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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대락 金大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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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대락
한자명 金大洛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자 : 학원(學源), 호 : 만송(晩松)
출신지 경상북도 청송(靑松)
생몰년월일 1851 ~ 1905. 10. 1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청송의진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6년 3월 심성지의 청송의진에 참모 및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활동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1997)

1851년경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신성리(薪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학원(學源), 호는 만송(晩松)이다.

1896년 3월 12일 청송 향교(鄕校)에서 유림 200여 명과 함께 창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沈誠之)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3월 15일 처음 이른바 청송의병부대(靑松義陣)가 편성될 때 참모(參謀)로 선임되었으나, 3월 21일 진용이 보강될 때는 중군장(中軍將)으로 중용되었다. 이후 1896년 4월 29일 의병부대 편제가 완비되면서 대장 심성지를 중심으로 부장 조성박(趙性璞)·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우익장(右翼將) 남두희(南斗熙)·전방장 윤정우(尹楨禹)·후방장 장무호(蔣武鎬)·사병도총 남승철(南昇喆)·소모장 심능장(沈能璋)·선봉장 홍병태(洪秉泰)·의영도지휘사 서효원(徐孝源) 등과 함께 지휘부를 이루고 의병부대를 이끌어갔다.

1896년 5월 14일 의병부대의 주력부대인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병부대(義城義陣) 및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병부대(利川義陣)과 호응하여 청송 안덕면 감은리(甘隱里)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관군은 물러나면서 마을을 불태웠다. 이튿날 오후 불탄 감은리 마을을 위로하고 군문집사 박봉의(朴鳳儀)를 보내 안덕면 신시장에 주둔하던 이천의병부대와 의성의병부대에 네 동의 술로 위무하였다.

청송의진의 창의지인 청송객사(경북 청송) [판형2]

1896년 5월 22일 좌익장 권성하(權成夏)로 하여금 포군(砲軍) 3초(硝)를 이끌고 영덕의병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5월 25일 관군의 추격과 고종(高宗)의 의병 해산 칙유(勅諭)에 따라 부대 해산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의병을 해산하는 것처럼 하면서 안으로는 분진(分陣)하여 대응할 계책이었다.

분진 결의에 따라 현북(縣北)을 맡고, 부장 조성박은 현내(縣內), 사병도총 남승철은 현동(縣東)과 현남(縣南), 선봉장 홍병태는 현서(縣西),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은 부동(府東), 좌익장 권성하는 부내(府內), 소모장 심능장은 부서(府西)를 맡아 각각 이속과 서기 1인을 두었다. 면군(面郡) 중심의 분진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분진체제 속에서 1896년 6월 15일 이천의병부대·의성의병부대와 함께 경주연합의병부대(慶州聯合義陣)를 결성하여 6월 18일 경주성(慶州城) 전투에 참가하였다. 또 6월 28일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병부대와 합세하여 7월 14일 영덕전투와 7월 20일 부동면(府東面) 상평리(上坪里) 뒷산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참고문헌|

『赤猿日記』(필사본), 1896 ; 국가보훈처, 『한말의병일기』, 2003 ;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청송군, 2004.
  • 영덕·영해·이천의병 전투지(경북 영덕)[출판x, 웹사전 게시용]
  • 청송의진의 창의지인 청송객사(경북 청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