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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강창거 姜昌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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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강창거
한자명 姜昌擧
본 관 진주(晉州)
이 명 강양일(姜良一)·김의련(金義連), 김치정(金致楨), 이재환(李在煥)
출신지 전라남도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910. 9. 16 ~ 2004. 11. 17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소년선봉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고려공산청년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0년대 중후반 동맹휴학 주도, 사회운동단체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5)

1910년 9월 16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제주면(濟州面) 용담리(龍潭里)에서 강제원(姜齊元)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이명은 강양일(姜良一)·김의련(金義連)이다. 제주의 유명한 항일운동가로서 8·15 직전 대전형무소에서 순국한 강창보(姜昌輔)의 아우이다.

제주공립보통학교(濟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1925년 4월 제주공립농업학교(濟州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였다. 2학년에 재학하던 1926년 4월 28일, 제주도 서문(西門) 밖에 있는 소년선봉회(少年先鋒會)의 1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총무부를 담당하였다. 그해 6월 25일 일본인 교사 야나기다 히코지柳田彦二가 부당하게 한인 학생을 차별한 데 항거하여 15개 조건을 내건 진정서를 학교 당국과 전남도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그해 7월 13일 이 일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동료 학생 14명과 함께 퇴학을 당하였다. 당시 학교 당국은 1, 2학년생 모두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으며, 야나기다 교장은 평북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1926년 9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1929년 3월 졸업하였다. 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에도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평소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과 부당성에 대한 저항 의식이 높았기에 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사회과학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1929년 1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중앙고보를 졸업할 즈음인 그해 3월에는 정관진(丁寬鎭)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였다.

제주공립농업학교 동맹휴학 보도(『동아일보』 1926.7.25) [판형4]

졸업 후인 1929년 8월 동아일보사의 제주지국 기자로 임용되었다. 그즈음 제주학우회(濟州學友會)에서 여름방학 때 많은 학우의 귀향을 앞두고 개최하기로 한 임시 강좌회 및 납량 음악대회의 문화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월까지 전남 목포(木浦)에 있는 제주기선상회(濟州汽船商會)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31년 5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려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昌信洞)에 거주하였다. 그해 6월 중순경 고려공산청년회 노동부원으로서 민병회(閔丙會)가 이끌어오던 경성세염노동조합(京城洗染勞動組合)을 인계받아 활동하였다. 또한, 서울로 올라온 후부터 그해 7월 사이에 3~4회에 걸쳐 사립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 교정에서 임봉식(任鳳植)을 비롯한 다수의 학생에게 사상 의식을 교양하고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활동하던 중, 김기범(金基範)·강위황(姜渭璜)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31년 9월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보다 앞서 1930년 말부터 검거 선풍이 일어난 서울계의 ‘조선공산당재건준비회 사건’,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설준비위원회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정리위원회 사건’ 등으로 불리던 사건과 함께 다뤄졌다. 따라서 이운혁(李雲赫)·송도호(宋道浩)·허정숙(許貞淑)·정관진 등과 함께 취급되어 1932년 7월에야 예심이 종결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이 구형되었다가 그해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 통산 180일)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형 집행 만기일인 1934년 9월 19일을 3개월여 앞둔 6월 2일 이른바 ‘소화9년 은사(恩赦)’로 징역 2년 2월 10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였다. 1947년 2월 23일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제주도지부 결성식에 참여하여 격려사를 하였다. 1949년 말경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2004년 11월 17일 사망하였다. 2006년 9월 25일 유해가 일본 오사카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32.7.7 ; 「身分帳指紋原紙」, 경찰청 ; 「中央高普生取調並學校狀況ノ件」, 京城鐘路警察署長, 1927.11.18, 『思想問題ニ關スル調査書類』 3 ; 「ソウル系共産黨再建設計劃檢擧ノ件」, 京畿道警察部長, 1931.9.7, 『思想ニ關スル情報綴』 1 ;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별집 1, 199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95 ; 『동아일보』 1926.7.18, 1929.8.16, 1931.9.12, 1932.7.8, 9.10, 9.13, 9.20 ; 『매일신보』 1929.8.29, 1931.9.1, 9.12, 1932.7.8, 8.23, 9.10 ; 『時代日報』 1926.5.8 ; 濟州道, 『濟州抗日獨立運動史』, 1996 ;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북제주문화원, 2005 ; 『연합뉴스』 2006.9.25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강창거
  • 제주공립농업학교(1938)
  • 제주공립농업학교 동맹휴학 보도(『동아일보』 1926.7.25)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강창거) 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강창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