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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주 金鐵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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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김철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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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金鐵柱 |
| 본 관 | 미상 |
| 이 명 | |
| 출신지 | 전남 여천(麗川) |
| 생몰년월일 | 1901. 1. 25 ~ 1962. 2. 22 |
| 운동계열 | 3.1운동 |
| 관련 단체 | |
| 관련 사건 | |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에서 독립만세시위 주도 |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1990) |
1901년 1월 25일 전라남도 여천군(麗川郡, 현 여수시) 율촌면(栗村面) 신풍리(新豊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에는 광주군(光州郡, 현 광주광역시) 광주면(光州面) 금정(錦町)에 거주하면서 숭일학교(崇一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광주에서 만세시위가 계획될 때 숭일학교 각 학년별 학생 대표 중 3학년 학생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학생 송기호(宋琪浩)와 김정수(金丁洙)·정병소(丁炳沼)와 함께 숭일학교 및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는 역할을 하였다. 3월 9일에는 정병소 등과 만나 각 학교에서의 시위 참여 상황을 점검하였다.
시위 당일인 3월 10일 아침 숭일학교 교사인 최병준(崔丙俊)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40~150장을 건네받고, 이를 학교 내 보통과와 고등과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오후 3시 무렵 광주교(光州橋) 아래 천변 소시장으로 내려가 부근 누문리(樓門里)에서 군중에게 남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이후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위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 도중 출동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징역 10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