고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위의 표 제1분대에 있는 주필영이 그일 가능성이 있다.
위의 편제는 초창기의 조직인데 후일 각지에서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 노동자 등이 이 부대에 합류함으로써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급속히 팽창하여 부대의 편성은 몇 차례 개편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부대의 개편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무렵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무기는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총에 소요되는 화약과 탄환은 처음에는 스스로 제조하여 상당기간 동안 자체조달하였다. 갑산에서는 질이 좋은 동(銅)이 산출되었으므로 탄환의 제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총이 없는 의병들은 원시적이지만 창과 도끼·도검 등으로 무장하였다. 하지만 차츰 일본군이 쓰던 근대적 소총을 노획해서 화력을 강화하게 된다. 의병들의 복장은 정해진 제복은 없었으나, 사냥 시에 입던 간편한 복장에 가죽 모자를 썼고 총은 각자 베로 만든 자루나 주머니에 넣어 이를 어깨에 메거나 등에 졌다. 그리고 탄약은 어깨에 두르거나 주머니가 달린 허리띠에 휴대하였으며 허리띠에다가 찐쌀을 5홉 정도 군량으로 두르고 다니기도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은 제1기(1907년 11월 15일∼1908년 3월 17일), 제2기(1908년 3월 17일∼1908년 11월), 제3기(1908년 11월∼1911년 3월)의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홍범도는 제1기에만 차도선과 같이 부대를 공동지휘하면서 싸웠고 그 이후 시기에는 도의병장(都義兵長)으로서 함경도 지방의 거의 모든 의병부대를 지휘했거나 연합해서 투쟁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의 소양이나 심오한 지식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후덕한 인품과 빼어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휘하에 기라성 같은 수많은 명장들을 포섭하여 의병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2) 후치령(厚峙嶺) 전투


후치령은 높이 약 1,335미터의 매우 험준한 고개로서 동해안 지방인 북청에서 내륙의 개마고원 지방인 삼수·갑산·혜산 등지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후치령의 정상에는 각지로 왕래하는 행인들과 짐꾼들의 유숙을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약 70여 명의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일본군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인솔하고 갑산에서 북청쪽으로 가는 후치령의 정상 부근에 매복하여 무기를 싣고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포수의병들은 대략 세 군데의 진지에 배치되었으니 후치령 고개 아래의 노양지 앞추여머리 길목과 진갈구미 한복판, 후치령의 내메머리 거리의 3개소가 바로 그곳이다.
홍범도는 의병들로 하여금 위의 매복지점에 나무를 베어다가 견고한 포진(砲陣)을 구축케 하고 눈으로 그 위를 덮어서 위장하도록 했다. 11월 중순이었지만 후치령에는 벌써 상당한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진이란 화승총으로 적을 사격하기 위한 진지를 말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의병부대의 진지를 그렇게 불렀다. 범도(홍범도)는 포진에 여러 사격조로 된 전투대오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케 한 다음 파발리 방면에 ‘발동군(당시의 정찰병)’을 보내서 적정을 탐지하도록 했다. 이 때 전투대오의 편성에서 특이한 점은 사격조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격조는 당시 포수들이 주로 갖추고 있던 화승총 사용방법상의 특징때문에 짜여진 것이었다. 즉 하나의 사격조는 4명의 의병으로 조직되었는데, 화약을 장약하는 포수와 탄알을 장진하는 포수, 화승대에 불을 붙이는 포수, 그리고 준비된 총을 조준하여 발사하는 사수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총을 사격하는 한 사람 외에 나머지 세 사람은 일종의 조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전투 준비를 끝낸 의병들은 이 포진에 의거하여 후치령을 왕래하는 일본군과 우편물 호위병, 목재창의 일본인 관리 등 일본 침략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22일 오후 4시경 안산·안평 두 고을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처음에 포수들의 총을 북청읍으로 반출하려던 일본군은 일본인 경찰 노우에(野上) 경부(警部) 등 경찰 4명과 상등병 이하 8명의 일본군 수비대원 등 군경 합동 12명과 한국인 첩자 한 사람의 인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북청읍을 향해 가던 중 안산사의 황수원(黃水院) 북방 병풍동에서 4명의 일진회원이 피살되었다는 소식과 신풍리(新豊里) 부근에서 사냥꾼들이 모여 우선 일진회원을 살해한 뒤에 일본인도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애초에 동행하던 경찰 일행과 상당수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급히 파견되었다. 그 결과 총기 호송 인원이 대폭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일행은 일본군 병졸 두 명과 경관인 순사(巡査) 한 명, 그리고 수송용 말 3마리와 한국인 마부 3명, 위에서 언급한 한국인 통역 겸 첩자 1인으로 이루어졌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들이 매복지점에 도달하자 일제히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 병졸과 순사 등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때 친일파인 한국인 통역은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탄환이 명중되었으나 재빨리 도망하여 버렸고 마부 3명은 모두 생포되었다. 의병들은 짐을 싣고 있던 말을 잡아서 동료 포수들이 빼앗겼던 총을 그대로 다 되찾았다. 그리고 일본군경이 갖고 있던 신식 무기와 기타 장비를 노획하여 그들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사로잡힌 마부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으므로 의병봉기의 대의명분과 반일항쟁의 필요성 등을 잘 설명하고 타일러서 석방하였다. 이 때 사살된 일본군은 북청주둔 일본군 제 50연대 소속이었고 일인 경찰은 이름이 도꾸에이(德永權吉, 덕영권길)였는데 북청경찰서의 고문부 소속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같은 날 석양 무렵에 갑산에서 북청으로 가는 우편물 호위 일본군 2명과 역시 북청으로 가던 혜산진 목림창 소속 반장 오끼하라(萩原守虎, 추원수호)란 자를 매복 포진에서 저격하여 모두 사살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 등을 노획하고 우편물도 빼앗았다.
포수의병들은 다음날인 11월 23일에도 같은 지점 즉 후치령에서 신점리로 내려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가던 일본군 아라다니(新谷, 신곡) 소위와 그가 타고 있던 말, 병졸 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무기와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했다. 이틀 사이에 아홉 명의 일본인 군경과 민간인이 처단된 것이다. 홍범도·차도선의 지도하에 승리의 개가를 올린 의병투쟁의 첫 성과는 포수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 시켰다. 또한 이 같은 포수의병들의 승리는 주변 민중들의 반일 의병투쟁을 더욱 고무 시켰다.
일본군 북청 수비대는 위와 같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계속된 투쟁에 놀라고 당황하여 일본군을 급히 출동시켰다. 즉 일제는 11월 24일 미야베(宮部, 궁부) 보병대위 지휘 하에 2개 소대 57명과 순검 5명, 헌병 4명을 급파하여 북청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 의병부대를 공격케 하고, 반대방향인 신풍리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는 아오또(靑砥, 청지) 보병대위 및 노우에(野上, 야상) 경부가 거느리는 일단의 군과 경찰을 출동시켜서 협공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우에 경부 등의 일행은 자기들의 인원이 소수이고 후치령에는 많은 의병들이 웅거하고 있다는 풍설을 듣고 자신이 없어 후치령으로 향하지 못하고 일본군의 분견대가 있던 신풍리를 경유하였던 까닭에 후치령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한편 후치령의 며칠간 투쟁성과가 주변 마을에 크게 알려진 결과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해산군인이 합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삼백 명의 규모로 군세가 확대되었다. 이 때 북청 진위대 병정으로 복무하던 도중 진위대가 해산되어 집에서 지내고 있던 송재원(宋才源)은 홍범도가 기병하면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대열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884년 3월 5일생으로 당시 23세의 한창 때였다. 그는 포수들을 이끌고 의병대에 참가하라는 홍범도의 연락을 받고 자기가 살고 있던 북청군 니곡사(泥谷社) 인동리에 거주하고 있던 8명의 포수들을 이끌고 후치령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1월 24일 정찰병인 발동군으로부터 북청에서 다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후치령 방면으로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적을 쳐부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신중하게 기다렸다. 의병들의 포진을 보강하여 주공방향으로 병력을 집중시켰고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진지에 내서 포수들이 안전하게 총을 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기다린 보람이 있어 드디어 다음 날인 25일 12시경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들의 포진 근처에 나타났다. 본격적인 후치령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전투는 오후 3시까지 약 세 시간 동안에 걸쳐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비록 낡은 화승총을 주로 갖고 있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고 사기 왕성한 가운데 철저히 미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세한 신식 장비를 보유하였다고 하나 북청에서부터 수백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매우 피로한 상태에 있었으며, 아무런 엄폐물이 없이 노출된 상태에서 낮은 곳으로부터 고지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지형적으로도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홍범도의 선제 사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피아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약 세 시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그들을 패주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절반이 넘는 3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고 의병진영에서도 김춘진·김문엽(홍범도는 이문엽으로 회상)·조강록·임승조·임사존 등 1등 사수인 다섯 사람의 포수가 전사하였으며 황봉준(黃奉俊) 등 다수의 부상자도 생겼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에 섬멸적 타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계속된 전투로 탄환이 거의 떨어지고 전투 직후 일본군 증원병이 올 것을 우려하여 후치령을 떠나 주력은 안산사의 신점(新店) 방면으로, 일부는 후치령 서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는 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이도 16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하였는데 전투에 처음 참가한 일부 포수들이 당황하여 전투에 애를 먹기도 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첫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포수들만이 할 수 있는 정확한 사격과 대담한 작전, 그리고 일정한 성과를 거둔 뒤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재빠른 기동력이라고 하겠다. 홍범도 등 포수의병들의 이러한 특정은 맹수를 사냥하면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그들이 사냥하던 지역의 지리와 지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이 바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인 것이다.
일제 경찰은 후일 그들의 보고문서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전사 3, 부상 4명 뿐인 것으로 피해를 축소하여 보고한 반면에 의병들의 피해는 크게 과장해서 전사자가 21명, 화승총 노획이 14정인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보고서에 출동 병력이 60명 이상이었으면서도 “아 병원(兵員)은 2개 소대이나 50명 이하이다.” 혹은 “적은 참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자기들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의병들이 완강하게 저항한 것처럼 진술하였다.
특히 그들은 위와 같은 허위보고를 하면서 후치령 전투 이후 약 1주일이 지난 12월 1일까지도

“폭도(의병: 필자)의 종적은 불명이며 지금까지 1인도 체포할 수 없었음은 유감으로 하는 바이다. 계속 수사 중이다.”

라고 하여 전투 직후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 의병들을 추적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이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을 증명하는 사실은 일본인 경찰까지도 전투 직후 일본군과 경찰 일행이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사실은 일본군이 전멸하지는 않았다) 신풍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분견소의 미끼(三木, 삼목) 소좌 등 일본군도 의병들의 신풍리 습격이 두려워서 갑산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당시 후치령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북청군 니곡사에 살던 정응섭(鄭應燮: 당시 27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왜놈들은 우리 동리에 와서 ‘폭도’와 교전하다가 4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사상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증언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승리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제는 후치령 전투에서 선발대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증원병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사정을 일제의 원산 경찰서장은 아래와 같이 통감부의 경무국장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통하여 일본군의 고전 상황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此)의 토벌로 북청 50연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하였으나, 수백 명의 폭도가 고개 위에 집합하여 극렬히 방전(防戰)하여 병졸 7명이 부상하고 곤전(困戰)하는 상황이므로 다시 동(同) 연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하고자 지난 26일 밤 신포 수비대에서 병졸 15명을 발탁하여 기관포 4문을 갖고 동(同) 방면으로 향한 모양인 바….”

이미 보낸 병력을 1개 소대로 축소하고 있으며 증원병에게는 최신 무기인 기관포까지 지급해서 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일제가 포수 의병들의 봉기에 얼마나 급급해하고 있는가 하는 진실을 간파할 수 있다.
후치령의 3일간 전투에서 매복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일제 침략자들을 처치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미야베 대위가 거느리는 북청수비대와 격전을 치른 직후에 신점을 거쳐 갑산 상남사(上南社)로 이동하였다. 12월 3일 그곳에서 이들은 일진회원 13명을 처단하고 부근의 이리산(伊離山)으로 들어가서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후치령에서 참패한 뒤에 의병을 색출한다는 핑계하에 그 부근의 무고한 한국인 민가 27호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북청에서 혜산진에 이르는 사이의 장항리(獐項里: 노루목)·성문 내리(內里)·후치령·황수원·신풍리·갑산 등지에 일단의 보병과 기병 부대를 배치하여 의병의 내습을 경계하였다.

(3) 삼수성(三水城) 전투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와 그의 아들 양순(홍양순)은 의병들의 탄환이 고갈되어 작전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후치령으로 갔다. 왜냐하면 후치령 주위에 널려 있는 수십 명 일본군의 전사자 시체에서 탄환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본군경이 시선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어서 대단히 위험했다. 두 부자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에 전장에 침투하였다. 이러한 모험 끝에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수천발의 탄환을 찾아서 의병들이 모인 장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엄방동에서 70여 명의 의병대와 합류한 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의병들에게 186발 씩의 탄환을 지급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의병들의 전의를 크게 고무·추동시켰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 이후 상당한 병력의 손실이 있었지만 다시 주위에 격문을 발송하여 포수와 농민·해산군인 등을 모집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후치령 전투는 어떤 의미에서 포수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단순한 화승총 탈환 투쟁으로부터 일제를 우리나라에서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의병항쟁으로 발전시키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 참가한 포수의병들은 실전을 경험하면서 보다 원활한 전투수행을 위해서는 의병부대의 철저한 조직체계 구성이 필요하고 참전 포수의병 개개인의 투철한 항전의지와 전투원으로서의 엄격한 자질이 한층 더 많이 요구된다는 귀중한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의병의 수가 증가하고 앞으로 집요하게 의병들을 추적 ‘토벌’하게 될 일본군과의 접전을 예상하여 12월 초에 그들의 조직체계를 더욱 정연하게 재편성하였다.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 의병부대에 참가한 김병호(金炳浩: 1882년생, 당시 25세)의 회상과『홍범도의 일지』,그리고 일제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재편성한 의병대의 가장 큰 변화는 부대 조직의 체계화 및 지휘부 감찰기능의 보강이었다. 즉 구한국군 편제를 참고해서 분대-소대-중대의 편제를 갖추었고 지휘부에는 군중기찰의 업무를 맡는 도검사(都檢事) 제도를 둔 것이었다. 도검사는 의병대오 내의 감찰과 군사규율을 취급하고 그 외에 민족 반역자인 일진회 회원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의병장은 도검사가 조사한 사항을 근거로 의병 가운데 규율을 위반한 사람과 기타 외부의 범죄자들에게 적당한 처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의병대에는 이밖에 군량도감(軍糧都監)이 있어서 의병들의 식량보급을 맡았다.
이때의 편제를 보면 말단의 최소 조직에 25명으로 구성되는 분대를 두고 그 지휘자인 분대장을 하사(下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2개 분대를 1개 소대(50명)로 구성하여 지휘자인 소대장을 오십장이라고 했다. 또 2∼3개의 소대로 1개 중대(100∼150명)를 이루게 하고 그 지휘자인 중대장을 참위(參尉)라고 하였다. 비록 민간 포수들의 집합체라고는 하지만 중대장 등 지휘관의 임명시에는 지휘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임명장인 사령장(離令狀)을 주어 엄격한 격식을 갖추었다.
이와 같이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한 홍범도와 차도선은 12월 중순 경에는 종전의 수동적인 진지 매복과 저격 위주의 공격에서 과감히 벗어나 능동적으로 기동하며 일본군을 기습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후치령 전투 이후 의병들이 대폭 증모되었으나 거기에 소요되는 무기와 장비가 많이 모자랐으므로 일본군의 보급품을 빼앗아 군수품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12월에 접어든 개마고원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월동장비나 피복·식량과 의약품 등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점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갑산의 상남사에서 북청의 안산·성대·덕성사 등지의 고산준령을 거쳐서 1907년 12월 중순에는 북청읍 부근까지 신속히 행군하여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지점을 선정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약 일주일 내외 사이에 거의 100km가 넘는 거리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북청읍까지 온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200여 명의 의병들은 마침내 그달 15일 북청읍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항리 근처에서 일본군 화물호송병과 우편물 호위병을 습격하여 병졸 아라이(新井元吉, 신정원길) 등 3명을 살상하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특히 이때 의병들은 일본군이 혜산 방면으로 운반하던 탄약상자 40여 개를 빼앗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어서 의병투쟁에 큰 활력소가 되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의병부대의 장항리 승리 이후 북청에서 삼수·갑산·혜산 방면으로 가는 교통로가 일시 차단되어 북청을 거치는 일제의 우편물 수송이 상당기간 중단되었다. 이 사실은 북청 주변의 여러 고을에 순식간에 퍼져나가 주민들 사이에서는 글자 그대로 의병들의 의로운 투쟁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 수비대는 의병의 토벌은커녕 그들의 보급품과 우편물이 위협을 받게 되자 16일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여 명을 출동시켰지만 의병들은 이미 잠적해 버린 뒤라 거의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무렵 홍범도와 차도선은 함흥 주변 지방의 포수들과 각 동리의 유지 및 연장자들에게 원수의 직책으로 자기들의 의진에 합세할 것을 권유 내지 명령하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송하였다.

「함흥 상하의 원산·문천·영원·희천·고원·맹산의 각사(社)에 고하노라.」

“알리노니 무릇 의병이란 것은 자고로 있어왔던 법이다. 이제 북청에서부터 삼수·갑산·이원·단천·홍원·길주까지의 7읍은 의병진영을 이루었는데, 유독 함흥 각사의 포수들이 아직도 오지 않았은즉 이것은 무슨 연유이냐? (포수들은) 며칠 내로 속히 성진(成陣)하고 각사와 리의 존위와 도감은 대진(大陣: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말함) 가운데로 참가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각 사와 리의 유력자와 포수 등은 장차 포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리라. 그래서 이 글로써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혹시 각사와 리의 각처에 이 글이 도달하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폐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를 알리는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의병들은 장항리 부근에서 많은 물자를 노획하고 일제의 치안을 교란하는 등 매우 큰 성과를 거둔 뒤에 재빨리 그곳에서 철수하여 깊숙한 골짜기인 삼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제는 의병대를 추적하여 ‘토벌’하려고 삼수와 혜산진 방면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12월 18일 함흥 수비대의 가미쯔끼(上月) 기병 소위 이하 16기의 기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홍범도 등은 삼수군 중평장(仲坪場)에서 그들을 요격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 다시 삼수 방면으로 이동했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홍범도는 원성택(元成澤)으로 중대장을 삼고 각지에 격문을 보낸 이후 모집된 상당한 숫자의 포수들을 의진에 편입시켜 군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 결과 12월 하순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거의 수백 명에 이르는 대부대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의병들은 과감하게도 삼수성에 쳐들어갈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삼수성에는 상당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군수 유등이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날씨에는 일정한 주둔지가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동기에서의 필요성도 있었다.
마침내 홍범도 의병부대는 12월 29일 삼수성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삼수성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일진회 회원을 색출하여 처벌하였으며 일제의 주구인 삼수 군수 유등을 효수하여 군내외에 의병들의 철석같은 의지를 과시했다. 삼수성에는 일본군이 국경 경비와 의병토벌을 위해 비축해 둔 많은 군수물자가 있어서 의병들의 무장강화와 식량 확보 등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의병들은 이때 삼수성에서 일본군의 소총 수십 자루와 탄약 100여 상자를 빼앗았고 이미 해산되었던 한국군 진위대 사용의 베르던식 소총 수십 자루, 탄환 15상자 등도 동시에 획득하였다. 특히 홍범도는 이때 빼앗은 베르던식 소총을 애지중지하며 이후의 전투는 물론 해외로 망명할 때에도 소지하고 건너가 거의 수십 년을 사용하며 절묘한 사격솜씨를 자랑하게 되었다.
삼수성을 점령당한 일본군은 성을 탈환하려고 연말인 12월 31일에 가미쯔끼(上月) 기병 소대 및 혜산진 수비대·갑산 수비대의 연합병력 70∼80여 명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홍범도 의병부대는 수적으로도 적을 압도한데다가 성을 점령하면서 얻은 근대적 무기를 보강하여 화력이 강화되었고 성이라는 유리한 건조물을 방어에 활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이 아무리 잘 훈련되고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갖고 있다고 해도 성안에 있는 의병들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포위공격 해오는 일본군과 대치하여 2∼3일 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켜 버렸다. 일본군이 성벽에 의지하여 맹공을 퍼붓는 의병들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절반이 넘는 병력이 살상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비겁하게도 어두운 틈을 이용하여 혜산진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이 전투 직후 일본군의 소총 18정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이 전투 직후 보고문서에서 그들의 패배를 아래와 같이 호도하여 얼버무렸다.

“31일 혜산진 및 갑산의 수비대와 협력하여 삼수를 포위 공격했다. 차도선이 인솔하는 폭도 약 400명은 삼수의 성벽에 의거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다. 약 3시간에 걸쳐서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하고 탄약결핍으로 암야를 이용, 혜산진으로 퇴각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164면에서-

일제는 여기에서 의병들의 숫자를 400여 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물론 이 당시는 의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 보고서는 그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의병의 숫자를 다분히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전투 시간도 줄여서 보고한 것 같다. 홍범도는 삼수성 전투가 3일 정도 계속된 것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본군의 허위보고에도 불구하고 삼수성에서의 참패는 그들의 위신을 말할 수 없이 떨어뜨린 반면에 의병부대의 사기와 자신감을 크게 고양시켰고 함경도 일대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을 드높이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삼수성 전투에서 의병부대가 대승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사상자도 꽤 생겼다. 김동운·성태일·노성극, 새골에 사는 홍병준·임태준 등 5명이 부상하고 최학선·길봉순·이봉준·조기석·홍태준·오지련·박봉준·김일보·최영준 등 9명이 전사하였던 것이다.

(4) 갑산읍 전투


일본군이 삼수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게 참패했다는 보고에 접한 일제는 의병들을 진압코자 각 부대 연합의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 동부수비관구 사령관 마루이(丸井) 소장은 의병진영의 강성함에 크게 놀라서 북청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미끼(三木, 삼목) 소좌로 하여금 북청 수비대의 장교 이하 보병과 기병 18명, 장항리에 파견된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명, 성진(城津) 수비대장 나까무라(中村, 중촌) 대위 이하 80명, 그리고 함흥에서 북청에 파견된 도요시마(豊島, 풍도) 기병소위 이하 26기(騎) 등 175명으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있는 홍범도 등의 의병들을 공격케 했던 것이다. 여기에 삼수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각지의 수비대가 합류하였으니 토벌대의 규모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에 부응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막강한 대병력의 일본군이 출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홍범도와 차도선은 휘하 의병들을 집결시키고 여러 정탐꾼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의병들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해 주는 주민들의 물심양변의 협조하에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이 때 특기할 만한 점은 정평 지역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의병부대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와 차도선은 1908년 1월 9일 막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삼수군의 중평장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의 고지인 운봉(雲峰)을 선점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며 지연작전을 펴다가 후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삼수성에 있던 주력부대는 재빨리 갑산 방면으로 이동하게 했다.
의병대의 이러한 주도면밀한 응전태세를 알 까닭이 없는 일본군은 그 무렵 세 방면에서 삼수성을 포위하여 압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한 고지를 미리 차지하여 일본군을 요격하려던 일단의 의병들은 마침내 1908년 1월 9일 아오또 대위가 이끄는 5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와 조우하여 격전을 벌여서 일본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에 예정된 대로 산악의 고지를 타고 갑산 방향으로 잠적해 버렸다. 일본군 토벌대는 의병부대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중평장에서의 전투에 열중한 나머지 그들이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의병 주력부대의 갑산 이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 뒤 일본군은 같은 날 의병들이 아직 삼수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아오또 지대는 계속해서 중평장에 주둔하고, 80여 명으로 이루어진 나까무라 대위의 일대는 계속해서 중평 방면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미끼 소좌가 이끄는 한 부대는 삼수 전투에서 패주한 혜산진 수비대와 합세하여 신동(新洞)에 도착했고 도요시마 기병 소대는 삼수성을 정찰하였다.
다음 날인 1월 10일에 일본군 토벌대는 3면에서 삼수성을 포위하여 접근하였으나, 이미 성은 고요하고 의병들은 흔적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일본군은 완벽하게 의병부대의 유인작전에 속은 것이었다.
한편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력은 일본군이 일부 의병부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삼수로 진입하는 사이에 일본군의 포위망을 교묘하게 벗어나 갑산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들은 약 300명의 대병력으로 9일 삼수를 출발하여 1월 10일 새벽 6시에 갑산읍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당시 갑산읍에는 일본군의 수비 분견초(分遣哨)와 일제 경찰의 순사 주재소, 그리고 우편 전신 취급소 등 일제 침략자들의 통치기구 하부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경이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삼수에 출동하여 갑산에 남은 병력은 불과 십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의병들은 완전히 적의 허점을 포착한 것이었다.
의병들은 조국을 침략하여 자기 민족을 압박하는 침략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항쟁에 과감히 떨쳐나섰다. 그들은 갑산 수비대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일본인 7명을 살상하는 등 일본군경을 궤멸시키고 다시 갑산 우편 전신취급소를 점령하여 전신·전화선을 모두 절단한 뒤에 우편취급소의 청사를 완전히 소각·파괴하여 버렸다. 이때 일제의 눈과 귀가 되어 주민들과 의병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데에 악용되었던 전신기기도 모두 파괴되었음은 물론이다. 홍범도 등 의병부대는 거의 아홉 시간이나 갑산읍을 점령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앞잡이 기관을 파괴하고 그 주구들을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의병들은 우체국과 일본인을 습격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았으나 선량한 주민들에게는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후 세 시경 삼백여 명의 의병부대는 거의 아무런 인명 손실도 보지 않은 채 일제 통치기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뒤에 갑산의 이리사(二里社) 방면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의병부대가 갑산에 잠시 머무는 동안 갑산군 허천사(虛川社)의 박신강(朴信康)은 소대장으로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또 갑산 전투 직후인 1월 11일에는 같은 군의 진동사(鎭東社)에 사는 김용권(金用權)이 부근에서 의병 60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 때 동네 주민들로부터 한말씩의 양식을 군량으로 차출하여 가져와서 의병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게 고양되었다.
갑산이 기습을 당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일본군 미끼 소좌는 매우 당황하여 1월 11일에 아오또 부대에게 삼수 부근의 수색을 위임하고 나까무라 대위가 이끄는 한 부대와 함께 급히 갑산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홍범도·차도선 의병대가 갑산의 이리사 방면으로 잠복해 버린 뒤였다. 이같이 일본군이 갑산읍으로 향하여 의병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 홍범도 등의 의병부대는 약 60명의 의병 지대를 1월 12일 갑산의 상남사로 파견해서 그곳의 악질 일진회 회원 원길학(元吉學)·박중형(朴仲兄) 등 48명을 몰살시켜 버렸다. 그 조치는 일제의 앞잡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냉엄한 민족의 심판이었으며 또한 주변의 주민들에게 의병들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암묵적 위협과 경고이기도 하였다.
의병대의 일진회원에 대한 이러한 준엄한 숙청은 북부지방의 주민들에게 지대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즉 의병들의 과감한 행동은 일제의 주구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여 도주케 하였으며 더 이상의 매국적 행위를 감행할 수 없게 하였고, 일반 촌민들도 일제에 대한 협조를 일체 거부하는 상황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개마고원 일대의 산간에서 일진회원은 거의 사라져버렸고 일제 군경들은 거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정찰에 나선 일본인 경관들은 숙박마저 거부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이 무렵 북부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일진회가’가 유행하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를 조소·야유하였다.

회야 회야 일진회야
삼춘화류 좋다더니
사절 명절 다 지났다.
오색 잡놈 모여들어
육조 앞을 지나가니
칠국거지 너 아니냐.
팔자도 기박하나
구구히 사잤드니
10월 치성 가련하다.
모자 벗어 코에 걸고
천리원주 네가 할제
상투생각이 너 안나더냐.

한편 의병부대의 갑산 점령 직후 갑산에 출동했던 미끼 소좌 등의 일본군 수비대는 갑산에서 의병을 추적하는 데 실패한 뒤에 의병대의 주력이 갑산군 이리사 쪽에 있음을 알아채고 각 지대를 그곳으로 급거 출동시켰다. 즉 아오또 부대는 신풍리 동쪽에서부터, 나까무라 대는 갑산읍으로부터 이리사 방면을 향하여 협공케 하고 미끼 자신은 상당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리사로 쫓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 1주일 동안 갑산군 부근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수색하였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1월 19일 다시 갑산읍으로 낭패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갑산읍 기습과 점령, 그리고 주둔 일본군경 및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대타격은 의병부대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에 의한 신출귀몰의 대승이었다. 갑산읍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유격전에 말려 들어서 의병의 추적과 토벌에 완전히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농락당할 정도로 당황하고 갈팡질팡 했던 것이다. 이 전투 이후 한국 북부지방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특히 홍범도는 적군인 일본군마저도 그를 ‘날으는 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갑산읍 전투 직후인 1월 중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다시 부대를 약간 개편하였다. 그 주요골자는 의병대의 소부대 단위 재편성과 지휘부내 참모진의 강화였다. 이러한 개편의 배경에는 당시의 몇 가지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즉 일제의 대규모 병력 동원에 의한 토벌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의병들이 많은 병력으로 한꺼번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기동하는 것은 작전상 불리하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이 각지에 분산되어 효과적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적의 배후와 허점을 불의에 기습하는 등 유격 전술을 전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정은 삼수·갑산 등지의 산골에서 많은 의병들이 집결하면 당장 식량문제의 해결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의병들의 보급문제 해결과 보다 효과적인 적정탐지 및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부대의 분산활동과 정보 및 보급문제 해결을 위한 참모기능의 강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와 차도선은 수백 명에 달하는 전체 의병을 4개 대오로 재편성, 그들의 지시하에 각지에서 분산하여 활동하게 했다. 비록 의병부대가 비교적 소규모로 분산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지시를 받고 각 대오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 각 대오에는 참모(參謀)·유사(遊士)라는 직책이 신설되어 의병들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돕게 되었다.
참모는 이무렵 전국 각 지방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부대의 조직에서 볼 수 있는 모사(謀士)와 같다. 그는 의병부대의 작전계획 수립과 그 집행을 맡아 의병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중·남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각 의병부대의 모사가 주로 유생들이어서 실질적 전투력의 확보에 미흡했던데 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참모(모사)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의병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이 맡았기 때문에 실제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사 역시 의병부대원 중에서 책임감이 강하고 동작이 민첩하며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 뽑혔다. 유사는 간혹 참빗장사, 물감·실장사 또는 담배행상 등으로 변장하고 부락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하였으며 의병들의 진격과 퇴각 시각의 결정 및 주둔, 휴식 장소의 물색 등을 담당했다.
이 때의 개편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기존의 군량도감을 정식편제에서는 폐지하고 의병부대가 장기간 일정한 장소에서 주둔할 경우에는 임시로 임명해서 식량조달을 책임지게 했다는 점이다. 그 대신에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전개하기 유리하도록 산간 곳곳의 민가에 비밀리에 병참부를 두어 식량 등을 저장·보급케 하였다.

(5) 운승리(雲承里) 전투


갑산 전투에서 의병부대의 기계(奇計)에 참패한 일제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고 말았으나 반대로 의병들의 활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일에 이르러서는 설유(說諭) 기타 보통의 방압(防壓) 수단은 그 효과가 없고 형세는 날을 따라 나쁘다.… 일반의 상황은 금후 쉽게 평온해 지지 않을 것 같으며 우편 전신취급소는 수비대 구내로 이전하기로 협의 결정 하였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비밀 보고문서에서-

갑산 전투 이후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웃의 단천(端川)군을 습격할 계획을 짰다. 단천에는 일진회원 출신 유문경(劉文卿)이 군수로 있었으므로 삼수·갑산·북청 등지에서 피난한 일진회원들이 많이 몰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진회원들이 사존이나 풍헌·촌장으로 활동하며 가렴주구에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수 유문경은 부패·탐학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단천에 살고 있던 일반 주민들 사이에는 의병부대가 습격해 올 지 모른다는 풍문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당국도 바짝 긴장해서 의병들의 동태 파악에 주목하고 있었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약 200명의 의병들은 일진회원 응징 계획에 따라 단천으로 진출하였다. 그 뒤 홍범도는 휘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친일파가 행세하고 있는 곳을 색출하여 처벌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단천군의 수하사(水下社) 운승리(雲承里)라는 마을이 그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운승리의 촌장은 일진회원인 최성학(崔成學)이었고 운승리 원충동(元忠洞)은 마을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국적 일진회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08년 1월 22일 단천의 친일 매국적을 처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이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막하의 한 부대 약 70명은 이날 운승리에 진격하여 촌장 최성학이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며 받은 일본돈 50원과 은화 60원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다. 또 이들은 원충동에 살고 있던 악질 일진회원 조정수(趙正洙) 등 4명을 처벌하기 위해 포박하였다. 의병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의 침략과 의병항쟁의 당위성을 설명하였으며 일제에 협력하는 자는 의병의 응징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의병들은 그 날밤 운승리에서 유숙한 뒤에 23일 아침 일진회원 4명을 호송코자 했다. 그런데 운승리에 있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23일 오전 9시경 일본군경 합동 약 30명의 ‘토벌대’가 불의에 내습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는 약 두 시간을 완강하게 저항하여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히며 싸웠으나 전황이 불리하여 결박한 일진회원 4명을 그대로 남겨둔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 때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운승리 전투 이후 철수해서 본대에 합세한 의병들과 함께 이들을 추격해 온 일제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며 분전했다. 즉 운승리에서 서남방으로 약 2km 떨어진 가농리(加農里) 모란촌(牡丹村) 부근의 고지에서 적을 불시에 기습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제 토벌대는 많은 손상을 보았지만 의병도 약 10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 전투로 큰 타격을 받고 의병대의 야습이 무서워서 모란촌에 숙박하지 못하고 다시 운승리로 도망하여 주둔할 정도로 의병의 위세가 적을 압도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단순한 항일투쟁만을 하지 않고 봉건적 수탈에 앞장선 부패 관리 등을 처벌하는 반봉건 투쟁도 동시에 벌였다는 사실이다. 즉 단천군은 친일 군수 유문경이 부임한 이래 같은 일진회원을 각급 관리로 임용하였기 때문에 부정이 마음대로 자행되어 군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홍범도 의병대는 이들의 부정과 매판적 행위를 응징하고 그들이 착복한 자금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병들이 단천을 습격한 뒤 군수 유문경이 1908년 4월경에 부정 혐의로 함경남도 재판소에 체포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특히 유문경이 군수 직책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단천 군민들이 앞으로는 일진회원을 군수로 임명치 말라는 대대적 청원을 정부 당국에 올렸던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6) 세곡(細谷) 전투


단천을 습격하여 일진회원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 해 2월 2일에는 북청의 금창(金昌)에서 약 200의 병력으로 일병과 접전하였고 2월 상순에는 휘하의 한 의병대가 혜산진 방면에서 일본 침략자 9명을 처단하였다. 또 2월 10일에는 장항리(獐項里) 북방에서 장진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혜산진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들을 소탕 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에는 북청군 거산(居山) 북쪽 현국사(玄國寺) 부근에서 일진회원 20명과 김성근(金性根) 외 수명의 순사를 생포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 21일 일본군 갑산 수비대 26명, 일제 경찰의 갑산 주재소 순사부장 등 4명의 경찰, 도합 30명의 군경 합동 토벌대는 의병을 감히 ‘토벌’하겠다고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갑산군 읍사 세동(細洞), 속칭 세골(청지평)로 찾아 들었다. 이에 홍범도가 거느리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는 부근의 고지에 매복하여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큰 손실을 입힌 뒤에 패주시켜 버렸다.
일제 경찰은 이 전투 직후인 2월 22일에 ‘적과 충돌하여 고전 후 격퇴시켰다’고 허위보고를 하였으나, 3월 5일의 비밀보고에서는 그들이 패퇴하였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기록하고 있다.

“21일 오전 4시 아베(阿部, 아배) 순사부장과 마루오(丸尾, 환미)·이(李)·고(高) 세 순사는 이리에(入江, 입강) 소위 이하 26명의 병원(兵員)과 같이 강행 정찰로 세동으로 향하였던 바 오전 6시 30분경 속칭 세곡(細谷: 청지평)이라고 하는 곳에서 약 200의 적과 충돌, 즉시 전개 교전하였다. 적은 가옥 및 견고한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사격을 하였다. 아군은 쌓인 눈 2∼3척, 특히 40∼50도의 경사진 산중턱에 의지하여 간신히 자못 힘썼으나 오전 11시경 휴대한 탄약이 모자라 적을 격퇴치 못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 빠진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하겠다. 본 전투 중 오전 9시 30분경 아베 순사부장은 오른쪽 대퇴가 골절되는 총상을 입었고 다른 병졸 2명의 부상자도 났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 대한 비밀보고에서-

위의 보고는 사실과 달리 일제 측의 피해가 축소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세곡 전투에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약 2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토벌대에게 많은 손상을 입혔고 소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무렵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는 서서히 의병활동의 전술전략과 투쟁의 방법론, 그리고 투쟁의 계속성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병들의 치열한 항쟁에 접한 일제가 무력진압의 방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보고 의병에 대한 회유와 기만이라는 여러 가지 술책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친일파와 일진회원을 동원시켜 의병들에 대한 온갖 유혹과 협박, 기만 그리고 소위 ‘귀순’ 공작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2월 초순에 일제는 차도선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는데, 차도선은 일제의 속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협적이며 동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일제의 이러한 기만적 술책에 관하여 차도선에게 누차 경고하였으며 단호한 항쟁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홍범도와 차도선은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세곡 전투의 일제보고서에서 다른 때와는 달리 ‘홍범도가 인솔하는 약 200명의 의병’과 교전하였다고 밝히고 있음에 비추어 이 때 홍범도는 차도선과 구별되는 단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 일제의 귀순공작에 관한 태도의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 2월까지도 포수 의병들의 항전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즉 2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단천 북방 약 70리 지점의 하농리(下農里)와 상농리(上農里)에서 사꾸마(佐久間, 좌구간) 특무조장이 거느리는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에는 약 300명의 군세를 유지하며 북청의 교별리(橋別里)에서 스기야마(杉山) 소좌 지휘하의 보병 1개 소대, 기병 1개 소대, 산포(山砲) 3문으로 무장한 대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 3월 11일에는 휘하의 한 의병부대가 혜산진 남방 30리 지점의 고거리(高巨里)에서 일본 경찰을 습격, 한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1) 일제의 의병 회유공작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에 함경도 지방에서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의병항쟁은 매우 치열하고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는 바야흐로 의병의 봉기가 절정에 달한 의병운동의 일대 고양기였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의병들의 투쟁은 전국연합 의병부대라고 할 수 있는 ‘13도 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 체제의 성립과 그에 의한 서울 진격 및 탈환작전의 전개였다.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격 및 탈환 작전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던 의병들이 한 장소에 집결하여 대부대를 형성하고 일제 통감부와 한국 주둔 일본군을 몰아내서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인영(李仁榮)을 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7년 12월경 경기도 양주에서 성립하였다. 이 때 전국 각 지방의 주요 의병장들을 망라한 부대가 결성되었으나 영남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호남지방에서 싸우고 있던 문태수(文泰洙) 의병부대는 그 지역의 일본군경과 투쟁하느라고 실제로 연합 의병부대에 가담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중부지역에서 일제와 항쟁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 의병부대가 조직되어 1908년 1월 말에서 5월 말까지 두 차례에 걸친 서울 진격작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작전은 한 때 거의 1만여 명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의병부대가 참가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여기에 참가한 주요 의병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영남) 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진동(해서) 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관북 지방의 의병장에 정봉준이 지명된 것은 그가 1905년부터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명도가 높았고 또한 이인영과 허위 등 유생 출신 의병장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은 13도 창의대진소 체제의 결성 논의가 있은 뒤에 의병항쟁에 나섰으므로 서울 근처까지 이들에 관한 소식이 전달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삼수·갑산 등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므로 중앙이나 남부지방까지 함경도의 포수 의병들에 관한 상세한 소식이 알려지기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한 실제로 이들 의병부대가 전국 연합조직에 포함된다고 해도 수천리 되는 먼 거리까지 갈 수 있었는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또 홍범도가 함경도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는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말려들어 투항한 뒤인 1908년 4∼5월부터였기 때문에 전국 연합 의병부대의 결성에 홍범도 의병장이 빠져있다고 해서 그의 명성에 손색이 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8년 1월과 동년 4월 말에서 5월 말에 걸쳐 두 차례의 서울 탈환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허위가 인솔하는 선봉대가 일본군과 동대문 밖에서 싸운 뒤에 본격적 작전을 전개하기 직전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별세를 이유로 귀가함으로써 1차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의병부대들은 1908년 4∼5월에 다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며 서울의 외곽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이었다. 이때 의병항쟁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함경도 지역에서 투쟁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정세는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식량과 탄약의 결핍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인 1908년 2∼3월경은 13도 창의 대진소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이 일단 실패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시적으로 침체해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일제는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까지 거국적으로 의병봉기가 전개되자 온갖 술책을 다 동원하여 이를 탄압하려 했다. 즉 한편으로는 무력진압 작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관리들을 표면에 내세워 기만적이며 야비한 회유 및 귀순 투항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무력 진압의 구체적인 책동을 보면 야만적인 초토화 전술로서 의병과 농민을 분리시키는 한편 일련의 교란 작전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포위하여 교통을 차단하고 반복하여 의병을 추격, 의병으로 하여금 기진맥진하여 투쟁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투항 귀순 공작으로는 ‘의병은 귀순하여 해산하라’는 순종 황제의 칙명을 내세워 선유사(宣諭使)를 각 도에 파견하였고 각 군에서도 각종 유화술책을 총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가 불가능하고 오히려 일본군경의 희생만 늘어가는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던 일본군 북부 수비관구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정세에 부응하여 대응전략을 변경해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회유하는 선무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일제의 회유공작은 1908년 2월 초순부터 본격화하였다. 즉 대한제국의 관리들인 갑산 군수와 장진 군수 등을 앞세워 치밀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고, 특히 2월 5일 일본군 북청 수비대의 신풍리 분견소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는 부근의 각 사(면)장들을 시켜서 직접 차도선 등의 의병들에게 ‘귀순’을 교섭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때 일제는 신사적인 귀순공작만을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인한 항전의지를 굳히고 있던 다수의 의병들을 무력화시키는 ‘효과적’ 방책으로서 처·자식 등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하는 수법, 그리고 귀순하는 의병장에게는 고위 관직을 주며 보통 의병들은 집에 와서 무사히 살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지식정도에 따라서 지방관청의 하급 관리로 등용한다는 등의 유혹을 자행하였다. 또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는 매수공작 등 다양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유화적 술책에 상당수의 의지가 굳지 못한 의병들은 동요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홍범도의 동지들인 차도선과 태양욱(太陽郁) 등은 일본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차도선 등은 황제가 보증하는 일본군의 회유책이 단지 의병과 일본군이 ‘상화(相和)’하는 것, 즉 일종의 휴전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인 한국 관리들은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상화’하는 조약을 체결하자고 차도선·홍범도·태양욱 등에게 북청군 낙생사(樂生社) 사장을 보내서 교섭하게 했다. 당시 의병부대들은 탄약 및 식량의 결핍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으므로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부족하고 뜻이 강하지 못한 의병 가운데는 이 기회에 투항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홍범도는 이러한 경향을 우려하면서 일본군과의 협상을 단호하게 반대하였지만 차도선과 태양욱은 의병항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서 일본군과 타협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차도선은 의병의 사기가 저하되고 얼마 있지 않으면 춘궁기가 도래하여 지방민들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질 형편에 처하여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해서 잠시 일제와 휴전한다면 후일 다시 기회를 보아 재봉기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차도선은 1908년 2월 12일 일단 협상할 뜻이 있음을 일본군에게 알렸으나 일본군의 진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다. 그러다가 그해 3월 6일 동료 의병장 양혁진(梁爀鎭)과 함께 자기 휘하 의병 25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본군 수비 분견대가 있는 북청군 신풍리(新豊里)에서 약 10리 떨어진 구신풍리에 가서 주둔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신풍리에서 의병 측에서는 차도선·양혁진·고운학(高云鶴: 중대장)·이성택(李聖澤: 서기) 외에 4명의 의병장이 참가하고 한국관청 및 일본군 측으로는 갑산 군수와 낙생사장, 일본군 분견대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 미야자끼(宮崎, 궁기) 군의관, 통역 등이 참석하여 회담이 열렸다.
일본군 측은 종전에 보낸 서신에서 요구한 대로 ‘귀순’할 의병의 연명부(連名簿)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차도선은 “전원 귀순에 대해서는 확실히 조약을 하고자 하므로 2∼3일 체재하여 수속을 명료히 하려한다. 그러므로 오늘밤 중 연명부를 만들어 제출하기로 하겠다.”고 말했다.
차도선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의 정세에 순응하여 부대를 소부대로 개편한 뒤에 막하의 의병들이 몇 개의 단위부대로 분산되어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집결시키는 데에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또 홍범도와 같이 일본군과 협상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병장도 있어서 신풍리로 올 때 연명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도선은 결국 그의 부하 의병 537명의 명단을 제출하였고 일본군 측은 537매의 ‘가면죄증(假免罪證)’을 주면서 귀순시에 정규의 ‘귀순증’을 발급해 주어 귀순증을 소지한 의병은 처벌하지 않고 본래의 직업에 종사할 것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의병이 갖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는 귀순증을 받고 1개월 간의 격납(格納) 유예기간을 준 뒤에 의병들이 약속한 장소의 민가에 무기를 집어 넣어 두기로 합의했다. 차도선은 이러한 협상이 이루어지자 홍범도와 태양욱도 ‘귀순’하라고 권유하기로 하고 3월 9일 신풍리를 떠나 의병의 본대로 돌아갔다.
일본군의 간교한 술책에 빠진 차도선은 홍범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양욱과 함께 부하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이미 일본군과 약속한 대로 3월 17일 신풍리에 있는 일본군에 ‘귀순’하였다. 일본군은 이들이 ‘귀순’하자 무장해제 기간 1개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즉시 전 의병들을 위협하여 무기를 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태양욱을 총살하고 차도선·이성택·김덕순(金德順) 등은 홍범도를 ‘귀순’시키는 데에 쓸 미끼로서 체포하여 구속해 버렸다. 차도선과 태양욱 등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었다. 이날 의병들이 일본군에 빼앗긴 무기는 화승총이 136정, 일본군에게서 노획했던 총으로서 30년식 총이 3정, 단발총이 9정, 10연발 총이 1정으로 도합 150자루나 되었다.
차도선 등 상당수의 의병들이 이 시기에 일제와 협상에 임하게 된 배경은 의병투쟁을 계속하기에 너무 어려운 현실적 어려움 이외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일제 측의 집요하고도 기만적인 포섭 공작, 예컨대 의병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협박과 회유, 또는 금전의 살포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핵심을 이루는 포수들의 의병진영 투신 동기가 유생이 주축이 된 의병진영보다 강고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포수 의병들의 봉기 동기가 반외세적 입장에 서서 일제를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의식과 애국심에서 발로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자위권 수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요소가 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은 일제 측이 강압적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짓밟을 때는 보수적 유림 출신의 지도자가 이끄는 의병부대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협박이나 금품제공, 혹은 좋은 조건의 제시 등 기만적인 회유책으로 나올 때는 적전에서 쉽게 분열될 수 있다는 약점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구성원 들은 대부분이 산포수와 농민·광산 노동자 등 평민 계층으로 이루어져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조하는 주자학적 전통의 학문적 소양이나 깊은 지식도 없었고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의해 자신들의 직접적 생계가 위협받게 되자 이에 크게 반발해서 과감히 일본군과의 항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가 무력탄압의 수단 대신 유화책을 쓰게 되자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동요하는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차도선 등의 의병들이 이 때 단순히 일제에 투항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 측의 다음과 같은 자료로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갑산·삼수 부근 폭도의 수괴(首魁) 차도선·태양욱 및 그 부하 약 200을 각종 수단을 다하여 3월 17일 신풍리에 초치하고 귀순의 성의에서 나온 것인가 아닌가를 취조한 바, 신풍리 분견대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의 열심한 귀순 권유의 목적으로 우선 차도선과 친선을 맺고 누차 왕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귀순의 성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일본군대와 상화(相和)하는 것으로 알고 무기를 쉽게 납부할 의도가 없고 부하들 (역시) 일본군과 화약(和約)하고 한국 인민 특히 일진회원을 참살, 혹은 금전·양식을 약탈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날 차도선 및 태양욱에게 무기의 납부에 대하여 말로 잘 타일러서 이를 압수하기로 했다. 이때 태양욱은 저항하므로 참살하고 차도선은 그를 이용하여 동료 홍범도 등에게 귀순을 권고시킬 목적으로 당분간 신풍리에 억류키로 하였다. 이후 홍범도가 신풍리 부근에 이르른다면 그 정황에 따라 해당 지점 부근에 출장하여 임기의 처치를 취하고자 한다.”
-일본군 제13사단 참모부의 1908년 4월 6일자 한국 내부(內部)에 대한 통보에서

우리는 위 문서를 통하여 차도선 등이 일본군을 접촉한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가 홍범도·차도선 등을 속임수로서 대응하여 처치하겠다는 야비한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2) 홍범도 가족의 수난


일본군은 그 뒤 홍범도를 ‘귀순’시키기 위하여 1908년 3월 20일경 후치령 아래 노은리 인필골에 있던 처가를 습격하여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두 자식들을 붙잡아서 억류해놓고 홍범도를 위협하며 투쟁을 중단하고 투항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공작에는 일진회원으로서 일본군 북청 수비구 산하의 제3순사 대장인 임재덕(林在德), 그리고 종전에 구한국군 참령(參領)으로서 북청 진위대의 대장을 역임한 뒤 일본군 휘하에 들어가 경시(警視) 직책을 맡고 있던 김원흥(金元興), 기타 밀정 최정옥 등이 주요 책임자로 참여하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범도(홍범도)의 처자를 불법으로 구속하여 홍범도를 위협하고 유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였던 사실은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이 4월 30일 임재덕에게 보낸 다음의 명령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목하 구류중인 차도선의 일군(一群) 김기학(金基學)·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의 처자 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 것을 허용한다. 단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함부로 석방하면 안된다.”

이에 따라 일제의 앞잡이인 임재덕이 거느리는 순사대는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남은 홍범도 등 의병들이 잠복해 있는 갑산군 동인사(同仁社) 부근의 창평리(蒼坪里)라는 마을에 일본군과 함께 들어와 주둔하였다. 그 뒤 이들은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한때 절에 있어서 글을 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그녀를 협박하여 남편에게 펀지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임재덕은 이씨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범도(홍범도) 모자를 어육(魚肉)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이씨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요지의 펀지를 쓰도록 윽박질렀다.

“당신이 일본 천황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에게 공작 벼슬을 주려고 하니 항복하십시오. 항복하여 공작 벼슬 하게 되면 나도 좋겠고 당신 자식도 귀한 사람의 자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씨는 억지로 강요하는 주구의 말을 완강히 거부하며 버티었다. 이씨는 말했다.

“나 같은 계집이나 아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 뿐인데, 내가 글을 쓴다고 해도 영웅호걸인 내 남편은 나 같은 아녀자의 말을 곧이 듣지 않는다. 너희놈들은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절대로 글을 맡지 않는다.”

그러자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이씨의 발가락 사이에 불을 달군 심지를 끼우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반죽음을 당하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친일 매국적과 일본군은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등을 갑산읍으로 후송시키고 마치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쓴 것처럼 해서 편지 한통을 작성했다. 그러고는 한인 순사로 하여금 그 편지를 홍범도 부대가 머물고 있는 용문동 산간에 전달케 하였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그 편지를 보고 일제에 귀순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분하여 펀지를 가져왔던 주구를 처단하여 버렸다.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보냈던 사람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 편지가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의병진영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이 간 뒤에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홍범도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억류되고 있었다. 일제와 그 주구들은 1908년 5월 초 며칠 사이에 여덟 명을 파견해서 여덟 통의 편지를 홍범도 의병진영에 보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들이 의병들에게 잡혔거나 피살된 것으로 단정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흉계를 짜기에 이르렀다. 범도(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을 동원하여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임재덕과 김원흥, 그리고 일본군 측에서 양순(홍양순)을 범도(홍범도)에게 보내려고 했던 데는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즉 이들이 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하는 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하였지만 무작정 한정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양순(홍양순)이를 보내서 추후 그들의 방침을 결정하는데 지표로 삼고자 했다. 이들은 양순(홍양순)이가 일단 가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대신에 그가 가져간 편지는 틀림없이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 양순(홍양순)의 어머니와 동생을 구속하고 있으므로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가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리라고 보았다. 일본군과 친일 매국적들은 만약에 양순(홍양순)이 범도(홍범도)에게 가서 소식이 없으면 그것은 양순(홍양순)이 홍범도의 의진에 가담한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제는 범도(홍범도)가 귀순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무력진압의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양순(홍양순)은 편지를 갖고 아버지에게 가기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일제의 협박을 못이겨 결국은 아버지가 있는 용문동으로 향하였다. 특히 순사대장 임재덕은

“너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또 이 편지가 네 아버지가 있는 군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방해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네가 가면 너의 아버지가 반가워 할 것이다. 그리고 네게서 편지가 나오면 네 아버지가 탄복할 것이다.”

하고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양순(홍양순)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 홍범도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범도(홍범도)는 잡혀 갔다던 큰 아들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고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과 그 앞잡이인 주구들이 쉽게 양순(홍양순)이를 풀어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도(홍범도)의 그런 짐작은 적중했다. 특히 범도(홍범도)는 양순(홍양순)이 가져온 편지를 읽고 대노하였다. 자기에게 귀순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떻게 의병장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뻔뻔스럽고 태연하게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양순을 크게 꾸짖었다.

“이놈아! 네가 전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만 네가 일본감옥에 3∼4삭을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자고 하는 놈이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 하겠다!”

하고는 평소에 갖고 다니던 소총으로 양순(홍양순)이를 향해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 때 범도(홍범도)의 옆에 있던 부관이 붙잡아서 양순(홍양순)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귀의 일부가 총에 맞아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나중에 양순(홍양순)이는 어머니와 동생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일본군과 임재덕 등의 위협에 못이겨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여 겨우 범도(홍범도)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단호하고도 결연한 항쟁의지는 다른 부하 의병들에게 전해져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양순(홍양순)은 그 뒤 범도(홍범도)의 의병진영에 가담하여 다시 초급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홍범도는 일본군과 한국 관변의 온갖 유혹과 협박, 기만적 계략과 탄압을 철저히 배격하고 끈질기게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차도선과 태양욱 등이 일본군의 회유책에 속아서 일본군에 일시적으로 투항하게 된 뒤 함경도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포수의병 진영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실제로 차도선 등이 3월 중순에 일본군과 ‘상화’ 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을 때 17명의 의병장과 약 2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도 무장해제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 갑산읍으로 끌려갔던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는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대가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숨지고 말았다. 나중에 이씨를 고문치사케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던 김원흥 등은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잡혀 처단되지만 이씨의 옥중투쟁과 순국은 의병장의 아내다운 의연한 모습과 장렬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3) 의병부대의 재조직


차도선 등 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속아서 피체되거나 피살되고 혹은 해산하여 귀가해 버린 뒤 함경도 지방의 의병투쟁은 실로 막대한 타격을 받아 험난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에 대한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다.
홍범도는 봉기 이후 1908년 3월 중순까지 차도선 등과 같이 공동으로 싸웠지만 이제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며 부대를 재편성, 항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사이에 삼수·갑산·무산·북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담하지 않은 산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참가시켰다. 또한 의병 부대들을 소부대로 나누어 함경도 산간의 각 마을에 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 받아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4월 중에는 다시 의병대의 규모가 400여 명으로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주목되는 사실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자체 무기조달 노력의 일환으로 스스로 무기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즉 갑산의 동점(銅店)에서 나는 구리를 재료로 해서 화승총 탄환은 물론 일부 신식무기의 탄환을 제작하기도 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구식 대포도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박원희의 증언에 의함). 하지만 그러한 자체 조달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진행되지도 못하였다.
1908년 4월 12일 홍범도 의병부대는 오족리(吾足里)에서 일제의 순사대 10여 명과 교전하는 것을 기점으로 재차 활기찬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에는 삼수 서방 지점에서 약 100명의 병력으로 일제 헌병대와 접전하여 큰 손실을 입혔다. 같은 날 다른 휘하 의병대가 함흥을 기습했는데, 이들은 일본군 포병대의 숙소를 방화하여 2개동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제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함흥까지 대담무쌍하게 기습한 작전이었다는 측면에서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함흥 일대에 홍범도 의병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져갔고 반대로 일제는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4월 27일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평안북도 강계의 평남진(平南鎭)으로 진출하여 강계수비대의 일병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5월 2일에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일병 3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소총 30정, 군도 두 자루, 탄환 300개, 권총 네 자루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4) 일제 주구배의 응징


잠시 침체에 빠져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는 국경지대인 삼수·갑산 일대는 물론 함흥지방까지 출몰하며 다시금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중좌는 홍범도 의병대의 눈부신 활동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전히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는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비구 산하의 제3순사대장 임재덕 등이 활동하는 곳으로 경시 김원흥 등 11명을 추가로 파견하여 홍범도의 귀순공작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무렵 임재덕은 범도(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을 보내서 홍범도를 귀순시키려고 했으나 양순(홍양순)이 돌아오지 않아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흥이가 새로 상관의 지시를 받고 와서 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다시 추진하려 하자 여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김원흥은 11명의 일·한인(일본인·한국인) 군경을 이끌고 임재덕 등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김원흥은 5월 1일 북청을 출발하여 후치령을 넘고 황수원(黃水院) 신풍리를 거쳐 4일에는 임재덕과 일본군 등이 머물고 있는 창평리에 도착하였다. 그 후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약 300명의 홍범도 의병부대가 창평리 서북 약 30리 지점의 도하리(都下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뒤 이들은 도하리의 더덕장 거리에 있는 김치강의 집에 와서 주둔하고 부근의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싸움할 것 같으면 싸움하고 귀순하기 원하거든 3시간 내에 계약을 체결하자.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사포로 너희 군대를 모조리 없애버리겠다!”

이 소식이 의병부대에 전해지자 온 부대는 자못 떠들썩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군은 위력 있는 최신식 무기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의병부대는 대부분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탄환이 모자랐고 식량도 넉넉지 않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기계(奇計)로서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작전계획을 썼다. 이에 따라 그는 5월 4일에 의병 가운데서 가장 사격을 잘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 70여 명을 선발하여 도하리 근처의 더덕장 거리 흙다리(土橋)에 매복시켰다. 그리고는 자기가 귀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여 변장하고 잠시 이름을 바꾼 뒤 김치강의 매제 집에 가서 김원흥에게 직접 그 편지를 전달했다.
김원흥은 홍범도가 이름을 숨겨서 변장하고 찾아온 줄도 모르고 그 편지를 보고는 씩 웃으면서 “너의 소원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여주마!”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일본군과 파수보는 경찰 15명을 김치강의 집에 남겨 놓고 일본인 및 한인 순사 20여 명을 인솔하여 범도(홍범도)가 유인하는 대로 흙다리목에 도착하였다. 김원흥 등이 의병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소에 이르자 총소리가 콩볶듯하며 사방에서 모진 광풍이 얼어난 듯 의병들의 기습적이며 집중적인 공격이 재빠르게 단행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작전으로 의병들은 김원흥 등 6명을 사로잡고 이들을 따라온 일본인 경찰과 한인 보조원 등 5∼6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범도(홍범도)와 가까운 노은촌 출신 의병 고응렬(高應烈)이 전사했고 조인각이 부상당하였다.
홍범도는 김원흥을 체포한 후 더덕장 거리의 여러 사람과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꾸짖었다.

“김원흥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이나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 산간에서 감자 농사하여 먹고 지내는 것이 도리이거늘 7조약(한일신협약, 1907)·9조약에 참여하여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처한다. 조선 사람들아 들어보아라! 당신들이나 나나 다 조선 사람인데 무슨 이유로 나 같은 의병들을 해치고자 하느냐? 일본놈은 남의 강토를 제 강토로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하자! 김원흥·임재덕 너희 같은 역적놈은 네 아비·어미 다 너와 같이 씨를 없애야 되겠다.”

범도(홍범도)는 김원흥을 의병투쟁의 제물로 삼아 공개 처형함으로써 온 동네 사람들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알리고 일제의 침략에 앞장서는 부일배들은 살아날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알렸다. 김원흥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될 최소한의 양심을 유지하기는커녕 일제의 주구로 변신하여 겁도 없이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다가 도리어 철석같이 강인한 투쟁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던 범도(홍범도)에게 마침내 응징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귀순 권고의 목적으로 김원흥 등 한국인 주구들을 파견하였던 일본군 수비대에서는 이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홍범도 의병부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결과적으로 의병들의 기세만을 크게 올려준 셈이 되었으므로 매우 당황하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 북청 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토벌’에 광분하며 관구 휘하의 부대를 총출동시켜 의병대의 진압에 필사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5) 의병부대의 개편과 분산 활동


홍범도 의병부대가 재기하여 위세를 되찾고 있을 무렵인 5월 7일, 일제에 속아서 일시적으로 ‘귀순’하였던 차도선 의병장이 갑산 헌병분견소에 잡혀있다가 구사일생으로 그곳을 탈출하여 다시 의병 진영에 가담하여 왔다. 이는 매우 고무적 현상이었다. 이 사건은 의병들에게 일본군과 대한제국의 매판적 관료들이 떠들어 댔던 귀순공작의 기만성과 야만성을 올바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도선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범도(홍범도)와 의병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으며 다시 적과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이 왔을 때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차도선이 진심으로 의병투쟁에 다시 나서려고 했을 때 과거의 신의와 공적을 생각하고 적극 환영하고 지원하였다. 그 결과 차도선은 다시금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차도선의 의병진영 가담은 홍범도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높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차도선의 활동은 예전만큼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때의 실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차도선은 가끔 홍범도 의병대와 같이 싸우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독자적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홍범도는 5월 16일 500여 명의 대부대를 인솔하여 장진의 산정개(山亭開)에서 갑산으로 이동하는 장진분견소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2일에는 200여 명의 휘하 지대가 갑산읍 서방에서 갑산수비대와 교전하였다. 또 그 달 28일에는 갑산군 괘탁리(掛卓里)에서 15기의 적 기병대와 접전하여 전멸시키고 말 다섯 필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도 3명이 전사했다.
이 무렵 일본군 각 부대의 출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5월 19일에는 아오또 대위 이하 45명, 21일에는 가따오까(片岡) 중위 이하 45명이 북청을 출발하여 후치령을 거쳐 신풍리로 갔고 또 23일에는 미끼(三木, 삼목)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하사 이하 10명과 기병 장교 이하 12기의 기병, 그리고 쓰나시마(莎島, 사도) 포병대가 역시 신풍리로 출동하였다. 같은 날 미야우찌(宮內, 궁내) 중위 이하 45명은 통파령(通坡嶺)을 거쳐 신풍리로 향하였는데, 이들은 앞서 출발한 각대와 신풍리에서 합류하여 미끼 소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들 부대와는 별도로 이와다(岩田, 암전) 중위 이하 30명은 이원·단천 방면으로 출동해서 미끼 소좌가 이끄는 토벌대와 서로 협동케 하였다.
이러한 약 250명 내외의 일본군 보·포·기병 합동의 정예 토벌대 이외에 북청 수비구 산하의 순사대까지 합치면 거의 300명을 넘는 대규모 군경 연합 토벌대가 1908년 5월 하순부터 북청과 갑산·삼수·혜산진 등지의 여러 곳에서 홍범도가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포위하고 끈질기게 파상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의병 토벌’을 내세웠지만 가는 곳마다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고한 양민에게까지 피해를 주었고 조금이라도 의병들에게 협조하는 징후가 있으면 무차별적인 초토화 전술을 구사하여 온 마을을 불태우는 등 산간 지방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소위 일제의 ‘비민(匪民)분리’ 정책의 결과 홍범도 의병대는 직접적 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필수적인 주민들의 협력을 받기가 어려워지고 각종 군수물자가 결핍하여 전에 겪지 못했던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홍범도는 5월 하순 갑산에 있는 동안 휘하의 김충렬(金忠烈)·조화여 두 사람에게 2만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러시아령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있는 이범윤(李範允)에게 파견,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그것은 갈수록 탄약과 무기가 부족하여 의병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홍범도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일부 동지와 부하들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이 너무 힘들어서 해산하고 싶어하는 회의에 빠지자, 불굴의 투지로서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도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요지의 신념을 역설하여 부하들을 설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아래의 자료를 통하여 더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같은 의병진에 있던 원석택(元錫澤)이 홍범도에게 원망하여 말하기를 ‘최초에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자네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런 방침 계책도 없이 다만 가련한 인민을 모아 아무 이익도 없고 쓸데없이 다수 동지를 사상시킬 뿐으로 점차 우리의 세력은 실추하고 이에 반해 일병(日兵)은 점점 강세를 더하니 이제야말로 우리는 살아서 거처가 없고 죽어서 묻힐 곳이 없다. 차라리 일찌감치 전대(全隊)를 해산하여 개인의 생계를 꾀하는 수밖에 길이 없을 것이다.’ 운운하니
범도(홍범도)가 말하기를 ‘옛날 임진의 변(變)에서도 의병이란 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드디어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금일의 사정은 우리 세력이 날로 불리한 것 같으나 앞서 정일환(鄭日煥)·임재춘(林在春) 등을 보내어 청지(淸地: 淸國)에서 탄약 보급의 길을 강구하고 있으며 또 다른 동지도 서로 만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얼마 안가 이들 사람과 삼수에서 회합하여 뒤의 계획을 정하고 장래의 방침을 정할 것이다.’ 운운하고 출발하였다.”
-1908년 11월 탄약구입차 중국으로 갔던 변해룡(邊海龍)이 검거된 뒤에 진술한 공술서에서

위의 기록에는 원석택의 범도(홍범도)에 대한 약간의 비관적인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변해룡이 일제에 체포된 다음 진술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 홍범도의 의병투쟁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원흥 등이 범도(홍범도)의 위계(僞計)에 의해 섬멸된 뒤 일제는 범도(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단념하고 이제 철저한 ‘무력토벌’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범도와 참모들의 끈질긴 항전의지, 그리고 일제 침략자와 매판·봉건적 관료들의 수탈에 항거하고 있던 하층 민중의 적극적 성원에 힘입어 홍범도 의병부대는 여전히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1908년 4월 말에 500여 명이었고, 5월 중순에는 650∼700명으로 증강되었다. 이렇게 막강한 의병규모를 갖춘 홍범도는 300여 명 대병력의 일제 토벌대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가 처음에 봉기할 때는 포계의 우두머리로서 연로한 임창근과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 등을 우대하여 부독(副督)이라는 직책으로 행세하였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범도(홍범도)는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과감히 항쟁하였다.
괘탁리(홍범도에 의하면 능구패택이) 전투에서 일본군 기병부대를 무찌른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말에 장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 진영을 새로이 개편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 때 장진 연화산(높이 2,355 미터)의 병풍바위골에서 직접 인솔하던 의병 이외에도 함경남도 지방에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활동하고 있던 군소 의병부대를 소집하여 통합, 자기 휘하에 재편성하였다. 병풍바위골 의병대 모임에는 함경도 남부의 고원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동섭(尹東涉) 부대와 영흥·덕원·안변 등지에서 싸우고 있던 노희태(盧熙泰) 부대가 참가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참가하여 700∼800의 많은 숫자를 헤아렸다. 이 병풍바위골은 범도(홍범도)가 해외로 건너가기 전의 상당기간 동안 홍범도 의병부대의 거점 및 병참부가 되어 의병들의 비밀스런 회합장소가 되었다.
홍범도는 이제 명실공히 함경도 지방의 의병대장으로서 여러 의병장과 의병부대를 지휘하거나 혹은 같이 연합하여 일제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다. 연화산에 집결된 의병부대를 그는 11명의 중대장과 33명의 소대장 편제로 재편성하였다. 이 때 범도(홍범도)는 다음과 같이 각 중대에 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장 원창복[일명 元基豊(원기풍)]은 장진의 청산령(높이 2,084미터)을 지키면서 아침·저녁으로 (일본군의) 장진 군대가 삼수로 넘어오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했다가 비밀리에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시오!
제2중대장 최학선(崔學善)은 응덕령(鷹德嶺)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일본)놈과 앞에서 시킨대로 하소!
제3중대장 박용락[다른 자료에는 林用洛(임용락)으로 나옴]은 안장령을 지키고 함흥·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4중대장 조병용은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삼수?), 단천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5중대장 유기윤[일제 측 자료에는 劉基云(유기운)]은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앞에서 지시한 대로) 그대로 좇아 하시오!
제6중대장 최창의는 (북청의) 후치령을 지키고 앞서와 같이 시행하시오!
제7중대장 송상봉(宋相鳳)은 (장진의) 부걸령(부전령: 높이 1,445미터)을 지키되 너는 꼭 내가 명으로 시키노라! 남시령을 지키고 길주로, 갑산 허리로 드나드는 놈과 싸움을 하되 남을 10명 죽이지 말고(죽이기보다는) 내 군사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너를 극력 주선으로 부탁하노라!
제8중대장은 삼수(군의) 신파(신갈파진) 목재(가)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아 넘기시오!
제9중대장은 (북청의) 통팔령(높이 1,445미터)을 지키고 홍원·북청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 계약한 대로 꼭 그대로만 하면 우리의 성공이 잘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재편성한 의병부대의 진용과 주된 작전구역 및 활동 방침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각지에 분산시켜 활동케한 9개 중대의 배치를 보면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의 중요한 길목이나 험준한 요새지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8중대가 압록강 방면을 경계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가 목재창을 설치하고 압록강을 통해 목재를 약탈해 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 나라의 이권이 외세에 침탈당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경제적 침략도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지에 흩어져서 활동케한 병력 이외의 나머지 의병들은 주력부대로서 범도(홍범도)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사방으로 옮겨다니며 일본군과 접전하고 경우에 따라 위에서 열거한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일개 중대에는 보통 2∼3개 소대가 있었고 한 소대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40∼50명의 의병으로 구성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때 홍범도의 아들인 양순(홍양순)이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나란히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각 중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력부대와 수시로 연계를 취하며 일정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경도 남부의 개마고원 각지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에 의병들을 분산배치하여 유격전을 벌이도록 한 것은 의병부대의 병력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집결되어 있으면 일본군의 추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또 산골에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홍범도가 직접 이끌었던 의병대의 조직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의병장 밑에 부의병장·검사·유사(遊士)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단위는 분대·소대·중대의 체계로 조직되었으며 독립부대로 대포령(大砲領)이 있었다. 특히 각지의 중요한 곳에 흩어져 활동하는데 효과적인 연락과 일정한 지휘체계의 확립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일은 유사대라는 특수한 조직을 따로 두어 각 의병중대의 감독과 작전에 따른 연락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분산과 주요 험로를 거점으로 한 의병의 재배치는 일본군 토벌대의 공세에 부응한 자구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장기적 항전인 지구전으로 전환하게 되는 준비단계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이제 의병부대는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하며 기동하여 게릴라식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의병부대를 개편 배치한 홍범도는 중대장 등 주요 간부에게는 임명장을 수여하여 엄격한 명령 수행을 당부하였고 또 의병장 및 의병들로 하여금 의병의 선서문을 낭독케 하여 의병으로서의 짜임새 있는 격식을 갖추었다. 이후 범도(홍범도)는 강택희[姜宅熙: 일명 姜澤基(강택기)]·원석택(元錫澤)·정도익(鄭道翼) 등의 본부 참모진과 직속 의병을 거느리고 장진 부근이 관할구역인 다른 중대의 의병부대와 함께 장진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때 연합의병대의 군세는 약 350명이었다. 나머지 약 300∼400명의 의병대는 원기풍(元基豊)·최학선(崔學善) 등의 지휘를 받게 하여 북청 등 각 방면의 지정된 작전구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홍범도가 일본군의 기만전술과 회유공작에 빠져 귀순하기는커녕 대규모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곳곳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의병들을 규합하며 새로운 작전을 개시하게 되자, 일본군은 크게 낭패하여 북부수비관구와 동부수비관구 병력을 총동원하며 6월과 7월에 걸쳐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한 ‘대토벌’을 전개하게 되었다.

(6) 두꺼비 바위(蟾岩), 쇠점거리(金昌) 전투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30일경 장진군 능골 어귀에서 일본군의 한 부대가 지나고 있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전투는 부대의 개편 직후에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는 점에서 의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중요한 전투였다. 홍범도 의병대는 6월 2일에 역시 장진의 다랏치(達阿峙) 금광 앞의 두꺼비 윗골(蟾岩)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16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 4∼5명이 전사했다. 또 같은 날 약 70명에 달하는 휘하의 한 의병대는 함흥 동북 부전령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범도(홍범도)는 두꺼비골 전투 직후 장진군으로 진출하였던 자기 휘하의 의병부대를 다시 2개 부대로 나누었다. 즉 자신은 의병 약 180명을 이끌고 북청군 안산(安山) 방면으로 향하였고 나머지 약 160명은 송상봉·강택희 등의 지휘 하에 장진 북방으로 가게 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던 것이다.
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의병대와 유기운이 이끄는 소부대 연합의 150여 의병들은 두꺼비골 전투 이후 함흥 초리장→동고촌 신성리→홍원군 영동을 거쳐 6월 10일에는 북청 통패장골의 쇠점거리(金昌)로 진출하였다. 이곳에는 일본군 기병·보병 연합부대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여기에서 적군 30여 명과 격전하여 13명을 사살하고 닭 50마리, 일본 과자 열 상자, 백미 30말 등 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부장 최경률(崔京律) 등 의병 3명이 전사했으나 특이한 사실은 일본군 수비대장의 아들을 생포했다는 점이다.

(7) 군자금 모집작전


의병들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대규모 일본군경의 추격을 받으며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가 식량 문제였고 다음으로는 탄약과 무기의 부족이었다. 이런 형편 가운데 군자금마저 제대로 지원되지 않고 있었으니 어찌 그 어려움을 말이나 글로써 다 밝힐 수 있으랴!
홍범도는 그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군자금을 모집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는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군자금을 징발하는 일에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가 군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주로 악질적 친일파와 일진회원, 부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악덕 지주나 상인과 같은 부자, 그리고 권력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관리 등을 습격하여 그들로부터 자금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5월 하순에 부하 두 사람을 연해주에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했다. 하지만 의병들이 계속해서 싸우려면 많은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6월 초에 함흥과 흥원 지방을 지나며 친일파와 부패한 관리를 습격하여 응징하고 군자금을 징발할 계획을 세웠다.
6월 6일경 홍범도는 함흥군 초리장(草里場) 유채골에 사는 악질 부자의 집을 공략하여 일본돈 28,900엔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같은 군의 동고촌 신성리(新成里) 친일파 박면장의 집을 기습하였다. 박면장은 일진회원이었고 그의 맏아들이 일본군 수비대의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의병 200여 명을 인솔하며 그날 밤 박면장 아들이 이끌고 용 일본군과 한국인 보조원 등 수백 명의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적을 거의 섬멸하여 버렸다. 이 전투에서 적은 1/4이 살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전투의 와중에서 박면장의 가족은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6월 8일경에는 함흥군에 인접해 있는 홍원군 영동으로 진격하였다. 의병부대는 그곳의 지산당에 주둔시키고 범도(홍범도)는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친일 주구배 박원성의 집에 접근하였다. 집 근처에서 범도(홍범도)는 변장한 뒤에 홀로서 대담하게 박원성의 집에 들어갔다. 박원성은 의병들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일본군 헌병대에 연락, 헌병 4명을 급료를 주어가며 파수꾼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문간에서 헌병이 심문하자 주위에 사는 백성으로 볼 일이 있어 왔다고 대답했다. 그가 안에 들어가니 함흥 좌수(座首) 이경택과 홍원 군수 홍가, 그리고 박원성 등 악질 부일배 세 놈이 다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범도(홍범도)가 들어가자 그들이 물었다.
“너는 웬 놈이냐?”
그러자 범도(홍범도)는 재빨리 품속에서 권총을 끄집어 내며 말했다.
“나는 산간에서 나무 밑을 큰 집 삼고 지내는 홍범도입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너희가 모르겠느냐? 빨리 나의 (명령한) 조처를 빨리 조처하시오! 이번 내 일이 바로 되면 좋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방안에 주검(시체)이 몇이 될 것을 모르겠소! 빨리 조처하시오!”
그러자 박원성은 깜짝 놀라면서도 한참 있다가 자기 처와 상의하여 일본돈 3만엔을 내다 주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돈을 받아 전대에 집어 넣고 박원성을 앞에 세운 뒤 그 집을 빠져나와 싹근다리까지 와서 박원성을 놓아 주었다.
위의 사례는 홍범도의 군자금 모집을 설명해 주는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이 같은 예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홍범도의 일지에 따르면 그해 7월 중순에도 위와 비슷한 지역에서 군자금을 압수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즉 홍원군의 전진포(前津浦)에 있는 부패 관리 홍원 군수를 기습하여 일본돈 37,000엔을 압수하였고 함흥군의 한 주사(主事)를 공략하여 역시 3만엔 가량의 자금을 끌어냈던 것이다.
홍범도가 가장 많은 액수의 자금을 획득한 것은 7월 초에 장진에 있는 달아치 금광을 공격하여 일군 수비대 6명을 처단하고 금괴를 다량 빼앗은 경우였다.
홍범도의 이러한 군자금 획득 투쟁은 종전에 그의 투쟁이 주로 반일(반외세)적 성격만을 지녔던 것으로 해석해 왔던 기존의 연구시각에 의문을 제기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홍범도 의병부대 투쟁의 성격은 반봉건·계급투쟁적 성격을 띠는 요소도 있다고 하는 점이다.

(8) 노희태 의병부대와의 연합 전투와 아들 양순의 전사


홍범도는 1908년 6월 12일 함경남도 안변·덕원·영흥 일대에서 활약하던 노희태(盧熙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취하게 되었다. 노희태는 원래 진위대의 하사였는데 군대 해산 이후 1907년 말부터 약 5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주로 함경남도의 남부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42∼3세 가량이어서 범도(홍범도)보다 3∼4세 연상이었고 기골이 장대한 용사였다. 그의 의병부대도 1908년 중반에는 탄약이 떨어지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혀 다른 의병들과의 연대가 절실히 요청되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범도가 누차 서신을 보내 같이 싸우자고 했을 때 선뜻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의 의병대는 앞서의 의병 연합회의 때 거리가 멀고 또 일본군과 싸우느라고 여유가 없어 장진 방면으로 오지 못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 무렵 정평 지방으로 남하하였고 노희태 의병대는 북상하였기 때문에 양 부대가 합류할 수 있었다. 양 부대가 합치자 군세는 약 300명으로 증가하였다. 홍·노(홍범도·노희태) 연합 의병대는 이날 정평의 한대골이라는 곳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을 치러 적 수십 명을 살상하여 패주시켜 버렸다. 이 때 의병도 4명이 죽고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같은 날 예하 40여 명의 한 의병대가 강계에서 장진의 몌물리(袂物里) 분견소 일병과 교전하였다.
6월 16일(음력 5월 18일) 홍범도 의진에서 막하 중대장으로 활동하던 아들 양순(홍양순)은 의병 20여 명을 데리고 정평의 바배기라는 곳에서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적은 영흥 경찰서 분서 순사와 일본군 수비대 연합의 10명 내지 20여 명이었다. 의병들은 분전하였다. 이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답게 싸우느라고 앞장서서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불행히도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다른 의병 한사람도 전사하였다.
양순(홍양순)과 같이 싸웠던 의병들로부터 아들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범도(홍범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더욱이 양순(홍양순)의 어머니도 5월 중순경 갑산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아들마저 죽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의병대장으로서 범도(홍범도)는 자기의 슬픈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수백 명 의병들의 대장이요 최고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는 양순(홍양순)의 죽음을 자기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막하 의병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다친 다른 의병들 가족의 마음도 자기와 같으리라!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많은 의병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비로소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린 양순(홍양순)이였지만 그동안 장하게도 어른들과 똑같이 고생하며 의병투쟁에 나섰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늘 그를 엄하게만 대했고 아버지로서의 정은 별로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몹시도 후회되었다. 범도(홍범도)는 뒷날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담담하게 회고하였다.

“정평 바맥이에서 50명 일병과 싸움하여 101명 잃고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고 거차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 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었다….”

위에서 홍범도는 16일의 정평 전투에서 의병이 패전한 것 같이 회고하고 있으나 일제 측 기록을 찾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뒷받침된다. 특히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편찬한『조선폭도 토벌지』를 보면 양순(홍양순)이 주도 했던 전투는 의병 2명만이 전사한 것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정평 전투 직후 홍범도는 노희태 군사를 데리고 함흥의 명태골을 거쳐 천불산에 있는 개심사(開心寺) 절로 들어가 탄약이 다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도 없는 노희태 의진으로 하여금 그대로 거기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의병들을 인솔하여 장진군 남사의 실령 어구에서 일병과 접전하여 16명을 사살하고 소총 16정, 탄환 여섯 상자를 노획하여 다시 천불산으로 돌아왔다. 범도(홍범도)는 빼앗은 탄약 가운데 2,400발을 노희태 의병부대에 주어서 활동하게 하였다. 노희태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홍범도 자기 의병들도 탄약과 무기가 모자라 쩔쩔 매는데 어찌하여 자기 부대에게도 실탄을 준단 말인가?

(9) 갑산 간평 전투


홍범도는 6월 중∼하순경 의병부대를 이끌고 갑산 상남사의 숯치기골이란 깊은 산골에 들어가 3일간을 머물렀는데, 계속해서 비가 퍼부어 큰 고생을 하였다. 그 뒤 홍범도는 극심한 식량난을 견딜 수가 없어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갑산의 간평이란 곳으로 내려왔다.
그 곳 사람들은 진심으로 의병들을 환영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가난한 산골 사람들이어서 좋은 음식을 차려서 의병들을 대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평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던 주식인 묵은 귀밀과 감자 등의 식량을 집집마다 조금씩 걷어서 밥을 지어 성의껏 의병들에게 제공하였다. 여러 날을 굶은 의병들은 그 성의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탈이었다. 그 동안의 피로와 굶주림이 겹친데다가 귀밀밥을 먹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의병들이 취하여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이때 길주 방면에서 의병부대를 추적하여 간평으로 넘어오던 4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가 의병들이 있는 것을 알고 그 집결지를 향하여 기습을 가해왔다. 이들이 의병의 숙영지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의 신속한 제보로 의병들을 급히 깨워서 전투대열을 정비하기는 하였으나 평소에 능동적으로 기동하며 적을 무찌르던 홍범도 의병부대다운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의병들의 다수는 크게 당황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의병대는 고전하였으나 토벌대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200여 명의 병력이었으므로 결국은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며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으나 의병은 8명이나 죽었고 부상자는 더 많았다. 이 전투는 방심한 끝에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았고 전과 비교하여 많은 피해를 받았다는 점에서 홍범도 의병부대의 패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홍범도가 기병 후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큰 손실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간평 전투에서 의병들을 깨우고 진두에서 지휘하며 싸워 의병장다운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지만 참으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앞으로는 절대로 이 같은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자기를 믿고 따른 의병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가족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간평 전투 이후 홍범도는 유사(遊士)를 원석택과 정도익 등에게 보내 그들로 하여금 의병 약 20명을 이끌고 북청의 성대(星垈) 지방으로 가서 포수들을 의병으로 모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30∼40명의 포수들이 홍범도 의병부대에 가담하게 되어 그동안의 전투와 기동으로 손실이 있었던 병력의 보충과 의병들의 사기진작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이렇게 일본군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산간지방에서 비호같이 빠른 유격전과 재빠른 이동으로 포위망을 교묘히 벗어나면서 적에 큰 타격을 주고 크게 활약하자 함경도 지방에서는 홍범도 의병대의 명성이 매우 높아진 반면, 일본군의 위신은 여지없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 함경도 산골지방에는 홍범도 의병대의 눈부신 활약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패배를 풍자하며 저주하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널리 퍼져서 불리웠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에헹야 에헹야 에행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괴택이 원성택 중대장님은
산고개 싸움에서 승리하였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 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도상리 김치강 김도감님은
군량도감으로 당선됐다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 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이 노래에는 후치령 전투 이후 계속된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한 성원과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야유와 비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10)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연합 시도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동은 1908년 중반, 즉 7∼8월경부터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의 의병에 대한 끈질긴 ‘토벌’과 ‘귀순공작’의 병행, 그리고 의병을 지원하는 주민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정책 등이 상당히 주효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로 인해 의병 진영은 때로는 활동 방침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여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겼으며 또 주민들과의 협조관계가 끊어져서 보급문제에 큰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는 함경도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볼 때도 의병항전이 일시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때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이 1908년 2월에 원주에서 일본군에게 피살되었고 동년 6월에는 호남지방에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장이 포로가 되었으며, 임진강 유역에서 투쟁하던 허위(許蔿) 의병장도 같은 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이 7월에 충청북도 작성에서 체포되었으며 평민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돌석(申乭石) 의병장도 그 해 12월에 경북 영덕에서 순국하고 말았던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함경도 지방의 의병전투를 거의 주도하면서 맹활약을 하였지만 1908년 5∼6월 경부터 심각한 군수물자 부족과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래서 홍범도는 5월 하순부터 이미 부하를 연해주에 보내서 이범윤 등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관한 소식이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준비하고 있던 안중근(安重根)에게 전해졌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사살한 열사로 유명하거니와 그는 1879년 생으로 홍범도보다는 11세 아래였다. 안중근은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1907년 겨울 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최재형(崔在亨)과 이범윤 등의 지원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1908년 4월 초순에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서 섬멸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안중근은 홍범도 의병부대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휘하 의병들을 데리고 국내로 진입하여 홍범도 의진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계속해서 남진하여 서울까지 진격할 결심이었다. 이리하여 안중근은 연해주 동포들의 성원에 힘입어 엄인섭(嚴仁燮) 등 약 100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1908년 7월 6일경 재차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과 종성·회령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세 차례의 큰 접전을 벌였다. 안중근 부대는 첫 전투에서는 일본 수비대를 궤멸시키고 10여 명의 일본 군인과 상인을 생포하기까지 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중근이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로잡은 일본병사들을 석방해 준 결과 의병대의 위치가 탄로되어 일군의 기습을 받은 끝에 결국은 참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의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였지만 일본군 석방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의병들이 많아 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끝내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군의 추격은 급박하였다. 안중근은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나, 홍범도 의병부대와의 연합 항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해 보지도 못한 채 7월 21일경 몇 명의 동지들을 이끌고 참담한 심정으로 연해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중근 의병부대가 일본군에 패전함으로써 홍범도 의병대와의 공동작전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러시아 측의 우수한 무기와 풍부한 탄약을 지원받으리라는 기대도 무산되고 말았다. 얼마 뒤에 홍범도는 안중근 의병부대의 분전과 패전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탄약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이제 자력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며 의병항전을 계속하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1) 휘하 의병부대의 활약


한편 홍범도와 연계를 가지며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싸우고 있던 다른 휘하 의병들의 활약상은 어떠하였는가?
홍범도와 갈라져서 160여 명을 거느리고 장진 방면으로 진출하였던 송상봉과 강택희는 다시 자기 막하의 의병대를 이끌고 각자 분담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의병들을 소대단위로 구분해서 스스로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싸우며 각지에서 정보를 수집해 오도록 했다. 홍범도로부터 장진 지역에서 싸우도록 명령을 받았던 송상봉은 자기 휘하의 중대규모 의병 세력을 다시 각지로 분산시켜서 싸우게 했다.
송상봉 중대에 속하는 한 부대 20여명의 의병들은 6월 4일경 장진 연화산 남쪽의 상남사 대흥장(大興庄)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의 일진회 회원 7명을 처단하였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양식과 돈을 압수하였다. 특히 이때 처단된 원홍겸(元弘謙)은 당시 56세였는데 일진회원으로서 친일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아들인 원기룡(元基龍)이 일제의 원산경찰서 소속 혜산진분서 순사였다는 것을 보아도 확실하다.
또 홍범도 휘하의 한 부대는 6월 8일 새벽 4시경부터 같은 군의 신흥장(新興庄)과 운수장(雲水庄)을 습격하여 일진회원을 응징하였으며 의병들을 추격해 온 일본군 헌병대를 따돌리며 유유히 평안북도 영원군 방면으로 잠적해 버렸다. 이 부대는 같은 달 10일 새벽 5시경에는 운수리에서 동북으로 약 30리 떨어진 창평리(昌坪里)에 나타나서 일진회 회원의 가옥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며 의병들을 추격해 온 함흥헌병분대 몌물리(袂物里) 분견소 헌병들을 농락하며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진군 일대에서 홍범도 의병부대의 신출귀몰하는 눈부신 활약으로 함경남도 지방의 매국노 일진회원들은 거의 모두 다른 지방 대도시로 도주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곳에서 일진회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또한 홍범도 의병부대의 이동칠(李東七)이 지휘하는 한 부대는 6월 27일 갑산 북쪽의 화하동(樺下洞)에 출현하여 일본군 아이요이(相良, 상량) 토벌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약 80여 명으로 구성된 다른 한 부대는 대담하게 북청군의 양화장(陽化場)에 진출해서 한국 침략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던 일본 상인들을 습격, 이마오(今尾謙吉, 금미겸결)라는 일본 상인을 처단해 버렸다. 양화장은 동해에 임한 평야지대로서 원산·함흥 지방과 청진·경성 등 함경북도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산간에서만 투쟁하고 있던 의병대가 이렇게 해안의 일본인 집결지를 기습한 것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특히 양화장의 일본 상인들을 습격한 사실은 즉각 일제 측의 통감부 통감과 조선주둔군 사령관, 그리고 한국의 내부대신과 정부의 각 부처 차관들에게 전보로 보고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일본군 북청수비대와 함경남도 북정경찰분서의 경찰이 의병들을 이틀 동안이나 추적하였지만 그들은 의병의 그림자도 찾아보지 못하고 29일에 북청으로 돌아왔다. 양화장을 습격한 의병부대는 28일 중산사(中山社) 장동(長洞)에서 숙박한 다음 29일 오전 6시에 양가사(良家社) 안곡(安谷)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그 날 오후 5∼6시경에는 북청읍의 바로 뒤에 있는 높이 800미터의 동덕산(東德山) 꼭대기에서 동쪽 능선에 걸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과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일군 중위 노나까(野中, 야중) 등 2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의병대가 동덕산에 출현하였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급거 그곳으로 출동했다. 이 때 홍범도 부대의 한 지대는 100여 명의 군세였고 정상 부근의 높은 곳에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일군 토벌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동덕산에서 약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의병들은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한 뒤에 탄약이 고갈되어 동덕산 북방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1907년 11월 후치령 봉기 이후부터 1908년 10월경까지 약 1년 동안 홍범도 의병부대가 일제 측과 수행한 의병전투는 무려 60여 회를 헤아렸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37회의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지은이가 새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일진회원 처단과 같은 친일파 처벌, 그리고 군자금 모집작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악질 부호나 관리 응징 등의 사례를 추가한다면 그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 활동약도(1907. 11~1908. 10)



(12) 연해주 망명과 재기도모


홍범도는 1908년 6월말 다시 장진 연화산에서 막하 의병들을 집합시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는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의병 가족을 지원하는 한편, 외국에서 탄약과 무기를 구입하는 문제가 주로 의논되었다. 이후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의병들이 모집하거나 강제로 압수한 군자금을 의병 가족들에게 150원씩 분배하였고 나머지 돈으로는 간도나 연해주로 부하를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치거나 병에 걸리고 혹은 연로하여 의병활동에 부적당한 일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가 의병활동시 모집한 군자금의 일부를 전사하거나 부상한 의병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병투쟁의 성격을 활빈당(活貧黨) 등의 활동과 같은 유형, 즉 부의 균등한 재분배 사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연합이 실패한 뒤에도 직접·간접으로 많은 의병들을 지휘하며 개마고원 일대에서 줄기차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 의병활동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공격이 더욱 치열해지는 반면에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은 오히려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8월 초순에 임재춘(林在春)·정일환(鄭日煥)·변해룡(邊海龍) 등에게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간도에 있는 김성서(金成瑞)에게서 군수물자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재춘과 정일환은 자금을 다른데 탕진해 버렸고 변해룡은 홍원에서 9월 14일 일제에 체포됨으로써 범도(홍범도)의 목적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5월 하순에 연해주로 보냈던 김충렬과 조화여도 일제의 첩자로 오해를 받아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의병들은 총알이 모자라서 점차 적과의 전투를 회피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소수의 부대로써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하였지만…
홍범도는 이러한 난관에 부딪혀 의병 지도자로서 무척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야 의병들의 손실을 줄이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하고…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상당수의 의병들이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안일한 생활에 대한 동경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도망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범도(홍범도)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 8월 하순경 그는 함흥군 천불산에서 의병들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후일에 기회를 보아 다시 일제와 싸우기로 하였다. 또 일부 의지가 강한 의병들은 평안도 일대로 진출하여 싸우도록 하였다. 자신은 의병 190여 명을 이끌고 잠시 간도로 건너가 직접 무기를 조달하며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이 때 의병들이 휴대한 무장은 소총 70여 정에 탄약 1만 1천발 가량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의병들이 해산하면서 남긴 무장을 천불산에 비밀리에 숨겨 놓았다. 그 수량은 총기류 44정과 탄약 1만발 가량이었고 기타 서류와 의복이 약간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잠시 간도로 진출하였으나 활동이 여의치 못하여 한두 달 뒤에 다시 의병들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끝내 국내에서 의병항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1908년 11월 2일경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사정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일화(일본돈) 2만원을 정하여 놓고 외국으로 갈 사람을 뽑는데 북청 사는 조화여·김충렬 그 동무들이 러시아 연추에 주둔하고 있는 이 관리(이범윤을 말함)에게 보내면 비똔약(뇌관과 화약)을 몇 십 밀리온 치라도 내올 수 있다고 하길래…보냈더니 이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정탐꾼으로 몰아 가두고…소식이 영 무소식하니 알 수 없어 약철(화약과 총알)이 없어 일본군과 싸움도 못하고 일본군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번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어 중국땅 통화(通化)로 10월 9일(음력)에 압록강을 건너…”

홍범도는 4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삼수군의 신갈파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통화로 건너갔다. 11월 중순에는 길림(吉林)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는 영변 출신으로서 중국 길림성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길성익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며칠 머물 수 있었다. 길림에서 범도(홍범도)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김창옥, 열두 살 먹은 아들 용환(홍용환), 의병참모 권감찰 등 3명만 남기고 나머지 의병들은 후일의 재기를 약속하고 국내로 돌아가게 했다.
그 후 홍범도 등 일행 4명은 유수현(楡樹縣) 등 북만주 지방을 굶주리며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12월 말경 만주 홍더허재(橫道河子)의 한인촌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6일을 묵은 뒤 일행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기차를 타고 1909년 1월 초에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領: 우수리스크)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일행은 또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6일을 머문 뒤에 12월 하순 연해주 민족운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 등 일행 4명은 당시 동포들이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부르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간 있으며 그곳의 실정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온 이유는 그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의도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연해주 지역의 상황과 관련하여 어려움에 부딪혔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1908년 7월 국내로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던 안중근 의병부대가 패전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의병들의 무력항쟁을 무모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특히 최재형과 같은 민족운동계의 유력 인사는 노골적으로 의병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과 산업진흥운동 등의 점진적 방법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측도 의병들의 항전을 저지하려 하였다. 실제로 250여 명의 러시아 군대가 1909년 1월 1일 연추에 있는 안중근 의병부대의 연락사무소에 들어와 모든 총기와 탄약을 압수하고 해산을 명령하였고 러시아 영토 안에서의 무장투쟁 준비를 저지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1909년 경의 연해주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홍범도가 구상한 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홍범도는 1909년 2월 초순 연추에 있는 이범윤을 찾아갔다. 그것은 그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의논하고 가능하다면 그의 원조를 받아볼 생각에서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투쟁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이범윤은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범도(홍범도)는 이범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상당히 실망하게 되었다.註4)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를 거쳤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6월에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의 수청(水淸: 노우니콜라에프카)으로 가서 군자금 및 의병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이 무렵 동의회(同義會)라는 민족운동 단체의 젊은 동지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대규모 국내 진격작전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동의회의 모임에 참석해서 국내 진입작전의 요령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홍범도는 동의회 회원인 안중근을 연추에서 만났다. 안중근은 홍범도와 같이 적극적 무장투쟁론자였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의병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교포사회의 지원이 끊겨서 조직적 의병항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의회에 참가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동지들과 함께 맹세하였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조직적 투쟁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그 활로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개인적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안중근은 후일 일제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1909년 홍범도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홍범도를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라고 술회하였다.
범도(홍범도)는 1909년 10월에는 연해주 보리스읍의 자피거우라는 곳에 머물며 군자금과 의병 모집에 열중하였다. 그가 연해주에 온 지 거의 10개월이 되었지만 의병투쟁을 위한 재기사업은 지지부진하였다. 그에 따라 범도(홍범도)는 내심 무척 초조하였고 아직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동지들이 걱정되었다. 동지들과 헤어질 때 틀림없이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적을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의 재기도모가 이렇게 순조롭지 못할 때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돌파구가 안중근의 의거로 마련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처단은 연해주 동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1909년 가을에 연해주 추풍(秋風: 코르사코프가) 허커우에 와서 별다른 성과없이 국내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소왕령에 있던 애국청년 최원세가 홍범도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국내로 귀환을 서두르는 범도(홍범도)에게 기회를 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가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아 보겠다고 말했다.
범도(홍범도)는 그 말을 듣고 그곳에서 기다렸다. 그랬더니 그 해 겨울에 최원세는 연해주 각처로 돌아다니며 무려 4,980루블의 자금을 마련해 오는 것이 아닌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던 범도(홍범도)는 감격했다. 그 돈으로 범도(홍범도)는 군인 모집과 무기의 구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10년 4월 초순(42세) 때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추풍을 출발, 국내로 향했다. 거의 1년 반 만에 낯익으며 그리운 강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재기한 홍범도 의병대는 1910년 4월 중순에 간도를 거쳐 함경북도 무산에 진입하였다. 거기에서 홍범도 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치렀으나 처음 의병으로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또 병력이 소수여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달 하순에는 갑산에서 오는 일군과 교전한 결과 적 40여 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일군 소총 40정, 권총 4정, 신호용 나팔 두개, 수류탄 14개, 군량 세바리, 탄환 7천발 등을 전리품으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 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0년 5월 초순 함경북도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적과 수차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은 의병들 다수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지리멸렬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마침내 홍범도는 재기의 꿈을 잠시 유보한 채 5월 중순에 백두산 건너편 중국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또 다시 러시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대부분의 책에서 1910년 3월에 홍범도가 비로소 만주 장백현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수정 되어야 할 것이다.

4. 홍범도 의병부대의 특징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은 한국 의병운동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채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병부대는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고양기’ 단계에 들어갔을 때 봉기한 다른 수많은 의병부대와 비교해 볼 때 그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러한 특징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의병부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사냥꾼으로 구성된 포수 의병부대였다. 물론 이 부대에는 농민과 광산 노동자·해산된 군인·일부 유생과 수공업자 등도 참가하고 있었지만 주력은 어디까지나 백두산 연맥과 개마고원 일대에서 산짐승을 사냥하며 생활하던 산포수들이었던 것이다. 포수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정확한 사격을 하였으며 그들이 사냥하던 함경도 산악지대의 지리와 지형을 손바닥 들여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어 적과의 전투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함경도 지방의 험준한 산맥에서는 일본 정규군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남한 지방의 다른 의병부대들이 주로 농민으로 이루어진 사실과 비교하면 분명 다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홍범도 의진은 기동력이 매우 빠른 부대였다. 평소에 포수들은 맹수를 사냥하던 일에 단련되어 강인한 정신과 튼튼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매우 기민하게 활동했으며 ‘빠른 행군’과 ‘비호같은 공격’, ‘재빠른 철수’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적을 공격하고 재빨리 빠지는 유격전과 산악전, 기동전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치고 빠지는 이러한 전법으로 훨씬 유리한 조건 속에서 싸우는 일본 군경을 무찌를 수 있었다.
홍범도 의병진이 거의 1년에 걸쳐 6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기동력의 보유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은 이 의병대가 보인 놀라운 기동력에 대한 적군의 찬탄이었던 것이다.
셋째, 이 의병진은 의병장과 병사의 절대 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진 평민 의병부대였다. 포수들은 원래 ‘양인(良人)신분’이었고, 대장 홍범도도 그들과 같은 신분이었다. 부하 의병장들도 거의 포수출신으로서 역시 양인신분이었다.
이렇게 이 의병부대가 하나의 동질적인 평민신분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우선 의병장과 병사 사이에, 그리고 병사들 내부에 끈끈한 통합과 단결을 유지케 하여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양반 유생이 주도한 남부지방의 일부 의병부대에서 신분적 갈등이 발생하여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던 사례와 비교하면 좋은 대조가 된다 하겠다.
넷째, 홍범도 의병부대는 민중과 밀착되고 그들의 절대적 지지와 성원을 받은 의진이었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유격전·기동전을 벌이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함경도 지방의 민중이 홍범도 의병부대를 적극 성원하였던 배경에는 홍범도를 비롯한 의병들의 주민에 대한 배려와 보호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외래 침략자에 대한 투쟁이라는 활동 외에도 주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부패 관리나 악질적 친일파, 부호 등을 처벌하는 의병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홍범도가 의병 전투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군자금으로 모집한 돈을 나누어 준 사례도 있듯이 홍범도가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였던 저간의 활동이 민중의 지지를 가능케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군은 지방 민중들이 홍범도 의진을 위해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하여 의병들에게 알리고 있는 사실을 여러 차례 상부에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의 제3순사대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병사로 가장하여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았더니 주민들이 그들을 매우 환영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당대(當隊)가 폭도(의병: 필자)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민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으로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량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渡邊正勝, 파변정승)의 보고에서

홍범도 의병부대가 막강한 일본군을 도처에서 연파하며 활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지방 민중의 이러한 지지와 성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강한 실질적 전투력’을 가진 무장세력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 의진은 국내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 군경은 ‘토벌’의 어려움을 여러 번 토로하곤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당시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진영 가운데 최대 규모의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대규모 의병부대의 하나로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대체로 다른 지역의 의병부대는 적을 기습할 때는 이기고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는 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홍범도 의진은 기습전은 물론 불시에 적을 만나서 싸우는 조우전(遭遇戰)에도 능했고 스스로 기동하며 대규모 공격전과 매복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적에게 심대한 손상을 주었다. 바로 이 점이 명분을 중시하고 실질적 전투력은 약했던 일부 양반 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과 크게 다른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홍범도의 망명 및 재기 경로(1908. 11~1911. 3)


제4장 독립군의 형성과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1. 만주·연해주에서의 역량축적과 무장투쟁 준비


홍범도가 연해주 추풍에서 국내로 출발하기 직전 국내에서 활동하다 여의치 못하여 6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해 있던 선배 의병장 류인석은 범도(홍범도)의 즉결적 무력투쟁 방략을 만류하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었다. 즉 그는 1910년 3월 9일과 4월 3일의 편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는 국내의 어려운 조건 하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우니 후일을 기다려 실력을 좀 더 기른 뒤에 투쟁하여야 한다는 비판과 충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류인석은 3월 9일(음력 1월 28일)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충고하였다.

“…그대의 의(義)가 사람들을 감동시켜 도처에서 (독립의) 바람을 일으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의) 기(氣)를 북돋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강함은 삼국의 조조(曹操)와 같을 뿐 아니라 우리 앞에는 제갈량(공명)도 없고 또 (삼국의 촉에 있었던) 5호대장(五虎大將)도 없습니다. 우리의 홍여천(홍범도: 필자)을 비록 5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 나머지 4호가 없으니 적을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대저 지(智)로써 싸울망정 힘(力)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힘으로 싸우면 우리의 힘이 저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비록 늙었으나 약간의 소견이 있습니다. 원컨대 우리 여천(홍범도)께서는 깊이 생각을 더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범도(홍범도)는 류인석의 이러한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현재 역량이 되는 대로 적과 생사를 건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요,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그 신념에 따라 그는 함경북도로 진공하였다. 그러나 자기와 같이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던 많은 의병동지들과 연락이 잘 안되는 데다가 일제가 한국을 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하기 직전 국경지방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여 엄중히 경계하였으므로 몇 차례의 전투 후에 패전하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 무력투쟁 방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럴만한 역량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에 당분간은 연해주에서 후일을 대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한가지로서 범도(홍범도)는 선배 의병장 류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1910년 6월 21일에 연해주 지역의 의병조직을 망라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 조직의 창건을 주도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여기에서 지휘부인 도총소(都總所)의 의원(議員)으로 선출되었다. 이 조직의 도총재(都總裁)는 류인석이 추대되었고 이범윤이 창의총재(影義總裁)를 맡았다. 이 조직에는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우병렬(禹炳烈)이 도총소의 참모로 임명되었고 국내에서 신민회를 주도하던 안창호·이갑(李甲)도 같은 부서의 의원을 맡게 되었다. 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李相卨)은 외교대원(外交大員)이 되었다.
이 조직의 주요 구성원을 볼 때 의병운동과는 다른 노선을 걸어왔던 계몽운동 계열의 ‘신지식인’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이는 결국 효율적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양 계열의 인사들이 종래의 독립운동 방법론과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또 13도의군은 연해주에 난립해 있던 의병조직을 통합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장을 포용하여 장차 국내 조직도 설치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활동이 크게 기대되는 것이었다.
그 해 7월 28일 13도의군의 영도자인 류인석과 이상설은 연명하여 이미 퇴위한 고종에게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영도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운동조직은 그 해 9월 이후 일제의 압력을 받은 극동 러시아 당국에서 한인 민족운동을 탄압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얼마 뒤에 해산되고 말았다.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사회에는 8월 29·30일에 ‘한일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 공포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다음날 새벽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또 이 소식에 격분한 청년 50명은 24일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고 다음날에는 무려 천여 명의 한인들이 역시 일본인 거주지 습격에 동참하여 일제의 책동을 규탄하였다. 성명회는 8월 26일 한국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반대 성명서를 만들어 각국 정부에 발송, 일제의 한국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홍범도는 이 성명서에 서명한 8,624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해 8월 29일 자기의 조국이 일본에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되었다는 소식을 얼마 뒤에 전해 들었다. 그 사실을 그는 슬픔과 함께 격한 분노로 맞이하였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일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그토록 끈질기게 싸웠건만 보람도 없이 조국은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 해 9월 초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일본인 습격사건을 구실로 극동 러시아 당국에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도록 강력히 항의하였다. 또한 러·일(러시아·일본) 간에 체결된 ‘형사범인의 상호 인도협약’을 내세워 주동인물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굴복한 극동 러시아 당국은 류인석·이범윤·홍범도 등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르쿠츠크로의 추방령을 내려 한인 민족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범도(홍범도)는 당분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부근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인 민족운동은 한 때 큰 타격을 받았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약 1~2년간 연해주의 야꾸지아 올레크민스크 금광 등을 왕래하며 그곳에서 일하기도 하고 한인 광산노동자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1911년 3월 중순 부하 의병장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30여 명의 의병들을 지휘케 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박영신은 두만강을 건너 함북 경원의 세천동(細川洞) 부근에서 일군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연해주 각지를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범도(홍범도)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1년 5월 20일에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勸業會)를 창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부근 한인들에게 독립 투쟁의 교육을 장려하고 ‘동지의 붉은 피’로써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며 1911년 3월에 연해주 지방의 유력인사 이종호(李鍾浩)에게 군자금 10만 루블의 원조를 청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종호는 범도(홍범도)와 독립투쟁의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단체적 사업’을 일으켜 그 목적을 달성하기로 합의하여 권업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권업회의 발기인으로는 이종호 외에도 부하 의병장 강택희(姜宅熙)와 엄인섭 등이 참여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연해주의 유지 최재형(崔才亨)이었고 부회장에는 홍범도였다. 이 조직은 1911년 12월 17일경 개편되는데, 이 때 수총재에 류인석이 추대되고 홍범도는 경찰부장(일부 자료에는 사찰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권업회는 겉으로는 일제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산업진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기관이었고 러시아 극동 총독 곤닷찌도 그 내용을 알면서도 그대로 허가해 주었다. 권업회는 일제와 야합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1914년 중반에 해산될 때까지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주도하며 교육·실업장려·무장투쟁 준비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일제와의 결전에 대비한 ‘광복군’ 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권업회는 이를 위해 1913∼4년 만주 나자구(羅子溝, 나재거우)에 사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군자금 비축활동의 하나로서 블라디보스토크와 간도 훈춘에 각각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홍범도는 권업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해주 지방에서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는 그러한 활동의 하나로서 권업회의 창립 후인 1911년 11월 15일 뜻을 같이하는 20명의 동지들과 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강제로 일본에 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된 뒤에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각종 비밀조직을 만들어 서로를 격려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맹세하곤 하였다. 21의형제 동맹도 바로 서로를 돕고 약해지는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비밀조직의 하나였다.
범도(홍범도)는 권업회의 연론(演論)부장 이범석(李範錫), 자기 휘하 경찰부원 유상돈(劉相燉)과 엄인섭(嚴仁燮) 등이 포함된 동지 20명과 함께 아래와 같은 맹세를 하고 서로의 결속을 다짐하였다.

“때는 신해(辛亥)년 11월 15일, 의형제 21인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형제의 의를 맺는다. 우리들 21인은 모두 지성과 열혈과 정의를 좋아하는 남자로서, 이에 결합하여 서약한다. 여기에 바른 말로 부끄러움 없음은 여러 신에게도 명백하다. 대저 우리 21형제는 서로 제휴하고 서로 급한 어려움을 구하여, 모두 함께 업신여김을 막고 격한 탁류를 맑게하며, 퇴폐한 풍속을 바로 잡고 완고함을 고치며 약한 것을 바로 세워, 이로써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중용을 지키고 맹세하는 말을 들어 마음의 폐(肺)에 새겨 맹세한다. 천지와 같은 대부모 있어 이에 강림하여 감동한다. 혹 누설하는 자 있어 신(神)으로부터 수치를 받는 자 있으면 신이 이를 죽인다.”

범도(홍범도)는 사나이 대장부로서 의형제를 맺은 것이 가슴 뿌듯한 보람이었다. 그는 당시 만 43세였는데 21인 가운데 이범석·최태(崔泰) 다음 세번째로 연장자였고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1886년 생으로 만 25세인 김태벽(金泰璧)이었다. 위와 같이 하늘에 철석같이 맹서하고 스물 한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건만 이 중 한 사람이었던 엄인섭은 나중에 일제의 밀정으로 변절하고 마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무렵 홍범도는 각종 민족운동 단체에 관련을 맺으면서도 자기의 할 일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1912년 가을에는 동지들을 이끌고 ‘노동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연해주 지방의 철도공사를 하며 노임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하고 있었다. 한편 그는 또 1913년 9∼10월경에는 권업회의 ‘남도파’와 ‘서북파’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동휘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 서로의 단결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12년 2월경 홍범도가 만주의 장백현에 가서 평안도의 저명한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만나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을 의논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홍범도는 1912∼3년 사이 약 1년 동안 연해주 추풍의 다아재골에서 농사에 종사하다가 1913년부터 1915년 7월 중순까지는 연해주 북쪽의 니콜라에프스크 어장과 꾸르바트 금광·비얀꼬 금광·얀드리스크 금광 등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한편, 그곳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동안 그는 4,500여 루블을 저축했고 그 자금으로 소총 17정과 탄약을 구입하였다.
1914년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제휴하여 동맹국이 되었다. 그 후 러시아는 일본과 공동방위 체제를 확립하고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 등 모든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효과적인 재기준비가 어렵다고 판단하며 마침내 북만주 밀산현 봉밀산으로 진출하였다. 거기에는 권업회의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던 김성무(金成武)가 권업회에서 설치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15년 7월 하순부터 1917년 11월까지 그 농장에서 농사와 사냥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위한 칼을 갈고 있었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교육 및 문화·계몽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자신은 비록 못 배웠지만 어린이와 청년들은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린 아이들은 직접 업고, 좀 큰 학생들은 손을 잡고, 다 큰 학생들은 앞에 세우고 학교로 갔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두루 시찰하였던 박은식(朴殷植)은 홍범도 등과 같은 옛날 의병 용사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나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참으로 대단한 의병들의 기개와 결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독립군의 형성과 러시아 적군(赤軍)과의 공동투쟁


1917년 11월 초 러시아에서는 사회민주 노동당 좌파의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파(다수파란 뜻)가 노동자들을 이끌고 제정(帝政) 러시아에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폭발하였다. 흔히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불리우는 이 혁명은 세계 각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특히 1920∼30년대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등 구미 열강의 식민지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식민지 민족에게는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혁명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은 1905∼7년 동안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과 연관된 것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10월 혁명은 대체로 내란이 종식되고 국제간섭군이 철수한 뒤 신경제정책이 시작되는 1921년 3월경을 끝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연해주 지역의 한인 민족운동도 러시아 혁명이 전개되는 3∼4년간은 이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범도는 이제 막 혁명이 시작되고 있던 1917년 11월 만주 밀산에서 다시 연해주 추풍의 다아재골로 왔다. 추풍은 밀산보다 훨씬 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밀산에 비축해 두었던 무기를 운반해서 추풍의 의사 최병준(崔丙俊)의 집에 묻어 두었다. 그런 뒤에 한편으로는 병사를 모집하고 또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곳을 떠나기까지 약 1년 10개월을 거기에 머물렀다.
그가 추풍에 있는 동안 러시아, 특히 연해주의 정세는 크게 변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되면서 연해주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의 지지파(적위파)와 반대파(백위파)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고 또 1918년 8월 혁명을 저지하려는 일본군이 침입하여 매우 복잡한 정세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혁명의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점차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적위파(赤衛派)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결국 소비에트 정권과 한인 민족운동 세력 사이의 접근을 의미했고 대일투쟁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소비에트 적군으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6월 이동휘는 아무르강변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그 후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의 민족운동가들을 망라한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중앙총회’와 협력하여 의용병을 모집하고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설이 있다. 아마도 홍범도는 이 때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도는 1919년 3월 중순(일설에는 2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이동휘가 부장을 맡고 있던 선전부(宣戰部: 뒤에 군무부로 바뀜)에서 활동하였다. 이동휘는 나중에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도 역임하게 되는 유력인사이다. 범도(홍범도)는 이 시기부터 부대를 이끌고 간도로 넘어갈 때까지 대한국민의회 및 이동휘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범도(홍범도)가 있던 추풍의 다아재골은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의 근거지가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동휘와 같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시키는데 열중하였다. 권업회에서 나자구에 설치했던 사관학교의 학생들과 범도(홍범도)의 부하들, 그리고 간도 훈춘출신 황병길(黃丙吉)·이명순(李明淳)·최경천(崔敬天) 등이 데리고 온 군인들을 기초로 군무부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이 때의 병력 규모는 4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 철도선 수비용병’의 이름을 빌려서 소비에트 적군 ‘에호’영에 가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추풍에서 가까이 지내던 최병준은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접제원(接濟員)으로 활약하고 이명순은 이후 대한국민의회 훈춘 지회장을 맡게 된다.
볼셰비키 혁명파는 반일·반백위파 투쟁에 동참하고 있던 한인 등 소수민족을 위하여 1919년 3월 올가에 ‘빨치산 제부대(諸部隊) 임시혁명본부’를 설치하고 그 아래 ‘민족부’를 두어 한인 등 무장세력의 활동을 원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전개와 동시에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고무된 범도(홍범도)는 그 해 중반경 이동휘 등과 함께 지속적인 무력투쟁을 통해 국제연맹회의와 같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때 범도(홍범도)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말하였다. 이 무렵 범도(홍범도)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 대부분의 한인들은 국내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3·1운동(1919)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흥분하였으며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국민의회 측과 상의하여 8월 8일 마침내 10여 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오던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떨쳐나섰다. 그가 간도로 이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민의회에서 국내진입 작전을 전개할 독립군의 후원 조직으로 ‘군정사(軍政司)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범도(홍범도)는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의 사정을 보아 병사를 추가로 모집하고 국내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의 부대는 이미 1919년 7월경 간도 지역 민족운동계의 거두 구춘선(具春先)과 의논하여 그가 주도하고 있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적 지원 등을 받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구춘선은 연해주에 갔다가 그 해 8월 23일 간도로 돌아왔고 ‘군정사후원회’를 조직하여 홍범도 부대를 지원할 준비를 시작했다. 홍범도 부대의 이동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3·1운동(1919)의 전개,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 대한국민의회 및 볼셰비키파의 지원 등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홍범도가 처음 추풍을 떠날 때 거느린 대원의 숫자는 106명이었다. 국민의회 군무부 소속부대 전체 규모가 400여 명에 달하였으니 그와 비교하여 1/4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기 직속 부하만을 추려서 출발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중에 나머지 병력의 대부분이 간도로 옮겨 오게 된다. 간도로 이동하면서 부대 규모는 점차 커지지만 초기의 구성원 가운데는 러시아 백위파가 내린 강제 징집령에 반대하여 홍범도 부대에 참가한 귀화 한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적극 수용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범도(홍범도)도 이미 이동휘를 통하여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고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이 부대가 간도로 이동한 뒤에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사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거의 2년이나 된 시기였으므로 당시 간도에 있던 한인들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여 일부는 알고 있었고 그 사상을 수용한 사람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형성된 홍범도 부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범도(홍범도) 자신은 의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형편에 비추어 ‘빨치산(의용병)’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 활동무대인 간도로 가기 전 러시아령 안에서의 과도기 단계에서는 투쟁 목표나 작전 방침이 확실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 당시부터 이미 조국의 광복(독립과 해방)을 위한 명분이 뚜렷이 있었으므로 ‘독립군’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범도(홍범도) 자신은 그 해 12월 ‘노령(露領, 러시아령) 주둔 대한독립군’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출발 당시 부대의 명칭에 대하여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홍범도 부대는 추풍을 떠나서 간도 방면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이들은 국경 부근의 아인덕이라는 곳에서 제정 러시아 측의 백위파군과 싸우는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만나게 되었다. 백군(白軍)과 싸우다 패전한 적군 패잔병 6명이 홍범도 부대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범도(홍범도)는 러시아인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본래의 임무인 간도로의 이동과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는데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하지만 홍범도 부대는 적·백(적위파·백위파) 양군의 전투 현장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서로 싸우는 양 진영의 투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부대는 일본 간섭군을 반대하여 싸우는 적군 측에 가담하여 백군과의 전투를 개시하였다. 전투는 러시아인들의 제분소인 물방아간에서 벌어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홍범도 부대는 백군 13명, 말 세 필을 사살하고 적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뒤부터 약 1년간 홍범도 부대에는 러시아 적군 출신 장교 3명이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바노비치 와씰네·꼬싸·까리멘니츠라고 했다. 이들은 홍범도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때로는 홍범도의 참모 역할을 하며 부대원들을 러시아식으로 훈련시키기도 하고 그의 작전 구사에 충고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3. 대한독립군의 창건과 국내 진입작전


일제 측의 한 정보에 의하면 1919년 8월 홍범도가 추풍을 떠났을 때의 병력은 4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13일 신민단(新民團)에서 모집한 100여 명의 의용병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소왕령(우수리스크)으로 가서 그 400명과 합쳤다고 한다. 이 정보가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에서 밝힌 홍범도 부대 규모가 앞에서 언급한 국민의회 군무부 산하의 군대와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범도 부대는 1919년 8월 중순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진입하여 간도 훈춘현의 따차무정재(大草帽頂子)를 지나며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마적 140여 명을 소탕하고 소총 50정 및 많은 탄약과 옷감·돈을 노획하였다. 선량한 주민들을 괴롭히는 마적떼의 소탕은 한인은 물론 많은 중국인들의 환영도 받는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달 하순에는 나자구를 거쳐 하마탕(蛤蟆塘)의 한인 기독교 마을에 주둔하였다. 그곳은 바로 구춘선의 집이 있는 한인 마을이었던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1919년 9월 초순경에 구춘선이 영도하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적·인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간도에 온 뒤에도 수차례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왕래하며 병사 및 군자금의 모집, 무기구입 등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몇 달 사이에 부대 규모도 커지고 체제와 장비 등이 상당한 정도로 갖춰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그 해 12월 중순 이제 정식으로 독립군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근거지 일대에서의 다른 군소 단체들의 기부금 징수를 금지하며 동포사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아래와 같은 유고문(喩告文)을 전단으로 만들어 널리 공포하였다.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으로 임시정부가 유(有)하야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주(主)하며 하(下)으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한 독립군이 출동되엿도다. 희(噫)라! 강권지하에 오직 정의 인도만 주창함도 불가능한 사(事)요 무권지민(無權之民)으로 한갓 평화회와 연맹회(국제연맹: 필자)만 의뢰함도 역(亦) 불가능한 사(事) 안이뇨. 고(故)로 혹 가산을 방(放)하며 혹 고금(雇金)을 득하야 무기를 쥰비함은 배성일전(背城一戰)에 성하지맹(城下之盟)을 약(約)코져 함이나 오히려 경동(輕動)치 못함은 오직 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 필자)로 광명정대히 선전(宣戰)함을 대(待)함이라. 이제 전설을 들은 즉 간도방면에서 무뢰지배가 승시(乘時)하야 혹 인장(印章)을 자의로 조각하여 독립군을 빙자하야 민간에 강제 모연(募捐)도 하며 혹 군복을 가장하며, 무기를 휴대하고 각 동리에 시위적 작란(作亂)이 비일비재라 하니 민심이 소요할 것은 물론이오 장차 외모(外侮)가 불원(不遠)할지라.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중에 투(投)하야 써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써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本義)라. 어찌 일지방(一地方) 소단체에 편의(偏依)하야 군중풍기를 문란케 하리오. 본 참모부는 시(是)를 통탄민휼(痛嘆憫恤)하야 자(玆)에 유고(喩告)하오니 자금(自今) 이후로 이와 같은 이매망량지도(魑魅魍魎之徒: 도깨비 같은 무리)가 촌간에 출몰하거든 해(該) 동리로 엄히 징치(懲治)하되 만약 세력이 부족할 시(時)는 즉시 본부(本部)에 보고하야 군율로 처치하기를 일반국민은 근신 심득(心得)할 지어다.”
대한민국 원년 12월 일
노령(露領, 러시아령)주둔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홍범도(洪範圖)
참모 박경철(朴景喆)·이병채(李秉埰)

이 유고문은 홍범도가 직접 작성하지는 못하고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고문의 내용을 볼 때 주목되는 점은 홍범도가 상해 임시정부를 매우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임시정부의 정식 선전포고를 기다리느라고 함부로 대일무력항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정의·인도를 내세운 평화적 시위형태의 3·1운동(1919)과 국제연맹 등의 국제기구에 호소하는 외교론과 같은 독립운동 방법론을 비판하고 ‘배성일전(背城一戰)’과 같은 무력항쟁을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다.
홍범도가 임시정부와 연계되는 시기는 대한국민의회가 상해 임시정부에 부분적으로 통합되었던 시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즉 1919년 8월 하순부터 1920년 2월 사이에 노령(러시아령)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가 통합운동을 벌여 부분적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소한 1919년 8월 이후부터 유고문이 발표되는 그 해 12월 사이에 임시정부와 어떤 관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인 ‘조선군 참모부’ 정보에 따르면 홍범도는 1919년 9월에 임시정부에 국내 진입작전을 개시하겠다고 통보했다가 안창호로부터 아직 시기상조이니 11월까지 연기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위 유고문의 내용은 임시정부의 기관지『독립신문』1920년 1월 13일자에도 보도되는데, 약간 내용이 다르다. 즉 홍범도가 대한독립군 ‘의용대장’ 직책으로 되어있고 ‘노령(러시아령)주둔’이 삭제되었으며 박경철과 이병채가 참모가 아닌 ‘동원(同員)’으로 되어 있고, 또 본문 가운데 참모부가 ‘본대(本隊)’로 되어 있는 것이다. 유고문에 나오는 참모 박경철은 창설 초기 대한국민의회의 재무부 부원을 맡은 사람이었다. 또 이병채는 전남 고흥의 백일도(白日島) 출신으로 허위(許蔿) 및 민용호(閔龍鎬) 의병장과 함께 의병항쟁을 주도한 인물이며 고흥 일대의 3·1운동(1919)에도 참가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더라도 홍범도 부대가 단순한 무장세력이 아니고 해외 한민족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여러 세력과 연계를 맺으며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홍범도가 대한독립군이라는 부대 명칭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략 1919년 9∼12월초 사이로 짐작된다. 대한독립군은 간도 국민회의 지원을 받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점차 규모가 커졌다. 부대의 조직은 소대-중대-대대의 편제를 채택하여 1개 소대를 50명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창건 초기, 즉 1919년 말에서 1920년 초기의 대한독립군은 약 300여 명의 병력에 3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이 무렵의 무장상태를 보면 소총 200여 정에 권총 약 30정, 탄약은 총 1정에 약 200발 정도였다. 그리고 간부진으로는 사령관은 물론 홍범도였고 부사령관에 주건(朱建), 참모장에 박경철이었다.
대한독립군이 1919년 10월 중순에 압록강변의 강계와 만포진을 함락시키고 자성에서 3일간 일군과 교전하여 적 사상자가 70여 명에 달했다는 임시정부 측의 기록(『조선민족운동 연감』)이 있으나, 다른 자료를 동원하여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이 기록이 홍범도 독립군 부대에 대한 기대의 심리가 반영된 과장 기사로 판단된다. 위의 유고문에서 보듯이 1919년 12월 중순까지는 대한독립군이 임정(상해임시정부)의 통제로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간도에 있었던 대한독립군이 가까운 두만강 건너편의 국내 지역을 놔두고 수백 리 떨어진 압록강변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경 부터 최명록(최진동)의 도독부(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을 과감히 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홍범도 부대의 활동에 크게 고무된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도 끊임없이 국내를 드나들며 일본 군경을 습격하여 일제를 괴롭혔다. 구체적 예를 들면 일본군 측의 축소된 통계에 의하더라도 이 해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공이 24회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같은 해 3월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전투 횟수는 32회에 달했으며 일제 측 관서와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나 되었다고 한다.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시기에 두만강 대안인 함경북도 온성군은 독립군 부대 출몰의 가장 중요한 공격대상이자 통로가 되었다. 일제의 집계에 의하면 이 시기 온성군에 진출한 횟수는 16회나 되었고, 그 중 3월 15일의 온성군 유포면(현재 북한의 남양시) 풍리동(豊利洞) 진공시에는 무려 250여 명의 독립군 부대가 출동하여 군경과 접전 후 한 때 그곳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이러한 국내 진입작전의 전개에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제의 어용신문인『매일신보』는 1920년 5월 1일과 2일자에서 독립군의 온성 습격사건을 크게 보도하였다. 이 기사는 일본군측의 발표를 인용하며 홍범도를 배후 인물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요주의 인물로 거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소 독립운동 단체들의 국경지방 출몰은 일제의 국정 경비 강화를 초래했고 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인 부일배 등을 밀정으로 고용하는 첩보활동도 크게 강화되었다. 이에 홍범도는 1920년 3월 대한독립군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하여 간도 및 연해주, 국내의 두만강 일대 한국인 경찰 보조원 및 기타 밀정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지면의 제한으로 전문을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 자기의 조국, 자기의 동족을 잔해(殘害)하여 이종(異種: 다른 종족)에 충성을 바치는 자는 하늘과 사람 모두의 공통된 분노를 초래함은 물론이오, 자기 역시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나 맑은 새벽 자리에 일어날 때에 상당히 생각되는 바 있고 죄를 점차 느낄 것이다. 오호! 천하에 어찌 이족(異族)을 위하여 동포를 잔해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며 사명일 것이냐? … 우리들은 지금 섬 원수를 밖으로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려고 의려(의로운 군대: 의병)를 일으켰다. 이때를 당하여 군(君) 등이 만일 회개치 않는다면 역시 적과 동일시 할 것이다. 우리 어찌 동포를 해치는 일을 좋아서 할 것인가?…”

홍범도는 위와 같은 경고문을 발표하고 간도 일대의 밀정을 소탕하는 한편, 간도 국민회 및 최명록의 도독부군과 군사통일을 추진하며 앞으로의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에 대비하였다.

4. 봉오동 전투의 대승

(1)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성립


1920년 초반 두만강의 얼음이 녹지 않았을 때 국내로 진입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둔 독립군 부대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국경지방에서 적을 습격하며 주구배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활동은 소규모 습격전투 이후 곧 만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국내외의 여론을 환기할 만한 대규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간도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거나 연합시켜 강대한 부대로 재편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홍범도는 이미 수 차례 공동 작전을 전개하였던 최진동의 도독부와 연합하여 3월 25일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그는 3월 30일에 구춘선의 집을 방문하여 각 부대의 연합문제를 상의하였다. 이 무렵 홍범도는 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일과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상황이 일제 측 정보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노력의 결과 5월 3일에는 최진동의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국민회·군무도독부·신민단·광복단·의군단 등 6개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대한독립군은 기실 1920년 초반에 맨 먼저 국민회 직속 독립군 부대와 연합했었다. 대한독립군은 국민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 그 산하에서 활동했지만 국민회에는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한국민회 국민군(약칭 국민회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맡고 안무는 국민회군을 지휘했지만 연합부대의 총지휘는 홍범도가 담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군의 총지휘 때는 ‘정일 제1군사령장관(征日第一軍司令長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국민회 산하에서 대한독립군이 국방군의 성격을 띠고 있던 반면에 국민회군은 경찰적 기능을 맡았던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홍범도 등의 노력으로 마침내 5월 28일에는 홍범도 부대·안무부대·최명록 부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게 되었다. 북로독군부는 병력을 화룡현 봉오동(鳳梧洞)에 집결시켰다. 당시 간부진은 이러했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府長) 최진동
부관 안무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이병채
향관(餉官) 안위동(安危同)
군무국장 이원(李園)
군무과장 구자익(具滋益) 치중(輜重)과장 이상수(李尙洙)
회계과장 최종하(崔鍾夏) 향무(餉務)과장 최서일(崔瑞日)
검사과장 박시원(朴施源) 피복과장 임병극(林炳極)
통신과장 박영(朴英)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曺權植)
사령부장 직속 병력 약간

간부 구성을 보면 주로 행정과 군사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정의 책임자인 북로독군부의 대표와 부관은 도독부의 대표인 최진동과 국민회군의 안무가 맡고 군사 분야는 전적으로 홍범도가 맡은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성립시 봉오동에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던 최진동 3형제가 재산을 모두 독립군에 바쳐서 많은 군비를 조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립 초기 대한북로독군부의 근거지는 자연스럽게 재정 지원과 보급을 받기 쉬운 봉오동 일대가 되었다. 북로독군부의 성립 직후 봉오동 골짜기에는 이제 800∼900명 내외의 많은 독립군 병력이 집결하여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세 부대 외에 약 80명의 신민단 독립군도 합세하여 있었다.

(2) 삼둔자(三屯子), 후안산(後安山) 전투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하여 독립군이 대병력을 형성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소규모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한 작전의 한가지로서 1920년 6월 4일 북로제1군사령부의 협조하에 약 30명의 신민단 독립군 소부대가 함북 종성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여 교전한 뒤 돌아왔다. 이 보고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장 아라요시(新美二郞) 중위는 다음날 1개 소대와 10여 명의 헌병을 인솔하고 불법으로 중국 영토인 화룡현 삼둔자로 침입해 왔다
삼둔자는 김·박·최씨 성을 가진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동족 마을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바로 이 삼둔자와 근처의 후안산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를 시발로 하여 전개된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계속 독립군을 수색하며 침공해 왔다. 신민단 독립군 부대는 6월 5일 밤 10시경 삼둔자 북방의 고지에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적에 기습을 단행하여 많은 손실을 입혀 패주시켜 버렸다. 이것이 바로 삼둔자 전투로서 적을 유인·기습한 소규모 개막전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어두운 밤에 접전이 되었으므로 피아의 손실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일본군 야쓰가와(安川) 추격대대가 원병으로 파견되는 정황을 보면 일본군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19사단은 앞의 남양수비대를 간도로 침입시켰으나 그러한 작은 병력으로는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토벌’될 위험에 빠질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사단 사령부는 독립군의 침입을 구실로 대부대를 출동시켜 아예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애버리겠다고 소좌(少佐) 야쓰가와(安 川)를 지휘관으로 하는 ‘월강(越江) 추격대대’를 급히 편성하였다. 이 월강추격대대의 편성과 병력은 아래와 같다.

보병 제73연대 제10중대 70명(가미다니(神谷)대위 지휘)
위 연대 기관총 1소대 27명(시야마(紫山)준위 지휘)
보병 제75연대 제2중대 123명(모리(森)대위 지휘)
헌병대 11명 및 경찰대 11명

여기에 아라요시가 이끄는 30∼40명 규모의 남양수비대 병력이 합세하였으니 봉오동 전투 당시 출동한 적군의 전 병력은 310명 내외 규모였다.
일본군 추격대대는 당시 중국령인 간도에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월경하였다. 이들은 6월 6일 밤 9시부터 7일 새벽 사이에 두만강을 건넜다. 일본군은 7일 새벽 세시 반 경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후안산 전투는 6월 6일 밤 12시경부터 7일 새벽 2시 반까지 후안산 마을과 고려령 남쪽 기슭에서 야쓰가와 추격대대와 최명극이 인솔한 모연대(군자금 징수대) 사이에 갑자기 벌어진 소규모 전투이다. 즉 일군 추격대대의 일부 부대와 약 25명의 독립군 모연대가 뜻하지 않게 충돌하여 총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양 측이 다 소수의 인명 피해를 냈다.



일본군이 그린 삼둔자 부근 전투약도


(3) 봉오동 대첩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 홍범도는 국내 진격작전을 구상하여 실천을 준비하고 있던 도중 대규모 일본군의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군과의 접전에 대비하여 6·7일경 봉오동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미리 피신하게 하였다. 그는 최진동과 상의하고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맞이하여 섬멸할 결심을 굳혔다.
봉오동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이고 가운데는 약간의 평지가 있었는데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천연의 요새지라고 할만 했다.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25리 정도로서 골짜기 입구로부터 하·중·상의 세 마을이 있었고 한 마을은 대개 30내지 60호 정도의 집이 모여 있었다.
사령부장 홍범도는 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작전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부대를 배치하였다.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東山)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北山)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西山) 남쪽 끝에 매복하여 적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서산 중턱의 북쪽 끝에 자리잡았다. 범도(홍범도)는 부대의 배치가 끝나자 적이 올 때에 척후병을 그대로 통과시킨 뒤 본대가 독립군의 포위망 가운데에 들어오면 호령을 시작으로 공격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군무국장 이원은 예비대로서 본부 병력 및 나머지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 산간에 있게 하여 병력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 보급을 지원케 하였다.
홍범도는 이렇게 산하 부대를 주도면밀하게 매복시킨 뒤에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특별 명령을 내렸다. 즉 고려령 북쪽 1,200미터 고지와 그 동북쪽 마을에 잠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전진을 지연시킨 뒤에 거짓 패퇴하여 적을 유인하라는 것이었다. 한편 독군부장 최진동과 부관 안무는 동북쪽 산의 서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병력을 지휘케 했다. 신민단 부대도 북로제1군사령부 부대와 합세하여 같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약 700명 내외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근처에서 치밀한 포위망을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7일 새벽부터 오만무례하게 봉오동을 향하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새벽 6시 30분경 이화일 부대는 월강추격대대의 전위중대와 교전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 뒤 예정대로 본대로 합류하였다. 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8시 30분경부터 11시 30분경까지 봉오동 하촌을 수색한 뒤 독립군이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 일단 집결한 다음 중촌·상촌을 거쳐 계속해서 독립군이 기다리고 있는 지점을 향해 진입해 들어왔다. 오후 1시경 적의 첨병이 봉오동 상촌에 있는 독립군의 매복지점을 통과해도 그대로 놔두자 적의 본대는 이제 독립군 매복지점 한 가운데까지 오게 되었다.
이 때 사령부장 홍범도는 적을 향해 발사하는 총성으로 공격명령을 대신하였다. 그동안 은인자중하고 있던 독립군들은 삼면 고지에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거의 두 배가 되는 700여 병력의 독립군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엄폐물로 가려진 진지에서 내려다보고 사격을 가하니 아무리 우수한 장비와 강한 훈련으로 다져진 ‘무적 황군’이라도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추격대는 가미다니 중대와 나까니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응사하고 기관총대를 앞세워 난사하며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추격대는 약 세 시간 동안 악전고투하며 막대한 손상을 입고 비파동(琵琶洞) 방면으로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쫓겨가는 적을 추격, 다수를 섬멸하였다.
봉오동 전투가 한창이던 오후 4시 20분경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이 폭풍과 함께 거세게 쏟아져 상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지는 기상의 이변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자 사령부장 홍범도는 신호용 나팔을 불어 독립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 틈을 타서 일본군은 패주한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홍범도의 직접적 지휘를 받지 않던 신민단 독립군 약 80명은 다른 독립군 부대의 철수를 알지 못하고 패주하는 도중의 적 기관총 소대와 정면으로 부딪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민단 병사들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냈고 일본군도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후일『봉오동전투 상보(詳報)』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 그들의 고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대목을 보기로 하자.

“… 상봉오동 남방 약 3천 5백미터 높이 503(미터)고지, 북방 약 천미터의 능선, 동방 약 천미터의 고지능선, 상봉오동에서 높이 445 중턱에 통하는 점선로(點線路) 북측 고지, 상봉오동 동북방 약 2천미터 높이 504 남방 고지선 및 그 서측 고지능선, 상봉오동 서측 고지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나 적(독립군)은 교묘히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그 위치가 분명치 않고 탄환은 사면에서 날아와 전황불리의 상태에 빠졌다. (중략) 공격 전진 중 일등졸(卒) 호리이(堀井茂邦)는 … 복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 소대장으로부터 후퇴명령이 있음에도 전투를 계속하기에 이르러 끝내 절명하고 … 왼쪽 방면에서 나온 나까니시, 소또야마(外山) 양 소대와 연락이 불충분하여 피아(독립군과 일본군)의 식별이 곤란하였으나 나팔을 불어 왼쪽 고지 및 골짜기를 전진 중인 양 소대와 연락을 취하고, 양쪽 고지에 척후를 보내 주력은 (패퇴로인) 비파동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겠다고 큰 소리쳤던 월강추격대대는 소탕은 커녕 오히려 궤멸적 타격을 입고 패퇴하였다. 그들은 대피하지 못하고 봉오동에 남아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16명을 학살한 뒤 패잔병을 이끌고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柔遠鎭)의 건너편 두만강변으로 와서 야영하다가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립군의 ‘봉오동 대첩’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냈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발표는 다분히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군은 전과를 어떻게 파악했는가?『봉오동전투 상보』에 의하면 일본군 피해가 전사 1명, 부상 2명이라 했고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33명, 부상 다수라고 하였다. 양측의 발표 내용을 보면 서로 상대방의 피해는 과장한 반면 자기 진영의 피해는 극소화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위의 두 기록 외에도 중국신문인『상해신문보(上海新聞報)』, 간도 국민회의 호외,『독립신문』,『홍범도의 일지』,『김정규(金鼎奎) 일기』등을 토대로 냉정히 조사해 보면 대체로 일본군 측 피해는 120내지 150명 내외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독립군 측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나 추정된다.
어쨌든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 독립군 부대가 큰 승리를 거둔 ‘대첩’이었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 몇 명 사살했다는 단순한 전투성과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립군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고하겠다.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의 독립군 승리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전체 독립운동계와 동포들의 사기를 매우 높여주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부르면서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더욱 몰두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일제 측의 비밀보고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아(我) 월강추격대에 반항하여 교전한 불령단(不逞團)은 해(該) 전투(봉오동 전투)에서 비상한 대승리를 얻고 아군을 조선 측으로 격퇴한 것 같이 선전하고 있다. 또한 이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칭하며, 금후 계속될 전투에 대비해서 양식의 준비, 간호대의 조직, 병원(兵員)의 모집에 더욱 힘쓰고 있다…. 봉오동 방면에는 다수의 불령단이 집합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이를 기회로 하여 각 단체간의 결속을 굳게 하고 있다. 금회(今回: 이번)의 추격은 도리어 나쁜 결과를 후에 끼칠 것이라고 관찰된다….”
-6월 15일 사까이(堺) 간도 총영사 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일제의 이러한 예측-후에 나쁜 결과를 끼칠 것이라는-은 그대로 적중된다. 바로 청산리 전투를 통해서 -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자기의『일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 3일(음력)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31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雲霧: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증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에로 영상(嶺上)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움하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던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도착)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한 즉 … 그 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명 죽었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 측은 봉오동에서 패퇴한 뒤에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일제 측의 ‘조선군’ 사령관은 독립군이 정식 군복을 착용하고 임명에 사령장을 쓰며 일정한 예식이 있는 등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고 있다고 육군대신에게 보고한 뒤 그 대책을 강구토록 요청하였다.
홍범도는 지난 날의 의병전투에 이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부대들을 지휘하며 대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그의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떨쳤다. 그는 50을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만주·노령(러시아령)지역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그린 봉오동 전투약도


5. 노두구(老頭溝) 전투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 직후 정일제1군사령장관 명의로 간도 국민회장 구춘선에게 의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여 부상당한 일부 병사들을 치료시키는 한편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는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여 6월 중순경 두만강 연안에 일부 부대원을 파견하여 엄중한 경계망을 갖췄다. 그리고 그달 21일에는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각 독립운동 단체들과 2차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량 비축과 무기 수입 방법 등을 의논하였다.
6월 말경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 산하 약 400명의 직속 부대원을 인솔하고 간도의 연길현 의란구(依蘭溝)로 주둔지를 옮겼다. 봉오동 전투 직후 간도 일본 영사관은 전전긍긍하며 매우 긴장하였다. 그래서 영사관의 일본 경찰은 독립군 및 그 가담자에 대한 수색, 체포와 주민들에 대한 동정파악에 열을 올리며 간도 일대에서 분주히 준동하였다.
간도 일본영사관의 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 분관 소속 경찰과 함경북도 각 경찰서 소속의 경관 등 46명은 히까다니(光谷宗助) 경부 인솔하에 7월 8일부터 합동 수색작전을 벌였다. 이들은 연길현으로 이동한 독립군의 동향을 탐지하면서 쉬구(西溝)를 거쳐 7월 11일에 연길현 노두구 탄산리(炭山里) 방면으로 진입하였다. 홍범도는 130여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탄산리 근처를 지나다가 일경이 오는 것을 탐지하였다. 그는 야산 참나무 숲의 세 고지에 부하들을 잠복시켰다. 산 아래 밭에는 보리가 한창 피어 무성한데 일경들이 허리를 굽히고 보리밭을 헤치며 오는 것이었다.
홍범도는 전 장병을 급히 전투태세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내가 쏘기 전에는 쏘지 말라! 탄환은 생명이다! 맹사(盲射: 목표를 겨누지 않고 함부로 쏨)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적을 노리고 있었다. 적이 보리밭을 빠져나와 막 산을 오르려 하였다. 이 때 범도(홍범도)가 총을 발사하였다. 이에 총사격이 시작되었다. 일경은 갑자기 맹렬한 사격을 받고 마구 쓰러졌다. 혼비백산한 일경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망쳐 버렸다. 오후 6시경부터 8시 10분경까지의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홍범도는 전멸시키기 전에 전리품을 수습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하며 철저한 수색 후에 전장을 정리하여 많은 무기를 얻었다. 홍범도는 후일 이 전투에서 “일병 100명을 몽땅 다 잡고 무장을 빼앗았다.”고 약간 과장되게 회상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노두구 전투이다. 지금까지 학계에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으나 이 전투로 간도 일본 영사관 경찰이 큰 손실을 본 것이었다. 전투 직후 일경은 니시다(西田) 순사부장도 중상을 입었으며 위기에 빠진 일경을 구하기 위해 용정(龍井)의 영사관 본관과 각 분관에서 42명의 경관을 급파하였다고 간도 총영사에게 보고하였다. 또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활동 하던 이정(李楨)은 그의『진중일지』7월 23일자에서 “홍범도 장군은 부하 1중대를 거느리고 노두구 방면에서 일본 영사관원 28명과 조우 격전하여 22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 측에는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노두구 전투 승리의 소식은 간도 각지에 파다하게 퍼졌다. 동포들은 봉오동 전투와 이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중순경에 홍범도 부대에 대한 대대적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특히 간도 국민회의 서부 분회, 옹성라자(甕聲磖子) 국민회와 숭례향(崇禮鄕) 동포들은 공동으로 홍범도 부대의 전승 축하회를 열어 동포들의 감사를 표하고 독립군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 대회는 국민회 대표의 개회사와 환영사·격려사·예물증정·홍범도의 답사가 있었고 식이 끝난 뒤에는 큰 잔치가 베풀어 졌다.
이 때 홍범도는 다음과 같은 답사를 하였다.

“나는 국권의 회복을 뜻한 이래로 이미 10년의 성상(星霜)을 지냈으며 공공연하게 독립의 의군(義軍)을 일으켜 한족(韓族)의 독립을 힘써 외친 이래 1년 반을 지냈다. 그 사이에 고국산천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영토에 유리 전전하여 비참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로부터 돈과 곡식의 의연(義捐)을 받은 것이 참으로 많은 바 있다. 이제 만일 우리의 소지(素志: 독립에 대한 평소의 뜻)가 좌절되거나 일본 내지 세계 각국의 조소(嘲笑: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면 반드시 우리들은 물론 고통스러운 바가 될 뿐 아니라, 우리 의군을 위하여 돈과 곡식을 제공하고 자기의 생활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 동포는 우리들에 대하여 독립의 미명(美名)을 빙자한 강도단이라고 하여 우리를 버릴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천지에 몸을 둘 곳이 없기에 이를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이다. 우리들 독립의군의 일단(一團)은 일의 성(成), 불성(不成)을 논하지 않고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소지관철에 분투함으로써 한족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부하에게 훈시하고 있다….”
-『현대사자료』27, 360면에서 -

간도 지방의 한민족 동포들은 봉오동 전투와 노두구 전투에서 연달아 일본군경을 격파한 홍범도의 이러한 애국 애족적 열성에 감복하여 그를 심히 숭배하고 존경하였으며 이제 한민족의 독립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실제로 일제의 비밀보고서에는 위와 같은 내용을 보고하는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는 심지어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의란구 지방의 민심은 대체로 전시 기분을 띠고 있는 흥분상태에 있으며 독립군의 제반 준비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일본군과의 교전이 곧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 내용도 있다.

6.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홍범도는 7월 중∼하순경 임시정부 특파원 이용(李鏞)의 중재로 북간도와 러시아 지역의 모든 독립군 부대들을 3개 단위로 통합하는 편성작업에 동참하였다. 이 때 동도군정서(東道軍政暑)·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동도파견부(東道派遣部)가 결성되었다. 동도군정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개편한 것이었고 동도파견부는 러시아 지역 의용병(빨치산) 및 독립군을 통합한 것이었다.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 북로제1군사령부장에 이어 동도독군부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의군단(義軍團)과 신민단 등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조직이었다. 동도독군부의 편제는 4개 대대와 홍범도 직속 2개 중대로 되어 있었다.
제1대대는 홍범도군 약간 및 국민회군에 허근(許根)이 이끄는 의군단이 혼성으로 구성되었고 대대장은 허근이었다. 허근은 본명이 허재욱(許在旭)으로 한말 군대에 있으면서 영장(營長)을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허영장’이라고 불렀다. 제2대대 역시 국민회군과 의군단이 혼합 편성되었고 부대장은 방우룡(方雨龍)이었다. 제3대대는 최진동의 대원으로 이루어졌고 최진동이 대대장이었다. 제4대대는 신민단원 2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대장은 김성(金星)이었다.
각 독립군 부대들은 동도독군부에 참여하여 공동 행동을 취하기로 했지만 이 조직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즉 그 해 8월 초순 의란구에서 독립운동 단체 연합대회를 연 결과 최진동과 홍범도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정확한 내막은 밝힐 수 없으나 최진동이 홍범도 아래 직책에 배치된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에 투쟁의 방법론이나 근거지 이동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을 것이다. 결국 간도 지역 독립군 부대의 재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진동 부대와는 갈라졌지만 홍범도 독립군 부대는 안무의 국민회군, 허근이 이끄는 의군단, 신민단 부대 등과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20년 8월 7·8일경 홍범도는 그 동안 머물던 의란구를 떠나 허근의 의군단 부대와 같이 북쪽의 명월구(明月溝)에 가서 약 한달간 있었다. 이 무렵 홍범도 부대는 안무 군대를 포함해서 약 550명 정도였다.
이 무렵 홍범도에게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즉 작은 아들 용환(홍용환)이 7월 중순 훈춘에서 중국군에게 체포되어 한 달 이상이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용환(홍용환)은 조을손(曺乙孫)이란 사람이 중국인 살해 혐의로 체포될 때 옆에 있다가 무고하게도 같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용환(홍용환)은 나중에 대한국민회장 구춘선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구출되지만 이 문제로 범도(홍범도)도 애를 많이 태워야 했다.
봉오동 전투 직후 홍범도를 본 적이 있던 홍상표(洪相杓)는『간도독립 운동소사』에서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은 50여세 가량의 중키쯤 되는 뚱뚱한 몸집에 철홍색 얼굴이 빛나는 장군이었다. 그는 언제나 계급장도 없는 일개 졸병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지휘도나 권총을 차지 않았고 장총 두 자루를 휴대하였다. 그는 일상 이렇게 말했다. 지휘도나 권총을 왜 차는가? 그것으로 왜놈을 잡는가? 제 동료나 죽이는데 쓰는것이지. 이런 장총이라야 왜놈을 죽여. 그는 이렇게 말할 때면 버릇처럼 장총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그의 부관의 말에 의하면 장군의 신품 38식 총은 봉옷골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인데 장군이 친히 골라서 두 자루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사격술은 유명하여 빈 병을 높이 던져 놓고 좌우로 마음대로 명중시켰다고 한다.”

홍범도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사격술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간도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그의 ‘백발백중’ 사격 솜씨를 한번 보고 싶어 했다. 그러자 그는 약 30미터나 되는 거리의 말뚝에 빈 병의 주둥이를 앞으로 해서 굽혀 놨다. 술이 얼근한 홍범도는 한 손으로 오연발 총을 들어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이자마자 발사했다. “땅-” 총알이 병의 주둥이로 들어가서 바닥을 꿰뚫었다. “한번 더!”하고 사람들이 외쳤다. 더 쐈다. 틀림없는 백발백중이었다. 간도 지방 동포들에 퍼진 홍범도에 대한 신뢰와 명성은 이런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도 지역의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의 연합을 모색하며 군사력의 증강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일제는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위한 대책을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하였다. 그 하나는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와 감시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7월 하순부터 세우기 시작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에 의하여 일본군이 직접 출동하여 ‘토벌’하는 것이었다.
7월 하순 일제의 압력을 받은 장작림은 그에 굴복하고 일본군 파견 장교의 감시 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7월 24일 일본군에 통고하였다. 일본군이 8월 15일 이에 동의하자 중국 측은 연변의 연길 주둔 보병 제1단장 맹부덕(孟富德)을 사령관으로 하여 중국군을 출동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맹부덕을 비롯한 중국군 장교들 가운데는 독립군 공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중국 관헌 중에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 단체들도 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중국군 측과 비밀리에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대한국민회 등 독립운동 단체와 중국군 사이에는 비밀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타협의 요지는 독립군이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일본 측의 눈에 띄지 않는 산림지대로 본거지를 옮기고, 중국군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독립군 부 대들은 8월 하순부터 홍범도 부대를 시작으로 본거지 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같은 ‘대책’과 함께 일제는 위에서 말한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8월에 확정짓고 9월 2일부터는 일본군 관련 부대에 출동준비를 계획하도록 명령했다. 일제는 중국군 측이 독립군을 ‘토벌’할 의지도 없고 그럴만한 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맹부덕의 중국군은 1920년 8월 28일부터 9월 27일까지 한 달간 독립군을 토벌한다 했지만 출동한 뒤 거의 아무런 ‘토벌’의 실적이 없었고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이미 독립군 측과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중국군에 파견되었던 정보장교 사이또(齋藤恒) 대좌는 일본군이 직접 주체가 되어 나서지 않으면 독립군의 ‘토벌’은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일본군 사령부에 제출하고 임지로 돌아갔다.
홍범도는 휘하 병력을 데리고 8월 하순경 명월구를 떠나 무산간도라고 부르던 백두산 기슭의 두도구·이도구 방면으로 향했다. 이동 도중인 9월 초순에 러시아에서 그 동안의 내란이 평정되어 볼셰비키파가 승리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범도(홍범도)는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그에 대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포들이 사는 연해주 지역은 이제 제정 러시아 당시의 온갖 차별과 압박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 혁명정권은 출발 당초부터 차별의 일소(一掃)를 내세웠으며, 짜르 제정시대 억압의 폐지, 러시아 안의 여러 소수민족에 대한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등을 선포하였었다. 시베리아에 대한 혁명정부의 영향력은 초기에는 약했지만 혁명의 와중이라는 혼란이 오히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여러 가지 압박을 약화시켰으므로 한인 민족해방운동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다. 특히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그러했다.
소비에트 혁명정권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동안 홍범도와 함께 싸워왔던 러시아 적군 출신 장교 3인은 이제 러시아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아쉽지만 30명의 호위병을 딸려서 세 명의 적군 장교를 돌려보냈다. 독립군 호송병들은 이들을 호송하던 도중 9월 8일 연길현 장인강(長仁江) 구룡평(九龍坪)에서 중국군과 충돌하여 중국군 몇 명에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빚기도 했다.
9월 하순 약 300명의 홍범도 독립군 부대는 함북 무산의 건너편인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漁郞村) 부근 삼림지대에 주둔하며 국내 진입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10월 초까지는 국민회의 안무 부대 약 250명, 한민회(韓民會) 부대 약 200명, 신민단 약 200명 등이 홍범도 부대 주둔지 근처로 이동해 왔다. 한편 서일·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북로군정서 부대는 사관연 성소 생도 졸업식을 9월 12일 마쳤다. 그러고 나서 이 달 중순에 일부 병력을 나자구 등에 배치한 뒤 약 600명의 병력으로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의 근거지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김좌진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 배경에는 그곳에 대종교 신도들이 있어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데 유리한 여건을 갖췄다는 한 요인이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부근으로 이동했던 반면에 최진동 부대는 중·러(중국·러시아) 국경지대인 나자구 방면으로 향했다.

7. 일본군의 ‘간도출병’과 홍범도 연합부대의 성립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독립군 ‘토벌’이 실패로 돌아간 후 간도에 일본군을 직접 출동시켜 독립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간도는 중국 영토로 되어 있었으므로 일본군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며 불법으로 침입할 구실이 없었다. 이에 일제는 그들이 매수하여 조종하는 한 마적단으로 하여금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방화케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훈춘사건’이다.
사건 직후 일제는 일본영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함북 나남에 사단 본부를 두고 있던 19사단의 한 대대를 우선 훈춘에 불법으로 파견하였다. 일본 정부는 10월 7일에 일본 육군성이 제출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승인하고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 뒤 일본 정부는 중국 중앙정부에 일본군의 ‘출병’을 승인해 주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친일적 성향을 보이고 있던 만주 군벌 장작림의 묵인 하에 중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10월 14일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일본군이 불법적 간도 침입을 자행하면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동원한 병력의 규모는 한국 주둔 19사단 전부, 20사단 일부,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방해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동했던 연해주 주둔군의 11·13·14 사단의 일부 등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5,000여 명의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의 대략적 작전계획과 부대 배치를 보자. 일본군은 우선 바로 위에서 말한 25,000여 명의 병력과 남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關東軍)에서 동원한 병력으로 서·북간도의 독립군 부대 전체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넓게 포위하여 그 포위망을 좁혀 들어 가려했다. 다음 그 포위망 안에서 다시 제19사단 주력 12,000여 명을 3개 지대(支隊)로 편성하여 간도를 갑·을·병의 3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대가 오지 깊숙이 쳐들어가 독립군을 수색,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갑구역은 이소바야시(磯林) 지대가 맡게 하였는데 담당구역은 훈춘-차무정재 방면이었다. 을구역은 기무라(木村) 지대가 맡았는데 서대파-하마탕-백초구(百草溝) 방면이 작전구역 이었다. 병구역은 아즈마(東) 지대가 맡았는데, 용정-연길-두도구·이도구 방면이었다.
일본군은 이미 10월 7일부터 간도에 침입하기 시작했고, 홍범도와 김좌진 등의 독립군 부대를 상대할 제19사단의 아즈마 지대(사령관 육군 소장 아즈마 마사히꼬) 약 5,000명의 병력은 10월 15일 간도 용정에 출동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다. 아즈마 지대는 증강된 2개 보병 연대와 기병 연대, 포병·공병·헌병 등의 혼성부대였다.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의 작전 목표를 2단계로 나누어 세웠다. 제1단 계에서는 작전 개시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독립군을 철저히 색출하여 ‘섬멸’하고 반복 토벌을 되풀이 실시, 독립군의 무장항쟁 근원을 철저히 없앤다는 것이었다. 제2단계에서는 1단계가 끝난 후부터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여 있는 독립군 지원세력과 민간인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수색하여 무장투쟁은 물론 비무장독립운동까지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은 각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소바야시 지대는 10월 14일에 훈춘하(琿春河) 골짜기에 출동하였으며 기무라 지대는 10월 17일 왕청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아즈마 지대는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있는 독립군들을 추적하여 10월 18일에 출동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엄청난 일본군의 ‘토벌’ 공세에 직면하여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었는가?
10월 초까지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홍범도 부대 근처로 이동해 온 뒤 그 달 중순까지는 의민단(義民團) 약 100명, 허근이 이끄는 의군부 약 300명이 추가로 집결해 왔다. 북로군정서는 9월 중순 서대파를 출발하여 10월 12∼13일경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로 옮겨왔다. 이리하여 청산리 일대에는 도합 1,500 내지 2,0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독립군 부대 병력이 집결하게 되었다. 이들 독립군 부대의 대표들은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합해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간도 침입이 시작되었다는 정보에 접한 독립군 부대들은 10월 13일 이도구의 북하마탕에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홍범도 부대 외에 국민회군·신민단·의민단·한민회군 등의 대표들이 모였다. 이 때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하나의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군사행동의 통일에 의한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단(홍범도군을 국민회군에 포함시킴)의 무력으로 군사행동의 통일을 도모할것.
2. 국민회 군적(軍籍)에 있는 사람을 총동원하고 예정의 부서에 배치할 것.
3. 군량·군수품의 긴급 징집에 착수할 것.
4. 경찰대를 조직해서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사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虛)를 찌르거나 혹은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는 경우 외에는 전투를 개시하지 말 것.

이를 계기로 홍범도 예하 병력을 주력으로 한 ‘홍범도 연합 독립군부대’가 성립한 것이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홍범도는 일본군과의 접전에 매우 신중을 기했다고 생각된다.
홍범도는 곧 있을 일본군과의 결전을 예상하고 이도구에서 연합부대의 병사들을 매일 훈련시키면서 독립전쟁을 대비하였다. 10월 중순경 간도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첩자를 동원하여 그런 상황을 아래와 같이 파악 하였다.

“홍범도의 휘하 주력 약 800명은 … 매일 교련을 행하고 있다. 홍(홍범도)의 최근의 의향은 ‘일본군대의 출동에 의해 독립군은 이제 일·중(일본·중국) 양국 군대와 경찰 때문에 압박을 받음이 심하여 행동을 견제 당하고 있으므로 이때 일거(一擧)에 조선땅을 침습(侵襲)하거나 또는 간도 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거나 하는 하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각 지방에 군수품 징발의 명령을 내리고 있다. 최근 약수동 이도구 방면에서 식량·담배·짚신 등의 징발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홍범도 연합부대가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군수물자 조달에 열중하고 있을 때 다시 200여 명의 광복단 독립군이 합세하였다. 대부분의 독립군이 연길 방면인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에 비하여 광복단군은 서쪽인 안도현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홍범도 부대에 합류, 이채를 띠었다. 이는 홍범도가 평소에 광복단과 가까운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홍범도 연합부대의 병력은 무려 7개 부대에 1,400여 명 내외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 독립군 부대는 각자의 단위부대를 그대로 유지한 채 홍범도 부대와 직접·간접적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전투에 임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독자적 행동도 가능하였다.
홍범도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청산리에 도착하자 일본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 일본군의 정보자료에도 그러한 상황이 탐지되어 있으며 북로군정서에서 싸웠던 이범석(李範奭)도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고 회고하였다. 특히 이범석은 홍범도 연합부대가 터시거우(두도구) 방면, 북로군정서가 중앙의 송림평(松林坪)을 맡았고 의군부가 무산간도 방면의 버들고개를 분담했다고 하였다.
일본군이 삼도구 충신장 상촌(上村)에 도착하기 전날인 10월 19일에도 홍범도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수뇌들은 자리를 같이 하여 공동 대응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때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玄天黙)이 피전책(避戰策), 즉 이번은 분전의 좋은 기회가 아니니 은인자중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하는 주장을 펴서 여러 사람의 논쟁 뒤에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일본군의 대공세에 부딪혀 상황이 변함에 따라 싸우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본군과 격전을 바로 앞둔 독립군 장병들의 긴장된 분위기를 북로군정서 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이정은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나무잎 떨어져 산모습 조용한데
하늘은 높고 달빛 더욱 밝구나.
木落山容靜 天高月影郞

장사의 마음속엔 만마가 달리는데
새아침 기다릴 제 밤이 이리도 길구나.
壯士意萬馬 待旦夜漫長

8.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대활약


청산리 독립전쟁이란 북로군정서 및 홍범도 부대 등의 독립군 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그곳으로 침입해 온 일본군 아즈마 지대를 상대로 대소 10여 차례의 격전을 치른 끝에 적을 패퇴시킨 일련의 전투들을 총칭한 것이다. 종전에는 ‘청산리 전투’라는 용어가 주로 쓰였고 그 의미도 북로군정서 부대가 삼도구 청산리의 백운평(白雲坪)에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주었던 1회의 전투를 가리켰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단독, 또는 연합으로 수행한 10여 차례 전투를 모두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으로 그 개념이 확대되었다. ‘독립전쟁’이란 용어는 당시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사용하던 용어였다. 따라서 크고 작은 몇 차례의 전투가 종합된 청산리 부근의 전투를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청산리 독립전쟁은 김좌진 부대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로 알려졌으나, 근래 홍범도 부대 등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참가하여 큰 공훈을 세웠다는 내용이 사실로서 판명되었다. 청산리 독립전쟁에는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는데, 완루구(完樓溝) 전투와 고동하곡(古洞河谷) 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수행한 전투이고 어랑촌 전투와 천보산(天寶山) 전투는 북로군정서 부대와 공동으로 싸운 전투였다. 기타 백운평 전투·샘물골(천수평: 泉水坪) 전투·맹개골 전투·만기구(萬麒溝) 전투·쉬구(西溝) 전투 등은 북로군정서 독립군 단독수행의 전투였다.
홍범도가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며 싸운 전투는 이밖에도 다수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홍범도 연합부대가 단독으로, 혹은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같이 싸운 전투를 중심으로 간단히 보기로 하자.

(1) 완루구 전투


청산리 독립전쟁의 두번째 전투인 완루구 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일명 만리구(萬里溝): 홍범도는 말리거우라 함)에서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독립군을 포위하여 밀고 들어 온 일본군 아즈마 지대 주력 부대를 역습하여 섬멸적 타격을 가한 전투였다.
현재 완루구 전투의 정확한 위치와 전투상황, 그리고 피아의 전과 등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와 일본군 측에서 발표하거나 보고한 자료가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기록을 대조해 보면 대략적 윤곽은 알 수 있다. 완루구 전투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전투 직후 임정 군무부에서는『독립신문』에 전과를 발표하였고 기타『진단』잡지나 등사물 기록,『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의 우리 측 기록은 꽤 있다.
대개 우리 측 기록은 완루구 전투에서 일본군이 자기편 군대를 독립군으로 잘못 알아 서로 싸운 결과 큰 피해를 냈다고 했으며, 어떤 기록에는 일본군이 홍범도군을 공격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과에 대해서는 적 400여 명이 전멸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홍범도는 그의『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날 밤으로 말거우 조분고려(고려인 부락?) 둘러싸고 날밝기를 저대하는(기다리는) 중에 나의 심정에 (어쩐지) 솔난하여(꺼림직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聚軍)하여 (집합시켜)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포소리 한방 나더니 사방으로 미야(기관총?) 소리가 천지진동하면서 (일본군의)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번에 말리거우 민간촌(民間村)에 달려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 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든지 몰수이(하나도) 없데서(없어서) 나갈 밤수(방법)를 얻는(찾는) 중에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치듯 막 사격하니까 종천강(끝내?) 종지출(나가지) 못할 것을 그려 놓았다. 밤이 삼경되도록 진(포위망)을 풀지 못하고 답(꼬박) 새우다나니 (일본군을) 다 잡았다. 총 240병(자루)과 탄환 500발 받아가지고 조선놈 사복하고 몸빠져 나가는 놈 여섯놈 붙들어…”

위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이렇다. 홍범도는 연합부대를 이끌고 완루구의 어느 마을에 들어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머물고 있었는데, 그러한 소식이 척후병이나 첩자를 통해 일본군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새벽에 일본군 주력부대가 그 곳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한편 홍범도는 일본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는 마당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간 마을에서 숙영한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려 불안하였다. 오랜 그의 전투 경험에 비추어 그래서 그는 밤중에 독립군 병사들을 집결시켜 근처의 높은 고지에 매복시켰다. 과연 10월 22일 새벽에 일본군이 그곳에 공격하여 왔다. 그들은 홍범도 군이 마을에 있는 줄 알고 집중 공격을 가해 오면서 진입해 왔다. 적군이 반대로 홍범도 군의 포위망에 걸려든 것이었다. 결국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일본 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일본 측 기록은 어떠한가? 단편적 사실을 적고 있는 아래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연길현 이도구 홍범도 부대, 일본군에 대항: 10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이도구 어랑촌에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에 저항전투를 하여 아(일본군)에 (병사)즉사 1, 말 3두(頭) 죽음.”
-간도 일본총영사관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보낸 통보문에서

“지대(支隊)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아즈마(東) 여단장의 주력은 22일 이른 아침 일루소(日樓訴: 완루구를 말함) 깊은 산림지대에 도피한 홍범도의 부대와 충돌하여 현재 맹렬히 추격중이라고 한다.”
-간도 일본총영사관 분관 주임이 주중국 일본공사에게 보낸 전보에서

일본군 측의 기록을 아직까지는 충분히 찾지 못했으나, 위 기록을 통해 일본군이 고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반면에 자기들의 피해는 매우 축소하여 약간이나마 적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립군에 큰 손실을 주었다면 언론기관 등에 크게 선전하였을 것이다. 홍범도의 일지와 비교해 보면 전투 개시 시각이 비슷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메시노(飯野) 대대와 지대 예비대가 합친 500여 명 내외의 부대였는데 그들은 후일 공식 기록인『간도출병사』에서 “밀림 중에서 길을 잃어 남양촌에 이르러 숙영했다.”고 얼버무렸다.
결국 완루구 전투는 적군이 서로 오인하여 싸워 큰 피해를 낸 것이 아니라 홍범도 연합부대의 매복 작전에 의해 적이 섬멸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적 300여 명 내외의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는 홍범도가 그의 일지에서 총 240자루를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로 증명된다. 물론 독립군 측 손상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완루구·어랑촌 부근도


(2) 어랑촌 전투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 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세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위의 독립군가처럼 완루구에서 적을 격멸한 홍범도 독립군 부대는 왕성한 사기로 어랑촌 방면으로 향했다.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격전이었으며 홍범도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부대가 공동으로 적을 타격한 전투였다. 이는 북로군정서가 먼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위기에 빠졌을 때 홍범도 연합부대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으로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어랑촌은 경술국치(‘한일합방, 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의 농민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약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이 마을 주변의 고지에서 10월 22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600여 명 가량과 홍범도 연합부대 700 내지 800여 명이 아즈마 지대의 1개 기병연대와 1개 보병 대대가 연합한 1,500명 내외의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것이다.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 독립전쟁의 세번째 전투인 샘물골 전투 이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어랑촌 서남단 고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돌진하였다. 왜냐하면 샘물골 전투시 빼앗은 적의 문서를 통해 적 주력부대가 바로 어랑촌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빨리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대병력의 일본군에 포위될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김좌진 부대는 부근의 높이 874미터의 고지를 선점하였다. 과연 얼마 후에 일본군은 기병과 보병 연합으로 대거 몰려와 군정서 부대를 사면에서 둘러싸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군정서군은 적보다 소수였고 화력도 약했으나 유리한 지형에서 싸웠으므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加納) 대좌의 직접 지휘 하에 오전 9시부터 독립군을 공격하며 주위에 있는 일본군을 추가로 집결시키려 하였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군정서군은 불리한 전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완루구 전투에서 적을 궤멸시키고 안도현 방면으로 행군하고 있던 홍범도 연합부대는 김좌진 부대가 많은 일본군에 포위되어 혈전을 치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지원하려고 어랑촌 방향으로 진격해 왔다. 결국 양 독립군 부대는 이날 오후 7시경까지 생사를 건 일대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홍범도가 통솔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있는 고지 바로 옆의 최고 고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의 배후에서 갑자기 맹공을 퍼부었다. 군정서군을 공격하는 데 열중하고 있던 적군은 불시에 등 뒤로부터 공격을 받아 많은 손실을 냈고 군정서군을 공격하던 병력을 나누어 홍범도 부대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홍범도 부대에도 기관총이 있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김좌진 부대는 전투 당시 홍범도 부대가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던 사실을 잘 알지 못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가 적을 공격하자 일본군의 다수가 홍범도 연합부대 쪽을 향해 몰려들었으므로 자연히 김좌진 부대를 포위했던 포위망이 풀리게 되었다. 따라서 양 독립군 부대들은 숫자상으로는 대등하지만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적에게 심대한 손상을 주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기관총과 박격포 등 우세한 중무기로 맹렬히 쏘아 댔으므로 독립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북로군정서 부대는 처음에 많은 적의 포위 공격을 받아서 피해가 컸다. 군정서의 기관총 중대는 많은 전사자를 냈고 산모퉁이를 방어하던 1개 소대도 전멸하고 말았다.
독립군 측은 김좌진 군이나 홍범도 군이나 모두 항전의식이 투철한 데다 지형상 유리한 지점을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에 돌격하여 올라오는 적을 내려다 보면서 사격하여 수백 명을 살상하는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온 종일 진행된 전투는 어두워지면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군정서 독립군 병사들은 충분치 못한 급양으로 굶주리며 싸워왔으나 동포들의 헌신적 지원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북로군정서 군은 홍범도 군의 적 공격에 힘입어 산줄기를 타고 서북쪽으로 퇴각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도 군정서 독립군의 일부와 합세하여 야음을 틈타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 철수함으로써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적도 독립군으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자 공격이 점점 약화되었고, 어두워지는 틈을 이용하여 패잔병을 수습하고 어랑촌을 거쳐 이도구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어랑촌 전투는 약 3,000 내지 3,500여 명의 피아간 병력이 충돌한 대격전이었고 1920년대 초반 무장항쟁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 또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둔 승전이기도 하였다.
어랑촌 전투에서 양 측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명쾌히 밝혀주는 자료는 다른 전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없다. 피아간의 자료를 냉정히 비판하여 그 진상을 올바로 파악하여야 하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 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를 300여 명이라고 발표했으며 부상자의 통계는 발표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군은 전투 직후 ‘조선군’ 사령관에게 전사 3명, 부상 11명을 냈다고 피해를 매우 줄여 보고했으며 독립군 측 사상자는 일체 밝히지 않고 기관총 1기, 소총 11정, 탄약 1,200발, 안경 1개를 노획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 일본 육군성에서는 10월 22일 봉밀구 전투에서 74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조사하였다. 그러므로 앞의 일본군 보고가 허위보고라는 것이 판명된다. 더욱이 독립군 측 사상자 숫자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그들이 패전하였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군정서에서 연성대장으로 싸웠던 이범석은 이 전투에서 가노 연대장을 비롯한 적 1,000여명이 살상되었다고 하였다. 홍범도는 정확한 숫자를 말하지는 않았으나 “기관총을 걸고 일병 대부대에다 내두르니 쓰러지는 것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고 회상하여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회고하였다.
일본군은 보고할 때마다 독립군을 패퇴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 전투에서 그들이 패전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간접적으로 실토하였다.

“봉밀구 및 청산리 부근에서 아즈마 지대의 전투 조짐이 있는데, 이 방면에 있는 적도(賊徒: 독립군)는 김좌진의 지휘하에 있는 군정서의 일파와 독립군 중 홍범도가 지휘하는 일단(一團)과를 합하여 기관총 등의 신식 병기를 갖고 약 6,000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며, 따라서 다른 방면과 달리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10월 25일 조선군 사령관의 육군대신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당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의 총병력은 2,000명 정도였으며, 일본군은 평소 독립군의 병력을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랑촌 전투에서 패배하자 자기들의 병력보다 독립군이 월등히 많은 6,000여 명이라서 패전한 것 같이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또 친일 어용신문인『매일신보』도 1920년 10월 24일자에서 “22일의 대격전”이라는 소제목으로 기사를 뽑은 뒤 일본군과 독립군 양편의 사상(死傷)이 매우 많다고 보도하였다. 이범석은 어랑촌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가 가장 많았다고 하면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 측의 피해는 알 수가 없으나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싸웠던 일본군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즈마 지대가 며칠 뒤인 27일 아침 ‘조선군 사령관’의 사전 승인도 없이 함경북도 무산과 회령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개 중대와 1개 대대를 원병으로 요청하여 즉시 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즈마 지대가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인명 손실을 입어 독립군 추격의 능력을 잃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어랑촌 전투는 홍범도 및 김좌진 양 독립군 부대가 공동으로 적을 공격하여 300명 이상의 적을 살상한 대승전이었다고 하겠다. 이 때 일본군 연대장이 사살되었는지 그 여부를 일본 측 기록을 통해 검증하지는 못했으나 이범석이 회고하는 내용은 그만큼 일본군의 피해가 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랑촌 전투에서 홍범도는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구원하고 아즈마 지대의 정예 기병연대를 섬멸하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어랑촌 전투 직후 홍범도는 청산리 독립전쟁 개시 직전에 성립한 7개 부대 약 1,400명의 연합부대를 각 부대별로 흩어져 싸우게 하고 자신은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같이 행동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적의 대부대가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독립군 부대가 한꺼번에 행동하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3) 천보산 전투


홍범도 부대원의 일부와 이범석이 이끄는 1개 중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그리고 25일 새벽 한 차례 천보산 서남쪽을 지나다가 은동광(銀銅鑛)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 가운데 24일의 전투는 이범석 등 군정서 부대가 수행한 전투였다. 그리고 25일 새벽의 전투는 식량을 구하러간 소수의 홍범도 부대원들이 적을 습격하여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모두 세 차례의 습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자 크게 당황하여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연길)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증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충하였다. 이로 보아 일본군의 피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독립군 2명이 전사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피해는 발표하지 않아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

간도 지방지도


(4) 고동하곡 전투


고동하곡 전투는 청산리 독립전쟁의 종반기에 펼쳐진 전투였다. 지금까지는 이 전투가 청산리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홍범도 부대는 간도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도 산발적 전투를 전개하였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일본군과 중국 마적의 연합부대와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고동하곡 전투는 고몽하(古同河)라는 하천 주위의 골짜기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는 1920년 10월 25일 한밤중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홍범도 부대와 국민회군, 약간의 군정서군 등 약 400여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아즈마 지대장이 직접 거느리고 온 150여 명의 일본군과 접전한 전투였다. 홍범도 부대는 이들과 격전하여 2개 소대 100여 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육군 소장인 아즈마 지대장이 휘하 장교도 별로 없이 직접 전투의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대장인 아즈마 자신이 직접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나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청산리 독립전쟁을 경과하며 아즈마 지대가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때 아즈마의 지휘를 받으며 싸운 장교는 메시노(飯野) 소좌였다. 처음 일본군이 출동할 때 메시노 소좌는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겨우 150여 명을 이끌고 출동했단 말인가?
보병중대는 대위가 지휘관으로 편제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메시노 대대는 그동안 독립군 부대와 싸우며 태반(3개 중대)을 잃고 겨우 1개 중대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즈마는 휘하의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다급하게 끌어 모아 홍범도 부대가 근방에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허겁지겁 추적해 왔다. 그것도 무려 50여 시간을 헤맨 끝에 … 궁상에 빠진 일본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그들 자신의 기록을 통해 검증해 보자.
아즈마 지대는 이 전투 직후 전투상보에서 당시의 정황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3. 피아의 병력: 적도(賊徒)의 병력은 약 350, 총기를 갖지 않은 자 약 30, 폭탄(수류탄: 필자) 100여를 가짐. 아(我) 병력은 보병 150, 기관총 3을 가짐.
4. 적의 단대호(團隊號: 부대명): 적은 홍범도가 거느리는 약 300, 국민회 및 김좌진의 부하 약 50 및 군정서원 약간 있고 그 총원(總員)은 불명하다.
5. 전투경과의 개요: 지대 예비대는 10월 22일 패퇴한 적단과 1일을 사이하여 10월 23일 오전 9시 20분 어로촌(어랑촌의 잘못) 서남방의 지구를 서방으로 쫓아 급진(急進)하였다. 처음 적도의 주력행동 방향은 불명하였으나 오후 4시에 이르러 적도가 전날 밤에 (머문) 노영지(露營地)를 발견하고 부근 주민을 캐물어서 적도의 노영 및 퇴각방향의 확증을 얻고 발자국을 찾아 밀림중에 방황하기 50여 시간, 25일 오후 10시경 전방 숲 가운데서 희미한 포연(砲煙)이 날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에 가까이 적도가 노영한다는 보고를 받고 적전 약 300미터 부근에서 부대의 전세를 가다듬고 메시노 소좌가 거느린 2(개)소대를 제1선으로 하고 나머지를 예비대로 하여 오후 12시 제1선으로 돌격을 결행하여 적의 전초(前哨)를 돌파했으나 적 본대의 노영지 옆쪽 및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또 절벽이 있으므로 돌격을 일시 중지시키고 다시 뛰어 넘어 적 본대에 돌입하여 분전한 후 오전 0시 45분 완전히 적도를 공격하고, 다음에 예비대를 제1선에 불러 적도의 습격에 대비하며 부근의 가장 높은 곳에 부대를 집결할 때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오자 장졸(장교와 병사)의 얼굴마다 기쁨의 기색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다만 애석하게도 적장 홍범도 및 그 막료(참모)를 우리 제1선 전방 수백 미터 사이에서 놓쳤다. 아(我)에 사상 없다….”

한편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미화한『간도출병사』는 위의 보고를 기초로 이 전투에 대해 기록하였으면서도 약간 다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차이를 보면 우선 기병연대로 하여금 어랑촌 방면의 독립군 퇴로를 차단하였다는 점, 각지에 있는 병력을 집결시키려 했으나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지대장 자신이 직접 독립군을 추격하러 나섰다는 것, 독립군 병사들이 여러 곳에 산재하여 난사를 계속하므로 쓸데없는 손해를 피하려고 부근의 1,743 고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는 점, 또한 자기들의 병력이 부족하여 철저하게 ‘초토’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다.
일본군은 위의 두 기록에서 그들의 사상자가 없다고 하면서도 독립군 측 사상이 30여 명이며 소총 7내지 10정, 탄약 1만발을 노획했다고 했다. 하지만 위의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고동하곡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하여 고지로 쫓겨 올라가게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처음에 일본군은 메시노가 이끄는 2개 소대 100여 명으로 독립군 진영으로 돌격을 개시하여 독립군의 척후대를 돌파하는 등 약간의 전과를 올렸다. 그들은 계속하여 홍범도 진영의 본대로 진입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자연적 장애물-하천과 절벽-에 부딪힌데다가 홍범도 등이 일본군의 내습을 알아차리고 부근에 흩어져 반격을 개시, 일본군을 포위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일본군 2개 소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당황한 아즈마는 뒤에 있던 예비대 50여 병력을 앞으로 이동시켜 독립군의 추격을 황급히 막으며 부근의 1,743 고지로 쫓겨 올라 가게 되다. 이 고지에 패퇴한 ‘무적 황군’ 육군 소장 아즈마 등은 독립군의 추격이 두려워 새벽 내내 전전긍긍 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에 희색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홍범도와 그의 참모들이 수백 미터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 가는 데도 추격은커녕 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도 갑자기 야습을 받았으므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나, 오히려 역습을 가하여 승리를 이끌어 냈다. 아즈마는 겁도 없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용맹한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를 잡겠다고 나섰다가 큰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홍범도 등 독립군은 고지로 쫓겨간 소수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안도현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였다.

(5) 안도현(安圖縣) 전투


홍범도는 국민회군과 소수의 군정서원, 광복단 대원을 함께 거느리고 안도현 방향으로 향하였다. 이제 홍범도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아즈마는 홍범도 부대와의 전투에서 패퇴한 직후 독립군 부대를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대다수의 독립군 부대는 이미 그들의 포위망을 완전히 탈출해 버렸다.
고동하곡 전투 이틀 뒤인 10월 28일 간도 일본총영사관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포위망을 교묘히 탈출해 버렸고 홍범도가 다른 지역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일본군을 분쇄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이 각 간도 파견지대장에게 비밀리에 통보하였다.

“일본군대에 포위되어 이도구 및 삼도구 방면 삼림지대에 숨은 불령선인단은 교묘히 일본군대의 경계선을 돌파하여 일부는 삼림을 타고 이동하여 장인강(長仁江)의 상류지방 및 오돌도강(二頭江?)의 오지 및 사인반(四人班: 안도현), 사도구황직(四道溝黃直: 두도구 남방 약 6리), 세린하(細鱗河) 탄막동(炭幕洞: 두도구 북방 약 4리)으로 탈주한 자가 많다고 한다. 홍범도는 특사를 보내 훈춘·왕청현 방면의 불령단(독립군) 및 마적단에 응원을 구하고 … 왕청 방면으로부터의 응원을 기다려서 일본 군대를 협격 분쇄하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다 한다.”

위의 기록이야 말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의 분전상을 그대로 알려주는 자료라 하겠다. 홍범도는 10월 말 5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안도현 황구령촌(黃口嶺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안도현 내두산 지역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내두산(乃頭山) 지역에는 이청천(李靑天)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병력 1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광복단(光復團)과 연합, 실력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들과 합류하여 적을 역습하거나 아니면 국내의 삼수·갑산 등지로 진격해서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의 배후를 쳐버릴 결심이었다. 그러나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웅대한 계획은 여러 가지 차질이 생겨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홍범도 부대가 이동하던 도중 내두산의 광복단 근거지가 조선총독부에 매수된 일본 낭인(浪人) 나까노(中野天樂)와 친일 중국 마적 장강호(長江好)가 거느린 500여 명의 마적떼에 습격을 받아 초토화되고 말았던 것. 이 때 나까노는 광복단원과 많은 한인 동포들을 독가스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둘째, 범도(홍범도)가 북로군정서의 지휘자 김좌진과 국내 진입문제를 논의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
11월 초순 홍범도는 안도현 동북쪽의 대사하자(大沙河子)로 진출하였다. 그는 이동하면서 흩어진 독립군 병사들을 수습하여 자기 휘하에 편입시켰으므로 부대원이 7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홍범도 부대는 안도현을 지나면서 소속 불명의 중국 마적떼 및 일본 기병 연합 병력과 3일간이나 격전을 치렀다. 11월 7∼10일경 홍범도 부대는 그들에게 포위되어 3일간이나 공방전을 치른 뒤에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하였던 것이다. 이 때 홍범도 부대는 수십 명의 일본군과 마적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독립군도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위에서 말한 일본 낭인 나까노는 후일 자신의 기록『천락(天樂) 각서』에서 11월 7일경 홍범도 부대를 공격하려 했으나 안도현의 중국군과 홍범도군이 연합하여 항전하였기 때문에 겁을 먹고 싸우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따라서 홍범도가 싸운 마적떼가 장강호 휘하 소속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이 때 나까노 등은 독가스를 사용하여 무고한 한인들을 대거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약간의 지역적·시간적 차이는 있으나, 이 안도현 전투도 청산리 독립전쟁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11월 13일경 홍범도는 부하 신관세(申觀世) 등 9명을 반석현(磐石縣)에 보내 한·중(한국·중국)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게 하였다. 11월 하순에는 북만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먼 길을 떠날 여건에 맞지 않은 70여 명의 병사들을 집에 돌려보냈다. 본격적인 북상·망명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군의 소위 ‘간도출병’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일본군은 독립군 부대를 포위하고 완전 ‘소탕’하겠다고 큰 소리 쳤지만 대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1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받지 않았던가? 청산리 독립전쟁은 일본군이 독립군을 잡겠다고 청산리 일대를 포위하고 압축해 들어왔을 때 여러 독립군 부대가 단독, 혹은 연합으로 일본군을 요격하여 패주시킨 것이었다. 일본 관헌은 11월 중순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교적 솔직하게 그 실패를 토로하였다.

“…일본군 담당구역 안에서의 불령선인(독립군 및 항일 한인)의 토벌은 이미 각 부대 모두 일단락을 고했다. 그 효과는 일찍이 조선군(일본군 19·20 사단)이 2개 연대의 병력으로써 2개월 간에 소탕할 수 있다고 믿은 기대와 반대로 성적은 의외로 생각과 같지 않아서 말하자면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하나… 한편 불령선인의 독립운동이 성질상 바로 절멸(絶滅)키 어려운 사정에 비추어 볼 때 가령 다른 날 다시 군대의 출동을 요하는 것은 금일의 경우 이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해도…”
-11월 22일 사까이(堺) 간도 총영사 대리의 외무대신에 보내는 보고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전과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기록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나, 지은이의 견해에 의하면 독립군은 일본군 수백 명 또는 최대로 보아 1,000여 명 내외를 살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러시아 측 자료에 김좌진과 홍범도를 대장으로 하는 두 개의 빨치산 연대가 10월 21∼23일 사이에 전투를 벌였는데, 첫날 전투에서만 일본군 220명이 전사했고 홍범도의 제1빨치산 연대는 63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10월 29일에는 안무(安武) 중대가 함북 무산(茂山) 시가지를 점령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 독립군 측 피해는 350명 정도의 전사 및 부상자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홍범도 부대의 전과와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 살상 약 500 내지 600여 명, 자신들의 피해는 많아야 100 내지 150여 명으로 추계할 수 있다.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부대와 같이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어떤 면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독립군의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직전 수백 리에 이르는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하였고 도착 직후는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하여 훈련과 식량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과 벌인 전투의 전과는 그만 두더라도 의병에서 독립군 투쟁까지 계속한 홍범도의 지명도와 일본군에 대한 정치적·심리적 타격효과, 홍범도와 싸웠던 일본군 자신의 평가 그리고 중국 마적을 비롯한 여러 세력과의 투쟁 등을 비교해 볼 때 그러한 사실은 분명해진다.
줄곧 일본군의 가장 중요한 추적 목표가 되었던 인물은 홍범도였고 적의 공세를 분쇄하기 위해 독립군 부대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도 그였지 않은가? 후일 북로군정서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군정서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배경이 있다. 반면에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2월 중순 이래 상해 임정(상해임시정부)과 불편한 관계가 되자 홍범도는 아무래도 임정(상해임시정부)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양 부대는 선의의 경쟁상대가 되기도 했으나, 적과의 전투 시에는 서로 돕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느 부대가 어느 정도의 전과를 거두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여러 독립군 부대의 연합에 의한 대규모 승전이었다는 사실과 이를 계기로 더욱 무장투쟁이 격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9. 홍범도 독립군 부대의 시베리아 이동과 ‘자유시 사변’


홍범도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국내 진입작전을 펴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북만주를 거쳐 러시아령 시베리아로 건너갈 생각을 하였다. 그곳으로 가면 한인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혁명정부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 4월 6일 시베리아의 치타에는 볼셰비키계의 혁명정부가 원동(遠東)공화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는데, 1922년 11월 15일 소비에트 러시아 공화국에 합병될 때까지 한인 민족운동의 원조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독립군 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자, 간도 일대에 사는 한민족 동포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그들은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구타·강간하고 촌락과 학교·교회 등에 방화 약탈하는 만행을 마음대로 저질렀다. ‘경신참변(庚申慘變)’·‘경신대학살’, 또는 ‘간도대학살’로 불리우는 일본군의 이 야수적 만행에 적어도 3,469명(일설에는 1만명) 이상의 무고한 간도 한민족이 살륙당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일본군의 초토화 전술이었다. 홍범도는 일본군의 이러한 만행을 전해 듣고 분개하였지만 일반 주민들이 일본군의 피해를 받을까 염려하여 무익한 국내 진입작전을 포기하기로 했다
11월 하순부터 독립군 부대들은 왕청현 북부지역으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독립군은 일본군의 기무라(木村) 지대와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야스니시(安西) 지대 및 북만주 파견군 하네이리(羽入) 지대 등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았다. 거기에 독립군이 간도 지역에 남아있는 한 일본군의 초토화 전술은 계속되어 주민들의 피해가 더욱 많아질 것이므로 독립군 부대들은 간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 12월 초 홍범도는 돈화현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머무르며 해산한 병사의 재소집과 다른 부대와의 연락, 북만주 장정에 대한 준비 등에 몰두하였다. 특히 이 무렵 그는 임시정부 특파원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 등과 함께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執行軍務司令官)의 직책을 맡았다. 중로연합선전부는 그 해 8월경 상해 임시정부와 러시아 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攻守同盟) 조약문의 제5항 규정에 따라 설치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중·러(중국·러시아) 국경지방의 한인에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만 애초에 임시정부가 의도한 바는 중국과 러시아, 기타 세력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려는데 있었던 듯하다. 이 때 간도지부에서 집행하기로 한 내용은 매우 주목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선전지부장 및 위원은 주로 간도지방 및 러시아·중국 국경 방면에 거주하는 한인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함.
2. 집행군무사령관 및 그 휘하는 무력으로써 부호의 재산분배를 실행함.
3. 간도 지방 주재 일본군경에 대해 기회를 보아 습격함.
4. 앞의 각 조항에 대해 반대행동을 하는 자는 전부 극형을 가함.
-1921년 1월 8일 일제 고등경찰의 제 95호 국외정보 문서에서-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은 위의 2항에 규정된 ‘부호의 재산분배’를 실행하는 것이었으나, 홍범도가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중로연합선전부 간도지부 자체가 별 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범도(홍범도) 자신도 곧 북만주로 북상하여 시베리아로 가기 때문이다. 홍범도가 중로연합선전부 간도지부에 참가한 것은 사상적 취향에서 보다는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력투쟁을 벌이기 위한 동기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 해 12월 초순 김좌진의 군정서 독립군 부대 등 다른 단체와 연합한 뒤, 그 달 중순에 김좌진과 공동명의로 아래와 같은 재소집 권고서를 간도 지방에 반포하였다.

“해산한 우리 군사에 고함
지난번 우리 군대 병사를 해산시킨 것은 일시의 편법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광복사업이 성취되지 않는 한 이(군대)를 해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러시아) 노농정부(勞農政府)와 약정하여 군수를 충분하게, 또 무기와 탄약은 제한 없이 무료로 공급을 받게 되었다.
(봉기)이래 와신상담하며 산과 들을 누비면서 목우즐풍(沐雨櫛風: 비바람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함)에 쉬는 날 없이 상하가 서로 피를 마시고 맹약한 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1920년 12월 17일 간도 총영사관의 극비정보 문서 제88호에서-

위의 권고서 내용은 홍범도가 북상하게 된 주요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는 홍범도가 안도현을 출발한 뒤 중로연합선전부와 연락이 되어 러시아 노농정부의 지원을 약속받고 시베리아 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홍범도 등 연합 독립군 부대는 북만주로 이동하던 도중인 12월 13일 육도구(六道溝) 부근을 지나다 간도 토벌대의 한 지대를 만나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지대장 다까하시(高橋) 중위 등 18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 승전의 소식은 일제의『매일신보』1920년 12월 19일자에도 보도되었는데, 범도(홍범도)는 그의 일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 안도현을 향하여 얼마쯤 가다나니 폐깐(산속)으로 내다보니 힌풍(천막)이 보이길래 점점 가까이 간즉 일병 대장놈이 군사 15명으로 파수를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데 달려들어 멸망시키고 군량·군복·탄환·전화통 한개, 과자 (등) 여러 가지를 (전리품으로) 앗아가지고 안도현 싸닌방으로 간즉 어느 땐고 하니 동지달 14일이다….”

홍범도 등 연합 독립군 부대 700여 명은 1920년 12월 하순에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김좌진 부대를 비롯한 다른 독립군 부대도 비슷한 시기에 거의 밀산에 집합하였다. 이들은 대오를 정비한 뒤 북만주의 호림(虎林)·요하(饒河)현을 거쳐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의 안내를 받으며 1921년 1월에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갔다. 독립군의 시베리아 이동은 대한국민의회의 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대한국민의회의 회장 문창범과 재무부장 한창해(韓滄海), 자유대대장 오하묵(吳夏黙) 등 간부들은 독립군의 북만주 북상 소식을 듣고 1920년 12월 초순경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원동공화국 혁명군 제2군단 본부에 가서 독립군 부대들의 러시아 이동문제를 상의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협상은 잘 진행되어 독립군 부대들을 우선 이만에 집결시킨 뒤 다시 자유시(알렉셰프스크: 현재의 스보보드니)로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또 시베리아의 치타시에 있던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지도국 한인부 소속 김진·계봉우(桂奉瑀)·장도정(張道政) 등은 1920년 12월 21일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1921년 2월 10일 독립군 부대들의 대표회의를 치타에서 열고 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를 창설한다는 내부방침을 확정시켰다. 그 뒤 이들은 이 방침에 따라 만주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세력을 시베리아로 집결시키게 된다.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이 무렵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위에서 말한 대한국민의회와 러시아공산당의 결정 외에도 1920년 늦은 여름 임시정부의 이동휘·박용만(朴容萬) 등 무력투쟁론자와 러시아 노농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註5)이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만은 당시 중·러(중국·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국경도시로서 하바로프스크 이북의 흑룡주(黑龍州: 일명 아무르주)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파스크에 이르기까지의 연해주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던 백군(白軍) 및 일본 간섭군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였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홍범도 부대는 1921년 1월 초순 이만에 진입하여 약 2주일을 머물렀다. 원동공화국 제2군단은 독립군이 자유시로 가기 전에 무장해제를 시키려 했다. 그 이유는 수천 명의 무장세력이 자국 영토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적절한 통제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군 부대가 갖고 있는 무기는 일본제·러시아제·체코제 등 각종 무기가 섞여 있어 효율적 활용이 어려우므로 일단 회수한 다음 러시아제 무기를 다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독립군 장병들은 의구심을 갖고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한 고민 끝에 홍범도는 그 요구에 응하였다. 이리하여 홍범도 부대는 1월 26일 원동정부 제2군단에 자기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제공하였다. 그 무기는 간도 동포들의 피와 땀이 배인 성금으로 구입되었고 또 독립군 장병들이 애지중지하며 다루어 오지 않았던가! 일부 총기는 일본군경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빼앗은 것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소중한 총을 내놓으면서 매우 아쉬워했다. 마치 자기의 생명이나 되는 것처럼…
홍범도는 일단 시베리아에 들어온 이상 원동정부 당국과 원만한 협조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원을 받아 일제를 상대로 다시 독립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무기를 혁명군 제2군단에 줄 때 그 숫자를 자기의 일지에 정확히 기록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본제 총기류가 709정, 러시아식 총기 4정, 탄환 4만 9천여 발, 수류탄 2,804개, 권총 40자루, 나팔 6개였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1907년 후치령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노획한 일제 기병총만은 내놓지 않았다. 영원히 자기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기 위해…
홍범도는 1921년 1월 하순 이만에 부대원 380여 명을 남겨 놓고 나머지 대원 220여 명과 함께 동년 2월 6일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자유시에는 이미 최진동 부대가 1월 하순에 와 있었고 안무 군대도 2월 초순에 옮겨 왔다. 연해주와 시베리아·만주 등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빨치산(의용병) 및 독립군 부대들은 이 해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모이게 된다. 註6) 홍범도 등 독립군 부대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독립군 병사들을 더 모아 1921년 1∼2월 초 이만에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 일명 대한총군부)’ 를 조직하고 군사통일을 실현하였다. 여기에는 만주에서 온 독립군 부대뿐만 아니라 청룡대, 사할린대(박일리아 지휘), 이만대(박그레고리 지휘) 등 연해주 지역에서 온 의용병(빨치산) 부대도 참가하여 병력이 3,000여 명이나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 조직에서 서일·최진동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볼셰비키파를 지원하며 활동하던 한인 의용병(빨치산) 부대들은 1920년 3월 적군(赤軍)과 같이 니콜라에프스크(일명 니항: 尼港)로 진격하여 일본군 및 일본인 거류민 700여 명을 전멸시켰다(이른 바 ‘니항사건’). 이후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대공세를 취하자 한인 의용병들은 연해주에서 흑룡주로 옮겨오게 되었던 것이다.
1921년 4월 중순 이만(일설에는 자유시)에 모인 많은 단체의 수뇌들은 다시 독립군대회를 열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이름을 ‘대한독립단’으로 바꾸고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홍범도는 이 때 부총재의 직책을 맡았는데, 그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대한독립단註7)
총재 서일 군사고문 이청천
부총재 홍범도 제1여단장 김규식(金奎植)
고문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참모 박영희(朴寧熙)
외교부장 최명록 제2여단장 안무(安武)
사령관 미정(김좌진 겸임설이 있음) 참모 이단승(李檀承)
참모부장 김좌진 제2여단 기병대장 강필립
참모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이 대한독립단은 본부로서 총재부를 두는 한편, 본부에 외교부를 두기로 했으며 제1여단은 러시아령 이만에 본부를 두고 제2여단은 만주 영안현에 본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또 사관학교를 영안현에 세우기로 하고 교관으로 이범석과 김홍국(金洪國)을 임명하였다.
총재 서일은 현천묵(玄天黙)을 북간도에, 나중소를 서간도에 파견하여 각 단체의 통일과 러시아 볼셰비키파 및 중국의 후원, 사관학교의 설립 사실 등을 널리 선전케 하고 양 간도 방면에서 독립사상의 환기와 여론의 주의촉구, 동지 규합 등을 대대적으로 추진토록 하였다. 또 서일은 이동휘의 명령을 받고 1개 중대의 독립군 유세대(遊說隊)를 조직하여 5월 하순 간도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 추동하도록 했다.
대한독립단의 결성을 계기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거의 모든 독립군과 의용병 세력이 하나의 지휘체계로 통합되었으며 총지휘는 서일과 홍범도가 맡게 되었다. 총재 서일은 대종교 지도자이며 동시에 무장투쟁을 적극 제창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으나,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종교지도자이며 무장투쟁을 뒷받침한 이론가였지 군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의 총지휘는 실질적으로 홍범도가 하게 된 셈이었다.
대한독립단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온 3,000여 명의 병력을 2개 여단으로 편성하였으나, 그 뒤에도 무장투쟁에 뜻을 같이하는 많은 청년들이 찾아 왔으므로 병사의 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이제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일제와 결전을 벌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독립단의 이 같은 원대한 계획은 이 조직의 성립 직후 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계열의 일부 독립군이 러시아 원동정부의 공동항일투쟁 제안에 반대하여 북만주로 되돌아감으로써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발생한 ‘자유시 사변(일명 흑하사변, 1921)’ 으로 결정적 타격을 받고 말았다.
1920년 9월 당시 흑하(黑河: 우수리강) 지방의 적군(赤軍) 수비대장 오하묵이 ‘한인 자유보병대대’를 창설하고, 이어 10월에 니콜라에프스크에서 활동하던 박일리아의 ‘니항군(尼港軍)’ 이 자유시에 도착한 뒤 자유시의 한인 무장세력은 이제 양파를 중심으로 크게 양분되어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최진동·이청천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오하묵과 박일리아파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양파에서는 간도의 독립군 부대들을 서로 자기파에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1921년 전반기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 민족운동계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와 연계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한인 무장세력의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하묵·김하석·최고려·문창범 등은 이르크츠크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고, 박일리아·박진순(朴鎭淳)·한형권(韓馨權)·이용(李鏞)·박애(朴愛) 등은 상해파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양 파는 형성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의 대립이 없지 않았고 한인 민족운동에 대한 노선의 차이도 있었다. 즉 한국의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느냐, 아니면 혁명과정에 있는 러시아(시베리아)의 방위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우선 싸우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국을 해방시킨 뒤에 세우려고 한 정부의 형태에 관해서도 상당한 견해차가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1921년 3월 중순 이르쿠츠크에서 긴급히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만주에서 오는 독립군 부대와 시베리아 한인들이 조직한 모든 의용대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오하묵이 지휘하는 한인 자유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적군체제로 개편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의장겸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깔란다라시윌리가 임명되었고 부사령관에 오하묵이 임명되었다. 5월 2일에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임시사령관 자격으로 오하묵이 자유시에 부임하였고, 같은 달 18일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정식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때 의장겸 총사령관에 깔란다라시윌리가 그대로 유임되었다.
홍범도는 양파의 갈등 속에서 가능하다면 이들을 조정하여 단결을 이루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5월 6일에 오하묵·최진동과 함께 자유시에 집결된 각 군사단체의 통일문제를 협의하였다. 6월 2일에는 박일리아의 방해를 무릅쓰고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이끌고 오하묵 진영으로 넘어왔다. 범도(홍범도)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정통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에 가담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해파의 박일리아 등이 지나치다고 판단하였다. 러시아 측의 지원을 받아 일제와 투쟁하기 위해서는 양파의 단결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고 군정의회 측의 지휘를 받는 것도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홍범도 부대의 오하묵 진영으로의 이동은 상해파-박일리아 진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홍범도 부대의 군정의회 측 가담은 커다란 화를 면했다는 점에서 범도(홍범도)에게는 무척 다행이었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부대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6월 25일 안무·이청천 등 부대와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군정의회 사령관 깔란다리시윌리와 오하묵은 자기 진영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박일리아 부대 및 일부 간도 독립군 부대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다. 군정의회 측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한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누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박일리아 등 상해파 독립군 측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군정의회 측에서는 급기야 무력의 행사를 결정하였다. 1921년 6월 28일 깔란다리시윌리와 오하묵은 자유대대 및 러시아 적군 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 의용대’ 로 불리우던 박일리아 진영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참극을 빚고 말았다. 이 공격으로 사할린 의용대는 물론 그곳에 같이 있던 최진동·허근 등의 독립군 부대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상해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때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큰 피해가 났다고 한다. 반면 군정의회 측에서는 그 해 9월 30일 사망 41명, 도주 50명, 포로 900여 명으로 피해를 공식발표하였는데, 피해가 축소된 듯 하다. 또 현장에 있었던 김승빈(金承彬)에 따르면 전사 30여 명, 익사자 상당수, 포로 800여 명이었다고 한다. 포로 가운데 다수는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넘겨져 벌목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자유시 사변(또는 흑하사변, 1921)’이라 한다.
홍범도 부대는 다행히 군정의회 측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그 현장에 있지 않았고 아무런 손실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한인 독립군과 의용병 병사들이 원수 일제와 싸우기는커녕 같은 동포와 동지라고 여겼던 러시아 적군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고 다수의 사상자가 나지 않은가! 역전의 용장 홍범도는 이 사태를 전해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 무슨 불행한 사건이란 말인가? 그러기에 그는 여태껏 단합과 통일을 외쳐 오지 않았던가? 이런 사태를 좋아할 당사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 외에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자유시 사변(1921)은 매우 안타까운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사건은 그 내막이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한인 민족 운동 세력 사이의 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분과 혁명정부의 한인 무장세력에 대한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엇갈려 발생한 것이었다. 만약 오하묵과 박일리아 등이 단합했더라면 후일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수많은 시련을 이겨왔던 홍범도였지만 자유시 사변(1921)은 대단히 불행한 비극으로 가슴속 깊이 아로 새겨졌다. 그가 기대했던 적군과의 합작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가능한 것이었다.

제5장 만년의 홍범도

1. 시베리아·연해주에서의 홍범도


자유시 사변(1921) 후 한인 무장 세력은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사변(자유시 사변, 1921)의 와중에서 탈출한 일부 병사들은 연해주나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일단 혼란을 수습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시에 의해 7월 초 자유시에 남아있는 한인 병력 전부를 바이칼 호수 근처의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한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일제와 싸우려는 목적을 갖고 있던 다수의 독립군 출신 장병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홍범도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이미 무장해제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힘이 없었고 또 좀 더 기다려보면 러시아 혁명정부에서 무언가 기대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겠느냐는 희망도 있어서 대부분의 한인 병력은 거의 두 달 뒤에야 이르쿠츠크로 가게 되었다.
1921년 8월 말 홍범도 부대는 자유시 참변 후 남은 부대원 1,745명에 포함되어 이르쿠츠크로 갔다. 홍범도 부대는 다른 한인 부대와 같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赤軍) 제5군 직속 한인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 범도(홍범도)는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한인 병사들은 적군으로 개편되면서 러시아제 무기를 정식으로 지급받을 수 있었다. 홍범도는 스스로 독립군 사령관임을 자임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제 적군 내의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장이 되었다. 그의 나이 만 53세 때의 일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정식 군대로 편제된 이상 다시 일본군과 싸우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해파에 속했던 박일리아와 이용·채영(蔡英) 등은 자유시 사변(1921) 후 나머지 병력을 수습하여 연해주에서 러시아 백군 및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이르쿠츠크로 온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한인 무장 세력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다른 52명의 한인 대표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는 코민테른 주최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일명 극동인민대표대회)가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하여 세계정세와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 사회주의 국가간의 갈등 양상 등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당에 관한 문제도 깊이 있게 토론되었다. 또 여기에서는 ‘극동 여러 민족에 대한 선언’ 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 선언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한국문제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으며 여러 민족의 대중이 단결하여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자는 호소도 들어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이 대회의 참가를 계기로 부쩍 정치의식이 향상되었고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극동제민족대회가 끝난 뒤 2월 초순경에 당시 러시아의 실질적 영도자 레닌을 만났다. 레닌은 범도(홍범도)에게 자유시 사변(1921)에 대해 물어 보았으며 기타 한민족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도 의견을 주고받았다. 범도(홍범도)는 자유시 사변(1921)에 대해 중립적 입장에서 레닌에게 해명했으며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러시아 공산당이나 코민테른에서 합리적 지원정책을 펴나갈 것을 당부했다. 그는 레닌을 만난 것이 큰 영광이었고,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등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했으며, 범도(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 주어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범도(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범도(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범도(홍범도)는 매우 기뻤다. 지난 날의 레닌 정권에 대한 약간의 불만이 좀 풀어지기도 했다. 면담이 끝난 뒤 범도(홍범도)는 레닌·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뒷날 그는 레닌을 만날 때 의외로 가슴이 떨리더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는 수많은 전투와 곤경을 겪었지만 두려워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1922년 2월 중순 다시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1923년 3월경까지 그곳에 주로 머물렀다. 그는 1922년 6월 자유시 근처의 블라고웨시첸스크에서 이동휘·문창범 등과 함께 한인민족운동 단체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 의 조직에 참여하였고, 그해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고려중앙정청의 정식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한인사회의 자치문제를 협의하였다. 그가 자유시 사변(1921) 직후 군대에서 예편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된 것 같다. 홍범도는 만 55세가 되는 1923년 중반경에 제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적군으로 개편된 한인부대가 이르쿠츠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1923년 3월까지는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1923년 4월부터 8월 초까지 치타에 머물며 한인 부대를 조직하려고 애썼다는 것, 그리고 같은 해 9월 제대한 나이 많은 동지들과 함께 이만 근처 까잔린 구역(싸인발)에서 콤비나트(집단농장)의 관리위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점으로도 명백하다.
1922년 4월 레닌이 은퇴하고 스탈린이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자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급변하였다. 또 그 해 10월 이후 볼셰비키파는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반대파인 백군(白軍)을 완전히 제압했으며, 이어 일본 간섭군도 같은 달에 철수하였다. 스탈린 정부는 그 해 12월 말 제1회 전연방(全聯邦) 소비에트대회를 열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을 출범시켰고 연해주도 완전히 통치구역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스탈린의 러시아 공산당은 이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화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철수한 일본군이 다시 러시아에 침입하는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한인 무장병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취하였다. 그 결과 적군에 편입되어 오하묵의 지휘를 받게 된 병력을 제외한 다른 한인 무장세력은 1923년 1월부터 소련 경내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항일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종전과는 달리 소련정권이 한인 무장세력에 대해 지원을 할 필요가 별로 없게 상황이 바뀐 것이다.
홍범도는 제대한 뒤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 약소민족의 슬픔을 느꼈지만 이제 와서 다시 간도로 갈 수도 없었다. 그의 나이 벌써 환갑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그는 아직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버리지 않은 채 1923년 8월 블라고웨시첸스크·하바로프스크 등지를 다니며 정부 당국과 협의한 결과 이만 근처의 까잔린구역(싸인발)의 토지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50여 명의 제대한 동지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범도(홍범도)는 이만 근처의 싸인발에서 1923년 9월경부터 1927년까지 농업조합을 세우고 약 4년간 농사를 지었다. 거기에서 그는 식량을 비축하여 군자금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수확이 신통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재기 노력은 내용이 약간 잘못되었지만 국내의『동아일보』1923년 11월 15일자에 보도될 정도였다.

홍범도 무송현(撫松縣)에
삼백명 부하를 이동한다고
노령 추풍에 근거를 둔 고려혁명군 제3군 사령부장 홍범도는 요사히 부하 300명을 모도와 조선 내지로 침입할 목적으로 무송현 동산(東山) 방면으로 이동을 하얐다….

범도(홍범도)는 연해주에서 처름으로 양봉(養蜂) 농업협동조합을 세우기도 했으나,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기 시작했으므로 꿀을 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1926년 아내 이씨를 잃은 지 18년 만에 재혼하였다. 상대는 근처에 살고 있던 과부 이인복씨였다. 이인복 여사는 범도(홍범도)보다 나이가 3∼4세 아래였고 슬하에 손녀 에까체리나도 데리고 있었다. 그의 재혼은 주위 동료들의 강력한 권유에 힘입은 바 컸다. 주위의 동료들은 범도(홍범도)가 아무 혈육도 없이 홀아비로 사는 게 안쓰러웠다. 범도(홍범도)가 군대에서 예편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자기들의 지도자인데, 너무 쓸쓸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남은 혈육이었던 둘째 아들 용환(홍용환)도 자유시 사변(1921) 직전인 1921년 6월 7일(음력 5월 2일) 만주 밀산에서 병사한 뒤 사실 범도(홍범도)는 외로웠다. 그는 용환(홍용환)이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할 범도(홍범도)가 아니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할지언정. 이인복 여사가 범도(홍범도)와 같이 지내자 생활은 좀 나아졌다. 또 동지들을 초청해서 대접할 수도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평소에 도무지 말이 없는 범도(홍범도)였지만 이인복 여사가 데리고 온 에까체리나를 보면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자식들과 같이 지내본 적이 별로 없는 범도(홍범도)에게는 양손녀가 무척 귀여웠다.
1927년 10월 범도(홍범도)는 소련 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증번호는 578492번.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또 줄곧 같이 일제와 싸워왔던 동지들을 데리고 집단농장을 이끌자면 당원자격이 필요하기도 했다. 연해주 지방에서 사회주의화 작업이 추진되면서 한인들을 부당하게 억압하거나 음해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로 탈바꿈하느라고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 어지러운 가운데 소수민족인 한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아가 연해주 지역의 한인 사회를 보호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홍범도와 같이 잘 알려진 인물이 당원이 되어 활동하는 일도 중요한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1928년 7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 이만 남쪽 스파스크의 진동촌으로 이주해서 한인 의용군(빨치산) 출신 인력을 이끌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진동촌은 흥개호(興凱湖) 옆에 있었으므로 여건은 좋은 곳이었으나, 러시아인들이 주축이 된 다른 농장의 비협조로 농사에 실패하였다. 물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회원들을 데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흥개호 부근의 카멘노 릐발로프 초원 치머우에 있는 ‘항가(흥개호의 중국식 발음)의 별’ 이라는 콤비나트에서 지도자로 일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1929년 겨울부터 만 65세가 되는 1933년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특히 여기에서의 농장경영은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넓은 초원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바꾼 뒤 농사를 지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장의 회원들은 말 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런 고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쓰빠쓰까(스파스크) 진동촌 와서 빨치산 알쩨리(조합)를 조직하여 농사하나 (러시아인들의) 달려사 쏩호스(국영농장)에서 물을 잘 주지 않아 추수 후에 회계해 본즉 쏩호즈 빚진 것이 500원을 진 것을 그나왈쳐서 그 빚 물고 그곳에서 떡까미나 어리발 빡끌로(카멘노 릐발로프 초원) 토지를 얻어 가지고 마(馬)·소 한 개(마리) 없이 회원들 어깨에다 멍지(멍에)를 걸게 만들어 메고 후치(농기구의 일종)로 째고 (하여) 조 21겍따르(헥타르), 콩 두 겍따르(헥타르)로 (192)8년도에 농사하여 대작(풍작)으로 되었는데, 까멘나 어리발롭 홍두애(공산당?) 기관에서 홍범도 알쩨리 선봉조합을 다른 곳으로 가라 하면서 어디든지 지시도 없이 가라한즉 (어떻게 할 수 없어) 모쓰크와 깔리닌(당시 명목상 소련의 최고책임자) 선생께 청원올렸더니 (깔리닌이) 변강 크라이(원동 변강(邊江)혁명위원회)에 명령하되 “홍범도(가) 몇천 날가리(헥타르)라도 요구하는 대로 획정하여주라!”고 내리므로 천 겍따리(헥타르)를 떼어 가지고 관개(灌漑)공사하여…”

위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홍범도가 빨치산 출신 회원들을 영도하여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언제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투쟁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범도(홍범도)는 ‘항가의 별’ 콤비나트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여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이 지역에서 벼농사는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3∼4년경 상부의 명령으로 러시아인들의 직커우재 콤비나트와 연합했다가, 농장 경영에 실패하고 말았다. 범도(홍범도)는 몹시 속이 상했다. 한인 회원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놀기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은 도무지 농사일을 하지 않았고 또 잘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불행한 결과가 양 민족의 민족적 특성을 무시한 당의 일방적 정책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또 이것은 소수민족에 대한 암묵적 탄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정책수행 과정에서의 조그만 실책으로 여겨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은 당원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상부의 명령을 거역할 처지도 못되었다. 독립된 자기 조국을 갖지 못한 식민지 민족, 조국을 떠난 망국민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범도(홍범도)에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1929년 겨울에 부근의 소왕령(우수리스크) 소재 한인 제76연대의 명예군인으로 추대된 사실이었다. 한인 76연대는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으로 개편되었던 한인 부대가 우수리스크로 옮겨온 뒤 연해주 지방의 한인 청년들을 흡수하여 개편되었으므로 모범적 민족군대로 명성이 높았다. 76연대는 10여 년 동안 존재하면서 수천의 한인 정예 군인을 양성하였고, 수백 명의 한인 장교들을 배출하였다.
당시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는 상당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한인 부대는 물론 다수의 학교 특히 고려사범전문학교와 벼재배업전문학교까지 세워 졌다. 76연대의 명예군인 홍범도는 3·1운동(1919) 기념일이나 76연대 창립기념일, 8월 29일의 국치일(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등에는 으레 부대나 학교에 초대되어 동포들의 애국심을 기르는 강연을 하곤 하였다. 그의 강연은 주로 적과의 전투담이었으나, 동포들의 단합과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었다. 이미 60이 넘은 노인인 그였지만 피끓는 청년들 앞에서면 눈에 정기가 돌고 목소리는 높아졌으며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강단에 설 때는 언제나 군복차림이었으며 레닌이 준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1928년 가을 홍범도를 만난 적이 있던 정태는 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농부로서 홍범도 대장은 시넬(군복?)과 또는 길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나간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아, 선생님. 어찌 그렇게 일하십니까? 시넬을 입고 가방을 멘 채…”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먹는다오.”하는 그는 조선 낫으로 그냥 가을을 하였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 …왜놈들을 벨 때 돕자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조를 벨 때 돕자는 건 그리 반갑지 않어.”
-『레닌기치』1968년 8월 27일자에서 -

1934년부터 1937년 9월 초까지 범도(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의 수청(水淸: 스찬이라고도 함)에 있는 ‘뿌찌 레닌나(레닌의 길)’ 콜호즈(농업협동조합)에서 지도자로 일했다.

2. 중앙아시아에서의 만년


1937년 8월 하순 수청에서 일하고 있던 범도(홍범도)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소련의 실질적 영도자였던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연해주 지역의 모든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 명분은 “원동지역에 대한 일본 간첩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였다. 연해주 지방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일본의 스파이(첩자) 노릇을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 일어나고 만주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이 생긴 뒤 다시 1937년 7월 일제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만주와 접경지역인 시베리아 및 연해주의 방위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1년 뒤인 1938년 7월부터 8월까지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소련 국경을 침범한 ‘장고봉(張鼓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스탈린 등은 이런 정세 하에서 소련 동부지역의 근본적 방위대책은 세우지 않고 엉뚱하게도 극소수 한인들이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모든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킬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스탈린의 이 같은 폭력에 한인들은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많은 한인들이 이무렵 부당하게 희생당했는데, 저명한 장교 오하묵과 작가 조명희(趙明照) 등도 총살당하고 말았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은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 소비에트 위원장 몰로토프와 공동 명의로 12개 조항에 달하는 결정을 내렸다. ‘소련인민위원회와 전 소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결정’이라는 이름의 이 명령 제목은 ‘국경지역과 원동지역에서의 재소 고려인 이주에 관하여’로 되어 있다. 이 극비문서의 주요 내용은 즉시 이주 작업에 착수해서 1938년 1월 1일까지 끝낼 것, 이주 대상 한인들에게 재산과 집기 및 가축을 갖고 갈 수 있도록 할 것, 이주민들이 남겨놓은 동산 및 부동산과 농작물의 가격을 보상해 줄 것, 원한다면 외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출국수속을 간편히 해줄 것, 카자흐공화국 및 우즈벡공화국 인민위원회 소베에트는 이주민들에게 새로운 거주지를 정해주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 등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결정서 내용 가운데 보상부분은 실제로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거의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낯설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강제로 옮겨가는 과정은 글자 그대로 비참한 것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기차로 수송 도중에, 그리고 도착 직후에 병들고 죽었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고유문화의 터전도 박탈당하였다. 또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이나 경작물·채권 등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1937년 12월 7일 카자흐공화국 인민위원회 소비에트 위원장 이사에프는 하바로프스크의 원동 변강집행위원회에 보낸 비밀문서에서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원동 변강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온 재소 고려인의 대부분이 전 거주지에 있던 원동 변강의 각 기관들로부터 농기구·건물·농산물·기타 물자를 바친 대가를 현금으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
카자흐공화국 농업은행이 실시한 계산에 의하면 원동기관들이 북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원동 집단농장과 개인농장에 진 빚만 해도 1,946,040 루블 03코체이카에 달한다….”

범도(홍범도)는 다른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1937년 9월 초순 수청을 떠나 10월 초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아강 근처 잔 아릐크 촌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다가 70세 때인 이듬 해 4월 초 다시 크즐오르다시로 이주하였다. 그가 크즐 오르다로 오게 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배려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비교적 생활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범도(홍범도)와 이인복 여사는 중앙아시아로 오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범도(홍범도)는 한인들이 왜 이곳까지 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연해주 한인들은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청년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보위하기 위해 총칼을 잡고 백위파 및 일본군과 싸웠고 자신은 이래 수십 년간을 일제와 싸우지 않았던가? 시베리아 및 연해주 지역의 방위와 소비에트화에는 한인들의 공헌도 상당히 컸다. 그런데 일본의 간첩이라니?
범도(홍범도)는 다른 한인들처럼 스탈린이나 소련 공산당 당국자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원인 자신이 앞장서서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한인들은 당장 목숨이 끊어질 지경인 것이다.
사막지대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또 다시 위대한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로서… 많은 황무지가 옥토로 변했고, 그곳에서는 보지도 먹어보지도 못했던 쌀을 산출하게 되었다.
이미 70이 넘은 노인 홍범도는 꿈에도 보지 못했던 크즐오르다로 와서 함경도와 간도·연해주 일대에서 힘차게 싸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곤 했다. 언제나 자기 조국, 고향에 가볼 수 있는가 하며… 승승장구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소식이 간혹 들려올 때면 너무나 가슴이 쓰라렸다. 그렇게 애썼던 자기의 투쟁이 헛된 것은 아니었나 하고…
1941년 6월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소련을 침범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범도(홍범도)는 7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당국을 찾아가 전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규군으로 참전하는 것을 거부당한 그는 자신의 힘과 유연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사격장에 의심하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는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5꼬빼이까 짜리 작은 동전을 명중시키는 솜씨를 발휘했다.
범도(홍범도)는 전시의 비상사태에서 놀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크즐오르다에서 활동하던 조선극단을 찾아가 물품 돌보는 일이라도 좋으니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는 조선극장의 총 연출가 겸 희곡작가 태장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극장의 수위장을 맡게 된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를 계기로 1929년 이래 받던 매월 80루블의 연금 외에도 따로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제법 넉넉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공연되는 연극을 구경하며 노년을 여유있게 보낼 수 있었으며 태장춘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조선극장은 원동 변강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32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식으로 창립된 단체였다. 1937년 가을 한인들의 강제 이주에 따라 이 극장도 중앙아시아로 오게 되었으며 마침내 크즐오르다에 정착 하였던 것이다.
국립 조선극장 창시자의 한 사람인 태장춘은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를 지켜보면서 그의 투쟁경험을 되살려 연극으로 공연하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독소전쟁(1941) 발발 이후 당시 소련에서는 전쟁을 지원하는 일이 온 국민의 임무로 부각되고 있었다. 따라서 태장춘은 적대국 독일의 동맹국 일본과 싸웠던 홍범도의 투쟁을 연극으로 공연함으로써 민중의 항전의지를 높이고, 또한 일본의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한을 풀어줄 결심이었다. 태장춘은 작품구성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홍범도와 자주 만나 그의 생애와 빨치산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연극공연을 하자면 대본이 되는 희곡이 있어야 했다. 이에 태장춘은 희곡의 참고자료를 삼기 위해 범도(홍범도)에게 그의 투쟁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부탁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 사양했으나 태장춘의 강력한 권유와 당시의 전쟁무드에 힘입어 자기의 고난에 찬 생애를 회고하며 「일지」를 썼고, 그 일지는 태장춘이 쓴 희곡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일지의 집필시기는 대체로 1941년 후반기로 추정되며, 태장춘에 의해 연극 ‘의병들’이 공연된 시기는 1942년 초반으로 짐작된다. 연극 ‘의병들’은 크즐오르다에서 공연 당시 관객의 절찬을 받았고 나중에 이름이 ‘홍범도’로 바뀌었다.
범도(홍범도)는 자신과 동지들이 그렇게도 고생하며 싸웠던 의병활동이 연극으로 공연되는 것을 구경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연극의 초연을 본 그에게 태장춘이 다가와 물었다.
“연극이 마음에 드십니까?” 묻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추네, 추어. 허나 연극을 아무리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백중인 총재 간이야 보여주지 못하지.”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연극이 공연된 시기는 재소 한인들의 조국이 식민지로 있었고 또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때였다. 그러므로 연극에서의 의병들의 투쟁상은 한인들의 민족적 긍지와 동질성을 심어주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고, 한인 사회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민중에게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조선극장은 1942년 4월 카자흐스탄공화국 딸띄 꾸르간주 우쉬또베로 이사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조선극장이 이사하기 직전 극장을 밤에 지키다가 카작(카자흐스탄) 청년들과 격투를 벌였다. 당시 극장에는 연극용으로 사용되는 빌로드 비슷한 옷감이 많이 있었다. 이런 천을 카작(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좋아했는데, 카작(카자흐스탄) 청년들이 이것을 훔치려고 극장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무리 범도(홍범도)가 장사라고 한들 70이 넘었고 상대는 여럿이라 당할 수가 없었다. 이 뒤로 그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크즐오르다 쓰쩨쁘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종 당시 옆에는 재혼한 이인복 여사와 동료들이 자리를 지켰으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병문안 왔었다. 범도(홍범도)는 와병 중에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임종 직전 자기가 기르던 돼지를 잡아 옛 친구들과 술상을 같이 하며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가 한 이야기는 조선극장 문예부장 이정희가 쓴『장군 홍범도의 죽음』에 잘 나타나 있다.
항일의 맹장 홍범도는 국내와 간도·연해주·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며 수십 년간 일제 및 매판 봉건세력과 투쟁하였으나, 그의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외롭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후인 1962년 3월 1일 한국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레닌기치』(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뀜)에 소설 ‘홍범도’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묘지에 그의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민족의 영웅’으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제6장 홍범도의 애국적 생애와 항일 투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

1. 홍범도의 독립운동방법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홍범도는 거의 30여 년간을 의병 및 독립군 투쟁, 러시아 볼셰비키파와의 공동투쟁 등 다양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국내에서 전개한 반봉건(활빈당) 투쟁과 계급 투쟁적 성격을 띠는 형태의 활동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그가 가장 큰 당면과제로 삼았고 또 가장 중요시한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독립운동가였던 것이다. 그러면 홍범도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 일제를 몰아내려고 하였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무력투쟁으로 외세를 쫓아내려 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무력투쟁론자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즉결적 무력투쟁론자였다. 즉 현재 역량이 되는대로, 일의 성패를 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거대한 적에 부딪혀 끊임없이 적에게 충격을 가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회가 올 때마다 즉각적으로 봉기할 것, 국내 진입작전 및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등을 수시로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투쟁방략을 일제 측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범도(홍범도)를 두려워 하였다.

“원래 홍범도는 다른 단체의 간부가 병력·군수품이 완비되는 때를 기다려 일본에 대하여 정식으로 선전을 포고하고, 자웅을 결하자는 의견을 가진데 반하여 홀로 조국의 독립을 기성(期成)함에는 먼저 당면의 적(敵)으로서 간도에 있는 일본 관헌의 활동을 저해하고, 이곳에서 완전한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급진적 견해로 따로 파를 만들어 각지에서 폭위(暴威)를 드러내고 있다….”
-1920년 7월 16일 일본인 밀정의 보고문에서-

그는 이 같은 즉결적 투쟁방략을 실천하기 위해 군소 단체의 연합과 통일을 주장하여 실현시키곤 하였다. 그는 의병전투시는 물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독립전쟁에서도 연합부대를 형성하고, 지휘를 맡아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각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는 그였기에 때로는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잊고 다른 사람의 아래에서 활동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노력은 그와 싸운 일제 측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그들의 기록에서 아래와 같이 외경스런 문투로 기록하였다.

“… 그가 독립군의 각파가 항상 행동상 일치를 못하고, 의사의 소격(疏隔)이 있는 것을 탄식하며, (그럴 경우) 도저히 광복의 대거(大擧)는 성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풍월을 벗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겠다고 사랑하는 부하를 걱정하면서 감개(感慨)한 심정을 토로한 듯, 혹은 각 독립군이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하고 단독 행동을 취하며 함남 삼수·갑산 방면으로부터 국경을 습격하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독립군의 의기(義氣)를 보이려고 하는 등 본격적 기백을 토로하기도 하며 역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 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상황』에서 -

위의 글을 통해 범도(홍범도)가 국내 진입작전 등 무장투쟁을 벌여 국내외 여론을 환기시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범도(홍범도) 자신이 쓴『일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청산리 독립 전쟁 때 그는 한국으로 진격할 결심이었음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의 즉결적 무력투쟁 방략은 의병운동의 대선배 류인석이 만류할 정도로 급진적이었음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의 이런 투쟁방략은 이승만이 중심이 되었던 외교론이나, 안창호 등으로 대표되는 실력양성론과 뚜렷이 대조되는 독립운동 방법론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대한독립군의 ‘유고문’에서 “오직 정의·인도만 주장함도 불가능한 사(事)요, 무권지민(無權之民)으로 한갓 평화회의와 연맹회만 의뢰함도 역(亦) 불가능한 사 안이뇨.”하며, 평화적 시위운동론이나 외교론을 비판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즉각적 무력투쟁론은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고 할 정도였으나, 국내외에 일으킨 반향은 앞의 두 방법론 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2. 홍범도의 전략전술


홍범도가 직접·간접으로 거의 60여 차례에 이르는 의병전투와 10여 회가 넘는 독립군 전투 등을 주도하며 적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오랜 기간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범도(홍범도)의 기민한 전략전술, 독립운동 단체 및 민중의 적극적 지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략이란 군사력을 적용하여 국가 목표와 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한나라의 군대를 사용하는 기술 및 과학을 가리킨다. 하지만 나라가 이미 망해버린 상태에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는 홍범도에게 전략의 개념을 위의 정의와 같이 단순하게 적용할 수 없고, 국가 대신에 독립운동 단체를 대입하면 될 것이다. 전술이란 기본적으로 전투장에서 실제 전투행위를 위한 준비로서 병력을 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즉 전투에서 아군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부대를 배열하고 기동시키는 부대사용술을 전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잠시 친군서영에 있기는 했지만, 체계적 군사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함경도 고원지대에서 오랫동안 사냥에 종사하면서 산짐승을 잡아 왔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그가 벌인 의병전투나 독립군전투 사례를 종합해 보면, 그의 전략과 전술을 대략 추출해 볼 수 있다.
범도(홍범도)가 세우고 있던 전략은 말할 것도 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 목표와 전략을 위해 1910년 이전에는 국내에서 의병봉기를 일으켰으며, 나라가 완전히 망한 뒤에는 간도나 연해주에서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고 또 간도에 출동한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그는 무력투쟁을 벌이면서도 단시일 안에 일제를 쫓아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희생을 무릅쓰고 부단히 타격을 가하면 그것이 쌓여 국내외 동포는 물론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되고 결국은 국내외 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전략이었다.
그러면 범도(홍범도)는 이런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전술을 구사했는가? 그 전술은 주로 적을 치고 재빨리 빠지는 유격전의 형태였다. 유격전의 다양한 형태로서 매복전·기습전·진지전·위계(僞計)전술 등 여러 가지 전술이 구사되었다. 그때 그 때의 상황에 알맞도록 말이다. 간혹 갑자기 뜻하지 않게 적을 만나게 되는 조우전(遭遇戰) 형태의 싸움도 있었으나, 이는 의도적 전술이라고 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후치령 및 봉오동 전투는 매복전이나 진지전으로 볼 수 있고, 삼수성 전투는 진지전, 갑산읍 전투와 완루구 전투·어랑촌 전투는 기습전, 고동하곡 전투는 역습전, 갑산 간평 전투는 조우전으로 볼 수 있다. 김원흥 등 일제 주구배의 숙청은 위계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봉오동 전투는 일종의 유인·포위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청산리 독립전쟁의 여러 전투는 이리저리 기동하면서 적의 추격을 뿌리치는 기동전, 즉 유격전의 전형이었다. 이런 전술을 구사하며 홍범도 부대는 그 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홍범도 부대가 적과 싸울 때 큰 위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재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외에도 엄격한 규율과 충분한 군수품으로 무장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전황이 불리하면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감히 후퇴할 줄 아는 전술도 부대의 전투력을 보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홍범도 부대의 엄격한 군기(軍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북간도에서 한 부대원이 주둔하던 주인집 아내와 눈이 맞았다. 남편이 범도(홍범도)를 찾아가 고소했다. 그 상황을 정태는 이렇게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취군나팔 소리 산곡을 울리었다. 독립군들이 뛰어 나왔다. 주민들이 뒤따라왔다. 의병들은 대열을 지어섰다. 한쪽에는 주민들이 모여섰다. 신소한 남편도 있었다. 죄지은 독립군을 의병대열 앞에 따로 내세웠다.
“네가 지은 죄를 자백하라구.”
대장의 유순한 말이다.
자백했다. 조금치도 감추지 않았다.
“죽음 밖에 다른 건 나를 용서치 못해요.”
총소리. 홍범도의 나간 권총. 대장은 천천히 혁대를 풀어 땅에 놓고 윗적삼을 벗었다. 다음에는 속적삼. 속적삼으로 죽은 의병의 얼굴을 덮어 쌌다.
“죽이지 않을 수는 없고 …아깝다…아깝다.”
물끄러미 시체를 굽어보는 대장의 양 뺨으로는 말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 울었다. 의병들·주민들.
홍범도는 웃통을 벗은 채 느린 걸음으로 주인집으로 갔다.
하루, 이틀, 사흘 음식을 전폐하고 방에 누워 울기만 했다.
-『레닌기치』1968년 8월 27일자에서 -

바로 이 같은 냉혹하다 할 정도의 군기. 이것이 독립군의 강철같은 의지와 의기를 북돋웠던 것이다. 또 1920년 겨울 홍범도 독립군 부대가 지나갔던 시베리아의 마사노프 마을에는 지금도 이들의 엄격한 군기와 친절한 행동이 칭송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 홍범도에 대한 평가


홍범도를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무장이라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날리며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럴만한 어떤 뛰어난 역량이나 성품·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간도 및 옛 소련(러시아) 등 대부분의 동포들, 더 나아가 그와 싸웠던 일본군마저도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조선극장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지금은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 안 미하일 쓰쩨빠노위츠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얼굴 오른쪽 볼수염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위로 자랐드랬소. 그것은 왜냐하면 너무나도 총을 많이 쏘았기에, 총을 쏠 때마다 총탁을 오른 쪽에 대기 위해 오른쪽 볼을 스쳐 겨냥하면서 올렸기 때문이오. 총 쏠 내기도 몇 번 해보았는데 정말 명포수였소.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젊은 것들이 어쩔 수 없었소. 극장 수위로 일하실 때 우리는 처음 그가 그 전설적인 영웅인, 일제에 있어서는 범인인 홍범도인줄 몰랐드랬소. 김세일이 소설을 쓰고, 태장춘이 희곡을 쓰고 하면서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를 무한히 존경하였소. 그는 자기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소….”
-고송무,『쏘련의 한인들』39면에서 -

홍범도의 모습과 인격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연변에 살고 있는 인사들도 홍범도에 관해 보고 들은 바가 많았다. 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자. 허근이 이끄는 의군단에서 병사로 활약했던 김인홍(金仁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홍범도가 봉오골 상촌에 와서 주둔하고 있을 때 보았다. 당시 53세 가량 되었는데,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어깨가 쩍 벌어지고 몸집이 웅장했다. 홍범도는 비록 지식은 없었지만 전략전술이 능란하고 총을 잘 쏘는 재간이 있었다.”
-『사회와 사상』1989년 3월호, 394면에서

또 홍범도 부대에서 활동했던 원용순(元龍淳)의 딸 원윤옥(元允玉)은 “그는 산간작전에 능하고 총을 잘 쏘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그는 의병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발전하기까지 무려 18차나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한번도 패전한 일이 없다…. 홍범도는 애국심이 강하고 성격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강한 사람이다…. 간도지구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기간 그의 명망이 조선족 인민들 속에 널리 알려졌으며, 왜놈들도 홍범도라는 이름을 들으면 간담이 서늘하여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홍범도는 조선족 인민들이 자랑하는 민족영웅이다.” 고 증언하였다. 물론 바로 위의 증언은 약간 과장된 면이 있지만 범도(홍범도)에 대한 동포들의 평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북로군정서에서 싸웠던 김승빈은 “…성품이 인자하고 태도가 겸손하며 일처리에 과단성이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 술회하였다. 또 러시아인으로 퇴역 해군 중좌인 에프 세웰낀은 “그는 자기 인민들 사이에서 참된 민족적 영웅이란 영예를 쟁취하였다. 그는 대중의 영용무쌍한 영도자였으며, 자기의 특출한 모범으로 조선 인민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는 헌신적인 투쟁으로 고무추동하였다.” 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평가를 들어보자. 청산리 일대에서 그와 싸웠던 일본군 자신들도 홍범도의 감투정신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였다.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 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면하여 일본군의 포위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1시(一矢)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상황』에서

위의 기록은 여러모로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우선 일제 측이 청산리 일대에서 싸운 독립군 주력부대가 홍범도 부대였다고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홍범도에 대해 은연중에 호감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특히 홍범도가 부하들로부터 신과 같은 숭배를 받고 있다는 서술은 일면 과장되기까지 한 것으로 그에 대한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끝으로 홍범도의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기로 하자.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927년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적어도 그가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에 공감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의 출신 성분과 행적·성품 등을 종합해 볼 때 이론에 투철한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자 또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홍범도의 이념이 무엇이었는가를 흑백논리로 규정하기보다 그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타당한 길이었는가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직전 어느 산마루에 올라가 멀리 조국땅을 바라보고 “슬프다, 내 몇해나 되어야 고향산천을 바라볼까!”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 의 드높은 애국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홍범도는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형적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그 이후 폭넓은 사상적 편력과 행적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광범한 행동반경과 오랜 기간의 투쟁경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홍범도는 과감성과 결단성, 강한 희생정신과 용기, 뛰어난 통솔력과 전술구사능력 등을 보유하여 적과의 전투, 나아가서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에 상당한 약점이나 결점도 있었다. 가끔 감정에 치우친 불같은 성격이 폭발하기도 했고, 전형적 군인이었기에 정치 감각이 뒤지는 점도 있었던 것이다.

4. 홍범도(부대)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홍범도 자신은 한 개인이었지만 부대를 조직하여 단체로 활동하였고, 또 그 과정에서 수 많은 동포 및 독립운동 단체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의 투쟁은 개인 차원을 넘어 민족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의병으로부터 독립군, 한인 빨치산 의용대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 무장이라는 점은 국내외 각지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수십 차례에 달하는 의병전투와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으로 상징되는 독립전쟁 전개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홍범도와 그가 이끌었던 부대의 투쟁은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함경도·평안도 지방 및 간도·연해주 지방에서 무력항쟁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활동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함경도와 평안북도 동부지방에서 일본군경의 침략활동을 저지하고, 그들의 식민지 가속화 작업을 마비시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반일투쟁 외에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이 일대의 친일파·일진회원·부패한 관리·매판적이며 악질적인 부호 등을 소탕·응징하는 투쟁을 동시에 수행하여 매국의 무리에게 경종을 울렸다. 홍범도 의병부대를 비롯한 각 의병부대의 ‘전쟁’으로 약 3년간 우리나라의 완전한 식민지화가 늦춰지게 된 사실은 중요한 뜻이 있다.
또 1920년대 초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독립전쟁을 주도함으로써 일제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 침략자들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이 “위력이 더욱 강대해져 무시할 수 없는 현세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조선국경의 습격 및 간도 지방 일본관헌의 취체(取締)에 대한 반항적 행동은 기회를 타서 감행하기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둘째, 홍범도 부대의 항일·반봉건투쟁은 국내 및 간도 일대 대중의 국권회복운동과 항일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 특히 대부분이 산포수로 구성된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은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평민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는 한 계기가 되었다. 또 간도 지방에서의 홍범도 독립군의 승리는 그 일대 주민들에게 항일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고,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히 벌이는 밑바탕이 되게 하였다.
1920년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의 승전은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였고, 또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전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역시 민족운동계 전반에 미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셋째, 홍범도 의병부대 및 독립군의 활약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크게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의 중국 관민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20년대 초반의 항일투쟁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물론, 중국 관민의 암묵적 동정과 지지를 유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일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할 때 한중연합투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넷째, 홍범도는 의병과 독립군 활동을 전개하면서 각 의병부대나 독립군 부대의 연합이나 통일을 앞장서서 실현하였는데, 이것은 무장투쟁 역량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단합노력은 열세한 한민족 무장세력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고, 결국 일제에 대한 투쟁의 강도를 높일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홍범도 부대가 연해주 및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과 연계될 수 있었고, 그것이 후일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홍범도와 그가 영도하였던 무장세력의 투쟁은 이처럼 민족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몇 가지 한계도 언급할 수 있다.
우선 군사행동이 고도의 정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확고한 정치이론이나 독립운동의 전략, 광복 후 수립할 국가에 대한 전망 등을 세우지 못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약점은 그의 부대가 상대적으로 방략을 달리하는 계몽운동론자들과 연계되지 못한 것에서 연유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홍범도가 군사이론가나 정치이론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간도지방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중국인 등과 같은 다른 민족을 항일운동에 대거 참가시키지 못한 사실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 그 문제는 매우 어려운 것에는 틀림없지만, 만약 중국인 대중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몇 가지 한계는 위에서 열거한 역사적 의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으로 홍범도와 그의 부대가 수행한 전투활동은 한국근대사, 나아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머슴, 산포수, 그리고 광산노동자 출신의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그는 분명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이채를 띠고 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온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라와 겨레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투쟁은 영원불멸의 큰 업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연보


1868. 8. 27 평안도 평양 문열사 앞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남. 뒷날의 호는 여천(汝千).
1868. 9 초 출생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모친 별세.
1877 (9세) 아버지를 여읨. 이후 15세(1883년)까지 숙부집에서 지내며, 이웃마을 지주집의 꼴머슴으로 일하기도 함. 1883∼1887 (19세) 15살 되는 해에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안 감영(친군서영)의 나팔수로 입대하여 3년간 복무.
1887∼1890 (22세)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의 종이공장에서 3년간 일함. 제지소 주인이 임금(삯)을 주지 않아 싸움 끝에 떠남.
1890∼1891 (23세)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止潭)대사의 상좌로 있으며, 절의 허드렛일을 함. 이 때 그의 아내가 된 단양(丹陽) 이씨를 만남.
1892∼1895. 8 (27세) 절을 떠나 함경남도 북청 방면으로 향함. 단양 이씨와 이별. 1892년(24세 때) 큰 아들 양순이 태어남. 강원도 회양(淮陽)의 먹패장골 산속에서 3년간 사냥에 종사하며 사격 등을 연마.
1895. 11 초 회양의 단발령(斷髮嶺)에서 김수협과 같이 의병 봉기를 결정. 철령(鐵嶺)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고, 안변 학포(鶴浦)로 이동.
1896. 8(28세) 안변에서 의병 14명을 모집,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한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류. 세 번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전하고 김수협은 전사.
1896∼1897 (29세) 황해도 영풍(永豊) 널귀 금광에 잠시 피신. 함경남도 덕원읍의 친일파 전성준을 처단. 이후 양덕·성천·영원 등 평안남도와 함경남도·황해도 접경지역 일대에서 단독 활동(활빈당과 비슷한 성격).
1897∼1904. 9 (36세)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단양 이씨를 상봉하여 정식으로 결혼생활. 1897년경 둘째 아들 용환(龍煥, 홍용환) 출생. 이후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安山社) 노은리(老隱里) 인필골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업에 종사.
1904. 9. 8 (음력) 러일전쟁(1904)이 한창이던 시기에 함흥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투쟁에 참가.
1905∼1907 (39세) 북청의 안산사 포계(砲契)라는 사냥꾼 협동조합에 가입. 이후 포계의 지도자(포연대장: 捕捐大將)로 추대되어 포수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섬.
1907. 11. 15 북청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防洞: 일명 언방골)에서 주로 산포수로 구성된 7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 항일투쟁에 나섬. 홍범도는 이때 차도선(車道善)과 같이 부독(副督)의 직책을 맡음.
1907. 11. 16 일진회(一進會) 회원이며 친일주구배인 안평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진목동(眞木洞)에서 처단.
1907. 11. 22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 일행을 후치령에서 습격, 일본군 2명과 순사 1명을 사살. 빼앗긴 화승총 73자루를 다시 찾고 일본군의 무기를 노획. 이날 같은 곳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가던 우편마차 호위병 2명, 북청으로 가던 혜산진 목재창 소속 일본인 1명을 사살.
1907. 11. 25 후치령에서 미야베(宮部) 보병대위가 지휘하는 일본 군경 합동병력 70여 명과 약 세시간 동안 격전, 적 30여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둠. 의병도 김춘진(金春辰) 등 5명 전사.
1907. 12. 15 북청의 장항리(獐項里: 일명 노루목)에서 100여명을 이끌고 일본군 화물 및 우편물 호위병을 습격. 일본군 2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수물자(탄환 상자 40개 등)와 무기를 노획.
1907. 12. 29 삼수성을 점령하고 수십 자루의 소총과 많은 탄약을 노획. 일제의 주구인 삼수부사(三水府使)와 주사(主事)를 처형하고 삼수 순사주재소를 완전 소각함.
1907. 12. 31 일본군 가미쯔끼(上月, 상월) 소위 등 기병소대와 혜산진·갑산 수비대가 합동으로 삼수성을 공격해 왔으나, 약 3시간의 격전 끝에 이들을 패주시킴. 의병 진영 측에서도 9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
1908. 1. 10 (40세) 함남 정평에서 온 의병들과 합세하여 300여 명의 대병력으로 갑산읍으로 진공, 9시간 동안 점령. 일본군 갑산수비대·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여 다수의 일본 관민을 처단하고 통신기기와 우체국 청사를 소각. 이후부터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음.
1908. 1. 12 60여 명의 의병대를 갑산군 상남사(上南社)에 파견하여 악질 일진회원 원길학(元吉學)·박중형(朴仲兄) 등 48명을 처단.
1908. 1. 23 악명 높은 일진회원 출신 군수 유문경(劉文卿)이 있는 단천군으로 진출. 일진회원 최성학(崔成學)이 촌장인 수하사(水下社) 운승리(雲承里)로 진격하여 일진회원을 응징.
1908. 2. 12 120여 명의 휘하 의병부대가 혜산진경찰서를 습격 하여 순사들을 소탕.
1908. 2. 21 약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갑산군 읍사 세동(細洞: 속칭 세골 또는 청지평)에서 군경 합동 30명의 토벌대와 교전, 패퇴시킴. 이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고 소총 3정을 노획.
1908. 3. 17 홍범도와 같이 의병대를 지휘해 오던 차도선이 일제의 ‘귀순공작’에 속아 200명의 부하 의병들을 데리고 북청 일본군 수비대로 ‘귀순‘.
1908.3.20 부인 이씨와 두 아들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제3순사대에 의해 홍범도의 귀순공작 인질로 체포됨.
1908. 4. 20 삼수 서방 지점에서 약 100명의 병력으로 일제 헌병대와 접전, 큰 타격을 입힘. 같은 날 휘하의 한 의병대가 함흥을 기습, 일본군 포병대의 숙사(宿舍)를 방화하여 2개동을 전소시킴.
1908. 5. 2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일병 32명을 저격, 전멸시키고 소총 30정 등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둠.
1908. 5. 4 갑산 도하리(都下里)에서 ‘귀순’을 권유하러 온 일제의 주구 김원흥 등 순사 6명을 처단.
1908. 5. 16 500여 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여 장진의 산정개(山亭開)에서 갑산으로 이동하는 장진분견소 일병을 섬멸.
1908. 5. 중순 아내 이씨가 일제 주구배의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죽음.
1908. 5. 하순 갑산에 있는 동안 김충열(金忠烈)·조화여에게 2만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러시아령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있는 이범윤(李範允)에 파견,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함.
1908. 5. 28 갑산군 괘탁리(掛卓里)에서 15기(騎)의 일군 기병대와 접전, 전멸시킴(16명 사살, 말 다섯 필 노획).
1908. 5. 말 약 7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를 장진 연화산 병풍바위 밑으로 집합시켜 소부대(9개 중대)로 재편성하고 각지에 분산하여 유격전을 전개토록 함. 홍범도는 3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진읍 방면으로 진출.
1908. 6. 2 장진 두꺼비 바위골(蟾岩)에서 일본군과 교전, 16명을 사살. 의병도 5명이 전사. 이후 다시 병력을 분산, 약 180명을 인솔하고 안산(安山) 방면으로 진출.
1908. 6. 6경 함흥 초리장(草里場) 유채골의 악덕 부호 박면장 집을 기습, 일본돈 2만 9천엔 가량을 군자금으로 압수.
1908. 6. 10 북청의 통패장골 쇠점거리(金昌)에서 150여 명의 의병대를 지휘, 일군 기병(騎兵) 토벌대와 격전. 적 30여 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량과 무기를 빼앗는 대승을 거둠.
1908. 6. 12 안변·덕원 등지에서 활약하던 노회태(盧熙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약 300명의 대부대를 형성. 함남 정평의 한대골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 섬멸적 타격을 가함.
1908. 6. 16 함남 정평 바배기에서 아들 양순(홍양순)이 일본 군경 토벌대와 싸우다가 전사.
1908. 6. 중순 갑산 간평에서 일병 80여 명과 격전. 일병 3명 사살, 의병 8명 전사.
1908. 6. 말 장진 연화산에서 다시 의병 회의를 소집,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의병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 그 뒤 여러 곳에서 부족한 탄약과 무기,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의병대는 각지로 분산함.
1908. 7 초 장진 달아치(達阿峙) 금광을 습격하여 일병 6명을 처단하고 군자금으로 쓸 금괴 다수를 노획.
1908. 7. 6∼21 안중근(安重根)이 이끄는 약 100명의 의병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에 진입, 홍범도 의병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세 차례의 전투 끝에 패전. 양 의병부대의 연합시도가 무산됨.
1908. 7. 18 홍원 전진포(前津浦)에 있는 부패관리 홍원군수 집을 기습하여 일본돈 3만 7천엔을 군자금으로 압수.
1908. 7. 21 북청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함흥수비대와 격전, 전 16명을 사살하고 소총 16정, 탄약 6상자를 노획.
1908. 8. 초순 정일환(鄭日煥)·임재춘(林在春)·변해룡(邊海龍)을 중국에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함.
1908. 9. 20 함흥 북방 천평리(天坪里)에서 60여 명의 대오를 이끌고 함흥 수비대 장교 이하 13명과 격전.
1908. 10. 중순 40여 명의 예하 의병부대가 단천에서 우포(右浦)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
1908. 11. 2 더 이상의 항전이 어렵게 되자 4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삼수군 신갈파진을 거쳐 중국 통화(通化)로 건너감.
1908. 11. 10 경 중국 길림(吉林)에서 둘째 아들 용환(홍용환)과 러시아어 통역 김창옥, 의병장 권감찰 등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들을 뒷날을 기약하고 국내로 돌려보냄.
1908. 12. 중순 연해주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 6일을 머묾.
1909. 1. 말 (41세) 두만강 건너편의 연추에 가서 이범윤을 만남.
1909. 6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의 스찬(수청: 水淸)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1909. 겨울 연해주 추풍(秋風) 허커우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4,980루블의 군자금을 모집.
1910. 3∼4월경 류인석(柳麟錫)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
1910. 4 초순(42세) 러시아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추풍을 출발, 국내로 향함.
1910. 4. 하순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본군 42명을 저격, 전멸시키고 소총 40정·권총 4정, 기타 많은 군량과 탄약을 빼앗음.
1910. 초∼중순 무산·종성 등지의 일군과 수차례 격전하였으나, 패전하고 다시 중국 안도현·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
1910. 6. 21 류인석 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의 의병조직을 망라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 조직에 참여, 의원(議員)으로 선임됨.
1910. 8. 하순 이상설의 주도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성명회(聲明會)에 참여, 일본의 한국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성토.
1911. 3. 중순(43세) 휘하 의병장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30여 명의 의병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 함북 경원 세천동(細川洞) 부근에서 일군 수비대와 격전
1911. 5. 20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의 창립을 주도, 부회장에 선임됨. 동년 말에는 이 조직의 사찰부장(査察部長: 일부자료에는 경찰부장)을 맡음.
1911. 11. 15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범석(李範錫)·엄인섭(嚴仁燮) 등 20명과 함께 ‘21의형제(義兄弟)’ 동맹을 결의.
1912. 가을 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고 연해주 지방의 철도공사를 하며 노임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
1913∼1915. 7 (47세)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과 군자금 모집에 종사. 그 동안 4,500여 루블을 비축하고, 그 자금으로 소총 17정과 탄약을 구입.
1915. 7∼1917. 11 (49세) 밀산 십리와에 있는 권업회의 농장에서 농사와 수렵에 종사하며 무력 투쟁을 준비.
1917. 11∼1919. 8 초(51세) 러시아령 추풍 다아재골로 이동, 의사 최병준(崔丙俊) 집에 무기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출의 기회를 엿봄.
1919. 10∼11 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왕래하며 병사 및 군자금의 모집, 무기의 구입 등에 노력.
1919. 12. 중순 ‘노령(露嶺)주둔 대한독립군대장’ 명의의 유고문(喩告文)을 간도 일대에 포고.
1920. 2∼3 (52세) 독립군 단체들의 함북 온성 일대 국내 진입작전을 주도하여 일군 수비대를 타격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에 노력.
1920. 3 간도 및 연해주, 국내의 두만강 일대에 “순사보조원(기타 밀정)에게 특히 고하노라!”는 제목의 경고문을 대한독립군 이름으로 포고.
1920. 3. 25 최명록(일명 최진동)이 영도하는 도독부(都督府)와 연합하여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결성하기로 합의.
1920. 5. 28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군 및 최진동이 이끄는 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음(홍범도는 가끔 정일제1군사령장관(征日第1軍司令長官)이라는 직함도 사용함).
1920. 6. 7 북로독군부의 최진동, 안무 및 신민단 등 700여 명의 연합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여 일본군 야쓰가와(安川) 소좌가 인솔한 월강(越江) 추격대대 등 310여 명의 일본군을 두만강 대안 봉오동(鳳梧洞)에서 공략, 적 200여 명을 살상(사망 120여 명)하여 패주시키는 대승리를 거둠(봉오동 대첩).
1920. 6. 21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2차
연석회의를 개최, 군량 비축과 무기수입 방법 등을 의논.
1920. 6. 말∼7. 초 약 400명의 부대원을 인솔하고 연길현 의란구(依蘭溝)로 근거지를 이동.
1920. 7. 6 봉오동 전투에서 부상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정일제1군사령장관 명의로 간도 국민회장 구춘선에게 의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
1920. 7. 11 130여 명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간도 연길현 노두구(老頭溝)에서 간도 일본영사관 니시다(西田) 경찰 부장 등 무장경관대 46명과 격전, 승리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
1920. 8. 7∼8. 간도 일량구(一兩溝: 일명 의란구)에서 독립운동 단체 연합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최진동과 의견 불일치로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8일 명월구(明月溝)에 가서 한달 가령 주둔함. 이 무렵 홍범도 부대는 안무 진영을 포함하여 약 550명의 병력 규모였음.
1920. 8. 하순 중국군과 타협 결과 근거지를 일본군 측 눈에 띄지 않는 산림지대로 옮기기로 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백두산 기슭의 무산 간도 방면으로 향함.
1920. 9. 하순 휘하 부대와 함께 연길현 두도구(頭道溝) 서쪽,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 부근 삼림지대에 주둔하며 국내 진입의 기회를 엿봄.
1920. 10. 초 국민회의 안무 부대 약 250명, 한민회(韓民會) 부대 약 200명, 의군단(義軍團) 약 100명, 신민단 약 200명 등이 홍범도 부대 주둔지 근처로 이동해 옴.
1920. 10. 13 일본군의 간도 침입에 대비한 국민회·신민단·의민단·한민회 등 4개 독립군 대표자회의가 이도구 북하마탕에서 열림. 여기에서 군사행동 통일을 기하기로 결정. 이를 계기로 홍범도 예하 병력을 주력으로 한 ‘홍범도 연합부대’가 형성됨.
1920. 10. 15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일군 아즈마(東) 지대가 두도구 방면의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용정에 출동, 작전을 개시.
1920. 10. 중순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북로군정서측과 연합작전을 협의, 홍범도 부대는 두도구 방면을 작전 구역으로 맡기로 합의.
1920. 10. 20경 허근(許根: 일명 허영장)이 이끄는 의군부 부대 300여 명이 홍범도 부대에 합류함. 이로써 홍범도 연합부대는 모두 7개 부대 1,400여 명 규모로 커짐.
1920. 10. 21∼22 연합부대를 지휘,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 아즈마(東) 지대의 한 부대를 포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섬멸하고 소총 240정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
1920. 10. 22 이도구 어랑촌(漁郞村)에서 700여 명의 북로군정서 부대와 협력하여 일군 아즈마 지대의 1개 기병연대와 보병 1개 대대가 연합한 1,500여 병력과 격전, 수백 명의 적을 섬멸(청산리 대첩). 독립군 측에서도 200여 명의 사상자가 남.
1920. 10. 23∼4경 안도현 방면으로 행군하던 도중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추적하던 마적들과 교전, 궤멸시키고 많은 돈과 식량을 노획.
1920. 10. 25∼26 봉밀구(蜂蜜溝) 부근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심야에 350여 휘하 병력을 지휘하며 일군 150여 명과 격전, 2개 소대 약 100여 명을 섬멸. 홍범도 부대도 상당한 손실을 입음.
1920. 10. 말 휘하 병력을 규합하며 안도현 황구령촌(黃口嶺村) 방면으로 진출.
1920. 11. 초순 약 700여 명의 독립군 혼성부대원을 이끌고 안도현(安圖縣) 동북의 대사하자(大沙河子)에 머묾.
1920. 11. 중순 예하 독립군을 데리고 국내의 삼수·갑산 진공작전을 구상했으나 북로군정서 등 다른 부대와 의견불일치로 실행하지 못함.
1920. 12. 초 항일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에 참가, 간도선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음.
1920. 12. 13 육도구(六道溝) 부근에서 간도토벌대의 한 지대를 포위 공격하여 지대장 다까하시(高橋) 중위 등 18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힘.
1920. 12. 중순 해산시켰던 일부 부대원을 재소집하기 위하여 김좌진과 공동명의로 재소집 권고서를 간도 일대에 반포.
1920. 12. 하순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북만주 밀산(密山)에 집결.
1921. 1. 12 홍범도의 부하였던 한준성(韓俊成)과 김태화(金泰華)가 평안남도 성천군 통천 면사무소에 진입, 일본인 금융조합 이사를 사살.
1921. 1. 하순 (53세) 700여 명의 부대원을 대동하고 흑룡강(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감.
1921. 1∼2. 이만에서 각지에서 오는 독립군 병사를 규합, 3,500여 명의 병력으로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 일명 대한총군부)’를 조직. 이 때 동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됨.
1921. 3. 중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의해 이르쿠츠크에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됨. 이 조직은 연해주와 만주에서 오는 한인 무장 세력을 적군으로 편성, 통합 지휘하기 위한 것.
1921. 4. 중순 이만에서 대소 36개 단체의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군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의용군총사령부의 이름을 ‘대한독립단’이라 바꿈. 이때 그 조직의 부총재로 추대됨.
1921. 5. 6 고려혁명군정의회 임시사령관으로 부임한 오하묵(吳夏黙), 총군부(總軍府)의 최진동과 함께 자유시(알렉셰프스크: 현 지명 스보보드니)에 집결된 각 군사단체의 통일문제를 협의.
1921. 5. 18 이르쿠츠크에서 정식으로 ‘고려혁명정의회’가 조직됨. 의장 겸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깔란다라시윌리.
1921. 6. 2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데리고 군정의회 측 진영으로 이동.
1921. 6. 5경 밀산에서 둘째 아들 용환(홍용환)이 병사함.
1921. 6. 25 홍범도 부대가 안무·이청천 등의 부대와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됨.
1921. 6. 28 ‘자유시 사변’이 발생하여 독립군이 큰 타격을 받음. 홍범도 휘하의 부대는 거의 손실 없었음.
1921. 8. 말 홍범도 부대가 자유시 사변(1921) 후 잔존한 부대원 1,745명에 포함되어 이르쿠츠크에 수송됨. 이후 홍범도 부대는 다른 한인 부대와 같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독립)한인여단으로 개편됨. 이 때 홍범도는 대대장으로 임명됨.
1922. 1. 21∼2. 2 (54세)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의 극동제민족대회(極東諸民族大會: 일명 동방 피압박민족대회)에 한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
1922. 2. 초순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 레닌을 만나고 모젤 권총과 금화 100루블의 상을 받음.
1922. 6 블라고웨시첸시크에서 이동휘·문창범 등과 같이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는데 참여.
1922. 9. 1 치타에서 고려중앙정청의 정식 대표자회의를 개최 하는데 참석.
1923. 9경∼1927 (55세) 제대한 나이 많은 동지들과 함께 이만 근처 까잔린 구역에서 농업에 종사. 콤비나트(집단농장) 관리위원장으로 일하면서 항일투쟁에 대비.
1926 (58세) 과부 이인복 씨와 상처 후 18년 만에 재혼.
1927. 10 (59세) 소련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당증번호 578492).
1928. 7∼1929. 가을 (61세) 스파스크진동촌으로 이주하여 동지들을 이끌고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다른 농장의 비협조로 실패.
1929. 겨울경 연해주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소재 한인 제76연대 명예군인으로 추대됨. 이 해에 정년퇴직하여 연금생활을 시작함.
1929. 겨울∼1933 (65세) 중·소(중국·러시아) 국경지대 흥개호(興凱湖) 부근 카멘노 릐발로프초원 치머우에 있는 ‘항가(흥개호의 중국식 발음)의 별’이라는 콤비나트(집단농장)에서 지도자로 일함.
1934∼1937. 9 (69세)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수청(水淸: 노우니콜라에프카)의 스꼬또브 지역 ‘뿌찌 레닌나(레닌의 길) ‘콜호즈(농업협동조합)에서 수직원으로 일함.
1937. 9. 8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다른 한인들과 함께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출발.
1937. 10 카자흐스탄 침껜트주(州) 잔 아릐크 촌으로 이사.
1938. 4 초 (70세)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시로 이주함.
1941.6. 하순 (73세)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주 당위원회에 찾아가 전선에 보내줄 것을 요구.
1942. 초반경 (74세) 크즐오르다에서 태장춘이 쓴 실화희곡 ‘홍범도’가 연극으로 공연됨.
1943. 10. 25 크즐오르다 쓰쩨쁘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집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함.
1962. 3. 1 한국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함.
1959∼1965 소설 『홍범도』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레닌기치』에 연재됨.
1984. 11. 초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묘지에 그의 반신동상이 세워짐.
1989. 5. 26 크즐오르다에서 ‘홍범도 거리’ 현판식이 거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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