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련 金仲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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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중련
한자명 金仲連
본 관  
이 명  
출신지 미상
생몰년월일 1873. 8. 14 ~ 1910. 3. 16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후기의병
주요 활동 연기우(延起羽) 의병부대에서 중군장(中軍長)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3)

1873년 8월 14일 태어났다. 1908년 경 연기우(延起羽) 의병부대에 합류하기까지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은 일제에 빼앗겼고, 내정 감독을 일본 통감이 담당하게 되었다. 협약 시행령에 준하는 부수각서(附隨覺書) 내용을 통해, 일본인의 대한제국 사법 관리 임용과 징병제로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친위대(親衛隊)와 시위대(侍衛隊)를 시작으로 9월 3일 함경남도 북청(北菁靑) 진위대(鎭衛隊)에까지 해산령이 하달, 대한제국 군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급화약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기존에 소지한 총포류는 반납할 것을 지시하였다.

대한제국 군인들과 산악 지역 산포수들은 이 조치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으로 분기하였다.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 해산으로 궐기한 의병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 부른다. 이전 의병이 주로 비전투원의 결집에 의한 비정규군의 성격을 가졌다면, 이 시기 의병은 군인과 포수의 참여로 인해 군사기술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띠었고, 지휘체계 또한 대한제국 군제와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다. 또한 의병부대 간의 연합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장기항전을 위한 거점과 군자금 및 군량미를 수급할 수 있는 기반 마련에 힘썼다.

이에 일제는 의병 ‘토벌’에 나섰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 창설된 이래, 1907년 7월 하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일제는 한국에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을 추가로 파병하였고, 이후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도합 4차에 걸친 여단급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약 5,000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에는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의병으로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07년 11월에서 1908년 7월까지 매달 평균 1,000여 명의 의병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호 지역은 해산령에 불복한 군인들이 중심이 된 정미의병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1908년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서울진공작전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군대 해산령이 발효된 이후 기호 지역에서 일어난 연기우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중군장(中軍長)을 역임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3월 16일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범내동(凡垈洞)에서 철원헌병분견소의 일본 관헌 5명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1988.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 : 1904~1911』,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의 장기항전 전략과 전술」, 『역사학연구』 57, 2015.
심철기, 「1907년 의병전쟁 참여세력의 존재양상과 일제의 대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