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金赫 |
한글명 | 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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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金赫 |
본 관 | 경주(慶州) |
이 명 | 본명 : 학소(學韶), 자 : 순익(舜翼), 호 : 오석(吾石, 烏石) |
출신지 | 경기도 수원 |
생몰년월일 | 1875. 10. 16 ~ 1939. 4. 23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관련 단체 | 흥업단, 신민부, 고려혁명자후원회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1900년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졸업, 1907년 군대해산 후 만주로 1차 망명하여 1914년 중국화폐를 위조하여 군자금 모금, 1919년 흥업단 부단장, 1925년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성동사관학교 교장, 고려혁명자후원회 회장 |
포상훈격(연도) | 독립장(1962) |
1875년 10월 16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기흥읍(器興邑) 농서리(農書里)에서 법부 참서관을 지낸 아버지 김태식(金泰植)과 어머니 윤현숙(尹顯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태장면(台章面) 매탄리(梅灘里)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갈천공파(葛川公派)이다. 본명은 김학소(金學韶), 독립운동 당시에는 김혁(金赫)·(金爀)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자는 순익(舜翼), 호는 오석(吾石)·(烏石)이다. 성장하여 전주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자 함종(咸從) 어씨(魚氏) 어용성(魚用成)의 차녀 어유순(魚裕順)과 1906년 재혼하였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4년 동안 용인향교에서 대유학자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신갈에 사는 김화식(金華植)이 향교 교육의 쇠퇴함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경기도 안성에 살고 있으면서 한강 이남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드높았던 맹보순을 모셔다 학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898년 6월 22일 대한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0년 1월 7일 졸업하고, 동년 1월 19일 육군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대한제국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경운궁(현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개최된 졸업식은 고종황제가 대원수 자격으로 참석하여 졸업생에게 직접 졸업장을 수여하는 등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1900년 7월 23일에는 친위 제1연대 제1대대에 부임하였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당시 정위(正尉)였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해직된 후 만주로 건너갔다. 스승인 맹보순과 향리의 일가친척인 김학조(金學祖)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에서 1913년경에 대종교를 신앙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였다. 1914년 만주 안둥현(安東縣)(현 중국 단둥시)으로 가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같은 해 7월 하순 예대희(芮大囍, 청도 출신), 홍승국(洪承國, 천안 출신) 등과 함께 지안현(輯安縣) 통고우(通溝)에서 서북방으로 3리 떨어진 도절령(刀折嶺) 기슭 동포 집에서 중국 화폐를 위조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1914년 4월 29일 대종교 참교(參敎)가 되었고, 1917년 11월 11일 지교(知敎)에 이르렀다.
1919년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가한 후, 1919년 5월 만주 류허현(柳河縣)으로 갔다. 동년 8월 백두산 서남쪽 펑티엔성(奉天省) 푸쑹현(撫松縣) 하북(河北)에 있는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 1920년 7월까지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이후에는 흥업단을 떠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맹부덕(孟富德)의 중국군이 독립군을 수색 ‘토벌’한다고 했을 때, 중국측에 의하여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현천묵(玄天黙)·나중소(羅仲紹)·이천을(李天乙)·윤창현(尹昌鉉)·윤우현(尹友鉉)·김재룡(金載龍)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었다. 북로군정서가 구한국 육군식의 조련방법(操鍊方法)을 채택하고 있음을 볼 때, 군대 훈련과 관련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로군정서에서 1920년 2월 초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상촌(上村)에 설립한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이 1920년 9월 9일 군정서 본영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조성환(曺成煥)과 함께 축사를 하여 졸업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후 1920년 (음)10월중 안투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 등과 의용군이라 칭하는 결사를 조직하고 부관(副官)에 선임되어 동년 (음)12월까지 활동하였다. 그 후 1921년 (음)1월 중 지린성(吉林省) 도목구(倒木溝)에서 김좌진, 서일 등과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에 임명되어 1921년 (음)5월까지 활동하였다. 한편 대한독립군 총재대리 명의로 왕칭, 옌지(延邊) 두개 현에 부하 김관영(金官永)을 파견하여 대한군사(大韓軍司) 탐사원을 모집하는 등 전 대한군정서 사관연습생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만주 미샨(密山)으로 이동한 뒤 다시 러시아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흑하사변)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독립군들은 만주로 재이동하여 1921년부터 조직을 정비하며 재기하였다. 1922년 8월 30일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이때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봄이래, 대한독립군 총재대리로서 간도지역에 있는 군정서 사관학교 출신들에게 군사탐사원이라는 사령서를 발급하고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1922년 10월경에는 수이핑허(綏芬河)에서 활동하였고, 1923년 1월 5일에는 황공삼(黃公三)과 더불어 중동선(中東線) 조선중학교를 설립하는데 발기인이 되었다. 또한 닝안현(寧安縣)에서 학생 수 80여 명인 동양학원의 원장으로서도 활동하였다. 부원장 현천묵, 학감 양백헌(梁白憲), 권학부장 최규하(崔圭和)였고, 교원은 계화(桂和), 이범석(李範錫) 등이었다.
1923년 상하이(上海)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였다. 국민대표회가 열렸을 때 현재의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항일운동에 매진하자는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6월 7일 지청천 등과 함께 더 이상 창조파 회의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국민대표회의 국민위원회 공보 제1호에 발표된 것처럼 자신은 국민위원으로 활동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국민위원 탈퇴 선언은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1923년 8월 30일자에 「국민위원 김혁씨의 성명사」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1924년 3월 북로군정서를 재건하기 위하여 북만주 똥빈현(同賓縣)을 근거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였다. 1924년 7월에 지린(吉林)에서 개최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一會議籌備會) 결과 남만주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었다.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통합을 위하여 1925년 1월 무링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동년 3월 10일 닝안현 영안성 내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창립 총회 때 조성환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신민부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이(51세), 항일 경력, 인품, 통솔력 등이 다양하게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1926년 4월 15일 김좌진 등과 함께 미국에 있는 이승만(李承晩)에게 서찰을 보내 내정, 경제, 무력 준비 등 여러 방면의 지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 서로군정서 군사부장 황학수를 맞아들여 중앙집행위원 겸 참모부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무링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에 임명되어 부교장 김좌진 등과 함께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동사관학교는 전후 5백여 명의 졸업생을 내어 독립군 간부로서 활동하게 하였다. 학교 운영에는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시절의 교육 내용과 항일투쟁 경험 등이 큰 기여를 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다니며 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으며, 독립운동 근거지인 각 지역을 탐방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엄우영(嚴宇泳)을 대동하고 미샨 평양진(平陽鎭)으로 가 그곳의 현황을 살펴보고, 이강훈(李康勳)을 동반하고 미샨현 전역을 순회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민부에서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훈련을 받으며 농사도 지어 자급자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둔전지역으로 신민부에서는 미샨을 택하였다. 서일, 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던 곳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다. 신민부에서는 1926년 5월에 심판원장인 김돈(金墩)과 그의 비서 겸 수행원으로 이강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상황이 과거와 달라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신민부 시절, 웨이허현(韋河縣)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상하이의 이존희(李在熙)와 연락하여 살왜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단체의 대원은 약 200명이고 회비는 매인 1각(角)이며 기타 자금을 모금하여 유지하기로 하였다. 총단장은 김준(金準)이 맡았으며, 각 지방의 단장은 신민부의 구장이 맡기로 하였다.
고려혁명자후원회를 조직한 후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고려혁명자후원회는 석두하자 한인 학교에서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총회를 열고 창립되었다. 고려혁명자후원회는 혁명자가 체포 구금되었을 때, 혁명자의 가족이 빈곤에 빠지게 된 경우, 교전하거나 사변으로 혁명자가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 원조하는 조직으로 당시 사회주의계통의 국제혁명가후원회(모플)의 영향에 의해 조직되었다.
1928년 1월 25일 일본 경찰이 음력 정초를 기하여 중동선 석두하자 역에서 신민부 총회를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습격하자, 이때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으며, 6월 12일에는 이 보다 3년 많은 징역 10년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 공소를 취하하여 10년형이 확정되었다. 7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1936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다. 1939년 4월 23일 용인 농서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한민보』에 게재된 「국민위원 김혁씨의 성명사」(1923. 8.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