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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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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2년 10월
독립기념관 관장 최창규

머리말


홍범도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사상 대표적 인물로서 일반 대중에게도 전설적 일화와 함께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 분석 연구 등은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요즈음 발간되는 독립운동관계의 각종 서적이나 자료집·연구논문 등에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국 연변과 구소련(러시아) 등지의 학자들과 교류가 가능하고 그곳의 연구 성과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홍범도에 대한 연구는 종전보다 훨씬 좋은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홍범도와 그가 이끌었던 무장 세력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남한과 북한·중국 연변·구소련(러시아)과 일본 등지에서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남한에서의 연구가 약간 많은 편이다. 그런데 연변에서는 작년(1991년) 여름에 『홍범도장군』이라는 전기물을 국내외 통틀어 처음으로 출판하여 그에 대한 연구에서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홍범도장군』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출판된 만큼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많이 제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고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내에서 읽힐 만한 새로운 홍범도 전기의 출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은이는 홍범도에 대한 간단한 소책자를 저술하여 국내의 독자들에게 홍범도의 비범한 일생을 알릴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홍범도는 함경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구소련(러시아)의 연해주 지방과 중국의 만주지방을 왕래하며 일제 및 반민족·매판봉건세력과 싸웠다. 또한 그 와중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지원하는 적군(赤軍)과 함께 제정 러시아를 지원하는 백위파(白衛派)를 상대로 투쟁하기도 하였고 노년에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임종하였다. 이 같은 그의 다양한 편력과 광범위한 범위에 걸친 행동반경, 수십 년을 헤아리는 장기간의 투쟁경력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다양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근래의 국내외 학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을 놓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홍범도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한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로 간주한다. 반면에 북한과 연변·구소련(러시아)의 학계에서는 그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서 거병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중에 사회주의자로 전향·발전한 영웅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생기게 된 요인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학자들이 서로 고립 분산적으로 연구하면서 자료의 부족이나 사상적 제약과 같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또 나름대로 시각의 차이 등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제한적 요소를 물리치기 위해 가능하다면 많은 국내외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또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집약하여 홍범도의 일생을 여러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이념이나 사상적 편력을 흑백논리로 재단하기보다 그가 당시에 어떤 상황과 입장에 처해 있었던가, 또 결국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즉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의 삶을 얼마나 진솔하게 이해하고 또 그의 투철한 생애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조명·평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홍범도는 그의 적대세력인 일본군 스스로가 “날으는 홍범도”로 부를 정도로 기민한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일본군을 연파, 명성을 떨쳤다. 당시 함경도 지방의 민중 사이에서 흥범도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의 명장” 등으로 까지 과장되게 알려져 있었다. 이는 그만큼 그의 활동이 비범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성원과 기대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홍범도는 공식적으로 정규군을 지휘·통솔하는 장군의 자리에 임명되거나 취임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 그는 체계적으로 잘 정비되고 짜여져 있는 정식 교육기관에서 한번도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 불리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가 존경받을 만한 인품을 지닌 훌륭한 무인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홍범도는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그는 구소련(러시아)에서 또한 ‘혁명가’, ‘소비에트 주권을 위하여 투쟁한 국제주의자 빨치산’ 등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연변에서도 뜨거운 민족애를 품은 사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홍범도의 폭넓은 생애를 단적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홍범도의 일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과 좌절, 동시에 오욕을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의 생애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은 물론,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지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연관시킨 거시적 시야에서의 고찰이 요구된다.
저자는 홍범도의 일생을 그려가면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미화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뛰어 넘는 특출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한 개인의 역할을 지나치게 크게 보는 영웅주의 사관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역사의 발전은 몇몇 개인에 의해 좌우되기 보다는 무수한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그 사회나 민족, 혹은 어떤 제도나 기구, 또 특출한 개인으로 하여금 그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시대적 상황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저자는 최근 구소련(러시아)에서 국내에 소개된 홍범도의 이력서와 일지 등 새로운 자료와 참고문헌, 그리고 기존의 국내외 여러 자료 및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개설적으로 그의 비범한 일생을 서술코자 한다.
홍범도의 생애는 크게 보아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저자는 아래와 같은 시기구분에 따라 그의 일생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제1기 유년시절 및 청·장년기: 출생부터 1907년 11월 본격적 의병활동의 개시 직전까지 시기
제2기 국내에서의 의병부대 조직과 항일무장투쟁시기: 1907년 11월부터 1908년 11월 초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까지의 시기
제3기 만주·연해주 지방에서의 재기도모 시기: 1908년 11월 초부터 1919년 8월 간도로 진입하기까지의 재기 준비 시기
제4기 간도 지방에서의 국내 진입 작전 및 독립전쟁 전개 시기: 1919년 8월부터 1921년 1월 구소련(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기 직전까지 시기
제5기 연해주·중앙아시아에서의 만년: 1921년 1월부터 1943년 10월 임종하기까지 연해주·중앙아시아 지방에서의 노년기

이러한 시기구분이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홍범도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에 약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시기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물론 국내에서의 의병부대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시기, 그리고 1920년대 초 국내 진입작전과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전개 시기라 할 수 있다.
문고판이라는 이 책의 특성-지면의 제약-때문에 홍범도의 후반부 생애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부분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집필과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조동걸·성대경·신용하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1. 어린 시절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안도 평양의 외성(外城) 서문(보통문을 흔히 이렇게 불렀음) 안에 있는 문열사 앞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부친의 성함은 홍윤식(洪允植)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 그의 모친에 관해서도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홍범도의 일지를 통하여 그의 어머니가 해산 후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홍범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고 한다.
그의 출생연도에 대하여는 1869년 설이 있으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68년 출생한 것이 확실하다. 또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평안남도 양덕이라고 하는 등의 이설이 있었지만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홍범도의 가계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평안도 지방에서의 전설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가 홍경래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으로서 원래 평안도 용강군의 화장골에서 홍경래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경래가 1811년 12월 농민봉기를 일으켜 5개월간 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홍경래 가문은 이에 연루되어 전부 화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고조부는 약간의 재산을 갖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홍범도의 증조부 대에 와서는 더욱 몰락하여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홍범도의 부친은 결국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료로서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 어떤 기록으로써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 전설은 홍범도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북지방의 풍운아 홍경래를 고의적으로 끌어 들이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 점은 홍범도 고조부와 홍경래의 생존연대를 유추해 보면 비슷한 시기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심증이 간다. 결국 홍범도와 홍경래 사이의 혈연적 연계 가능성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홍범도가 태어난 평양은 어떤 곳인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했다고 하는데, 아사달이 바로 평양이었다고 한다. 평양은 낙랑, 고구려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 전시대를 거쳐 서경(西京) 흑은 서북지방의 웅도로서 매우 중시되었고 경기 이북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회지이기도 하였다. 평양은 거의 2천 년 이상을 북한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산업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로 역할하였던 곳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때도 평양성 내에 있었던 기자릉(箕子陵)과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은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평양 시민들로 하여금 이 도시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평양은 또한 매우 아름다운 풍류의 고도로서 수많은 시인 묵객과 재사들이 수려한 풍광을 읊으며 찬탄을 보내기도 했던 명승지이기도 하였다. 맑고 정겨운 대동강이 평양성을 끼고 도는 가운데 대동강의 푸른 물줄기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연광정과 부벽루·을밀대 등은 대표적 명소들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은 1811년 말에서 1812년 4월까지 청천강 유역에서 전개된 홍경래의 난 때문에 세도정치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에게 반역의 고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누명이 씌워져 있었다. 이처럼 고려·조선 양 시대에 서북인들은 지배층에 영합하기보다 그들에 저항하다가 필경은 실패하고 더 큰 불이익을 받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지닌 지역이었다.
19세기 후반 무렵의 평양은 평안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평안도 관찰사가 평양부윤을 겸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평양부 관하의 인구는 약 2만 2천명이었는데, 이는 수도 서울인 한성과 개성에 뒤이어 전국적으로 세 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조선왕조 후기에 와서 중국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며 수공업 및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됨에 따라 평양이 서북지방의 상공업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무렵의 나라 안팎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은 60여 년간에 걸친 세도정치로 정치체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열강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다투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홍콩(香港)을 할양받았으며, 광동(廣東) 등을 개항시켰다. 한편 미국도 일본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1854년 통상조약(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는 늦었으나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선박은 이미 18세기부터 조선연해에 나타났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배를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초기에는 측량과 탐사를 목적으로 조선 연안에 접근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는 직접 통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해안지방에 불법으로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에 대한 공포와 의구심이 깊어졌고 내부적으로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와 같이 서양세력의 침투와 내정의 문란이라는 내우외환으로 조선사회가 큰 시련에 직면하였을 무렵인 1863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고종이 즉위하면서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쇄국정책을 취하여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외국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서양물품의 교역을 엄금하며, 외세를 안으로부터 맞아들이는 세력이라고 생각되는 천주교에 대하여 일대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1866년 9월 로즈(P. G. 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침략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침입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 정권의 굳은 항전 의지와 유학자들의 적극적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뒷받침된 국민여론, 그리고 한성근(韓聖根)·양헌수(梁憲洙) 부대의 분전으로 격퇴되었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1866)라 한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때 서북지방의 포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외세의 침략을 격퇴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같은 해 7월(음력)에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e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격분한 평양의 군민과 충돌하여 소각, 침몰하는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이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홍범도의 할아버지가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용맹하게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때 평양 사람들은 용감히 싸웠다. 평양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홍범도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홍범도가 태어나던 해인 1868년 미국 군함 쉐난도(Shenandoah)호가 셔먼호의 생존자 수색 차 대동강 하류 유역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여 주민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1868년 4월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조선에 불법 침입하여 천주교도의 안내로 충청도 덕산군에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는 야만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만행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집권층의 쇄국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고 일반 국민들에게 서양인은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확실케 하여 배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1592) 이후 조선과 교린관계를 유지해 오던 이웃 일본은 1854년 개항된 직후에 상당한 시행착오를 범했으나 미국 이외의 유럽 여러 나라와도 통상조약을 맺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서서히 근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1868년에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타도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정부가 성립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되어 봉건적 신분제가 폐지되는 등 일대 혁신이 단행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으나, 부국강병 정책을 실현한 뒤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조선을 정복하자는 의견으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침략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나라가 처한 내외적 상황은 그 나라에 사는 국민 개개인에게는 절대적인 관련을 갖고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홍범도가 나서 자라고 성인으로서 활동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의 한국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범도는 자기 자신의 한 개인적 삶을 뛰어 넘어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한 일본의 침략세력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자신의 생애를 민족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는 출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의 품에서 이웃 동네 여인들로부터 젖을 얻어 먹으며 자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지주의 집에서 머슴을 하고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아서 동냥젖일망정 풍족하게 얻어 먹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정성스런 양육과 이웃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범도(홍범도)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무 탈이 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사내답게 생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름을 ‘범도’라고 지었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모범 범(範)’자에 ‘그림 도’ 또는 ‘꾀할 도(圖)’자였다. ‘호랑이 같은 아이’ 또는 ‘장수답게 생긴 애’ 라는 뜻이 담겨 있었고 훌륭하게 자라서 타인의 모범이 되라는 간절한 소망도 들어 있었다. 이 이름은 물론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지은 것이었으나 그는 무식했기 때문에 혼자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제일 유식하다는 훈장 어른을 찾아 뵙고 좋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귀한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어머니를 일찍 잃어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 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므로 군색한 가운데에서도 행복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바로 집 앞에 있는 보통문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같은 동네의 어린 친구들과 같이 성 밖에 나가 푸른 대동강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운 한 때를 갖기도 했다.
홍범도가 만 세 살 때인 1871년에는 5년 전 평양에서 침몰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핑계로 조선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개국시키고자 미국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미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이때 범도(홍범도)가 사는 평양에도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지시로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서 온 평양 사람들이 서양 오랑캐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범도(홍범도)의 아버지는 사건의 내용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장과 같이 서양 오랑캐들의 야만적 침략에는 오직 힘닿는 대로 싸워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는 낮에는 집에서 혼자 놀기도 하고 주위의 동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성 밖의 넓은 들판을 쏘다니며 뛰어 놀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고된 일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일하며 엄마도 없이 자라는 불쌍한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한지 범도(홍범도)가 만 아홉 살 때인 1877년 홍윤식은 고역에 지친 나머지 병에 걸려 여러 달을 누워서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린 범도(홍범도)의 정성스런 간호도 보람 없이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도(홍범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머니도 없이 자란 그가 이제 아버지마저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아직 철모르는 어린이였지만 자신이 이제 홀로 되었으며, 양친도 없이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뼈저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험난한 앞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고아일망정 꿋꿋하게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어렸을 때에 가끔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며 자신을 몹시 귀여워해 주던 작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것이었다. 숙부는 아버지마저 여읜 범도(홍범도)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범도(홍범도)는 평양 근처의 숙부 댁에서 자라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1877년은 쇄국정책으로 굳게 문을 닫았던 조선이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으로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 지 일년 뒤였다.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일본은 그 틈을 이용하여 그들이 미국에서 당한 전례를 모방한 운양호(雲揚號) 사건(운요호 사건, 1875)을 일으키고, 이어서 강화도에 군함과 군인을 파견하여 위협적으로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개항반대론이 거세었으나 개항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있어서 불평등한 내용의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으로 정치·군사·경제·문화적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조선 침투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구미(유럽·미주) 열강과도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열강의 침투가 심화됨에 따라 조선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시련을 겪게 되었다.

2. 평양 친군서영의 병사생활


홍범도는 숙부 댁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살림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작은 아버지도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농부인 숙부를 도와서 농사일을 같이 하였다. 어린 범도(홍범도)는 힘에 부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고 성심성의껏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도와 드렸던 것이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잔일을 하며 몇 년을 보낸 범도(홍범도)는 체격도 제법 커지고 일도 꽤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란 범도(홍범도)는 숙부 댁에서 지내며 신세를 지기보다는 힘들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일해 주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숙부 댁에서 멀지 않은 부잣집의 꼴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에게 머슴살이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남의 집에서 머슴으로 생활해야 했던 홍범도는 동년배의 소년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온갖 차별과 냉대를 경험했고 또 같은 마을의 다른 일꾼이나 머슴들과도 어울리며 지냈으므로 자기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이에 비해서 매우 조숙한 소년이 되었다. 이제 범도(홍범도)는 자기 부모님들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고역을 자신이 몸소 체험하면서 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 했으며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데도 집은 그렇게 가난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당시 조선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지주·소작관계의 모순과 양반 관료사회의 부패 및 신분제의 한계가 갖는 의미는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는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항상 가난하고 주인네는 논밭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잘 사는 것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범도(홍범도)는 그러면서도 자기가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으며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막일을 하며 머슴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인집에 충실히 대했으며 맡은 일은 열심히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꼴머슴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되었고 점차 사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일하는 가운데 틈틈이 평양성 내외를 오가며 같은 연배의 상놈 친구들과 어울렸고 유명한 평양 박치기·돌팔매질·씨름하는 법 등을 배워 꽤 할 줄 알게 되었다.
홍범도가 열네 살 때인 1882년 서울에서는 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임오군란(1882)은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우대하고 구식군대는 차별한데 대한 반발로 구식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 별기군은 조선정부에서 추진하던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1881년 설치한 신식군대였는데 일본인 교관이 초빙되어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임오군란(1882)에는 개항 이후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쌀값이 폭등하는 등의 이유로 직접 피해를 입고 있던 서울의 일부 시민들도 가세하였다. 군인들은 군기고(무기고)와 포도청을 습격하고 고관들을 살상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또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고 있던 상당수 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궁궐에도 침입하여 민비(閔妃, 명성황후)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민비(명성황후)가 충주(장호원)로 피난하여 실패하였다. 임오군란(1882)의 결과 한때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청군(淸軍)이 출동해서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청으로 압송해 갔기 때문에 다시 민씨(명성황후) 일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민씨(명성황후) 척족들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은 이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임오군란(1882) 후 청의 원세개(袁世凱)는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에 주둔하였는데 조선군대를 청나라식으로 훈련시키게 하였고 군제도 청의 군제대로 개편케 하였다. 임오군란(1882) 직전인 1881년 말까지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5군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5군영이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에 성립한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수어청(守禦廳) 등 서울 중심의 다섯 군영을 말한다. 그러나 수백 년간 지속되었던 5군영체제는 1881년 4월에 별기군이 창설된 뒤 동년 12월 말경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이라는 양 군영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같은 양 군영체제는 임오군란(1882) 직후 잠시 5군영체제로 환원되었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청군이 조선에 출동하여 주둔하면서 신건친군(新建親軍)이라는 새로운 청식 군제로 바뀌게 된다. 즉 1883년부터 1884년 11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종래의 5군영은 신건친군 전·후·좌·우영과 친군 별영(別營)이라는 친군영제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때 성립한 친군 각 영은 병력 수나 소속군의 내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조직은 대체로 비슷했다.
또 각 군영은 병기도 청을 통해 수입한 영국제 소총과 청의 천진(天津) 기기국에서 만든 대포 등으로 무장하였다. 그런데 임오군란(1882) 직후에 이와 같이 서울의 군대가 청군의 지도를 받아 신식으로 개편되고 있을 때 지방의 각 군영도 청의 영향력 하에서 새롭게 편제되고 있었다. 특히 평안감영군은 청군이 중국을 왕래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다른 감영보다 더 빨랐고 북방의 방위와 관련하여 중앙정부의 관심도 컸다. 이리하여 평안감영에서는 1883년부터 감영군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친군후영 감독(후에 營使로 개칭됨)과 좌영의 영사(營使)를 역임하였던 민응식(閔應植)이 188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안감영의 군병은 서울의 친군영에 따라 전면적으로 개편되었고 청식으로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의 평안감영은 1885년 친군서영(親軍西營)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평안감사가 서영사(西營使)를 겸하였다. 민응식은 민비(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으로 피난하였을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당시 민씨(명성황후) 척족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크게 혜택을 받고 있던 보수적 인물이었다.
이 무렵 각 지방의 병영은 새로 군병을 모집하여 경군(京軍)의 예에 따라서 훈련하며 가끔 상경하여 서울의 각 영군과 어울려 조련하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이러한 친군영 군제는 1888년까지 유지되었다. 친군서영은 1895년 군제개편으로 다시 진위대(鎭衛隊)로 개편되어 비로소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 관헌측 자료나 국내 대부분의 서적에 홍범도가 평양의 진위대에서 병사로 복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은 잘못된 언급이다. 그는 친군서영에서 근무하였던 것이다.
홍범도가 만 15세가 되던 1883년 위와 같은 사정에 따라 평양의 감영에서는 병정을 모집하여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비록 나이 어리고 무식하지만 군대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되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머슴보다는 군인이 되어 스스로의 앞길을 열어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때에 뽑는 병정은 의무병이 아니고 지원병이므로 자기 같이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군인이 되면 아주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럭그럭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범도(홍범도)는 비록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된 일을 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녔기 때문에 몸이 아주 튼튼했으며 체구가 나이에 비해서 좀 컸다. 그래서 그는 병영에 가서 입대할 수 있는 장정의 자격과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 참으로 아쉬운 점은 군인이 되려면 최소한 만 17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다. 그는 그러한 제한조건을 알고 무척이나 실망하였다. 더욱이 또 그를 어렵게 한 점은 병사로 입대하려는 어중이떠중이 청년들이 너무 많았고 당시 유행하던 매관매직의 풍조로 뇌물을 바치고 군인이 되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홍범도 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서민들이 돈을 받고 복무하는 고용병이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범도(홍범도)는 군인이 되기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는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마침 평안감영에서는 신호병의 직책인 나팔수를 몇 명 뽑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팔수 지원자들은 얼마 안되어서 범도(홍범도)는 자신의 나이를 17세라고 두 살 올려서 지원한 결과 가까스로 입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는 부모님을 다 여읜 뒤에 열다섯 살까지 숙부 댁에서 지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슴일도 하며 어린 시절을 굉장히 고생하며 보냈으나 이제 겨우 군인이 됨으로써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홍범도는 당시 기영(箕營)으로 불리우기도 하던 평안감영의 우영 제1대에서 나팔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임오군란(1882) 이듬해인 1883년 즉 계미(癸未)년이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사격술을 배웠다. 그는 총을 쏘는 훈련에 열성적으로 임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사격에 꽤 익숙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가 입대한 뒤에 평안감영은 친군서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던 친군서영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임오군란(1882) 직후에 어수선하던 서울의 치안과 관청의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고 또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무위영과 장어영 소속의 각 병영과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병력의 일부가 선발되어 교대로 서울에 와서 몇 달씩 근무하였다. 범도(홍범도)도 이때 인물과 체격이 좋고 훈련을 잘 받는다고 하여 뽑혀 서울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서울은 평양보다 훨씬 넓었고 상당히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이나 장비가 많이 눈에 띄어 범도(홍범도)를 놀라게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친군서영에서 병졸로 약 4년간 복무하여 처음 입대할 당시보다 몇 계급 진급도 하여 직위가 높아졌고 또 병영생활에 차츰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는 군대생활에 꽤 흥취를 갖게 되었고 군인노릇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수는 넉넉지 않지만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병졸생활을 통하여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가 친군서영에 있던 시절은 한창 성장하는 시기였으므로 몸과 마음 모두 많이 자라고 성숙하였으며 이제 거의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의 졸병생활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의 군대는 규율이 없고 부패하여 양반 출신인 군교(장교: 초관이나 별군관, 초장 등)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고 병사들에 대한 급양이 형편없었을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병정들을 학대하고 차별하였던 것이다. 1860년대 이후에는 거의 매년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러한 농민봉기는 조선왕조 말기 민중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범도(홍범도)가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던 1883∼7년 사이에도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1884년 12월에 함경도 안변·덕원 등지에서 농민들이 수세(收稅) 문제로 일으킨 소요사건은 북부지방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군인들은 이러한 민란의 진압에 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민들의 세금을 징수하여 오는 일에도 동원되었으므로 병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군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와 같은 모순된 현실을 목격하고 군대생활에 점차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친군서영은 그전의 평안감영이 개편된 군영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부대의 내용이 크게 혁신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편제와 장비 등은 많이 바뀌었지만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훈련내용도 종전과 비슷했고 군교들의 병정들에 대한 차별과 군내의 부패상도 여전했다. 따라서 전투력의 향상을 달성하기 위한 당초의 개혁목적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아직 어렸던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 박봉이나마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갈수록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착취와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또 사병들에 대한 학대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되자 군대생활에서 어떤 보람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때에 범도(홍범도)는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군교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 사람을 구타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할 수 없었다. 병영에 돌아가면 중형으로 처벌받을 게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범도(홍범도)는 안정된 직업이자 호구지책이었던 병졸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3. 제지공장의 노동생활


범도(홍범도)는 병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행동은 미리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서 단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평양을 벗어나자 막상 갈 곳이 없었고 당장 먹고 자고 할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생활고는 더욱 심각해졌으며 당장의 일거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범도(홍범도)는 평양성을 빠져나왔으나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척 막막하였다. 평양에 살고 계시는 작은 아버지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으나 어려운 형편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이제 성인이 다 된 그가 몸을 의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얼마 동안을 주저앉아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같은 부대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하던 말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해도 수안군에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製紙所)가 있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마땅하게 의지할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설은 수안까지 가기가 주저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지소의 노동자로 일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수안은 황해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 1,120미터의 언진산이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고 비교적 산이 많은 벽지였다. 하지만 평양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 교통이 편리하였다. 또 이곳에는 금광이 있어 광산노동자들이 많았고 일거리를 얻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1888년경부터 황해도 수안군 천곡의 총령(蔥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로 가서 종이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생활은 거의 머슴살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총령은 수안에서 신계로 가는 요로에 있는 고개였다. 특히 이곳은 그 옆에 흐르고 있는 총령천이 유명하여 종이 산출지로 꽤 알려진 지역이었다. 총령천은 깊은 바위굴 속에서 흘러 내리는데 장마나 가뭄에도 수량에 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매일 조수 때를 따라 일정하게 늘었다 줄었다 한다. 바로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 때문에 이 총령천 옆에는 종이 만드는 제지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종이를 만드는 작업에는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지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정부에 공납을 바치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종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주로 서민들이 창문에 바르는 창호지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제지소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소 주인은 19세기 후반에 창도되어 한창 맹렬히 퍼져나가던 동학의 수안군 주요 간부였다.
홍범도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본래 이름을 숨기고 가짜 이름을 쓰며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거의 모든 공정을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극히 수공업적인 것으로서 대체로 다섯 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 기술자들을 도와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웃 대오면에서 나는 닥나무를 옮겨오는 일이라든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힘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 즉 닥나무를 잘게 부수는 일이나 제지원료를 물에 씻는 일 등을 주로 하였던 것이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고 일이 많은 고된 과정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온갖 잔일로 단련된 범도(홍범도)에게는 참고 견딜 만한 것이었으며 나무를 재료로 하여 새하얀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을 하였고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었다. 당시 숙련된 제지기술자는 하루에 약 500장 정도의 분량을 만들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 더 열심히 배우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원본누락)…
허황되서 믿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군대에 있을 적에 받은 교육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동학은 배척해야 할 이단적 사교라고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 요인은 범도(홍범도)가 어려서부터 거의 혼자서 자기문제를 해결해 왔고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이나 기타 미신 혹은 종교의 힘에 의존하여 해결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종교에 관해서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였으며 또 보이지 않는 신이나 절대자의 권능에 의지 한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동학이라는 종교는 미신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였기 때문에 그가 보기에는 도대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범도(홍범도)는 주인에게 동학에 들 수 없고 또 믿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주인은 여러 번 범도(홍범도)에게 동학을 믿고 그 조직에 참가할 것을 권하였고 점차 강제적으로 명령하다시피 하였다. 그렇지만 범도(홍범도)가 어떤 사람인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겸연쩍어 하며 조심스럽게 거절하였지만 누차 주인의 강요가 계속되자 아무리 강요하더라도 동학을 신봉할 수 없으며 그 관련조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제지소에 들어온 지 약 2년이 넘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동학에 들라고 협박하였으며 몇 달 후부터는 아예 동학에 들지 않으면 임금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매월 주던 노임마저 주지 않았다. 범도(홍범도)는 화도 나고 기가 막혔지만 이곳마저 벗어나면 갈 곳도 없는 처지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리하여 받지 못한 삯이 일곱 달이나 밀리게 되었다. 그동안 범도(홍범도)는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구차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지소 주인은 자신이 범도(홍범도)를 고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위세를 빌어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말했다.

네 고삯을 찾으려거든 동학에 참여하여라. 그러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소원대로 할 데 있으면 하여 봐라!

범도(홍범도)가 생각하기에 동학에 끌리는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인의 강압적 태도가 비위에 거슬리고 또 노임도 받지 못한 처지에 자기의 고집이 있는지라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어갈 생각은 없소.”
범도(홍범도)가 수안 총령의 제지공장에 들어와 일한 지 약 3년이 되었을까?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주인에게 밀린 삯을 달라고 여러 번 청하였다. 하지만 주인은 동학을 믿으면 밀린 노임을 모두 주겠다고 하면서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럴 때마다 범도(홍범도)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참았다.
이렇게 주인과 범도(홍범도)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날 주인과 범도(홍범도)는 마침내 동학에 관한 문제로 크게 다투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일곱 달이나 거의 무료나 다름없이 일해 주고 있는 범도(홍범도)에게 주인이 또 다시 동학에 들라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난 다음 저녁 무렵에 범도(홍범도)를 불러서 다시 동학에 가입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동안 범도(홍범도)는 머슴이나 다름없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며 참을 만큼 참았는데 주인은 이제 범도(홍범도)한테 동학에 들지 않으려거든 제지공장을 아예 떠나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떠날 결심을 하고 밀린 임금을 달라고 주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파렴치한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들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서 아예 떼먹으려고 하였다. 심지어 주인은 범도(홍범도)를 협박하며 폭력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그날 밤 주인과 말다툼 끝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에게 주먹을 휘둘러 꺼꾸러뜨리고 말았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삼 년 가량이나 꽤 애착을 갖고 열성적으로 종이 뜨는 기술을 배웠지만 주인의 고집에 시달리며 쓰라린 고용노동자 생활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반성해 보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행패가 워낙 심하여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차라리 그곳을 뛰쳐나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4. 금강산 수도생활


범도(홍범도)는 군대생활과 제지소의 고공(雇工: 품팔이) 생활 모두 상급자 및 주인과 싸우고 좋지 않게 결말을 보며 마감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이 혹시 비뚤어지거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고 깊이 반성해 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나 더 큰 잘못은 대개 상대방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도 남과 다투고 나면 속으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불공평한 일이나 억울한 사정을 당하면 그러한 사태를 수수방관하지 못하였고 도무지 가만 놓아둘 수 없었다. 이러한 성격은 그가 일면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자라온 성장과정을 눈여겨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평안도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으며 용감하고 동작이 민첩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평안도인의 기질을 맹호가 산림 가운데서 뛰쳐나오는 것 같다(猛虎出林)고 비유하기도 했던 것이다. 평양 사람들이 싸울 때 곧잘 하는 박치기는 유명했다. 물론 홍범도의 인품이나 성격을 태어난 지방의 특색이나 기질에만 한정하여 논하는 시각은 대단히 지엽적이며 위험한 관점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시적이며 포괄적인 넓은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자세가 요청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홍범도는 유년 시절부터 매우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간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인내심, 그리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적극적 자세가 몸에 배어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이와 같은 시련은 한편으로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한 강한 반발과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불의와 부정을 미워하며 항상 약자를 돕는 정의감을 드높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홍범도 청년기의 성격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불같이 급한 격정적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홍범도가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병영과 제지공장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후일 인생역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대경험은 그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한 체험은 노동의 소중함과 어려움, 그리고 가진 자들의 횡포를 직접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제지공장에서 나온 범도(홍범도)는 수안에서 가까운 신계를 거쳐 강원도 북부지방으로 향하였다. 제지소 주인을 해쳤기 때문에 당분간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는 산골에서 조용히 숨어서 지내고 싶었다. 그는 몇 달에 걸쳐 강원도 북부의 이천·평강·철원·김화·회양 등의 산골을 지나며 지주집에서 품을 팔아 약간의 돈을 벌어 노자를 삼기도 했고 어떤 마을을 지나다가는 웬 떠돌이가 마을에 들어오느냐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곳 마을들은 이천·철원의 일부 지방과 같이 평야지대인 곳을 제외하면 대개 깊은 산골이었으므로 쌀농사보다는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하고 군색하게 살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생활의 서러움을 몸소 겪으며 자신의 신세를 여러 번 한탄하였다. 왜 자기는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여러 곳을 유랑하던 끝에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동해안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태백산맥에 연결되는 고산준령을 뒤로 하고 망망한 동해를 앞으로 하여 산과 바다가 있고 또 마을 주위에는 농사짓기에 제법 부족하지 않은 평야도 있었다. 그래서 관동지방의 주민들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가운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며 때로는 산에서 임업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유명한 금강산 해금강 방면으로 향하여 고성군의 동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간성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통천군에 이르게 된다.
범도(홍범도)는 천하제일의 명산 금강산을 지나면서 생전 처음으로 자기의 조국에는 참으로 수려한 강산이 많으며 자랑할 만한 명산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방랑의 처지를 돌이켜 보고는 우울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정리를 지나 발길을 옮기다가 양진리라는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은 금강산의 한 줄기인 관음봉과 문필봉이 지척이어서 경치가 매우 좋았고 앞에 꽤 넓은 평야가 있어서 농사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금강산 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계사라는 절이 있어서 가끔씩 찾아오는 절의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얼마 동안 일을 하며 그날그날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결코 안정된 삶을 제공하지 못하였으며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여러모로 불투명한 하루하루였고 어떤 보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무렵 신계사에는 지담(止潭) 대사라는 고승이 있어서 불교 신도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남에게 구차스런 사정을 해가며 품팔이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중이 되어 속세를 떠나 심신을 수양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되면 먹고 자고 입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자신의 억울한 심정이 해소되며 자제력이 없는 급한 성격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신계사의 지담 대사를 찾아가 저간의 자기사정을 고백하고 절에 머물며 수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를 살펴보고 난 뒤에 우선 절의 잔일을 하며 수도를 하는 상좌(上佐)로서 수도하도록 허락하였다. 상좌란 일명 행자(行者)라고도 하는데 절의 온갖 잔심부름이나 궂은일을 하여야 하는 절의 일꾼이나 다름없는 수도과정의 승려를 말한다. 상좌는 절의 주지나 고승들의 시중부터 동네에 나가 시주를 받아오는 일이나 나무해오기·물기르기·밥하기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하나의 도피처와 마음의 안식처로 절을 택했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0년경부터 그 이듬해까지 약 1년 반 동안 범도(홍범도)는 신계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지담 스님의 상좌노릇을 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에게 그럴듯한 법명을 지어 주었다. 이제 신계사에서 그는 더 이상 ‘홍범도’가 아니었다. 신계사는 아름다운 외금강의 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신계천이 흐르고 멀리는 짙푸른 동해바다가 아스라이 보이는 명승지에 위치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양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절이었다. 신계사는 불교계의 31본산시대 때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末寺)였다.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519)년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옛날부터 이 절의 옆에 있는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이러한 살생으로 성역의 참된 뜻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조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고기를 다른 곳에서 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하천에는 고기가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절 이름에 귀신 신(神)자를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신계사 승려 생활은 범도(홍범도)에게는 아직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별천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며 절의 어려운 수도생활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절의 상좌노릇을 하면서 바쁜 가운데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지담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절에 들어올 때부터 심오한 불교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또 자신이 불도를 깊이 깨달아 고승이 되겠다는 각오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수도생활은 투철한 승려의 길은 아니었다. 나이 20이 넘어서 뒤늦게 시작한 불교 공부가 잘 될 리도 없었거니와 범도(홍범도) 자신도 불법의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 무렵 한글은 약간 알고 있는 그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한문투성이의 경전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으며 머리가 아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담 스님이나 다른 중들이 하는 설법을 많이 듣다 보니까 대충 불교가 어떤 종교라는 것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의 체류기간을 통하여 간단한 한글 문장이나 편지 따위를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종교나 사상·학문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졌다고나 할까?
지담 스님은 원래 수원출신으로 속성은 덕수(德水) 이씨였다. 덕수 이씨는 조선조에서 문무 양 부문에 걸쳐 저 유명한 이율곡[李珥(율곡 이이)]과 이충무공[李舜臣(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하여 명문 씨족으로 알려진 가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과 백전백승의 뛰어난 전술에 관하여 가끔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비록 산간에 있는 중이라고 해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에는 몸을 아끼지 말고 구국 항쟁의 대열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하였다. 이러한 지담 스님의 수도승답지 않은 현실적 국가관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가문전통과도 연계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서산대사(휴정: 休靜)와 그의 제자들인 사명당(유정: 惟政)·처영(處英) 등의 승군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금강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점사에는 임진왜란(1592) 때 승군장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명당의 유품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또한 사명당의 스승 서산대사의 부도(浮圖)도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점사 이외에도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표훈사·원통사·고승사·신계사 등의 각 절에는 임진왜란(1592) 때의 승군 조직에 관련된 이야기나 서산대사와 사명당에 관한 무수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서 그러한 애국 전통이 그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승려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이와 같이 신계사의 특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훈도를 받아 점차 정신적으로 성숙하였고 종래의 무계획적이며 방만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참으며 은인자중 할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처해 있을 때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많은 가련한 중생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가 아니었던가? 신계사에서 알게 된 김유신이나 이순신·사명당과 같은 그러한 인물들처럼… 범도(홍범도)에게는 속세에서 떨어진 산속에서 혼자만 해탈하겠다고 참선하며 면벽하고 앉아있는 답답한 중들보다는 실제로 도탄에 빠진 중생을 염두에 두고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지담 대사의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가끔 지난날의 행적을 되돌아 보면서 깊이 뉘우쳤다. 과거의 감정에 치우친 과격한 행동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몇 번이었던가 하고…
홍범도의 생애에서 이 무렵은 그의 앞날에 자못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마도 그는 금강산 신계사의 은둔과 수도를 통하여 이순신이나 서산대사·사명당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임진왜란(1592) 당시의 대일항전에 관하여 일상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반일감정이 누적되었고 의병 전통이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머리 속 깊이 새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의 상좌생활은 고달픈 것이었고 별로 깊이 있는 사상이나 학문에 접해보지 못했던 그였기에 불교철학을 잘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익에 급급하며 감정적인 폭력이나 휘두르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 냉철하며 합리적인 통찰력과 장기적 전망에 입각한 올바른 실천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일을 도모할 때에는 조직적인 방법을 취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도 하였을 것이다.

제2장 첫 의병봉기와 시련

1. 첫 의병봉기와 류인석 의병부대


범도(홍범도)는 절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부근의 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서 절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큰 절인 장안사나 유점사 등 다른 절로 자주 왕래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약 1년가량 되었을 때 자기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의 여승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신계사 근처에는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비구니의 속성은 단양(丹陽) 이씨였고, 북청 출신이었다. 원래 불교 교리 공부에 취미가 없던 데다가 조실부모한 탓으로 무척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범도(홍범도)는 비록 서로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허심탄회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나이 20이 넘도록 여자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별로 없는 범도(홍범도)는 그 여승과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와 그 여승은 자기들이 중의 신분이라는 엄연한 한계도 잊고 서로 알고 정답게 지냈으며 처녀·총각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신계사에 몸담고 있었지만 끝내는 자기가 불교계에 빠져들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이 여승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선경이라고 일컬어지던 금강산의 뛰어난 경관 속에서 청춘남녀들이 향유하는 사랑을 속삭였으며 이성 간에만 있을 수 있는 정을 주고받고 하면서 마침내는 승려로서의 한계를 넘는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거의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이제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절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였다. 범도(홍범도)와 사랑을 나누던 비구니의 배가 불러와서 더 이상 절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었다.
1892년 여름 무렵 범도(홍범도)는 이제 중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속인의 신분으로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파계하고 평범한 아녀자의 처지로 돌아온 단양 이씨를 데리고 신계사를 떠났다. 두 사람은 금강산을 벗어나 원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그 처녀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원산 근처에서 불의의 변을 당한 뒤 서로의 행방을 모른 채 헤어져 버리고 말았다. 홍범도는 이씨 처녀의 행방을 탐문하였으나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였다. 그녀와 갑자기 생이별을 하게 된 현실이 너무 원통했다. 더구나 그녀가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범도(홍범도)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이제 또 다시 혼자되었으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씨가 우연하게 그와 헤어진 뒤 북청 친정에 가서 그의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된 것을 범도(홍범도)는 알지 못했다.
범도(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러다가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의 먹패장골이라는 곳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은 금강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깊은 산골이었는데 신계사에 있을 때 가끔 이야기를 듣던 고을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이곳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거의 세상과는 발길을 끊고 약 3년간 머무르면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기도 하고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를 발휘하여 사냥을 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용히 참선하며 수양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절에 있을 때 깎았던 머리는 다시 자라서 상투를 틀어 올릴 수 있었으며 수염도 제법 자라서 완연한 성인으로서 어엿한 청년의 풍채를 보이게 되었다.
홍범도가 먹패장골에 있던 동안 조선의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갑오년인 1894년에 삼남지방은 물론 황해·강원·평안도의 일부 지방까지도 동학군이 주동이 되고 봉건적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에 반발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거 가담한 농민들의 봉기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동학농민전쟁(1894) 또는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이 국내에 진주하여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청일전쟁(1894~1895)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의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청과 시모노세키(下關)조약(1895)을 맺어 청으로부터 요동(遼東) 반도와 대만(臺灣)을 할양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일본은 노골적인 침략의 손길을 조선에 뻗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 친일적 인사들을 도와 정부의 내각을 구성케 했고 그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케 했다. 이 같은 일련의 개혁을 우리는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진보적 개화론자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자주적으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을 위하여 무리하게 강요한 요소도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은 일본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그 개혁조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 민중의 반일감정을 폭발적으로 격화시킨 사건이 바로 1895년 8월 20일(음력; 양력으로는 10월 8일)에 일제의 하수인들에 의해 야만적으로 자행된 민비(명성황후)시해 사건이었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간접적 배경이 된 것은 소위 ‘삼국간섭’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고 러시아의 힘이 일본을 압도하자 그 기회를 틈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물리치려던 조선정부의 배일친로(排日親露) 정책이었다. 즉 고종은 김홍집·박영효 등의 친일내각을 물리치고 이범진(李範晋)·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 등으로 친러시아 내각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호시탐탐 조선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크게 당황하여 자기세력의 만회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이란 1895년 5월경 러시아·독일·프랑스 등이 연합하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일본을 위협한 결과 일본이 이에 굴복해서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준 일련의 국제적 사건을 말한다.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서 세력만회에 부심하던 일본은 배일친로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지목되어온 민비(추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를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그리하여 일본인 낭인(깡패)과 군대를 동원하여 민비(명성황후)를 무도하게도 시해(을미사변, 1895)하였고 조정의 친로파를 축출한 후 김홍집·유길준 등으로 하여금 다시 내각을 조직케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하였고 열강도 일본을 비난하였다.
을미사변(1895) 후에 수립된 김홍집 내각은 잠시 중단되었던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강행 하였다. 양력의 사용(건양: 建陽)을 비롯해서 지방 행정구역을 8도에서 23부(府)로 개편하며 군제의 개편 등을 단행하고 급기야는 단발령을 내려 강제로 국민들의 머리를 잘라서 반일감정에 불을 붙였다. 특히 단발령의 강제 실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겨오던 유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온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야기하였고 을미사변(1895) 때문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국민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리하여 을미사변(1895)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봉기는 이제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의 강행 이후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범도(홍범도)가 있는 먹패장골은 깊은 산중이었으므로 서울 등 전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뒤늦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후 한참 뒤에야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든가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봉기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였다. ‘왜놈’이 조선 땅을 짓밟고 있는 현실이 너무 원통했던 것이다. 자기가 신계사에 있을 때도 보았듯이 임진왜란(1592) 때 왜병에 의해 불타버린 절이 한 두 군데였던가? 그래서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지 기회가 생기면 일본에 대하여 꼭 원수를 갚겠다고 벼르면서 그 골짜기를 나와 대처로 향하였다. 이때가 대략 을미(1895)년 8월 23일경(음력)이었는데 범도(홍범도)의 나이는 만 27세로 훤칠한 헌헌장부로서 혈기왕성할 때였다. 홍범도는 후일 “반일·반봉건(反封建) 의식에 눈을 뜬 것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 때였다.”고 말하였다.
먹패장골에서 나온 지 약 23일 뒤인 음력 9월 18일쯤(양력 11월 3일경) 범도(홍범도)는 단발령을 지나오다가 고개 정상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이의 이름은 김수협이었고 황해도 서흥 출신이었으며 연배가 범도(홍범도)와 비슷했다. 단발령은 높이 1,241미터의 험준한 고개로서 금강산 서쪽 천마산(天摩山) 중턱에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을 지나다가 빼어난 금강산의 여러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출가를 다짐하는 뜻에서 삭발하였다 하여 단발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단발령 근처 남서쪽에는 오량동(五兩洞), 북동쪽에는 피목정(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오량동은 행인들이 단발령을 지날 때 산적을 막기 위해 안내인에게 다섯 냥의 돈을 주어 호송을 부탁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홍범도는 김수협과 함께 고개 위에서 쉬다가 통성명을 하며 서로 친하게 되었다. 김수협은 당시의 국내사정을 말하며 비분강개하였다. 범도(홍범도)도 그와 비슷한 시국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숨김없는 심정을 토로하며 의기투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미약하나마 힘을 합쳐 의병투쟁을 벌이기로 약속하고 우선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무것도 없으니 먼저 친일인사와 일본군이 있는 큰 도회지로 가서 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과 무기를 빼앗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오량동을 지나 금성읍에 이르렀는데 그곳 장거리에 때마침 일본군의 한 부대 약 200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두 의병은 일본군 병사가 어깨에 메고 있는 최신식 소총을 보니 무척 욕심이 났다. 당시 일본군은 ‘무라다(村田)’식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이 총은 공주 우금고개 전투를 비롯한 동학농민군과의 각종 전투와 청일전쟁(1894~1895)에서 큰 위력을 떨쳤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최신식 무기로 농민군을 도처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일본군의 무기를 빼앗고 싶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자신들과 같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갖춘 지점을 물색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다닌 결과 그들은 경기·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으로서 천하의 험로로 알려진 철령(鐵嶺)을 찾아냈다. 철령은 높이 685미터의 고개로서 회양의 북쪽에 위치하여 강원도와 함경도를 구분하는 관문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고개의 북쪽인 함경도 지방을 관북지방, 서쪽인 평안도를 관서지방, 동쪽인 강원도 지역을 관동지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서쪽의 풍류산(風流山), 동편의 장수봉이 천하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고 당시에도 수비하기에 매우 알맞은 석성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와 김수협 두 사람은 그들이 능히 수십 명을 대적할 수 있는 고개의 고지 한곳을 선정하여 견고한 진지를 만들고 일병이 지나가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일본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수백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공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는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장총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떨어지는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적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척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이튿날 아침에는 약 10여 명의 일병이 원산방면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별로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철령을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야말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날랜 화승 놓는 솜씨로 화승총을 발사하여 순식간에 그들을 거의 궤멸시키고 말았다. 일본군은 두 사람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으나 안전하게 엄폐된 고지의 요새에서 사격하는 정확한 사격솜씨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홍범도가 전개한 최초의 의병전투였다. 아직까지 남한의 학계에서는 1907년 11월의 후치령(厚峙嶺) 전투를 홍범도가 처음으로 전개한 의병전투라고 보고 있는데 앞으로 면밀한 검증을 거친 뒤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철령 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병을 몰살시킨 후에 그들이 갖고 있던 소총과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피신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일병의 추격을 받아 견디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포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까스로 거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합계 14인의 소규모 의병부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바야흐로 범도(홍범도) 나이 만 28세인 1896년 여름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전국각지에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 이후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의병봉기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남한산성의 김하락(金河洛)부대, 강릉에서 봉기한 민용호(閔龍鎬)부대, 춘천에서 기병한 이소응(李昭應)부대, 그리고 단양·충주·제천 등지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강원도로 이동하여 싸움을 계속하던 류인석(柳麟錫) 부대,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부대,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부대, 광주의 기우만(奇宇萬) 부대 등은 대표적 의병부대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함흥 지방에서는 민용호의 관동 창의군과 밀접히 연관되어 활동하던 최문환(崔文煥) 의병부대가 함흥부의 관리들을 처단하는 등의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가 학포에서 모집한 의병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거나 떠돌이 또는 산간에서 사냥을 하던 포수들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군대 경험과 산중에서의 사냥 경험을 되살려 얼마동안 이들에게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요원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병부대의 진용을 어느 정도 구비한 뒤에 이들은 안변군에 있는 석왕사(釋王寺)로 옮겨와서 봉기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해몽과 관련된 전설이 유명한 절이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는 바로 앞에 원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어서 일본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또 원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원산거류 일본인과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부근에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추가령(楸哥嶺)과 철령이 나오는 것이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작은 부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화승총으로 무장되었고 철령에서 빼앗은 소수의 신식 소총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석왕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충주와 제천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끌던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한 류인석 부대가 가까운 안변의 영풍으로 옮겨와서 자기들과 같이 싸울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홍범도와 김수협은 의논하여 류인석 의진에 합류하기로 했다. 소수의 부대로 활동하기보다는 류인석과 같은 명망 있는 지도자가 인솔하는 대부대와 함께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홍범도 등이 류인석 의진에 가담한 시기와 장소 등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관련 자료를 원용하여 추정해 볼 수는 있다. 홍범도의 일지에 “류인석 진과 합하여 세 번 전쟁에 크게 패하고 그 진이 일패 도주하여 다 없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 그리고 류인석 의진에 참가하였던 원용정(元容正) 등이 남긴『의암 류선생 서행대략(毅菴柳先生西行大略)』에 “7월 2일(음력)에 안변의 영풍으로 진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그 시기와 장소를 추측할 수 있다. 즉 이로 보아 홍범도 등이 류인석 의진에 합류한 곳은 안변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시기도 양력 8월 12∼3일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류인석은 헌종 8(1842)년 춘천 가정리(柯亭里)에서 출생했다. 이후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에게 배워 화서학파의 맥을 계승하였다. 그의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 시에도 상소를 올려 내수자강론(內修自强論)과 개항 반대론을 극력 주장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 앞장섰다.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한 개화는 국가와 민족을 파멸시킬 뿐이라는 강경한 척사론과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논리를 펴며 반개화(反開化) 및 반일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을미사변(1895) 후에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당시에 류인석은 최익현 등과 함께 유림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논리를 전개하며 의병봉기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1896년 초에는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호좌(湖左) 의병진영의 창의대장(倡義隊長)으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그 뒤 활동이 순조롭지 못하자 소위 ‘북천지계(北遷之計)’의 방략에 의해 북상하게 되는 것이다.
북천지계란 호서·관동지방에서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또 관군의 군세가 강하여 중부지방에서 싸우기가 불리하니 인민의 기질이 강건하고 용맹하며 무예에 능한 사람이 많은 서북지방으로 옮겨가서 의병운동을 계속하자는 임기응변적 전술을 말한다. 류인석의 이 같은 논리는 1907년 고종의 퇴위와 정미(丁未) 7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 이후에 나라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국외 기지건설론과 지구전의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즉 류인석은 전국의 의병부대는 전투방법을 지구전으로 하되 무산·삼수·갑산 등 백두산 부근지역을 무대로 삼고 중국과 러시아에 기지를 두어 정예군을 양성, 운동을 펴나가야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함부로 국내에 진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의 이러한 계책은 후일 홍범도의 항일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1896년 6월 하순경부터 강원도 지역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정선을 거쳐 대화(大和)에 이르른 동년 7월 11일(음력 6월 1일)에 포고문과 통문을 발송하여 서북지방으로의 행선지를 재확인했다.
홍범도와 김수협 등 의병들은 류인석 부대가 안변·양덕·영흥·맹산 등 평안도와 함경도 접경 지방을 경과하며 투쟁할 무렵 여기에 참가하여 이들과 같이 줄기찬 항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 등은 류인석 부대와 함께 그동안 세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이 와중에 이들은 크게 패하여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던 김수협이 전사했고 다른 의병들도 하나 둘씩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결국은 범도(홍범도) 혼자만 남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소수이기는 했으나 자신이 어렵게 조직했던 의병조직이 무너지고 홀로 남게 되자 더 이상 의병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수적 이념과 반일, 반개화의 의지는 철석같이 강했지만 실질적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서는 문제가 있던 류인석 의진과 결별하고 거기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후일 류인석 진영이 철원 보개산에 있을 때 거기에 참가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원용정 등의 기록에는 류인석 의병진이 철원 보개산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홍범도 등이 류인석 측에 합류한 뒤에 세 번 싸워서 패했다는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류인석 의병부대는 평안도 북단인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북지방에서 이 부대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과 봉기 이래 류인석을 추종하여 그곳까지 종군했던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강을 건너지 않고 국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몇 년 뒤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다시 의병투쟁을 위해 봉기하게 된다.
홍범도와 류인석은 서로의 출신성분과 지위가 달랐고 지향하는바 이념은 비록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이 투쟁하였다. 두 사람은 이때 헤어지지만 1908년 7월경 류인석이 추종인사와 더불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고 홍범도 역시 의병활동이 여의치 않자 1909년 1월경 연해주 크라스키노(우리 동포들은 연추라고 부름)를 잠시 방문함으로써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의 호(號)는 여천(汝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류인석 의병부대에 참가했을 때 류인석이 자신의 자 여성(汝聖)과 비슷한 여천(홍범도)이라고 지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2. 단독 의병활동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같이 싸우다가 패전하고 피신한 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며 적당한 기회가 오면 의병활동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다수의 대중들을 설득하여 의병봉기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1896년 후반기에 황해도 곡산군 하도면(당시에는 영풍으로 불리웠음) 널귀 금광으로 가서 자기 신분을 숨기고 광산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박달재를 넘으면 함경도 문천과 원산이 바로 코앞이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당시 조선의 주요 광산은 대부분 미국·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열강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었다. 미국은 그해 평안도의 운산(雲山) 금광을, 러시아는 함경도의 경원과 경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을, 또 영국은 1900년에 평안도의 은산 금광을, 독일은 1896년에 강원도 금성의 당현(堂峴) 금광 채굴권을, 일본은 1900년 황해도 송화와 장연의 금광 및 은율·재령의 철광 채굴권을 조선정부로부터 획득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은 오래 전인 1882년부터 벌써 함경도 단천의 사금장 채굴권을 빼앗았으니 이러한 사례만 보더라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얼마나 수탈에 열을 올렸던가 그리고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이때 일하게 된 금광은 워낙 산골에 있어 아직 일본의 침탈을 받지는 않았지만 가끔 일본인들이 찾아와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광산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으며 작업도구도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업환경도 매우 위험해서 일하면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의 임금 또한 매우 낮아서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이 가끔 휴식을 취할 때면 의병에 관해 이야기 하였으며 은연중에 반일 사상을 고취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홍범도가 이 금광에서 몇 달간 일했을 때 그의 신분은 결국 노출되고 말았다. 같이 일하던 광부가 그를 밀고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에 붙잡힐 뻔 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도망하였다. 기존의 논문이나 저서에 홍범도가 단천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의 일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황해도 곡산의 한 금광에서 일했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단천에는 사금장(沙金場)이 있을 뿐이고 광산에서 산출되는 금은 없다는 점을 보아도 확실하다.
범도(홍범도)는 광산에서 도주하여 평안남도(1896년 8월 지방관제의 개혁으로 1년 전의 23부 체제가 다시 과거의 8도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경기·강원·황해도를 제외한 각 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뉨) 양덕 방면으로 가는 도중 지경령이라는 고개에서 일본군 병사 세 명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지경령은 높이 약 655미터의 꽤 험한 고개였고 옆에는 해발 1,486미터의 우람한 하림산이 곡산과 양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병들은 방심하고 천천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일본 병정 셋을 몽땅 화승총으로 사살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세 자루와 약 300발의 탄환, 그리고 쌀 등을 노획했다. 그 중 총 두 자루는 후일을 대비하여 부근의 알기 쉬운 지점에 묻어 놓았다. 그 뒤 범도(홍범도)는 총과 양식 등을 배낭에 휴대하고 바로 옆에 있는 지경산 꼭대기에 올라가 밤을 지샜다.
홍범도는 이튿날 지경산을 내려와 양덕을 거쳐서 며칠 후에는 함경남도 덕원의 무달사라는 절에 도착했다. 그는 무달사 근처에서 상당기간을 머물며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덕원읍의 사정을 정탐하였다.
당시 덕원읍에서는 좌수로 있는 전성준이라는 자가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홍범도는 전성준을 응징하여 민족반역자는 의병의 단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온 덕원고을에 알리기로 했다. 전성준은 덕원 근처인 원산을 내왕하며 일본 침략세력의 주구가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원산은 조선 초기에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산하의 원산진(元山津)이라는 조그만 어항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래로 함경도 일대는 물론이고 강원·황해·평안도와 한양 등 각지에서 여러 물산이 집결되고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일대 도회지가 된 곳이었다. 그런데 1880년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한 뒤부터는 일본의 조선침략 교두보로서 활기를 띠며 번성하였다. 이리하여 그 곳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조계지(租界地)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일본상인들도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강력한 보호를 받으며 조선의 각지를 순회했고 기만적 상업행위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자주 말썽을 일으키곤 하였다.
일본상인들이 개항 후 1880년대 전반기까지 우리나라에 가져온 상품은 약 88%가 영국산 면제품이었다. 개항 직후만 하더라도 일본제 상품은 보잘것 없는 수공업 제…(원본누락)…
정부에서도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사례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머슴으로, 군인으로, 절의 중으로, 그리고 사냥꾼과 금광의 채전꾼으로 일하며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범도(홍범도)는 농민들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성준은 이 무렵 원산에 있는 일본의 곡물수집상과 관리들의 손발이 되어 우리 농민의 피땀 어린 농산물을 수집해서 일본으로 실어가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동안 거액의 돈을 벌어서 그 위세로 덕원의 좌수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분개하였다.
홍범도는 달이 없는 칠흑 같은 밤에 대담무쌍하게도 혼자서 전성준의 집에 쳐들어갔다. 그는 전성준을 위협하여 그 사이에 모아놓은 돈을 다 꺼내라고 명령하였다. 전성준은 범도(홍범도)가 일본제 소총을 들이대자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숨겨놓은 돈을 끄집어냈다. 전성준은 애지중지하며 모아놓은 돈을 강탈당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웬 시커먼 녀석이 갑자기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니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서 총소리를 내면 자기가 위험할 것 같아서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납치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전성준은 될 수 있으면 집안에서 버티려고 했지만 소리칠 수도 없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데리고 무달사 어귀까지 왔다.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성준에게 알렸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이미 을미년부터 의병 활동을 계속해 왔다는 것과 일제의 앞잡이로서 힘없고 가난한 조선 농민들의 피땀을 착취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단호하게 역설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빼앗은 돈은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쓸 것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주저하였다. 연방 굽신대며 생명을 보전코자 애쓰는 전성준을 보려니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처치함으로써 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친일 민족반역자는 살아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의병의 항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민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독한 마음을 품고 전성준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그는 전성준을 사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부터 덕원의 좌수 전성준이 괴한에게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온 덕원에 쫙 퍼졌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에게 뺏은 돈을 계산해 보고 조금 놀랐다. 일본돈 8,480원이라는 거액이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이곳저곳 장마당으로 다니면서 장기간의 산중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과 양식·신발·의복 등을 구입해서 평안남도 동부의 산간지방인 양덕·성천·영원 등 깊은 산골의 숲속과 바위틈 여러 곳에 숨겨 놓았다. 또 이전에 곡산의 지경령 근처에 숨겨놓은 무기도 찾아서 옮겨다 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곳을 주 무대로 거의 1년간을 혼자 떠돌아 다니면서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때가 1897년경이었다. 범도(홍범도)의 나이 만 30이 되지 않았을 때인…
이 무렵 국내 사정은 어떠하였던가? 단발령 이후 치열하게 벌어졌던 의병들의 항거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몰락한 다음 고종이 의병해산 조칙을 공포하고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 등을 파견해서 의병을 선유케한 결과 점차 의병들의 저항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류인석 등은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가 평안도를 거쳐 서간도 지방으로 건너갔음은 이미 앞에서 고찰하였다. 소위 을미의병(乙未義兵, 1895)이라고 하는 1895∼6년의 의병봉기는 이렇게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을미의병(1895)의 이러한 근왕적(勤王的)·보수적 성격은 이 무렵 의병투쟁의 한계로 지적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홍범도가 이 사이에 평안도 동북부에서 의병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소규모로 행동해야 했던 배경에는 저간의 국내 상황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생 주도의 의병봉기는 이와 같이 1896년 10월경이 되면 거의 소멸되지만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5)과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던 일부 빈농민과 영세 수공업자·도시빈민 등은 그 후에도 화적집단이나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원본누락)…등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 10월에 임금은 여러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였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외세의존적인 정부를 비판하고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였고 입헌의회의 설치를 주장하여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깊은 산골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국내 정치상황의 변동을 잘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덕원의 전성준에게서 빼앗은 돈을 군자금 삼아서 몇 년 간을 평안도 동북지역으로 떠돌아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그는 약간의 일본군을 살상하였고 친일적인 관리들과 매판적 양반·부호들을 응징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탄환과 식량·의복과 신발 등이 다 떨어지고 몸과 마음이 지쳐서 더 이상 의병항쟁을 계속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이제 의병활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동안 그는 자기의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써왔으나 이제 굳이 이름을 속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후 진짜 이름인 홍범도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30세까지 홍범도의 행적


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1. 산포수 생활


홍범도는 잠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발걸음을 함경남도 북청 방면으로 돌렸다. 그리로 가면 예전에 신계사에서 만났다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단양 이씨를 혹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 처녀의 고향이 북청이었다는 희미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또 함경도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에는 직업포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자기도 일정기간 수련을 거치면 훌륭한 산포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그곳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냥을 하면 그럭저럭 생계유지는 될 것 같았다.
범도(홍범도)는 1897년 북청에 정착해서 부잣집의 농토를 소작하여 농사를 지으며 틈이 나는 한가한 초겨울에는 사냥에 나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하는 등 얼마간 홀로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30이었으니 당시의 혼인 풍습에 비추어 보면 거의 홀아비에 가까운 노총각이었다. 세월은 무상하여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범도(홍범도)는 북청에서 사냥과 농사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수소문하며 자기의 옛사랑을 찾아보았다.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몇 달이 흐른 뒤에 가까스로 범도(홍범도)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녀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단양 이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양순(홍양순)이라고 이름한 아들을 데리고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외롭게 살고 있던…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가 헤어졌던 1892년경에 외갓집이라고 할 수 있는 북청의 자기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이때 양순(홍양순)이는 겨우 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일 그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십대의 어린 소년으로 의병에 참가하여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 양순(홍양순)이는 거의 6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범도(홍범도)대로 이씨는 이씨대로 또 양순(홍양순)이는 양순(홍양순)이대로 얼마나 애타는 세월이었던가? 이제 범도(홍범도)는 나이 서른이 되서야 정식으로 장가들게 되었다. 뒤늦은 만남이었기에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 소중했고 그러기에 세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홍범도는 이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이씨가 살고 있던 처가에서 살게 되었다. 처가는 북청군 안산사(安山社: 1914년 풍산군 안산면으로 개칭됨) 노은리(老隱里) 인필골에 있었다. 그곳은 북청에서 갑산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厚峙嶺) 고개 바로 아래였다. 노은리 옆에는 높이 1,527미터의 송동산이 있었고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주로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총을 들고 사냥을 나섰다. 범도(홍범도)가 사는 북청 등 관북지방은 함흥과 영흥 등의 일부 평야지대와 해안 연변의 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높고 척박한 산악지대로 되어 있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고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은 소출이 변변치 않은 반면 야생동물의 사냥은 때때로 상당한 수입을 보장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인적이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울창한 산림에는 호랑이·곰·멧돼지·표범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민가에 내려와 해를 끼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사람들은 이를 ‘호환(虎患)’이라 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맹수들의 습격을 물리치기 위한 덫을 설치하거나 직업 포수들을 고용하기도 했고 주민 자신이 무기를 갖추어서 스스로 수렵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사는 웬만한 청·장년들은 대부분이 농민이면서 동시에 사냥꾼이기도 했다. 사냥꾼들은 산사람과 같은 생활을 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호탕한 기질과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생활을 했는데, 그런 생활이 범도(홍범도)에게는 무척 어울렸다.
함경도의 포수들은 대부분 늦가을과 겨울에 사냥을 하고 봄·여름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한겨울에는 한가하게 쉬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1년 중 약 5개월은 사냥을 하고 7개월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홍범도는 사냥철이 되면 북청 이외에도 이웃 고을인 삼수·갑산·장진·홍원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곰·호랑이·사슴·여우·사향노루·멧돼지·검은 담비 등을 사냥 하였다. 호랑이는 가죽과 뼈가, 곰은 웅담이라 불리는 쓸개가, 사슴은 흔히 녹용이라고 하는 뿔이 값이 많이 나갔다. 여우도 가죽이 쓸모 있었으며 사향노루의 사향은 비싼 약재로 유명했다. 담비는 이곳의 특산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가죽이 중국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멧돼지는 사냥꾼들에게 별로 인기는 없었지만 밭의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제거해 달라는 요청이 자주 있었다.
대개 관북지방의 포수들은 혼자서 수렵을 하지 않고 몇 명의 포수들이 협동하여 공동 작업으로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곰·호랑이 등 맹수가 이 지역에 많은데다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구식 화승총으로 그러한 맹수를 잡으려면 철저하게 잘 짜여진 공동의 협력이 없으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또 가끔 식인 호랑이가 출현하면 그 호랑이를 잡을 임무가 부여되는데 그 때에는 평상시보다 많은 사냥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홍범도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 북청군 안산사에는 포연대(捕捐隊)라는 직업 포수들의 동업조합이 결성되어 있어서 부근 지방까지 그 명성이 높았다. 포연대는 ‘안산사 포계(砲契)’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사냥꾼들이 대거 참여하여 계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농업과 사냥 일을 겸하다가 탁월한 사격술과 우수한 사냥솜씨를 인정받아 이 직업 산포수대에 가입하게 되었다.
포연대는 함경남도 당국의 승인을 받은 합법 조직이었다. 포연대와 같은 사냥꾼들의 조합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들 스스로가 조직한 측면도 있으나 이러한 조합의 결성에는 또한 유사시 포수들을 전투병으로 동원하기 위한 봉건정부의 의도가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헌들은 이 조직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유사시에는 포수들을 징발하였던 것이다. 사냥꾼들의 계 형식 협동조합 내지 이익단체의 성격을 띠는 이와 같은 조직은 사냥꾼들이 많은 평안도 강계, 함경도 삼수·갑산 등에 많이 결성되어 있었다. 병인양요(1886) 때 강계포수들이 대거 참여한 양헌수(梁憲洙)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사실은 포수들이 국방에 동원된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홍범도는 포연대에 가입한 지 얼마 후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어 이 조직의 대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포연대장은 지방의 관리들과 교섭하여 세금으로 내는 포획물의 양을 협상하고 이를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일정하고 정확한 포획의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수렵의 특성 때문에 지방 관리와 포수들은 사냥의 성과물에 관한 협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이 지방의 포수들은 대체로 빈궁했고 그들이 사냥 때 쓰는 수렵 도구는 거의가 낡은 화승총이었으며 기타 탄약이나 장비도 별로 좋지 않았다. 포수들의 사냥 성과물은 대개 일정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허탕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군의 관청에서는 포수들에게 포획물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애써 사냥한 포획물을 송두리째 세금으로서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즉 지방관리들이 호랑이 가죽이나 웅담, 사향이나 녹용 등을 헐값으로 빼앗아 가는 사례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포연대장으로서 동료들의 신임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사냥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던가? 사냥감을 쫓아서 수십 리 산과 들을 헤매고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사투를 벌이며 운이 좋아야 겨우 목표로 삼은 짐승을 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굳세고 강건한 북청 사냥꾼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세금액을 낮추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포수들 사이에서는 더 큰 신임을 얻었으나 당국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수하려 했으며 더 높은 직책을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범도(홍범도)는 이를 모두 단호하게 거부하고 완강히 투쟁하여 결국은 사냥꾼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결혼 이후 약 8∼9년간 북청의 안산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후에는 안산사 포계의 포연대장을 겸하였다. 그가 포연대장의 직책을 맡은 뒤로는 농사보다 사냥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으며 동료 포수들을 위하여 한층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범도(홍범도)의 일생에서 이 시기가 제일 행복하고 단란한 때였을 것이다. 그는 이씨와 재결합 직후인 1897∼8년경에 두 번째 아들을 얻었다. 범도(홍범도)는 둘째의 이름을 용환[龍煥(홍용환)]이라고 지었다. 첫째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가 없을 때 그의 부인이 자기 좋을 대로 지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개명하는 것도 어색해서 그냥 그대로 양순(홍양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둘째 아들은 자기가 손수 짓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에 호랑이를 뜻하는 음인 ‘범’자가 들어 있으니 아들은 범에 손색이 없는 용 같은 씩씩한 녀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 용자’에 ‘빛날 환자’를 집어넣었다.
‘용환(홍용환)’-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범도(홍범도)는 흐뭇하였다.
두 아들은 자기를 닮아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무렵 서른이 넘은 범도(홍범도)는 체격이 컸고 두껍고 새까만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의 얼굴은 좀 넓어 보였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약간 엄격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짙고 두터운 눈썹 아래 깊이 자리 잡은 눈은 차분하고 선량해 보였다. 이때는 단발령이 내린 뒤라 신식 하이칼라식으로 머리를 자른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특히 북청과 같은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들을 거의 친일파라고 단정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범도(홍범도)도 이때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여러 가지 애로에 부딪혀 1908년 말부터 1910년 초반에 걸쳐 만주와 연해주를 왕래하게 되는데, 이 무렵 상투를 자르고 턱수염을 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덟 팔(八)자 모양의 콧수염은 평생 자르지 않고 기르고 있었다. 40대 중반인 1912년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홍범도는 얼굴이 약간 길쭉하고 콧대가 우뚝하며 눈에 정기가 있고 입술이 좀 두툼해서 남자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범도와 같이 살았고 뒤에 그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비교적 냉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는 동정적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보통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끌었고 그 자신도 기꺼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범도(홍범도)는 우정을 존중할 줄 알았고 신의와 포용력이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의 성품은 인자했고 태도는 겸손했으나 일처리에는 과감하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사람됨은 동료와 다른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1)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


되 나왔다 되 들어가는데
왜 들어왔다 왜 나가지 않노.
되 들어가 안 나오는데
왜 안나가고 왜 죽는거뇨.

청일전쟁(1894~1895)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는 이런 동요가 퍼져서 많이 불리우고 있었다. 이는 청(되)을 은근히 동정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비꼬는 노래였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심화된 일본의 침투는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한 뒤에는 이제 노골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당시에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든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체결하고 이어 1905년 을사5조약(을사늑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1907년에는 소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한일신협약)’을 통하여 일본인을 각부의 차관으로 임명토록 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은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해산 뒤 전국 각지에서는 한일의정서 이후로 계속되고 있던 의병들의 항전이 치열하게 재연되었다. 이 봉기에는 군대해산으로 군문에서 쫓겨난 해산 군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함경도 지방에서도 반일 의병투쟁이 1904년부터 시작되었다.『함경도지』 277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04년 3월 21임 밤 함흥에 폭도(의병: 필자) 약 300명이 봉기하여 매우 위험한 순간에 원산수비대로부터 파견된 오꾸다[奧田(오전)] 대위가 인솔한 정찰대와 조우하여 동야반(同夜半) 즉 다음 날 22일 오전 2시 반까지 격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의병 봉기의 기록은 활빈당 같은 농민운동 집단이 의병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느 의병부대의 활동인지 또 그 후에 이들은 어떠한 행적을 보이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의병의 봉기가 함경도 지방에서는 러일전쟁(1904~1905)이 개전된 직후에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홍범도는 그의 일지에서 러일전쟁(1904~1905)이 한창이던 1904년 9월 초순에 다시 의병활동을 벌였다고 적고 있는데 위의 자료를 보면 그러한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의 회상이 정확한지 여부는 추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905년에는 함경북도 무산지방의 포수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부령과 회령 등지를 주 무대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관북 지방에서는 반일 의병투쟁이 일시적으로 잠복상태에 있다가 1907년 중반부터 격렬하게 일어났다.
홍범도는 안산사 일대의 포수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자 1906년경부터 사냥꾼들이 주축이 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민중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그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 모았다.
일제 침략자들은 1905년 이후부터 그들의 침략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행정구역과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인 참여관(參與官)을 두어 행정을 감독케 하였다. 이 무렵 함경도 지방의 행정체계는 군(郡)·사(社)·리(里) 또는 동(洞)의 단위체계로 되어 있었다. 군에는 군수가, 사에는 사존(社尊)과 풍헌(風憲) 및 도헌(都憲)이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있었고, 리 또는 동에는 존위(尊位)와 도감(都監)이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봉건적인 지방조직을 자기들의 침략목적에 적합하도록 개편하였다. 즉 군에서 사를 폐지하고 몇 개의 사를 통합하여 몇 개의 면으로 만드는 등 일련의 작업을 거쳐서 행정체계를 뜯어 고쳤던 것이다. 또 군과 사·리·동 등의 행정책임자인 원(元)·사존·풍헌·도헌·존위·도감 등의 직책을 폐지하고 대신에 군수·면장·구장(區長) 등을 신설하여 그들을 일진회원(一進會員) 등 친일분자들로 임명케 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에는 보안법(保安法)을 제정하여 집회 및 결사(結社)를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침략적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06년 10월 압록강과 두만강의 삼림에 관한 한일합동조관(韓日合同條款)을 체결하고 뒤이어 이듬해 4월에는 영림창(營林廠) 관제를 공포하여 북부지방의 삼림에 관한 통제와 벌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1907년부터 삼수·갑산 지방에 삼림의 도벌을 주관하는 목재창(木材廠)을 설치하고 산림 도벌과 반출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북부지방의 산림에 관한 이러한 일제의 침략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화전민과 포수들의 생계유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벌채하거나 밭을 일구기 위해 불을 지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처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 울창한 삼림지대가 벌채됨으로써 야생 조수들이 격감하여 포수들의 수렵에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결국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으로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침투가 늦었던 북부지방의 주민들은 이제 직접적인 생계의 위협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더욱 부채질을 한 사건이 바로 같은 해에 서울의 군대해산 이후 마지막으로 진행된 북청 진위대의 해산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시행이었다. 특히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강행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은 산포수가 많은 함경도 지방에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이 법령은 한국 민간인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아에서 거두어 들이도록 하고 위반자를 처벌토록 한 것이었다. 이 법은 민간인까지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 결국 의병투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사냥꾼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렵용 무기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법률의 적용에 따라 포수들은 이제 그들의 생업이 위협을 받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함경도 지방에는 지역적 특성상 산포수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에 무기도 또한 제일 많았다. 그러기에 일제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함경도 지방 포수들의 무기를 빼앗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제의 무기·탄약 회수반이 함경도의 포수들을 찾아와서 총기의 납부를 요구한 때는 1907년 10월경이었다. 즉 일제는 북청의 파발교(擺撥橋) 부근에 병력을 파견하여 각 면의 면장을 앞세우고 포수들의 수렵용 총기를 수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의 북청수비대는 북청군의 안산사 내에 있는 포수들의 총을 빼앗으려고 일부 수비대를 그곳에 보냈다.
홍범도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일본군에게 납부하라는 꼭두각시 정부와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설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안산사에 그대로 있다가는 왜놈들한테 총을 빼앗기게 될 것이니 왜놈들을 후치령 이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고 주장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또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 봉기를 예로 들며 이 시기야말로 두메산골에서 사냥만 하고 지내는 우리일망정 자기의 생존권 및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하였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설득이 주효하여 당시 북청의 36사(社) 포수들은 대부분 그들의 총을 당국에 제출하였으나 유독 안평·안산 두 사의 총기 납부실적은 매우 부진하였다.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일제 침략자들을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위하여 궐기하자는 범도(홍범도)의 강력한 권유는 동료 포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범도(홍범도)의 주장과 설득에 동감한 포수들은 그들의 풍부한 사냥경험을 자랑하며 반일 의병대의 조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일찍이 행하여 오던 의병조직 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는 동료 포수들뿐만 아니라 차츰 일제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화전민과 광산 노동자, 몰락한 빈농민 등을 망라하였고 또한 북청 진위대의 해산으로 실직 상태로 있던 해산병도 받아 들여 전투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 조직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통칭 안산사 포계라 불리우는 북청군 안산사와 안평사 두 사(후에 면으로 개칭됨) 포수들의 동업조합인 ‘포계’였다. 이 포계의 계장은 당시 임창근(林昌根: 70세)이라는 은퇴한 포수였다. 임창근은 연장자였기 때문에 조합의 장으로 추대되었고 실제로 이때 안산사 포계의 포수들을 고무, 추동하여 의병봉기에 가담시킨 사람은 애초부터 포연대장 홍범도였다. 또 홍범도 의병부대는 차도선(車道善)을 중심으로 한 북청·삼수·갑산 등지 일단의 포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범도(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공동으로 지휘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이며 일진회원으로서 안평면의 면장이었던 주도익(朱道翼)은 안평면의 총기 회수실적이 신통치 못하자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총기 등을 납부하라고 독촉하며 금품을 강탈하는 등 행패를 부려서 인근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특히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면장 유병갑(劉炳甲)을 쫓아내고 스스로 면장이 되었고 심지어는 면민의 결혼도 반드시 일진회원과 할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주민들에게 일진회에 가입하라고 선전하여 신망을 잃고 있었다.
홍범도와 차도선의 인솔하에 약 70여 명의 포수들은 머리에 가죽관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 엄방동(嚴方洞: 언방골이라고도 함)에서 모여 의병으로 떨쳐 일어날 것을 결의하였다. 이날이 바로 홍범도 산포수 의병부대의 봉기일이었다. 홍범도가 후치령 전투 전후 시기에 의병부대를 처음 조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국내외 대부분의 책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봉기 당시 차도선은

하늘이 일진회의 무리를 없애기 위해 나로 하여금 의를 안산(安山)에서 일으키게 하는구나! 이제 그들을 살육함으로써 국운을 회복시키려 한다!

고 하며 친일주구인 일진회원의 소탕을 선포하였다.
봉기한 포수의병들은 그 다음날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주구로서 가렴주구와 매국친일에 앞장서던 안평면장 주도익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진목동에서 그를 처단함으로써 결연한 구국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들은 같은 달 19일에 역시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파인 안산면장 이쾌년(李快年)과 그의 아들 이봉국(李鳳國)을 총살하였고 이튿날인 20일에는 안산사에 거주하는 일진회 회원 최석우(崔錫禹)·이종현(李鐘鉉)·김창식(金昌植)·김창로(金昌魯) 등 5명을 한꺼번에 처형하고 부근의 친일분자들을 소탕하여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섰다.…(원본누락)…
이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김춘진(金春辰) 등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러한 사태의 심각함과 일제의 간악한 술책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과 같이 일제의 기만적 책동을 쳐부수기 위한 대책으로서 반일 의병대를 본격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범도(홍범도)는 일찍이 진행하여 오던 의병 조직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키는 한편 총을 압수당한 포수들을 자기 휘하에 받아들여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속아서 빼앗긴 총을 다시 회수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포수들의 사냥총을 압수한 일본군 수비대는 다음날 그 총을 말 3마리에 싣고 후치령을 넘어 북청으로 반출하려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 수비대가 파발리에서 북청으로 가자면 반드시 후치령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포수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총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본격적인 의병항쟁은 바로 이 후치령의 길목에서 무기를 빼앗아 북청으로 넘어가는 일본군을 섬멸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봉기 당시 조직은 약 70여 명의 7개 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제가 후치령 전투 직후에 입수한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907년 11월 15일경 홍범도 의병부대의 조직편제와 간부 및 의병대원의 명단·주소는 다음과 같다.

제1분대
분대장 차도선(車道善) 부독(副督)
홍범도(洪凡道) 부독
김춘진(金春辰) 참독(參督)
김문엽(金文葉) 정궁(正宮)
김홍윤(金弘允)
주필영(朱必英)
임승조(林承祚)
임용기(林用基)

제2분대
분대장 김규연(金奎淵) 안평 서상리(西上里)
김상준(金尙俊) 안평 중지경(中地境)
김기준(金基俊) 안평 진목정(眞木亭)
유용칠(劉用七) 안평 중지경
장양민(張良民) 안평 신점리(新店里)
김용학(金用學) 안평 노은수(老隱水)
이종호(李宗浩)
김상사(金尙社)
이춘덕(李春德) 안평 엄방동
임승수(林承秀) 안평 심포(深浦)

제3분대
분대장 임용락(林用洛)
김석필(金錫必) 배왕동(裵王洞)
박지응(朴枝應)
이지옥(李枝玉)
장윤택(張允澤)
조병민(趙丙敏) 미전동(米田洞)
황영팔(黃永八)
이종원(李鍾元)
조병록(趙炳彔)
이일권(李日權)

제4분대
분대장 나현서(羅鉉瑞) 엄방동
김학권(金學權)
김학용(金學用)
김달엽(金達葉)
나종수(羅宗洙) 안산 황수원(黃水院)
조광목(趙光牧)
김운용(金雲用)
김명순(金明淳)
신방일(申芳日) 지량봉(志良峯)
설인택(薛仁澤) 노은수

제5분대
분대장 김치환(金致驩) 양평(陽坪)
박중실(朴仲實) 양평
김택선(金澤善) 노경봉(老竟峯)
이득책(李得柵) 양평
이창록(李昌祿)
최석책(崔錫柵)
최창건(崔昌乾)
강우봉(姜禹鳳) 양평
정익영(鄭益永) 양평
김경신(金景信) 노양촌(老陽村)

제6분대
분대장 임윤석(林允石) 진목전(眞木田)
김운성(金雲星) 안평 심포
이명근(李明根) 위와 같음
송호수(宋虎秀) 위와 같음
이종성(李宗成) 위와 같음
김종인(金鍾引) 진목전
김봉익(金鳳益) 미전동
이종순(李鍾淳) 신점리
홍사영(洪使永) 진목전
김경당(金景棠) 노은수

제7분대
분대장 고응렬(高應烈) 노은촌(老隱村)
송석규(宋錫奎) 위와 같음
김준학(金俊學) 위와 같음
이봉재(李鳳在) 감토동(甘土洞)
이종수(李宗秀) 위와 같음
임교수(林喬秀) 안산 황수원
송홍익(宋弘益) 감토동
이성만(李成萬) 노은수
김홍원(金洪元) 서상리
신전태(申田太) 미전동

위의 표에 나오는 68명과 도독 1명을 합하여 69명이 1907년 가을에 봉기한 홍범도 의병부대의 간부진과 참가 의병인 것으로 파악된다. 위의 명단에 도독의 이름은 없으나 도독은 앞에서 설명한 안산사 포계의 계장인 임창근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문서에는 후치령 전투에서 임창근이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 사실 여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위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1분대가 지휘본부이며 차도선과 홍범도가 똑같이 부독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휘본부인 제1분대의 분대장이 차도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범도가 부독의 자리에 있었음은 궐기 당시 홍범도가 이 조직 안에서 차도선과 동일한 지휘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차도선이 분대장이라는 사실은 의병부대의 조직 과정에서 차도선의 기량과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차도선이 범도(홍범도)보다 5살이나 연상인 1863년생이었다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홍범도가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을 우대하여 분대장의 임무를 위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범도(홍범도)는 실제로 부대의 지휘를 차도선과 같이 공동 협의하여 했거나 아니면 서로 분담하여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도선이 한때 일제에 ‘귀순’하기 전까지의 이 부대를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홍범도-차도선 다음의 제3의 지휘자가 참독인 김춘진이며 정궁의 직책을 맡은 김문엽은 아마도 이 세 사람의 참모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의 한 연구(오길보의 논문 「홍범도 의병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주중국이라는 17세 소년이 마을 서당에서 홍범도가 기병할 당시에 포수들을 모집하는 과정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즉 주중국은 그에 관한 유고(遺稿)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위의 표 제1분대에 있는 주필영이 그일 가능성이 있다.
위의 편제는 초창기의 조직인데 후일 각지에서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 등이 이 부대에 합류함으로써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급속히 팽창하여 부대의 편성이 몇 차례 개편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부대의 개편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무렵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무기는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총에 소요되는 화약과 탄환은 처음에는 스스로 제조하여 조달하였다. 갑산에서는 질이 좋은 동(銅)이 산출되었으므로 탄환의 제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총이 없는 의병들은 원시적이지만 창과 도끼·도검 등으로 무장하였다. 하지만 차츰 일본군이 쓰던 신식 소총을 노획해서 화력을 강화하게 된다. 의병들의 복장은 정해진 제복은 없었으나, 사냥시에 입던 간편한 복장에 가죽 모자를 썼고 총은 각자 베로 만든 자루나 주머니에 넣어 이를 어깨에 메거나 등에 졌다. 그리고 탄약은 어깨에 두르거나 주머니가 달린 허리띠에 휴대하였으며 허리띠에다가 찐쌀을 5홉 정도 군량으로 두르고 다니기도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은 제1기(1907년 11월 15일∼1908년 3월 17일), 제2기(1908년 3월 17일∼1908년 11월), 제3기(1908년 11월∼1911년 3월)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홍범도는 제1기만 차도선과 같이 부대를 공동지휘 하면서 싸웠고 그 이후에는 도의병장(都義兵長)으로서 함경도 지방의 거의 모든 의병부대를 지휘했거나 연합해서 투쟁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의 소양이나 심오한 지식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후덕한 인품과 빼어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휘하에 기라성 같은 수많은 명장들을 포섭하여 의병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2) 후치령(厚峙嶺) 전투


후치령은 높이 약 1,335미터의 매우 험준한 고개로서 동해안 지방인 북청에서 내륙 개마고원 지방의 삼수·갑산·혜산 등지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후치령의 정상에는 각지로 왕래하는 행인들과 짐꾼들의 유숙을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약 70여 명의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일본군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인솔하고 갑산에서 북청 쪽으로 가는 후치령의 정상 부근에 매복하여 무기를 싣고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포수의병들은 대략 세 군데의 진지에 배치되었으니 후치령고개 아래의 로양지 앞추여머리 길목과 진갈구미 한복판, 후치령의 내메머리 거리 등 3개소가 바로 그곳이다.
홍범도는 의병들로 하여금 위의 매복지점에 나무를 베어다가 견고한 포진(砲陣)을 구축케 하고 눈으로 그 위를 덮어서 위장하도록 했다. 11월 중순이었지만 후치령에는 벌써 상당한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포진이란 화승총으로 적을 사격하기 위한 진지를 말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의병부대의 진지를 그렇게 불렀다. 범도(홍범도)는 포진에 여러 사격조로 된 전투대오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케 한 다음 파발리 방면에 ‘발동군(당시의 정찰병)’을 보내서 적정을 탐지하도록 했다. 이때 전투대오의 편성에서 특이한 점은 사격조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격조는 당시 포수들이 주로 갖추고 있던 화승총 사용방법상의 특징 때문에 짜여진 것이었다. 즉 하나의 사격조는 4명의 의병으로 조직되었는데, 화약을 장약하는 포수와 탄알을 장진하는 포수, 화승대에 불을 붙이는 포수, 그리고 준비된 총을 조준하여 발사하는 사수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총을 사격하는 한 사람 외에 나머지 세 사람은 일종의 조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끝낸 의병들은 이 포진에 의거하여 후치령을 왕래하는 일본군과 우편물 호위병, 목재창의 일본인 관리 등 일본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22일 오후 4시경 안산·안평 두사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처음에 포수들의 총을 북청읍으로 반출하려던 일본군경은 노우에(野上) 경부(警部) 등 경찰 4명과 상등병 이하 8명의 일본군 수비대원 등 군경 합동 12명과 한국인 첩자 한사람의 인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북청읍을 향해 가던 중 안산사의 황수원(黃水院) 북방 병풍동에서 4명의 일진회원이 피살되었다는 소식과 신풍리(新豊里) 부근에서 사냥꾼들이 모여 우선 일진회원을 살해한 뒤에 일본인도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애초에 동행하던 경찰 일행과 상당수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급히 파견되었다. 그 결과 총기 호송 인원이 대폭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일행은 일본군 병졸 두 명과 경관인 순사(巡査) 한 명, 그리고 수송용 말 3마리와 한국인 마부 3명, 위에서 언급한 한국인 통역 겸 첩자 1인으로 이루어졌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들이 매복지점에 도달하자 일제히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 병졸과 순사 등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때 친일파인 한국인 통역은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탄환이 명중되었으나 재빨리 도망하여 버렸고 마부 3명은 모두 생포되었다. 의병들은 짐을 싣고 있던 말을 잡아서 동료 포수들이 빼앗겼던 총을 그대로 다 되찾았다. 그리고 일본군경이 갖고 있던 신식 무기와 기타 장비를 노획하여 그들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사로잡힌 마부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으므로 의병봉기의 대의명분과 반일항쟁의 필요성 등을 잘 설명하고 타일러서 석방하였다. 이때 사살된 일본군은 북청주둔 일본군 제50연대 소속이었고 일인 경찰은 이름이 도꾸에이(德永權吉, 덕영권길)였는데 북청 경찰서의 고문부 소속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같은 날 석양 무렵에 갑산에서 북청으로 가는 우편물 호위 일본군 2명과 역시 북청으로 가던 혜산진 목림창 소속 반장 오끼하라(萩原守虎, 추원수호)란 자를 매복 포진에서 저격하여 모두 사살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 등을 노획하고 우편물도 빼앗았다.
포수의병들은 다음날인 11월 23일에도 같은 지점 즉 후치령에서 신점리로 내려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가던 일본군 아라다니(新谷, 신곡) 소위와 그가 타고 있던 말, 병졸 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무기와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했다. 이틀 사이에 아홉 명의 일본인 군경과 민간인이 처단된 것이다. 홍범도-차도선의 지도하에 승리의 개가를 올린 의병투쟁의 첫 성과는 포수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 시켰다. 또한 이 같은 포수의병들의 승리는 주변 민중들의 반일 의병투쟁을 더욱 고무 시켰다.
일본군 북청 수비대는 위와 같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계속된 투쟁에 놀라고 당황하여 일본군을 급히 출동시켰다. 즉 일제는 11월 24일 미야베(官部, 관부) 보병대위 지휘하에 2개 소대 57명과 순검 5명, 헌병 4명을 급파하여 북청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 의병부대를 공격케 하고, 반대방향인 신풍리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는 아오또(靑砥, 청지) 보병대위 및 노우에(野上, 야상) 경부가 거느리는 일단의 군과 경찰을 출동시켜서 협공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우에 경부 등의 일행은 자기들의 인원이 소수이고 후치령에는 많은 의병들이 웅거하고 있다는 풍설을 듣고 자신이 없어 후치령으로 향하지 못하고 일본군의 분견대가 있던 신풍리를 경유하였던 까닭에 후치령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한편 후치령의 며칠간 투쟁성과가 주변 마을에 크게 알려진 결과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해산군인이 합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삼백 명의 규모로 군세가 확대되었다. 이때 북청 진위대 병정으로 복무하던 도중 진위대가 해산되어 집에서 지내고 있던 송재원(宋才源)은 홍범도가 기병하면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대열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884년 3월 5일생으로 당시 23세의 한창 때였다. 그는 포수들을 이끌고 의병대에 참가하라는 홍범도의 연락을 받고 자기가 살고 있던 북청군 니곡사(泥谷社) 인동리에 거주하고 있던 8명의 포수들을 이끌고 후치령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1월 24일 정찰병인 발동군으로부터 북청에서 다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후치령 방면으로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적을 쳐부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신중하게 기다렸다. 의병들의 포진을 보강하여 주공방향으로 병력을 집중시켰고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진지에 내서 포수들이 안전하게 총을 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기다린 보람이 있어 드디어 다음 날인 25일 오후 12시경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들의 포진 근처에 나타났다. 본격적인 후치령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전투는 오후 3시까지 약 세 시간 동안에 걸쳐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비록 낡은 화승총을 주로 갖고 있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고 사기왕성한 가운데 철저히 미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세한 신식 장비를 보유하였다고 하나 북청에서부터 수백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매우 피로한 상태에 있었으며 아무런 엄폐물이 없이 노출된 상태에서 낮은 곳으로부터 고지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지형적으로도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홍범도의 선제 사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피아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약 세 시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그들을 패주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절반이 넘는 3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고 의병진영에서도 김춘진·김문엽(홍범도는 이문엽으로 회상)·조강록·임승조·임사존 등 1등 사수인 다섯 사람의 포수가 전사하였으며 황봉준(黃奉俊) 등 다수의 부상자도 생겼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에 섬멸적 타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계속된 전투로 탄환이 거의 떨어지고 전투 직후 일본군 증원병이 올 것을 우려하여 후치령을 떠나 주력은 안산사의 신점(新店) 방면으로, 일부는 후치령 서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는 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이도 16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하였는데 전투에 처음 참가한 일부 포수들이 당황하여 전투에 애를 먹기도 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첫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포수들만이 할 수 있는 정확한 사격과 대담한 작전, 그리고 일정한 성과를 거둔 뒤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재빠른 기동력이라고 하겠다.
일제 경찰은 후일 그들의 보고문서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전사 3, 부상 4명 뿐인 것으로 피해를 축소하여 보고한 반면에 의병들의 피해는 크게 과장해서 전사자가 21명, 화승총 노획이 14정인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보고서에 출동 병력이 60명 이상이었으면서도 “아 병원(兵員)은 2개 소대이나 50명 이하이다.” 혹은 “적은 참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자기들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의병들이 완강하게 저항한 것처럼 진술하였다.
특히 그들은 위와 같은 허위보고를 하면서 후치령 전투 후 약 1주일이 지난 12월 1일까지도

폭도(의병: 필자)의 종적은 불명이며 지금까지 1인도 체포할 수 없었음은 유감으로 하는 바이다. 계속 수사 중이다.

하여 전투 직후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 의병들을 추적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이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을 증명하는 사실은 일본인 경찰까지도 전투 직후 일본군과 경찰 일행이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사실은 일본군이 전멸하지는 않았다) 신풍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끼(三木, 삼곡) 소좌 등 일본군도 의병들의 신풍리 습격이 두려워서 갑산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당시 후치령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북청군 니곡사에 살던 정응섭(鄭應燮: 당시 27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놈들은 우리 동리에 와서 ‘폭도’와 교전하다가 4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사상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일제는 후치령 전투에서 선발대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증원병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사정을 일제의 원산 경찰서장은 아래와 같이 통감부의 경무국장에게 보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일본군의 고전 상황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此)의 토벌로 북청 50연대로부터 l개 소대를 파견하였으나, 수백 명의 폭도가 고개 위에 집합하여 극렬히 방전(防戰)하여 병졸 7명이 부상하고 곤전(困戰)하는 상황이므로 다시 동(同) 연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하고자 지난 26일 밤 신포 수비대에서 병졸 15명을 발탁하여 기관포 4문을 갖고 동(同) 방면으로 향한 모양인 바-

기왕에 보낸 병력을 1개 소대로 축소하고 있으며 증원병에게는 최신 무기인 기관포까지 지급해서 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일제가 포수 의병들의 봉기에 얼마나 급급해 하고 있는가 하는 진실을 간파할 수 있다.
후치령의 3일간 전투에서 매복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일제 침략자들을 처치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미야베 대위가 거느리는 북청수비대와 격전을 치른 직후에 신점을 거쳐 갑산 상남사(上南社)로 이동하였다. 12월 3일 그곳에서 이들은 일진회원 13명을 처단하고 부근의 이리산(伊離山)으로 들어가서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후치령에서 참패한 뒤에 의병을 색출한다는 핑계하에 그 부근의 무고한 한국인 민가 27호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북청에서 혜산진에 이르는 사이의 장항리(獐項里: 노루목)·성문 내리(內里)·후치령·황수원·신풍리·갑산 등지에 일단의 보병과 기병 부대를 배치하여 의병의 내습을 경계하였다.

(3) 삼수성(三水城) 전투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와 아들 양순(홍양순)이는 의병들의 탄환이 고갈되어 작전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후치령으로 갔다. 왜냐하면 후치령 주위에 널려 있는 수십 명 일본군의 전사자 시체에서 탄환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곳에는 일본군경이 시신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어서 대단히 위험했다. 두 부자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에 전장에 침투하였다. 이러한 모험 끝에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수천발의 탄환을 찾아서 의병들이 모인 장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엄방동에서 70여 명의 의병대와 합류한 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의병들에게 186발씩의 탄환을 지급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의병들의 전의를 크게 고무·추동시켰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 이후 상당한 병력의 손실이 있었지만 다시 주위에 격문을 발송하여 포수와 농민·해산군인 등을 모집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후치령 전투는 어떤 의미에서 포수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단순한 화승총 탈환 투쟁으로부터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의병항쟁으로 발전시키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 참가한 포수의병들은 실전을 경험하면서 보다 원활한 전투수행을 위해서는 의병부대의 철저한 조직체계 구성이 필요하고, 참전 포수의병 개개인의 투철한 항전의지와 전투원으로서의 엄격한 자질이 한층 더 요구된다는 귀중한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의병의 수가 증가하고 앞으로 집요하게 의병들을 추적 ‘토벌’하게 될 일본군과의 접전을 예상하여 12월 초에 그들의 조직체계를 더욱 정연하게 재편성하였다.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 의병부대에 참가한 김병호(金炳浩: 1882년생, 당시 25세)의 회상과 홍범도의 일지, 그리고 일제의 정보문서 등에 따르면 재편성한 의병대의 가장 큰 변화는 부대 조직의 체계화 및 지휘부 감찰기능의 보강이었다. 즉 구한국군 편제를 참고해서 분대-소대-중대의 편제를 갖추었고 지휘부에는 군중기찰의 업무를 맡는 도검사(都檢査) 제도를 둔 것이었다. 도검사는 의병대오 내의 감찰과 군사규율을 취급하고 그 외에 만족 반역자인 일진회 회원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의병장은 도검사가 조사한 사항을 근거로 의병 가운데 규율을 위반한 사람과 기타 외부의 범죄자들에게 적당한 처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의병대에는 이 밖에 군량도감(軍糧都監)이 있어서 의병들의 식량보급을 맡았다.
이때의 편제를 보면 말단의 최소 조직에 25명으로 구성되는 분대를 두고 그 지휘자인 분대장을 하사(下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2개 분대를 1개 소대(50명)로 구성하여 지휘자인 소대장을 오십장이라고 했다. 또 2∼3개의 소대로 1개 중대(100∼150명)를 이루게 하고 그 지휘자인 중대장을 참위(參尉)라고 하였다. 비록 민간 포수들의 집합체라고는 하지만 중대장 등 지휘관의 임명시에는 지휘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임명장인 사령장(辭令狀)을 주어 엄격한 격식을 갖추었다.
이처럼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한 홍범도와 차도선은 12월 중순경에 종전의 수동적인 진지매복과 저격 위주의 공격에서 과감히 벗어나 능동적으로 기동하며 일본군을 기습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후치령 전투 이후 의병들이 대폭 증모되었으나 거기에 소요되는 무기와 장비가 많이 모자랐으므로 일본군의 보급품을 빼앗아 군수품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12월에 접어든 개마고원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월동장비나 피복·식량과 의약품 등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점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갑산의 상남사에서 북청의 안산·성대·덕성사 등지의 고산준령을 거쳐서 1907년 12월 중순에는 북청읍 부근까지 신속히 행군하여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지점을 선정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약 일주일 내외 사이에 거의 100km가 넘는 거리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북청읍까지 온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200여 명의 의병들은 마침내 그달 15일 북청읍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항리 근처에서 일본군 화물 호송병과 우편물 호위병을 습격하여 병졸 아라이(新井元吉, 신정원길) 등 3명을 살상하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특히 이때 의병들이 일본군이 혜산 방면으로 운반하던 탄약상자 40여 개를 빼앗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어서 의병투쟁에 큰 활력소가 되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의병부대의 장항리 승리 이후 북청에서 삼수·갑산·혜산 방면으로 가는 교통로가 일시 차단되어 북청을 거치는 일제의 우편물 수송이 상당기간 중단되었다. 이 사실은 북청 주변의 여러 고을에 순식간에 퍼져나가 주민들 사이에서는 글자 그대로 의병들의 의로운 투쟁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 수비대는 의병의 토벌은커녕 그들의 보급품과 우편물이 위협을 받게 되자 16일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여 명을 출동시켰지만 의병들은 이미 잠적해 버린 뒤라 거의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 무렵 홍범도와 차도선은 함흥 주변 지방의 포수들과 각 동리의 유지 및 연장자들에게 원수의 직책으로 자기들의 의진에 합세할 것을 권유 내지 명령하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송하였다.

[함흥 상하의 원산·문천·영원·희천·고원·맹산의 각사(社)에 고하노라]

알리노니 무릇 의병이란 것은 자고로 있어왔던 법이다. 이제 북청에서부터 삼수·갑산·이원·단천·홍원·길주까지의 7읍은 의병 진영을 이루었는데, 유독 함흥 각 사의 포수들이 아직도 오지 않았은 즉 이것은 무슨 연유이냐?
(포수들은) 며칠 내로 속히 성진(成陣)하고 각 사와 리의 존위와 도감은 대진(大陣: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말함) 가운데로 참가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각 사와 리의 유력자와 포수 등은 장차 포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리라. 그래서 이 글로써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혹시 각 사와 리의 각처에 이 글이 도달하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폐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를 알리는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의병들은 장항리 부근에서 많은 물자를 노획하고 일제의 치안을 교란하는 등 매우 큰 성과를 거둔 뒤에 재빨리 그곳에서 철수하여 깊숙한 골짜기인 삼수방면으로 기동하였다. 일제는 의병대를 추적하여 ‘토벌’하려고 삼수와 혜산진 방면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12월 18일 함흥 수비대의 가미쯔끼(上月, 상월) 기병 소위 이하 16기의 기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홍범도 등은 삼수군 중평장(仲坪場)에서 그들을 요격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 다시 삼수 방면으로 이동했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홍범도는 원성택(元成澤)으로 중대장을 삼고 각지에 격문을 보낸 이후 모집된 상당한 숫자의 포수들을 의진에 편입시켜 군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 결과 12월 하순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거의 수백 명에 이르는 대부대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의병들은 과감하게도 삼수성에 쳐들어갈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삼수성에는 상당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군수 유등이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날씨에는 일정한 주둔지가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동기에서의 필요성도 있었다.
마침내 홍범도 의병부대는 12월 29일 삼수성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삼수성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일진회 회원을 색출하여 처벌하였으며 일제의 주구인 삼수 군수 유등을 효수하여 군내외에 의병들의 철석같은 의지를 과시했다. 삼수성에는 일본군이 국경 경비와 의병 토벌을 위해 비축해둔 많은 군수물자가 있어서 의병들의 무장 강화와 식량 확보 등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의병들은 이때 삼수성에서 일본군의 소총 수십 자루와 탄약 100여 상자를 빼앗았고 이미 해산되어버린 한국군 진위대에서 사용하던 베르던식 소총 수십 자루, 탄환 15상자 등도 동시에 획득하였다. 특히 홍범도는 이때 빼앗은 베르던식 소총을 애지중지하며 이후의 전투는 물론 해외로 망명할 때에도 소지하고 건너가 거의 수십 년을 사용하며…(원본누락)…산진으로 퇴각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 164면에서)

일제는 여기에서 의병들의 숫자를 400여 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물론 이 당시는 의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 보고서는 그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의병의 숫자를 다분히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전투 시간도 줄여서 보고한 것 같다. 홍범도는 삼수성 전투가 3일 정도 계속된 것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본군의 허위보고에도 불구하고 삼수성에서의 참패는 그들의 위신을 말할 수 없이 떨어뜨린 반면에 의병부대의 사기와 자신감을 크게 고양시켰고 북한 일대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을 드높이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삼수성 전투에서 의병부대가 대승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사상자도 꽤 생겼다. 김동운·성태일·노성극, 새골에 사는 홍병준·임태준 등 5명이 부상하고 최학선·길봉순·이봉준·조기석·홍태준·오지련·박봉준·김일보·최영준 등 9명이 전사하였던 것이다.

(4) 갑산읍 전투


일본군이 삼수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게 참패했다는 보고에 접한 일제는 의병들을 진압코자 각 부대 연합의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 동부 수비관구 사령관 마루이(丸井, 환정) 소장은 의병진영의 강성함에 크게 놀라서 북청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미끼(三木, 삼목) 소좌로 하여금 북청 수비대의 장교 이하 보병과 기병 18명, 장항리에 파견된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명, 성진(城津) 수비대장 나까무라(中村, 중촌) 대위 이하 80명, 그리고 함흥에서 북청에 파견된 도요시마(豐島, 풍도) 기병소위 이하 26기(騎) 등 175명으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있는 홍범도 등의 의병들을 공격케 했던 것이다. 여기에 삼수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각지의 수비대가 합류하였으니 토벌대의 규모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에 부응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막강한 대병력의 일본군이 출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홍범도와 차도선은 휘하 의병들을 집결시키고 여러 정탐꾼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의병들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해 주는 주민들의 물심양면 협조 하에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이때 특기할 만한 점은 정평 지역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의병부대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와 차도선은 1908년 1월 9일 막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삼수군의 중평장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의 고지인 운봉(雲峰)을 선점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며 지연작전을 펴다가 후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삼수성에 있던 주력부대는 재빨리 갑산 방면으로 이동하게 했다.
의병대의 이러한 주도면밀한 응전태세를 알 까닭이 없는 일본군은 그 무렵 세 방면에서 삼수성을 포위하여 압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한 고지를 미리 차지하여 일본군을 요격하려던 일단의 의병들은 마침내 1908년 1월 9일 아오또 대위가 이끄는 5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와 조우하여 격전을 벌여서 일본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에 예정된 대로 산악의 고지를 타고 갑산방향으로 잠적해 버렸다. 일본군 토벌대는 의병부대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중평장에서의 전투에 열중한 나머지 그들이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의병 주력부대의 갑산 이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 뒤 일본군은 같은 날 의병들이 아직 삼수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아오또 지대는 계속해서 중평장에 주둔하고, 80여 명으로 이루어진 나까무라 대위의 일대는 계속해서 중평 방면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미끼 소좌가 이끄는 일대는 삼수 전투에서 패주한 혜산진 수비대와 합세하여 신동(新洞)에 도착했고 도요시마 기병 소대는 삼수성을 포위하여 접근하였으나, 이미 성은 고요하고 의병들은 흔적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일본군은 완벽하게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유인작전에 속은 것이었다.
한편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력은 일본군이 일부 의병부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삼수로 진입하는 사이에 일본군의 포위망을 교묘하게 벗어나 갑산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들은 약 300명의 대병력으로 9일 삼수를 출발하여 다음달인 1월 10일 새벽 6시에 갑산읍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당시 갑산읍에는 일본군의 수비 분견초(分遣哨)와 일제 경찰의 순사 주재소, 그리고 우편 전신 취급소 등 일제 침략자들의 통치기구 하부조직이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경이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삼수에 출동하여 갑산에 남은 병력은 불과 십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의병들은 완전히 적의 허점을 포착한 것이었다.
의병들은 조국을 침략하여 자기 민족을 압박하는 침략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항쟁에 떨쳐나섰다. 그들은 갑산 수비대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일본인 7명을 살상하는 등 일본군경을 궤멸시키고 다시 갑산 우편 전신취급소를 점령하여 전신·전화선을 모두 절단한 뒤에 우편취급소의 청사를 완전히 소각·파괴하여 버렸다. 이때 일제의 눈과 귀가 되어 주민들과 의병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데에 악용되었던 전선기기도 모두 파괴되었음은 물론이다. 홍범도 등 의병부대는 거의 아홉 시간이나 갑산읍을 점령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앞잡이 기관을 파괴하고 그 주구들을 처치해 버린 것이다. 의병들은 우체국과 일본인을 습격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았으나 선량한 주민들에게는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후 세 시경 삼백여 명의 의병부대는 거의 아무런 인명손실도 보지 않은 채 일제 통치기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뒤에 갑산의 이리사(二里社) 방면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의병부대가 갑산에 잠시 머무는 동안 갑산군 허천사(虛川社)의 박신강(朴信康)은 소대장으로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또 갑산 전투 직후인 1월 11일에는 같은 군의 진동사(鎭東社)에는 김용권(金用權)이 부근에서 의병 60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에 가담하였는데, 이때 동네 주민들로부터 한말씩의 양식을 군량으로 차출하여 가져와서 의병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게 고양 되었다.
갑산이 기습을 당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일본군 미끼 소좌는 매우 당황하여 1월 11일에 아오또 부대에게 삼수 부근의 수색을 위임하고 나까무라 대위가 이끄는 한 부대와 함께 급히 갑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홍범도-차도선 의병대가 갑산의 이리사 방면으로 잠복해 버린 뒤였다. 이같이 일본군이 갑산읍으로 향하여 의병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 홍범도 등의 의병부대는 약 60명의 의병 지대를 l월 12일 갑산의 상남사로 파견해서 그곳의 악질 일진회 회원 원길학(元吉學)·박중형(朴仲兄) 등 48명을 몰살시켜 버렸다. 그 조치는 일제의 앞잡이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냉엄한 민족의 심판을 단행한 것이었으며 또한 주변의 주민들에게 의병들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암묵적 위협과 경고이기도 하였다.
의병대의 일진회원에 대한 이러한 준엄한 숙청은 북부 지방의 주민들에게 지대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즉 의병들의 과감한 행동은 일제의 주구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여 도주케 하였으며 더 이상의 매국적 행위를 감행할 수 없게 하였고 일반 촌민들도 일제에 대한 협조를 일체 거부하는 상황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개마고원 일대의 산간에서 일진회원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일제 군경들은 거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 정찰에 나선 일본인 경관들은 숙박마저 거부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무렵 북한지방에는 다음과 같은「일진회가」가 유행하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를 조소·야유하기도 하였다.

회야 회야 일진회야
삼춘화류 좋다더니
사절 명절 다 지났다.
오색 잡놈 모여들어
육조 앞을 지나가니
칠국거지 너 아니냐.
팔자도 기박하나
구구히 사잤드니
10월 치성 가련하다.
모자 벗어 코에 걸고
천리원주 네가 할 제
상투생각이 너 안나더냐.

한편 의병대의 갑산 점령 직후 갑산에 출동했던 미끼 소좌 등의 일본군 수비대는 갑산에서 의병을 추적하는 데 실패한 뒤에 의병대의 주력이 갑산군 이리사 쪽에 있음을 알아 채고 각 지대를 그곳으로 급거 출동시켰다. 즉 아오또 부대는 신풍리 동쪽에서부터, 나까무라 대는 갑산읍으로부터 이리사 방면을 향하여 협공케 하고 미끼 자신은 상당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리사로 쫓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 1주일 동안 갑산군 부근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수색하였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1월 19일 다시 갑산읍으로 낭패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갑산읍 기습과 점령, 그리고 주둔 일본군경 및 일제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대타격은 의병부대의 ‘성동격서(聲東擊西)’전술에 의한 신출귀몰의 대승이었다. 갑산읍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유격전에 말려 들어서 의병의 추적과 토벌에 완전히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농락당할 정도로 당황하고 갈팡질팡 했던 것이다. 이 전투 이후 한국 북부지방에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특히 홍범도는 적군인 일본군마저도 그를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갑산읍 전투 직후인 1월 중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다시 부대를 약간 개편하였다. 그 주요골자는 의병대의 소부대 단위로 재편성과 지휘부내 참모진의 강화였다. 이러한 개편의 배경에는 당시의 몇 가지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즉 일제의 대규모 병력 동원에 의한 토벌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의병들이 많은 병력으로 한꺼번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기동하는 것은 작전상 불리하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이 각지에 분산되어 효과적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적의 배후와 허점을 불의에 기습하는 등 유격전술을 전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정은 삼수·갑산 등지의 산골에서 많은 의병들이 집결하면 당장 식량문제의 해결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의병들의 보급문제 해결과 보다 효과적인 적정탐지 및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부대의 분산 활동과 정보·보급문제 해결을 위한 참모기능의 강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홍범도와 차도선은 수백 명에 달하는 전체 의병을 4개 대오로 재편성, 그들의 지시 하에 각지에서 분산하여 활동하게 했다. 비록 의병부대가 비교적 소규모로 분산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지시를 받고 각 대오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 각 대오에는 참모(參謀)·유사(遊士)라는 직책이 신설되어 의병들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돕게 되었다.
참모는 이무렵 전국 각 지방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부대의 조직에서 볼 수 있는 모사(謀士)와 같다. 그는 의병부대의 작전계획 수립과 그 집행을 맡아 의병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중남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각 의병부대의 모사가 주로 유생들이어서 실질적 전투력의 확보에 미흡했던 데 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참모(모사)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의병 가운데 선발된 인원으로 충당되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유사 역시 의병부대원 중에서 책임성이 강하고 동작이 민첩하여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 뽑혔다. 유사는 간혹 참빗장사, 물감·실장사 또는 담배행상 등으로 변장하고 부락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하였으며 의병들의 진격과 퇴각 시각의 결정 및 주둔, 휴식 장소의 물색 등을 담당했다.
이때의 개편 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기존의 군량도감을 정식편제에서는 폐지하고 의병부대가 장기간 일정한 장소에 주둔할 경우는 임시로 임명하여 식량조달을 책임지게 했다는 점이다. 그 대신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전개하기 유리하도록 산간 곳곳의 민가에 비밀리에 병참부를 두어 식량 등을 저장·보급케 하였다.

(5) 운승리(雲承里) 전투


갑산 전투에서 의병부대의 기계(奇計)에 참패한 일제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고 말았으나 반대로 의병들의 활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일에 이르러서는 설유(說諭) 기타 보통의 방압(防壓) 수단은 그 효과가 없고 형세는 날을 따라 나쁘다. … 일반의 상황은 금후 쉽게 평온해 지지 않을 것 같으며 우편 전신취급소는 수비대 구내로 이전하기로 협의 결정하였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비밀 보고문서)

갑산 전투 이후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웃의 단천(端川)군을 습격할 계획을 짰다. 단천에는 일진회원 출신 유문경(劉文卿)이 군수로 있었으므로 삼수·갑산·북청 등지에서 피난한 일진회원들이 많이 몰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진회원들이 사존이나 풍헌·촌장으로 활동하여 가렴주구에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수 유문경은 부패·탐학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단천에 살고 있던 일반 주민들 사이에는 의병부대가 습격해 올지 모른다는 풍문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당국도 바짝 긴장해서 의병들의 동태 파악에 주목하고 있었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약 200명의 의병들은 일진회원 응징 계획에 따라 단천으로 진출하였다. 그 뒤 홍범도는 휘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친일파가 행세하고 있는 곳을 색출하여 처벌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단천군의 수하사(水下社) 운승리(雲承里)라는 마을이 그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운승리의 촌장은 일진회원 최성학(崔成學)이었고 운승리 원충동(元忠洞)은 마을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국적 일진회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08년 1월 22일 단천의 친일 매국적을 처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이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막하의 한 부대 약 70명은 이달 운승리에 진격하여 촌장 최성학이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며 받은 일본돈 50원과 은화 60원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다. 또 이들은 원충동에 살고 있던 악질 일진회원 조정수(趙正洙) 등 4명을 처벌하기 위해 포박하였다. 의병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의 침략과 의병항쟁의 당위성을 설명하였으며 일제에 협력하는 자는 의병의 응징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의병들은 그날 밤 운승리에서 유숙한 뒤 23일 아침 일진회원 4명을 호송코자 했다. 그런데 운승리에 있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23일 오전 9시경 일본군경 합동 약 30명의 ‘토벌대’가 불의에 내습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는 약 두 시간을 완강하게 저항하여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히며 싸웠으나 전황이 불리하여 결박한 일진회원 4명을 그대로 남겨둔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운승리 전투 이후 철수해서 본대에 합세한 의병들과 함께 이들을 추격해 온 일제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며 분전했다. 즉 운승리에서 서남방으로 약 2km 떨어진 가농리(加農里) 모란촌(牡丹村) 부근의 고지에서 적을 불시에 기습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제 토벌대는 많은 손상을 보았지만 의병도 약 10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 전투로 큰 타격을 받고 의병대의 야습이 무서워서 모란촌에 숙박하지 못하고 다시 운승리로 도망하여 주둔할 정도로 의병의 위세가 적을 압도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단순한 반일투쟁만을 하지 않고 봉건적 수탈에 앞장선 부패 관리 등을 처벌하는 반봉건 투쟁도 동시에 벌였다는 사실이다. 즉 단천군은 친일 군수 유문경이 부임한 이래 같은 일진회원을 각급 관리로 임용하였기 때문에 부정이 마음대로 자행되어 군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홍범도 의병대는 이들의 부정과 매판적 행위를 응징하고 그들이 착복한 자금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병들이 단천을 습격한 뒤 군수 유문경이 1908년 4월경에 부정 혐의로 함경남도 재판소에 체포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특히 유문경이 군수직책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단천 군민들이 앞으로는 일진회원을 군수로 임명치 말라는 대대적 청원을 정부 당국에 올렸던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6) 세곡(細谷) 전투


단천을 습격하여 일진회원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 해 2월 2일에는 북청의 금창(金昌)에서 약 200의 병력으로 일병과 접전하였고 2월 상순에는 휘하의 한 의병대가 혜산진 방면에서 일본 침략자 9명을 처단하였다. 또 2월 10일에는 장항리(獐項里) 북방에서 장진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혜산진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들을 소탕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에는 북청군 거산(居山) 북쪽 현국사(玄國寺) 부근에서 일진회원 20명과 김성근(金性根) 외 수명의 순사를 생포하기도 하였다.
홍범도가 거느리는 약 200명의 의병대는 1908년 2월 21일 일본군 갑산 수비대 26명, 갑산 주재소 일인 순사 부장 등 4명의 경찰, 도합 30명의 군경 합동 토벌대와 격전을 치렀다. 이들이 의병을 감히 ‘토벌’하겠다고 의병의 주둔지인 갑산군 읍사 세동(細洞), 속칭 세골(청지평)에 찾아 들자 부근의 고지에서 매복·공격하여 섬멸적 손실을 입힌 뒤 패주시켜 버렸던 것이다.
일제 경찰은 이 전투 직후인 2월 22일 ‘적과 충돌하여 고전 후 격퇴시켰다’고 허위보고를 하였으나, 3월 5일의 비밀보고에서는 그들이 패퇴하였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기록하고 있다.

21일 오전 4시 아베(阿倍, 아배) 순사부장과 마루오(丸尾, 환미)·이(李)·고(高) 세 순사는 이리에(入江, 입강) 소위 이하 26명의 병원(兵員)과 같이 강행 정찰로 세동으로 향하였던바 오전 6시 30분경 속칭 세곡(細谷: 청지평)이라고 하는 곳에서 약 200의 적과 충돌, 즉시 전개 교전하였다. 적은 가옥 및 견고한 지물(地物)을 이용하여 사격을 하였다. 아군은 쌓인 눈 2∼3척, 특히 40∼50도의 경사진 산중턱에 의지하여 간신히 자못 힘썼으나 오전 11시경 휴대한 탄약이 결핍함으로서 적을 격퇴치 못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빠진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하겠다. 본 전투 중 오전 9시 30분경 아베 순사부장은 오른쪽 대퇴가 골절되는 총상을 입었고 다른 병졸 2명의 부상자도 났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 대한 비밀보고)

위의 보고는 사설과 달리 일제 측의 피해가 축소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세곡 전투에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약 2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토벌대에게 많은 손상을 입혔고 소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무렵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는 서서히 의병활동의 전술전략과 투쟁의 방법론, 그리고 투쟁의 계속성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병들의 치열한 항쟁에 접한 일제가 무력진압의 방법만으로는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보고 의병에 대한 회유와 기만이라는 여러 가지 술책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친일파와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의병들에 대한 온갖 유혹과 협박·기만 그리고 소위 ‘귀순’ 공작을 전개하게 되었다. 1908년 2월 초순에 일제는 차도선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는데 차도선은 일제의 속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협적이며 동요적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일제의 이러한 기만적 술책에 관하여 차도선에게 누차 경고하였으며 단호한 항쟁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홍범도와 차도선은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세곡 전투의 일제보고서에서 다른 때와는 달리 ‘홍범도가 인솔하는 약 200명의 의병’과 교전하였다고 밝히고 있음에 비추어 이때 홍범도는 차도선과 구별되는 단독 의병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홍범도와 차도선 사이에 일제의 귀순공작에 관한 태도의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 2월까지도 포수 의병들의 항전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즉 2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단천 북방 약 70리 지점의 하농리(下農里)와 상농리(上農里)에서 사꾸마(佐久間, 좌구간) 특무조장이 거느리는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에는 약 300명의 군세를 유지하며 북청의 교별리(橋別里)에서 스기야마(杉山, 삼산) 소좌 지휘하의 보병 1개 소대, 기병 1개 소대, 산포(山砲) 3문으로 무장한 대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또 3월 11일에는 휘하의 한 의병부대가 혜산진 남방 30리 지점의 고거리(高巨里)에서 일본 경찰을 습격, 한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3. 의병부대의 재조직과 항전

(1) 일제의 의병 회유공작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에 함경도 지방에서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의병항쟁은 매우 치열하고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때는 바야흐로 의병의 봉기가 절정에 달한 의병 운동의 일대 고양기였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의병들의 투쟁은 전국연합 의병부대라고 할 수 있는 ‘13도 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체제의 성립과 그에 의한 서울 진격 및 탈환작전의 전개였다.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격 및 탈환 작전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던 의병들이 한 장소에 집결하여 대부대를 형성하고 일제 통감부와 한국 주둔 일본군을 몰아내서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7년 12월경 경기도 양주에서 성립하였다. 이때 전국 각 지방의 주요 의병장들을 망라한 부대가 결성되었으나 영남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호남지방에서 싸우고 있던 문태수(文泰洙) 의병부대는 그 지역의 일본군경과 투쟁하느라고 실제로 연합 의병부대에 가담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중부지역에서 일제와 항쟁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 의병부대가 조직되어 1908년 1월 말에서 5월 말까지 두 차례에 걸친 서울 진격작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작전은 한 때 거의 1만여 명을 헤아릴 정도의 대규모 의병부대가 참가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여기에 참가한 주요 의병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영남) 창의대장 박정빈(朴正斌)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진동(해서) 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관북 지방의 의병장에 정봉준이 지명된 것은 그가 1905년부터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명도가 높았고 또한 이인영과 허위 등 유생 출신 의병장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은 13도 창의대진소 체제의 결성 논의가 있은 뒤에 의병항쟁에 나섰으므로 서울 근처까지 이들에 관한 소식이 전달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삼수·갑산 등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주로 활동 하였으므로 중앙이나 남부지방까지 함경도의 포수 의병들에 관한 상세한 소식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며 또한 실제로 이들 의병부대가 전국 연합조직에 포함된다고 해도 천여 리나 되는 먼 거리까지 갈수 있었는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또 홍범도가 함경도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는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말려들어 투항한 뒤인 1908년 4∼5월부터였기 때문에 전국 연합 의병부대의 결성에 홍범도 의병장이 빠져있다고 해서 그의 명성에 손색이 간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1908년 1월과 동년 4월 말에서 5월 말에 걸쳐 두 차례의 서울 탈환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허위가 인솔하는 선봉대가 일본군과 동대문 밖에서 싸운 뒤에 본격적 작전을 전개할 때 후속부대의 도착이 늦어 1차 탈환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의병부대들은 1908년 4∼5월에 다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며 서울의 외곽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서울 탈환작전이었다. 이때 의병항쟁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가 함경도 지역에서 투쟁하고 있을 무렵 전국의 정세는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식량과 탄약의 결핍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인 1908년 2∼3월경은 13도 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이 일단 실패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시적으로 침체해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일제는 1907년 후반기에서 1908년 전반기까지 거국적으로 의병봉기가 전개되자 온갖 술책을 다 동원하여 이를 탄압하려 했다. 즉 한편으로는 무력진압 작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관리들을 표면에 내세워 기만적이며 야비한 회유 및 귀순 투항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무력 진압의 구체척인 책동을 보면 야만적인 초토화 전술로서 의병과 농민을 분리시키는 한편 일련의 교란 작전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포위하여 교통을 차단하고 반복하여 의병을 추격, 의병으로 하여금 기진맥진하여 투쟁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투항 귀순 공작으로는 ‘의병은 귀순하여 해산하라’는 순종 황제의 칙명을 내세워 선유사(宣諭使)를 각 도에 파견하였고 각 군에서도 각종 유화술책을 총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가 불가능하고 오히려 일본군경의 희생만 늘어가는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던 일본군 북부 수비관구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정세에 부응하여 대응전략을 변경,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회유하는 선무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일제의 회유공작은 1908년 2월 초순부터 본격화하였다. 즉 대한제국의 관리인 갑산 군수와 장진 군수 등을 앞세워 치밀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2월 5일 일본군 북청 수비대의 신풍리 분견소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는 부근의 각 사(면)장들을 시켜서 직접 차도선 등의 의병들에게 ‘귀순’을 교섭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때 일제는 신사적인 귀순공작만을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인한 항전의지를 굳히고 있던 다수의 의병들을 무력화시키는 효과적인 방책으로서 처·자식 등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하는 수법, 그리고 귀순하는 의병장에게는 고위 관직을 주며 보통 의병들은 집에 와서 무사히 살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지식 정도에 따라서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로 등용한다는 등의 유혹이 행해졌다. 또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는 매수공작 등 다양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유화적 술책에 의지가 굳지 못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동요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홍범도의 동지들인 차도선과 태양욱(太陽郁) 등도 일본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차도선 등은 황제가 보증하는 일본군의 회유책이 단지 의병과 일본군이 ‘상화(相和)’하는 것, 즉 일종의 휴전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인 한국관리들은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상화’하는 조약을 체결하자고 차도선·홍범도·태양욱 등에게 북청군 낙생사(樂生社) 사장을 보내서 교섭하게 했다. 당시 의병부대들은 탄약 및 식량의 결핍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으므로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부족하고 뜻이 강하지 못한 의병 가운데는 이 기회에 투항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홍범도는 이러한 경향을 우려하면서 일본군과의 협상을 단호하게 반대하였지만 차도선과 태양욱은 의병 항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서 일본군과 타협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차도선은 의병의 사기가 저하되고 얼마 있지 않으면 춘궁기가 도래하여 지방민들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질 형편에 처하여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 잠시 일제와 휴전한다면 후일 다시 기회를 보아 재봉기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차도선은 1908년 2월 12일 일단 협상할 뜻이 있음을 일본군에게 알렸으나 일본군의 진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다. 그러다가 그해 3월 6일 동료 의병장 양혁진(梁爀鎭)과 함께 자기 휘하 의병 25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본군 주둔지 신풍리(新豊里)에서 약 10리 떨어진 구신풍리에 가서 주둔하였다. 이리하여 다음날 신풍리에서 의병측에서는 차도선·양혁진·고운학(高云鶴: 중대장)·이성택(李聖澤: 서기) 외에 4명의 의병장이 참가하고 한국관청 및 일본군 측으로는 갑산 군수와 낙생 사장, 일본군 분견대장 무라야마(村山, 촌산) 중위, 미야자끼(宮崎, 궁기) 군의관, 통역 등이 참석하여 회담이 열렸다.
일본군 측은 종전에 보낸 서신에서 요구한 대로 ‘귀순’할 의병의 연명부(連名簿)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차도선은 “전원 귀순에 대해서는 확실히 조약을 하고자 하므로 2∼3일 체재하여 수속을 명료히 하려한다. 그러므로 오늘밤 중 연명부를 만들어 제출하기로 하겠다.”고 말했다.
차도선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의 정세에 순응하여 부대를 소부대로 개편한 뒤 막하 의병들이 몇 개의 단위부대로 분산되어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집결시키는 데에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또 홍범도처럼 일본군과 협상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병장도 있어서 신풍리로 올 때 연명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도선은 결국 그의 부하 의병 537명의 명단을 제출하였고 일본군 측은 537매의 ‘가면죄증(假免罪證)’을 주면서 귀순시에 정규 ‘귀순증’을 발급해 주어 귀순증을 소지한 의병은 처벌하지 않고 본래의 직업에 종사하도록 허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의병이 갖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는 귀순증을 받고 1개월간의 격납(格納) 유예기간을 준 뒤 의병들이 약속한 장소의 민가에 무기를 집어 넣어 두기로 합의했다. 차도선은 이러한 협상이 이루어지자 홍범도와 태양욱도 ‘귀순’하도록 권유하기로 하고 3월 9일 신풍리를 떠나 의병의 본대로 돌아갔다.
일본군의 간교한 술책에 빠진 차도선은 홍범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양욱과 함께 부하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이미 일본군과 약속한 대로 3월 17일 신풍리에 있는 일본군에 ‘귀순’하였다. 일본군은 이들이 ‘귀순’하자 무장해제기간 1개월의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즉시 전 의병들을 위협하여 무기를 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태양욱을 총살하고 차도선·이성택·김덕순(金悳順) 등은 홍범도를 ‘귀순’시키는 데에 쓸 미끼로서 체포하여 구속해 버렸다. 차도선과 태양욱 등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었다. 이날 의병들이 일본군에 빼앗긴 무기는 화승총이 136정, 그리고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총으로서 30년식 총이 3정, 단발총이 9정, 10연발 총이 1정으로 도합 150여 자루나 되었다.
차도선 등 상당수 의병들이 이 시기에 일제와 협상에 임하게 된 배경은 의병투쟁을 계속하기에 너무 어려운 현실적 어려움 이외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일제 측의 집요하고도 기만적인 포섭 공작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핵심을 이루는 포수들의 의병진영 투신 동기가 유생 주축의 의병진영보다 튼튼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포수 의병들의 봉기 동기가 반외세적 입장에 서서 일제를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철저한 사명의식과 애국심에서 발로된 것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자위권 수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요소가 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은 일제 측이 강압적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짓밟을 때는 보수적 유림 출신의 지도자가 이끄는 의병 부대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협박이나 금품 제공, 혹은 좋은 조건의 제시 등 기만적인 회유책으로 나올 때는 적전에서 쉽게 분열될 수 있다는 약점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산포수와 농민·광산 노동자 등 평민 계층으로 이루어져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조하는 주자학적 전통의 학문적 소양이나 깊은 지식도 없었고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의해 자신들의 직접적 생계가 위협받게 되자 이에 크게 반발해서 과감히 일본군과의 항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가 무력탄압의 수단 대신 유화책을 쓰게 되자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동요하는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차도선 등의 의병들이 이때 단순히 일제에 투항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 측의 다음과 같은 자료로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갑산·삼수 부근 폭도의 수괴(首魁) 차도선·태양욱 및 그 부하 약 200을 각종 수단을 다하여 3월 17일 신풍리에 초치하고 귀순의 성의에서 나온 것인가 아닌가를 취조한바, 신풍리 분견대장 무라야마 중위의 열심한 귀순 권유의 목적으로 우선 차도선과 친선을 맺고 누차 왕래하였으나 그들은 귀순의 성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일본군대와 상화(相和)하는 것으로 알고 무기를 쉽게 납부할 의도가 없고 또 부하들에 대해서는 일군과 화약(和約)하고 또 한국인민 특히 일진회원을 참살, 혹은 금전 양식을 약탈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날 차도선 및 태양욱에게 무기의 납부에 대하여 말로 잘 타일러서 이를 압수하기로 했다. 이때 태양욱은 저항하므로 참살하고 차도선은 그를 이용하여 그의 동료 홍범도 등에게 귀순을 권고 시킬 목적으로 당분간 신풍리에 억류키로 하였다. 이후 홍범도가 신풍리 부근에 이르른다면 그 정황에 따라 해당 지점 부근에 출장하여 임기(臨機)의 처치를 취하고자 한다.
(일본군 제13사단 참모부의 1908년 4월 6일자 한국 내부(內部)에 대한 통보에서)

우리는 위 문서를 통하여 차도선 등이 일본군을 접촉한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홍범도-차도선 등을 속임수로서 대응하여 처치하겠다는 야비한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2) 홍범도 가족의 수난


일본군은 그 뒤 홍범도를 ‘귀순’시키기 위하여 1908년 3월 20일경 후치령 아래 노은리 인필골에 있던 처가를 습격하여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두 자식들을 붙잡아서 억류해 놓고 홍범도를 위협하며 투쟁을 중단하고 투항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공작에는 일진회원으로서 일본군 북청 수비구 산하의 제3순사대장인 임재덕(林在德), 종전에 구한국군 참령(參領)으로 북청 진위대의 대장을 역임한 뒤 일본군의 휘하에 들어가 경시(警視) 직책을 맡고 있던 김원흥(金元興) 기타 밀정 최정옥 등이 주요 책임자로 참여하여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범도(홍범도)의 처자를 불법으로 구속하여 홍범도를 위협하고 유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였던 사실은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이 4월 30일 임재덕에게 보낸 다음의 명령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목하 구류중인 차도선의 일군(一群) 김기학(金基學)·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의 처자 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 것을 허용한다. 단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함부로 석방하면 안된다.

이에 따라 일제의 앞잡이 임재덕이 거느리는 순사대는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남은 홍범도 등 의병들이 잠복해 있는 갑산군 동인사(東仁社) 부근의 창평리(蒼坪里)라는 마을에 일본군과 함께 들어와 주둔하였다. 그 뒤 이들은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한때 절에 있어서 글을 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그녀를 협박하여 남편에게 편지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임재덕은 이씨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범도(홍범도) 모자를 어육(魚肉)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이씨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요지의 편지를 쓰도록 윽박질렀다.

당신이 일본 천황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에게 공작 벼슬을 주려고 하니 항복하십시오. 항복하여 공작 벼슬하게 되면 나도 좋겠고 당신 자식도 귀한 사람의 자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씨는 억지로 강요하는 주구의 말을 완강히 거부하며 버티었다. 이씨는 말했다.

나 같은 계집이나 아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 뿐인데, 내가 글을 쓴다고 해도 영웅호걸인 내 남편은 나 같은 아녀자의 말을 곧이 듣지 않는다. 너희놈들은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절대로 글을 맡지 않는다

그러자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이씨의 발가락 사이에 불을 달군 심지를 끼우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반죽음을 당하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친일 매국적과 일본군은 이씨와 양순(홍양순)·용환(홍용환) 등을 갑산읍으로 후송시키고 마치 범도(홍범도)의 아내 이씨가 쓴 것처럼 해서 편지 한통을 작성했다. 그러고는 한인 순사로 하여금 그 편지를 홍범도 부대가 머물고 있는 용문동 산간에 전달케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그 편지를 보고 일제에 귀순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분하여 편지를 가져왔던 주구를 처단하여 버렸다.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보냈던 사람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 편지가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의병진영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이 간 뒤에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홍범도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억류되고 있었다. 일제와 그 주구들은 1908년 5월초 며칠 사이에 여덟 명을 파견해서 여덟 통의 편지를 홍범도 의병진영에 보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들이 의병들에게 잡혔거나 피살된 것으로 단정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흉계를 짜기에 이르렀다. 아들 양순(홍양순)이를 동원하여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임재덕과 김원흥, 그리고 일본군 측에서 양순(홍양순)을 범도(홍범도)에게 보내려고 했던 데는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즉 이들이 홍범도를 귀순시키고자 하는 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하였지만 무작정 한정 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양순(홍양순)이를 보내서 추후 그들의 방침을 결정하는 데 지표로 삼고자했다. 이들은 양순(홍양순)이 일단 가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대신에 그가 가져간 편지는 틀림없이 범도(홍범도)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순(홍양순)의 어머니와 동생을 구속하고 있으므로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가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리라고 보았다. 일본군과 친일 매국적들은 만약에 양순(홍양순)이 범도(홍범도)에게 가서 소식이 없으면 그것은 양순(홍양순)이가 홍범도 의진에 가담한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제는 범도(홍범도)가 귀순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무력진압의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양순(홍양순)이는 편지를 갖고 아버지에게 가기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일제의 협박을 못이겨 결국은 아버지가 있는 용문동으로 향하였다.
양순(홍양순)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 홍범도가 있는 곳을 찾아 갔다. 범도(홍범도)는 잡혀갔다던 큰아들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고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과 그 앞잡이인 주구들이 쉽게 양순(홍양순)이를 풀어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도(홍범도)의 그런 짐작은 적중했다. 특히 범도(홍범도)는 양순(홍양순)이 가져온 편지를 읽고 대노하였다. 자기에게 귀순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떻게 의병장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뻔뻔스럽게 태연하게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양순(홍양순)을 크게 꾸짖었다.

이놈아! 네가 전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만 네가 일본감옥에 3∼4삭을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자고 하는 놈이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 하겠다!

하고는 평소에 갖고 다니던 소총으로 양순(홍양순)이를 향해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때 범도(홍범도)의 옆에 있던 부관이 붙잡아서 양순(홍양순)이는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귀의 일부가 총에 맞아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나중에 양순(홍양순)이는 어머니와 동생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일본군과 임재덕 등의 위협에 못이겨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여 겨우 범도(홍범도)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단호하고도 결연한 항쟁의지는 다른 부하 의병들에게 전해져 큰 감동을 주었다. 양순(홍양순)은 그 뒤 범도(홍범도)의 의병진영에 가담하여 다시 초급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홍범도는 일본군과 한국 관변의 온갖 유혹과 협박, 기만적 계략과 탄압을 철저히 배격하고 끈질기게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갑산읍으로 끌려갔던 아내 이씨는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대가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숨지고 말았다. 나중에 이씨를 고문치사케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던 김원흥 등은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잡혀 처단되지만 이씨의 옥중투쟁과 순국은 의병장의 아내다운 의연한 모습과 장렬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3) 의병부대의 재조직


차도선 등 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속아서 피체되거나 피살되고 혹은 해산하여 귀가해 버린 뒤 함경도 지방의 의병투쟁은 실로 막대한 타격을 받아 험난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제에 대한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다.
홍범도는 봉기 이후 1908년 3월 중순까지 차도선 등과 같이 공동으로 싸웠지만 이제는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며 부대를 재편성, 항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4월부터 5월 중순 사이에 삼수·갑산·무산·북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담하지 않은 산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참가시켰다. 또한 의병부대들을 소부대로 나누어 함경도 산간의 각 마을에 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 받아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4월중에는 다시 의병대의 규모가 400여 명으로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주목되는 사실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스스로 무기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즉 갑산의 동점(銅店)에서 나는 구리를 재료로 해서 화승총 탄환은 물론 일부 신식 무기의 탄환을 제작하기도 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구식 대포도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박원희의 증언에 의함). 하지만 그러한 자체 조달은 원활히 이루어 지지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진행되지도 못하였다.
1908년 4월 12일 홍범도 의병부대는 오족리(吾足里)에서 일제의 순사대 10여 명과 교전하는 것을 기점으로 재차 활기찬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에는 삼수 서방 지점에서 약 100명의 병력으로 일제 헌병대와 접전하여 큰 손실을 입혔다. 같은 날 다른 휘하 의병대가 함흥을 기습했는데 이들은 일본군 포병대의 숙소를 방화하여 2개동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제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함흥까지 대담무쌍하게 기습한 작전이었다는 측면에서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함흥 일대에 홍범도 의병 부대의 명성은 널리 퍼져갔고 반대로 일제는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4월 27일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평안북도 강계의 평남진(平南鎭)으로 진출하여 강계수비대의 일병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5월 2일에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일병 3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소총 30정, 군도 두 자루, 탄환 300개, 권총 네 자루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4) 일제 주구배의 응징


잠시 침체에 빠져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는 국경지대인 삼수·갑산 일대는 물론 함흥지방까지 출몰하며 다시금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중좌는 홍범도 의병대의 눈부신 활동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전히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는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비구 산하의 제3 순사대장 임재덕 등이 활동하는 곳으로 경시 김원흥 등 11명을 추가로 파견하여 홍범도의 귀순 공작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무렵 임재덕은 범도(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을 보내서 홍범도를 귀순시키려고 했으나 양순(홍양순)이가 돌아오지 않아 범도(홍범도)를 귀순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흥이 생로 상관의 지시를 받고 와서 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다시 추진하려 하자 여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김원흥은 11명의 일·한인(일본인·한국인) 군경을 이끌고 임재덕 등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합류했다. 김원흥은 5월 1일 북청을 출발, 후치령을 넘어 황수원(黃水院)·신풍리를 거쳐 4일에는 임재덕과 일본군 등이 머물고 있는 창평리에 도착하였다. 그 후 임재덕과 김원흥 등은 약 300명의 홍범도 의병부대가 창평리 서북 약 30리 지점의 도하리(都下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뒤 이들은 도하리의 더덕장 거리에 있는 김치강의 집에 와서 주둔하고 부근의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싸움할 것 같으면 싸움하고 귀순하기 원하거든 3시간 내에 계약을 체결하자.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사포로 너희 군대를 모조리 없애버리겠다!

이 소식이 의병부대에 전해지자 온 부대는 자못 떠들썩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군은 위력 있는 최신식 무기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의병부대는 대부분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탄환이 모자랐고 식량도 넉넉지 않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기계(奇計)로써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작전계획을 짰다. 이에 따라 그는 5월 4일 의병 가운데서 가장 사격을 잘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 70여 명을 선발하여 도하리 근처의 더덕장 거리 흙다리(土橋)에 매복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가 귀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여 변장하고 잠시 이름을 바꾼 뒤 김치강의 매제 집에 가서 김원흥에게 직접 그 편지를 전달했다.
김원흥은 홍범도가 이름을 숨겨서 변장하고 찾아온 줄도 모르고 그 편지를 보고는 씩 웃으면서 “너의 소원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여주마!” 하고는 일본군과 파수보는 경찰 15명을 김치강의 집에 남겨놓고 일·한인(일본인·한국인) 순사 20여 명을 인솔하여 범도(홍범도)가 유인하는대로 흙다리목에 도착하였다. 김원흥 등이 의병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소에 이르자 총소리가 콩볶듯하며 사방에서 모진 광풍이 일어난 듯 의병들의 기습적이며 집중적인 공격이 재빠르게 단행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작전으로 의병들은 김원흥 등 6명을 사로잡고 이들을 따라 온 일본인 경찰과 한인 보조원 등 5∼6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범도(홍범도)와 가까운 노은촌 출신 의병 고응렬(高應烈)이 전사했고 조인각이 부상당하였다.
홍범도는 김원흥을 체포한 후 더덕장 거리의 여러 사람과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꾸짖었다.

김원흥 이놈! 네가 수 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 원이나 받아 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 산간에서 감자 농사하여 먹고 지내는 것이 도리이거늘 7조약(한일신협약, 1907)·9조약에 참여하여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처한다. 조선 사람들아 들어보아라! 일본놈은 남의 강토를 제 강토로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하자! 김원흥·임재덕 너희 같은 역적놈은 네 아비·어미 다 너와 같이 씨를 없애야 되겠다!

범도(홍범도)는 김원흥을 의병투쟁의 제물로 삼아 공개 처형함으로써 온 동네 사람들에게 의병들의 활약상을 알리고 일제의 침략에 앞장서는 부일배들은 살아날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알렸다. 김원흥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될 최소한의 양심을 유지하기는커녕 일제의 주구로 변신하여 겁도 없이 홍범도를 ‘귀순’시키려다가 도리어 철석같이 강인한 투쟁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던 범도(홍범도)에게 마침내 응징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귀순 권고의 목적으로 김원흥 등 한국인 주구들을 파견하였던 일본군 수비대에서는 이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홍범도 의병부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결과적으로 의병들의 기세만을 크게 올려준 셈이 되었으므로 매우 당황하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청 수비구 사령관 하세가와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토벌’에 광분하며 관구 휘하의 부대를 총출동 시켜 의병대의 진압에 필사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5) 의병부대의 개편과 분산 활동


홍범도 의병부대가 재기하여 위세를 되찾고 있을 무렵인 5월 7일, 일제에 속아서 일시적으로 ‘귀순’하였던 차도선 의병장이 갑산 헌병분견소에 잡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그곳을 탈출하여 다시 의병 진영에 가담하여 왔다. 이는 매우 고무적 현상이었다. 이 사건은 의병들에게 일본군과 대한제국의 매판적 관료들이 떠들어 댔던 귀순공작의 기만성과 야만성을 올바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도선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범도(홍범도)와 의병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으며 다시 적과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이 왔을 때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차도선이 진심으로 의병투쟁에 다시 나서려고 했을 때 과거의 신의와 공적을 생각하고 적극 환영하고 지원하였다. 이제 차도선은 다시금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차도선의 의병진영 가담은 홍범도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높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차도선의 활동은 예전만큼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때의 실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차도선은 가끔 홍범도 의병대와 같이 싸우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독자적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홍범도는 5월 16일 500여 명의 대부대를 인솔하여 장진의 산정개(山亭開)에서 갑산으로 이동하는 장진분견소 일병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2일에는 200여 명의 휘하 지대가 갑산읍 서방에서 갑산수비대와 교전하였다. 또 그 달 28일에는 갑산군 괘탁리(掛卓里)에서 15기의 일군 기병대와 접전하여 전멸시키고 말 다섯 필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도 3명이 전사했다.
이 무렵 일본군 각 부대의 출동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5월 19일에는 아오또 대위 이하 45명, 21일에는 가따오까(片崗) 중위 이하 45명이 북청을 출발하여 후치령을 거쳐 신풍리로 갔고 또 23일에는 미끼(三木, 삼목)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하사 이하 10명과 기병 장교 이하 12기의 기병, 그리고 쓰나시마(莎島, 사도) 포병대가 역시 신풍리로 출동하였다. 같은 날 미야우찌(宮內, 궁내) 중위 이하 45명은 통파령(通坡嶺)을 거쳐 신풍리로 향하였는데, 이들은 앞서 출발한 각대와 신풍리에서 합류하여 미끼 소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앞서 출발한 각대와 신풍리에서 합류하여 미끼 소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들 부대와는 별도로 이와다(岩田, 암전) 중위 이하 30명은 이원·단천 방면으로 출동해서 미끼 소좌가 이끄는 토벌대와 서로 협동케 하였다.
이러한 약 250명 내외의 일본군 보·포·기병 합동의 정예 토벌대 이외에 북청 수비구 산하의 순사대까지 합치면 거의 300명을 넘는 대규모 군경 연합 토벌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 군경은 1908년 5월 하순부터 북청과 갑산·삼수·혜산진 등지의 여러 곳에서 홍범도가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포위하고 끈질기게 파상공격을 계속 하였다. 이들은 ‘의병 토벌’을 내세웠지만 가는 곳마다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고한 양민에게까지 피해를 주었고 조금이라도 의병들에게 협조하는 징후가 있으면 무차별적인 초토화 전술을 구사하여 온 마을을 불태우는 등 산간 지방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소위 일제의 ‘비민(匪民)분리’정책의 결과 홍범도 의병대는 직접적 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필수적인 주민들의 협력을 받기가 어려워지고 각종 군수물자가 결핍하여 전에 겪지 못했던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홍범도는 5월 하순 갑산에 있는 동안 휘하의 김충렬(金忠烈)·조화여 두 사람에게 2만 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러시아령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있는 이범윤(李範允)에게 파견,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그것은 갈수록 탄약과 무기가 부족하여 의병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홍범도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일부 동지와 부하들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이 너무 힘들어서 해산하고 싶어 하는 회의에 빠지자, 불굴의 투지로서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도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요지의 신념을 역설하여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그러한 상황은 아래의 자료를 통하여 더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같은 의병진에 있던 원석택(元錫澤)이 홍범도에게 원망하여 말하기를 “최초에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자네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런 방침·계책도 없이 다만 가련한 인민을 모아 아무 이익도 없고 쓸데없이 다수 동지를 사상시킬 뿐으로 점차 우리의 세력은 실추하고 이에 반해 일병(日兵)은 점점 강세를 더하니 이제야 말로 우리는 살아서 거처가 없고 죽어서 묻힐 곳이 없다. 차라리 일찌감치 전대(全隊)를 해산하여 개인의 생계를 꾀하는 수밖에 길이 없을 것이다.” 운운하니
범도(홍범도)가 말하기를 “옛날 임진(임진왜란, 1592)의 변(變)에서도 의병이란 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드디어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금일의 사정은 우려 세력이 날로 불리한 것 같으나 앞서 정일환(鄭日煥)·임재춘(林在春) 등을 보내어 청지(淸地; 淸國)에서 탄약 보급의 길을 강구하고 있으며 또 다른 동지도 서로 만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얼마 안가 이들 사람과 삼수에서 회합하여 후의 계획을 정하고 장래의 방침을 정할 것이다.” 운운하고 출발하였다.
(1908년 11월 탄약구입 차 중국으로 갔던 변해룡(邊海龍)이 검거된 뒤에 진술한 공술서)

위의 기록에는 원석태의 범도(홍범도)에 대한 약간의 비관적인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변해룡이 일제에 체포된 다음 진술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 홍범도의 의병투쟁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원흥 등이 범도(홍범도)의 위계(僞計)에 의해 섬멸된 뒤 일제는 범도(홍범도)에 대한 귀순공작을 단념하고 이제 철저한 ‘무력토벌’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범도와 참모들의 끈질긴 항전의지, 그리고 일제 침략자와 매판·봉건적 관료들의 수탈에 항거하고 있던 하층 민중의 적극적 성원에 힘입어 홍범도 의병부대는 여전히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병보대의 규모는 1908년 4월 말에 500여 명이었고 5월 중순에는 650∼700명으로 증강되었다. 이렇게 막강한 의병대를 갖춘 홍범도는 300여 명 대병력의 일제 토벌대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가 처음에 봉기할 때는 연로한 임창근과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 등을 우대하여 부독(副督)이라는 직책으로 행세하였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범도(홍범도)는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과감히 항쟁하였다.
괘탁리(홍범도에 의하면 능구패태이) 전투에서 일본군 기병부대를 무찌른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말 장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의병 진영을 새로이 개편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이때 장진 연화산(높이 2,355미터)의 병풍바위골에서 직접 인솔하던 의병 이외에도 함경남도 지방에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활동하고 있던 군소 의병부대를 소집하여 통합, 자기 휘하에 재편성하였다. 병풍바위골 의병대 모임에는 함경도 남부의 고원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동섭(尹東涉) 부대와 영흥·덕원·안변 등지에서 싸우고 있던 노희태(盧熙泰) 부대가 참가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참가하여 700∼800의 많은 숫자를 헤아렸다. 이 병풍바위골은 범도(홍범도)가 해외로 건너가기 전 상당기간 동안 의병부대의 거점 및 병참부가 되어 의병들의 비밀스런 회합장소가 되었다.
홍범도는 이제 명실 공히 함경도 지방의 의병대장으로서 여러 의병장과 의병부대를 지휘하거나 혹은 같이 연합하여 일제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다. 연화산에 집결된 의병부대를 그는 11명의 중대장과 33명의 소대장 편제로 재편성하였다. 이때 범도(홍범도)는 다음과 같이 각 중대에 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장 원창복[일명 元基豊(원기풍)]은 장진의 청산령(높이 2,084미터)을 지키면서 아침·저녁으로 (일본군의) 장진 군대가 삼수로 넘어오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했다가 비밀리에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시오!
제2중대장 최학선(崔學善)은 응덕령(鷹德嶺)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일본)놈과 앞에서 시킨대로 하소!
제3중대장 박용락[다른 자료에는 林用洛(임용락)으로 나옴]은 안장령을 지키고 함흥·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4중대장 조병용은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삼수?)·단천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와 같이 하소!
제5중대장 유기윤[일제 측 자료에는 劉基云(유기운)]은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앞에서 지시한 대로) 그대로 쫓아 하시오!
제6중대장 최창의는 (북청의) 후치령을 지키고 앞서와 같이 시행하시오!
제7중대장 송상봉(宋相鳳)은 (장진의) 부걸령(부전령: 높이 1,445미터)을 지키되 너는 꼭 내가 명으로 시키노라! 남시령을 지키고 길주로, 갑산 허리로 드나드는 놈과 싸움을 하되 남을 10명 죽이지 말고(죽이기보다는) 내 군사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너를 극력 주선으로 부탁하노라!
제8중대장은 삼수(군의) 신파(신갈파진) 목재(가)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아 넘기시오!
제9중대장은 (북청의) 통팔령(높이 1,445 미터)을 지키고 홍원·북청으로 넘나드는 놈과 앞서 계약한 대로 꼭 그대로 하면 우리의 성공이 잘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재편성한 의병부대의 진용과 주된 작전구역 및 활동 방침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각 지에 분산시켜 활동케 한 9개 중대의 배치를 보면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의 중요한 걸목이나 험준한 요새지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8중대가 압록강 방면을 경계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가 목재창을 설치하고 압록강을 통해 목재를 약탈해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홍범도는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이권이 외세에 침탈당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경제적 침략도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지에 흩어져서 활동케 한 병력 이외의 나머지 의병들은 주력부대로서 범도(홍범도)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사방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과 접전하고 경우에 따라 위에서 열거한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일개 중대에는 보통 2∼3개 소대가 있었고 한 소대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40∼50명의 의병으로 구성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때 홍범도의 아들인 양순(홍양순)이가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나란히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각 중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력부대와 수시로 연계를 취하며 일정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경도 남부 개마고원 각지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에 의병들을 분산 배치하여 유격전을 벌이도록 한 것은 의병의 대병력이 한꺼번에 집결되어 있으면 일본군의 추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또 산골에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홍범도가 직접 이끌었던 의병대의 조직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의병장 밑에 부의병장·검사·유사(遊士)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단위는 분대·소대·중대의 체계로 조직되었으며 독립부대로 대포령(大砲領)이 있었다. 특히 각지의 중요한 곳에 흩어져 활동하는데 효과적인 연락과 일정한 지휘체계의 확립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일은 유사대라는 특수한 조직을 따로 두어 각 의병중대의 감독과 작전에 따른 연락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분산과 주요 험로를 거점으로 한 의병의 재배치는 일본군 토벌대의 공세에 부응한 자구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장기 항전인 지구전으로 전환하게 되는 준비단계의 의미가 있었다. 이제 의병부대는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하며 기동하여 게릴라식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의병부대를 개편 배치한 홍범도는 중대장 등 주요 간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여 엄격한 명령 수행을 당부하였고 또 의병장 및 의병들로 하여금 의병의 선서문을 낭독케 하여 의병으로서의 짜임새 있는 격식을 갖추었다. 이후 범도(홍범도)는 강택희[姜澤熙: 일명 姜澤基(강택기)]·원석택(元錫澤)·정도익(鄭道翼) 등의 본부 참모진과 직속 의병을 거느리고 장진 부근이 관할 구역인 다른 중대 의병부대와 함께 장진군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당시 연합의병대의 군세는 약 350명이었다. 이때 나머지 약 300∼400명의 의병대는 원기풍(元基豐)·최학선(崔學善) 등의 지휘를 받게 하여 북청 등 각 방면의 지정된 작전구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홍범도가 일본군의 기만전술과 회유공작에 빠져 귀순하기는커녕 대규모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곳곳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의병들을 규합하며 새로운 작전을 개시하게 되자, 일본군은 크게 낭패하여 북부수비관구와 동부수비관구 병력을 총동원하며 6월과 7월에 걸쳐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한 ‘대토벌’을 전개하게 되었다.

(6) 두꺼비 바위(蟾岩), 쇠점거리(金昌) 전투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30일경 장진군 능골 어귀에서 일본군의 한 부대가 지나고 있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전투는 부대의 개편 직후에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는 점에서 의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중요한 전투였다. 홍범도 의병대는 6월 2일에 역시 장진 다랏치(達阿峙) 금광 앞의 두꺼비 윗골(蟾岩)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16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 4∼5명이 전사했다. 또 같은 날 약 70명에 달하는 휘하의 한 의병대는 함흥 동북 부전령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범도(홍범도)는 두꺼비골 전투 직후 장진군으로 진출하였던 자기 휘하의 의병부대를 다시 2개 부대로 나누였다. 즉 자신은 의병 약 180명을 이끌고 북청군 안산(安山) 방면으로 향하였고 나머지 약 160명은 송상봉·강택희 등의 지휘 하에 장진 북방으로 가게 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의병대와 유기운이 이끄는 소부대 연합의 150여 의병들은 두꺼비골 전투 이후 함흥 초리장→동고촌 신성리→홍원군 영동을 거쳐 6월 10일에는 북청 통패장골의 쇠점거리(金昌)로 진출하였다. 이곳에는 일본군 기병·보병 연합부대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여기에서 적군 30여 명과 격전하여 13명을 사살하고 닭 50마리·일본과자 열 상자·백미 30말 등 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부장 최경률(崔京律) 등 의병 3명이 전사했으나 특이한 사실은 일본군 수비대장의 아들을 생포한 점이었다.

(7) 군자금 모집작전


의병들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대규모 일본군경의 추격을 받으며 무력투쟁을 벌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가 식량 문제였고 다음으로 탄약과 무기의 부족이었다. 이런 형편 가운데 군자금마저 제대로 지원되지 않고 있었으니 어찌 그 어려움을 말이나 글로써 다 밝힐 수 있으랴!
홍범도는 그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군자금을 징발하는 일에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가 군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주로 악질적 친일파와 일진회원, 부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악덕 지주나 상인과 같은 부자, 그리고 권력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관리 등을 습격하여 그들로부터 자금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5월 하순에 부하 두 사람을 연해주에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했다. 하지만 의병들이 계속해서 싸우려면 많은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6월 초에 함흥과 홍원 지방을 지나며 친일파와 부패한 관리를 습격하여 응징하고 군자금을 징발할 계획을 세웠다.
6월 6일경 홍범도는 함흥군 초리장(草里場) 유채골에 사는 악질 부자의 집을 공략하여 일본돈 28,900엔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같은 군의 동고촌 신성리(新成里) 친일파 박면장의 집을 기습하였다. 박면장은 일진회원이었고 그의 맏아들이 일본군 수비대의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의병 200여 명을 인솔하며 그날 밤 박면장 아들이 이끌고 온 일본군과 한국인 보조원 등 수백 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1/4이 살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전투의 와중에서 박면장의 가족은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6월 8일경에는 함흥군에 인접해 있는 홍원군 영동으로 진격하였고 의병부대는 그곳의 지산당에 주둔시키고 범도(홍범도)는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친일 주구배 박원성의 집에 접근하였다. 집 근처에서 범도(홍범도)는 변장한 뒤에 홀로서 대담하게 박원성의 집에 들어갔다. 박원성은 의병들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일본군 헌병대에 연락, 헌병 4명을 급료를 주어가며 파수꾼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문간에서 헌병이 심문하자 주위에 사는 백성으로 볼 일이 있어 왔다고 대답했다. 그가 안에 들어가니 함흥 좌수(座首) 이경택과 홍원 군수 홍가, 그리고 박원성 등 악질 부일배 세 놈이 다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범도(홍범도)가 들어가자 그들이 물었다.
“너는 웬 놈이냐?”
그러자 범도(홍범도)는 재빨리 품속에서 권총을 끄집어 내며 말했다.
“나는 산간에서 나무 밑을 큰 집 삼고 지내는 홍범도 입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너희가 모르겠느냐? 빨리 나의 (명령한) 조처를 빨리 조처하시오! 이번 내 일이 바로 되면 좋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방안에 주검(시체)이 몇이 될 것을 모르겠소! 빨리 조처하시오!”
그러자 박원성은 깜짝 놀라면서도 한참 있다가 자기 처와 상의하여 일본돈 3만 엔을 내다 주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돈을 받아 전대에 집어 넣고 박원성을 앞에 세운 뒤 그 집을 빠져 나와 싹근다리까지 와서 박원성을 놓아 주었다.
위의 사례는 홍범도의 군자금 모집을 설명해 주는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이 같은 예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홍범도의 일지에 따르면 그 해 7월 중순에도 위와 비슷한 지역에서 군자금을 압수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즉 홍원군의 전진포(前津浦)에 있는 부패관리 홍원 군수를 기습하여 일본돈 37,000엔을 압수하였고 함흥군의 한 주사(主事)를 공략하여 역시 3만엔 가량의 자금을 끌어냈던 것이다.
홍범도가 가장 많은 액수의 자금을 획득한 것은 7월 초 장진에 있는 달아치 금광을 공격하여 일군 수비대 6명을 처단하고 금괴 1,994개를 빼앗은 경우였다.
홍범도의 이러한 군자금 획득 투쟁은 종전에 그의 투쟁이 주로 반일(반외세)적 성격만을 지녔던 것으로 해석해 왔던 기존의 연구시각에 의문을 제기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홍범도 의병부대 투쟁의 성격은 반봉건·계급투쟁적 성격을 띠는 요소도 있다고 하는 점이다.

(8) 노희태 의병부대와의 연합 전투와 아들 양순의 전사


홍범도는 1908년 6월 12일 함경남도 안변·덕원·영흥 일대에서 활약하던 노희태(盧熙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취하게 되었다. 노희태는 원래 진위대의 하사였는데 군대 해산 이 후 1907년 말부터 약 5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주로 함경남도의 남부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42∼3세가량이어서 범도(홍범도)보다 3∼4세 연상이었고 기골이 장대한 용사였다. 그의 의병부대도 1908년 중반에는 탄약이 떨어지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혀 다른 의병들과의 연대가 절실히 요청되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범도(홍범도)가 누차 서신을 보내 같이 싸우자고 했을 때 선뜻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의 의병대는 앞서의 의병 연합회의 때 거리가 멀고 또 일본군과 싸우느라고 여유가 없어 장진 방면으로 오지 못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 무렵 정평 지방으로 남하하였고 노희태 의병부대는 북상하였기 때문에 양 부대가 합류할 수 있었다. 양 부대가 합치자 군세는 약 300명으로 증가하였다. 홍·노(홍범도·노희태) 연합 의병대는 이날 정평의 한대골이라는 곳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을 치러 수십 명을 살상하여 패주시켜 버렸다. 이때 의병도 4명이 죽고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같은 날 예하 40여 명의 한 의병대가 강계에서 장진의 몌물리(袂物理) 분견소 일병과 교전하였다.
6월 16일(음력 5월 18일) 홍범도 의진에서 막하 중대장으로 활동하던 아들 양순(홍양순)이는 의병 20여 명을 데리고 정평의 바배기라는 곳에서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적은 영흥 경찰서 분서 순사와 일본군 수비대 연합의 10명 내지 20여 명이었다. 의병들은 분전하였다. 이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답게 싸우느라고 앞장서서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불행히도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다른 의병 한 사람도 전사하였다.
양순(홍양순)과 같이 싸웠던 의병들로부터 아들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범도(홍범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더욱이 양순(홍양순)의 어머니도 5월 중순경 갑산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아들마저 죽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의병대장으로서 범도(홍범도)는 자기의 슬픈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수백 명 의병들의 대장이요 최고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는 양순(홍양순)의 죽음을 자기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막하 의병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다친 다른 의병들 가족의 마음도 자기와 같으리라!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많은 의병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비로소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린 양순(홍양순)이었지만 그동안 장하게도 어른들과 똑같이 고생하며 의병투쟁에 나섰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늘 그를 엄하게만 대했고 아버지로서의 정은 별로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몹시도 후회되었다. 범도(홍범도)는 뒷날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정평 바맥이에서 50명 일병과 싸움하여 101명 잃고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고 거차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 때 양순(홍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홍양순)이 죽었다….

위에서 홍범도는 16일의 정평 전투에서 의병이 패전한 것 같이 회고하고 있으나 일제 측 기록을 찾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뒷받침된다. 특히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조선 폭도토벌지』를 보면 양순(홍양순)이 주도했던 전투는 의병 2명만이 전사한 것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정평 전투 직후 홍범도는 노희태 군사를 데리고 함흥의 명태골을 거쳐 천불산에 있는 개심사(開心寺) 절로 들어가 탄약이 다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도 없는 노희태 의진으로 하여금 그대로 거기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의병들을 인솔하여 장진군 남사의 실령 어구에서 일병과 접전하여 16명을 사살하고 소총 16정, 탄환 여섯 상자를 노획하여 다시 천불산으로 돌아왔다. 범도(홍범도)는 빼앗은 탄약 가운데 2,400발을 노희태 의병부대에게 주어서 활동하게 하였다. 노희태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홍범도 자기 의병들도 탄약과 무기가 모자라 쩔쩔 매는데 어찌하여 자기 부대에게 실탄을 준단 말인가?

(9) 갑산 간평 전투


홍범도는 6윌 중·하순경 의병부대를 이끌고 갑산 상남사의 숯치기골이란 깊은 산골에 들어가 3일간을 머물렀는데 계속해서 비가 퍼부어 큰 고생을 하였다. 그 뒤 홍범도는 극심한 식량난을 견딜 수가 없어 자기부대를 거느라고 갑산의 간평이란 곳으로 내려 왔다.
그 곳 사람들은 진심으로 의병들을 환영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가난한 산골 사람들이어서 좋은 음식을 차려서 의병들을 대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평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던 주식인 묵은 귀밀과 감자 등의 식량을 집집마다 조금씩 걷어서 밥을 지어 성의껏 의병들에게 제공하였다. 여러 날을 굶은 의병들은 그 성의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었다. 그 동안의 피로와 굶주림이 겹친데다가 귀밀밥을 먹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의병들이 취하여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이때 길주 방면에서 의병부대를 추적하여 간평으로 넘어오던 4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가 의병들이 있는 것을 알고 그 집결지를 향하여 기습을 가해왔다. 이들이 의병의 숙영지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의 신속한 제보로 의병들을 급히 깨워서 전투대열을 정비하기는 했으나 평소에 능동적으로 기동하며 적을 무찌르던 홍범도 의병 부대다운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의병들의 다수는 크게 당황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의병대는 고전하였으나 토벌대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200여 명의 병력이었으므로 결국은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며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으나 의병은 8명이나 죽었고 부상자는 더 많았다. 이 전투는 방심한 끝에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았고 전과 비교하여 많은 피해를 받았다는 점에서 홍범도 의병부대의 패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범도(홍범도)가 기병 후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큰 손실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간평 전투에서 의병들을 깨우고 진두에서 지휘하며 싸워 의병장다운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지만 참으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앞으로 절대로 이 같은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자기를 믿고 따른 의병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가족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간평 전투 이후 홍범도는 유사(遊士)를 원석택과 정도익 등에게 보내 그들로 하여금 의병 약 20명을 이끌고 북청의 성대(星垈) 지방으로 가서 포수들을 의병으로 모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30∼40명의 포수들이 홍범도 의병부대에 가담하게 되어 그 동안의 전투와 기동으로 손실이 있었던 병력의 보충과 의병들의 사기진작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이렇게 일본군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산간지방에서 비호같이 빠른 유격전과 재빠른 이동으로 포위망을 교묘히 벗어나면서 적에 큰 타격을 주고 크게 활약하자 함경도 지방에서는 홍범도 의병대의 명성이 매우 높아진 반면 일본군의 위신은 여지없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 함경도 산골지방에는 홍범도 의병대의 눈부신 활약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패배를 풍자하며 저주하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널리 퍼져서 불리웠다.

홍(홍범도) 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에헹야 에헹야 에행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괴택이 원성택 중대장님은
산고개 싸움에서 승리하였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 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도상리 김치강 김도감님은
군량도감으로 당선됐다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 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이 노래에는 후치령 전투 이후 계속된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한 성원과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야유와 비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10)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연합 시도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동은 1908년 중반, 즉 7∼8월경부터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의 의병에 대한 끈질긴 ‘토벌’과 ‘귀순공작’의 병행, 그리고 의병을 지원하는 주민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정책 등이 상당히 주효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로 인해 의병 진영은 때로는 활동 방침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여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경우도 생겼으며 또 주민들과의 협조관계가 끊어져서 보급문제에 큰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는 함경도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볼 때도 의병항전이 일시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때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이 1908년 2월 원주에서 일병에게 피살되었고 동년 6월에는 호남 지방에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장이 포로가 되었으며, 임진강 유역에서 투쟁하던 허위(許蔿) 의병장도 같은 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이 7월에 충청북도 작성에서 체포되었으며, 평민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돌석(申乭石) 의병장도 그 해 12월에 경북 영덕에서 순국하고 말았던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함경도 지방의 의병전투를 거의 주도하면서 맹활약을 하였지만 1908년 5∼6월경부터 심각한 군수물자 부족과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래서 홍범도는 5월 하순부터 이미 부하를 연해주에 보내서 이범윤 등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관한 소식이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준비하고 있던 안중근(安重根)에게 전해졌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사살한 열사로 유명하거니와 그는 1879년생으로 홍범도보다 11세 아래였다. 안중근은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1907년 겨울 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최재형(崔在亨)과 이범윤 등의 지원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1908년 4월 초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서 섬멸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안중근은 홍범도 의병부대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휘하 의병들을 데리고 국내로 진입하여 홍(홍범도) 의진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계속해서 남진, 서울까지 진격할 결심이었다. 이리하여 안중근은 연해주 동포들의 성원에 힘입어 엄인섭(嚴仁燮) 등 약 100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1908년 7월 6일경 재차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과 종성·회령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세 차례의 큰 접전을 벌였다. 안중근 부대는 첫 전투에서는 일본 수비대를 궤멸시키고 10여 명의 일본 군인과 상인을 생포하기까지 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중근이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로잡은 일본병사들을 석방해 준 결과 의병대의 위치가 탄로되어 일군의 기습을 받은 끝에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의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였지만 일본군 석방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의병들이 많아 지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끝내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군의 추격은 급박하였다. 안중근은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나, 홍범도 의병부대와의 연합항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해 보지도 못한 채 7월 21일경 몇 명의 동지들을 이끌고 참담한 심정으로 연해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중근 의병부대가 일군에 패전함으로써 홍범도 의병대와의 공동작전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러시아 측의 우수한 무기와 풍부한 탄약을 지원받으리라는 기대도 무산되고 말았다. 얼마 뒤에 홍범도는 안중근 의병부대의 분전과 패전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탄약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이제 자력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며 의병항전을 계속하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1) 휘하 의병부대의 활약


한편 홍범도와 연계를 가지며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싸우고 있던 다른 휘하 의병들의 활약상은 어떠하였는가?
홍범도와 갈라져서 160여 명을 거느리고 장진 방면으로 진출하였던 송상봉과 강택희는 다시 자기 막하 의병대를 이끌고 각자 분담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의병들을 소대단위로 구분해서 스스로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싸우며 각지에서 정보를 수집해 오도록 했다. 홍범도로부터 장진 지역에서 싸우도록 명령을 받았던 송상봉은 자기 휘하의 중대규모 의병세력을 다시 각지로 분산시켜서 싸우게 했다.
송상봉 중대에 속하는 한 부대 20여 명의 의병들은 6월 4일경 장진 연화산 남쪽의 상남사 대흥장(大興庄)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의 일진회 회원 7명을 처단하였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양식과 돈을 압수하였다. 특히 이때 처단된 원홍겸(元弘謙)은 당시 56세였는데 일진회원으로서 친일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아들인 원기룡(元基龍)이 일제의 원산경찰서 소속 혜산진분서 순사였다는 것을 보아도 확실하다.
또한 홍범도 휘하의 한 부대는 6월 8일 새벽 4시경부터 같은 군의 신흥장(新興庄)과 운수장(雲水庄)을 습격하여 일진회원을 응징하였으며 의병들을 추격해 온 일본군 헌병대를 따돌리며 유유히 평안북도 영원군 방면으로 잠적해 버렸다. 이 부대는 같은 달 10일 새벽 5시경에는 운수리에서 동북으로 약 30리 떨어진 창평리(昌坪里)에 나타나서 일진회 회원의 가옥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며 의병들을 추격해 온 함흥헌병분대 몌물리(袂物里) 분견소 헌병들을 농락하며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진군 일대에서 홍범도 의병부대의 신출귀몰하는 눈부신 활약으로 함경남도 지방의 매국노 일진회원들은 거의 모두 다른 지방 대도시로 도주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곳에서 일진회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또 홍범도 의병부대의 이동칠(李東七)이 지휘하는 한 부대는 6월 27일 갑산 북쪽의 화하동(樺下洞)에 출현하여 일본군 아이요이(相良, 상량) 토벌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약 80여 명으로 구성된 다른 한 부대는 대담하게 북청군의 양화장(陽化場)에 진출해서 한국 침략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던 일본 상인들을 습격, 이마오(今尾謙吉, 금미겸결)라는 일본 상인을 처단해 버렸다. 양화장은 동해에 임한 평야지대로서 원산·함흥 지방과 청진·경성 등 함경북도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산간지에서만 투쟁하고 있던 의병대가 이렇게 해안의 일본인 집결지를 기습한 것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특히 양화장의 일본 상인들을 습격한 사실은 즉각 일제 측의 통감부 통감·조선주둔군 사령관 그리고 한국의 내부대신과 정부의 각 부처 일인 차관들에게 전보로 보고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일본군 북청수비대와 함경남도 북청경찰분서의 경찰이 의병들을 이틀 동안이나 추적하였지만 그들은 의병의 그림자도 찾아보지 못하고 29일에 북청으로 돌아왔다. 양화장을 습격한 의병부대는 28일 중산사(中山社) 장동(長洞)에서 숙박한 다음 29일 오전 6시에 양가사(良家社) 안곡(安谷)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그 날 오후 5∼6시경에는 북청읍 바로 뒤에 있는 높이 800미터의 동덕산(東德山) 꼭대기부터 동쪽 능선에 걸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과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일본군 중위 노나까(野中, 야중) 등 2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의병대가 동덕산에 출현하였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급거 그곳으로 출동했다. 이때 홍범도 부대 지대는 100여 명의 군세였고 정상 부근의 높은 곳에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일군 토벌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동덕산에서 약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의병들은 적에 큰 타격을 가한 뒤에 탄약이 떨어져 동덕산 북방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1907년 11월 후치령 봉기 이후부터 1908년 10월경까지 약 1년 동안 홍범도 의병부대가 일제 측과 수행한 의병전투는 무려 60여 회를 헤아렸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37회의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필자가 새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일진회원 처단과 같은 친일파 처벌, 그리고 군자금 모집작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악질 부호나 관리 응징 등의 사례를 추가한다면 그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 활동약도(1907. 11.∼1908. 10.)


(12) 연해주 망명과 재기도모


범도(홍범도)는 1908년 6∼7월경 그동안 의병들이 모집하거나 강제로 압수한 군자금을 의병 가족들에게 150원씩 분배 하였고, 나머지 돈으로는 간도나 연해주로 부하를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오도록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치거나 병에 걸리고 혹은 연로하여 의병활동에 부적당한 일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가 의병활동 시 모집한 군자금의 일부를 전사하거나 부상한 의병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병투쟁의 성격을 활빈당(活貧黨) 등의 활동과 같은 유형, 즉 부의 균등한 재분배 사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안중근 의병부대와의 연합이 실패한 뒤에도 직접·간접으로 많은 의병들을 지휘하며 개마고원 일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제 의병활동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공격이 더욱 치열해지는 반면에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은 오히려 악화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8월 초순에 임재춘(林在春)·정일환(鄭日煥)·변해룡(邊海龍) 등에게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간도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재춘과 정일환은 자금을 다른데 탕진해 버렸고 변해룡은 홍원에서 9월 14일 일제에 체포됨으로써 범도(홍범도)의 목적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5월 하순에 연해주로 보냈던 김충렬과 조화여도 일제의 첩자로 오해를 받아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의병들은 총알이 모자라서 점차 적과의 전투를 회피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소수의 부대로써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하였지만….
홍범도는 이러한 난관에 부딪혀 의병 지도자로서 무척 고민하였다. 어떻게 해야 의병들의 손실을 줄이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상당수의 의병들이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안일한 생활에 대한 동경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도망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범도(홍범도)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1908년 8월 하순경 그는 함흥군 천불산에서 의병들을 소집하였다. 그 곳에서 많은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후일에 기회를 보아 다시 일제와 싸우기로 하였다. 또 일부 의지가 강한 의병들은 평안도 일대로 진출하여 싸우도록 하였다. 자신은 의병 190여 명을 이끌고 잠시 간도로 건너가 직접 무기를 조달하며 기회를 보기로 했다. 이때 의병들이 휴대한 무장은 소총 70여 정에 탄약 1만 1천발 가량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잠시 간도로 진출하였으나 활동이 여의치 못하여 한 두 달 뒤에 다시 의병들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끝내 국내에서 의병항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1908년 11월 2일경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사정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

…일화(일본돈) 2만 원을 정하여 놓고 외국으로 갈 사람을 뽑는데 북청사는 조화여·김충렬 그 동무들이 러시아 연추에 주둔하고 있는 이 관리(이범윤을 말함)에게 보내면 비똔약(뇌관과 화약)을 몇 십 밀리온 치라도 내올 수 있다고 하길래…보냈더니 이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정탐꾼으로 몰아 가두고…소식이 영 무소식하니 알 수 없어 약철(화약과 총알)이 없어 일본군과 싸움도 못하고 일본군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번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어 중국땅 통화(通化)로 10월 9일(음력)에 압록강을 건너….

홍범도는 4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삼수군의 신갈파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통화로 건너갔다. 11월 10일경에는 길림(吉林)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는 영변 출신으로서 중국 길림성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길성익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며칠 머물 수 있었다. 길림에서 범도(홍범도)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김창옥, 열두 살 먹은 아들 용환(홍용환), 의병참모 권감찰 등 3명만 남기고 나머지 의병들은 후일의 재기를 약속하고 국내로 돌아가게 했다.
그 후 홍범도 등 일행 4명은 유수현(楡樹縣) 등 북만주 지방을 굶주리며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12월 초순 만주 흥더허재(橫道河子)의 한인촌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6일을 묵은 뒤 일행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기차를 타고 1908년 12월 중순 마침내 러시아의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행은 또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6일을 머문 뒤에 12월 하순 연해주 민족운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 등 일행 4명은 당시 동포들이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부르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간 있으며 그곳의 실정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온 이유는 그 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가고, 또 연해주 지역의 의병부대와 공동보조를 취하며 더 나아가 남한지역의 의병부대와도 연계하여 대대적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의도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연해주 지역의 상황과 관련하여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1908년 7월 국내로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던 안중근 의병 부대가 패전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의병들의 무력항쟁을 무모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특히 최재형과 같은 민족운동계의 유력인사는 노골적으로 의병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과 산업진흥운동 등의 점진적 방법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측도 의병들의 항전을 저지하려 하였다. 실제로 250여 명의 러시아 군대가 1909년 1월 1일 연추에 있는 안중근 의병부대의 연락사무소에 들어와 모든 총기와 탄약을 압수하고 해산을 명령하였고 러시아 영토 안에서의 무장투쟁 준비를 저지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1909년경의 연해주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홍범도가 구상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홍범도는 1909년 2월 초순 연추에 있는 이범윤을 찾아갔다. 그것은 그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의논하고 가능하다면 그의 원조를 받아볼 생각에서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투쟁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이범윤은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를 거쳤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6월에 블라디보스토크 동북 수청(水淸: 스찬)의 니콜라에프카로 가서 군자금 및 의병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이 무렵 동의회(同義會)라는 민족운동단체의 젊은 동지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대규모 국내 진격작전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동의회의 모임에 참석해서 국내 진입작전의 요령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홍범도는 동의회 회원인 안중근을 연추에서 만났다. 안중근은 홍범도와 같이 적극적 무장투쟁론자였다. 하지만 의병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교포사회의 지원이 끊겨서 조직적 의병항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의회에 참가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동지들과 함께 맹세하였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조직적 투쟁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그 활로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안중근은 후일 일제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1909년 홍범도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홍범도를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라고 술회하였다.
범도(홍범도)는 1909년 10월 연해주 보리스읍의 자피거우라는 곳에 머물며 군자금과 의병 모집에 열중하였다. 그가 연해주에 온 지 거의 10개월이 되었지만 의병투쟁을 위한 재기사업은 지지부진하였다. 그에 따라 범도(홍범도)는 내심 무척 초조하였고 아직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걱정되었다. 동지들과 헤어질 때 틀림없이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적을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재기도모가 순조롭지 못할 때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돌파구는 안중근의 의거로 마련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처단은 연해주 동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1909년 가을에 연해주 추풍(秋風) 허커우에 와서 별다른 성과 없이 국내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있던 애국청년 최원세가 홍범도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국내로 귀환을 서두르는 범도(홍범도)에게 기회를 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가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아 보겠다고 말했다.
범도(홍범도)는 그 말을 듣고 그곳에서 기다렸다. 그랬더니 그해 겨울에 최원세는 연해주 각처로 돌아다니며 무려 4,980루블의 자금을 마련해 오는 것이 아닌가?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던 범도(홍범도)는 감격했다. 그 돈으로 범도(홍범도)는 군인 모집과 무기의 구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10년 4월 초순(42세)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추풍을 출발, 국내로 향했다. 거의 1년 반 만에 낯익으며 그리운 강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재기한 홍범도 의병대는 1910년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경북도 무산에 진입하였다. 거기에서 홍범도 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치렀으나 처음 의병으로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또 병력이 소수여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달 하순에는 갑산에서 오는 일군과 교전한 결과 적 40여 명을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일군 소총 40정, 권총 4정, 신호용 나팔 두 개, 수류탄 14개, 군량 세 바리, 탄환 7천발 등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 뒤 홍범도 의병대는 1910년 5월 초순 함경북도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적과 수차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은 의병들 다수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지리멸렬한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마침내 홍범도는 재기의 꿈을 잠시 유보한 채 5월 중순 백두산 건너편 중국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또 다시 러시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대부분의 책에서 1910년 3월에 홍범도가 비로소 만주 장백현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홍범도가 연해주 추풍에서 국내로 출발하기 직전 국내에서 활동하다 여의치 못하여 6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해 있던 선배 의병장 류인석은 범도(홍범도)의 즉결적 무력투쟁 방략을 만류하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었다. 즉 그는 1910년 3월 9일과 4월 3일의 편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는 국내의 어려운 조건 하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우니 후일을 기다려 실력을 좀더 기른 뒤에 투쟁해야 한다는 비판과 충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류인석은 3월 9일(음력 1월 28일)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충고하였다 .

…그대의 의(義)가 사람들을 감동시켜 도처에서 (독립의) 바람을 일으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의) 기(氣)를 북돋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강함은 삼국의 조조(曹操)와 같을 뿐 아니라 우리 앞에는 제갈량(공명)도 없고 또 (삼국의 촉에 있었던) 5호대장(五虎大將)도 없습니다. 우리의 홍여천(홍범도: 필자)을 비록 5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 나머지 4호가 없으니 적을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대저 지(智)로써 싸울망정 힘(力)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힘으로 싸우면 우리의 힘이 저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비록 늙었으나 약간의 소견이 있습니다. 원컨대 우리 여천(홍범도)께서는 깊이 생각을 더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범도(홍범도)는 류인석의 이러한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재 역량이 되는대로 적과 생사를 건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요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그 신념에 따라 그는 함경북도로 진공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투 후에 패전하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 무력투쟁 방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럴 만한 역량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에 당분간 연해주에서 후일을 대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한가지로서 범도(홍범도)는 선배 의병장 류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1910년 6월 21일에 연해주 지역의 의병조직을 망라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 조직의 창건을 주도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여기에서 지휘부인 도총소(都總所)의 의원(議員)으로 선출되었다. 이 조직의 도총재(都總裁)는 류인석이 추대되었고 이범윤이 창의총재(彰義總裁)를 맡았다. 이 조직에는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우병렬(禹炳烈)이 도총소의 참모로 임명되었고 국내에서 신민회를 주도하던 안창호·이갑(李甲)도 같은 부서의 의원을 맡게 되었다. 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 되었던 이상설(李相卨)은 외교대원(外交大員)이 되었다.
이 조직의 주요 구성원을 볼 때 의병운동과는 다른 노선을 걸어왔던 계몽운동 계열의 ‘신지식인’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이는 결국 효율적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양 계열의 인사들이 종래의 독립운동방법론과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또 13도의군은 연해주에 난립해 있던 의병조직을 통합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장을 포용하고 장차 국내 조직도 설치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활동이 크게 기대되는 것이었다.
이 운동조직은 같은 해 9월 이후 일제의 압력을 받은 극동 러시아 당국에서 한인 민족운동을 탄압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얼마 뒤에 해산되고 말았다.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사회에는 8월 29·30일에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 공포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다음날 새벽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또 이 소식에 격분한 청년 50명은 24일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고 다음날에는 무려 천여 명의 한인들이 역시 일본인 거주지 습격에 동참하여 일제의 책동을 규탄하였다. 성명회는 8월 26일 한국 합병반대 성명서를 만들어 각국 정부에 발송, 일제의 한국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홍범도는 이 성명서에 서명한 8,624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해 8월 29일 자기의 조국이 일본에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되었다는 소식을 얼마 뒤에 전해 들었다. 그 사실을 그는 슬픔과 함께 격한 분노로 맞이하였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일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그토록 끈질기게 싸웠건만 보람도 없이 조국은 멸망하고 만 것이다.
이 해 9월 초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일본인 습격사건을 구설로 극동 러시아 당국에 한인들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강력히 항의하였다. 또한 러·일(러시아·일본) 간에 체결된 ‘형사범인의 상호 인도협약’을 내세워 주동인물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굴복한 극동 러시아 당국은 류인석·이범윤·홍범도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이르쿠츠크로의 추방령을 내려 한인 민족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범도(홍범도)는 당분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부근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인 민족운동은 한 때 큰 타격을 받았다.
범도(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약 1∼2년간 연해주의 야꾸지아 올레크민스크 금광 등을 왕래하며 그곳에서 일하기도 하고 한인 광산노동자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1911년 3월 중순 부하 의병장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30여 명의 의병들을 지휘케 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박영신은 두만강을 건너 함북 경원의 세천동(細川洞) 부근에서 일군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연해주 각지를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범도(홍범도)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1년 5월 20일에 민족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를 창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 부근 한인들에게 독립투쟁의 교육을 장려하고 ‘동지의 붉은 피’로써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며 1911년 3월에 연해주 지방의 유력인사 이종호(李鍾浩)에게 군자금 10만 루블의 원조를 청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종호는 범도(홍범도)와 독립투쟁의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단체적 사업’을 일으켜 그 목적을 달성하기로 합의하여 권업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권업회의 발기인으로는 이종호 외에도 부하 의병장 강택희(姜宅熙)와 엄인섭 등이 참여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에는 연해주의 유지 최재형(崔才亨)이었고 부회장에는 홍범도였다. 이 조직은 1911년 12월 17일경 개편되는데, 이때 수총재에 류인석이 추대되고 홍범도는 경찰부장(일부 자료에는 사찰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권업회는 겉으로는 일제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산업진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기관이었고 러시아 극동총독 곤닷찌도 그 내용을 알면서도 그대로 허가해 주었다. 권업회는 일제와 야합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1914년 중반경에 해산될 때까지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주도하며 교육·산업장려·무장투쟁 준비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일제와의 결전에 대비한 ‘광복군’ 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권업회는 이를 위해 1913∼4년 만주 나자구(羅子溝, 나재거우)에 사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군자금 비축활동의 하나로서 블라디보스토크와 간도 훈춘에 각각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홍범도는 권업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해주 지방에서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는 그러한 활동의 하나로서 권업회의 창립 후인 1911년 11월 15일 뜻을 같이하는 20명의 동지들과 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강제로 일본에 합병된 뒤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각종 비밀조직을 만들어 서로를 격려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을 맹세하곤 하였다. 21의형제 동맹도 바로 서로를 돕고 약해지는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비밀조직의 하나였다.
범도(홍범도)는 권업회의 연론(演論)부장 이범석(李範錫), 자기 휘하 경찰부원 유상돈(劉相燉)과 엄인섭(嚴仁燮) 등이 포함된 동지 20명과 함께 아래와 같은 맹세를 하고 서로의 결속을 다짐하였다.

때는 신해(辛亥)년 11월 15일, 의형제 21인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형제의 의를 맺는다. 우리들 21인은 모두 지성과 열혈과 정의를 좋아하는 남자로서, 이에 결합하여 서약한다. 여기에 바른 말로 부끄러움 없음은 여러 신에게도 명백하다. 대저 우리 21형제는 서로 제휴하고 서로 급한 어려움을 구하여, 모두 함께 업신여김을 막고 격한 탁류를 맑게 하며, 퇴폐한 풍속을 바로 잡고 완고함을 고치며 약한 것을 바로 세워, 이로써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중용을 지키고 맹세하는 말을 들어 마음의 폐(肺)에 새겨 맹세한다. 천지와 같은 대부모 있어 이에 강림하여 감동한다. 혹 누설하는 자 있어 신(神)으로부터 수치를 받는 자 있으면 신이 이를 죽인다.

범도(홍범도)는 사나이 대장부로서 의형제를 맺는 것이 가슴 뿌듯한 보람이었다. 그는 당시 만 43세였는데 21인 가운데 이범석·최태(崔泰) 다음 세 번째로 연장자였고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1886년 생으로 만 25세인 김태벽(金泰璧)이었다. 위와 같이 하늘에 철석같이 맹서하고 스물 한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건만 이 중 한 사람이었던 엄인섭은 나중에 일제의 밀정으로 변절하고 마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무렵 홍범도는 각종 민족운동 단체에 관련을 맺으면서도 자기의 할일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1912년 가을에는 동지들을 이끌고 ‘노동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연해주 지방의 철도공사를 하며 노임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하고 있었다. 한편 그는 또 1913년 9∼10월경에는 권업회의 ‘남도파’와 ‘서북파’의 대립이 심화되자 이동휘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 서로의 단결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12년 2월경 홍범도가 만주의 장백현에 가서 평안도의 저명한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만나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을 의논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홍범도는 1912∼3년 사이 약 1년 동안 연해주 추풍의 다아재골에서 농사에 종사하다가 1913년부터 1915년 7월 중순까지는 연해주 북쪽의 니콜라에프스크 어장과 꾸르바트 금광·비얀코 금광·얀드리스크 금광 등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한편, 그곳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동안 그는 4,500여 루블을 저축했는데 그 자금으로 소총 17정과 탄약을 구입하였다.
1914년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제휴하여 동맹국이 되었다. 그 후 러시아는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확립하고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 등 모든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효과적인 재기준비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북만주 밀산현 봉밀산으로 진출하였다. 거기에는 권업회의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던 김성무(金成武)가 권업회에서 설치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15년 7월 하순부터 1917년 1월까지 그 농장에서 농사와 사냥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위한 칼을 갈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두루 시찰하였던 박은식(朴殷植)은 홍범도 등과 같은 옛날 의병 용사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나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달의 의병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 뿐이며 자나 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속 가득한 끊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참으로 대단한 의병들의 기개와 결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홍범도의 망명 및 재기 경로(1908. 11.∼1911. 3.)


제4장 홍범도 의병부대의 특징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은 한국 의병운동사에서 특출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병부대는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고양기’ 단계에 들어갔을 때 봉기한 다른 수많은 의병부대와 비교해 볼 때 그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러한 특징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의병부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사냥꾼으로 구성된 산포수 의병부대였다. 물론 이 부대에는 농민과 광산 노동자·해산된 군인·일부 유생과 수공업자 등도 참가하고 있었지만 주력은 어디까지나 백두산 연맥과 개마고원 일대에서 산짐승을 사냥하며 생활하던 산포수들이었던 것이다. 포수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정확한 사격을 하였으며 그들이 사냥하던 함경도 산악지대의 지리와 지형을 손바닥 들여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어 적과의 전투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함경도 지방의 험준한 산맥에서는 일본 정규군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남한 지방의 다른 의병부대들이 주로 농민으로 이루어진 사실과 비교하면 분명 다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홍범도 의진은 기동력이 매우 빠른 부대였다. 평소에 포수들은 맹수를 사냥하던 일에 단련되어 강인한 정신과 튼튼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매우 기민하게 활동했으며, ‘빠른 행군’과 ‘비호같은 공격’·‘재빠른 철수’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적을 공격하고 재빨리 빠지는 유격전과 산악전·기동전에서 필수적 요소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치고 빠지는 이러한 전법으로 훨씬 유리한 조건 속에서 싸우는 일본 군경을 무찌를 수 있었다.
홍범도 의병진이 거의 1년에 걸쳐 6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기동력의 보유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은 이 의병대가 보인 놀라운 기동력에 대한 적군의 찬탄이었던 것이다.
셋째, 홍범도 부대가 엄격한 규율로 무장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전황이 불리하면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감히 후퇴할 줄 아는 전술도 부대의 전투력을 보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홍범도 부대의 엄격한 군기(軍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북간도에서 한 부대원이 주둔하던 주인집 아내와 눈이 맞았다. 남편이 범도(홍범도)를 찾아가 고소했다. 그 상황을 정태는 이렇게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취군나팔 소리 산곡을 울리었다. 독립군들이 뛰어 나왔다. 주민들이 뒤따라 왔다. 의병들은 대열을 지어섰다. 한 쪽에는 주민들이 모여섰다. 신소한 남편도 있었다. 죄지은 독립군을 의병대열 앞에 따로 내세웠다.
“네가 지은 죄를 자백하라구.”
대장의 유순한 말이다.
자백했다. 조금치도 감추지 않았다.
“죽음 밖에 다른 건 나를 용서치 못해요.”
총소리. 홍범도의 나간 권총. 대장은 천천히 혁대를 풀어 땅에 놓고 윗적삼을 벗었다. 다음에는 속적삼. 속적삼으로 죽은 의병의 얼굴을 덮어 쌌다.
“죽이지 않을 수는 없고…아깝다…아깝다.”
물끄러미 시체를 굽어보는 대장의 양 뺨으로는 말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 울었다. 의병들, 주민들.
홍범도는 웃통을 벗은 채 느린 걸음으로 주인집으로 갔다.
하루, 이틀, 사흘. 음식을 전폐하고 방에 누워 울기만 했다.
(『레닌기치』 1968년 8월 27일자)

바로 이 같은 냉혹하다 할 정도의 군기. 이것이 홍범도 부대의 강철 같은 의지와 의기를 북돋웠던 것이다.
넷째, 이 의병진은 의병장과 병사의 절대 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진 평민 의병부대였다. 포수들은 원래 ‘양인(良人)신분’이었고 대장 홍범도도 그들과 같은 신분이었다. 부하 의병장들도 거의 포수출신으로서 역시 양인신분이었다.
이렇게 이 의병부대가 하나의 동질적인 평민신분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우선 의병장과 병사 사이에, 그리고 병사들 내부의 사이에 끈끈한 통합과 단결을 유지케 하여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양반 유생이 주도한 남부지방의 일부 의병부대에서 신분적 갈등이 발생하여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던 사례와 비교하면 좋은 대조가 된다 하겠다.
다섯째, 홍범도 의병부대는 민중과 밀착하고 그들의 절대적 지지와 성원을 받은 의진이었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유격전·기동전을 벌이면서 해당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 할 것이다.
함경도 지방의 민중이 홍범도 의병부대를 적극 성원하였던 배경에는 홍범도를 비롯한 의병들의 주민에 대한 배려와 보호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외래 침략자에 대한 투쟁이라는 활동 외에도 주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부패 관리나 악질적 친일파·부호 등을 처벌하는 의병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홍범도가 의병 전투 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군자금으로 모집한 돈을 나누어 준 사례도 있듯이 홍범도가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였던 저간의 활동이 민중의 지지를 가능케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군은 지방 민중들이 홍범도 의진을 위해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하여 의병들에게 알리고 있는 사실을 여러 차례 상부에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의 제3순사대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병사로 가장하여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았더니 주민들이 그들을 매우 환영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

…당대(當隊)가 폭도(의병: 필자)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만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을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정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波邊正勝, 파변정승)의 보고서)

홍범도 의병부대가 강한 일본군을 도처에서 연파하며 활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지방 민중의 이러한 지지와 성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강한 실질적 전투력’을 가진 무장세력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홍(홍범도) 의진은 국내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 군경은 ‘토벌’의 어려움을 여러 번 토로하곤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당시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진영 가운데 최대 규모의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대규모 의병부대의 하나로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주었다. 대체로 다른 지역의 의병부대는 적을 기습할 때는 이기고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는 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홍범도 의진은 기습전은 물론 불시에 적을 만나서 싸우는 조우전(遭遇戰)에도 능했고 스스로 기동하며 대규모 공격전과 매복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적에게 심대한 손상을 주었다. 바로 이 점이 명분을 중시하고 실질적 전투력은 약했던 일부 양반 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과 크게 다른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맺음말


홍범도를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상 가장 대표적인 무장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날리며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럴 만한 어떤 뛰어난 역량이나 성품·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간도 및 옛 소련(러시아) 등 대부분의 동포들, 더 나아가 그와 싸웠던 일본군마저도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조선극장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지금은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 안미하엘 쓰쩨빠노위츠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얼굴 오른쪽 볼수염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위로 자랐드랬소. 그것은 왜냐하면 너무나도 총을 많이 쏘았기에, 총을 쏠 때마다 총탁을 오른쪽에 대기 위해 오른쪽 볼을 스쳐 겨냥하면서 올렸기 때문이오. 총 쏠 내기도 몇 번 해보았는데 정말 명포수였소.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젊은 것들이 어쩔 수 없었소. 극장 수위로 일하실 때 우리는 처음 그가 그 전설적인 영웅인, 일제에 있어서는 범인인 홍범도인줄 몰랐드랬소. 김세임이 소설을 쓰고 태장춘이 희곡을 쓰고 하면서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를 무한히 존경하였소. 그는 자기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소.
(고송무, 『쏘련의 한인들』)

홍범도의 모습과 인격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연변에 홍범도에 관해 보고 들은 바가 많았다.
홍범도 부대에서 활동했던 원용순(元龍淳)의 딸 원윤옥(元允玉)은

그는 산간작전에 능하고 총을 잘 쏘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그는 의병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발전하기까지 무려 18차나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한번도 패전한 일이 없다.…홍벙도는 애국심이 강하고 성격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강한 사람이다.…간도지구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기간 그의 명망이 조선족 인민들 속에 널리 알려졌으며, 왜놈들도 홍범도라는 이름을 들으면 간담이 서늘하여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홍범도는 조선족 인민들이 자랑하는 민족영웅이다.

고 증언하였다. 물론 바로 위의 증언은 약간 과장된 면이 있지만 범도(홍범도)에 대한 동포들의 평을 엿볼 수 있다.
후일 청산리 일대에서 그와 싸웠던 일본군 자신도 홍범도의 감투정신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였다.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연하여 일본군의 포위 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일시(一矢)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

위의 기록은 여러모로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우선 일제 측이 청산리 일대에서 싸운 독립군 주력부대가 홍범도 부대였다고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홍범도에 대해 은연중에 호감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특히 홍범도가 부하들로부터 신과 같은 숭배를 받고 있다는 서술은 일면 과장되기까지 한 것으로 그에 대한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홍범도의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기로 하자. 범도(홍범도)가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927년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적어도 그가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에 공감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의 출신 성분과 행적·성품 등을 종합해 볼 때 이론에 투철한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자, 또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920년 6윌 봉오동 전투 직전 어느 산마루에 올라가 멀리 조국 땅을 바라보고 “슬프다, 내 몇 해나 되어야 고향산천을 바라볼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은 그의 드높은 애국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홍범도 자신은 한 개인이었지만 부대를 조직하여 단체로 활동하였고 또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포 및 독립운동 단체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의 투쟁은 개인 차원을 넘어 민족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의병으로 부터 독립군·한인 빨치산 의용대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 무장이라는 점은 국내외 각지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수십 차례에 달하는 의병 전투는 물론 뒷날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으로 상징되는 독립전쟁 전개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홍범도와 그가 이끌었던 의병부대의 투쟁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함경도·평안도 지방 등지에서 무력항쟁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함경도와 평안북도 동부지방에서 일본군경의 침략활동을 저지하고 그들의 식민지 가속화 작업을 마비시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반일투쟁 외에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이 일대의 친일파·일진회원·부패한 관리, 매판적이며 악질적인 부호 등을 소탕·응징하는 투쟁을 동시에 수행하여 매국의 무리에게 경종을 울렸다. 홍범도 의병부대를 비롯한 각 의병부대의 ‘전쟁’으로 약 3년간 우리나라의 완전한 식민지화가 늦춰지게 된 사실은 중요한 뜻이다.
둘째, 홍범도 의병부대의 반일·반봉건투쟁은 국내 및 간도·연해주 한인 대중의 국권회복운동과 항일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 특히 홍범도 의진의 활약은 대다수의 열반인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평민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는 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크게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 지방의 중국 관민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10년대 초반 간도를 왕래하며 일제와 싸웠던 것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물론, 중국 관민에게 일제의 침략 실상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에 후일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할 때 한·중(한국·중국) 연합투쟁의 가능성을 열게 하였다.
넷째, 홍범도는 의병 활동을 전개하면서 각 의병부대의 연합이나 통일을 앞장서서 실현하였는데, 이것은 무장투쟁 역량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단합노력은 열세한 한민족 무장 세력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고 결국 일제에 대한 투쟁의 강도를 높일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홍범도가 간도·연해주에 국외 한인 민족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함으로써 1910년 전후 우리의 민족운동은 해외의 민족운동과 밀착될 수 있었고, 그것이 후일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머슴·산포수, 그리고 광산노동자 출신의 의병대장 홍범도. 그는 분명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이채를 띠고 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온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라와 겨레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투쟁은 영원불멸의 큰 업적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연보


1868. 8. 27. 평안도 평양 문열사 앞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 의 아들로 태어남. 후일의 호는 여천(汝千).
1868. 9. 초 출생 7일 만에 출산 휴유증으로 모친 별세.
1877(9세) 아버지를 여읨. 이후 15세(1883년)까지 숙부 집에서 지내며 이웃마을 지주집의 꼴머슴으로 일하기도 함.
1883∼1887(19세) 15살 되는 해에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안 감영(친군서영)의 나팔수로 입대하여 3년간 복무.
1887∼1890(22세) 황해도 수안군 총령(蔥嶺)의 종이공장에서 3년간 일함. 제지소 주인이 임금(삯)을 주지 않아 싸움 끝에 떠남.
1890∼1891(23세)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止潭) 대사의 상좌로 있으며 절의 허드렛일을 함. 이때 그의 아내가 된 단양(丹陽) 이씨(李氏)를 만남.
1892∼1895. 8.(27세) 절을 떠나 함경남도 북청 방면으로 향함. 단양 이씨와 이별. 1892년(24세 때) 큰 아들 양순(홍양순)이 태어남. 강원도 회양(淮陽)의 먹패장골 산 속에서 3년간 사냥에 종사하며 사격 등을 연마.
1895. 11. 초 회양의 단발령(斷髮嶺)에서 김수협과 같이 의병 봉기를 결정. 철령(鐵嶺)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고 안변 학포(鶴浦)로 이동.
1896. 8.(28세) 안변에서 의병 14명을 모집,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한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류. 세 번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전하고 김수협은 전사.
1896~1897(29세) 황해도 영풍(永豊) 널귀 금광에 잠시 피신. 함경남도 덕원읍의 친일파 천성준을 처단. 이후 양덕·성천·영원 등 평안남도와 함경남도·황해도 접경지역 일대에서 단독 활동(활빈당과 비슷한 성격).
1897~1904. 9(36세)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단양 이씨를 상봉하여 정식으로 결혼생활. 1897년경 둘째 아들 용환[龍煥(홍용환)] 출생. 이후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安山社) 노은리(老隱里) 인필골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업에 종사.
1904. 9. 8.(음력)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함흥 등지에서 일어난 반일투쟁에 참가.
1905~1907(39세) 북청의 안산사 포계(砲契)라는 사냥꾼 협동조합에 가입. 이후 포계의 지도자(포연대장: 捕捐大將)로 추대되어 포수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섬.
1907. 11. 15. 북청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防洞: 일명 언방골)에서 주로 산포수로 구성된 7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 항일투쟁에 나섬. 홍범도는 이때 차도선(車道善)과 같이 부독(副督)의 직책을 맡음.
1907. 11. 16. 일진회(一進會) 회원이며 친일주구배인 안평 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진목동(眞木洞)에서 처단.
1907. 11. 22.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 일행을 후치령에서 습격, 일본군 2명과 순사 1명을 사살. 빼앗긴 화승총 73자루를 다시 찾고 일본군의 무기를 노획. 이 날 같은 곳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가던 우편마차 호위병 2명, 북청으로 가던 혜산진 목재창 소속 일본인 1명을 사살.
1907. 11. 23. 북청으로부터 혜산진으로 가는 일본군 아라다니(新谷) 소위와 우편마차 호위병 2명을 후치령에서 사살.
1907. 11. 25. 후치령에서 미야베(宮部) 보병대위가 지휘하는 일본 군경 합동병력 70여 명과 약 세 시간 동안 격전, 적 3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둠. 의병도 김춘진(金春辰) 등 5명 전사.
1907. 12. 15. 북청의 장항리(獐項里: 일명 노루목)에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 화물 및 우편물 호위병을 습격. 일본군 2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수물자(탄환 상자 40개 등)와 무기를 노획.
1907. 12. 29. 삼수성을 점령하고 수십 자루의 소총과 많은 탄약을 노획. 일체의 주구인 삼수부사(三水府使)와 주사(主事)를 처형하고 삼수 순사주재소를 완전 소각함.
1907. 12. 31. 일본군 가미쯔끼(上月) 소위 등 기병 소대와 혜산진·갑산 수비대가 합동으로 삼수성을 공격해왔으나 약 3시간의 격전 끝에 이들을 패주시킴. 의병 진영 측에서도 9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
1908. 1. 10.(40세) 함남 정평에서 온 의병들과 합세하여 300여 명의 대병력으로 갑산읍으로 진공, 9시간 동안 점령. 일본군 갑산수비대·경찰관주재소를 공격 하여 다수의 일본 관민을 처단하고 통신기기와 우체국 청사를 소각. 이후부터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음.
1908. 1. 12. 60여 명의 의병대를 갑산군 상남사(上南社)에 파견하여 악질 일진회원 원길학(元吉學)·박중형(朴仲兄) 등 48명을 처단.
1908. 1. 23. 악명 높은 일진회원 출신 군수 유문경(劉文卿)이 있는 단천군으로 진출. 일진회원 최성학(崔成學)이 촌장인 수하사(水下社) 운승리(雲童里)로 진격하여 일진회원을 응징.
1908. 2. 12. 120여 명의 휘하 의병부대가 혜산진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들을 소탕.
1908. 2. 21. 약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갑산군 읍사 세동(細洞: 속칭 세골 또는 청지평)에서 군경 합동 30명의 토벌대와 교전, 패퇴시킴. 이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고 소총 3정을 노획.
1908. 3. 17. 홍범도와 같이 의병대를 지휘해 오던 차도선이 일제의 ‘귀순공작’에 속아 200명의 부하 의병들을 데리고 북청 일본군 수비대로 ‘귀순’.
1908. 3. 20. 부인 이씨와 두 아들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제3순사대에 의해 홍범도의 귀순공작 인질로 체포됨.
1908. 4. 20. 삼수 서방 지점에서 약 100명의 병력으로 일제 헌병대와 접전, 큰 타격을 입힘. 같은 날 휘하의 한 의병대가 함흥을 기습, 일본군 포병대의 숙사(宿舍)를 방화하여 2개동을 전소시킴.
1908. 5. 2.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사이의 구름물령(雲波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일병 32명을 저격, 전멸시키고 소총 30정 등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둠.
1908. 5. 4. 갑산 도하리(都下里)에서 ‘귀순’을 권유하러 온 일제의 주구 김원흥 등 순사 6명을 처단.
1908. 5. 16. 500여 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여 장진의 산정개(山亭開)에서 갑산으로 이동하는 장진분견소 일병을 섬멸.
1908. 5. 중순 아내 이씨가 일제 주구배의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죽음.
1908. 5. 하순 갑산에 있는 동안 김충열(金忠烈)·조화여에게 2만 원의 군자금과 여비를 주어 러시아령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있는 이범윤(李範允)에 파견, 무기와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함.
1908. 5. 28. 갑산군 괘탁리(掛卓里)에서 15기(騎)의 일군 기병대와 접전, 전멸시킴(15명 사살, 말 다섯 필 노획).
1908. 5. 말 약 7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를 장진 연화산 병풍바위 밑으로 집합 시켜 소부대(9개 중대)로 재편성하고 각지에 분산하여 유격전을 전개토록 함. 홍범도는 3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진읍 방면으로 진출.
1908. 6. 2. 장진 두꺼비 바위골(蟾岩)에서 일본군과 교전, 16명을 사살. 의병도 5명이 전사. 이후 다시 병력을 분산, 약 180명을 인솔하고 안산(安山) 방면으로 진출.
1908. 6. 6경 함흥 초리장(草里場) 유채골의 악덕 부호 박면장 집을 기습, 일본돈 2만 9천엔 가량을 군자금으로 압수.
1908. 6. 10. 북청의 통패장골 쇠점거리(金昌)에서 150여 명의 의병대를 지휘, 일군 기병(騎兵) 토별대와 격전. 적 30여 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량과 무기를 빼앗는 대승을 거둠.
1908. 6. 12. 안변·덕원 등지에서 활약하던 노희태(盧熙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약 300명의 대부대를 형성. 함남 정평의 한대골에서 함흥수비대와 격전, 섬멸적 타격을 가함.
1908. 6. 16. 함남 정평 바배기에서 아들 양순(홍양순)이 일본 군경 토벌대와 싸우다가 전사.
1908. 6. 중순 갑산 간평에서 일병 80여 명과 격전. 일병 3명 사살, 의병 8명 전사.
1908. 6. 말 장진 연화산에서 다시 의병회의를 소집,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의병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 그 뒤 여러 곳에서 부족한 탄약과 무기,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의병대는 각지로 분산함.
1908. 7. 초 장진 달아치(達阿峙) 금광을 습격하여 일병 6명을 처단하고 군자금으로 쓸 금괴 다수를 노획.
1908. 7. 6∼21. 안중근(安重根)이 이끄는 약 100명의 의병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에 진입, 홍범도 의병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세 차례의 전투 끝에 패전. 양 의병부대의 연합시도가 무산됨.
1908. 7. 18. 흥원 전진포(前津浦)에 있는 부패 관리 흥원군수 집을 기습하여 일본 돈 3만 7천엔을 군자금으로 압수.
1908. 7. 21. 북청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함흥수비대와 격전, 전 16명을 사살하고 소총 16정, 탄약 6상자를 노획.
1908. 8. 초순 정일환(鄭日煥)·임재춘(林在春)·변해룡(邊海龍)을 중국에 파견하여 탄약과 무기를 구입해 오도록 함.
1908. 8. 말 중국에 파견했던 변해룡이 간도에서 탄약 구입교섭을 수행하고 귀환.
1908. 9. 20. 함흥 북방 천평리(天坪里)에서 60여 명의 대오를 이끌고 함흥 수비대 장교 이하 13명과 격전.
1908. 10. 중순 40여 명의 예하 의병부대가 단천에서 우포(右浦)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
1908. 11. 2. 더 이상의 항전이 어렵게 되자 4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삼수군 신갈 파진을 거쳐 중국 통화(通化)로 건너감.
1908. 11. 10경 중국 길림(吉林)에서 둘째 아들 용환(홍용환)과 러시아어 통역 김창옥, 의병장 권감찰 등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들을 후일을 기약하고 국내로 돌려보냄.
1908. 12. 중순 연해주 소왕령(蘇王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도착, 6일을 머묾.
1908. 12. 하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 달을 머묾.
1909. 1. 말(41세) 두만강 건너편의 연추에 가서 이범윤을 만남.
1909. 6월 블라다보스토크 동북의 스찬(수청: 水淸)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1909. 겨울 연해주 추풍(秋風) 허커우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4,980루블의 군자금을 모집.
1910. 3∼4월경 류인석(柳麟錫)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
1910. 4. 초순(42세) 러시아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추풍을 출발, 국내로 향함.
1910. 4. 하순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본군 42명을 저격, 전멸시키고 소총 40정·권총 4정, 기타 많은 군량과 탄약을 빼앗음.
1910. 5. 초~중순 무산·종성 등지의 일군과 수차례 격전하였으나, 패전하고 다시 중국 안도현·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
1910. 6. 21. 류인석 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의 의병조직을 망라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 조직에 참여, 의원(議員)으로 선임됨.
1910. 8. 하순 이상설의 주도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성명회(聲明會)에 참여, 일본의 한국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성토.
1911. 3. 중순(43세) 휘하 의병장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30여 명의 의병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 함북 경원 세천동(細川洞) 부근에서 일군 수비대와 격전.
1911. 5. 20.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의 창립을 주도, 부회장에 선임됨. 동년 말에는 이 조직의 사찰부장(査察部長: 일부자료에는 경찰부장)을 맡음.
1911. 11. 15.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범석(李範錫)·엄인섭(嚴仁燮) 등 20명과 함께 ‘21의형제(義兄弟)’ 동맹을 결의.
1912. 2월(44세) 부하 심석만(沈石萬)과 함께 만주 장백부(長白府)로 가서 평안도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회동,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을 논의.
1912. 가을 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고 연해주 지방의 철도공사를 하며 노임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
1913∼1915. 7.(47세)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과 군자금 모집에 종사. 그 동안 4,500여 루블을 비축하고 그 자금으로 소총 17정과 탄약을 구입.
1915. 7.∼1917. 11월(49세) 밀산 십리와에 있는 권업회의 농장에서 농사와 수렵에 종사하며 무력투쟁을 준비.
1917. 11.∼1919. 8초(51세) 러시아령 추풍 다아재골로 이동, 의사 최병준(崔丙俊) 집에 무기를 숨겨 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출의 기회를 엿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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