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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윤격 方允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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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방윤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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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方允格 |
| 본 관 | |
| 이 명 | |
| 출신지 | 미상 |
| 생몰년월일 | 미상 ~ 1919. 3. 10 |
| 운동계열 | 3.1운동 |
| 관련 단체 | |
| 관련 사건 | 맹산군 맹산면 만세운동 |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10일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 만세시위 참여 |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2000) |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와 출신 지역은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3월 6일부터 10일 사이에 평안남도 맹산군(孟山郡)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군경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맹산군은 천도교 교세가 강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천도교도들이 주도하였다. 인근 지역인 덕천군(德川郡) 천도교구(天道敎區)의 공선원(共宣員) 현성재(玄聖才)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맹산군에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맹산군 천도교구에서도 교구장 문병로(文炳魯)를 비롯한 천도교 간부 길응철(吉應哲)·방기창(方基昌)·정덕화(鄭德化)·김치송(金致松)·이관국(李寬國)·방진원(方鎭垣)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천도교도들이 주도하는 맹산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6일 시작되었다. 문병로를 비롯한 천도교도 30여 명이 시위를 주도하며, 주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7일에는 전날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오후 3시부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천도교도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과 마을 주민들도 참가하여 시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3월 8일에도 연달아 시위가 일어나자 맹산군수(孟山郡守)와 경찰서장이 시위대에게 해산을 권유하였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쳤다. 3월 9일에는 인근 마을의 주민들까지 가세하여 3월 6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이 연일 확장되었다.
3월 10일에는 지난 나흘간과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형태로 만세운동이 면소재지인 수정리(水晶里)에서 다시 진행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가 점차 확장되자, 덕천헌병분대에서 일본군 헌병 장교 이하 10여 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오전 10시 맹산군에 도착하여 가두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해산시켰다.
시위대가 해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헌병대는 책임자를 색출하겠다며 기독교계 교사 1명을 붙잡아 맹산 헌병분견소에 가둬놓고 고문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 100여 명과 함께 오후 2시 30분부터 헌병분견소 앞에서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헌병분견소장은 시위군중에게 분견소 안에서 평화적인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여 시위 군중 가운데 다른 55명과 함께 분견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일제 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동시에 총을 난사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때 53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극적으로 생존하여 탈출한 2명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