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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천궈푸(진과부) 陳果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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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천궈푸(진과부)
한자명 陳果夫
본 관  
이 명  
출신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
생몰년월일 1892. 10. 27 ~ 1951. 8. 25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관련 단체 중화혁명당, 중국국민당
관련 사건  
주요 활동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흥(金奎興) 등 초기 한인 독립지사 지원, 윤봉길(尹奉吉)의거 이후 국민당의 조직부장으로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내에 한인특별반을 만들 수 있도록 김구(金九)를 지원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6)

20세기 전반기 중국 국민정부 시기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았던 중요 정치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국민당 조직부 산하의 비밀정보기구의 중심 인물로서 장제스(蔣介石) 중심의 국민정부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비밀정보기구의 주요 인사였기 때문에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는 인물이다.

1892년 10월 27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씽현(吳興縣)에서 태어난 그는 신해혁명 시기 상하이(上海)와 저장지역 혁명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치메이(陳其美)의 조카로서 이른바 혁명 가문의 일원이다. 특히 친동생 천리푸(陳立夫)와 함께 국민당 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흔히 CC계로 일컬어지는 계파를 형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친 국민당정권 시기에 장제스, 쑹즈원(宋子文), 쿵샹시(孔詳熙) 집안과 함께 사대가족(四大家族)으로 칭해지며 권력과 특권을 독점하였다는 비난의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찍이 창사(長沙)의 명덕학교(明德學校)를 다니다가 1907년 이후 항저우(杭州)에 있는 육군소학당(陸軍小學堂)으로 옮겼고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1911년에는 난징(南京)의 제4육군중학당(第四陸軍中學堂)에 들어갔으며, 이 해에 혁명파 단체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이어 삼촌인 천치메이를 따라 상하이와 저장 지역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 토원전쟁(討袁戰爭), 곧 제2차혁명 시에는 상하이에서 활동하였으며 1915년에는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 비밀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상하이에서 전통 은행인 전장錢莊이나 증권거래소 등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안 후일 국민당 정권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장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 1월에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일은 장제스와의 관계가 큰 작용을 하였는데, 이후부터 그는 장제스의 최측근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국민당 중앙조직부 비서에 취임하였고 곧 이어 중앙조직부 부장이 되었으며, 7월에는 최고 핵심기구인 중앙정치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장제스의 반공(反共) 군사정변인 1927년 4·12정변 이후 장제스 정치권력의 기반이 되는 상하이의 임시정치분회 위원이 되었고, 9월에는 난징국민정부 정부위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감찰원(監察院) 부원장, 1929년 3월 이후에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같은 해 4월 이후에는 다시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臺灣)으로 옮겨 갈 때까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중앙조직부장, 국민정부위원 등 요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특히 국민당 조직부를 통한 정보공작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장제스의 측근 군인장교들로 구성된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흔히 남의사(藍衣社)로 알려져 있음) 의 정보활동과 함께 국민당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국민당을 통한 독재적 정보 통치를 이르는 당통(黨統)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로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공식적으로 철수하기 전인 1948년 12월, 고질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타이완의 타이중(臺中)으로 거처를 옮겨 치료에 전념하였다. 이후 1950년 국민당 중앙평의원에 선임되었고 1951년 타이베이(臺北)로 갔다가 같은 해 8월 25일, 59세를 일기로 타이베이에서 병사하였다.

그와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는 숙부 천치메이를 도와 신해혁명에 참여하던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신해혁명 이전 시기 이미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흥(金奎興)을 비롯한 초기 한인 독립지사들과 천치메이가 밀접한 교류를 맺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천치메이의 조카로서 천치메이를 돕고 있던 그와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908년 이후 광둥(廣東) 지역에서 혁명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김규흥이 쩌우루(鄒魯) 등 광동지역 혁명파 지도자들에게 천치메이를 소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1908년 이전 시기에 김규흥과 천치메이의 관계가 돈독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 중국 망명 한인 지사들과 천치메이 사이의 밀접한 교류가 그 뒤에 조카인 그의 한인 지사들에 대한 지원에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일어난 윤봉길의거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국민정부와 국민당의 김원봉(金元鳳), 김구(金九) 지원 과정에 당시 국민당 조직부장이던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김원봉에 대한 지원은 장제스의 측근 장교 그룹이 조직한 삼민주의역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반면에 김구에 대한 지원은 국민당 조직부장인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구체적으로는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안에 한인특별반을 만들 수 있도록 김구를 지원한 것이었다.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내의 한인특별반은 일제의 항의와 간섭으로 비록 1년여 만에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이후에도 한인 청년들을 각지의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이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의 한인특별반 운영의 이면에는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의 상하이침공으로 발생한 상하이사변 이후 장제스와 난징국민정부 측의 대일(對日) 전략으로 확정되는 이른바 ‘장기항전(長期抗戰)’의 한 가지 실천방안으로서 만주(滿洲) 지역의 항일의용군(抗日義勇軍)을 지원하는데에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동원하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런 측면으로만 보자면 그를 통한 김구 지원은 중국의 대일전략 추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한중연대’ 혹은 ‘한중호조(韓中互助)’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구를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 또한 중국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일을 단지 중국을 위한 희생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 중국의 지원을 얻어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용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배경한⋮

|참고문헌|

민두기, 『중국의 공화혁명』, 일조각, 1999 ; 배경한, 『장개석연구 : 국민혁명시기의 군사 정치적 대두과정』, 일조각, 1995 ; 배경한, 『쑨원과 한국』, 한울, 2007 ; 배경한, 「신해혁명과 한국-김규흥의 광동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학보』212집, 2011. 12 ; 김영신 편역, 『장중정총통당안 중 한국관련자료 집역』, 선인, 2011 ; 『陳果夫先生文集』 1-10冊, 臺北, 近代中國出版社, 1991 ; 范小方, 『陳果夫與陳立夫』, 武漢, 武漢出版社, 1996 ; 吳相湘, 『陳果夫的一生』, 臺北, 傳記文學出版社, 1971 ; 胡春惠(신승하 역), 『중국 안의 한국독립운동』, 단국대학교 출판부,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