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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신채호 생가</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복원 / 생가는 복원되었으며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situation>
<define>신채호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de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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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anization>신민회/동창학교/신한혁멱당/대한민군임시정부/의열단/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organization>
<person>이승만</person>
<content>&lt;![CDATA[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해 수학했다. 1905년 『 황성신문』의 논설위원,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들의 매국행위에 대한 논설을 실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07년 4월 신민회에 가입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1910년 4월 일제의 강제병합 직전 망명하였다. 1911년 연해주에서『대양보』와『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와 만주지역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1914년에는 서간도 환인현의 동창(東昌) 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으며, 1915년 북경에서 신한혁명당, 1917년 상해에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위임통치를 주창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신대한』을 발행해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펼치며 이승만 타도에 앞장서 반(反)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조선혁명선언」을 집필 발표했으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26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8년 4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에 참석했다. 같은해 대만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reference>신용하,『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한길사, 1984. 
조동걸, 「단재 신채호의 삶과 유훈」, 『한국사학사학보』3, 한국사학사학회, 2001, 181~199쪽. 
한시준, 「신채호의 재중독립운동」, 『한국사학사학보』3, 한국사학사학회, 2001, 227~253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25~446쪽.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어남동 233)</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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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고령신씨세보」 및 『단재 신재호 전집』에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다.</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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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홍주의사총</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의병전쟁</groupe>
<sort>묘소</sort>
<situation>원형보존 / 1949년 홍주의병의 유해가 발굴된 장소에 조성한 묘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situation>
<define>1906년 5월 30·31일 홍주성전투 중에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홍주의병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define>
<historic>1906년 홍주성전투</historic>
<organization>홍주의병(洪州義兵)</organization>
<person>민종식(閔宗植)</person>
<content>&lt;![CDATA[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한 홍주의병은 천제를 지내고 의병의 편제를 보강하였다. 아울러 대장 민종식(閔宗植)은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모병을 지시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인근의 사민들도 의병에 합류하였다.

홍주성 점령 소식을 접한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요시미치에게 명령을 내려 일본주차군 제60연대의 보병 2개중대와 기병 반개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소대를 파견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5월 30일 밤부터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결국 참모장 채광묵(蔡光默)을 비롯하여 성재평·전태진·서기환·전경호 등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홍주성전투 직후 홍주군수로 부임한 윤시영(尹始永)의 일기에 의하면, 일본기마병이 의병을 추격 사살하였으며, 체포된 의병을 심지어는‘작살’하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1949년 홍주경찰서과 소방서원들의 식목 행사 중홍성천 주변에서 유해가 발굴되어 묘역을 조성하였다. 의병총은 2001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묘역 일대를 성역화하였다.]]</content>
<reference>윤시영, 「홍양일기」, 『향토연구』11, 충남향토연구회, 1992, 22쪽. 
손재학, 「왜정36년간에 내가 겪은 실화」, 『손재학회고록』(필사본).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144쪽.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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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ress>충남 홍성군 </address>
<addressRoadname>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79</addressRoadname>
<research>윤시영의 『홍양일기』에 의하면 일본기마병이 의병을 추격하여 사살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손재학의 「왜정36년간에 내가 겪은 실화」에 의하면, 1949년 의사총을 조성한 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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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이남규부자 순국지 - 외암리</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의병전쟁</groupe>
<sort>산야</sort>
<situation>변형 / 1986년에 건립한‘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가 있다.</situation>
<define>1907년 9월 26일 이남규·이충구 부자가 일본군 기마대에 의해 순국한 곳</define>
<historic/>
<organization/>
<person>이충구(李忠求)</person>
<content>&lt;![CDATA[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6년 홍주의병이 결성되자, 그는 여기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남규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군 기마대는 압송 도중 온양(현 아산)의 외암동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인 이충구(李忠求)와 하인마저도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족지인『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6년에 이남규부자 순국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賈壽福)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여 현장에‘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을 건립하였다.]]</content>
<reference>『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일, 2면 5단,「何故被禍」. 
김상기,「수당 이남규의 학문과 홍주의병투쟁」,『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664-665쪽.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충남의 독립운동가2』, 2011, 101-104쪽.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충남 아산시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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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 기사에 의하면 이남규부자가 온양군 외암동에서 순국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1986년 기념비 건립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의 증언이 남아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research>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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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이상재 생가</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애국계몽운동</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복원 / 생가의 안채는 1800년경, 사랑채는 1926년경 건립되었으나 해방 전 허물어져 1981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생가는 1990년에 재복원한 것이다.</situation>
<define>독립협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던 이상재가 태어난 곳</define>
<historic/>
<organization>조선척후단(朝鮮斥候團), 신간회, 독립협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조선교육협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organization>
<person>박정양, 이승만, 홍영식</person>
<content>&lt;![CDATA[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충남 한산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문객으로 있었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게 되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공사관 서기생(1등서기관)으로 동행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의 참찬관에 임명되었다.

1896년 7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1908년 YMCA 총무가 되었으며,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content>
<reference>「이상재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년 8월 14일. 
이광린,「 월남 이상재」,『 개화기의 인물』,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유영익, 「이상재-기독교 갑옷을 입은 유가 선비로 신대한 건설에 헌신-」, 『한국사시민강좌』30, 일조각, 2002.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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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ress>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71(종지리 263)</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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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이상재의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19년 8월 4일)에 이상재의 주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로 되어 있으며, 현재 한산면 종지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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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최익현 집 - 모덕사 중화당</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의병전쟁</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변형 / 1914년 건립된 모덕사가 집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청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situation>
<define>1900년부터 최익현이 살았던 곳</de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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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content>&lt;![CDATA[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李恒老)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한 최익현은 이후 예조좌랑·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73년에는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10년 권세를 붕괴시켰다. 또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가‘5불가소’를 올려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였다.

최익현이 의정부 찬정 등의 관직을 사양하고 충남의 정산으로 이거한 것은 1900년 음력 4월의 일로 벽지에서 은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며, 1906년에는 노구를 이끌고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대마도에서 함께 유배된‘홍주9의사’들과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그해 11월(음)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reference>『면암집』연보. 
김상기,「최익현의 정산 이주와 태인의병」,『충청문화연구』7,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1. 
박민영,『대한 선비의 표상 최익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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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ress>충남 청양군 </address>
<addressRoadname>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나분동길 12 </addressRoadname>
<research>『면암집』연보를 통해 1900년부터 최익현이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모덕사 경내에 중화당(中和堂)이 보존되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모덕사 홈페이지에는‘면암선생 기거하신 곳’이라고 중화당을 설명하고 있다.</research>
</item>
<item>
<subject>이종일 생가</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3·1운동</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복원 / 1986년과 1990년에 복원되었다.</situation>
<define>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보성사 사장을 역임한 이종일이 태어난 곳</define>
<historic>1919.3.1 3·1독립만세운동</historic>
<organization>독립협회/보성사</organization>
<person>권동진(權東鎭)/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인종익(印宗益)/안상덕(安商德)/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함태영(咸台永)/이경섭(李景燮)/박인호(朴寅浩)</person>
<content>&lt;![CDATA[이종일(李鍾一, 1858~1925)은 1858년 태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상경하여 한학을 공부했다. 1894년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李承晩) 등과 함께『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과장과 보성사(普成社)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일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를 했으며, 2월 초순부터 3·1운동에 참가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해 한용운 3,000매, 인종익 2,000매, 안상덕 2,000매, 강기덕·김원벽 1,500매, 함태영 1,200~1,300매, 이경섭 1,000매씩 등을 직·간접적으로 배포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함께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국에 보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 위해『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reference>「이종일 신문조서(제2회)」;
「이종일 이종린 대질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167~168쪽.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1, 1990, 161~16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2·5·8·9, 1971~1977. 
박걸순,『이종일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8</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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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이종일이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태안군 북이면 정포리로 1914년 8월 지방행정구역 변경으로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 반계리로 변경되었다.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향토사학자 이은우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research>
</item>
<item>
<subject>홍주의병 전투지 - 홍주성</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의병전쟁</groupe>
<sort>기타(성곽)</sort>
<situation>변형 / 성곽 주변 가옥을 철거하고 토지매입·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홍주성 안에는 홍성군청이 위치하고 있다. 홍주성은 성곽·조양문·아문이 1972년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으며 안회당과 여하정이 1997년 추가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situation>
<define>1906년 5월 20일부터 31일까지 홍주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룬 곳</define>
<historic/>
<organization/>
<person>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유준근(柳濬根)</person>
<content>&lt;![CDATA[홍주의병은 1906년 3월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재봉기하였으나, 청양 합천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이후 홍주의병은 5월 9일 부여의 지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고, 부대를 정비한 후 5월 13일 서천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남포읍성 전투에 성공하여 병사를 의병에 귀순시키는 등 의병을 모집하면서 5월 19일 홍주읍에 들어와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민종식은 이후 천제를 지내고 의병의 편제를 보강하였다. 아울러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모병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여러 차례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요시미치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주차군 제60연대의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파견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결과 홍주의병은 5월 30일 밤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튿날 새벽 결국 채광묵(蔡光默) 부자 등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채 패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홍주의병 8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에서 유병장(儒兵將) 유준근(柳濬根)을 비롯하여 9명은 대마도에 유배되기까지 하였다.]]</content>
<reference>홍순대,『해암사록』. 
『황성신문』, 1906년 6월 18일, 2면 4단,「義擾調査」. 
「한국각지폭동잡건」,『한말의병자료Ⅲ』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17집, 독립기념관, 2002, 75-79쪽. 
김상기,「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126-157쪽.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충남 홍성군 </address>
<addressRoadname>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일대</addressRoadname>
<research>「한국각지폭동잡건」(『한말의병자료』Ⅲ권 수록)에 1906년 5월 30~31일 전개된 홍주의병의 홍주성 전투상황이 보고되어 있다.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research>
</item>
<item>
<subject>한용운 생가</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3·1운동</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복원 / 1992년 생가를 복원하였다.</situation>
<define>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한용운이 태어난 곳</define>
<historic>1919 3·1운동</historic>
<organization>신간회/조선불교청년회/조선불교청년동맹</organization>
<person>백용성(白龍城)/최린(崔麟)</person>
<content>&lt;![CDATA[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충남 결성에서 태어나 1905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13년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했으며,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유심(唯心)』을 발간하여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4일부터 27일 사이 승려 백용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27일 최린의 집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3월 1일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기쁘며 더욱 더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계속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문학 활동을 하였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전환해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월간지『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전념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reference>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12·13·14, 1973∼1978.
「한용운 신문조서」, 1919년 8월 27일 ;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1·12, 1990, 88∼90·189쪽.
만해사상연구회,『만해 한용운 연구』, 민족사, 1980.</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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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한용운 신문조서」에는 출생지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로 되어 있고, 『홍양사』에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 복원된 생가지로 위치를 비정하였다.</research>
</item>
<item>
<subject>김한종 생가</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국내독립운동</groupe>
<sort>가옥</sort>
<situation>복원 / 1980년대까지 생가가 일부 남아 있었다. 현재 생가는 2000년 복원된 것이다.</situation>
<define>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 김한종이 태어나 1918년 체포 당시까지 살았던 곳</define>
<historic/>
<organization>대한광복회</organization>
<person>박상진/우재룡/채기중/김경태/김재창/이철영/김좌진</person>
<content>&lt;![CDATA[김한종(金漢鍾, 1883~1921)은 일제강점 후 충청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7월 김경태(金敬泰)·김재창(金在昶)과 함께 부여의 이철영(李哲永) 집에서 조선총독 및 고관들의 암살을 모의했다. 때마침 조선총독이 부여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조선총독 처단을 모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경주로 박상진을 찾아가 광복회에 참여해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우재룡(禹在龍)과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하고 충청도 지부조직에 착수했다. 그가 책임을 맡은 충청도지부는 광복회 지부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충청도지부장으로써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활동을 펼쳤다. 서울에서 박상진과 함께 김좌진(金佐鎭)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하기도 하고, ‘고시문(告示文)’을 별도로 작성해 충청도지역에서 자금을 모집하고 예산·연기·인천에 곡물상으로 위장한 광복회 거점을 설치했다. 또한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을 처단해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한종 생가는 2000년에 해체·복원되었으며, 2007년 기념관이 개관하였다.]]</content>
<reference>「박상진 등 40인 예심종결결정」, 공주지방법원, 1918년 10월 1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상진 등 19인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년 9월 2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상진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0년 9월 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동걸, 「대한광복회 연구」, 『한국민족주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284~285쪽. 
이성우, 「광복회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71~80쪽.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address>
<addressRoadname>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장신신흥길 283-12</addressRoadname>
<research>「박상진 등 19인 판결문」에 의하면 본적과 주소가 모두 신흥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광시면 신흥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후손인 김경식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research>
</item>
<item>
<subject>태인의병 창의지 - 무성서원</subject>
<category>국내항일운동사적지</category>
<groupe>의병전쟁</groupe>
<sort>건물</sort>
<situation>원형보존 / 19세기 중엽 중수 이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situation>
<define>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태인의병 창의를 결의한 곳</define>
<historic>1906 태인의병 창의</historic>
<organization/>
<person>최익현(崔益鉉)/고석진(高石鎭)/임병찬(林炳瓚)</person>
<content>&lt;![CDATA[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철도 이용 거부·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촉구하였다.

1906년 3월 그의 제자인 전북 고창 출신의 고석진(高石鎭)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자 최익현은 태인의 임병찬(林炳瓚)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같이할 것을 권하였다. 몇 차례의 서신 왕래를 통해 임병찬의 뜻을 확인한 최익현은 당시 거주하고 있던 충청남도 청양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였다. 임병찬을 제자로 받아들인 최익현은 회문산 북록의 상종성에 약 2개월간 머물며 거의를 준비하였다.

창의소를 지어 고종에게 올린 최익현은 임실·순창·담양 등지로 사람을 보내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창의를 발의하니 따르는 자가 8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서원은 원래 최치원(崔致遠)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였으나, 1696년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태산사는 1484년 최치원을 제사지낸 유상대(流觴臺) 위의 선현사(先賢祠)를 이건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 중수한 것이다.]]</content>
<reference>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368-38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68-7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2-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749-75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677-678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403쪽. </reference>
<addressThen/>
<address>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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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면암집』·『돈헌선생문집』·『면암선생창의전말』등 태인의병 관계 문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원 옆에 세워진 병오창의기적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research>
</item>
</roo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