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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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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 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머리말


안중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한말(韓末)의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민족 최대의 시련기였다. 유사 이래 우리는 외세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오면서도 나라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망국(亡國)의 위기를 당하더니 끝내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통한의 역사를 남기고 말았다.
안중근(安重根)이 태어난 것은 민족의 운명이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다. 망국의 위기에서 그는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처음엔 계몽운동에 투신하다가, 1907년 광무황제(光武皇帝; 高宗)의 강제 퇴위와 한국 군대의 강제해산 등 일제의 노골적 침략에 직면해서는 의병(義兵)으로 전환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구원(救援)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갔다.
한말의 구국운동은 일반적으로 의병과 계몽운동, 그리고 외교 및 의열 투쟁 등을 포함한 반제투쟁의 세 갈래로 구분되어 지는데, 안중근의 구국운동은 이들 세 범주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즉, 그는 구국을 위한 길이라면 이념과 방략에 구애됨이 없이, 필사의 각오로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위기 때마다 지조와 순결을 지키며 자정(自靖) 또는 자결로서 청사(靑史)에 이름을 빛낸 지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구국이란 면에서, 단지 깨끗한 죽음을 택한 순절지사의 길과 비교할 때 안중근의 구국운동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빛나는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안중근의 그와 같은 살신성인의 구국관은 이후 간단없이 전개된 독립운동의 횃불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구국정신의 영원한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안중근에 대한 연구는 국내와 국외에서 발표된 여러 편의 학술연구를 비롯하여 교양 수준의 전기류가 다수 출간됨으로써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들 연구를 통해 안중근에 대한 많은 부분이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에 대한 연구가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볼 때 마땅한 교양지가 없는 형편이고, 연구 수준의 면에서도 몇몇 논문을 빼고는 심도 있는 연구가 아쉬운 실정이라 하겠다. 예컨대, 역사 사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결여되거나 또는 안중근의 위대성에 매몰되어 역사적 감각을 외면한 서술 등의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는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이에 기초한 올바른 역사적 시각의 정립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먼저 지적할 것은 안중근의 구국운동을 이등박문의 포살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거나 평가하려는 점이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은 구국과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그의 활동 가운데 최후의 수단으로 강구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등박문의 포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그의 선행적 구국활동에 대한 규명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이등박문의 처단에만 지나치게 편중된 안중근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올바른 안중근의 상(像)을 정립하는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 면이 없지 않았다. 안중근의 활동 가운데 이등박문의 처단 의거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의거에 편중하여 기념비적 차원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또는 안중근의 활동을 이등박문 처단으로만 국한시킬 경우 안중근에 대한 이해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후자와 같은 시각은 특히 일본인들의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안중근을 일본의 「영웅」인 이등박문의 「암살자(暗殺者)」로 단정하는 논리는 제쳐놓더라도, 과거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일본인 학자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이등박문을 「살해」한 안중근’으로부터 그들의 논리를 세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떠나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안중근이 옳고 이등박문이 나빴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건의 표면적 내지는 현상적 이해에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일본인들의 안중근 연구에서 안중근의 계몽운동 및 의병운동과 같은 구국운동에 거의 관심을 보여지 않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의 안중근 연구는 자유와 정의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독립운동의 본질적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각에서 투영된 안중근의 상 역시 올바른 것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또한 그 의거가 지니는 의미도 대자적(對自的) 민족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그 폭을 넓혀 인류의 인도 정의의 시각에서 바라 볼 때, 비로소 올바른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즉 이등박문의 포살은 단순히 민족적 기준에서의 의미를 넘어 반인류적인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반성하는 인류사의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등박문의 처단 의거는 우리 민족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정의 인도의 기준에서 서술되어야 하는 세계 역사의 기록에서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환기해 둘 것은, 일본에서는 지금도 상당수의 일본인이 이등박문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이등박문이 과거 제국주의 시기 일본의 애국자일런지 모르지만, 그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적 존재로서 한국은 물론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의 파괴자였다. 그는 인류평화의 반역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등박문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자체는 군국주의적 소산에 다름 아닌 것이며, 과거 제국주의의 반인류성을 반성하지 못한 증좌인 것이다. 그리고 이등박문의 「영웅화」는 일본만의, 그것도 군국주의적 발상에 불과한 것으로 몰역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義士)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당사자인 우리 민족 못지않게 중국(당시는 청국)의 입장에서도 절실하게 바라던 쾌거였다. 중국은 청일전쟁(1894) 패배의 대가로 일제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등 굴욕적 수모를 당한 바 있는데다가, 러일전쟁(1904) 당시에는 청의 발상지인 만주(滿洲)가 전쟁터로 화하게 되자 중국인들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등박문이 러시아와 야합하여 만주를 분할 점령하려는 야욕 아래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오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럴 때 안중근의 의거가 터진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안중근이 대신하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열렬히 찬양하였다. 중국의 각 신문·잡지들이 안중근 의거를 연일 대서특필함은(일부 언론은 일본을 의식하여 소극적 보도를 하기도 했지만) 물론, 취묵생(醉墨生) 같은 이는 의거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고, 학생들은 각처에서 안중근의 의거를 연극으로 꾸민 「안중근」을 공연하면서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면서 「제2의 안중근」이 나올 것을 간절히 고대해 마지 않았다. 그 중에는 등영초[鄧穎超; 후일 周恩來(주은래)의 부인이 됨]처럼 여학생이 남장을 하면서 안중근 역을 맡기도 하였다. 즉 그들에게 안중근은 「중국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중국에서의 역사 평가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안중근이 순국한 여순(旅順) 감옥은 현재 [여순감옥구지전람(旅順監獄舊址展覽)]이라는 이름아래 중국 항일투사의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간판의 안내문에는 “이 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세웠으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1945년까지 이곳을 통치하여 감옥을 확장하고 많은 항일지사와 애국동포를 투옥하고 살해했다. 특히 「조선저명민족영웅(朝鮮著名民族英雄) 안중근(安重根)」이 이곳에서 살해됐다. 전쟁이 끝난 후 감옥을 해체, 항일투사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념관 복도 양편에는 중국인 항일지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중국인의 경우 4명당 사진 한 장의 비율로 전시되고 있는데 비하여 안중근 관계 전시는 사진 4장 분량의 면적을 할애하여 초상화와 친필 유묵·시(詩)·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단편적 예이긴 하나 이를 통해 안중근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 의식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가능한 한 안중근의 생애를 빠짐없이 서술하고자 했다. 안중근의 활동을 크게 계몽운동·의병운동·이등박문 처단 의거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국운동의 전반적 조망위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글은 전문적 학술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전거를 밝히지 않았으나 서술 과정에서 연구상 쟁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주로 처리하여 이해의 편의를 구하였다. 끝으로, 이글을 작성하는데 신용하 교수님의 논문(「안중근의 사상과 계몽운동」,『한국사학』제2집, 1980;『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에서 교시 받은바 컸음을 밝혀둔다.

제1장 가계와 성장 과정

1. 집안 내력


안중근은 1879년 9월 9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었으므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것이라 하여 안응칠(安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또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안중근이 태어나던 무렵 그의 집안은 수천 석을 하던 해주의 대지주였다. 본관(本貫)이 순흥(順興)으로 고려 말의 명유(名儒) 안향(安珦)의 후예이기도 한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향반(鄕班) 계층이었다. 그리고 선조(先祖) 중에는 무반(武班)으로 이름을 높임으로써 해주 일대에서는 명문에 속하던 집안이었다.

[안중근의 가계]
安知豊[안지풍(고조부, 무과급제)]
定祿[안정록(증조부, 무과급제)]
仁壽(안인수)[仁奎(안인규): 조부, 진해현감)]
泰鎭(안태진)-宗根(안종근)-榮生(안영생)
莊根(안장근)-鳳生(안봉생), 椿生(안춘생)
泰鉉(안태현)-明根(안명근)-毅生(안의생), 陽生(안양생)
洪根(안홍근)
泰勳(안태훈)-趙氏부인-重根(안중근)-金亞麗(김아려)부인-賢生(안현생, 여), 분도生(안분도생), 俊生(안준생)
定根(안정근)-原生(안원생), 珍生(안진생)
恭根(안공근)
姓女(안성녀)
泰建(안태건)-鳳根(안봉근), 忠根(안충근), 性根(안성근)
泰敏(안태민)-敬根(안경근), 炯根(안형근)
泰純(안태순)

위에서처럼, 고조부(高祖父) 안지풍(安知豊)과 증조부(曾祖父) 안정록(安定祿)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명예직이긴 했으나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낸 바 있었다. 안인수는 수천 석의 지주로 성품이 어질고 인심이 후하여 자선가로서 해주부 내에 평판이 높았던 선비였다. 안인수는 슬하에 태진[泰鎭(안태진)]·태현[泰鉉(안태현)]·태훈[泰勳(안태훈)]·태건[泰建(안태건)]·태민[泰敏(안태민)]·태순[泰純(안태순)] 등의 6남과 3녀를 두었는데, 3남 태훈(안태훈)이 안중근의 부친이다.
아버지 안태훈은 6형제 중에서도 특히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여덟 살 무렵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했으며 열 서너 살 무렵에는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사륙병려체(四六倂麗體)를 익힐 정도로 문재(文才)를 보여 인근에서는 그를 가리켜 선동(仙童)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안태훈은 마침내 서울로 유학하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태훈이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개항(開港)이니 개화(開化)니 하여 서구의 물결이 밀려옴에 따라 세상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태훈은 전통적 유학(儒學)에만 머물지 않고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에도 앞장섰던 선각적 인사이기도 했다.
이 무렵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세력은 근대적 문물의 수용과 함께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으로 개화파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년 70여 명을 선발하였는데 안태훈은 그 중에 뽑힌 개화파 청년일 만큼 개화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계획은 1884년에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이 실패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자연 무위에 그치고 말았으니, 안태훈의 나이 23세이고 안중근이 6세 때의 일이다. 갑신정변(1884)의 실패 후 이들 개화파 청년들은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바 안태훈은 몸을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화를 피하기 위해 이듬해인 1885년에 7∼80명의 가솔을 이끌고 고향 해주를 떠나 깊은 산골인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의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대부분의 안중근 전기류들에서 안(안태훈)씨 일가가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는 배경을, 대원군(大院君, 흥선대원군)이 막대한 양의 원납전(願納錢)을 요구하며 탄압을 가해옴으로써 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실시한 것은 1860년대 후반의 일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시기가 맞지 않으며 따라서 사실과 다른 것이다].
『안중근의사자서전』(이하 자서전으로 약칭)에 의하면, 이 무렵 안태훈은 ‘국사가 날로 틀려지나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된다.’ 하고, 또 ‘산에서 살면서 구름 아래 밭이나 갈고 낚시나 하면서 세상을 마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토로하면서 청계동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했던 안태훈은 갑신정변(1884)의 실패라는 정국의 회오리 속에서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개화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현세적 욕망을 단념하고 은둔 생활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태훈은 그의 부친 안인수와 상의하여 대대로 세거하던 고향 해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청계동 산골로 피신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위의 가계표에서, 친동생 정근[定根(안정근)]과 공근[恭根(안공근)]은 안중근 사후(死後)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정근(안정근)은 임시정부에 참가하는 한편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부회장과 상해중한호조사(上海中韓互助社)의 간부 등으로 활약하였고, 공근(안공근)은 김구(金九)가 주도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주요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4촌 동생 명근[明根(안명근)]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안악사건(安岳事件)」의 장본인이다. 「안악사건」이란 안명근이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처단하고 북간도(北間島)에 가서 의병운동을 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1910년 12월에 발각되자 일제가 이를 기회로 하여 황해도 지역의 애국지사 160여 명을 대거 검거한 사건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안명근의 일이 터지자 대부분의 안(안태훈)씨 일가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태진[泰鎭(안태진)]·태현[泰鉉(안태현)] 등 백부가 중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장근[莊根(안장근)]·경근[敬根(안경근)] 등 4촌들도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조카 봉생[鳳生(안봉생)]·원생[原生(안원생)]·진생[珍生(안진생)]·춘생[椿生(안춘생)] 등도 만주 독립군이나 광복군에 참여하며 독립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들 안(안태훈)씨 일가는 항일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이름을 높였다.

2. 청계동에서의 소년생활


황해도의 서부에 위치한 신천군 두라면(斗羅面) 청계동은 멸악산맥 줄기의 천봉산을 배경으로 첩첩 산중에 4∼50여 호의 인가가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이었다. 청계동의 지형은 험준하고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 매우 협소하였지만 일단 마을에 들어서면 꽤 넓은 논밭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빼어난 산세를 등에 업은 듯한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등 산수경치도 수려한 곳이었다. 때문에 세상을 잊고 은신하려던 안태훈 일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안태훈은 마을 입구의 암벽에 친필로 「청계동천(淸溪洞天)」네 자를 써서 암각하였는데 글자가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고 한다.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을 파서 못 가운데에 한 간의 초정(草亭)을 세우고, 안태훈은 형제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세상을 잊고자 하였다. 안중근이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청계동의 풍경을 ‘별유천지(別有天地)’라고 회상하는 것처럼 청계동의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와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더불어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청계동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게 되었다. 안중근은 7, 8세가 되면서 할아버지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는데 이후 10여 년간의 수학을 통해 유교경전(儒敎經典)과 조선역사(朝鮮歷史)에 관한 서적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그는 소년시절을 학문 정진에만 힘썼던 것은 아니다. 틈이 나는 대로 주위의 산을 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고, 활쏘기나 말 타기 그리고 사냥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청계동의 안중근 집에는 여러 명의 포수꾼이 기식을 하고 있었다. 청계동은 워낙 산중 마을이라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곧잘 출현하였으므로 이를 사냥할 목적에서 안태훈이 포수들을 고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포수꾼들을 따라다니며 안중근은 사냥이나 사격술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리하여 12세 무렵에는 말 타기와 활쏘기의 솜씨가 묘기를 부릴 만큼 능숙하였고, 15~6세가 되어서는 발군의 명사수(名射手)로 이름을 날릴 정도가 되었다. 이 무렵 안태훈의 배려로 청계동에서 의탁하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소년 안중근의 모습을 『백범일지(白凡逸誌)』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진사(필자주; 안태훈을 지칭)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 아들이 중근(안중근)으로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는데 상투를 틀고 자주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동방총(메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장총의 일종)을 메고는 날마다 노인당(老人堂)과 신상동(薪上洞)으로 사냥 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영기(英氣)가 발발하여 여러 군인들 중에서도 사격술이 제일이라고들 했다. 사냥할 때도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시키는 재주라는 것이다. 태건[泰建(안태건)] 씨와 숙질이 동행하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고라니를 여러 마리씩 잡아왔다. 그것을 가지고 군(軍)을 먹이는 것이었다.

백범(김구)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때 동학군으로 참가했다가 패퇴한 뒤 오도 갈 데 없는 처지에서 안태훈의 배려로 청계동에서 수개월 동안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안중근의 용맹하고 영기 발발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태건[泰建(안태건)]은 안태훈의 바로 밑의 동생이고, 군(軍)은 뒤에서 보겠지만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동학군과 대항하기 위해 안태훈이 이끌던 의려(義旅)의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사냥에 열중하다 보니 공부를 자연 소홀히 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모와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게을리 한다고 여러 차례 꾸중을 듣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어린 소견에도 문약하기만 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보다는 중국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같이 장부다운 기개로써 역사에 남기를 바랬다. 안태훈은 아들의 그러한 심지를 헤아린 뒤로는 중근(안중근)의 아우 정근[定根(안정근)]·공근[恭根(안공근)] 등에게는 글공부를 독려해도 큰아들에게는 공부하라고 꾸짖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남다른 용맹심을 지난 큰 아들 안중근의 기백을 키우는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무렵 안중근에게는 몇 가지의 변화가 있었다. 14세 되던 해인 1892년에 할아버지의 죽음과, 16세 때인 1894년에 김홍섭(金鴻燮)의 딸 김아려(金亞麗)를 맞이하여 결혼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이때의 일을 『자서전』에서는 “조부 인수(안인수)께서 돌아가시므로 나는 사랑하고 길러 주시던 정을 잊을 수 없어 심히 애통한 나머지 병으로 앓다가 반년이나 지난 뒤에 회복하였다.”라고 기술하듯이, 그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반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처럼 그는 지극한 효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장성함에 따라 안중근은 16세 되던 해에 황해도 재령군 김 진사의 딸 김아려(金亞麗; 당시 17세)를 아내로 맞이하여 성혼함으로써 성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 동학농민전쟁과 상무정신의 배양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외세의 제국주의 침략이 거세게 몰려옴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있었고, 안으로는 봉건적 지배질서의 모순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집권세력인 민씨정권은 무능하여 그와 같은 격동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집권욕에만 사로잡혀 정국은 날로 혼란해져 갔다. 그러한 속에서 봉건세력의 극심한 탄압과 학대에 대항하는 농민이 삼남민란(三南民亂)에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급기야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국적 항쟁을 일으키니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이다. 동학농민전쟁(1894)은 처음에는 전라도 지역에서 발원하여 곧 삼남지방으로 번져갔고, 이어 전국으로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다.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는 동학의 황해도 도접주(道接主) 원용일(元容日)의 지도아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해주(海州) 감영(監營)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각처의 양반 부호들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鄭顯奭)은, 다수의 포수꾼들을 기식(寄食)시키며 청계동에서 상당한 사병(私兵)을 기르고 있던 안태훈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정현석은 일찍이 1883년에 원산(元山)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세운 개화파 인사였다. 때문에 개화파 인사인 안태훈은 정현석과는 이전부터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리하여 정현석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안태훈은 포수꾼과 민병 등 70여 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에게 위협을 받던 해주 감영을 구제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안태훈이 일으킨 민병은 이른바 「갑오의려(甲午義旅)」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갑오의려」는 봉건세력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역사 발전의 시각에서 보수반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주로 봉건사회의 양반계층이 주도한 「갑오의려」에는 동학군 토벌의 공을 세워 입신출세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양반들이 많았다. 따라서 「갑오의려」는 반외세의 기치아래 일어난 의병(義兵)과는 또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갑오의려」가 보수 반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반론적 평가로서, 안태훈의 경우는 보수 반동의 일반적 「갑오의려」와는 성격을 달리했던 것 같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안태훈은 일찍이 개화파 세력에 가담한 경력의 인사였다. 그리고 이후의 일이지만 천주교로 개종하여 적극적으로 전도사업을 벌일 만큼 서구 문물의 수용에 앞장서던 개화적 인사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안태훈의 반동학적(反東學的) 입장은 개화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화와 동학이 이념적 지향을 달리함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화와 동학의 상반된 입장은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피치 못할 갈등이기도 했다. 반봉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반봉건의 실천 논리에서 이들 양자는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개화가 서구의 논리를 수용, 추구하였던 것에 비해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고 전통논리에 의해 반봉건의 구현을 모색했던 점이 달랐던 것이다. 때문에 양자의 현실적 대응은 상반된 양상을 띠울 수밖에 없었다. 즉 동학의 입장에서는 개화파의 세력이 외세 침략의 앞잡이나 길잡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개화의 입장에서는 동학군의 봉기가 민란 내지는 폭도이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역사 인식의 문제에서 개화사상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안태훈의 「의려」는 그러한 개화적 인식이 깊게 반영된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
안태훈의 「의려」가 지니는 성격은 그렇다 치고, 어쨌든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안태훈을 도와 의려의 선봉(先鋒)에 서서 맹활약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선봉을 섰다는 사실이 안중근의 담대한 기백을 말해주고 있지만, 적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과 비범한 지략은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 『자서전』에서는 당시 동학군과의 싸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날 밤 내 아버지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의논하기를 “만일 내일까지 앉은 자리에서 적병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면,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대항하지 못할 것은 필연한 일이라, 오늘 밤으로 먼저 나가 적병을 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곧 명령을 내렸다.
닭이 울자 새벽밥을 지어 먹고 정병 40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병정들은 본동(本洞)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 선봉 겸 정탐독립대(偵探獨立隊)가 되어 전진 수색하면서 적병 대장소(大將所)가 있는 지척에까지 다다랐다. 숲 사이에 숨어 엎디어 적진 형세의 동정을 살펴보니 기폭이 바람에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아 대낮같은데 사람과 말들이 소란하여 도무지 기율이 없으므로 나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이르되,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연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다.”고 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얼마 안 되는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당적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대답하되, “그렇지 않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고 했다.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함부로 모아 놓은 질서 없는 군중이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저런 난당(亂黨)은 비록 백만 대중이라고 해도 겁날 것이 없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뜻밖에 쳐들어가면 파죽지세(破竹之勢)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방략으로 좇으라.”고 했더니 모두들 응락하여 계획을 완전히 끝내었다.
호령 한마디에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진의 대장소를 향해 사격을 시작하니 포성은 벼락처럼 천지를 진동하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적병은 별로 예비하지 못했기에 미처 손을 쓸 수 없었고,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기계도 들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밟으며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했었다.

이처럼,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익힌 무예와 병법을 통해 이미 훌륭한 용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전력의 절대 열세 속에서도 담대한 용기와 탁월한 지략을 바탕으로 기습전을 감행하면서 매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함으로써 주위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기도 하였다.
한편 동학군과의 싸움을 경험하면서 안중근의 생각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대로 발전하였다. 그의 생각은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는 점점 약하여져,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文弱)에서 벗어나 무강(武强)의 기품을 조성함으로써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상무정신(尙武精神)에 입각한 구국의식을 갖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마을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무예를 단련시키는 한편 점차 다른 지역의 청년들까지 포함시키며 그와 같은 의지를 실천해 갔다. 또한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찾아가서 감개한 이야기로 국사(國事)를 논하며 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안중근의 호방한 기질은 아버지 안태훈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안태훈은 ‘정의(正義)’를 가훈으로 삼으며 매사에 의리를 존중하였다. 그리고 도량 또한 넓어 많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안태훈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따랐다. 앞서 보듯이 백범 김구를 청계동으로 불러 거처까지 마련해주고 기거하게 한 사실은 그러한 안태훈의 면모를 말해주고 있다. 동학농민전쟁(1894) 때 19세의 김구는 동학의 팔봉접주(八峰接主)로 해주공략 작전에 선봉장으로 참가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또한 동학군내에서 분란이 일어나서 한 때 기세가 하늘을 찌르듯이 높았던 황해도 지역의 동학군은 자멸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김구는 일신의 거처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안태훈이 김구를 반갑게 맞이하여 줌으로써 김구는 잠시나마 청계동에서 보낼 수 있었다. 김구는 이때의 일을 훗날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장동군(長洞郡) 몽금포 근처의 마을로 피신하여 석 달을 숨어 살았다. 동쪽에서 전해오는 풍문을 들으니 이동엽은 벌써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고, 해주 각 고을의 동학은 거의 소탕되었다는 얘기였다.
정씨와 함께 텃골 본집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매우 불안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병들이 죽천장(竹川場)에 진을 치고, 부근 동학당을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양친께서도 내게 먼 땅으로 가서 화를 피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정씨는 청계동 안 진사(안태훈을 지칭함)를 찾아가 보자고 하였다. 나는 주저했다. 안(안태훈)씨가 받아들여 준다 하더라도 패군지장인 나에게 포로와 같은 취급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자 정씨는 “안(안태훈) 진사가 그때 밀사를 보냈던 진의는 무슨 책략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형의 연소 담대한 재기를 아껴서 그랬던 것이오, 염려 말고 같이 갑시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토록 힘써 권하는 바람에 나는 정씨와 함께 그날 천봉산을 넘어서 청계동 동구까지 갔다. (중략)
우리의 명함을 본 안(안태훈) 진사는 정당(正堂)에서 우리를 친절히 맞아들였다. 수인사 후에 안(안태훈) 진사의 맨 첫말이 이러했다.
“김 석사(金碩士 : 김구를 지칭함)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벗어난 뒤에 심히 우려되어 계신 곳을 탐색하였은 즉 계신 곳을 모르던 터에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그러고서 다시,
“들으니 구경하(具慶下 : 두 어버이 시하)라시던데 양위 두 분은 어디 안접(安接)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며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노라고 말하였더니 안(안태훈) 진사는 즉시 오일선(吳日善)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붙여주면서, “당장 텃골에 가서 김 석사(김구) 부모님을 모시고 이웃 근동의 우마를 빙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옮겨 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집 한 채를 사서 그날로 청계동에 살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살게 되니 내 나이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이었다.
안(안태훈) 진사의 후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날마다 사랑에 와서 그가 없는 사이라도 자기 동생들과 놀고, 사랑에 모인 친구들과 얘기를 하든지 책을 보는지 마음대로 해가며 아무 상관 말고 안심하고 지내라는 것이다. (중략)
안(안태훈) 진사의 6형제는 모두가 장사 체격으로 허약하게 보이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중 안(안태훈) 진사는 특히 안광이 찌를 듯하여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대관들 중에도 필단(筆端)이나 면담으로 항변을 당하면, 그 당장에는 안(안태훈) 진사를 나쁘게 평하더라도 직접 면대하면 자연 경의하는 마음이 얼어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지만, 그러나 품성이 퍽 소탈하여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고 친절하여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은 매우 청수했으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잘된 율시들이 많이 전송되었다. 안(안태훈) 진사 자신도 때때로 나에게 득의의 작을 읊어주곤 했다. 그리고 안(안태훈) 진사는 친필로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 : 三略素書)를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는 주흥이 날 때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인용문이 좀 길기는 하지만, 이상의 내용은 안태훈의 인물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태훈은 뛰어난 학식과 소탈한 성격, 그리고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조정 대관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당당하게 항변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력으로 대치하던 동학군의 두목인 백범(김구)을 너그럽게 수용하는 호방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엔 적군에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백범(김구)도 이러한 안태훈의 인품에 감복하게 되었다. 때문에 4~5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청계동의 생활이 백범(김구)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큼 뜻 깊은 나날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백범(김구)은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삭이지만 이 동안은 내게는 심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안태훈) 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산림(高山林, 고능선)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백범(김구)이 훈도를 받았다는 고산림이란 고능선(高能善)을 가리킨다. 그는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의 문인이며, 의병장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과는 동문으로 당시 해서(海西)의 행검(行儉)으로 꼽히는 대학자였다. 고능선 역시 이 무렵 안태훈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고능선은 그의 학통에서 드러나듯이 척사유림의 인사였다. 때문에 개화적 인사였던 안태훈과는 사상적으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1895년 을미년(乙未年)에 의병 기의를 놓고 고능선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데 대하여, 안태훈이 신중론을 펴 의병 기의를 거절함으써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것은 안태훈이 사상적 편향없이 동학출신이나 척사유림의 인사들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안태훈의 사상이 전통논리나 서구논리의 어느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유연함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간관계에서 이념적인 것 보다는 인물 됨됨이에 비중을 두었던 안태훈의 호방한 기품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안태훈의 기질은 안중근에게 이어졌고, 안중근의 인격 형성에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것이었다. 안중근이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가장 소중히 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은 물론, 후일 안중근이 구국운동에 투신할 때 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을 받은 바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안중근이지만, 아버지 안태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태훈이 선비의 모습을 간직한 문사적(文士的) 인사였다면 안중근은 무사적(武士的) 성품이 넘쳤던 점일 것이다.
안중근은 청소년 시절 자신이 가장 즐기던 것이,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騎馳駿馬).

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의리와 호방함을 갖춘 무사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모험심도 많아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기도 했다. 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동지 6~7인과 산에 가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탄환이 총구멍에 걸려서, 빼낼 수도 없고 들이밀 수도 없어 쇠꼬챙이로 총구멍을 뚫으려고 주저 없이 쑤셨더니, 「쾅」하고 터지는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머리가 붙어 있는지, 목숨이 살아 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자세히 살펴보니 탄환이 폭발하여 쇠꼬챙이는 탄환알과 함께 오른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또 한 번은 남의 잘못 쏜 엽총에 산탄(散彈) 두개가 등에 박혔는데, 별로 중상은 아니었고 곧 총알을 빼내어 나았다.

그 밖에도, 산을 즐기던 그는 산에 올랐다가 발을 잘못 디뎌 수십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다가 낭떠러지에 걸린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도 있었다. 이처럼 남다른 경험을 통하여 안중근은 더욱 강인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길러갈 수 있었다. 그리고 후일 그가 의병이 되어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산중에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 이러한 경험들은 더없이 귀중한 힘이 되었으니, 그 같은 일들은 그에게 다가올 숙명적 고난과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예비 단련의 과정인 셈이기도 하였다.

4. 천주교 입교와 신앙생활

(1) 천주교 입교의 배경


안중근의 청년시절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천주교에의 입교이다. 안중근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것은 19세 되던 해인 1897년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안중근은 수년간을 천주교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동안 천주교의 신앙을 깊이 간직하게 된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역시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때문이었다. 안태훈의 천주교 입교는 다음과 같은 사정에 연유되었다.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의려를 일으킨 바 있던 안태훈은 동학군으로부터 탈취한 양곡 5백 석을 군량미로 사용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양곡 5백 석이 탁지부(度支部) 소관의 정부미였던 관계로 후일 안태훈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으로부터 군량미 반환의 독촉을 받게 되었다[당시 안태훈이 동학군으로부터 탈취한 양곡이 정부미라는 설과 어윤중(魚允中) 개인 소유의 것이라는 설의 양론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윤중이 황해도에 그러한 대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고 그 후에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이것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아 정부미로 봐야 된다는 신용하 교수의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 愼鏞廈, 「安重根의 思想과 義兵運動」,『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1985, 146∼147면].

그러나 5백 석의 양곡을 정부에 반환하게 되면 안태훈의 집안은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될 처지였다. 그리하여 양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안태훈은 일찍이 개화파 동지이며 당시 갑오경장[甲午更張, 갑오개혁(1894)] 내각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던 김종한(金宗漢)에게 도움을 청하여 양곡 반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단락되었던 양곡 반환문제는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어윤중이 피살된 후 민비(명성황후) 수구파의 거물인 민영준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어윤중이 양곡문제를 들고 나올 처음에는 그래도 김종한의 도움으로 무마할 수 있었지만, 이제 막강한 세도가인 민영준에게는 도저히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다급하게 된 안태훈은 청계동에 이웃한 안악(安岳)의 마렴성당에 피신하여 프랑스인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안태훈이 천주교당에 피신하여 있는 몇 달 동안 프랑스인 신부가 나서서 이 정부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당시 천주교는 집권세력이던 친로(러시아)수구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치외법권적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미의 반환문제를 무마할 수 있었다. 당시 황해도에서는 마렴(麻簾)의 천주교 본당이 유일한 것으로, 마렴성당의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홍[본명 : 빌헬름(Joseph Wilhelem), 한국명 : 洪錫九(홍석구)] 신부였다. 그가 황해도에 온 것은 황해도가 평안도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포교지로 된 1896년의 일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그는 페낭신학교에서 수학한 당시 36세의 청년 선교사로서 1883년에 조선선교사로 임명된 이래 경기도 일대에서 전교에 힘을 쏟다가 황해도가 독립 포교지로 됨에 따라 첫 번째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왔다.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가 정부미 반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안태훈은 마렴의 천주교 교당 안에 머무르면서 천주교 강론을 듣고 성서를 읽으며 천주교 신자가 되기에 이르렀고 베드로란 영세명까지 받았다. 그리하여 사건이 모두 해결되어 1896년 10월경 귀가할 때에 안태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뿐 아니라 그는 천주교를 황해도 일대에 포교하고자 박학사(博學士) 이보록(李保祿)과 함께 120권의 교리서를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2) 청계동 본당의 설립과 「해서교안」


청계동에 돌아온 안태훈은 1897년 1월에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를 초빙하여 안중근과 가족 등 36명을 영세받게 하였으니 이때가 안중근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이러한 경로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 청계동의 안(안태훈)씨 일가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 되었고 또 천주교 전파에도 남달리 열성적이었다. 특히 안태훈은 천주교의 선교에 앞장서는 한편 본당 축성 사업을 벌여 산골 동네인 청계동에다 황해도에서는 두 번째 본당을 설치하는 적극적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에는 마렴에 있던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가 이곳 청계동 본당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청계동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지휘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8년에 청계동의 교세가 140여 명이던 것이 1900년에 청계동 본당의 총 교세는 25개 공소에 영세 신자 8백여 명, 예비 신자 6백여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고, 1902년에는 영세 신자 1천 2백여 명, 예비 신자 9백여 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또한 천주교의 축일에는 백여리 밖의 신도들까지 모여 들어 청계동 본당에는 겨우 3분의 1 정도만이 입장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렇듯 청계동 본당의 급속한 교세 확장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의 활약과 안태훈·안태건 형제의 헌신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는 치외법권적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리의 탄압으로부터 신음하는 민중들의 고민을 해결해줌으로써 수많은 신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안태훈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가 미처 해결하기 어려운 분쟁들을 처리하면서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의 대리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청계동 본당의 회장을 맡았던 안태건(영세명 : 가밀로) 역시 각지의 공소에서 발생되는 분쟁의 해결에 앞장섬으로써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시켜 갔다.
그러나 안태훈의 천주교 전도 사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안태훈은 천주교도를 탄압하던 관리에 의해 여러 번 체포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해서교안(海西敎案)」이 발생하게까지 되었다. 「해서교안」이란 1896년 이후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도가 급속히 증가되는 상황에서, 관리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해오자 천주교회가 반발하면서 일어난 충돌이었다. 「해서교안」은 1900년경부터 발단되기 시작하여 이후 3년여에 걸쳐 황해도 각 지역을 휩쓸며 일어났다. 이러는 동안 황해도 지역 천주교회의 본부 역할을 담당하던 청계동 본당의 안(안태훈)씨 형제들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안태훈과 안태건이 번갈아 투옥되었으며, 특히 안태훈은 중앙에서 내려온 사핵사(査覈使) 이응익(李應翼)으로부터 주모자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하여 안태훈은 수개월 동안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야 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화병을 얻은 안태훈은 중병을 앓다가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3) 안중근의 신앙 활동


한편 토마스란 영세명을 받은 안중근은 프랑스인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로부터 교리 수업을 받아가며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 20여세 무렵부터는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를 수행하여 해주·옹진 등지의 황해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과 직접 접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는 「대학교」의 설립을 계획하는 한편 교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천주교 전도활동을 하는 가운데에도 포교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민족과 정의를 위해 열정을 쏟았다.
먼저 전도활동과 관련하여 당시 그가 행한 설교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자서전』에 이때의 설교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연설문이 장문인 관계로 주요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흔히 신령하기 때문이오. 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生魂)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는 혼이오. 둘째는 각혼(覺魂)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지각(知覺)하는 혼이오. 셋째는 영혼(靈魂)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고 능히 지각하고 그리고서 또 능히 시비를 분변하고 능히 도리를 토론하고 능히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오.
사람이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육체만으로서는 짐승만 같지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짐승은 옷이 없어도 추위를 나고 직업이 없어도 먹을 수 있고 날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어 재주와 용맹이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많은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의 본성이란 것은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오.
그러면 천주는 누구인가? 한 집안에 그 집 주인이 있고, 한 나라에 임금이 있듯이 이 천지 위에는 천주가 계시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삼위일체로서 전지(全知)·전능(全能)·전선(全善)하고 지공(至公)·지의(至義)하여 천지만물 일월성신을 만들어 이루시고 착하고 약한 것을 상주고 벌주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큰 주재자가 바로 그분이시오. (중략)
그런데 이 천지간에 큰 아버지요 큰 임금이신 천주께서 하늘을 만들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들어 우리를 떠받쳐 주시고, 해와 별과 달을 만들어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또 만물을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쓰게 하시니 실로 그 크신 은혜가 그같이 막대한데 만일 사람들이 망령되어 제가 잘난 척 충효를 다하지 못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의리를 잊어버린다면 그 죄는 비길 데 없이 큰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며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소. 그러므로 공자(孔子)도 말하기를,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도 없다.’고 했소. (중략)
혹시 어째서 천주님이 사람들이 살아있는 현세(現世)에서 착하고 악한 것을 상주고 벌주지 않느냐고 하겠지마는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오. 이 세상에서 주는 상벌은 한정이 있지만 선악에는 한이 없는 것이오. (중략)
이 세상 벌은 다만 그 몸을 다스릴 뿐이오, 그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지만 천주님의 상벌은 그렇지 아니하오. 천주님은 사람의 목숨을 너그러이 기다려 주었다가 세상을 마치는 날 선악의 경중을 심판한 연후에 죽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무궁한 상벌을 받게 하는 것이오. 상은 천당의 영원한 복이요 벌은 지옥의 영원의 고통으로서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한번 정하고는 다시 변동이 없는 것이오. (중략)
만일 천주님의 상벌도 없고 또 영혼도 역시 몸이 죽을 때 같이 따라 없어지는 것이라면 잠깐 사는 세상에서 잠깐 동안의 영화를 혹시 꾀함직도 하지마는 영혼이란 죽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라 천주님의 지극히 높은 권한도 불을 보는 것처럼 명확한 것이오.
옛날 요(堯) 임금이 말한,
‘저 흰구름을 타고 제향(帝鄕)에 이르면 또 다른 무슨 생각이 있으리요.’ 한 것이나, 우(禹) 임금이 말한
‘삶이란 붙어 있는 것이요(寄也),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라(歸也). 한 것과 또
‘혼은 올라가는 것이요, 넋은 내려가는 것이리.’ 한 것들이 모두 다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이오.
만일 사람이 천주님의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 하여 그것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유복자(遺腹子)가 아버지를 못 보았다고 해서 아버지 있는 것을 안 믿는 것과 같고 또 소경이 하늘을 못 보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는 것을 안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오. 또 화려한 집을 보고서 그 집을 지을 때 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집을 지은 목수가 있었던 것을 안 믿는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소. (하략)

이상의 설교 내용은 안중근이 여순(旅順)의 감옥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던 때에 회상한 것이므로 당시에 행한 연설과는 다소의 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된 초점은 안중근의 신앙심을 살피는데 있는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연설은 안중근의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전도 활동 중에 안중근은 일반 대중과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저급한 것을 보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내에 뛰어난 인재들을 교육하고 양성함과 동시에 포교에도 도움을 주기 위하여 「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와 상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천주교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민(본명; 뮤텔, 민덕효)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은 안중근의 계획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만약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굽히지 않고 「대학교」설립의 승낙을 얻기 위해 계속 설득해 보았지만, 끝내 외국인 신부들이 이러한 안중근의 제안을 반대함으로써 그가 구상한 「대학교」의 설립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중근은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토록 믿고 따랐던 외국인 신부가 종교적 이기심으로 오로지 포교에만 관심을 가질 뿐 우리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데 대한 배신감과 분함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 양심과 외국인 신부들의 종교 양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안중근의 생각은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 신부들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그로 인하여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로부터 수개월 동안 배우던 프랑스 말도 중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외국어를 배웠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외국어의 학습은 그 외국의 앞잡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대한(大韓)이 세계에 문명을 떨친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려 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민족주체의 의지를 강하게 품게 되었다. 『자서전』에서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벗이 묻기를, “왜 배우지 않는가?”고 하기로, 대답하기를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 영국말을 배우는 자는 영국의 앞잡이가 된다. 내가 만약 프랑스 말을 배우게 되면 프랑스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를 폐하였다. 만약 우리 한국이 세계에 떨친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자네는 이를 염려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안중근은 천주교를 신봉하면서도, 그 종교적 대행자가 민족의식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이를 단호히 배격하였던 것이다. 즉 그의 신앙의식은 민족 양심과 종교 양심이 일치하는 바탕위에서 키워진 것이었다.
안중근은 신앙 활동 중에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와 다툰 일화를 보기로 한다. 앞서 보았듯이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는 안중근에게 천주교의 신앙을 가르쳐준 장본인일 뿐 아니라 양곡문제로 안(안태훈)씨 일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해결 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또 안중근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를 따라 황해도 각지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같이 다니기도 하였다. 그런데 평소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가 일반 교인들을 압제하는 것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안중근이 나서서 제기하였고, 이에 화난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는 안중근을 심하게 구타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존경하는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이었지만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진언하는 안중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국 신부의 우월의식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이때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해 옴에 따라 이들은 다시 전일의 우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교인 중 억울한 경우를 당하게 되면 그는 자기 일처럼 나서서 해결하여 주었다. 옹진군(甕津郡)에 사는 교인 중의 하나가 서울의 중앙 대관(大官)에게 돈 5천 냥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상대가 중앙의 고관인지라 교인은 돈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를 안 안중근은 서울의 대관 집에 찾아가 당당하게 이치를 따져 대관을 굴복시킨 다음 돈을 돌려주겠다는 확약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이처럼 안중근은 전도생활을 하던 중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정의의 의식은 점차 사회 문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에 관한 문제로 옮겨 가면서 구국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5. 청년시절의 의협심과 일화


안중근은 그의 청년 시절에 전도생활을 하는 한편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하여 채표회사(採票會社)인 만인계(萬人稧)의 사장에 피선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출표식(出票式)이 거행되던 날 안중근은 만인계의 사장으로서 출표식에 입회하였다. 식장에는 원근에서 온 수만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 개표가 시작되는 순간 추첨 기계의 고장으로 문제가 발단되었다. 한번에 한 장씩 나오게 되어 있는 기계에서 표인(票印) 5~6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자 출표식을 지켜보던 수만의 군중들은 시비곡직을 가리기도 전에 협잡한 짓이라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흥분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일대 소동을 벌였다. 그런 상황에서 채표회사의 임원은 물론 경비를 맡던 순검까지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안중근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안중근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면서 사장을 죽이라고 외쳐댔다. 이때 안중근은 “만일 사장이란 자가 한 번 도망을 간다면, 회사 사무는 다시 돌아볼 여지가 없을 것이요, 더구나 뒷날 명예가 어찌될 것인가?” 하고 자리를 지키며 군중들을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흥분될 대로 흥분된 군중들은 막무가내였다. 급박한 형세에서 안중근은 12연발의 권총을 꺼내어 계단 위로 올라가 관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왜 이러는가? 왜 이러는가? 잠깐 내말을 들으시오.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는가? 그대들이 시비곡직도 가리지 않고 소란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야만적인 행동이 있을 것인가? 그대들이 비록 나를 헤치려 하지마는 나는 죄가 없다. 어찌 까닭 없이 목숨을 버릴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결코 죄 없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나와 더불어 목숨을 겨룰 자가 있으면, 흔쾌히 앞으로 나서라.” 그러자 군중들은 모두 겁을 집어 먹고, 물러나 흩어지고 다시는 떠드는 자가 없었다. 이어 안중근은 군중을 불러 모아 안정시킨 뒤, “오늘 된 일들은 이렇고 저렇고 간에 별로 허물된 것이 없고, 공교롭게도 기계 고장으로 생긴 일이니, 원컨대 여러분들도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떠하오?” 하자 군중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이렇게 군중들을 타이른 안중근이 “그러면 오늘 출표식 거행하는 것을 마땅히 시종여일하게 한 다음에라야 남의 웃음거리를 면할 것이오. 그러니 속히 다시 거행하여 끝내는 것이 어떠하오?” 했더니 군중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응락함으로써 채표식을 계속 거행하여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스무 살 남짓의 청년 안중근은 노도처럼 밀려드는 성난 군중들을 대상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자세로 맞서 이들을 무마함으로써 사장의 의무를 다하는 대범함을 보였던 것이다.
한번은, 금광 감리(監理)인 주가(朱哥)라는 사람이 천주교를 비방함으로써 전도활동에 피해가 적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때문에 천주교 측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여 주가라는 사람과 사리문답을 통해 설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그 총대(總代)에 선정되어 홀로 주가라는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4~5백 명이나 되는 금광의 일꾼들이 제각기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안중근을 두들기려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안중근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어 주가의 가슴에 대고, “네가 비록 백만 명 무리를 가졌다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알아서 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가는 크게 겁내어 좌우를 물리치므로, 일꾼들이 안중근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안중근은 주가의 오른 손을 잡은 채로 문밖을 나와 10여리를 동행케 한 다음 일꾼들의 위협에서 벗어 나온 일이 있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상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찾아갔던 것이나, 위급한 상황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안중근의 기개는 가히 범인(凡人)이 따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미 소년 시절에 의려(義旅)의 선봉에 섰던 그의 놀라운 기개는 청년시절을 통해 더욱 강고해져 후일 의병활동으로 이어져 갔으며,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처단’이라는 역사적 의거를 거행케 했던 것이다.

제2장 민족의 위기와 계몽 운동에의 투신

1.「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의 늑결과 중국 이주의 계획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급기야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놓고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일제는 조선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하며 식민지화 작업을 노골적으로 자행하였다.
안중근이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된 직후였다. 그는 러일전쟁(1904)의 발발 직후부터 국제 정세의 변동을 예의 주시해 오던 터였다. 각종 신문의 보도는 물론 각국의 역사책들을 탐독하면서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에 의하여 일제에게 국권을 박탈당하자, 그는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앞날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전 가족을 중국 상해(上海)로 이주시켜 상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앞서 러일전쟁(1904) 당시만 하더라도 이들 안(안태훈)씨 부자는 일제의 노골적 침략이 이렇게 급박하게 다가올 줄은 깊게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러일전쟁(1904)이 일어나자 당시 안중근은 어느 쪽이 승리하던 한국에게 유리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러일전쟁(1904) 자체가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쟁탈전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양쪽 중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될 경우 한국에게 더 불리하게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일제는 러일전쟁(1904)의 선전포고문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기만적 구호를 내세웠고 한국인의 후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물론 안중근이 이를 굳게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독자적 노선을 견지하기 어려울 만큼 국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승리가 우리로서는 조금은 나을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이들 양 강대국이 우리의 면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하여, 설령 이 침략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더라도 힘이 없는 당시의 한국 정부는 뾰족한 방도 없이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었다. 이 무렵 국제사회는 오직 양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만이 관철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약자인 우리 민족은 눈앞에서 그러한 광경이 펼쳐지는 가운데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일전쟁(1904)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곧이어 한국의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하였던 바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의 늑결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이들 안(안태훈)씨 부자는 전 가족의 국외 이주와 함께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에 의해 침탈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일가의 상해 이주를 준비하기 위하여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직후인 1905년 말 상해로 건너갔다.
이때 안중근은 상해로 건너간 목적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 듣건대 청국 산동 상해 등지에는 한인이 많이 살고 있으니 우리 집안도 역시 그곳으로 옮아 살다가 전후의 방책을 도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살피고 돌아올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그 사이에 비밀히 짐을 꾸려서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진남포로 옮겨 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신 다음에 이일을 의행하도록 하십시다.”고 했다. 이로써 부자의 약속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즉 안중근은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운동의 방책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산동(山東) 등지를 두루 다녀 본 뒤 상해(上海)에 갔다. 안중근이 국외 이주를 계획할 때 기대를 걸었던 곳은 상해였다. 상해는 세계 해상교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조계지(租界地)가 있던 국제도시였다. 따라서 상해는 구미 각국인의 내왕과 거주가 많아 국제적인 여론 형성과 정보 수집 등에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1910년대 이후 한국의 혁명지사들이 이곳을 독립운동의 해외 거점으로 삼고자 다수 망명하였으며 3·1운동(1919) 직후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한 곳이었다. 안중근은 이미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늑결 직후에 상해를 국권회복운동의 거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해에 간 그는 그곳의 여러 동포들을 만나면서 국권 회복운동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안중근은 상해의 한국인 유력자 민영익(閔永翊)을 두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문지기 하인이 “대감은 한국인은 만나지 않는다.”고 하며 문을 닫고 들어서지 못하게 하여 만날 수조차 없었다. 이에 분개한 그는 다음과 같이 크게 꾸짖은 뒤 다시 민영익을 찾는 일을 단념하였다.

공(公)은 한국인이 되어 가지고 한국 사람을 안 만난다고 하면 어느 사람이라야 만나게 되는 것인가? 공은 한국에서 대대로 국록을 먹은 신하로서 이 같이 위급한 시기에 전혀 사람 사랑하는 마음 없이 베개를 높이하고 편안히 누워 조국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이 같은 일이 있어도 좋단 말인가. 오늘날 나라가 위급해진 것은 그 죄가 전혀 공들과 같은 대관들한테 있는 것이요, 민족의 허물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워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인가?

민영익은 민씨(명성황후) 정권의 중요 인물로 1883년에는 전권 대사로 미국을 다녀온 뒤 관직요로를 거친 구한국의 대관 출신이었다. 그는 러일전쟁(1904) 직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상해에는 민영익 외에도 구한말의 세도가 또는 부호들이 거액의 자금을 휴대하고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온만에 급급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안중근이 만난 상인 서상근(徐相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의 간절한 제의를 거절한 서상근은 “나는 한낱 상인으로서 기십 만 원의 재정을 정부대관들에게 빼앗겨 이처럼 몸을 피하여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 나라의 정치와 백성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안중근이, “그렇지 않다. 공은 오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만약 백성이 없다면 나라도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라는 몇 사람의 대관들의 나라가 아니고 당당한 이천만 민족의 나라이다. 그런데도 국민으로서 국민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어찌 민권의 자유를 얻겠는가? 지금은 민족 세계인데 오직 한국 민족만 즐겨 남의 밥이 되어 앉은 채 멸망을 기다려서야 될 일이겠는가?”면서 설득하였지만, “공의 말이 옳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단지 상업으로 입에 풀칠만 하면 되는 것이니 거듭 나에게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민족의 위기를 아무리 역설하여도 이른바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고 안중근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우리 민족의 뜻이 모두 이와 같으니 나라의 앞길은 알 만하다.’고 하며 민족의 앞날에 대한 생각에 강개를 금하기 어려웠다.
한편 안중근은 동포들의 단결 이외에도 상해의 외국인들, 특히 천주교의 유력한 외국인 신부들을 통하여 한국의 국권침탈 사실과 한국민의 국권회복 요구를 그들의 본국에 급히 전달하여 외교적 원조를 발동케 하는 것도 유력한 국권회복운동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상해 여행의 목적에는 천주교 인사들과의 만남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지난날 국내에서 안면이 있던 프랑스인 곽(郭) 신부를 만나 그러한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곽(郭) 신부는 안중근의 상해이주 계획을 반대하면서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때 곽 신부의 얘기는 “옛글에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다’ 했으니,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니, 이 네 가지를 철저히 성취시키면 2천만 정신의 힘이 반석과 같이 튼튼해서 비록 천만 문의 대포를 가지고서도 능히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안태훈이 갑자기 별세함으로써 안중근은 더 이상 상해이주 계획을 추진하지 않고 급히 귀국하였다. 이로서 상해로의 이주와 함께 그곳에서 전개하려던 국권회복운동의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으니 이때가 안중근의 나이 28세 되던 1906년 양력 1월(음력 1905년 12월경)의 일이었다.

2. 진남포로의 이주와 교육운동


안중근이 상해에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장례가 이미 끝난 뒤였다. 안중근이 상해로 떠나는 것과 때를 맞추어 이 무렵 안태훈은 안중근과의 약속대로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鎭南浦)로 이주하였다. 안태훈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속에서 화병을 얻어 안중근이 상해로 떠나갈 때에는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었다. 그런데 진남포에 이주한 직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이에 가족들은 급히 상해의 안중근에게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한편 영구를 청계동으로 옮겨 장례를 치루었다.
급히 서둘러 청계동에 도착한 안중근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버지의 별세를 당하여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안중근에게 아버지 안태훈은 정신적 지주였고, 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리고 안태훈 역시, 장남 안중근에게 쏟았던 사랑과 믿음은 특히 유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부자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서로 힘을 굳게 합치며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안중근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일으킨 의려의 선봉에 섰던 일이며, 안태훈이 천주교로 개종한 이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일, 그리고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의 강제 늑결을 당해서는 상해이주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들 부자는 언제나 뜻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안중근에게 아버지의 별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깊은 충격이었다. 그러한 충격 속에서 안중근은 상주로서 상례를 다하며 그해 겨울을 청계동에서 보냈다.
이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평소 즐기던 술을 독립이 되는 날까지 마시지 않기로 굳은 맹세를 하였다. 앞에서 보듯이 술 마시는 것은 안중근이 청년시절에 즐기던 것 네 가지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 산소 앞에서 금주(禁酒)의 결심을 하였던 것은 민족의 위기에 대처할 앞으로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후 안중근은 이때의 맹세를 한번도 어기지 않고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한편 안중근은 아버지의 죽음에만 한없이 슬퍼할 수 없었다. 민족의 현실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운 때 청계동의 산골에서 소일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에도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6년 봄에 다시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진남포는 중국 상선이 빈번히 드나들 뿐 아니라 상해로 가는 주요 지점이었다. 때문에 이들 안(안태훈)씨 일가가 처음에 상해 이주의 계획과 함께 진남포로 이사했던 것은 그러한 진남포의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진남포로의 이주는 처음과는 달리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뜻을 둔 것이었다. 상해에서 곽 신부의 권유도 있었지만, 교육사업은 일찍부터 안중근이 품어온 바이기도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안중근은 천주교 전도에 힘을 쏟던 무렵에, 비록 외국인 신부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이미 「대학교」의 설립을 계획한 일이 있었다.
그가 진남포로 이주한 뒤 첫 번째의 사업은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한 일이었다. 삼흥학교의 삼흥은 토흥(土興)·민흥(民興)·국흥(國興)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토와 국민이 흥하여 나라를 일으킨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렇듯 삼흥학교는 학교명에서부터 분명하게 구국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삼흥학교에는 안중근이 교장으로 취임하고 동생 정근[定根(안정근)]과 공근[恭根(안공근)] 삼형제가 힘을 합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힘을 쏟은 결과, 학생수는 5~60명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처남 김능권(金能權)이 전답을 팔아 1만 5천 냥을 기부함으로써 학교 교사를 3천여 간(間)으로 규모를 늘리면서 삼흥학교는 더욱 번창해 갔다. 삼흥학교의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교련시간에는 목총과 나팔과 북을 사용하면서 순 군대식 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교과 과정에 교련시간을 두고 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것은 구국운동의 준비과정에 다름 아닌 것으로써 이 무렵 민족 사립학교에서는 이 같은 군대식 훈련이 폭넓게 행해지고 있었다. 즉 이들 민족 사립학교들은 구국운동의 역군을 배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바, 삼흥학교 역시 그러한 민족 사립학교의 하나였다. 삼흥학교는 뒤에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한편 안중근은 삼흥학교 외에도 새롭게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면서 교육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원래 돈의학교는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서 해체될 형편에 있던 것을 인수한 것이었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교당의 주임 신부인 프랑스인 방(方) 신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것이었는데 방 신부가 신병으로 진남포를 떠나게 되면서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해체될 상황에서 안중근이 사재를 털어 다시 문을 열게 된 것이었다. 돈의학교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1907년 가을 평안남북도 및 황해도 3도의 60여 개교 약 5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과와 술과(術科)의 연합경기가 벌어진 공사립학교 연합운동대회에서 돈의학교가 1등의 성적을 거두었던 점이다. 이는 안중근이 학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의 값진 대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안중근은 이 무렵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관계하고 있었다. 1906년 10월에 설립된 서우학회는 계몽주의 단체로서 1908년 1월에 한북학회(漢北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게 되는데 안중근이 서우학회에 관계했던 시기는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전까지인 1906∼7년 무렵이었다. 이 같은 학회의 활동은 주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있었는데 안중근은 아마 학교 운영과 관련하여 연계 활동을 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삼합의」의 설립

(1)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안중근이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운동에 열중하던 1907년 초 국내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제로부터 들여온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907)이 제창되고 있었다.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제기된 국채보상운동(1907)은 일제가 대한제국정부에 1천3백여만 원의 차관을 미끼로 한국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국민의 단연(斷煙)을 통하여 절약한 의연금으로 이를 상환해서 재정적 독립을 강화하자는 운동이었다.
일제는 침략 수단의 하나로 이미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차관 공여를 제기한 바 있었다. 이때는 3백3십여만 원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차관 공세를 펴왔다. 일제가 이토록 차관 공세를 폈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첫째, 차관을 통하여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자는 속셈이었고, 둘째는 그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이후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카다(目賀田種太郞, 메카다 다네타로)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원의 차관을 도입케 하였다. 제1차 차관은 1905년 1월 ‘화폐정리자금채’ 라는 명목으로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한 3백만 원이었고, 제2차 차관은 1905년 6월 우리 정부의 부채정리와 재정 융통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한국의 국고금을 담보로 2백만 원, 제3차 차관은 1905년 12월 우리나라의 토착자본을 일본자본에 예속시킬 목적으로 금융자금채 150만 원, 제4차 차관은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명목으로 5백만 원을 각기 들여왔던 것이다. 그러니 불과 1년여 만에 이 엄청난 액수의 차관이 들어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 같은 일제의 차관공세는 우리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존망과도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즉 들여온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망할 형편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국고를 다 털어도 이 빚을 갚을 수 없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으며, 일제는 이 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침략의 수단으로 차관을 제공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 같은 위기를 인식한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1907)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의 처음은 1907년 1월 31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회장 김광제(金光濟)와 부회장 서상돈(徐相敦) 등 10여 명이 「국채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란 격문을 돌리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자산가들이 중심이 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그리고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한 바 있는 선각적 인사였다. 이들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그 발기 취지를 밝히는 것과 함께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러한 광문사의 국채보상운동발기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대동보』 등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면서 국채보상운동(1907)의 열기는 1907년에서 1908년간에 전국을 휩쓸 정도로 거세게 일어났다.
안중근 역시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참가하였다. 그는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關西支部)를 설치하고 몸소 실천에 앞장섰다. 안중근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국채보상운동(1907)의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관서지방의 국채보상운동에 중요한 지도자로 활약하며 누구보다 열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일반 한인이 발기한 국채보상회는 앞을 다투어 돈을 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을 본 일본 형사 한 명이 와서 그 형편을 알아보고 묻기를,
“회원은 몇이나 되며 재정은 얼마나 모았는가?”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회원은 2천만 명이고 재정은 1천3백만 원을 모은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했다.
“한인들은 하등한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부채라는 것은 갚아야 하는 것이요. 급채라는 것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시샘을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그 일본인은 화가 나서 나를 쳤다. 내가 이르기를,
“이처럼 까닭 없이 욕을 본다면 2천만의 겨레들이 더 많은 압제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마주 쳤더니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운데 들어 화해를 시켜 서로 헤어졌다.

위의 기록은 국채보상운동(1907)에 임하는 안중근의 결연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국채보상금의 헌납에도 앞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인의 귀감을 샀던 일화를 남기고 있다. 국채보상운동(1907)의 물결이 관서지방에 파급되면서 그는 부인 김(김아려)씨에게 국채보상운동(1907)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장신구 전부를 헌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인은 주저함없이 자기의 금은지환·비녀·월자 등 장신구들을 전부 헌납하고 어머니와 제수들의 것은 본인들과 상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안중근은 “국사는 공(公)이요, 가사는 사(私)이다. 지부장인 우리 가정이 솔선수범치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고 하여 전 가족분을 모두 헌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전파되자 관서지방의 일반 민중은 크게 감동되어 각 가정이 다투어서 국채보상금을 헌납하는 미거(美擧)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2) 삼합의의 설립


진남포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안중근은 교육사업에 대한 자금조달을 위해 1907년 초 무렵 평양에서 「삼합의(三合義)」라는 채탄회사를 세워 경영하기도 했다. 삼합의는 대동강 상류 탄광지대에서 석탄을 채굴·수매·매각하는 회사였다. 당시 대동강 상류인 강동(江東)과 성천(成川)의 탄광지대에서는 탄맥의 노두(露頭)들이 여기저기서 산견(散見)되고 있었으므로 어려운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노천채굴 방식에 의해 어렵지 않게 석탄을 캘 수 있었다. 또한 채굴된 석탄은 인근의 평양까지 대동강을 따라 석탄배로 운반하여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쉽게 판매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채탄사업의 경영에 안중근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무렵 앞서 보듯이 교육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던 국채보상운동(1907)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영리 사업인 광산업에 몰두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채탄회사인 삼합의는 그와 해주출신의 지주인 한재호(韓在鎬)가 자금을 대고 이달경(李達慶)이 경영을 맡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어느 사업이 다 그러하듯이 사업 초창기에는 많은 자본이 투자됨은 물론 뜻하지 않는 어려움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전망이 좋아 손을 댄 광산업이었지만 삼합의 역시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다가 안중근이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수개월 후인 1907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회사를 정리함에 따라 삼합의의 사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로서 안중근은 수천 원의 손해를 보았는데 이때의 일을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그 무렵 나는 재정을 마련해 볼 계획으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광을 캐었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좋은 돈 수천 원이나 손해를 보았었다.

위에서처럼 일본인의 방해로 손해를 보았던 것도 사실 이겠지만, 그보다는 안중근이 의병운동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에 앞서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합의를 처분했다는 기록이 있어 여기에 소개해 둔다[이달경의 아들 두산 이동화(斗山 李東華)의 「나는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해방 전후에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원고)에 두산(이동화)의 어머니가 회고한 바에 따른 것이다. 그 회고에 의하면 삼합의는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중근이 처분하던 무렵에는 경영상태가 점차 좋아져 갔다고 한다. : 金學俊(김학준), 『李東華評傳』, 민음사, 1987, 17∼28면 참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안중근이 삼합의를 처분하기 직전 탄광을 방문하여 탄광경영의 현황을 듣고 피력한 주장을 위의 회고에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말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수고를 하고 노력을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광산 개발 사업이 큰 성과를 올리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왜인들이 침략의 마수를 계속 뻗쳐오고 있는데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여 이 사업을 추진하고 발전시킬 수 있겠느냐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사업과 활동도 중요하지 않음은 아닙니다만,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우선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고서야 우리들 모두가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후의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삼합의는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날 때 운동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급히 처분하였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손해를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손해를 본 사실이 아니고 구국의 길에서 일신의 영리를 과감히 내던지는 결단성과 아울러 이 시기에 구국운동의 전략을 의병적 전략으로 전회하는 사실인 것이다. 특히 계몽적 성향을 보이던 안중근이 구국운동의 방식을 의병운동으로 전환해 간 사실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로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제3장 국외 망명과 의병운동의 전개

1.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의 체결과 국외 망명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 한국 침략을 더욱 노골화 시킨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자 이를 구실로 동년 7월 18일 광무 황제(光武皇帝 : 高宗)를 강제 퇴위시키는 충격적 정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또 광무황제(고종)에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융희 황제(隆熙皇帝 : 純宗)를 상대로 하여 동월 24일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한일신협약, 1907)」을 강제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요지는 한국 정부가 일제 통감부의 감독을 받고 고급 관리의 임명조차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밀각서를 통해 군대해산의 내용을 넣음으로써, 일제는 이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을 통해 그야말로 식민지화 작업의 마무리를 지었다. 이로써 일제는 대한제국정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는 소위 차관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이제 이름만이 남게 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동월 24일 「신문지법(新聞紙法)」을 공포하여 언론 출판의 검열을 강화하였으며, 이어 동월 27일에는 「보안법(保安法)」을 공포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일련의 침략사태에 반발할 국민적 저항에 대처하는 악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동월 31일에 급기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한국의 주권 수호 능력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적 자행에 대하여 맨 먼저 분기한 것은 강제 해산을 당한 구한국 군인들이었다. 당시 구한국군대는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5개 대대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 8개 대대가 있었다. 이중 일제는 먼저 서울의 시위대 5개 대대를 8월 1일에 강제 해산하였다. 당시 일제는 군대해산의 이유가 경비(經費)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목을 내세웠다. 그리고 8월 1일 시위대의 무장해제의 방편으로 도수체조 연습을 한다고 속이고 시위대 군인을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내막을 눈치 챈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항의하여 자결 순국하자 이에 충격 받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 1천여 명은 훈련원 집결 직전에 전격적으로 무장항쟁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들 구군인들은 당일 오전 11시 경부터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과 서울의 남대문과 서소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처절한 항전을 개시하였고 이는 대한제국 군대 최후의 항전과도 같았다. 이 싸움에서 한국군의 병사들은 탄약이 떨어지게 되자 퇴각하여 각처에서 항전하던 의병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구한국 군인들의 항전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크게 일어났다. 원주(原州) 진위대의 경우는 부대 자체가 의병부대로 전환하였으며, 강화(江華) 분견대의 군인도 집단적으로 의병전열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이 외에도 산발적으로 개인 또는 무리를 지어 의병전열에 참가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이렇듯 해산 군인들의 의병 참가에 의하여 의병전쟁의 양상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이에 맞추어 전국에서 의병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함에 따라 의병전쟁은 보다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국난의 정세 변동 속에서 안중근은 교육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1907)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이 무렵 그는 계몽운동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 같이 위중한 위기에서 국가와 민족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적 구국방략으로 수정하는 독립전쟁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국전략의 전환과 함께 그는 즉시 상경하여 동지들과 함께 그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당시 안중근과 함께 대책을 협의한 동지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어지는 것은 안중근과 신민회(新民會)와의 관계이다. 신민회는 1907년 망국 사태에 직면하여 비밀결사로 결성된 계몽운동 좌파의 대표적 단체였다. 1907년을 기점으로 계몽운동 계열은 강압되는 일제 침략의 위기에서 저항과 타협, 강경과 온건 등의 노선 분화를 보였고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가름할 수 있는 신민회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갈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친일적 성향을 띄워갔던 대한협회의 우파적 경향에 비해 좌파의 신민회 계열은 지하조직으로 존재하면서 계몽주의의 방략을 수정하여 의병과 합류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의 자료에서는 안중근이 신민회의 회원이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분명한 사실을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서북학회의 주요 인사들이 신민회에 망라되었고 또 신민회의 블라디보스토크 책임자인 이강(李剛)과 안중근이 그 후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을 볼 때 안중근도 신민회에 가입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안중근과 서울에서 구국 전략을 협의하던 동지들이 신민회 계열의 인사들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이 무렵 안중근이 구상하고 계획한 독립전쟁전략은 신민회의 독립전쟁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 일본제국주의는 그 팽창과정에서 5년 안으로 반드시 러시아·청국·미국의 3국 중의 어느 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②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니 이것은 한국으로는 큰 기회라고 할 수 있다.
③ 이때에 만일 한국민에게 미리 준비가 없다면 일본이 패전하여도 한국은 또 다시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④ 한국 민족은 오늘로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길러서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공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⑤ 만약 큰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다가 혹 패전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각국의 공론으로라도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안중근의 전략은 1907년 당시 주위의 동지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의 의병운동은 현대식 병기의 절대적 부족과 의병들의 군사 훈련의 부족으로 패전을 각오하고 승패를 초월하여 전개되고 있었던 데 비하여,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장기전이 될 국권회복운동에서 의병적 투쟁보다는 후일의 독립완성에 목표를 두고 실력 배양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계몽운동을 중단하고 자신의 독립전쟁 전략에 의거하여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노령(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의 국외 망명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때 국외 구국운동의 자금은 앞서 보듯이 자신이 경영하던 삼합의를 처분하여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에 안중근은 성진(城津)·청진(淸津)을 거쳐 선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청진까지 갔으나 일경에 밀항 사실이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선로가 좌절되자 그는 육로를 택하여 함경북도 회령(會寧)을 경유해서 종성군(鍾城郡) 상삼봉(上三峰)을 끼고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간도(間島) 화룡현(和龍縣) 지방전(地坊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북간도(北間島)에는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에 따라 간도관리사가 폐지되고 1907년 일제가 간도 용정에 통감부임시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안중근은 약 3개월 동안 북간도 일대를 돌아본 뒤 다음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등지를 경유하여 1907년 겨울에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2. 국외 의병부대의 결성


러일전쟁(1904) 직후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한국 독립운동자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므로 많은 애국인사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당시 5천명 정도의 동포가 살고 있었으며 한국인 학교와 청년회도 세워져 있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직후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여 임시사찰(臨時査察)의 일을 맡아 보면서 의병 기의의 계획을 구체화시켜 갔다. 이때 안중근은 이범윤(李範允)을 비롯한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유력자들을 대상으로 의병부대의 창설을 적극 주장하면서 이들을 설득하였다.
1904~5년에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은 러일전쟁(1904) 때 5백명의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여 러시아군을 지원한 바 있으며,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 일제에 의해 간도관리사에서 쫓겨난 뒤로는 러일전쟁(1904) 때 러시아를 지원한 인연을 찾아서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이범윤은 연해주에서 동포의 친일 행각을 엄금하는 격문을 붙이는 등 동포사회의 애국적 기반을 굳히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이러한 이범윤이었지만 처음에는 안중근이 제기한 의병부대 창설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의병을 일으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재정과 무기가 필요한데 그것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안중근은 의병 기의의 필요성을,

조국의 흥망이 조석에 달려 있는데 다만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돈과 무기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올 것입니까?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까? 이제 각하께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심만 하신다면 제가 비록 재주야 없을망정 만분의 하나라도 힘이 되겠습니다.

라고 열성적으로 주장하였고, 그래도 망설이던 이범윤에게 거듭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의병부대 창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범윤의 동의를 받은 안중근은 이후 의병 모집과 자금 마련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의병 부대 창설의 준비단체로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동의회는 노령(러시아령)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 지방에서 국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준비 단체로서 동의회 회원은 의병과 다름이 없었다. 최재형은 당시 노령(러시아령)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안중근의 의병 기의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최재형에 대해 보기로 하자. 최재형은 함경도 경원(慶源) 사람으로 9세 때인 1870년경 러시아의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건너간 이래 그곳에서 줄곧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강인하며 또 날래고 씩씩하여 유달리 모험심이 많았다. 그는 비록 러시아의 국적을 갖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갑신정변(1894) 때에는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를 만나보기 위하여 일본까지 간 일도 있었다. 그는 러시아 육군 소위, 경무관부속 통역관을 역임하였고, 두 번이나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그에 가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연추도헌(煙秋都憲)의 관직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항상 우리 동포들을 감싸고 돌봐주어 동포사회에서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 또한 그는 상당한 재력가로 해마다 동포 학생 1명을 러시아의 수도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당시 동포 학생 중 러시아 유학 출신이 많은 것은 다 그의 힘이었다. 그는 노령(러시아령)지역 한인사회의 장로격 인사로서 후일 1919년에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역시 이러한 신망에 의해 1919년 상해에서 성립된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출병한 일본군이 저지른 1902년 4월의 「4월 참변」 때 일본군에게 사살되어 순국하였다.
안중근은 이러한 노령(러시아령)지역의 거물 최재형으로부터 전격 지원을 받는 한편 노령(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의 한국인 유력자들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동의회 회원들 즉 의병의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한인촌을 돌아다니면서 유세작업을 벌였다. 그는 이에 앞서 두 사람의 귀중한 동지를 얻을 수 있었으니 엄인섭(嚴仁燮)과 김기룡(金起龍)이 그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담략과 의협심이 뛰어나 능히 뜻을 같이 할만한 동지들이었다. 이에 이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으니 엄인섭이 큰형, 안중근이 둘째, 김기룡이 셋째가 되었다.
안중근이 한인촌을 돌면서 벌인 유세의 요점은, 젊은이들은 총을 들고 독립전쟁에 나가야 하고, 노인들은 각자의 업무를 면려하여 양식 등의 자금을 만들고,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베풀어 금후 국권회복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이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연설한 유세 내용의 중요 부분만을 『자서전』에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뿌리 없는 나무에 의지하여 살 수가 있으며, 나라 없는 백성이 무엇에 의지하여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에 여러분이 외국에서 산다고 하여 조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것을 러시아 사람들이 안다면 필시 이르기를 ‘한인들은 그 조국을 모르고 그 동족을 사랑할 줄 모르니 어찌 외국을 돕고 외국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무익한 인종을 도와 보아야 무용할 것이라.’ 라는 말썽이 들끓어 멀지 않아 러시아 땅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때를 당해서 조국의 땅을 이미 외적에 잃고 외국인 역시 한결같이 배척하여 받아 주지 않는다면, 늙은이를 업고 어린이를 이끌며 어디로 가서 마음 놓고 살 수 있겠는가?
여러분 폴란드인의 학살이나 흑룡강(黑龍江)의 청국인의 참상을 들었는가 못들었는가? 만약 나라를 잃은 백성이 강국인과 동등하다면 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며 왜 강국을 좋아하지 않을 것인가? 어느 나라를 가릴 나위 없이 나라 없는 백성이 그처럼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학대를 받는 것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즉 오늘날 우리 한국의 겨레는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느 것을 좋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한번 의거하여 적을 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한국의 내지(內地) 13도 강산 곳곳에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데가 없다. 만약 의병이 패하는 날에는 간적(奸賊)들은 옳고 그르고를 가리지 않고 폭도라는 핑계로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지를 것이다. 이처럼 된 다음에 한국 민족들은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그러니 오늘날 한인은 국내·국외를 가릴 것 없이 남녀노소가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하여 승패를 돌봄 없이 한껏 한바탕 싸워 천하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해야 할 것이다. (중략)
오늘로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힘을 길러 스스로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구국의 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호소는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명과 함께 민족과 국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그와 같은 내용의 유세를 벌이며 의병 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상당수의 의병을 모을 수가 있었다. 또 많은 액수의 의연금도 거두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준비가 완료됨에 따라 1908년 봄에 의병부대를 조직했으니, 보통 「이범윤부대」로 알려져 있는 의병부대가 바로 이 의병부대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이 의병부대는 실제로는 안중근의 의병부대와 다름없었다. 의병 기의의 계획뿐 아니라 의병모집에 이르기까지 의병부대 창설의 모든 과정이 안중근의 활약에 의해 이루어졌던 사실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의병부대는 국외에서 결성된 최초의 의병이라는 점에서 의병사의 측면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의병조직이었다.
『자서전』에 의하면 이 의병부대는 총독에 김두성(金斗星), 총대장에 이범윤(李範允), 참모중장에 안중근이 직책을 맡아 진용을 정비하였고, 부대원의 규모는 약 3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부분은 총독 김두성이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보듯이 간도관리사를 지낸바 있는 이범윤은 항일투쟁의 경력이나 연해주 동포사회에서의 위치로 보나 쟁쟁한 경력을 가진 인사였다. 그런 이범윤을 휘하에 둘 정도의 인물이라면 마땅히 의병사 내지 한말 역사의 전면에 부상되어야 할 텐데 유감스러운 것은 김두성이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실명(實名)의 인물인지 아니면 가명(假名)의 인물인지가 의혹스럽고, 또 가명인물이라면 누구인가 하는 점이 궁금한 것이다. 이제까지 김두성의 신원에 대한 자료나 기록은 김두성의 출신지가 강원도라고 밝힌 『자서전』과, 그밖에 김두성이 1907년까지 구한국의 순사를 지낸바 있으며 1908년 8월경 가출한 인물이라는 일본 경찰 보고서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 경찰 보고서에 나타난 김두성은 아무래도 의병 총독 김두성과 동명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므로 동명이인이라 보여지고, 그렇다면 김두성은 역시 가명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가명 김두성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자서전』에서 김두성의 출신지가 강원도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당시 연해주 지방에 망명한 강원도 출신의 거물급 인사를 살펴보면 류인석(柳麟錫)을 들 수 있다. 척사 유림의 인물인 류인석은 일찍이 전기의병(前期義兵 : 乙未義兵) 당시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으로 의병을 일으킨 이래 의병 전선의 대부(代父)와도 같았던 인사였다. 그는 1908년에 68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하였고, 1910년 5월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될 때에는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자서전』에서처럼 김두성이 강원도 출신 인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김두성의 실제 인물은 일단 류인석일 가능성이 크고, 또 류인석이라면 통칭 「이범윤부대」라 알려진 이 의병부대의 총독에 추대될 만한 위치에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추에도 몇 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류인석이 연해주에 망명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인가?(1908년 2월과 7월의 두 가지 설이 있음) 1908년 7월이 옳다면 위의 유추가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안중근은 왜 실제 이름을 쓰지 않고 굳이 김두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인가 하는 점 등이다(안중근의 『자서전』에 등장 되는 인물의 대부분이 실제 이름으로 적혀지고 있음). 이처럼 이 문제를 명쾌하게 규명하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다. 또 이 문제만을 일일이 다룰 수 없는 처지이므로 여기에서는 김두성에 관한 논의를 문제 제기 정도의 수준에서 그치기로 하고,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해주 지방 의병사 연구의 진척과 함께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김두성이 류인석일 것이라는 설에 대하여는 趙東杰(조동걸), 「安重根義士 裁判記錄上의 人物 金斗星考-舊韓末 沿海州 地方 義兵史의 斷面-」, 『春川敎育大學論文集』 제7집, 1969 참조].
아무튼 위의 유추와 같이 김두성이 류인석이라 하더라도 70 고령의 류인석이 의병전선에서 실질적 활동을 전개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안중근 의병부대의 상징적 존재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이범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국내진입을 위한 이 의병부대의 실질적 편제는 이범윤의 부장을 지냈던 전제익(全濟益)이 대장을 맡고, 엄인섭이 좌군영장(左軍領將), 안중근이 우군영장(右軍領將)을 맡았다.
이 의병부대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제와의 교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결성 직후 강도 있는 군사훈련을 통하여 전투력 배양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지휘아래 군사훈련을 거친 이 의병부대는 단기간 내에 전투의병의 대오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어 작전 개시를 위해 두만강 부근의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근거지를 이동한 뒤 국내진입작전의 결행을 기다렸다.

3. 국내 진입작전의 단행

(1) 홍범도 의병부대와의 연합시도와 첫번째 승리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에서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안중근은 작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무렵 함경북도 지역에서 맹활약하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의 공동작전을 계획하였다. 구한국 군인 출신의 홍범도는 함경도 일대에서는 제일가는 산포수(山砲手)로 이름을 크게 떨치며 일군의 산포수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1907년 9월 18일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하며 산포수들의 무기와 탄약을 압수하게 되자 이에 항거하여 홍범도는 동년 11월에 산포수단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기의 후 홍범도 부대는 갑산(甲山)·북청(北靑) 등지를 주 무대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작전을 전개하며 곳곳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바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수비대도 홍범도 부대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게 강력한 의병부대였으므로 일제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기만적인 선무공작을 벌였고 이에 휘말린 의병의 일부가 1908년 3월경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홍범도 의병부대는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가는 곳마다 일본군을 격멸했으며, 안중근이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에서 국내 진입작전을 도모할 무렵 홍범도 의병부대는 갑산에서 조금 북상하여 함경북도 무산군(戊山郡) 삼사면(三社面)의 서두수(西頭水) 상류 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게 된다면 전력의 증강은 물론 작전수행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에 안중근은 홍범도 부대와 군사 연락을 취할 목적으로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를 출발하여 백두산 밑 농사동(農事洞)까지 갔었으나 도중에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당하게 되어 홍범도 부대와 접선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안중근은 백두산 밑 남서쪽의 산간 밀림에서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에 귀환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홍범도 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려던 첫 번째의 계획은 무산되고 안중근 의병부대 단독의 진입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국내 진입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의병대원들을 격려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2~3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은 세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요, 방법에 있어서도 그렇다. 병법에 이르기를 ‘비록 바쁜 중이라 하더라도 만전(萬全)의 방책을 세운 연후에 큰일을 꾀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들이 단 한번의 의거로써 성공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올해 안 되면 또 내년에 해보고 그것이 십 년, 백 년까지 가도 좋다.
만약 우리가 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들 대(代)에 가서 또 손자 대에까지 가더라도 기어이 대한국의 독립권을 되찾고 그런 다음에라야 말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천천히 나가며 앞일에도 대비하고 뒷일에도 대비하며 모든 준비를 갖추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전에 임하는 안중근의 비장한 결의를 볼 수 있다. 비록 달걀로 바위를 치는 형세라 하더라도 오로지 이 방법만이 구국에 이르는 길이므로 결행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나 승패의 여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독립의 그 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우는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결사적 각오 아래 안중근 의병부대는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였으니 이때가 1908년 6월이었다.
안중근과 엄인섭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건넌 의병부대의 첫 번째 작전은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안중근 부대는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규모의 전투는 아니었으나 치밀한 작전에 의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개가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로써 부대원의 사기는 더없이 충천하였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안중근 부대는 일단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연추(煙秋 :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귀환하였다.

(2) 일본군 포로의 석방과 의병부대의 분열


첫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중근 부대는 이어 두 번째의 작전을 계획하였다. 안중근은 앞서 실행하려다 이루지 못한 홍범도 부대와의 연합을 재차 시도하는 한편 1908년 7월 두 번째의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엄인섭·김기룡·백규삼(白圭三)·이경화(李京化)·강창두(姜昌斗)·최천오(崔天五) 등이 부대를 나누어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넌 뒤 안중근 부대는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新阿山) 부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들 안중근 부대는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의 방법을 통해 그때마다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안중근 부대는 다수의 일본군인과 일본 상인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안중근은 이 생포된 일본군 포로들을 부대원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국제공법(國祭公法)에 의거하여 석방해 주었다. 그러자 부대원들은 안중근의 이 같은 처리에 대해 불평을 강하게 토로해 왔다. 그들의 주장인즉 일본군은 우리 의병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 죽이는 것은 물론, 또 자신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산림 속에서 그 어렵게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해가며 애써 잡은 포로인데 그대로 놓아주면 이제까지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안중근은 국제공법에 의거하여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주게 되어 있다.’고 부대원들에게 포로를 석방해 준 사실을 설득하였다. 그럼에도 계속 불만을 갖는 부대원들에게 그는 다시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적병이 이처럼 폭행을 일삼는 것은 신(神)과 사람이 다 함께 노여워 할 일인데 지금 우리도 같이 야만한 행동을 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없앤 다음에 국권을 되찾자는 말인가? 상대를 알고 나를 안다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약하고 적이 강하니 악하게 싸울 것이 아니라 충행의거(忠行義擧)로써 하여야만 이등[伊藤博文(이등박문)]의 폭략(暴略)을 두들겨 세계에 널리 알리고 열강의 동정을 얻어서 한을 풀고 권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약하면서도 능히 강한 것을 당하고 어진 것으로써 악한 것에 맞설 수 있는 법인 것이다. 그대들은 다시는 여러 말을 말라.

위의 말들을 통해 우리는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도 안중근의 의식이 감정적 원한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정의 인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전쟁에도 있는 도(道)의 규준에 따라 포로를 석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높은 수준의 인도주의적 실천이기도 했다. 혹 그의 이러한 처사는 이상주의자의 비현실적 태도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중의 사살과 포로의 사살은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으로 포로의 사살은 명백히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포로 몇 사람의 사살이 독립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당시의 상황에서 의병부대는 포로들을 호송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낮에는 숨고 밤으로 산을 타며 활동하던 의병들에게 포로는 거추장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 행할 길은 포로를 사살하거나 아니면 석방해 주는 길 뿐이었다. 이러한 양자의 선택에서 포로 사살의 야만적 태도를 경원하던 안중근으로서는 포로를 석방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포로들이 병기를 갖지 않고 귀대하면 석방되어도 군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는다고 사정을 해오자 안중근은 무기까지 되돌려주면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주었다.
이렇듯 국제공법에 의거한 일본군 포로의 석방은 이에 앞서 1907년 12월 국내의 의병부대들이 통합하여 결성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정책과도 맥락을 같이 한 것이었다.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한 총대장 이인영(李麟榮) 등은 김세영(金世榮)을 서울에 잠입 파견하여 각국 공사관에 의병의 통문을 발송한 바 있었다. 이인영 등은 이 통문에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함과 동시에 ‘의병은 순연한 애국단체이니 열국은 이를 국제 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한국인의 의병운동에 정의 인도를 주장하는 열국의 지지 성원을 바란다.’라고 하여 한국인의 의병이 국제공법상의 합법적 전쟁단체임을 전 세계에 명확히 밝히었다. 또한 이인영은 「전 세계 대한인(大韓人)에게 보내는 성명(聲明)」을 통해 국외의 한국인들에게도 의병전쟁을 일으키어 일본 침략자들을 격살할 것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촉구하였다.

동포여 우리는 단결하여 조국에 우리 자신을 바쳐서 독립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야만적 일본인들의 극악한 죄악과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며 진보와 인도의 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본인들과 그들의 첩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과 야만적 일본군을 격살하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십삼도창의대진소는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안중근의 의병전쟁과 국제공법에 의한 일본군 포로의 석방은 바로 이러한 전국 의병의 통합부대와 같은 십삼도창의대진소의 방침에 보조를 맞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포로 석방이 아무리 국제공법에 의거한 것이고 정의의 기준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부대원들은 포로를 석방한 처사에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의병을 생포하는 즉시 총살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의병에게 음식을 제공한 민간인조차도 동조자라 하여 체포해서 총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일본군 포로는 즉결 처분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안중근의 일본군 포로 석방에 대해 의병들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다.
때문에 안중근 의병부대 내부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의론으로 들끓었으며, 이 일이 있고난 후 부대원 중에는 안중근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끝내는 의형제를 맺으며 의병 기의에 함께 진력했던 엄인섭마저도 부대를 나누어 안중근을 떠나게 됨에 따라 안중근 의병부대는 분열되고 말았다.

(3) 일본군의 습격과 패퇴


포로를 석방한 문제로 의병의 일부가 떠나므로 인해 의병부대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안중근 자신도 포로 석방이 이렇게까지 의병부대를 분열시킬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며 나머지 병사들을 겨우 설득하고 타일러서 흐트러진 전력을 수습하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석방해 준 포로들에 의해 안중근 부대의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던 때문이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4~5시간 동안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안중근 부대의 정보를 갖고 습격하는 일본군을 당해내기란 역불급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은 제각기 흩어져 산발적 항전은 전개하였고 때마침 날이 저물고 폭우가 거세게 쏟아져 전투는 일단 중지되었다. 안중근은 산간의 밀림에서 폭우를 맞으며 꼬박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흩어진 병력을 모아보니 6, 7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있는 병사들도 격전을 치른 뒤이고 이틀이나 굶은 상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모습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살려는 마음뿐이라 기율에도 따르지 않았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안중근은 창자가 끊어지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의병부대가 어떠한 노력으로 조직된 것이었는가. 그런데 그 의병부대가 대의(大義)를 좇아 포로를 석방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토록 부서지고 말았으니, 냉엄하고 비정한 현실에 부딪쳐 엄청난 갈등이 짓눌러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안중근은 우선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와 보리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게 한 뒤 대오를 재정비 하였다. 그러나 이때 숨어서 기다리던 일본군이 재차 공격해 옴으로써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대열은 다시 깨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안중근은 세 명의 병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명의 의견은 각기 달랐다. 자살하고 싶다든지, 어떻게라도 살아야 한다든지, 일본군에게 투항하겠다든지 모두 의견이 달랐다. 이러한 속에서 안중근은 시 한 수를 지어 병사들에게 읊어 주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 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難處身
望須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그대들은 모두 뜻대로 하라. 나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일본군과 더불어 한바탕 장쾌하게 싸움으로써, 대한국 2천만인 중의 한사람이 된 의무를 다한 다음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이른 뒤 총을 들고 적진을 향하여 갔다. 그러자 병사들이 쫓아와 통곡하면서 극구 만류하였다. 지금의 죽음은 다만 헛될 뿐이니 다음의 기회를 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안중근은 생각을 고치어 재기를 다짐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향하였다.
그러나 장마철인지라 시도때도없이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더욱이 깊은 산간의 밀림인지라 구름과 안개가 하늘에 차고 땅을 덮어 동서를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물론 깊은 산속에 인가가 있을리 없어 이들은 끼니를 때울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중근이 겪은 고초는 붓으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다. 이들은 5일 동안 한 끼의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맨발로 산속을 헤매었다. 거기에다 때로는 일본군과 부딪치게 되면 피해야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극한적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풀뿌리를 캐어 먹고 담요를 찢어서 발에 감으며 서로 격려하고 보호하면서 활로를 뚫는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렇게 헤매던 끝에 이들은 6일 만에야 민가를 발견하고 조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안중근은 이때의 조밥을 마치 하늘나라 사람들이 먹는 요리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자서전』에서 회상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안중근 일행은 때로는 친일파나 일본군과 부딪쳐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중에는 안중근 일행을 일본군에게 넘기려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민족의 위기를 건져보고자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이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감사의 뜻은 커녕 오히려 일본군에게 넘겨 보내려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찾은 민가의 한 산촌노인은 안중근 일행을 맞이하며 따뜻하게 격려해 줌은 물론 두만강을 건너는 안전한 길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뒷날에 다시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라고 적극 격려해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일을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또 다시 인가를 찾으니 다행히도 외진 산속에 초가가 있고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불렀더니 얼마 있다가 한 노인이 나와서 방으로 들어가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에 음식을 청했다. 말이 떨어지자 곧 동자를 불러 성찬을 내어왔다.(산속에 별미가 있을 수 없다. 산나물과 과일이었다.) 염치를 돌볼 겨를도 없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정신을 차려서 생각해 보니 거의 열이틀 동안에 단 두 끼만 먹고 목숨을 부지하여 온 셈이다. 주인 할아버지에게 크게 감사하여 그 사이에 겪은 고초를 하나하나 얘기했더니 노인이 이르기를
“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이처럼 겪는 것은 국민 된 의무이다. 흥겨움이 다 하면 슬픔이 오고 쓴 것이 다하면 단맛이 있다는 말도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지금 일본 병정들이 곳곳에서 찾아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길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 어디서부터 어디로 갈 것 같으면 큰 걱정도 없이 편리할 것이고 두만강도 멀지 않을 것이니 빨리 강을 건너 돌아가서 뒷날 좋은 기회를 엿보라.”
고 하였다. 내가 그 이름을 물으니 노인이 이르기를
“굳이 묻지 말고”
하며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일제는 의병에게 식사나 편의를 제공한 사람을 즉각 총살하는 만행을 부리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의 만행이 두려워 일반인의 경우 선뜻 의병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이들을 격려하고 또 길 안내까지 해주었던 이 노인의 정성은 안중근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산골 노인의 정성을 통해 동족(同族)의 진한 정을 느끼는 동시에 구국에의 사명과 의지를 더욱 다질 수 있었다.
안중근 일행은 산골 노인의 안내대로 길을 잡아 나가 무사히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의 본거지로 도착하니 출진한 지 한달 반만이었다.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에 도착한 안중근 등의 모습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형상이었다. 심지어는 친구도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이들은 야위었고 변해 있었다. 그동안 먹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출진할 때 입었던 옷은 모두 썩어 알몸을 가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썩은 옷에는 이가 득실거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출진하고 한 달 반 동안을 이들은 언제나 노영(露營)으로 밤을 세워야 했고 거기에 연일 계속되는 장마비를 하는 수없이 맞아야 했던 때문이다.
이처럼 구사일생으로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귀환했지마는 의병 패배에 따른 책임감 때문에 안중근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워야 했다. 그러나 패군지장인 그로서는 아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절치부심하면서 오직 의병의 재기를 다짐하였다. 열흘 가량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에서 지친 몸을 요양한 뒤, 의병 재기를 위해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동지들을 만나보고 의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북으로는 하바로프스크(河發浦) 방면으로 향해 기선을 타고 흑룡강(黑龍江) 상류 수천여 리를 돌아보고는 뜻있는 사람들을 찾아 국권회복의 방략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수청(水淸) 지방에 이르러 교육에 종사하기도 하고 사회단체의 조직에 힘쓰기도 하면서 한인 교포사회에서 의병의 재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석방해 주어 패전했다는 사실은 한인 사회에서 격렬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때문에 안중근의 호소는 패전의 책임을 묻는 동포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난번에 의병부대의 조직을 지원했던 교포사회의 거부 최재형조차도 안중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좌절하지 않고 의병재기를 부르짖고 다녔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의 교포학교에 들러 연설을 하기도 하고 한인사회의 조직 강화에 힘을 쓰면서 의병의 재조직을 주장하였다.

4. 단지동맹의 결성과 혈서


그렇지만 의병의 재기는 쉽지 않았다. 의병을 재기하려면 우선 자금이 있어야 했고 또 많은 병사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자금과 병사를 구하는 일이 뜻과 같이 못하자, 안중근은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로 되돌아와 1909년 음력 1월 장기적 구도아래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혈맹을 맺으니 이것이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이들이 단지동맹을 맺은 것은 당장에 의병 재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이때 단지동맹에 가담한 12사람은 확실치는 않아도 안중근·김기룡·강기순(姜基順)·유치현(柳致鉉 혹은 柳致弘)·박봉석(朴鳳錫)·백낙규[白樂圭 혹은 白南奎(박남규)]·강두찬[姜斗瓚 혹은 姜計瓚(강계찬)]·황길병(黃吉秉; 黃秉吉(황병길)의 오기?)·김백춘(金伯春)·김춘화[金春化 혹은 金天化(김천화)]·정원식[鄭元植 혹은 鄭元桂(정원계)]·조순응(曺順應) 등으로 추정된다.(*위에서 보이는 바처럼 단지동맹에 참가한 인사들의 이름은 불분명한 것이 많다. 그리고 참가 인물도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에는 자료의 인쇄 과정에서 오기된 것이 적지 않은데, 여기서는 「자서전」의 권말 부록에 실린 단지동맹 구성원의 명단과 『한국독립운동사료』6권(331면), 7권(400여면)(국사편찬위원회 편, 1968)을 참고하였다. 단지동맹의 12사람을 정확하게 밝히고 이들에 대한 활동을 밝히는 것은 단지동맹의 성격과 나아가 안중근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한 작업일 것이나 여기서는 미처 그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이들은 왼손 무명지를 끊고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혈서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으니,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의 단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단지동맹에 참가한 사람들은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입 작전에 참가했거나 의병 재기에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었다. 그 중 김기룡은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고 의병 기의 이래 늘 안중근과 행동을 같이한 인사로 후일 노령(러시아령)지역의 한인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조순응 역시 안중근의 의병에 참가했던 인사로서 후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의 한인부(韓人部) 위원으로 활약한다.
단지동맹을 결성한 이들은 앞에서 보듯이 조직 단위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펴지는 않았다. 그것은 당장에 활동을 펼 수 없는 처지에서 구국에의 의지를 점검하고 후일의 결전에 대비하는 맹약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지동맹의 성격을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해 정윌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열둘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다. 생각컨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은 제각기 왼손 새끼손가락을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
「대한독립」
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말하자면 단지동맹은 의병 재기의 징표인 셈이었다. 즉 의병 재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냥 동지들을 해체시키지 않고 단지동맹을 통해 의병 재기의 뜻을 확고하게 밝힌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이에 따라 각지로 흩어져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렸다.
단지동맹 후 안중근은 주로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 지방에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의 기자로 지국을 열어 신문 보급에 종사함과 동시에 교육과 강연 등 계몽사업에 종사하면서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4장 이등박문의 처단과 동양평화론

1. 이등박문의 죄과와 포살

(1) 이등박문의 포살 계획과 대동공보사


단지동맹 이후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 관계하며 정세변동을 주시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09년 9월 동지들을 만나러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에 들었다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만주(滿洲)를 시찰하러 온다는 외신(外信)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의 강제병탄(한일강제병합, 1910)을 눈앞에 둔 일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한반도 지배에 그치지 않고 이제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그 침략의 첨병으로서 이등박문이 만주를 찾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이등박문의 이번 만주 여행의 목적이 만주를 지배할 야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던 안중근에게 이등박문의 만주 시찰은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즉, 의병장 안중근의 활동지역에 적장 이등박문이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었다. 이에 안중근은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도 지체없이 즉각 이등박문 포살의 결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이 안중근의 진술처럼 순전히 자신의 단독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안중근은 피체 후 일제의 공판정에서 진술하기를, 이등박문 포살에 참여한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의 세 사람 중 우덕순에게만 그러한 계획을 알렸을 뿐 나머지 두 사람에게조차 포살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거사에 다른 사람과 조직의 관련설을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등박문 포살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 하려는 안중근의 깊은 배려에서 사실을 감춘 것일 뿐 실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 의거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가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대동공보사에서 이등박문의 포살이 거론된 것은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7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시국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대동공보사의 실질적인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兪鎭律), 주필 정재관(鄭在寬), 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 그리고 연추(煙秋, 러시아명은 노에키에프스코에)지국장 탐방원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 우덕순 등이었다. 이 좌담에서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올 것이라는 보도와 관련하여 누군가가 “저 한국을 삼켜버리고 지금 또 하얼빈에 온다니 과연 그렇다면 반드시 측량할 수 없는 간계를 품고 오는 것일 것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고 또 한 사람은 “그를 포살하는데 대단히 좋은 기회이다. 불행히도 힘이 부족하여 어떻게도 하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즉 이등박문의 포살은 국권회복을 위해 절호의 기회이나 실행할 힘이 없는 것이 통탄스럽다는 것이었다.
이때 안중근은 그 실행의 책임을 맡을 것을 자원하였고, 그 자리에서 우덕순도 자진하여 안중근과 뜻을 같이 하고 나섬으로써 이등박문 포살의 계획은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획의 추진과 함께 유진율은 안중근에게 얼마간의 자금과 권총 3정을 넘겨주었으며 이강은 거사의 성공을 위해 하얼빈의 대동공보사 인사들에게 안내 편지를 써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안중근의 의거 뒤에는 대동공보사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대동공보사에 대해 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대동공보』는 『海朝新聞』의 후신으로 당시 노령(러시아령)지역의 한국인민회의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신문이었다. 주식회사의 형식으로 설립된 이 신문사는 처음에는 최재형이 주로 자금을 부담했다가 안중근의거 전후에는 최봉준(崔鳳俊)·김병학(金秉學) 등이 많은 자금을 부담하기도 했다. 매주 2회 수요일과 일요일에 4면으로 1천부 정도가 발행되던 『대동공보』는 주로 연해주의 한국인에게 배부되었고 그 밖에 국내는 물론 멀리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그리고 상해에도 송부되었다. 그러나 이 신문은 한국인 이외의 외국인에게는 일체 판매되지 않았으며 지면은 항상 반일 국권회복 사상을 고취하는 것으로 가득 찼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동공보사는 이러한 신문발행 뿐만 아니라 한국인 교민들의 구락부처럼 되어 출입자가 많았으며 서로 모이면 국권회복의 방략을 토론하는 곳처럼 되어 있었다.
이 신문의 발행 서명인은 명목상으로는 제정 러시아의 퇴역 육군 중좌이며 변호사인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미하일로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진율이 사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관련된 대동공보사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하일로프는 안중근이 의거 직후 체포되자 변호사의 자격으로 여순(旅順)까지 달려가 안중근의 변호를 자청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진율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당시 35~6세였고, 일찍이 1898년에 『독립신문』에 글을 실을 정도의 선각적 계몽주의자였다. 그후 그는 노령(러시아령)지역으로 넘어가 「브라고유친스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대동공보사의 총무 주필 겸 실질적 사장으로 대동공보사의 경영을 책임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 러시아에 귀화하여 「니콜라이 페드로비치 유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인민회에 항상 출석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회(회원 약 3백 명)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누구나 그를 먼저 방문할 정도로 이곳 한인사회의 유력한 실력자였다.
대동공보사 편집 논설기자인 이강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당시 약 40세 정도였다. 그는 신민회의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의 간부였으며 미국의 샌프란시스코·하와이의 한국인들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문필의 재주가 뛰어났고 한국인 간에 세력이 있었으며 안중근과는 가장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포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나갔을 때 그는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정재관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이었으며 그 후 신민회의 블라디보스토크 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일찍이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는 한국인 신문인 『공립신보(共立新報)』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공립신보』가 1909년 2월 『신한민보(新韓民報)』로 바뀌자 정재관은 이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민회의 외곽 단체인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였다. 『대동공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동시에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토크 통신원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윤일병은 서울 출신으로 신민회 회원이었고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의 목사였다. 따라서 그는 계몽운동을 주도한 상동교회를 통해 일찍부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던 인사였다. 「헤이그 밀사사건(1907)」에 관계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다음 대동공보사의 기자로 있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덕순은 충청북도 제천 출신으로 1905년경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왔으며, 당시 대동공보사의 집금회계계의 일을 하면서 겸하여 금·은공장 또는 담뱃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연준(禹連俊)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한 그는 안중근이 조직한 동의회에 가입했으며 안중근과 함께 의병투쟁에도 가담한 동지였다.
조도선은 함경북도 홍원 출신으로 본명은 조준승(曺俊承)이다. 1894년경에 고향을 떠나 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제정 러시아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이범진(李範晋)의 막하에 있다가 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대동공보사에서 일하였다. 1909년 10월에 안중근의 거사에 앞서 상업을 하려고 하얼빈으로 가 있었던 그는 러시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에는 이러한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을 비롯한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은 이등박문 포살의 의거를 이용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을 기대하였던 것 같다. 즉 안중근의 의거가 이등박문의 포살 자체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을 세계에 폭로하고 규탄함으로써 독립을 추구하여 싸우고 있는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공판정에서 이등박문 포살의 목적이 일제침략을 세계에 폭로하여 규탄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힌 안중근의 다음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등(이등박문)이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5개조의 조약(을사늑약, 1905)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전의 선언(宣言)과 반하여 한국의 불이익이 되었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불복을 칭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07년 또 7개조의 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통감이었던 이등(이등박문)이 병력으로 압박을 가하여 체결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크게 분개하여 일본과 싸우더라도 세계에 발표할 것을 기했다.
이번에 거사를 한 것도 하나는 우리들의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인데 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이러한 안중근의 계획은 일제가 공개 재판을 하지 않고 철저하게 비공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당초 세계 만방에 일제 침략을 폭로하려던 기대는 뜻과 같이 이룰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1차 목적인 이등박문 포살의 성공적 의거만으로도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투쟁과 기상을 세계에 널리 떨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이등박문의 포살 기사를 앞다투어 대서특필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

(2) 하얼빈의 의거


그러면 안중근이 결행한 이등박문 포살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중근이 이등박문 포살을 결행하기 위해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이에 앞서 이강은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을 맡고 있는 김형재(金衡在)에게 안중근 등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 주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포그라니치나야 역에서 내리어 친지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방문하고 “가족을 마중하기 위하여 하얼빈 방면으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마중이 필요하니 아들을 동행케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유경집은 하얼빈에서 한약재를 구입할 용건이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 유동하의 동행을 쾌락하였다.
안중근은 이에 통역 유동하를 구한 다음 하얼빈에 도착하자 유동하에게 그의 이등(이등박문) 포살계획을 설명하여 유동하로부터 협조 약속을 얻었다. 안중근 등은 하얼빈에 도착하여 『대동공보』의 하얼빈지국을 맡고 있는 『대동공보』 기자 김형재를 찾아가 이강의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합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10월 23일경에는 김형재의 소개로 안중근 일행 4명은 김성백(金聖白 또는 成白)의 집으로 안내되어 하얼빈에서의 활동계획을 상의하였다.
처음에 안중근은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 지역인 남장춘(南長春)·관성자(寬城子)와 이등박문의 도착지인 하얼빈·채가구(蔡家溝) 등 4개 지점에서 의거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비가 모자랐고 또 실제 가동인원도 부족하여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의 두 곳으로 한정하여 계획을 추진해 갔다.
안중근은 교차역으로서 기차가 쉬게 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는 우덕순·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은 안중근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했다. 만약 이등박문이 탑승한 특별 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치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올라 이등박문을 포살하기로 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공격하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계획을 추진하는 중 안중근은 강개한 마음이 일어나 홀로 이역만리의 여관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하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며, 영웅이 때를 만들도다.
천하를 응시하며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와 지니 장사의 의기가 뜨겁다.
분개는 한번 갔으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쥐 도적 이등(伊藤)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알았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로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이렇듯 마음을 가다듬고 결행의 그날을 기다리던 안중근은 유동하로부터 이등박문이 10월 25일 아침에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10월 24일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한 뒤 하얼빈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등박문은 10월 25일 아침이 아니라 하루 늦은 10월 26일 아침에 오게 되어 있었다. 일본을 떠나 10월 18일 중국 요동반도의 대련(大連) 부두에 상륙한 이등박문은 10월 21일에 여순(旅順)의 전적지를 시찰한 뒤 봉천(奉天; 현재 瀋陽)으로 들어가, 24일에는 무순(撫順) 탄광을 돌아보고 10월 25일 밤 장춘(長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동일 밤 청국도대(淸國道臺) 주최의 환영회에 참석한 뒤 러시아 측에서 보내온 귀빈 열차를 타고 하얼빈 역으로 향하였다.
안중근은 10월 25일을 김성백의 집에서 묶고, 26일 새벽에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오전 7시쯤 하얼빈 역에 도착하니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망과 함께 이등박문을 맞이할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등박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하얼빈에 앞서 채가구에서의 거행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10월 24일 채가구에 병력을 배치하러 내려왔던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돌아가면서 세 사람이 마지막 이별로 서로 포옹하고 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러시아 경비병이 이를 보고 수상히 여기고, 이등박문을 태운 특별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우덕순·조도선 등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잠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등박문을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9시에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등박문은 출영 나온 제정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쵸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모종의 중요 회담을 한 뒤 9시 30분경 코코프쵸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출영 나온 각국 관민과 인사를 교환하고 경호군(警護軍) 명예군단장인 러시아 재무대신(財務大臣)의 요청에 의하여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사열을 마친 후 이등박문은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의 후방에 있었다. 그는 이등박문이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브러닝 8연발의 권총으로 이등박문의 어깨 부분을 조준하여 네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안중근과 이등박문의 거리는 불과 10여보에 불과했다. 세발이 이등(이등박문)에게 정확하게 명중되었고 그와 동시에 이등박문은 쓰러졌다. 이때의 상황을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찻집에 앉아서 차를 두세 잔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이 되어 이등(이등박문)이 탄 특별열차가 와서 닿았다.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하며 십분 생각하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이윽고 이등(이등박문)이 차에서 내려오자, 각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 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삼천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고, 어질고 약한 인종(人種)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하고는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갔다.
그리고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를 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그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처럼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 것이 필시 이등(이등박문) 노적(老賊)일 것이다. 곧 단총을 빼어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네 발을 쏘았다.

이등박문 저격 직후 안중근은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이등박문의 얼굴을 모르므로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이등(이등박문)으로 알고 발사한 대상이 이등박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순간 안중근은 만일의 실수를 없게 하기 위하여 일본인 집단 중에서 모습이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 가는 자를 향해서 세발을 연이어 발사하였다. 안중근의 이 사격으로 이등박문을 수행 중이던 천상(川上) 하얼빈 총영사와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삼괴남(森槐南)·전중(田中) 만철(滿鐵) 이사 등이 총탄을 맞아 이들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어 제8탄을 발사하기 직전 안중근은 러시아군에 의하여 제지되었고, 이때 그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한 후 태연자약하게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한편 이등박문은 제정 러시아 장교와 일본인 수행의사들에 의하여 열차 안에 옮겨져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30분 후에 절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은 안중근의 엄중한 단죄를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3) 이등박문의 죄과와 정의의 응징


안중근은 완전 식민지로의 한국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과 만주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이등박문을 희생자로 택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한국침략의 원흉일 뿐 아니라 동양평화에 대한 교란자로 간주하고 이등박문의 죄목을 다음의 15가지로 열거하였다.

1. 한국 민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을사늑약, 1905)과 7조약(한일신협약, 1907)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이상에서 열거한 이등박문의 죄목 가운데, 제15조에 들고 있는 명치왕(明治王)의 아버지인 효명왕(孝明王)의 사살만이 사실과 다를 뿐 나머지는 조선침략의 선봉에 섰던 이등박문이 마땅히 저지른 죄였음이 분명한 것이었다.(명치왕의 아버지인 효명왕의 죽음은 1866년 12월 하순의 일이었으므로 아직 이등박문이 궁중에 출입하기 전의 일이었고 이 무렵 이등박문은 자신의 고향에서 와병 중에 있었다.)
이등박문은 1892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된 이래 1896년까지 4년여 동안 수상의 자리에 앉아 침략정책의 최고 결정권자로서 1894년의 청일전쟁과 1895년의 민비(명성황후)시해와 같은 침략행위를 자행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는 직접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을 준식민지(準植民地)로 만드는 데 앞장섰고, 스스로 일제통감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침략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통감으로 있으면서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강제 체결 및 군대해산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1909년 6월 일제통감부의 통감을 사임하고는 일본 추밀원 의장이 되어 동년 10월에는 만주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직접 만주시찰에 나선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제국주의 침략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로서 동양평화의 파괴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의와 인도의 기준에서 평화의 파괴자, 침략자의 응징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그 정의의 응징은 안중근의 포살로 나타난 것이었다. 안중근은 이러한 침략자이며 평화의 파괴자인 이등박문에 대한 응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분명히 하였다.

다만 나의 큰 목적을 발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한 것이었으므로 세계의 오해를 면키 위해 진술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므로 다음에 그 대요를 말한다.
이번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일로전쟁(러일전쟁, 1904)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 조칙에 의하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개선하였음에 대하여는 한국인은 마치 자국이 개선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랬던바 이등(이등박문)이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 상하 인민을 속이어 5개조의 조약(을사늑약, 1905)을 체결하였다…. 이어 또 7개의 조약(한일신협약, 1907)을 체결당했으므로 더욱 한국은 불이익을 받을 뿐 아니라 있어서는 안될 일로 황제의 폐위까지도 행하였으므로 모두 이등박문을 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3년간 각처로 유세도 하고 또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있으나 보통의 피고인이 아니고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은 조선침략의 원흉 및 동양평화의 파괴자에 대한 정의의 응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한국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등박문을 포살했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등박문의 포살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전지역 내에 들어온 적장을 공격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립전쟁은 침략자에 대한 정의의 항거이고, 따라서 자신은 일반 자객이나 죄인이 아니고 적군인 일본군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때문에 안중근은 그 후 공판정에서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은 오해로 말미암은 범죄이니 감형을 바란다고 변론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이를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등(이등박문)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에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구(旅順口)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 재판하는 것이 옳다.

안중근 또한 공판정에 그의 이같은 견해와 신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전부터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추대되어 있었으며 동지자는 다 각자의 임무를 하여 각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기로 동맹하고 있지만 나는 특파 독립대로 하얼빈에 와서 이등(이등박문)을 살해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일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병사를 불러 올 수가 있었고 또 나에게 병력이 있었더라면 대마도(對馬島) 근처쯤으로 출동해 가서 이등(이등박문)이 타고 오는 배라도 전복할 심산이었다.

2. 구국사상으로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의 구국사상은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그의 구국활동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동양평화론』은 그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이러한 자신의 구국사상인 『동양평화론』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완성하고자 했으나 일제가 서둘러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그만 미완성 원고로 끝나고 말았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한 『안응칠 역사』(앞에서 『자서전』으로 약칭한 저술)를 끝낸 뒤인 1910년 3월 15일이 지나서였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옥중에서 두 종류의 저술을 구상했다. 하나는 전기적 기록인 『자서전』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저술로서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동양평화론』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형 집행의 일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 일자를 한 달 정도 연기해줄 것을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일제 고등법원장이 몇 달 걸려도 좋다는 승낙을 해 옴으로써 안중근은 이를 믿고 공소권(公訴權) 청구도 포기한 채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러한 약속과 달리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기간은 10여일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안중근이 공소하였더라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최후작인 『동양평화론』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술의 시간을 주겠다는 일제 당국의 약속만을 믿고 일체의 미련 없이 공소를 포기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이 미완성으로 끝나게 됐음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안중근이 집필하려 했던 『동양평화론』의 체계는 1) 서(序) 2) 전감(前鑑) 3) 현상(現狀) 4) 복선(伏線) 5) 문답(問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이 실제 집필한 것은 서(序)와 2장의 전감(前鑑)인데 그중 전감도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동양평화론』은 서론에 해당되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비록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나 서와 전감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동양평화론』의 주된 골자는 「동양의 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었다. 이러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서(序)


『동양평화론』의 집필 목적을 밝힌 서(序)에서는 국제정세의 양상을 동서양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동양 평화의 보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일본 등 삼국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 여기에서 전제는 동양 삼국이 각기 독립의 상태를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제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일제가 내세우던 아시아연대주의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외형상 일견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 본질에서는 명백한 차이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점인 것이다.
주지하듯이 아시아연대주의는 일제 침략 정책의 논리였다. 일제는 겉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하여 동양 삼국이 연대하여 동양 평화의 질서를 확립해야 할 것을 외치면서 아시아연대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아시아연대주의는 이들 삼국의 평등한 의미에서의 연대가 아닌 상하의 관계에서 설정하였다. 즉 일제를 아시아의 지도자로 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시아연대주의의 또 하나의 본질은 긴밀한 연대에 진정한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체의 독립 보전책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이기적 정략의 소산인 아시아연대주의는 일본의 침략정책과 국가적 타산을 은폐하는 수단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적 독립을 전제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는 그 출발부터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일본이 동양평화를 방기한 채 제국주의적 침략을 자행하는 것에 대해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현재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 나오는 화근에 대해서 동양의 인종은 일치단결하여 극력 방어하는 일이 상책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분명히 깨닫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어찌 일본은 이 순연의 대세를 돌보지 않고 동종의 우방을 분할하여 우의를 깨트리고 스스로 물고기 다툼을 현출하여 낚시꾼을 기다리는 꼴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과 청국의 양국 사람이 희망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현재의 정략을 크게 단절하는 일이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 이후 일본의 기만적 행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강했던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 청국의 인민이 일본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두 나라가 일본을 도운 것은, 첫째 러시아와 일본이 개전할 때 일본왕이 선전포고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공히 한다」는 대의(大義)를 밝혔던 점에서이고, 둘째 황색인종과 백색인종의 싸움에서 인정의 당연한 순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러한 양국의 지원을 외면한 채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만주 땅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동양 평화의 소망을 저버리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이제 일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자연 발생적으로 의병이 봉기해서 독립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미 십수만의 의병을 살해하였으며 수백의 의병장을 살해했다. 이제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모든 세계 사람들은 일본이 한국을 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하려는 것으로 알고 일본을 경계할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안중근은 러일전쟁(1904)을 동양과 서양의 인종간의 싸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왕이 선전포고문에서 한국독립의 보장을 내세운 것에 대하여 얼마간의 기대도 가졌던 것 같다. 안중근의 이러한 의식은 당시 계몽주의적 성향의 일반 추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처럼 안중근은 일제의 노골적 침략에 직면해서 계몽적 방략을 의병전쟁 전략으로 수정해 갔고, 그러한 내용이 위의 글을 통해서도 찾아지는 것이다. 즉 구국에 대한 안중근의 사상적 전환을 볼 수 있는데, 『동양평화론』은 그와 같은 안중근의 사상적 전환까지 포함한 구국사상이었다.

(2) 전감(前鑑)


전감에서는 청일전쟁(1894) 이래 러일전쟁(1904)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를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이 장(章)의 전체 서술이 완성된 것은 아니나 저술된 부분 중 중요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청일전쟁(1894)에 대하여는 주로 청국의 패배 원인에 주목하였다.

청국은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땅덩어리도 크며 일본에 비해 몇 십 배가 되면서도 어찌 패하였을까? 예부터 청국 사람들은 스스로 중화(中華)의 대국이라 자칭하고 외방을 오랑캐라 불러 교만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권신과 친족 및 외척들이 국권을 마음대로 농락함으로써 백성들은 원한을 품고, 이로써 상하가 화합하지 못하여 이 같은 치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 국내적으로는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도 외국과의 싸움이 시작되면서는 연합을 혼성해서 한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안중근은 청국이 청일전쟁(1894)에서 진 것은 민족이 화합하지 못하고 단결되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족 보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단결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그의 구국운동론이나 『동양평화론』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음에 청일전쟁(1894)과 관련하여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의 침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러시아는 동양함대를 조직하고 프랑스·독일과 연합하여 요코스가 해상에 진입하여, 일본이 청일전쟁(1894)의 대가로 빼앗은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과 배상금을 삭감할 것을 요구해 왔다.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천하의 공법을 따르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는 시랑의 심술보다 더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몇 해도 못가서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구(旅順口)를 조차하여 군항을 확장하고 철도건설을 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인은 수십 년 이래 봉천(奉天) 이남의 대련(大連)·여순(旅順)·우장(牛莊) 등의 따뜻한 항구를 한 곳이라도 차지하려는 욕심이 불과 같았으나 감히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청국이 영국·프랑스의 양국으로부터 천진(天津)을 침범당하고 관동(關東)의 각 요새에 신식 병기를 설치하고 경계를 강화한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 가운데에서도 러시아의 침략을 가장 경계한 듯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백색인종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러시아가 한반도에 침략하게 되면 한국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 같다.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과 영토를 맞대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곧 한국의 위협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동양평화론』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러시아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동양 삼국이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논리를 깔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과 청국은 러일전쟁(1904) 당시 일본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게 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러일전쟁(1904) 당시 한국과 청국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만일 러일전쟁(1904)에서 한국과 청국 양국의 관민이 일본을 배척하여 공격했더라면 일본의 패전은 물론이려니와 서양 열강은 이 기회를 타서 동양에 개입하여 동양은 백년풍운(百年風雲)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약 서구 열강이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하여 앞을 다투어 출병케 한다면 영국은 인도(印度)·홍콩과 기타 여러 곳에 주둔시키고 있는 육·해군을 진격시켜 청국과 협상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월남(베트남)·인도네시아 방면으로부터 육군과 군함을 이끌고 와서 미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포르투갈 등 제국의 동양순양함대와 연합해서 이익을 분배하는데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군사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동양의 참상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청(한국·청) 양국 관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약장(約章)을 준수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일본을 지원해서 일본이 승리케 하는데 작용했다.

또한 안중근은 개전 초기에 만일 한국의 관민이 이때를 기회로 삼아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을 공격하고, 청국도 청일전쟁(1894)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일본을 공격했더라면 일본은 끝내 사방에서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궁하였다.
안중근은 그럼에도 일본은 한·청(한국·청) 양국의 그와 같은 동양평화의 소망을 저버림으로써 동양평화는 깨어지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자연의 형세를 돌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헤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 악행을 일삼아 따돌림을 받는 사람-일본)의 화란(禍亂)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계속하여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핍박한다면 그로 인하여 일본은 자체의 파멸을 자초할 것인 즉,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라 했다. 그러한 연후에 서로 독립한 청국·한국·일본의 3국이 동맹하여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해야 만이 동양평화는 실현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상이 전감(前鑑)에서 피력하고 있는 『동양평화론』의 주요 골자이다. 『동양평화론』의 구성 체계상 전감은 본론에 앞선 문제 제기의 장(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감은 그가 구도한 『동양평화론』의 일부를 밝힌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감의 내용을 통해 그 기저에 흐르는 안중근의 역사 인식과 『동양평화론』의 본질을 어느 정도는 살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등박문의 처단도 그러한 동양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맥락에서 거행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5장 옥중투쟁과 의연한 최후

1. 일제의 부당한 재판


의거 직후 안중근은 역 구내의 헌병파출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러시아 시심재판소(始審裁判所)의 검사와 한국인 통역으로부터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당일 저녁에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는 10월 28일 일본 외무대신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의 명령에 의해 여순(旅順)에 있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의 일본인 검사에 의해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고 10월 30일부터 정식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일제의 일방적인 절차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재판 과정과 관련하여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일제의 재판이 부당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사건이 얼어난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이란 점과 당사자 안중근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이 하등 일본의 법률에 의하여 안중근을 재판할 권리가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는 명목이나마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제는 제정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여 안중근을 인도받았으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부당하게 재판한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안중근은 이에 대하여 그의 『속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오늘 내가 당하는 이 일이 생시인가 꿈속인가. 아(我)는 당당한 대한국 국민인데 왜 오늘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가. 더욱이 일본 법률의 재판을 받는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한 사람인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것이 꿈이라면 어서 깨고, 확실히 깨어라.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 아무런 이야기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대답하되,
“재판관 마음대로 하라. 나는 아무튼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둘째, 각국인 민선 변호인단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관선 변호인을 선정하여 재판을 진행시킨 점이다. 이것은 법률 위반일 뿐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조치였다.
대동공보사 측에서는 안중근의 변호를 위하여 러시아인 미하일로프와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를 고용하여 여순에 파견하였으며, 간도와 노령(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의 한국인들은 의연금을 갹출하여 안중근의 변호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변호사 안병찬(安秉瓚)·고병은(高秉殷) 등이 안중근의 변호를 담당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여순에 왔었다. 그러나 일제 측은 국제법과 일본 국내법조차 무시해가면서 이러한 변호인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일제는 민선 변호인단의 신청을 거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우선 안중근의 재판을 일본 측이 전담하는 것부터가 부당한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법이론에 근거한 변호인단의 비판이 나올 것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변호인 심문 과정에서 일제의 한국국권 박탈에 대한 안중근의 비판이 나올 것을 봉쇄하기 위한 중첩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안중근에 대한 언론의 봉쇄이다. 일본 측은 안중근이 본래 목적한 바의 하나로서 공판정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세계에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하여 안중근이 자기의 의견을 진술하려고 할 때마다 이를 제지하였다. 안중근은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속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언권이 금지되어, 내가 목적한바 의견을 진술할 도리가 없었고 모든 사태는 숨기고 속이는 것이 현저했다.
만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한국인을 겁낼 것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굳이 이등(이등박문) 한 사람이 해를 입었던가. 오늘 또 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 하면 그야말로 이등(이등박문)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일제 측은 민선 변호인단을 봉쇄해 놓고 재판정에서 검찰관과 재판관이 심문할 때도 안중근의 응답을 봉쇄하였다. 안중근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때 재판관이 출석하여 검찰관의 심문한 문제에 의해서 대강을 심문하는데 내가 자세한 의견을 진술하려 하면 재판관은 그저 회피하며 입을 막으므로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 까닭을 알기 때문에 하루는 그 기회를 틈타서 몇 개 목적을 설명하려 했더니 재판관은 문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방청을 금지시키고 다른 방으로 물러갔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내 말속에 칼이 들어 있어서 그러는 것이냐. 마치 맑은 바람이 한 번 불자 쌓였던 먼지가 모두 흩어지는 것과 같아서 그런 것이리라.

일체 측은 안중근이 공판정에서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박탈을 비판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공판을 중지하고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시켰다. 재판을 공개로 진행코자 할 때는 비공개재판에서 사전에 안중근에게 일본의 대한정책을 비판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재판을 공개할 필요를 느꼈을 때 일제 재판관은 비공개재판에서 안중근에게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있다.

문(재판관) : 이상과 같은 정치상에 관한 의견은 사건 재판을 하는 데 있어 이상 깊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도 후일 거듭 이것을 진술할 뜻이 없으면 심리를 공개해도 지장이 없으나 그래도 타일 심리 중에도 오늘과 같이 의견을 말하려는 심산인가?
답(안중근) : 나는 사원에 의하여 살해한 것이 아니고 정치상의 관계에서 본건이 일어났던 것이므로 정치상의 의견을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이상과 같은 부당한 재판을 받은 다음 그의 최후 진술에서 일제 측이 그에게 붙이는 이름인 ‘암살자’임을 부정하고 그가 ‘의병’임을 다음과 같이 진솔하였다.

내가 이등(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이등(이등박문)이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한국·일본) 간을 소격시키므로 한국의 의병중장의 자격으로 주살하였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 적군의 포로가 되어 와 있으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범죄자가 아닌 적군의 포로로서 자신을 처리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항변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일언지하에 묵살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가 내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일본 외상 소촌(小村, 소촌수태랑)은 1909년 12월 2일 지시 전문으로 「정부는 안중근의 범행이 극히 중대함을 감안, 응징의 정신에 의거 극형에 처형함이 타당할 것을 사료하고 있다」는 내용과 우덕순에서 대해서도 모살 미수죄를 적용할 것을 시사하고, 조도선과 유동하에 대해서는 재량에 위임한다는 지시를 보내었다.
즉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이처럼 소촌(소촌수태랑) 외상의 지령에 의하여 이미 결정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법적 심판의 여지와 안중근의 주장은 전적으로 무시되는 속에서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2. 그 어머니의 그 아들


안중근은 부당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다. 앞에서 보듯이 「흉악범」으로 보려는 일제에게, 안중근은 자신의 이번 거사가 의병으로의 임무를 수행한 것임을 확고하게 밝혔으며 또한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기개를 잃지 않고 시종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중근의 의연한 태도 앞에는 일본인 검사나 판사도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거사 후에 보여준 이러한 당당한 태도는 안중근의 의거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가 아들이 사형을 당하게 되는 그 순간에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앞둔 안중근에게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는 뜻을 아들에게 전함으로써 안중근의 마지막 결심에 흔들림이 없도록 권고했다.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에서 아들의 죽음을 바라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 어머니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의 경우는 달랐다. 아들의 의거를 대견해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아들의 의거가 혹 빛을 바래지 않도록 의연한 죽음을 권고한 것이었다. 그녀가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의 영원한 삶을 바란 진정한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이 무렵의 신문 기사들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먼저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1910년 2월 12일자)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아침 안중근의 제(弟) 정근(안정근)과 공근(안공근) 두 형제가 조심스럽게 검사국에 출두하고 13일에라도 형 안중근에게 면회할 수 있도록 허가를 신청했다. 그 목적은 어머니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내용인즉 “앞으로 판결 선고가 사형(死刑)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소식은 만주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에서도 화제를 뿌렸다.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1910년 2월 17일자)에서는 「사형선고 후의 안중근」이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4일 형(刑)을 선고받은 안중근 등 4명 중 우(禹, 우덕순)·조(曹, 조도선)·유(劉, 유동하)의 3명은 15일 공소 포기의 수속을 마침으로써 16일부터 형(刑)을 복역하게 된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도 모든 행동이 평상과 다름없을 뿐 아니라 식사나 수면(睡眠)도 줄지 않았다.
두 제(弟)와 종제(從弟) 안명근(安明根)과 면회하고 어머니로부터의 전언을 들었다. 형(刑)을 받은 마당에 가명(家名)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며, 공소 등 구명(救命) 행위는 단념하라는 충고이어서 안중근도 예기치 않았던 내용이어서인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안중근은 십중팔구 공소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프랑스 선교사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에게 와달라는 전보를 쳤는데 안중근은 그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이러한 소식은 충격적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다. 일개 흉악범의 소행으로 치부하려던 그들에게 그녀의 의연한 모습은 안중근이 행한 의거의 본질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준 셈이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일본인들은 신문 기자를 한국으로 특파하면서까지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등 추태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10년 2월 30일자)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시모시자(是母是子)」란 제목 아래 그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안중근 씨의 어머니가 변호를 위탁하기 위해 평양에도 착하여 안병찬(安秉讚) 씨와 교섭할 때, 이곳 경찰서와 헌병대에서 순사와 헌병을 파견하여 수차 문초를 했는데 이 부인은 용모가 자약(自若)하고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물 흐르듯이 대답했다.
“이번에 중근(안중근)이가 한 행동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러일전쟁, 1904)을 시작한 이후 밤낮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상에 있었으며 평상에 집에 있을 때도 매사가 올바른 생각뿐이고 조금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집안 사람들도 숙연(肅然)해서 몇 해 전에 자주 독립하려면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부터 갚자고 하는 국채보상금(國債報償金) 모집 때도 중근(안중근)의 아내는 물론 제수들이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까지도 내놓게 하고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아깝겠느냐고 함에 며느리들이 기꺼이 이 말을 따라서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며 안중근 씨의 역사를 빠짐없이 설명하니 순사와 헌병들도 서로 바라보며 놀라고 말하기를 안중근이 한 일은 우리가 이미 놀라고 있지만 그 어머니의 사람됨도 한국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더라.

3. 유언과 순국


안중근은 예상대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미 생사를 초월한 안중근은 자신의 행적과 사상을 남기기 위해 집필에 열중하는 한편 2월 14일과 15일에 가족과 친지들에게 7통의 유서를 남겼다. 흡사 안중근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이 유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어머니에게 드리는 글
어머님 전상서
아들 안토마스(안중근)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 자식은 감히 한 말씀 어머님에게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의 막심한 불효와 정성(定省)註1)을 못다 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슬처럼 허무한 이 세상에서 육정(六情)을 못 이기시고 이 불초자식을 너무나 염려해 주시니, 후일 천국에서 만날 뵈올 것을 바라며 기원합니다. 현세의 일이야 말로 모두가 주의 명령에 따른 바이오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분도(안분도, 안우생)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주시옵소서.
이상은 그 대요이며 여쭐 말씀은 많습니다만 어쨌든 후일에 천국에서 기쁘게 또 만나 뵈옵겠으니 그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가족 일동에게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주교(主敎)를 전심(專心) 신앙하여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사는 정근[定根(안정근)]과 공근[恭根(안공근)]에게서 들어 주시옵고 반드시 염려를 거두시옵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위에서 「분도(안분도)」는 안중근의 장남으로 당시 6세였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 노령(러시아령) 지역에서 일찍 사망함으로써 아버지의 유언대로 신부가 될 수 없었다.

② 아내에게 보내는 글
「분도(안분도)」모에게 보내는 글
장부 안토마스(안중근) 배(拜)

예수 주님을 찬미하옵고.
우리는 이슬과 같은 허무한 세상에 천주님의 뜻으로 배필이 되어 또 다시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헤어지게 되었으나 멀지 않아서 주님의 은총에 의해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肉情)을 고려(苦慮)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해서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식들의 교육에 힘쓰고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편안하게 가지시고 후세의 영원(靈源)의 낙만을 기원할 뿐이오.
장남 「분도(안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천주님에게 바쳐 후세의 신부로 되게 하시오. 할 말은 많으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다시 만나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기원할 뿐이오.
1910년 경술(庚戌) 2월 14일

③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에게 보내는 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전상서
죄인 안토마스(안중근) 배(拜)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자애가 넘치시는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영세를 주시고 또한 마지막에는 많은 노고를 불구하시고 이와 같은 곳에 특별히 내임하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사례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대전(主大前)에 기도를 바쳐주시옵고 죄인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신부들과 교우 여러분들에게도 문안드려주시고, 아무쪼록 우리가 빨리 천당 영복의 땅에서 기쁘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교님께도 상서 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나의 신부님이시여.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며, 저도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④ 민(뮤텔, 민덕효) 주교에게 드리는 글
민(뮤텔, 민덕효) 주교전상서
죄인 안토마스(안중근) 백(白)

자애 깊으신 주교님께서는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금번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님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무지이온바 고비(高庇)로 나의 주 예수의 특혜를 입어 고백 영성체(領聖體)의 비적(秘蹟) 등 모든 성사(聖事)를 받은 결과 심신이 모두 편안함을 얻었습니다.
주모(主母)의 홍은(鴻恩), 주교의 은혜에 대해서는 더 말씀드릴 나위 없습니다.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대전(主大前)에 기도를 바쳐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그리고 주교와 여러 신부께옵서는 다 같이 일체가 되어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여 멀지 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인(外人)과 열교인(劣敎人) 등이 일제히 정교(正敎)로 귀의하여 나의 주 예수의 자애로우신 적자(赤子)가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뿐입니다.

⑤ 숙부에게 드리는 글
여러 숙부님께 답하는 글
조카 토마스(안토마스, 안중근) 백(白)

아-멘
하서에 접하옵고 엎드려 기쁨을 만끽하옵니다. 불초 소생의 신상에 대하여는 너무 상심치 마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세상에서 화복을 불문하고, 무슨 일이건 다 주님의 명이온대, 인력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바이므로, 다만 성모(聖母)의 바다와 같은 은혜만을 믿고, 또 축원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이번 특별한 은혜에 의하여 모든 성사를 받을 수 있었음은 주 예수 및 성모마리아께서 저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그 분의 품속으로 구해 올려 주셨음을 믿으며 자연 심신의 편안을 느꼈습니다. 여러 숙부님들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께서는 어느 분이시나 괴로워하시지 말고, 주모의 은혜에 저를 대신하여 사례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가내가 서로 일생을 화목하게 편안히 지내시기를 비옵니다.
종백부(宗伯父)께서는 현재 입교(入敎)치 않으셨다는 말을 듣고 유감스럽기 그지없사오니, 진력하시어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하여 마지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을 떠남에 임하여 제가 드리는 일생의 권고임을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제 교우에게는 별도로 일일이 서장도 내지 못하니 반드시 제 교우가 다 신앙하기를 바라고 숙부들께서도 열심히 전교에 종사하시어 머지않아 우리의 고향인 영복의 천당, 우리 주 예수앞에서 기쁘게 만날 것을 바라오니 제 교우께서도 저를 대신하여 주께 사례 기도하시기를 천만복망(千萬伏望)하여 마지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만 붓을 놓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⑥ 사촌동생 명근[明根(안명근)]에게 보내는 글
명근(안명근) 현제(賢弟)에게 보내는 글
예수를 찬미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꿈속의 꿈이라 할까. 다시 중몽(重夢)의 날을 파하고 영복의 땅에서 기쁘게 손잡고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안락을 받을 것을 바랄뿐이다.

⑦ 정근(안정근)·공근(안공근)에게 주는 글
송부하는 바, 신서 6통은 각각 본인에게 전송하라. 이에 다시 후일 영원한 복지에서 기쁘게 손잡기를 기대하며, 이로써 종언(終言)할 뿐이다.

이상의 유서를 통해 우리는 삶을 거룩하게 마감하는 의인(義人)의 평정된 심경을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여한 없이 최선을 다했던 의사(義士) 안중근. 그는 이미 속인(俗人)의 상태를 초월해 있었다.
그는 동포들에게도 할 말을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그는 또 순국 직전에 정근(안정근)과 공근(안공근) 두 아우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의사(義士)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순국하였다.

연보


1879. 9. 9 (1세) (음 7. 16)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부인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鎭海縣監 : 명예직)에 임명되었던 수천 석 지기였고, 아버지 안태훈은 진사시험(進士試驗)에 합격한 향반(鄕班) 가문의 출신이었음.
태어날 때 가슴에 북두칠성(北斗七星)과 흡사한 모양의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하여 유명(幼名)을 응칠(應七)이라 함.
1884. (6세) 아버지 안태훈이 상경(上京)하여 박영효(朴泳孝) 등이 주도한 일본 유학생 선발에 뽑혔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의 실패로 좌절을 맛보고 귀향함.
1885. (7세) 고향 해주를 떠나 신천군(新川郡) 청계동(淸溪洞) 산골 마을로 이사함.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는 배경은 개화파에 관여했던 안태훈이 수구정부의 탄압으로 피하기 위한 것이었음.
1885. 1. 17. 아우 정근[定根(안정근)] 출생.
1886. (8세) 할아버지 안인수의 배려로 유교경전(儒敎經典)과 조선역사(朝鮮歷史)를 배우기 시작함.
이후 8~9년 동안 한문(漢文)을 수학함.
1889. (11세) 아우 공근[恭根(안공근)] 출생.
1890. (12세) 어려서부터 익힌 말타기와 활쏘기 솜씨가 묘기를 부릴 정도로 익숙해 짐.
여동생 성녀[姓女(안성녀)] 출생
1891. (13세) 숙부(叔父)와 포수꾼을 따라, 단총(短銃)을 지니고 수렵에 나섰고 사격술도 뛰어나 발군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림.
1892. (14세) 할아버지 안인수의 사망. 할아버지의 정을 잊을수 없어 침식을 잃은 채 애통하다가 병을 얻어 반년가까이 병상에서 보냄.
1894. (16세) 재령군 신환면(新換面) 김홍섭(金鴻燮)의 딸 김아려(金亞麗 : 당시 17세)와 결혼.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1894) 당시 안태훈이 일으킨 의려(義旅)에서 선봉(先鋒)으로 활약함. 동학농민전쟁(1894) 직후 수개월간 병상에 누웠다가 회복함.
1895. (17세)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안태훈이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5백 석 가량의 양곡을 군량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중앙 정부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으로부터 양곡을 상환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개화파 동지인 김종한(金宗漢)의 도움으로 일단 무마됨.
1896. (18세)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어윤중이 피살된 후 민비정권(閔妃政權)의 거물인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양곡의 상환문제를 들고 나오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안태훈이 인근의 마렴(麻簾 : 銀泉郡 梅花里) 천주교당으로 수개월간 피신하고 프랑스인 신부(神父)가 곡식 상환의 문제를 해결하여 줌. 이 과정에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함.
1896. 10 양곡 상환 문제가 해결된 뒤 안태훈은 독실한 신자가 되어 천주교의 포교를 위해 120권의 경서와 함께 박학사 이보록(李保祿)을 대동하고 귀향함.
1897. 1. (19세) 안태훈이 마렴에 있던 프랑스인 Joseph Wilhelem[한국명; 洪錫九(홍석구)] 신부를 청계동으로 초빙하여 일가족 30여 명이 홍[洪(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음. 이때 안중근은 토마스란 영세명을 받음. 이후 안중근은 홍[홍석구, Joseph Wilhelem(빌헬름)] 신부로부터 교리 공부와 함께 프랑스 말을 배우며 천주교 포교에도 힘을 쏟음.
전도생활 중 민심의 수준이 박약함을 깨닫고 국가 대세를 위한 방략으로 「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계획하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민주교(뮤텔 主敎, 민덕효) 등 외국인 신부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함. 이 일로, 천주교의 진리는 믿지만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배우던 프랑스 말을 중단.
이무렵 인근의 금광 감리(監理)가 천주교에 대한 비방이 심하자 그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단신으로 수백 명의 광부를 상대하여 당당히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함.
천주교 신도중 중앙 관리 김중환에게 5천 냥을 약탈당한 일과 또 처와 재산을 약탈당한 신도의 딱한 사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권력층과 당당히 맞서 대항함.
1898. (20세 무렵) 채표회사인 만인계(萬人稧)의 사장에 피선됨.
청년시절에 ① 벗을 얻어 의를 맺고(親友結義) ② 술 마시고 가무를 즐기며(飮酒歌舞) ③ 총으로 사냥하고(銃砲狩獵) ④ 준마를 타고 달리는(駿馬騎馳) 것 등을 통해 호방한 기질과 의협심을 길러감. 그리하여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찾아가 의기(義氣)를 나누었고, 신도 중에 관리에게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겼을 때에는 서울까지 올라가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항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정의를 실행함.
1904. 2. (26세)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느끼고, 신문·잡지 등의 탐독을 통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각국의 역사를 배움.
1905. (27세) 장남 분도생[芬道生(안분도)] 출생.
1905. 말. 「을사5조약(乙巳五條約, 을사늑약, 1905)」의 늑결로 망국(亡國)의 현실이 급박해지면서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건너감. 이때 그의 계획은 상해와 산동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상해의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 침탈의 실상을 널리 알려 외교적 수단을 강구하여 국권회복을 실현시키고자 하였음. 그러나 상해 등지의 유력 한인(韓人)들 및 외국인 신부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감.
1906. 1. (28세) 아버지 안태훈의 사망으로 계획을 단념하고 상해에서 귀국.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금주(禁酒)를 맹세하고, 평생 맹세를 지킴.
서우학회[西友學會; 뒤에 西北學會(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
1906. (음)3 청계동을 떠나 평남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함.
평양에서 한재호(韓在鎬)·안병운(安秉雲) 등과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벌이는 한편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함.
또한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학교를 인수하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여 교과 교육에 교련 시간을 배정하고 집총 훈련을 통한 군대식 훈련을 실시함.
1907. 1. (29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907)이 일어남.
1907. 2.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안창호(安昌浩)의 연설과 활동에 강한 공감을 갖고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의 관서지부(關西支部)를 설치하고 주도적 활동을 전개함.
이때 부인의 금은지환(金銀指環)·비녀·월자(月子)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 모두를 헌납하며 관서지방의 국채보상운동(1907)을 발흥시키는데 앞장 섬.
1907. 3. 서울로 올라가 수개월 머무르면서 김종한·민형식·이동휘 등과 친교를 맺고 국권회복운동에 관한 대책을 강구함.
1907. 6. 서울을 출발하여 진남포를 거쳐 북간도(北間島)로 향함.
1907. 8. 광무황제(光武皇帝, 高宗)가 강제 퇴위 당하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곧 서울로 올라와 동지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전쟁에 대한 전략을 구상함.
1907. 가을. 평안도 황해도의 60여개 공사립학교가 참가한 연합 운동대회에서 [돈의학교]가 1위의 성적을 거둠.
1907. 가을. 독립전쟁전략에 의거, 국외에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노령(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 처음엔 선편을 이용하여 성진(城津)·청진(淸津)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했으나 청진에서 일경에게 밀항 사실이 발각되어, 육로를 택해 회령(會寧)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넘.
1907. 10. 간도(間島) 화룡현(和龍縣) 지방전(地坊典)에 도착하여 3개월간 북간도 일대를 돌아봄.
1907. 겨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블라디보스토크의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참가하여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됨.
1908. 초. (30세) 이범윤(李範允) 등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력한 인들에게 의병부대의 창설을 적극 주장하여 동의를 얻어내는 한편 동지들의 포섭에 힘을 쏟아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의형제를 결의함.
그리고 노령(러시아령) 연추(煙秋 : 노에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 조직으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에는 최재형(崔在亨)을 추대하고, 노령(러시아령) 일대의 한인촌을 다니면서 유세를 통해 의병을 모집함으로써 의병부대를 조직함.
의병부대의 총독에는 김두성(金斗星)이 추대되고 총대장은 이범윤·안중근은 참모중장(參謀中將)을 맡음. 의병부대의 규모는 약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연추(煙秋 : 노에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국내진입작전을 준비함.
국내진입작전에 앞서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삼사면(三社面) 서두수(西頭水) 상류 지대에 진을 치고 있던 홍범도[洪範導(洪範圖)] 의병부대와 공동작전을 취하기 위해 백두산(白頭山) 농사동(農事洞)까지 갔다가 도중에 일본군수비대를 만남으로써 연추(煙秋 : 노에키에프스크)로 귀환.
1908. 6.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 최하단의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수명의 일본군을 사살 하고 승리를 거둠.
1908. 7. 무산(茂山)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통하면서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新阿山) 등지로 진입하여 곳곳에서 일본군을 섬멸함. 이때 일본군 등을 10여 명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 하여 포로를 석방시키는 인도주의적 의지를 보임. 그러나 이러한 안중근의 처사에 상당수의 의병부대원들이 불만을 갖고 부대를 이탈하게 됨. 더욱이 포로의 석방과 함께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패퇴하게 됨.
1908. 8. 패퇴 후 휘하에 3명의 병사를 이끌고 며칠씩 굶는 극한적 상황에서 한 달여의 온갖 고초 끝에 연추의 본거지로 귀환함.
귀환 후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다니며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전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함.
1908. 9∼12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시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자, [대동학교(大東學校)] 학감(學監),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함.
1909. 1. (31세) 의병의 재기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연추(煙秋 : 노에키에프스크)로 돌아와 의병재기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 11명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고 구국을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함. 그리고 왼손 무명지(無名指)를 끊어 태극기의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의 네 글자를 혈서하고 의병의 재기를 기약함.
의병의 기회를 보면서 연추에서 대동공보사의 기자로 지국(支局)을 운영하며 교육과 강연을 통한 민족의식의 계몽에 힘을 쏟음.
1909. 9.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외신(外信)을 접하고 이등박문의 포살을 결심.
1909. 10. 초. 이등박문의 포살에 대한 구체적 준비에 착수함.
1909. 10. 21. 우덕순(禹德淳)과 동행하여 하얼빈 역을 향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1909. 10. 23. 도중 포그라니치아에서 유동하(劉東夏)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조도선(曺道先)과 합류하여 거사에 따른 치밀한 작전을 세움.
1909. 10. 26. 오전 9시 반,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하고 나오는 이등박문을 향하여 육혈포 3발을 명중시킨 뒤 “대한만세(大韓萬歲)”를 크게 외치고 러시아 군대에 피체.
당일 일본영사관에 호송됨.
1910. 2. 7. 제1회 공판이 시작됨.
1910. 2. 14. 판결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음.
1910. 2. 사형 언도를 받은 직후에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저술에 착수.
1910. 3. 26. 오전 10시에 사형 집행으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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