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충식 閔忠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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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민충식
한자명 閔忠植
본 관  
이 명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890. 2. 25 ~ 1978. 11. 14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동제사, 박달학원, 체화동락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협성회, 시사책진회, 재상해유일학생회, 톈진교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3년 동제사 가입, 1919년~192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21년 협성회 및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90년 2월 25일 서울 종로(鍾路) 안국동(安國洞)에서 태어났다. 1902년 서병호(徐丙浩) 등 6명과 연지동(蓮池洞)의 1905년 경신학교(儆新學校) 첫 입학생이 되었다. 수료 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다가, 1913년 봄 미국으로 건너갈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고, 이후 박달학원(博達學院)에 기숙하였다.

1913년 겨울, 이동녕(李東寧)으로부터 독립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1914년 초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신한촌(新韓村)에서 후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한 김원식(金遠植)과 접촉하였다.

이후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에 거주하는 이민복(李敏馥),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에 있던 이상설(李相卨)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1914년 1월 15일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여 이상설·이동녕(李東寧)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지교(知敎) 백순(白純)과 만나서 대종교 소속의 비밀결사 단원이 되었다.

당시 이상설이 시베리아 동북지역에 ‘한국군관학교’ 설립 계획을 추진 중이었는데, 이때 연락 관련 일을 맡았다. 1914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등으로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모스크바로 이동하였다가 1916년 여름 니콜스크 우수리스크로 돌아왔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가 동제사 인사들과 다시 교류하면서 1916년 말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의 일원으로 거류 한인의 단결 및 재외 한인단체와 연락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수립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1922년 2월경까지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말에는 임시정부의 충북 영동군(永同郡)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1년 4월 임시정부가 와해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윤기섭(尹琦燮)과 의정원 의원 김태연(金泰淵) 등이 조직한 협성회(協誠會)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노력하였다.

협성회에 참여하기 직전인 1921년 2월 함영구락부(含英俱樂部)를 결성하였으며, 그 해 10월 재상해유일학생회(在上海留日學生會)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7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논의할 목적으로 결성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톈진(天津) 조선인교민단(朝鮮人僑民團)의 이사를 맡는 등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참고문헌|

재상해일본총영사관,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春園, 「人生의 香氣」, 『삼천리』 7호, 1930.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東京: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 1975.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 중국편, 1976.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韓國史料硏究所, 『朝鮮統治史料』 7,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1.
외솔회, 『나라사랑』 제20집,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