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金仁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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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 | 김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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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金仁植 |
본 관 | |
이 명 | |
출신지 | 경기도 고양(高陽) |
생몰년월일 | 1883. 8. 6 ~ 1945. 10. 26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고양군 한지면 만세시위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9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 만세시위 참여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표창(2008) |
1883년 8월 6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하왕십리(下往十里)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당시 야채행상을 하며, 고양군 한지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8일 용산 총독관방 총무국 인쇄소 인쇄직공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3월 9일부터 서울 시내에서는 상점들의 철시투쟁이 시작되었고 철도국, 동아연초회사, 전차 차장운전수 동맹파업 등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이어졌다. 이러한 투쟁양상은 서울 외곽이었던 고양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숭인면(崇仁面) 왕십리(往十里)에는 조선국민대회 명의로 철시와 공장의 폐업, 노동자의 휴업을 권고하는 내용의 격문이 붙었다.
이 상황에서 9일 오후 11시 권성모(權聖模)·노수천(魯壽天)·이광천(李光天)·최광철(崔光哲)·조영근(曹永根)·신순근(申順根) 등 하왕십리 주민 300여 명과 함께 왕십리공립보통학교 교정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경성헌병분대에서는 10명의 헌병을 급파해 현장에서 24명을 붙잡고 추가로 3명을 체포하였다. 이날의 탄압으로 서울과 고양 일대의 만세시위는 3월 23일까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이날 권성모·노수천·이광천·최광철·조영근·신순근 등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1월 8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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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5. 6)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