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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만성</name>
<nameHanja>鄭萬成</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06)</orders>
<addressBirth>서울</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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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72. 12. 25 ~ 1947. 5. 9</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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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 5. 2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references>
<content>1872년 12월 25일 서울 필운동(弼雲洞)에서 태어났다. 노동자로 일하였으며 1919년 3월 26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서울에서는 야간 시간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6일 밤 누하동(樓下洞)·적선동(積善洞)·안국동(安國洞)·광화문통(光化門通)·삼청동(三淸洞)·가회동(嘉會洞)·와룡동(臥龍洞)·재동(齋洞)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시위대는 서울 시내 경찰 파출소 건물, 전차 등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날 밤 광화문통(光化門通) 기념비각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를 보고, 이들의 외침에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김교승(金敎承)·김규정(金奎正) 등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따라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명월관(明月館) 부근을 지날 때, 명월관 앞에 있던 5~6명의 사람들과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서울 시내 만세시위(3. 26)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서울(3.26) 시위</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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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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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문선</name>
<nameHanja>鄭文善</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16)</orders>
<addressBirth>전북 군산(群山)</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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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73 ~ 미상</bornDied>
<placeOfOrigin>미상</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4. 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ferences>
<content>전라북도 군산부(群山府, 현 군산시) 송창동(松昌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20년 당시 47세로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노동자로 일하였으며, 1919년 3월 5일 군산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군산부 만세시위는 전북 옥구(沃溝)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옥구에서 교사들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던 개신교도 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熙淳)에게서 독립운동의 취지를 듣고 3월 6일로 예정된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동의하여 군산부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3월 5일 영명학교 교사들이 만세시위 계획을 알아차린 군산경찰서 일제 경찰로부터 체포되자, 시위 주도자들은 예정보다 하루 앞당긴 3월 5일에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옥구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군산부에 도착해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을 때, 영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과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전개하다가 결국 붙잡혔다.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부 만세시위 참가</activities>
<engagedEvents>군산부 만세시위</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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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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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만산</name>
<nameHanja>鄭萬山</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08)</orders>
<addressBirth>경기 고양(高陽)</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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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6. 8. 17 ~ 1941. 1. 27</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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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 5. 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 1995.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 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ferences>
<content>1886년 8월 17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월곡리(月谷里,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6일 고양군 숭인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6일 고양군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당일 아침 마을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일제 면사무소는 이미 만세시위 계획을 탐지하고 이날 면사무소를 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최정식(崔貞植)·이재성(李在成) 등 다른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의 문을 열라고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맞서 최정식·이재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저항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만세운동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고양군 숭인면 만세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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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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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기동</name>
<nameHanja>鄭其東</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1992)</orders>
<addressBirth>전북 전주(全州)</addressBirth>
<aliases>이명 : 정동찬(鄭東燦)</aliases>
<bornDied>1901. 9. 12 ~ 1987. 10. 27</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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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 4. 16. ; 『매일신보』, 1919. 4. 2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ferences>
<content>1901년 9월 12일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봉동면(鳳東面) 은하리(隱下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동찬(鄭東燦)이다. 1919년 당시 학생이었으며, 전라북도 전주군 봉동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전라북도 전주군 봉동면 낙평리(洛平里) 소재 영흥학교(永興學校) 교정에서 노순석(魯順錫)에게 3월 21일 전주군 봉동면 장기리(場基里) 장날 대규모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의하였다. 노순석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비밀리에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9일 저녁 노순석은 장기리에 사는 주민 김정일(金政一)의 집, 3월 20일 장기리 주민 김봉문(金奉文)의 집 외벽에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는 격문을 붙였다. 노순석이 격문을 붙일 때 장기리 주민 박성춘(朴成春)과 김갑경(金甲敬)을 만나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노순석과 함께 봉동면 장기리 일대 독립만세를 계획하였으나, 이들의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전주군 봉동면 일대 독립만세시위 계획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봉동면 장기리 장날 시위 계획</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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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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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백용</name>
<nameHanja>鄭伯用</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1992)</orders>
<addressBirth>경북 영일(迎日)</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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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91. 4. 28 ~ 1956. 4. 5</bornDied>
<placeOfOrigin>초계(草溪)</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4. 28. ; 「수형인명부」. ; 「형사사건부」. ; 윤보현, 『영남출신독립운동략전』 1, 1961. ; 3·1동지회, 『迎日三一同志史』, 1953. ; 청하면개발자문위원회, 『청하·송라 3·1운동사』, 북랜드, 2009. ; 이상준, 『포항의 3·1운동사』, 삼일기획, 2016.</references>
<content>1891년 4월 28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청하면(淸河面) 미남리(美南里)에서 아버지 정성준(鄭成俊)과 어머니 최유순(崔有順)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8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이 전파되면서 경북 영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윤영복(尹永福)과 오용간(吳用干)이 영일군 청하면 덕성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오용간이 전국 각처에서 독립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에 감화하여 윤도치(尹道致)·김윤선(金允先)·이상호(李相浩)·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 등과 함께 3월 22일 덕성 장날 시장에서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3월 22일 오후 1시경 덕성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오용간이 배포한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윤영복·오용간 등 23명과 함께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 덕성장터 만세시위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1919년 영일군 청하면 덕성 장터 독립 만세 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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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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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정몽호</name>
<nameHanja>鄭夢虎</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경남 남해(南海)</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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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98. 10. 4 ~ 1984. 12. 13</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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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1919. 7. 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국가보훈처 마산보훈지청, 『경남항일독립운동참여자록』, 2001. ; 국사편찬위원회 편, 『1919, 그날의 기록』 3, 2019.</references>
<content>1898년 10월 4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문항리(文巷里)에서 태어났다. 남해군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남해군 설천면 남양리(南陽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남해군 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던 중, 고현면(古縣面)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경찰주재소에 만세시위 사실을 밀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만세시위를 중단하였다. 4월 4일 남해군 읍내 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장터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오후 2시경부터 다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장대에 높이 단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시위대를 지휘하여 읍내 중심가를 행진하였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지배의 상징적 기관들에 진입하여 의분을 표현하였다. 남해군수와 일제 경찰을 붙잡아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심을 거쳐 1919년 7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부산감옥 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4월 3~4일 경상남도 남해군 읍내 만세시위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3.1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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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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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전상호</name>
<nameHanja>田相鎬</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경북 영덕(盈德)</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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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9. 1. 10 ~ 1924. 7. 31</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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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6. 5.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9. 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김희곤,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 Ⅱ -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ferences>
<content>1889년 1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寧海面)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영해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오후 1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 뒤, 2,000~3,000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일제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났다. 시위대는 영해경찰관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우편소·심상소학교·면사무소를 돌며 시위를 전개하면서 건물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영덕경찰서에서 일제 경찰이 파견되었으나, 시위대는 일제 경찰을 제압하여 구타하고 감금하였다. 이때 시위대에 합류하여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그해 9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영해면 만세시위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영덕군 영해면 3.1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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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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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전선근</name>
<nameHanja>全善根</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06)</orders>
<addressBirth>경북 의성(義城)</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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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9. 6. 1 ~ 1941. 12. 22</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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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 1919. 4. 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ferences>
<content>1889년 6월 1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신평면(新平面) 덕봉리(德峰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말 신평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신평면 만세시위는 기독교인 김수성(金守星)·이학술(李學述) 등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25일 김목이(金睦伊) 등과 만나 거사의 대의를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서 거사에 참여하기로 약속하고 거사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만세시위 준비 소식을 전하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무렵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즉각 거사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을 주민 김태성(金泰成)·황경응(黃敬應)·김차쇠(金且釗)·유홍식(柳洪植)·유성이(柳聖伊) 등과 함께 거사 장소로 이동하여 합류하기로 하였다. 이날 밤 9시 마을 앞 바위산에 모여 김목이가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5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바위산에서 중율동(中栗洞) 방향으로 행진하였으며, 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었다. 이러한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주도자를 체포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의성 신평면(3.25) 3.1운동</activities>
<engagedEvents>의성 3.1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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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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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전부명</name>
<nameHanja>田富明</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06)</orders>
<addressBirth>전북 김제(金堤)</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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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7. 5. 29 ~ 1941. 2. 16</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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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 4. 1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ferences>
<content>1887년 5월 29일 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水流面, 현 금산면) 구월리(九月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김제 수류면 원평리(院坪里) 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김제 원평리 시장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0일·21일에 걸쳐 일어났다. 수류면 구월리 사는 농민 배세동(裵世彤)은 3월 13일 전주군(全州郡) 전주시장(全州市場)의 만세시위를 목격한 것을 계기로 수류면 원평리 시장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이를 계획할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3월 16일 구월리 주민인 전도근(田道根)·전도명(田道明)·이병섭(李秉燮)·김성수(金成守) 등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3월 20일 오후 원평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6시경 원평리 시장에서 전도근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장날을 기해 시위를 감시하던 일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일부 주민들과 함께 3월 21일 원평리 시장에 다시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19년 4월 1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20, 21일 김제 원평리 시장 만세시위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김제군 수류면 만세시위</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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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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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조종두</name>
<nameHanja>趙鍾斗</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04)</orders>
<addressBirth>충남 청양(靑陽)</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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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9. 12. 15 ~ 1953. 2. 7</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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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수형자명부」.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 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편, 『충남의 독립운동가』 제2권, 2011. ; 김진호, 「청양지역 3·1운동과 일제 탄압」, 『충청문화연구』 16,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6.</references>
<content>1889년 12월 15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지곡리(池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청양군 목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청양군 정산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서정리(西亭里)에 위치한 정산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3시경부터 홍범섭 등이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 헌병은 해산을 종용하면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총격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이날의 만세시위는 종료되었지만, 다음날 권흥규의 시신을 목면 안심리(安心里)에 위치한 집으로 운구하면서 더욱 큰 규모의 만세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수많은 만장(輓丈)이 뒤따르는 운구행렬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이미 전날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운구행렬이 마을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참여가 지속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운구행렬 속에서 태극기가 배포되었고, 운구행렬을 뒤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안심리를 향해 행진하였다. 일제는 정산의 헌병과 함께 공주(公州) 주재의 헌병까지 정산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과 마주치자마자 즉각적으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김국삼(金國三)·유행길(柳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 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에 구금되었고, 1919년 4월 26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4월 6일 충남 청양군 목면 만세시위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1919년 청양군 목면 만세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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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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