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완 趙鍾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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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조종완
한자명 趙鍾完
본 관
이 명 창씨명 : 백천종완(白川鍾完)
출신지 평남 강서(江西)
생몰년월일 1891. 3. 15 ~ 1945. 3. 5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대한향촌회, 동우구락부, 수양동우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0년 대한향촌회 조직, 1925년 동우구락부 가입, 1926년 수양동우회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1년 3월 15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초리면(草里面) 포리(浦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백천종완(白川鍾完)을 썼다. 1912년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대한향촌회(大韓鄕村會), 1925년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 1926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염정두(廉正斗)·강승두(康昇斗)·김병표(金炳豹) 등과 함께 대한향촌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었다. 1921년 6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5년 평양(平壤)에서 이윤재(李允宰)·오경숙(吳敬淑)·김찬종(金燦鍾)·김항복(金恒福) 등과 함께 동우구락부에 가입하였고, 1926년 수양동우회에 참여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이광수(李光洙)가 중심이 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동우구락부가 통합되어 탄생한 것으로, 인격 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흥사단(興士團)의 국내 조직 역할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성업(金性業)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의 약법 속에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삽입하는 것에 대해 협의하였고, 다른 회원들과 수차례 만나 수양동우회의 발전책에 대해 협의하고 동우회 평양지방회관 건설 등도 논의하였다.

1927년 12월 16일 재만동포구축(在滿同胞驅逐) 사건에 대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의 조만식(曺晩植)·정세윤(鄭世胤) 등과 함께 실행위원이 되어 위원의 파견과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재외 한국인의 이익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평양기부모집, 미림수리조합폭행사건 처리, 숭인상업학교기성회(崇仁商業學校期成會), 평양 신간회 등에 참여하며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한국인의 이익 보호 등에 진력하였다.

1935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으나, 다시 기소되었다. 1936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7년 6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서울 본부에서 55명, 11월 평안도 평양·선천지회(宣川支會)에서 93명, 1938년 3월에는 황해도 안악지회(安岳支會)에서 33명 등 모두 181명의 동우회원들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룰 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항소로 1939년 1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이 취소되고 경성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 부쳐졌다. 그해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무죄를 받았다. 일제 검사가 재차 항소하였고, 1940년 8월 21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고, 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9. 1. 12.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40. 8. 21.
「판결문」, 고등법원, 1941. 7. 2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동아일보』, 1921. 5. 14, 1927. 12. 16, 1929. 2. 5, 7. 2, 1930. 12. 28, 1933.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