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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구 林永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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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임영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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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林永求 |
| 본 관 | |
| 이 명 | 임영구(林永九) |
| 출신지 | 전남 |
| 생몰년월일 | 1892. 6. 30 ~ 1952. 7. 8 |
| 운동계열 | 3.1운동 |
| 관련 단체 | |
| 관련 사건 | 광주군 만세운동 |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만세시위 참여 |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표창(2005) |
1892년 6월 30일에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본적은 전라남도 고창군(高敞郡) 고창면(高敞面) 외정리(外亭里)이고, 1919년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였다. 이명은 임영구(林永九)이다. 일용직 노동자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군 광주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광주 읍내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도한 김철(金鐵), 기독교도 김강(金剛)·남궁혁(南宮爀) 및 숭일학교(崇一學校)·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김철 등은 광주의 작은 장날인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독립가를 등사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오후 2시 30분 작은 장이 열리는 부동교(不動橋) 아래에는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집결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읽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광주 읍내를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시위 행렬에 합류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가 없는 사람들은 모자를 흔들며 독립의 희망을 전파하였다. 서문통(西門通)과 본정통(本町通)을 지나 북문(北門)에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시위대와 합쳐 더욱 세를 불린 다음, 다시 방향을 돌려 우체국 방향으로 향하였다.
오후 5시경 일제 기마헌병대가 퇴역 군인들이 속한 재향군인회와 소방대를 동원하여 총칼로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참여한 사람들을 헌병대로 끌고 가며 강제 해산을 기도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