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관성 金觀聲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관성
한자명 金觀聲
본 관  
이 명 김신제(金信濟), 김관공(金觀公), 김관성(金觀成)
출신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생몰년월일 1891 ~ 미상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관련 사건 남만통일회 후원대, 서간도사변
주요 활동 재만 독립군단인 광한단 대원으로 국내 진입 군자금 모집, 통의부 성립을 위한 남만통일회 후원대 선전위원, 정의부 해원지방행정위원, 다물청년당 회원, 고려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1891년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신제(金信濟)·김관공(金觀公)·김관성(金觀成)이다. 가족관계와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서간도(西間島)로 건너갔다. 1920년 2월 이시열(李時說)·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 등과 관뎬현(寬甸縣) 화류두(火流頭)에서 독립군단인 광한단(光韓團)을 설립하였다. 단장은 이시열이었으며, 약 100명의 단원이 있었다. 이 군단의 활동 노선은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1920년 7월 단원 이명환(李明煥)·박민희(朴敏凞) 등과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였다.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신안면(新安面) 안운동(安雲洞)에 도착한 3명의 대원들은 마을의 부호로 알려진 승계연(承啓璉)의 집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군자금 700원을 받아냈다. 하루 뒤 같은 군의 남면(南面) 남양리(南陽里)로 이동해 역시 방일진(方一鎭)의 집으로 갔다.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남의 집에 침입하였으므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리라 예상하였으나 의외로 방일진은 단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융숭한 대접에 군자금 250원까지 받고 철수해 관뎬현 본부로 돌아왔다.

이명환·김만길(金萬吉)·문일(文一)·박정호(朴正鎬) 등 4명의 단원과 함께 결사모험대(決死冒險隊)를 결성해, 같은 해 11월 초순 또 다시 국내로 진입하였다. 전 대원들은 콜트식 자동권총으로 무장을 갖췄다. 평양까지 진입해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있는 황덕교(黃德敎)의 집에 3명을 체재하도록 하고 이명환과 계리(鷄里)에 있는 금융조합 숙직실에 거처를 정하였다. 황덕교와 금융조합 숙직실을 제공해준 박문학(朴文學)은 모두 광한단 지단원(支團員)이었다. 박문학이 금융조합 서기(書記)였기에 가능하였다.

머물 장소가 정해지자 출동 전 함께 활동하기로 약속하고 평양에 와 있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군자금 모집장(募集長) 궁인성(弓寅聖)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광한단 본부가 있는 관뎬현은 신의주 대안(對岸)인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丹東市))과 접해 있고, 그 지역 자체도 압록강변이었다. 따라서 교통로인데다 국내 진입이 쉬운 지역이었다. 게다가 약 90퍼센트 가까이 산악지대였기에 여러 독립군단이 본부 또는 지단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한독립단도 본부는 류허현(柳河縣)에 있었지만 관뎬현에 지단을 설치하고 있었다. 광한단은 관뎬현에 본부나 지단을 둔 독립군단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합동 작전을 펼쳤는데 궁인성과의 연락도 그렇게 된 것이었다.

「광한단원검거의 건」(1921.2.23) [판형3]

의병 활동부터 시작해 상당한 군사적전 능력을 갖춘 궁인성의 지휘를 받아가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부호로 알려진 김진근(金鎭根)의 집을 기습하였으나 당장 현금이 없다고 하여 열흘간의 기간을 준 뒤 나왔다. 이어 박재창(朴在昌)의 집을 습격해 1,000원, 황연(黃演)·황석환(黃錫煥) 등에게서 300원씩 총 1,60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1920년 12월 초 일제 경찰에 포착되고 말았다. 게다가 박문학이 제공한 금융조합 숙직실을 거처로 삼고 활동한다는 것까지 발각되고 말았다. 12월 3일 일제 경찰대가 숙직실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이명환은 출타 중이고 두 사람만이 숙직실에 있다가 필사적으로 대응해 한국인 순사 김태선(金泰善)을 총상을 입히고 탈출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박문학은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이때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탈출해 본부로 돌아왔다. 함께 파견된 모험대 대원 중 이명환과 박정호는 체포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일제의 수사망을 벗어났다.

1921년 후반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은 각 단체를 하나로 묶는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서북간도 독립운동 기지는 1920년 10월 그 시기 최고 성능의 무기로 무장하고 이 지역을 침략한 약 2만 명의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독립운동 기지뿐만 아니라 이주 한인 사회도 폐허로 변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 장차 만주까지 침략할 야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서북간도 지역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중국 측보다 한국 독립군들이 더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대병력을 이 지역으로 침입시켜 약 반년간 대만행을 자행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군들이 물러간 뒤, 폐허로 변한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나서 모두의 힘을 합치고자 노력하였다. 노력의 결과 1922년 1월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그 후원대(後援隊)까지 구성하였다. 김원상(金元常)·양승우(楊承雨) 등 5명과 함께 후원대의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후원대의 노력으로 1922년 초 광한단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및 대한독립단 일부가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성립시켰다.

대한통의부의 활동지 환인현 훈강의 전경(랴오닝 관전현) [판형2]

하지만 그 정도의 통합으로는 경신참변으로 파괴된 남만주 한인 사회를 재건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독립군 기지를 복원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후원대는 그해 2월 27일, “불완전하고 국부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고, 일치되고 적극적인 정신으로 남만의 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활동한다”라는 내용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통합에 앞장섰다. 각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을 만나 통합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구성원들에게는 힘을 합해야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들의 열성적 노력으로 1922년 8월 남만주의 17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탄생하였다.

통의부가 성립되자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었다. 통의부는 이전의 독립군단들과는 달리 재건과 독립운동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졌다. 따라서 조직의 편제를 재건을 위한 행정과 독립운동을 위한 의용군 등 두 갈래로 구성하였다. 단체를 책임질 총장에는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선임되었고, 재무·법무·교통·군사·민사·교섭·학무·실업·참모 등 행정부서와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한 의용군이 편성되었다.

통의부는 폐허가 된 한인 사회를 하루빨리 재건해 한인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시급함이 있었기에 성립을 추진할 때부터 구성원들의 이념이나 노선은 표명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2년 9월 24일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신봉하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인사들이 단체의 이념을 문제 삼아 갈등을 일으킨 후 공화주의(共和主義) 파인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였다. 그리고 갈등을 일으킨 다른 공화주의 계열 인사들을 구금하고 구타하였는데, 이때 양기탁(梁起鐸)·현정경·황동호(黃東湖) 등과 함께 수난을 겪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후 복벽주의 계열 인사들은 이듬해 2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성립해 통의부를 이탈하고 말았다. 이들이 나간 뒤 검무국장 대리의 직을 맡았다.

하지만 행정직에 임명되었다고 해서 항일 무장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23년 2월 제4토벌대장에 임명되어 18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해 활동을 벌였다. 또 1924년 1월 26일에는 최익권(崔益權)·김시관(金時觀) 등 17명의 대원을 인솔하고 국내로 진입하였다. 압록강을 넘은 후, 대원들을 4개 조로 나누어 서울·평양·대구·부산 등 4대 도시로 분산시켜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한편, 1923년 초 이념적 갈등이 일어나 복벽주의 계열이 빠져 나간 통의부는 1923년 후반이 되자 적극적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의용군 계통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의용군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을 비롯한 김원상·박응백(朴應伯) 등은 1923년 말,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협의한 뒤 남만으로 와서 1924년 중반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이탈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을 만든 것이었다.

참의부가 성립되고 난 후, 통의부 지도부는 다시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통합 운동을 일으켜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정의부는 통의부와 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고본계(固本契) 및 통의부 성립 때 참여하지 않고 남아 있던 서로군정서 잔류 세력 등이 통합해 이루어진 단체다.

정의부가 성립되자 해원(海原) 지방 행정위원에 임명되었다. 정의부 또한 통의부와 마찬가지로 중앙에는 입법·사법·행정 등 3권 분립에 입각한 자치조직과 항일 무장 활동을 위한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민사·법무·학무·재무·군사·교통·생계·외무위원회 등 8개의 행정부서와 이들 부서장들을 총괄해 중앙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사법기관인 중앙심판원, 입법기관인 중앙의회가 구성되었다. 중앙행정위원장은 이탁(李沰)이 선임되었고, 의용군 사령관은 군사위원장인 지청천(池靑天, 이명 이청천(李靑天))이 겸임하였다.

정의부는 남만주의 광대한 지역을 관할하며, 그 지역 내 거주하는 한인들을 부민(府民)으로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삶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지방 또한 중앙과 마찬가지로 입법·사법·행정의 체제를 갖추어 지방행정위원회, 지방심판원, 지방의회 등이 설치되었다.

해원 지방은 해룡(海龍)·개원(開原)·동풍(東豊)·서풍(西豊)·서안(西安)·도원현(挑原縣) 등이 포함된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 내에 거주하는 약 1,000호에 해당하는 한인들을 지도하고 이끌 총관(總管)이 선임되었고, 권태형(權泰亨)·김동헌(金東憲) 등과 함께 3명이 지방행정위원으로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제 측 보고서에 기록된 김관성 [판형3]

1925년 후반에는 주거지를 화이더현(懷德縣)으로 옮겨 다물청년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23년경 남만주를 기반으로 결성되었으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다가 정의부가 성립되면서 그 구성원들이 대거 청년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추진하였다. 본부도 정의부 중앙조직이 있는 류허현 삼원포(三源浦)에 설치하였다. 이 청년당은 한민족의 자립을 이루어 그 힘을 바탕으로 침략자 일제를 구축하고 조국 광복을 이룩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활동을 추진하였다. 본부가 있는 삼원포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의부 관할 지역 내 각 지방에 구(區)집행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구집행위원회는 매월 2회의 예회(例會)를 개최해 당원들에게 민족정신을 확립할 수 있는 정신교육과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 성과를 중앙에 보고하면, 중앙은 장단점을 파악해 같은 교육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거나 또는 수정·변경해 지시를 내렸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 가입해 당원이 되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중국 지린(吉林)에서 양기탁(梁起鐸)·최동희(崔東羲)·오동진(吳東振)·정이형(鄭伊衡, 이명 정원흠(鄭元欽))·현정경(玄正卿) 등이 주도해 창당한 독립운동 단체다. 창당 초기 양기탁이 위원장에 선임되고, 정이형·현정경·최동희·유동열(柳東說)·김좌진(金佐鎭) 등 15명이 위원이 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천도교·형평사·민족운동계 등이 통합해 성립한 단체다. 따라서 창당 시 이들 3계통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합일된 이념과 노선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였고, 그 결과 제국주의 일본을 타파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독립 전쟁의 실천을 통해 그를 달성한다는 강령과 당략을 정하였다. 이 같은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고려혁명당은 만주 내에 11개의 세포조직을 설치하고, 국내에도 형평사 및 천도교 측의 노력으로 당원을 확보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려혁명당은 성립된 지 채 1년이 안된 1926년 12월 28일 위원 중의 한명인 이동락(李東洛)이 중국 창춘(長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만주와 국내에서 당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위기를 맞게 된 고려혁명당 지도부는 아청현(阿城縣) 취원창(聚源昶)에서 1927년 8월 22일부터 3일간 세포연합대회를 개최해 새롭게 간부를 개선하며 조직을 재편하였다. 이때 이일심(李一心)·박경종(朴敬鍾)·승진(承震)·현정경 등과 함께 9명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고려혁명당을 이끌며 거주지인 화이더현 오가자(五家子)에서 랴오허(遼河) 농장을 경영하며 한인의 생계를 위해 활동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고려혁명당 창당 시 마찰을 일으켜 불참하고, 그 이후로도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우삼(李友三)·장진환(張鎭煥)과 함께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참고문헌|

「光韓團員檢擧ノ件」, 1921.2.23 ; 「不逞團統一宣傳ニ關スル件」, 1922.4.11 ; 「西間島地方不逞鮮人團ノ統一ニ關スル件」, 1922.10.2 ; 「南滿韓族統一會決議佈告文入手」, 1922.10.4 ; 「南滿統一派ノ通告文配布ニ關スル件」, 1923.7.23 ; 「大韓統義府中央議會議決文公布」, 1923.2.21 ; 「大韓統義府ノ近況」, 1924.2.11 ; 「大韓統義府ノ近況」, 1924.3.5 ; 「統義府ノ現狀及寬甸地方不良鮮人名簿ニ關スル件」, 1925.1.12 ; 「獨立不逞鮮人團正義府ノ動靜ニ關スル件」, 1925.5.6 ; 『독립신문』 1922.11.8 ; 『동아일보』 1923.2.2, 1925.5.31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 金正明, 『명치백년사총서』 제1권 분책, 原書房, 1967 ; 金正明, 『명치백년사총서』, 제2권, 原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4집,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1973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00.
  • 일제 측 보고서에 기록된 김관성
  • 정의부 본부가 있었던 유하현 삼원포 전경(지린 유하현)
  • 대한통의부의 활동지 환인현 훈강의 전경(랴오닝 관전현)
  • 「광한단원검거의 건」(1921.2.23)
  • 일제 측 보고서에 기록된 김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