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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해윤 嚴海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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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엄해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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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嚴海潤 |
| 본 관 | |
| 이 명 | |
| 출신지 | 강원 영월(寧越) |
| 생몰년월일 | 1864 ~ 1909. 11. 30 |
| 운동계열 | 의병 |
| 관련 단체 | 노응규 의병부대, 이은찬 의병부대 |
| 관련 사건 | 중기의병(노응규 의병부대), 후기의병(이은찬 의병부대) |
| 주요 활동 | 1906년 노응규 의병부대와 1908년 이은찬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의병활동 전개 |
| 포상훈격(연도) | 독립장(1996) |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부내면(府內面) 행정리(杏亭里, 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의하면 1909년 당시 46세로 기록되어 있어, 186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의원(醫員)으로 생업에 종사하다가, 1906년 11월 20일 서은구(徐殷九)의 소개로 을사늑약 이후 충북 황간군(黃澗郡, 현 영동군 황간면)에서 의병을 일으킨 노응규(盧應奎) 의병부대의 종사관 노공일(盧公一)을 만나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노응규 의병부대에서는 선봉장을 맡았는데, 노응규의 심복으로 불릴 정도로 큰 신임을 받았다. 노응규를 도와 영동군(永同郡)·청산군(靑山郡, 현 옥천군 청산면)·옥천군(沃川郡)·보은군(報恩郡) 일대에서 경부선 철도와 열차를 파괴하는가 하면,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척후병을 패퇴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1월 8일 황간군 상촌면(上村面) 거리(巨里, 현 영동군 상촌면 일대)에 있는 주점에서 동료들과 함께 휴식하던 중 황간분파소에서 파견된 순검들의 기습을 받고 붙잡혔다. 1907년 5월 18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형(流刑) 7년을 받고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1908년 (음)11월 10일 이은찬(李殷贊)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다시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이은찬 의병부대에서 참모의 직을 맡아 동료 의병 50~60여 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抱川郡)과 양주군(楊州郡)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음)12월 이은찬 의병부대에서 이종협(李鍾協)을 대장으로 분대가 조직될 때 함께 하였고, 참모로서 황해도 금천군(金川郡)과 토산군(兔山郡)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붙잡혀 경성감옥에 수감되었으나, 1909년 4월 13일 궂은 날씨를 틈타 같이 수감 중이던 유문재(柳文在)·유현서(柳鉉西)·오남석(吳南石)·이성팔(李星八) 등과 함께 간수를 제압하고 탈옥하였다. 그러나 도주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4월 16일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신둔리(新屯里, 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일대)에서 재차 붙잡혔다.
이 일로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9월 17일 경성공소원에서 이른바 강도죄, 수도 도주죄 등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18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같은 해 11월 30일 경성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