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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南宮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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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남궁억 |
|---|---|
| 한자명 | 南宮檍 |
| 본 관 | 함열(咸悅) |
| 이 명 | 자: 치만(致萬), 호: 한서(翰西) |
| 출신지 | 강원 홍천(洪川) |
| 생몰년월일 | 1863. 12. 27 ~ 1939. 4. 5 |
| 운동계열 | 문화운동 |
| 관련 단체 | 독립협회, 황성신문사, 대한협회, 관동학회, 배화학당, 상동청년학원, 모곡교회, 모곡학교 |
| 관련 사건 | 십자가당 사건 |
| 주요 활동 | 1886년 고종황제 어전 영어 통역관, 1889년 궁내부 별군직, 1893년 경상도 , 1896년 독립협회 수석 총무 및 사법위원, 1898년 『황성신문』 사장 겸 주필, 1905년 성주목사 부임, 1906년 양양군수 부임, 1908년 관동학회 회장, 1915년 종교교회 남감리회 본처전도사, 1929년 『조선니약이』 저술, 1933년 십자가당 사건으로 구금 |
| 포상훈격(연도) | 독립장(1977) |
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 왜송골에서 중추도사(中樞都事)를 지낸 아버지 남궁영(南宮泳, 자는 景涵)과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12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열(咸悅)이며,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이름은 억(檍)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생활이라 글방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동무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사과(李司果) 댁 담 밑에 가서 종일 서성거렸다.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어머니는 이사과 댁을 찾아가서 배울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렇게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8, 9년간 교육을 받으며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많은 고서를 탐독하여 한학에 조예가 깊어갔다.
16세 되던 1878년 두 살 연상인 양혜덕(梁惠德)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아들 남궁염은 후에 미국 뉴욕 총영사를 지냈고, 장녀 남궁숙영은 일찍 혼자 되어 친정에 돌아와 아버지를 받들어 집안 살림을 보살폈으며, 둘째딸 남궁자경은 윤치호의 아들 윤광선의 부인이 되었다.
한문공부에 이어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영어 실력을 알아본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1883년 9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된 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하였다. 당시 21살로 함께 영어 공부를 하던 친구들은 송달현(宋達顯), 주우남(朱雨南)이었으며, 영어를 배운 지 1년도 안되어 회화를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년 6월 동문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886년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통역관이자 황제의 어전통역관으로 고종을 알현하였다. 1887년 조민희를 유럽 5개국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파견할 때 통역서기관으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을 출발한 일행은 청국 측의 완강한 반대로 홍콩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2년간 지내면서 민영익을 만나 국내외의 변화와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홍콩에서 머물다 돌아온 후 1889년 1월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봉직하였다.
1893년 4월 4일 경상도 칠곡부사에 임명되었다. 칠곡부사 재임시절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몸소 겪었는데, 동학군을 무사히 평정한 공을 높이 평가받아 순무사(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청렴하게 관직에 임하므로 1895년 가을 칠곡 유림회와 군민회가 500냥을 들여 그의 송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 비석은 한국전쟁시 폭격을 맞아 없어졌지만 비문의 내용은 칠곡의 유지이자 친구였던 배석하(裵錫夏)의 일기 『일신와만록(日愼窩漫錄)』 상권에 전해진다.
1895년 2월 칠곡부사를 사임하고 궁내부 토목국장에 임명되었다. 토목국장 재임 시 한성의 종로통과 정동 일대 및 육조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 정비하고, 근대식 탑골공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백성들에게 망건 대신 단발을 적극 권장하였다. 토목국장 당시 낮에는 관직에 충실하였으며, 밤이면 흥화학교(興化學校) 교사로 영문법과 한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외국어와 선진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내부대신 남정철의 모함으로 1897년 8월 27일 면직되었다.
1896년부터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시작은 서재필이, 협회장은 안경수, 이완용에 이어 윤치호가 맡았으며, 실질적인 살림살이를 책임졌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발행하는 한 페이지짜리 신문이었으나 곧 세 번으로 늘어났다. 한글판과 영문판 두 종류를 발간하였는데, 한글판은 주시경이, 영문판은 그가 편집하였고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기사를 모았으며, 배재학당 삼문인쇄소에서 인쇄를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문판은 발행한 지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896년 12월 31일에 종간되었다. 이어서 『대조선독립협회회보』라는 반월간 잡지를 1896년 12월에 간행하였는데, 구국사상의 일환으로 물리·화학·기술·실업 등의 실용적인 내용을 담은 잡지로 지령 제18호로 종간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시 토론회에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말부터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주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들로 토론 과정에서 그를 비롯한 소장 위원들이 국가의 정치 문제에 대해 비판을 더하면서 고위관료들과 의견 대립이 생겼다. 당시 그는 35세의 소장신진파로서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1898년 2월 20일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함으로 소장신진파를 중심으로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부회장이던 이완용이 회장에, 윤치호가 부회장에, 이상재와 윤호정이 회계를 맡았고, 이때 서기가 되었다.
『독립신문』을 통해 언론의 힘을 경험한 그는 1898년 9월 주식회사로서 황성신문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 매일신문인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1898년 9월 5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한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지식층 독자를 확보하였는데, 필진으로는 당시 한학과 유학의 조예가 깊었던 장지연·유근·박은식·신채호·남궁훈 등이 참여하였다.
1902년 러일협정 의정서의 부당함과 일제의 간계를 폭로한 기사를 『황성신문』에 게재하여 총무 나수연과 함께 구속되어 경무청에 구금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경무청 감방 앞에서 17살 아들 남궁염이 아버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14일을 단식투쟁하였다. 평리원의 심사를 마친 후 8월 8일 석방되었고, 총무 나수연은 9월 11일 석방되었다.
1903년 3월 경영의 어려움으로 황성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1905년 3월 성주목사(聖州牧使), 1906년 1월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지방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양양군수 시절 동헌 뒷산에 중등학교 정도의 현산학교를 설립하여 순수 민간차원에서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현재 양양초등학교의 전신인 현산학교는 1906년 9월 8일 개교식을 거행하였으며,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강원도 근대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년 8개월을 양양군수로 재직하며 고을을 다스리다가 1907년 9월 사임하였고, 관직생활은 막을 내렸다.
1907년 11월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1908년 2월 8일 제4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그해 12월까지 재임하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8년 4월 25일 『대한협회회보』를 발간하였다. 두 차례 논설을 실었는데, 제2호(1908.5.25.)에는 「사상과 능력의 상수(相須)」를, 제3호(1908. 6. 25)에는 「사회조화」란 글을 발표하였다.
이외에 인민의 교육계몽과 민족교육에 앞장서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역별로 단체들을 조직하였는데, 강원도 출신들로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1908년 4월 2일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8년 6월 25일 대한협회에서 국민교육과 사회계몽을 실행하기 위해 『교육월보』를 창간하여 10개월 동안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발행한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의 교육잡지이며, 통신 강의록이었다.
기독교 입교 동기는 『윤치호일기』에 의하면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요량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돈이었던 윤치호의 영향이나 권유를 받아 감리교인이 되어 1910년 11월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15년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본처전도사’라는 직책을 받았는데, 1929년, 30년 매년회 회록에선 ‘임명받지 아니한 본처전도사’로 나오고 심문조서에는 ‘명예전교사’ 또는 ‘명예전도사’라는 직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1918년 홍천으로 내려갈 때까지 배화학당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교사 시절 학생들 상황에 맞게 적당한 교재를 손수 만들어 가르쳤다. 기독교의 진리를 기초로 배화학당의 이념과 ‘현모양처주의’ 교육사상과 애교심을 강조한 배화학당의 교가도 직접 작사하였다. 배화학당 교사시절 가정교과서인 『가정교육』을 저술하여 가정에서 주부 역할의 중요성과 유아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글 궁체를 봉서방(奉書房) 나인들에게서 얻어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쳤으며, 1914년 12월에는 『신편언문체법』을 발행하였다. 또한 배화학당 시절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여 무궁화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무궁화 자수본은 집집마다 벽에 걸고 혹은 선물로 미국이나 하와이 등지로 나가는 등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배화학당 교사시절 상동청년야학원에서도 교사로 일하였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 사건으로 체포당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더 이상 재기할 수 없게 되자 50세에 상동청년야학원 원장을 맡았다. 낮에는 배화학당에서 야간에는 당시 젊은 학생들의 정신적 신앙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8년 12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낙향하였다. 그리고는 춘천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전도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사택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엔 사재 3,900환으로 대지를 매입하고 현재 한서기념관 자리에 예배당을 지었다. 이곳에서 교사 4명이 마을 아이들 100여 명을 모아놓고 4년제 보통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모곡학교(牟谷學校)의 시작이다. 모곡학교는 학교 겸 교회로 사용되었고 192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3년 춘천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스톡스(M.B.Stokes) 목사의 도움과 유지들의 힘을 모아 모곡학교 교실과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한편, 보리울에서는 100여 곡의 노래를 작사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1928년 합동찬송가에 수록되었고 통일찬송가 371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보리울에서도 학생들에게 한국역사를 비밀리에 가르쳤는데 그런 중에 1924년 겨울에 역사책 『동사략』 전 4권을, 5년 후인 1929년 4월에는 인찰지 1,290쪽 분량의 『조선니약이』전 5권을 집필하였다. 『동사략』이 성인용이라면 『조선니약이』는 어린이용으로 한국역사를 쉽게 풀어쓴 책이었다. 신라 박혁거세부터 3·1운동기까지를 담고 있으며, 각 권은 군왕부, 정치부, 문예부, 절의부로 나누어 인물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처럼 배화학당에서 무궁화 자수본을 통해 무궁화 사랑을 시작하였고, 모곡학교에서는 손수 무궁화 보급운동을 통해 나라사랑의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중 모곡학교 운영 후임자 선정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정구환과 모곡지서 순사 정도일이 함께 무궁화보급운동을 홍천경찰서에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11월 4일 홍천경찰서에서 8명의 사복경관이 나와 학교는 물론 인근 교사와 청년들의 가택을 수색하여 28명의 남녀 청년들을 붙잡아갔다. 이때 여고사 남궁경숙, 모곡교회 유자훈 목사 등과 함께 끌려갔다. 이것이 바로 ‘보리울 무궁화사건’이다. 이 사건이 확대되어 강원도 경찰부에서는 무궁화 나무를 전부 없애버리라는 긴급지시를 내렸고 모곡리 일대 무궁화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무궁화사건’으로 감시가 한층 삼엄해진 홍천지역에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춘천 선교부 ‘십자가당사건’이다. 홍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교사 김복동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비밀결사인 십자가당이 발각되었다.
십자가당(‘크레스트당’)은 1933년 4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원의 감리교계 목사와 신자들이 ‘공존공향(共存共享)의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자 기독교사회주의 이념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1933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춘천교회 허문리예배당에서 제3차 동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기간 중 연회 회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아래층 춘천여자관에서 연회와 별도의 비밀 회합이 이루어졌다. 목회자로는 인제구역 담임 남천우(南天祐) 목사와 홍천서구역 담임 유자훈(劉子勳) 전도사, 가평서구역 담임 이윤석(李胤錫) 전도사 등과 평신도 대표로 연회에 참석했던 창촌교회 어인손, 모곡교회 김복동, 후동교회 남궁식 등이 항일 비밀결사 ‘십자가당’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신규 회원을 늘려가는 단계에서 평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불온한 사상’이 떠도는 것을 예의 주시하던 홍천주재소 순사들이 발각한 것이다. 이로서 홍천지역 독립운동의 실체를 파악한 일제에 의해서 십자가당 당원 전원과 함께 붙잡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감리교인이었으나 십자가당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 일제 경찰에게 혹독한 조사를 받고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16명은 면소(免訴)되었고, 1933년 12월 14일에 12명만 서울로 송치되어 총독부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1934년 8월 3일 유자훈, 남천우, 김복동 등과 함께 공판에 회부되었다.
붙잡힌 후에도 조금도 굴복함 없이 당당하게 대처하였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겪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잠시 서울에 머물다 보리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리울에서 다시 교회일에 힘쓰며 모곡교회의 새로운 진흥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의 고문과 부실한 섭생으로 망가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1939년 4월 5일 오전 몇 마디 유언을 남기고 향년 77세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