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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李東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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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이동녕 |
|---|---|
| 한자명 | 李東寧 |
| 본 관 | 연안(延安) |
| 이 명 | 자 : 봉소(鳳所), 호 : 석오(石吾), 암산(巖山) |
| 출신지 | 충남 천안(天安) |
| 생몰년월일 | 1869. 10. 6 ~ 1940. 3. 13 |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 관련 단체 | 상동청년회, 신민회, 경학사, 권업회, 독립임시사무소,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관련 사건 |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
| 주요 활동 | 1898년 만민공동회 참여, 1903년 상동청년회 참여, 1906년 서전서숙 창설, 1907년 신민회 참여, 1911년 4월 경학사 재정부장 및 신흥강습소 초대 소장, 1913년 권업회 참여,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 공동 발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1924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1926~1927, 1931~1933년 임시의정원 의장, 1927~1933, 1935년~1940년 임시정부 주석 |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장(1962) |
1869년 10월 6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목천면(木川面) 동리(東里)에서 아버지 이병옥(李炳鋈)과 어머니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암산(巖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 이병옥은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와 경북 의성(義城)과 영해(寧海) 등지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인 유학을 수학하였고, 1891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894년 풍산김씨(豊山金氏) 김경선(金慶善)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등이 설립한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참여하여 국권수호·개화·민권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회원이자 간사로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하여 구속된 독립협회 간부 석방과 정권 교체 및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함과 동시에 이상재(李商在)·양기탁(梁起鐸)·이준(李儁)을 비롯한 주요 인사 400여 명을 체포하는 등 강경한 탄압으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1903년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재건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참여하여 기독교계와 인연을 맺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구국운동을 펼쳤다. 당시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던 상동청년회는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에 의해 설립된 상동교회 내에 조직된 엡웟청년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상동청년회 회장 전덕기와 이동휘(李東輝)·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조성환(曺成煥)·주시경(周時經) 등을 만났으며, 평생의 동지로서 항일 독립운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중등교육 기관인 상동청년학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을 하였다. 1904년 10월 설립된 이래 1905년 정식으로 개원한 상동청년학원은 국어·수학·영어·일어·중어·측량·부기·역사학·지리학·윤리학 등 인문학과 실용학문을 학생들에게 교육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상동청년회와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다. 상동청년회는 엡윗청년회 경성대회 개최를 명분으로 전국의 수많은 청년과 교인들을 서울로 모아 1주일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함께 이끌어간 평생 동지인 김구(金九)를 만났다. 당시 김구는 진남포 엡윗청년회 총무이자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6년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만주에서 최초로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조직과 운영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숙장(塾長) 이상설을 비롯하여 서전서숙 교원들과 함께 반일의식 고취와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년 만인 1907년 9월경 문을 닫게 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광무황제(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에 빠진 것이다. 둘째, 룽징에 1907년 8월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統監府間島臨時派出所)가 설치되어 반일의식을 가진 한인과 단체에 대한 조사와 탄압, 통제 등이 강화되자 결국 서전서숙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 등 7명의 창건위원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 조직으로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체(共和政體)의 자유 독립국을 수립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신민회 총서기를 담당하였고, 양기탁은 총감독, 전덕기와 안창호는 재무와 집행원을 각각 맡았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한 신민회는 일제의 한국 강점이 가시화되자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일환으로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만들기 위해 회원을 파견하였다. 1910년 가을 주진수(朱鎭壽) 등과 함께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는 일을 하였다. 일제는 1911년 9월 이른바 ‘안악사건(安岳事件)’을 조작하여 전국의 지도자격 애국계몽운동가들을 대규모로 체포, 고문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펼치는 과정에서 신민회가 드러났다. 신민회는 결국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1910년 12월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서간도(西間島)로 이주하였다. 이회영 등과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답사한 뒤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를 독립운동기지로 선정하였다. 12월부터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한 안동지역 유림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삼원포 대고산(大孤山)에 이주 한인 300여 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초대 사장으로 선임된 이상룡과 함께 재정부장을 맡아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곧이어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 설치하고 초대 소장을 맡아 우수한 독립군을 배출하는 요람으로 키워나갔다.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지면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배출된 졸업생들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913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활동지를 옮겼다. 이곳에는 이상설과 최재형(崔才亨)·이종호(李鍾浩) 등이 조직한 권업회(勸業會)에서 재러 한인들의 권익 보호와 동시에 광복군 양성에 노력하고 있었다. 1914년 권업회의 주요 인사였던 이상설·이동휘 등과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설립하고, 권업회가 양성하고 있었던 광복군을 기반으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와 제휴한 러시아의 탄압으로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리스크로 이동한 뒤 1917년 3월과 6월 동지 이상설과 이갑(李甲)의 임종을 지켰다.
1918년 3월 중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에서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볼셰비키 정권의 지원과 협조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이동휘가 개최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에 참여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주요 인사들이 소집된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볼셰비즘(Bolshevism)으로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이끌어 가려는 입장과 후원만을 얻자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는데, 후자에 속하였다. 1919년 초 만주 지린(吉林)에서 대종교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조소앙(趙素昻) 등 39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공동명의로 발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3월 하순경 연해주에서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상하이로 이동하던 중 여운형(呂運亨)·이시영·김동삼·조소앙 등을 만났고 이후 일행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된 독립임시사무소(獨立臨時事務所)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국내외에서 도착한 29명의 대표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임시의정원은 한국 최초로 결성된 의회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에 선출되어 4월 10일과 11일 개최된 임시의정원 첫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천명하였다. 정부의 관제와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원을 선출하였고, 헌법으로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통과시켰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 당시 만세운동의 영향이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국내의 세칭 한성정부(漢城政府) 등이 수립되었다. 각지의 임시정부 통합을 위해 노력한 결과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하여 9월 11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면서 통합 임시정부를 이루었다. 새롭게 개편된 내각에서 내무총장으로 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였고, 국내 국민과의 연계를 위해 임시지방연통제(臨時地方聯通制)를 실시하여 이를 총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각원 간에 독립운동의 방략과 이념 차이로 마찰이 일어났고, 이승만은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1921년 1월 이동휘를 비롯한 다수 각원이 사직하였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1년 1월 국무총리 임시대리로 선임되어 노력하다가 5월 사임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침체된 독립운동을 타개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소집하였다. 임시정부의 개편을 두고 해체 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유지 및 개편·보완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끝내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임시정부는 적극적으로 자체 개편을 추진하였다.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쇄신을 주도하였다.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7일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바꾸었다. 이상룡(李相龍)을 시작으로 양기탁·안창호·홍진(洪震) 등이 차례로 국무령으로 선임되었으나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11월 24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임되어 김구의 국무령 취임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12월 국무령에 선출된 김구와 함께 내각을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유지시켜 나갔다.
1927년 4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국무령 김구와 함께 헌법을 개정하여 정치 체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바꾸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정부의 수반인 주석(主席)을 국무위원들이 돌아가며 맡았고, 주석의 역할은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1927년 8월 국무위원회 주석과 법무장을 맡았으며, 김구와 함께 1933년까지 국무위원회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국무위원제는 1940년 10월 주석 지도체제로 개정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1930년 김구·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기초세력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이념에 따라 임시정부를 운영해 나간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초대 이사장에 추대되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한보(韓報)』·『진광(震光)』 등 기관지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 선전활동, 의열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1931년 11월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에 관한 사항을 김구에게 맡겼다. 이후 사전협의하여 1932년 1월 8일과 4월 29일 이봉창(李奉昌)의 도쿄의거와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공원에서의 의거가 결행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본격화되어 1932년 5월 조성환·송병조(宋秉祚)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항저우(杭州)·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綦江)으로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7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義烈團) 등 중국 관내 주요 정당 및 단체들이 통합을 이루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였다. 한국독립당 및 임시정부 요인 대다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가 다시 유명무실해지자, 그해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김구와 함께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사태를 수습하였다. 11월 항저우에서 김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였다. 또한 11월부터 임시정부 주석으로 이동시기 임시정부의 제반 사항을 관장하며 우익진영의 통합운동을 주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와 함께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 정당 및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37년 8월 난징에서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및 조선혁명당, 미주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가 조직되었다.
1939년 5월 치장(綦江)에 도착한 후 국무위원회 주석으로서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고 세력기반을 확대하였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조직에 참여하였던 재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인사들을 임시정부로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정부 조직의 확대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해 10월 치장에서 개최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와 국무회의를 통해 기존 17명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35명으로, 7명이었던 국무위원을 11명으로 확대하고 동시에 재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인사 다수를 합류시켰다. 이와 더불어 김구와 함께 좌우익 진영의 통합을 재추진하였다.
1939년 8월 17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등 총 7개 정당 및 단체의 대표가 치장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합 방식에 따른 의견 차이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퇴장하는 바람에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9월에 나머지 5개 정당과 단체들이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陳線協會)를 조직하여 5당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민족혁명당이 내부의 노선 문제로 탈퇴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1939년 10월 25일 임시정부는 새롭게 선출된 11명이 참가하여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다시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13일 치장에서 폐렴으로 인해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시정부는 치장 산기슭에 터를 마련하고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1948년 9월 김구는 유해를 중국 치장에서 모셔와 사회장(社會葬)을 치른 뒤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