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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박도백</name>
<nameHanja>朴道伯</nameHanja>
<movementFamily>3.1운동</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6)</orders>
<addressBirth>경남 김해(金海)</address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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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Died>1892. 4. 19 ~ 1939. 5. 24</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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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예심결정문」, 부산지방법원, 1919. 7. 16. ; 「신분장지문원지」. ; 「電報 : 전국 및 間島 방면 3月 29日 시위상황」, 1919. 3. 30,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1』. ; 경상남도경찰부, 『高等警察關係摘錄』, 193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국사편찬위원회 편, 『1919, 그날의 기록』 3, 2019.</references>
<content>1892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대저면(大渚面) 출두리(出斗里,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九浦面, 현 부산광역시 북구 일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중순 구포면 출신의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 양봉근(楊奉根)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구포면 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찾아왔다. 양봉근은 임봉래에게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임봉래는 윤경(尹涇)·유기호(柳基護) 등 지역 청년들과 함께 3월 29일 구포시장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9일 정오경 구포시장은 장날을 맞이해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임봉래 등은 장꾼들에게 준비해 온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이끌었다. 장터에 모여 있던 1,0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군중의 한 사람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이 시위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며 김옥겸(金玉兼) 등 12명을 연행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구포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가 곤봉을 휘두르고 투석하며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집기를 파손하였다. 이들이 김옥겸 등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군경은 발포로 대응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시위 주도자로 붙잡혔다. 1919년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3월 29일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 만세운동 주도</activities>
<engagedEvents>구포면 만세운동</engaged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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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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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강우규</name>
<nameHanja>姜宇奎</nameHanja>
<movementFamily>의열투쟁</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2)</orders>
<addressBirth>평남 덕천(德川)</addressBirth>
<aliases>자: 찬구(燦九), 호: 왈우(曰愚), 이명: 영일(寧一)·강녕(康寧)</aliases>
<bornDied>1855. 7. 14 ~ 1920. 11. 29</bornDied>
<placeOfOrigin>진주(晋州)</placeOfOrigin>
<references>송상도, 『기려수필: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 3권, 도서출판 문진, 2014. ; 진주강씨중앙종회, 『선국선열 강우규』, 진주강씨중앙종회, 1982. ; 박환, 『강우규의사 평전』, 선인, 2010. ; 정운현, 『강우규: 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references>
<content>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武陵面) 제남리(濟南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少監公派世譜)』에는 ‘철묘십년(哲廟十年) 기미유월이일(己未六月二日)’, 1859년 (음)6월 2일생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고, 이명은 영일(寧一)·강녕(康寧)이다. 아버지는 강재장(姜齋長)이고, 슬하에 중건(重建, 일명 鍵夏)·건형(鍵衡) 두 아들을 두었다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읜 탓에 누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부친이 살아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920년 강우규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장남 중건이 『동아일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하였다.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큰 절의가 있었으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라고 한다. 10여 세에 한문을 배웠고, 이후 한방 의술을 익혀 한약방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30세 되던 1885년 함남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사하였다. 홍원에서는 생업을 위해 남문 앞에서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25년간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1908년 이동휘(李東輝)가 신민회(新民會) 활동의 하나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 활동과 함께 학교 설립을 통한 구국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영명학교(靈明學校)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처음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두도구(頭道溝)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답사하며 이동휘·박은식(朴殷植)·계봉우(桂奉瑀)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찾아와 2개월간 기거하면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본 뒤 안중근의 의거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후일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정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자, 이를 피해 1915년경 우수리강을 건너 지린성 라오허현(繞河縣, 현 헤이룽장성 라오허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라오허현은 북만주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무렵 하바롭스크에서 가족과 재회하였다 한다. 라오허현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한 결과, 처음 몇 호에 불과하던 마을이 100여 호에 달하자 신흥동(新興洞)이라 이름 지었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에 협성학교(協成學校)와 조선민회(朝鮮民會), 만주 라오허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에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하자, 라오허현 신흥동 동포 400~500명을 모아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직후인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김치보(金致寶)의 집에서 조직한 단체다. 노인동맹단은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던 까닭에 회원의 나이를 46~70세로 연령 제한을 두었다. 단장 김치보, 총무 김순약(金舜若), 의장 이일(李逸), 서기 서상구(徐相矩), 의원 이륜(李崙)·박희평(朴凞平)·한승우(韓承羽)·이득만(李得萬)·윤여옥(尹餘玉)·주우점(朱于漸)·강석기(姜錫基)·서상구(徐相矩)·정치윤(鄭致允)·이일·박대동(朴大同) 등을 선출하였다. 노인동맹단은 발족 이후 전단위원(傳團委員)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단원을 모집하였다. 4월 2일 유태순(劉泰純)이 사오수이펀(小綏芬, 일명 小秋豊)과 포크라니치나야 지방을 향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4월 3일 차대유(車大有)는 스찬(水淸, 일명 蘇城, 현재의 파르티잔스크), 최시종(崔侍從)은 이만으로 각기 출발하였고, 4일에는 이륜·김영학(金永學)이 수이푼(秋豐) 니콜리스크(蘇王嶺, 일명 雙城子)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라오허현 인근 이만 지역으로 온 최시종을 만나게 되자,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19년 5월경 정세를 살피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李承喬, 일명 李發)를 만나 그의 소개로 가입하였다는 설도 있다. 노인동맹단은 5월 말 이승교 등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이승교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였다. 일제는 이승교 등을 체포하였으나 이승교·정치윤은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하고, 윤여옥 등 다른 단원들만 이른바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추방된 이승교·정치윤 등이 6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자, 노인동맹단은 환영회를 베풀고 향후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6월 말 노인동맹단은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명의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한국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이즈음 국내 정세를 파악하려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건너갔다. 신한촌에서 이승교 등의 환영식 소식과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살던 신흥동 근처 청룡(靑龍)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였다. 문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폭탄을 부녀자의 월경대처럼 바짓가랑이에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6월 11일 일본 기선 에치고마루(越後丸)라는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4일 함남 원산(元山)에 도착하자 최자남(崔子南)을 찾아갔다. 최자남은 1915년 니콜리스크에 거주할 당시 4개월간 머물게 해주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을 제공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한 달간 최자남의 집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때 최자남의 소개로 허형(許炯)·한은철(韓殷哲)을 소개받기도 하였다. 허형은 평남 안주(安州)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당시 러시아로 건너가기 위해 최자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7월 5일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하세가와가 도쿄(東京)로 물러나자 곧 신임 총독이 부임할 것을 예견하고 8월 5일 허형·한은철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도착 후 허형의 주선으로 안국동(安國洞)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정보를 탐문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2일 일본 정부는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고, 언론에서는 신임 총독의 시정 방침과 함께 사진까지 공개하며 대서특필하였다.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을 확인한 뒤,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을 지니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히는 한편,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 28일 거사 장소인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 박영근의 집으로 숙소를 옮기고, 매일 남대문역 앞을 찾아 지형을 면밀히 살피며 여러 차례 현장 상황을 점검하였다. 8월 29일 도쿄에서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9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의 의장대와 보병 제78연대 소속 보병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이외에도 경찰을 동원하여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9월 2일 아침,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싼 뒤 허리에 묶고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어 허형과 남대문 밖 중국요리점에서 같이 점심을 한 후 거사 장소로 향하였다. 총독 도착 1시간 전, 거사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총독이 귀빈실을 거쳐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귀빈실 근처로 자리를 옮겨 총독의 도착을 기다렸다. 총독을 태운 특별열차는 오후 5시 정각에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이토 총독은 열차에서 내려 1,000여 명의 환영객이 운집한 곳으로 가 악수를 하고는 남대문역 광장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총독 내외와 정무총감 내외가 탈 마차가 각각 준비되어 있었다.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등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의거 직후 담담한 자세로 체포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를 체포하지 않자 숙소로 돌아와서 허형과 재차 거사를 계획하는 한편, 안국동·가회동(嘉會洞)·사직동(社稷洞)에 사는 지인의 집을 오가며 은신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킨 지 16일 만인 9월 17일 누하동에서 한국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석은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警部)로, 후일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되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 경찰이었다. 체포 소식은 사건 발생 20여 일이 지나서야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형을 허형에게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허형은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옥고를 겪었다. 판결 후 곧바로 항소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도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상고 기각 후 6개월 뒤인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은 서대문형무소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발송하였다. 사형 일자는 3일 뒤인 11월 29일이었다. 29일 오전 9시 30분, 서대문형무소 측은 종로구치감에 갇혀 있던 그를 데려왔고, 10시 30분 오카모토(岡本) 검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때 세상을 떠나며 시를 남겼다. 이른바 사세시(辭世詩)이다. 단두대에 서니 斷頭臺上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有身無國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豈無感想 처형 직전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에서 온 장남 중건이 마련해준 한복 두루마기를 입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당일,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 가두었다가 사형 집행이 끝난 후에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오후 3시 반경 중건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하였다. 감옥 시체실에서 중건에게 내어준 사각형 궤짝 속에는 강우규의 시신이 앉은 채로 입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상고심에서 강우규의 사형 결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진주강씨종친회는 문중 차원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안장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신을 선산에 안장할 경우,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빈소도, 조문도,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유해를 운구하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였다. 일본 경찰이 유해가 운구되는 동안에도 쫓아오며 감시를 하자, 화가 난 중건은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해야만 속이 시원하냐!”라고 외쳤다 한다. 1956년 10월 유지들의 발의로 수유리 산109번지로 묘지를 이장하였다가 반세기가 다 된 1967년 6월에야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 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다. 이 의거는 의열단(義烈團)으로 계승되면서 1920년대 의열 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자리 잡는 역할을 하였다. 2006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남대문역두의 투혼 의사 강우규』를 출간하였고, 동상 건립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각종 기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08년 영명학교 설립, 1917년 광동학교 설립, 1919년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라오허 현 지부장</activities>
<engagedEvents>남대문역 투탄의거</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국민노인동맹단, 영명학교, 광동학교</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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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안중근</name>
<nameHanja>安重根</nameHanja>
<movementFamily>의열투쟁</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2)</orders>
<addressBirth>황해 해주(海州)</addressBirth>
<aliases>응칠, 아명 자임</aliases>
<bornDied>1879. 9. 2 ~ 1910. 3. 26</bornDied>
<placeOfOrigin>순흥(順興)</placeOfOrigin>
<references>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2·3, 1970·1971. ; 『대한매일신보』, 1907. 5. 31, 1909. 11. 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2·5·7·8·9·10권, 1970·1971·1973·1976·1977·1978. ; 신용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 오영섭, 『한국 독립과 동양평화의 사도, 안중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 김호일, 「구한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연구」, 『중앙사론』 10·11, 중앙사학연구소, 1998. ; 최기영,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 일조각, 2003. ; 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 『역사문화연구』 23,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5. ; 윤경로, 「안중근의거 배경과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 :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6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references>
<content>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주의 대지주 집안이었으며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고려 말 명유(名儒) 안향(安珦)의 후예이며, 누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향반 계층이었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아버지 안태훈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던 유생으로 구한말 개화(開化)사상을 비롯하여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자, 전통 유학(儒學)만 고집하지 않고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에 앞장섰다. 또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 세력이 근대적 문물의 수용과 함께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으로 개화파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킬 계획으로 청년 70여 명을 선발할 때 그 중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자 안태훈은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885년에 70~80명의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골인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의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을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보내게 되었다. 7~8세가 되면서 할아버지로부터 한문 수업을 받으며 이후 10여 년간 유교 경전과 조선 역사에 관한 서적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소년시절 학문 정진에만 힘썼던 것은 아니며 틈나는 대로 산을 타면서 활쏘기나 말 타기, 사냥에도 깊은 흥미를 가졌다. 당시 청계동 집에서 함께 지내던 여러 명의 포수들을 따라다니며 사냥이나 사격술을 익힐 수 있었다. 12세 무렵에는 말 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묘기를 부릴 만큼 능숙하였고, 15~6세가 되어서는 명사수(名射手)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또 소년 시절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는 점점 약하여져,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文弱)에서 벗어나 무강(武强)의 기품을 조성해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의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였다. 1897년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천주교에 입교 후 수년간을 천주교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천주교 신앙을 깊이 유지하였다. 안태훈은 천주교 선교에 앞장 서는 한편 본당 축성 사업을 벌여 청계동에 황해도에서는 두 번째 본당을 설치하는 적극적인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에는 마렴에 있던 홍석구(洪錫九) 신부(Nicolas joseph Marie Wilhelm)가 청계동 본당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청계동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마(Thomas)란 천주교 영세명을 받았으며, 홍 신부로부터 천주교 교리 수업 등을 받으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도 넓혀 나갔다. 20세 무렵에는 홍 신부를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지의 황해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연설도 하였다. 또 그들과 직접 접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는 ‘대학 설립’을 계획하는 한편 교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는데 앞장섰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뜨자 교육 사업을 통한 구국 운동을 목적으로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하였다.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삼흥이란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을 말하는 것으로, 국토와 국민이 흥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때 삼흥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두 아우인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 등도 힘을 합하였다. 학생 수는 5~60명에 이르렀고, 처남 김능권(金能權)이 전답을 팔아 1만 5,000량을 기부해 학교 교사를 확장해 나갔다. 삼흥학교에서는 일반 과목 외에 교련시간을 두어, 목총, 나팔, 북을 사용하여 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 사립학교였던 삼흥학교는 뒤에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꾸었다. 삼흥학교 외에도 새롭게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면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원래 돈의학교는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서 해체될 형편에 있던 것을 인수한 것으로, 진남포 교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방(方) 신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방 신부가 신병으로 진남포를 떠나며 해체될 상황에 놓이자 사재를 털어 인수하였다. 돈의학교는 1907년 가을 서북 3개도의 60여 학교 5천여 명이 참가한 연합운동대회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둘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이 무렵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관여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1906년 10월에 설립된 서우학회는 계몽주의 단체로서 1908년 1월에 한북학회(漢北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게 되는데, 서우학회에 관여했던 시기는 1907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때 국채보상금의 헌납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이 관서지방에 파급되면서 부인 김 씨에게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장신구 전부를 헌납하였다. 이어 같은 해 고종(高宗)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 망국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해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1907년 가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직후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여 임시사찰(臨時査察)의 일을 맡아 보면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의병 모집과 자금 마련을 위해 힘을 쏟은 결과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동의회는 노령 연추(煙秋) 지방에서 국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준비단체였으며 동의회 회원은 의병과 다름이 없었다. 최재형은 당시 노령지역 한인 사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의병을 일으키는데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 1908년 6월, 국내진입작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함경북도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 공동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독부대로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였다. 동지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붙잡은 포로를 석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의병부대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어 엄인섭이 떠나면서 의병부대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었고, 이에 의병의 재기가 어려워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음력 1909년 1월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는 혈맹을 맺었다. 당장에 의병 재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단지동맹 후 주로 연추 지방에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교육과 강연 활동을 전개하면서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의거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의병 재기를 준비하던 상황에서 더없이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이에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결행하기 위해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하였다. 이때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 이강(李剛)은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을 맡고 있는 김형재(金衡在)에게 소개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포그라니치나야(Пограничный) 역에서 내려 친지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방문하고 “가족을 마중하기 위해 하얼빈 방면으로 여행하는데 러시아 통역이 필요하니 아들을 동행케 해달라”고 간청해,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劉東夏)와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하얼빈에 도착하자 유동하에게 이토 히로부미 저격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 약속을 받았다. 하얼빈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대동공보』 하얼빈 지국 기자 김형재를 찾아가 이강의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을 합류시킬 수 있었다. 10월 23일경에는 김형재의 소개로 일행 4명은 김성백(金聖白 또는 成白)의 집으로 안내되어 하얼빈에서의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당초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기하고자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와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 등 네 곳에서 의거를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비가 모자라고, 실제 가동 인원도 부족해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의 두 곳으로 한정하여 계획을 추진해 갔다. 교차역으로서 기차가 쉬는 전략적 요처인 채가구에는 우덕순, 조도선을 배치하였고, 이때 하얼빈을 맡았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하였다.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 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지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 올라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로 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이어 유동하로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5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그 해 10월 24일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한 뒤 하얼빈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5일 아침이 아니라 하루 늦은 10월 26일 아침에 오게 되어 있었다. 일본을 떠나 10월 18일 중국 요동반도의 대련(大連) 부두에 상륙한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1일에 뤼순(旅順)의 전적지를 시찰한 뒤 펑텐(奉天)으로 들어가, 10월 24일에는 푸순(撫順) 탄광을 돌아보고 10월 25일 밤 창춘(長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밤 청국도대(淸國道臺)에서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석한 뒤 러시아 측에서 보내온 귀빈 열차를 타고 하얼빈 역으로 향하였다. 이에 10월 25일 김성백의 집에서 지내다가 10월 26일 새벽에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그 날 오전 7시쯤 하얼빈 역에 도착하니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들어가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채가구에서의 거사 계획은 불발로 끝났다. 10월 24일 채가구에 우덕순, 조도선 두 동지들을 배치하러 왔다가 하얼빈으로 돌아가면서 마지막 이별로 서로 포옹하고 우는 것을 러시아 경비병이 수상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경비병은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우덕순, 조도선 등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잠가버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출영 나온 제정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중요 회담을 한 뒤 9시 30분경 코코프체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출영 나온 각국 관민과 인사를 나누고 러시아 대장대신의 요청에 따라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후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의 후방에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브라우닝 8연발 권총으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의 거리는 불과 10여 보에 불과했고, 세 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자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다. 이때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의거 직후 붙잡혀 역구내 헌병파출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러시아 시심재판소(始審裁判所)의 검사와 한국인 통역으로부터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당일 저녁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는 10월 28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秀太郞)의 명령에 의해 뤼순에 있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으며, 10월 30일부터 정식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재판은 불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이었으며,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따라서 일본 법률에 의해 일제가 재판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목이나마 대한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제정러시아에 압박을 가해 안중근을 인도 받았으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부당하게 재판한 것이었다. 일본 외상 고무라는 1909년 12월 2일 전문을 보내, 범행이 극히 중대함을 감안, 응징의 정신에 의거 극형에 처함이 타당할 것이라는 내용과 우덕순에서 대해서도 ‘모살 미수죄’를 적용할 것을 시사하고 조도선과 유동하에 대해서는 재량에 위임한다는 것을 지시하였다. 즉 재판은 이처럼 고무라 외상의 지령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으며,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옥중 생활 중 그간의 행적과 한국 독립에 관한 사상을 남기기 위해 집필에 열중하는 한편 2월 14일과 2월 15일에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7통의 유서를 남겼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두 종류의 저술을 구상했는데 하나는 전기적 기록인 『안응칠 역사』 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저술로서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동양평화론』 이었다. 사형 집행 일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일자를 한 달 정도 연기해 줄 것을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 고등법원장이 몇 달 걸려도 좋다는 승낙하자, 이를 믿고 공소권 청구도 포기한 채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이때가 한 달여 만에 『안응칠 역사』를 끝낸 직후인 1910년 3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과 달리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하였고 이로써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기간은 10여 일 정도에 불과하여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동양평화론』의 체계는 1서(序) 2전감(前鑑) 3현상(現狀) 4복선(伏線) 5문답(問答)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집필한 것은 서(序)와 2장의 전감(前鑑)인데 그 중 전감도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남아 있는 『동양평화론』은 서론에 해당되는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옥중에서 11회 신문을 받는 동안 미조부치(講淵孝雄) 검찰관과 벌인 논쟁을 통해 『동양평화론』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미조부치는 “1. 독립할 능력이 없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되면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지므로 청일 ·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며, 청일 · 러일전쟁은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불기피한 선택이었다”, “2. 국제공법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보호’하는 것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것이다”, “3. 한국의 진보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있다”, “4.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한 일본의 조치가 한일협약이며 이는 합법적이다”, “5.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가능케 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6.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살인행위를 금하고 있는 천주교 교리를 위반한 것이다”와 같이 일본의 주요 논리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논리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였다. “1. 러일전쟁의 침략적 성격, 강제한 을사늑약, 한국 황제 폐위 등 일제의 침략정책으로 한국인이 분개하고 있다”, “2. 일본의 한국 ‘병합’ 야심을 열강이 좌시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 “3. 일본이 위생 · 교통시설의 완비, 학교의 설립 등을 내세워 한국의 진보를 돕고 있다고 하나, 이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이 아니다. 명치 초년의 일본은 문명하지도 진보하지도 않았다”, “4. 을사늑약은 일본 군대가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한 것이다. 을사늑약은 “형제 동지간에 있어 한편이 다른 한편을 먹이로 삼은 것”이다”, “5.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를 들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일본을 각성시키고 침략행위를 중지시키고자 한 것이다”, “6.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더 큰 죄”이며 이는 결코 교리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야말로 인도주의에 반한 행위이다”는 논리였다. 즉 일제 침략의 화근이 결국에는 만주를 비롯하여 동양으로 확대될 것을 분명하게 간파하였으며, 이에 하얼빈 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길에서 결행된 것임을 뚜렷이 밝혔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에 대항하여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공조 체제가 더욱 절실하던 시점에서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위해 만주침략을 성사시키고자 하얼빈을 방문하였다. 『동양평화론』의 골자는 서양의 침략을 맞이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일본 등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양 평화의 범주에는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해 태국, 미얀마까지를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들이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들 국가가 일치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양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당시 동양을 침략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독립과 평화를 지키자는 것이지, 서양 그 자체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천주교 세계관을 통해서도 확인될 뿐 아니라, 일본을 향하여 침략성을 버리고 동양 평화에 동참하라는 주장에서 입증되고 있다. 즉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데 그 기저를 두었다. 이렇듯 『동양평화론』은 국제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기반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로서 동양 평화의 방도를 제시하였다. 동양 평화의 구도는 대체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한 바탕위에서 한국과 청국이 정립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동양 삼국의 동등한 자격을 논의하면서도, 현실적 차원에서 일본의 주도를 인정하고 있었다. 동양 평화에 대한 구상은 나아가 뤼순항을 개방하여 삼국이 공동 관할할 것과 또 삼국 대표에 의한 평화회의 기구를 조직함으로써 동양 평화의 출발점으로 삼자고 주창했으며, 공동 출자에 의한 재정 확보 방안과 삼국의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 구성 등 경제, 군사 방면에까지 이르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삼국의 황제들이 로마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갖도록 하여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천주교적 세계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성을 막아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하얼빈의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동양 평화의 출발이 되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일본 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주장은, 바로 그러한 『동양평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 평화의 기초를 이루는 삼국의 독립을 해쳐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처단한 것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보전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한국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사상과 이념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한 것으로 『동양평화론』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은 인종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채 세계평화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중국은 당시 청일전쟁 패배의 대가로 일제에게 영토를 분할당하는 등 굴욕적 수모를 당하고 있었고, 더욱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야합하여 만주를 분할 점령하려는 야욕 아래 하얼빈을 방문하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때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고 중국인들도 이에 기뻐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05~1908년 계몽운동 전개, 1908년 의병전쟁 참여,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저격</activities>
<engagedEvents>하얼빈 의거</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삼흥학교, 돈의학교, 단지동맹(동의단지회)</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최동오</name>
<nameHanja>崔東旿</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독립장(1990)</orders>
<addressBirth>평북 의주(義州)</addressBirth>
<aliases>호 : 의산(義山), 이명 : 최학원(崔學源), 지석호(池錫浩)</aliases>
<bornDied>1892. 6. 22 ~ 1963. 9. 16</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 1～4, 국사편찬위원회, 2005.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 박영석, 『재만한인독립운동연구』, 일조각, 1988. ;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연구』, 일조각, 1989. ; 채영국, 『韓民族의 민족독립운동과 正義府』, 국학자료원, 2000. ; 조범래, 「국민부의 결성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장세윤, 「재만 조선혁명당의 민족해방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김상현, 「1920년대 초반 최동오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references>
<content>1892년 6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마룡동(麻龍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의산(義山)이며, 이명은 최학원(崔學源)·지석호(池錫浩)이다. 1903년 여름 동학(東學)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천도교(天道敎) 세력의 중심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일 최안국(崔安國)과 함께 의주 남문(南門) 밖 시가에서 군중들을 지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일에는 기독교계와 공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독립민회(獨立民會)를 결성하고 간사가 되었으며, 3월 4일에는 양실학원(養實學園)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서 한 달 정도 수감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국내의 한성정부(漢城政府)와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통합을 이루어 새롭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통합 이후 새롭게 구성된 내각에서 포고문을 발표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그해 10월 천도교 의주대교구장 최석련(崔碩連)과 선천대교구장 이군오(李君五)의 후원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여 통합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9년 11월 임시정부 의주군 조사원이 되었으며, 같은 달 14일에는 내무부 참사가 되었고, 1920년 3월 4일에는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내에서는 주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중국 관내지역 천도교인들의 단결과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는데 손병희탄신축하연(孫秉熙誕辰祝賀宴)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교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이밖에 왕삼덕(王三德)·안정근(安定根) 등과 함께 북간도에 파견되어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1년 초부터 침체된 독립운동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모색과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김규식(金奎植) 등과 함께 창조파(創造派)에 속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수립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는 베이징(北京)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하고 재일 한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자 재동경지방조선인이재자위문회(在東京地方朝鮮人罹災者慰問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烈團)과 함께 도쿄(東京) 등지에서 거사를 일으키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국내 거사를 도왔다. 1924년 3월 16일에는 천도교인 이민창(李民昌)을 비롯한 장건상(張建相)·서왈보(徐曰甫)·한진산(韓震山) 등 베이징지역 민족운동세력과 함께 동안시장(東安市場) 동안다루(東安茶樓)에서 관동대지진 때의 한인 학살 문제와 한국과 일본의 감리교 감독으로 있던 미국인 헐버트 웰치(Herbert Welch)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회의에서는 관동대지진에서의 참상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알릴 것과 웰치에 대해서는 대표자 1명을 파견하여 항의하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1월 20일 일·소조약의 체결로 양측 간에 우호관계가 성립되고 소련이 한국의 독립 지원 방침을 철회하자, 3월 7일 베이징의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 주최로 조양문(朝陽門) 내 조선기독교회에서 재류조선인유지대회(在留朝鮮人有志大會)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한교동지회와 고려학생회가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제2원에서 개최한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여 기념사를 하였으며, 쑨원(孫文)이 서거하자 3월 12일 교인 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하여 조선화환(朝鮮花環)과 애도문(哀悼文)으로 조문하였다. 그러나 천도교 북경종리원(北京宗理院)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이 일제에 의해 세밀하게 파악되고 있는 상황에서 1925년 운동의 거점을 만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만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는 주로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金東三)·현익철(玄益哲)·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초기에는 화성의숙(華成義塾)의 교장으로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힘썼다. 1925년 초 건립된 이 학교는 화뎬현(華甸縣) 휘발하(輝發河)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년을 교육기간으로 하여 정의부 관할 각 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여 교육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지린(吉林)에서 길림한교문제연구회(吉林韓僑問題硏究會)를 조직하고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체결의 여파로 재만 한인에 대한 일제 경찰의 탄압이 가중되고 중국 당국의 한인구축정책(韓人驅逐政策)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곤경에 처한 한인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의 결과로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과 외교위원장(外交委員長)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민부의 지도기관으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된 후에는 중앙위원 겸 외교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도발하고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자 만주를 떠나 다시 관내(關內)로 이동하여 유동열(柳東說)·현익철·이광제(李光濟)·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으며, 1933년부터는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11월에는 조선혁명당 대표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하고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통일전선 정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직에서 물러났다. 독립운동 전략과 자금 문제 등으로 조직 내에 의견 대립이 표면화되자 1937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8월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재건 한국독립당, 그리고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등 우파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聯合會)를 결성하면서 다시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1939년 10월에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 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때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직 중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작전권을 제한하는 광복군행동9개준승(光復軍行動九個準繩)을 취소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감사로 선임되어 민간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장에 재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을 통합하여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귀국 후 1946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 부의장,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우파 대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立法議院)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南北連席會議)에 남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956년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在北平和統一促進協議會)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19년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 1923년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1925년 화성의숙 교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 겸 외교위원장, 1929년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겸 외교부장, 1932년～193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1933년 임시정부 법무장,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부의장, 194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겸 비서장, 1944년 임시정부 법무부장</activities>
<engagedEvents>국민대표회의</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대한민국임시정부, 화성의숙, 정의부,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임시의정원, 한국독립당, 좌우합작위원회, 남조선과도입법의원</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차이석</name>
<nameHanja>車利錫</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독립장(1962)</orders>
<addressBirth>평남 영원(寧遠)</addressBirth>
<aliases>필성(必成)</aliases>
<bornDied>1881. 7. 27 ~ 1945. 9. 9</bornDied>
<placeOfOrigin>연안(延安)</placeOfOrigin>
<references>이명화, 『차리석의 생애와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 역사공간, 2005. ; 박수현, 『차리석(임시정부와 흥사단을 이끈 독립운동계의 재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 장석흥, 「東岩 車利錫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학논총』23,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01. ; 장석흥, 「차리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references>
<content>1881년 7월 27일 평안남도 영원군(寧遠郡) 동면에서 아버지 차시헌(車始軒)과 어머니 서시은(徐始恩)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이명은 서입환(徐立煥)이며, 호는 동암(東巖)이다. 아버지 차시헌은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으로 초시에 합격한 바 있는 유생 출신이었다. 차시헌은 1895년 여름 서울에서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열렬한 기독교 신자로 변모하였다.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한 차시헌은 1897년 평양 교외의 장천마을에서 최초의 농촌교회인 장천(將泉)교회를 세우며 기독교 전파에 앞장섰다. 장천교회는 선교사 중심의 도시교회와 달리 한국인의 힘으로 세운 민족교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장천교회는 신의학교와 신애여학교 등의 학교를 세우고 초등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런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차시헌은 아들이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문의 지혜를 가지고 새 시대를 살아가길 바랐다. 그리하여 1897년 가을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의 ‘사랑방학급(숭실학당의 전신)’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혔다. 차시헌은 1898년 독립협회 평양지회가 세워질 때 장천교회의 한석진(韓錫晉) 목사, 자신의 동생 차계헌(車啓軒) 등과 함께 참가하는 등 근대 개혁에 대한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다. 이때 18세 청년으로 자연스럽게 평양지회를 출입했으며, 그곳에서 21세의 청년 도산 안창호를 만날 수 있었다. 1898년 쾌재정에서 행한 안창호의 연설은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1904년 최광옥(崔光玉) 등과 숭실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1906년 『그리스도신문』이 공모한 ‘비유문제’에서 장원을 차지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청년이었다. 숭실학교에 다닐 때부터 세계지리에 관심이 높아 『사민필지(四民必知)』를 늘 품에 안고 살았으며, 1906년 『공립신보(共立新報)』에 기고한 논설에서 보듯이, 새 시대의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 졸업 후 교직에 몸담고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던 무렵, 조국은 을사늑약으로 통감정치에 놓이면서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계몽주의적 인식에서 1907년 초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가입해 보았지만, 그것은 학문이나 신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1907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와 해후하였다. 새 시대를 꿈꾸던 10년 전의 만남과 달리, 이제 두 사람은 스러지는 국운을 바로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주에서 발행된 『공립신보』 국내발매소를 운영, 평양지역 배포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07년 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현재 서울역 부근) 앞 김형제상회 2층 사무실에서 안태국(安泰國)과 함께 신민회 사업에 몰두하던 안창호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신민회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설립과 청년학우회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민족교육은 구국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성학교는 그 중에도 남달랐다. 안창호의 민족관과 교육관 아래 학생들은 장래의 구국지사로서, 독립군으로서 양성되고 있었다. 대성학교 내에 중심조직을 두고 무실역행(務實力行), 충의용감(忠義勇敢)의 정신을 수양하던 청년학우회도 마찬가지였다. 조신성(趙信聖)이 경영하던 진명여학교에 출강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철혈여장부’ 조신성과의 인연은 만세운동 직후 평안도 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독립청년단의 무장투쟁 때에도 깊게 이어졌다. 1910년 3월 안창호가 망명한 뒤에는 장응진(張膺振)과 함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의 운영을 맡았다.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대성학교에서 일제의 강점을 반대하는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10월 ‘신민회사건’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1914년 5월, 대성학교 출신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기성볼단(箕城볼團)의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재개하였다. 축구단을 가장한 기성볼단은 미국의 네브라스카 무관학교, 서간도 무관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배워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던 청년비밀단체였다. 1915년 3월에 발각되고 말았지만, 대성학교의 교육과 정신이 독립운동으로 계승된 사례였다. 이무렵 진남포에서 임치정·안세환 등과 광산을 경영하던 무렵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반드시 조국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에서 ‘필성(必成)’이라 개명하고 중국 안둥(安東, 현 단동)으로 망명해 ‘안동청년단(安東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중국 안둥일대와 서북지역은 하나의 독립운동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대한독립청년단 등의 청년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출신의 기독교 청년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의 청년비밀결사들과 연대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때론 강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던 평양 대한국민회의 대한독립청년단이나, 조신성이 맹산에서 대한독립청년단과 연결되어 활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안동청년단’은 독립운동 이력에서도 새롭지만, 국내와의 연결을 끊임없이 꾀하던 안창호의 독립운동 방략을 구체적으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안둥에서 청년단 조직 기반을 다진 뒤 상하이로 건너가 맡았던 첫 직분은 독립신문사 기자였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안창호는 임시정부 기관지로서 『독립신문』 간행에 힘을 쏟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독립신문사의 일을 보게 된 것이다. 언론활동은 1932년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신문』,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韓民)』, 그리고 『임시정부공보』 등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독립신문』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이 무렵 안창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중에 하나가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안창호는 연통제를 시행했으나, 1920년 초 대부분 조직이 파괴당하면서 새롭게 시도한 것이 지방선전부였다. 지방선전부는 국내와 해외 동포들의 연락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항일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1920년 3월 임시정부에 설치된 비밀기관이었다. 1920년 5월 임시정부 지방선전부 이사를 맡았다. 1921년 들어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문제로 혼미를 거듭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 초기의 구심력을 상실하면서 독립운동계는 새로운 통할 기구 수립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노동총판직을 사퇴한 안창호는 1921년 5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창하며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지방선전부를 나와 독립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복귀하는 한편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참가하였다.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이어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전략을 바꿔 1922년 2월 의정원에 들어가 국민대표회의를 지원하였다. 제10회 의정원 회의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놓고 찬성과 반대 측의 열띤 토론장이 되었다. 이때 임득산(林得山)·김붕준(金朋濬)·조덕진(趙德津) 등 안창호 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저지를 받아 열띤 공방만 계속될 뿐 승인을 얻어내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니 ‘인민청원안’이 그것이다. 상하이거류민 102명의 연서로 제출된 인민청원안의 요지는 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각계의 대표회인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개월에 걸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격론 끝에 국민대표회의 지지파의 주장대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찬성안과 대통령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지만, 반대파의 거센 저항으로 세력 간의 분열만 가속시킨 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의 내분 수습과 독립운동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할 때 참가하였다. 시국문제를 먼저 장외에서 토의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을 세우고자 했으나, 정파 간의 이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시사책진회도 결성된지 한 달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1923년 5월 제11회 의정원 회의에 평안도 지역 의원으로 다시 의정원에 참가하였다. 이 무렵 의정원에서는 법제 개정과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광복운동의 통일적 진행 등을 골자로 하는 ‘대국쇄신안’을 가결시켰다. 아울러 임시대통령제의 폐지 문제도 상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옹호파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효화되기에 이르렀고, 의정원은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1923년 초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창조·개조·임정옹호 등 정파 간의 이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되자 이에 의원직을 사임하고 임시의정원을 떠났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난징(南京)으로 거점을 옮겨, 흥사단과 동명학원(東明學院) 운영 등 독립운동 인적 기반의 확대 및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3년 12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임시위원장 대리로, 1924년 2월에는 원동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임되며 흥사단 단무를 총괄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동명학원을 세워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인적 기반을 확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중등과정 및 대학예비과정을 설치한 동명학원은 차세대 독립운동자 양성소로서, 중국 관내에서 중등 한인교육기관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동명학원의 기지 선정, 교사 설계 및 건축, 개교 등 학원 설립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1925년 흥사단 창립기념행사를 주도하여 열었다. 원동흥사단을 청년중심의 단체로 개조,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6년 동명학원이 폐쇄된 이후, 국내에서 잡지 『동광(東光)』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임시의정원에 다시 돌아온 것은 7년여 만인 1930년이었다. 그동안 주로 흥사단 사업과 교육운동에 매진했으나, 1928년 이후 흥사단이 독립운동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흥사단 내부에서도 혁명운동 단체로의 전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는 안창호의 선창으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이 크게 일면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논리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실천적 조직으로서 정당 활동이 1930년을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흥사단 세력과 임시정부 세력이 힘을 모아 1930년 초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때 안창호를 비롯하여 흥사단 인사들과 함께 창립 이사로 참가하는 한편 임시의정원에 복귀한 것이다. 의정원에 복귀해 1930년 11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는 한편 김붕준·김홍서 등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상임위원회는 국정처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제도로, 폐회 중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의정원은 권력구조 면에서 정부의 위치보다 우위를 점하였고, 상임위원회는 정부를 보호, 감독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1930년 12월 흥사단 임원직을 잠시 휴직하였으며, 1931년 경제적 혁명기관으로 창립된 공평사(公平社) 이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는 세계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창호가 의거 당일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도산선생구제위원회’를 결성하고 누구보다 안창호를 구출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럼에도 안창호가 국내로 압송되자, 안창호의 역사를 정리해 『도산선생역사』를 저술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의정원은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기나긴 유랑의 시대를 보내야 하였다. 유랑의 과정에서 임시의정원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족수조차 채우기가 어려워 정회할 때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때로는 의장 대리를 맡아 의정원을 이끌었으며, 1933년부터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겸무하면서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파수꾼’으로 역할을 자임해 갔다. 1934~5년경 임시정부는 존립의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독립운동 정당을 중심으로 단일당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진작되면서 대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해체를 전제로 신당결성운동이 전개된 것은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면서였다. 이후 독립운동 정당과 제 단체들 가운데는 단일당운동 조직과 함께 임시정부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임시정부를 폐지하려는 단일당운동에 단호히 반대하였다. 이들은 한국독립당 탈당 성명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사수를 위한 확고한 의지를 공표하였다. 1935년 4월 8일 항저우에서 국무위원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니, 그 요지는 광복을 이룰 때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것과 반임시정부적인 단일당운동을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 김구가 5월 19일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서한을 보내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송병조와 함께 김구 계열의 임시정부 지지 세력과 결합하여 임시정부를 살려낼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 동암의 동의로 김구·이동녕·이시영·조성환·조완구 등 5명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무회의 주석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이시영 등으로 임시정부의 진용이 어느 정도 정비될 수 있었다. 이때 비서장을 맡았다. 피난길에 접어든 임시정부는 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柳州) 등지를 전전해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한 곳에서 길어야 반년, 적게는 한 달 남짓 머무르다 또다시 이동해야 하는 고난을 겪어야 하였다. 창사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저격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등 혹독한 시련도 따랐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유랑의 와중에서도 홀로 『임시정부공보』를 발행하면서 임시정부의 존재를 지켜 나갔다. 1939년 5월 임시정부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이르러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치장시기에 임시정부는 각 정당의 통합을 위해 힘을 기울였으나, 통일방법과 독립운동 최고기구를 놓고 의견 대립을 벌인 끝에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통합 노력이 결렬된 후,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을 포용하면서 임시정부의 진용을 정비해 갔다. 1940년 5월에는 한국광복진선의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통합한국독립당을 결성하면서 보다 강력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는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명실상부한 정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9월 17일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항전의 무력 기반을 마련하는 등 전시체제도 확립하였다. 임시의정원이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1940년 10월 충칭에서 열린 제32회 정기의회에서였다. 상하이를 떠난 지 8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임시의정원은 피난길에서 헌법을 다듬을 기회도 없어 1927년의 약헌(約憲)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과 그에 따른 정세 변화는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충칭시기 의정원 활동은 주로 개헌 작업에 집중되었다. 1940년의 ‘약헌’ 개정과 1942년부터 시작되어 1년 반 만에 완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은 그 결실이었다. 이 과정에서 임시헌장의 골간이 되는 의견과 제안을 주도하며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먼저 의회와 정부의 권한 범위를 구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회에서 정할 법과 정부에서 정할 법을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책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의회에서 국무원을 선거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석의 권한을 대폭 강화할 것을 역설하였다. 즉, 국무위원회의 주석에 불과한 체제를 정부의 주석 내지 국가의 대표로 하는 동시에 국무위원의 수반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법령은 대소를 물론하고 의회를 통과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면서 광복에 대비한 행정부의 기능 강화에 역점을 두자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정부 명칭과 조직문제를 놓고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자는 주장이 있을 때에도, ‘임시정부’ 명칭의 역사성과 필요성을 논리정연하게 펼쳐 고수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새로 고칠 임시헌장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임시정부 주석의 권한 강화와 국체 및 정체의 규정, 임시정부 명칭론은 건국강령을 구체화하고 독립운동을 총결산하며 광복에 대비하는 법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도 본격적 독립전쟁에 대비하면서 정부 조직을 확충해 갔다. 이때도 변함없이 비서장의 자리를 맡았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통과되면서 임시정부의 권한은 더욱 확대되었다. 임시정부의 권한 강화, 특히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임시정부가 김구 주석의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회복하기까지 그 밑거름이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정정화(鄭靖和)의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광주에서 출발한 후부터 임정의 전체 살림은 임정의 비서실장이었던 동암이 주로 맡아하였다. 중국에 있는 임정의 살림을 맡았던 분들 중에서 특히 우천과 동암은 그 청렴함으로 해서 존경을 받았는데, 두 분은 언제나 무명으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단 두벌만으로 지내셨다. … 동암과 우천(藕泉, 조완구)은 임정의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 만큼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들이었다. 동암과 우천의 청렴결백한 인품이 오늘에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는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던 중 중국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 꿈이 달성된 것,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 4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감격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비서장으로서 환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45년 9월 9일, 충칭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이때 65세의 나이였다. 환국 준비를 하다 과로로 쓰러져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죽는구나”하며 통곡하자, 백범도 끝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고 평가한 백범은 1948년 6월 아들 신(信)을 보내 유해를 봉환해 성대하게 사회장을 거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신민회 활동으로 옥고, 안동청년단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등에서 활동하다가 과로로 사망</activities>
<engagedEvents>신민회 사건,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초안 수립</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숭실학교,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기성볼단, 안동청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흥사단</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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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최재형</name>
<nameHanja>崔在亨</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독립장(1962)</orders>
<addressBirth>함북 경원(慶源)</addressBirth>
<aliases>최 표토르 세묘노비치 ЦойПётр Семёнович</aliases>
<bornDied>1860. 8. 15 ~ 1920. 4. 7</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독립신문』, 1920. 5. 27. ; 박환, 『시베리아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역사공간, 2008. ; 이정은, 「최재형(崔才亨)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0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 박환, 「최재형과 재러한인사회 - 1905년 이전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 한국사학회, 1998. ; 박환, 「구한말(舊韓末)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최재형의병(崔才亨義兵) 연구(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9. ; 반병률, 「4월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애국지사들 -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역사문화연구』 26,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7. ; 반병률, 「안중근과 최재형」, 『역사문화연구』 33,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 이병조, 「생존자의 회상을 통해서 본 스탈린 탄압의 비극: 최초의 한인 해군장교, 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 가족을 중심으로」, 『재외한인연구』 24, 재외한인학회, 2011. ; ЦойОльга Петровна, [Моя жизнь], 1990.1.10, г.Москва. ; Цой В.В.(2000), 『ЧХВЕ ДЖЭХЁН-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 Алматы.</references>
<content>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에서 최흥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Цой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부친 최흥백은 당시 함경북도 경원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동포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부친은 가족을 인솔해 같은 해 9월 9일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로 이주하였다. 이후 연추(煙秋, 현 추카노프카) 마을로 이사하였다. 이어 20세기 초,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1905년 노보키예프스크(현 크라스키노)로 이사하였고, 다시 1910년에 슬라뱐카로, 마지막으로 1917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로 이사하였다. 이주한지 2년 후인 1871년 한인(韓人)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소년시절 러시아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축적하였다. 1878년부터 조선·중국·러시아 3국 국경이 접해있는 지역인 연추에서 러시아병영의 통역으로 일하였다. 1880년 연추 남도소(南都所)의 러시아어 서기로 피선되어, 3년 동안 문서정리와 사무처리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884년 연해주 당국은 군사적 목적으로 조선 국경까지 군사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도로는 블라디보스토크-라스돌리노예-바라바시-슬라비얀카-노보끼에프스크-크라스노예셀로 촌을 연결하는 군용도로였다. 이 군용도로 건설시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연해주 당국으로부터 영군 300명을 거느릴 권한을 받아 연추에서 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였다. 멍고개라는 명칭은 당시 한인들이 부르던 지명인 것으로 보이며 러시아식 명칭은 ‘바라바쉬’였던 것으로 보인다. 10년간 도로건설에 관여하는 통역으로 일하면서 많은 한인들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1893년 연추 남도소의 도헌(都憲)에 피임되었다. 이때 유실수를 이용한 녹지조성과 교육계몽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축적된 부와 러시아인 주류사회에서 얻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0년대 말 지금의 하산 지구 크라스키노의 노보키예프스크에 최초의 공원(과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서도 큰 업적을 세웠다. 해마다 성실한 많은 한인 젊은이들을 뽑아 러시아 대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넓은 인맥 덕분에 당시 큰 상업회사들이었던 ‘추린’, ‘쿤스트와 알베르스’, ‘퍈코프’, ‘마르코프’ 등의 지역판매상점이 포시에트 지구의 노보키예프스크, 슬라뱐카, 아디미 등에 유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 건물들은 주변에서 가장 멋진 벽돌건물들이었고, 주문신청을 받은 상점들은 1주일 안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상품들을 제공하였다. 1894년 제1차 전러시아 면장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에 갔다. 그 후 13년 동안 도헌으로 일하였다.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여하였다. 1890년대 하반기 재러동포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 연추 지역은 조선·중국·일본과 관련된 러시아의 주요 군사지점으로서 다수의 러시아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막사 등 건축물과 이들이 거주하는 데 필요한 연료, 상품 그리고 이들을 먹일 육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특히, 의화단(義和團)사건, 러일전쟁 등이 일어나자 더 많은 물류가 필요하게 되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한 바실리 루키치(Хан Василий Лукич)와 한 옐리세이 루키치(Хан Елисей Лукич) 형제, 김 표트르 니콜라에비치(Ким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최 니콜라이 루키치(Цой Николай Лукич) 등의 재력가들과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 자신의 조력가들과 상업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러시아 군(軍)에 대한 물품청부사업 등을 통해 성공적으로 물질적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 후 1905년 말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데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을사늑약의 체결로 인하여 한국이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현실에 더욱 놀랐다.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실상과 국제정세를 분명히 이해하고자 할 때에, 평소 “유신개혁 인물로 외국에 망명하여 세계대세를 통관하는” 인물로 알고 있던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두어 번 일본으로 올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바로 일본 도쿄(東京)로 향하였다. 일본에 반년동안 체류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았고, 세계정세의 흐름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박영효와의 만남을 통하여 국가의 위급함을 절실히 깨닫고 이에 민족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서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계동학교(啓東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李範允)과 연락하여 함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쓰고자 하였다. 1908년 4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한 이후 총재로서 내외에 이 조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해조신문(海潮新聞)』에 그 취지서를 게재하였다. 동의회는 1905년 이후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총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함께 한 중심인물은 이범진(李範晉)·이위종(李瑋鍾) 부자와 이범윤 등이었다. 많은 자산의 소유자였으므로 동의회의 조직과 운영, 활동에 드는 비용 대부분을 지출하였다. 러시아 지역에서 한인들의 의병활동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8년 4월까지 연해주로부터 약 1천명의 의병이 함경도로 넘어들어 갔는데, 이때 이범윤과 힘을 합해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부대를 100명 내외의 소부대로 나누어 비교적 일본수비대의 경비가 취약한 지점을 골라 산발적인 도강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국내진공에 성공한 각 부대는 함경도 갑산(甲山)·무산(茂山) 등 예정 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이며 항구적인 국내항쟁을 시도하였다. 한편 의병들의 국내진입에 국경지대의 일본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러시아 지역에 밀정을 파견하는 한편 군대를 전진 배치하여 재러의병의 국내진공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일본 측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이범윤과 함께 이끄는 연해주의병들은 6월말과 7월초에 두만강 하류에 있는 일본 소규모부대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활동은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일제의 러시아에 대한 외교와 이범윤 등과의 갈등·대립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하게 되어 1908년 하반기 이후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러시아 지역의 의병이 이범윤·유인석(柳麟錫) 등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정치적 망명세력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던 시기에 다른 재러한인 자산가계급과는 달리 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일제의 조선 강점이 다가오면서 더욱 무장투쟁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무장투쟁노선에서 계몽운동방향으로 운동 노선을 전환하였다. 1908년 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민족지 『대동공보(大同公報)』 사장으로서 언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장투쟁의 시기를 엿보았다. 『대동공보』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던 시기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11월 18일 창간하여 1910년 9월 1일까지 약 2년 동안 발행한 한글 민족지였다. 이 신문의 종지는 동포의 사상을 계몽하여 문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의 내용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국권회복,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관한 것이다. 재러한인의 권익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대동공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0년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신문 간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대양보(大洋報)』가 간행되자 신문의 발행소 건축에 기여하였다.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일제에게는 최고의 경계대상이었다. 러시아 정부에 대한 일제의 끈질긴 외교적 간섭과 압박, 그리고 공작으로 인해서 한때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0년 러일협정 체결 이후 비밀첩자들을 통해 일제와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는 거짓정보를 날조해 흘렸다. 일제 첩보기관에 의해 기만당한 극동 대군관구사령부는 이러한 거짓선전에 근거를 두고 1911년 러시아에서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가 연해주 군무지사 스볘친(И.Н.Свечин) 앞으로 “본인은 한인 최재형을 애국자이자 러시아에도 충성스런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옹호하는 내용의 협조서신을 보냄으로써 가까스로 일단락되었다. 1911년 12월 19일 일제에 의해 망국민이 된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동포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흑룡주(沿黑龍州)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였다. 1911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권업회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임시임원을 선출하였는데, 그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13년 10월 6일 특별총회에서도, 1914년 1월 19일 정기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4년 권업회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일제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이르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자 독립운동 지휘기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의 노령이주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그 시기를 이용하여 재러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인아령이주오십년 기념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개최될 수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일제와 러시아의 관계가 좋아지자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8월 일제가 한인지도자 28명의 추방을 러시아 측에 요청하였는데, 그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아울러 1916년 8월 러일신협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주요 한인지도자인 김도여(金道汝)·이종호(李鍾浩)의 가택이 수색당할 때, 슬라뱐카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붙잡혀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풀려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얀치헤면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18년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特別全露韓族代表會議)에는 한인회임시중앙총회에서 보고위탁을 받아 초청받은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안건토의를 구성한 각 분과위원회 가운데 토지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간부선출에서 이동휘(李東輝)와 함께 만장일치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본군이 1918년 8월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침략해 오자 가족을 이끌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우수리스크 군회(젬스트보) 의원, 검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대한국민의회는 회장 문창범(文昌範), 부회장 김철훈(金哲勳), 서기 오창환(吳昌煥) 등의 명의로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한 3월 중순 국민의회가 이동휘를 선전부장에, 김립(金立)을 이동휘의 부관에 선임해서 이동휘를 간도 방면에 파견해 독립운동의 선전 선동에 종사하게 하였을 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이동녕(李東寧)·이시영(李始榮)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김신부로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연해주와 연흑룡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극동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쉬코토보, 포시에트, 기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대대적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김이직(金利稷)·엄주필(嚴柱弼)·황경섭(黃景燮, 황카피톤)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에 붙잡혀서 총살당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붙잡히기 전날 밤 몸을 피신하라는 가족들의 간청이 있었지만,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나는 일본군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당시 60세),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고 말하며 죽음의 상황을 준비하였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8년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출, 대동공보 사장, 1911년 권업회 발기회 회장, 1914년 한인아령이주 5주년 기념회 회장,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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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동의회,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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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김재병</name>
<nameHanja>金才秉</nameHanja>
<movementFamily>국내항일</movementFamily>
<orders>대통령표창(2015)</orders>
<addressBirth>함북 경원(慶源)</addressBirth>
<aliases>김재병(金裁秉)</aliases>
<bornDied>1886. 11. 17 ~ 미상</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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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1. 3. 7. ; 「身分帳指紋原紙」, 경찰청. ; 『매일신보』, 1921. 2. 10. ; 『조선일보』, 1921. 2. 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references>
<content>1886년 11월 17일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안농면(安農面) 양동(良洞)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자료에 따라 김재병(金裁秉)으로도 되어 있다. 1920년 10월 3일경 중국 훈춘(琿春)의 군정서(軍政署)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재욱(金載旭)·박원규(朴元奎)·김석(金碩)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에 대해 협력해 줄 것을 요청받자, 이를 승낙한 후 이들을 같은 마을의 황하일(黃河一) 집으로 안내하였다. 당시 김재욱 등은 이들에게 독립하려면 반드시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무기를 구입하려면 상당한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이를 모집하려고 국내로 들어왔다고 얘기하였다. 황하일과 함께 이에 적극 협력하기로 마음 먹고, 마을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낼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물색하였다. 황태민(黃泰敏)·최상혁(崔相赫) 등 마을 주민 몇 명을 황하일 집으로 불러서 총 255원의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며, 직접 한만섭 등 몇몇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1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경흥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으로 징역 5월(미결통산 50일)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항소 하였으나, 그 해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6월 19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0년 함경북도 경원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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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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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계성범</name>
<nameHanja>桂性範</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애족장(1990)</orders>
<addressBirth>함남 안변(安邊)</addressBirth>
<aliases>계준호(桂埈昊)</aliases>
<bornDied>1899. 5. 1 ~ 1985. 6. 25</born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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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上海에서의 赤化鮮人 趙應順 및 桂俊昊의 陳述 槪要」(高警 제436호), 1922. 2. 14. ; 「政治에 관한 犯人移送方의 件」(機密 제65호), 1922. 2. 20.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高警 제1140호), 1922. 4. 13.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2. 6. 26. ; 『경향신문』 1954 . 5 . 9, 1960. 6. 29, 1963. 11. 8, 1967. 5. 26, 6. 9, 1971. 5. 7, 1977. 11. 30. ; 『동아일보』 1960. 12. 1, 1980. 12. 1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9, 1975.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1996.</references>
<content>1899년 5월 1일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위익면(衛益面) 죽근리(竹根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계준호(桂埈昊)이다.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 후 1920년 11월경 하얼빈[哈尔滨]과 모스크바(Москва)를 거쳐, 그해 12월 치타(Чит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한인사회당 당원대회에 참가한 조응순(趙應順)을 만났다. 그와 협의한 뒤 1921년 9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와 재무총장 이시영(李始榮)으로부터 자금 모집원으로 임명되어 하얼빈으로 파견 명령을 받았다. 출발 전 상하이로 돌아온 조응순을 다시 만났다. 조응순은 한국독립단 부단장으로서 일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한 의군단 결사대를 조직했는데 이에 가입하였다. 조응순의 소개로 만난 김춘(金春)의 도움을 받아 하얼빈으로 가는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에서 출발하려다 1922년 1월 4일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본국으로 압송되어 1922년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4년 5월 3일 감형으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20~1922년 임시정부에서 남북만주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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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대한민국 임시정부</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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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계봉우</name>
<nameHanja>桂奉瑀</nameHanja>
<movementFamily>임시정부</movementFamily>
<orders>독립장(1995)</orders>
<addressBirth>함남 영흥(永興)</addressBirth>
<aliases>북우(北愚), 뒤바보, 사방자(四方子)</aliases>
<bornDied>1880. 8. 1 ~ 1959. 7. 5</bornDied>
<placeOfOrigin/>
<references>『北愚 桂奉瑀 資料輯』 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 「러시아공산당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회의록」, 국사편찬위원회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러시아편 I), 1997. ; 계봉우, 「이력서」, 1936.1.28. ; 『國外에 있는 容疑朝鮮人名簿』, 朝鮮總督府警務局, 1934년 6월.國外容疑朝鮮人名簿, 總督府警務局. ; 『만주지역 本邦人 在留禁止關係雜件』, 국가보훈처, 2009. ; 金正明 編, 『韓國獨立運動』 第2卷, 東京 : 原書房, 1967. ; 「高麗共産黨代表會의 內幕및 國際共産黨 鮮人部 經過狀況에 관한 譯文送付의 件」(1923.4.23), 일본외무성사료관 소장,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鮮人과 過激派2』 제16권,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1996.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편, 『러시아의 한국학과 북우 계봉우』, 소명출판, 2013. ; 윤병석, 「桂奉瑀의 생애와 저술목록」, 『仁荷史學』 1, 인하역사학회, 1993.12. ; 반병률, 「노령에서의 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의 이해와 평가-광복50주년기념 4개년 학술대회 논문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 조동걸, 「解題: 北愚 桂奉瑀의 생애와 저술활동」, 『北愚 桂奉瑀 資料輯』 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 반병률, 「在露韓人 강제이주 이전의 한인사회의 동향(1923~1937)」,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 1997. ; 반병률, 「러시아혁명 전후 시기 계봉우의 항일민족운동, 1919~1922. ; 기독교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편, 『 러시아의 한국학과 북우 계봉우』, 소명출판, 2013.</references>
<content>1880년 8월 1일 함경남도 영흥(永興)의 관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7세부터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사기(史記)를 읽었다. 15세부터 24세까지 10년 사이 동학에 입교하기도 하고, 정감록(鄭鑑錄)·점술·사주·관상법 등과 함께 병서(兵書)도 공부하고, 도인(道人) 최통 선생을 찾아 헤매거나 정도령을 찾아 백두산 일대를 뒤지는 등 청소년 시기를 방황하며 보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과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고 마음을 잡았다. 1906년 10월 김정규(金正奎)·권영호(權永鎬) 등과 함께 영흥에 홍명(洪明)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의 역사, 지리와 한문을 가르쳤다. 1908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1910년에는 함흥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08년에는 도쿄 유학생 출신들이 만든 태극학회(太極學會)에 가입하여 영흥지회를 결성하였다. 이동휘(李東輝)의 영향으로 영흥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 지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이동휘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1월 정창빈·오영선·장기영·도용호·김하구 등 이동휘의 추종자 30여 명과 ‘기독교 포교’라는 명목으로 대거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북간도 소영자(小營子)에 위치한 광성학교(光成學敎, 길동기독학당)에서 한국 역사와 조선지지(朝鮮地誌)를 가르쳤다. 아울러 청년 단체인 청년친목회(靑年親睦會)와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대동협신회의 기관지인 월간잡지 『대진(大震)』의 책임주필로 활약하였다. 1912년 중등부 교재『조선역사』와 수신(修身) 역사 교과서인 『오수불망(吾讐不忘)』, 『신한독립사』를 저술하여 대동협신회에서 발행하였다. 이동휘 등이 1911년경 북간도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광복단(光復團)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광성학교가 운영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1913년 가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자치기관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여 기관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1914년의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이동녕·이상설 등이 1913년 10월 말 11월 초 무렵에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復軍政府)의 책임비서로 제1대 이상설, 제2대 정도령(正都領)인 이동휘 등과 함께 항일 광복 전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권업신문』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1914년 6월 28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권업신문』이 폐간되는 8월 2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동맹국이 된 러시아 정부에 이동휘 등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에 의해 이동휘·이종호·이동녕·정재관 등 20명과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다시 북간도 왕칭현(王淸縣) 하마탕(蛤螞塘)으로 도피하였다. 하마탕에는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 등 가족들을 비롯하여 구춘선·김학규·임병극 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로 중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이동휘·이종호·정재관의 주동으로 중국과의 연합을 통한 대일 전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강력한 요구를 받은 중국 당국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16년 11월 당시 중러 국경지대를 순방하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던 이동휘가 하마탕에 돌아와 있었다. 이동휘는 부인 강정혜의 생일 10월 29일을 맞아, 훈춘에서 왕칭현 하마탕으로 이사한 가족과 동지들과 해후하려고 하마탕에 와 있었다. 21개조 타결 이후 룽징(龍井) 일본총영사관은 이동휘의 하마탕 방문 정보를 입수하고, 6,7명의 형사를 급파하여 이동휘 본가를 습격했으나, 동네 청년들의 제보로 이동휘는사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이때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회령(會寧)으로 압송된 후, '치안법 위반'으로 영종도에서 1년간 금고형을 선고받고, 이후 고향인 영흥에서 3년간의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았다. 1918년 12월 고향 영흥에서 거주 제한을 받고 있던 중 함경남도 덕원(德源)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姜基德)을 만나 서울에서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로 1919년 2월 27일 서울로 올라가 남문(南門) 안 봉래정의 신학생 숙소인 신행여관에 머물렀다. 이때 거사 일이 바뀌어 3월 1일 1시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제2의 만세시위운동 지휘책임자였던 강기덕의 요청에 따라 세브란스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집필하여 건네주었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참관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가 영흥으로 귀환한 후 원산에서 망명 계획을 부탁한 바 있는 차장로(車長老)를 찾았다. 차장로의 소개로 강우규(姜宇奎)를 만나, 훗날 강우규 의거의 공모자가 되는 최자남(崔子南)을 소개받은 후,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하였다. 신한촌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 철혈광복단(철광단)에 가입하였고, 모친 등 가족들을 만나려고 북간도 하마탕을 방문하였다. 1910년대 민족운동 당시 동지들이 주도하는 북간도 국민회와 연계를 갖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철혈광복단(鐵血光復團) 단장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1919년 11월경 북간도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떠났다. 신한촌에 도착한 당일 거행된 단장 취임식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노령의 국민의회가 통합되는 것을 반대하는 일부 단원들이 상하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간에는 승인·개조 분쟁으로 당초의 통합 합의 협약이 깨지고, 일부 철광단 간부들에 의해 임시정부 반대와 국민의회 복설이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임시정부 지지 입장과 철광단의 반대 입장이 맞서는 상황에서 다수 의견에 따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났다. 1919년 11월 26일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북간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다. 독립운동사 재료수집원,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활약하는 한편, 이광수의 청탁을 받고『독립신문』1920년 1월부터 5월까지 거의 매호에 민족운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이때 필명인 사방자(四方子)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4회, 1920.1.1 1.10, 1.13, 1.22)를 발표하고,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아령실기(俄領實記)」(8회, 1920.2.26, 3.4, 3.13일, 3.18, 3.25, 4.1, 4.3), 「김알넥산드라소전(小傳)」(3회, 1920.4.17, 4.20, 4.22), 「의병전(義兵傳)」(7회, 1920.4.27, 4.29, 5.1, 5.6, 5.8, 5.11, 5.15)을 각각 발표하였다. 1920년 4월 19일 안정근, 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서간도 파견원에 임명되었으나 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의 소개로 “국가 평등, 인종 평등, 세계 평등”의 이념을 가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한편 대동단은 『구국일보(救國日報)』 주필 황줴(黃覺, 黃介民)가 주도하던 단체로, 황줴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15년 말 김철수·윤현진·장덕수 등의 한국 유학생들과 대만의 펑화룽(彭華榮)과 함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또는 신아동맹단)을 조직한 바 있다. 신아동맹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일체의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 4월경 김립(金立)의 권고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를 읽고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곧바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기관지 『자유종(自由鐘)』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즈음『독립신문』에 기고한 「경성노동회에 대하여」(1920.5.27)에는 사회주의적 인식이 반영되었다. 9월 초, 한인사회당은 한인공산당으로 개칭되며 조직을 확대·개편하였고, 이때 이동휘는 한인공산당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립은 이한영·김만겸·안병찬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선동출판부는 신문 『신생활』(『신대한독립보』를 개칭)과 잡지 『공산』(『자유종』을 개칭)을 출판하는 한편, 『공산당선언』을 번역·발간하였다. 1920년 12월 2일 원동공화국의 수도 치타에서 7인의 지역대표가 참가하여 개최한 한인공산당 중임(重任) 당원회의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원동부(遠東部; 달이뷰로, 원동공화국 수도 치타 소재) 소속의 한인부(韓人部) 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다른 위원으로 박애(朴愛), 김진(金震), 박창은(朴昌殷), 장도정(張道政)이 있다. 1921년 1월 16일에 열린 한인부 정기회의에서 박애·장도정과 함께 3인으로 구성되는 간부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선전선동출판부장에 선임되었다. 한인부의 선전선동출판부장으로서 1921년 2월 한인부의 기관지인『노동신문』을 창간하여 매월 4회 간행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극동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탄압으로 『노동신문』은 폐간되었다. 이르쿠츠크파는 동양비서부의 일방적 후원을 받아, 5월의 전한고려공산당대표대회 준비위를 한명세·남만춘·이성·채성룡·김철훈 등 자파 일색으로 조직하였다. 또한 참가 대표들에 대한 자격심사권을 확보함으로써 상하이파의 대회참가 여지를 박탈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의 남만춘(南萬春)은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B.Z.Shumiasky)의 명령을 받아 치타의 한인부를 해산하고, 하바롭스크에 있는 한인 공산 기관들을 해산시켰다. 장도정·김진·오성묵(吳成黙) 등 한인공산당위원회에서 발간하던 기관지 『신세계』도 폐간시켜 대표 파견과 활동할 권리를 박탈하였다. 슈미야츠키의 지도하에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5월 4일에서 17일에 걸쳐 제1차 고려공산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국과 국내에서 32개의 공산주의 단체와 8,730명(1,880명은 현역당원, 나머지는 후보당원)을 대표한 83명이 참석하였다. 이 가운데 64명만이 표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상하이에서 김만겸·안병찬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40만 원 자금 문제로 이동휘·김립 등의 한인사회당 측을 반대한 인물들이었다. 대회는 동양비서부의 슈미야츠키가 모든 진행을 지도하였다. 대회 폐회 후 다음 날인 5월 1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와 동양비서부가 합동 회의를 개최하고 위원제의 임시고려혁명법원을 조직하였는데, 한인부 위원 4인에 관한 사건을 처리하려고 구성한 것이다. 이들 한인부 간부들은 원동부의 명령을 받고 한인부 문부들을 송부한 5월 9일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5월 16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들의 체포와 압송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가 주관한 것이었다. 동양비서부는 이어 5월 15일 상해파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 흑하 지방(마사노프)에 있던 김규면(金圭冕)·한운용(韓雲用)·박원섭(朴元燮)·우시욱(禹時旭)·주영섭(朱英涉)·안태국(安泰國)·임상춘(林常春) 등 13인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흑하 지방 현지의 친상해파적인 러시아 정치보안부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1921년 5월 18일 한인부 간부들과 함께 김철훈·채성룡·채동순 3인의 취조를 받았고, 5월 말 재판 결과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소비에트러시아 제5군단과 동시베리아군대 혁명법원에서 감형되어 3년의 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이동휘·박진순(朴鎭淳)·홍도(洪濤, 洪鎭義)구성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한 결과 석방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양파 대표단의 입장을 검토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검사위원회로 하여금 제반 사실과 문건들을 검사하게 하여 5개 항으로 된 「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서」(1921.11.15)를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참변을 조사할 유력한 검사위원을 선출하여 동양비서부에 의해 체포되어 있는 박애 등을 석방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할 것, 자유시참변으로 투옥된 80여 명 가운데 검사위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는 곧바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검사위원회가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동수로 구성하도록 결정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실권은 이동휘와 홍도에게 넘겨졌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를 방문하게 되자 이르쿠츠크파는 그 이전에 한인부 간부들로부터 ‘자과(自過)에 대한 회개’를 받아내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고 12월에 서둘러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후 치타에서 조선인 청년회 잡지 『새사람』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 통합대회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개최 전날인 10월 18일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제1차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연합 간부와 주요 활동가들이 각각 9명씩 18명과 지도원으로 러시아공산당원 3명이 참석하였다. 상해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북간도 옌지현 대표로 의결권을 갖고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선출된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 10명에 포함되었는데, 신간부는 이동휘·홍도·박밀양(朴密陽, 朴允海)·김아파나시·윤자영(尹滋英)·장기영(張基永)·김진·성예완·김철수였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 또는 고려총국)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된 1922년 말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면서 국내와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기까지 교육, 집필 그리고 반종교·무신자 운동을 통한 한인 사회의 사회주의적 건설 과정에 주력하였다. 활발한 집필 활동은 원동에서 『선봉』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기치』에 게재된 기고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이만 ‘고려인회’의 촉탁으로 원동 조선인 소학교의 『조선력사』를 저술하였다. 1924년에는 연해주 학무국의 지정으로 일급학교용 한국어 독본 『붉은 아이』를 편찬하였다. 1924년 1월부터 6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제8호 중학교에서, 1926년 8월부터 1930년 3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노동학원에서 한국어를 교수하였다. 1930~1931년에는 초급중학교용 고려어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해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하바롭스크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극동 스파스크 스비기야노 소재의 국민학교에서 고려어를 가르쳤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북프로홀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37년에는 강채정과 공저로 원동변강국립출판부에서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간행하였다. 한인 사회의 문화적 볼셰비키화를 위해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에 남아 있던 종교와 전통적인 미신과 관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1929년 블라디보스토크현 당간부 선전과의 승인을 받아 오성묵과 함께 무신(자)동맹을 조직하였다. 고려인무신동맹의 요청을 받아 반종교운동의 근거자료로서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을 저술하였다. 교육 문화 사업을 통한 한인 대중의 볼셰비키화 과정에서 두 개의 중요한 논쟁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하나는 1930년 11~12월에 오창환과 주고받은 『고려문전』 논쟁이고, 또 하나는 한자폐지론-한자제한론 논쟁이다. ‘고려문법통일에 대한 협의회’에서 한글 문법에 대한 협의와 토론을 거쳐, 오창환의 이론에 따라 저술한 『고려문전』을 비판하자, 오창환이 반박하는 형식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한자폐지론은 1927년부터 시작된 ‘고려문자라틴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라틴화운동’과 관련되어 진행되었는때 이때 한자제한론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에 『과학의 원수』(1930),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1932), 『조선역사』1~2권(1936), 3권(1953), 『고려어교과서』(1937, 강채정과 공저) 등을 저술하였다. 1936년 1월 28일에 작성한 「이력서」에는 1935년까지의 교육·저작 활동이 기록되어 있고, 1920년 3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로 들어간 때까지의 민족혁명사업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1940년대에 카자흐스탄에서 『조선말의 되어진 법』(1941), 『꿈속의 꿈』(1940~1944), 『조선문법』(1947~1948), 『조선문학사』 1~2(1950)를 집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1907~1910년 서북학회, 신민회 등을 통해 한말구국운동에 참여,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광성학교 육성, 『조선역사』·『오수불망』·『신한독립사』저술, 1913년 연해주 이주하여 권업회 참여, 『권업신문』기자, 1919년 임시의정원 의원, 『구국일보』기자, 『독립신문』에 필명(사방자, 뒤바보)으로 기고하며 언론활동, 1920년 한인사회당 입당, 『자유종』 주필, 1923년 원동 조선인 소학교의 『조선력사』서술, 1930~1931년 초급중학교용 고려어 교과서 저술, 1933~1935년 하바롭스크대학·스파스크 스비기야노·북프로홀리학교에서 고려어 교수, 1937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 후 교육·집필·반종교 운동에 주력, 1940~1944년 『꿈속의 꿈』집필, 1941년 『조선말의 되어진 법』저술</activities>
<engagedEvents>3.1운동,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자유시참변</engagedEvents>
<engagedOrganizations>서북학회, 신민회, 광성학교, 권업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한인사회당</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item>
<item>
<name>윤봉길</name>
<nameHanja>尹奉吉</nameHanja>
<movementFamily>의열투쟁</movementFamily>
<orders>대한민국장(1962)</orders>
<addressBirth>충남 예산(禮山)</addressBirth>
<aliases>본명: 우의(禹儀), 호: 매헌(梅軒)</aliases>
<bornDied>1908. 6. 21 ~ 1932. 12. 19</bornDied>
<placeOfOrigin>파평(坡平)</placeOf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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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禮山郡) 덕산면(德山面) 시양리(柿梁里)에서 농민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金元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奉吉)이다. 1913년 6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18년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3 · 1운동이 일어나자 어린 마음에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1921년 14세 때부터 마을 부근의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熟)에서 6년 간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과 한학을 수학하였다. 특히 시재가 뛰어나서 오언 · 칠언 등 한시를 잘 지어 『명추(鳴椎)』, 『옥타(玉唾)』, 『임추(任椎)』 등의 제목으로 시집을 꾸며, 3백여 편의 자작 한시를 수록하였다. 오치서숙 수학 시기에 한문만 아니라 신문과 『개벽』 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신학문을 자습하고 민족 문제와 농촌 문제들을 학습하였다. 1926년 19세 때 스승 성주록은 윤봉길에게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석별 기념으로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하여 첫 단계로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갑 · 을 2개 반으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치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지식향상에도 노력하며, 월례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였는데, 『농민독본』의 내용을 보면, 20세의 청년 윤봉길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체계화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928년 21세에 농촌부흥운동 본부로서 부흥원(復興院)을 설립하고, 그 건물 대들보에 붓글씨로 “조선 개국 사천이백육십일년 이월 십오일 오시”라는 단기를 적어 강력한 민족의식을 명시하였다. 이 시기 그는 격조 높은 한시를 지어 읊었는데, 『대나무를 노래함(詠竹)』이라는 칠언절구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기개를 대나무에 빗댔다. 대나무를 노래함(詠竹) 그대는 꼿꼿이 서 있어 굽힐 줄을 모르는데(此君挺立不許回) 마음 소통은 그 누가 열어주었나(心契疏通誰爲開) 절개가 사철을 관통해서 언제나 봄빛일세(節貫四時春色准) 바람은 천 길이나 높은데 빗소리 다가오누나(風高千尺雨聲來) 어찌타 광주리로 짜여서 임금께 드려졌나(敢承厥匪登朝闕) 한갓되이 긴 장대 되어 낚시터에 드리워졌나(謾作長竿向釣臺) 시험삼아 한 가지 꺾어 퉁소 만들어 불어보니(試把一枝堪有問) 강남에서 불던 그 옛 가락 애달파서 차마 못 듣겠네(江南古調使人哀). 1929년 농민운동단체인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월진회의 목표는 농민 자신의 힘에 의한 자활의 쟁취에 있었다. 월진회의 활동은 1)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 2) 애국 사상 및 정치의식의 고취, 3) 공동 경작 및 공동 식수를 통한 공동 정신의 함양, 4) 축산 등 농가 부업을 통한 농가의 경제생활의 향상, 5) 소비조합 운동, 6) 위생 보건 사업 및 청소년의 체력 단련 등이었다. 일제는 윤봉길의 농민운동을 불온시하여 자주 덕산주재소로 호출하였다. 그는 농민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독립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1930년(23세) 3월 6일 『장부출가생부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였다. 그는 칭다오(靑島)에서 1931년 10월 18일 고향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우리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고 조국과 겨레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나섰음을 천명하였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분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중국인의 반한 ·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이를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1931년 9 · 18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1932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을 수립해서 일제의 직접적 지배하에 두었다. 이어서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략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차이팅카이(蔡廷楷)가 지휘하는 제19로군, 장즈중(張治中)이 지휘하는 제4로군(제87사단과 88사단) 및 민병대 등 30만 명을 투입하여, 제19로군과 협동해서 상하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해군과 육군 병력 10만 명에 비행기 100여 대를 투입해서 1개월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상하이를 점령해버렸다. 1931년 11월 임시정부 국무회의 회의에서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특공작전으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킬 것을 결의하고 전권을 김구에게 위임하였다. 김구는 즉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특공 작전 강화를 모색하던 때, 그를 찾아가서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이 필요할 때는 자기가 이를 담당하겠다고 자원함으로써, 상해 의거 준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경축일, 4월 29일) 을 일본군의 상하이점령 전승 경축식을 겸해서 일본조계인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었다. 경축식과 동시에 관병식이 열리는데 일본 거류민들은 입장권, 일장기와 함께 각자 도시락과 수통만 휴대하고 참석하라고 공고하였다. 전승 경축식에는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이 모두 모일 것이기 때문에 의거를 감행할 절호의 기회였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4월 26일 혈서로 ‘선서문’을 써서 사명 수행을 맹세하였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4월 28일 저녁에는 자필 약력과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시 1편, 조국 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시 1편, 두 아들에게 남기는 다음의 유시 1편을 써서 남겨두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은 김구가 중국군 장교로서 중국군 제19로군 병기창 주임으로 복무하고 있던 왕웅(王雄, 본명 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중국인 기술자 왕백수(王伯修)의 지도 밑에서 특별히 제조한 도시락 폭탄과 어깨끈이 달린 수통형 고성능 폭탄의 사용방법을 익혔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일찍 7시 45분경 그는 입장권도 없이 중국인 수위 경비시간에 맞추어 홍구공원 정문 앞에 도착하였다. 중국인 수위가 입장권의 제시를 요구하자, 윤봉길은 “나는 일본인이다. 입장권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일축하고, 바로 장내로 들어갔다. 양복을 입고, 일본인처럼 수통을 어깨에 걸머메고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든 윤봉길의 행색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기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 관병식 · 경축식장은 중앙 식단을 중심으로 전면의 좌우에 일본군 장교들이 도열하였고, 식단 후면에는 위병들과 반경 약 19m의 반원형으로 기마 헌병대를 2열로 배치하여 3중으로 경계하였다. 일본 거류민의 관람석은 식단으로부터 20m 떨어져 있었다. 식단의 단상에는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좌측에는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과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村井), 그 우측에는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友野) 등 7명의 군정 수뇌들이 앉았다. 1만 명의 일본 거류민 및 1만 명의 일본 군인들과 각국 외교관 · 무관들이 초청되어 참석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식은 2부로 나누어서 제1부의 관병식은 오전 9시부터 홍구공원 앞 대로에서 기갑 부대와 분열식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11시에 종료하였다. 제2부의 축하식은 약 30분 간 휴식 후 11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관병식과 축하식을 관찰하면서, 3중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 2개의 폭탄을 연속 투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수통형 폭탄을 던져 판가름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개회사와 축사가 있는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일본국가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국가 합창이 종료에 가까워오는 순간이 최적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 도시락형 폭탄을 내려놓고, 수통형 폭탄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뽑은 후 2, 3명을 어깨로 밀어젖히면서 식단 후방 약 1간 정도의 거리까지 앞으로 달려나가서 상하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기치 중장을 노려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가 투척한 폭탄은 정확하게 시라카와 대장과 우에다 중장의 바로 앞 단상 중앙에 떨어져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였다. 단상에 서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우에다 겐기치 중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회 서기장 도모노 등 7명은 일시에 쓰러졌고 경축 식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이때가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이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중상을 입고 입원했으나 사망하였다. 우에다 중장은 중상을 입고 오른쪽 발가락을 절단하였다.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중상을 입고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는 중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는 즉사하였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는 중상을 입었다. 1932년 4월 29일 하오 1시경에 ‘상해 의거’는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 반침략 투쟁이거나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알았다가, 이튿날부터 한국 청년 윤봉길의 항일 독립운동임이 밝혀지자 전세계는 더욱 놀라게 되었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다음의 몇 가지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독립운동이었다. 첫째, ‘상하이 의거’는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붕괴된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연대를 다시 강화하고, 중국 영토 안에서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여건을 회복해 주었다. 중국인들은 30만 명 중국군을 투입하여 1개월여 치열한 항전을 벌이고서도 패배하여 상하이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치욕과 울분에 떨다가, 한국 청년 윤봉길의 의거로 일본 침략군 총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 수뇌의 이동체가 궤멸하자 일제히 환호했으며, 윤봉길을 극구 칭송하고 한국인들에게 무한히 감사하였다. 만보산사건으로 말미암은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악감정과 적대감은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국인에 대한 감사와 협조로 급반전되어, 만주와 중국 안에서 독립운동의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다. 둘째, ‘상하이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침체에서 부활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윤봉길 특공작전의 커다란 성과에 고무된 다수의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을 재인식하여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재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중국 각 단체와 관민의 재정 지원과 편의 제공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임시정부는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한국 청년이 해냈다”고 윤봉길 특공작전 의거를 높이 평가하고, 중국군의 사관학교 안에 한인 장교 훈련반을 설치케 하여 여기서 양성된 한국 청년들이 후일 임시정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셋째, ‘상하이 의거’는 중국 상하이를 침략 점령한 일본 침략군 총사령부의 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를 섬멸함으로써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중국군 30만 명의 치열한 저항도 물리치고 상하이를 무력 점령한 막강한 일본군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 7명을 일본‘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장에서, 일본군의 막강함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자리에서,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특공 작전으로 궤멸시켰으니 일본 침략군이 받은 실제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일본군이 전쟁을 확전하는 경우 중국 청년들이나 한국 청년들 가운데 제2, 제3의 윤봉길이 계속 나와서 특공 작전을 감행할 경우를 일제측은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이 중국 관내지역으로의 확전을 단념하고 1932년 5월 5일 중국측과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한 것은 국제적 압력의 영향뿐만 아니라 윤봉길의 일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이하 총사령부 이동체 섬멸이 가한 심대한 타격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상하이 의거’의 성공은 일제의 잔혹무비한 식민지 통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한국 민족의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독립사상을 크게 고취했으며, 전반적으로 국내외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다섯째, 상하이 의거는 국제도시 상하이를 무력 침략하여 점령한 일본군의 동태를 전세계가 주시하는 속에 상하이의 외국인 공동조계 안의 홍구공원에서 외국인들의 참관과 주시 속에서 일본 침략군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을 섬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세계를 더욱 크게 놀라게 해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매우 완강하고 용감하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였다. ‘상하이 의거’ 뒤 윤봉길 의사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훙커우공원 옆의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일제 헌병대의 심문에 대답하면서, 현재 한국민족은 실력이 없어 자기의 의거로 당장 독립이 실행되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한국을 잊어버린 전세계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뇌리에 깊이 새겨 넣도록 함은 장차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하여 의거를 일으켰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강국인 일본제국주의 등 제국주의 열강도 다음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피폐하게 될 것이고, 세계대전 후에 한국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며, 우리 독립운동가의 역할은 이 독립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응수하였다. 1932년 5월 1일 그는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 검찰에 송치되었고, 5월 25일 일본 상하이 파견군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金澤) 육군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이튿날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문 · 저작 · 관련자료들은 『매헌윤봉길전집(2012)』에 수록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content>
<activities>고향에서 농민운동, 부흥원 설립, 월진회 조직,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의 김구가 지휘하는 한인애국단 가입,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상해 점령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 군정 수뇌 7명에게 폭탄을 던져 섬멸한 의열 특공작전에 성공하여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최대의 전과 쟁취 순국.</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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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agedOrganizations>월진회, 한인애국단</engagedOrganizations>
<isForeigner>내국인</isFore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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