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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낙임 金樂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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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낙임
한자명 金樂任
본 관 선성(宣城)
이 명  
출신지 경북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881. 3. 8 ~ 1914. 3. 9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5년 경북 순흥에서 거의한 뒤 1908년 5월경부터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등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1년 3월 8일 경상북도 순흥군(順興郡) 도강면(道講面) 상석리(上石里, 현 경북 영주시(榮州市) 부석면(浮石面) 상석리)에서 김영시(金永時)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부친 김영시는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의 소모장(召募將)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금달연(琴達淵)과 함께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이강년 부대의 중군장 김상태(金相泰)와 연대하여 순흥의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7년 (음)9월 금달연과 함께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김상태의 소개장을 가지고 이강년 의병부대의 진중으로 찾아가 종군(從軍)을 요청하였다. 이강년은 금달연을 의진(義陳)의 별초종사(別抄從事)로 임명하여 합류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때 허약한 신체와 집안의 독자(獨子)라는 사정으로 종군을 승낙받지 못해 되돌아왔다.

『운강선생창의일록』(국립중앙도서관) [판형3]

종군은 단념하였으나 의병부대를 도울 방법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08년 5월 봉화군(奉化郡) 서벽리(西碧里)에 주둔한 이강년 부대는 경북 북부 지방과 태백산과 소백산, 일월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여러 의병부대와 연합의진을 편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상태 등이 예하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 이들 의병장 반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6월 이강년이 붙잡힌 뒤에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순흥군 화천면(花川面) 본리(本里)에 거주하는 박세현(朴世鉉)을 찾아가 군자금 30원을 징수하였다.

이 일로 일본군에게 잡혀 1913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공갈죄(恐喝罪)’로 징역 3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13. 2.22 ; 『운강창의록』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Ⅰ(의병항쟁), 2012 ; 김일수 외, 『영주독립운동사』, 영주시, 2006.
  • 『운강선생창의일록』(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