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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조경한 趙擎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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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조경한
한자명 趙擎韓
본 관 옥천(玉川)
이 명  
출신지 전남 승주(昇州)
생몰년월일 1900. 7. 30 ~ 1993. 1. 7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배달청년회,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사건 대전자령전투
주요 활동 1927년 만주에서 배달청년회 가입,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을 이끌고 쉬란현성, 어무현성, 쌍성보 등을 점령, 1933년 중한토일연합군으로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 참여, 6월 대전자령전투 참여,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 교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에서 활동,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출, 1940년 5월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참여, 9월 한국광복군 참여,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900년 7월 30일 전남 승주군(昇州郡, 현 순천시) 주암면(住巖面) 한곡리(閑谷里) 한동(閑洞)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옥천(玉川)이다. 본명은 조종현(趙鍾鉉)이고, 호는 백강(白岡) ・ 일청(一靑), 이명을 안훈(安勳) 또는 조경한(趙擎韓)이라 하였다. 독립운동 시에는 안훈, 정일청(鄭一淸 ・ 丁一淸)으로 여러 이름을 썼으나, 귀국 후에는 조경한이란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다.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며, 일찍부터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조부 조병조(趙炳祖)는 노론계열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여 부근 향리에서 유림으로 명망이 있었다. 송병선이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하자, 제자인 조부가 대성통곡하며 빈소를 다녀온 것을 보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 일은 인상에 깊이 남아 '항왜(抗倭)정신'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9세 때인 1909년 9~10월경 호남지역 의병을 탄압하던 일본군 1개 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조씨 문중의 제각(祭閣)을 점거하고 의병들을 추격하면서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더욱더 철저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18세 때인 1918년부터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단의 국내연락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1919년 고향에서 3 ・ 1운동을 겪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향리에서 가진 애도행사에서 제문을 낭독한 일로 경찰의 의심을 받았고, 독립단과 연계된 동지 소철원(蘇哲元)과 김방현(金邦鉉)의 활동이 경찰에 발각되어 고향에서의 활동이 곤란하게 되었다. 결국 부인과 3남 1녀 자녀들을 두고 1927년 2월 말 고향을 떠나, 5월에 중국 셴양(瀋陽)을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다.

베이징에서는 덕신의숙(德新義塾)과 계명학원(啓明學院) 법정과에서 수학하였다. 계명학원에는 1927년 6월경 입학하였으나, 학비가 없어 곤란하였다. 원장인 중국인 류리앙청(劉良成)의 도움으로 학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베이징에 머물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의병지도자 출신 이천민(李天民, 본명 李世永)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27년 후반부터 신채호 ・ 여준(呂準) ・ 김동삼(金東三) ・ 정신(鄭信) 등 명망가 및 대종교 계열의 인물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단군교(대종교) 창시자인 나철(羅喆, 본명 羅寅永)이 승주 낙안(樂安) 출신이었으므로 대종교 계열 인물들과 쉽게 연계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27년 말경 신채호가 혁명가에게는 가명이 필요하다며 '백강(白岡)'이라는 호와 '경한(擎韓)'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백강은 백두산의 산등성이를 의미하고, 경한은 조국(한국, 대한민국)을 받들고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었다.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심히 분열되어 있으니 만주로 가서 직접 무력투쟁을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본격적 항일투쟁을 위하여 1927년 11월경 항일투쟁의 본거지인 만주로 이동하였다. 만주 이동 당시 '한국유일당촉성회 북경촉성회'의 '만주특파접흡원(滿州特派接洽員)' 자격이었다. 만주지역에서 대종교계열의 독립운동 단체 및 산하의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배신학교(倍新學校)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만주 이동 후 정의부(正義府)가 지린(吉林)에서 운영하던 정미소 '부흥태(復興泰)'를 연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때 정의부의 '농민교과서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인동포 자제들의 교육에 노력하였다. 또한 정의부 ・ 참의부 ・ 신민부 등 각 단체의 통합대회를 참관하는 등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府) 통합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만주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 및 3부 통합운동이 별다른 진전이 없자, 1928년 3월 베이징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경 상하이(上海)의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한 달 뒤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 해 계명학원 법정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 7월 홍진(洪震) ・ 지청천(池靑天) ・ 민무(閔武) ・ 황학수(黃學秀) ・ 신숙(申肅) ・ 이장녕(李章寧) ・ 정신 등과 함께 북만주의 중동선(中東線) 연변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대부분 대종교 신자 및 유림 ・ 기호지방 출신 인사들과 한학 수학이나 무관학교 졸업 등의 배경을 지닌 양반 ・ 지주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였고, 대체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한국독립당 창당 당시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당은 항일투쟁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10월 5일 우창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긴급중앙위원 회의를 열고 급박한 시국정세와 향후의 투쟁노선을 논의하였다. 당시 일제의 침략이 만주에 그치지 않고 중국 관내 등 다른 지역까지 미치는 것은 물론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견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펴 이들의 지원을 받으며 투쟁하면서 세계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면 전후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전략을 주창하였다.

한국독립당은 하얼빈(哈爾濱) 근교의 중동선 연변을 중심으로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청장년들의 징집을 실시하는 한편, 당 군사위원장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의 편제를 정했다. 한국독립군 편성 당시 안야산(安也山)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여 재무 겸 외교관을 담당하였다.

1931년 12월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의하여 공동투쟁을 약속하였다. 이후 총사령부의 위치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이란현(依蘭縣)으로 정하고 당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후방 각 군구의 조직들이 항일전선에 집중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동만 ・ 북만의 각 지역에 한국독립당 위원장 홍진 등 12명의 징집책임자를 파견하였다. 당시 우창(五常) ・ 쉬란(舒蘭) ・ 지린 일대의 징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병력모집에 노력하는 한편, 당과 한국독립군의 목적과 이념, 활동을 적극 선전하였다.

우창 ・ 쉬란 일대에서 권오진(權五鎭) 등과 함께 모병활동을 벌여 약 270명 1개 대대규모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1932년 1월이 부대를 이끌고 본부가 있는 팡정현(方正縣)으로 이동하는 도중 지린자위군(吉林自衛軍) 9사(司) 셰부청(謝復成) 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하였다. 이때 스스로를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으로 명명하고 셰부청 부대로부터 소총 70정, 탄환 5,000발, 수류탄 1,200개, 장창 200자루를 지원받아 무장한 후 사령부와는 별도의 작전을 수행하였다.

1월 29일 밤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지린자위군과 함께 쉬란현(舒蘭縣)의 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중 양군은 적 150여 명을 살상하고 소총 121정, 탄환 8,000여 발을 비롯하여 박격포 2문, 포탄 22상자, 기관총 2정 등의 많은 무기와 피복 100여 벌, 군마 5필, 지방화폐(吉林省大洋) 200만원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2월 초순에는 셰부청 부대와 함께 200여 명의 지린군(吉林軍)이 주둔하고 있던 어무현성(額穆縣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곳에서 50여 일간 머물며 부대를 정비한 뒤, 3월 말경 중동철도 연변지역을 따라 북상하였으나, 우창현 일면파(一面坡) 부근에서 일만(日滿)군경 대부대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9월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지린자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한 쌍성보(雙城堡)를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2천여 명에 달하는 만주국군이 투항하였고, 많은 물자를 확보하였다.

한국독립군은 1933년 1월 야오진산(姚震山) ・ 차이스룽(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편성하였다. 이후 6월까지 경박호(鏡泊湖)전투, 사도하자(四道河子) 및 동경성(東京城)전투 등을 치르며 동 ・ 북만주 일대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정훈대표 등 참모직과 단위부대장의 직책을 맡아 사령관 지청천을 보좌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933년 4월 동경성 전투를 치른 후 성공적으로 동경성에 입성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 6월 한국독립군 선전공작대 대장(사령)을 맡아 만주 각지에 흩어져있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합류한 원종교도(元宗敎徒) 500여 명 가운데 100여 명을 선전대에 편입시켜 한국독립군의 전투력 증강과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한토일연합군은 1933년 6월 하순 대전자(大甸子, 일명 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던 1,600여 명 규모의 19사단 소속 간도파견군이 옌지현(延吉縣) 방면으로 철수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6월 30일 대전자령에서 간도파견군을 공격하여 4~5시간에 걸친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하였다. 대전자령 전투에서 대승한 한국독립군은 구국군(救國軍)과 협의하여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의 선전대장 및 참모로 활동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8월 12일 경 대전자를 떠나 둥닝현(東寧縣)과 닝안현(寧安縣) 등 산악지대를 전전하였다.

1933년 9월 6일 한국독립군은 우이청(吳義成) 휘하의 차이스룽 ・ 스층헝(史忠恒) 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훈춘(琿春) ・ 왕칭(汪淸)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하여 중 ・ 소 국경지대의 둥닝현성(東寧縣城)을 공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처음에는 현성을 점령하는 등, 적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한편 김구는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에 '한국청년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과 청년들을 관내로 이동시켜 교육시키려고 하였다. 김구의 군사훈련 계획은 1933년 10월 초순 이규보 ・ 오광선(吳光鮮) 등을 통해 한국독립군에 전해졌다. 10월 20일경 홍진 ・ 지청천 등 주요간부 및 군관학교 입학 지원자 등 40여 명과 함께 베이징을 거쳐 뤄양 ・ 난징(南京) 등 중국 관내로 먼저 가게 되었다.

1934년 2월 김구의 주선으로 뤄양군관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오광선 ・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교관을 맡아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1934년 3월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 계열 인물들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신한독립당의 군사부에서 조선역사를 강의하였다. 군사부는 1935년 4월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폐교된 후 지청천 휘하의 한인청년들을 난징으로 데려와 조직한 부서였다. 그리고 윤기섭(尹琦燮) ・ 지청천과 함께 신한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해 각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였다. 1935년 7월, 5개 정당 ・ 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조직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金元鳳) 계열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37년 4월에는 지청천 ・ 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만주에서 이동해온 김학규(金學奎) 등과 새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민족주의 진영의 정당 ・ 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임시정부가 치장(綦江)에서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던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활약하였다.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통합해 창당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했으며,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할 때 총사령부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충칭에 있던 총사령부를 전방지역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설치하면서 총사령부 총무 처장 대리를 맡았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초모한 한인청년들을 교육 ・ 훈련시키기 위해 설치한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황학수 ・ 조시원(趙時元)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0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 조장을 맡아 무장독립운동 활동과 관련 지원 임무에 주력하였다. 1943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비서장, 1944년 2월 국무위원회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4년 3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집행위원, 훈련부장을 맡았다. 이 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원 국내공작위원회 위원, 국무위원 등의 요직을 맡아 1945년 8월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독립당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4년 단군숭녕회 총재로 선출되었고, 9월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81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이 되어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조항을 넣는데 기여하였다. 1993년 1월 7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2005년 5월 순천시의 국도 17호선 일부 8.1km(너비 35m)가 '백강로'로 지정되는 등 최근 순천시 일원에서 추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독립운동 당시 『혁명공론(革命公論)』 및 『광복(光復)』 등에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실상을 전하는 글을 투고하여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장편 한시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도 있다.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백강 회고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장세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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