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근 許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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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허근
한자명 許根
본 관
이 명 허근(許瑾)·허은(許垠)·허재근·허영장(許營將)·허재욱(許在旭)
출신지 함북 회령(會寧)
생몰년월일 1864 ~ 1926. 2. 11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의군부(단), 대한독립단, 권업회, 의민단, 독군부, 총군부, 사할린의용대, 고려중앙정청, 동양혁명대의단
관련 사건 후기의병,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자유시참변
주요 활동 의병운동, 의민단 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 의군단 전위대장,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고려중앙정청 고려군인징모위원으로 공산주의 선전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5)

함경북도 회령(會寧)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4년생으로 추정된다. 한자가 다른 허근(許瑾)과 허은(許垠)·허재근·허재욱(許在旭)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고 일반사람들이 보통 허영장(許營將)이라고 불렀다. 장남 허찬(許燦)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한 약국에서 일했고, 차남은 함북 회령의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러일전쟁 때 20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갑산(甲山)에서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사격에 능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09년 총 수 자루를 은닉하다가 발각되어 반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1911년 5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복태루(福泰樓)에서 홍범도·최병규(崔炳奎)·김제익(金濟益)·조장원(趙璋元)·이춘식(李春植)·이진룡(李鎭龍)·엄인섭(嚴仁燮) 등과 함께 회합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밀정으로 변절한 엄인섭은 관련 정보를 일제에게 밀고하였다.

1913년 말, 1914년 초 무렵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휘와 연락하며 활동하였다. 1914년 2월 이종호(李鍾浩)의 집에서 이동휘·이동녕(李東寧) 등 15명과 함께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신채호(申采浩)·김하구(金河球) 등에 의해 창립된 권업회(勸業會)와 『권업신문(勸業新聞)』과도 관련되었다. 1914년 9월 『권업신문』이 일제의 영향으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간되자 10월경 조장원·오창환(吳昌煥)과 함께 만주의 태평구(太平溝)로 떠났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만주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이후 네이멍구(內蒙古)의 만주리(滿洲里)로 가서 몇 달간 목공일을 하다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로 돌아와 이동휘와 연락하며, 장정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활동을 펼쳤다. 1919년 4월 왕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천주교인 중심으로 국내진공작전과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의민단(義民團)의 영장(營將)이 되었다. 의민단은 약 300명의 대원에 소총 400여 정, 권총 50여 정, 수류탄 480여 발을 소유하고 있었고, 천주교도들의 헌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1919년 10월 23일 부하 80여 명을 인솔하고 노모저구(老母猪溝)에 도착하여 약 4일간 머물다가 다시 토문자(土們子)로 떠나 홍범도와 회합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후반에 들어 홍범도와 이범윤이 주도하던 독립군 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홍범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군(의용대) 부대에서 제1군 감시(監視)로 임명된 것은 확인된다. 한편, 이범윤이 과거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본부를 노령에 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일명 의군단)를 조직하자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선 대대를 영솔하고 북간도 지역의 의군부를 실제로 지휘하였다.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주로 북간도 봉오동(鳳梧洞) 일대에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구춘선(具春先)·이용(李鏞),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동휘(李東輝)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2월경 인솔한 200명의 부대를 왕칭현 춘양사(春陽社)와 옌지현(延吉縣) 지인향(志仁鄕) 의란구(依蘭溝)에 나누어 주둔시켰다. 1920년 2월 25일 대한의군부의 이영근(李英根)과 함께 약 200명을 인솔하여 의군단 소재지인 왕칭현 춘양사 북삼차구(北三岔口)에서 출발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6월 봉오동전투 승리 이후 대한의군부(단)는 조직 개편을 시행했고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0년 8월 당시 대한의군부가 군사조직으로 전위대와 산포대를 갖고 있었는데 전위대의 대장(營長)으로 임명되었다.

봉오동전투 이후 일본군이 공격해 올 거라는 풍설이 돌자 무산·갑산으로부터의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920년 6월 12일 부하 300여 명을 인솔하여 명월구(明月溝)를 거쳐 무산과 간도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월경한 일본군이 없는 관계로 도중에 다시 군대를 철수시켜 6월 27일 이도구(二道溝) 남북촌(南北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각 단체 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하 4~5명과 함께 장동(獐洞)으로 바로 떠났다. 각 단체의 연합체로 출범한 독군부(督軍府)의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부대를 이란구로 옮겨 왕칭현 춘융향(春融鄕) 소백초구(小百草溝) 상촌(上村)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 제일대대(第一大隊)와 와우구(王禹溝) 등지로 나누어 주둔시켜 경계 임무를 수행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에 1921년 2월까지 홍범도 휘하에서 결사대장(決死隊長)으로 활약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피해 1921년 5월에는 간도대(間島隊) 간부의 일원으로 홍범도·최진동(崔振東)·안무(安武) 등 500 명과 함께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최진동과 함께 총군부 군대를 이끌고 사할린의용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사이에 독립군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반목하였고, 러시아적군과 한인보병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다수의 독립군들이 희생당하거나 체포당하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자유시참변을 겪은 후 블라고베시첸스크(武市, Blagoveshchensk)로 이동하여 그해 9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정청인 고려중앙정청의 고려군인징모위원(高麗軍人徵募委員)으로 임명되어 홍범도·안무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1년 말경 블라고베시첸스크 근처에 거주하면서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하고 있던 것이 확인된다. 그 뒤 간도로 건너가 밀산 근거지로 의군부의 수령으로 250명을 인솔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요하현(饒河縣) 근처에서 홍범도 등과 같이 활동하였다.

1922년 12월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러시아 혁명파에 의하여 무장해제당하고 간부들과 함께 포박당하기도 했다. 1924년 가을경 이동휘가 임시단장으로 동양혁명대의단(東洋革命大義團)을 결성했던 당시에 참모장으로 선정되었다. 9월 20일 대한혁명군단장으로 부하 35명을 인솔하여 미산현을 출발하여 동지선(東支線)의 영고탑(寧古塔) 마도석(磨刀石)을 근거지로 삼아 대종교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였다는 정보가 있는데 동양혁명대의단과 대한혁명군단이 같은 단체로 판단된다. 1926년 2월 바라바시(Barabashi)에서 일시 거류하던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손염홍⋮

|참고문헌|

「憲機 제1040호 블라디보스토크지방 鮮人 排日의 추세 변이의 건」, 1911. 6.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憲機 제1086호 5월 24일 이후 嚴仁燮으로부터 얻은 鮮人 정보」, 1911. 6. 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朝憲機 제110호 최근 排日氣勢의 槪況과 間島방면의 不穩說에 대하여」, 1914. 2. 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4』.
「朝憲機 제158호 排日鮮人의 언동과 豆滿江沿岸의 鮮人移住件」, 1914. 3.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4』.
「朝憲機 제630호 勸業會 해산 후에서의 不逞鮮人의 恐慌」, 1914. 9. 2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官秘 제8호 在露 鮮人 排日運動 근절방법에 관한 건」, 1915. 8. 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高警 제7959호 對岸 不逞鮮人의 移動에 關한 件」, 1920. 3. 19,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5』.
「機密 53호 주된 不逞鮮人에 관한 조사보고 건」, 1921. 12. 1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高警 제621호 露支領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상황에 관한 건」, 1923. 2. 2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4』.
「機密 제14호 間島 不逞鮮人 團體와 그 動靜에 관한 調査書의 件」, 1920. 3.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6』.
「機密公 제169호 不逞鮮人 決死暗殺隊 實行員의 行動 등에 관한 건」, 1920. 7. 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機密 제320호 大正十一年 七月中 間島地方 治安情況에 관한 건」, 1922. 8.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3』.
「機密 제250호 間島 接壤 不逞鮮人團의 行動에 關한 件」, 1924. 9. 2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0』.
「機密 제428호 間島 및 接壤地方 不逞鮮人의 行動에 관한 건」, 1924. 10.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0』.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41·42·43, 1983·2005·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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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