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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승만 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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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승만
한자명 李承晩
본 관 전주(全州)
이 명 초명 : 승룡(承龍), 호 : 우남(雩南)
출신지 황해 평산(平山)
생몰년월일 1875. 3. 26∼1965. 7. 19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주미외교위원부, 대한인동지회
관련 사건 1905년 러일강화협상, 1919년 파리강화회의, 1921~22년 워싱턴회의,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
주요 활동 19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 1941~45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위원장, 1948~60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49)

1875년 3월 26일(2월 19일[음])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마산면(馬山面) 대경리(大慶里) 능내동(陵內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형이 둘 있었으나 천연두로 일찍 죽고, 누이 둘은 각각 단양(丹陽) 우씨(禹氏)와 청송(靑松) 심씨(沈氏)에게 출가하였다. 5대째 벼슬이 끊겨 가정 형편은 빈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종손인 이근수(李根秀)의 사숙(私塾)에서 과거를 목표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후 실시된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개설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이 학당에서 기독교 위주의 정규교육을 받는 한편 갑신정변 가담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ho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특별 연속강연과 학내 토론단체인 협성회(協成會)를 통하여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와 조선왕조의 정치현실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1897년 7월 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했다. 그 후 언론 및 정치 활동을 통하여 민중 계몽과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협성회회보』 논설위원,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사장 겸 기재원, 『제국신문』 편집인 등을 차례로 맡는 한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898년 11월 종 9품인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으로 선임된 후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의 소환 · 서용(恕容)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되었다. 당시 국내에 잠입한 박영효 일파의 고종(高宗) 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된 정황과 탈옥까지 겹쳐 처음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세 차례 특사를 받아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개화기에 형성된 그의 민중계몽 의식과 정치개혁 이상,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등이 잘 드러나 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자 대미 외교와 유학을 목적으로 그 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8월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 주선에 나섰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회견하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때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Agreement)이 성립된 직후였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여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1910년 6월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직후인 1910년 10월에 귀국한 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학감 직을 맡아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청년회 조직망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얼마 후 이른바 105인사건(일명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터지자 미국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기독교감리회 연차총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출국했다. 이는 사실상 정치적 망명이었다.

1913년 2월 하와이(Hawaii)에 정착한 후 한인감리교회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곧 한인중앙학교로 개칭)의 교장으로 취임하고 한글 월간지인 『태평양잡지』를 창간하여 사장 겸 주필을 맡았다. 이어 105인사건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출간하여 “내(內)로는 교육과 교화에 힘쓰고, 외外로는 서양인에게 우리의 뜻을 널리 알려 동정을 얻게 되면 순풍을 얻어 돛 단 것같이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실력양성과 외교독립론의 배합 노선은 박용만(朴容萬)의 무장투쟁 노선과 충돌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인 1918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정한경(鄭翰景)과 더불어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월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갔으나 미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함으로써 파리강화회의에의 출석이 좌절되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2월 25일에 “연합국 열강은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는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른바 위임통치 청원으로서, 나중에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 세력들로부터 정치적인 비판과 공격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 · 1운동 발발 후 국내와 중국 · 러시아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속속 조직 · 발표되면서 대한공화국의 국무경,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울에서 선포된 세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 해 9월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인정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 수반인 임시대통령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 멸망 후 9년 만에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내에서 3 · 1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4월 중순 서재필 · 정한경 등과 더불어 미주에서의 3 · 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일명 대한인총대표회)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민의 목표와 열망」이라든가 「미국에의 호소문」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여 한국민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6월 중순에는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본부’를 설치한 후 조선왕조와 조약을 체결했던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 열국에 공문을 보내 한국에서 새로운 민주국가가 탄생했음을 알렸다.

1919년 8월 25일에는 ‘임시정부 행정령’ 제2호를 발하여 워싱턴 D.C.에 구미주차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약칭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임시대통령의 직속기구로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무를 대표”하도록 되어 있었다.

구미위원부의 기능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주 교민들로부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거두는 일이었다. 둘째는 미국과 유럽에서 외교 및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초기에 대중집회와 강연 활동, 각종 홍보물의 배포,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확대 등을 통하여 3 · 1운동의 진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구미위원부의 초기 선전활동이 일단락되던 1920년 6월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에 잠시 머물다가 12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약 6개월 동안 임시대통령으로서의 업무를 집행했다. 이때에 임시정부가 당면한 과제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부 조직과 운영의 정상화이고, 둘째는 안정적인 재정 확보이며, 셋째는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장기적인 비전의 제시였다.

임시대통령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각료들과 이들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지만, 첫 국무회의에서부터 정부 조직과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놓고 의견 대립이 빚어지면서 그동안 잠재되었던 갈등만 표출되었다. 거족적인 3 · 1운동의 결과로서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는 했지만, 각료들 사이에 사상과 노선의 차이가 뚜렷했고 각자의 활동 지역과 기반 또한 달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간극을 좁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난한 일이었다.

결국 국무총리인 이동휘(李東輝)가 사표를 내자 그 뒤를 이어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총장 남형우(南亨祐) 등이 정부를 떠났다. 임시대통령은 신규식(申圭植)을 위시한 이른바 기호파(畿湖派) 중심의 내각을 구성한 뒤 외교상의 긴급과 재정상의 절박함을 내세워 상하이를 떠났다.

1921년 6월 말 하와이에 도착하자 일종의 친위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했다. 7월 14일에 발표된 이 단체의 규약에는 “현 정부를 옹호하고 대동단결을 도모한다”든가 “현 정부가 만일 위란(危亂)에 처하면 우리는 신체와 물력(物力)을 전부 보내 응원한다”와 같은 조항이 들어갔다. 이어서 미국 본토로 건너가 11월 12일부터 개최되는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에 한국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총력 외교를 펼쳤다.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 ·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 중국 등 9개국 대표단이 참여한 이 회의는 동아시아 · 태평양지역의 현안문제들에 대하여 폭넓게 논의되었지만 초대받지 못한 ‘한국대표단’의 참석은 끝내 거부되었다.

그 후 구미위원부는 존폐의 기로에 놓였고, 상하이의 임시정부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내각 구성조차 하기 어렵게 되었다. 1925년 3월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령과 더불어 임시대통령에 대한 탄핵 · 면직 처분을 내렸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대통령이 직무지를 이탈하여 난국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둘째, 허황된 사실들을 공포하여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였다. 셋째, 한성정부의 계통을 내세워 임시헌법을 부인하고 임시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며 정부의 존재까지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직 처분에도 불구하고 1925년 4월 29일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여 “침묵과 견인과 실력으로 국민 대단결을 도모하면서 한성정부의 계통을 이은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시켜 나가자”고 호소했다. 이는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었다. 그 후 하와이에 있는 지지자들을 동지회로 결집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1백만 동지’의 확보에 나섰다. 그 대상은 미주 본토와 국내였다. 이리하여 시카고(Chicago), 뉴욕(New York), 몬태나(Montana), 디트로이트(Detroit),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등지에 동지회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한편 국내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매개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朝鮮支會)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전자는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했고, 후자는 공개적인 조직이었다. 두 단체에는 국내의 기독교계와 학계 및 언론계에 종사하는 다양한 성향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미 · 일간의 갈등과 대립 구도속에서 한국의 독립을 전망하고 있었다.

1925년 말부터는 하와이에서 합자회사인 동지식산회사(同志殖産會社)의 설립과 동지촌(同志村) 건설 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는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기 위한 경제적인 자급자족 프로젝트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하와이 섬 올라아(Olaa)에 있는 임야 950에이커를 매입하여 선박 건조용 내지 가구용 목재를 만들어 판매하려고 했는데 그 재질이 적합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 해군 당국과 화학제작용 목탄을 만드는 용역 계약을 체결하지만 그 조건을 이행하지 못해 벌과금을 포함한 3만 달러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1930년 10월 식산회사는 사업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후 부채 청산을 위한 자금 조달 문제로 동지회와 교민단(僑民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고 이것이 재판으로까지 이어지자 하와이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滿洲國)을 세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명전권수석대표’의 직함을 가지고 스위스의 제네바(Geneva)로 건너가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서 서영해(徐嶺海)가 파리에서 운영하던 고려통신사(Agency Korea)를 통하여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이라는 선전책자를 출간했다. 그 요지는 만주의 한국인 문제들에 대한 정당한 고려 없이 만주분쟁의 해결은 바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 회복만이 19세기 말 이래 지속된 일본의 대륙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보루가 된다는 점을 국제연맹과 그 회원국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이었다. 국제연맹에서 고립된 일본은 탈퇴를 선언했다.

그 후 제네바 주재 미국 총영사 길버트(Prentiss B. Gilbert)와 중국 상주대표 후스쩌(胡世澤)와 만나 앞으로 미국 · 중국 · 한국이 소련과 합세해 일본의 대륙팽창을 저지하자는 복안을 제시하고 그들의 찬동을 얻었다. 이들의 주선으로 러시아행 비자를 발급받아 1933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지만, 그날 밤 소련 외무부는 비자 발급이 ‘착오’였다면서 곧바로 퇴거를 요구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당시 소련으로부터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매입하려고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일본협상단의 압력이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후 미주 한인단체들 사이의 연합 또는 합작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과 1941년 4월 하순 호놀룰루(Honolulu)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기로 하자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중국 충칭(重慶)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로부터도 워싱턴 주재 전권대표(全權代表)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정계와 언론계 · 학계 ·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와 기독교인친한회(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대미외교의 전면에 나섰다.

1941년 8월 초 『일본내막기 : 오늘의 도전(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을 출간하여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이 책에 대한 첫 서평은 뉴욕에서 발간되던 월간 잡지인 『아시아(Asia)』 1941년 9월호에 실렸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 벅(Pearl S. Buck)은 그 서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미국인들을 위하여 집필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만 할 때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두려워한다.” 이 책은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및 육군장관 등에게 증정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국무부 정치담당 고문인 혼벡(Stanley K. Hornbeck)에게 편지를 보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충돌이 발생했으며 한국인은 미국의 대의에 도움이 될 모든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 3 · 1절 행사를 앞두고 백악관 근처의 라파옛(Lafayette)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다.

미주 각 지방에서 온 한인 100여명과 워싱턴의 정객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1) 한국의 자유와 해방을 성취할 때까지 계속하여 투쟁할 것, (2)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모든 정성을 다하여 지원하고 유지해 나갈 것, (3)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미국 국무부에 요청할 것, (4)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 등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때 미국 국무부 내에서는 전후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고 그 대신 연합국 열강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신탁통치 실시 구상이 검토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와 한미협회의 계속되는 요청에 대하여 어떤 긍정적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1942년 12월 7일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이 ‘수치스러운 날’ 한국 동포들은 미국 육군부에 의하여 대일전쟁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아시아에 있는 한국인들의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섬 나라의 야만인들’을 패배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이 무렵 주미외교위원부는 미국 합동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OSS)과 접촉하여 미주에서는 한국인 청년과 유학생들로 구성된 ‘자유한인부대(Free Korean Legion)’를 창설하고, 극동에서는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에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구상은 임시정부의 ‘참전외교’를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1943년에 들어서면 북미(北美) 국민회를 중심으로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인 이승만의 소환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로는 외교 실패, 권리 남용, 인심 소란 등이 제시되었다. 그 후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 문제를 놓고 국민회와 동지회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는 충칭의 임시정부에 이러한 상황을 보고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과감한 인물’을 미국에 파견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재조직 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미주한인사회의 자체 해결을 권고하고 이승만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논의하기 위하여 연합국회의가 개최되자 임시정부 훈령에 따라 한국대표단을 구성하고 미국 국무부에 회의 참가를 요청했다. 그러자 국무부는 “주최국들의 합의에 따라 1945년 3월 1일 현재 UN 가입국들만이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초청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한국대표단의 출석 요구를 거부했다.

한국대표단은 아르헨티나(Argentina), 시리아(Syria), 레바논(Lebanon) 등이 국무부가 제시한 자격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청을 받은 사실을 들어 한국도 동등한 대우를 해달라고 거듭 요구하였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된 한국의 참가 요청을 끝내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둔 시점에서 모든 외교적 노력이 좌절되자 미국 · 영국 · 소련 3국 정상이 1945년 2월에 열렸던 얄타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세력범위 하에 두기로 했다”는 밀약설을 제기했다. 이어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신문사 사주 허스트(William Hearst)에게 편지를 보내, 확실한 근거를 갖는 ‘국제적 노예무역’의 비밀이 폭로된 이상 귀하와 같은 여론의 대지도자들이 그것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만일 미국 국민들이 이러한 일을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의 아들은 다음 15년 내에 제3차 세계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불려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소 · 반공적 논조를 펴던 허스트 계열의 신문들이 일제히 얄타밀약설을 기사로 내보내자 미국 국무장관 대리 그루(Joseph C. Grew)는 6월 8일 성명을 발표하여 얄타회담에서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어떠한 비밀협정도 체결된 바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이 그 출처가 분명치 않은 얄타밀약설을 제기한 배경에는 그의 뿌리 깊은 반소 · 반공의식과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소 ‘유화’ 정책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작용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33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그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맡으면서 미 · 소 합의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 ·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 ·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런 가운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하여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3월에 발표된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은 반공 · 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후 유엔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 · 19혁명이 일어나자 1960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이곳에서 서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술로는 『독립졍신』, 『한국교회핍박』,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 『일본내막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이승만의 프린스턴대 졸업기념_1910 [판형3]
한국민족대표자대회에서 이승만과 김구_창덕궁 인정전_1947-07-15 [판형3]

 

⋮고정휴⋮

|참고문헌|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대통령이 되기까지』, 중앙M&B, 1996 ;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과도정부 구상과 중간파 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전7권, 조선뉴스프레스, 2015.
  • 이승만 부친 사진
  • 서울 감옥에서의 이승만_1903
  • 이승만
  • 이승만의 하버드대 졸업기념_1908
  • 이승만의 프린스턴대 졸업기념_1910
  • 프린스턴 대학에서 윌슨대통령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_1910
  • 이승만
  • 이승만
  • 구미위원부 직원 일동_워싱턴_1920-03-01
  •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사진
  •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한 이승만, 정한경_1921
  • 제네바에서 이승만_1933
  • 이승만 결혼기념 사진_1942
  • 중국 남경을 방문한 이승만_1947
  • 한국민족대표자대회에서 이승만과 김구_창덕궁 인정전_1947-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