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운 李東運 |
|
| 한글명 | 이동운 |
|---|---|
| 한자명 | 李東運 |
| 본 관 | |
| 이 명 | |
| 출신지 | 서울 |
| 생몰년월일 | 1892. 7. 24 ~ 1963. 1. 14 |
| 운동계열 | 3.1운동 |
| 관련 단체 | |
| 관련 사건 | 1919년 광주군 부동교 만세운동 |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10일 광주군 부동교 만세시위 참여 |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1990) |
1892년 7월 24일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광주농업학교에 재학하였으며, 그 해 3월 10일 광주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6일 광주에서도 김복현(金福鉉)·최병준(崔炳俊)·김강(金剛)·홍승애(洪承愛)·서정희(徐廷禧) 등의 인물들이 모여 3월 10일 장날 부동교 아래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날 김복현이 독립선언서 취지를 연설 한 후 ‘독립만세’를 외치며 광주 시내를 행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설득하였다.
3월 9일 광주농업학교 기숙사에서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최영균(崔瑛均)으로부터 3월 10일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동참하기로 하였다. 당일 오후 3시경 송기호(宋琪浩) 등 약 28명의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누문리(樓門里)로 나갔다.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였으며,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모여들었다. 총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우편국을 향하여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경찰이 출동하자 해산하였다.
이 때문에 붙잡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