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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낙필 金洛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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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낙필
한자명 金洛必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북 남원(南原)
생몰년월일 1885 ~ 미상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후기의병(정성현 의진)
주요 활동 1907년 정성현 의진에 소속되어 전북 남원, 임실 등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1885년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아영면(阿英面) 유도리(柳道里)에서 출생하였다. 평소 노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상인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퇴위되고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갔다.

전북 임실에서 정성현(鄭成鉉, 鄭聖連의 이명임)이 거의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자, 그곳으로 가서 참여하였다. 이후 의병장 정성현을 따라 이석용(李錫鏞) 의진에 합류하였다. 정성현은 우포장(右捕將)이 되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기삼연이 전라도 일대의 의병부대를 결집시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한 뒤 그해 10월 말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해갔다. 이들은 주로 장성, 영광, 담양, 고창, 함평, 무장 등 전라도 서부 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여 각 읍에 상주해 있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1909.11.10) [판형2]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인해 1908년 2월 기삼연이 체포되어 사망한 뒤 여러 의병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갔다. 이때 이석용 부대도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으나 1908년 9월 임실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한 뒤 해산하였다. 이후에도 정성현 의병장과 함께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17명의 동료 의병과 남원과 임실을 오가며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동료 의병과 함께 총기를 들고 1908년 (음)11월 19일 전북 남원 아영면 망전리(望田里)에 거주하던 모씨(某氏)의 가택을 습격하여 총으로 위협한 뒤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같은 해 (음)12월에는 임실 기암리(奇岩里) 오참봉(吳參奉) 가택에 돌입하여 엽전 40냥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1909년 (음)정월 5일에는 임실 구성리(九成里) 이서방(李書房)의 집을, 같은 해 (음)4월 10일경에는 임실 하운면(下雲面) 박고개(박고치(朴高峙)) 소재 한사일(韓士一)의 가택을 습격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이처럼 동료 의병들과 함께 소규모 단위로 남원과 임실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추격해 오던 일본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09년 11월 1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집, 1974 ; 조동걸, 「호남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호남학연구』 26, 1998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1909.11.10)
  • 이석용이 창의를 결의한 용암(전북 진안)[출판x, 웹사전 게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