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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기만 金琪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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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기만
한자명 金琪萬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북도 임실(任實)
생몰년월일 1881 ~ 미상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후기의병
주요 활동 1907년 정성현(鄭成鉉)·이석용(李錫鏞) 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순창과 임실 등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5)

1881년경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일도면(一道面) 중당(中堂)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평소 전라도 일대에서 연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상인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임실에서도 정성현(鄭成鉉)이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는데, 거의의 뜻을 함께하고자 참여하였다.

이후 정성현 의병부대는 이석용(李錫鏞) 부대에 합류하였으며, 정성현은 우포장(右捕將)이 되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한편, 이석용은 1907년 9월 기삼연이 전라도 일대의 의병부대들을 결집하여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자 부대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한 뒤 1907년 10월 말부터 다음 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무장 등 전라도 서부 지역을 활동 무대로 하여 각 읍에 상주한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인해 1908년 2월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한 뒤 여러 의병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갔다. 이때 이석용 의병부대도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으나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한 뒤 해산하였다.

의진이 해산 이후에도 정성현의 지휘 아래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창과 임실 일대에서 항일 전투를 이어갔다. 소규모 단위로 항일 전투를 펼쳐가던 중 추격해 오던 일본군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결국 1910년 2월 2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수괴 정성현의 폭동행위를 방조한 죄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0 ; 조동걸, 「호남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호남학연구』 26, 1998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10.2.22)
  • 이석용 의진 근거지 상이암(전북 임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