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규 文精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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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정규
한자명 文精奎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북 창성(昌城)
생몰년월일 1850 ~ 미상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창성군 창성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4월 1일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2)

1850년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우면(祐面) 달산동(達山洞)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69세였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1일 창성군 창성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창성군은 동쪽은 벽동군(碧潼郡)·초산군(楚山郡)·운산군(雲山郡), 서쪽은 삭주군(朔州郡), 남쪽은 태천군(泰川郡), 북쪽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접하고 있다.

창성군에 만세시위 계획이 알려진 것은 1919년 3월 1일 이전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유여대(劉如大)가 의논 끝에 의주군 월화면(月華面) 교회의 송문정(宋文正) 목사를 창성·삭주·벽동 등지에 파견하였다. 송문정은 창성교회(昌城敎會) 장로인 강제희(康濟羲)를 찾아가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창성에서도 동참할 것을 권하였다. 강제희는 창성군 만세시위를 책임질 것을 약속하고 송문정에게 120원의 운동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3월 1일 선천과 의주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후에도 창성군내에서 유력자로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던 강제희는 만세시위를 준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천도교인 김염복(金念福)이 매일같이 찾아와 시위 준비를 촉구하는 등 여러 사람으로부터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았다. 강제희는 여러 날 고민 끝에 전창교회(田倉敎會)에 다니는 박찬소(朴燦韶)·강정식(康貞植)·황대붕 등의 기독교인과 직원인 전봉재(全鳳梓)와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먼저 거사일은 4월 1일로 잡고 시위 군중은 창성면 서문 밖 들판에 집결하도록 계획하였다. 대중 동원은 각 면마다 연락 책임자 5명씩을 선정하여 이들이 각 마을에 들어가 집회 장소로 모일 것을 알리는 방식을 취하였다.

4월 1일 낮 12시가 되어 2,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 때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식에서 강제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은 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내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가로막고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시위대는 거부하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섰다. 이때 투석전에 앞장서다 붙잡혔다.

일자 미상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된다고 하여 징역형을 받자 이에 불복하고 즉시 항소하였다. 1919년 6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이에 다시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고 인도 정의를 본의로 한 민족자결주의로 나아가는 세계의 공안(公眼)으로부터 공인된 바로 이를 보안법에 의해 처결하는 것은 천리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당해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4월 28일 은사령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 고등법원, 1919. 7. 2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평안북도지』, 1973.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