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익상 金益相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익상
한자명 金益相
본 관  
이 명 호: 추산(秋山), 이명: 김봉남(金鳳男) 
출신지 경기도 고양(高陽)
생몰년월일 1895 ~ 1941. 8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의열단
관련 사건 조선총독부(왜성대) 투탄 의거, 상해 황포탄 의거
주요 활동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 1922년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저격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95년 6월 25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큰형은 일찍이 사망하고 막내는 김준상(金俊相)이다. 호는 추산(秋山), 본명은 김봉남(金鳳男)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 중에는 나카무라(中村政太郞)라는 이름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장 환경은 조실부모하여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07년 13살 때에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1915년 21세 때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특히 부친은 일본 사람과 함께 재목 장사를 하다가 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였고, 그로 인해 일찍 운명하였다고 한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에 재학하였으나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평양과 서울 등지에서 철공소 견습공과 전기수리공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19년경 서울 교북동(橋北洞, 현 독립문 근처)에 있던 연초회사인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로 옮겨 기관수(機關手)로 근무하게 되었다. 1921년 6월경 만주 펑톈(奉天, 현 沈(陽))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나 중국으로 갔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중국으로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엽연초(葉煙草)를 빼돌려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런 뒤 텐진(天津)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廣東)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둥의 호법정부(護法政府)는 북벌(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이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조선의 독립은 2천만 민족의 10분지 8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는 김원봉의 연설에 감동 받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창단된 이후 본격적으로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을 실행하고 있었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朴載赫)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12월 27일에는 최수봉(崔壽鳳)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식민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에는 더욱 대담하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경성의 지리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 자원하였다.

 

1921년 9월 9일 김원봉으로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입수한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9월 10일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베이징에서 기차를 탔다.

 

텐진을 거쳐 펑톈에 도착하여 안봉선(安奉線)으로 갈아타고 안둥(安東, 현 (丹東))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압록강 철교를 통과하는 경의선으로 갈아타고 9월 11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국경 통과 중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가는 일본 여자와 능숙한 일본말로 대화하며 부부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의 검문을 피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이태원(梨泰院)에 살던 아우 김준상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이날 밤 아우와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던 부인 송씨에게 의거 계획을 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인 전기 수리공차림으로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하러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갔다.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會計課)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굉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왔다.

 

의거 직후 이태원의 아우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이튿날 평양으로 몸을 피하였다. 다시 일본인 복장으로 변장하여 국경을 벗어난 뒤, 9월 17일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김원봉을 만나 의거 사실을 보고하였다.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반성하는 기색이 없자 재차 의거를 결심하였다.

 

1922년 2월 3일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김원봉과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다. 그때 마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하이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다나카는 1920년 10월 일제가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간도를 침공하여 수많은 한인 동포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자행했을 당시 육군대신이었다. 이른바 ‘간도불령선인초토화계획’의 구상과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총지휘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다나카를 누가 처단할 것인가를 의논할 때, 동지인 오성륜·이종암(李鍾巖) 등과 서로 다나카 처단을 맡겠다고 나섰다. 결국 김원봉과 논의 끝에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그가 제2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제3선에서 순차적으로 권총과 폭탄으로 다나카를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1922년 3월 27일 아침 6시 오성륜과 부두에 나가 시간을 보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다나카 일행이 상하이 황포탄(黃浦灘) 세관부두로 상륙하였다.

 

먼저 오성륜이 다나카에게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으나 앞서 나오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맞고 말았다. 다나카가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망치자 두 번째로 그가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지만, 모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다시 폭탄을 다나카에게 던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던진 폭탄조차 바로 터지지 않자, 영국 경찰이 강물 속으로 차 넣어 버리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그는 피신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 붙잡혔고,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피신 중에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하늘을 향해 총탄을 발사하여, 무고한 희생을 막겠다는 의열투쟁의 정신을 실천 하였다.

 

붙잡힌 후 오성륜과 함께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분리, 수감되었다. 5월 2일 오전 2시경 오성륜은 함께 있던 일본인 죄수의 도움을 받아서 감옥을 탈출하였다. 당황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오성륜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오성륜 탈출 후 곧바로 상하이에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는데, 이는 탈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5월 3일 일본 상하이 총영사관의 스기우라(杉浦)와 오쿠보(大久保) 두 순사의 감시 아래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일본 모지(門司)항을 향하였다. 5월 8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이때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고 말하였다.

 

1922년 6월 30일 오전 9시 40분경에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마쓰다(松田)재판장과 이시카와(石川)검사 입회 아래 제1회 공판이 열렸다. 당시 재판광경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푸른 미결수의 옷을 입고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의기가 충천한 듯한 태도로 앉아서 자주 방청석과 신문기자 좌석을 돌아보며 은근히 눈인사를 했다”고 한다. 시종 재판정에서 여유 만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또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하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다나카 대장이 상하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50명 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 윗두목 가는 자를 암살할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8월 18일 제2회 공판에서 이시카와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다.

 

1922년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마쓰다 재판장에 의해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에 사형을 주장한 검사가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9월 30일 나가사키 공소원에서 모리(森) 재판장과 미요시(三好)검사가 열석한 가운데 항소 공판이 열렸다.

 

검사 미요시가, “피고의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朝鮮獨立義勇軍)을 위시하여 독립단이 뒤를 이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경한 형벌에 처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니 극형에 처하여 달라고 구형”을 하니, 태연히 웃으며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치 않는다”고 말하였다. 11월 6일 오후 1시 열린 나가사키공소원에서 모리 재판장에 의해 사형을 받았다. 자신의 한목숨을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치기로 작정하여 추호의 미련도 없었기에 상고를 포기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4년 1월 일본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을 기해 발표된 은사칙령(恩赦勅令)에 의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나가사키, 후쿠오카(福岡), 구마모토(熊本), 가고시마(鹿兒島)형무소 등에서 오랜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5년 6월 6일 자신의 의거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고초를 겪은 동생 김준상이 생활고로 자살하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사랑하는 아내도 어린 딸을 데리고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는 개인적 고통도 감내해야만 하였다. 같은 해 12월 25일 히로히토가 일왕에 오르면서 대사령(大赦令)이 발표되어,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28세의 나이로 의거를 결행한 뒤, 15년 여를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귀국하여 서울의 이태원에 살던 형의 아들인 조카 김기복(金基福)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미상의 시기에 일본인 고등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최후에 대하여 독립운동 지사 이강훈은 1942년경 용산경찰서에 연행 중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익상의 만기출옥 보도(『한민』 1936. 8. 29) [판형1]

 

 

김익상 사진 보도(『동아일보』 1922. 4. 7) [판형1]

 

⋮김용달⋮

|참고문헌|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 ; 송건호,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85 ; 염인호, 『김원봉연구』, 창작과비평사, 1992 ;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 김용달,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 독립기념관, 2017 ; 김용달, 「김익상의 생애와 의열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8, 독립기념관, 2011 ; 이명화, 「식민지 청년 김익상의 삶과 의열 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독립기념관, 2015.
  • 김익상_profile
  • 김익상 사진 보도(『동아일보』 1922. 4. 7)
  • 김익상의 만기출옥 보도(『한민』 1936. 8. 29)
  • 김익상 프로필사진
  • 김익상 사진 보도(『동아일보』 192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