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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조성환 曺成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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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조성환
한자명 曺成煥
본 관 창녕(昌寧)
이 명 이명 : 조욱(曺煜·曺旭), 호 : 청사(晴蓑)
출신지 경기 여주(驪州)
생몰년월일 1875. 7. 9 ∼ 1948. 10. 7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건 신해혁명
주요 활동 1915년 신한혁명당 가입, 1917년 「대동단결선언」 발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23년 대한군정서 군사부장, 1925년 신민부 조직,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 추진,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 1935년 임시정부 군무장,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 주임, 1940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및 통수부 막료,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통수부 주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75년 7월 9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대신면(大神面) 보통리(甫通里)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청사(晴蓑)이며 이명은 조욱(曺煜 · 曺旭)이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창녕 조씨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출신으로 부친도 진사였다

1900년 1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외국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입학생도 칙임관(勅任官)들의 자제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신규식(申圭植) · 서상팔(徐相八) 등의 동기생과 노백린(盧伯麟) · 김희선(金羲善) 등의 교관을 만난 것은 훗날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만큼 장교로 성장하는 길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1902년 1월, 무관학교 개혁을 요구하는 데 선두에 나섰다. 이 때문에 주동자 13명이 구속되었을 때 가장 강한 역종신형(役終身刑)을 선고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주동자 가운데 혼자 실형을 살았다. 1904년 6월 칙령으로 13명 모두 복권되고, 보병 참위로 임관되었지만 홀로 보직을 받지 못하고 군대 해산때까지 군적(軍籍)만 유지하였다. 직책도 없던 초급 장교 시절 상동교회를 드나들며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벌이던 인물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외교권을 빼앗긴 정국을 바로 잡아보려고 나서기도 하였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신민회는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 자본을 모은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오히려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로 삼았다. 1907년 후반에서 1908년 초반 사이에 교육구국운동과 연해주 의병 연계 작업에 나섰다. 평양 기명학교(箕明學校)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안중근(安重根)이 만주로 갈 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또 1908년 1월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을 만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논의하였다.

1909년 2월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이는 신민회 주역 안창호 · 양기탁 · 노백린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과 논의한 끝에 베이징으로 청년들을 보내 군사교육을 시키기로 정한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조욱(曺煜)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신민회 주요 인물 모임에 참석하여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 펑미산(蜂密山)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군사기지를 만들자고 논의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베이징은 신해혁명의 공격 대상인 청나라의 수도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반북경’ 세력과 연계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크게 고무되었다. 마침 무관학교 동기생 신규식이 베이징에 오자 함께 논의한 끝에 난징(南京)으로 향하였다. 1912년 1월 신규식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난징으로 가서 새로운 공화국 중화민국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이때 중국혁명이 성공한다면 한국 독립도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중화민국 건국과 쑨원(孫文)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일은 중국만의 행복이 아니라 아시아와 우리나라의 행복이라는 사연을 써서 안창호에게 보냈다. 그리고 신규식과 더불어 자유당과 공화헌정회(共和憲政會)에도 가입하고 중국 혁명의 핵심 인물과도 교류하였다.

이즈음 가장 시급한 과제가 중국 혁명세력과 교류할 기관을 만드는 것이라 판단하여 신규식 등과 함께 1912년 7월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8월 7일 갑자기 일제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끌려왔다. 가쓰라(桂太郞) 전 일본수상의 러시아 방문시 암살을 계획하였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일제는 베이징 일대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발을 묶기 위해 22명을 체포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암살모의’ 혐의로 유형(流刑)을 선고받고 1년 동안이나 외딴 섬에서 거주 제한을 당하였다.

유형에서 풀려난 시기는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였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제가 패하면 한국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1915년 3월 베이징으로 가서 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독일이 승리하면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과 충돌할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독일과 베이징정부처럼 제정(帝政)을 갖추는 것이 삼국동맹, 또는 이에 앞서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맺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국내로 황제 위임장을 받으러 사람을 보냈으나, 일제 경찰에 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1917년 7월 신규식 · 박은식 · 박용만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안한 것으로 대의정치와 공화정을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새롭게 되찾을 나라는 군주국가가 아니라 민(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여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하였다.

1917년을 지나면서 베이징을 떠나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북만주로 갔다.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윈현(烏雲縣)에 약 5천 호 가량이 경작할 토지를 얻어 둔전병제를 실시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빠른 기간 안에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이동휘(李東輝)의 정치노선과 맞지 않아 이동녕(李東寧)·양기탁 등과 함께 지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4월 10일에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연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이라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어서 관제를 제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정하자, 군무차장에 뽑혔다. 4월 21일부터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자 군무위원장이 되어 군사 업무를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진행 상황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자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에서 독립군을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19년 10월 니콜리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여 간도와 지린지역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뜻을 모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합류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4월 서일(徐一)이 대종교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확대·개편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그해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창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 현지 당국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당시 펑텐(奉天) 독군(督軍) 장쭤린(張作霖)이 일본과 긴밀하게 친일정책을 펼치자 베이징에 머물던 이동녕과 연락하며 외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펑텐 독군과 반목하던 지린 측으로부터 무기와 토지를 지원받고 군사활동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한군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920년 중반까지 김좌진과 함께 왕칭현(汪淸縣) 시다풔(西大坡)에서 대한군정서 병사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같은 해 7월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桂和) 등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니콜리스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기관총 · 소총 · 탄약 등 무기 구입 계약을 맺었다. 9월 초 무기운반대를 이끌고 소련과 중국 국경을 넘어 시다풔 본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대한군정서는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 무렵 경신참변(庚申慘變)이 터졌다. 봉오동 · 청산리 승첩 이후 일본군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한인사회를 짓밟고 나선 것이다.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 조직들은 동포의 피해를 막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북간도를 벗어나 12월까지 미산으로 모였다. 대표들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않고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러시아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출발에 앞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부총재를 맡게 되었다. 병력은 3,500명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이를 이끄는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그를 비롯하여 김좌진 · 홍범도 등 3인이었고, 여단장은 이청천이었다. 독립군 부대와 함께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르쿠츠크로 가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사관을 기르는 한편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러시아 백군 토벌에 나서는 등 독립군 간부로서 군관학교 운영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1년 6월 중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상하이로 이동한 탓에 곧이어 일어난 자유시참변의 참화(慘禍)를 피할 수 있었다.

1921년 여름 상하이를 중심으로 홍콩과 광둥(廣東)을 오르내리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노력하였다. 10월 이후 1년 정도 베이징에 머물면서 자유시참변 당시 만주로 흩어져 되돌아온 독립군을 다시 묶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세영(李世榮)을 비롯해 박용만 · 이광(李光) · 황학수(黃學秀) 등 군인 출신 인사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 통합과 군사 양성 방법을 논의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의가 바로 여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편 192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선임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922년 가을 이후 북만주와 러시아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자 이를 좋은 기회로 파악한 독립군 조직들은 두 지역에서 각각 단체 통일에 나섰다. 이때 북만주로 가서 김좌진 · 김규식과 함께 무장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종교(大倧敎)를 적극 후원하였다. 독립군이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무엇보다 동포사회가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얼빈을 중심으로 자치운동을 벌여 중국 관헌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등 이곳에 둔전제를 확립시켜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를 묶어나가는 작업이 진척을 보이는 가운데, 공산주의 무장단체들이 들어서면서 곳곳에서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좌진 · 현천묵(玄天默)과 함께 군사연합회를 조직하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려고 나섰다. 남북만주를 오르내리며 노력한 끝에 1923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9개 단체만 참가하는 데 그쳤다. 1924년 2월 현천묵과 함께 대한군정서를 다시 조직하고 군사부장 겸 참모를 맡았다. 군사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는 한편 만주 각지에 모연대(募捐隊)를 보내 군자금을 모으는 등 군정서 재건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같은 해 7월 고려혁명군 간부진을 대한군정서로 합류시키기도 하였다.

남만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탄생하자 자리를 옮겨 군사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말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어 정의부(正義府)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남만주에 정의부가 들어서자 북만주 독립군 단체들도 통합 논의를 거듭한 결과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탄생시켰다. 이에 군정서 대표로서 참가하여 통합 교섭을 이끌었다. 신민부가 조직된 뒤 외교부장이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를 실시하여 상비군을 확보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운영하여 독립군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1926년 여름부터는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나섰다. 좌우로 나뉜 독립운동 조직을 하나로 묶되, 그것도 하나의 ‘정당’을 만들어 국가를 움직이는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구현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1926년 중반부터 안창호가 나서서 벌이기 시작한 이 운동은 그 해 10월 베이징의 좌파 세력과 힘을 합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창립시킴에 따라 첫 성과를 올렸다. 여기에 참가하여 10월 12일 열린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원세훈 등과 공동으로 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고, 창립 후에는 집행위원 겸 대표로서 대당 결성을 위한 활동을 이끌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독립운동계 통합만이 아니라 만주 이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북경촉성회 창립 직후 입적간민회(入籍墾民會)를 조직하여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갖고 안정적 정착을 함으로써 독립군 활동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한편 일제가 미쓰야협정(三矢協定)으로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리자 1929년 박찬익과 더불어 외교를 펼친 끝에 이를 해결하였다.

1929년 민족유일당운동에서 좌파가 이탈하자 1930년 1월 임시정부를 에워싼 우파 인물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1년 12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주로 베이징에 머물면서 한국독립당 북경지부 간사로만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윤봉길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있던 1932년 11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자 이듬해인 1933년 2월 항저우로 합류하여 이동녕 · 조완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3월 국무위원을 11인으로 늘리고 여러 독립운동 계열을 입각시켜 항저우 피난 이후 혼란에 빠졌던 임시정부를 수습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국민당 정부의 입장이 호의적으로 돌아서자 김구와 장제스(蔣介石) 간에 회담이 열렸고 한국청년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켜 초급 간부를 양성시키는데 합의하였다. 군사 간부 양성을 위해 청년과 이들을 가르칠 지도자가 필요하자 이청천을 비롯한 만주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 주요 인물을 옮겨 오는 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면서 다수의 인물이 임시정부를 떠났지만, 김구 · 이동녕 · 이시영 · 조완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고수하였다. 임시정부 고수파는 정부를 지탱해 줄 정당으로 이해 11월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이시영 · 양우조(楊宇朝)와 함께 감사를 맡아 당을 지도하고 감독하였다.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장(軍務長)에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충칭에 이를 때까지 줄곧 국무위원으로서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군대 창설 계획을 서둘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을 의열투쟁에서 군사노선으로 전환하고, 광복의 유일한 방법이 독립전쟁이라는 판단 아래, ‘군사인재 양성’, ‘군사통일기관 설치’, ‘특무사업 실행’을 골자로 하는 사업방향을 정하였다. 이에 유동열 · 이청천과 더불어 군사위원이 되어 실천 방안을 세워 나갔다. 1939년 10월 1일 군무장이자 군사위원회 책임자로서 군사특파단 주임에 선임되었다. 그해 11월에는 군사 자원으로 한인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갔다. 이때 황학수 · 왕중량(王仲良) · 이웅(李雄) 등 군사지도자와 서파(徐波)·노복선(盧福善) 등 군사공작원이 동행하였다. 시안에서 한인 청년을 모집하고 지대 조직을 서두르고 있던 1940년 8월 6일 군무장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당군’이 아니라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했음을 천명하였다. 그해 10월 9일 헌법 개정에 따라 정부 각료 명칭이 변경되자 군무장에서 군무부장이 되었다. 11월 1일에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가지는 대한민국 임시통수부(臨時統帥府)가 시행되면서 당연직으로 통수부 막료(幕僚)도 맡았다. 당시 통수부는 주석에 김구, 막료에 유동열(참모총장) · 조성환(군무부장) · 조완구(내무부장)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1940년 11월 말 광복군이 성립한 지 두 달 만에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이는 전방으로 나아가 군대를 적극적으로 확충하자는 것이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군사특파단과 모병된 인원을 중심으로 제1 · 2 · 3지대를 편성하였다. 1941년 1월에는 시안에서 먼저 활약하고 있던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설득하여 제5지대로 합류시켜 모두 4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12월 29일 임무를 매듭짓자 군사특파단을 해체하고 뒷일을 총사령부에게 넘겨준 뒤, 군무부장과 통수부 막료라는 직책을 맡기 위해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1941년 11월 중국국민당 정부가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行動準繩)」을 내놓고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비롯하여 인사권까지 중국국민당 정부에 예속시켰다. 이에 군무부장으로서 이 문제가 광복군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전체를 고사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9개 준승 수정을 거듭 요구하였다. 1943년 1월 국무회의에서 유동열 · 조소앙 · 박찬익 등과 소조회(小組會)를 만들어 중국과 재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1944년 9월에서야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통수권을 되찾아오게 되었다. 1944년 5월 군무부장 자리를 내놓고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5년 이후 지청천에게 넘긴 10개월을 제외하면 오로지 군정 업무만 9년 정도 도맡았다. 1944년 10월에는 통수부 판공처(辦公處)가 신설되면서 주임을 맡았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군사후원회 총재, 간도협회(間島協會) 고문,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또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 부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지난 1948년 10월 7일 마지막으로 머물던 종로6가 낙산장(駱山莊)에서 만 73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희곤⋮

|참고문헌|

『권업신문』 ;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 『독립신문』 ; 『동아일보』 ; 『신한민보』 ; 『한민』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14·16, 2005~2006 ;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1,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Ⅰ-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희곤, 『조성환; 독립군을 기르고 광복군을 이끈 군사전문가』, 역사공간, 2013 ;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Ⅱ-장정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Ⅲ-중경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양태석, 「청사 조성환(1875~1948)의 항일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3, 한국근현대사학회, 2010.
  • 조성환과 부인 조성구
  • 조성환 가족사진_1930년대
  • 조성환과 중국 부인 이숙진
  • 조성환 가족사진_1930년대
  • 조성환과 중국 부인 이숙진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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