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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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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송미령) 宋美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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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쑹메이링(송미령)
한자명 宋美齡
본 관  
이 명  
출신지 중국 상하이(上海)
생몰년월일 1897. 3. 5 ~ 2003. 10. 24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관련 단체 중국국민당
관련 사건  
주요 활동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68)

1897년 3월 5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유복한 기업가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쑹쟈수(宋嘉樹)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중국에 돌아온 이후 성경(聖經) 출판과 판매, 제분업 등의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3남 2녀의 형제들은 모두 조기에 미국에 유학하여 웨슬리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 경력은 사상이나 생활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니, 당대 서구의 최고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서구적 지식과 생활에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큰언니 쑹아이링(宋靄齡)은 뒤에 중국 최고 재벌인 쿵샹시(孔詳熙)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언니 쑹칭링(宋慶齡)은 중국 공화혁명의 아버지로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인 쑨원(孫文)의 부인이 되었다. 오빠 쑹즈원(宋子文)은 쑨원과 장제스(蔣介石)의 주요한 협력자로 국민정부의 재정부장, 외교부장, 행정원장 등의 고위 관직을 지낸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다. 흔히 그녀의 집안을 송씨왕조(宋氏王朝)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17년 이후 상하이 사교계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1922년 형부 쑨원의 소개로 장제스를 만난 이후 어머니 니쟈젼(倪佳珍)과 언니 쑹칭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7년 12월 장제스와 결혼하여 당대 최고 정치지도자의 부인이 되었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흔히 정략결혼으로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그녀는 장제스가 기왕의 결혼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장제스는 이때의 결혼 이전에 이미 3명의 부인을 거치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장제스의 네 번째 부인인 셈이었다. 장제스는 처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본처와는 이혼하였고 다른 여자들과는 사실상의 혼인관계가 없었다는 개인 성명서를 일간지에 게재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둘째 언니 쑹칭링은 결혼에 크게 반대하였다. 그것은 장제스의 정치적 입장이 철저하게 반공적인 것으로 만년의 쑨원이나 쑹칭링의 정치적 입장과 크게 대립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27년 이후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쑹칭링과 장제스의 대립은 적지 않은 갈등을 낳았으니, 민권보장동맹(民權保障同盟)을 중심으로 한 쑹칭링의 독재 반대운동은 장제스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이 세기의 결혼과 관련하여 주목할 일은 장제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장제스는 기독교도인 그녀와 혼인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이후 일생동안 비교적 충실한 기독교도인의 삶을 이어갔다. 장제스의 기독교 입교는 장모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여러 지역 군벌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장전쟁(反蔣戰爭)인 이른바 중원대전(中原大戰)을 겪으면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기독교도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또한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여 자신이 번역 · 감수한 성경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정치적 활동에 관하여 살펴보자면,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예컨대 장제스의 정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위기 가운데 하나인 1936년 12월의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났을 때,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장제스를 억류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과의 협상을 중재하였다. 선항일(先抗日)을 내세우며 내전 중지, 정치범 석방을 주장한 장쉐량과의 협상을 통해, 결국 장제스를 2주일 만에 풀려나도록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장쉐량은 그 후 오랜기간 동안 정치적 연금을 당하게 된다.

또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덕분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장제스의 정치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도우며 국제무대에서 활동이 빛났다. 예컨대 1942년 11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제창으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전후 세계질서의 재구축을 위한 회담인 카이로회담에 장제스의 통역 자격으로 참석하여 루즈벨트, 처칠 등 세계 최고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유능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또 장제스를 대신하여 중일전쟁 시기 미국의 군사적 · 경제적 원조를 얻어내는 외교활동에도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특히,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원조가 얼마나 미국에 유익한지를 알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국민당 정권의 대륙 철수 때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臺灣)으로 옮겨갔다. 1950년 4월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인 중화부녀반공항아연합회(中華婦女反共抗俄聯合會, 부연회(婦聯會)로 간칭)를 만들고 장제스의 타이완 통치를 적극 도왔다. 또 항일전쟁 시기부터 본격화하고 있던 외교분야 활동의 연장으로 1950년 8월과 1952년 8월 두 차례 미국을 장기 방문하면서 대륙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적극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그녀는 미국에서 ‘백만인위원회’를 조직, 미국인들의 국민당정권(중화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녀의 대미외교활동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 대륙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의 회원이 되는 것을 막아내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일생 동안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그녀는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국민당 주석직에 오르자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같은 해 9월 타이완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롱아일랜드의 저택에서 한가한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2003년 10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에 앞서 1981년 대륙에 남아 공산당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언니 쑹칭링이 사망하자 한때 대륙 방문설이 파다했지만 결국 방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쑹칭링의 장례는 끝나고 말았다. 자매는 1949년 국민당 정권이 패퇴하여 대륙을 떠난 이후 결국 만나지 못한 채 모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1986년에는 장제스 탄신 100주년을 맞아 일시 타이완으로 돌아와 5년간 거주하기도 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독자적으로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확인되는 사실이 많지 않다. 다만 장제스의 부인으로서 장제스가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난다든가 할 때 늘 배석하여 지지를 표명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1924년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한국인 청년들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처음 확인된다. 한인 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와 중국혁명 참가는 코민테른이 추진하던 ‘연합전선’과 식민지 약소민족 간의 협력체제 구축 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쑨원과 장제스로 대표되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태도나 ‘지원’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삼민주의(三民主義), 특히 ‘민족주의’ 내지 ‘대아시아주의’로 대표되는 국민당의 약소민족 정책 속에는 ‘지원을 통한 영향력 확보’라고 하는 전통적 중화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상 독자적 기반이 없었던 임시정부는 중국 내 망명정부로 존재해 있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존립기반이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지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의 내면에는 ‘중한호조(中韓互助)’로 표현되는 긍정적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중점적인 활동목표는 첫째, 한국의 자주적 독립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

우선 군사조직인 광복군 창설과 관련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직후인 1940년부터 중국 국민정부와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주된 논의사항은 임시정부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와 중국 국민정부의 이에 대한 견제 및 통제정책이었다. 중국 국민정부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제정을 통하여 광복군을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에 예속시키고 실제적 운영도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중국 장교들이 장악하도록 하였다. 중국 국민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라는 것에서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조치는 항일을 위한 연대라는 ‘중한호조’의 측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측면보다는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통제와 예속이라는 측면을 더 잘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한중간에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문제에 있어서도 중국 국민정부에서는 적극적인 승인의지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국민정부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의 이면에는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내부 분쟁이 워낙 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또 다른 열강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 국민정부의 입장이 들어 있었다.

중국 국민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통해 전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통제,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기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방안에 동조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였다. 따라서 카이로회담 이후 단계에 가면 중국 국민정부의 독자적인 임시정부 승인이란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민정부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였다. 또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검토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국민정부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시기(in due course)’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의 한반도 개입 정책은 일본 패망 이후 미국군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진 이후 단계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장제스와 함께 한국독립운동 내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상당한 업적을 냈다고 말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인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환국할 때 중국 국민정부에서 환송연을 열었는데, 장제스와 함께 배석하여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한국독립운동 지원의 상징적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배경한⋮

|참고문헌|

이양자, 『송미령평전』, 한울, 2004 ; 배경한, 『장개석연구』, 일조각, 1995 ; 레이황(黃仁宇) 저, 구범진 역,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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