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락 金河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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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하락
한자명 金河洛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자 : 계삼(季三), 호 : 해운당(海雲堂), 초명 : 길주(吉周), 이명 : 일길(日吉), 길굴(吉窟)
출신지 경북 의성(義城)
생몰년월일 1846. 12. 14 ~ 1896. 7. 14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이천수창의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 결성후 백현전투, 이현전투, 남한산성전투, 1896년 5월 청송 감은리전투, 1896년 6월 경주성전투, 1896년 7월 영덕 남천쑤전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82)

1846년 12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의성읍(義城邑) 원당(院堂) 3리에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석(錫)의 32대손으로 부 김운휘(金運輝)와 모 덕수 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초명은 길주(吉周), 이명은 일길(日吉), 혹은 길굴(吉窟)이다. 김하락(金河洛)이라는 이름은 훗날 개명한 것으로 본명은 김길주(金吉周), 혹은 김일길(金日吉)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이거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 이정배(李庭培)의 딸과 결혼하였고, 슬하에는 장녀 영규(榮奎)와 아들 병우(秉宇)를 두었다.

김하락의 12대조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고려), 14대조 김한계(金漢啓)는 승무원사, 19대조 김근(金近)은 성균진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인해 벼슬길이 막히자 증조부 김기수(金琦洙)·조부 김동화(金東和)·부 김운휘(金運輝) 이래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유천(柳川)이 편찬한 『의성지(義城誌)』에 의하면, “근 40세 가까이 되어 처음 경서와 병서를 옥산(玉山) 성동(城洞)의 암혈에서 읽기 시작하여 수년 만에 통달하고 자칭 길굴(吉窟)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중일기(陣中日記)」에서는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여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학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영남 유생으로 상경했던 재야 유생의 신분이었다. 인상에 대해서는 김도현(金道鉉)의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에서 “키가 크고 시원스러우며, 그의 말은 쾌활하고 씩씩하다”고 적고 있는데, 무인적 기질도 겸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1895년 12월 31일(음)11. 16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창의를 결심하고, 활동 지역을 경기 이천으로 정하였다. 1896년 1월 1일(음)11. 17 경기 이천에 도착하여 당시 이천군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의 협조 하에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처음 함께 창의한 인물들 중 조성학은 이종제(姨從弟)인데, 의병부대에 참여할 것을 직접 권유하였다. 조성학의 본집은 경북 풍기 백운동이고, 비슷한 처지의 영남 출신 재야 유생이었다. 그 외 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은 모두 경기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방춘식과 상의하여 이천군의 포진도안(砲陣都案)에 수록된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하여 수대(數隊)로 나누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우선 구연영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군사 300여 명, 조성학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광주(廣州)에서 남한산성의 별패진포군 300여 명, 신용희는 음죽(陰竹)·죽산(竹山)에서 화포군 300여 명 등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들어가 이미 창의했던 민승천(閔承天)과 합세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천의 창의 소식을 들은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1896년 1월 17일(음)12. 3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의 기치 아래 결성된 의병부대의 편제는 창의대장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 김하락, 도총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신용희, 선봉장 김태원, 중군장 구연영, 후군장 박주영(朴周英), 소모 전귀석(全貴錫), 유격장 김경성(金敬誠), 돌격장 심종만(沈鍾萬), 도지휘종사 안옥희(安玉熙), 대장종사 최순룡(崔順龍)·김명신(金明信), 도총종사 조순희(趙舜熙) , 중군종사 최진엽(崔鎭曄) 등이다.

이천수창의소는 1896년 1월 17일 백현전투(魄峴戰鬪)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월 12일 이현전투(利峴戰鬪)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박주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2월 28일 광주산성 의병부대 심진원(沈鎭元)의 요청에 따라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이석용(李錫容)의 양근(楊根) 의병부대와 합세하였고, 세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남한산성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남한산성 의병부대는 서울 진공작전을 수립하여 투쟁하였으나, 3월 22일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1896년 4월 7일경 이천의병부대의 대장에 추대되어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4월 9일 이천을 출발하여 여주(驪州)~흥원(興原)~백운산(白雲山)~제천(堤川)~단양(丹陽)~풍기(豊基)~영천(榮川)(현 영주)을 거쳐 4월 20일 안동 유동역(楡洞驛)에 도착하였다. 당시 예천(醴泉)을 비롯하여 경북 북부지방 일원에서 의병부대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던 호좌 의병부대 중군장 서상렬(徐相烈)의 제의에 따라 연합의병을 구성하였다. 곧이어 안동 의병부대도 합세하였으나 달성(達城)을 공략하자는 논의 과정에서 의병부대의 연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서상렬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달성 공격을 중단하자는 주장을 하였지만, 이에 반대하여 공격을 강행하자는 주장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고 서상렬과 결별하고 의성으로 의병부대를 옮겨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천의병부대는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하여 금성면(金城面) 금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에 주둔지를 정하고 군비 확충을 위해 금성면 청로동(淸魯洞)의 김택용(金宅溶)을 영입하여 후군장에 임명하였다. 이때 군위에는 관군 3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5월 9일(음)3. 27 의흥을 공략하여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 짐 가량 확보하였다.

한편 군위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은 5월 10일(음)3. 28 의성의병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황산을 공격하였다. 이 황산전투에서 의성의병부대가 크게 패하였다. 5월 11일 의성의병부대의 패보를 듣고 사품(沙品)을 거쳐, 5월 12일 대곡(大谷)에 주둔지를 마련하였다. 이때 관군에 쫓기며 청송으로 들어가던 의성의병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에 의성의병부대를 따라 청송으로 들어가 김상종을 만나 합세하고 관군에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의성의병부대 김상종의 제의에 따라 이천의병부대와 청송의병부대가 상응하여 의성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리하여 의성연합의병부대는 청송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와 의성 비봉산전투(飛鳳山戰鬪)를 치렀다. 감은리전투는 1896년 5월 14일(음)4. 2 의성연합의병부대가 청송군 안덕면(安德面) 감은리(甘隱里)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에서 연합의병부대는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봉산전투는 5월 20일(음)4. 28 의성의병부대와 이천의병부대가 관군과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 이후 청송의병부대와 헤어진 의성·이천 의병부대는 그 본진을 다시 금성산과 비봉산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로 이동하였다. 수정사에서 전열을 정비한 연합의병부대는 비봉산전투를 치른 이후 5월 26일(음)4. 14까지 관군과 대적하였다.

의성연합의병부대는 청송 감은리전투와 의성 비봉산전투를 통해 명실공히 전투 의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봉산전투 이후 의성의병부대의 김상종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피신길에 올랐으며, 이천의병부대의 김하락은 경주로 이동하였다.

1896년 5월 26일(음)4. 14 비봉산에서 출발한 김하락의 이천의병부대는 경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이천에서부터 함께 활동해 온 구연영이 이천 출신의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이천으로 돌아감으로써 전력면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김하락은 50~6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두음산(斗音山)·황학산(黃鶴山)~금학산(金鶴山)~황산(黃山)~실업동(實業洞)~청송 화목(和睦)~도동(道洞)~덕현(德峴)~안덕(安德)~유천(柳川店)~입암(立岩) 등지를 거쳐 6월 15일 경주 인비(仁庇)에 도착하였다. 이천의병부대는 경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6월 8일 실업동전투(實業洞戰鬪)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6월 15일 경주 인비에 도착하자 경주 지역의 유림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이 찾아와 연합의병부대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편제의 경주연합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그 편제는 창의대장 김하락(金河洛), 경주군도소모장 이채구(李采久), 참모 이준구(李俊九)·이종흡(李鍾翕)·장상홍(張相弘)·이우정(李寓禎)·박승교(朴承敎), 좌봉장 서두표(徐斗杓), 우선봉 홍병태(洪秉泰), 좌익 안옥희(安玉熙), 우익 안재학(安載學), 중군 이익화(李益和), 후군 김두병(金斗柄), 좌봉 이용관(李容觀), 우봉 이상태(李相台), 좌포장 황성학(黃性學), 우포장 이시민(李時敏), 영솔 김병문(金炳文) 등이다.

경주연합의병부대는 경주 지역의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이천의병부대·의성의병부대·청송의병부대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참여한 연합의병부대이었다. 물론 의병장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의성의병부대나 청송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병사들이 경주연합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연합의병부대는 조직을 정비한 후 1896년 6월 17일(음)5. 7 경주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 대구부 소속의 관군과 안강 주둔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합하여 경주성을 공략하자 6월 23일 경주연합의병부대는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경주성전투에서 패전한 후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기계(杞溪)~흥해(興海) 등지를 거쳐 영덕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 중 기계에 이르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차츰 합세해 왔고, 청송의병부대도 다시 가담해 왔다. 흥해·청하에서는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흥해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탄약을 조달하는 등 의병부대의 진용은 차츰 정비되어 갔다.

이천의병부대는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영덕으로 진군하였다. 6월 28일(음)5. 18 청송의병부대와 합세한 뒤 6월 29일 영덕 장사를 거쳐, 7월 2일 영덕읍에 도착하였는데, 영덕의병부대의 의병장 신운석(申運錫)이 합세하였다. 영덕에서 다시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더욱 진용을 강화하였다.

7월 5일(음)5. 25 다시 축산으로 이동하였다. 7월 7일 영해의병부대의 선봉과 좌익장이 찾아와 합세할 것을 요청하자 영해부로 들어갔다. 또 7월 9일 안동 의병부대의 전군 류시연(柳時淵)이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류시연과 함께 안동부로 주둔지를 옮기기로 하였다.

7월 11일(음)6. 1 일본군이 청하에서 영덕으로 북상중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우선 이채구(李采九)·이준구(李準九)·홍병태(洪炳泰)로 하여금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을 향해 선발대로 출발토록 하였다. 그리고 7월 12일 조성학과 함께 영덕으로 들어갔다.

7월 13일과 14일, 양 일간에 걸쳐 일본군과의 접전이 벌어졌다. 첫날 전투에서 의병부대가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날 7월 14일 수백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쳐 남천쑤(南川藪)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의병부대는 군사적인 열세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계속하던 중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여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고, 병졸 몇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영덕 강구의 한규열(韓奎烈)·손치문(孫致文)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바닷가에 매장하였다. 영덕전투에서 패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사망할 당시 장녀 영규는 11세였고, 아들 병우는 5세였다. 1914년 사위 정웅(鄭雄)이 충남 서천의 남산 축향(丑向)으로 반장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참고문헌|

「海雲堂金公行錄」, 1914. 4.
韓奎烈, 「義媒氏前上答書」, 1916.
柳川編, 『義城誌』, 卷三十, 「人物」.
『義城勝鑑』 卷之二, 「人物」.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1, 1971.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김희곤 외, 『義城의 獨立運動史』, 의성군, 2002.
권대웅·권영배, 『경북독립운동사』 Ⅰ, 경상북도, 2012.
권대웅, 『불굴의 의병장 해운당 김하락』, 지식산업사, 2020.
柳漢喆, 「金河洛義陣의 義兵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