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충락 權忠洛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권충락
한자명 權忠洛
본 관  
이 명  
출신지 충청남도 논산(論山)
생몰년월일 1890. 8. 27 ~ 1955. 4. 14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흥업단
관련 사건 흥업단 군자금 모집사건
주요 활동 1920년 흥업단 가입 이후 군자금 모집 활동, 1943년 새끼가마니 강제공출 비판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8)

1890년 8월 27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赫)·김호(金虎)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다. 흥업단은 표면상 산업 진흥과 이주 동포 간의 친목 도모를 표방하였으나 사실상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 기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흥업단은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의 요새지인 푸쑹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할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였다. 또한, 주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 전쟁에 필요한 청년을 양성하고 강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전투 상황을 연출하였다.

흥업단을 이끈 인물은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인 김혁이었고, 그 뒤에는 대종교(大倧敎) 제2세 교조 윤세복(尹世復)이 이끌었다. 대종교 교인이 중심이 된 흥업단은 단장 김호, 부단장 김혁,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李源一)·오제동(吳濟東), 교섭 김성규(金星奎) 등으로 구성되었다. 병농겸행(兵農兼行)의 시책으로 각처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하였는데 단원은 200명 정도였다. 이후 흥업단은 1921년 10월 14일 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과 함께 통합되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조직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하 단체로 들어갔다.

1920년 11월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 단장 김호의 명을 받아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과 함께 한교회(韓僑會) 회장 손경헌(孫庚憲)을 방문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김인제(金仁濟)·최성규(崔聖奎)·황문익(黃文益) 등과 권총 5정 및 실탄 90발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1921년 음력 1월 손경헌으로부터 권총 2정과 탄환 수십 발을 받은 뒤 함경북도를 거쳐 국내에 잠입하였다.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에서 이만준과 재회한 뒤 대구(大邱)·양산(梁山)·밀양 등지를 거점으로 1922년 2월까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1921년 1월 하순 동지들과 함께 대구 양한위(梁漢緯)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이튿날 권총 2정과 약간의 탄환을 소지하고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동(友鹿洞)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안내를 담당한 우홍기(禹洪基)가 오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권충락 체포 보도(『동아일보』 1922.12.2) [판형2]

1921년 8월 말경 권안이(權安伊) 집에서 이만준으로부터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10월경 이만준과 함께 권정락(權政洛)의 집에서 김종만(金鍾萬)·홍종락(洪鍾洛)·박재화(朴在華)에게 각자의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종만·홍종락·박재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경북 영천군(永川郡) 신령면(新寧面) 권주경(權周慶)을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라 대구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하순 홍종락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지사동(智沙洞)에 사는 부호 최재교(崔在敎)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함께 최재교의 집에 가서 “우리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파견 군자금 모집원이다”라고 하여 240원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22년 5월 경북경찰부에 의해 홍종락 등이 군위(軍威)에서 체포되면서 관련자 28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될 때 함께 붙잡혔다.

19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불복하여 1924년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겪고 1928년 8월 20일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43년 3월 9일 대구의 한 결혼피로연 석상에서 일제의 새끼가마니 강제공출제도를 비난였다. 그러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고 하여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5월 14일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구치감(拘置監)에 입감되었다. 그해 7월 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겪은 후 1944년 1월 1일 출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동언⋮

|참고문헌|

「판결문」, 大邱地方法院, 1923.11.22 ; 「판결문」, 大邱覆審法院, 1924.2.20 ; 『동아일보』 1922.12.2, 12.12, 12.30 ; 경북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6, 1969 ; 대종교총본사 편, 『대종교중광육십년사』, 1971 ; 김후경·신재홍,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 권충락
  • 권충락 체포 보도(『동아일보』 1922.12.2)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4.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