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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협 全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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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전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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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全協 |
| 본 관 | 완산(完山) |
| 이 명 | 호 : 두암(斗庵), 이명 : 전국환(全國煥)·김동운(金東雲)·한석동(韓錫東)·한유동(韓裕東) |
| 출신지 | 서울 |
| 생몰년월일 | 1876. 1. 1 ~ 1927. 7. 11 |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관련 단체 | 일진회, 조선민족대동단 |
| 관련 사건 | 조선민족대동단 사건, 의친왕 망명사건 |
| 주요 활동 |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 결성 |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1990) |
1876년 1월 1일 서울 이문동(里門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호는 두암(斗庵)이며, 이명은 전국환(全國煥)·김동운(金東雲)·한석동(韓錫東)·한유동(韓裕東)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0세 때인 1896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관직으로 진출하였다. 2년 후 사직했다가 1904년 황해도에서 농상회사(農商會社) 설립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전국환이라는 이름을 썼다.
1904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조직되자 이에 가담한 후 평의원과 총무원을 거쳐 같은 해 말 전북시찰원(全北視察員)이 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일진회 전라북도 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주(全州)를 거점으로 일진회의 전북지역 활동을 주관하던 중, 1907년 7월 부평군수(富平郡守)로 임명되었다. 부평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진회 내에서 의견 충돌을 겪었고, 수차례 군수직 사임을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간도 이주를 계획하고 1909년 이주를 준비하며 윤치호(尹致昊)의 땅을 허위로 매도하여 15,000원을 횡령한 후, 마련한 자금을 들고 중국 안둥현(安東縣)을 거쳐 류허현(柳河縣)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항일세력이 강성했던 서간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1912년 국내로 돌아왔다. 후일 일제 심문과정에서 일진회 경력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진회 경력은 이후의 활동을 여러모로 제약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족적 과오를 반성해갔다.
1912년 귀국 후에는 윤치호 토지 횡령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옥고를 겪다가 1914년 11월 감형되어 풀려났다. 이후 서울과 중국 펑톈(奉天)을 왕래하며 지내다가, 국제 정세의 변화에 주목하여 다시 국외 활동을 계획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와 미주(美洲)행을 위해 자금을 마련해가며, 1918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제1차대전이 종식되고 강화회의가 성립하여 약소국은 독립한다. 조선 또한 독립할 것이다”라는 소식들을 접하고, 국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919년 2월 귀국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도하였다.
1919년 3월 서울 봉익동에 거점을 마련한 후, 최익환(崔益煥) 등과 함께 독립운동 조직 결성을 준비해갔다. 그리고 우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민족과 각 계급을 망라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서 호소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조직 결성에 나섰다. 이어서 “정의·인도는 세계 동일한 것이고, 조선인도 이 크나큰 정의·인도 아래에 단결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조직의 이름을 ‘대동단(大同團)’이라 지었다. 이로써 1919년 3월경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대동단)이 결성되었다.
대동단을 조직한 후 먼저 일반 대중에 조직을 알리고자 선전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전물에는 대동단 성립을 천명한 ‘선언서’·조직체계를 규정한 ‘기관’·‘임시규칙’·파리강화회의와 윌슨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선전활동은 국내외 유력인사를 포섭하여 각계 각층으로 구성된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대동단은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의 조직 구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단장으로서 조직 구성과 재정 운용을 총괄하며 조직확장에 나섰다.
1919년 5월말 대동단을 함께 주도했던 최익환이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에는 더욱 은밀하게 조직원 확보에 나서며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최익환 등의 체포로 특히 선전활동에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정남용(鄭南用)에게 선전활동을 전담시키면서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하였다.
대동단 1차 검거로 일제의 수사가 강화되었지만, 조직 확장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제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양상을 탈피하기 위해 전라북도와 신의주 등지에서 단원을 확보하며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중국 펑톈과 상하이의 독립운동 인사들과 연락하며 국외로의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다. 아울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며 제2차 국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고, 나아가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후 단계적으로 이를 실행해갔다.
대동단은 상하이 이전의 첫 단계로 국내 유력 인사의 규합과 망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김가진(金嘉鎭)을 대동단 총재로 추대한 후, 상하이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어서 다음 단계로 의친왕(義親王)의 상하이 망명과 국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0월 31일 만세시위 거행을 계획하며, 대동단 자체로 민족대표 33인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열리지 못하고, 11월 말에 거행되었다. 이는 그 사이에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추진되었다가 일제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단계에서 이미 의친왕 망명은 계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이를 실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먼저 의친왕과 면식이 있으며 독립운동에 동참할 인물들을 포섭하였다. 정운복(鄭雲復)·이재호(李在浩)와 접촉하여 11월 9일 의친왕을 직접 만나 망명계획을 알리고, 다음날 바로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일제 경찰에 의해 의친왕 일행은 중국 안둥역(安東驛)에서 붙잡혔다. 결국 대동단의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고, 11월 19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의친왕 망명까지 계획한 대동단의 활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일제는 체포한 대동단원에 대한 고문을 자행하며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대동단에 대한 재판은 1년간 계속되었으며, 결국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을 얻어 1927년 7월 9일 가출옥되었으나, 이틀 만인 7월 1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