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량 夫德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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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부덕량
한자명 夫德良
본 관 제주(濟州)
이 명
출신지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911. 11. 5 ~ 1939. 10. 4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하도강습소, 제주도해녀어업조합, 구좌면 해녀조합
관련 사건 제주해녀항일운동
주요 활동 1932년 1월 제주해녀항일운동 주도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2005)

1911년 11월 5일 제주도(濟州島) 구좌면(舊左面) 하도리(下道里)에서 태어났다. 13세부터 해녀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야학을 다녔다. 하도보통학교 부설 야학인 하도강습소에서 한글과 한문에 대한 기초 교육과 역사를 배웠고,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 신지식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과 계급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 해녀들의 노동 가치에 대해 자각하였다.

1931년 12월 20일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해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조합비를 무리하게 징수하자, 동료 해녀들과 함께 “지정판매 폐지, 경쟁입찰에 의한 공동판매제 부활, 미성년자와 40세 이상의 해녀조합비 면제” 등을 요구하였다. 1932년 1월 7일 김옥련(金玉蓮)·부춘화(夫春花) 등과 함께 해녀 300여 명을 규합하여 하도리에서 세화리(細花里) 5일장이 열리는 장터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제주도해녀조합장이자 제주도사(濟州島司)인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는 사태 해결을 약속하였다.

1932년 1월 12일 다구치가 세화리(細花里)경찰주재소를 방문하자 오조리(吾照里) 해녀 300여 명,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 등 총 700여 명을 규합하여 구좌면 세화리의 연두막 동산에 집결하였다. 호미와 빗창(전복 따는 도구)을 들고 세화장터까지 행진을 주도하며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세화장터에 도착하자 다구치 제주도사를 포위한 채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낭독하며 이행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1932년 1월 24일 해녀 2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이 소식을 듣고 구좌면 해녀들이 항의하다가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다. 해녀와 경찰이 부상당하였고 옷이 찢어지는 등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1월 26일 해녀 30여 명이 추가로 붙잡혔고, 800여 명의 해녀들이 재차 항의하며 충돌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 의해 김옥련·부춘화 등과 함께 붙잡혀 목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932년 6월 17일 이른바 폭행죄로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풀려나기까지 약 5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참고문헌|

『조선일보』, 1932. 1. 24.
『동아일보』, 1932. 1. 26.
『매일신보』, 1932. 3. 5.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 편, 『제주해녀사료집』, 2009.
제주도지편찬위원회 편,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북제주문화원, 2005.
하도향토지발간위원회 편, 『하도향토지』, 2006.
후지나가 다케시, 「1932년 제주도해녀투쟁」, 『4·3 장정』, 제주 4·3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