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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서재필</name>
<nameHanja>徐載弼</nameHanja>
<movementFamily>계몽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77)</orders>
<addressBirth>전남 보성(寶城)</addressBirth>
<aliases>호: 송재(松齋), 영어명: Philip Jaisohn</aliases>
<bornDied>1864. 1. 7 ~ 1951. 1. 5</bornDied>
<placeOfOrigin>대구(大邱)</placeOfOrigin>
<references>『독립신문』. ; 『신한민보』. ; 『Korea Review (한국평론)』. ; Philop Jaisohn, Hong, Sun-pyo, ed.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00. ; 이정식, 『서재필-미국망명시절』, 정음사, 1984. ;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85. ; 송재문화재단 편, 『인간 송재 서재필』, 송재문화재단편집부, 1986. ; 임장영 저, 유기홍 역, 『위대한 선각자 서재필박사 전기』, 공병우글자판연구소, 1987. ; 이택휘·김운태·양재인·신복룡·이상철·이우진, 『서재필』, 민음사, 1993. ;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서재필기념회, 『서재필과 그 시대』, 서재필기념회, 2003.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홍선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 서재필기념재단, 2008. ; 최기영 편, 『서재필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2010. ; 김승태,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개혁의 선구자 서재필』, 역사공간, 2011. ; 이광린, 「서재필의 『독립신문』 간행에 대하여」, 『진단학보』 39, 진단학회, 1975. ;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사상」, 『동방학지』 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 홍선표, 「서재필의 독립운동 연구(1919-19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references>
<content>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 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가문의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李箕大)의 다섯째 딸 성주(星州) 이씨 사이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가는 충남 은진군 구자곡면(현 논산시 연무읍 일대)이다. 호는 송재(松齋)이고 미국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6~7세경 자식이 없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간 후 충남 대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살았다. 7~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金聲根)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하여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 해 12월 4일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 정부로부터 역적으로 낙인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 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사상과 인생 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정·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 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사회를 근대할 목적으로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민간 신문의 발간은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정부와 민중간의 원활한 정보 전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고 민중들에게 근대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독립신문』을 계기로 이후 조선 사회에 『매일신문』·『제국신문』·『경성신문』·『대한황성신문』 등 각종 근대적인 신문 발간으로 확산시켜 당시 군주 중심의 폐쇄적인 유교사회에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배양하고 여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토론문화와 대중강연을 도입하였다.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 정세를 가르치고 학생 자치기관인 협성회를 조직해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가르쳤다. 1896년 7월 2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사회단체인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등과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기 위한 사무를 관장할 목적에서 관료들의 사교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또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활동 범위를 확장시켰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에 대한 반대를 위해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주권 수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여론을 결집시켜 정부에 총의를 전달하는 방식은 자유와 민권을 신장시키는 획기적인 활동이었다. 이밖에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이 헐린 앞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민권신장을 위한 활동은 서재필 추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여론을 결집해 민감한 정치 현안까지 정부를 압박해 나가자 이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와 정부 내 수구파의 반발이 커진 것이다. 이들은 민중계몽운동의 배후자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조선 정부를 상대로 추방 공작으로 1898년 5월 14일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3년 여의 계몽활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이었고, 자주독립사상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사상을 심어 준 활동이었다. 다시 미국에 건너간 후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5년 7월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해 미주 한인을 대표한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九)가 필라델피아에 왔을 때 외교문제를 협의하였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청원서를 보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여운홍(呂運弘)·안창호(安昌浩) 등과 교류하며 한국 독립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1918년 12월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50만 달러의 예산으로 영문잡지를 발간할 것을 제의하였다. 영문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지배 실상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그만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운데다 다른 시급한 시국 현안 등을 이유로 무산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4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이승만·정한경(鄭翰景)과 함께 ‘제1차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를 개최하였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150여 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는 한국인 외에 톰킨스(F.W. Tomkins) 목사와 밀러(H.A. Miller) 교수 등 유력한 미국인들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모든 회의를 주재한 후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방향을 담은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을 작성해 대외에 공표하였다. 이때 작성된 결의문과 호소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 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였다. ‘제1차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 결과 본격적인 대외 선전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19년 4월 22일경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하고 한국통신부장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통신부를 설립한 것은 일본이 대외 선전 매체를 통해 한국의 식민지 실상을 왜곡 선전한 것을 알고 이를 대항해 한국인의 정당한 주장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외교고문으로 선임하였고 재정적으로도 후원해 주었다.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첫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이 조직하는 친한 단체, 즉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전개되었다. 한국통신부의 선전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결성한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이 파리강화회의 기간 동안 발간하던 영문 잡지를 인수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은 1919년 3월부터 ５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영문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 영문 잡지를 인수해 1919년 6월부터 『KOREA REVIEW』라는 새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1919년 6월부터 1922년 7월까지 월간으로 발간한 이 영문잡지는 초기 1,000부에서 2,000부까지 증간해 미국의 주요 공공기관과 도서관, 각종 정치·사회·종교 단체 등지에 배포하였다. 활발한 선전활동 때문에 일제 정보 당국은 『한국평론』을 해외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 간행물 중 가장 유력한 반일 선전물로 간주하고 예의 주시하였다. 한국통신부는 『한국평론』 발행 외에 『한국의 어린 순교자들(Little Martyrs of Korea)』,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 『한국의 부흥(The Renaissance of Korea)』 등 다양한 영문 책자를 발행하였다. 또 개인적으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언론을 통한 기고 활동도 전개하였는데，3년여 동안 펼쳤던 그의 강연 횟수는 300회 이상이었고 미국인 청중의 수는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통신부를 통한 선전활동과 강연 그리고 기고 활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 전하고 싶었던 주요 내용은 첫째,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갖고 한국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 둘째, 한국의 독립은 장차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 셋째, 한반도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일본은 원래 신의가 없는 나라이고 지금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하고 있는 동화정책은 민족말살을 위한 것이므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독립밖에 없다는 점, 넷째, 오랫동안 유구한 문화 민족으로 누려온 한국인은 지금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드시 극복할 능력을 갖춘 민족이라는 점 등을 강조하였다.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별도로 톰킨스와 함께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로 압박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친한 미국인 중심으로 결성한 것으로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21개가 결성되었다. 그 외 런던과 파리에도 결성되어 한국친우회는 구미 지역에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순(玄楯)이 주미공사관 설립 문제로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위원장에서 사임하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영국·프랑스·일본·중국 등 9개국 열강들과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워싱턴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임시정부에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7월 15일 뉴욕 한인들이 워싱턴회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에서 임초(林超)를 수전위원으로 임명하고 미국 각지를 순행하며 모금활동에 나서서 3개월 동안 21,219달러를 모금하였다. 모금 성적은 당초 목표액인 1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미주 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성과였다. 또 모금활동을 통해 분열되고 있던 당시 미주 한인사회를 독립의 열기로 다시금 일치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대비하여 1921년 9월 29일자로 단장 이승만, 서기 정한경,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이때 부단장을 맡았다. 워싱턴회의에 대한 참가권이 없는 한국대표단은 10월 1일 미국대표에게 회의 참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0월 중순에는 한국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대통령 하딩에게 한국을 피침략국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를 위한 토대가 될 것임을 주장하고 대회 참가를 공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과 식민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등으로 한국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워싱턴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아무런 논의나 관심도 없이 폐회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대외선전활동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 결과 60여 곳의 신문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한민보』 1922년 2월 23일 전체 한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은 당장에는 다소 실망하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번 회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기회를 세운 줄 생각하노라” 하고 이번 국제회의 활동이 결코 무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워싱턴회의 외교활동으로 얻은 소득에 대해 첫째, 한국대표단의 민첩한 활동으로 미국 정부 대표 등 9개국 열강 대표들에게 한국문제를 이해시킨 점, 둘째, 비록 공식적으로 한국 의 독립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으나 비밀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체 한인들의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한 점, 셋째, 워싱턴회의를 통해 영일동맹의 폐기와 중국의 권리인정 등은 장차 한국 독립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 등은 큰 소득으로 보았다. 그밖에 당시 내부 분열로 침체되고 있던 미주 한인사회와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킨 점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했던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이번 외교활동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주었고 대미 외교 위주의 독립운동 방략에 큰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워싱턴회의가 끝난 직후인 1922년 2월 본업인 사업에 전념할 것임을 밝힌 후 그 해 7월 『한국평론』 마지막 호를 간행한 후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전면에 나선 때는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하면서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에 있는 세계 YMCA 주관으로 설립된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가 추진한 비정치적인 민간대회였다. 이 대회는 태평양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각국 대표가 개인 자격으로 각 국가의 현실 문제를 자유로운 토론과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명하고 우의를 증진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1925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는 미국과 하와이·필리핀·일본·한국·중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에 파견된 14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대회 의장은 스탠포드 총장 윌버(Ray Lyman Wilbur)이고 사무총장은 데이비스(J. Merle Davis)였다. 회의는 호놀룰루의 교외의 푸나호우(Punahou)학교에서 개막되었다. 한국대표단은 국내와 미주 대표로 구성되었다. 먼저 국내에는 YMCA 총무·단장 신흥우(申興雨),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宋鎭禹), 연희전문학교 교수 유억겸(兪億兼), 『조선일보』 기자 김양수(金良洙), 보성전문학교 교수 김종철(金鍾哲) 등이 참석하였다. 미주 한인을 대표해 참석하였고 한국대표단의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한국대표단은 조선에 대한 민족자결의 원칙, 경제문제, 교육문제, 조선·만주에 대한 인종적 감정 해소문제 등 4가지 문제로 회의에 임하였다. 일본대표단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대회 참가 대표들에게 한국의 주권문제를 상기시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렸다. 아울러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하와이 한인들에게 한국 독립을 위해 상호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번창하던 문구 및 인쇄사업은 1924년경 완전히 파산하였다. 이렇게 되자 유일한의 도움을 받아 이희경(李熙景)·정한경과 함께 1925년 4월 유일한회사(New Ilhan Company) 필라델피아지사를 설립하였다. 유일한이 설립한 유일한회사는 디트로이트에 본부를 둔 회사로 한국 물품을 수입하고 미국의 약품과 화장품 등을 국내로 수출하는 무역회사였다. 필라델피아지사는 사장 서재필, 부사장 정한경, 전무 이희경으로 구성되었고 필라델피아 시내 부동산신탁빌딩(Real Estate Trust Building) 1092호에 사무소를 두었다. 필라델피아지사는 1927년까지 필라델피아의 상공록에 회사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926년경 사업을 접었다. 무역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적성과 맞지 않았던 데다 사업을 총괄하던 유일한이 1926년 귀국하면서 사업을 계속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또 개인적으로 의사로서 새 출발할 결심한 때문이었다.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특별학생으로 입학해 다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의사 인턴 생활 때 여러 병원을 거치며 고된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1927년 11월 한인 최초로 병리학 전문의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사업과 독립운동 그리고 새로운 의사로서의 삶을 사는 분주하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국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미국 내 『신한민보』를 비롯한 여러 한인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대표적인 기고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고국동포에게」, 「개인주의와 협동주의」, 「회고 갑신정변」, 『조선일보』의 「고국을 바라보고: 구하라, 과학적으로」, 잡지 『산업』 1930년 5월호의 「조선경제발전에 대한 관견」, 미주 한인 주간신문인 『신한민보』에 기고한 「Random Thought」와 「My Days in Korea」 등이 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국내외 한인들에게 단합된 힘을 호소하였고 강인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을 대비한 실력을 양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부름을 받아 군정청 수석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의 자격으로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정치적인 활동보다 신생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민족통일을 위한 계몽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먼저 한국 도착 직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국민의 소리’라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국민 방송 연설을 시작하였다. 해방 당시 라디오는 가장 효과적인 정보 전달 매체여서 이러한 방송활동은 국민 계몽에 매우 유용하였다.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은 1948년 9월까지 라디오방송 외에 각종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서 펼쳤다. 1948년 ８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8년 9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임을 밝혔다. 자택이 있는 미국 미디아시로 돌아와 다시 의사로 활동하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884년 갑신정변 참여,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7월 독립협회 결성,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한국통신부 설립, 5월 한국친우회 결성, 6월 『Korea Review(한국평론)』 발행,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9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부단장 등 역임</activities>
<engagedEvents>갑신정변, 제1차 한인회의，워싱턴회의</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독립협회,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 구미위원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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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신채호</name>
<nameHanja>申采浩</nameHanja>
<movementFamily>계몽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62)</orders>
<addressBirth>충남 대덕(大德)</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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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80. 11. 7 ~ 1936. 2. 21</bornDied>
<placeOfOrigin>고령(高靈)</placeOfOrigin>
<references>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편, 『단재신채호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논집』, 1980. ; 신일철,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3. ; 최홍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 형설출판사, 1983. ; 신용하,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한길사, 1984. ;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편, 『단재신채호와 민족사관』, 형설출판사, 1986. ; 임중빈, 『단재 신채호: 그 생애와 사상』, 명지사, 1987. ; 김병민, 『신채호문학 연구』, 아침, 1989. ; 강만길 편, 『신채호』, 고려대학교출판부, 1990. ; 이만열,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 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단재 신채호 연구논집』, 충북대학교, 1994. ; 배용일, 『박은식과 신채호사상의 비교연구』, 경인문화사, 2002. ; 신용하, 『증보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나남, 2004. ; 최홍규, 『신채호의 역사학과 민족운동』, 일지사, 2005. ; 김삼웅, 『단재신채호 평전』, 시대의창, 2005. ; 신충우, 『민족지성 신채호』, 한림원, 2006. ;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편, 『단재신채호의 사상과 민족운동』, 경인문화사, 2010. ; 김주현, 『신채호문학 연구초』, 소명, 2012. ; 이호룡, 『신채호 다시 읽기: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돌베개, 2013. ; 김주현, 『계몽과 혁명: 신채호의 삶과 문학』, 소명출판, 2015. ; 홍이섭, 「단재사학(丹齋史學)의 일면-반도적사관의 비판과 고구려구강론」, 『백산학보』 3, 백산학회, 1967.</references>
<content>1880년 (음)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림(桃林) 마을에서 신광식(申光植)과 안동 권씨(權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북도 청주(淸州)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 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이름은 처음 채호(寀浩)였으나 뒤에 채(采)로 간략하게 표기하였다. 호는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에서 취하여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을 썼으나 뒤에 단재(丹齋)로 고쳤다. 필명으로 무애생(無涯生)·금협산인(錦頰山人)·연시몽인(燕市夢人)·한놈·적심(赤心) 등을 사용하였다. 망명하여 독립운동기간에는 유병택(劉炳澤)·유맹원(劉孟源)·박철(朴鐵)·옥조숭(玉兆崇)·왕국금(王國錦)·윤인원(尹仁元) 등의 이명을 쓰기도 하였다. 집안은 본디 양반이었으나 경제적으로 가난하였다. 증조할아버지 신명휴(申命休)는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18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아버지 신광식은 신채호가 8세가 되던 1887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였다. 소년 시절, 할아버지 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9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마치고,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였다고 한다. 1897년 할아버지의 소개로 수구파 대신 신기선(申箕善)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신기선의 충남 목천(木川) 본가의 서책을 빌려 읽으면서 유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1898년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 근대 신문들과 신서(新書)들을 탐독하며 개화자강 사상에 젖기 시작하였다. 친러수구파 정부가 1898년 11월 5일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서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고 만민공동회 참여를 전환점으로 개화자강파로 전환하였다. 한 달여 뒤인 12월 25일 고종(高宗)과 정부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주동자 430여 명을 체포할 때, 잠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1901년 향리 부근인 청주군 낭성면(琅城面) 인차리(仁次里)의 문동학원(文東學院)에 강사로 나가면서, 시대 변천과 한문무용론(漢文無用論)을 주장하다가 유생들에게 배척당한 일도 있었다. 1904년 정부가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승인해 주려 하자 조소앙(趙素昻) 등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일제와 주모자 이하영(李夏榮)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해 상반기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이 일제의 을사늑약을 폭로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무기정간을 당하자, 1905년 말 1906년 초 양기탁(梁起鐸)의 초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가 되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李東寧)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신민회 이념을 논설에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으며, 신민회의 비공식적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07년 10월 량치차오(梁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번역, 간행하였다. 이어서 한국역사상의 삼걸(三傑)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순신(李舜臣)·최영(崔瑩)을 뽑아 전기를 저술하였다. 1908년 5월 『을지문덕』을 간행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수군제일위인(水軍第一偉人) 이순신전』을 연재하였다. 1909년 12월 5일부터 1910년 5월 27일까지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을 연재하였다. 일반 민중과 부녀층을 위하여 순국문판 『을지문덕젼』을 1908년 7월 펴냈고,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 11일부터 10월 24일까지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와 『대한협회월보』에 여러 편의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부녀층 계몽을 위하여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순국문 잡지인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하였다.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가 후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독사신론』은 확고한 근대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들을 다수 정립하여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다. 그밖에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를 저술하였으나 망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1909년 신민회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하자,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써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가 일부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기지 건설 사업을 담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참여하여 망명길에 올라 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李相卨)·최재형(崔在亨)·정재관(鄭在寬)·이동휘(李東輝)·이종호(李鍾浩)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李甲)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되었다. 회장은 윤세복, 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에서 통고문(通告文)과 고시문(告示文) 등을 작성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1914년 대종교(大倧敎)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의 환런현(桓仁縣) 홍도천에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서간도에서 주로 독립운동근거지 답사,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 답사,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국사 교수, 『조선사(朝鮮史)』 집필 등을 하였다. 이때 지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 제2환도성 유적과 광개토대왕릉 등 방대한 고구려 고분군들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李會榮)의 안내로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만세운동 때까지 약 4년 체류하였다. 베이징에서는 주로 역사연구, 베이징 부근 조선고대사 유적 답사, 독립운동관계 논설 집필, 『중화보(中華報)』·『북경일보(北京日報)』 등의 논설 집필 등의 일을 하였다. 1919년 2월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자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다른 39명의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서명하였다. 베이징에서 만세운동 소식을 듣자,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발기회의인 ‘29인 모임’에 참가하였다. 발기위원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에서 밤을 새워 토의한 결과 4월 11일 새벽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의결하는데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하의 각료조직을 구성할 때, 무장투쟁론에 의거하여 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창설한 박용만(朴容萬)을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하였다. 이때 현창운(玄彰運)에 의하여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되었다. 그러나 모두 부결되었다. 결국 이승만·안창호·이동녕 3인이 국무총리 후보로 가결되었고 이 중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4월 22일 열린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을 맡고, 충청도 출신 의원으로도 선임되는 등 1919년 4월부터 7월까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제6회 회의는 상하이 임시정부·노령 국민의회(國民議會)·한성 임시정부를 통일하여 통합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던 것이 주된 의제였다. 이때 안창호 등이 통합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려고 하자, 일찍이 ‘위임통치안’을 제출한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李東輝)를 국무총리로 한 새로운 내각의 통합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출범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그해 10월 상하이에서 대통령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는 신규식(申圭植)·남형우(南亨祐) 등과 함께 주간(週刊)신문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고, 주간(主幹)이 되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일제를 격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40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고 부단주(副團主)가 되어 단주(團主) 남형우와 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재정 사정으로 『신대한』 발행이 중단되자 1920년 4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박용만 등 5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제2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내임장(內任長)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9월에는 박용만·신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발기하였다. 1921년 1월 김창숙(金昌淑) 등의 지원을 받고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4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물면서도 위임통치청원 사실에 대해 사과와 해명이 없음을 보고 격분하여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규탄 「성토문」을 작성한 뒤, 54명 동지들의 서명을 받아 임시정부에 보내고 공표하였다. 이어 박용만·신숙 등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였다. 1922년 12월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의열단(義烈團)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 집필을 간곡히 요청받았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선언문을 집필하면서 김원봉이 합숙시킨 유자명(柳子明)으로부터 의열단의 혁명이념과 함께 무정부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 듣게 되었고, 그 결과 민족주의와 함께 무정부주의 요소가 집필에 반영되었다. 1개월 여의 산고(産苦) 끝에 1923년 1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이라는 노작(勞作)을 완성하였다. 이 글은 내용과 문장 모든 면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을 감격시켰다.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조선의 국호·정권·생존의 필요 조건을 모두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므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고, 동시에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에 대해서는 ‘혁명’으로 살벌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웅장한 필치로 선언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하이에서 70여 독립운동단체 대표 124명이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재정·군사·외교분과위원회의 결의안까지 토의하여 통과시키고, 현 임시정부의 대통령불신임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 또는 임시정부를 완전히 부정하고 러시아·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개조파’와 ‘창조파’가 분열되었다. 이때 창조파를 지지하여 러시아나 만주에 무장투쟁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하는 망명임시정부를 새로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개조파는 5월 23일부터 회의에 전연 출석치 않음으로써 사실상 국민대표회의는 분열되었다. 창조파는 단독으로 1923년 6월 7일 회의를 열어 새로운 헌법과 국호·연호를 제정하였다. 또한 입법부인 국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윤해(尹海) 등 33명을 위원으로 선출하였고 행정부인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행정수반으로 선출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이동휘·문창범(文昌範) 등 30명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김규식을 행정수반으로 한 창조파의 새로운 ‘임시정부’는 1923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한 소련 정부는 자기 영토 내에서의 한국인 ‘임시정부’의 활동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창조파 독립운동가들을 일시 경찰서에서 구금하였다가 석방하였다. 이에 창조파의 새로운 ‘임시정부’는 자연히 해산되었고, 독립운동가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정신적 충격과 좌절에 빠져 베이징으로 돌아와서는 1924년 3월 승려가 되려고 베이징 교외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갔다. 승려 생활 중에 주로 시작(詩作)을 하다가 1924년 여름부터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사 연구를 위해 6개월간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1924년 가을 속세로 돌아왔다. 1924년 가을부터 1925년 말까지 이전 원고들을 수정하고 중국 내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인 국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중 1924년 이룬 국사 연구상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사(朝鮮史), (朝鮮上古史)』 총론을 완성한 일이었다. 대체로 총론은 원고의 마지막에 쓰는 것이 관례이므로, 본문의 원고는 이미 그 이전에 쓴 것이라고 본다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는 1924년 완성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총론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그의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을 극명하게 이론화하여 천명하였다. 1924년 1월부터 3월까지 『동아일보』에 다수의 역사 연구 논문들을 연재하였는데, 이 논문들은 투옥된 다음 1930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묶어져 간행되었다. 이 무렵 무정부주의 잡지 『신세계』에 게재된 크로포트킨과 다수의 중국 무정부주의자의 논문들을 읽고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4년 「문제없는 논문」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비치기 시작하였고, 1925년에 쓴 「낭객(浪客)의 신년만필」에서는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짙게 나타났다. 이 글에서 인류의 5대 사상가로 석가·공자·예수·마르크스·크로포트킨을 들고 있으며, 『동아일보』의 독자들에게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靑年)에게 고(告)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라고 권고하였다. 이에 1926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1927년부터는 무정부주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9월 중국 텐진(일설에는 베이징)에서 중국·조선·일본·대만·베트남·인도 등 6개 민족 대표 120여 명이 모여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을 조직하려 하자, 대만인 무정부주의자 린빙원(林炳文)의 안내로 이필현(李弼鉉)(일명 (李志永))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1927년 홍명희(洪命熹)와 안재홍(安在鴻)의 편지 요청을 받고 고국에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무정부주의 작품으로서 「대흑호(大黑虎)의 일석담(一夕談)」, 「용(龍)과 용(龍)의 대격전」 등을 썼다. 1928년 4월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잡지 또는 신문)을 설립할 것과 일제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제조소 설치를 결의하였다. 회의 후 잡지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해 5월 8일 유병택(柳炳澤; 일설 柳孟源)이라는 가명으로 타이완 지롱(基隆)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륙하던 중 지롱수상서원에게 붙잡혀 다롄(大連)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첫 공판이 열리기까지 7개월간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함께 체포된 대만 인린빙원은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8년 8월 옥사할 정도로 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30년 4월 28일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중사상범으로 독방에 수감되었다. 옥중 생활에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추위였다. 원래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북방 뤼순(旅順)의 날씨와 감옥의 시멘트 바닥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이에 끼니를 굶고 있는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 달라”고까지 하였다. 1935년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자신이 옥중에서 죽게 될 것을 예감하기 시작하였다. 뤼순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된 후 홍명희에게 편지를 보내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약전(鄭仁弘略傳)』 등 두 개의 구상된 원고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땅에 묻힐 것을 애석해 하였다.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서울에 있던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은 “신채호 뇌일혈,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장례 절차를 준비하여 다롄으로 향하였다. 가족들이 뤼순감옥에 도착해 면회를 하였을 때, 의식불명인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일제 간수들은 면회시간이 지나자, 부인과 아들은 간수에게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임종을 지켜보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간수들은 규칙을 내세워 가족들을 쫓아냈다.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홀로 생을 마쳤다. 저술로는 1908년에 『독사신론(讀史新論)』, 『을지문덕(乙支文德)』,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李舜臣傳)』,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10년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24),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20년대 논문집, 1931) 등 다수가 있다. 번역서로는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07년 신민회 회원, 1911년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주필, 1912년 광복회 부회장, 1919년 임시정부 발기위원, 임시정부 의정원 전원위워회 위원장, 신대한동맹단 부단주, 1920년 제2보합단, 군사통일촉성회 조직, 1921년 군사통일주비회 개최, 1923년 조선혁명선언 집필, 1927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조선대표</activities>
<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신민회, 기호흥학회, 대한매일신보, 권업회, 광복회, 임시정부, 제2회 보합단, 군사통일촉성회, 군사통일주비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무정부주의동방연맹</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김구</name>
<nameHanja>金九</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2)</orders>
<addressBirth>황해 해주(海州)</addressBirth>
<aliases>자: 연상(蓮上), 호: 연하(蓮下), 백범(白凡), 초명: 창암(昌巖), 후에 창수(昌洙), 이명: 두래(斗來), 구(龜)</aliases>
<bornDied>1876. 8. 29 ~ 1949. 6. 26</bornDied>
<placeOfOrigin>안동(安東)</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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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樂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연상(蓮上), 초호는 연하(蓮下), 활동기 이후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다가 동학 입도 후에 창수(昌洙), 그 후 구(龜, 九)로 개명하였다. 불교 입교 시기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가, 환속 후 유랑기에는 잠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을 썼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급 서당에 가지 못하였다. 9세부터 서당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차린 서당과 이웃 동네 서당에서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 14세에 평민 출신인 훈장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한당시(漢唐詩)·대학(大學)·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과거 초시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의 초시(初試)가 해주에서 열리자, 정훈장의 권고로 과거시험을 보러 해주 관풍각(觀風閣)에 갔으나, 온통 부정투성이인 시험의 실상을 확인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반상의 차별을 한탄하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수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연비(蓮臂, 신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팔봉(八峯)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는데, 황해도·평안도 동학당 중에서 가장 어린 접주로 가장 많은 연비를 이끌었다고 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700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가 담당한 서문 공격은 계획대로 되었으나, 본대는 남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기병한 진사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 과 만나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하고 구월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이동엽(李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해산한 다음,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집에 은신하였다. 안태훈의 집에서는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의 강의와 훈도를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5년 (음)8월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 및 일본 낭인배들이 궁궐을 야습하여 명성황후 시해 만행을 자행하자, 그해에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만주 삼도구(三道溝)로 건너가 김이언(金利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강계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에 눌려 패전하였다. 1896년 2월 안악으로 돌아오다가, 치하포(鴟河浦)의 객줏집에서 상인으로 변복하고 밀정 활동을 하던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발견하고는 국모의 원수 갚는 일의 하나로 그를 처단하였다. 쓰치다 처단으로 투옥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차츰 개화 의식을 갖게 되었다. 1897년 7월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한 달 후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라는 고종황제의 특명이 내렸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게 되자 1898년 3월 탈옥하여 계룡산 갑사를 거쳐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25세인 1900년 환속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신교육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이름을 김구(金龜)로 고쳤다. 1903년에는 황해도 장연읍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였고, 이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벗(Evert)청년회 총무로 일하였다. 에벗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덕기(全德基)·이준(李儁)·이동녕(李東寧)·최재학(崔在學)·조성환(曺成煥)·김병헌(金炳憲, 후에 별명 王三德) 등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 운동 및 가두 연설을 전개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총감이 되어 황해도에서 신교육 구국운동·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초 동지들과 함께 안악에 양산학교(陽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립되자 황해도 총감(總監)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의 민주국가 건설을 공식 목표로 설정한 국권 회복 운동 단체였다. 그는 서명의숙과 양산학교의 교원, 해서 교육총회의 총감, 재령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며, 황해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총지도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비밀리에 열린 전국간부회의에서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였다. 황해도 총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군자금과 애국 청년 모집 그리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을 벌이던 중, 1911년 1월의 ‘안명근사건(안악사건)’으로 신민회 황해도 지회 회원 160여 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15년 형을 선고받은데 이어,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으로 2년 형이 추가되었다. 감옥에서 김구의 ‘구(龜)’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호를 평민이라는 뜻으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1914년 7월에 형기 2년을 남기고 가출옥되어 주거 제한의 요시찰을 받으면서, 친구 농장에서 농감으로 농민들을 지도 계몽 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3·1운동 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상하이에서 한국노병회(韓國勞兵會)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노병회는 국내외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임금을 모아 10년 안에 1만 명의 독립군 예비병과 100만 원 군자금을 준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1926년에는 내각수반인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1928년 3월부터 독립운동 전선에서 전사하기로 맹세하고,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로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하였다. 1929년에는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겸임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이동녕(李東寧)·이시영(李始榮) 등과 상하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하였다. 1931년 7월 일제는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여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킨 다음, 1931년 9월 18일 만주 침략을 자행하였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하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정규군 30만 명을 투입한 중국 측은 1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였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임시정부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승인과 위임하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다. 1932년 1월 18일 단원 이봉창(李奉昌)을 도쿄(東京)에 파견하여 일왕에게 투탄케 하였다. 폭탄은 명중하지 않았지만, 한인 독립운동가가 일본의 심장에까지 파고들어 일왕을 공격하자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어서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이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들에게 투탄하였다. 상하이 점령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해서 군정 수뇌 일곱 명을 섬멸하였다. 전 세계가 한국 독립운동의 완강한 투지에 놀랐다. 중국 측은 30만 명의 중국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해냈다고 환호하고 경탄하면서 지원을 본격화하였다. 장제스(蔣介石) 위원장은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국인 장교 양성반의 특설을 허가하여,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장교 훈련이 시작되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에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인 장교 양성이 시작되었다. 후일 전자는 광복군의 기간 세력, 후자는 조선의용대의 기간 세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 활동이 성공한 후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립하였다. 60세인 1935년 임시정부의 지지 정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장쑤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柳州), 치장(綦江)을 거쳐 1939년에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 1940년 4월 1일 한국국민당·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지청천(池靑天)의 조선혁명당을 통합해서 임시정부 여당으로서 새로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일제 말기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독립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李範奭)을 임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이 창건됨으로써 임시정부는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건국 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용한 것으로써, 정치와 교육의 균등은 자유민주주의에 의거하고, 경제의 균등은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튿날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공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의 확전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일제 패망과 조국 광복을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군사 통일을 추진하여,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합병안을 의결하였고, 7월에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종래의 광복군 제1·2·5지대는 제2지대로 통합 개편하여, 이범석을 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김학규(金學奎)를 제3지대장에 임명하여 한국인 학병 탈출자들을 대상으로 징집 활동을 강화하였다. 1942년 10월 개최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조선혁명당 출신 좌파 의원들이 참여하여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한국독립당이 여당이 되고 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야당 역할을 한 전 민족적 통일의회가 되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 장제스 위원장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요구하는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초청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위해 힘쓸 것을 약속하였고, 1943년 12월 1일 장제스가 참석한 연합국 수뇌의 카이로선언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1944년 4월 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 수를 증원하였는데, 주석에 선출되었다. 부주석은 민족혁명당 대표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이시영·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조완구(趙琬九)·차리석(車利錫)·박찬익(朴贊翊)·조소앙(趙素昻)·김붕준(金朋濬)·안훈(조경한, 趙擎韓) 등 9명, 조선민족혁명당의 장건상·성주식·김원봉 등 3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및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을 국무위원으로 입각시켰다. 이로써 조국의 해방을 앞두고 정부의 통일도 실현되었다. 이와 함께 광복군과 연합군의 합동 작전을 추진하여 광복군을 중국 최전선 전지공작(戰地工作)에 투입하였다. 1943년 6월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과 영국군 동남아사령부 대표 콜린 매켄지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광복군 1개 대를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하여 심리전에 종사케 하였다. 또한, 1944년 5월 광복군은 주중국 미 공군 사령관 웨드마이어(Wedemeyer, A. C.)의 원조를 얻어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동으로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는 지대장 이범석과 OSS의 사전트 소령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합작하였고, 제3지대는 지대장 김학규와 OSS의 윔스가 안훼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비밀 훈련을 하였다. 1945년 8월 시안으로 날아가 광복군의 국내 진입 훈련을 시찰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통일 임시정부를 이끌고 환국할 준비를 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획정하여 남과 북에 주둔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개인 자격의 입국만을 허용하였다. 70세인 1945년 11월 23일 부주석 김규식·이시영 등 국무위원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환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아침 8시에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키자”라는 귀국 방송을 하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대회에서 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국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한편,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즉각 거족적인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연합국 3수뇌의 카이로회담 직후 미국 수뇌부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미국에 강력한 항의를 전한 바 있었다. 또 광복 후에 연합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방해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하면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당시 반탁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결성하고, 2월 14일에는 민주의원(民主議院)을 조직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통일된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947년 3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國民議會)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총회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유엔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에 국한한 선거 실시’를 결정하자, 이것이 단독 정부 수립에 의해 남북 분단을 고착시키며,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 정부 수립은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하였다. 남북 협상으로 북쪽을 설득하여, 처음부터 통일 대한민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밝혔다. 1948년 2월 조국의 분단과 내전을 막고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 김규식·조소앙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4김(金) 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마친 뒤,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교장에서 고전을 읽으며 칩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잔당들과 일부 권력 추구배들이 고용한 안두희(安斗熙)라는 하수인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제가 일찍이 방대한 일제 군경 조직을 동원하여 60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집요하게 추격하였지만, 위해를 가하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를 해방된 조국 땅 수도 서울에서 친일파 잔당들이 백주에 시해한 것이다.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황해도 팔봉 접주로 참가, 1895년 만주 삼도구의 김이언 의병부대 참가, 1896년 치하포에서 일제 밀정 처단, 1910년 신민회 황해도 총감, 애국계몽운동 황해도 지도자,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에 취임,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일왕에게 투탄(1932.1.8.),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1932.4.29.) 지도, 1933년 장제스와 난징회담에서 낙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40년 충칭시기 임시정부 주석, 1940년 한국광복군 창군, 임시정부의 좌·우연합정부로의 개편, 1943년 미·영·중 연합국 대표의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 약속받는 외교활동, 1947년 광복 후 신탁통치 반대운동, 비상국민회의 조직, 민주의원 조직 총리 취임, 1948년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대한민국 추구</activities>
<engagedEvents>치하포 사건, 안명근사건(안악사건), 만주사변, 이봉창 의거, 상하이 사변, 윤봉길 의거, 난징회담, 태평양전쟁, 카이로회담</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신민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노병회, 한인애국단,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박열</name>
<nameHanja>朴烈</nameHanja>
<movementFamily>일본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89)</orders>
<addressBirth>경북 문경(聞慶)</addressBirth>
<aliases>초명 : 혁식(赫植), 이명 : 박준식(朴準植)</aliases>
<bornDied>1902. 3. 12 ~ 1974. 1. 17</bornDied>
<placeOfOrigin>함양(咸陽)</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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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1902년 3월 12일 ((음)2월 3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戶西南面) 모전리(茅田里)에서 부친 박지수(朴芝洙)와 모친 정선동(鄭仙洞)의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초명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烈로 불렀고, 호적에는 박준식(朴準植)으로 되어 있다.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노선에 따라 일왕과 일본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려다 체포되어 22년 2개월이란 세계 최장의 수형을 받은 혁명가이다. 광복 후에는 재일한인들의 단체인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립하여 초대단장을 역임한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태어난지 몇 해 되지 않아 가족 모두 마성면(麻城面) 오천리(梧泉里) 샘골로 이주해 살았다.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전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한다. 맏형 정식(庭植)과 둘째형 두식(斗植)은 오천리 마을 구장을 맡아보며 인근 산지의 삼림보호와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星山組合, 1919년 권농조합으로 개칭)을 이끄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7세인 1908년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咸昌)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한국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일본교사는 경찰의 형사”라고 말하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경복궁 근처 소격동에서 하숙하며 재학하던 중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이른바 ‘대역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학교 재학 중 1919년 만세운동을 맞아 시위에 참여했는데, 일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4월 초부터 중순까지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에 끌려간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취체 경험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1919년 10월경 부산에서 도쿄(東京)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 행상 등 노동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반제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재일유학생들을 만났고 우연히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사상 공감에 이어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도쿄 최대의 한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유학생인 김약수(金若水)·백무(白武)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교육을 위한 야학활동도 벌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주최하는 여명회(黎明會)·코스모구락부·자유인연맹 등 각종 사상단체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반제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또한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 후에 철권단(鐵拳團)·혈권단(血拳團)·박살단(撲殺團)으로 개칭)을 조직해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거나 집단 구타하여 응징하였다. 1921년 11월 29일 원종린(元鍾麟)·김약수 등 유학생들과 함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아 1922년 7월 10일자 창간호와 8월 10일자 2호를 발간하고, 니카다현(新潟縣) 나가쓰가와(中津川)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에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흑도회는 9월 7일 학우회와 함께 도쿄 YMCA에서 이 사건의 진상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천여 명이 모인 이 행사에서 일본 약탈체제의 근본적 파괴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학살조사를 국내에 보고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김한(金翰) 등 의열단 간부들을 비밀리에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백무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여 1922년 12월 홍진유(洪鎭裕)·장상중(張祥重) 등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 가네코와 함께 기관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 『민중운동』 등 항일 잡지를 발간하였다. 또 일본 및 한인 사회단체들과 함께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 반대운동을 벌이고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일본 지식인을 초청하는 등 연대활동을 펼쳤다. 1923년 4월 중순경 자택에서 한인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를 별도로 조직해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 참가 등의 대중활동을 펼쳤다. 1923년부터는 의열투쟁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폭탄유입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에서 폭탄을 유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를 실험하는 한편, 의열단 국내 책임자인 김한(金翰)에게 폭탄 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하지만 의열단 내의 정보혼란으로 폭탄 확보가 중단되고 일제의 계략으로 압수당하자, 고교 동창이며 동지인 김중한(金重漢)을 통해 폭탄을 구입하려 하였다. 한편으로 불령사 회원 최영환(崔英煥)을 통해 중국의 한인 의열단체인 다물단(多勿團)으로부터 폭탄을 건네받았다. 유입된 폭탄은 1923년 10월 중 예정된 일본 히로히토(裕仁) 태자의 결혼식에 투척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한인 폭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6천여 명의 한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6,200여 명이 강제 연행될 때,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9월 3일 새벽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검찰 조사 도중 폭탄 구입 사실이 알려졌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경찰은 이를 ‘대진재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 검찰은 관련자 진술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자, 1924년 2월 15일 박열·가네코 후미코·김중한 세 사람만을 추가 기소하였고,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일본 검찰에 기소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혹심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일체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과 조선 예복의 착용,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을 낭독하게 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일본 사법부가 이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의 사대관모와 관복을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일왕의 죄를 밝혔다. 그리고 옥중에서 작성한 선언문인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권력자계급에게 준다」 등 4편의 글을 낭독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6년 3월 25일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일제는 10일 만에 특별 감형을 요청하였고,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형 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 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이별해야 했는데, 이에 4월 6일 이감되자마자 은사전달에 저항하며 약 10일 동안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가네코는 가혹한 자신의 상처와 항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었고, 일본 경찰과의 충돌과 우여곡절 속에서 4개월 만인 11월 5일 가까스로 박열의 고향 선산인 경북 문경 팔령산(八靈山)에 묻혔다. 한편 1926년 9월초에는 옥중에 수감 중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괴사진’이 일본 언론에 의해 알려짐에 따라 큰 파장이 일었다. 문제의 사건은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예심판사가 박열과 환담하던 중, 마침 옆방에 온 후미코를 동석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을 ‘사법권의 문란’으로 본 우익과 야당 인사들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였는데, 이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고 담당 사법관이 파면당하는 등 정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 8월 고스게(小菅)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3년 8월 도쿄에서 먼 동북지방의 해안가인 아키다(秋田)의 형무소로 옮겼다. 이후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 최장기간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꾸준히 사상전향을 강요해 모두 5편의 전향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제시된 전향선언서는 문장구성과 내용이 이전과 지나치게 다르고, 주변인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를 출옥시키거나 감형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작되었다고 여겨진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었으나,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 27일까지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먼저 출옥한 원심창(元心昌)·이강훈李(康勳)·김천해金(天海)이 1945년 10월 15일 박열의 석방을 요구하며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탄원서를 제출하였다. 1945년 10월 홋카이도(北海道) 변방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1945년 12월 6일 도쿄에서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옥중에서 박열을 감시했던 형무소 주임인 후지시다 이사부로(藤下伊一郞)가 나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사죄의 뜻으로 아들을 양자로 바치고, 자신의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버려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범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이때 초대 단장을 맡았다. 민단은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항일 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이다. 이후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이승만 정부도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지지 방침은 민단 내부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결국 1948년 2월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과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듬해 5월 영구 귀국을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와 머물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였고, 사흘 뒤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압송 당하였다. 납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안재홍·엄항섭·김약수 등 민족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헌영 등과 함께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상무위원과 최고위원, 회장 등을 맡아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73세 나이에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1년 흑도회, 1922년 흑우회, 1923년 불령사 일왕폭살계획 추진, 1923～1945년 투옥, 1947년 재일조선거류민단 단장</activities>
<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흑도회, 흑우회, 불령사</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김낙영</name>
<nameHanja>金洛永</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5)</orders>
<addressBirth>황해 장연(長淵)</addressBirth>
<aliases>김낙영(金洛泳, 金樂永)</aliases>
<bornDied>1899. 7. 23 ~ 1971. 2. 8</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고등법원, 1919.10.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ferences>
<content>1899년 7월 23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다른 한자 이름으로 김낙영(金樂永)을 사용하였다. 장연군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1일 장연읍 장터에 모인 천도교인 2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장연읍 장터에서는 다음 장날인 3월 16일에도 300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들어 장연군의 만세 시위는 본격화되었다. 4월 5일 속달면(速達面) 태탄리(苔灘里), 8일 후남면(候南面) 남호리(南湖里), 11일 장연읍과 남호리, 16일 용연면(龍淵面) 도경리(道景里), 18일 대구면 송천리, 22일 해안면(海安面) 몽금포리(夢金浦里) 등 장연군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대구면 송천리는 1884년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에 의해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가 세워질 정도로,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다. 김창현(金昌鉉) 등의 청년과 송천리의 기독교인들과 논의를 통해 송천리 장날인 4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만세 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18일 김창현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80여 명의 청년과 기독교인을 선도하면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장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경찰들은 시위대에 해산을 종용하였고, 장연 읍내의 경찰과 군인까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김창현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국제연맹회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체결되고 세계 평화를 주창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유죄판결 하는 것은 만국공법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4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만세시위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3.1운동</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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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병선</name>
<nameHanja>康炳善</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5)</orders>
<addressBirth>평북 벽동(碧潼)</addressBirth>
<aliases/>
<bornDied>1895 ~ 1924</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機密受 제960호 - 機密 제235호, 南滿統義府軍隊의 宣言文 및 警告文 送付의 건」, 1924.5.2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 ; 『時代日報』 1924.5.21.</references>
<content>1895년생으로 추정되며, 출신지는 평안북도 벽동(碧潼)이다. 1920년 이후 만주에서 대한독립단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중국 퉁화현(通化縣) 팔도(八道)에 거주하는 전학수(田學秀)를 대한독립단에 가입시켜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전학수에게 서용운(徐龍雲) 앞으로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고, 친일 행각을 일삼은 홍국준(洪國俊)·유봉수(劉鳳洙)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1중대 제1소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제1중대 대표로서 「남만군민(南滿軍民)에게 경고」라는 제목의 경고문을 발표하고 김창화(金昌化)·이명옥(李明玉)·장창헌(張昌憲)·백광운(白狂雲)·최원건(崔元健)·유상엽(劉尙燁)·한용만(韓用萬)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들이 단합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남만주 일대의 독립군 대표로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 하면서, 대업을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개인의 야심으로는 활동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에도 독립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가 1924년 경 퉁화현 강산(岡山) 두도구(頭道溝)에서 토병(土兵)과 전투 끝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0년경 대한독립단 소대 활동, 대한통의부 제1소대장, 1924년 대한통의부 제1중대 대표</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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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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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name>김길우</name>
<nameHanja>金吉友</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2009)</orders>
<addressBirth>함남 함흥(咸興)</addressBirth>
<aliases/>
<bornDied>1899. 3. 24 ~ 1934</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金俊燁·金昌順 共編, 「朝鮮國內工作委員會事件等豫審決定書寫(1933.4.28)」, 『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編 Ⅱ, 1980. ; 楣村秀樹·姜德相 編, 「共産黨朝鮮國內工作委員會事件檢擧ニ關スル件(1931.7.21)」, 『現代史資料』 29(朝鮮 5), みすず書房, 1972. ; 『조선중앙일보』 1934.5.24. ; 『조선중앙일보』 1934.6.1. ; 『조선일보』 1933.7.15. ; 『동아일보』 1934.6.2. ; 『신한민보』 1934.7.12.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 김경일, 「1930년대 전반기 서울상해파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references>
<content>1899년 3월 24일 함경남도 함흥부(咸興府) 운흥리(雲興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춘식(金春植), 김성춘(金成春), 김도성(金島城, 金都成)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서 곡물상을 하였다. 이후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일용노동, 중국인 부호의 사병(私兵), 서점원, 농업, 곡물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해외지부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26년 5월 지린성(吉林省) 위사현(韋沙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간도와 남북만(南北滿) 각지에는 만주총국 하부조직들이 만들어졌고 이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발표된 「12월테제」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향후 항일운동의 방향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29년 6월 지린성 둔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는 한반도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전국적으로 하부조직을 두고자 하였다. 파견된 조직원은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월 간도의 룽징(龍井)에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남세극(南世極)·김자성(金自成) 등과 함께 여남수(呂南壽)를 책임자로 하는 용정 제4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야체이카ячéйка는 러시아어로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기초 조직 단위를 말한다. 1929년 1월 돈화현 황니하자(黃泥河子)로 이동하였고, 2월 상순경에는 방정구(方正球)·허용(許湧)과 함께 허문덕(許文德)을 책임자로 하는 황니하자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이후 5월에 황니하자야체이카는 조직 구성이 바뀌어 방정구·허용이 탈퇴하고 새롭게 한(韓)모와 박원진(朴元鎭)이 참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야체이카 회의를 개최하고 해당지역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당시 농민동맹 조직은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통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1930년 10월 함남 함주군(咸州郡) 흥남면(興南面) 송상리(松上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는 인쇄업에 종사하며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5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던 중 1933년 3월부터 류마티스와 척수염으로 환자들을 수감하는 병감(病監)에 수용되었다. 7월 14일 옥중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가족이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34년경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의견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8년 간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 입당, 1929년 돈화현 황니하자 야체이카 활동,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활동</activities>
<engagedEvents>조선국내공작위원회사건(朝鮮國內工作委員會事件)</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조선공산당 만주총국</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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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name>김낙원</name>
<nameHanja>金樂元</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1992)</orders>
<addressBirth>경북 영덕(盈德)</addressBirth>
<aliases>김재동(金載東)</aliases>
<bornDied>1898. 2. 29 ~ 1958. 8. 10</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6.5. ; 「김세영 외 77명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경북, 2013.</references>
<content>1898년 2월 2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동(遠黃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재동(金載東)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의 장날을 기해 일어났던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병곡면 병곡동(柄谷洞)까지 이동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영덕지역의 3·1운동은 3월 18일 영해 장터에서의 대규모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군 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의 6개 면에서 일어났다. 특히 영덕 북부의 영해면·창수면·병곡면의 만세 시위는 경북에서 가장 격렬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해 장터의 만세 시위는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였던 김세영(金世榮)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던 중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시위를 계획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김세영은 3월 12일 낙평동(洛坪洞) 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서울·평양·대구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전달하였다. 권태원은 김세영의 권유에 따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의 장로교회 조사인 정규하(丁奎河)를 만나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 등지의 기독교와 유림 세력 등을 규합해가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 장터에 모인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영해경찰관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심상소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였다. 오후 2시경 정규하는 2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북쪽에 위치한 병곡면의 주재소로 향하였다. 병곡면에 도착한 시위대는 4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둥과 지붕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하고, 면사무소의 납세고지서 원부 등의 공문서류를 파기한 뒤 오후 7시경에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일제에 붙잡혀 김세영 등 96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18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및 병곡면 만세시위 참가</activities>
<engagedEvents>3·1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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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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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병일</name>
<nameHanja>姜秉一</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국장(1990)</orders>
<addressBirth>함북 회령(會寧)</addressBirth>
<aliases>강병일(姜丙日)</aliases>
<bornDied>1888. 4. 29 ~ 1928. 11. 5</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機密公信 제11호-琿春鮮人基督敎友會 役員名簿에 관한 건」, 1916.3.2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公信 제115호-獨探嫌疑者에 관한 건」, 1918.10.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公信 제146호-排日鮮人의 動靜에 관한 건」, 1919.10.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公信 제52호 琿春 不逞鮮人團 통일에 關한 件」, 1920.4.2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外務省文書課受 第16號 琿春縣 春化鄕 大 五道溝에 不逞新民府 支會設置한 外交部員 全海雲 檢擧에 關한 處置 方向에 관한 件」, 1926.1.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김정명 편, 『明治白年史叢書-朝鮮獨立運動Ⅲ : 民族主義運動篇』, 1980.</references>
<content>1888년 4월 29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팔을면(八乙面) 원산동(元山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이주 뒤에는 만주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춘화향(春化鄕) 이수(梨樹)에 거주하였다. 이명은 강병일(姜丙日)이다. 1916년 훈춘 지역에서 훈춘선인기독교우회(琿春鮮人基督敎友會) 회원으로 참가하여 종교 활동을 통해 반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1918년에는 일제가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조직한 경성시찰단(京城視察團)에 참가하여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의지를 꺾지 않고 이르쿠츠크 독일파견원(獨逸派遣員)과 연결되어 활동하는 한편,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정탐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진입하고자 하였으나 국제연맹회의(國際聯盟會議) 개최 전까지 연기하게 되었다. 1920년경에는 지린성 훈춘현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황병길(黃丙吉)·이명순(李明淳) 등과 함께 4월 말 회동하여 자신이 이끌던 의사단(義士團)을 최경천(崔慶天) 아래의 포수단(砲手團) 등과 합쳐 군무부(軍務部)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군무부 편성과 군율을 제정하였고, 중대장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훈춘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본 군대를 습격하고 이들에게 압수된 무기를 탈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6년경에는 신민부 훈춘지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이후 훈춘 부근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박정환(朴政煥)·채덕승(蔡德勝) 등과 함께 러시아령 거주 동포들에게 군자금을 모금하여 군무부 군무부장 황병길에게 전달하였다. 같은 해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장쭤린(張作霖) 휘하 부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문의 영향으로 1928년 11월 5일 병환으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6년 훈춘선인기독교우회, 1920년 군무부 중대장, 1926년 신민부 훈춘지회 총무</activities>
<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훈춘선인기독교우회, 군무부, 신민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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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고기용</name>
<nameHanja>高基用</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2014)</orders>
<addressBirth>평북 초산(楚山)</addressBirth>
<aliases>고영태(高英泰, 高泳泰, 高永泰)</aliases>
<bornDied>1886. 2. 18 ~ 미상</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高警 제7122호, 國外情報: 西間島地方 情報 一束」, 1921.3.10,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8호, 大正10年 中에 있어서 管內 不逞鮮人의 狀況」, 1922.2.2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9, 2006. ; 『동아일보』 1927.1.15, 4.3. ; 『매일신보』 1928.8.26. ; 박걸순, 「대한통의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 채영국, 「1920년대 중반 남만지역 독립군단의 정비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 「고기용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references>
<content>1886년 2월 18일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성면(城面) 성동동(城東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고영태(高英泰, 高泳泰·高永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활동 당시 중국 펑톈성(奉天省) 관덴현(寬甸縣) 시아로우허(下漏河) 스고우(石溝)에 거주하였다. 1921년경 중국 지안현(集安縣) 양수천자(凉水泉子) 일대에 소재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집서지부(輯西支部)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 조직의 국장은 최석순(崔錫淳)이고, 총무 김길보(金吉甫), 검찰 봉관국(奉官國), 외교원(外交員) 김봉관(金奉官) 등이었다. 이 조직에서 18명의 외교원 혹은 단원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남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보약사(保約社)·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를 연합한 무장투쟁 단체였다.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이었는데, 이때 최석순은 지안현 서부를 관장하는 지단장이었다. 이후 최석순의 휘하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송갑(宋甲, 이명 송운서(宋雲瑞)·송만선(宋滿旋))의 지휘 하에 관뎬현 시아로우허 스고우에서 6연발 권총을 휴대하고 청년단원이라고 칭하면서 의병 활동을 벌였다. 특히 송갑은 초산군을 오가면서 함께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 활동한 동지는 모두 청년단 검찰로 백인식(白仁植)·박곽산(朴郭山)·김형빈(金亨彬)·김형수(金亨洙) 등이었다. 1921년 10월 30일을 기하여 부하인 이득조(李得祚)·최명준(崔明俊)·이운서(李雲瑞) 등을 이끌고 권총을 휴대한 채 관뎬현의 연자구(碾子溝) 혹은 천자구(淺子溝) 장석곡(長石谷)에 잠입하였다.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인 이운서에게 무장활동 동참을 권유해 부하로 삼았다. 소규모 부대원을 이끌고 군자금 모금과 밀정 처단의 활동 등을 벌였다. 이날 부하들과 함께 군자금 모금을 위해 김관오(金官吾)의 집을 향하였다. 그러던 중 이지순(李芝淳)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초산군의 성면(城面) 옹암주재소에서 파견한 순사 이명청(李明淸, 혹은 이시청(李時淸))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명청은 당시 관뎬현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밀정 숙청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던 대한독립단의 활동과 정황을 조사하려고 파견된 순사였다. 즉시 단원들과 함께 권총으로 이명청을 사살하였다. 당시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光復軍總營)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중 부일 세력인 순사를 처단하였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 정규군을 표방하였으나 자체적인 군사 조직으로 활동하고자 1920년 창설된 단체다. 주로 관뎬현 향로구(香爐溝)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천마별영으로 두고, 벽동군(碧潼郡) 파저강(波瀦江) 연안에 벽파별영을 두었다. 1926년 2월 21일부터 1927년 1월까지 김만재(金萬再)·전필성(全弼成) 등과 함께 평북 의주군(義州郡) 주내면(州內面) 어적동(於赤洞), 같은 군의 서호동(西湖洞) 일곡리(一谷里) 등 12곳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7년 1월 말에는 의주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들과 격투를 벌인 끝에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이때 김만재는 홀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당시 모금한 군자금은 무려 1,500여 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1년부터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의용군 소속으로 중국 콴덴현 일대와 평북 초산군과 의주군 일대에서 친일 세력 숙청 및 군자금 모금 활동 전개</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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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대한통의부 의용군</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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