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국 安泰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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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안태국
한자명 安泰國
본 관 순흥(順興)
이 명 호: 동오(東吾)
출신지 평남 중화(中和)
생몰년월일 1875. 9. 23 ~ 1920. 4. 11
운동계열 계몽운동
관련 단체 신민회, 청년학우회, 한민회, 임시정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7년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 1909년 청년학우회 창립 주도, 태극서관 설립, 1919년 북간도 훈춘 3·1운동 지도, 훈춘 한민회와 한민회 독립군 창설 지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875년 9월 23일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지도면(至道面) 상사리(上四里)에서 가난한 농촌 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분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동오(東吾)이다.

소년기에 고향 서당에서 약 7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성년기에 평양으로 이사하여 기독교 장로교의 신도가 되었다. 이때 교회 활동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인이 되어 평양에서 ‘비단장사’를 하였다. 협동사(協同社)라는 상회를 설립한 점으로 미뤄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사업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3월 평양 경무서 경무관 박승훈(朴承薰)의 부당한 비리부정 요구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구속되었다. 이때 평양 경무관의 무고한 구속에 항의하여 상인 최응두(崔應斗) 등이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고 단결하여 철시까지 단행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동지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동시에 경무관 처벌을 요구하며 대대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07년 4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 5월 해당 사건이 평남재판소에 넘겨졌고,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이건호(李建鎬)·안병찬(安秉瓚) 등이 평남에 변호사출장사무소를 차리고 변론에 나섰다. 이 사건은 약 6개월 후에 승리로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석방되었지만 사업과 가계는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사업자금은 고갈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이건호·안병찬의 법률사무소(法律事務所) 평양 제1출장소 사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협동사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시기인 1907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귀국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4월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梁起鐸) 등과 더불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고, 고향인 평안도에 지회를 결성하려고 활동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활동을 시작한 1907년 9월경,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신민회 최고위 간부이자 평안남도 총감의 임무를 맡았다. 신민회 초기 최고위 간부조직을 보면, 조직 책임자에 안창호, 회장에 윤치호(尹致昊), 총감독에 양기탁, 서울 총감에 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함경남북도 총감에 이동휘(李東輝), 평안북도 총감에 이승훈(李昇薰), 황해도 총감에 김구(金九), 경남남북도 대표에 김진호(金鎭浩), 충청남북도 대표에 최익(崔益), 강원도 대표에 주진수(朱鎭洙), 기타지역 대표에 김도희(金道熙) 등이었다. 시기에 따라 각도 총감이 변동되기도 했지만, 신민회 창립부터 해체까지 평안남도 총감을 담당하였다.

평안남도의 신민회는 평양이 이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서울 다음으로 막강하였다. 총감이 된 후 서우학회(西友學會), 그 뒤를 이은 서북학회(西北學會) 등에 가입해 이를 통해서도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세력을 배양하고 조직화하며 전국에서도 현저하게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 지사장의 일도 맡았다.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으로서 중앙 총감독인 양기탁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신문 보급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조직, 확대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 신민회 사업으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창립하였다. 태극서관 자본은 평안북도 총감 이승훈이 조달하였다. 태극서관은 애국계몽운동에 필요한 도서의 공급과 출판을 위한 서점의 형태를 취했지만, 내면으로는 신민회의 자금조달과 연락기관을 겸하였다. 그 뒤 태극서관의 전국 주요도시 설립을 추진하여, 서울과 대구에는 태극서관을 설치하면서 이를 전국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안창호가 1908년 9월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의 육성을 위해 찬무원이라는 이름으로 후원회장격으로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신민회의 청년운동 조직으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어 청년학우회 중앙 총무로 활동하던 중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이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 중상을 입힌 일명 ‘이재명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붙잡혀 2개월간 고문을 수반한 조사를 받았다. 이로 인해 최남선(崔南善)이 중앙 총무 후임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풀려난 후 평안남도 총감 겸 발기위원으로서 청년학우회 중앙총회와 평양연회의 강화 발전을 위해 진력하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모든 일을 기록을 남기지 않고 극비리에 수행했기 때문에,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 시절 자세한 활동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안남도와 평양 지역의 모든 애국계몽운동의 배후에는 신민회 평남지회의 지휘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의거가 일어나자, 일제는 발악적으로 안창호 등 신민회 간부 중 일부를 예비 검속하였다. 이에 신민회는 1910년 3월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10년 4월 안창호·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신채호(申采浩)·김희선(金羲善)·이종호(李鍾浩) 등이 망명길에 올랐다.

신민회는 1910년 12월 중앙총감 양기탁의 집에서 다시 전국 간부회의를 열었다. 중앙총감 양기탁, 평안북도 총감 이승훈, 황해도 총감 김구, 강원도 총감 주진수와 이동녕, 김도희 등과 함께 이 간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독립군 간부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를 국외에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평안남도 대표(총감)에 선정되었다. 경기도와 3남(충청·전라·경상)은 양기탁이, 평안북도는 이승훈이, 강원도는 주진수 등이 각각 맡게 되었다. 각도 대표들은 자기 지구에 돌아가 서간도에 세울 독립군 기지 건설설치의 이주민 모집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평남·평북·황해는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와 3남(三南)은 20만원의 군자금을 15일 이내에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평양으로 돌아온 뒤에 15만원의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사업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안악사건)’을 기회로 신민회 황해도지회와 중앙본부의 간부들을 검거하였고, 조사 과정에서 간도에 독립군기지·무관학교 설립계획을 포착하여 신민회 간부들을 붙잡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양기탁·주진수·김도희·임치정(林蚩正)·고정화(高貞華) 등과 함께 붙잡혀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일제는 독립운동세력이 강력한 서북지방부터 이를 해체하고자 이른바 ‘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 신민회 간부급 인사들 600~700명을 일시에 붙잡았다. 일제는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11년 10월 처음으로 신민회라는 국권회복운동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신민회의 회원과 조직을 찾아내려고 무자비한 고문과 탄압을 자행하였다.

당시 복역 중에 있던 중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재기소되었다.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면서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 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1912년 9월 28일 양기탁·윤치호·임치정·이승훈·유동열 등과 함께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도 불렸던 신민회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그 뒤 일제는 세계 기독교계의 국제적 압력과 비판을 고려하여 1915년 2월 13일 윤치호를 사면하였다. 이 여파로 징역 5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16년에 풀려났다. 가혹한 고문과 열악한 옥중생활의 여파로 왼쪽 눈은 절반이 감긴 거의 실명상태였으며 입도 왼쪽으로 돌아가는 등 후유증을 겪었다.

1916년 풀려나자마자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훈춘(琿春)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후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훈춘 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이명순(李明淳)·이광택(李光澤)·황병길(黃炳吉)·고일섭(高一燮)·김정규(金正奎)·김한익(金漢益) 등 후배 동지들과 함께 한민회(韓民會)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 독립군을 창설하는데 진력하였다. 한민회군(韓民會軍)은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하여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19년 9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안창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한성정부(漢城政府)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3개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안창호로부터 1920년 3월경 상하이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중요한 직책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이에 1920년 3월 25일 동지 이보(李輔)를 대동하고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러시아령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을 군사·외교·자치·재정·교통 등 5가지 사업으로 나누어 보고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기려고 했으나, 이를 고사하였고 분열되어가는 북간도 동포들과 연해주 동포들의 민심을 대동단결시켜 이 지역 독립운동의 강화발전에 헌신할 뜻을 밝혔다. 이어 안창호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특파원 파견 직전 장티푸스에 걸려서 1920년 4월 11일 적십자 병원에서 4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임시정부 요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1920년 4월 14일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용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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