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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구응 金球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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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구응
한자명 金球應
본 관  
이 명  
출신지 충남 천안(天安)
생몰년월일 1887. 7. 27 ~ 1919. 4. 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병천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1일 천안군 병천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87년 7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갈전면(葛田面, 현 병천면) 가전리(佳田里)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7년 교육 구국 운동의 열풍이 일어나자,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가전리 청신의숙에서 훈도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의 소식을 듣고 가까이 지내던 유창순·김상훈 등과 의논하며 독립 방법을 모색하며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 교사로서 이후 3·1운동 때 옥고를 겪은 조만형과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을 가르쳤다. 1918년부터는 병천리 성공회 구세실(Alfred Cecil Cooper(1882~1964)) 주교가 운영하는 진명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지령리에 살던 조인원과 유중권·유중무 형제, 유관순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아우내 만세 운동에 주도적인 참여를 하겠다고 결의하고 앞장섰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장터에는 천안 주민들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모인 약 3,000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군중은 무리를 지어 대한 독립 만세를 연달아 높이 외치면서 병천 일본 헌병 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만세 행렬을 제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중은 헌병주재소로 들어가, 적극적인 항의를 하면서 시위는 더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오후 4시경 병천헌병주재소를 지원하려고 천안 철도 엄호대장이던 키네(甲) 대위 이하 6명이 자동차를 타고 병천으로 왔다. 뒤이어 무차별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시적으로 총격에 놀라 시위대가 흩어졌으나 이내 다시 몰려들었고, 여성들은 근처 냇가에서 치마에 돌을 싸서 군중에게 날랐고, 군중은 이 돌멩이로 맞섰다.

김구응 사망 보도(『신한민보』 1919.9.2) [판형4]

이러한 격렬한 만세 시위의 선두에 나섰다가 헌병이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헌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총을 쏴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최정철(崔貞徹)은 아들의 시신 주변에 있던 헌병의 멱살을 잡으면서 “내 나라를 찾겠다고 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당장 내 아들 살려내라!”라며 절규하였다. 이에 헌병은 최정철에게도 총을 쏘았다. 이렇게 어머니와 아들은 4월 1일 한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을경⋮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일본정부외무성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1 : 3.1운동편 기일, 국회도서관, 1977 ; 조병호, 「유관순과 병천장날」, 『신동아』 3월호, 1969 ; 이정은, 『유관순 -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편, 『충남을 빛낸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2012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김구응 사망 보도(『신한민보』 1919.9.2)
  • 수신 방향으로 본 아우내장터(충남 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