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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구춘선</name>
<nameHanja>具春先</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96)</orders>
<addressBirth>함북 온성(穩城)</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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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57 ~ 1944. 3. 20</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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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계봉우, 『꿈속의 꿈』 상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北愚 桂奉瑀 資料集』 1권, 1996).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國外容疑朝鮮人名簿』, 1934. ; 「朝鮮民族運動年鑑」(金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권, 原書房, 1967). ; 慶尙北道警察部 編, 『高等警察要史』, 1934. ; 「機密公 제219호, 不逞鮮人團의 통일에 관한 협의의 건」, 1920.8.28,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 - 在滿洲의 部 2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27호, 不逞鮮人團體 調査에 관한 건」, 1925.3.18,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 - 在滿洲의 部 4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독립신문』 1920.1.10. ; 『신한민보』 1924.7.17.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獨立運動史』 3권, 정음문화사, 1983.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7. ; 김병기·반병률, 『국외 3·1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반병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신서원, 2013.</references>
<content>1857년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미포면(美浦面) 풍인동(豊仁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북은(北隱)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886년에는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永達鎭)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궁궐수비대 병정이 된 후 남대문 수문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향리로 돌아왔다.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여 온성 대안(對岸)인 북간도의 양수천자(凉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한인 농민들을 보호하였다. 1907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룽징(龍井)에 중앙교회(中央敎會)를 세웠다. 북간도에서 한인 자제들의 교육 진작을 위해 1912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에 참여하였다. 특히 간민교육회 회원들이 1911년 3월 이종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하여 3년여 동안 경영해온 왕칭현(汪靑縣) 소영자(小營子)의 길동기독학당(吉洞基督學堂)의 간사로 참여하였다. 길동기독학당의 교장은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李同春)이었다. 당시 교사로 참여한 계봉우(桂奉瑀)는 자신의 회고록 『꿈속의 꿈』에서 “간사 구춘선은 씩씩하고 화기스러운 맛이 있었으며” 라고 회상하였다. 간민교육회가 고루한 유학자와 보수적인 농민의 반대, 그리고 이를 이용한 일제의 중국 당국에 대한 외교적 압력으로 그 활동이 유명무실해지자,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을 비롯해, 정재관·유기연·김립 등 이전 간민교육회 회원 24명과 간민회(墾民會)를 발기하고 1913년 2월 26일 창립대회를 열었다. 중국과 일본의 간섭이 한층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왕칭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哈蟆塘)으로 이주하여 한인 마을을 개척하였다. 1913년에 하마탕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를 매개로 한 민족 교육과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면서 1920년 가을까지 하마탕을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국내외에서 3·1운동의 분위기가 고조었다. 북간도 지역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 선언·만세 시위 운동과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3·1운동이 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간도 인사들은 의사부(議事部)를 조직하고(대회장 金永學, 부대회장 裵亨湜) 3월 13일 룽징 서전(瑞甸)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독립축하회’에서의 독립 선언과 뒤이은 만세 시위운동에는 약 3만 명 이상의 동포가 참여하였지만, 일제의 사주와 압력을 받은 중국 군경의 발포로 17명의 순국자와 30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이때 이 지역의 지도자들과 함께 시위대 해산 후 국자가(局子街)에 머물면서 일본 영사관의 압력과 지시에 따라 많은 살상자를 낸 연길도윤공서(延吉道允公署)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이어 3월 28일 둥닝현(東寧縣) 나자구 삼도하자(三道河子)에서의 독립선언축하회에 김영학 등과 함께 참석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3월 13일 당일 북간도 한인 지도자들은 의사부를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로 개편하였는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임시헌법’을 반포하자 국호의 상충을 피하기 위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한 이후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대한국민회는 하마탕에 소재한 총부(總部) 밑에 민정 기관으로 지방회 8개를 두었고, 지방회 밑에 130여 개 지회를 설립하였다. 오랫동안 국민회 총부의 회장으로서 국민회의 전체 조직을 총괄하였다. 국민회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이끌던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론을 실현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무관학교 설립, 무기 구입 등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 발표된 「국민회장고유문(國民會長告諭文)」에 나타난 대로 북간도 한인 사회의 통일적 중심기관이었던 국민회는 임시정부가 효과적인 독립 전쟁을 실현하고자 추진한 북간도 무장 단체 통합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 3월 이후 7월까지 임시정부가 파견한 안정근(安定根), 왕삼덕(王三德), 이용(李鏞)의 적극적인 권유와 활동으로 북간도 모든 단체의 통합 운동이 추진되었지만,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불참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20년 3월 8~10일, 사흘에 걸쳐 하마탕에서 개최된 독립군 단체 대표 회의에 국민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한독립군의용대장 홍범도(洪範圖), 광복단 단장 이범윤(李範允), 김광국(金光國), 홍림(洪林), 서성권(徐成權), 황병길(黃炳吉), 전의근(全義根) 등 40여 명이 참석하였다. 북간도 제단체의 통일운동은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5월 말 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간의 3단 연합에 성공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였다. 3단 연합을 축으로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북간도의 6개 단체가 통합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6월 초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1920년 7월 초 북간도 제단체의 통일을 위한 제3차 회의가 개최되어 행정기관과 군사기관의 2부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행정기관으로 대한민단(大韓民團), 군사기관으로 동도군정서(東道軍政署)와 동도독립군서(東道獨立軍署)를 설립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대한민단 단장에 선임되었고, 부단장은 서상용(徐相庸), 고문은 이용 등이 맡았다. 그리고 북로군정서는 동도군정서로, 대한북로독군부는 동도독립군서로 재편하기로 한 바, 동도군정서장에는 서일, 사령관에는 김좌진, 동도독립군서장 및 사령관에는 홍범도가 내정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북로사령부 2개 단체가 찬동하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봉오동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던 3단 연합은 8월에 이르러 붕괴하고 말았다. 국민회는 1919년 말 이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후원하고 산하에는 군무위원회(軍務委員會)만을 두었으나, 3단 연합이 붕괴한 1920년 8월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대한국민군(사령관 안무(安武))을 창설하였다. 대한국민군의 일부는 홍범도부대 등 여러 무장 단체와 연합하여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였다.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이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간도 침공을 맞아서 청산리대첩을 치렀다. 청산리대첩 직전, 임시정부는 북간도 지역의 국민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광복단(光復團) 등 단체들을 통합하여 군정·민정·재정을 통일적으로 담당할 기관으로 재편을 시도하였다. 즉,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군정), 총판부(總辦府, 민정), 재무관서(財務官署, 재정)를 조직하고 책임자(총판, 사령관, 재무관)와 직원들을 임명하였지만, 일본의 간도 침공과 청산리대첩으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총판부는 간북남부(間北南部) 총판부와 간북북부(間北北部) 총판부로 나뉘었는데, 남부 총판부는 옌지(延吉)·화룽(和龍)·둔화(敦化)·어무(額穆) 등 지역을, 북부 총판부는 왕칭(汪淸)·훈춘(琿春)·둥닝(東寧)·닝안(永安)·무링(穆陵) 등 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간북남부 총판부의 총판(總辦)에 임명되었고, 간북북부 총판부 총판에는 서일(徐一)이 임명되었다. 북로사령부 사령관은 임시정부가 임명할 예정이었고, 참모장으로 조성환(曺成煥)이 임명되었다. (간북)남부재무관서에는 재무관에 강구우(姜九禹), 부재무관에 김창순(金昌順)이, 북부재무관으로는 계화(桂和), 부재무관에 정남윤(鄭南允)이 각각 임명되었다. 군정·민정·재정 등 각 분야에 북간도 여러 단체의 인사가 망라되어 북간도 지역 제단체를 통일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간도 침공과 뒤이은 일제의 북간도 한인 사회에 대한 대학살 만행인 간도참변을 피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일시 도피하였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군 주력 부대는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하여 청산리대첩 이전에 밀산(密山)을 거쳐 중·러 국경을 넘어 러시아 이만으로, 다시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사건을 맞게 되었다. 자유시참변 3개월 후인 1921년 9월 국민회 등 북간도 10개 단체 대표자 공동명의로 대한국민의회 당국자들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의 자유시참변에 관련한 책임을 규탄하는 성토문이 발표되었다. 2명씩 대표 명의를 올린 단체는 국민회·군비단(軍備團)·광복단·신민단·노농회(勞農會)·공의단(公義團)·농무회(農務會)·의민단·청년독립단·야단(野團) 등이다. 이 성토문에 대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1921년 9월 30일 자로 반박 선포문을 발표함으로써 자유시참변의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북간도 10개 단체의 성토문에 이봉우(李鳳雨)와 함께 국민회 대표자로 명시되어 있는 바를 지적하고 성토문에 국민회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국민회장 명의의 성명서에서 “허위(虛僞)의 선전이 세상에 번번히 전파되어 우리의 통합에도 무익하고 도리어 중심(衆心)을 현(眩)하여 사업상 지장이 불소”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북간도에 잔류하였던 일부 그리고 자유시참변 후 러시아에서 귀환한 일부 국민군 병사를 규합하였다. 간민국(墾民局)이 둔화현(敦化縣)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북로군정서 군대(지도자-李鴻來, 羅仲昭)와 국민회(지도자-許東奎)가 연합하여 조직된 후 이를 확대 개편하여 독립군 총합부(總合部)를 창설하였다.(1921년 12월 15일) 독립군 총합부는 김성극(金星極)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국내 진입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안투현(安圖縣) 잉두산(仍頭山)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동휘를 비롯하여 북간도 출신과의 오랜 친분으로 북만 지역에서의 상해파 계열의 고려공산당 활동에 관여하였다. 러시아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던 상해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3월경 적기단의 고문(顧問)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적기단은 1922년 말 종결된 원동해방전쟁에 참전하였다고 해산된 빨치산부대에서 제대한 장교와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창립한 조직이다. 적기단 단원의 대부분은 과거 북간도 지역의 민족운동 전선에서 활약한 바 있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청년들이었다. 적기단은 당면 과업으로 만주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중국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며 둔전식(屯田式) 빨치산부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행동 강령으로는 남만주·북만주·동만주 3개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러시아혁명 승리의 경험을 활용하여 일제와 투쟁하되 필요한 경우 파괴와 암살을 감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24년 6월 1일 요양차 왕칭현 대황구(大荒溝)의 둘째아들 구자익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이를 알아챈 일본 영사관에서 ‘영원한 국민회 회장’을 체포하려고 보낸 순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중국 순경국에서 이 소식에 접하고 즉시 대황구 파견소에 명령하여 20여 명의 순경이 출동하여 구출한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2년 간민교육회 참여, 1913년 간민회 창립, 1919년 조선독립기성회 회장,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활동,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 조직, 간북남부총판부 총판, 1921년 독립군총합부, 1925년 적기단 고문</activities>
<engagedEvents>간도참변, 자유시참변</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간민교육회, 간민회, 조선독립기성회, 대한국민회, 간북총판부, 총합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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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김경천</name>
<nameHanja>金擎天</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98)</orders>
<addressBirth>함남 북청(北靑)</addressBirth>
<aliases>본명 : 김광서(金光瑞), 이명 : 김경천(金警天·金敬天), 김응천(金應天), 김현충(金顯忠)</aliases>
<bornDied>1888. 6. 5 ~ 1942. 1</bornDied>
<placeOfOrigin>김해(金海)</placeOfOrigin>
<references>『동아일보』 1922.1.23, 1922.1.24, 1923. 7.29. ; 김경천 지음·김병학 정리, 『擎天兒日錄』, 학고방, 2013.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선인, 1999. ; 박환, 「시베리아의 항일운동가 김경천」,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1, 국학자료원, 2003.</references>
<content>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서문외(西門外)에서 사족 출신인 아버지 김정우(金鼎禹)와 어머니 윤옥연(尹玉蓮) 사이에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金海)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다른 이름으로 김경천(金警天·金敬天)·김응천(金應天)·김현충(金顯忠)이 있으며,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포병 장교였고, 형 성은(成殷)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대한제국 군대의 공병대를 만들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경기 광주군(廣州郡)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와 형은 곧 일본으로 유학하러 갔으므로, 홀로 어머니를 모시며 한문을 배웠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살았다. 1900년 여름 아버지와 형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형은 공병대 창설에 분주하고, 아버지는 육군 군기청장으로 근무함에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일본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5세 때인 1903년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시도하였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일본 유학생 파견자를 모집하였다. 최린(崔麟)·조용은(趙鏞殷, 조소앙)·김진용(金晉鏞) 등 50명의 유학생과 함께 1904년 8월 인천에서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므로 다른 유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사이 정규 예비학교의 보통과를 이수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군인이 될 결심을 하였으며,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할 길을 찾아보았다. 1905년 9월 1일 일본 육군대신의 추천을 받고 일왕의 허락을 얻어 자격시험을 본 결과, 학력 수준이 예과 2학년에 해당한다 하여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6년 겨울에 형이 사망함에 따라 6대 독자가 되었다. 연이어 1907년 봄 아버지까지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1907년 9월 1일 본과에 입학하여 1908년 7월 졸업하였다. 이후 기병(騎兵) 상등병(上等兵) 자격으로 도쿄의 기병 제1연대 제1중대에 입대하였다. 1909년 10월 도쿄 근교에서 부대 대항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하고 속으로 외쳤다. 1909년 12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졸업하였다. 그해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초대 총독으로 부임 예정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불러서 일본군 장교로 임관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해 12월 일본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제국의 유학생에서 일본군 장교로 처지가 바뀌었다. 1911년 8월 귀국해 혼인을 약속한 유정화(柳貞和)와 결혼하고 서울 사직동에 신혼집을 장만하여 할아버지, 누이 옥진(玉振)과 함께 거주하였다. 1913년 1월 가족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하였다. 1915년 6월 11일 장녀 지리(智理)가 태어났다. 그해 9월 기병 소위에서 중위로 승진하였고, 그해 육군 도야마학교(戶山學校), 1917년 육군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12월 육사 제26·27기생인 홍사익(洪思翊)·이응준(李應俊) 등과 제1사단에 근무하는 한국인 장교만의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17년 2월 8일 둘째 지혜(智慧)가 태어났다. 1918년 6월 9일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해 12월 도쿄의 기병연대로 복귀하여 재직하였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개조의 흐름과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보았다. 때마침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도 통지받아 알고 있었다. 몸도 추스르고 정세도 판단할 겸 다시 기병연대에 휴가를 신청하였다. 1919년 2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아내, 누이,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요양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준비도 통지를 받아 항일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화창한 3월 1일 오전 서울 시내에 있는 청년회관에 들려 윤치호(尹致昊)를 만났고, 이후 종로 일대에서 만세 시위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때 주변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받았다. 국외에서 여러 해 동안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서간도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9년 6월 6일, 31세 되던 때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이 되는 일본 육사의 3년 후배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수원까지 내려가 밤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으로 갔다. 6월 9일 서간도를 향해 출발하여 약 보름 만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柳河縣) 고산자(孤山子)의 대두자(大肚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하였다.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출신으로 며칠 먼저 와 있던 신팔균(申八均)을 만났다. 세 사람은 ‘천(天)’자가 붙은 호칭을 서로 붙여주기로 하고 신팔균은 동천(東天), 본명이 지석규(池錫奎)인 지청천은 청천(靑天), 그리고 자신은 경천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세 사람을 가리켜 ‘남만주 3천’이라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당시 200명 정도의 학생이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9월 중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결정에 따라 신팔균과 함께 무기를 구입하려고 러시아의 니콜스크를 향해 출발하여 가는 도중, 신팔균은 지린(吉林)에 남고, 몇몇 동지와 함께 창춘(長春)과 하얼빈을 거처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1920년 들어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이용(李鏞)·김하석(金河錫)·유동열(柳東說)·정재관(鄭在寬) 등 여러 독립운동가와 의견을 교환하며 한인 무장대를 편성하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비록 “북도(北道), 남도(南道), 서도(西道), 서울…자기들끼리도 당파가 있다. 아아, 이것이 대한이 망한 이유가 아닌가”라며 실망하였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중립이라며 “나는 생각한다. 군인은 군사행동의 실전지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가고, 삶과 죽음의 굴을 넘나들어도 좋으리라 한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실제 이후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공산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우수리스크의 파르티잔스크(수찬, Suchan, 水淸)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면서 한인 청년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볼셰비키 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러시아인 민병대와 합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마적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가을 외수청(外水淸) 일대에서 마적이 사라졌다. 1920년 9월 28일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교육을 실시하자는 북간도 독립운동 세력의 요청을 받고 출발하였다. 북간도에 가까이 갔을 즈음, 일본이 사주한 마적이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고 이를 명분으로 일본군이 북간도를 침입하자 독립군이 모두 흩어졌다는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머무는 곳 50리 밖까지 와 있던 일본군이 한인의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인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10월 19일 발길을 돌려 수이푼(秋風, Suifun)의 솔밭관 고려혁명군 본부로 돌아갔다. 솔밭관 고려혁명군은 1920년 7월 15일 결성된 조직으로 일본군·러시아 백군·마적 등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을 알렸던 한인 빨치산 부대이다. 이때 인근에 있던 혈성단(血誠團)의 김규면(金圭冕)을 만나 그가 이끄는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수이푼 일대의 마적을 소탕하였다. 한편에서는 군정의 책임자로서 살인사건과 같은 형사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도 벌였다. 1921년 4월 24일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총사령관이 되었고, 5월 아누치노(都兵河, Anuchino)에 있던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군용품을 나누어 사용하면서 마적 소탕에 집중하였다. 9월 들어 적군과의 공동 작전을 강화하며 백군과 여러 곳에서 싸웠다. 이즈음부터 1922년 가을까지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의 후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 사이에 벌어진 시베리아 내전에서 적군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1921년 11월 자신을 후원하던 적군 대장이 백군과 내통하는 바람에 러시아 백군에게 다우비허를 빼앗겨 수청 고려의병대를 이끌고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1922년 1월 말 이만에 있던 군비단(軍備團) 군인 40~50명이 백군에게 살해당한 데 대한 반격으로 이만을 점령하였으나, 병력이 모자라 퇴각하였다. 1922년 5월 이념을 묻지 않고 일본군 및 백군과 싸우며 독립 역량을 키우고자 이중집(李仲執)을 총재로 하는 고려혁명군이 결성되었을 때 수청에 본부를 둔 고려혁명군 동부사령부의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2년 6월 아누치노를 떠나 백군과 일본군의 허리를 끊고자 수이푼으로 이동하였지만, 한인의 일부 부대와 적군의 충돌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였다. 이에 적군 사령관이 한인 빨치산부대의 해산을 명령하자 자신의 부대를 해산시킴으로써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전투 지휘는 끝이 났다. 이즈음부터 적군 사령관에게 부탁받은 일본군의 군사학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는 데 한동안 몰두하였다. 한편에서 ‘나제즈다(희망)’ 또는 ‘앞으로’라는 이름의 한국인 협동농장을 만들어 동포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군인 위원으로 추천받아 회의에 참석하고자 2월 11일 니콜스크를 떠나 하얼빈·창춘·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처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 민족적 항일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기대와 달리 창조파와 개조파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9월에 스위스인이 운영하는 기선(汽船)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24년 3월 고려구락부를 조직하여 여러 곳과 연락을 취하며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검토하며 독립 방안을 논의하였지만, 사실상 민족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한촌(新韓村)과 니콜스크에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꽃을 가꾸는 등 한가로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1925년 2월 21일 서울에서 아내가 홀로 찾아와 7년 만에 만났다. 아내는 3월 11일 서울을 향해 떠났다. 7월 5일 아내와 자녀들이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 자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갈 작정으로 아내가 경찰에 여행권을 신청하였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자 세 자녀와 함께 사라졌는데 종로경찰서에서 행방을 조사 중이라는 기사가 있다. 니콜스크시에서 일시 거주하다 1926년 봄 수청의 다우지미 서개척(西開拓)에 집을 지어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1927년 개척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수청의 난채시(蘭採市)에 위치한 일명 한성동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29년 1월 31일 넷째 지희(智姬)가 태어났다. 1932년 봄부터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여 변강 합동국가보안국의 소수민족 부서에서 한국어·일본어·중국어 통역으로 일하였다. 7월 24일 다섯째 기범(奇凡)이 태어났다. 1934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사범대학의 초청으로 이주하였다. 대학에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1936년 가을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9월 29일 연해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인 자유박탈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가족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라간다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1939년 2월 4일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되자, 3월 가족이 있는 까라간다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독일인 농장인 코민테른 콜호스에서 작업부로 일하였다. 1939년 4월 5일 가족을 만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12월 17일 모스크바의 재판에서 간첩죄로 강제노동수용소 8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0년 1월 17일 러시아 북부에 있는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 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수용소의 부설 병원에서 비타민 결핍에 의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서는 그의 사망 날짜가 1월 2일·14일·26일 등으로 되어 있다. 1956년 재심에서 3년형 선고를 받은 1936년의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무죄를 선고받았고, 8년 수감을 내린 1939년의 재판도 1959년 2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93년 4월 14일 선포된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저술로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1915년 일본 기병 중위, 1919년 신흥무관학교 참여, 1920년 이후 솔밭관 고려혁명군 활동, 창해청년단 총사령관, 1921년 수청 고려의병대 총사령관, 1922년 고려혁명군 동부사령부 책임자, 1924년 고려구락부 조직</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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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신흥무관학교, 창해청년단, 솔밭관 고려혁명군,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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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김동삼</name>
<nameHanja>金東三</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62)</orders>
<addressBirth>경북 안동(安東)</addressBirth>
<aliases>초명: 긍식(肯植)·종식(宗植), 자: 한경(漢卿), 호: 일송(一松).</aliases>
<bornDied>1878. 6. 23 ~ 1937. 4. 13</bornDied>
<placeOfOrigin>의성</placeOfOrigin>
<references>김희곤,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 이상룡, 『국역 석주유고』, 경인문화사, 2008. ;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지식산업사, 2009. ; 류시중·박병원·김희곤, 『국역 고등경찰요사』, 도서출판 선인, 2010. ; 김대락, 『국역 백하일기』, 경인문화사, 2011.</references>
<content>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臨河面) 천전동(川前洞, 내앞마을)에서 아버지 김계락(金繼洛)과 어머니 영해 신씨寧海申氏의 2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고,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한 뒤 사용한 이름이다. 광산 김씨 김노창(金魯昌)의 딸과 혼인했으나 장녀를 낳고 죽음에 따라, 반남 박씨 박순부(朴順夫)와 재혼하여 장남 정묵(定默)과 차남 용묵(容默)을 두었다. 가학을 이어받고, 서산(西山) 김흥락(金興洛)에게 유학을 배웠다. 1905년 2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을 드나들며 민족 문제와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사상적 변화를 보이다가 가장 보수적이었던 안동 지역 계몽운동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전통 질서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은 안동에 혁신의 물길을 끌어들이는 작업은 다른 지역에 비해 어려웠다. 10년 전에 서울에는 신식학교가 들어섰지만,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는 성리학적 질서가 흔들림 없었다. 그럴 즈음 상경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한 류인식(柳寅植)이 1904년에 계몽운동을 시작하다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1907년 3월 다시 시도한 것이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이었다. 1907년 3월 류인식·김후병(金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내앞마을에 3년제 중등과정인 협동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앞장섰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손 김병식(金秉植)이 교장을, 김동삼이 교사를 거쳐 교감을 맡았다. 협동학교는 영남 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고 격려하였다. 유림의 압력과 예천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젊은 신지식인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이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해 나갔다.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격려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 교사를 파견하였던 사실은 이 학교에 쏠린 기대감을 잘 보여주었다. 협동학교 경영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상도 일원의 계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사실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한 사실과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하자,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운 뒤에 국내 진공을 감행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후반 집안 동생인 김만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기초조사를 시킨 다음, 같은 내앞마을 출신이자 족숙(族叔)인 김대락(金大洛)과 논의하고, 만주 망명 계획을 확정지었다.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김대락·이상룡 등 안동의 주요인물들이 가족을 이끌고 출발하였고, 뒤이어 망명객이 줄을 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걸어서 압록강을 건넌 뒤,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이었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문중, 김대락의 매부인 이상룡이 이끄는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씩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반(婚班) 관계인 영덕의 무안 박씨(務安 朴氏), 울진의 평해 황씨(平海 黃氏), 안동의 흥해 배씨(興海 裵氏), 그리고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漢陽 趙氏) 문중 등이 대규모로 참가하였다. 문중 단위, 그것도 혼반으로 얽힌 큰 단위가 움직인 것이다.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류허현(柳河縣) 삼원보(三源浦)에 도착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하는 등, 초대 사장 이상룡(李相龍)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이는 안동 출신 인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이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면 동포들을 이주시켜야 하고, 경작지가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했다. 그 사업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바로 경학사였고, 장차 독립운동의 중추적 인물이 될 인력을 양성한 기관이 신흥강습소와 그를 이은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강습소나 그를 이은 신흥학교가 협동학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따서 김동삼(金東三), 동생은 김동만(金東滿)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장주(庄主)가 되었다.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퉁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속에 들어가 둔전형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였고, 군대 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상 병영이었다. 망명 이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은 첫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월 지린(吉林)에서 민족대표 39명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는데, 이상룡과 더불어 서명에 참여하였다. 이들 39명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비롯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이 선언 발표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4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열린 회의에 참석한 2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가하였다. 4월 11일 국가 이름을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이를 운영할 조직으로 임시정부(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을 구성하였다. 연호(年號)도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를 선택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으니, 이는 제헌헌법이요, 이날 회의는 곧 제헌의회였다.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 인선까지 마친 다음 활동 본거지인 서간도로 되돌아갔다. 당시 서간도에는 세 개의 조직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종래의 부민단(扶民團)이 한족회(韓族會)로, 백서농장 군영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각각 개편하였다. 먼저 한족회는 부민단의 류허·퉁화·싱징현(興京顯)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보에서 결성하였다. 한족회는 곧 백서농장을 서로군정서로 발전시키고 군정(軍政)과 민정(民政) 이원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보로 돌아와 한족회에서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이어서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고, 한족회 서무사장 자리는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金聲魯)에게 넘겨주었다. 또 학무사장은 김대락의 아들이자 집안 동생인 김형식(金衡植)이 맡았다. 자신은 백서농장 장주를 거치면서 독립운동진영의 지도적 인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당초 군정부(軍政府) 조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 정부 외곽 조직으로 위상을 정리하여 서로군정서가 되었고, 이상룡이 최고책임자인 독판(督辦)을 맡았다. 한족회가 민정기관이라면, 서로군정서는 군정기관인 셈이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사령관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부대를 안투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는 왕칭현(汪靑縣) 서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 후 서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치른 후 북상하여, 미산(密山)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하였다. 서간도에서도 군사력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으로 서간도나 북간도 지역 한인 사회는 참변을 겪었다. 1920년 벌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은 김동삼 가족에게도 그대로 들이닥쳤다. 삼원보 삼광소학교(三光小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에 앞서 청산리대첩 와중에 집안 조카인 김성로(金成魯) 가 전사하는 비극도 맞았다. 김동삼은 김형식과 논의하여 집안 일가들을 북만주 닝안현 주가둔(周家屯, 현재 닝안현 강남 조선족·만주족 공동 자치향)으로 옮기고, 고향에서 사촌 동생 김장식(金章植)을 불러들여 가족들을 이끌도록 하였다. 또 김정식·김창로·김성로에게 군자금 모집 임무를 주어 국내로 파견한 다음, 자신은 류허현과 싱징현(현 신빈현) 일대로 옮겨 활동하였다. 1922년 6월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통군부(統軍府)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는 통군부 교육부장을 거쳐 통의부 총장을 맡았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을 거친 다음, 만주 지역 군사 세력을 통합하려 했던 노력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이후 준비되어온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모여, 오랜 기간,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자 대표 총회였다. 국내외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집결했는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에 선출된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차지한 위상을 확인해 주었다. 안창호(安昌浩)와 윤해(尹海)가 부의장이었다. 1923년 5월 말부터 국민대표회의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조하자는 개조파, 그리고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뉜 것이다. 김형식과 함께 개조파에 속했다. 별개의 정부 수립은 미루고, 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통할 체계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두 주장이 맞선 상태에서 5월 15일 만주에서 대표를 소환함에 따라 의장에서 물러나 만주로 되돌아갔다. 6월에 들어 창조파가 가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는 작업이 급선무로 대두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하자, 이상룡과 양기탁(梁起鐸)이 다시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통합 작업에 매달렸다.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고, 의장에 선임되었으며,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는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만주 지역 3대 조직 가운데 하나였고, 류허현 삼원보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하여 1925년 만주 지역 한인 사회는 민정과 군정 기능을 갖춘 3부가 정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력 향상 등을 도모해 나갔다.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었고, 상하이로 부임한 이상룡이 그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만주 항일투쟁 현장을 비울 수 없어 부임하지 않았다. 1927년 이후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 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념상 분화된 좌우 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 안창호와 원세훈이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상하이와 난징, 우한과 광저우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 지역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에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운동의 실마리를 열었던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이어서 4월 15일 지린 남쪽 융지현(永吉縣) 신안툰(新安屯)에서 민족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하여,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새로운 통합 방법을 찾아 나섰다.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직전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뽑혔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고문을 맡았다. 늘 통합운동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안동 출신이자 사돈인 이원일(李源一), 경북 영양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南慈賢)과 항일공작을 추진하려고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하였을 때 남자현이 무명지를 잘라 독립을 호소하였고,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武藤信義) 처단을 시도한 사실이 이들의 투쟁 성향을 말해준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경성감옥으로 옮겨졌다가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龍雲)이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렀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라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협동학교 설립, 경학사, 신흥학교, 백서농장 장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서로군정서 참모장, 한족회, 국민대표회의 의장, 통의부 총장, 정의부, 혁신의회 활동</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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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협동학교, 경학사, 신흥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로군정서, 통의부, 정의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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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계의성</name>
<nameHanja>桂義成</nameHanja>
<movementFamily>광복군</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평북 선천(宣川)</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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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924. 1. 3 ~ 1982. 10. 6</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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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65. 『독립신문』 1944.10.8 ; 『동아일보』 1982.10 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6권, 1975.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OSS의 共同 作戰에 관한 硏究」,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references>
<content>1924년 1월 3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1943년 10월 20일에 공포된 일제의 ‘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병제’에 따라 징집되어,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2월경 일본군으로서 중국 전선에 투입, 산시성(山西省) 윈청(運城)에 배치되어 복무하였다. 군 복무 중 1944년 7월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였다. 탈출 후 1944년 9월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을 졸업하고 본부 위병분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44년 10월에는 산시성 치우린현(秋林縣) 커난풔(克難坡)에서 공작 활동을 하던 광복군 제2지대원 이순승(李淳承)에게 포섭되어 송창석(宋昌錫)·백준기(白俊基) 등과 함께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에 입대하였다. 입대 후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과 제3구대장 노복선의 지휘하에 산시성, 허난성(河南省), 허베이성(河北省) 일대에서 한국인 청년 및 사병을 모집하여 광복군의 일원으로 충원케 하는 초모 활동과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5월, 미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한국광복군의 합작작전인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 특수훈련에 참여하였다. 1기로 선발되어 훈련소가 있는 산시성(陝西省) 두취(杜曲)로 가서 12주(1945.5.11~1945.8.4)에 걸쳐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이때 OSS 특수훈련반은 무전반과 정보·파괴반 두 반으로 나누어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정보·파괴반에 편성되어 국내에 침투하여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쿠데타 감행, 게릴라 작전 등 특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1기생 50명 중 훈련을 마친 대원은 모두 38명이었다. OSS특수훈련에 참여하였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국 광복을 이루겠다는 염원으로 매일 8시간의 고된 훈련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4일, OSS 특수훈련을 마친 대원과 기타 지대원을 중심으로 국내 침투 작전을 수행할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장덕기(張德祺, 무전반)·장철(張鐵, 정보·파괴반)과 함께 국내 정진군 제1지구 평안도반 제1조에 편성되었다. 평안도반에 편성된 이유는 평안도 출신으로서 작전 수행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침투하여 작전 수행을 기다리다가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작전은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6월 3일 광복군 500여 명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귀환하였다. 1971년 경기도 벽제에 있는 일본인 위령탑에 불을 지르기도 하는 등 강한 반일 정서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82년 10월 6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누산4리 자택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끝에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44년 7월 산시성 윈청 주둔 일본군 부대 탈출, 1944년 9월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을 졸업하고 본부 위병분대장으로 근무,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에 입대, 1945년 OSS훈련을 마치고 국내정진군 평안도반 제1조에 편성</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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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한국광복군 제2지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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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고태리</name>
<nameHanja>高泰利</nameHanja>
<movementFamily>국내항일</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5)</orders>
<addressBirth>제주(濟州)</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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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912. 9. 24 ~ 1932. 4. 9</bornDied>
<placeOfOrigin>제주(濟州)</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2.3.1. ; 「형사사건부」.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집. ; 『동아일보』 1931.3.11, 3.14, 3.24, 3.27, 3.31, 7.17, 8.3, 8.5, 8.8, 8.24, 8.31. ; 『매일신보』 1931.8.26, 11.7. ; 김찬흡, 『20세기 제주인명사전』, 제주문화원, 2000. ;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북제주문화원, 2005.</references>
<content>1912년 9월 24일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읍(舊左邑) 귀덕리(歸德里)에서 고창주(高昌周)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제주이다. 1931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를 졸업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계기로 항일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분위기였다. 독서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는 중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31년 3월에 개최된 제주농업학교 졸업사정회에서는 졸업 예정자인 김원요(金源堯)를 제적 처리하고, 신창진(愼昌珍)·양두옥(梁斗玉) 등에게 유급 조치를 내렸다. 학교 행사 때에 「교육칙어」를 봉송(奉誦)해도 전혀 묵도(黙禱)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졸업식 당일인 3월 7일 김원요는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선생인 야마가와(山川助夫)에게 부당한 조치에 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담임이 일본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경찰이 곧바로 출동해 제주경찰서에 수감하였다. 이에 졸업생 동료들과 함께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기 위해 3월 9일 학교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신창진·양두옥은 9일 교장 스기사키(杉崎勝藏)를 찾아가 유급 조처의 부당성을 말하고 일본인 교사 모리다森田親厚에게 모순됨을 항변하였다. 동행한 홍계표(洪季杓)는 교사 다카하시(高橋)와 야마가와에게 동료 김원요의 수감은 부당하다고 따졌다. 옆에 있던 한국인 교사가 “선생에 대한 불손한 태도가 그러냐!”라고 오히려 불손한 태도를 문제 삼았다. 이때 밖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고운석(高雲石)·현도선(玄道善)·김두진(金斗珍)·신찬익(申瓚翊) 등과 함께 교무실로 들어가 기물을 던지며 거세게 항의하였다. 합세한 양치삼(梁致三)과 더불어 교장실로 들어가 동료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물을 파괴하며 강력하게 항쟁하였다.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8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여 1932년 3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위반으로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기까지 1년여 동안 옥고를 겪었다.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출옥한 지 한 달 만인 1932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31년 제주에서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 주도</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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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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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석훈</name>
<nameHanja>姜錫勳</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국장(1996)</orders>
<addressBirth>함북 종성(鍾城)</addressBirth>
<aliases>강만길(姜萬吉)</aliases>
<bornDied>1896 ~ 미상</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間島竝其接壤地方ニ於ケル不逞鮮人團」, 秘受9533號-高警第24216號 (1921.8.10). ; 「不逞鮮人名簿送付ノ件」, 秘受8634號-機密公信第36號 (1921.7.13). ; 「崔慶天一派ノ親日鮮人拉去及軍資金募集ニ關スル件」, 機密受第129號-機密第112號 (1922.3.20). ; 姜德相, 『現代史資料』 26·27, みすず書房, 1970. ; 김승학,『韓國獨立史』, 獨立文化社, 1965. ; 국사편찬위원회, 『韓民族 獨立運動史』 4·13, 198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컴퓨터 파일)』, 2000. ; 국사편찬위원회, 『大韓民國臨時政府資料集』 별책 2(조선민족운동연감), 2009. ; 국사편찬위원회, 『大韓民國臨時政府資料集』 42(서한집 I), 2011. ; 박환, 『滿州韓人 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 潘炳律,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ferences>
<content>1896년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으로 이명은 강만길(姜萬吉)이다. 22세가 되던 해인 1917년 3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만주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의 북일중학교(北一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臨時政府) 군무부(軍務部)에 소속되어 한인 무장부대 규합 및 국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동년 7월 신광삼(申光三)과 함께 50여 명의 대원을 모집하여 함북 무산군(茂山郡) 진출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9월 19일에 훈춘에서 개최된 대한국민지회 총회(大韓國民支會總會)에 참석해 독립군을 무장하고자 무기 구입을 기획하였다. 1920년 6월에는 황태식(黃泰植)·김운서(金雲瑞)와 함께 3개 지대, 70여 명의 요원을 모집하여 국내 진입을 계획하는 등 계속해서 한인 요원 모집 및 국내 진공에 매진해 일제와 중국 관헌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직후 러시아 시베리아로 건너가 시지미(Sidimi)의 강병관(姜秉官) 동생 강룡관(姜龍官)의 집에서 김학섭(金學燮)과 강병관을 만났다. 청산리대첩 이후 악화된 일제의 탄압 때문에 대규모 군사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년 12월 국내 일본 기관 파괴와 일본 주구 암살 등의 직접 행동을 목표로 문창학(文昌學)·최시능(崔時能)·최영찬(崔英燦) 등을 규합해 임시대한독립군(臨時大韓獨立軍)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1년으로 예정된 ‘워싱턴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계획하고 그를 위한 전공(戰功) 달성을 목적으로 국내 진입 및 일제와의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 첫 번째 과제로 함북 웅기(雄基)의 경찰서·금융조합사무소 폭파와 무기, 군자금 확보를 계획하였다. 임시대한독립군은 국내 진입 결사대 15명을 총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결사대장(決死隊長)을 겸한 김학섭 등 5명이 제1지대, 김병관 등 5명이 제2지대를 구성하였을 때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4인의 결사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웅기에 진입하려고 1921년 오소리강(烏蘇里江)을 건너 만주 훈춘현 홍룡구(紅龍溝)로 이동하였으나 연초 경계가 엄중해 웅기까지의 국경 진입이 어려웠다. 이에 문창학이 제의한 홍룡구 근방 함북 신건동(新乾洞)의 일본주재소 공격으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1, 2지대에겐 신건동 입구 좌우의 고지를 점령해 수비대의 출동을 막는 임무가, 강석훈의 3지대에게는 주재소의 직접 공격 임무가 부여되었다. 임시 대한독립군은 1921년 1월 5일 오전 1시부터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학섭과 강병관의 1, 2지대가 신건동 입구 좌우 고지의 신건동 수비대의 출동을 막는 틈을 타 3지대가 얼어붙은 두만강의 오룡천(五龍川)을 도강해 신건원주재소를 공격하였다. 40여 분의 교전 끝에 임시대한독립군은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松崎安太郞)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달성한 뒤 연해주로 돌아갔다. 1921년 10월 하순부터는 훈춘현 춘화경(春化鄕) 관대구(寬大溝)에서 최경천(崔慶天)을 수장으로 하는 한민회(韓民會)에 참여해 포병대장 겸 군무부(軍務部) 중대장에 임명되어 최두철(崔斗哲)·한창규(韓昌奎) 등 무장대 8명을 이끌었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가 가시화되자 상하이 조계지에 머물면서 이한호(李漢浩)·박태열(朴泰烈)·김성득(金成得) 등의 9명의 동료와 맹호단(猛虎團)을 조직, 윤해(尹海)·한형권(韓亨權)·남형우(南亨祐) 등의 창조파를 지원하였다. 맹호단은 동년 8월 4일 상하이 서문 밖 미술학교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9월에는 연서로 국민대표회의주비회의 후원과 국민대표회의의 속회를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해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압박하였다.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 개최식 때는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金東三)의 개회사, 신숙(申肅)의 연설에 이어 세번째로 기념 연설을 하였다.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진행된 ‘신건동주재소 습격사건(新乾洞駐在所襲擊事件)’ 재판에서 김학섭·강병관·문창학 등과 더불어 살인과 폭발물취체법 위반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고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는 등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3년 말엽에 이르러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고 11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한인무장부대 규합 및 국내 진출 시도, 1920년 12월 (임시)대한독립군 조직 및 활동</activities>
<engagedEvents>1919년 대한국민지회총회, 1921년 신건동주재소 전투, 1922년 맹호단의 시국비판 강연회 및 국민대표회의속회촉구 선언서 발표</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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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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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상해</name>
<nameHanja>姜尙海</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2011)</orders>
<addressBirth>미상</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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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98 ~ 미상</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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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고등법원, 1923.11.8. ; 「가출옥 관계기록물 중 독립운동 관련자 목록」, 『日帝文書解題 : 行刑篇』,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기록편찬문화과, 2012. ; 1922년 3월 27일, 「機密受제15호-機密公제11호, 新乾源을 襲擊한 不逞鮮人에 관한 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獨立新聞』 1923.6.13. ; 『동아일보』 1922.1.7, 1.8, 1.18, 1923.6.2, 6.23. ; 『매일신보』 1922.1.8, 1.14, 1.18, 1.24, 1.27, 1923.2.23, 6.2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5권, 1973.</references>
<content>1898년에 태어났다. 출신지 및 가족관계 등은 자료의 한계로 알 수 없다.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가 통합하여 결성된 항일 무장 단체다. 대한정의단은 서일(徐一) 등 대종교 계열인 중광단(重光團)의 후신으로 단단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길림군정사는 김좌진(金佐鎭) 등 육군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단체였다. 양 단체의 민중적 기반과 군사력을 통합한 대한군정서는 청산리대첩 등을 이끌며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무장 단체로 부상하였다. 당시 대한군정서의 규모는 약 1,200명의 대원과 군총(軍銃)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기관총 7정, 수류탄 780발의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지는 왕칭현(汪淸縣) 춘명향(春明鄕) 탁반령(托盤嶺),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일대의 깊은 밀림 지대에 위치하였다. 대한군정서는 기지 내에 병영과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등 건물 8동을 짓고 350여 명의 청년을 새로 선발하여 정규 사관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들의 교육은 신흥무관학교와 러시아 무관학교 출신의 교관들이 담당하였다. 1919년 음력 9월경,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황구(荒溝)에서 김학섭(金學燮) 등과 항일 무장 활동을 위해 총기와 탄약 등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와 중국 관헌이 결탁한 토벌 작전에 쫓기자, 무기를 강에 버리고 러시아 연해주 시지미(Sidimi)로 옮겨갔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독립운동의 기세가 꺾이자, 동지들과 함께 국내의 일제 관공서를 공격하여 항일 투쟁 의지를 고양하기로 결의하였다. 김학섭·강병관(姜秉官)·강석훈(姜錫薰)·최치능(崔峙能, 崔時能), 최장혁(崔長赫)·고양린(高陽吝)·채규철(蔡奎哲)·신광호(申光浩)·나만규(羅萬奎)·이승준(李承俊)·이태륜(李太侖)·문창학(文昌學)·김한수(金漢水)·김영걸(金英傑) 등과 함께 시지미에서 대한독립군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 결사대는 국내 진입 지역을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웅기(雄基)로 정하고 그곳의 경찰서와 금융조합을 습격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12월 2일 강병관이 무장투쟁에 사용할 무기를 조달해오자, 1920년 1월 2일 대원들은 각자 소총 1정, 실탄 150~200발, 수류탄 1~2개와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러시아령의 독립군들이 일제히 경찰관서를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탐지한 일제가 12월 하순부터 신년 초까지 함북 지역에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원들은 공격 목표를 노정이 먼 웅기 대신 가까운 함북 경원군(慶源郡) 동원면(東原面)의 신건원주재소(新乾源駐在所)로 변경하였다. 대원 중 문창학이 신건원주재소의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주재소까지의 진입 경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년 1월 5일 새벽, 이들 결사대는 3개 대로 나누어 1개 대가 주재소를 공격하는 동안 나머지 2개 대가 양쪽으로 수비대 관사를 공격하여 수비대의 출동을 견제하였다. 교전 40분 만에 결사대는 경찰관주재소와 수비대 관사를 파괴하고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을 사살하는 쾌거를 올렸으나 접전 중 대원 김영걸이 전사하였다. 일제의 특별 경계를 뚫고 국내에 잠입하여 폭탄과 육혈포로 신건원주재소를 폭파하고 순사를 처단한 신건원 사건은 일제를 전율케 하였다. 당시 일제는 주재소를 공격한 독립단의 규모를 30명 내외로 파악하고 이들을 찾기 위해 간도 지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1년 가까이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건원사건의 전말은 1920년 말경 한인 밀정의 신고로 김학섭과 문창학·최치능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에 붙잡히면서 비로소 밝혀졌다. 신건원주재소를 폭파한 대원들은 붙잡힌 3인과 더불어 모두 기소되었다. 이때 같이 기소되어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의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이른바 살인 및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 등으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대한군정서에 가입 활동, 대한독립군 결사대 조직 및 신건원주재소 습격에 참여</activities>
<engagedEvents>대한군정서</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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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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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성곤</name>
<nameHanja>姜聖坤</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미상</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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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미상 ~ 미상</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동아일보』 1920.9.3, 1921.3.5. ; 『매일신보』 1921.1.20.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동지회, 1956.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7, 1973.</references>
<content>출생지와 생몰 연대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에는 서간도(西間島) 지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1월, 27결사대 대원으로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동우(東愚) 이탁(李鐸)이 이시영(李始榮)·이동녕(李東寧)·안태국(安泰國) 등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만주(滿洲)의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 서탑(西塔)에서 만나 결성한 의열 투쟁 단체다. 결성 목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勒約) 강압과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이후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결국에는 망하게 한,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즉, 이완용(李完用)·권중현(權重顯) 등 5명의 을사오적과 조중응(趙重應)·고영희(高永喜) 등 7명이 대상이었다. 이 두 사건에 이완용은 모두 연루되어 있었기에 11명이 처단 대상이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한 이탁은 국내에서 넘어온 많은 청장년과 교류하였다. 이들 중 안경식(安景植)·주병웅(朱秉雄)·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나경호(羅景鎬) 등 26명과 함께 27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단체의 이름은 이들 구성원 숫자에 따라 27결사대라 명명하였다. 결성 당시 27명이었으나 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해 50명이 넘는 단원이었다. 1919년 3월 3일은 광무황제의 국장 일이었다. 국장 행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는 아직도 고관대작으로 행세하는 이들 매국노들이 참석할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날을 거사 일로 잡고, 단장 이탁을 포함한 단원들을 3개 대로 선발대를 편성한 후 국내로 잠입하였다. 2월 하순 선발대에 가담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단원들과 함께 국장 행렬이 통과하는 거리를 답사하며 거사 계획을 짰다. 그런데 국장일인 3월 3일, 봉천에서 무기를 가져오기로 한 운반 조가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거사를 성공시키고자 선발대는 망우리 고개에 매복해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도착하지 않아 폭탄은 투척하지 못하고, 매국노들의 죄악상을 폭로한 성토문만 국장 행렬에 투척하고 돌아섰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무기를 은닉하고 들어왔기에 신속히 이동하기 어려웠던 운반 조는 국장일에 맞추지 못하고 3월 10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도착해 권총과 탄환, 단도 등을 넘겼다.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었던 매국노 처단에 실패하자 단원들과 함께 차선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무기를 보급받은 단원들은 군자금 모집에 나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때 한창 무르익은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이끌기도 하고, 빛바랜 독립문의 태극기를 선명하게 색칠하였으며, 시내를 다니며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린 벽보를 부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차병제·손창준·박기한(朴基寒) 등은 서울에서 새로 단원이 된 이우영(李宇榮)·이기원(李基原) 등과 서울 시내 부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나머지는 조를 구성해 각자의 임무를 정해 움직였다. 군자금 모집 조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태극기 색칠과 벽보 부착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분담해 활동을 벌이던 중, 부호 너덧 집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손창준·이우영·안경식·박진태(朴鎭台)·이기원·박기한 등이 5월 5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이 더는 어렵게 되자 활동을 접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결사대 본부가 있는 서간도로 돌아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단장 이탁 또한 사선을 뚫고 본부로 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1월 서간도에서 결성된 27결사대에 가입, 광무황제 국장일 매국노들을 처단키 위해 서울에 진입해 활동</activities>
<engagedEvents>을사5적 및 정미7적 처단</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27결사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김좌진</name>
<nameHanja>金佐鎭</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2)</orders>
<addressBirth>충남 홍성(洪城)</addressBirth>
<aliases>자 : 명여(明汝), 호 : 백야(白冶)</aliases>
<bornDied>1889. 11. 24 ~ 1930. 1. 24</bornDied>
<placeOfOrigin>안동(安東)</placeOfOrigin>
<references>윤병석, 「參議·正義·新民府의 성립과정」, 『백산학보』 7, 1969. ; 윤병석, 『백야 김좌진』, 태극출판사, 1971. ; 박영석, 『한 독립군병사의 항일전투: 북로군정서 병사 이우석 옹의 사례』, 박영사, 1984. ; 신용하, 「독립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연구」,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 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전옥진,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홍성군편, 2001. ; 박환, 『김좌진 평전』, 선인, 2010. ; 임선일, 『북로군정서』, 치우, 2011. ; 신주백, 「한국현대사에서 청산리전투에 관한 기억의 流動」, 『한국근현대사연구』 57, 2011. ; 이성우, 『김좌진(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역사공간, 2011. ; 손세제 외,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 『유학연구』 37,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references>
<content>(음)18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기에는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4년 뜻한 바 있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에 남아 있는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그 직후 일제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자행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구국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한성연회(漢城聯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 양위 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하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설립하고 각 지방 학회를 설립하여 대응하였다. 이때 대한협회 지부를 홍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성지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지방의 구국교육운동을 선도하였다. 1908년 자택을 교사로 제공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 경비로 충당하게 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군 무장 항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부터 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형원(趙亨元)·남정면(南廷冕)·이영렬·박종원(朴鍾元) 등과 직접 자금모집에 나섰다.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서울에서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 생활 중 백범 김구(金九)와의 만남은 항일 투쟁을 위한 새로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13년 출감 후 고향에서 정양을 취하던 중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창설하자 이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광복회 일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7년 3월 이기필(李起弼)·감익룡(甘翼龍)·신효범(申孝範) 등 7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기필·감익룡·신효범은 기소되었고, 최익환(崔益煥) 등 4명과 함께 면소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곧바로 위조화폐를 발행하여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일본 경찰이 단서를 잡고 추적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서(大韓獨立書)」를 발표할 때, 서일(徐一)·여준(呂準) 등 38명과 함께 서명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한독립서」는 국내 독립선언서보다 몇 주 앞서 공표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대종교측에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창설하자 총재 서일의 요청을 받고 대한정의단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서일 등 대종교 신도들은 만주에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가 만세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강화를 위해 유교 신도단체 공교회(孔敎會)와 합작하여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북간도 각지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 개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순한글 신문인 『민보(民報)』 와 『신국보(新國報)』 를 발행하였다. 또한 독립군 편성 준비로 극비리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1,037명의 청년자원자를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 장정과 군자금 준비가 갖추어지자 1919년 8월 독립군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실제로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가 절박하게 대두되자, 대한정의단은 이 과제를 신민회 계통 무관을 초빙하여 해결하였다. 이때 조성환(曺成煥)·이장녕(李章寧) 등과 함께 초빙되어 1919년 8월부터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장정들의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들이었던 반면에 공교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군주제(君主制)를 지지하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이었기 때문에 공교회 계통의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탈하였다. 김성극(金星極) 등은 복벽파의 독립군 단체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새로 조직하고, 이규(李珪)·강수희(姜受禧) 등은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를 조직하였다. 1919년 10월 서일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玄天黙)이었고,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즉 대한군정부의 독립군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창설 지휘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성립과 동시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성립을 보고하고, 산하 군사기관으로서의 공인을 신청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로서,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명칭 변경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대한군정부도 ‘정부’(政府)의 이름을 갖게 되면 임시정부의 ‘정부’와 혼동되어 마치 동격의 2개 정부가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무렵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중심이 되어 편성한 독립군 단체에게 이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는 명칭을 보내었으므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는 이와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지어 애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는 ‘대한군정서’라는 공식명칭보다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 사령관을 맡자 곧바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 편성작업 시작과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李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김훈(金勳) 등 다수 훈련 장교들 및 각종 교재를 공급받았다. 1920년 3월 초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 떨어진 삼림지대 안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겸임하였다. 약 500명의 장정을 뽑아 독립군을 창설하고, 뒤이어 다시 6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병력을 보충했으며, 나머지 장정들은 대기하면서 경호 병력이 되게 하였다. 입대한 병사들에게 사격술과 총검술을 비롯한 총기사용 훈련과 학과훈련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현재 사관연성소에서 훈련을 끝낸 독립군 사병이 약 600명이었고, 장래 독립군 사관이 되기 위하여 상등병의 견장을 붙이고 철저한 군사 훈련과 전략전술을 교육받고 있는 사관생도가 약 300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사관연성소에서 철저한 군사 훈련교육을 받은 연성대(硏成隊)를 가졌으며, 대종교의 군자금 조달로 무기를 잘 공급하여 독립군 부대들 중에서 무장이 가장 잘 갖추어진 부대였다. 대체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는 소총이었으며, 기관총을 1정이라도 갖춘 부대는 드물었다. 이에 비하여 북로군정서는 중무기에도 큰 비중을 두어 기관총과 함께 야포도 구입하였다. 일제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독립군에게 대패하자,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토벌’하려 함과 동시에 8월에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워 일본군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중국군이 출동하게 되자, 멍푸더(孟富德)의 중국군측과 한국 독립군측은 일본측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지린성(吉林省)의 옌지현(延吉縣)·훈춘현(琿春縣)·왕칭현(汪淸縣)·허룽현(和龍縣)의 4현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명월구(明月溝)에 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 제일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國民會軍)·의군부(義軍部)·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 등도 이도구로 이동하였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독립군은 북방 이동하여 9월 말경 나자구(羅子溝)에 도착하였다. 왕칭현 서대파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1920년 9월 17일~18일에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여 1920년 10월 12일~13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한국 독립군 ‘토벌’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간도불령선인 초토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출병’해서 독립군 ‘진압’ 작전을 시작하였다. 일제가 간도침입에 동원한 일본군 병력은 나남(羅南)의 제19사단 전부와 용산(龍山)의 제20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 및 기타 보조 병력을 차출 첨가하고, 시베리아 주둔 11사단·13사단·14사단의 일부를 차출하여 모두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측면 지원으로 관동군 일부와 비행기까지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이 거대한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이중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 작전 목표는 제1단계에서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반복 ‘토벌’해서 독립군을 전원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민간인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독립군 무장운동은 물론 비무장 독립운동까지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 목표에 따라 아즈마(東)지대가 10월 15일 용정(龍井)에 도착한 후 10월 18일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와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일본군 아즈마지대는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000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여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일본군 선발대 야마다보병연대(山田步兵聯隊)가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에 진입하자 백운평(白雲坪) 부근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선발부대를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백운평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부터 청산리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 전투에서 대승한 후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여 주둔했을 때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泉水坪)(샘물골) 마을에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작전회의를 열고 천수평의 일본 기병대를 먼저 기습 섬멸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 이범석 지휘의 연성대가 앞장서서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4명은 탈출하고 나머지 일본군 기병 제27연대 소속 전초기병중대 116명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북로군정서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으로 경미하였다. 이것이 일본군 1개 기병중대를 섬멸한 대승리의 ‘천수평전투’였다. 뒤이어 ‘어랑촌(漁郞村)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 874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에, 10월 22일 오전 9시 일본군도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왔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6배가 넘는 우세한 병력과 화력만 믿고 고지 독립군을 아래에서 포위하여 오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우세한 화력으로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고지 아래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만 낸 채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당황망조(唐慌罔措)하여 결국 패퇴하였다.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기병연대장 가노(加納) 대좌를 비롯해서 30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한편 독립군측도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도 결국 독립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인 10월 23일부터 소부대를 편성해서 서북방으로 이동하면서 일본군 부대들과 조우할 때마다 소규모 전투로서 ‘맹개골(萬麒溝)전투’ ‘쉬구(溝)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9일경에 안투현 황구령촌(黃口嶺村)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들과 합류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북방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의 결과를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가 1,200여 명”이라고 하여,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00여 명으로 계산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임시정부에 제출한 정식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이며, 부상자가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중국의 『요동일일신문(遼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2,000명으로 추정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주력이 되어 승리한 ‘청산리독립전쟁’은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수립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과 작전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일본군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에서 무장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 비무장 독립운동세력까지 뿌리 뽑아 한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었는데, 일제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1단계에서조차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하여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들의 ‘청산리독립전쟁’ 대승리는 만주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까지도 보위했으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투쟁을 한층 더 고양시켜 주었다. 1920년 12월 미산에 집합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여기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 등의 요청과 안내를 받아 다른 독립부대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 노령(露領)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무기 공급을 받아 대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1921년 3월 이만에서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군무도독부·혈성단 등 만주에서 건너온 독립군 부대들과 청룡대·사하린부대(박일리아 부대)·이만부대(박그레고리 부대) 등을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 후에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다. 이 통합독립군은 약 3,000명의 병력으로서 총재 서일과 부총재 김좌진·홍범도 등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통합독립군이 대작전을 전개하기 전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1921년 3월 긴급하게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臨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 오하묵(吳夏黙)을 임명한 후 통합독립군을 그 산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이때 소련군의 독립군 지휘를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왔다. 그 직후 1921년 6월 박일리아부대(사하린부대) 등이 고려혁명군정회의에의 편입에 거부 반응을 보이자 갈란다라시윌린 등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부대 등을 공격케 함으로써 독립군은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참혹한 희생을 내었다. 이것이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북만주에 돌아오자 다시 독립군 재건에 진력하였다. 1925년 3월 닝안현(寧安縣)에서 호응하는 이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 김혁(金赫)·조성환·정신(鄭信)·남성극(南星極)·박두희(朴斗熙)·최호(崔灝)·유현(劉賢)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 맡았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아 즉시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장정들을 모집해서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졸업생이 500여 명에 달하자 약 530명의 병력으로 신민부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는 만주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만주에서의 한국인 무장활동을 만주군벌이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1928년 1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서 다수 간부를 체포하였다. 신민부는 타격을 입고, 독립운동은 독립군 군사 활동보다는 교육·민생 활동에 역점을 두자는 최호 등의 ‘민정파’가 대두하였다. 이에 신민부를 재건하여 직접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고 독립군 활동 중심의 신민부(군정파)를 운영하였다.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 군량과 경비조달을 보조하도록 하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국내에 강(姜)모 요원 등을 파견하여 조선총독부 기습작전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신민부 통치하의 북만주 일대 동포들에게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반드시 1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밖에 노동강습소를 설립하여 일반교육과 함께 독립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신민부(군정파)는 1928년 2월 3일 닝안현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그 해 12월에는 남만주의 참의부 간부들과 함께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일시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통 단체들과 공산주의 계통 단체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비밀결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는 한편, 동년 7월에는 김종진(金宗鎭)·이을규(李乙奎) 등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세력도 포섭하여 북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聯合會)를 창립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주석으로서 농촌 자치조직을 강조하고, 동포들의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 1929년 10월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 운영하는 등 실업운동을 실행하였다. 또한 북만동포의 중등교육을 위한 북만중학(北滿中學) 설립을 추진하여 토지를 확보하였다. 한족총연합회 사업 활동의 하나인 산시참 정미소 사업격려 도중에 노령 고려공산당 산하 재중공산청년동맹에서 파견한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1930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겠다고 간도에 침입해 들어온 5개 사단 차출 2만 5,000명 병력의 막강한 일본군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의 적은 병력으로도 탁월한 작전과 과감한 기습 선제공격으로 참패시켜 독립군의 대승리를 쟁취해서 한국독립운동을 보위한 무장독립운동의 영원불멸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content>
<activities>청년학우회 한성연회 간부, 기호흥학회 창립, 호명학교 설립, 대한광복회 부회장,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청산리독립전쟁(청산리전투) 수행, 대한독립단(대한의용군총사령부) 부총재, 신민부(新民府)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성동사관학교 설립, 혁신의회와 한족총연합회 조직</activities>
<engagedEvents>대한광복회, 성동사관학교,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자유시참변, 민족유일당운동</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광복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신민부, 한족총연합회</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남자현</name>
<nameHanja>南慈賢</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62)</orders>
<addressBirth>경북 영양(英陽)</addressBirth>
<aliases/>
<bornDied>1872. 12. 7 ~ 1933. 8. 22</bornDied>
<placeOfOrigin>영양(英陽)</placeOfOrigin>
<references>『신한민보』, 1928. 3·15. ; 『조선일보』, 1933. 6. 11. ; 『조선중앙일보』, 1933. 8. 26·27·31, 『부인신보』 1947. 8. 22. ; 『가정신문』, 1946. 8. 21. ; 『동아일보』, 1934. 9. 5, 1946. 3. 3, 8. 21, 1948. 3. 3. ; 『震光』, 창간호, 1934. 1(한국독립당, 중국 항주 발행). ; 「朝鮮革命家後援會의 發起」, 『日本警察審問調書』 1927. 2. 14. (朝保秘 152호). ; 『부흥』, 제32권 2호, 1948. 3. ; 김무근, 『독립혈사』, 서울문화정보사, 1949. ; 박영랑, 『독립혈사』 2, 대한문화정보사, 1956. ; 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 박용옥,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박영석, 『만주지역한인사회와 항일독립운동』, 국학자료원, 2010. ; 강윤정 외,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여성』,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1. ; 서명훈,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 민족출판사, 2007.</references>
<content>1872년 (음)12월 7일 아버지 남정한(南珽漢)과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지경리(地境里)로 추정된다. 남편의 본적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一直面) 일직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양 일대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이미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고, 12세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하였고,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1891년 영양 석보면의 김영주(金永周, 김상주(金尙周))와 혼인하였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남편이 1896년 7월 11일 당시 진보(眞寶) 진보면(眞寶面, 현 경북 청송 진보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편의 전사 후 12월에 태어난 유복자를 기르며 시댁에서 생활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진보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을 정도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무너졌다. 이어 1907년에는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 친정아버지 남정한이 의병운동에 나서자,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고 전한다. 1910년 국권상실이후 친가와 시가인 안동과 영양의 지사들이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3년 무렵부터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1919년 2월말 서울 남대문통에 살던 김씨부인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였다. 상경한 후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3월 9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경상북도 인사들이 1919년 5월에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시작된 일본군의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피해 서로군정서가 백두산 안도현을 거쳐 지린성(吉林省) 어무현(額穆縣)으로 이동하자 함께 따라왔다. 이곳에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독립군의 간호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로써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1921년 지린성 어무현(額穆縣) 나인구에서 20여 개가 넘는 교육단체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환런현(桓仁縣)에서 여자권학회(女子勸學會)를 조직하였다. 주로 순회 강연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데 힘을 쏟았다. 1925년 4월 채찬(蔡燦)·박청산(朴靑山)·김문거(金文居)·이청수(李靑守) 등과 함께 지린성 안에서 조선총독처단 계획을 세웠다. 4월 김문거로부터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 직접 서울로 잠입하였다. 혜화동 지인의 집에 머물며, 교회 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처단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34년 발행된 『진광(震光)』에는 1928년에 4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거사를 시도하려고 서울에 잠입했지만 4월 6일 단원이 체포되어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6년 12월에는 지린성 판스현에서 정의부·한족노동당·남만청년동맹 등이 모여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家後援會) 조직을 위한 발기회 92명 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조직은 1927년 11월 초순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때 김상덕(金相德)·고할신(高豁信)·이광민(李光民, 위원장)·이관린·권진화(權進華)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2월 ‘길림대검거사건(吉林大檢擧事件)’ 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200여 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지린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붙잡혀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 이때 독립운동가 중 42명이 지린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본 경찰에게 인수할 것이므로 이를 저지하고자 독립운동계가 구명 운동에 나섰다. 이때 이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이 사건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구금된 독립운동가들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1928년 1월 길림여자교육회(吉林女子敎育會)의 부흥총회를 열고 만주 한인 여성들의 통합과 운동을 결집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金東三)이 체포되어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친척으로 가장하여 김동삼을 면회하고, 안팎 소식을 알렸다. 김동삼이 신의주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 작전을 세웠지만 이동 날짜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자 침략의 불법성을 조사하기 위해 5개국 대표로 구성된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르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냈다. 자료에 따라서는 ‘조선독립원’, ‘대한독립원’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1933년 2월 이춘기(李春基)등과 주만일본대사(駐滿日本大使)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처단 계획을 세웠다. 만주국 건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1933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2월 27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숨기고 창춘으로 향하던 중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간의 가혹한 고문과 옥고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수감 6개월 후인 8월부터 일제에 항거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단식한지 9일 만인 8월 1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출옥 후 여관에서 병간호를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1933년 8월 22일 사망하였다. 마지막 순간,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과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33년 8월 23일 영결식을 치르고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묘지 마가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에 「무토대장모살범남자현(여)수별세(武藤大將謀殺犯南慈賢(女)遂別世)」이란 기사로 사망 사실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1933년 10월 12일 묘비석이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서울 만세운동 참가.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 활동, 1923년 여자권학회 조직, 1926년 12월 조선혁명자후원회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역임, 1927년 ‘길림대검거사건’으로 체포 구금된 독립운동가 구명운동, 1928년 1월 ‘길림여자교육회’ 조직,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장 리튼에게 ‘한국독립원’ 혈서 전달 시도, 1933년 2월 부토 일본전권대사 처단 의거로 피체되어 수형.</activities>
<engagedEvents>길림대검거사건, 부토[武藤信義] 처단 의거</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서로군정서, 조선혁명자후원회, 길림여자교육부흥회</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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