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용 朴世用 |
한글명 | 박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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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朴世用 |
본 관 | |
이 명 | 박휘일(朴輝一) |
출신지 | 경남 부산 |
생몰년월일 | 1907. 8. 7 ~ 1935. 8. 12 |
운동계열 | 일본방면 |
관련 단체 |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도야마토건노조, 호쿠리쿠조선노조 |
관련 사건 |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도야마토건노조, 호쿠리쿠조선노조 |
주요 활동 | 1929~1931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도야마토건노조, 호쿠리쿠조선노조 등에서 활동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2006) |
1907년 8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長面) 서부리(西部里,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박휘일(朴輝一)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사촌형인 박세현(朴世鉉)은 기장광복회를 설립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박세현의 영향을 받아 사회의식과 항일의식이 남달랐다. 성인이 된 이후 모종의 활동을 하던 중 붙잡혀 1928년 11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9년 일본 도야마시(富山市)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도야마토목건축노조(富山土木建築勞組) 등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대만인까지 포함하여 전개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활동에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계열이었던 도야마토목건축노동조합도 거의 전멸 상태가 되었다. 1931년 7월 동지들과 세 차례에 걸쳐 모여 협의한 끝에 호쿠리쿠지부준비회(北陸支部準備會)를 열어 조합 활동의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8월 26일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을 도모하였다.
1931년 11월 30일 노동조합원 43명이 일제히 검거될 때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32년 2월 10일 기소되었다. 징역 6년을 받고 가나자와형무소(金澤刑務所)에 갇혔다. 2년 후 가나자와형무소에서 나라형무소(奈良刑務所)로 이감되었다. 1935년 6월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옥중에 겪은 고초로 후유증을 앓다가 풀려난 지 두 달 후인 1935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세용 사망 보도(『동아일보』 1935. 8.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