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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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한자명 Ernest Thomas Bethell
본 관
이 명 배설(裵說)
출신지 외국 영국
생몰년월일 1872. 11. 3 ~ 1909. 5. 1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관련 단체 대한매일신보, 코리안 데일리 뉴스, 국채보상운동
관련 사건 헤이그 특사, 고종 양위, 국채보상운동, 의병
주요 활동 대한매일신보·코리안 데일리 뉴스 사장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50)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틀(Bristol)의 비숍스턴(Bishopston)에서 아버지 토마스 핸콕 베델(Thomas Hancock Bethell)과 어머니 마사 제인 홀름(Martha Jane Hollom)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배설(裵說)이다. 브리스틀의 상인조합 벤처상업협회가 운영하는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Merchant Venturers School) 이과과정 고등부에서 수학하고 1888년경 졸업하였다.

1888년 17세의 나이에 일본 고베(神戸)로 건너가 1904년까지 머물렀다. 처음에는 친척이 경영하는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1899년 동생 허버트(Herbert)와 함께 무역상 베델 브라더스(Bethell Brothers)를 공동 설립하였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영국 물품을 들여오거나 일본의 골동품 등을 영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이었다. 고베에서는 사교와 스포츠클럽인 KR&AC의 운영위원과 사무국장을 담당하며 수영·요트·크리켓 경기에 출전하는 등 고베의 명사로 활동하였다. 1900년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였다.

1904년 3월 10일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토마스 클라크 코웬(Thomas Clark Cowen)에 이은 『데일리 크로니클』의 두 번째 통신원이었다. 4월 16일자 지면에 경운궁 화재 사건을 다룬 기사 「한국 황궁의 화재(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와 고종의 초상, 서울 풍경을 스케치한 그림을 게재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 통신원보다 런던(London) 주재 일본대사관으로부터 더 많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해임 직후 바로 토마스 코웬·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 창간 준비에 착수하였다.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는 한글판 2면, 영문판 4면 총 6면 구성으로 창간되었다. 이때 사장을 맡아 총무 양기탁과 함께 편집과 경영을 총괄하며 논설이나 기사를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창간한 지 8개월 만인 1905년 3월 11일부터 인쇄소에 지불할 자금이 부족하여 발행이 어려워졌다. 자체 인쇄를 위해 일본에서 활자와 인쇄시설을 들여온 후 8월 11일부터 재발행하면서 각 4면의 국한문혼용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로 분리하였다. 이후 고종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1907년 4월 국한문혼용판의 지면이 확장되었고 5월 23일에는 순한글판을 새로이 창간하였다.

이 두 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郎)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등 일제의 한국 침략정책 및 의병항쟁과 같은 한국인의 저항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간행되던 친일 성향의 영자신문 『재팬 메일(Japan Mail)』, 『고베 헤럴드(Kobe Herald)』와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에 주한 영국공사 조단(J.N.Jordan)이 영국의 우호적 대일외교정책에 어긋나는 논조를 펼치고 있어 장차 영일관계의 저해 요인이 될 것이라고 본국 외무부에 보고하였고, 영국 외무부는 사장의 처벌을 포함한 이 문제를 일본에 일임하고자 하였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는 가쓰라 타로(桂太郞) 일본수상에게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정책을 비난하고 한국인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으니 군율 위반으로라도 사장을 처벌·추방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곧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영국과 일본의 외교진이 모두 교체되면서 바로 행동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쓰고 구속되고 신문은 정간되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옥중 투쟁을 비롯한 후속 기사를 연일 보도하였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전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한편 고종은 을사늑약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알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세계 여론에 알리고자 각국에 밀서를 보내었다. 영국 신문 『트리뷴(Tribune)』사의 기자 스토리에게도 1906년 1월 29일자로 작성되고 옥쇄가 찍힌 밀서가 전달되었다. 스토리가 중국으로 건너가 본사로 송전한 밀서의 내용은 『트리뷴』에 1906년 2월 8일자 「한국의 호소, 『트리뷴』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Korea’s Appeal, Emperor’s Statement to the 『Tribune』, Coerced by Japan, Powers Asked to Intervene)」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1907년 1월 16일자 지면을 통해 밀서의 내용을 국내외로 다시 알렸다. 밀서가 사실무근이니 정정하라는 한국통감부의 요구를 『대한매일신보』는 무시하였다.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가 열리고 다음날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자 대한매일신보사는 관련 기사 보도뿐 아니라 직접 의연금을 접수하는 등 운동의 중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7월에는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양위하는 사실을 호외로 보도하였고, 각지에서 전개되는 의병운동과 일본군의 탄압을 상세히 알렸다.

일제는 이러한 ‘반일적 언론 활동’에 대한 직접 처벌을 영국 측에 요구하였다. 결국 영국은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하고 두 차례의 재판을 열었다.

첫 번째는 1907년 10월 14~15일 이틀 동안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렸다. 영국총영사 헨리 콕번(Henry Cockburn)이 판사로 주재한 일종의 약식재판이었다. 일왕 아들의 방한을 앞둔 시점에서 치안을 방해하고 민중을 선동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실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이 재판에서 한국통감부 외무과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는 원고 측 증인으로 나와 두 신문의 기사는 평화를 해치고 한국인들의 대일 악감정을 유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혐의 사실을 모두 부인하였지만, 15일 콕번은 6개월의 근신과 또다시 유사한 행동을 한 경우 300파운드의 벌금을 납부할 것을 명하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판결에 대한 불복 항소 제기 여부를 타진하였지만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와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근신 기간 동안에도 통감부 기관지 『서울 프레스』 등 친일 신문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근신 기간이 끝나자 일제와 통감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비판하였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Francisco)에서 일어난 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저격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는 처벌을 위해 본격적인 외교 공세에 나섰다.

1908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 중국 상하이(上海) 주재 영국 검사와 판사가 서울에 와서 두 번째 재판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식 재판이었다. 유죄 입증을 위한 구체적인 증거로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스티븐스 암살을 알린 1908년 8월 17일자 기사 등 세 건이 제시되었다.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 대신 고소인 자격으로 참석하여 의병 봉기의 원인이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피고 및 양기탁 등 피고측 증인, 변호인 모두 의병 봉기는 자발적이고 근본 원인은 일본의 한국 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18일 증거로 제시된 세 건의 기사가 한국인들에게 항일 봉기를 선동하였다고 결론지은 재판부에서 3주간의 금고형과 근신 6월, 350파운드의 보증금 납부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는 외국인 구금시설이 없어 영국 군함을 타고 상하이로 건너가 그곳의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08년 7월 12일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탄압을 위해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하였다. 17일 구금 기간이 끝나 서울로 돌아와서는 신문을 통한 명예회복을 꾀하고, 횡령을 기정사실인양 보도한 상하이의 영자신문사를 고소하여 승소를 거두었다. 9월 15일 피고 양기탁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무고함을 주장하였고, 결국 양기탁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09년 1월 30일 2차 재판 직전에 발행이 중단되었던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속간하였다. 그러나 3개월 후인 5월 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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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
『신한민보』.
국사편찬위원회 편, 『통감부문서』 2, 1998.
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 1998.
정진석,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영국 언론인 배설』, 역사공간, 2013.
정진석, 『네 건의 역사드라마』, 소명출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