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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홍진</name>
<nameHanja>洪震</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독립장(1962)</orders>
<addressBirth>서울</addressBirth>
<aliases>본명 : 홍면희(洪冕憙), 초명 : 봉근(鳳根)·우봉(又鳳), 자 : 성무(聖武), 이명 : 홍진(洪鎭·洪震), 호 : 만호(晩湖)·만오(晩悟), 필명 : 경환(警寰)</aliases>
<bornDied>1877. 8. 27 ~ 1946. 9. 9</bornDied>
<placeOfOrigin>풍산(豊山)</placeOfOrigin>
<references>『구한국관보』. ; 『독립신문』. ;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 『자유신문』. ; 『동아일보』.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 1994.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4, 2005. ; 박환,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 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 ;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지식산업사, 2004. ;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6. ; 조범래, 『한국독립당연구 1930 – 1945』, 선인, 2011. ; 장세윤,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 고정휴, 「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 이현주, 「3·1운동 직후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수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6, 한국근현대사학회, 1997. ; 이명화, 「안창호와 만주지역의 통일운동」, 『도산사상연구』 5, 1998. ; 배경식, 「중경시기 반한독당세력의 임시정부 개조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1999. ; 정병준,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1999. ; 장석흥, 「해방 직후 상해지역 한인사회와 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 정병준,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건국 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 이재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8, 2014. ; 오대록,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references>
<content>1877년 (음)8월 27일 서울 차동(車洞, 현 서소문)에서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 수동(壽東)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본명은 홍면희(洪冕憙)이고, 어려서는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으로 불렸다. 자는 성무(聖武)이고, 호는 만호(晩湖)· 만오(晩悟)이며, 필명으로 경환(警寰)을 쓰기도 하였다. 한자가 다른 홍진(洪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이후 한성재판소 주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되었고,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받았다. 1908년 변호사 인원ㄱ가장을 받고, 1909년부터 평양에서 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규갑(李奎甲)을 알게 되었다. 이규갑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공주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감을 지낸 인물로 평양의 남산현(南山峴)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서울에서 이규갑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법조계·기독교계·유교계·학생 등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두고 극비리에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 이규갑·이교헌·윤이병·윤용주·한남수·김규·김사국·이민태·민강 등과 법관양성소 출신의 검사인 한성오(韓聖五)의 집에 모였다. 이 회합에서 정부의 이름은 ‘한성정부’, 정부수반의 명칭은 ‘집정관총재’, 각원은 ‘총장’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집정관총재에 이승만(李承晩)국무총리 총재에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과 평정관·파리강회회의 대표 등을 선출하고, 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도 제정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조직안이 만들어졌다. 한성정부의 수립은 13도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통해 공포하기로 하고,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다. 13도대표자대회는 일종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국민적 기반과 절차를 거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인천·수원 등 일부 지역과 종교계 대표들만 참석하였을 뿐, 지방대표들은 거의 참석하지 못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의 임시정부 수립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4월 8일 한남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한남수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4월 15일경 이규갑과 함께 ‘한성정부 조직안’을 성냥갑 속에 숨겨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꾸었다. 상하이로 떠나면서 국민대회 개최와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일은 학생조직에게 맡겼다. 4월 23일 김사국(金思國)을 비롯한 학생들은 서울시내 서린동 봉춘관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13도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취지서」와 각원 명단 및 약법이 들어있는 선포문을 배포하였다. 이로써 한성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 상하이에는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4월 8일 국내에서 강대현이 가지고 온 ‘임시정부안’을 기초로 하여,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조직을 상하이의 인사들에게 알렸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오히려 황옥(黃鈺)과의 관계로 인해 밀정으로 몰리는 곤경을 당하였다. 황옥은 일제 경찰의 경시(警視)로 근무하면서 상하이행을 주선해 준 인물이었다. 4월 30일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8일에는 법제위원장을 맡았다. 9월 11일 노령·한성·상하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었지만, 각료들이 취임하지 않자 국무총리 이동휘(李東輝)를 찾아가 조속한 취임을 촉구하였다.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8월에는 대태평양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이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서재필(徐載弼)을 참석대표로 선출하는 한편, 국내에서 각 사회단체와 지역 대표자 372명의 서명을 받아 「한국민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글(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을 보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에서는 한국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2년 4월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22년 8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할 때, 양측 인사들을 만나 타협을 도모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지만, 임시의정원 의원의 자격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좌절되었다. 1924년 4월 법무총장을 사임하고 전장(鎭江)으로 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은거하면서 임시정부가 쇠퇴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통분과 절망」이란 글을 작성하였고, 『독립신문』에 ‘대중아! 모여라’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핵심 내용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루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일정한 주의(主義)와 정강(政綱)을 마련할 것’과 ‘희생과 복종’이 요구된다고 역설하였다. 1926년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이 되었다. 국무령으로서 추진해나갈 시정방침으로 3대 정강을 제시하고, 내각을 구성하여 무정부 상태를 수습하였다. 3대 정강의 핵심은 전민족이 단결한 정당(政黨)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방침하에 최창식(내무)·이유필(재무)·김응섭(군무)·조상섭(사법)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무령으로 취임한 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전민족이 대단결한 정당을 조직하자는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8일 안창호는 삼일당(三一堂)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민족이 대단결한 혁명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운동은 상하이에서 시작되어 베이징·만주 등 각지로 퍼져 나갔다. 유일당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조직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우선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산주의 세력의 대표자인 홍남표(洪南杓) 등을 만나 유일당 결성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상해촉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베이징(北京)·광둥(廣東)·우한(武漢)·난징(南京) 등지에서도 촉성회가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중국 관내의 5개 촉성회가 연합을 이루어 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유일당운동은 급진전되었다. 관내촉성회가 결성된 후, 1928년 1월 만주 지린(吉林)에 도착하여 각 단체의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유일당 결성을 종용하였다.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유일당 조직을 협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열렸지만, 기존의 단체를 연합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과 기존의 단체는 해체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하자는 개인본위조직론 등 방법론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1929년 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창현(五常縣)에서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고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생육사는 지청천(池靑天)·황학수(黃學秀)·이장녕(李章寧)·김좌진(金佐鎭) 등과 더불어 북만주 일대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를 위해 농지를 매수하여 북만주 일대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이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1930년 7월 지린성 웨이허현(韋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지청천·박관해·신숙(申肅) 등과 함께 민족주의 세력이 대결집하여 조직한 것이다. 같은 시기 남만주지역에서는 조선혁명당이 결성됨으로써 만주지역은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재편이 이루어졌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으로서 북만주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지도자 위치에 올랐다.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당군(黨軍)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자 당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선임하여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1월과 12월 남대관(南大觀)·신숙·지청천 등으로 하여금 중국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護路軍)과 한·중 연합을 도모토록 하고, 이들과 연합하여 서란현 쌍성보 등에서 항일전을 펼쳤다. 1932년 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연석회의를 열고, 당과 군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만주지역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동 중 길림구국군의 차이스롱(柴蔡世榮)·우이청(吳義成)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군(中韓聯合討軍)을 결성하고, 경박호(鏡泊湖)·동경성(東京城)·대전자령(大甸子嶺) 등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10월 연합을 이루었던 길림구국군의 우이청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산시(山市)역 부근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김구로부터 중국 관내지역으로의 이동 제의를 받고, 1933년 11월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함께 베이징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4년 2월 난징에서 신익희(申翼熙)의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에 신한독립당 대표로 참여하여 통일문제를 협의하였다. 1935년 7월 5일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 등과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검사위원이 되었다. 두 달여만인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7월 난징에서 한국국민당의 송병조(宋秉祚)와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을 만나 3당이 협력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8월 17일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미주지역 6개 단체를 참여시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해오자 피난길에 올랐다. 임시정부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가, 광저우(廣州)·류저우(柳州)를 거쳐 1939년 5월 치장(綦江)에 도착하였다. 8월 치장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로 7당통일회의에 참석하고, 10월에는 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3당 통일을 추진하였다. 1939년 10월 1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고, 10월 25일 내무장에 임명되었다. 11월 5일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불겸직 원칙에 따라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5월 9일 우익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총사령부성립전례식에서 정부대표로 훈사를 하였다. 10월 8일 김구 주석 체제가 성립되면서 송병조와 함께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되어 세 번째로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하자 약헌개정위원회(約憲修改委員會)를 조직하여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고, 1944년 4월 임시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43년 5월 8일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10일 충칭(重慶)에 있던 각 정당 및 한인들이 모여 재중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할 때, 주석단 총주석에 선출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결의안」·「동맹국 원수들에게 보내는 전문」 등을 채택하였다. 1944년 1월 3일 임시의정원 부의장 최동오(崔東旿)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무위원 선출 방식을 위한 투표에서 여야 동수가 되었을 때, 의장으로 야당측이 주장하는 무기명투표안에 찬성하였던 사건을 계기로 탈당한 것이다. 헌법개정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야의 대립을 수습하고, 4월 20일 헌법개정안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좌우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6일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이 취임할 때 임시의정원 의장 자격으로 취임선서를 받았다.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유동열(柳東說)·김붕준(金朋濬)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신한민주당은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다. 2월 28일 제37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고, 정부측에서 요구한 「대독일선전요구안(對德宣戰要求案)」을 통과시켰다.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의장으로 정부의 각원과 의원들에게 ‘행동’과 ‘희생’의 길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신한민주당의 안으로 의정원 의장·임시정부 주석·광복군 총사령이 주체가 되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추진하자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안을 제출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충칭에서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항복에 따른 향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8월 17일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화평공제(和平共濟)의 새 정신’으로 당면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회의에서 야당측이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하고, 이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다가 회의는 종결되고 말았다. 1945년 11월 5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주석·부주석 등 제1진이 국내로 출발한 후, 12월 1일 제2진으로 조성환(曺成煥)·황학수·조소앙 등 22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폭설로 인해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이튿날인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6년 2월 1일 명동천주교회당에서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으로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던 중 심장천식으로 입원하여, 1946년 9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한성정부 수립,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1921년 임시의정원 의장, 대태평양외교후원회 간사장, 1922년 임시정부 법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 추진, 1929년 생육사 조직, 1930년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장 임명, 1934년 난징에서 신한독립당 창당, 1935년 한국독립당 재건, 1939년 임시의정원 의장 및 임시정부 내무장, 1940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1942년 임시의정원 의장, 1943년 재중자유한인대회 총주석, 1945년 신한민주당 창당</activities>
<engagedEvents>이완용피습사건</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한성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생육사, 한국독립당(만주), 신한독립당, 한국독립당(충칭), 신한민주당</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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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탕지야오(당계요)</name>
<nameHanja>唐繼堯</nameHanja>
<movementFamily>독립운동지원</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68)</orders>
<addressBirth>외국 중국</addressBirth>
<aliases>당계요</aliases>
<bornDied>1883. 8. 14 ~ 1927. 5. 24</bornDied>
<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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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1883년 8월 14일 중국 윈난성(雲南省) 후이저현(會澤縣)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사숙(私塾)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904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東京) 신부(振武)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8월, 쑨원(孫文)이 도쿄에서 조직한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몇몇 사람과 함께 육군단(陸軍團)과 무학사(武學社)를 조직하였다. 그해 11월 일본정부가 한중유학생들을 단속하는 규칙을 제정하자 다수의 중국 유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는 취지로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였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1906년 신부(振武)학교를 졸업한 후 카나자와(金澤)의 제9사단 포병연대 견습생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제6기로 졸업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윈난독련공소(雲南督練公所) 제조(提調), 강무당(講武堂) 교관·감독, 신군(新軍) 제19진 참모관, 74표(標) 제1영(營) 관대(管帶)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윈난의 동맹회원들은 리홍시양(李鴻祥)과 집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10월 30일 차이어(蔡鍔)·리건위안(李根源)과 함께 윈난 독서(督署)를 공격하고, 이튿날 쿤밍(昆明) 봉기에 성공하여 성 전체를 광복하였다. 이후 대한운남군도독부(大漢雲南軍都督府)가 조직되어 군정부·참모부 양부의 차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 1월 북벌군사령으로 전군(滇軍)을 이끌고 출병하여 1912년 3월 초, 구이양(貴陽)을 점령하고, 5월 구이저우성(貴州省) 도독에 임명되었다. 1913년 7월 장시성(江西省)의 리러쥔(李熱鈞)이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반대하여 독립을 선포하자, 8월에 쓰촨군(四川軍) 제5사 사단장 겸 충칭진수사(重慶鎭守使) 슝커우(熊克武)가 호응하였다. 이 때 전검연군(滇黔聯軍) 사령관에 임명되어 슝커우를 평정하는 공을 세우게 되었다. 1913년 10월, 윈난도독 겸 민정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양춘쿠이(楊春魁)가 다리(大理)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진압하였다. 1914년 개무장군(開武將軍) 겸 윈난 순안사(巡按使)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독리군무(督理軍務)가 되었다. 1915년 10월 위안스카이로부터 일등개무후(一等開武侯)의 작위와 함께 매월 3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위안스카이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지만 제제운동(帝制運動)이 시작되고 전국적으로 반원운동(反袁運動)이 거세지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1915년 12월 쿤밍으로 돌아온 차이어와 함께 반원호국(反袁護國)전쟁을 일으켜 윈난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討袁)을 위한 호국군을 조직하였다. 본래 토원운동은 쑨원이 시작한 것으로 호국전쟁과 성격이 같았기 때문에 혁명파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호국운동은 빠르게 발전하여 1916년 3월 22일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였다. 5월 8일 윈난·구이저우·광둥·광시·저장 다섯 성이 연합으로 광둥 자오칭(肇慶)에서 군무원을 조직하였는데 무군장(撫軍長)을 맡아 군국업무를 감독 조종하였다. 그해 7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첸춘쉔(岑春煊)·량치차오(梁啓超) 등과 함께 리위안훙의 총통 계승과 국회 회복을 조건으로 군무원의 철폐를 선언했다. 이후 북양군벌 돤치루이(段祺瑞)가 임시약법을 파괴하면서 호법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호국군은 3개 군에서 8개 군으로 확대되어 쓰촨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1911년 신해혁명부터 1916년 호국전쟁까지는 서남군벌의 잉태기라 할 수 있다. 호국전쟁 이후 전계(滇係)와 계계(桂係)를 중심으로 서남군벌이 정식 형성되었는데, 서남이란 윈난·광시(廣西)·구이저우 일대를 가리킨다. 윈난이 전(滇)으로 약칭되고 윈난군벌이었기에 ‘전계’라고 불렸으며, 광시에 기반을 둔 계계의 루룽팅(陸榮廷)과 함께 호법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8월 25일 광저우의 비상국회에서 군정부를 수립하고 쑨원을 대원수로 선출하였을 때, 루룽팅(陸榮廷)과 함께 원수로 선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18년 5월 18일, 광저우 비상국회는 서남군벌과 정학계(政學系)의 지지에 힘입어 대원수제를 총재제로 바꾸었다. 이때 루룽팅·쑨원·첸춘쉔 등 7인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남군벌은 반원운동을 계기로 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1918년 5월 충칭에서 쓰촨·윈난·구이저우·후베이·허난 5성 연합군회의를 소집하고 5성의 정국연군총사령(靖國聯軍總司令)에 취임했으며, 산시·후난·푸젠 등의 일부 군 수뇌들이 호응하자 다시 쓰촨·윈난·구이저우·후베이·후난·산시·허난·푸젠 8성연군총사령이 되었다. 1919년 11월 23일 남북화의가 진행되자 직계군벌 우페이푸(吳佩孚)와 군사밀약을 맺었고, 광둥·후난·광시·쓰촨 군벌 대표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0년 6월 1일, 폐독재병(廢督裁兵)의 여론이 거세어지자 독군 폐지를 선언한 후 폐관자치(閉關自治)를 선언했다. 그해 발생한 전천(滇川)전쟁에서 패하여 1921년 2월까지 사직을 압박받자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봄, 쑨원과 북벌을 준비하고 있던 광시·윈난 주둔군을 거액에 매수하여 윈난으로 되돌아왔다. 또한 윈난 남부의 비적(匪賊) 우쉬에셴(吳學顯)을 매수함으로써 3월에 윈난의 군정대권을 다시 장악하고, 연성자치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1일 성정부를 개조하여 민치를 실행하고 「윈난성정부 임시조직대강」을 반포하였으며 윈난성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윈난군을 5개의 건국군으로 확대 편성하고 스스로 쓰촨·윈난·구이저우·후베이·장시·허난·산시 7성의 건국연군총사령이라 불렀다. 1923년 2월, 쑨원이 광저우로 돌아와 대원수부를 세우고, 9월 북벌 참가를 촉구하며 부원수로 추천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4년 11월, 쑨원의 북상을 기회로 광둥군벌 천중밍(陳炯明)이 광저우로 진공하자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광시성 난닝(南寧)을 점령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후 3월 18일 윈난에서 부원수직에 취임한다고 통보하였다. 광저우정부가 이를 질책하며 토벌에 나서자 5월 홍콩대표와 비밀리에 광저우정부의 전복을 모의하였다. 6월 광저우정부가 먼저 광둥에 있던 윈난·광시군 수만 명을 괴멸시키고 8월에는 난닝·류저우의 윈난군까지 패퇴시켰다. 윈난은 해마다 계속된 전쟁으로 가렴잡세와 지폐 남발이 끊이지 않아 1926년 8월,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북벌군이 연승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우페이푸·쑨촨팡(孫傳芳)과 연대하여 ‘반공과 공산당 토벌’을 내세운 민치당(民治黨)을 조직하였다. 1927년 북벌군이 중국의 절반을 석권하면서 전계의 군벌통치도 붕괴되었다. 그의 부하였던 롱윈(龍雲)·후뤄위(胡若愚) 등 4인이 2월 6일 독재와 전제를 비난하며 군사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민치당이 해산되고 유명무실한 성무위원회 총재에 추대되었다가 1927년 5월 23일 쿤밍에서 사망하였다.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신해혁명 이후 보수세력의 집권, 특히 군벌들의 할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군벌의 공통된 속성은 투철한 국가관이나 정치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무력을 배경으로 사적인 목적을 추구할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제국주의와 손잡고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따라서 중국군벌이 한국독립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군벌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일본 유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정부의 한중유학생 규제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귀국 길에 한국을 경유하면서 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울을 경유하면서 “거리를 거니는 학생을 보니 모두 생기가 있고 활발하고 영준하고 유능하여 결코 망국인 같지 않았다”라고 보았다. 이후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망국민이 아니다. 반드시 조만간 구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국독립지사들과의 직접 접촉은 반원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중국 혁명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한국의 인물은 신규식(申圭植)이었다. 신규식은 상하이(上海)에서 활약하고 있던 천치메이(陳其美)와 함께 토원운동에 직접 참가하였다. 이 때 두 사람의 접촉이 이루어졌으며, 그 관계는 대단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신규식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왔다.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범석(李範奭)이 다음 해 신규식의 추천으로 윈난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때 이범석과 동행한 인물로 배달무(襄達武)·김정(金鼎)·김세준(金世唆)·최진(崔震) 등이 있었다. 이범석은 1919년 제12기로 포병과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신규식의 지시에 따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범석이 윈난에서 받은 군사훈련은 청산리전투에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신규식과의 관계는 김홍일(金弘壹)의 회고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홍일이 군관학교에 들어갈 길을 모색하던 중 구이저우독군 뤼시엔스(劉顯世)의 아들 뤼강우(劉剛吾)의 추천으로 천다쥔(陳大均)과 함께 어렵게 구이저우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광저우에 들렸는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을 방문하였다. 신규식은 며칠 후 김홍일에게 구이저우군관학교는 너무 교통이 불편하니 윈난의 육군강무학교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했다고 한다. 김홍일은 뤼시엔스의 관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신규식과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결의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을 쑨원의 호법정부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광저우로 가던 길에 신규식이 홍콩을 경유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재회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별한지 오래 되었으며 지금 홍콩에서 만나니 퍽이나 유쾌하다는 말로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물어보면서 “만일 윈난으로 돌아가면 한국을 위하여 최소한도 2개 사단의 군관인재를 양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윈난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당시 중국군벌들 가운데 가장 열렬히 한국독립을 지원해 주었는데, 특히 한국의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여 주었다. 윈난 강무당 출신의 한인들이 만주지역의 독립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한국인 군사인재 양성을 통한 한국 독립운동 지원</activities>
<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민국임시정부, 윈난육군강무학교</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외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박동활</name>
<nameHanja>朴東活</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경북 영덕(盈德)</addressBirth>
<aliases>자 : 한백(漢伯), 이명 : 재한(載漢)</aliases>
<bornDied>1891. 12. 29 ~ 1942. 3. 15</bornDied>
<placeOfOrigin>영해(寧海)</placeOfOrigin>
<references>「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7. 11.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9. 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2. ; 윤보현, 『경북판 독립운동실록』, 1974.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 1운동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경북독립운동사』 Ⅲ, 경상북도, 2013.</references>
<content>1891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부곡동(釜谷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한백(漢伯), 이명으로 재한(載漢)을 사용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영해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金世榮)의 권유에 따라 기독교인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이 계획하였다. 권태원·정규하 등의 권유를 받고 남교문(南敎文)·신상문(申相文)·김탁이(金卓伊)·남응하(南應夏) 등과 함께 3월 18일 오후 1시 영해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영해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스즈키를 비롯한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또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과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을 비롯한 순사, 순사보 4명을 때리고, 본서로 돌아가는 이들을 추격하여 응징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9일 아침부터 지역민 7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경 영덕경찰서의 응원 요청을 받은 포항헌병대 분대장이 헌병 6명을 이끌고 영해에 도착하였으며, 오후 5시경에는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장교 이하 17명이 영해에 도착하였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해산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군중은 해산을 거부하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일제 군경은 공포탄을 발사하였고, 곧이어 실탄을 발포하며 무력 진압을 자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임창목(林昌穆) 등 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남효량(南孝樑) 등 1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일제는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영덕을 비롯한 영해·병곡·창수·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다수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하자, 1930년경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영해면 만세시위</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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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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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최석순</name>
<nameHanja>崔碩淳</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95)</orders>
<addressBirth>미상</addressBirth>
<aliases>강기수(康記守), 필성공(必成功)</aliases>
<bornDied>미상 ~ 1925. 2. 25</bornDied>
<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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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자료의 한계로 출신지와 출생일자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생 최석준(崔錫濬, 이명 : 崔錫俊)의 본적이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군내면(郡內面) 대대동(大垈洞)으로 되어 있어 이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연도는 동생의 출생연도인 1891년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호는 백순(白淳)이며, 이명은 강기수(康記守)·필성공(必成功)이다. 1919년 만세운동 때 동생과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생 최석준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귀향하여 고향 삭주와 인근 창성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주도하거나 참여한 정확한 장소와 일시는 알 수 없으나, 삭주에서는 3월 5일부터 5월까지 각지에서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된 바 있다. 일제 정보문서에 1919년 4월 3일 중국 지안현(輯安縣) 서취보(西聚堡) 화전자(花甸子)에 거주하는 예수교도 최석준 등이 한족회(韓族會)의 결성을 계획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형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곧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최석준은 192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조직에 참여하여 삭주군 경감(警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남만주지역 무장투쟁 단체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2년 상하이(上海)의 임시정부를 다녀오다 안둥(安東)에서 일제에 붙잡혀 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11월 14일 동지 이호영(李浩英)이 고문당하는데 분개하여 일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던 중 일제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만주로 건너간 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여 집서지단장(輯西支團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남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보약사(保約社)·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와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조직한 복벽주의 계열의 무장투쟁 단체였다.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으로 의병 출신들이 주도하였는데, 회원은 756명에 이르렀다. 최석순은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의 남만촉성회 주비위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개편과 최고기관의 조직과 운영,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촉구하였다. 1922년 1월경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 등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는데, 문호개방을 천명하고 다른 단체 의 가입을 권유하여, 1922년 8월 23일 이른바 8단(團) 9회(會) 대표 71명이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개편하였다. 대한독립단원으로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여 의용군 제2중대장에 선임되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아래 5개 중대와 유격중대와 헌병대의 독립소대가 소속되었다. 제1중대는 중대장 백광운(白狂雲) 휘하에 서로군정서 계열의 100명(전성기 800~900명), 제2중대는 중대장 휘하에 대한독립단 계열의 130명(전성기 600~700명), 제3중대는 중대장 최시흥(崔時興) 휘하에 천마산대(天魔山隊) 계열로 국내 진공작전을 주된 임무로 하며 병력은 미상(전성기 500~600명), 제4중대는 중대장 홍기주(洪基柱) 휘하에 대한독립단 계열의 50명(전성기 500명), 제5중대는 중대장 김명봉(金鳴鳳) 휘하에 의병 계열의 120명(전성기 500명)으로 구성되었다. 5개 중대 구성원은 계열이 달랐기 때문에 이념도 같지 않았다. 1922년 10월 14일, 복벽계와 공화계가 충돌하는 ‘서간도사변(西間島事變)’ 발생 이후 박장호·채상덕 등 복벽계가 이탈하여 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이탈에 참여하지 않고 잔류하였다. 1923년 12월 초, 2중대 소속 20여 명을 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북 초산과 벽동군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귀환하였다. 다시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2중대는 압록강을 건너 추격해 온 일본군 80여 명의 포위 공격을 받아 용맹하게 분전하였으나, 백낙원(白洛元)과 김관빈(金官賓)이 전사하였다. 의병 계열의 의군부의 이탈과 분립 이후, 통의부 의용군은 제1중대장 백광운 등이 나서 임시정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결과, 1924년 4월 남만주지역 군인 대표 78명이 서명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에서 임시정부는 전 민족의 대동 통일적인 최고기관이므로 대한의 군민(軍民)으로 전 민족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공고케 해야 하며 임시정부 군무부 하에 원수인 적을 격퇴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5월 임시정부 주만육군참의부(駐滿陸軍參議府)가 조직되었는데 군인 대표 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용군 중대(제1·2·3·5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의 참의부가 조직될 때 참여하였다. 참의부에서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24년 5월 19일, 휘하인 참의부 의용군 제2중대 1소대 장창헌(張昌憲) 이하 대원 8명이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時灘)에서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일대 국경지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 사이토(齋藤實) 일행의 배를 기습 공격하였다. 사이토가 탄 배는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대응도 못하고 도주했던 일은 국내와 일본 언론에 보도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참의부 내의 갈등으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이던 백광운이 이해 겨울 문학빈(文學彬)의 부하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 등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참의부가 직면한 큰 위기를 참의장 겸 제2중대장을 맡아서 수습하였다. 이 시기 제2중대 휘하의 제1소대 2분대장 김창화(金昌化)와 부대원 7명은 평북 후창군 우항령에서 일제 경찰과 접전 끝에 적 1명을 사살하고 다른 1명에게는 중상을 입혔고, 후창군 성천면 내동의 영림창을 습격하여 소각하는 전과도 거두었다. 이해 7월에는 조응건(趙應建)·김만성(金萬成)·박영진(朴永鎭)·김봉서(金鳳瑞)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북 초산에 진입하여, 밀정으로 악명 높던 이갑정(李甲廷)의 집을 소각하고 귀환하는 등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1925년 2월, 부대원을 이끌고 압록강에서 60여리 떨어진 산악지대로 비교적 안전한 중국 지안현 고마령(古馬嶺)으로 이동하고 향후 투쟁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열었다. 전창희(田昌禧)·최항신(崔恒信) 등 60여 명이 참석하여 5, 6일간 회의가 계속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조선총독부는 초산수비대 120여 명과, 경찰대 65명을 합동 출동시켰다. 일본군 수비대는 월경할 경우 국제문제가 되기 때문에 압록강 북안에 대기하였고,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 등 경찰대가 6개 분대로 나뉘어 2월 24일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25일 새벽 1시경,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일제 경찰은 먼저 고마령 골짜기에 있는 참의부 통신기관장 김명준(金明俊)을 체포해 회의장을 급습한 것이다. 고마령의 회의장에 있던 참의부원 6명의 대원이 전사하였고, 소대장 전창희·최항신 등과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으나 회의장에 있던 참의부 독립군과 함께 사망하였다. 참의부는 물론 만주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참사로, 참의부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전사했던 ‘고마령참변’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3·1운동 이후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집서지단장으로 활동, 1922년 8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장, 1924년 참의부 참의장겸 제2중대장으로 활동</activities>
<engagedEvents>고마령참변</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참의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이승희</name>
<nameHanja>李承熙</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77)</orders>
<addressBirth>경북 성주(星州)</addressBirth>
<aliases>자 : 계도(啓道), 호 : 강재(剛齋), 한계(韓溪) 개명 : 대하(大夏)</aliases>
<bornDied>1847. 2. 19 ~ 1916. 2. 27</bornDied>
<placeOfOrigin>성산(星山)</placeOfOrigin>
<references>琴章泰, 「韓溪 李承熙의 生涯와 活動」, 『韓國近代의 儒敎思想』, 서울대학교, 1990. ; 김기승, 「만주·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과 대동사회 건설 구상-」, 『한주학파의 학맥과 민족운동』,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0. 8. ; 權大雄, 「韓末 寒洲學派의 啓蒙運動」, 『대동문화연구』 제38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1. ; 권대웅, 「한계 이승희의 생애와 독립운동」, 『이승희선열공훈선양 학술강연회』,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06. ; 이윤갑, 「한말 일제초기 이승희의 민족운동」, 『인문학연구』 47, 계명대학교, 2013.</references>
<content>1847년 2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대포리(大浦里)에서 아버지 한주(寒洲) 이진상(李震相)과 어머니 흥양이씨(興陽李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계도(啓道), 호는 젊어서 강재(剛齋)라 하였고 장년에 대계(大溪)라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건너간 뒤 1909년 겨울부터 한계(韓溪)로 다시 고쳤으며, 이름도 대하(大夏)로 고쳤다. 성산이씨는 성주의 대표적 사족 가문으로 조선 말기 종조부 응와(凝窩) 이원조(李源祚)와 한주 이진상이 출현함으로써 영남지방에서 우뚝한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고, 주리세가(主理世家)의 명망을 얻었다. 특히 이진상은 주희(朱熹)와 이황(李滉)의 성리학(性理學)을 계승하여 영남 서부지역에서 독자적인 학통을 형성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종장이 되었다. 5세부터 아버지의 지도 아래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행동 또한 엄중히 하였다. 스스로가 “남들이 너무 강경하다고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16세에 여강 이씨(驪江李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나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27세에 전의 이씨(全義李氏) 이언회(李彦會)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딸 하나와 두 아들 기원(基元)과 기인(基仁)을 두었다. 1864년 18세에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시행된 정시(庭試) 경과동당시(慶科東堂試)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으로 뽑혔고, 그 후 향시(鄕試)에도 여러 번 합격하였다. 19세에 종조부 이원조가 주강(主講)한 회연서원(檜淵書院)의 강회에 참석하여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부자가 한 방에 거처하면서 강학토론(講學討論)에 몰두하였으며, 부친의 문하를 출입하던 후산(后山) 허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동문들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였다. 1867년 성학(聖學)·호적(戶籍)·전제(田制)·선거(選擧)·제병(制兵)의 5조목(五條目)으로 이루어진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시국대책문을 흥선대원군에게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 정관응(鄭觀應)의 『이언(易言)』과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척사론적 입장에서 비판하여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특히 1882년 1월 이만손(李晩孫)을 소수(疏首)로 한 영남유생들이 『조선책략』에 대한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기 위해 상주의 산양(山陽)에 모였을 때,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조선이 처한 대내외의 위기를 역설하였다. 1879년 동문 홍와(弘窩) 이두훈(李斗勳), 면와(勉窩) 이덕후(李德厚) 등과 함께 정시에 응시하였다. 1882년에는 과거에 응시하려다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정부가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영재(寧齋) 이건창(李建昌)이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리고 1886년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뒤 동문 허유(許愈)·곽종석·윤주하(尹冑夏) 등과 함께 부친 이진상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종조부 이원조와 부친 이진상의 가학을 승계하여 한주학파의 적통을 계승하였다. 부친 이진상의 영향을 받아 현실을 직시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 입장에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견지하였다.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극력 옹호하면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향약 시행에 힘을 기울였다. 1883년 빈부 차이에서 비롯된 동족 마을의 내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포의사계(大浦義社契)를 결성하였다. 그 뒤 이진상이 만든 성주향약을 시세의 변화에 맞게 보완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윤리규범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한편,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의제(代議制) 등 행정제도에 관해서만 우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대개 부정적이었다. 서양 학문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비판한 『태서격물설변(泰西格物說辨)』(1892)과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상제설(上帝說)을 비판하는 『위군상제비태극론변(韋君上帝非太極論辨)』(1902) 등을 저술하였다. 동학이 1892년 삼례집회(參禮集會)와 1893년 보은집회(報恩集會)를 거치면서 교세를 삼남지방으로 확장하자, 1893년 양호선무사(兩湖宣撫使)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을 대신하여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지었다. 이 통유문에서 동학을 “유불선(儒彿仙) 3교의 합일(合一)은 유교의 도덕률을 파괴하는 이단(異端), 서학과 같은 사설(邪說), 그리고 무부무군지교(無父無君之敎)”로 동학교도는 “황건적(黃巾賊)과 백련교(白蓮敎) 같이 반역을 도모하는 비류(匪類)”로 보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동문들과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곽종석의 반대로 그만둔 뒤 외교적인 방안을 통해 국권회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곽종석·장완상(張完相)·강구상(姜龜相)·이두훈(李斗勳) 등과 함께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이토일본국사통고천하각국공관문(以討日本國事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1897년 8월 『한주선생문집(寒洲先生文集)』이 도산서원에서 반송되었고, 상주 도남서원에서는 불태워졌다. 이진상의 심즉이설(心卽理說)이 퇴계의 이발기발설(理發氣發說)과 상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곽종석과 함께 이를 반박하고 해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5년 8월 국가의 실정을 통탄하는 『의진시사소(擬陳時事疏)』를 올려 과감한 내정개혁을 촉구하였다.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勒約疏)』를 올렸다. 그리고 『유일국신민조(諭一國臣民詔)』, 『투일본사령부문(投日本司令府文)』 등을 주한일본군사령부에 보내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12월 25일 대구경무서에 구속되어 문초를 받았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나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고 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꾸짖는 편지를 썼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이토를 “천하강상지적(天下綱常之賊)”으로 지목하였다. 1906년 4월 7일 출옥하였다. 1907년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대구에서 발기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3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자는 통문을 향중에 발의하고 (음)3월 19일 성주장날 모임을 가지기로 하였다. 배우홍(裵遇鴻) 등과 함께 발기하여 1907년 (음)3월 20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星州郡義務所國債報償趣旨書)』에서 헌금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강조하였다. 회갑연에 쓸 20원을 의연금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또 경남지역 국채보상회(慶南地域國債報償會) 회장으로 추대되어 경남지방에 호소하는 통문을 지어 발표하였다. 그 외 향약의 조직 원리를 변용한 국채보상회 조직의 규칙을 만들었으며, 『통유국채의무회인민문(通諭國債義務會人民文)』을 지어 전국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죄상을 알리고 이를 심판할 것을 호소하는 『여화란국해아만국평화회중서(與和蘭國海牙萬國平和會中書)』를 지었다. 일본이 특사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압박하자 『이해아변무사통고만국정부문(以海牙辨誣事通告萬國政府文)』을 지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이덕후(李德厚)·정인하(鄭寅夏)·이수인(李洙仁) 등 동문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1908년 5월 18일 성주를 출발, 6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도착하여 감리(監理) 김치보(金致甫)의 집에 투숙하였다. 1909년 여름 보재(溥齋) 이상설(李相卨)을 만났다. 당시 이상설은 헤이그(Hague)에서 이준(李儁)이 순국한 뒤 모스크바(Moscow)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일 만나서 명리(名理)와 시사(時事)에 관하여 대담하였는데, 이상설의 박식함과 애국 애족하는 마음에 크게 감명 받았다.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만국대동의원사의(萬國大同議院私議)』를 저술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할 후보지를 물색하고 그곳의 토지를 사들이기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이수인을 국내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공동출자 회사인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林野株式會社)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 이상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한인의 집단 정착지를 물색한 결과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에 있는 싱카이호(興凱湖) 주변을 주목하여 중국 쪽의 미산부(密山府) 봉밀산(蜂蜜山) 지역으로 결정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0리가 넘는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1909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면밀히 답사하였다. 1909년 겨울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의 기름진 터를 골라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을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여 1백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키면서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고 하였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 하였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마을의 규약인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한흥동에서 실시한 민약은 고향 성주에서 실시했던 향약을 계승한 것이었다. 『일명(日銘)』과 『5강목(五綱目)』을 지어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암송토록 하였다. 이는 전통유교의 바탕을 잃지 않고 생활 속에서 유교 이념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강재(剛齋)라는 호를 한계(韓溪)로 고치고, 이름도 대하(大夏)로 바꾸었다. 4년 동안 한흥동에 머물며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흥동 개척은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과 권업회(勸業會)의 활동 위축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1913년 대종교도 백순(白順)과 김현(金玄) 등에게 경영권을 양도하고 서간도로 이거하였다. 1913년 미산부에서 남만주의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현(丹東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안둥현에는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대눌(大訥) 노상익(盧相益) 형제, 수파(水坡) 안효제(安孝濟) 형제 등 저명한 유생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둥현의 남쪽 접리수(接梨水)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안둥현에 도착한 후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공교회(北京孔敎會)에 편지를 보내 지회(支會)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4년 1월 5일 베이징으로 들어가 공교총회를 방문하여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공교지회(孔敎支會)로 공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고, 나아가 이문치(李文治) 등 저명한 중국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때 아들 기인(基仁)과 청도 출신의 이산(伊山) 예대희(芮大僖) 등이 곁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펑텐(奉天, 현 선양(瀋陽))의 서탑(西塔)으로 이주하여 권병문(權丙文)의 집에 머물며 김창현(金昌鉉, 고령)·권병하(權丙夏, 서울)·성종호(成鍾護, 창녕)·이계동(李啓東, 안동) 등을 만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로부터 이 지역에 개간이 가능한 황무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랴오중현(遼中縣) 덕흥보(德興堡)에 토지를 매입하여 집단농장을 설립하고, 이주 한인을 모집하여 개간과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1914년 8월 경상남도 함안 출신의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와 함께 토지 매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랴오중현 덕흥보에 약 100여 호가 생계를 유지할 만한 토지 280일경(日耕)을 매입하였다. 이 일은 시따(西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정규·이광룡·이계동·정돈섭·이우열·이성훈 등의 협조를 얻어 추진하였고 농장일은 주로 둘째 아들 기인(基仁)에게 맡겼다. 1915년 봄 이주를 위해 덕흥보로 들어갔으나 매입한 땅이 해동(解冬)되면 물바다가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계획에 함께했던 인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시따(西塔)의 일승잔(日昇棧)에 머물면서 공교회 운동에 전념하였다. 1915년 부인 전의이씨(全義李氏)와 자부 안씨(安氏), 그리고 장손 해석(海錫)이 펑텐으로 찾아와 가족이 함께 생활하였다. 1916년 2월에는 장남 기원(基元)이 국내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감기가 점점 악화되어 1916년 3월 30일 새벽 4시 70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나는 나라가 광복되지 않으면 죽더라도 일본이 지배하는 고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성주 일원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반장(返葬)을 촉구하는 편지와 전문이 쇄도하였다. 결국 ‘대한한계이선생(大韓韓溪李先生)’이란 명정을 걸고 기차 편으로 고향 성주로 운구(運柩)되었고, 5월 29일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저술로는 『한계유고(韓溪遺稿)』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895년 명성황후 시해 만행 규탄 포고문 발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투쟁, 1907년 국채보상운동 전개, 1909년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 개척, 1913년 한인공교회 창립, 1915년 랴오중현 독립운동기지 덕흥보 개척</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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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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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채상덕</name>
<nameHanja>蔡相悳</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95)</orders>
<addressBirth>황해</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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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62 ~ 1925. 4</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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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東京 : 原書房, 1967. ;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국역 고등경찰요사』, 2010). ; 『독립신문』, 1922. 9. 11, 1924. 5. 31, 1925. 5. 5. ; 『동아일보』, 1925. 2. 28, 1926. 11. 16～20.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4, 청계연구소, 1986. ; 박걸순, 「대한통의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 채영국, 「1920년대 중반 남만지역 독립군단의 정비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 박환, 「참의부 특파원 이수흥의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references>
<content>황해도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2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채상덕(蔡相德·蔡尙悳), 호는 심호(深湖)를 사용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만세운동 이후 독립군단이 재정비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 동참하였다. 남만주지역의 한인사회(韓人社會)는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질서가 붕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보민회(保民會)나 민회(民會) 등의 친일 어용조직을 파괴하고 1922년경 독립운동 기지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양대 참변을 극복하고 재기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의 독립군은 과거의 게릴라전식 투쟁을 청산하고 여러 단체를 합하여 공동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2년 1월경, 당시 서간도지역의 가장 큰 항일투쟁 단체인 한족회(韓族會) 등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는데, 서간도지역 무장투쟁계의 중추로 인정되어 대표인 총장에 선임되었다. 그 외 비서장 고할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李雄海), 군사부장 이천민(李天民), 교육부장 김동삼(金東三),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경무관 전덕원(全德元),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대한통군부 간부들은 대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간부들로 구성되었고 군사뿐만 아니라 한인의 자치행정을 담당한 군정부의 성격을 지닌다. 군정부로서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호적·교통·학교·실업·의무병·재정·구휼 등의 사항을 결의, 한인사회 내부 결속을 도모하며 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 1922년 6월 3일,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개방하고 각 다른 기관과 더불어 무조건으로 통일하되 일체 공결(公決)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천명하며, 통합 단체에의 가입을 권유하였다. 8월 23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에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관전동로 한교민단·대한광복군영·대한정의군영·대한광복군총영·평안북도독판부 등 이른바 8단 9회 대표 71명이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통의부의 총장 김동삼(金東三)에 이어 부총장에 선임되었다. 그 외 비서과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재무부장 이병기(李炳基), 교섭부장 김승만,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실업부장 변창근, 군사부장 양규열(梁奎烈), 참모부장 이천민, 사령장 김창환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대한통군부에서 대한통의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간부간의 정체 이념과 권력 분배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발생하였다. 즉, 전덕원 등 복벽계가 중앙부서 간부에서 배제되고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간부 등 공화주의 계열이 다수 간부로 선임된 것이다. 이에 의병계열의 추앙을 받고 있던 전덕원과,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양기탁의 불화가 표출되었다. 급기야는 1922년 10월 14일, 콴뎬현(寬甸縣)에 있던 양기탁 일행을 전덕원계 군인들이 습격하여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고 양기탁·고할신·현정경 등 주요간부를 포박하여 구타하는 이른바 ‘서간도사변(西間島事變)’이 일어났다. 이 불상사의 발단은 전덕원이 요직에서 배제된 데 대한 복벽계 군인들의 불만 표출에서 비롯된 것이나, 지도부 상층부간의 이념 대립이 근본적 원인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당사자인 전덕원과 양기탁이 원만한 해결에 노력하였고, 상하이(上海)에서도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남만동지에게 충고하는 편지 (忠告南滿同志書)’라는 편지와 전보 등을 보내 양측의 화해를 권유하여 무마하고자 하였다. 당시 총장대리직을 맡고 있었는데, 전덕원계 제1중대장 박일초(朴日楚)에게 양기탁 등 9인의 ‘범죄사실 심판요구 28개항’을 받았다. ‘서간도사변’을 전후한 시기, 전덕원 지지자 중 일부가 통의부 의용군에 편성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다가 1923년 2월경, 독자 노선을 천명하고 대한통의부에서 이탈하여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 대한의군부는 박장호를 총재로 하였는데,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이밖에 박일초·조대능(趙大能)·성보운(成寶運)· 계담(桂聃)·이병규·한정윤(韓鼎潤)·전덕원·김유성(金有聲)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고, 군무부장 전덕원 휘하에 사령장은 통의부 제5중대장이었던 김명봉(金鳴鳳)이 맡고 있었다. 대한의군부는 의암(毅菴) 유인석(柳麟錫)의 충의를 계승함을 천명하고 융희(隆熙) 연호를 사용하는 등 의병의 복벽주의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따르고자 하였다. 의군부는 통의부를 적대시하고 대립하였다. 그런데 1924년 현재 일제측 기록에 의하면, 의군부는 통의부에 비해 군사 규모나 무장상태 등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대한의군부의 이탈과 분립 이후, 통의부 의용군은 제1중대장 백광운 등이 나서 임시정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결과, 1924년 4월 남만주지역 군인 대표 78명이 서명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선언서에서 ‘전 민족의 대동 통일적 최고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로 모일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만육군참의부(駐滿陸軍參議府, 이하 참의부로 약칭)가 조직되었다. 결국 대한통의부의 1차 분열로 대한의군부가 이탈하였다면, 2차 분열로 참의부가 이탈하였던 것이다. 제자 이수흥(李壽興)과 함께 대한통의부에서 이탈된 참의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5년 2월 25일,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등 수많은 독립군이 일경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는 이른바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이 발생하였다. 당시 최석순은 부대원을 이끌고 압록강에서 60여리 떨어진 안전한 산악지대인 지안현(輯安縣) 고마령으로 이동하였다. 최석순은 이곳에서 5개 중대의 군사회의를 열었다. 전창희(田昌禧)·최항신(崔恒信) 등 60여 명이 참석하여 5~6일간 회의가 계속되었다. 이때 이 정보를 입수한 조선총독부는 초산수비대 120여명과, 경찰대 65명을 합동 출동시켜 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자 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월경할 경우 국제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압록강 북안(北岸)에 대기하였고,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 등 경찰대가 6개 분대로 나뉘어 2월 24일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25일 새벽 1시경,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일제 경찰은 먼저 고마령 골짜기에 있는 참의부 통신기관장 김명준(金明俊)을 체포·고문하여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고마령 정상부에 있는 두 집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참의부원은 첫 번째 집을 급습당하여 6명의 대원이 사망하였다. 이어 일제 경찰은 두 번째 집을 포위 공격하였다. 제2중대장 최석순은 소대장 전창희·최항신 등과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일제 경찰 경부보 미즈노와 순사부장 고피득을 상대로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석순을 비롯하여 수많은 참의부 독립군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살해된 참의부 독립군 숫자에 대해 일제는 42명으로, 『독립신문』은 22명으로 기록하였다. ‘고마령참변’은 참의부는 물론 만주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참사로서, 참의부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전사함으로써 전력에 일대 타격을 입었다. 고마령회의장에서 총상을 입은 채 부상당한 동지와 현장을 탈출한 이수흥에게 ‘고마령참변’의 비보를 듣고 눈물과 한숨으로 지냈다. 이수흥이 완쾌되자 ‘조선인은 단체적 훈련의 부족과 배반자의 속출로 단체적 행동’은 할 수 없는 결함이 있으므로, 안중근처럼 단독으로 거사를 하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이수흥에게 ‘퉁화현(通化縣) 이도구(二道溝) 회당촌(會堂村) 김운용(金雲用)의 집에 자신이 맡겨둔 권총 2정을 찾아 투쟁에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 살 면목이 없다면서 음독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2년 1월 대한통군부 총장으로 선임, 같은 해 8월 대한통의부 부총장으로 선임, 1924년 5월 참의부 합류</activities>
<engagedEvents>고마령참변</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통군부, 대한통의부, 참의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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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홍범도</name>
<nameHanja>洪範圖</nameHanja>
<movementFamily>만주방면</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2021)</orders>
<addressBirth>평남 양덕(陽德)</addressBirth>
<aliases>호: 여천(汝千)</aliases>
<bornDied>1868. 8. 27 ~ 1943. 10. 25</bornDied>
<placeOfOrigin>남양(南陽)</placeOfOrigin>
<references>강용권·김택, 『홍범도 장군』, 장산, 1996. ; 장세윤, 『홍범도의 생애와 독립전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김삼웅,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현암사, 2013. ; 반병률, 『홍범도장군(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한울, 2014. ;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6. ; 신용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한국학보』 제43집, 1986. ; 장석흥, 「만주 독립군의 형성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6집, 2013. ; 김주용,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과 역사적 의의」, 『한국학연구』 제32집, 2014.</references>
<content>1868년 8월 27일 평안남도 양덕(陽德)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① 평남 양덕 ② 평북 자성(慈城) ③ 평양 외성리(外城里)의 세 가지 설이 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여천(汝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년간 삼촌댁에서 살다가 부근 지주집의 머슴살이로 들어갔다. 체격이 건장하였고,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박하고 겸손하며, 신의가 있고, 의협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83~1887년 5년간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구면(水口面) 신현리(新峴里)에서 한지제지소의 수공업 노동자로 일하였다. 1887년 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평양(平壤)의 친군서영(親軍西營, 이후 평양진위대로 개칭)에 자원입대하였다. 정규 군인이 되어 사격술을 배웠다. 그러나 병졸생활은 기대한 것처럼 나라를 지키는 생활이 아니었다. 장교들의 사병에 대한 굴욕적인 학대와 부패에 놀라서 군대생활이 무의미함을 절감하고 3년간 복무한 후 그만두었다. 1891년경 함남 단천(端川)으로 가서 광산노동자가 되었다. 1893년경 삼수(三水)의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사냥꾼이 되었다. 이어서 북청군(北靑郡) 안산사(安山社)로 이사하였는데, 안산사에는 함경도 감영으로부터 공식 승인받은 산포수들이 있었다. 당시 북청군 안산사(安山社)와 안평사(安坪社) 2면의 산포수들은 통칭 ‘안산사 포계(安山社 砲契)’로 알려져 있는 동업조합을 만들어 조직화된 포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안산사 포계에 가입하여 오래지 않아 포연대장(捕捐大將)에 뽑혔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양을 정하고 이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산포수들은 빈곤했을 뿐 아니라 무기도 대부분 낡은 화승총이었으며 탄약 장비도 열악하였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포수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안산사 포계의 포연대장으로 관청에서 부과하는 세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분투하였다. 지방 관리들로부터 위협과 매수 시도를 받았으나, 완강히 투쟁하여 포수들의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동료 포수들의 신망을 얻었다. 1893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14년간 삼수·갑산(甲山)·풍산(豐山)·북청 일대에서 포수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는 홍범도의 일생에서 단 한번 단란한 가정생활을 한 시기였다. 아들 용범(龍範)과 용환(龍煥)을 두었는데, 후에 의병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용환을 제외한 부인과 용범 등 가족은 일제에 체포되어 사실상 인질로 이용되었는데, 이때 ‘귀순’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하자 모두 일제에 의해 사망하였다. 그후 용환은 홍태준(洪泰俊)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 병사를 모집하여, 아버지의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 포수생활을 시작한 직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는데, 후일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뜬 것은 동학농민운동 때였다”라고 술회하였다. 갑산에서 포수 생활을 할 무렵,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군대 해산이 있었고, 9월 7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이 공포되어,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과 사냥총까지 모두 회수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들에게 “일제가 사냥총까지 거두어 가는 것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니, 이에 응하지 말고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태양욱(太陽郁) 등 동지들과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 및 청년들 200여 명을 규합하여, 1907년 11월 함남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특징은 주로 산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였으며 당시의 의병부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의병부대였다. 그 결과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산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북청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11월 23일 갑산과 혜산진(惠山鎭) 사이에서 일본군 북청수비대가 호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였다. 놀란 일본군 북청수비대는 1개 중대를 토벌대로 파견하였는데, 11월 24일 후치령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섬멸하였다. 이 전투 후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2월 15일 갑산과 북청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일본군의 군용 물자 수송대를 습격하여 물자를 노획하고 수송병들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북청수비대와 함흥수비대가 합동으로 ‘토벌대’를 구성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휘하 의병부대를 차도선(車道善) 의병부대와 통합하여 병력을 400여 명으로 증가시켰으며, 12월 3일 중평장(仲坪場)에서 3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을 혜산진으로 패주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당시 전국 의병부대들 중에서 홍범도 부대가 최강임을 재확인하고, 북청·함흥(咸興)·성진(城津)의 3개 수비대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1개 기병 소대까지 포함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진을 치고 있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 대부대에 맞대응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유격전법을 택하였다. 삼수에는 1개 소대만 남겨 두고 일본군 토벌대대를 삼수에 묶어 둔 채, 1908년 1월 10일 의병부대 본대가 갑산읍을 기습하여 9시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 갑산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우체국 등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갑산읍을 점령한 후 가급적 전면전을 피하고, 주로 이원(利原)·단천·풍산·갑산·혜산진 일대의 산악 지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기동성이 매우 뛰어나 일본군은 결코 홍범도 의병부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일제는 군사 행동만으로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의 이름을 빌리고 관리를 보내어 선무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08년 3월 27일 홍범도의 동지 차도선이 직계 부하들을 데리고 귀순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1910년 무렵 탄약이 고갈되어 더 이상 국내에서 싸우기가 어렵게 되자, 그해 3월 소수의 부하 의병들을 데리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동하였다. 1911년 3월 부장(副將)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선발대가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경원수비대를 섬멸시켰다. 하지만 이 전투 후 탄약 고갈로 의병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는 해산하였다. 1913년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회(勞動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만세운동이 간도에도 파급되었다. 이 무렵 만세운동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독립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1일자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홍범도가 독립군을 조직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총기를 구입하고 있다”라고 보고되었다. 그해 5월 북간도에서 의병출신들과 간도 및 노령의 한국 청년 및 산포수들을 모아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였다. 초창기 대원은 약 200명이었다. 같은 해 8월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국내 진입작전을 단행하여 일본군 혜산진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입작전 중 최초의 사례였다. 같은 해 9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 헌병 금정주재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다. 10월 평안북도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였으며,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명을 처단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사원으로 오동진(吳東鎭)·김응식(金應植) 등을 파견하여 이 승리를 확인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최초 국내 진공작전의 승전은 만세운동의 성과를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간도와 노령 일대에는 독립군단이 속출하였고,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19년 겨울 두만강과 압록강(鴨綠江)이 얼어붙자 독립군 부대들이 이듬해 봄까지 끊임없이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용감히 잘 싸우는 독립군이었으나, 무기와 병참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하여 1919년 12월 간도의 교민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로 들어갔다. 당시 대한국민회는 직할군대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운용하였다. 대한국민회의 지원으로 대한독립군은 무기도 더욱 충실해지고 병력도 300명으로 증가되었다. 1920년 5월 대한독립군은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편성하였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의 북로사령부장을 맡았다. 이 연합의 결과로 약 1,000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鳳梧洞)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국내에 진입한 신민단(新民團)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해 온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까지 들어왔다. 이때 주민을 철수시키고 독립군을 매복시켰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분지에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를 포위 공격하여 157명을 처단하고 200명을 부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군에게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독립군과 중국군이 타협하여 근거지를 산악의 밀림 지대로 이동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김좌진(金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은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의군부(義軍府)·한민회군(韓民會軍)·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신민단 등의 독립군부대들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이 주둔하는 이도구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제20사단·제11사단·제13사단·제14사단에서 차출한 25,000명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간도를 침공하였다. 이 중 아즈마(東) 지대(支隊)가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처하여 이도구에 모인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군·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이때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연합부대의 실제 전투 병력은 약 1,400명이었다. 한편 삼도구 청산리에 주둔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여 명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일본군 300여 명을 처단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범석(李範錫)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연성대(硏成隊)가 특히 큰 전공을 세웠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였다가 천수평(泉水坪)에서 일본군 기병대 전초 중대 120명을 섬멸하였다. 10월 21일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직접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고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 아즈마지대 본대 수백 명을 처단하였다. 이후 어랑촌 서남단 고지에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교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0월 22일 아침부터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서 김좌진 부대 600명과 홍범도 부대 1,400명 등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아즈마지대 5,000여 명이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교전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청산리에서 10여 차례 교전하여 승전을 거두었다. 독립군 130명이 사망하였으며, 일본군 1,200명을 처단하였다. 청산리 대첩 이후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1920년 12월 밀산(密山)에 모였고, 1921년 6월 헤이루장(黑龍江)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가, 자유시 알렉세에스크에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당하였다.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자유시에 모인 한국독립군 부대들을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소속시키고, 사령관에 가란달라시윌린을 임명하였다. 7월 5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8월 5일 자유시의 모든 한국인 군대는 이르쿠츠크로 수송되었으며, 이때 동료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그해 8월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폐지하고 한국인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관할하의 한족여단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다른 노병들과 함께 모스크바 관광에 보내졌다. 1922년 전반기 약간 명의 옛 부하들과 함께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돌아갔다.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이동휘(李東輝)·문창범(文昌範) 등과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였으며, 그해 9월 1일 치타에서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모스크바정부의 외교교섭으로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그해 12월 30일 스탈린 정부는 제1회 전연방 소비에트대회를 열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출범시켰으며, 이때 연해주도 통치구역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소련 영토 내에서 한국인의 무장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1923~24년경부터 이만에서 옛 부하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군의 재기 기회를 기다리다가, 1926년경 중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20~30만의 한국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현재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지방에 정착하여 집단농장을 개척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정규군으로 참전을 자원했다가 거절당하였다. 자신이 싸울 힘과 유연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25m 떨어진 거리에서 동전을 명중시켰다. 이 무렵 크질오르다에서 활동하던 소련 한인극단을 찾아가 연극 극단의 물품 돌보는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극단의 희곡작가 태장춘은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희곡 ‘홍범도’를 창작하여 소련 중앙아시아 한인극단에서 공연하였다. 희곡 창작과정에서 태장춘에게 자신의 영웅적 행동보다는 전우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사실을 본래 그대로 묘사해 주기를 주장하여, 연극에 알맞게 사실을 옮기려는 태장춘이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쳤다고 한다.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07년부터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후치령전투, 갑산읍 점령 등을 비롯하여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 1913년 독립군 활동 준비단계로 노령 연해주에서 노동회 조직, 1919년 만세운동 직후 가장 먼저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여 최초의 국내 진입작전에서 승전.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함께 승리</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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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대한독립군</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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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name>박도현</name>
<nameHanja>朴道玄</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국장(1994)</orders>
<addressBirth>전북 익산(益山)</addressBirth>
<aliases/>
<bornDied>1865. 2. 5 ~ 1919. 4. 4</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제적등본」.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이리문화원 편, 『내 고장 이리의 뿌리』, 이리문화원, 1990. ; 익산시사편찬위원회 편, 『익산시사』 中, 익산시, 2001.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 1운동 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이덕주, 「익산 4. 4 만세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 익산4. 4만세의거 81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자료, 2000.</references>
<content>1865년 2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동화리(同化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웃 마을인 덕실리(德實里)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일찍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1919년 4월 4일 익산면 이리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4년 호남선(湖南線)이 모두 개통된 이래 익산면 이리(裡里)는 철도 교통을 비롯한 호남지역 육상 교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1919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만세시위에 관한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이리 읍내에서는 3월 26일부터 산발적이지만 격렬한 만세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이를 제압하고자 일본 헌병과 보병 중대가 이리역(裡里驛) 앞에 주둔하고 있었다. 옥구(沃溝)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문용기(文鏞祺)가 이리 읍내로 와 장경춘(張京春) 등을 비롯한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이리시장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때 문용기·장경춘 등과 함께 시위를 적극적으로 준비하였다. 4월 4일 이리 읍내 장날에 다른 기독교인 300여 명과 함께 장터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조선 독립의 정당함을 역설하는 각종 격문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선두에서 시위 행진을 이끌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군중이 더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여러 사람이 방망이를 들고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 당국은 이리 읍내 소방대원들과 일본인 소유 대교농장(大橋農場)의 농장원 수 백여 명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자 출동한 일본 군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시위대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문용기·장경춘 등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광복 후인 1949년 5월 이리 군민이 뜻을 모아 만세시위가 시작된 읍내 장터에 그들을 기리는 순국열사비(殉國烈士碑)를 세웠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李承晩)이 직접 비문을 짓고 휘호를 썼다. 1971년에는 이리역 앞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가 주도한 3·1운동 유적보존운동의 일환으로 3·1운동 유적기념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시장 만세시위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익산면 만세시위</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쑨커(손과)</name>
<nameHanja>孫科</nameHanja>
<movementFamily>독립운동지원</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장(1970)</orders>
<addressBirth>외국 중국</addressBirth>
<aliases>자 : 철생(哲生)</aliases>
<bornDied>1891. 10. 20 ~ 1973. 9. 13</bornDied>
<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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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1891년 10월 20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현 중산시)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철생(哲生)이고, 쑨원(孫文)의 첫째 부인인 루무전(蘆慕貞)의 소생이다. 태어난 이듬해, 쑨원이 마카오의 경호병원에 취직되어 모친과 함께 마카오로 이주하였고 얼마 후 홍콩에 정주하였다. 1895년 겨울, 광저우(廣州)봉기에 실패한 모자를 호놀롤루(Honolulu)로 보냈고, 미국에서 쑨원의 큰형인 쑨메이(孫眉)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삼자경(三字經)』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웠으며, 12살에 천주교회가 설립한 성안동(聖安東)학당에서 공부하였다. 영민하고 성적이 우수해 8년 과정을 4년에 마치고 성 루이스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10년 3월 쑨원이 호놀룰루로 옮겨와 혁명운동을 전개할 때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자유신보』·『대성주간』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성 루이스학원을 마친 후 캘리포니아주립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에 입학하였고, 현지 화교가 창립한 『소년중국신보』의 편집에 참가하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귀국하여 혁명 선전에 몰두하였다. 1912년 7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중단된 학문을 이어갔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대학원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신문학을 부전공하며 이듬해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 8월 미국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광저우 호법군정부의 대원수부비서 겸 외교부비서를 맡았고, 이듬해 『광저우시보』를 창간하여 부주편을 맡았다. 1920년 11월 쑨원이 광저우군정부를 조직하면서 광저우 시정청장(市政廳長) 겸 치하독판(治河督辦)을 맡았다. 광저우의 첫 번째 시장으로 「광저우시조직조례」를 제정하고, 시정부에 공안·공무·재정·교육·위생·공용 6국을 개설하였다. 1922년 8월 국민당개진안기초위원회 위원을 맡아 국민당의 개조준비 작업과 새로운 당강(黨綱) 및 당장(黨章)의 입안에 참가하였다. 1923년 10월 국민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1924년 가을, 쑨원의 명령에 따라 선양(瀋陽)에서 펑계(奉系)군벌 장쭤린(張作霖)과 남북합작을 추진하고 즈계(直系)군벌의 토벌을 계획하였다. 그해 11월 북상한 쑨원이 베이징(北京)에서 간암으로 사망한 후 1925년 7월 대원수부가 국민정부로 개조되었다. 국민정부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1월 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 광둥성 정부위원 겸 건설청장에 취임하여 광저우의 도시건설을 주도하였다. 북벌군이 승리하면서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당부가 12월 우한(武漢)으로 이전하였고,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및 임시연석회의 주석단을 역임하였다. 2기 3중전회에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중앙정치위원, 군사위원회 위원과 국민정부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청년부장을 겸임하였다. 4·12정변으로 국민당의 내분이 심화되자 중앙당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당의 통일방안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7년 9월 중앙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국민정부 재정부장과 건설부장을 맡았다. 국민당의 파벌투쟁이 격렬하던 1928년 1월 후한민(胡漢民)과 함께 출국하여 유럽 각국의 정치경제상황을 고찰하면서 건국구상을 가다듬었다. 그해 6월 파리에서 미래의 중국정부는 쑨원의 구상에 따라 ‘오권(五權) 통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국(黨國) 훈정대강 및 외교처리방안」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같은 해 9월 귀국하여 「국민정부조직법」 및 「중국국민당훈정강요」의 작성에 참여하였고, 10월 국민정부가 개조된 이래 국민정부 위원, 고시원 부원장, 행정원 철도부장, 교통대학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중국의 첫 민항공사를 창립하고 사장을 역임하였다. 정치적으로 장제스(蔣介石)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졌지만 되도록 충돌을 피하며 합작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31년 2월 28일 후한민이 수감되자 국민당재조파가 결성되었고 지도자로 옹립되었다. 광둥·광시(廣西)를 기반으로 반장(反蔣)세력을 규합하여, 5월에 국민당 중앙집감위원(執監委員) 비상회의와 국민정부를 조직하고 두 조직의 상무위원을 맡았다. 양광(兩廣)세력이 장제스의 토벌을 목표로 북상하려고 할 때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였다. 전국적으로 “내전중지, 항일일치”의 여론이 고조되자 난징(南京)과 광저우 쌍방은 당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평화통일회의에서 중앙상위에 추천되었고, 행정원장을 맡아 1932년 1월 1일 취임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재정위기와 외교적 곤경을 처리할 힘이 없어 1월 25일 사직하였다. 1933년 1월 입법원장에 취임하여 헌법기초 작업을 주도하였다. 1934년 10월 입법원을 통과한 헌법안이 국민당 중앙의 수정을 거쳐 1936년 5월 5일 공포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전시상황을 이유로 헌정 실시를 미루다가 1946년 11월 국민대회에서 재수정한 헌법을 통과시켰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 중소문화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37년 8월 21일 중소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소련의 군사원조와 차관을 얻기 위해 1938년 1월과 3월, 1939년 4월 세 차례 걸쳐 소련을 방문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고, 1946년 10월 제헌국민대회 주석단, 1947년 4월 국민정부 부주석 겸 입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3월 장제스에 의해 부총통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리쭝런(李宗仁)에게 패하였다. 얼마 뒤 입법원장, 행정원장에 취임하였고, 1949년 2월 5일 행정원이 광저우로 이전하면서 3월 8일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 후 홍콩과 프랑스를 거쳐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5년 타이완에서 열린 쑨원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후 총통부 자정(資政)과 고시원 원장을 맡았다. 1967년 8월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73년 9월 13일 심장병으로 타이베이에서 생애를 마쳤다.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국민정부 입법원장과 중한문화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며 여론을 환기시켰다. 입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42년 3월 충칭(重慶)에서 국민외교협회와 동방문화협회 및 국제반침략회 중국지회 등 세 단체가 공동 주최한 한국문제강좌에서 한중관계의 역사성을 주장하며 양국의 당면과제로 대일 공동항전을 제기하였다. 구체적 방안으로 중국이 한국을 원조하여 독립운동을 촉성시키면 한국 민중은 자동적으로 봉기하여 해방을 요구하고 일제를 타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일전쟁시기 한국은 일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촉진제로 인식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이 ‘한국독립을 원조할 수 있는 방도의 하나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이라고 판단하였다. 1942년 2월 22일 ‘한국독립문제’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중국이 항일전을 전개하기 이전에는 임시정부를 승인할 힘이 없었으나 26개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는 현재로서는 그 역량이 있으므로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고 특히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한국임시정부의 23년간 혁명분투의 역사는 구주의 유망정부와는 달리 성립시 한국민족을 대표하였으며 현재까지 한국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 내에는 비록 상이한 당파가 있으나 제2의 임시정부는 없다. 미국내 수만의 한교(韓僑)는 최근에 회의를 개최하여 충칭의 한국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으며 소련의 수만 명의 한인, 동삼성의 수만 명의 한인도 또한 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의 천만 인민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나면 영국·미국도 이에 따를 것이고 소련도 이에 따라 승인을 할 것이다. 승인한 후에 한국임시정부는 역량을 키워 우리들이 도쿄로 군사를 집합할 때 저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서 부흥대업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 당위성을 밝혔다. 1942년 4월 8일 국민참정회에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제의하여 통과되었으나 당시 상황 때문에 발표되지 않았다. 1942년 7월 국민정부는 임시정부의 승인계획을 확정하고 적당한 시기가 오면 곧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국민정부의 공식 입장은 끝까지 유보적이었다. 한국과 민간차원의 외교활동도 적극적이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1942년 10월 11일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한국과 중국의 각계 인사들을 망라한 우호단체로 다과회·강연회·좌담회 등을 통해 친선도모 및 독립촉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1월 10일 개최한 한국임시의정원 의원 초대 다과회에서 ‘단결은 존망의 관건’이란 연설을 통해 “한국 혁명은 중국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 당 한 파만의 일이 아니다. 어느 한 당 한 파가 전적으로 알아서 처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당파가 일치단결하여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지금 모든 정세는 우리에게 극히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중국 항전 승리의 기회이자 한국독립의 기회이기도 하다. 한인들이 언제 어디에서든 단결을 이룰 수 있기 바란다. 절대 단결을 잊지 말라! 단결! 단결!”이라 하며 단결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캐나다 위니펙(Winnipeg)에서 열린 태평양관계토론회에 중한문화협회 회장자격으로 연합국의 조속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1944년 5월 18일 임시정부의 신임 국무위원 및 각부 수장을 위한 다과회를 직접 주재하고 단결에 기초한 신속한 국권회복을 기원하였다. 같은 해 10월 8일 중한문화협회 성립 2주년 기념식 및 회원대회에서는 “이번 세계대전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감됨으로써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각국은 속히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일작전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게 하고, 무장한 한국 인민이 중국의 반공(反攻)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연합국의 임정승인을 촉구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민간단체인 까닭에 집행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요 구성원이 대다수 한중 당·정·군의 유력인사들로 한중 유대와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 등을 통해 한중간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상호이해를 증진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content>
<activities>임시정부 승인, 한중연대 강화</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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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대한민국임시정부, 중한문화협회</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외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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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쑨원(손문)</name>
<nameHanja>孫文</nameHanja>
<movementFamily>독립운동지원</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8)</orders>
<addressBirth>외국 중국</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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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66. 11. 12 ~ 1925. 3. 12</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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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쉬프린(H. Z. Shiffrin) 저, 민두기 역, 『손문평전』, 지식산업사, 1990. ; 민두기, 『중국의 공화혁명』, 지식산업사, 1999. ; 배경한, 『쑨원과 한국』, 한울, 2007. ; 손문 저, 김승일 역, 『삼민주의』, 범우사, 2000.</references>
<content>1866년 11월 12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췌이헝촌(翠亨村)에서 태어났다. 샹산현은 현재의 중산시(中山市)에 속하며, 주강(珠江)의 하구인 홍콩(香港)에서 약 8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주강삼각주 농촌마을이다. 중국이 유럽열강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던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곳 부근이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운동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슈취안(洪秀全)의 고향 화현(花縣)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중농 출신의 부모 아래에서 전통적 사숙 교육을 받던 중 1879년 하와이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성공한 화교로서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큰형 쑨메이(孫眉)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훗날 혁명사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쑨메이의 도움으로 하와이에서 교육을 받은 뒤 1884년부터 2년간, 또 1887년부터 5년간 홍콩으로 옮겨가 영국계 의과대학을 다녔다. 이후 마카오에서 개업의로 활동하여 상당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과정과 교육 경력은 동서 문명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데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국어 수준으로 배우게 된 영어는 후일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타고난 다독가(多讀家)로서 여러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였기에 동서사상을 융합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사상체계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창안하고 그것을 정치적 주장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던 1894년 11월 하와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는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한 반대라는 종족주의적 한계를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만주족 왕조, 곧 청조의 타도와 민국(民國) 곧 공화국의 건설을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른바 공화혁명 운동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타이완(臺灣)을 비롯한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 하는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맺던 1895년, 비밀결사 조직을 기반으로 첫 번째 반청(反淸) 무장기의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1년 10월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반청기의가 성공하면서 최초의 혁명정부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기간을 유럽, 일본,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해외의 화교들을 중심으로 반청혁명을 선전하고 혁명자금을 모금하여 국내에서 반청기의를 일으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해외 화교들을 혁명의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일은 결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변법운동의 지도자로 역시 해외에 망명했던 캉유웨이(康有爲) 중심의 개혁운동(입헌운동) 세력과의 경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반복되는 무장기의의 실패로 인하여 혁명의 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난 혁명파 내의 내분 또한 심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창기의가 일어나던 시기 미국에서 화교들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가 우창기의 발발 이후 두 달 반이 지난 1911년 12월말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각 성 혁명정부 대표들의 회의에서 초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첫 번째 (임시)대총통에 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주는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당시 혁명세력의 기반은 취약하였다. 이어서 위안스카이가 약속을 어긴 채 국회를 해산하고 임시약법(臨時約法)을 철폐하자 공화국 수호를 위한 전쟁을 일으키지만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이후 몇 차례 지방군벌들과의 합작을 바탕으로 광둥을 중심으로 혁명정권을 만들지만 사적 군대를 소유한 군벌들 간의 계속된 다툼 가운데 공화국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혁명정권을 바탕으로 군벌들에 대한 정벌전쟁(북벌)을 통한 전국적 통일을 꾀하였지만, 오히려 한때 혁명정권을 지지하던 군벌들과의 대립과 충돌이 격화되어 혁명정권의 존립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무렵부터 시작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중국혁명에 대한 지원정책은 새로운 희망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10월혁명이 성공한 2년 뒤인 1919년에 만들어진 국제공산당[코민테른(Comintern)]은 공산주의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목표로 한 것인데, 특히 식민지 약소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을 지원하는 전략으로 자본주의 혁명세력과 연합을 통하여 공산주의혁명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른바 연합전선정책을 제기하였다. 중국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원은 공산당 창당과 국민당과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1922년부터 본격화된 국민당과 신생 공산당과의 연합, 곧 첫 번째 국공합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실제적인 출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하여 이루어진 국민당의 개조(改組)였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국민당에 대한 연합과 지원의 대가로서 볼세비키(Bolshevik) 정당으로 조직을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코민테른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 국민당 측에서 여기에 적극 응하여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대중적 기반을 강조하는 정당조직으로의 대대적인 개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른바 소련과의 연합(聯俄), 공산당과의 협력(容共), 노동자·농민운동의 지원(扶助農工)이라는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었다. 이후 소련의 군사·정치적 원조 아래 국민당 휘하의 당군(黨軍)인 국민혁명군의 육성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군벌과의 전쟁인 북벌전쟁과 전국통일, 대중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에서 소련과의 연합이나 공산당과의 협력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민당 내부에서의 분파와 대립은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이나 성격을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최고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에 대한 대탄압이라는 이른바 4·12정변을 불러와 국공합작은 결국 결렬되었다. 그러나 1928년 6월 국민혁명군의 베이징(北京) 입성 후, 그해 12월의 이른바 동북역치(東北易幟)라 칭하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의 국민당에 대한 복속 선언으로 전국적 통일을 이룩한 국민혁명은 청조 멸망 이래 다각적인 방향에서 모색되어 오던 중국의 국민국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직접적 과정이 되었다. 국민혁명의 초기 단계인 1925년 3월 군벌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으나, 그 단초를 놓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는 1905년 도쿄에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유학했던 조소앙(趙素昻)을 비롯한 한국유학생들과 따이지타오(戴季陶)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유학생 간의 긴밀한 교류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한인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에서 이루어진 혁명세력과의 교류는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인 1908년경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김규흥(金奎興)의 경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인 지사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 혁명세력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1911년 10월 신해혁명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의 성공 소식을 들은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간 것으로 확인되는 신규식(申圭植)·김규식(金奎植) 등 한인 망명 지사들은 혁명의 중심지인 상하이·난징(南京) 지역에서 중국혁명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의 밀접한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중국 혁명세력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9월에서 10월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광저우호법정부(廣州護法政府) 방문과 회담은 임시정부와 호법정부가 상호간에 외교적 승인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지원을 보냈다. 그러나 신규식의 광저우방문 일정을 자세하게 추적한 연구에 의하면 당시 광저우의 비상국회(非常國會)에서 다룬 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안이 아니라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이었고,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에서도 호법정부 승인안을 처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 사이의 승인은 구두에 의한 ‘사실상의 승인’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한편으로 같은 시기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들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특히 당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呂運亨)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볼 수 있으니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반제연대의 일환으로서 중국·한국·베트남·인도의 혁명가들 사이에 추진되고 있었던 연대활동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혁명세력 인사들과의 연대를 위한 단체의 결성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1912년에 신규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나 1921년 상하이·광저우·창사(長沙) 등지에서 만들어졌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같은 조직이 이에 속한다. 이들 조직을 통하여 중국혁명가들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가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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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Events>중국국민당</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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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외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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