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조소앙 趙素昻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조소앙
한자명 趙素昻
본 관 함안(咸安)
이 명 본명: 용은(鏞殷), 자: 경중(敬仲), 호: 아은(亞隱), 소앙(嘯卬, 蘇卬, 素卬, 素昻), 소해(嘯海), 상담생(嘗膽生), 한살림(韓薩任), 아나가야후인(阿那伽倻後人)
출신지 경기 교하(交河)
생몰년월일 1887. 4. 8 ~ 1958. 9. 10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동제사, 대한독립의군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0년 대한흥학회의 합방반대운동, 1913년 동제사 가입, 1914년 일신교 제창,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 참여,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 부령, 「대한독립선언서」 기초,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 만국사회당 대회 참여, 1922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정당 한살림 조직, 1922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1927년 유일당운동,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삼균주의 강령 기초,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참여, 탈퇴 후 한국독립당 재건, 1940년 통합 한국독립당 창당,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 기초, 1944년 중국과 교섭하여 광복군의 독립적 지위 확보, 1940년대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독립외교를 전개하여 전후 한국 독립의 약속을 받아냄.
포상훈격(연도) 대한민국장(1989)

1887년 4월 8일 경기 교하군(交河郡, 현 파주시) 월롱면(月籠面)에서 아버지 정규(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본명은 용은(鏞殷)이다. 자는 경중(敬仲), 호는 아은(亞隱), 소앙(嘯卬, 蘇卬, 素卬, 素昻), 소해(嘯海), 상담생(嘗膽生), 한살림(韓薩任), 아나가야후인(阿那伽倻後人)이다.

1892년부터 조부 성룡(性龍)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2년까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1902년 7월 성균관(成均館) 경학과(經學科)에 입학하여 유교 경서, 역사서, 세계지리, 산술, 작문 등을 배웠다. 1903년 정부에서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고 하자 신채호(申采浩) ・ 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성균관을 그만두었다.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균관 경학과를 마치고 관료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것이다

1904년 7월 황실특파 유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11월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46명으로 구성된 한인학생 특설과에서 일본어와 함께 일본의 근대식 중등 교육과정을 학습하던 중, 1905년 12월 일본인 교장이 한국 학생들에 대한 고등교육이 무리라고 발언한 데 항의하여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퇴학하였다.

1906년 1월 최린(崔麟) 등과 함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률과에 입학하였으나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복귀하지 않으면 장학금 지급을 중단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중학교로 복학하였다. 1907년 3월 도쿄부립제일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습학교에 다니면서 도쿄제일고등학교나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908년 3월 메이지대학 고등예과(高等豫科)에 입학하였다. 1909년 9월 메이지대학 법학부 본과로 진학하였다. 프랑스법학의 영향을 받아 도쿄제국대학의 국권주의 법학을 비판하면서 민권주의 법학을 중시했던 메이지대학 법학부에서 근대적 법학 교육을 받았다.

일본 유학 시기 한인 유학생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05년 6월에는 도쿄부립제일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수회(進修會)라는 독서토론회를 조직하였고, 1906년 3월 도쿄의 한인유학생 단체인 대한유학생구락부 서기로 선출되었다. 1906년 7월 대한유학생구락부가 한금청년회와 통합하여 대한유학생회로 확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6년 9월 관비유학생들로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고 서기와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공수학회 기관지 『공수학보』의 편찬위원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3월 『대한유학생회학보』 창간호에 「신교론(信敎論)」을 발표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아 유교적 도덕을 진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공수학보』 창간호에 발표한 「녹림시대(綠林時代)를 탄(嘆)함」에서는 당시의 제국주의를 도적떼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던 야만의 시대라고 비판하였다.

1908년 공수학회 대표로서 태극학회 ・ 대한학회 등과 협의하여 일본 유학생 단체의 통합운동에도 앞장섰다. 1909년 1월 재일본 유학생들의 통합 조직으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한 후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흥회의 기관지 『대한흥학보』의 편찬위원과 편찬부장을 역임하였다. 1909년 12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자 대한흥학회 명의로 일진회 성토문을 기초하였다. 1910년 7월 대한흥학회 총무로 선출된 뒤, 일본 유학생들 중심의 ‘합방’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한일합방성토문」을 기초한 뒤, 이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국내의 윤치호(尹致昊)와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낼 위임장을 작성하였다. 8월 24일 대한흥학회 총회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요시찰 대상이 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1910년 10월 대한흥학회가 해체되고 1911년 5월 조직된 조선유학생친목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종교와 철학에 대한 탐구를 본격화하였다. 이를 통해 유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불교와 도교, 서양 철학 관련 서적을 광범위하게 읽고 사색하였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일원론적으로 통합된다는 독자적 가치관을 확립하였으며, 조국과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일본과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외국에서 독립운동의 전개방안을 모색하였다. 일본 유학 초기부터 중국 유학생들의 단결력과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중국 정세를 파악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논의하던 중 1912년 2월 일본 헌병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12년 6월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시험이 끝난 후 바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경신학교, 양정학교,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박은식(朴殷植) ・ 신채호(申采浩) ・ 문일평(文一平) ・ 신석우(申錫雨) ・ 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상하이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 한인 교포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운영하였는데, 여기서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박달학원 출신 학생들은 지원하는 바에 따라 중국의 각 학교나 구미로 유학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일본 유학 때부터 구상한 세계의 종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14년 1월 15일 「일신교령(一神敎令)」을 제창하였다. 1915년 2월 「학지광에 기(奇)함」이라는 제목으로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에 「일신교령」을 발표하였다. ‘일신교’에서는 단군 ・ 예수 ・ 석가 ・ 마호메트 ・ 공자 ・ 소크라테스 6명의 성현을 모두 일신(一神)의 아들로 보았고, 육성(六聖)의 가르침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나누어 매일 한 명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게 되면 세계의 평화 통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내세우는 일신교는 세계의 종교 통일을 통해 국제사회의 폭력적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 박용만(朴容萬) ・ 박은식 ・ 신채호 등과 함께 14인의 명의로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의 조직을 촉구하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주권불멸론에 의거한 합방조약의 무효, 황제의 주권 포기, 국민주권의 원칙 등을 천명하였으며,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하되 국민주권주의에 의거한 임시정부 수립 원칙을 제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의 계획은 당장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1919년 2월 지린(吉林)에서 여준(呂準) ・ 박찬익(朴贊翊) ・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부령(副領)의 직책을 맡았다. 대한독립의군부에서 국외 독립운동가 39인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사해동포주의, 평등주의, 육탄혈전과 같은 희생적 투쟁 등을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해 3월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서 2,000원을 갖고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29명의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이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이후 해방될 때까지 입법 ・ 의결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정책을 수립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어 국가 운영의 기본법인 헌법을 기초할 때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마련하였다. 이 임시헌장은 10개조로 구성된 간략한 것이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표방하고 있다. 이후 4월 19일 회의에서 국무원 비서장으로 선출되어 실질적인 정부 수립 업무를 담당하다가 4월 22일 차장제가 폐지되고 위원제가 채택됨에 따라 비서장에서 면직되고 국무원 위원이 되었다.

1919년 5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대표의 활동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외교활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동생 조용주(趙鏞周)와 협의하여 단체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내에서 안재홍 ・ 연병호(延秉昊) 등에 의해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6월말에 도착하여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으나 유럽의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 및 단체들에 대한 독립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사회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결의안이 통과된 후 1920년 3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문제실행 요구한」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 1921년 4월 만국사회당 본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과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도록 국제연맹에 요구하게 되었다. 더불어 국제사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을 위해 1919년 12월 사회당 명의로 파리에서 『적자보(赤子報)』를 간행 배포하였다.

한편 1919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살음(李薩音) ・ 이순기(李舜基) ・ 김호(金乎) 등이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였는데, 이들로부터 만국사회당이 주최하는 세계 약소민족 결합조직인 국제인민연맹 결성대회 파견 대표로 선임되었다. 노동사회개진당으로에서 신임장과 2,500달러를 제공받아 1920년 2월 국제인민연맹 이사회에 서신을 보내는 등 국제인민연맹 참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4월 영국을 방문하여 노동당 인사들과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후, 덴마크 ・ 리투아니아 ・ 에스토니아 등지를 거쳐 10월 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화 과정을 둘러보고, 1921년 3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공산당대회를 참관하였다. 1921년 3월말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와 치타를 거쳐 5월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다.

1921년 12월 말 상하이로 왔으며, 1922년 초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정당인 ‘한살림’을 조직하고, 「한살림요령」에서 정강정책을 체계화하고 「발해경」을 저술하여 용기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조국을 되찾은 발해인들의 용기를 본받아 행복한 한국을 광복하자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1922년 6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정부에 다시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해 유럽에서의 다양한 외교 활동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지도력을 상실한 채 침체상태에 놓여 있었고, 독립운동 진영도 이념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의 개편을 둘러싸고 창조론과 개조론이 대립되면서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임시정부를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한편 1920년대 중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탄핵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정부 소재지인 상하이를 떠나 미국에 있음으로 인해 업무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24년 9월 이승만의 ‘유고’ 결정이 내려졌을 때 외무총장으로 이에 서명하였으나, 11월 박은식 임시대통령 체제가 성립된 후에는 외무총장직을 사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된 후 미주의 이승만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이승만 정부 복원 계획을 추진하였다. 무력 정변을 통한 정부 복원, 무장노선에 의거한 독립운동 역량 강화, 하와이로의 정부 이전 등의 방법을 이승만에게 제안했으나 한성정부 법통을 고수하던 이승만의 거절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사임한 후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나섰다. 통합된 하나의 ‘정당’을 만들어 국가를 이끌어가는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구현하자는 시도였다. 1927년 3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중국 관내 여러 지역에서 조직된 촉성회가 통합을 이루기 위해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상하이측 대표로 이동녕(李東寧) ・ 홍진(洪震) ・ 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연합회의 15인 집행위원 중 1인으로 선정되어 유일당주비회 조직 작업을 추진하였으나 좌우익의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기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1930년 1월 안창호(安昌浩) ・ 이동녕 ・ 김구 등과 함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독립운동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발기인으로서 창립 단계부터 참여하였으며, 결성된 후에는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동녕 ・ 안창호 ・ 이유필(李裕弼) ・ 김두봉 ・ 안공근(安恭根) ・ 조완구(趙琓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당의(黨義)와 당강(黨綱) 기초위원이 되었다. 혁명적 수단으로 일제를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광복하고 “정치 ・ 경제 ・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해서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 향함”이라는 당의를 통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의거한 독립운동 이념을 제시하였다. 1930년 4월 「한국의 현상 및 혁명 추세」를 탈고하여 1929년 광주학생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혁명 역사를 삼균주의적 관점에서 정리하면서 한국사회의 정치 ・ 경제 ・ 교육의 불균등한 현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균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과제를 체계적으로 지적하였다.

193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정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0월 난징(南京)에서 제4차 중국국민당 집행위원회가 개최되자 임시정부 외무장 자격으로 장제스(蔣介石), 장쉐량(張學良) 등과 만나 삼균주의에 의거한 한국독립당의 주의와 정책을 설명하고 만주 동포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어 1931년 4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취지와 목표를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선언문을 작성하여 중국 국민당에게 보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처럼 한국독립당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한편 같은 시기 「한국독립당의 근황」을 저술하여 한국독립당이 삼균주의 이념에 의거하여 민주 ・ 입헌공화국을 지향하고 ‘일당정치(一黨政治)’를 추구한다고 설명하면서 무산계급 독재를 추구하는 공산당과의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응하여 한국과 중국의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임시정부 외무장으로서 김구 ・ 김철 등의 국무위원 및 중국측 인사들과 함께 한중항일대동맹을 결성하였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 의거와 윤봉길(尹奉吉)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활동 무대를 항저우(杭州)로 옮겼다. 이 때 선현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유방집(遺芳集』과 자신의 글을 모은 『소앙집』을 간행하였다. 1934년 1월부터 임시정부의 내무장을 맡아 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한국독립당의 내무장과 총무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을 통해 선전활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3월 한국독립당,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조선의열단 등이 참여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회에서 민족단일당 결성을 위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로 한국독립당 내에서는 찬반 의견이 나뉘었지만, 김규식 ・ 조동호(趙東祜) ・ 양기탁(梁起鐸) ・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단일당 결성에 찬성 입장을 취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단일당으로서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결성대회에 최석순(崔錫順) ・ 양기탁 ・ 김두봉 ・ 박창세(朴昌世) ・ 이광제(李光濟)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당의 ・ 당강 ・ 정책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삼균주의에 의거한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1935년 9월 박창세 ・ 문일민(文逸民)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 선언」을 발표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였다. ‘순수한 민족주의의 대의를 옹호하고’, ‘한국독립당의 본령을 고수하고 우리 진영을 정화하고자 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10월 한국독립당 임시당무위원회 명의로 「고당원동지」를 발표하여 재건 한국독립당은 신민주주의에 의거한 삼균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국학파의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철학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1935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서 사직 처리된 후, 1939년 10월까지 임시정부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5년 11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 1936년 11월 의원, 1937년 10월 상임위원 등을 지내면서 임시의정원에서는 계속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우익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결성되자 재건 한국독립당 대표로 이에 참여하였다. 1937년 10월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전위원회에 참여하여 창립선언문을 기초하였다. 1939년 8월 치장(綦江)에서 우익의 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익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통일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7당 통일회의가 열리자 홍진(洪震)과 함께 재건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여하였다. 7당통일회의에서 신익희 ・ 조완구와 함께 주석단의 일인으로 선정되어 통일기관의 정강 ・ 정책을 논의하였다. 1939년 10월 경기도 의원으로 참석한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신임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외무장을 맡았다. 「독립운동방략」을 기초하여 11월 국무위원회의에서 결의한 후 12월 임시의정원회에서 통과되어 공포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당-정-군 삼각협력 체제에 의거한 독립운동의 실행 방안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재건파를 이끌고,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池靑天)의 조선혁명당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에 1930년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삼균주의적 독립운동 노선이 그대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41년 5월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 선언」을 기초하여 ‘삼균제도의 건국강령’을 내세우면서 한국독립의 과제를 복국 ・ 건국 ・ 치국 및 세계일가의 4단계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이어 삼균주의 이념에 의거한 광복 후 신국가 건설 계획을 체계화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하였다. 이는 1941년 11월 28일 국무위원회 명의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1942년 11월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개정하기 위한 약헌개정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장으로 선정되어 차리석(車利錫) 비서와 함께 위원회를 이끌었다. 1943년 6월까지 22회에 걸친 회의를 통해 마련한 개헌안은 1944년 4월 임시의정원의 의결을 거쳐 「대한민국임시헌장」으로 공포되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독립외교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외무부 산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조직된 후,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을 받아들였으나 이를 수정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1943년 1월 김규식 ・ 조성환 ・ 유동열 ・ 박찬익 등과 함께 소조회(小組會)를 만들어 「한중호조군사협정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초안을 갖고 중국 국민당 정부 측과 교섭하였다. 1944년 6월과 7월 개최된 중국 측과 실무회담에서 교섭 대표로 활동하여 임시정부를 사실상 승인한 상황에서는 상호군사협정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중국측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1944년 8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이 폐지되고 광복군이 임시정부 직속으로 편제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연합국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1941년 6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부를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의 주미외교위원부로 편제하고,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정한경(鄭翰景)과 이원순(李元淳)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구 주석과 외무부장 공동 명의로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과 태평양전쟁 참전을 선언하였다. 대일선전포고를 통해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정식 교전단체로 승인받기 위한 것이었다. 외무부장 명의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독립 외교 서한을 보내거나 주중 미국 대사와 접촉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활용하여 임시정부 승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42년 10월 한국과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한중문화협회를 창립하고 부이사장을 맡았다. 1944년 7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게 임시정부 국무위원 명의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어 9월에는 한중문화협회 회원들과 교섭하여 중국참정회에서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연합국들 사이에서 한국문제의 처리방안으로 국제공동관리(國際共同管理) 방안이 거론되었다. 이에 국제 공동 관리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의 당위성과 논리적 근거를 밝히는 다양한 외교 언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 ・ 영국 ・ 중국 3국의 수뇌가 회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를 전개하였다. 1943년 7월 김구 주석 등과 함께 장제스를 만나 영국과 미국이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방식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 독립을 주장하고 관철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장제스로부터 힘써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결과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국제적 약속이 공표되었다.

1945년 4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의 창설과 전후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한 회의가 개최가 예정되자 임시정부 대표의 샌프란시스코 참가를 추진하였다. 일본 ・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들만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에 1945년 2월 임시정부 주석과 외무부장 명의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어 미주 지역에서는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하도록 조치하였으며, 김규식과 함께 원동 지역 대표로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가하고자 노력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왕복 경비와 활동비 지원을 받은 뒤, 주중 미국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였으나 비자를 받지 못하여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홍진 ・ 조성환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귀국하였다. 환국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건국 작업을 진행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자 한국독립당 명의로 활동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 반대를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하여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환국 후 재조직된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1947년에는 국민의회 의장이 되어 미군정이 주도하는 과도입법의원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12월 삼균주의 청년동맹을, 1948년 3월에는 삼균주의 학생동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 국가건설 작업을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 다녀왔다. 1948년 5・10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의회 활동을 통해 삼균사회 건설 작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1950년 6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6・25전쟁으로 납북되어 1958년 9월 10일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평양시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승⋮

|참고문헌|

삼균학회, 『소앙선생문집』(상·하), 횃불사, 1979 ; 강만길 편, 『조소앙』, 한길사, 1982 ; 국학진흥사업추진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조소앙 편』(1~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1997 ; 홍선희, 『조소앙 사상 – 삼균주의의 정립과 이론체계』, 태극출판사, 1975 ;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 육성교에서 삼균주의까지』, 지영사, 2003 ; 한시준, 「조소앙 연구-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사학지』 18, 1984 ; 한시준, 「조소앙의 삼균주의」, 『한국사시민강좌』 10, 1992 ; 한시준, 「조소앙의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5, 1996 ; 조동걸,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상의 형성」, 『삼균주의연구논집』 21, 2000 ; 김기승, 「해방 후 조소앙의 국가건설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9, 2004 ; 김기승, 「일본 유학을 통한 조소앙의 근대 체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2006 ; 한시준, 「조소앙의 저술 ‘소앙집’ 분석」, 『삼균주의연구논집』 28, 2007 ; 김기승, 「조소앙의 독립운동과 삼균주의」, 『한국사시민강좌』 47, 2010 ; 김인식,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민족혁명론」, 『한국인물사연구』 16, 2011 ; 한시준, 「조소앙의 소앙집 간행과 역사관」, 『사학지』 42, 2011.
  •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 유럽 시찰당시의 조소앙_영국_1920-09-25
  • 조소앙_1925
  • 조소앙과 군관학교생들_광동_1936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경과보고하는 조소앙 외무부장_중경 가릉빈관_1940-09-17
  • 3·1절 2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_중경_1941-03-01
  • 조소앙
  • 조소앙
  • 조소앙_1946
  • 위드마이어 장군과 조소앙_비원_1946
  • 조소앙 자택에서 소육린(邵毓麟)과_1947
  • 남북협상시 한독당 8인 대표중 4인_평양_1948
  • 조소앙_경교장_1946-01
  • 조소앙_1950
  • 북한 애국열사릉 내 조소앙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